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목욕해요, 공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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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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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할게. 네 뜻대로.”
가까스로 대답했다.
이복동생 테레사가 애완견을 달래듯 날 쓰다듬었다.
“그럴 줄 알았어. 아이시아 언니는 정말 귀엽다니까!”
손길이 역겨웠지만 쳐 내지 못했다.
테레사가 반짝이는 하늘색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방긋 웃었다.
“언니를 위해서 대신전을 장미로 장식했어. 오면서 봤지?”
못 봤어. 아무 설명도 듣지 못하고 끌려왔거든.
“다들 부러워하더라. 역시 왕녀의 결혼식은 특별하다고.”
난 왕녀가 아니야. 너 때문에 쫓겨났잖아.
네가 가져온 그 문서 한 장 때문에…….
오래된 기억이 차갑게 얼어붙은 심장을 찔렀다.
저주받은 폐왕녀 아이시아.
5년 전부터 그것이 내 이름이었다.
“오늘이야? 내 결혼식이?”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테레사가 미소로 답했다.
“언니는 아름다운 신부가 될 거야. 첫 번째, 두 번째 결혼식 때만큼!”
누가 내 남편이 되는지 몰랐다.
첫 번째, 두 번째 정략결혼 때와 마찬가지였다.
“신부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혀주렴.”
테레사가 발랄한 목소리로 하녀들에게 명령했다.
“분부 받들겠습니다, 왕세녀 전하.”
하녀들의 손이 몸에 닿을 때마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테레사의 학대가 가혹해지면서 생긴 증세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어떤 감정도 얼굴에 나타나진 않는다는 것뿐.
“까마귀 같은 흑발도 꾸며놓으니 그런대로 볼만하네요.”
“새빨간 눈동자에 순백의 드레스라니… 어휴, 섬뜩해라.”
“표정 좀 어떻게 해 보세요. 누가 보면 죽으러 가는 사람인 줄 알겠어요!”
하녀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거울 속 신부는 아름다웠다.
몸속 어디에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을 것 같은 무표정만 빼면.
머리 위에 드리워진 웨딩 베일이 시체를 감싼 흰 천 같았다.
교수대에 걸린 밧줄 같기도 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기사들이 모든 문을 지키고 있었다.
운 좋게 탈출한다 해도 내게 갈 곳은 없었다.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내 가족은 병든 국왕과 계모, 모든 걸 빼앗아간 이복동생뿐이었다.
물론 그들은 날 가족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다.
“남편의 뜻에 순종해라. 아쿠아로드 왕실의 명예를 더럽혀선 안 된다.”
국왕이 명령했다.
사라진 줄 알았던 희망이 불쑥 피어올랐다.
“…그럼 저도 왕실 일원으로 인정해주시는 건가요?”
처절하게 부서질 걸 알면서도 나는 또 그랬다.
테레사가 연극하듯 과장된 몸짓으로 날 끌어안았다.
또다시 욕지기가 밀려왔다.
“당연하지! 언니도 왕녀잖아? 비록 왕세녀 자리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
“항상 미안했어. 마력도 없고, 심장도 약한 언니 걸 빼앗은 것 같아서.”
“원래 네 거였어. 테레사. 나 같은 게 왕세녀라니…. 지나가는 개도 웃을걸.”
“언니는 주제 파악을 참 잘한다니까. 그 점이 제일 마음에 들어!”
테레사가 높은 웃음을 터뜨렸다.
만약 진심을 조금이라도 드러냈다면 아마도 피투성이가 되도록 채찍질을 당했을 것이다.
“새 남편은 너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한 분이다. 시녀가 되었다 생각하고 성심껏 모셔라. 스무 살이니 그 정도는 알겠지?”
미덥지 않다는 듯 국왕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테레사가 국왕의 팔짱을 끼며 재잘거렸다.
“언니는 잘할 거예요. 첫날밤은 못 보냈어도 알 건 다 알아요!”
드레스를 움켜쥔 주먹이 하얗게 질렸다.
세 번째 결혼을 앞두었지만, 나는 남자를 경험하지 못했다.
남자 손조차 잡아본 적 없었다.
순결한 유부녀. 남편 잡아먹는 마녀.
나는 아직 이 수치스럽고 기괴한 별명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열 손가락에 보석 반지를 낀 계모가 끌끌, 혀를 찼다.
“첫날밤에 남편이 죽다니. 그것도 두 번이나! 누가 저주의 씨앗 아니랄까 봐. 쯧쯧.”
내가 무슨 잘못을 했을까?
항의하는 대신 입술을 짓깨물었다.
그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 * *
테레사는 늘 그랬다.
비릿하게 실실 웃다가 느닷없이 폭력을 퍼부었다.
티파티가 취소되어서, 하늘이 흐려서, 붉은 눈동자가 재수 없어서.
나를 때리는 이유는 날마다 새로웠다.
맞다가 기절하는 건 일상이었다.
고막이 터지고, 갈비뼈가 부러졌으며 폐에 물이 찼다.
심장 발작까지 겹치면 움직이는 날보다 어둡고 더러운 헛간에 누워있는 날이 더 많았다.
아무도 테레사를 말리지 않았다.
테레사는 왕국을 이어받을 왕세녀였고, 나는 왕국을 멸망시킬 저주의 씨앗이었으므로.
「도와주세요. 아바마마! 테레사가 지진 상처가 썩어가요!」
열다섯 살 즈음엔 국왕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애원했다.
하지만 되돌아온 건 차가운 비웃음뿐이었다.
「누가 네 아비더냐? 저주받은 계집이.」
「하지만 테레사가……!」
「닥치거라! 쓸모가 없으면 인내라도 있어야지!」
어릴 적엔 날 무릎에 앉히고 동화책을 읽어주시던 아버지였다.
「마력이 없어도 괜찮단다. 심장도 아비가 어떻게든 고쳐주마. 사랑하는 내 딸, 아이시아.」
아버지의 돌변한 눈동자는 여린 심장을 더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내칠 거라면 사랑해주지 말지. 그럼 행복이 뭔지, 가족의 사랑이 뭔지도 아예 몰랐을 텐데…….
내게도 적통 왕세녀로서 고귀하게 대접받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다정한 시녀, 인자한 가정교사들에 둘러싸여 미소짓던 꿈같은 나날들.
「왕세녀 전하는 천재십니다! 검술, 피아노, 외국어… 가르쳐드리는 족족 익히시잖아요?」
「하늘색 머리칼이 왕족의 상징이라면 아이시아 님의 흑발은 왕국의 보물이에요!」
「테레사 님을 동생이라 생각하지 마세요. 국법상 정부의 딸은 왕녀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테레사가 왕궁 서고에서 발견해온 문서 때문이었다.
[흑발, 적안을 가진 저주의 씨앗이 ……아쿠아로드를 역사에서 지워버릴 것이다. ……왕족은 처형될 것이고, 백성들은 ……눈물을 흘릴 것이다.]
아쿠아로드 초대 국왕이자, 대예언자였던 아발론의 친필 예언서였다.
군데군데 지워진 글자들이 있었지만, 역사가들이 수백 년간 찾던 문서임이 밝혀졌다.
깊은 가뭄, 마물의 출몰, 마도사들의 실종…….
예언서에 적힌 멸망의 징조들이 왕국 곳곳에 등장했다.
나는 아쿠아로드에서 태어난 유일한 흑발, 적안의 왕족이었다.
그다음은 너무도 뻔했다.
난 왕세녀의 존위를 박탈당했다.
백성들에게 성녀로 추앙받던 헬레나 왕비 또한 함께 폐위당했다.
어머니의 가문인 발렌티아 후작가가 크게 반발했지만, 반역으로 몰려 멸족을 당했다.
어머니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셨다.
그리고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어머니를 따라가고 싶었다.
치욕 속에서 사느니 죽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살아남거라. 아이시아.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살아. 기회가 올 때까지……!」
‘대체 무슨 기회가 온다는 건가요?
제가 왜 살아야 하나요? 제발 말씀해주세요, 어머니.’
돌아가신 어머니를 원망하면서도 목숨을 끊어내지 못했다.
폐왕녀 신세가 된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는 것뿐이었으므로.
「왕비마마. 부디 치료 신관을 불러주세요.」
살기 위해서, 매춘부였던 여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다리에서 피고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엄살떨지 마. 아이시아.」
「치료 안 하면 다리를 잘라야 한대요.」
「그러게, 애초에 잘못을 하지 말았어야지! 테레사가 괜히 널 괴롭힐 애는 아니잖아?」
새 왕비가 뱀 같은 눈동자로 날 훑어내렸다.
친모의 천한 출신도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테레사는 완벽한 왕세녀였다.
왕국의 번영을 이끌 강한 마력과 흠잡을 데 없는 미모.
아쿠아로드 왕가의 상징인 하늘색 머리칼을 가진 소녀.
테레사를 거역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번은 왕궁 밖으로 도망친 적도 있었다.
얼마 못 가 잡혀 올 때마다 테레사의 학대는 집요하고 악랄해졌다.
「언니. 너는 영원히 내 거야. 기라면 기고, 죽으라면 죽어야 해. 내가 명령하기 전까지 살아야 하고!」
부러진 갈비뼈를 발로 짓이기며 테레사가 말했다.
「네가 잘난 핏줄 덕에 오냐오냐 자랄 때 난 창녀의 딸이라고 개무시 당했어! 내가 훨씬 뛰어난데도!」
「테레사, 제발! 때리지 말아줘. 다시는 도망치지 않을게!」
「때리는 게 아니라 교육시켜 주는 거야. 그러니까 고마워하면서 열심히 맞아!」
나는 이복동생의 장난감으로 사는 것에 적응해야 했다.
고통에도 익숙해져야만 했다.
모든 감정을 지워야 겨우 가능한 일이었다.
천년 빙설처럼 무표정한 얼굴 뒤로 가족에게조차 위로받지 못한 스무 살 인생을 숨겼다.
남은 거라곤 타인을 접촉할 때마다 올라오는 구역질뿐이었다.
* * *
딱 하나, 좋은 것도 있었다.
나는 웨딩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그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세 번째 남편은 다정한 분이실지도 몰라. 따뜻한 물로 마음껏 목욕하게 해줄지도 모르고…….
모두가 비웃겠지만, 욕실에서 누리는 자그마한 행복만이 내 삶의 유일한 낙이었다.
욕조에 몸을 담그면 어머니의 말씀이 들려오는 듯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희망을 잃으면 안 된다, 아이시아. 너는 아쿠아로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인이 될 테니까.」
시녀에게 맡기는 것이 당연한데도 어머니는 날 직접 씻겨주시곤 했다.
왜일까. 날 바라보던 어머니의 눈빛에는 언제나 희미한 슬픔이 번져 있었다.
그래도 목욕은 어머니와의 추억이었다.
테레사를 피해 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했다.
“테레사. 난 어떤 분과 결혼하게 되니?”
조심스레 테레사에게 물었다.
테레사의 눈빛이 돌변했다.
“왜, 도망치게?”
“그럴 리가 없잖아.”
“닥쳐. 언니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
“이번엔 꽤 유명한 남자야. 기대해도 좋아.”
재미있다는 듯 테레사가 킬킬거렸다.
웅장한 나팔 소리가 울리고, 의전관은 목이 터질듯 외쳤다.
“크로티무스 황제 폐하의 숙부이자, 대영지의 주인이신 살로메디안 세드나 공작 각하 입장하십니다!”
순간 심장이 얼어붙었다.
세드나 공작! 마신(魔神)이라 불리는 대륙 최강의 남자였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살인귀. 피 목욕을 즐기는 전쟁광.
그에게 붙은 악명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황족인 그가 왜 남편 잡아먹는 마녀의 세 번째 남편이 되려는 걸까?
합리적인 의문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하나 남은 희망마저 산산조각이 되었다.
세드나 공작은 내게 지상 최악의 남편감이었다.
“크로티무스 만세! 아쿠아로드 만세!”
환호성과 함께 신부를 위한 행진곡이 연주되었다.
흰 융단 끝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커다란 키, 넓은 어깨. 그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공작의 총애를 얻어. 나와 왕국을 위해.”
테레사가 내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내가 다급히 물었다.
“저분이 왜 나랑 결혼하려는 거야? 훌륭한 신붓감들이 줄을 설 텐데?”
“그깟 게 무슨 상관이야?”
“테레사!”
“공작을 꼬시면 왕녀로 인정해줄게. 너 따위를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겠다고.”
왜 나는 시험에 들어야 할까? 왜 항상 내 것을 빼앗기고 이용을 당해야 하지?
한 방울 눈물이 뺨 아래로 떨어질 즈음 결혼 축포가 터졌다.
“우와아아!”
한 걸음, 한 걸음.
세드나 공작에게 다가갈수록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와 결혼하느니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정말이지 이젠, 여기서 그만 끝내고 싶었다.
“왜 절 선택하셨습니까?”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물었다.
흐르는 눈물 탓에 세드나 공작의 얼굴이 흐릿했다.
“날 기억하지 못하는가?”
“저는 각하를 모릅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단 하루도 편히 쉰 적 없었다.”
“그날이라니요?”
“한 달 전, 그대가 내 것을 훔쳐 간 날. 계속 시치미를 뗄 건가?”
그의 물음이 매서워졌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잊은 척도, 잊은 것도 용서하지 못한다.”
“네?”
“결혼은 관두기로 하지.”
듣기 좋은 저음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내 가슴을 반으로 가르기 전까지.
“아……!”
짧은 탄식과 함께 심장에서 피 분수가 치솟았다.
그때까지 나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통증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새빨간 피로 젖은 세드나 공작의 손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틈만 나면 발작하던 내 심장이 그 손 위에 있었다.
그가 차갑게 읊조렸다.
“도둑에겐 이쪽이 더 어울려.”
도둑? 난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어. 늘 빼앗기기만 했다고!
마지막 말을 뱉지 못했다. 눈앞이 새까매졌다.
억울함도, 공포도, 지독한 외로움도 모두 흩어졌다.
순간, 나를 죽인 이 살인자에게 감사했다.
이제 테레사에게 벗어날 수 있어. 어머니도 이해해주실 거야…….
나를 죽인 그는, 어쩌면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괜찮은 남자였다.
* * *
『널 기다리고 있어. 네가 와줘야 해.』
목소리가 들려올 때 나는 목욕 중이었다.
그것도 꿈에 그리던 온천에서.
환상이라도 이런 데 있다니. 죽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체온보다 조금 높은 온도의 따스한 온천수가 피부를 부드럽게 감쌌다.
팔다리를 쭉 뻗자 몸이 둥실 뜨며 행복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흐……!”
현실이라 해도 믿을 만큼 생생한 감각이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저 멀리 눈에 익은 저택이 보이고, 호화로운 가구로 꾸며진 내 방이 떠올랐다.
다정한 친구와 매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밥. 그리고…….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말고,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마. 그대는 내 아내니까.』
이런 말을 하는 남편이 있는 환상이라니.
너무 구체적이어서 이상하지 않은가?
그때 신비로운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환상이 아니라 네 미래야.
“죽은 사람한테 미래가 어디 있어요?”
-있다면 어떡할래? 죽어서 기쁜 것 같던데.
죽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죽음조차 길들여졌던 것이다.
저항 한 번 못 하고 삶을 끝냈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죽는 순간까지 나는 어머니에게 부끄러운 딸이 되고 말았다.
미래에 온천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달랐을까?
딱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빼앗기지만은 않았을 거야. 테레사한테 조종당하지도 않을 거야.”
여윈 주먹을 움켜쥐었다.
기다렸다는 듯, 신비한 목소리가 말했다.
-네가 원하면 회귀시켜 줄 수 있어. 가짜 예언서 이전으로는 어렵지만.
가짜 예언서?
심장이 왈칵 뒤집혔다.
몸을 덥히던 열기가 순식간에 식었다.
흐트러진 숨이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역사가들이 증명했어요. 진짜 예언서라고!”
-전부 가짜란 뜻은 아니야. 몇몇 단어를 고쳐서 내용을 뒤집어버렸지만.
“누가요?”
-몰라서 물어? 네 자리를 탐내던 그 여자애랑 걔 엄마지.
차가워진 손끝이 덜덜 떨렸다.
예언서가 나타난 후 내 인생은 지옥에 처박혔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고 철저히 버려졌다.
모든 것이 테레사의 계략이었다고?
차라리 거짓말이라고 해줘. 제발.
-안타깝게도 사실이다. 넌 철저히 농락당한 거야.
“말도 안 돼……!”
-너에게 두 개의 선택지가 있어. 첫째, 과거로 회귀한다. 둘째, 그냥 죽는다. 어떻게 할래?
두 개의 선택지.
죽느냐, 사느냐.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던 시절로 갈 수 있나요?”
간절하게 물었건만 신비한 목소리는 내 기대를 저버렸다.
-헬레나를 살리는 건 능력 밖이야. 내가 살릴 수 있는 건 너 한 명뿐이다.
참았던 눈물이 또 맺혔다.
어머니가 없는 과거 따위엔 관심 없었다.
-1년 전이나 1달 전으로 보내줄 수는 있어. 그런 소설 많잖아?
“과거로 돌아가서 실수를 바로잡는 것 말인가요?”
-그래. 가족을 후회하게 만들어 줘. 넌 미래를 알잖아.
그 말에 피식,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안다고 달라질까요? 저는 저주받은 폐왕녀일 뿐인데.”
-…….
“회귀해봤자 또 정략결혼으로 팔려 갈 거예요. 도망칠 곳도, 도와줄 사람도 없으니까요.”
아쿠아로드에는 내 편에 서 줄 사람이라곤 떠오르지 않았다.
혼자서 싸울 마력도 없고, 테레사의 계략을 입증할 증거도 갖지 못했다.
무작정 돌아갔다간 똑같은 지옥만이 나를 기다릴 게 뻔했다.
기절할 때까지 얻어맞고 강제로 깨어나 다시 매질을 당해야 했던 나날들.
우는 법도 웃는 법도 잊어야 겨우 견딜 수 있던 하루하루.
그 안엔 내 고통을 즐기는 테레사와 날 버린 아버지, 비웃음을 가득 머금은 시녀들로 가득했다.
언제나 따스한 손길로 날 감싸주셨던 어머니는 없었다.
기적도 어머니를 살릴 수 없다고 했다.
그럼 나는 어떤 과거로 가야 할까.
-어차피 똑같을 테니까 포기하겠다는 거니?
목소리가 물었다.
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를 되찾을 수 없다면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회귀할게요. 대신 죽기 5분 전으로 보내줘요.”
내 결정에 신비로운 목소리가 높아진 톤으로 되물었다.
-고작 5분 전으로 회귀하겠다고?! 진심이야?
“유일한 탈출구는 세드나 공작뿐이에요. 그를 만나야 해요.”
대륙 그 누구보다 강한 남자. 잠시나마 나와 결혼하려 했던 남자.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세드나 공작이 내 인생을 바꿀 유일한 열쇠였다.
심장을 빼앗기기 전에 그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서둘러야 할 거야. 널 기다리다가 …돼버리면 끝인데.
신비한 목소리가 중간에 끊어졌다.
내가 다급히 물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누군데 날 회귀시켜준다는 거예요?”
-헬레나의 딸. 불과 물 모두를 가진 아이. 나는 너의…….
“잘 안 들려요!”
-나는……. 나는…….
목소리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온천수에 담겨있던 내 몸도 서서히 투명해졌다.
이대로 사라져버리는 걸까? 정말 회귀할 수 있는 거야?
환상 속에서 한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대는 정말 목욕을 좋아하는군.』
비명이 새어나갈 것 같아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분명 입을 막고 있는데 어디선가 내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도 무례하십니다, 각하.』
미래의 나일까? 내가 모르는 나는 침입자와 잘 아는 사이 같았다.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목욕하는 여자를 훔쳐보는 남자에게 어떻게 익숙해지겠습니까.』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바라보는 것에서 멈추지 않을 생각이거든.』
그가 내 쪽으로 바짝 다가섰다.
흩날리는 백금발을 가진 미남자.
나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 * *
살로메디안 세드나.
그 이름을 발음하자,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빛이 돌아왔다.
똑같은 웨딩드레스, 똑같은 결혼식장, 똑같은 함성.
이것도 환상인가? 아니면 진짜 미래를 보고 온 걸까?
믿기지 않게도 이미 본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손등을 꼬집어 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불안이 전신을 휘감을 때, 의전관의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크로티무스 황제 폐하의 숙부이자, 대영지의 주인이신 살로메디안 세드나 공작 각하 입장하십니다!”
심장이 미친 말처럼 내달렸다. 신부를 위한 행진곡이 연주되고, 테레사가 내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공작의 총애를 얻어. 나와 왕국을 위해.”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정말 사망 5분 전으로 회귀한 거였다.
이유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흰 융단 끝에 내 심장을 뜯어낸 남자가 서 있었다.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지? 나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해?
맥박이 터질 것 같았다.
분명한 건, 과거처럼 행동한다면 또다시 개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이었다.
그제야 흐릿하던 시야가 밝아졌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내 인생을 망친 악녀, 테레사였다.
“테레사. 저 사람이 나랑 결혼하려는 이유 알지?”
“그깟 게 무슨 상관이야? 공작을 꼬시면 왕녀로 인정해줄게. 너 따위를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겠다고.”
질문을 바꿔봤지만, 테레사의 대답은 똑같았다.
‘넌 영원히 그대로일 거야. 하지만 나는 이제부터 변할 거야. 어머니에게 부끄럽지 않은 딸이 될 거거든.’
직접 겪고도 믿기지 않는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이것이 어머니가 말씀하셨던 기회라면 절대 놓칠 수 없었다.
나는 죽음을 겪었고, 다시 살아났다.
예언서가 가짜란 것도 알았다.
남은 것은 테레사에게 길들여진 인생을 180도 틀어버리는 것뿐이었다.
“인정 따위 필요 없어. 가족 같은 건 내가 갖다 버려버릴 거니까.”
허리를 곧게 펴고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그 말을 하고 나니, 비로소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기분에 사로잡혔다.
심장이 날뛰었지만, 테레사가 더는 두렵지 않았다.
두려운 건 오직 하나.
또다시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가족으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어. 처음부터 우린 가족이 아니었으니까.”
“뭐라고?”
“기억 안 나니? 내가 적통 왕녀고 너는 후궁도 되지 못한 정부의 딸이라는 거.”
테레사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제 앞에서 설설 기던 내 말대꾸가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놀라움도 잠깐, 테레사가 팔을 치켜들었다.
“이년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치려고?”
“미친개는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내 새로운 남편도 그렇게 생각할까?”
내가 살로메디안을 가리켰다. 테레사가 멈칫했다.
대신전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암소처럼 팔려 가는 년이 어디서……!”
저열한 악담을 퍼부었지만, 테레사는 날 때리지 못했다.
스산한 바람이 가슴을 훑어 내렸다.
테레사의 마리오네트로 살아온 시간이 억울해서 이를 악물었다.
“나는 저주의 씨앗 따위가 아니야. 아쿠아로드의 왕녀 이름도 버려주겠어.”
주먹을 꼭 쥐고 중얼거렸다.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너 자꾸 이상한 소리 지껄일래?!”
내 어깨를 테레사가 움켜잡았다.
테레사의 손을 탁, 쳐냈다.
이젠 밀려 올라오는 욕지기를 삼킬 필요가 없었다.
“손대지 마. 역겨워.”
“정, 정말 미친, 미쳤구나?”
분노를 넘어선 황당함에 테레사는 말까지 더듬었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내가 미치면 네가 제일 곤란해질 텐데? 날 선택한 저 남자가 가만히 있어 줄까?”
테레사가 불안한 눈길로 세드나 공작을 흘낏거렸다.
“너 따위가 진짜 공작부인이 될 리 없어. 기껏해야 성 노리개지!”
테레사도 세드나 공작이 나와 결혼하려는 이유를 모르는 듯했다.
크로티무스 제국과 비교하면 아쿠아로드는 약소국 중의 약소국이었다.
아쿠아로드 쪽에서 결혼 이력이 두 번이나 있는 폐왕녀를 신붓감으로 내밀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가 날 직접 선택했다고? 도대체 왜?
“우와아아!”
뒤늦게 축포가 터지고 탄성이 울려 펴졌다.
이번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날 죽였던 남자에게 다가갔다.
누구보다 우아하고 기품있는 자세로.
* * *
별을 녹여 만든 실처럼 빛나는 백금발, 푸른 하늘을 그대로 담은 투명한 눈동자.
놀랍도록 아름답지만 가녀린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포식자의 얼굴.
살로메디안은 신이 빚은 작품이라 해도 믿을 만큼 완벽한 미남자였다.
휘광처럼 두른 오만함과 차디찬 무표정도 그를 돋보이게 할 뿐이었다.
“미친, 너무 잘생겼어!”
“마신이 아니라 물의 천사님 같아요! 너무 아름다워요!”
“저주받은 마녀가 저런 분의 아내가 된다고?! 말도 안 돼!”
귀부인들이 손수건을 물어뜯으며 나를 노려봤다.
마신이라 불리는 공작이 20대 초절정 미남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흰 제복을 입은 그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차디찬 눈빛이었다.
그저 바라보기만 했을 뿐인데 무릎이 덜덜 떨렸다.
장미보다 붉은 피.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채 박동을 멈추지 않던 심장.
죽음의 기억이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비릿한 피 맛이 올라올 때까지 볼 안쪽 살을 깨물었다.
미래로 가려면 왕세녀 시절보다 더 당돌하고, 대담해져야 했다.
“날 기억하지 못하는가?”
살로메디안의 첫 마디도 똑같았다.
나는 그의 푸른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잊은 척도, 잊은 것도 아닙니다. 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죽고 싶지 않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산 채로 제 심장을 뜯어내려 하시지 않습니까?”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내가 그럴 거라는 걸 어떻게 알지?”
“미래를 보고 왔거든요.”
황당하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눈썹을 구겼다.
내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아내가 될 겁니다.”
아내란 말에 그의 입가가 씩 올라갔다.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흥미가 생긴 것 같기도 했다.
“갑자기 왜 변한 건가? 나와 결혼하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저에 대해서 아십니까?”
“지나칠 만큼 많이.”
“각하와 저는 초면입니다만.”
“내 것을 훔쳐 가고서 초면이라고? 한 달 동안 나를 휘저어놓고서?”
적의로 가득 찬 목소리였다.
부분적으로 달라지긴 했지만, 전생에서 했던 말과 내용은 같았다.
내가 무얼 훔쳤다는 게 무슨 뜻일까?
한 달 전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지?
혼란스러움을 겨우 감추고 있을 때 살로메디안이 검지로 내 심장 부근을 짚었다.
움찔, 아찔한 열기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거부감은 아니었다. 구역질도 나지 않았다.
타인이 내 몸을 건드렸는데.
너무나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가 본데, 이건 내 것이다.”
내 것.
그 기묘한 울림이 다시 한번 심장을 움켜쥐었다.
“돌려드리겠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알고 하는 말인가?”
“물론입니다. 돌려드릴 테니 이 자리에서만 가져가지 마십시오.”
내게는 심장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남자와 말씨름을 할 여유가 없었다.
일단 살아서 아쿠아로드를 빠져나가야 했다.
세드나 공작부인이란 이름을 달고.
살로메디안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날 어찌할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일 분 일 초가 억겁처럼 길다고 느꼈다.
* * *
“저… 괜찮으시다면 결혼예식을 거행해도 되겠습니까?”
주례로 불려온 대신관이 끼어들었다.
식은땀을 흘리는 대신관을 보다가 살로메디안에게 속삭였다.
“일단 결혼식부터 끝내시지요.”
“내가 왜?”
“신전에서 피를 보실 작정이십니까?”
“신전이 대수인가?”
“악명이 부족하시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만 크로티무스 제국의 명예와 각하를 보필하는 신하들도 생각해 주시지요.”
누군가 떠올랐는지 살로메디안이 멈칫했다.
예상 밖의 행운에 마음이 급해졌다.
내가 대신관에게 말했다.
“대신관님. 결혼식을 서둘러 진행하십시오.”
“내가 왜 왕녀님의 명령을 따라야…….”
“잡소리 말고, 시킨 일이나 해. 죽고 싶지 않으면.”
대신관의 말을 싹둑 자르고 협박을 곁들였다.
섬뜩한 살기가 내 몸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대신관이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무, 물의 정령 아쿠엘의 이름으로 기도합시다.”
아쿠아로드 왕국은 물의 정령 아쿠엘을 주신으로 모셨다.
치유와 지혜를 관장하는 아쿠엘 덕에 신관들은 고급 치료술을 쓸 줄 알았다.
내가 모진 목숨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그 탓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예식, 언제까지 해야 하나?”
지루한 기도를 들으며 살로메디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꽤 길어질 겁니다. 물의 기도를 하려면.”
“물의 기도?”
“욕조에 들어가 아쿠엘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의식입니다.”
독실한 신자는 아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기도를 핑계로 목욕할 수 있었으니까.
“그만하지.”
뭘 어쩌시려고요, 라고 묻기도 전에 살로메디안이 선언했다.
“결혼식은 끝났다. 다들 물러가라.”
물을 끼얹듯 차가운 정적이 대신전을 점령했다.
아쿠아로드가 아무리 약소국이라곤 하지만, 왕족과의 결혼식을 중지하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무례였다.
하긴, 신부의 심장을 뜯어가는 신랑이 예의를 따질 리 없겠지.
살로메디안의 서늘한 시선이 내게로 떨어졌다.
“나는 내 것을 가지고 돌아가겠다.”
또 나를 ‘내 것’이라 불렀다.
정확히는 내 심장이었으나, 맥박이 날뛰고 호흡이 흩어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열기가 후끈 치솟았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아무도 저를 거스를 수 없다는 오만함.
그 오만함을 뒷받침하는 힘과 권력.
살로메디안은 그 모두를 가진 남자였다.
“예식도 마치지 않고 소중한 언니를 끌고 가실 수는 없습니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테레사였다.
소중한 언니? 내가 왜 네 언니야?
어이없는 말에 소름이 돋았다. 살로메디안이 나른한 어조로 물었다.
“넌 누구지?”
“아쿠아로드 왕국의 왕세녀 테레사입니다!”
“그래서?”
“제국 황족이라고 해도 저를 무시하실 수는 없습니다.”
“무시한 건 아니지만. 무시했다면 어쩔 건데?”
살로메디안이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였다.
테레사로서는 견딜 수 없는 치욕일 거였다.
“각하! 정녕 아쿠아로드와 척을 지시려는 겁니까?”
“거슬리면 결투를 신청해. 말싸움은 질색이니까.”
그가 손가락으로 검 손잡이를 톡 건드렸다.
순간 팽팽한 긴장감이 대신전을 감쌌다.
하늘을 가르는 검술과 신조차 위협하는 마력을 가진 최강의 남자.
그가 어린 여자에게 결투 신청을 종용하고 있었다.
자기가 이길 걸 뻔히 알면서도.
그냥 죽이면 후환이 생기지만 결투 중에 죽인다면 문제없으니까 저러는 거겠지?
마신이란 별명이 찰떡이네…….
이런 남자를 상대로 심장을 지킬 수 있을까?
까마득한 불안이 목 끝까지 치받았다.
살로메디안의 아름다움에 취해있던 귀빈들도 그제야 그가 누군지 되새기는 듯했다.
“부디 용서하십시오! 딸을 대신해서 제가 빌겠습니다!”
국왕이 나섰다.
일국의 왕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비굴한 태도였다.
테레사를 껴안은 왕비도 눈물을 글썽였다.
“우리 테레사가 어려서 실수한 거예요! 하나뿐인 딸을 살려주세요!”
뭉클한 가족애를 선보이는 아버지와 계모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테레사가 하나뿐인 딸이었다면 나는 뭐였을까?
고기, 내장, 가죽 뭐 하나 버릴 것 없는 가축? 헐값으로 팔아치울 수 있는 재산?
칼로 온몸을 난자당한 듯 고통스러웠다.
한편으로 홀가분하기도 했다.
마지막 하나 남은 미련을 완전히 접을 수 있었으니까.
‘가족이 아니라 어머니를 죽인 원수일 뿐이야. 난 새로 태어났어. 이제 과거처럼 살지 않을 거야.’
그제야 날 옥죄던 쇠사슬이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내 입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각하. 아쿠아로드 왕세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 * *
대신전의 모든 이들이 경악에 휩싸였다.
이 정도로 뭘 놀라고 그러시나. 앞으로 재미있는 일이 더 많을 텐데.
아슬아슬한 불안감 대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흘러나왔다. 덕분에 한 발짝 앞으로 나설 수 있었다.
“황족을 모욕한 자를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시아 언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사색이 된 테레사가 외쳤다.
내가 여유롭게 받아쳤다.
“내가 틀린 말 했니? 아쿠아로드 왕족이라고 해 봤자 제국 시골 영주만도 못하잖아?”
“길러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년!”
국왕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내 손가락이 그를 가리켰다.
“각하. 국왕도 함께 베시지요. 사랑하는 딸과 함께 죽을 수 있어서 기쁠 겁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살로메디안이 미간을 좁혔다.
“지금 아비와 이복동생을 죽이라고? 신전에서 피를 보지 말라고 한 건 그대 아닌가?”
“제 피는 아니지 않습니까.”
“본인 피만 아니면 괜찮다?”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해?
내 인생을 망치고 어머니와 그 가족까지 죽인 인간들인데.
“세드나 공작과 공작부인이 될 저를 능멸한 자들입니다. 자비 따위는 잊으십시오.”
살로메디안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왠지 웃음을 참는 것 같았다.
“내 아내가 될 거라고 지나치게 확신하는군.”
“결혼을 원하신 건 각하입니다.”
“내가 변덕스럽다는 소문 못 들었나?”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이번엔 그러지 않으실 테니까요.”
“…….”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살로메디안이 입을 다물었다.
순간 대신관이 들고 있는 성혼 확인서가 보였다.
대신관은 방심하고 있었다. 기회였다.
“와, 왕녀님?!”
성혼 확인서를 낚아채자, 대신관이 비명을 질렀다.
내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제 피를 좀 봐도 괜찮을 것 같군요.”
“무슨 뜻이지?”
“이런 뜻입니다.”
눈썹을 찌푸린 살로메디안을 바라보며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엄지를 물어뜯었다.
피가 흩뿌려지면서 순백의 웨딩드레스가 붉게 물들었다.
나는 피 묻은 엄지로 성혼 확인서에 지장을 찍었다.
그리고 살로메디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잠시 빌리겠습니다, 각하.”
내 쪽에서 누군가를 잡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구역질을 못 참겠거든 토하지 뭐. 일단 결혼부터 해야 해!
내 머릿속엔 오로지 결혼뿐이었다.
“대체 뭐 하는 건가?”
살로메디안의 푸른 눈이 처음으로 잘게 흔들렸다.
그가 내 손을 뿌리치기 전에 강제로 지장을 찍었다.
“뭐 하긴요? 부부가 되고 있는 중입니다.”
성혼 확인서 위에 한 쌍의 지장이 찍혔다.
뚝뚝 떨어진 핏방울 때문에 음산해 보이긴 해도 법적 효력을 가진 문서가 완성되었다.
“…….”
내 살벌한 눈빛을 본 대신관이 살로메디안의 눈치를 봤다.
살로메디안은 침묵했다.
대신관은 그것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살로메디안 세드나 공작 각하와 아이시아 왕녀님의 결혼이 성사되었음을 선언합니다!”
* * *
신랑 신부의 행진을 알리는 연주곡이 흘러나왔다.
꽃가루 사이로 두려움 섞인 웅성거림이 떠돌아다녔다.
살로메디안이 낮게 읊조렸다.
“그대는 내가 알던 여자가 아닌 것 같다.”
죽다가 살아났는데 똑같을 리가 없지.
그런데 날 언제 봤다고 자꾸 아는 척일까?
“사람은 변하는 법입니다.”
“보통, 사람이 잘 안 변한다던데.”
“그럼 성장했다고 생각하시지요. 전 새롭게 태어났고, 앞으로 더 성장할 겁니다.”
건조한 어조로 답했다.
살로메디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신전에서 피를 볼 만큼 나와 결혼하고 싶었나?”
“네.”
“내가 크로티무스 황족이라서?”
“아니요. 당신이 살로메디안 세드나라서요.”
내가 답했다.
그러자 그가 툭 던지듯 한마디 했다.
“잘도 답하는군. 얼굴은 새신부가 아니라 암살자 같은데.”
무표정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암살자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불쾌함을 꾹꾹 누르는데 그가 내 손을 낚아챘다.
숨을 멈췄다. 아니, 쉴 수 없었다.
“손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타인과 접촉을 했는데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가 내 심장을 짚었을 때도, 지장을 찍었을 때도 그랬다.
왜 구역질이 나지 않는 걸까. 어린아이와 닿아도 어김없이 토악질이 올라왔는데.
내 손을 내려다보는 살로메디안의 표정은 진지했다.
짙은 눈썹, 날카로운 콧날, 그린 듯 섬세한 입술.
상처에서 낯선 열기가 자글자글 끓어올랐다.
설마, 날 걱정하는 걸까?
의지와 상관없이 뺨이 달아올랐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돋고 있었다.
그래서 테레사의 광기 어린 눈빛은 무시했다.
“그만 놓아 주십시오.”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 했지만, 그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왜? 우린 부부잖아?”
살로메디안의 눈꼬리가 야릇하게 올라갔다.
부부지만 초면이잖아요? 라고 말하려는데, 그가 내 허리를 한쪽 팔로 감았다.
“각하!”
내 몸을 옥죈 근육질 팔과 아찔하도록 달콤한 체취.
심장 발작보다 위험한 두드림이 날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거친 호흡을 집어삼키고 겨우 평정심을 흉내 냈다.
“왜 이러십니까?”
“그래도 결혼식인데 키스가 필요할 것 같아서.”
바짝 다가온 살로메디안의 숨결이 예민한 살갗을 간지럽혔다.
몸으로 전해지는 그의 체온은 불꽃보다 뜨거웠다.
영혼을 활활 태우고도 남을 만큼.
“좀 무례하십니다!”
쌕쌕거리는 호흡을 뱉으며 살로메디안의 가슴을 떠밀었다.
석류빛 눈동자가 만개한 꽃처럼 벌어졌고, 속눈썹은 파르르 떨렸다.
5년 동안 단련한 무표정이 한순간 허물어져 버렸다.
“치한 취급은 좀 서운한데. 결혼을 성사시킨 건 그대가 아닌가?”
살로메디안이 성혼 서약서를 팔랑 흔들었다.
사뭇 진지한 얼굴이었는데 날 놀리는 것 같았다.
원망을 담아 그를 째려봤다.
“놀리시는 겁니까?”
“신부에게 맹세의 키스도 못 한다는 말은 아니겠지?”
“……!”
“곧 첫날밤도 치를텐데?”
세드나 공작이 귓가에 속삭였다.
또 한번 더운 숨이 훅 끼쳤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솜털이 일었다.
첫날밤……? 그게 뭔데?!
놀라서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내 머릿속엔 아쿠아로드 탈출과 온천밖에 없었다.
왕세녀일 때는 제왕학, 경제학, 신학 위주로 교육받았다.
부부 생활은 성인이 된 후에 어머니나 유모에게 배우는 것이 보통이지만 내 지식은 고작 열 다섯 살에 멈춰 있었다.
정말 키스도 하고, 그것도… 해야 하는 거야?
심장이 왈칵 뒤집혔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예식은 파행이 되고 말았지만 나는 세드나 공작부인이 되었다.
오늘 밤. 이 남자와 한 침대를 쓴다는 뜻이었다.
첫 번째, 두 번째 남편들과 달리 살로메디안은 급사할 것 같지 않았다.
“아까는 결혼은 관두겠다더니…….”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대가 지장을 찍어버리지 않았나? 결혼하기로 하지.”
살로메디안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미래가 바뀌었다.
바라던 일이었으나 떨림을 주체하기는 힘들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분명한 사실은 천사보다 아름답지만, 예의를 개무시하며, 결정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