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 * *
살로메디안은 저보다 한 살 어린 조카가 불 속성 신붓감을 찾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의 이상형이 불의 정령 콰이엘이라는 것도.
설마, 시아에게 천사 어쩌고저쩌고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나 다를까.
“아이시아 님, 불의 정령 콰이엘에 대해 아십니까?”
네이선이 다짜고짜 아이시아에게 물었다.
“잘 모릅니다. 폐하.”
“아름답지만 냉혹하기로 이름난 정령이죠. 성화를 보신 적 있습니까?”
“아니요, 폐하.”
네이선이 무엇을 물어도 아이시아가 단답식으로 대답하며 대화의 맥을 끊었다.
가끔 못마땅하던 무표정이 오늘따라 대견해 보였다.
살로메디안은 아이시아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했다.
건방진 조카의 반반한 낯짝도.
“아쿠아로드는 물의 정령 외에 다른 신은 인정하지 않는 나라라고 들었습니다.”
“예.”
“그래도 아이시아 님은 불 속성 아닙니까? 놀랍도록 콰이엘을 빼닮으셨고요.”
아이시아의 미간에 보일 듯 말 듯 미세한 금이 갔다.
동경하던 이상형과 마주한 네이선은 그녀의 반응을 알아채지 못했다.
“콰이엘 성화를 보여드릴까요?”
아이시아가 답하기도 전에 네이선이 품에서 납작한 은제 케이스를 꺼냈다.
케이스 안에는 불의 정령 콰이엘의 성화가 담겨있었다.
저런 것까지 들고 다녔어? 완전 미친놈이잖아?
혈육이라도 황제를 욕할 수는 없기에 살로메디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욕할 수는 있지만 아이시아 앞에서는 하고 싶지 않았다.
“부끄럽습니다만 콰이엘은 제 짝사랑 상대였습니다.”
“그러십니까.”
“아이시아 님 앞에 있으니 어쩐지 긴장되네요.”
고백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네이선이 볼을 붉혔다.
순간 살로메디안의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쥐고 있던 나이프 날도 번뜩였다.
정확히 네이선의 목덜미를 향해 나이프를 틀자, 차를 홀짝이던 바바라가 벌컥 목소리를 높였다.
“이 새끼가 어디서 개수작이야?!”
* * *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상스러운 말을 내뱉은 바바라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좌중을 둘러보았다.
“어디서 이런 말이 들린 것 같지 않나요?”
“바바라?”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들은 모양이네요, 호호.”
네이선은 어리둥절했고, 아이시아는 ‘바바라 님은 귀가 밝으신 분이구나.’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살로메디안은 몹시 불쾌한 얼굴로 나이프를 식탁에 박아
넣었다.
콰직!
묵직한 소리가 식당을 울렸다.
하지만 누구도 살로메디안의 거친 행동을 지적하지 않았다.
네이선의 눈은 여전히 아이시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통 드시지 않으시던데.”
“배부릅니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에서 마력까지 폭주했으니 아이시아는 무척 굶주린 상태일 거였다.
‘낯선 사람이 바글바글한데 음식이 넘어갈 리 없지. 나랑 단둘이 있었다면 몰라도…….’
아이시아는 조금씩 살로메디안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다.
그 미세한 변화를 발견하는 것도, 소유하는 것도 오직 살로메디안 뿐이었다.
네이선이란 놈만 등장하지만 않았더라면 꽤 즐거운 저녁이었을 텐데.
뒤집어진 살로메디안의 속도 모르고 네이선이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숙부님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아이시아 님처럼 강한 불 속성 여인은 드무니까요.”
“…….”
“저도 황후를 꼭 불 속성으로 맞아야 하는데 걱정이 큽니다.”
마력이 없는 평민이나 귀족은 상관없지만 강한 마력을 지닌 대귀족과 왕족은 사정이 달랐다.
속성이 다르거나, 마력의 절대량이 떨어지는 상대와의 결혼은 불가능했다.
당연히 아이를 잉태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꼭 같은 속성의 반려를 만나야 했다.
젊은 황제가 황후를 맞이하지 못한 것도 그 탓이 컸다.
아이시아를 바라보는 네이선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뜨거운 까닭도.
“숙부님께는 죄송합니다만 아이시아 님을 제가 먼저 봤다면 분명 청혼했을 겁니다.”
거기까지가 살로메디안의 인내심의 한계였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 섬뜩한 말이 흘러나왔다.
“죽고 싶나, 네이선?”
정작 네이선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는데 아이시아와 바바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살롬! 폐하께 무슨 무례인가요?”
“각하! 제발 똥오줌 좀 가리세요!”
네이선이 어색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다독였다.
“제가 실수를 했군요. 괜찮으니 그만 앉으세요.”
“폐하…….”
“숙부님께서도 고정하시지요. 어차피 저를 죽일 수 없지 않습니까?”
안 죽이는 것이 아니라, 못 죽이는 것.
그 차이가 살로메디안의 심장을 날카롭게 찔렀다.
네이선의 경고를 알아듣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살과 뼈에 새겨진 계약 마법이 족쇄처럼 자신을 옭아매고 있다는 것.
계약을 어기면 죽음보다 중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것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숙부라 칭하며 깍듯하게 대우해주고 있지만, 네이선은 계약의 주인이었다.
‘난 노예에 불과하지. 인간으로 살 수도 없고,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못하는 노예.’
살로메디안의 아름다운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눅진한 침묵을 깨고 바바라가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 열 받으실 만도 했어요. 폐하 때문에 공작부인께서 배를 곯고 계시니까요.”
“나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네이선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식사엔 손도 안 댔는데 배부르다고 한 이유가 뭐겠어요?”
“아…….”
“황제가 자꾸 말을 거는데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어요? 그게 소화나 되겠느냐고요? 차라리 다리 밑에서 돌멩이를 주워 먹고 말지.”
바바라가 한심한 눈길로 황제를 훑었다.
그제야 상황을 눈치챈 네이선이 아이시아를 향해 꾸벅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아이시아 님!”
“괘념치 마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진심으로 난처해하는 네이선 앞에서 아이시아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일그러진 뺨 근육과 길쭉하게 찢어진 입꼬리, 이리저리 방황하는 눈이 평소라면 귀여웠겠지만…….
황제를 위해 웃으려고 애쓰는 그녀를 보자 살로메디안 안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훅 끼쳤다.
바바라는 나이프를 만지작대는 살로메디안과 머쓱해진 네이선, 차갑게 굳은 아이시아를 살피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시아 님. 한 술도 뜨지 못하실 것 같은데 방에서 식사를 마저 하시는 게 어떨까요? 각하와 함께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이시아가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무표정하지만 바바라의 제안을 반기고 있다는 것이 심장을 통해서 살로메디안에게 전해졌다.
시아도 나와 단둘이 있고 싶겠지. 하여간 귀여워.
“시끄럽긴 해도 너는 훌륭한 집사다, 바바라.”
바바라를 치하한 후 살로메디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올라가지, 시아.”
아이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아이시아는 살로메디안이 아닌 네이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물러가도 괜찮겠습니까, 폐하?”
왜 네이선에게 허락을 받지? 내가 가자고 했거늘.
우지끈. 살로메디안의 심장에서 격통이 몰려왔다.
“무척 아쉽지만 그러셔야겠지요…….”
“황공합니다, 폐하.”
“사과의 뜻으로 황궁의 요리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꼭 황궁에 와주십시오, 아이시아 님.”
네이선은 아이시아의 손등에 키스하고 싶다는 뜻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는 아이시아가 파르르 떨었다.
‘거절해. 그대는 타인과 닿는 걸 싫어하잖아. 오직 나만 그대를 만질 수 있잖아!’
살로메디안의 기대와 달리 아이시아가 네이선을 향해 작고 흰 손을 내주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네이선은 환희에 차올랐고 살로메디안의 이성은 끊어져 버렸다.
황제의 손과 아내의 손이 맞닿기 직전, 살로메디안이 아이시아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 이상은 허락 못 한다.”
“살롬?”
격한 숨을 토하며 아이시아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붉은 눈동자에는 책망과 당황이 뒤섞여있었다.
그 안에 구해줘서 고맙다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숙부님. 그저 인사를 하려던 것뿐입니다.”
“각하! 언제쯤 철드실래요?”
네이선의 변명도 바바라의 잔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은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
* * *
“살롬, 잠시만요!”
제 손에 잡힌 가녀린 손목이 움찔거렸다. 명백한 저항이었지만 무시했다.
아이시아를 바라보는 네이선의 모습이 살로메디안의 망막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내 앞에서 탐욕을 숨기지 않다니. 감히 내 것을 노리다니……!
하마터면 계약을 어기고 네이선의 눈동자를 뽑아버릴 뻔했다.
그러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지금이라도 내려가서 죽일까? 계약이고 뭐고 엎어버려?
고민하는 사이 2인용 침실에 도착했다.
아이시아와 단둘이 남고 나서야 살로메디안은 겨우 진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단둘이 되고 나니 숨쉬기는 더욱 곤란해졌다.
“폐하께 너무 무례하셨습니다.”
보일 듯 말 듯 미간을 찌푸린 채로 아이시아가 팔짱을 꼈다.
뾰로통하게 밀려나온 도톰한 입술, 원망이 잔뜩 담긴 석류빛 눈동자.
네이선과 바바라 앞에서는 보여주지 않았던 아이시아의 진짜 얼굴이었다.
오직 나에게만 허락된 시아. 내 아내. 내 것. 내 심장.
그렇게 되뇌던 살로메디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반쪽밖에 남지 않은 심장도 터질 듯 내달렸다.
아내가 아름답다는 것은 알았지만, 미치도록 아름다워서 욕망을 부채질한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탓이었다.
2인용 침대가 살로메디안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둘이 눕고도 남을 만한 침대 위에서 아이시아가 절 올려다보고 있었다.
살로메디안은 침을 겨우 삼켰다. 하지만 입을 열 수 없었다.
입을 열면 지금 꺼내선 안 될 열기가 마구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배 속부터 끓어오르는 욕망을 잠재우며 살로메디안이 거칠게 머리를 뒤로 넘겼다.
“내가 말했지? 귀찮은 일이 생길 거라고.”
잠시 미간을 모으고 있던 아이시아가 물었다.
“눈치는 없으시지만 그래도 황제 폐하 아닙니까?”
“지독히도 멍청한 놈이지. 그런 놈이 철혈의 군주라고 불리다니.”
“멍청한 분은 아닐 겁니다. 그저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신분이신 거죠.”
아이시아가 씁쓸한 어조로 답했다.
주눅 든 채 남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시절이 떠오른 걸까? 그 하늘색 머리 인간들한테 괴롭힘을 당하던?
쓰라린 동통과 함께 분노가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몰살시켰어야 했는데…….”
후회 어린 말에 아이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굴 말씀이십니까?”
순진하기까지 한 맑은 눈동자가 살로메디안을 뒤흔들었다.
이렇게 어여쁜 여인을, 왜 그토록 학대한 건가.
어금니를 깨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쿠아로드 왕족을 몰살시킨다 해도 아이시아의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
그녀가 받았을 고통과 쓰라린 기억을 지울 수도 없었다.
지금 그가 할 수는 있는 유일한 것, 고작 손을 뻗어 아이시아의 뺨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시아.”
움찔 놀라긴 했지만, 그녀는 살로메디안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어린아이와 접촉해도 구역질을 하는 아이시아가 제 손만은 허락한다.
그것이 세상의 어떤 권력보다 값진 특권으로 여겨졌다.
심장 반쪽을 내준 덕분이겠지만, 이 정도 보상이라면 심장도 아깝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제국 따위 망하거나 말거나.
‘나, 정말 미친 걸까?’
물음에 이어 반발하듯 답이 떠올랐다.
‘미치면 왜 안 되는데?’
순간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대륙 유일의 쌍 속성으로 온갖 의무를 지고 살아왔지만,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본 적 없었다.
‘제국이 망한다고 나랑 무슨 상관이지? 내가 원해서 마신의 계약자가 된 것도 아니잖아?’
살로메디안의 몫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몸뚱이와 살인 기계로 살아온 인생뿐이었다.
아이시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누군가 웃는 얼굴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도, 그 미소를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나도 인간인데…….
담즙처럼 씁쓸한 맛이 목구멍을 치받았다.
인간이라는 말이 낯설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죽은 키산드라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넘어왔다.
「세드나 공작은 인간이 아니다. 널 사랑해줄 사람은 없다. 넌 평생 혼자일 거고, 외로움 속에서 몸서리칠 것이다.」
그녀 역시 마신의 계약자이자 세드나 공작이었다.
후대인 살로메디안이 태어나기 전까지 무려 170년이나 살아야 했던 운명.
키산드라의 목소리가 살로메디안을 옥죄었다.
납덩이처럼 굳은 그를 흔든 건 다정하고도 보드라운 목소리였다.
“살롬. 무슨 생각 해요?”
살로메디안을 바라보는 아이시아의 눈빛에 걱정이 어려 있었다.
그것만으로 구원받는 느낌이었다.
너무나 한심하게도.
“딱딱해.”
일부러 냉담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영문을 모르는 아이시아의 붉은 눈이 동그래졌다.
“네?”
“그대의 표정, 말투. 다시 딱딱해졌다고.”
살로메디안의 지적에 아이시아가 손으로 제 얼굴을 꾹꾹 눌러보았다.
“긴장해서 습관이 나와버렸네요. 황제 폐하를 만나 뵐 줄 몰랐어요.”
“긴장할 필요 없다.”
“폐하 앞인데 어떻게 긴장을 안 합니까?”
아직도 떨린다는 듯 아이시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이시아의 손등에 입 맞추려 했던 네이선이 떠올라 살로메디안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불거졌다.
구역질을 삼키며 자그마한 손을 내주려 했던 아이시아도.
“그대가 불편하다면 없애주지.”
농담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말이었다. 아이시아가 쓰게 웃었다.
“남편이 반역죄로 사형당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폐하가 그리 불편하지도 않고요.”
남편이라는 호칭이,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듯 시선을 비껴내리는 아이시아의 몸짓이 살로메디안의 분노를 다독여주었다.
그 또한 놀라운 경험이었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 분노를 잠재운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군. 계약 마법 때문에 황제를 죽이는 건 까다롭거든.”
“계약 마법은 어기면 위험하잖아요!”
“그래도 그대가 원하면 죽일 거다.”
“……계약 마법이 없었다면요?”
“진작에 죽였겠지.”
이상형이니 뭐니 떠들면서 내 아내를 바라봤을 때.
* * *
살벌한 대답에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살로메디안의 행동은 지나치게 충동적이었고, 앞뒤 맥락도 없었다.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찾아온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릴까 봐.
그것이 견딜 수 없이 괴로울까 봐, 두려울 뿐이었다.
멋대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손으로 꼭 눌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와 단둘이 있는 방에서 숨조차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쩌자고 침대에 앉은 걸까. 지금이라도 자리를 옮길까?
불안한 눈으로 2인용 식탁을 바라볼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리.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급사가 찾아왔다.
따스한 김이 올라오는 수프와 빵, 닭고기 요리를 보며 살로메디안이 투덜거렸다.
“밥 한 끼 먹이기 힘들군.”
왠지 날 탓하는 것 같아서 머리를 꾸벅 숙였다.
“까탈스럽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함부로 반성하지 말랬지?”
“……아.”
“그대 잘못은 하나도 없다. 모든 건 네이선 그놈 때문이야.”
다시 생각해도 짜증 난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으르렁거렸다.
그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그가 고마웠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살롬.”
나는 천천히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살로메디안의 얼음 조각처럼 차가운 표정이 녹아내리듯 사라졌다는 걸 나는 몰랐다.
따스하고 싱그러운 분위기가 날 감쌌다는 것도, 그것이 살로메디안의 심장을 뒤흔들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초조하게 입술을 씹고 있던 살로메디안이 말을 바꾸었다.
“다른 사람 앞에선 계속 무표정인 편이 좋겠다.”
“딱딱하다면서요?”
“…이놈 저놈 꼬일 것 아닌가.”
잠시 망설이던 그가 대답했다.
찌푸려진 살로메디안의 눈썹을 보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제 주위에 남자들이 덤빌까 봐 걱정하시는 거예요?”
살로메디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은 표정만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정말로 내가 뭇 남자들의 눈길을 끌까 걱정하고 있었다!
“전 남편 잡아먹는 마녀예요! 아무도 제게 관심 없어요. 살롬이니까 절 거둬준 거죠.”
괜한 감정 낭비하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휘저었다.
살로메디안이 가만히 내 손을 잡았다.
착각일까. 그와 닿을 때마다 조금씩 뜨거워지는 체온.
날 향하는 그의 푸른 눈이 아찔했다.
“그렇게 스스로 낮추지 마라.”
“네?”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미안해하지도 마. 그대는 가만히 있어도 빛나는 존재니까.”
“살롬…….”
“누구라도 그대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경건한 어조로 살로메디안이 말했다. 그 말이 가슴 깊숙이 날아와 박혔다.
그는 확신에 찬 곧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발끝부터 심장까지 뭉클한 감동이 차올랐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대는 내게 꼭 필요한 존재다.」
살로메디안의 목소리가 기억을 타고 올라왔다. 아직도 그 말의 진의를 묻지 못했다.
듣고 싶지 않다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몰랐다.
필요하다는 것은 이용 가치가 있다는 말이고, 그 말은 가치가 사라지면 필요도 없어진다는 뜻이니까.
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곁에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그렇게 다짐하면서 폭신폭신한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씹을수록 느껴지는 고소한 단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닭고기는 촉촉하면서도 부드러웠고, 샐러드는 밭에서 갓 따온 것처럼 신선했다.
5년 동안 누군가 남기거나, 상해서 버려진 음식만 먹어야 했던 내게는 낯선 경험이었다.
“이 여관은 유명한 맛집인가요?”
내 물음에 살로메디안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맛집까지는 아니다.”
“제국에서는 평민들도 이런 걸 먹나요?”
“극빈자가 아니라면 어렵지 않겠지.”
살로메디안의 대답에 가슴 한쪽이 내려앉았다.
“아쿠아로드인들은 정말 불쌍하네요.”
그것이 제국 음식에 대한 첫 감상이었다.
살로메디안은 내 말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미간을 모았다.
“아쿠아로드의 땅에선 사탕수수가 자라지 못해요. 수입량도 극히 적으니 설탕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싸죠.”
“어느 나라에서나 설탕은 값비싼 사치품이지.”
“꿀 같은 대체품도 모두 귀족용이에요. 무조건 상납해야 해요.”
“평민들은 꿀조차 못 먹는다고?”
“신전에서 기름지고 단 음식은 사치라고 가르치니까요. 대다수 귀족들은 신경 쓰지 않지만.”
운이 좋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자들은 평민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을 흥청망청 썼다.
평민들은 달콤함이란 작은 행복도 모른 채 딱딱한 빵으로 끼니를 때웠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기에 제국의 단맛을 마음 편히 즐길 수 없었다.
아쿠아로드 사람들도 이런 빵을 먹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만약 내가 국왕이었다면…….
얼핏 떠오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내 한 몸 지킬 수 없어서 억지 결혼한 주제에 국왕?
말도 안 된다고 자조하면서 남은 빵을 뜯어 먹었다.
오늘의 빵 한 조각이 아쿠아로드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오직 신만이 알고 있었다.
* * *
아이시아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네이선의 시선은 오래도록 계단참에 닿아있었다.
지워 내려 했지만 아이시아의 모습이 망막을 떠나지 않았다.
허리 아래서 물결치는 밤 하늘색 머릿결. 신이 내린 명장의 조각처럼 아름다운 이목구비.
정점은 역시 어떤 보석보다 고귀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였다.
그 맑고 큰 눈에 담긴 불꽃을 보는 순간 네이선은 감전된 사람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얼음 절벽 위에 핀 꽃처럼 서늘한 표정까지도 성화에 등장하는 불의 정령과 똑같았다.
‘이상형을 닮은 여인이 숙부의 아내라니.’
결혼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황후 자리를 계속 비워둘 수는 없었다.
문제는 네이선의 짝이 될 만한 마력을 가진 불 속성 귀족 영애가 없다는 거였다.
네이선은 13살도 안 된 꼬마가 황후 후보에 이름을 올린 걸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황후 후보를 제국 밖에서도 찾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바로 어제였다.
조금 빨리 결정을 했다면, 아이시아를 아내로 맞이하는 건 자신이었을지도 몰랐다.
‘항상 뒤지는구나. 마력도, 검술도, 심지어 아내까지…… 무엇 하나 이길 수가 없어.’
대륙 제일의 권력을 가졌음에도 살로메디안 앞에서는 늘 작아지는 네이선이었다.
「세드나 공작은 인간이 아닙니다. 세상에 어떤 인간이 마신과 싸워 이기겠습니까?」
그런 말도 네이선의 자존심을 긁을 뿐이었다.
살로메디안이 세드나 공작으로 선택받지 않았더라면 황제가 될 수 있었을까?
네이선의 불안을 비웃기라도 하듯 살로메디안은 항상 자신만만했다.
네이선이 황금 새장을 지배하는 카나리아라면 살로메디안은 창공을 훨훨 나는 매였다.
늘 부러웠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심장이 터질 것처럼 아름다운 여인의 손목을 쥐고 사라지기 전까지.
네이선의 움켜쥔 주먹을 바라보던 바바라가 말했다.
“내가 찾던 황후감인데, 왜 하필 숙부의 아내지?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시는군요, 폐하.”
허를 찔린 네이선이 미간을 좁혔다.
입술을 꾹 다문 네이선을 향해 바바라가 날카롭게 꼬집었다.
“설마…… 아이시아 님을 빼앗고 싶은 건 아니죠?”
뜨끔한 얼굴로 네이선이 시선을 돌렸다.
“그럴 리가.”
“시치미 떼실 필요 없습니다. 폐하처럼 표정을 읽기 쉬운 분도 없으니까요. 살로메디안 님도 그렇지만요.”
바바라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황족 앞에서 조금도 주눅 들지 않는 것이 바바라의 매력이었다.
거침없고 솔직하지만 절대 선을 넘지 않는 여인. 정치 문제와 경제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뛰어난 문관.
몇 번 거절당한 전력이 있지만, 네이선이 다시 한번 물었다.
“황궁에서 일해 볼 생각은 없나?”
예상했던 대로 바바라가 발끈했다.
“가끔 불려가는 것만으로도 미치겠거든요? 게다가 황궁엔 바넷사 언니가 있잖아요!”
“인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그로반 가는 황족의 집사 가문이잖아? 언니와 함께 일하면 그대도 좋을 텐데.”
“거기까지만 하세요! 사고뭉치 주군 때문에 골머리가 터질 것 같으니까!”
“황제보다 세드나 공작을 선택하겠다는 건가?”
네이선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부드러운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지만 그를 둘러싼 위압감은 한층 더해졌다.
바바라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황제의 기세에 눌리기는커녕 웃음기 없는 눈을 내리깔지도 않았다.
“호호. 선택한 게 아니라 떠맡은 거죠. 살로메디안 님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잖아요? 제가 아니면 누가 처리하겠어요?”
“…….”
“대륙 유일의 쌍 속성이 사라진 지금이라면 더더욱이요.”
동의를 구하듯 바바라가 한쪽 눈을 찡끗했다.
네이선이 변방 국경지대까지 달려온 것은 살로메디안의 결혼 때문이 아니었다.
“살로메디안 님께선 불 속성을 잃고 물 속성이 되셨어요. 제국과 마신의 계약은 깨진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바바라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네이선의 수려한 얼굴에도 근심이 가득했다.
크로티무스 황가에 얽힌 비밀 때문이었다.
* * *
700년 전, 크로티무스 초대 황제가 마신과 계약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는 대륙을 정벌할 수도 대제국을 건국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마신은 황제에게 충성을 요구했고, 그 증거로 쌍 속성으로 태어난 황태자를 바치라 명했다.
황제의 자손 중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하며, 가장 훌륭한 성품을 가진 소년을.
황제는 피눈물을 쏟으며 황태자를 폐위하고, ‘숭고한 지배자’란 뜻의 이름과 공작 위를 내렸다.
마신은 세드나 공작에게 인간이 절대 가질 수 없는 강력한 힘을 나눠주었다.
그렇게 세드나 공작은 평생 제국의 수호자이자 마신의 계약자로 살아야만 했다.
황실에서 태어나는 쌍 속성 아이는 차기 세드나 공작이 되어 마신의 계약을 이어가야 했다.
후대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죽을 수도 없었다.
역대 황제들은 세드나 공작이 가진 마신의 힘을 두려워했다. 물론 그 힘을 낭비하지도 않았다.
세드나란 이름을 받은 아이는 황제의 명에 따라 전쟁터를 누비며 평생 피를 뿌려야 했다.
모든 영광은 황제에게 돌아갔고, 세드나 공작에게는 ‘살인귀’라는 낙인이 찍혔다.
무려 700년. 그 긴 시간 동안.
* * *
“후대가 태어나지 않았는데 쌍 속성이 사라지다니. 제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진 거예요. 하아…….”
바바라가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었다.
네이선이 씁쓸하게 덧붙였다.
“마물의 출몰이 점점 잦아지고 있다. 마신의 계약이 느슨해진 탓이겠지.”
“마물 새가 죽은 건 한 달 전이라면서요? 왜 진작 살로메디안 님을 찾아가지 않았죠?”
바바라가 추궁하자 네이선이 시선을 피했다.
“숙부님께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게 죄송스럽기도 하고…….”
“아아아!”
절망스럽다는 듯 머리를 감싸 쥐던 바바라가 고개를 번뜩 들었다.
“살로메디안 님은 어쩌다가 불 속성을 잃은 걸까요?”
“글쎄.”
“살로메디안 님도 예측 못 한 일이었을 거예요. 그게 아니면 혼인처럼 귀찮은 일을 하셨을 리 없어요.”
“불의의 사고로 불 속성을 잃으셨고 그 일이 아이시아 님과 관련 있다… 란 뜻이로군.”
바바라와 네이선이 살로메디안의 비밀에 바짝 접근했다.
하지만 그가 심장 반쪽을 아이시아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은 죽었다 깨도 알 수 없었다.
아이시아 본인도 실감 못 하고 있었으므로.
“숙부님께서 불 속성을 되찾으시면 아이시아 님과 이혼하겠지?”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한 사람처럼 네이선이 눈을 빛냈다.
바바라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차갑게 읊조렸다.
“결혼 서약서에 잉크도 안 말랐는데 무슨 이혼이에요?”
“필요해서 한 결혼이라고 너도 말했잖아?”
“정말 아이시아 님을 황후감으로 생각하시는 거예요? 이혼녀라도요?”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토록 기품 있고 아름다운 분께.”
네이선이 은은히 볼을 붉혔다. 황제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본 바바라가 경고했다.
“우리 마님 탐내지 마세요. 살로메디안 님을 조련한 유일한 분이시니까요. 분명 훌륭한 공작부인이 되실 거예요!”
“황후가 되면 더 빛나실 분 같은데.”
“살로메디안 님 앞에서 그 말을 꺼내지 마세요. 목숨이 귀중하시다면요.”
“숙부님이 날 해칠 리 없다.”
네이선은 자신만만했고, 바바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계약 마법을 너무 믿지 마세요. 아이시아 님을 바라보는 살로메디안 님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어요.”
바바라가 턱을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네이선이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숙부님께서 아이시아 님을 사랑하기라도 한다는 건가?”
“제 예감이 맞다면요.”
“나는 물론 친부모까지도 멀리하시는 분이야. 숙부님이 여인을 마음에 품다니, 말도 안 돼.”
네이선의 말에 바바라가 안타까움을 섞어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살로메디안 님을 형님처럼 모시면서 누구보다 잔인한 말씀을 하시네요.”
“난 숙부님을 존경하고 그분이 행복하길 바라.”
“하지만 살로메디안 님보다 제국이 먼저겠죠?”
잠시 침묵하던 네이선이 눈매를 부드럽게 접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텐데?”
“…….”
“숙부님은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분이 아니야. 아이시아 님도 곧 깨달으실 거다. 그럼 내게 기회가 생기겠지.”
무슨 미래를 상상하는지 네이선이 미소를 머금었다. 바바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집요하게 아이시아를 쫓던 살로메디안의 눈빛과 그를 바라보던 아이시아의 시선이 떠오른 탓이었다.
‘제국보다 살로메디안 님을 먼저 생각해줄 분이 생긴 건지도 몰라.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몰라도.’
* * *
나와 살로메디안은 황실 근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공작령까지 이동하게 됐다.
네이선이 직접 배웅하겠다고 나섰지만 살로메디안이 단칼에 거절했다.
버려진 강아지처럼 침울해하는 네이선이 어쩐지 가엾어서 인사말을 건넸다.
“조만간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습니다, 폐하.”
“감사합니다! 아이시아 님을 위해 성대한 환영 파티를 준비하겠습니다!”
네이선의 우중충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맑게 갰다. 그 솔직함이 어딘가 귀여웠다.
황제는 권위에 찌든 위정자일 줄 알았는데…….
무표정이 무너지기 직전에 살로메디안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환영 파티가 아니라 혼인 축하 파티겠지.”
네이선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살로메디안이 날 마차에 밀어 넣었다.
“그만 가자.”
“아이시아 님, 꼭 황궁에 와주십시오!”
네이선이 날 향해 목을 빼고 손을 흔들었다.
“황공합니다, 폐하.”
“부디 네이선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아이시아 님!”
머뭇거리는 날 대신해서 살로메디안이 일갈했다.
“너야말로 시아를 숙모님이라 불러라!”
“새로운 마물 새를 보낼 테니 이번에는 죽지 않게 해주십시오, 숙부님.”
네이선은 해맑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날 숙모라고 부를 마음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살로메디안은 태연하게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난 털끝 하나 건들지 않는다. 내 아내는 어떨지 모르지만.”
역시 내가 황가의 새를 죽였구나…….
근심에 사로잡힌 나는 차갑게 일그러지는 네이선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슬쩍 올라가는 살로메디안의 입꼬리도.
* * *
“살롬. 공작령에 도착하려면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빠르면 반나절.”
반나절만 더 가면 온천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는 거야? 바로 온천욕도 할 수 있고?
기쁨으로 가슴이 콩콩 뛰었다.
“공작령에 도착하면 바로 온천욕을 할 수 있는 건가요?”
“온천이 있다고 했지,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살로메디안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온천을 못 한다니요?”
심장이 우지끈 내려앉았다. 덜덜 떨리는 입술을 겨우 달싹였다.
“몇 달쯤 온천이 마르더니 지금은 돌과 이끼뿐이라더군.”
“…돌과 이끼라고요?”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답했다.
온천이 사라졌다고?!
순간 눈앞이 까매지고 삐익 하는 날카로운 이명이 들려왔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듯 절망스러웠다.
“온천이 마른 이유는 모르십니까?”
“알 턱이 없지. 영지 관리는 모두 바바라가 하니까. 바바라는 3개월 전부터 출장 중이었고.”
“살롬은 왜 가보지 않으셨어요?”
“난 온천욕을 즐기지 않거든.”
온천수가 말라버렸다는데 살로메디안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태연했다.
배신감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눈물을 참는 것도, 목소리를 가다듬는 것도 불가능했다.
“절 속이신 겁니까, 각하?”
“시아. 호칭이랑 말투가 바뀌었는데.”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온천욕을 못 하는데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벌컥 소리쳤다. 온천욕을 못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날 속인 살로메디안을 향한 원망도 하늘을 찔렀다.
“예상은 했지만 그대는 온천이 제일 중요하군.”
“네?”
“온천이 없으면 공작부인도 때려치울 것 같아.”
그의 씁쓸한 말투를 들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 희망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혹 제 결심을 시험하려고 거짓말을 하신 겁니까?”
“아니. 온천이 마른 건 사실이다. 이유도 알 수 없고.”
차갑게 굳은 얼굴로 그가 대답했다. 청천벽력을 들은 건 난데 오히려 살로메디안이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 * *
나는 바바라가 건네준 ‘세드나 공작령 현황’이란 보고서를 침울하게 바라봤다.
세드나 공작령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아쿠아로드와 국경을 맞댔다는 것과 그 국경이 마신의 숲 근처라는 것뿐이었다.
올해 갑자기 말랐다잖아? 분명 되살릴 수 있을 거야. 아니, 살려야만 해!
나는 결투를 앞둔 기사처럼 전의를 불태웠다. 살면서 이처럼 강한 열망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온천을 살리려면 세드나 공작령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아야 했다.
서류 뭉치를 열자, 바바라의 편지가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공작부인. 불행하게도 각하를 모시고 있는 집사 바바라입니다.
공작령의 상황은 암담하지만, 끝까지 읽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각하는 전쟁에 정신이 팔려 영지 경영을 내팽개친 분이시라, 공작부인이 제 마지막 희망이랍니다.
세드나 공작령은 제국의 최남단을 떠받치는 모자 모양의 광활한 영토입니다.
대부분 산림지역이기에 영민은 많지 않습니다.
곡창지대도 없고, 광산도 없습니다. 부유한 영지는 아니란 뜻이지요.
‘마신의 숲’이라 불리는 장소에서는 해마다 수많은 마물이 출몰합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 방면에서 무능한 각하께서 유일하게 잘하는 것이 살육이니까요! 호호.]
빠르게 편지와 서류를 넘겼다. 보면 볼수록 공작령의 상황은 끔찍 그 자체였다.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바바라의 보고서를 넘겼다.
세금은 안 걷히는데, 마물 토벌에 쓰이는 돈이 너무 많아. 영아 사망률도 높고 영민들도 줄고 있어! 그런데 빚이 5000만 골드나 있다고?
천문학적인 숫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호화로운 생활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세드나 공작령이 이토록 가난한 영지일 줄은 몰랐다.
말만 공작령이지, 쓸모없는 땅덩어리를 주고 마물 소탕이라는 위험천만한 책임만 떠넘긴 거였다.
이거 너무하지 않나? 공작령에서 마물을 토벌하지 않으면 제국 전체가 위험해지잖아?
영지에서 세금이 안 나오면 황실에서 예산을 내려줘야지?
5년 전에 배웠던 제왕학을 떠올리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바바라의 보고서로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공작령이 파산 일보 직전이라는 것.
둘째, 바바라가 매우 유능하다는 것.
문제는 너무 유능해서 황도로 자주 차출된다는 거였다.
바바라가 출장을 떠난 동안 영지는 더욱 피폐해졌고, 살로메디안은 한결같이 영주 노릇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지옥의 악순환이었다. 그리고 그 지옥이 내 미래였다. 온천마저 사라진.
설마 이 정도는 아닐 거야. 바바라가 조금 과장한 거겠지. 황족의 위상이 있을 텐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애써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되리란 걸 알 턱은 없었다.
* * *
“정말 이 숲에 저택이 있다고요?”
나는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거대한 숲 앞에서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빽빽한 나무 사이로 마물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원시림이 내뿜는 축축한 공기를 마시며 침을 꼴깍 삼켰다.
마신의 숲에 다시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므로.
바바라가 방긋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도둑도 없고 강도도 없는 안전한 곳이죠! 공기는 얼마나 좋은데요?”
도둑이 없는 대신 마물이 있잖아요? 강도가 미쳤다고 여기까지 오겠어요?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왜 공작저가 마신의 숲에 있는 겁니까?”
척박한 땅이라도 영지가 그렇게 넓은데.
들어간 사람은 있지만 나온 사람은 없다는 마신의 숲이라니?
준비한 모범 답안을 내놓듯 바바라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역대 세드나 공작들께서는 번잡스러운 것을 싫어하셨거든요. 조용하고 경치도 훌륭하니 이만한 곳도 없죠.”
“설마요.”
“약간 외지긴 하지만 마차 주차 공간도 넓어요! 엔틱 스타일의 저택도 유물급으로 아름답고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았지만 나는 바바라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만해, 바바라. 어차피 곧 알게 될 텐데.”
뒤에서 살로메디안이 조소했다. 왜 산통을 깨느냐는 듯 바바라가 살로메디안을 노려봤다.
“공작부인께서 도망가시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이미 시아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을 거다.”
살로메디안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무슨 결정? 아직 저택 구경은 하지도 못했는데?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을 들여다봤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바바라가 서둘러 숲 초입에 세워놓은 검은 용 석상으로 향했다.
“환영 마법으로 숨겨놓아서 그렇지, 길도 잘 닦여있답니다. 언제든지 티파티를 여실 수도 있어요!”
용머리 부분을 비틀자 환영 마법이 해제되면서 마차 두 대가 너끈히 지나갈 만한 길이 나타났다.
길이 아무리 잘 닦여있어도 저주받은 숲에 티파티를 하러 올 레이디는 없겠지만.
“어서 마차에 오르세요! 사용인들 모두 공작부인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바바라가 내 등을 떠밀었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익숙한 풍경을 보며 신음을 삼켰다.
죽음의 공포를 견디며 배회하던 숲을 마차로 관통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마신의 숲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흐릿하기만 했다.
영혼을 태울 듯 강렬하던 열기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대가 우리의 첫 만남을 기억하는 것. 이것이 조건이다.」
살로메디안의 목소리가 심장을 두드렸다. 푸른 눈에 번지는 슬픔 어린 그리움 또한.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곳에서 나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치맛자락을 움켜잡으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세드나 공작 저택을 바라봤다.
* * *
저택의 첫인상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석벽엔 금이 갔고, 칠은 벗겨졌으며, 깨진 유리창이 방치되어 있었다.
정원수는 말라 죽었고, 대리석 조각상과 분수대는 가시 돋친 넝쿨 식물로 뒤덮여있었다.
반쯤 썩어가는 동물 사체와 저택 주변을 배회하는 까마귀 떼까지.
고급 자재로 만들진 것 같지만, 허물어지기 직전의 폐가에 불과했다.
오랜만에 귀가한 주인을 마중하는 사용인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하하… 저택 상태가 왜 이러지? 3개월 전에는 안 이랬는데. 아하하.”
바바라가 아이시아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오, 오히려 잘된 거 아닐까요? 공작부인의 취향대로 다시 꾸미시면 되니까요. 사람도 새로 뽑고요!”
바바라가 간절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살로메디안을 대신해 영주 노릇을 해야 할 내가 도망칠까 봐 두려운 모양이었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택을 수리할 예산이 없지 않습니까?”
“폐하께 말씀드리면 돈을 융통할 수 있을 겁니다.”
“이미 빚이 5000만 골드라면서요?”
“제 사비라도 털겠습니다! 제발 떠나지만 말아 주세요, 공작부인!”
바바라가 연두색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두 손을 모았다.
나보다 연상이라는 건 알지만 사랑스러운 외모의 바바라가 울먹이자 심장이 쿵 주저앉았다.
이 언니 너무 귀여워! 뭐든 도와주고 싶어!
저택을 보고 꽤 놀라기는 했지만 공작저를 떠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돌아갈 곳도 없었지만, 그보다 온천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온천을 살리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나.
테레사에게 복수할 힘을 키우는 것과 온천욕을 하는 것.
그것이 나의 제1 목표였다.
“제가 왜 떠나겠습니까. 이곳이 제집인걸요?”
나는 담담하게 답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이던 바바라가 내 품을 파고들었다.
“사랑해요, 공작부인!”
비교적 큰 키를 가진 내 가슴팍에 바바라의 연두색 머리칼이 흩날렸다.
부드러울 것 같은데 만져 봐도 되려나? 실례겠지?
굽실거리는 연두색 머리를 쓰다듬어보고 싶은 욕망과 달리 왈칵, 헛구역질이 밀려왔다.
내장이 뒤틀리고 식은땀이 솟았다.
다행히 바바라가 금방 떨어져서 연두색 머리칼 위에 토하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문득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정말 떠날 마음이 없는 건가?”
그의 아름다운 얼굴은 불신으로 일그러져있었다.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어서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제가 왜 떠나야 하나요?”
잠시 움찔한 살로메디안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온천이 없어졌으니 그대가 떠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마음의 결정을 내렸을 거라고 한 거야? 어이가 없어서!
“온천이 없다니요? 온천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잠시 마른 것뿐이라고요.”
우리 소중한 온천이 없어졌다니. 지금은 아프지만 금방 살아날 아이인데!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푸른 하늘을 닮은 살로메디안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아직도 못 믿는 것 같아서 다시 한번 못 박았다.
“온천이 없어도 저는 떠나지 않습니다. 살롬이 제 제안을 받아들였고, 저는 주어진 소임을 다할 것입니다.”
이혼 전까지 세드나 공작부인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
그것이 계약의 조건이었다.
허를 찔린 사람처럼 살로메디안이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잘못한 걸까? 속으로 의아해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온천은 제가 다시 살릴 거예요. 꼭 그렇게 할 거라고요!”
욕망과 열정이 지나쳤던 탓일까? 내 주먹에서 파란 불꽃이 번쩍 피어올랐다.
이런, 또 마력이 폭주하려나 봐!
* * *
화들짝 놀라 주먹을 터는데, 바바라가 탄성을 내질렀다.
“마력을 실체화시키시다니! 정말 놀라운 능력이십니다, 공작부인!”
이게 능력이라고요? 공작의 셔츠나 태우는 민폐가 아니라?
“…어려운 일입니까?”
푸른 불꽃에 휩싸인 주먹을 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었다.
바바라가 눈을 반짝거리며 답했다.
“당연하죠! 살로메디안 님이나 폐하가 아닌 분이 마력을 실체화하는 건 처음 봅니다. 정말 멋지세요!”
“…….”
“공작부인은 미모, 능력, 열정 모든 걸 가진 분이시로군요! 세상 쓸모없는 우리 각하에게 아내 복이 있었을 줄이야! 각하가 영지에 도움이 되다니!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공작령을 구할 영웅을 만났다는 듯 바바라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렸다.
아무래도 불꽃을 만드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내 의문을 살로메디안이 해결해줬다.
“마력은 섬세하고도 위험한 힘이다. 마력 보유가 1단계라면 발동이 2단계, 실체화가 3단계다.”
“마력을 사용해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만들지는 못한다는 건가요?”
“그래. 고위 귀족이라도 2단계까지밖에 하지 못하지.”
나는 마력을 이용해 괴롭히던 테레사를 떠올렸다.
테레사가 강력한 마력을 가졌다는 건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물방울을 만드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테레사도 못 하는 걸 내가 하는 거야?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불꽃 덕에 곤혹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이 불꽃이 능력의 상징이라니.
황당하기도 하고 어쩐지 감격스럽기도 했다.
“오랫동안 억눌렸기 때문에 그대의 마력이 폭발적인 거다. 마력 폭주는 그대 잘못이 아니야, 시아.”
이번에도 살로메디안이 날 위로했다.
“위로해주셔서 감사해요, 살롬.”
수줍게 인사를 건네는데 살로메디안이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내 탓도 있으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런 게 있다.”
살로메디안이 맨손으로 불타고 있는 내 주먹을 붙잡았다.
치익, 하고 살갗이 타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가 번졌다.
나와 바바라가 동시에 외쳤다.
“살롬!”
“살로메디안 님!”
하지만 살로메디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손아귀에서 푸른 불꽃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그때까지 살로메디안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남은 것은 위험스러울 정도로 뜨거운 그의 체온뿐이었다.
심장이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또다시 불꽃을 내뿜게 될까 봐 가까스로 호흡을 골랐다.
“괜찮으세요?”
“이 정도는 금방 나아.”
걱정할 것 없다는 투로 살로메디안이 입매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그의 손에 있던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고 있었다.
치료 신관도 못 할 놀라운 능력에 나는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자동 재생이야? 도대체 살롬은 못 하는 게 뭐지?
“바바라. 시아를 방으로 안내해.”
살로메디안이 바바라에게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각하.”
“목욕물도 데우고. 시아는 목욕을 좋아한다.”
그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되는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푸른 눈이 날 파고들었다.
내밀한 곳까지 속속 꿰뚫어 보는 듯한 그 앞에서 입술이 바짝 말랐다.
「시아는 목욕을 좋아한다.」
듣기 좋은 그 목소리가 귓가에 반복해서 울렸다.
누군가 날 알아주고 인정해준다는 기쁨은 상상보다 황홀한 행복이었다.
목이 타고 숨쉬기 곤란하다는 것만 빼면.
어색함을 감추려고 내가 말을 돌렸다.
“살롬. 바쁘지 않으면 마력에 대해 알려 주시겠어요?”
“물론이다.”
“부르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기다릴 것 없다. 내가 그댈 찾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살로메디안이 떨어졌다.
멀어지는 그를 보며 안도감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가 언제 찾아올지 알았다면 순순히 보내주진 않았을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