소설리스트

8화 (8/50)

8

* * *

혼자 남겨진 내게 다가온 바바라가 은근히 물었다.

“공작부인. 어떻게 각하를 함락시키신 건가요?”

싱글싱글 웃는 눈매나 짓궂은 표정이 장난기 많은 아이 같았다.

“함락이라니요.”

“각하께서 다른 분이 되신 것 같아서요. 껍데기만 똑같지 내용물은 완전히 바뀌셨거든요.”

“그 정도로 변하신 겁니까?”

“돌연사하실까 봐 걱정할 정도예요.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는다고 하잖아요? 호호.”

바바라가 귀여운 얼굴로 독설을 내뱉었다. 나는 그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각하는 어떤 분이신가요?”

“죽을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놈이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바라가 냉큼 답했다. 무표정하던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요?”

“이제는 좀 바뀌신 것 같지만요.”

“그게 무슨…….”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바바라는 ‘차차 알게 되실 거예요.’라는 의미로 생긋 웃었다.

* * *

저택 2층까지 날 안내한 바바라가 허리를 숙였다.

“천천히 둘러보세요. 저는 월급 도둑들을 족치고 오겠습니다.”

“안내해줘서 고마워요, 바바라 님.”

“별말씀을요. 전담 하녀도 곧 소개하겠습니다.”

하녀가 남아있다는 가정하에요…….

바바라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고풍스러운 무늬의 황동 손잡이를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게 내 방이란 말이야?”

급히 치웠는지 방 곳곳에 매캐한 먼지 냄새가 남아있었다.

관리가 허술했지만, 공작부인의 방답게 가재도구와 내부 장식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내 키보다 커다란 황금 거울과 대연회장에 어울릴 법한 크리스털 샹들리에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아쿠아로드 왕족이 쓰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구나.”

마도구로 돈을 벌었다고 해도 아쿠아로드 왕실은 제국 황족에 비하면 시골 영주와 다름없었다.

사용하는 물품에도 격이 달랐다.

가구라기보다 예술품으로 보이는 마호가니 침대와 벽화로 장식된 벽을 보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폐왕녀인 내가 진짜 공작부인이 된 거야.”

냉기가 올라오는 돌바닥에 누워 빈대와 씨름하던 나날이 머릿속을 스쳤다.

시도 때도 없이 주먹을 휘두르던 테레사의 목소리가 왕왕 울렸다.

「너 같은 건 아무 쓸모도 없어! 살아있어 봤자 남한테 피해 주는 거야!」

「네가 죽어도 슬퍼할 사람은 없어. 널 필요로 하고 사랑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호호.」

금속성 웃음소리가 관자놀이를 파고들었다.

아쿠아로드를 떠났음에도 테레사의 저주는 날 떠나지 않았다.

테레사에게 복수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입술을 짓씹는데 바바라가 돌아왔다. 한바탕 잔소리를 들었는지 얼굴색이 파리한 하녀 둘과 함께.

“공작부인, 함께 가시지요. 목욕하시는 동안 방 청소를 마무리하라 일렀습니다.”

“방에 달린 욕실에서 씻는 것이 아닙니까?”

“목욕을 좋아하신다 하여 저택 지하의 대욕장을 준비했습니다.”

바바라의 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다 쓰러져가는 폐가에 대욕장이 있다고?

그런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말을 안 한 거야? 알았으면 말라버린 온천 소식을 들었을 때 화를 덜 냈을 텐데!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웃음이 실실 비어져 나올 것 같아서 입매에 힘을 줬다.

벅차오르는 설렘 탓에 거미줄이 쳐진 복도도, 곰팡이 슨 계단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곳이 세드나 공작저가 자랑하는 대욕장이랍니다.”

물항아리를 든 천사가 조각된 커다란 문 앞에서 바바라가 멈춰 섰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서 무척 깨끗하답니다.”

바바라가 문을 열자 더운 수증기가 확 밀려 나왔다. 나는 석상처럼 굳은 채 목욕탕을 바라보았다.

처참한 몰골의 세드나 공작저를 봤을 때보다 더 강한 충격이 머리를 내리쳤다.

* * *

세상에 이런 목욕탕이 존재하다니! 여기는 천국 아닐까?

지금까지 봐 왔던 어떤 목욕탕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호사스러운 목욕탕이었다.

신전에나 사용할 법한 우윳빛 대리석 기둥이 늘어서 있었고, 천장과 벽은 금박을 입힌 그림으로 장식되었다.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원형 욕조는 스무 명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욕조 가운데에는 물의 정령과 불의 정령 조각상이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 주위로 작은 분수가 뜨거운 물을 뿜어댔다.

바바라가 욕조에 손을 넣어 수온을 확인했다.

“딱 좋네요. 아쿠아로드에서 수입한 마도구 덕에 수온을 쉽게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

“공작령에서도 마도구 같은 고부가 가치 특산품이 있다면 좋을 텐데요. 슬슬 겨울 준비도 해야 하는데.”

한숨 섞인 바바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대욕장에 마음을 빼앗겼다.

마도구 제작 기법을 아쿠아로드에서 빼 왔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넘겨버린 기쁨과 과도한 흥분 탓에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나는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얼음 인형 같은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공작부인. 듣고 계십니까?”

“…….”

“불만이 있으십니까?”

“아아.”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겨우 대꾸했다. 그것이 바바라의 오해를 산 모양이었다.

바짝 긴장한 바바라가 허리를 숙였다.

“제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그런 게 아니라…….”

“대욕장이 마음에 안 드시면 공작부인 침소 욕실을 다시 준비하겠습니다.”

천국 같은 목욕탕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서 넋이 나간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여기서 목욕하게 해주세요!”

방언이라도 터진 사람처럼 말을 쏟아냈다.

놀란 바바라가 눈을 크게 떴다.

“고, 공작부인?”

망했다! 유능하고 침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는데.

부담스럽긴 했지만, 살로메디안을 대신해서 영주 노릇을 해주길 기대하는 바바라가 내심 고마웠다.

날 필요로 해주고, 떠나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던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실망했겠지? 나처럼 경박한 여자가 공작부인이라니.

하지만 예상과 달리 바바라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너무 사랑스러우셔요, 공작부인!”

“네에?”

“솔직한 모습이 훨씬 예쁘시네요! 앞으로도 기탄없이 말씀해주세요!”

바바라의 뜨거운 반응에 나는 얼떨떨했다.

“차갑고 엄하신 분일 줄만 알았는데. 살로메디안 님 말씀 이상으로 목욕을 좋아하시는군요? 너무 귀여우세요!”

“실망하지 않으셨어요?”

“실망이라니 말도 안 돼요! 공작부인은 살로메디안 님을 휘어잡은 능력자시잖아요?”

“제가요?”

“그럼요! 마력도 빵빵하시고! 조련 실력도 갖추시고. 제가 꿈꾸던 공작부인 이상형이세요!”

바바라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덕분에 차갑게 얼어있던 표정도 한결 누그러졌다.

“바바라.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래요?”

“뭐든지 말씀만 하세요. 공작부인! 이 바바라가 다 들어드릴게요!”

바바라가 작은 주먹을 가슴을 땅땅 쳤다.

정말 볼수록 귀여운 언니다. 언니보다는 막냇동생 같지만.

바바라를 보며 용기를 냈다. 살로메디안에게 그랬던 것처럼.

“저… 바, 바바라랑… 친해지고 싶어요…….”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떨리는 걸까.

남들에겐 간단할지 몰라도 내게는 입가에 경련이 일 정도로 어려웠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처, 처음 봤을 때부터… 바바라랑 친구가 되고 싶었어요.”

“저랑요? 왜요?”

“바바라가 유능하고 멋있어서…….”

그보다는 귀엽고, 사랑스럽고, 앙증맞아서지만.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바라가 눈을 깜빡였다.

“격의 없이 지내달라는 말이 진심이셨어요? 돌려서 깐 줄 알았는데요?”

또 오해를 샀구나 싶어서 씁쓸하게 웃었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대꾸했다.

“오해한 것도 무리는 아니에요. 제 표정이 늘 이 모양이라서요.”

요리조리 날 살피던 바바라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예쁘기만 한데요?”

“…진심인가요?”

“물론이죠! 공작부인은 제가 봤던 어떤 귀부인보다 아름답고 우아해요. 반전 매력도 있으시고요.”

“반전 매력이 뭔데요?”

“겉모습과 다른 특별한 매력이죠. 살로메디안 님이 홀딱 빠지실 만해요. 호호.”

바바라와 살갑게 웃었다. 용기를 낸 덕분에 바바라와 부쩍 가까워진 것 같아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고마워요, 바바라. 공작령에 오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제가 드려야 할 말이에요. 어두컴컴한 인생에 이제야 빛이 비치는 것 같아요!”

“그럼 공작부인 말고 시아라고 불러줄래요?”

내 물음에 바바라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우리끼리만 있을 땐 그렇게 부를게요! 시아도 절 바비라고 불러주세요!”

구역질이 밀려왔지만, 이 순간의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목욕 시중을 들겠다는 바바라를 겨우 내보내고 천천히 옷을 벗었다.

바바라는 아쿠아로드 관습을 기억하고 목욕용 리넨 천까지 준비해둔 상태였다.

역시 바바라는 최고의 집사였다.

“이제 목욕을 해볼까?”

리넨 천으로 몸을 가린 후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딱 좋은 온도였다.

발끝부터 올라오는 황홀한 감촉에 감탄하며 목욕물에 몸을 푹 담갔다.

온몸의 긴장이 완전히 풀리면서 나른한 행복함이 밀려들었다.

남편과 목욕탕, 거기에 친구까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눈매를 접은 채 헤실헤실 웃는데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욕탕은 마음에 드는가?”

* * *

상대가 누군지 알면서도 비명이 자동 발사되었다.

“꺄아악!”

수증기 사이에서 살로메디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귀와 목덜미까지 새빨개진 채 팔로 앞섶을 가리며 외쳤다.

“무례하십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느슨한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내가 찾아간다고 하지 않았나?”

“목욕탕으로 온다는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마력에 대해서 알려달라고 한 건 그대 같은데.”

“목욕하면서 배우고 싶다고 한 적도 없어요!”

벌컥 목소리를 높였다. 살로메디안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나도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다.”

이게 목욕탕에 쳐들어온 남자가 할 소리인가?

황당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눈썹을 응그렸다.

욕조에 걸터앉은 살로메디안이 태연하게 손을 목욕물에 담갔다.

“좀 뜨겁군.”

섬세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가 물결을 어루만졌다.

그 손이 내 몸에 닿은 것도 아닌데 어깨가 튕겨 올랐다.

검보다는 펜이나 붓이 잘 어울리는 손인데. 저 손으로 사람을 죽인다고?

나도 그 손에 죽어봤으면서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그는 살인자가 아니라, 내 남편이었으니까.

살로메디안은 투명하리만치 푸른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뜨거운 것은 목욕물이 아니라 그의 눈빛이었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 같아. 전생에서처럼 내 심장을 뜯어갈 것 같지는 않지만…….

위태로운 적막이 대욕장을 가득 채웠다.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는데 살로메디안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아. 그대의 비밀을 알려줄까?”

비밀이라는 말에 아이시아가 붉은 눈을 위로 치켜떴다.

동그랗게 반짝이는 눈동자에 사탕처럼 달콤해 보였다.

한입에 삼켜버리고 싶을 만큼.

살로메디안이 잠시 뜸을 들이자, 아이시아가 재촉했다.

그 모습이 미치도록 사랑스럽다는 걸,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무슨 비밀인데요?”

“목욕할수록 그대 마력은 상승할 거다.”

“네에?”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아이시아가 입술을 뾰족 내밀었다.

이 여인은 자신이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 알고 있을까?

내가 자기 입술을 물어뜯을 듯 보고 있다는 것도.

아이시아의 입술 감촉을 상상하다가 살로메디안이 미간을 좁혔다.

서두르면 안 될 것 같은 예감과 그럼에도 조급해지는 마음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대는 아쿠엘의 땅에서 물 속성 오러를 흡수하며 살았다. 극단적으로 목욕을 좋아했고.”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불 속성 마력을 가졌으면서 물에 친숙한 기이한 체질이 된 거다. 마력을 다루려면 심장에 쌓인 거대한 마력을 녹여야 해.”

“뜨거운 목욕이 마력을 녹이는 데 도움 된다는 거군요.”

“그래.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살로메디안이 씩 웃었다.

그의 미모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아이시아도 잠시 정신을 놓을 정도로 눈부신 미소였다.

“좀 더 빠른 방법을 원하나?”

“빠르면 좋지요. 또 폭주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그럼 산 채로 불 속으로 뛰어들면 된다.”

살로메디안의 말에 아이시아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목욕 열심히 하겠습니다!”

셀프 화형만은 피하고 싶다는 듯 아이시아가 외쳤다. 살로메디안은 웃음을 삼키고 목욕물에 손을 담갔다.

“내 조언이 없었더라도 목욕을 열심히 하겠지만.”

“살롬은 정말 저에 대해 모르는 게 없으시네요.”

아이시아가 감탄을 섞어 말했다. 경직되어있던 표정도, 말투도 약간은 풀린 상태였다.

리넨 천 위로 드러난 매끈한 어깨와 목덜미, 은은한 빛을 발하는 피부, 그 위로 굴러떨어지는 물방울.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매혹이 살로메디안을 어지럽혔다.

“난 목욕탕이나 기웃거리는 무뢰한이 아니다.”

손가락으로 아이시아의 뺨을 쓸어내렸다. 움찔하긴 했지만, 그녀는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것이 살로메디안에게 어떤 자신감을 심어 줬다.

‘실험해볼 것이 있어서 왔다는 말은 할 필요 없겠어. 아직은 가설에 불과하니까.’

그때 아이시아가 불쑥 물었다.

“살롬. 영지 관리에는 왜 무관심하신 거죠?”

살로메디안이 별로 좋아하는 화제는 아니었다.

* * *

“이대로라면 공작령은 곧 파산이에요.”

“나는 살육과 전쟁밖에 모른다. 훈련시켜야 할 기사들도 많고.”

“흑룡기사단 말인가요?”

“그대도 알고 있군.”

흑룡기사단을 화제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살로메디안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그에게 기사단은 나에게 목욕탕과 비슷한 존재인 듯했다.

바바라의 보고서에서도 흑룡기사단에 대해 적혀있었다.

살로메디안의 악취미 때문에 공작령 예산이 거덜 났다는 하소연이 대부분이었지만.

흑룡기사단이 마물을 토벌해주지 않았었다면 마신의 숲 인근 마을 모두가 초토화되었을 거였다.

바바라는 흑룡기사단을 돈 잡아먹는 하마쯤으로 취급했지만 나는 그들이 고마웠다.

마신의 숲은 아쿠아로드와 크로티무스 국경 지대에 있어. 아쿠아로드 백성들도 흑룡기사단의 덕을 본 거야.

아쿠아로드 왕실은 마신의 숲이 더럽혀진 이교도의 땅이라며 무시했다.

그곳의 백성들도 모른 척했다. 버림받은 아쿠아로드인들을 떠올리자 가슴이 아려왔다.

살로메디안이 뜬금없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한동안 상념에 잠겨있었을 거였다.

“영지 경영은 그대가 해줬으면 좋겠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항의했다.

“그런 계약은 하지 않았는데요?”

“시아. 내가 아무에게나 영지를 떠넘길 사람 같나?”

살로메디안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대는 여느 귀족들과 질적으로 다르다.”

“귀족치고는 험한 꼴을 많이 당하긴 했죠.”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럼 뭔데요?”

“그대는 어떤 귀족보다도 백성들의 고충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사람이다. 분명 나보다 좋은 영주가 될 거야.”

“설마요.”

“바바라도 동의하더군. 바바라가 내 결정에 찬성한 건 처음이다.”

“이혼하기 전까지 절 최대한 이용하실 작정이시군요.”

괜히 뾰로통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칭찬에 들떴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계약과는 무관하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아내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아내란 단어를 발음할 때 살로메디안의 눈매가 사르르 접혔다.

단지 그것뿐인데 별 가루를 뿌린 듯 반짝거리면서 주변이 환해졌다.

얼마나 많은 여자가 넋을 놓고 봤을까? 마력 속성이 다른 여자와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데.

살로메디안의 전 여자들은 전부 물 속성이었을까?

수많은 질문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쳤다.

어떤 깨달음과 함께 강한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어차피 우린 첫날밤도 치르지 못하는 거잖아요? 저는 불이고 살롬은 물이니까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간 목소리가 생각보다 훨씬 컸다. 귓바퀴는 물론 목덜미까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첫날밤을 못 치러서 안달난 여자처럼 보일까 봐!

“내가 물 속성이라고?”

살로메디안의 한쪽 눈썹이 크게 휘어 올라갔다.

“살롬이 만든 물방울을 여러 번 봤어요. 치유력도 물의 신관보다 대단했고요.”

그건 물 속성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씁쓸한 어조로 살로메디안이 중얼거렸다.

“난 원래 쌍 속성이었다. 그대가 불 속성 심장을 가져가기 전까지.”

살로메디안의 집게손가락이 내 가슴을 짚었다. 찌릿하는 촉감이 발바닥부터 명치까지 훑어 올라왔다.

“쌍 속성이라고요……?”

“이제는 아니지만.”

“왜요?”

“몇 번을 말하나? 그대가 내 심장을 훔쳐 갔다고.”

파르르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전설의 쌍 속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보다 나 때문에 그가 불 속성을 잃었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도둑에게는 이쪽이 더 어울려.」

결혼식에서 그의 손에 살해당했으면서도 믿지 못했다. 아니, 적극적으로 외면했다.

낯선 남자가 제 심장을 훔쳤다고 주장하면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될까?

숲에서 만난 적은 있지만 뭔가 착각한 걸 거야. 내겐 살롬의 심장을 훔칠 만한 능력이 없으니까.

순간, 느닷없는 폭풍처럼 기억이 휘몰아쳤다.

시커먼 늪에 가라앉아있었던 기억이 선명하게 솟아올랐다.

마신의 숲. 죽은 마물 새 옆에서 나는 푸른 불꽃에 휩싸여 있었다.

이성을 잃은 석류빛 눈동자.

나는 살로메디안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몸을 떨었다.

게걸스레 먹이를 먹어치우는 굶주린 짐승처럼.

내가 살롬을 잡아먹고 있어……?!

기억 속 살로메디안은 날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나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가진 불 속성 심장을 모조리 빨아들일 때까지.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던 열기와 내 몸을 적시는 마력의 기운이 차례로 떠올랐다.

심장이 발작했음에도 죽지 않았던 이유.

살로메디안이 나와 결혼하려 했던 이유.

그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라고 한 이유.

모두 내가 그의 심장을 훔쳤기 때문이었다.

나도 테레사와 다를 게 없어. 남의 것을 훔친 주제에 진실을 잊어버린 거야. 파렴치하게도……!

내겐 테레사를 경멸할 자격이 없었다. 그것이 날 비참하게 만들었다.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우리가 특별한 줄만 알았다.

첫 만남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동화 속 주인공들처럼.

그의 눈빛에 속수무책으로 떨리는 심장도, 그의 손길에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는 몸도 운명의 증거라 믿었다.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모두 착각이었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나는 도둑이었다.

마도구 때문에 기억을 잃었다는 것도 변명거리가 될 수 없었다.

도둑질 덕분에 강력한 마력을 손에 쥐었고,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할 공작부인이란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공작령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만만했다.

살로메디안의 진짜 아내라도 된 듯 한껏 들떠 있었던 것이다.

* * *

“죄송하다는 말로는 부족하겠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각하의 심장을 정말로 훔쳤을 거라고는 조금도 믿지 못했습니다.”

창백한 아래턱을 덜덜 떨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시아?”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제게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무슨 말이지? 자격?”

살로메디안이 한걸음 내 앞으로 다가왔다. 살로메디안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울고 싶지 않았지만,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저는 각하의 아내가 될 수 없습니다. 계약도 잊어주십시오. 당장 이혼… 아니, 당장 제 가슴을 갈라 심장을 가져가십시오.”

전생에서처럼요.

터질 듯한 고통을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살로메디안에게 멋대로 주었던 마음을 거둬들일 수 있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내 심장은 그대와 이미 하나가 됐어. 그대의 심장은 도려내 봤자 아무 쓸모 없다!”

살로메디안의 대답이 날 절망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나 때문에 전설의 쌍 속성이 사라졌는데 심장을 돌려줄 수도 없다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투명한 눈물이 한 방울, 뺨을 가로질렀다.

“기다려 주십시오. 전 대륙을 뒤져서라도 방법을 찾겠습니다.”

“시아!”

날카로운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의 목소리로 듣는 애칭이, 그 보드랍고 달콤하던 단어가 내 심장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었다.

“제발 그 이름으로 절 부르지 말아 주십시오!”

어차피 살로메디안은 심장 때문에 나와 결혼한 거였다.

심장을 돌려받으면 나는 쓸모없는 존재가 될 테고, 또다시 버림받을 운명이었다.

버려지는 순간까지 이 사람을 바라볼 테고, 숱하게 떨릴 테고, 또 기대하겠지. 혹시라도 사랑해줄까 싶어서.

그 까마득한 슬픔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가족들에게 천만 번 다시 버려진다고 해도 그에게만은 버려지고 싶지 않았다.

벌써 살로메디안은 나에게 그런 존재가 돼버리고 말았다.

이기적인 마음만 더 커지기 전에 잘라내야 했다.

이미 커질 대로 커져서 날 집어삼킨 뒤였지만.

“그렇게 심장을 돌려주고 싶은가?”

입술을 짓씹던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웅얼거렸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돌려드리겠습니다.”

“내 심장이 참을 수 없이 불쾌한가 보지?”

살로메디안의 물음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튀었다.

“불쾌하다니요? 그게 무슨…….”

옷이 젖는 것을 개의치 않고 그가 욕탕에 들어왔다.

철벅 철벅.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오싹했다. 그 주위로 살기가 스민 물안개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나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 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마신의 공포를 실감한 까닭이었다.

“살롬이라고 부르겠다면서. 그조차 잊어버린 건가, 시아?”

살로메디안이 몸을 숙여 얼굴을 바짝 붙였다. 매혹적인 체취가 코끝을 찔렀다.

온몸의 털이 곤두설 만큼 두려운데도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이 이성을 마비시켜버려서 나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이젠 내가 보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로군.”

체념이 묻어 슬픈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를 볼 자신이 없었다. 보고도 매달리지 않을 자신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심장은 꼭 돌려드리겠습니다.”

“하나도 진심으로 들리지 않는다!”

나를 향해 살로메디안이 으르렁거렸다.

“믿어 주십시오!”

“그럼 증명해.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이란 말이다.”

살로메디안이 싸늘하게 읊조렸다.

온몸의 털이 솟으며 어깨가 오들오들 떨렸다.

나에게만은 다정했던 그의 모습이 환영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멋대로 빠져나오려는 울음을 어금니로 깨문 채 고개를 들었다.

너무 행복해서 꿈결 같던 현실은 산산조각이 났다. 남은 것은 내가 감당할 책임뿐이었다.

“제가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아이시아의 도발적인 물음에 살로메디안은 할 말을 잃었다.

‘글쎄. 내가 뭘 원하는 걸까…….’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 텅 빈 가슴을 메웠다.

증명 운운하며 아이시아를 들쑤신 것도 상처 입은 마음을 숨기려는 술수에 불과했다.

비겁하고 치졸하구나, 살로메디안.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한 번도 인간으로 살아본 적 없었다.

언젠가부터 자신도 그렇게 믿었다.

난 사람이 아니라 마신이라고. 그러니 외로움도 고통도 느낄 수 없다고.

웃음도, 행복도, 영원히 주어지지 않는 선물 같은 거라고.

제 역할을 대신해줄 아이가 태어나 새로운 계약자가 되기 전까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몸이었다.

「널 사랑해줄 사람은 없다. 넌 평생 혼자일 거고, 외로움 속에서 몸서리칠 것이다.」

키산드라의 말이 저주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죽어가는 그녀는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으니까.

그날부터 살로메디안의 소원은 하루라도 빨리 죽는 거였다.

‘하지만 그대를 만나고 모든 것이 달라졌지.’

붉게 부푼 아이시아의 눈매 탓에 살로메디안은 자꾸만 입술이 말랐다.

그녀를 지키고 싶었고, 그녀를 괴롭게 한 자들을 죽이고 싶었다.

건방진 황제와 다른 사내들이 아이시아를 흘끔거리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 내 손으로 그녀의 목숨을 거둬?

처음엔 아무 일도 아니었지만,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쩌자고 이 여인을, 심장 대신 가슴에 들여놓은 걸까.

‘마신의 심장이 그토록 꺼림칙한 건가? 끔찍한 것을 품고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눈물을 머금은 살로메디안이 아이시아를 바라보다 고개를 떨어뜨렸다.

혀가 말리고 턱이 뒤틀려 차마 묻지 못했다.

아이시아의 대답을 들을 용기도 없었다.

그녀라면 자신을 인간으로 봐줄지도 모른다고 착각했기에.

「살롬. 아쿠아로드에서는 달맞이꽃을 살롬이라고 불러요.」

「달맞이꽃?」

「각하의 머릿결과 똑같은 백금색 꽃이에요. 제가 본 꽃 중에 가장 아름다운…….」

수줍은 목소리가 그의 기억 속에서 넘어왔다.

낯부끄러운 애칭도, 시도 때도 없이 벌떡거리는 가슴도, 제가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듯했다.

계약으로 시작했지만, 이제 미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미래가 과거보다 더 따뜻하고 보드라울 거라고 상상했다.

그래서 아이시아가 심장을 가져가라 했을 때, 처음 품어 본 희망이 산산이 조각났다.

“각하.”

아이시아는 애칭마저 거두어갔다. 어여쁜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살로메디안 앞에 섰던 수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저건 인간이 아니라 악마야!」

「피에 미친 괴물! 전쟁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살인광!」

「마신의 계약자라는 것도 전설일 뿐이잖아요? 늦둥이를 낳다가 돌아가신 황후마마만 가엾지.」

두려움에 움츠렸다가 뒤에서 값싼 주둥이를 나불대는 인간들.

그중엔 선대 황제였던 아버지와 황후였던 그의 어머니도 있었다.

「내 자식 중에 쌍 속성이 태어나다니! 괴물 같은 놈!」

「너 때문이다. 내가 죽는 건 널 낳았기 때문이야…! 넌 내 아들이 아니라 날 죽인 원수다!」

평생 들어왔던 비난과 모욕이 뒤늦게 살로메디안의 가슴을 할퀴었다.

충격, 후회, 죄책감… 심장을 통해 아이시아의 감정이 밀려 들어왔다.

수많은 감정 중 그녀를 온통 사로잡은 것은 공포였다.

‘처음부터 시아는 이혼을 원했었지. 잠깐만 아내 노릇을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마신의 심장을 가졌다니. 나라도 죽고 싶을 거야.’

하얗게 질린 아이시아 앞에서 살로메디안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버려질까 봐 두려워한다는 것은 조금도 몰랐다.

살로메디안 역시 처음 겪는 두려움에 짓눌려 있었으므로.

“제가 어찌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울음을 삼키는지 아이시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놓아주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놓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비열해지고 싶었다.

살로메디안의 입술이 달싹였다.

“계약 마법을 걸겠다.”

“계약 마법이라니요?”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그대를 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아이시아의 석류빛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녀에게 경멸의 대상이 된다 한들 계약 말고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시아는 대답이 없었다. 살로메디안은 조바심을 숨기고 입꼬리를 비틀었다.

“싫은가 보지? 역시 돌려주겠다는 말은 거짓이었나?”

그녀의 낯빛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뭐든 각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런 얼굴로 날 보지 마, 시아. 내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어차피 각하와 저는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니까요.”

체념하듯 아이시아가 읊조렸다.

계약이라는 말이 비수가 되어 살로메디안을 찔렀다.

처음부터 잘못 꿰어진 단춧구멍이었다.

계약 따위는 필요 없다고 해야 했다. 마신의 숲에서 있었던 일도 순순히 털어놓아야 했다.

‘왜 심장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는지, 왜 널 찾아 아쿠아로드까지 오게 됐는지 솔직히 고백해야 했다. 이미 너무 늦어버린 듯하지만.’

아이시아가 물었다.

“계약 조건이 무엇입니까?”

“그대가 내 심장을 가졌다는 걸 비밀로 해. 우리가 계약했다는 것 또한.”

“알겠습니다.”

“누구에게도 들키면 안 돼. 진짜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처럼 굴어야 한다.”

“네?”

아이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제 속셈을 눈치챌까 봐 살로메디안이 매섭게 경고했다.

“허술한 연기는 용납 못 한다. 애칭, 말투, 태도 무엇 하나 달라져선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돌아버릴지도 모르니까.

“그게 전부라고요?”

심장을 돌려주는 것과 상관없는 조건만 늘어놓는 살로메디안을 아이시아는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당연했다. 그 스스로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아니, 가장 중요한 게 남았다.”

아이시아의 표정에 긴장감이 어렸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살로메디안이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게서 도망치지 말 것. 그것이 계약의 조건이다.”

“!”

“어때. 할 수 있겠는가?”

아이시아는 새빨간 입술을 짓깨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들킨 걸까? 비열하게 감춘 내 마음을…….’

아이시아가 거절할까 봐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두려움이란 게 이런 느낌이구나.’

낯선 감각을 실감하며 살로메디안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아이시아의 대답을 기다리는 자신이 너무 인간다워서.

영겁 같은 시간이 흐른 후 아이시아가 겨우 입술을 뗐다.

“하겠습니다.”

“좋다. 계약 마법을 시작하지.”

“…각하께서는 절 전혀 믿지 못하시는군요.”

아이시아의 얼굴에 무너질 듯한 슬픔이 스쳤다. 왜냐고 묻지 못했다.

그녀가 생각을 바꾸기 전에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 * *

살로메디안의 손바닥에서 맑고 푸른 물이 쏟아져 나왔다.

너울거리는 물줄기가 살로메디안과 아이시아를 감쌌다.

물 사이에서 기하학적인 무늬가 가득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은은하게 빛나는 마법진이 둘로 갈라져 살로메디안과 아이시아의 심장에 스며들었다.

두 사람과 제국의 운명을 뒤바꿀 계약이 그렇게 끝났다.

“계약은 이루어졌다, 시아.”

애칭으로 부르자 고통스럽다는 듯 아이시아가 미간을 좁혔다.

안도감 대신 끝 모를 허탈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심장을 돌려드릴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각하.”

“아주 잊었나? 나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살롬…….”

울 것 같은 얼굴로 아이시아가 대답했다.

‘시아가 마법진을 이해하지 못해서 다행이군. 내가 계약 조건을 바꾼 것도 모를 테니까.’

살로메디안의 심장이 아이시아의 심장과 하나가 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이시아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면 다시 쌍 속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제국도 마신의 계약자를 되찾을 거였다.

아이시아 한 사람만 죽으면 모두가 안전하단 뜻이었다.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시아가 위험하다. 네이선이 알게 된다면 더더욱…….’

살로메디안은 마신의 힘 절반을 잃었다.

황제가 제국군을 이끌고 쳐들어온다면 아이시아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계약 마법을 걸었다. 제 몸에 무슨 일이 생겨도 아이시아만은 살릴 수 있도록.

‘시아도 모르는 게 좋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까.’

계약 때문에 오해를 사고 원망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지키겠다는 것도 허울일 뿐, 결국 그녀를 곁에 두고 싶은 집착이었다.

그 하찮은 감정에 700년을 이어온 의무까지 저버렸다.

‘키산드라. 당신의 말이 맞았습니다. 절 진심으로 사랑해 줄 사람은 영원히 없을 겁니다.’

젖은 옷을 벗으며 살로메디안이 목욕탕 밖으로 향했다.

옷과 함께 거짓으로 더러워진 마음도 벗어버릴 수 있다고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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