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50)

5

* * *

퐁. 퐁. 퐁.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는 언제나 듣기 좋았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는 물결의 감촉도, 싱그러운 물 냄새도 좋았다.

어떤 향유를 뿌린 걸까?

숲을 가로지르는 바람처럼 상쾌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역시 목욕이 최고야. 너무 행복해.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목욕물은 따뜻한데 폭 안겨있는 쿠션은 서늘해서 기분이 끝내줬다.

단단하면서도 포근한 이 느낌은 언젠가 경험해본 것 같았다.

방금까지 마신의 숲에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또 꼬여버린 걸까?

끔찍한 두통이 찾아오지 않는 걸 보면 지금은 목욕의 즐거움을 만끽해도 좋을 듯했다.

특히 이 쿠션이 마음에 들었다. 목욕용 쿠션이라니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의아함보다 만족감이 더 컸다.

쿠션을 어루만지며 내가 중얼거렸다.

“맨날 이렇게 목욕하고 싶다.”

“…….”

“매끈하면서도 탄성이 느껴지는 감촉도, 묵직한 무게감도, 온몸을 감싸는 크기도. 모든 게 완벽해.”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기 전까지 나는 완전무결하게 행복했다.

“그렇게 좋은가?”

“!”

“그대가 원하면 언제든지 같이 목욕해주지.”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반짝 떠졌다. 내 입에서 반사적으로 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살로메디안?”

“아이시아.”

진짜 살로메디안이 내 이름을 불렀다. 욕조 안에서 내 등을 꼭 끌어안은 채.

어쩐지 목소리가 너무 가깝더라니! 또 같이 목욕하고 있잖아?!

입 밖으로 튀어 나갈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동그랗게 뜬 붉은 눈이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일까?

10명이 동시에 들어가도 좋을 법한 대형 욕조도, 창밖으로 정원이 보이는 욕실도 낯설기 그지없었다.

방황하던 내 눈동자가 다시 살로메디안을 향했다.

꼴깍.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그는 이번에도 상반신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왜 자꾸 옷을 벗는 거야? 목욕 중이니 당연한 걸까?

섬세하면서도 강인한 근육에 뺨을 붉게 물들었다.

하마터면 내가 만지작거렸던 가슴 근육을 따라 빨래판 같은 복근 아래, 배꼽 밑까지 시선을 떨어뜨릴 뻔했다.

으아앗! 두 손으로 눈을 가린 내가 비명을 삼켰다.

다행히 그는 바지를 입은 채였고, 내 몸도 리넨 천으로 돌돌 말려 있었다.

“각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정신도 돌아오고, 목청도 돌아온 것 같아서 기쁘다.”

살로메디안이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대꾸했다.

“우리가 왜 같이 목욕 중인지 설명해주세요!”

나는 온몸이 달아올라 미치겠는데 그는 태연자약했다.

“그대는 열흘 만에 깨어났다.”

“열흘이요?”

“감각을 자극해야 의식이 돌아온다고 들었다. 그대를 자극하는데 목욕 이상의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내가 틀렸는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정답이었다.

내 감각을 자극하는 데 목욕보다 좋은 건 없을 테니까.

정말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네. 혼잣말을 들었다는 게 사실인가 봐.

나는 이 사람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데.

어쩐지 억울한 마음이 솟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굳이 같이 목욕할 필요는 없지 않았습니까? 욕조에 담가두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텐데요.”

그것도 꼭 끌어안고요. 무의식중에 살로메디안을 더듬은 것이 민망해서 입술이 뾰로통해졌다.

“그대가 익사하는 걸 구경하라고?”

살로메디안이 삐딱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 노고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불만인 모양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짐 내놓으라는 격이로군.”

“도와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신세를 졌습니다.”

리넨 천이 흘러내리지 않게 단단히 말아 쥐고 머리를 숙였다.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했는데 살로메디안의 눈썹이 불쾌하다는 듯 휘어 올라갔다.

“내 아내는 참으로 다정하군.”

말투가 꼬여 있었다. 이 남자 왜 화가 난 거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대가 쓰러지고 나서 내가 얼마나…….”

말을 하다 말고 살로메디안이 입을 다물었다. 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서 미간을 좁혔다.

“저 때문에 곤란한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니. 나는 아주 잘 먹고 잘살았다!”

그 말을 끝으로 살로메디안이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에 젖은 바지가 하반신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당연히 온몸의 굴곡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탄탄하고 탱글탱글한 엉덩이와 강인하게 쭉 뻗은 허벅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근육들…….

가라앉은 줄만 알았던 열기가 확 솟구쳤다.

내가 미쳤나 봐! 남자 엉덩이를 훔쳐보다니!

제멋대로 움직이는 얼굴 근육을 꾹꾹 누르며 심호흡했다.

그렇지 않으면 무표정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혼자 가버릴 줄 알았던 살로메디안이 내게 손을 뻗었다.

“어지럽다. 천천히 일어나라.”

상반신도 하반신 못지않았다. 얼굴은 더더욱 그랬다.

물에 젖은 살로메디안은 거칠고도 날렵했다. 알몸보다 더 선정적이었다.

시험에 드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푹 숙였다.

“쯧. 이러다 또 쓰러지겠군.”

살로메디안이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꺅!”

이번엔 비명을 삼킬 수 없었다.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몸이 닿았다. 기묘한 불꽃이 호흡을 잠식했다.

향유인 줄 알았던 숲 냄새는 그의 체취였다.

젖은 머리칼과 매끄러운 근육 위를 구르는 물방울.

이 모든 것이 아찔한 현기증이 되었다. 왕세녀일 때도 누군가와 이렇게 자주 스킨십을 나누어 본 적은 없었다.

구역질이 안 나는 것도 여전히 신기했다.

그저 미친 듯 뛰는 심장이 덜컥 멈춰 설까 봐 염려스러웠다.

“……내려주십시오.”

“당분간 무리하지 마라. 바닥 미끄러우니 조심하고.”

살로메디안이 경고와 함께 욕조 밖으로 날 내려놓았다.

아주 연약하고 소중한 무언가를 다루듯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테레사를 고문하라고 했을 때는 진짜 마신 같았는데 지금은 철부지 손녀를 지켜보는 할아버지 같았다.

그 차이가 낯설기도 하고, 문득 뭉클하기도 했다.

왜 나한테 잘해주는 거지? 결혼해서? 아니면 내가 그의 심장을 가지고 있어서?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숨을 골랐다. 호흡이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이 파우더룸에서 커다란 목욕용 수건을 가져와 내 머리 위에 덮어씌웠다.

수건을 뒤집어쓴 내가 좌우로 꿈틀거렸다.

“각하. 앞이 안 보입니다만?”

“상관없다. 그대는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움직이지 마라. 성가시다.”

살로메디안이 수건으로 내 머릿결의 물기를 닦아냈다. 누군가의 시중을 들기엔 어리숙하고 투박한 손동작이었다.

천하의 세드나 공작이 목욕 시중 경험이 있을 리가 없지. 성가시다면서 왜 직접 해주는 거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솜사탕처럼 몽실몽실하고 달콤한 맛이 나는 분홍색 안개가 가슴을 채우는 것 같았다.

가만히 서 있기도, 살로메디안의 손길을 느끼기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이상한 건, 이 시간이 계속되기를 바란다는 거였다.

살로메디안이 부드러운 중저음으로 말했다.

“그대는 독을 맞고 쓰러졌다. 마력 운용을 할 줄도 모르는 상태에서 마도구 부작용까지 겹쳤고.”

“저는 마력이 없습니다.”

“아주 크다. 온 대륙을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살로메디안의 말에 숨을 집어삼켰다. 내게 그 정도로 강한 힘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수건을 걷으며 한 번 더 부정했다.

“뭔가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불기둥을 만든 걸 잊은 건가? 그건 마력 폭주였다.”

설마 했는데, 마력이었을 줄이야.

아득해진 머리를 짚었다.

“하지만 신전에서도, 왕궁에서도 저에게는 마력이 없다고 했습니다.”

“보지 못한 것이다. 아쿠아로드는 물의 정령이 다스리는 나라다. 그대는 누구보다 강한 불의 마력을 가졌고.”

“진심이십니까?”

“농담으로 들리는가?”

아니요. 하지만 변덕스러워 보입니다만.

그렇게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살로메디안이 말을 이었다.

“아쿠아로드의 왕족은 물의 축복 속에서 태어난다지? 태어난 직후 성수에 몸을 씻기고.”

“그렇습니다.”

“그대의 마력은 생존을 위해 숨바꼭질을 택한 것 같다. 혹시 차가운 목욕을 자주 했나?”

“신께 올리는 기도이기 때문에 찬물로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귀족들도 찬물로 씻는다고?”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물론 귀족들은 한여름에도 따뜻한 물을 사용하지요.”

하지만 독실한 아쿠엘교 신자였던 어머니 덕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찬물 목욕을 자주 했었다.

폐왕녀가 된 이후에 더운물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기도란 핑계가 없었다면 씻을 기회도 빼앗겼을 터였다.

“각하. 정말 제게 불의 마력이 있습니까?”

“밤하늘보다 검은 머릿결, 불꽃처럼 새빨간 눈동자. 모두가 불의 정령 콰이엘의 상징이다. 성화 속 등장하는 불의 천사라 해도 믿을 정도지.”

살로메디안의 시선이 내 머리카락을 지나 눈동자에 고정되었다.

그가 바라보는 곳마다 열꽃이 피었다.

그의 푸른 눈에는 감탄과 호기심 이상의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게 뭔지 알 수 없지만, 자꾸만 입이 마르고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불의 성화는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이교도들은 처형됩니다.”

“아쿠아로드에 물의 마력을 가진 자들만 우글거리는 게 이해되는군. 나라 전체가 물 속성이라니, 악취미야.”

“그렇게 이상한 일입니까?”

“보통은 반반이다. 하지만 불 속성 마력을 가진 자들을 제거하고, 물 속성끼리만 결혼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만약 제가 불 속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 알려졌다면…….”

“당연히 죽임을 당했겠지.”

살로메디안이 딱 잘라 말했다.

형용할 수 없는 억울함이 차올랐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달랐던 것뿐인데. 잘못도 없이 살해당해야 한다니.

“그대의 삶은 끊임없는 불과 물의 충돌이었다. 심장 발작도 그 때문이겠지.”

“발작과도 관련이 있다고요?”

“마력은 심장에 맺히는 거니까.”

살로메디안이 손가락으로 내 쇄골 아래를 짚었다.

짜르르한 전류가 그의 손가락부터 시작되어 온몸을 휘감았다.

약하디약한 심장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안에 마력이 감추어졌을 줄이야.

귀에 못 박히게 들어왔던 말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마력도 없는 왕녀가 태어나다니! 아쿠아로드는 끝이다.」

「흑발의 적안은 멸망의 징조입니다. 저주받은 것이 틀림없어요. 죽여야 해요!」

「어차피 쓸모도 없잖아요. 왜 안 죽이고 살려놓는 거예요?」

왕세녀였을 때도 마력이 없다는 이유로 은근히 멸시당했다.

견습 기사보다 빠르게 검술을 익혀도, 학자들도 풀지 못한 난제를 해결해도 평가는 언제나 똑같았다.

왕가의 상징인 푸른 머리칼을 갖지 못한 반편이. 마력조차 없는 지진아.

가짜 문서 한 장에 신분을 박탈당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테레사의 천한 출신을 못마땅해하는 귀족들도 적통 왕녀인 날 감싸주지 않았다.

마신의 숲에 버려진 것도 그 때문이었을까?

내가 살로메디안을 올려다봤다.

“기억 일부가 돌아왔습니다.”

“정말인가?”

“마신의 숲에서 각하를 뵈었습니다. 마물 새를 죽인 직후 심장 발작이 있었고요.”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에 빛이 스몄다. 희망에 들뜬 순수한 기쁨이었다.

“그 뒤의 일도 기억이 나는가?”

“안타깝게도 거기까지입니다.”

“아…….”

빛이 꺼지고 빈자리에 실망이 담겼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살로메디안은 이토록 아쉬워하는 것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한참 망설이다 물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실 수는 없습니까?”

하지만 살로메디안은 말없이 입술을 씹고 있었다.

기나긴 침묵 끝에 그가 내놓은 대답은 이랬다.

“그대가 기억하도록 해.”

“각하?”

“그대가 원한대로 날 공격한 아쿠아로드 기사와 왕족을 처형하지 않았다. 제국에도 알리지 않았지.”

“그 점은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조건을 따르겠다고 한 것도 기억하는가?”

심장을 뺏는 것보다는 수월할 조건.

입속에 고인 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대가 우리의 첫 만남을 기억하는 것. 이것이 조건이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남자가 씹어뱉듯 말했다.

첫사랑에게 배반당한 소년처럼 슬픈 눈동자로.

* * *

다음날 세드나 공작령으로 떠나기로 했다. 내가 열흘이나 누워있는 바람에 일정이 밀렸다고 했다.

내 짐은 많지 않았다.

옷감이나 보석류도 구색을 갖추기 위해 대충 준비한 물건들로, 시골 귀족 수준에도 못 미치는 하급품이었다.

“서두르면 사흘 정도 걸릴 것이다. 괜찮겠나?”

살로메디안의 물음에 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일정에 방해되지 않겠습니다.”

내 모습을 빤히 내려다보는 살로메디안이 미간을 좁혔다.

“그대는 욕실 안에서의 표정과 욕실 밖에서 표정이 매우 다르다는 걸 아는가?”

“제가 아니라, 누구나 다를 겁니다.”

“…….”

“애초에 욕실 안에서의 표정을 타인에게 보여줄 생각도 없었고요.”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살로메디안이 픽 웃었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텐데.”

순간 귀를 의심했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실금이 갔다.

“또 저랑 목욕을 하시겠다고요?”

마부와 기사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불만인가?”

“각하!”

“그대가 먼저 부탁할 수도 있지.”

그의 가슴 근육을 만지작댄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가 어깨를 바들바들 떨면서 장담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

미리 알면 재미없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요염한 미소를 머금었다.

의식도 돌아오고 마력이 폭주하지도 않는데 왜 같이 목욕을 한단 말인가?

미래의 기억에서도 살로메디안은 온천욕을 하던 내게 다가왔었다.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느냐면서.

문득, 잊었던 중요한 질문이 떠올랐다.

“각하. 긴히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날 돌아본 살로메디안이 움찔했다.

“표정이 왜 이렇게 살벌하지? 결투 신청하려는 건가?”

“혹시 공작령에 온천이 있습니까?”

“대답에 따라 날 죽이기라도 할 것 같은데?”

“말씀해 주십시오. 제겐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기대심으로 부푼 속마음을 감출수록 얼굴은 차갑게 굳어 갔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살로메디안이 천사처럼 아름답고 마신처럼 위험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물론 있다. 사시사철 뜨거운 물이 솟아나오는.”

그 말에 내가 우뚝 멈춰 섰다. 망가진 태엽인형처럼.

살로메디안이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갑자기 왜 그러나?”

“서둘러야겠습니다.”

“?”

“밤낮없이 달리면 이틀 안에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루 반나절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마음이 급해서 대답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온천이 있는 곳이라니! 그곳은 천국, 그 이상이었다.

살로메디안이 짐짓 못마땅한 투로 물었다.

“나와 결혼하고 싶었던 이유가 고작 온천인가?”

고작 온천이라니?

나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선언했다.

“각하께서는 제 이상형이십니다.”

내 얼굴은 차갑게 굳어있었지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동자가 어리둥절, 잘게 떨렸다.

“……이상형?”

“네. 평생 각하 같은 분을 기다려왔습니다.”

내가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목욕을 좋아하는 내게 온천은 신의 선물이자, 천국 그 자체였다.

세상에 온천을 모두 가진 남자가 있었다니!

진작 알았다면 내 발로 찾아가 결혼해달라고 빌었을 거였다.

살인광이 어쩌고저째? 피로 목욕하는 마신이 뭐 어쨌다고?

아무래도 상관없어. 온천이 있으니까!

정말 온천이 있는 미래로 갈 수 있다니.

벅찬 희망이 차올랐다.

공작령까지 폴짝폴짝 뛰어갈 수 있을 듯했다. 아니, 기어서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두르십시오! 일정이 밀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마차 문 앞에서 재촉했다.

꾸물거리면 버리고 가겠다는 속내를 읽었는지 살로메디안이 물었다.

“짐이 너무 적던데. 빠짐없이 챙긴 것 맞나?”

문득 이성이 돌아왔다.

온천도 온천이지만,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었다.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군요.”

“뭘 잊은 건가?”

“도둑이 장물도 없이 떠날 수야 없지요.”

내 말에 살로메디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대도 꽤 음흉하군.”

“각하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금방 뛰어넘을 것 같다.”

날 에스코트하기 위해 살로메디안이 손을 내밀었다.

몇 번이나 맞잡은 손이었지만 다시금 가슴이 뛰었다.

“각하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잠시 귀 좀…….”

내 속삭임에 살로메디안의 눈빛이 변했다.

“나보고 그런 연기를 하라고?”

“아무래도 어렵겠습니까?”

“……흠. 해보겠다.”

“감사합니다. 각하.”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날 바라보며 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흉계는 이미 그대가 나보다 한 수 위다.”

* * *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느냐?! 너 하나 때문에 왕국이 멸망할 뻔했다, 테레사!”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국왕이 왕좌 팔걸이를 내려쳤다. 열 손가락에 보석 반지를 낀 왕비가 속살거렸다.

“그만 용서해주세요, 폐하. 테레사도 반성하고 있잖아요?”

“세드나 공작이 제국에 알렸다면 어쩔 뻔했소? 나도 이 왕국도 끝장이었을 것이오!”

“어휴. 좋게 끝난 일을 왜 들추고 그러세요?”

“좋게는 무슨! 아이시아가 공작을 말리지 않았다면 큰 사달이 났겠지!”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국왕이 목소리를 높였다.

대낮부터 취해있는 국왕을 보며 테레사가 입술을 짓깨물었다.

‘내가 세드나 공작을 죽이려다가 실패했고, 아이시아 그년이 무마했다고 소문이 났어. 밥버러지 같은 기사 놈들 때문에…….’

테레사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한 기사들이 아이시아의 공을 떠들고 다녔다.

아쿠아로드의 은인이라는 둥, 마신을 조련하는 공작부인이라는 둥 황당무계한 말이 대부분이었다.

문제는 그 말을 믿는 얼간이들이 많다는 거였다.

‘저주의 씨앗이라며 피하던 것들이……! 약소국의 왕세녀보다는 제국 황족에게 붙겠다는 건가?!’

아이시아만 생각하면 속이 뒤틀렸다.

그저 타고난 핏줄 덕에 아무런 능력도 없이 아이시아 손엔 늘 제일 훌륭하고 귀한 것만 쥐어졌다.

대귀족 출신 왕비가 낳은 왕세녀와 고급 창녀 밑에서 태어난 테레사.

고작 한 살 차이인데도 대우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불리는 호칭도, 입는 옷도, 먹는 것도, 받는 교육도 달랐다.

정말 화가 나는 건, 아이시아는 테레사 앞에서 늘 착한 척을 했다.

「우리 둘만 있을 때는 그냥 언니라고 불러. 왕세녀 전하는 너무 딱딱하잖아?」

「너랑 친구 같은 자매가 되고 싶어. 내가 안 쓰는 보석 세트가 있는데, 괜찮으면 가져가. 마음에 안 들면 새것 사줄까?」

친절하고 우아한 우리 왕녀님.

아이시아는 거지에게 적선하듯 테레사를 보살피면서 제 우위를 확인하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환하게 웃지 못했겠지.

창녀의 딸이라며 자신을 벌레 취급하던 왕궁의 사용인들이 아이시아를 떠받드는 모습을 보면 이가 득득 갈렸다.

마력은 내가 훨씬 강한데. 나는 아이시아도 갖지 못한 왕가의 푸른 머리칼을 가졌는데.

테레사는 국왕을 아버지라 부르지도 못했다. 테레사를 낳고도 모친은 후궁조차 되지 못했다.

‘하지만 운명은 내 편이었지.’

테레사는 예언서를 손에 넣던 그 날을 잊지 못했다.

테레사가 매수한 마도사가 감쪽같이 예언서를 고쳤고, 문서 한 장으로 아이시아의 모든 것을 빼앗아 올 수 있었다.

왕세녀 전하.

그렇게 불릴 때마다 온 세상이 발아래 놓인 듯 환희가 차올랐다.

물론 14년 동안 쌓인 설움이 쉽게 사라지진 않았다.

그래서 틈틈이 아이시아를 가지고 놀았다.

아이시아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를 때마다 상처받은 어린 시절을 위로받는 듯했다.

표정을 잃고 마리오네트처럼 변해가는 아이시아도 보기 좋았다.

당당하고, 우아하고, 친절한 아이시아는 사라졌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니까.

너무 오랫동안 재미를 본 걸까.

길들였다고 생각한 개가 발목을 깨물 줄은 몰랐다.

‘마신의 숲에서 해치워야 했는데…….’

테레사는 아주 오래전부터 아이시아를 죽이고 싶었다.

그때마다 역사학자들이 테레사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시아를 살려두어야 한다는 거였다.

고작 썩어가는 문서 한 장 때문에.

짜증스럽다는 듯 입술을 씹는 테레사를 향해 국왕이 분통을 터뜨렸다.

“왕세녀라고 너무 오냐오냐했구나! 마도구 관리를 맡긴 내 잘못이다. 비고의 열쇠를 반납해라!”

와인을 얼마나 마셨는지 국왕의 입술은 지저분한 보랏빛으로 물들어있었다.

국왕의 눈치를 살피며 왕비가 비굴하게 웃었다.

“테레사가 책임감이 강하고 호기심이 많아서 그래요. 폐하께서 너그러이 용서해주세요.”

“잔혹하고 폭력적이란 말은 못 들었소? 내 귀엔 그런 소리만 들리던데?”

“폐하. 말씀이 지나치세요! 하나뿐인 우리 딸이잖아요!”

“흥. 이번에 날 죽일 뻔한 건 테레사지. 내 목숨을 구한 건 아이시아고.”

또 아이시아였다. 삐, 하고 귀에서 높은 이명이 들렸다.

‘중요한 업무는 나한테 떠넘기고 창녀들이랑 뒹구는 술주정뱅이 주제에……!’

테레사가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왕세녀라지만 테레사에겐 힘을 실어줄 외척이 없었다.

귀족들은 창녀 출신 왕비는 말도 안 된다며 틈만 나면 새 왕비를 책봉하라고 떠들었다.

국왕이 변덕을 부린다면… 자신도, 어머니도 무사할 수 없었다.

절대로 밝혀져서는 안 될 ‘비밀’이 탄로 날 수도 있었다.

다시 시궁창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자 온몸의 털이 거꾸로 솟았다.

‘이번엔 내가 너무 서툴렀어. 실패해도 공작의 기억을 없애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다음엔 절대 이런 실수하지 않아.’

세드나 공작은 상상보다 훨씬 더 강한 남자였다.

그런 남자를 제 손으로 아이시아에게 갖다 바친 꼴이라니!

잡초처럼 끈질긴 년. 억세게 운 좋은 년.

이번에도 아이시아는 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륙을 호령하는 제국의 황족이 되었다.

강하고 아름다우며 부유한 남편까지 생겼다.

나는 죽음을 무릅쓰고 사기까지 쳐 가며 코딱지만 한 나라의 왕세녀가 됐는데…….

내 약혼자 후보는 개밥그릇처럼 생긴 아쿠아로드 얼간이들뿐인데!

원통하고 분해서 눈물이 밀려왔다. 아이시아가 제 위에서 환하게 웃는 꼴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다시 내 밑으로 끌고 올 거야. 이번엔 더 철저히 짓밟아주마, 아이시아!’

테레사가 풀썩 주저앉으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모두 제 잘못이에요. 아바마마! 부디 저를 벌해주세요!”

“오오. 가엾은 우리 아가!”

왕비가 프릴이 잔뜩 달린 드레스를 휘날리며 테레사를 껴안았다.

그녀의 눈에도 악어의 눈물이 달려있었다.

“네 잘못은 없단다, 아가. 전부 못난 어미 탓이다!”

“저는 이미 결심을 했어요.”

“결심이라니, 무슨 말이니?”

“세드나 공작을 찾아가 제 목을 바치겠습니다.”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왕비가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것만은 안 된다, 테레사! 차라리 이 어미를 밟고 가렴! 흑흑흑.”

“불효녀를 용서하세요. 어마마마.”

“폐하! 테레사를 말리지 않고 뭐 하세요? 대통을 이을 후계자를 죽게 하실 건가요?”

후계자란 말에 국왕이 눈썹을 찌푸렸다.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투로 국왕이 내뱉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아이시아가 공작을 설득했다고 하니, 두고 볼 일이다.”

국왕이 아이시아를 들먹이자, 왕비의 눈빛이 돌변했다.

“상처받은 애한테 굳이 소금을 뿌리셔야겠어요, 폐하?”

“상처는 내가 받았소. 아이시아가 아니었으면 왕국이 잿더미가 됐을 거란 말이오!”

“그 눈 빨간 애가 그렇게 좋으면 다시 데려오세요! 저주의 씨앗을 후계자로 키워 보시라고요!”

왕비가 앙칼지게 외쳤다. 테레사는 일부러 눈물을 닦지 않은 채 왕비를 말리는 척했다.

“말씀을 삼가세요, 어마마마. 모든 게 제 잘못이에요.”

“네가 뭘 잘못했다고? 왕족에게 수치를 주고, 아쿠아로드를 무시한 건 세드나 공작인데!”

“왕국의 명예를 지키고 싶었던 것뿐이지만……. 황족을 시해하려 했으니 책임을 져야지요. 왕국을 위해서라면요.”

애국심을 강조하자 국왕이 눈빛이 흔들렸다.

“흠흠. 앞으로는 행실을 각별히 조심해라.”

더러운 늙은이. 이 일만 마무리 되면 왕좌에서 끌어내려 주마.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다시는 실망을 안겨 드리지 않을게요!”

테레사가 천진난만한 미소로 대화를 마무리지을 때였다.

“그래서 어떻게 책임질 건데?”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알현실 문이 열렸다.

의전관이 갑작스러운 손님들의 방문을 뒤늦게 알렸다.

“살로메디안 세드나 공작 각하와 아이시아 세드나 공작부인 입장하십니다……!”

* * *

나와 살로메디안을 보는 테레사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국왕은 두려움에, 왕비는 경악에 휩싸여 입을 떼지 못했다.

“급히 떠났다고 들었는데…….”

테레사의 벌레 씹은 표정을 보자, 돌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준다고 한 걸 깜빡 잊어서.”

“뭘 줘?”

“잊었어? 마도구 제작 기법의 반을 넘기기로 했잖아.”

환하게 웃으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내 입꼬리는 위로 길게 찢어질 뿐이었다.

테레사가 반박하기도 전에 국왕이 쇳소리를 질렀다.

“테레사! 이게 무슨 말이냐?!”

“저년이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그런 약속을 했을 리가 없잖아요!”

창백하게 질린 테레사가 항변했다.

잠자코 지켜보던 살로메디안이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감히 사랑스러운 내 아내를 저년이라고 불렀는가?”

‘사랑스러운’을 공들여 발음하는 살로메디안을 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다정한 부부인 척 연기해달라 부탁하기는 했지만, 대놓고 사랑스럽다는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남들 앞에서 허리를 껴안는 행동도 능청맞기 짝이 없었다.

목덜미까지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살로메디안의 불꽃 연기 덕에 내 동요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그가 성난 맹수의 눈으로 테레사를 노려봤다.

“네 머리엔 뇌 대신 스파게티가 들었나? 제국의 황족에게 무례를 범하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거늘. 한 번만 더 허튼 소리하면 혀를 뽑아버리겠다.”

살로메디안의 시선이 부들부들 떠는 테레사에게서 내 쪽으로 옮겨 왔다.

“놀라지는 않았소, 나의 장미 아이시아?”

나의 장미라니. 연기라지만 도가 지나치잖아?

소름이 돋아버린 팔을 문지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웃음이라고 해봤자 어색한 찡그림에 지나지 않았지만.

“괜찮습니다. 테레사의 모욕은 처음이 아니라서요.”

“몹쓸 짓을 많이 당했다고 들었소.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소.”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여자의 목을 베어 결혼 선물로 주고 싶소만. 허락해주겠소?”

여보세요. 그건 선물이 아니라 똥이거든요?

테레사의 목을 결혼 선물로 주겠다는 말에 뒷골이 당겼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을 알기에 더욱 그랬다.

바들바들 떠는 테레사와 국왕 부부를 보며 내가 시치미를 뗐다.

“부질없는 피로 우리의 결혼을 더럽히고 싶지 않습니다.”

“그대의 마음씨는 천사보다 곱소. 아름다운 나의 신부.”

살로메디안은 사랑에 빠진 새신랑 연기에 심취해 있었다.

이 남자, 전공을 잘못 골랐네. 기사가 아니라 광대가 돼야 했을 사람이야.

적당히 하라는 뜻으로 허리를 꼬집었지만, 그의 불꽃 연기는 멈출 줄을 몰랐다.

“아쿠아로드를 불바다로 만들어도 속이 풀리지 않겠지만, 다정한 아내의 뜻에 따라야겠지.”

“감사합니다. 각하.”

“침대에서처럼 이름을 불러주시오, 나의 장미.”

침대라니?! 이건 설정에 없었잖아요?

눈동자를 휘둥그레 뜨자 살로메디안은 내가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샤르르 곱게 접힌 눈매와 가지런하게 드러난 치열.

날 바라보는 눈빛까지도 진짜 사랑에 빠진 남자 같았다.

정말 연기 맞아? 진심 같은데?

연기를 부탁한 나마저도 헛갈릴 정도로 꿀이 뚝뚝 떨어졌다.

덕분에 온몸에 솜털이 바짝 서고,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살로메디안이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왜 가만히 있나? 연기를 하자고 한 건 그대잖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얼음덩어리처럼 굳어있던 내가 겨우 장단을 맞췄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단둘이 있을 때만 해요. 살…… 살로메디안.”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사랑스럽소, 아이시아.”

이름을 불러주어 기쁘다는 듯 그가 내 이마 위에 입술을 올렸다.

쪽, 하고 수줍은 소리가 났다.

뽀뽀까지 하다니! 이런 건 계획에 없었잖아요?

부드럽고 촉촉한 감촉이 살갗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현기증이 핑 돌면서 심장이 얼얼할 정도로 거세게 뛰었다. 반쯤 벌어진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뽀뽀했다는 사실보다, 첫 뽀뽀를 가족 같지도 않은 가족들 앞에서 연기로 했다는 것이 억울했다.

“아, 아프다더니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로구나. 아이시아.”

국왕이 내 눈치를 보며 다정하게 안부를 전했다.

달달한 간지러움은 사라지고 발끝부터 욕지기가 치밀었다.

언제부터 날 걱정했다고. 살이 썩어갈 때도, 맞아 죽기 직전에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아비가.

왕비가 떨떠름하게 덧붙였다.

“너 아플 때 치료 신관들을 엄선해서 보낸 것도 우리였단다. 안 그래요, 폐하?”

예전에도 그랬지.

온갖 고통은 다 느끼고 죽기 직전에 신관을 보내줬잖아. 대단한 선심이라도 쓰듯이.

“귀한 딸이 제국의 황족이 되었는데 그 정도는 당연하지. 아무렴, 그렇고말고.”

귀한 딸이라는 국왕의 말이 지난날의 상처를 더 후벼 팠다.

한편으로는 달라진 내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저주받은 폐왕녀에서 대 제국의 황족이 되었다.

국왕과 왕비가 내 앞에서 설설 기는 것도 전부 살로메디안 때문이었다.

그의 존재가 든든하다는 것과 별개로 가슴 한구석에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내 힘으로 저들을 깔아뭉갤 수 있었다면 더 나았을 텐데.

나는 언제쯤 그런 힘을 가질 수 있을까. 내게 마력이 있다는 것은 사실일까?

“아쿠아로드인들은 무례하기 짝이 없군. 사랑스러운 내 아내는 크로티무스 황족이다. 그대들도 예를 다하도록.”

살로메디안이 불쾌하다는 듯 경고했다.

그가 예의를 운운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제국 황족에 비하면 아쿠아로드 왕족은 촌 동네 영주에 불과했다.

“송구합니다, 각하.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국왕이 비지땀을 훔치며 굽신거렸다. 물론 살로메디안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약속한 물건이나 내놔. 내 아내를 데리고 이 불쾌한 촌동네를 떠나고 싶다.”

“마도구 제작 기법은 우리나라의 생명줄입니다. 테레사가 무슨 약조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는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습니다! 믿어 주세요, 아바마마!”

테레사가 억울하다는 듯 악을 썼다. 그래 봤자 욕만 먹을 뿐이었지만.

“닥쳐라! 모두 네가 자초한 일 아니냐?!”

“아바마마! 저는 우리 왕국을 위해…….”

변명을 늘어놓는 테레사 앞을 내가 가로막았다.

“네가 책임을 지겠다고 했잖아? 내 남편에게 목을 바치겠다며? 밖에서 다 들리던데?”

테레사의 자색 눈동자가 벌겋게 뒤집혔다.

내게 존대를 해야 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지 아래턱을 떨고 있었다.

“……왕국의 기밀을 빼돌리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황족을 암살하려 해놓고, 그냥 아무 일 없이 해 달라고? 우리가 그렇게 호락호락해 보이니?”

“그, 그건…….”

“이걸 주면서 마도구 제작 기법의 절반을 넘긴다고 했잖아. 그래서 용서해준 거고. 이래도 거짓말할래?”

내가 작은 손가방에서 펜 모양의 마도구를 꺼냈다.

내 기억을 앗아간 그 마도구였다. 살로메디안이 테레사의 눈알을 파내려고 했던 물건이기도 했고.

증거를 내밀자, 국왕과 왕비의 낯빛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테레사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비고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는 귀물이거늘! 저것이 왜 공작부인 손에 있는 것이냐, 테레사?!”

“이제 제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폐하?”

복수의 서막이었다. 내 얼굴에 미소다운 미소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테레사, 네가 감히……!”

국왕이 원망을 가득 담아 테레사를 째려봤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믿지 않을 기세였다.

함정에 빠졌다는 걸 눈치챈 테레사도 더는 애걸하지 않았다.

내가 국왕의 망설임에 쐐기를 박았다.

“제작 기법을 줄 수 없다면, 암살 사건에 가담했던 기사들을 모조리 제국으로 끌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동자인 테레사도 함께.”

“그 뒤엔?!”

“운이 좋으면 교수형, 보통이면 참수형이겠지요. 나쁘면 사지를 갈기갈기 찢길 수도 있고요.”

내 입가에 싸늘한 조소가 걸렸다.

파랗게 질린 국왕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아이시아!”

“제 이름을 부르지 마십시오. 우리가 그럴만한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찔끔한 국왕이 서둘러 말투를 바꿨다.

“공…… 공작부인! 꼭 그래야만 하겠소?”

“선택지는 드렸습니다. 최종 결정은 국왕께서 하시지요.”

왕좌에 앉아있던 국왕이 비틀비틀 다가왔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늙은이가 내 아버지란 것이 차마 믿기지 않았다.

증오하지만, 한때는 사랑했던 아버지.

나는 그가 무릎을 꿇고 테레사를 살려달라고 빌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내 예상을 크게 빗나갔다.

짜악!

그가 다짜고짜 테레사의 뺨을 후려쳤다. 왕비가 쇳소리를 질렀다.

“폐하!”

국왕은 멈추지 않고 테레사의 반대편 뺨도 때렸다.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갈 만큼 강한 힘이었다.

짜악!

입가에 붉은 피를 흘리면서도 테레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뺨을 치는 것만으로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국왕이 테레사를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천한 년! 배은망덕한 년! 감히 제국 황족을 시해하려 하다니!”

“…….”

“너 같은 년은 죽어야 한다! 자결해서 죗값을 치르라!”

테레사는 공벌레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쏟아지는 매를 맞았다. 왕비가 딸을 껴안았다.

“제발 고정하세요! 이러다 애 잡겠어요!”

“이년 때문에 재산을 반 이상 잃게 생겼는데 고정하라고?!”

“그래도 폐하의 뒤를 이을 왕세녀잖아요!”

“몸뚱이나 팔던 년이 뭐라 지껄이는 거냐?! 딸년 하나 가르치지 못하고!”

왕비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국왕을 노려보는 테레사의 눈에도 독기가 서렸다.

테레사가 일을 꾸몄다고 해도 국왕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자식과 기사들을 지킬 궁리는 하지 않고, 죄를 떠넘기는 꼴이라니.

저런 수준의 인간에게 아버지라고 잘 보이고 싶었던 내가, 언젠가는 다시 받아들여지길 바랐던 내가 가엾어서 가슴이 미어졌다.

씩씩거리며 주먹을 휘두르던 국왕이 날 향해 말했다.

“테레사와 기사들을 끌고 가십시오.”

“……!”

“다만 이 일을 빌미로 아쿠아로드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해 주십시오.”

국왕이 비굴하게 웃으며 두 손을 마주 비볐다.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는 듯했다.

결국, 그는 딸과 충신들을 포기했다. 고작 돈벌이 수단을 지키기 위해.

말을 잇지 못하는 날 대신해서 살로메디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언제 뽑았는지 모르지만, 그의 손에는 파르라니 벼려진 검이 들려있었다.

“딸 목숨보다 그 마도구가 그렇게나 소중하다는 뜻이냐?”

살로메디안이 국왕의 목덜미에 칼끝을 들이댔다.

누렇게 뜬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국왕이 변명했다.

“딸도 소중하지만…… 왕국의 보물을 지켜야 하기에…….”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건가? 꽤 훌륭한 국왕이로군.”

“크로티무스 제국과 황족님들의 보살핌 덕분이지요.”

“좋다. 네가 바란 대로 자비를 베풀어 주마.”

살로메디안이 그림같은 미소를 머금으며 칼을 내렸다.

“단 한 사람의 목숨만 바치면, 마도구 제작 기법을 요구하지 않겠다. 기사들도, 왕세녀도 살려주지.”

그 말에 국왕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왕비도, 테레사도 깜짝 놀라 살로메디안을 바라봤다.

도대체 뭘 꾸미는 걸까.

그가 쉽게 자비를 베풀 인간이 아니란 것을 아는 나만이 눈썹을 찌푸렸다.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국왕이 무릎을 꿇고 거푸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기뻐하기는 일렀다.

살로메디안이 거뒀던 검을 높이 추어올렸다.

“감사하면 얌전히 목을 내놓아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한 사람이 바로 그대니까.”

살로메디안이 상큼하게 한쪽 눈을 찡끗했다.

마신의 윙크 앞에서 국왕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무릎걸음으로 도망치는 국왕의 뒷모습을 보며 살로메디안이 검을 고쳐 쥐었다.

“살려주십시오! 마도구 제작 기법을 드리겠습니다!”

“싫다. 그냥 네 목만 따 가겠다.”

“반이 아니라, 7할을 드리겠습니다!”

“싫다. 나는 자비로우니까.”

국왕이 뒤늦게 빌어봤지만 살로메디안은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이들을 희생하려 했던 국왕은 살로메디안에게 참수당할 처지에 놓였다.

그가 국왕의 목을 몸통에서 분리하기 직전, 내가 입을 열었다.

“그만 검을 거두어 주십시오.”

“왜 말리는 것이오, 나의 장미?”

아직 안 끝났구나, 다정한 부부 연기…….

낭패한 마음을 감춘 후에 나도 다시 연기를 시작했다.

다행히도 내 얼굴엔 늘 가면 같은 무표정이 씌워져 있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숭고한 결혼을 피로 더럽히고 싶지 않습니다. 살로메디안도 그걸 바라진 않으시겠지요?”

“…….”

“제작 기법의 7할이면 목숨값으로 충분합니다.”

날 빤히 바라보던 살로메디안이 검을 검집에 돌려놓았다.

“그대가 바라는 일이라면.”

살로메디안의 속삭임이 귓가에 닿았다. 와중에도 그윽한 눈빛과 달콤한 체향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이 사람은 왜 쓸데없이 치명적인 거야? 이것도 연기인가?

태연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뺨이 속절없이 붉어졌다.

살로메디안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들어주겠노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단지 그뿐인데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가 대륙 최강의 사내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내 편에 서주는 단 한 사람.

그런 사람이 내게도 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찰 정도로 황홀했다.

기괴한 신음이 들리기 전까지.

“히끄으윽.”

공포에 질린 국왕이 허옇게 눈을 뒤집으며 혼절했다.

죽은 개구리처럼 늘어진 아비를 보면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어차피 내 가족이 아니었으니까.

이번 일로 테레사의 흉악함이 세상에 알려지고, 국왕의 체면은 땅에 떨어질 거였다.

몇 달이 지나면 마도구 수출도 급감하겠지.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내 인생을 짓밟은 자들을 이 정도로 용서할 수 있을 리가.

나는 우아한 몸짓으로 국왕이 홀짝이던 와인 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테레사에게 다가갔다.

맞아서 엉망이 된 테레사는 어느 때보다 비참했다.

반짝이던 하늘색 머리는 헝클어졌고, 눈두덩은 시퍼렇게 멍들었다.

손톱으로 바닥을 긁으며 날 노려보는 테레사는 왕세녀가 아니라, 밤거리에서 하룻밤을 구걸하는 한물 간 창부 같았다.

나는 더 잔인하고 싶었다.

“앞으로 네 입장이 참 흥미로워지겠다. 직접 보지 못해서 아쉬워.”

“……!”

“내가 말했잖아. 마지막 기회를 잡지 못하면 넌 내 손에 죽게 될 거라고.”

“날 죽이겠다고?”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받아야지.”

그날을 기대하라는 뜻으로 와인 잔을 높이 올렸다. 크리스털 잔에 담긴 포도주가 보석처럼 붉게 빛났다.

내 입가에 화사한 미소가 걸렸다.

테레사가 침을 튀기며 외쳤다.

“오늘 일은 꼭 갚아주겠다, 아이시아!”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복수를 네가 왜 하니? 내 차례가 끝나려면 멀었는데.

기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놓고도 참회할 줄 모르는 테레사를 보며 혀를 찼다.

“쯧쯧. 공작부인이라고 불러. 건방지게 반말하지 말고.”

그 말과 함께 와인을 테레사에게 뿌렸다.

촤악!

피처럼 붉은 와인이 테레사의 몸을 적셨다.

그 모습을 보고 왕비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이런 시시한 거에 놀라면 안 되지. 너희들 때문에 죽고 상처 입은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분노로 몸을 떠는 테레사의 귓가에 속삭였다.

“넌 내게 구정물을 서른다섯 번 뿌렸고, 뜨거운 수프를 열두 번, 말똥은 네 번 뿌렸어. 하나씩 갚아줄 테니까 기대해.”

내 말에 동요한 사람은 살로메디안뿐이었지만 괜찮았다.

진짜 복수는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 * *

델마와 함께 가고 싶었지만, 감금되어 있던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소신이 부주의한 탓입니다. 부디 벌해 주십시오!”

죄책감으로 얼룩져 있는빈센트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델마의 마음을 얻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자책하지 마세요. 인연이 닿으면 만나게 되겠지요.”

“공작부인…….”

“아쿠아로드 왕족 때문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영지에 도착하면 포상 휴가를 받으시도록 각하께 말씀 올리겠습니다.”

“감, 감사합니다.”

빈센트가 얼굴을 붉혔다.

휴가가 무척 간절했나 보다……. 기사도 사람인데 틈틈이 쉬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마도구 제작 기법이 실린 마차에 올랐다.

마도구가 세드나 공작령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 그곳은 어떤 곳일까?

온천이 있다는 것 외에 나는 세드나 공작령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다른 게 무슨 상관이야. 온천이 있다는데!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나는 오월의 장미처럼 붉은 눈동자를 반짝였다.

하지만 공작령에 도착하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각하와 계약을 맺으면 좋겠습니다.”

심호흡한 후 맞은편 좌석에 앉아있던 살로메디안에게 말했다.

최고급 벨벳 쿠션에 몸을 기댄 그가 미간을 좁혔다.

“갓 혼인한 신부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꼭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살로메디안이 계속해보란 투로 손을 까딱거렸다.

“기억은 사라졌지만, 저와 각하는 마신의 숲에서 만났습니다. 그곳에서 있었던 모종의 사건 때문에 저와 결혼하신 거고요.”

“훔친 심장 이야기를 엄청 돌려서 하는군.”

“……그 부분은 기억을 떠올린 후 다시 논의해보지요.”

“아직도 못 믿는 건가? 내 심장 덕에 그대 마력이 깨어났거늘.”

“덕분에 마력 폭주를 겪었습니다.”

“불타오르는 그대를 구한 것 또한 나였지.”

살로메디안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은혜를 잊지 말라는 건가? 왠지 삐친 것 같은데.

내게 호의적이긴 하지만 그는 예측할 수 없는 변덕을 가진 남자였다.

전생에서처럼 내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가져갈 수 있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내 인생을 지키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어쨌든 저는 각하께 유의미한 존재란 뜻이겠지요. 맞습니까?”

“유용하다기보다, 없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더 적확하겠군.”

“……무슨 뜻입니까?”

“그대는 꼭 필.요.한. 존.재. 란 말이다.”

살로메디안이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얼핏 강렬한 속삭임 같지만,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포식자 앞에 놓인 생쥐처럼 본능적 공포가 밀어닥쳤다. 머릿속에서 생존 경고음이 시끄럽게 울렸다.

잡아먹힌다! 분명 잡아먹히고 말 거야!

어디까지나 마음의 소리일 뿐 내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럼 이야기가 더 쉽겠군요. 말씀드렸다시피 심장은 꼭 돌려드리겠습니다. 대신 계약을 받아주십시오.”

“지난번 거래도 끝나지 않은 줄 아는데?”

살로메디안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암살 사건을 무마할 때, 제국의 침략을 막는 대가로 살로메디안과 거래했다.

살로메디안의 조건은 ‘사라진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그 조건이 성립되지 못한 상태로 새로운 계약을 맺는 건 위험했다.

그러나 나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어찌 원하는 것을 얻겠습니까.”

“그렇게까지 해서 뭘 얻으려는 건가?”

“제가 힘을 기를 때까지만 각하의 아내로 살게 해주십시오.”

“…힘을 기르면?”

“이혼해드리겠습니다.”

완벽했던 살로메디안의 얼굴에 금이 갔다. 고요한 호수 같던 푸른 눈동자도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변했다.

쿵. 쿵. 쿵. 심장이 낯선 간격으로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이러지? 나는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데.

낯선 감각을 억누르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자립할 때까지만 절 지켜주십시오. 저도 결혼을 유지하는 동안 공작부인으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말 이혼할 생각인가?”

확인하고 싶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다시 물었다.

붉은 입술을 짓깨물다가 겨우 답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이혼은 제가 원할 때 하고 싶습니다.”

나는 임시일 뿐 살로메디안의 진짜 아내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심장을 돌려받기 위해, 나는 살아남기 위해 억지로 한 결혼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상대가 생긴다면 물러나는 것이 옳았다.

그걸 아는데 왜 이렇게 괴로운 걸까.

살로메디안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처음 생긴 내 편이었다.

그를 잃는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노래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실패를 겪은 만큼 테레사는 더 영악해질 거였다.

이혼당할 때를 노려 내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분명했다.

안전을 위해 나는 세드나 공작부인이라는 이름이 필요했다.

살로메디안에게 심장을 돌려주고, 힘을 기를 때까지만 결혼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내가 살로메디안에게 바라는 전부였다.

그 이상은 욕심일 테니까.

“각하. 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까?”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눈으로 살로메디안이 읊조렸다.

“그 계약은 거절한다.”

순간 심장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듯한 충격이 엄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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