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50)

2

* * *

약소국이라고는 하나 마도구 수출로 큰돈을 버는 나라답게 아쿠아로드 귀빈실은 최고급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살로메디안은 바로 떠나려 했지만, 빈센트가 만류했다.

“신부의 가문에서 초야를 보내는 것이 아쿠아로드의 법도입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하나?”

“바바라 누님께서 아시면 피곤하실 겁니다.”

바바라란 이름에 살로메디안이 멈칫했다.

빈센트와 똑같은 연두색 머리칼을 가진 비서의 잔소리가 떠오른 탓이었다.

「각하는 미친 거예요? 돈 거예요? 각하가 싼 똥 치우느라 등골 빠지는 제 생각은 안 하세요? 월급도 안 올려주면서! 콱 이직해버릴라!」

바바라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바바라와는 전혀 다른 차분한 목소리로 빈센트가 조곤조곤 문제를 짚었다.

“상의도 없이 국혼을 치르셨지 않습니까?”

“…….”

“예식을 중단시키고, 신부를 납치하듯 데려왔다는 걸 알면 폐하께서도 심려가 크실 겁니다.”

“쓸데없는 격식 따지는 건 네 누나와 똑같구나.”

“송구스럽습니다.”

젊은 기사가 머리를 조아렸다.

정식 서임은 받지 못했지만, 빈센트의 충성심은 기사단 내에 따를 자가 없었다.

살로메디안이 전적으로 신임하는 몇 안 되는 심복이기도 했다.

“공작부인께서도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공작부인이라.”

“아이시아 님과 혼인하신 것을 후회하십니까?”

빈센트의 물음에 멈칫했다.

아이시아와 결혼 따위를 하게 된 까닭이 떠오른 탓이었다.

새빨간 눈동자를 치켜뜬 아이시아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했지만, 예상과 너무나 달랐던 그녀.

그녀와 마주쳤던 한 달 전 그날이 불쑥 떠올랐다.

동시에 입안에 침이 고였다.

“후회는 무슨. 아직 좀 어색할 뿐이다.”

“모두가 기뻐할 겁니다. 세드나 공작령에 안주인이 생겼으니까요.”

주군에게 어울리지 않는 여자라며 핏대를 올려도 모자랄 판에 빈센트는 아이시아를 안주인이라 불렀다.

아이시아를 선택한 사람이 살로메디안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진실을 알게 되면 너는 날 증오하겠지. 아이시아를 죽이려 하거나.’

충신에게조차 숨겨야 하는 비밀을 품고 살로메디안이 몸을 돌렸다.

“물러가라.”

“쉬십시오, 각하.”

긴 소파에 몸을 기댄 살로메디안이 성혼 확인서를 흔들었다.

“내가 정말 결혼하게 될 줄이야…….”

조그맣지만 선명한 지장이 꽃잎처럼 팔랑거렸다.

달콤하리만치 짙은 혈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결혼을 제안한 건 자신이었지만 정말 아이시아를 아내로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그 어떤 여자도 세드나 공작부인이 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소심하고 따분한 여자였는데. 무슨 바람이 분 걸까?”

빼앗긴 심장을 통해 살로메디안은 아이시아의 감정을 단편적이나마 읽을 수 있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혼잣말도 들을 수 있었다.

한 달이면 상대가 어떤 인간인지 파악하고도 남을 만한 시간이었다.

눈치 보는 개처럼 늘 주눅이 들어 있는 여자.

힘도 없고, 의지도 없는 인간.

아이시아는 영혼 없는 마리오네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살로메디안이 가장 경멸하는 부류이기도 했다.

그래서 죽이기로 했다.

어차피 심장을 돌려받을 방법도 그 길뿐이었다.

결혼이란 귀찮은 방식을 선택한 건 마지막으로 그녀의 ‘변명’을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날의 기억을 잃은 건지, 모른 척하는 건지, 남길 말은 없는지 궁금했다.

확인한 다음에 죽여도 늦지 않을 터였다.

“완전히 달라졌단 말이지.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사람처럼.”

아이시아는 제 생살을 물어뜯고, 대신관을 협박했다.

마신이라 불리는 남자와 결혼하겠노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살로메디안이 봤던 그 어떤 여자보다 당돌하고 자신만만했다.

살로메디안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긴 여자다웠다.

“정말 미래를 보고 온 걸까.”

허튼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쉬 잊히지 않았다.

아이시아는 제 행동마저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심장을 뽑아내리란 것도 알았다.

무표정한 얼굴과 경계심 가득 사나운 눈빛. 사무적이고 딱딱한 말투.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말투가 살로메디안의 신경을 긁어댔다.

“키스를……. 할 걸 그랬나?”

살로메디안이 손으로 제 입술을 쓸었다.

아이시아의 얼음 인형 같던 얼굴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 눈앞을 스쳤다.

쌕쌕거리는 숨소리, 투명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

살짝 벌어진 입술과 그 사이로 보이던 분홍빛 혀.

그녀의 심장 박동이 살로메디안에게 옮겨와 가슴을 두드렸다.

아찔하게 낯선 감촉. 하마터면 제 심장이 달음박질치는 거라고 착각할 뻔했다.

물론 초면이라고 주장 중인 아이시아 때문에 골이 지끈거렸다.

“어떻게 까맣게 잊어버릴 수가 있지? 일부러 날 괴롭히려는 건가?”

계획대로 아이시아를 죽이고 심장을 빼앗으면 낯선 감정도, 두통도 끝이었다.

하지만 죽음 직전에서 절 붙들던 아이시아의 체온이 한 달이 지난 지금도 손끝에 남아있었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살로메디안과 아이시아는 물론 제국의 운명까지도.

당사자인 아이시아는 모르고, 살로메디안은 인정하지 않는 일이었다.

“어차피 늦은 거 조금 더 지켜봐도 되겠지.”

생전 처음 살인을 미뤘다. 그 순간이 어떤 일로 되돌아올지 살로메디안의 상상은 닿지 못했다.

* * *

“장미 목욕이잖아?”

장미꽃잎을 띄운 욕조를 보며 눈을 비볐다.

경험해보지 못한 호사에 여린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진정해, 아이시아. 발작하면 안 되잖아.”

애써 감정을 다스렸다.

어릴 적부터 내 심장은 사소한 흥분에도 멈춰 버리곤 했다.

최근 들어 좀 잠잠해지긴 했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나는 커다란 리넨 천으로 몸을 감쌌다.

아쿠아로드에서는 알몸으로 욕조에 들어가지 않았다.

목욕을 신께 올리는 기도라 믿기 때문이었다.

“향 좋다…….”

목욕물은 미지근하게 식어있었지만 살아서 목욕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없이 행복했다.

온천욕의 황홀한 기억이 꿈결처럼 밀려들었다.

정말 세드나 공작령에도 온천이 있는 걸까? 살로메디안은 알고 있을까?

그를 떠올리자마자, 장미 목욕이 주는 행복이 씻겨나가고 머릿속은 오직 살로메디안으로 가득해졌다.

스킨십, 속삭임, 키스, 첫날밤!

내겐 하나같이 낯설고 위험스러운 것들뿐이었다.

물론 가장 위험한 것은 세 번째 남편이었다.

“물어볼 사람도 없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초조한 마음에 손가락으로 목욕물을 튕겼다.

집게손가락 끝에서 파란 불꽃이 솟아오른 것은 그때였다.

“이게 뭐야?!”

경악에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욕실 밖에서 대기하던 하녀가 다급히 물었다.

“공작부인. 무슨 일이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들어오지 마세요.”

차갑게 대꾸했지만,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아직도 손가락 끝에서 파란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체온이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언젠가 느껴본 적 있었던 감촉이었다.

언제였지? 어디였지?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잘라내기라도 한 듯 기억 한구석이 텅 비어 있었다.

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린 듯 답답했다.

불쾌한 두통이 찾아왔다. 욕조를 빠져나와 수건을 집었을 때였다.

“첫날밤 준비는 잘돼 가?”

문이 벌컥 열리고, 테레사가 침입했다.

“나한테 처맞던 폐왕녀가 장미꽃 목욕도 하고 출세했네.”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는 나와 장미꽃이 띄워진 욕조를 번갈아 바라보며 테레사가 빈정댔다.

“공작부인이 된 덕분이지. 고마워. 좋은 남편감을 찾아줘서.”

가운을 걸치며 내가 차분히 대꾸했다.

테레사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모두 앞에서 모욕당하던 테레사.

내 말대꾸에 부들부들 떨던 테레사.

그 모습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사망 5분 전으로 회귀한 보람이 충분했다.

“뭘 잘못 먹고 돌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난 척도 끝이야.”

“과연 그럴까?”

“그 남자가 누군지 잊었어? 마신이야. 널 죽일 거라고!”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나한테 관심 꺼. 테레사.”

눈을 희번덕거리던 테레사가 조소를 머금었다.

“너보단 그 남자가 죽는 게 좋겠다. 내 발닦개로 돌아오면 건방지게 굴었던 걸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테니까!”

“세드나 공작은 쉽게 죽을 남자가 아니야.”

“남편 잡아먹는 마녀의 저주는 피하지 못할걸?”

이상하리만치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뭐지? 모든 게 정리되는 이 느낌은.

“첫 번째 남편도, 두 번째 남편도 아무 이유 없이 죽었잖아? 바로 너 때문에!”

테레사의 말대로 내 정략결혼 상대들은 첫날밤도 치르지 못하고 죽었다.

나는 그들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저주 따위도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죽은 걸까?

“죽을 만했으니까 죽었겠지.”

테레사의 표정을 살피며 냉담하게 대답했다.

테레사의 눈썹이 휘어 올라갔다.

반면 나의 붉은 눈동자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첫 번째 남편은 60살 넘은 늙은이였지. 10만 골드짜리 신부 노릇은 몸뚱이로 하라고 했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겠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야?”

“두 번째 남편은 왕실에 복수하고 싶어 했어. 내 귀와 코를 잘라서 왕궁으로 보낼 거라면서 웃더라. 둘의 공통점이 뭘까?”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시치미 떼지 마. 둘 다 반 국왕파 귀족들이었잖아.”

테레사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서둘러 말을 이었다.

“처음엔 나도 저주인 줄 알았어. 하지만 너무 이상한 우연이잖아? 내 남편이 죽고, 내 악명이 올라갈 때마다 왕실이 덕을 봤으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늬들이 죽였지?”

치맛자락을 움켜쥔 테레사의 손이 잘게 떨렸다.

심장이라도 멈춘 듯 파르란 얼굴이었다.

“저주를 이용해서 정적들을 처리한 거지. 날 팔아서 돈도 챙기고.”

“…….”

“내 인생을 가지고 논 거야.”

처음엔 나도 내가 저주받은 탓이라 믿었다.

모두가 그리 말했으니까.

하지만 신비로운 목소리는 테레사가 예언서를 조작했다고 말했다.

의심은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건강하던 남자가 둘이나 죽었는데 어떤 조사도 하지 않았다. 그 가문 귀족들도 반발하지 않았다.

이유는? 내가 저주의 씨앗이자, 남편 잡아먹는 마녀이기 때문이었다.

전 남편들은 제 손으로 마녀를 선택한 남자들이었고.

그들이 죽어서 이득을 보는 사람이 누구지?

답은 금방 나왔다.

이제야 깨달았다는 것이 황당할 만큼.

“참 편했겠네. 마음에 안 드는 자가 있으면 나랑 결혼시켜서 죽여버리면 그만이잖아.”

주춤하던 테레사가 피식 웃었다.

“그게 어때서?”

“!”

“넌 태어나서 처음으로 왕실에 도움이 된 거야. 그러니 고마워해야지?”

뻔뻔하며 역겨운 말이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창백해졌다.

“초야를 치르기 전에 죽인 것도 그 때문이야? 순결을 남겨둬야 다른 남자에게 또 팔 수 있으니까.”

“오. 제법 똑똑한데?”

테레사가 손뼉 쳤다.

모래를 한 주먹 씹은 것처럼 입 안이 까끌했다.

정략결혼을 시켜서 살인을 저지르고, 그마저도 내 탓으로 돌렸다니…….

국왕과 테레사는 내 명예를, 인생을 짓밟았다.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 줄로만 알았는데 인간으로도 취급하지 않았다.

「언니는 영원히 내 거야. 기라면 기고, 죽으라면 죽어야 해. 그전까지는 살아야 하고.」

기억 속에서 테레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심장에서 광포한 불길이 일었다. 이상한 기운이었다.

이것으로 테레사를 공격할 수 있을까? 이 힘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주먹을 움켜쥐고 낯선 열기를 가라앉혔다.

감정에 휩쓸려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냉철하게 판단하고 완벽한 기회를 노려야 했다.

내 모든 걸 빼앗은 테레사에게 복수하려면.

“넌 구제 불능 쓰레기야.”

활활 타오르는 심장과 달리 내 목소리에서는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감히 왕세녀인 나한테 쓰레기라고?!”

“쓰레기 이상이지. 네게서 역겨운 악취가 풍겨. 시궁쥐도 너보단 향기로울 거야.”

“네년이 죽고 싶은 것이냐?!”

예상대로 테레사의 눈동자가 뒤집혔다.

그녀가 마력을 일으키자, 옷자락이 찢어질 듯 펄럭거렸다.

날 밀어내고 왕세녀 자리를 차지할 만한 마력이었다.

테레사의 재능은 역대 왕족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라고 했다.

평소라면 겁에 질려 몸을 웅크렸겠지만, 가슴이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저 마력으론 날 해칠 수 없어.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아.

내 심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죽여 봐. 입으로만 떠들지 말고.”

“이년이!”

“황족을 해치면 네 인생도 참 재미있어질 것 같지 않아?”

“황족이라고?”

“내가 세드나 공작부인이 되었다는 걸 까먹은 거야? 성격만 더러운 줄 알았는데 머리까지 나쁘네.”

“남자 하나 믿고 위세 등등하구나! 수치도 모르는 년!”

테레사가 쇳소리를 질렀다.

“세드나 공작 덕분이기는 하지만 수치스럽지 않아. 너처럼 남의 것을 빼앗지는 않았으니까.”

“내가 뭘 빼앗았다고?”

발뺌하는 테레사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내 몸에서 살기가 흠뻑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테레사조차 한 걸음 물러설 정도였다.

“끝까지 발뺌해 봐, 테레사. 재판정에서 네 죄를 낱낱이 파헤쳐줄 때까지.”

“아이시아……!”

“싫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날 죽여. 이 기회를 놓치면 너는 내 손에 죽게 될 거야.”

섬뜩한 어조로 읊조렸다.

잠시 혼란스러워하던 테레사가 가래 섞인 침을 뱉었다.

“퉤! 네깟년의 속셈을 모를 줄 아느냐? 날 도발해서 결혼 장사를 말아먹으려는 거지?”

“…….”

“세드나 공작을 죽이고, 널 다시 팔 거야. 잠깐이나마 황족이었으니까 값이 뛰겠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살려달라고 손발이 닳도록 빌던 주제에 살로메디안을 죽이겠다고? 무슨 수로?

“아무리 강해도 독 안에 든 쥐일 뿐이야. 마도구로 무장한 왕실 기사단을 상대할 순 없어.”

테레사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테레사의 말대로 살로메디안은 수행 기사 몇 명만을 대동한 상태였다.

하지만 첨단 마도구를 사용한다 해도 그를 해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내 진짜 걱정은 따로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날 보며 테레사가 높은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조금만 기다려. 반병신이 되도록 패줄 테니까. 나한테 기어오른 걸 평생 후회하게 해주마!”

* * *

테레사가 낄낄거리며 욕실을 빠져나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살로메디안은 죽지 않겠지만… 아쿠아로드인들은 학살을 당할 거야.”

아쿠아로드는 전 대륙을 통틀어서 가장 뛰어난 마도구를 생산하는 나라였다.

변방 소국인 아쿠아로드가 지금껏 명맥을 보전했던 것도 마도구 제작 기법을 철저히 숨겨왔기 때문이었다.

대놓고 발톱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아쿠아로드를 노리는 열강들이 많았다.

특히 북쪽 국경을 맞댄 크로티무스 제국은 아쿠아로드를 침공할 기회만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테레사가 살로메디안을 죽이려 한다면?

제국은 황족 시해를 명분 삼아 아쿠아로드를 짓밟고 마도구 제작술을 빼앗을 게 분명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이 죽어 나갈 거였다.

귀족들이 금은보화를 챙겨 나라 밖으로 도망칠 동안에.

“그래서 어쩌라고? 난 이제 아쿠아로드 사람이 아니야. 왕세녀는 더더욱 아니고.”

움켜쥔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돌아가신 어머니 말씀이 귓전에 울렸다.

「평범한 사람들에겐 마력이 없단다. 넌 그들과 같으니까 다른 왕족들보다 백성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차가운 욕실 바닥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잊으려 했으나 잊히지 않던 서러움이 가득 밀려왔다.

「제국군이 쳐들어온다 해도 사람들은 절 욕할 거예요. 모두 저주의 씨앗인 저 때문이라고요.」

「예언서는 가짜야. 희망을 잃지 마. 자랑스러운 내 딸 아이시아.」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았다.

하나뿐인 딸과 이름 모를 백성을 공평하게 사랑하셨던 분이니까.

「사람들을 기억하렴. 테레사의 명령을 어기고 네게 책을 건네주던 치료사, 몰래 먹을 걸 챙겨준 하녀. 그들이 죽길 바라는 건 아니지?」

절대 바라지 않아요. 하지만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세드나 공작과 결혼하긴 했지만 또 언제 심장을 빼앗길지 몰라요. 그의 눈 밖에 나면 그 즉시 버림받을 거예요.

「테레사 밑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의 눈치만 보겠다는 거니? 백성들이 모조리 학살당할지도 모르는데?」

상상 속에서 어머니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당당하게 살겠다 다짐했으면서 또 누군가의 그늘로 기어들어 가려는 스스로가 수치스러웠다.

비굴한 나와 내 뼛속에 그 비굴을 각인시킨 테레사를 향한 분노가 전신을 휘감았다.

넌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겠지. 백성들이 죽든, 나라가 무너지든.

가짜 예언서로 내 삶을 부서뜨렸을 때처럼.

누군가는 가족을 잃고 누군가가 서럽게 울부짖어도, 테레사는 아름다운 미소만을 머금고 사뿐사뿐 꽃길을 걸어갈 거였다.

“테레사. 절대 용서 못 해……!”

참고 참았던 눈물 한 방울이 기어이 흘러내렸다.

손끝에서 또 파란색 불꽃이 튀어나온 건 그때였다.

불꽃은 이내 내 몸을 감싸는 거대한 불기둥이 되었다.

잠재워 보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내 통제를 벗어난 푸른 불꽃이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내 몸에서 불이 치솟는 이유도, 이 불의 정체도 몰랐다.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었던 어마어마한 활력이 끓어 넘치고 있다는 것밖에는.

모조리 태우고 싶어. 더는 참을 수 없어!

흉포한 야성이 불꽃과 함께 넘실거렸다.

이성의 끈이 끊어지기 직전, 몇몇 목소리가 들렸다.

“고정하십시오, 각하! 부인께서는 아직……!”

“비켜라!”

“왕실 법도에 따르셔야 합니다!”

“타죽고 싶지 않으면 비켜!”

문이 열리고, 푸른 불꽃 사이로 살로메디안이 보였다.

흐트러진 백금발, 명치까지 풀어헤친 셔츠 단추.

거친 숨을 내뱉는 그의 모습을 어디선가 본 것만 같았다.

* * *

아이시아와 연결된 살로메디안의 심장이 미친 듯 두근거렸다.

아이시아의 분노와 슬픔이 밀려왔다.

한 달 동안 느꼈던 감정들보다 훨씬 격렬한 감정이었다.

‘내 예상보다 훨씬 감정이 풍부한 여자야. 그동안 쌓인 분노도 거대하고.’

아이시아의 혼잣말을 들어왔기에 살로메디안은 그녀를 잘 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가 알았던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무표정한 얼굴에 감춰져 켜켜이 쌓인 감정들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데…….’

푸른 불기둥에 휩싸인 아이시아를 보며 살로메디안이 마른침을 삼켰다.

분노는 불의 정령이 가장 좋아하는 먹잇감이었다.

아이시아는 제 몸에 거대한 마력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몰랐다.

마력을 다루는 법도, 마력이 폭주 중이라는 것도 알 리 없었다.

“진정해! 이러다 죽는다!”

아이시아의 손목을 움켜잡으며 살로메디안이 외쳤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아이시아에게 닿지 않았다.

아이시아는 대륙에서 열 손가락에 꼽힐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물의 정령이 지배하는 땅에서 태어난, 불의 화신 같은 소녀.

엇갈린 운명에 짓눌려있던 마력 위에 살로메디안의 심장이 품고 있던 마력이 더해지자, 그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러다간 나까지 타죽겠군!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믿어왔는데, 날름거리는 불꽃을 바라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살고 싶은 마음보다 아이시아를 살리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왜 아이시아를 살리고 싶은지는 알 수 없지만 서둘러야 했다.

살로메디안이 물 속성 마력을 끌어올렸다.

투명한 물방울이 갑옷처럼 그의 몸을 감쌌다.

“정신 차려, 아이시아!”

그가 두 팔을 벌려 아이시아를 끌어안았다.

치이익.

물과 불이 충돌하며 연기가 치솟았다.

아이시아와 맞닿은 살로메디안의 살갗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크흡!”

생살이 불타는 고통에도 아이시아를 놓지 않았다.

가느다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기나긴 통곡처럼 구슬펐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여인.

그녀를 활활 타오르는 불꽃 속에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어떻게 하지? 아이시아는 물론 왕궁 전체가 잿더미가 될 것 같은데?

긴급한 폭발은 막았지만, 아이시아의 불길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살로메디안 눈에 장미꽃잎이 띄워진 욕조가 보인 건 그때였다.

그가 아이시아를 껴안은 채로 욕조 안으로 뛰어들었다.

푸시시시식.

빨갛게 달군 쇠를 물에 넣었을 때처럼 뜨거운 물방울이 튀며 연기가 치솟았다.

목욕물이 순식간에 끓어올랐다.

욕조 속에서 결코, 함께하지 못할 것 같던 불과 물이 하나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불과 그 열기를 차갑게 식히는 물.

희열에 가까운 평온함이 아이시아와 살로메디안을 감쌌다.

불완전한 둘이 완전한 하나가 되는 기묘한 감각은 심장을 빼앗기기 전에는 느껴본 적 없었다.

너무나 황홀해서 아이시아를 품에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이시아가 마력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누구도 그녀와 싸워 이기지 못할 터였다.

그런데 왜 작고 여린 동물처럼 느껴지는 걸까. 심장 뛰는 것이 장하게 느껴질 만큼.

내가 미쳤나 보군. 마력이 폭주했을 때 심장을 빼앗았으면 간단했을 것을.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살로메디안은 아이시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도자기보다 매끄러운 피부와 발갛게 달아오른 뺨.

밤하늘로 지은 비단처럼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릿결이 살로메디안의 심장을 또 한 번 흔들었다.

고르게 오르내리는 아이시아의 가슴을 보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품속에서 아이시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 * *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느낌이었다.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상반된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포근함에 손을 꼼지락거렸다.

이게 뭐지? 뭔지 모르겠지만 계속 만지고 싶어. 놓고 싶지 않아.

“언제까지 더듬고 있을 거지?”

익숙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살로메디안이 어딘가 지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각하?”

내가 열심히 주물럭댄 것은 다름 아닌 살로메디안의 가슴 근육이었다.

으으아아악! 내적 비명을 지르며 살로메디안에게서 떨어졌다.

“드디어 정신이 드는가 보군.”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나보다 그대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왜 우리가 욕조에서 부둥켜안고 있죠?

살로메디안에게 묻는 대신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테레사가 개소리를 지껄였고, 몸에서 불꽃이 튀어나왔지.

거기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이상은 가물가물했다.

“하아…. 탄내가 심하군.”

살로메디안이 그을린 셔츠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검댕이 묻고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셔츠 사이로 조각처럼 완벽한 근육이 드러났다.

말도 안 돼! 내가 저기를 밀가루 반죽처럼 조물거렸다고?!

감촉이 다시 떠올라서 뺨이 붉어졌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로메디안에게 물었다.

“혹시 저 때문입니까?”

“판단력을 잃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같이 죽을 뻔했거든.”

푸른 불기둥과 날 끌어안은 살로메디안이 머릿속을 스쳤다.

얼핏 살코기가 타는 냄새도 맡은 듯 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소름이 온통 돋았다.

내가 사고 쳤나 봐! 다시 심장을 뺏길지도 몰라!

화들짝 놀란 내가 두 팔로 앞섶을 가렸다.

살로메디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뭐 하는 건가?”

당신이 심장을 뜯어 갈까 봐 막은 겁니다만.

“인제 와서 부끄러운 모양이지?”

다 안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피식 웃었다.

부끄러운 게 아니라 살고 싶은 건데…….

동그랗게 뜬 눈을 굴리다,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내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가운 한 장 달랑 걸친 채 처음 만난 세 번째 남편과 욕조 안에 있다는 현실이 말이다.

“으읏!”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쥐구멍이 있다면 쥐새끼한테 빌어서라도 숨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는 목숨을 걸고 날 구해준 사람이었다.

“폐 끼쳐서 죄송합니다, 각하! 아니,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순간 살로메디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개를 홱 돌린 채 어깨를 조금 떨기도 했다.

화가 난 건가? 무릎이라도 꿇었어야 했나?

슬금슬금 다가가 불에 탄 그의 셔츠를 만지작거렸다.

“비싼 것 같은데 죄송해요. 물어낼 돈은 없으니까…. 고쳐 드리겠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살로메디안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나보고 기운 옷을 입으라는 건가?”

“각하?”

“그대도 이런 얼굴을 할 줄 아는군. 하하하.”

물방울처럼 싱그러운 웃음이 내 가슴을 씻어 내렸다.

내가 본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남자가 흰 치아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 박동 소리가 그에게도 들릴 것 같아서 한 손으로 가슴 부근을 지그시 눌렀다.

살로메디안이 재미있다는 투로 말했다.

“내 심장 잘 쓰고 있군.”

또 도둑 취급인가?

돌려주겠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내 모든 걸 훔쳐 간 테레사와 비슷한 취급을 받는 건 딱 질색이었다.

“장담하건대 저는 각하의 심장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훔칠 재주도 없고요.”

“마신의 숲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 안 난다고?”

“마신의 숲이라면 마물이 출몰하는 버려진 땅 아닙니까?”

마신의 숲은 크로티무스 제국과 아쿠아로드 왕국 국경에 자리 잡은 원시림이었다.

가난한 집에서는 군식구를 줄이려고 갓난아이나 노인, 병자를 마신의 숲에 버리기도 했다.

마물을 잠재운다며 어린 소녀들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들어간 사람은 있어도 나오는 사람은 없다는 공포의 숲.

왜 마신의 숲 이야기를 꺼낸단 말인가?

“저는 그곳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심장 발작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가?”

“마신의 숲에서요?”

“거의 죽을 뻔했잖아? 왜 모른 척하는 거지?”

살로메디안이 거짓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에 없는 일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자꾸 몰아붙이십니까?”

내 목소리에서 얼음 조각이 뚝뚝 떨어졌다.

살로메디안의 아름다운 얼굴이 묘하게 굳었다.

그가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만두지.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으니.”

냉랭한 말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짓깨물었다.

“각하. 무슨 일이십니까?”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20대 초반의 기사가 다가왔다.

망가진 셔츠를 훌렁 벗으며, 살로메디안이 날 응시했다.

하늘처럼 투명한 푸른 눈이 시려서 숨쉬기가 어려웠다.

“내가 쓸데없는 짓을 한 모양이다.”

살로메디안의 목소리가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심장을 뜯겼을 때와 비슷한 통증이 온몸에 번졌다.

* * *

“각하께서 하시는 일 중에 쓸데없는 건 없습니다.”

곧은 눈빛과 연두색 머리칼을 가진 기사가 고개 저었다.

기사의 목소리에는 주군을 향한 존경과 믿음이 담겨있었다.

망토를 벗은 젊은 기사가 내게로 바짝 다가왔다.

살로메디안보다 화려함은 덜했지만, 그 역시 빼어난 미남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공작부인.”

기사가 망토로 내 어깨를 감싸줬다.

그가 날 건드리자 속이 울렁거렸다.

물에 젖어 드는 망토를 만지작거리며 나는 헛구역질을 삼켰다.

살로메디안과 함께일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그가 특별한 걸까? 아니면 내가 이상한 걸까?

“처음 보여드립니다. 각하를 모시는 빈센트 윗스라 합니다.”

기사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태연한 척 대꾸했다.

“고맙습니다. 윗스 경.”

“정식 서임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냥 빈센트라 불러주십시오.”

살로메디안이 견습 기사를 대동할 것 같지는 않은데.

의아해하고 있을 때 빈센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치료받지 않으셨습니까?”

빈센트의 시선이 내 엄지손가락에 닿아있었다.

멈췄던 피가 다시 흐르고 있었다.

테레사에게 당한 것에 비하면 상처라고도 할 수 없는 사소한 흠집에 불과했다.

“치료받을 만한 상처가 아닙니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을 억누르며 손을 뒤로 감췄다.

빈센트는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중하지 않다니요? 공작부인께서는 세드나 공작령의 안주인이자, 크로티무스 제국의 황족이십니다.”

몇 시간 전까지 버러지만도 못한 처지였지만요.

그렇게 말할 수 없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정말 괜찮습니다.”

“저는 괜찮지 않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귀부인의 손 아닙니까?”

제 상처에는 둔감할 것 같은 남자가 내 작은 생채기에 분개했다.

걱정해주는 마음이 고마워서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고맙습니다, 빈센트 님.”

내 미소를 보고 빈센트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마치 사신이라도 만난 사람처럼.

한 발짝 물러 서 있던 살로메디안이 투덜거렸다.

“작작 해라, 빈센트. 본인이 괜찮다고 하지 않나?”

훤히 드러난 상반신 때문에 그를 똑바로 보기 어려웠다.

탄탄한 가슴과 굴곡진 근육에 눈이 닿았다.

필연적으로 감촉이 되살아났다.

매끄럽고 따뜻하지만, 쇳덩어리처럼 강인한 몸.

타인과 접촉하면 구역질하는 내가 남자의 몸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히게 될 줄이야!

죽다 살아나지 않았다면 믿지 못할 일이었다.

“왜 눈을 피하지?”

살로메디안은 시선을 피하는 내가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근육 촉감을 되새김질하느라 바빠서요, 라고 대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랑은 말하기 싫다는 건가?”

“아닙니다.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감히 내 앞에서 딴생각했다고?”

살로메디안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왜 화를 내지? 사과해야 하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의 대화, 몸짓, 감각, 모든 것들이 너무 낯설었다.

확실한 건 하나뿐이었다.

살로메디안과 멀어지고 싶지 않다는 이상한 마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날 살로메디안이 덥석 안아 들었다.

“흡!”

새된 비명이 터져나갈 것 같아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동그랗게 벌어진 내 눈동자를 보며 살로메디안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가 웃자 욕실 전체가 환하게 밝아지는 듯했다.

잘생긴 남자가 웃으면, 후광이 비치고 별 가루 같은 것이 쏟아지는구나…….

그가 날 안고 있다는 것을 망각할 정도로 멍하니, 바라보고 말았다.

“놀랐나?”

그럼 안 놀랐겠어요?

방금까지 인상 쓰고 있던 남자가 샤랄라 미소를 뿌리는데.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시치미를 뚝 뗐다.

“행동이 과하십니다.”

“나와 있을 때 딴생각 못 하도록 해주지.”

“안 할 테니까 내려주십시오.”

“안 돼. 또 한눈을 팔지도 모르니까.”

살로메디안이 날 안은 채로 성큼성큼 걸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문제는 예측 불가능한 살로메디안이 싫지 않다는 거였다.

세 번째 남편이 생기고, 그와 한 욕조를 쓰고, 그의 품에 공주님처럼 안기고…….

하루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게다가 ‘첫날밤’이란 위험천만한 단계가 남아있었다.

심장을 간질이던 깃털이 날카로운 꼬챙이가 되어 위장을 쿡쿡 찔러댔다.

부부니까 어쩔 수 없는 걸까?

복도에 몰려든 사용인들이 살로메디안과 그의 품에 안긴 날 지켜보며 웅성거렸다.

“어머! 이게 웬일이래?”

“각하께서 폐왕녀를 진짜 아내로 맞을 건가 봐!”

“폐왕녀 따위가 제국 황족이 된다고?!”

“두 분이 초면 맞아요? 너무 다정하신데요?”

쏟아지는 시선이 견디기 어려웠다.

발바닥이 간질거리면서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런데 이 역시 싫지 않았다.

내가 정말 미쳤나 봐!

* * *

“세드나 공작이 아이시아를 데려갔다고?”

테레사가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테레사의 전속 호위기사인 델마가 고개 숙였다.

큰 키와 짧은 머리칼, 다부진 표정 때문에 언뜻 미청년으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폐왕녀를 직접 안아서 신방에 데려갔다고 합니다.”

“아이시아 같은 머저리가 세드나 공작을 꼬셨단 말이야? 그게 말이 돼?!”

“송구합니다, 왕세녀 전하.”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던 테레사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준비는 잘되어 있는 거지?”

“근위대는 물론 수도 방위 기사단까지 대기 중입니다.”

“나와 왕실을 개무시한 놈이야. 곱게 죽여주지 마. 철저하게 고통을 주라고.”

달콤한 디저트를 한 입 먹은 아이처럼 테레사가 해맑은 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델마는 미소녀의 껍데기 안에 악마가 숨어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세드나 공작을 꼭 죽이셔야겠습니까?”

망설임 끝에 델마가 물었다.

아무리 왕세녀의 명령이라지만, 암살이라니.

명예를 지키는 기사로서 참을 수 없는 수치였다.

세드나 공작을 죽인다면 아이시아도 무사할 수 없었다.

함께 자란 다정한 왕녀님을 떠올리며 델마가 입술을 깨물었다.

“감히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거니?”

“왕국에 불똥이 튈까 염려됩니다.”

“너… 지금 나 무시하지?”

테레사가 싸늘하게 물었다.

델마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전하!”

“5년 전까지 아이시아의 호위였잖아. 충성하는 척하면서 속으로 날 비웃는다는 걸 모를 줄 알아?”

“소신은 대대로 왕실을 지켜온 그로반 가문의 후예입니다.”

“그래서 너 같은 걸 호위기사로 삼은 거잖아?!”

“…….”

“네 아버지가 국왕의 호위기사고, 후계자인 네가 왕세녀의 호위기사니까. 재수 없지만, 어쩔 수 없이!”

테레사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델마의 자존심을 허물어뜨렸다.

뼈를 깎는 노력과 충성심 모두를 짓밟힌 것 같아서 살이 떨렸다.

‘아이시아 님과 함께 왕궁을 탈출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아이시아가 거부했다.

자신은 물론 델마의 가문까지 화를 입게 될 거라며.

아이시아는 그런 성품이었다.

“아무 계획 없이 황족을 죽일까 봐? 혼자 똑똑한 척하지 마. 델마.”

“어찌하실 계획입니까?”

“도적단이 들었다고 할 거야. 마도구 제작 기법을 훔치려고. 공작은 신부를 지키려다가 죽은 거로 하지.”

“기사단을 도적떼로 위장하신다는 뜻입니까?”

“왕궁에 도둑이 자주 들었잖아? 너희가 일을 똑바로 못해서!”

테레사가 앙칼지게 외쳤다. 델마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암살만으로도 참기 힘든 불명예인데, 기사들에게 도적 흉내를 내라고?

하지만 테레사의 흉계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공작 일행만 죽으면 의심할 테니까…. 근위 기사 열댓, 하녀랑 시종들도 스무 명쯤 죽여.”

“전하!”

“그래야 설득력이 나오지.”

“안 됩니다! 그들은 전하의 충신이자, 백성들입니다!”

“싫으면 너랑 네 아버지부터 죽여줄까?”

테레사가 눈매를 접으며 음산하게 물었다.

“충성심을 증명할 기회를 주는 거야. 세드나 공작이 왕실을 모욕할 때 쥐새끼처럼 숨어있던 기사들한테.”

“국왕 폐하께서도 이 계획을 알고 계십니까?”

“아바마마께는 내가 말씀드릴 테니까, 시킨 일이나 잘 해!”

테레사의 명에 따르든 따르지 않든, 델마 앞에 남은 건 죽음뿐이었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명예롭지 못한 개죽음은 두려웠다.

동료와 죄 없는 이들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마도사한테 받아오란 건 가져왔니?”

테레사의 물음에 델마가 붉은 상자를 내밀었다.

아쿠아로드는 자국의 안전을 위해 특수한 기능을 지닌 마도구는 수출하지 않았다.

붉은 상자 속 마도구는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물건이었다.

왕족이라도 국왕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테레사가 이 마도구를 사용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펜 모양의 마도구를 꺼내며 테레사가 희희낙락했다.

“이것만 있으면 너희들이 실패해도 난 빠져나갈 수 있어.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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