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50)

6

* * *

“이유를 들려주시겠습니까?”

아이시아의 눈썹은 일그러졌고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살로메디안이 슬쩍 올라가는 입매를 가다듬었다.

“거래에, 계약까지 하라고? 결혼이 이토록 골치 아픈 일인 줄 알았다면 시작도 안 했을 것이다.”

고요하기만 하던 아이시아의 석류빛 눈동자가 요동쳤다.

이제야 인간다운 표정을 짓는군.

남들 앞에서는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다가, 단둘이 되자마자 얼음 조각으로 돌아온 아이시아에게 살로메디안은 서운함을 넘어 부아가 치밀었다.

일부러 저를 자극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온천이란 말을 꺼내자마자 태도가 돌변한 것도 거슬렸다.

만약 온천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이상형이란 말은 듣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누군가의 이상형이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참을 수 없는 건, 온천보다 하찮은 취급을 받았다는 거였다.

천하의 세드나 공작보다 온천이 더 좋다는 건가?

그게 무슨 상관이야. 심장만 되찾으면 그만이지.

정말 그런 줄만 알았는데, 왜 자꾸 짜증이 솟구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이시아가 이혼이란 단어를 꺼냈을 땐 폭발할 뻔했다.

성혼 확인서에 피도 마르지 않았건만 이혼이라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역시 후회하고 계셨군요.”

아이시아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

“당장 이혼하자는 뜻입니까?”

가늘게 떨리는 아이시아의 아랫입술을 보면서 살로메디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 입에서 이혼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때마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진짜가 올 때까지 임시 아내가 되겠다고?

하! 무슨 말도 안 되는……!

제 입으로 마신의 아내가 되겠다고 했으면서. 세드나 공작령을 지키겠다고 했으면서.

살로메디안의 어금니 사이에서 으드득, 날카로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물론 계약 따위 없더라도 살로메디안은 아이시아를 지켜야 했다.

세상에 그가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뿐이라면, 그 사람은 황제가 아니라 아이시아가 될 터였다.

그녀가 심장 반쪽을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럼 이혼은 언제 하실 겁니까?”

“제발 그 이혼이란 말 좀 그만할 수 없나?”

“다시 아쿠아로드로 가야 하다니…….”

아이시아의 상태가 어쩐지 이상했다. 최상급 루비보다 반짝이던 눈동자도 흙탕물처럼 흐려져 있었다.

살로메디안이 아이시아의 어깨를 붙들었다.

“아이시아?”

“버림받을 거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당신도 날 이용할 테고, 쓸모없어지면 버리겠지…….”

체념인지 확신인지 모를 가느다란 목소리가 살로메디안의 가슴을 후벼 팠다.

이거 위험한데.

반쪽밖에 남지 않은 살로메디안의 심장이 채찍질 당한 말처럼 내달렸다.

아이시아의 불안과 슬픔이 해일처럼 밀어닥치고 있었다.

“또 태우려는 건가?”

묻기가 무섭게 아이시아가 푸른 불꽃에 사로잡혔다. 이번에도 마력 폭주였다.

“너무하는군!”

춤이라도 추듯이 일렁이는 불꽃이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아이시아의 불기둥은 살로메디안에게도 위협적이었다.

그가 가진 마력만으로 아이시아를 진정시킬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여긴 욕실도 없었다.

날름거리는 불꽃 속에서 아이시아의 감정이 쏟아져 나왔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아……!’

살로메디안의 거절이 그녀의 상처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하필이면 지금……!

살로메디안이 마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며 아이시아를 껴안았다.

작열하는 통증 탓에 신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큽.”

폭발은 미뤘지만, 역시 부족했다.

아이시아를 껴안은 살로메디안이 마차 천장을 부수고 날아올랐다.

날아오른 하늘에서 농지 옆 자그마한 연못이 눈에 띄었다. 그가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물과 불이 하나가 되는 뜨겁고도 황홀한 감각이 살로메디안을 휘감았다.

살갗이 불타는 고통에서도 웃을 수 있다니. 아이시아를 놓지 않고 오히려 빈틈없이 밀착하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모양이었다.

언제쯤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날이 오기는 할까?

살로메디안은 대답 대신 아이시아의 가녀린 몸을 으스러지라 껴안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의식을 잃은 그녀의 입술을 훔쳤을 테니까.

* * *

살로메디안의 품에 안긴 채 눈을 끔뻑거렸다.

밭을 갈던 농부들이 나와 살로메디안을 겁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빈센트를 비롯한 수행 기사들도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이게 무슨 일입니까?”

불타버린 살로메디안의 옷가지와 뜨뜻미지근해진 연못물.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또 저질렀구나! 벌건 대낮, 연못이라니……!

욕실에서도 감당하기 힘들었던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었다. 하지만 쥐구멍은커녕 시간이 갈수록 구경꾼이 늘고 있었다.

살로메디안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돌아가자마자 마력 운용법을 가르쳐야겠다. 이러다 옷이 남아나지 않겠어.”

틈만 나면 마력 폭주하는 임시 아내가 계약을 요구한다면?

나라도 당장 이혼하고 새 삶을 시작할 것 같았다.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말이 없는데 그가 먼저 사과했다.

“미안하다. 모두 나 때문이다.”

문제를 일으킨 것은 난데…… 살로메디안이 왜?

의아함보다 앞선 것은 안도감이었다.

고개를 바짝 들고 살로메디안에게 물었다.

“저는 아쿠아로드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나요?”

태연한 척하고 싶었지만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어쩐지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살로메디안이 대답했다.

“당연하다. 그대는 나의 아내 아닌가.”

그가 내게 커다란 손을 뻗었다.

때리기라도 하려는 건가,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매서운 파공음 대신 사라락, 사라락 가슴 한쪽이 간질거리는 상냥한 소리가 들려왔다.

살로메디안이 조금은 어색한 손길로 내 머릿결을 쓰다듬고 있었다. 시리도록 투명한 푸른 눈도 내게 고정되어있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젠 도망칠 필요 없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볼 안쪽 살을 세게 악물었다.

기대하지 마, 아이시아. 사랑해서 결혼한 사이도 아니잖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해. 기대를 할수록 실망만 커진다는 거 잘 알잖아?

그러나 속절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왜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날 선 긴장이 풀리고 복잡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오래 경험해보지 못했던 따스함을 느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때 살로메디안이 입을 열었다.

“계약을 받아들이겠다.”

“정말입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를 지켜주겠다. 누구도 그대를 농락할 수 없도록.”

“각하!”

순수한 기쁨이 날 가득 채웠다. 살로메디안이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대신 이혼은 그대가 아니라, 내가 원할 때 하겠다.”

“네?”

“그것만은 양보하지 못한다.”

* * *

아이시아가 멈칫했다. 하지만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좋습니다. 서둘러 힘을 기르겠습니다. 오래 폐 끼치지는 않을 겁니다!”

아이시아의 석류빛 눈동자가 이슬을 머금은 듯 반짝였다.

환하게 피어오르는 그녀 앞에서는 밤하늘의 별도 빛을 잃을 듯했다.

아름답다. 눈을 뗄 수 없다. 놓아주고 싶지 않다.

기이한 감정이 살로메디안을 서서히 잠식했다. 그래서 멍하니 아이시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곁에 있는 동안 부끄럽지 않은 아내가 되겠습니다. 영지에 보탬이 되는 임시 공작부인이 되겠습니다.”

열의가 넘치는 아이시아의 다짐을 들으며 살로메디안은 텅 빈 가슴에서 올라오는 쓴 물을 삼켰다.

아이시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계약을 선택했지만, 함께 웃을 수는 없었다.

다음 달쯤엔 공작부인 자리가 공석이 될 수도 있겠군.

이혼을 결정하는 것이 자신이라 해도 떠나는 그녀를 잡지는 못할 테니까.

‘당신도 날 이용할 테고, 쓸모없어지면 버릴 테니까.’

그 말이 살로메디안을 얼마나 헤집어놓았는지 아이시아는 모르고 있었다.

나만은 널 버리지 않겠노라고 말할 뻔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아이시아가 원하는 건 세드나 공작 가의 이름일 뿐, 살로메디안이란 남자는 아니었다.

그것이 그를 낯선 지옥에 떨어뜨렸다.

“나는 고작 그 정도인가…….”

살로메디안이 중얼거렸다. 아이시아가 되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못 들은 거로 해라.”

살로메디안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녀에게서 심장을 돌려받지 못하면 그는 영원히 물 속성으로 살아야 했다.

완벽한 균형을 이루던 신체는 불안정해질 테고, 서서히 무너져 내릴 것이다.

자신만의 죽음이라면 문제 될 것 없었다. 하루빨리 죽는 것이 소원일 지경이니까.

하지만 제국은 달랐다.

마신의 계약자인 쌍 속성이 사라지면, 제국은 피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내 인생을 짓뭉갠 나의 조국. 그 존망이 아이시아에게 달려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살로메디안과 아이시아의 심장에.

심장을 돌려달라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전에, 나는 심장을 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이시아의 티 없이 맑은 얼굴을 바라보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살로메디안의 예감은 지독할 정도로 잘 맞아떨어지는 편이었다.

그 예감이 불길할수록.

“각하, 안색이 좋지 못하십니다.”

아이시아가 걱정스럽다는 투로 물었다.

자신에게 둔감하면서 타인의 변화에는 민감하기 짝이 없는 여인이었다.

오랫동안 눈칫밥을 먹었기 때문이겠지.

아쿠아로드 왕족들의 낯짝을 떠올리자 밑도 끝도 모를 분노가 치솟았다.

살로메디안이 음산한 목소리로 다짐했다.

“남김없이 죽여주겠다.”

“누굴 죽이시겠다는 겁니까?”

네 가족. 널 괴롭힌 자들. 네게 오물을 뿌리고 네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한 인간 전부.

대답을 삼키고 살로메디안이 딴청을 피웠다.

“일단 밖으로 나가지? 옷을 갈아입고 싶은데.”

“죄, 죄송합니다!”

얼굴이 새빨개진 아이시아가 살로메디안에게서 떨어졌다.

연못을 빠져나가며 첨벙거리는 모습이 천생 어린아이 같았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아이시아는 넝마가 된 그의 옷을 흘끔거렸다.

자책하며 축 늘어진 어깨도 안쓰러웠다.

안쓰럽다고? 그건 또 뭐지?

‘귀엽다’에 이어서 ‘안쓰럽다’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 탓에 살로메디안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차피 해석할 수 없겠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시아를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사소한 것에 미안해할 필요 없다. 세드나 공작부인이 되려면.”

“각하?”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말고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마. 그대는 내 아내니까.”

지령을 받은 병사처럼 아이시아가 자세를 빳빳하게 고쳤다.

“반드시 유념하겠습니다.”

“훨씬 낫구나.”

“뭐가요?”

“그대 표정. 얼음 인형 같을 때보다 훨씬 보기 좋다.”

그는 서둘러 연못 밖으로 향했다. 불꽃이 옮겨붙은 것처럼 귓바퀴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아이시아가 눈치챌까 봐 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 * *

부서진 마차로 이동을 계속할 수 없었다. 인근엔 귀족 전용 숙소도 없었다.

수행 기사들이 새 마차를 수배하는 동안 살로메디안과 나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가까운 여관으로 향했다.

“어서 옵쇼!”

1층은 식당 겸 술집이라 용병과 떠돌이 상인들로 왁자지껄했다.

불끈불끈한 근육을 자랑하는 용병들을 보며 살로메디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시끄럽고 더럽지만 노숙 보다는 나을 거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각하께서 불편하시지 않겠습니까?”

“전쟁터를 떠돌다 보면 잠자리를 가리지 않게 된다. 이보다 못한 곳에서 자주 자 봤고.”

“저 역시 그렇습니다.”

돼지우리나 헛간에 비하면 이 여관은 초호화 숙소이나 다름없었다.

“좋은 방이 하나 남았는데 드릴깝쇼?”

툭 튀어나온 배를 가진 주인이 나와 살로메디안을 맞이했다.

“남은 방은 하나뿐인가?”

“다섯 개가 남았습니다만 연인들을 위한 2인용 침대방은 하나뿐입니다요.”

주인이 구리 열쇠를 흔들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흘려들어도 좋으련만 살로메디안이 굳이 주인의 말을 정정했다.

“우린 연인이 아니라 부부다.”

친구도, 연인도 아닌 부부.

내 뺨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와 부부로 불린다는 것과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한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주인장이 넉살 좋게 대꾸했다.

“2인용 침대 방을 드려야겠군요.”

“남은 방 다섯 개를 모두 빌리겠다. 내 아내에게도 깨끗한 방을 주도록.”

살로메디안이 열쇠를 낚아채서 유유히 2층으로 올라갔다.

2인용 침대방 열쇠를 가지고 남편이 홀로 사라지자 주인은 황당한 모양이었다.

“부군과 싸우셨습니까, 부인?”

미소를 감추고 주인에게 물었다.

“신경 쓸 것 없습니다. 혹시 방에서 목욕할 수 있습니까?”

“욕조는 없고 공용 샤워장뿐입니다요.”

“방으로 세숫물을 올려주십시오.”

후드 아래로 드러난 내 얼굴을 본 주인이, 갑자기 반쯤 얼이 빠져 눈을 끔뻑거렸다.

얼굴에 뭐가 묻었나?

* * *

얼굴이 시뻘게진 주인을 뒤로하고 소박한 여관방 안으로 올라왔다. 곧 따뜻한 물이 담긴 들통이 전해졌다.

살로메디안은 뭘 하고 있을까? 황족도 하층민들과 공용 샤워실을 쓸 수 있을까?

살로메디안을 떠올리자, 그와 연못에 뒤엉켜 있던 일이 떠올랐다.

날 샅샅이 훑어 내리던 푸른 눈동자와 어떤 비바람도 막아줄 것 같은 단단한 가슴도.

앞으로도 같이 목욕하게 될 거란 말이 그런 뜻이었나……? 마력 폭주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살로메디안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말고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마. 그대는 내 아내니까.」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배 속이 간질거리고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왕세녀일 때도 나를 감춰야 했다. 마력이 없는 만큼 완벽해야 했고,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살로메디안은 내 본모습을 본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런 날 보기 좋다고 해준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손을 맞잡을 때의 떨림과 물씬 밀려오는 체취의 아찔함, 머리를 쓰다듬을 때 느껴지던 행복 같은 것들.

그는 얼마나 많은 처음을 경험하게 해줄까. 기대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숨어있던 불안이 고개를 내밀었다.

‘진짜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널 버릴 거야. 마신의 아내가 될 여자가 또 있을진 모르겠지만.’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됐다.

행동이나 말투가 좀 거칠긴 해도 살로메디안은 다정한 남자였다.

그가 마신이라면 나는 남편 잡아먹는 마녀 아닌가?

살로메디안을 대신해 변명하는 날 발견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받을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쏠리는 마음을 추스르기 어려웠다.

마신의 숲에서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까마득한 두통이 찾아왔다.

정과 망치로 두개골을 깨고 그 안을 칼로 쑤시는 듯한 통증이었다.

이것도 마도구 부작용이겠지?

테레사를 향한 원망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살로메디안은 내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길 바랐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려면 새까맣게 지워진 기억 속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부터 알아내야 했다.

* * *

살로메디안은 식탁 앞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었다.

구석 자리였지만 넓은 식당 안에서 그 혼자만 돋보였다.

밤하늘을 밝히는 샛별처럼 빛나서 보지 않으려 해도 절로 시선이 가는 극한의 아름다움.

저 얼굴을 보고도 홀리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시장할 텐데 식사부터 하지.”

살로메디안이 맞은편 의자를 권했다. 식탁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가득했다.

우리 쪽으로 쏟아지는 시선을 의식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각하. 너무 눈에 띄십니다. 후드를 쓰셨어야지요.”

“내가 아니라 그대를 보고 있는데?”

“아니요. 각하를 보고 있습니다.”

내가 단호하게 못 박았다.

살로메디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대는 자신에 대해서는 정말 모르는군.”

주제 파악을 못 한다는 뜻인가? 임시 공작부인 실격?

내가 바로 표정을 굳혔다.

“시정하겠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말씀해주시면 고치겠습니다.”

“틈만 나면 반성하는 것부터 고치시지?”

정곡을 찔려 순간 움찔했다.

살로메디안이 포크를 휘휘 돌리며 말했다.

“다나까 말투도 고치는 게 좋겠군. 전쟁터에 부관이랑 있는 것 같아 불편해.”

딱딱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군인 같다니…….

어색해서 손발이 오그라들었지만, 최대한 부드럽게 물어봤다.

“이, 이렇게 말하면 안 불편하실까요?”

살로메디안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것만으로 1층 식당 전체가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좋아. 말투를 바꾸는 것. 그게 두 번째 조건이다.”

“하오나…….”

“왜? 계약을 깨겠다는 건가?”

“그건 아니지만.”

“그럼 무조건 바꿔.”

살로메디안은 막무가내였다. 나는 진심으로 볼멘소리를 냈다.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가 없잖아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아. 수고했어.”

예법을 거스를 만큼 솔직했는데 혼나기는커녕 칭찬을?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남자였다.

약간은 솔직해도 된다면, 딱딱한 말투 때문에 그가 불편하다면…… 이렇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책에서만 봤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용기를 끌어모았다.

내 뺨이 발그레 달아올라 있었다.

“각하 말고, 다른 호칭으로 불러도 되겠습니까?”

“예를 들면?”

기다렸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되물었다.

반짝거리는 그의 푸른 눈을 보며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좀 더 부드럽고 친밀한 호칭이 있지 않을까 해서요. 진짜 부부처럼 보여야 하기도 하고.”

“그대와 나는 가짜 부부란 말인가?”

살로메디안이 삐딱하게 고개를 숙였다. 눈빛도 사나워졌다.

하여간 종잡을 수 없는 남자라니까.

“진짜 부부긴 하죠. 계약이 얽힌 관계이긴 하지만요.”

“그래서 날 뭐라 부를 셈인가?”

“이를테면 이름을 줄여 부른다든지…….”

우물쭈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실망했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눈썹을 찌푸렸다.

“고작 애칭 같은 것 말인가?”

나도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애칭은 친우와 가족에게만 허락하는 특별한 이름 아닙니까?”

끝까지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지만, 돌아가신 어머니도 날 애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이상한 부분에서 고집스러운 분이셨다.

덕분에 나는 누구에게도 애칭으로 불려본 적이 없었다.

언제 이혼할지 모르는 남편에게 첫 애칭을 허락한 건데, ‘고작’이라니.

“그대가 ‘여보’나 ‘자기’,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할 줄 알았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살로메디안이 짓궂은 미소를 머금었다.

“앞으로도 쭉 각하로 가겠습니다!”

얼굴이 새빨개진 상태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놀리지 않을 테니까 앉아.”

“놀린다는 자각은 있으시니 다행입니다. 앞으로 조심해 주십시오.”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그대의 반응이 몹시 재미있거든, 시아.”

살로메디안의 눈매가 유선형으로 휘었다.

흠칫, 감전이라도 된 사람처럼 온몸이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시아… 요?”

“빨리 발음하면 샤가 되는군. 귀엽지 않나?”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생전 처음 불린 애칭이 가슴을 온통 헝클어 놓았다.

열감이 훅 끼치며 손끝이 달달 떨렸다.

사탕을 입 안 가득 물고 있는 것처럼 달콤한 여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시아.

잇새를 스치는 사랑스러운 애칭이 폐왕녀, 재앙, 저주받은 계집아이, 마녀로 불리던 과거를 씻겨내는 듯했다.

“각하를 살롬… 이라 불러도 될까요?”

머뭇거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살로메디안이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사… 살롬?”

“아쿠아로드에서는 달맞이꽃을 살롬이라고 불러요.”

“달… 달맞이꽃?”

이번에도 살로메디안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황당함을 넘어 두통마저 느끼는 듯 커다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정말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엄청 고민한 건데.

그와 결혼한 직후부터.

“각하의 머릿결과 똑같은 백금색 꽃이에요. 제가 본 꽃 중에 가장 아름다운… 꽃이기도 하고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설명을 이었다.

날 바라보는 살로메디안의 낯빛이 빠르게 바뀌었다.

“꽃이라, 꽃이라니…….”

넋이 빠져 중얼거리던 그가 모든 걸 내려놓은 듯 눈을 감았다.

“원한다면 그렇게 불러도 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허락하는 애칭일 테니까.”

“제가 각하의 애칭을 부른 첫 번째 사람이라고요?”

“그게 뭐 특별한 일인가?”

“저도 각하께 처음을 드리고 싶어서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살로메디안의 눈썹이 크게 휘어 올라갔다.

“처음?”

“각하께서 제게 여러 가지 것들을 처음 겪게 해주셨거든요. 애칭이나 신…… 체 접촉 같은.”

누군가와 손을 잡고 포옹하고, 안겨지고, 이마 키스까지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게 싫지 않을 줄은, 앞으로가 더 기대될 줄은 또 어떻게 알았겠는가.

“시아.”

살로메디안이 내게 손을 뻗었다.

얼굴을 만지나 싶었는데, 잠시 멈칫한 손이 내 머릿결을 가볍게 쥐었다.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떨고 있는 것은 나일까, 아니면 그일까.

어쩌면 우리 둘 다일지도 몰랐다.

내가 놀랄까 봐 손길조차 조심하는 살로메디안. 서로 애칭을 지어주며 툭탁거리는 시간.

이 모든 것이 한여름 밤 꿈 같았다.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고.

“그대는 내 첫 번째 아내다. 그대와 하는 모든 것이 처음이야.”

“살롬은 제 세 번째 남편이지만, 저도 모든 게 처음이에요.”

불퉁하게 답했다. 살로메디안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잘 알고 있다. 그대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별로 없지.”

“살롬.”

“그건 너만 부를 수 있는 이름이다, 시아.”

살로메디안이 내 머릿결을 입술로 가져갔다.

그 입술이 흑단 같은 내 머리카락에 키스했다.

살갗이 닿은 것도 아닌데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듯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쿵쿵 날뛰는 심장 탓에 이성을 붙들고 있기도 힘겨웠다. 나도 그의 머릿결을 만져보고 싶었다.

몇 번 손을 움찔거렸지만 끝내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저 숨을 멈추고 살로메디안의 입술을 바라볼 뿐.

우리를 둘러싼 공기가 핑크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감탄 섞인 수런거림이 여관 곳곳에서 들려왔다.

“왜 천사님들이 보이지? 꿈을 꾸는 것인가?”

“그 꿈…… 나도 꾸는 것 같은데? 세상에 저렇게 생긴 사람도 있나?”

“사람 같지 않게 예쁜 커플이구먼. 한동안 남편 얼굴 못 보겠어.”

“나도 마누라 얼굴 오랫동안 못 볼 듯싶으이.”

그때 여관 문이 거칠게 열리고 칼과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제국 기사단이다!”

“황실 근위대 아니야?”

경악에 찬 비명과 함께 투숙객들이 흩어졌다.

불 뿜는 황금용은 크로티무스 제국의 상징이었다.

황금용을 가슴에 새길 수 있는 기사도 황제를 측근에서 보필하는 황실 근위대뿐이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 살로메디안에게 물었다.

“무슨 일일까요?”

“매우 짜증 나고, 몹시 귀찮은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 * *

살로메디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불꽃처럼 선명한 적발을 가진 남자가 등장했다.

살로메디안과 비슷할 정도로 큰 키에, 전신에서 기품과 위엄이 자연스레 배어 나오는 20대 남자였다.

그 옆엔 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미소녀가 서 있었다.

짙은 연두색 머리카락을 높이 틀어 올린 소녀는 못마땅하다는 투로 여관을 훑어보았다.

어쩐지 낯설지 않은 외모였다.

누굴까? 보통 신분은 아닐 것 같은데.

천천히 탐색하고 있는데 적발의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내 앞에서 잠시 멈칫한 그가 살로메디안을 향해 묵례했다.

“숙부님. 여기 계셨군요.”

이 세상에서 살로메디안을 숙부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크로티무스 황제뿐이었다.

이 사람이 제국 제2 전성기를 이끈다는 젊은 황제?!

나는 화들짝 놀라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하려 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하지만 살로메디안에게 팔이 잡히는 바람에 무릎은 반쯤 굽히지도 못했다.

“아이시아 님이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네이선 크로티무스라고 합니다.”

황제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네이선이 정중하게 악수를 청했다.

그 손을 맞잡으려는데 이번에도 살로메디안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곤 황제에게 쏘아 물었다.

“네가 동네 백수냐? 여기까지 왜 왔어? 성가시게.”

너무 무례한 것 아닌가요? 조카라도 황제잖아요?

숨을 집어삼키는데 네이선이 배시시 웃으며 내민 손을 거뒀다.

살로메디안의 무례에 익숙한 모양이었다.

“숙부님이 혼인을 하셨는데 제가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마물 새가 죽었기 때문이겠지.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없게 됐으니까 감시하러 온 거고.”

살로메디안이 냉소했다.

그 마물 새가 내가 죽인 새는 아니겠지? 설마…… 아니어야 하는데…….

“겸사겸사 나온 겁니다, 숙부님.”

“바바라는 왜 달고 왔어?”

살로메디안의 시선이 연두색 머리칼을 가진 소녀에게 닿았다.

바바라라 불린 소녀가 당돌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각하를 잡아 족쳐야 한다고 간언한 사람이 저거든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황제에게 성가시다고 말하는 살로메디안이나, 살로메디안을 잡아 족친다는 소녀나 아찔하긴 마찬가지였다.

내가 제국의 신분제를 잘못 이해한 걸까? 아니면 이 사람들이 특이한 걸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는데 바바라가 살로메디안을 압박했다.

“제가 출장 간 틈에 혼인하셨다고요?”

“그래.”

“상대가 아쿠아로드 왕녀님이시라고요? 그것도 5년 전에 왕가의 이름을 빼앗긴?”

“정보가 빠르군.”

“각하, 진짜 미치셨어요?”

바바라의 말이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내 가슴을 찔렀다.

약소국의 폐왕녀가 제국 황족이 되는 건 말도 안 되지. 화를 낼 만해. 날 받아들여 준 빈센트 경이 특이한 거야.

빈센트를 떠올리자마자, 바바라가 왜 낯익었는지 알 것 같았다.

싱그러운 연두색 머리, 날렵한 눈매가 똑 닮아 있었다.

“둘이 인사부터 하지. 이쪽은 내 집사 바바라. 바바라, 여긴 내 아내 아이시아. 참고로 바바라는 25살이야.”

피곤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살로메디안이 소개했다.

15살 정도인 줄 알았는데 25살이라니! 키도 엄청 조그맣잖아? 나보다 언니라니 말도 안 돼……!

진짜 25살이라고 해도 공작 가문의 집사가 되기엔 지나치게 어린 나이였다.

무척 놀랐지만 내 얼굴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가오자마자 그림 같은 무표정으로 돌아온 탓이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아이시아입니다.”

바바라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윗사람이 먼저 말을 거는 것이 예법이었으니까.

“공작 각하를 모시는 바바라 윗스입니다.”

“빈센트 님의 누나시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동생이 아니라 누나라는 것이 어색했다.

바바라의 은회색 눈동자에 감탄이 서렸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각하의 성의 없는 소개를 듣고도 놀라지 않은 분은 처음이십니다.”

“실은 몹시 놀랐습니다.”

“하나도 티가 안 나시던걸요? 그 미덕을 각하께서도 배우셨으면 좋겠네요.”

바바라가 틈을 놓치지 않고 살로메디안을 쏘아봤다. 그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투덜댔다.

“왜 여기까지 쫓아와서 잔소리냐?”

“황가의 허락도 없이, 예물도 보내지 않고 국혼을 한 분이 할 소리예요?”

“성혼 서약서는 챙겼다.”

“와우, 우리 각하 똑똑하시다! 이럴 줄 아셨나요? 대체 결혼을 뭐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살로메디안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바바라의 목소리가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아이시아 님께 사과는 제대로 하셨어요?!”

“해야 하나?”

“당연히 하셔야죠! 각하 같은 미친노…… 아니, 남자를 신랑으로 맞이해준 은인 같은 분인데!”

바바라는 내가 폐왕녀라는 사실보다 살로메디안의 무례함에 화가 난 것 같았다.

날 정말 은인이라고 생각해주는 건가? 저주받은 폐왕녀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잔잔한 감동을 느끼고 있을 때, 바바라가 숨도 쉬지 않고 살로메디안을 쏘아붙였다.

“금은보화를 바치고 모셔 와도 모자랄 분을 누추한 여관에 묵게 하시고! 각하는 언제나 실망의 끝을 보여주시네요. 예의라고는 파리똥만큼도 모르시고요!”

“시끄럽다, 바바라.”

“시끄러워도 들으세요! 아이시아 님은 세드나 공작령의 마지막 희망이에요. 각하 같은 남자를 받아준 대천사시고요!”

“…….”

“맞선 상대였던 영애들 기억 안 나세요? 각하만 봐도 까무러치던 그분들이요! 치료비 물어준 걸 생각하면, 아까워서 꼭지가 돌아버린다고요!”

바바라의 잔소리가 이어졌지만, 살로메디안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대륙 최강의 남자와 그를 마구 혼내는 미소녀 집사.

살로메디안은 괴로운 것 같았지만,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의 모습은 퍽 흥미로웠다.

“앉아서 말씀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각하도 저도 식사를 못 했습니다.”

차분하지만 냉기가 담긴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바바라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허리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공작부인 앞에서 큰 결례를 저질렀군요. 부디 화를 푸십시오.”

“저는 전혀 화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했지만 내 말투는 내가 들어도 화가 난 사람 같았다.

바바라가 다시 한번 사과했다.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살로메디안과 허물없이 지내지만, 무척 예의 바른 사람인가?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텐데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바바라와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하자 긴장감이 배가됐다.

덕분에 내 표정과 목소리는 오히려 더 냉랭해졌다.

“천만의 말씀을요. 부디 저와도 격의 없이 지내주십시오.”

차가운 얼굴 탓에 비꼬는 말로 들리면 어쩌나 걱정하던 참에, 바바라가 쓴웃음을 머금고 고개 숙였다.

“영광입니다, 공작부인.”

살로메디안만이 그 모습을 보고 풋, 하고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살롬. 윗사람이 면전에서 상대를 비웃으시다니요. 보기 좋지 않습니다.”

‘살롬’이라는 애칭으로 그를 부르자, 바바라와 네이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살로메디안이 낭패란 듯 딱딱한 표정으로 한발 물러섰다.

“……밥부터 먹지.”

동시에 네이선과 바바라의 감탄이 쏟아졌다.

“대단하십니다, 아이시아 님.”

“오오, 존경합니다. 공작부인!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리신 거죠?”

바바라가 두 눈을 반짝이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골치 아픈 맹수를 떠넘기고 싶어 하는 사육사의 눈빛처럼.

살로메디안의 말대로 몹시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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