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50)

4

* * *

결과적으로 말하면 아무도 죽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은 도둑으로 위장한 기사들과 도둑을 잡기 위해 애쓰는 척하던 기사 모두를 제압했다.

그 역시 도둑으로 변장한 채.

“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이냐?!”

“크아악!”

“피해라! 계획이 들통났다!”

그들이 가진 첨단 마도구는 쓸모가 없었다.

꺼내기도 전에 살로메디안의 물방울을 맞고 하나둘 쓰러져갔다.

빈센트를 포함한 살로메디안의 수행 기사들은 우리가 도착하기 전 침입자들을 때려눕힌 상태였다.

특히 빈센트가 처리한 괴한들은 다섯이 넘었다.

저런 실력자가 왜 기사 서임을 받지 못한 거지?

출신 성분이 안 좋은 건가?

내가 의아해할 때 빈센트가 미심쩍다는 투로 물었다.

“설마 공작부인이십니까?”

“맞습니다, 빈센트 님.”

복면을 조금 내리고 수줍게 대답했다.

남들이 듣기엔 차가운 읊조림에 불과했겠지만.

“어째서 그런 차림을 하고 계십니까?”

“이것은…….”

도둑이 되자는 남편 때문에 억지로 입었습니다만.

헐렁한 옷을 만지작거리며 대꾸할 말을 골랐다.

살로메디안이 내 어깨에 한쪽 팔을 턱, 걸쳤다.

“세드나 도적단의 돌격대장이거든.”

돌격대장? 제가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빈센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깊은숨을 토했다.

“하아… 각하. 귀부인께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거래 당사자가 직접 봐야 할 일이 있거든.”

“네?”

“그런 게 있다.”

살로메디안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북새통 와중에도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공작부인께 너무 위험합니다. 소신이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빈센트가 날 에스코트하기 위해 다가왔다.

그의 손끝이 팔에 살짝 닿은 것뿐인데 속이 메슥거렸다.

목구멍에 치미는 토기를 밀어 넣으며 체념했다.

역시 괜찮은 건 살로메디안뿐인 건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위험할 것 없다. 물러서라.”

살로메디안이 새파랗게 굳어있는 내 앞을 가로막으며 빈센트를 제지했다.

놀랍게도 불편하던 속이 가라앉았다.

“나, 세드나 공작이야. 내가 지키는데 뭐가 위험하단 말이냐?”

“하오나 각하!”

“이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곳이 내 옆이다. 내가 있는 한 솜털 하나 다칠 일 없다.”

살로메디안이 오만해 보일 만큼 강력하게 선언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혼자 처리한 기사가 무려 서른이 넘었다.

최정예 기사들을 단숨에 제압하면서도 그는 호흡 한번 흐트러지지 않았다.

밤 산책을 나온 사람처럼 유유자적한 모습에 몰래 감탄했다.

멋있다. 대단하다. 그래서 떨린다…….

살로메디안이 날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속내를 들켰을까 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다른 데 꽂혀있었다.

“가짜 도둑을 처리했으니, 진짜 도둑질을 해 볼까. 돌격대장?”

* * *

“있는 것 다 내놓아라. 죽고 싶지 않으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살로메디안이 말했다.

아무래도 그는 도둑과 강도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짓이냐?! 네놈은 누구지?”

잠옷 차림의 테레사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야심한 시각, 침전에서 강도를 만나야 할 줄은 몰랐겠지.

나도 몰랐다. 결혼 첫날밤, 부부강도단이 될 줄은.

“보면 모르나? 도둑놈이다.”

살로메디안이 무성의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했다.

테레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비볐다.

가짜 도둑을 진짜 도둑으로 만들면 살로메디안은 무사할 테고, 아쿠아로드는 피해자가 되지. 제국이 전쟁을 일으킬 명분은 없어.

하지만 살로메디안의 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마도구 제작 기법이 숨겨진 비고가 있다지? 죽고 싶지 않으면 다 내놔.”

목숨은 살려주지만, 공짜는 아니란 말이 이제야 이해됐다.

진짜 도둑질을 할 줄이야…. 나는 복면 아래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보다 테레사가 더 당황스럽겠지만.

“세드나 공작인가?”

“설마.”

“복면으로 가린들 정체를 숨길 수 없다!”

테레사의 자색 눈동자가 날 향했다.

복면을 썼다고 해도 살로메디안의 백금발과 내 붉은 눈동자를 가릴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숨길 마음도 없어 보였다.

“고맙지 않나? 기껏 도둑으로 분장해서 널 살려줬는데?”

“닥쳐라!”

테레사가 살로메디안을 공격했다. 그녀의 몸에서 물 속성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살로메디안이 손을 휘저어 테레사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손짓 하나에 물방울은 천 갈래로 갈렸다. 날벌레를 쫓듯 하찮은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손바닥 위에서 물방울을 만들었다. 테레사와 똑같은 물 속성 마력이었으나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힘이었다.

물을 수족처럼 다루고 있어……!

보글보글 일어난 물방울이 뱀처럼 길고 굵은 형태를 이루었다.

살로메디안이 손가락을 튕기자 물뱀이 테레사를 향해 날아갔다.

“크읍!”

물뱀이 테레사의 목에 착 감겼다. 테레사가 날뛸수록 물뱀은 더욱 숨통을 옥죄었다.

입가에 흐르는 침과 충혈된 눈, 관자놀이에 불룩 튀어나온 핏줄까지.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테레사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네 앞에서 난 항상 이런 얼굴이었니? 추한 날 보며 즐거워했던 거야?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어.

“말해라. 왕궁 비고는 어디에 있지?”

살로메디안이 테레사를 향해 물었다.

“크으윽.”

“고통을 좀 더 즐기겠다면 말리지 않아.”

“큽! 큭큭!”

테레사가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이 상태로 어떻게 말하냐고 항의하는 듯했다.

“꿈틀대는 꼴이 볼썽 사납군.”

살로메디안이 물뱀을 몇 개 더 만들었다.

물뱀은 테레사의 양발과 양다리를 결박해서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벽에 고정된 테레사는 고귀한 왕세녀가 아니라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 같았다.

“돌격대장. 비고의 위치를 알아내라.”

살로메디안이 내 쪽을 바라봤다.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였다.

살로메디안이 턱으로 책상 위를 가리켰다.

“고문해도 좋아. 여기 쓸 만한 도구가 많군.”

날카로운 펜과 편지 봉투를 자르는 나이프, 잉크, 양초 등이 눈에 띄었다.

내 어깨에 손을 올린 그가 친절한 조언을 덧붙였다.

“살가죽을 벗겨내는 것부터 시작해 볼까? 기도에 잉크를 붓는 것도 나쁘지 않지. 살점을 가르고 촛농을 떨어뜨리면 비명을 질러댈걸?”

내가 움직이지 않자, 살로메디안이 붉은 상자에서 펜을 꺼내줬다.

“귀찮으면 이걸 가볍게 찔러 넣어. 안구가 생각보다 무르거든.”

싱긋 웃는 그의 모습 뒤로 커다란 낫을 든 사신이 겹쳐졌다.

이래서 ‘마신, 마신’ 하는 거구나….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별명 참 잘 지었네.

등골이 오싹하긴 했지만, 순순히 펜을 건네받았다.

묵직한 감촉이 어쩐지 낯설었다.

“펜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크으읍! 읍!”

테레사가 사지를 뒤틀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그 반응을 보고 살로메디안이 푸른 눈동자를 빛냈다.

“마도구로군. 아주 흥미로운 종류의.”

그의 말대로 펜촉과 펜대에 기하학적인 마법진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마법진이었다.

새로 개발한 걸까? 왜 펜 모양인 거지?

의아해하는 내게서 살로메디안이 마도구를 가져갔다. 위험한 물건은 만지지 말라는 듯이.

“어떤 기능이 숨겨져 있는지 실험해 봐야겠지? 아, 마침 좋은 실험체가 있군!”

살로메디안이 테레사를 돌아봤다.

한 걸음 한 걸음 그가 다가갈수록 테레사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크으으읍!”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된 테레사의 얼굴이 낯설었다.

가엾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유쾌하지도 않았다.

마음이 여린 탓은 아니었다.

육체적 고통을 안기는 건 내가 원하는 복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너는 사람들 앞에서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해.

오랫동안 죗값을 치러야 하고. 그게 내가 원하는 복수야.

“말할 기회를 주마. 살고 싶으면 잘 생각하고 입을 놀리는 좋을 거야.”

살로메디안이 손가락을 튕겨 물뱀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가, 가까이 오지 마!”

“묻는 말에나 답해. 이 마도구는 어떤 용도지?”

“으으……!”

“말하지 않으면 눈동자를 파내는 용도로 쓰겠다.”

‘점심은 오믈렛으로 하지’라는 말보다 훨씬 산뜻한 목소리였다.

괜한 협박이나, 농담으로 들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공포스러웠음은 물론이었다.

“……기억을 지우는 마도구다!”

겁에 질린 테레사의 입에서 찐득한 침이 튀었다.

순간, 살로메디안의 얼굴이 납덩이처럼 굳었다.

“아직 시험 단계야! 효과는 뛰어나지만, 부작용이 심하다고!”

“사용한 적이 있다는 뜻이로구나.”

“……!”

“네가 이것으로 아이시아의 기억을 지웠느냐?”

그가 마도구를 테레사의 목 끝에 들이밀었다.

아이시아.

그의 목소리로 내 이름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내 이름이 달콤하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아찔한 열기에 현기증마저 일었다. 하지만 그 감각을 즐길 겨를이 없었다.

또 살로메디안 때문이었다.

“내 아내에게 마도구를 쓴 걸 후회하게 해주마!”

내 아내.

다시 한번 심장이 격하게 요동쳤다.

하지만 테레사가 죽으면 모든 계획은 수포가 되어 버린다.

나는 살로메디안의 팔을 붙잡았다.

“부디 진정하세요!”

“이 여자가 내 것을 건드렸다. 살려둘 수 없다.”

“각하!”

살기에 사로잡힌 그는 날 바라보지도 않았다. 당장 테레사의 목을 비틀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목 뒤에서 따끔한 통증이 퍼졌다.

“으읏.”

퍼뜩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후드를 눌러쓴 누군가가 내게 긴 대롱을 겨누고 있었다.

“아…….”

묵직한 통증과 함께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목소리를 낼 수도, 손가락을 까딱할 수도 없었다.

털썩, 무릎이 땅에 닿았다.

“아이시아?!”

살로메디안의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팔을 뻗어보았지만, 그에게 닿지 않았다.

흐릿하던 그의 얼굴도 완전히 지워졌다.

누군가 내 발목을 잡고 늪 아래로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다.

죽음보다 음험한 어둠이 날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 * *

꿈속에서 나는 몇 시간째 울창한 숲을 헤매고 있었다.

하늘을 가린 거대한 나무와 이끼로 뒤덮인 땅 덕분에 걸음을 옮기기도 쉽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마물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한 번 들어가면 누구도 살아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마신의 숲. 나는 그곳에 있었다.

꿈이 아니야. 난 여기에 버려졌어. 그것도 사흘 동안……!

발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고통과 굶주림보다 음산한 숲의 그림자가 견디기 어려웠다.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마물들이 군침을 흘리며 날 노리고 있었다.

「겨우 발견했는데, 개죽음당할 수는 없어! 얼른 빠져나가야 해!」

뭘 발견했다는 거지? 누가 날 마신의 숲에 버린 거지?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기억 속에서도 끝내 떠오르지 않는 것들이 남아있었다.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무언가.

떠올리려 할수록 두개골을 도끼로 내려찍는 듯한 두통이 밀려왔다.

나는 다친 발을 질질 끌며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엔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빽빽한 침엽수 사이에서 저택을 발견했을 땐 눈을 의심했다.

마신의 숲에 이런 저택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어둠에 휩싸인 저택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서자, 커다란 새가 괴성을 지르며 날아왔다.

「끼이룩!」

오색빛깔로 번득이는 눈동자가 무려 네 개나 달린 새였다.

「마물이구나!」

「끼엑! 끼엑!」

마물 새가 발톱을 세우고 날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죽을 수 없어. 왕궁으로 돌아가, 테레사에게 빼앗긴 것을 되찾을 거야!

새를 향해 날카로운 돌멩이를 던졌다.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낯선 힘이 가득 실려 있었다.

돌은 마물 새의 눈동자를 정확히 맞췄고, 새는 땅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꿰에에엑!」

죽은 건가? 혀를 빼문 새를 발끝으로 툭, 건드렸다.

「끼엑!」

죽은 줄 알았던 마물 새가 다시 홰를 치며 달려들었다.

새가 부리로 내 어깨를 쪼아댔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젖 먹던 힘을 짜냈다.

목을 힘껏 비틀자 마물 새가 네 개의 눈을 뒤집으며 축 늘어졌다.

하지만 나도 무사하지 못했다. 과한 힘을 쓴 탓에 심장 발작이 찾아오고 말았다.

「아흣.」

가슴께를 움켜쥐고 옆으로 쓰러졌다. 생살을 쇠스랑으로 긁어내리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이번 발작은 범상치 않았다. 온몸의 감각이 사라지고 사지가 뻣뻣하게 굳었다.

제발 와달라고 부탁할 땐 얼씬도 하지 않던 죽음이 가장 살고 싶은 순간에 찾아왔다.

「그대가 새를 죽였나?」

흐릿한 시야에 노을을 등진 한 남자가 보였다.

얼굴이 보이지 않음에도 가슴이 먹먹했다.

이것이 그리움이라는 걸 나는 어떻게 알고 있을까.

「살로메디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도 내 이름을 불렀다.

「아이시아.」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재회한 연인들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팔을 벌렸다.

그의 품에 안긴 순간, 번뜩 깨달았다.

그날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몰랐다.

이것이 내 기억이라면 어떻게 이름을 부르는 거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살로메디안의 얼굴엔 아름다운 이목구비 대신 시커먼 구멍이 뚫려있었다.

아차, 하는 사이 그가 내 가슴을 반으로 갈랐다.

「도둑에게는 이쪽이 더 어울려.」

「아아……!」

살로메디안이 피에 젖은 손으로 내 심장을 잡아 뜯었다.

동시에 감당할 수 없는 열기가 치솟았다.

바위를 녹이고, 영혼을 태울 법한 푸른 불꽃이 혀를 날름거렸다.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 * *

독침을 맞은 아이시아는 열흘째 눈을 뜨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이 침대에 누운 그녀의 창백한 입술을 손끝으로 쓸었다.

꽃잎처럼 부드러운 입술이 바싹 말라 있었다.

“아이시아.”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심장이 산산 조각나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내가 방심하지만 않았더라도…….!

살로메디안의 어금니 사이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무너지던 순간이 망막에 깊게 새겨져 떠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뻗은 손. 초점 잃은 붉은 눈동자.

지켜주겠다 장담했으나 지키지 못했다.

살수를 놓칠 정도로 살로메디안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놀랄 만큼 이성을 잃고 말았다.

열흘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살로메디안은 먹을 수도, 잘 수도 없었다. 당연히 아이시아 곁을 떠날 수도 없었다.

짙은 죄책감은 어둠처럼 내려앉았고, 후회가 아침 해와 함께 떠올랐다.

모든 하루가 일 년처럼 흘렀다.

“각하. 식사를 또 거르셨습니까?”

빈센트가 차갑게 식은 수프 그릇을 내려다봤다.

“열흘 동안 한 끼도 드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신의 힘으로도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각하의 몸은 제국의…….”

“잔소리할 거면 나가라.”

빈센트의 말을 잘랐다. 충언이라는 걸 알면서도 듣고 싶지 않았다.

듣고 싶은 건 오직 아이시아의 목소리뿐이었다.

“공작부인께서는 쾌차하실 겁니다.”

빈센트의 위로가 공허했다.

아쿠아로드 최고라는 치료 신관이 신성력을 쏟아부었지만 아이시아는 눈을 뜨지 못했다.

몸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살로메디안은 어렴풋이 짐작했다.

‘아이시아의 마력과 내 마력이 충돌하는 거다. 그녀의 몸은 마력을 받아들일 만큼 강하지 못해. 독 때문에 더 약해졌고.’

세상에는 물의 정령 아쿠엘의 사랑을 받는 수속성과, 불의 정령 콰이엘의 축복 아래 있는 화속성 마력이 있다.

물과 불, 모두를 가진 쌍 속성이 절대적으로 강하지만,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기에 전설로만 여겨졌다.

마신 바실리키의 피를 잇는 자만이 가질 수 있다는 쌍 속성.

대륙 유일의 쌍 속성이 바로 살로메디안이었다.

마신의 숲에서 아이시아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반쪽 심장만 남겨놓고, 그대는 어디를 떠돌고 있는 것인가.”

아이시아가 불 속성 마력을 모두 가져가면서 살로메디안은 쌍 속성을 잃었다.

그것이 자신과 제국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 몸이나 제국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시아의 야윈 얼굴만이 살로메디안의 폐부를 찔렀다.

나는 왜 떠나지 못하는가. 나는 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가.

이 여자가 대체 뭐라고…….

수없이 질문해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살로메디안은 아이시아란 물음표를, 한 번도 품지 않았던 소용돌이를 그저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끝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해도.

“그러니 눈을 떠라.”

느슨한 옷깃 사이로 드러난 아이시아의 피부는 새하얀 진줏빛이었다.

살로메디안이 아이시아의 쇄골을 더듬었다. 은은한 열기가 손끝에서 피어올랐다.

건드리면 부서질 듯 연약한 몸 안에 거대한 마력이 숨어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아이시아가 마력 운용법을 깨우치기만 한다면 그 힘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거였다.

“이겨내라. 아이시아. 그대는 대륙에서 가장 강한 여인 아닌가?”

“…….”

“일어나서 운명의 장난에 놀아나는 날 비웃어보아라.”

아이시아가 쓰러진 후, 성가실 정도로 자주 들려오던 혼잣말이 멈췄다.

심장을 멋대로 가지고 놀던 감정 부스러기도 사라졌다.

그뿐인데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무색무취의 적막만이 가득한 무덤 같은 나날들.

예전으로 돌아온 것뿐인데 견딜 수 없었다.

그제야 살로메디안은 깨달았다.

그는 아이시아를 죽이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죽일 수 없었던 거였다.

결혼을 핑계로 아쿠아로드에 온 이유도 고작 심장 때문이 아니었다.

황홀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했던 ‘그 경험’ 때문도 아니었다.

아이시아가 이 남자 저 남자에게 팔려 다니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을 뿐.

뒤늦은 깨달음은 사무치는 죄책감이 되었다.

조금만 솔직했더라면, 아이시아를 다치게 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각하. 테레사 왕세녀가 범인을 잡았다고 합니다.”

빈센트의 보고가 살로메디안을 상념에서 깨웠다.

“죄를 뒤집어씌울 먹잇감을 골랐나 보군.”

“일개 기사의 개인적 일탈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개소리.”

살로메디안이 한 마디로 일축했다.

테레사와 그 잔당들을 쓸어버리지 않은 건 아이시아와의 거래 때문이었다.

살육 파티를 벌이면 아이시아가 화내겠지. 악마 똥구멍이니 뭐니 할지도 몰라.

이상야릇한 욕설을 떠올리며 살로메디안이 볼 안쪽을 짓깨물었다.

다시 그 괴상한 말들을 재잘거려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신의 아내가 되겠습니다.」

곧고 맑은 눈동자로 날 빤히 바라보며 한 번 더 말을 해준다면…….

살로메디안이 눈부신 백금발을 거칠게 뒤로 넘겼다.

아이시아를 깨우기 위한 제물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장 내 앞에 범인을 데려와라.”

* * *

목과 손목에 붕대를 감은 테레사가 주춤거리며 나타났다.

왕실 기사들이 검은 후드를 쓴 범인을 살로메디안 앞에 무릎 꿇렸다.

“아이시아를 죽이려 한 범인을 잡았습니다.”

테레사가 비굴한 미소와 함께 고개 숙였다.

살로메디안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이시아? 세드나 공작부인이다. 소국의 허접한 왕족 따위가 함부로 부를 이름이 아니야.”

“송, 송구합니다.”

“범인은 누구지?”

살로메디안의 물음에 테레사가 범인이 쓰고 있던 후드를 벗겼다.

짧은 갈색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여자였다.

체포 과정에서 거친 취급을 받았는지 얼굴은 피멍투성이였다.

입에는 개에게나 물릴 법한 재갈을 채워놓았다.

분명 테레사라는 저 악녀의 소행일 거였다.

“왕실 근위대 소속 델마 그로반이란 년입니다.”

“…….”

“공작부인의 호위기사였습니다. 그 이유로 기사단 안에서 따돌림을 당해서 앙심을 품게 되었다고 합니다.”

표독스러운 눈으로 델마를 노려보던 테레사가 기사의 창을 빼앗아 그녀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감히 황족을 시해하다니!”

“읍……!”

“너 때문에 아쿠아로드가 위험에 빠졌다! 삼족을 멸해도 갚지 못할 죄라고!”

“으으읍.”

델마는 바닥에 얼굴을 처박힌 채 신음했다. 살로메디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 아내의 방에서 지금 무슨 짓이냐?”

“이년이 허무맹랑한 죄를 지어서…….”

“입 닥쳐라. 네가 지껄일 때마다 공기가 더러워진다.”

테레사가 움찔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자색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는 것은 잊지 않았다.

암살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음에도 끝까지 책임을 전가하려는 모습이 역겨웠다.

독침을 쏜 자가 누구라도, 명령을 내린 건 테레사일 것이다.

살려둘 가치 없는 쓰레기. 병균을 옮기는 쥐새끼.

테레사와 마주할 때마다 살로메디안은 타오르는 살기를 갈무리하기 어려웠다.

‘아이시아가 지키려는 건 이 땅의 사람들이지. 저건 벌레니까 죽여도 될 거야…….’

테레사를 바라보는 살로메디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여자의 멱을 따면 아이시아가 어여쁜 두 눈을 반짝 뜰 것 같았다.

한번 시험해볼까?

살로메디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테레사가 슬금슬금 물러났다.

“각하께서 직접 심문하시지요. 저는 처리할 일이 좀 남아서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테레사가 꽁무니를 빼자, 빈센트가 델마의 재갈을 풀어줬다.

입가에 흐른 침을 닦고 델마가 자세를 고쳤다. 처참한 몰골이었지만, 기품 있는 여자였다.

살로메디안이 준엄한 어조로 물었다.

“네가 정말 아이시아에게 독침을 쐈는가?”

“예.”

“왜 그랬지?”

“아이시아 님 때문에 출셋길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델마가 대답했다. 살로메디안도 빈센트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빈센트가 미리 준비한 서류를 꺼냈다.

“그로반 가문은 대대로 아쿠아로드 왕족의 호위기사라고 합니다. 차녀인 델마 그로반 경이 가문의 후계자입니다.”

“…….”

“어려서부터 공작부인과 동무처럼 자랐다고 합니다. 공작부인께서 폐위되신 후엔 테레사 왕세녀의 호위기사가 되었고요.”

미동조차 없었던 델마가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제 출신은 이 일과 무관합니다. 제가 아이시아 님께 독침을 쐈습니다. 그때 사용한 독이 이것입니다.”

“기사 가문의 후계자가 독침을 쏜다? 왕세녀를 위해 거짓 자백을 하는 것이냐?”

살로메디안이 실소를 터뜨렸다. 델마는 눈썹 한 올 깜빡하지 않았다.

“모두 저 혼자 꾸민 짓입니다.”

“너만 희생하면 왕국이 안전할 거라고 그 여자가 속삭이던가?”

“…….”

“착각하지 마라. 어떤 변명을 내놓든 너희를 죽이고 살리는 건 내 손에 달렸다.”

살로메디안의 전신에서 살기가 이글거렸다.

동시에 델마와 빈센트가 움찔할 만큼 강한 마력이 휘몰아쳤다.

“아이시아가 눈을 뜨지 않는다면 이 나라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리겠다……!”

지금 당장에라도 아쿠아로드를 잿더미로 만들 기세였다.

델마의 시선이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시아에게 향했다. 흔들림 없던 검은 눈동자가 한 차례 일렁였다.

“아이시아 님께서는 아직도 의식이 없으십니까?”

“배신자의 동정은 필요 없다.”

“아뢰옵기 송구하옵니다만… 정신 조작 마도구의 후유증일 수도 있습니다.”

“뭐라?”

예상치 못한 대답에 살로메디안이 눈을 부릅떴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정신계 마법이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얼얼했다.

델마가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아이시아 님께 마도구를 쓰는 것을 막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죽여주십시오.”

“죽여줄 때는 내가 정한다. 우선 아는 대로 말해라. 아이시아가 깨어나지 못하는 게 마도구 후유증일 수 있다고?”

창백한 얼굴로 델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오라비는 마력이 부족하여 기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대신 왕실 마도사가 되었지요.”

“기억을 지우는 마도구를 만든 것이 네 오라비더냐?”

“예. 부작용에 대해 말하는 것도 들었습니다. 두통과 현기증, 정신착란, 의식불명…….”

델마가 병증을 하나씩 읊을 때마다 살로메디안의 낯빛이 시퍼렇게 굳어 갔다.

그가 손을 들어 델마의 말을 막았다.

“그만! 네 오라비를 데려와라. 직접 심문하겠다.”

“오라비는 마도구를 완성한 후 행방불명되었습니다.”

델마가 괴롭다는 듯 입술 끝을 씹었다.

예로부터 멍청한 권력자들은 명검을 만든 장인을 죽여 또 다른 명검의 탄생을 막았다.

테레사라면 목적을 이룬 후, 마도사를 죽이고도 남았을 거였다.

“아무런 방법이 없단 말이냐?”

살로메디안이 절망으로 물들기 전, 델마가 덧붙였다.

“정신 조작 마도구는 의식에 작용한다고 합니다. 의식이 망가졌을 때는 감각을 깨워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

“마도구를 개발한 마도사의 말이니 틀림없을 겁니다.”

감각이라는 말에 살로메디안이 아이시아를 돌아봤다. 어떤 영감이 퍼뜩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아이시아를 깨울 방법을 찾을지도 모르겠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빈센트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저 자의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각하.”

“빈센트?”

“주인을 배반한 기사입니다. 새 주인의 명령에 따라 거짓 자백까지 했고요.”

빈센트가 경멸을 담은 눈으로 델마를 응시했다. 델마의 얼굴이 수치스러움으로 일그러졌다.

그녀의 아래턱이 덜덜 떨렸다.

“가문과 왕가를 지키는 것이 사명이라고 교육받았습니다. 아이시아 님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습니다.”

“후회는 소용없다.”

“절 뭐라 욕하셔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아이시아 님을 살려주십시오! 다른 건 바라지 않습니다!”

델마가 다시 한번 이마를 찧었다.

쿵쿵, 바닥이 울릴 때마다 아이시아를 살리고 싶어 하는 델마의 간절함이 전해졌다.

“오랫동안 의식이 없으셨다면 위험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아이시아 님을 깨워야 합니다!”

델마의 말에 살로메디안도 동의했다.

아이시아가 저절로 눈을 뜨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뭐든 시도해 봐야 할 때였다.

살로메디안이 빈센트에게 명령했다.

“빈센트. 저 자를 감금하라.”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한번 믿어보겠다.”

“아니 됩니다, 각하!”

“내 결정이다. 따라라.”

살로메디안이 단호하게 못 박았다.

빈센트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고개 숙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빈센트 손에 끌려가면서도 델마의 눈은 아이시아에게 고정되어있었다.

“아이시아 님을 부탁드립니다! 제 목숨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가져다 쓰십시오!”

“조용히 하시오.”

“제발 아이시아 님을 살려주십시오…….”

델마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눈물 몇 방울이 후두두 바닥에 떨어졌다.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씹던 살로메디안이 씹어뱉듯 말했다.

“빈센트. 그로반 경을 죄인이 아니라 포로로 대접하라.”

“예에?”

“누가 부탁하지 않아도 나는 내 아내를 살릴 것이니.”

살로메디안의 말에 델마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놀란 건 빈센트도 마찬가지였다.

철들 무렵부터 살로메디안을 모셔왔지만, 주인이 적에게 자비를 베푸는 건 처음이었다.

물론 누군가를 간호하는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전쟁과 검술 외엔 무관심한 분이었는데…….

빈센트가 걱정을 담아 살로메디안을 살폈다.

“각하.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고 합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혹 편찮은 곳이 있으십니까, 머리가 좀 아프시다든지……?”

“시끄럽다. 물러가라.”

귀찮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팔을 휘저었다.

충직한 기사는 조금 망설이다가 델마를 데리고 방을 빠져나갔다.

이제 아이시아를 깨울 차례였다.

“조금만 기다려. 그대가 가장 좋아하는 걸 하게 해주지.”

아이시아의 감각을 건드릴 단 하나의 방법이 떠올랐다.

살로메디안이 아이시아를 침대 시트로 둘둘 감아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솜으로 만든 인형도 이렇게 가벼울 것 같지는 않았다.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을 치받았다.

살로메디안이 아이시아를 안고 나오자, 시종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각하. 무슨 일이시옵니까?”

“이 왕궁에서 가장 좋은 욕실이 있는 곳을 안내하라.”

“요, 욕실이요?”

“시간 없다.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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