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당신 얼굴 봤으니 됐습니다. 난 이만 갈게요.’
‘가다니, 당신 어딜 가는데요?’
‘어디든. 내키는 대로. 내가 낄 곳이 아니잖아요. 사이도 좋아 보이고. 애초에 당신을 소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으응? 그게 무슨….’
칼리우스가 돌아왔을 때. 떨리는 눈빛으로 일카이와 카르샤를 보는 그의 모습을 본 순간 아스펠라는 소리를 빽 지르고 말았다.
‘세상에, 당신이 아빠예요!’
“저 아저씨 이상해.”
카르샤가 아스펠라의 다리 뒤로 숨으며 말했다. 아스펠라는 조금 당황한 듯 칼리우스의 눈치를 살피며 아이를 달래봤다.
“카르샤. 그러지 말고 나와서 인사해야지.”
“싫어! 일카이한테 갈래.”
천천히 등을 토닥이고 머리를 쓸어내려 달래도 역부족이었는지, 이번엔 뒤쪽의 일카이에게로 달려갔다. 천방지축 장난꾸러기인 천성이 어딜 가지 않아, 일카이의 다리 사이에서 얼굴만 빼꼼 내민 채로 경계 어린 눈빛을 보냈다.
칼리우스는 그런 카르샤를 보며, 눈빛이 아주 아스펠라를 쏙 빼닮았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저 아저씨 이상하다니깐!”
“저 아저씨 아니고 너네 아빠야 임마.”
일카이는 삿대질하는 카르샤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딱밤을 놓으며 말했다. 제 이마를 문지르던 카르샤가 또 한번 빼액, 소리를 질렀다.
“우리 아빠 아니야! 나 아빠 없써!”
“아빠가 없긴 왜 없어, 저기 있잖아.”
“저거 아빠 아니야!”
아빠 없음, 저 사람 아니고 저거, 아빠 아니야. 세 공격을 동시에 받은 칼리우스는 마치 비수가 꽂힌 것마냥 자신의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아스펠라는 그런 칼리우스를 안타깝게 보긴 했으나, 그렇다 하여 제 딸을 혼내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엄마. 저거 아빠 아니지. 그치?”
일카이가 자신의 의견을 받아주지 않자 심통 난 것인지, 이번엔 다시 아스펠라에게 쪼르르 다가와서는 묻는다. 이제 겨우 네 살 된 카르샤에게 칼리우스는 오랫동안 보고 싶어 하던 아빠가 아닌,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정체불명의 아저씨일 뿐이었다.
“카르샤. 동쪽 서재에 있는 초상화 기억해?”
그러자 카르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쪽 서재라 함은, 쓰는 이가 없는 서재였다. 카르샤는 언제나 그 서재에 대해 궁금했다.
분명 쓰는 이는 아무도 없는데 매일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정돈되어 있다. 사실 그곳은 카르샤의 비밀 기지처럼 사용되기도 했는데, 그곳에서 놀다 초상화 하나를 발견했었다.
“엄마가 그때 그 사람이 카르샤의 아빠라고 그랬지?”
카르샤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샤랑 엄마랑, 그리고 튀니아 왕국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는 사람이었지.
하지만 카르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치만 초상화 아빠랑 저 아저씨랑 완전 달라. 그러니까 아빠 아니야. 아빠는 저렇게 털북숭이 아니야!”
초상화 속의 아빠는, 아주 깔끔하고, 단정하며, 잘생긴 남자였다. 고작 네 살짜리라도 미적 감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헌데 눈앞의 사내는 긴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긴 턱수염이 보이며, 어쩐지 꾀죄죄하며, 또 옷은 마치 다른 이의 것을 훔쳐 입은 것처럼 터질 것 같이 작았다.
“초상화랑 완전히 다른 사람인걸. 내가 오또케 믿어!”
결국 칼리우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면도 좀 하고 올게요, 아스펠라.”
황혼에 가까워지던 시간, 그토록 기다렸던 이와 만나 기쁨을 만끽하려던 것은 잠시 밀어둬야겠다.
아스펠라를 만난 기쁨으로 제 몰골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는데 이래가지곤 제 딸에게 영영 인정받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스펠라 역시 그런 그를 말리지는 않았다. 물론 그녀는 그런 몰골의 칼리우스여도 상관없었고, 무엇보다 투명하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를 보는 순간 칼리우스라는 걸 단번에 알았지만 아무래도 카르샤에게는 그저 이방인일 뿐이었다.
아스펠라는 어깨가 축 처져서 터덜터덜 계단을 오르는 칼리우스의 뒷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다, 얼른 시종을 불러다가 그의 옷가지들을 꺼내오라 명했다. 그러곤 제 손을 꼭 잡고는 콧김을 흥, 내뿜으며 “아빠 아니라니까.” 중얼거리는 카르샤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봤다.
아스펠라는 맨 처음, 자신의 뒤에 숨어 빼꼼이 쳐다보는 카르샤를 자신과 일카이의 딸이라 착각했던 칼리우스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아스펠라가 후 한숨을 내쉬다, 이내 뭔가 생각이 난 듯 눈을 빛냈다.
***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하는 게 얼마만인지, 목욕을 마치고 깨끗해진 몸으로 나온 칼리우스는 드디어 거울 앞에 섰다.
시중을 들던 시종들도 그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정말 자신들이 모시던 주인이 맞는 건지 확신하지 못하는 듯했다. 아스펠라의 저택에서 일하는 이들 대부분은 모두 대공성에서 일하던 이들이었다.
칼리우스는 거울 속의 자신을 마주하고는 한껏 당황했다. 이 정도라면 카르샤가 털북숭이 아저씨라 부를 만하고도 남았으며, 시종들이 왜 그리 저를 믿지 못하는 눈치인지 이해가 갔다.
민가의 빨랫줄에 널려있는 옷을 몰래 훔쳐온 것인지라 사이즈가 맞지 않는다는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었고, 거기에 며칠씩 방황하며 이리저리 정처 없이 다녔으니 그야말로 부랑자의 몰골이었다.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아스펠라가 대단하다 느낄 정도로 그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이런 꼴로 아스펠라와 카르샤를 만나다니, 한숨을 푹 내쉬며 칼리우스는 마저 면도를 했다. 거품을 씻어내고, 맨질해진 얼굴로 이번엔 세면대 위의 가위를 들어올렸다.
어깨까지 삐죽삐죽 늘어진 머리칼을 잡고는 짧게 자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머리칼까지 모두 자르고 나서야 칼리우스는 거울 속의 자신을 조금 봐줄만 하다 생각했더랬다.
자신의 몸에 꼭 맞는 새 옷을 받아 갈아입고 옷매무새를 만지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고 아주 작은 머리통 하나가 빼꼼 들어왔다. 아직 경계하는 아기 고양이 마냥 바짝 털을 세운 채로 자신을 보고 있다. 칼리우스는 유하게 미소 지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들어와도 된단다.”
그러자 카르샤가 슬그머니 뒷짐을 진 채로 들어왔다.
“엄마가, 이고, 갖다 주라고.”
그러고서는 조막만한 주먹을 그에게 불쑥 내밀었다. 칼리우스가 손을 내밀자 카르샤가 손에 힘을 풀곤 그의 손바닥 위에 뭔가 툭 떨궜다.
“이건….”
그의 손바닥에 올려진 것은 다름 아닌 반지였다. 그 반지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다. 몇 년 전 루이나의 상자로서 같이 봉인되었을 때, 아스펠라와 마지막 인사를 한 뒤 그녀의 손바닥에 올려놓은 자신의 반지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둘의 결혼반지.
‘아스펠라가 이걸 여태 보관했었군.’
“아빠 거라구, 엄마가 나보고 직접 갖다주랬어여.”
“그래. 고맙구나. 무척 소중한 거였거든.”
그러자 카르샤가 슬쩍 몸을 배배 꼬더니, 이내 문을 향해 소리쳤다.
“이제 됐지?!”
문틈 사이로 아스펠라 역시 고개를 빼꼼 내밀곤 카르샤를 향해 엄지를 들어올렸다. 카르샤는 조금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 헤헤, 작게 웃음소리를 내다 칼리우스와 공중에서 눈이 딱 마주쳤다.
털북숭이 아저씨는 아빠가 아니라며 단호하게 말하던 카르샤였는데, 이번엔 불편한 기색을 내기는커녕 또 한번 몸을 배배 꼬고는 엄마에게로 달려갔다.
아스펠라가 방안으로 들어와 카르샤의 엉덩이를 작게 토닥였다.
“잘 전달해줘서 고마워, 카르샤.”
“우웅.”
다시 한번 칼리우스를 힐긋 바라보기에, 칼리우스 역시 또 미소를 지어줬다. 조금은 자신에게 경계를 푸는 걸까 싶었는데, 잠시 아스펠라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더니 귀에 대고 뭐라 작게 속삭였다. 그리곤 “일카이 삼쫀한테 갈래!” 하곤 쪼르르 달려나갔다.
아무래도 영 사이가 가까워지는 게 쉬워보이지가 않아, 칼리우스가 어색한 미소로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시간은 많으니까. 내 생각엔 당신이 싫다기 보단, 쑥스러워 하는 것 같은걸요.”
“…거울을 처음 봤는데, 나 같아도 털북숭이 아저씨라면서 싫어할 것 같더군….”
“지금은 다시 초상화 속 아빠랑 똑같다고 부끄러워하는데,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거예요.”
아스펠라는 칼리우스에게 다가가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정말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정말 내가 아는 칼리우스가 맞네요.”
“응.”
“진짜로 돌아온 거죠.”
“응.”
아스펠라는 칼리우스의 손바닥에 들려있던 반지를 집어들더니, 손수 그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딱 맞는 반지에 아스펠라는 그저 감격스러운 듯 잠시 그의 손을 매만졌다.
“아직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때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에게 자신의 반지를 주고 간 이유는 자신을 잊지 말라 부탁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기다리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걸 아스펠라가 모를 리 없었다.
“당신은 아직 날 너무 모르는 것 같아요. 당신을 두고 어떻게 내가 다른 이를 만나겠어요? 야속했어. 오기로 기다렸지. 언젠가 돌아오면 내가 꼭 보란 듯이 이걸 다시 껴준다고. 봐. 결국 내가 이겼죠?”
그렇게 말하는 아스펠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칼리우스가 손을 들어 충혈된 눈가를 쓸어주자, 아스펠라가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내 코를 훌쩍이곤 씩 웃으며 농담까지 했다.
“평생 기다릴 작정이었는데 오히려 생각보다 빨리 돌아와서 놀랐다니까요. 정작 자기 애도 못 알아보고 나와 일카이의 아이인줄 헛다리짚은 야속한 남자인데.”
아스펠라가 째려보며 말하자, 칼리우스는 안절부절못하며 얼른 변명하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라, 난 당연히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거라 생각했고. 일카이는 당신에게 진심이었으니까….”
그날 결혼반지를 아스펠라에게 돌려주며, 아주 잠깐 일카이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 대신 아스펠라 곁을 지켜달라는 그의 눈빛을 알아챈 듯 일카이는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샤는 당신 아이가 맞아요. 저 얼굴을 봐요. 아주 빼다 박았는데. 나 참 부녀가 서로 못 알아봤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라니까. 그래서, 만약에 나와 일카이의 아이였으면 어쩔 셈이었는데요?”
“행복을 빌어주어야겠죠….”
연신 시무룩하게 말끝을 흐리는 칼리우스에게 아스펠라가 마지막 기회라는 듯 되물었다.
“진짜 그럴 셈이었어요?”
그러자 잠시 침묵하던 칼리우스가 슬쩍 입꼬리를 당겨 올리며 아스펠라의 입술을 머금었다. 이내 아스펠라를 번쩍 들어 올려 그녀를 소파 위에 눕히며 말했다.
“아니.”
***
맨 처음 눈을 떴을 땐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았으며 자신에게 손과 발이 있다는 걸, 더 나아가 자신이 누구였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이따금 웬 목소리가 나타나 그에게 말을 걸곤 했다. 그를 종종 ‘상자야’라고 부르곤 했고, 자신을 ‘루이나’라고 말하긴 했으나 그는 사실 모든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루이나가 물었다.
「정말 나랑 대화 안 할 거니? 마지막 인사는 좀 제대로 해줬으면 하는데. 상자야. 넌 정말 참으로 재미없는 존재구나. 이런 애랑 평생 공존해야 한다니.」
쯧쯔즈 혀를 차던 루이나에게 의문점이 들었다. 마지막 인사라니? 곧 떠나기라도 한다는 소리인가? 뭐, 어찌되는 상관없다. 어차피 그에게는 암흑뿐이었으니까.
「얘, 나갈 준비 안하고 뭐하는 거야 대체?」
준비라니. 나가기는 어딜 나간단 말인가. 그저 자신을 좀 조용히 내버려뒀으면 했다.
「아스펠라가 데리러 올 거라니까. 빨리 준비 안 해?」
그러자 처음으로 제 입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스펠라가 날?’
어떻게 데리러 온다는 건가. 아니, 그보다 아스펠라는 누구더라.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뭔가가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그것이 자신의 심장이라는 걸, 그곳에서 피가 흐르고, 손과 발에 따듯한 피가 돈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아스펠라가 누구더라.
아스펠라는…….
멀리서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기 좋은 중저음의,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였는데 아스펠라가 누군지 기억도 안 나면서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그녀의 목소리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따라가. 아스펠라가 마중 나왔네.」
그와 동시에 암흑뿐이었던 곳이 싱그럽고 울창한 숲으로 변했다. 눈이 보이기 시작한 것에 놀라기도 잠시, 하늘을 돌아다니며 지저귀는 새의 소리가 들렸다.
시선이 아래로 내려와 자신의 발을 쳐다봤다.
오동통한 발은 아주 작았다.
그는 어쩐지 목이 마르는 듯해 물가로 갔다. 수면 위에 비친 자신은 아주 작은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그때 또 한번 아스펠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맨 처음에는 웅얼거려 제대로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이번엔 선명하게 들렸다.
‘칼리우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자신의 이름임을 깨닫게 되었다. 칼리우스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따라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온통 어두웠으나 저기 멀리서 손톱만한 빛이 보였고, 목소리는 그곳으로부터 들려오는 것 같았다. 칼리우스는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천천히 걷던 그의 다리에 점점 힘이 실렸고, 이윽고 그는 힘차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까지 숨이 차올라도 계속해서 달렸다. 이내 아주 멀리서 보이던 빛에 가까워졌다. 그 작은 점이 점점 더 환한 빛을 내며 커지더니 칼리우스를 덮치듯 밝게 빛났다.
눈이 부셔 찌푸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차가운 동굴 속에서 눈을 떴다.
이곳이 어딘지는 중요치 않았다. 자신이 알몸인 것도 중요치 않았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아스펠라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
“잠깐, 내가 당신을 불렀단 말이에요?”
아스펠라가 담요를 끌어당겨 알몸을 가리며 물었다. 칼리우스는 그런 아스펠라의 어깨 부분을 살살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목소리가 들렸고, 그 목소리와 빛이 나는 곳을 무작정 따라가니 동굴이 나왔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마 블레드 성의 지하가 아닐까 싶어요. 그때 당시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동굴에서 나와 그가 마주한 것은 무너진 건물들, 어쩐지 황량해 보이는 숲. 사람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듯한 거리였다.
빈집에 들어가 옷을 아무거나 걸친 뒤 칼리우스는 그렇게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몇 번 길을 헤매고, 몇 번 밤을 지새고. 그러는 동안 점점 기억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선명하진 않지만 점점 아스펠라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게 몇날며칠 걷다 보니 웬 탑 같은 것이 나왔다. 그곳의 병사들은 칼리우스를 보자마자 총구를 들이밀며 사람인지, 불사체인지를 확인했다고 한다.
‘뭐야, 멀쩡한 인간이잖아. 이봐, 여긴 출입금지 구역이라고. 불사체한테 뜯겨서 같이 동족이라도 되고 싶은 거야? 수상한 놈인데, 이놈 혹시 불사체 숭배자 아니야? 대장한테 데려가자.’
갑옷을 입은 이들에게 끌려간 칼리우스는 그곳에서 또 며칠 동안 구금당해 있었다.
‘이봐. 자네 신분이 뭐야? 뭐하는 놈이야? 신분 증명해줄 만한 사람 없어?’
그들에게 칼리우스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아스펠라를 만나야 하오. 나는 칼리우스요.’
하지만 그의 말을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다들 날 미친놈 취급하더라고요. 일카이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마 지금도 구금되어 있었을 겁니다.”
칼리우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스펠라를 만나야 한다. 나는 칼리우스다. 흔하지 않은 이름이었던 탓에 곧장 기사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이름을 곱씹었다고 한다.
‘아스펠라? 대공 부인 말하는 거 아닌가? 칼리우스라면 ‘그날’에 죽었다 하지 않았어? 에라이 이런 미친놈을 다 봤나. 죽은 이 사칭하는 것도 죄다 이놈아. 게다가 어딜 감히 우리 언데드 기사단장님 이름을 들먹여? 천벌 받을 놈. 옷 꼬라지는 또 왜 이래?’
정말 억울해지려던 찰나였다.
‘돌아가신 대공 각하 이름까지 파는 걸 보면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대장한테 데리고 가자. 가서 이 자식이 아스펠라 님 이름 들먹인 거랑 대공 각하 사칭한 거 일러바치면 이놈 최소 사형이야.’
넌 이제 끝났다 이놈아, 하며 기사들은 칼리우스를 묶어 어디론가 끌고 갔다. 탑 아래쪽의 작전 회의 방으로 끌려간 칼리우스는 그들이 말하는 대장을 만날 수 있었다.
‘대장! 이 자식 좀 보십쇼!’
‘뭐야?’
‘출입금지 구역에서 발견한 놈입니다. 엄청 수상합니다! 돌아가신 대공 각하를 사칭하고, 아스펠라 님 이름을 들먹이던 놈입니다. 아주 혼쭐을 내주십쇼!’
‘어떤 간 큰 새끼가 감히 그 이름들을 들먹여? 불사체 밥으로 던져주랴?’
인파를 가르며 다가와 으름장을 놓은 이는 바로,
‘일카이?’
일카이였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그에 대한 기억도 모두 떠올랐다.
“덕분에 아스펠라 당신에게 올 수 있었습니다. 제대로 인사를 해야 하는데.”
“아마 지금쯤 카르샤랑 노느라 바쁠 거예요.”
“둘이 죽이 잘 맞던데요.”
“그래. 당신이 부녀지간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말이죠.”
“그건 내가 정말 잘못했어요, 아스펠라.”
칼리우스가 항복하듯이 아스펠라의 품을 파고들며 말했다. 아스펠라 역시 킥킥 웃으며 그런 칼리우스를 꼭 껴안았다.
일라이와 함께 이곳에 도착했을 때, 칼리우스는 그 드넓은 곳에서 아스펠라가 어디에 있을지 바로 알 것만 같았다.
여전히 아스펠라의 목소리가 귀에 맴도는 듯 했고, 마치 그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는 듯했다.
그리고 드디어 만났을 때 오만 감정이 파도처럼 그를 덮쳤다. 감격해 서로 꼭 껴안은 채로 눈물만 흘리고 있는데…… 아스펠라 뒤로 보이는 저 작은 머리통은 대체 뭐지?
도도도 짧은 다리로 달려와 아스펠라의 치맛자락을 꼭 잡곤 자신을 노려보더니 이내 저 멀리 오는 일라이에게 후다닥 달려가 안기는 것이었다.
그 광경에 바로 묻지는 못했지만, 칼리우스는 다행히 아스펠라가 날 잊고 잘 살았구나 하며 안도함과 동시에 가슴이 찢어질 듯 속상했다.
이미 둘은 가족이 되었고, 자신 역시 아스펠라를 여전히 사랑하지만 애까지 있는 부부의 사이에 끼어들 수는 없는 법.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로 다시 생을 얻긴 했지만, 아스펠라에게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으며 또 아스펠라에게 죄책감 따위도 주고 싶지 않았다.
물론 아주 찰나의 착각이었지만, 이후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아스펠라를 닮기도 하고 또 자신을 닮기도 한. 물론 저렇게 귀엽고 작고 사랑스러운 걸 보면 아스펠라를 훨씬 더 많이 닮긴 한 듯하지만.
“카르샤랑 어떻게 해야 친해질 수 있을까요. 이러다가 아빠 취급 전혀 못 받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
칼리우스가 후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카르샤는 그냥 당신을 만나 부끄러운 거라니까요.”
“그치만 눈도 안 마주치려 하던걸요. ……하긴, 갑자기 나타나 네 아빠라 주장하니 어린애한테는 당황스럽겠죠.”
아스펠라가 고개를 숙여 그런 칼리우스의 이마에 입을 쪽 맞추곤 장담컨대, 운을 뗐다.
“카르샤는 당신을 절대 싫어하지 않아요. 무서워하지도 않고.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거예요. 무엇보다 카르샤는 내 딸인걸.”
날 닮아 분명 당신 얼굴에는 약할 거라며, 아스펠라가 하하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칼리우스는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다 이내 천천히 아스펠라의 가슴께를 가리고 있던 담요를 빼냈다.
물론 카르샤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눈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 아스펠라가 먼저였다.
***
아빠의 서재에서 초상화를 본 뒤부터, 카르샤의 이상형은 ‘아빠’였다. 엄마 말로는 말투는 좀 재수 없긴 했다만 그렇게나 자신을 챙겨주는 이도 없었고, 의외로 속이 여린 사내라고 했다.
무엇보다 엄마를 가장 사랑했던 사내였고, 자신의 모든 걸 내주었으며, 엄마 역시 가장 사랑하는 사내였다고.
엄마가 아빠를 사랑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했지만, 가장 으뜸인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제 막 네 살이 된 카르샤에게도 미적 감각은 당연히 있었다. 아빠의 초상화를 보는 순간 ‘아! 엄마는 아빠가 엄청 잘생겨서 사랑했구나!’하고 생각했더랬다.
카르샤는 살면서 이렇게 잘생긴 사람은 처음 봤다.
물론 초상화일 뿐이라지만, 펠킨의 말에 의하면 화공이 실력이 떨어져 실물의 반도 못 담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원래 우리 아빠는 대체 얼마나 잘생긴 건가!
그날 이후 카르샤는 아빠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아스펠라는 그것이 아빠의 부재에 대한 외로움 때문인가 싶어 마음 아파했지만, 사실 카르샤는 외로움보다는 ‘아빠가 대체 얼마나 멋진 사람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다.
한번은 일카이에게 물었다.
‘삼똔. 우리 아빠 잘생겨써?’
‘네 아빠? 흐음, 재수 없지만 분하게도 잘생기긴 했지.’
‘펠킨. 우리 아빠 잘생겨써?’
‘예 좀 재수 없으시긴 했지만, 미모와 능력 하나만큼은 왕국 제일이셨습니다.’
‘엄마. 아빠 잘생겨써?’
‘그럼. 엄청 잘생겼지. 사람들은 아빠가 재수 없다고 했지만 엄마한테만은 굉장히 다정하고 부드러웠단다. 물론 엄청나게 잘생겼고. 그러니까 카르샤도 남자를 만나려거든 그런 남자 만나렴.’
‘폐하, 우리 아빠 잘생겨써요?’
‘에르윈 대공은 왕국 제일의 미남이었단다. 얼굴값 좀 하느라 재수 없긴 했어도 아스펠라한테는 아주 맥을 못 췄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물어봐도 모두 한결같은 대답이었다.
요컨대 아빠는 좀 재수 없긴 해도 사랑하는 여자한텐 다정하고, 또 엄청나게 잘생기고, 엄청나게 능력 있는 사람이었구나! 나도 그런 사람 좋아!
이제부터 카르샤의 이상형은 우리 아빠야!
언제나 잠들기 전 엄마나 펠킨, 혹은 일카이가 동화책을 읽어줄 때면 카르샤는 언제나 동화 속 공주님, 그리고 공주와 사랑에 빠지는 사내는 언제나 상상 속 아빠를 떠올리며 잠에 들었다.
“카르샤, 이리 오렴. 아빠한테 인사해야지.”
……그런데, 어째서 터질 것 같이 작은 누더기를 걸치고 있고, 수염과 머리는 덥수룩하며, 어쩐지 꼬질꼬질한 저 이상한 아저씨가 갑자기 우리 아빠라는 건가.
카르샤는 인정할 수 없었다. 우리 아빠는 저렇지 않아!
이렇게 예쁘고 완벽한 우리 엄마가 저런 이상한 아저씨를 사랑했을 리 없어!
카르샤의 환상이 와장창 무너졌다.
“그치만 초상화 아빠랑 저 아저씨랑 완전 달라. 그러니까 아빠 아니야. 아빠는 저렇게 털북숭이 아니야!”
자신의 말에 충격 받은 듯,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가 심장 부근을 부여잡으며 고개를 떨궜다.
그러더니 어깨가 축 쳐져서는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가는 것 아니겠는가.
말이 좀 심했나 싶어 슬그머니 엄마의 눈치를 살피는데, 아스펠라가 카르샤에게 말했다.
“카르샤. 엄마 부탁 좀 들어줄래?”
“뭔데에?”
엄마 손을 잡고 엄마의 서재로 향한 카르샤는, 책상 위에 있던 보석함을 받았다. 참 예뻐서 카르샤가 언제나 가지고 싶어 했던 것 아니었나.
“이거 카르샤 줄게. 가지고 싶어 했지?”
“웅! 근데 엄마, 이 보석함 안에 소중한 게 있다고 했잖아.”
달라고 달라고 떼를 써 봐도, 모든 걸 다 줘도 이건 소중한 걸 보관해야 하는 함이라 줄 수 없다던 엄마 아니었던가.
“괜찮아. 그 안에 있는 거 좀 꺼내줄래?”
“웅.”
뚜껑을 열자 보석함 안에는 반지가 들어있었다. 엄마 손에 끼어져 있는 것과 같은 것. 하지만 조금 더 큰 반지.
이게 뭔가 싶어 가만히 들어 올리자 아스펠라가 말했다.
“이거 아빠한테 가져다줄래?”
“아빠 아니야 그 아저씨.”
말은 가려하자는 듯 단호한 카르샤의 말에, 아스펠라가 꾹 웃음을 참았다. 그간 카르샤가 아빠에 대한 환상이 얼마나 컸는지 잘 알기에 어쩌면 무례할 수 있는 카르샤의 반응에도 나무라지 않았다.
아스펠라는 카르샤의 머리칼을 넘겨주며 말했다.
“초상화 속 아빠는 잘생겼는데, 지금 아빠는 잘생기지 않아서 싫어?”
“아빠 아니라니까아.”
“그치만 카르샤랑 저 아저씨랑 밤하늘 같이 검은 머리칼이 아주 똑같은데? 황금빛 눈동자도 같고.”
“그, 그건 맞긴 하지만. 그래도 카르샤는 인정 할 쑤 없어!”
아스펠라는 최대한 카르샤에게 왜 아빠의 머리칼이 저렇게 된 것인지 알기 쉽게 설명해줬다.
“아빠는 밖에서 온 사람이야. 정확히는 불사체들이 들끓는 곳에서. 바깥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카르샤도 잘 알고 있지?”
아스펠라의 질문에 카르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카이 삼촌을 따라 바깥 외출을 한 날, 세상은 동화 속과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바깥에는 불사체라 부르는 살아있는 시체들이 인간을 공격하고,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 그들에게서 몸을 지켜야 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곳에서는 사람이 마냥 깨끗하고, 몸을 치장하는 것에만 신경을 쓸 수 없어 카르샤.”
아스펠라의 말이 좀 이해가 된 것인지 카르샤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 물었다.
“그럼 아빠 맞아? 진짜루? 초상화 아빠 맞아?”
“그럼 그 아빠도 카르샤의 아빠고, 지금 아빠도 카르샤의 아빠야. 좀 꼬질꼬질하지만, 그래도 엄마는 한눈에 알아봤는걸? 이 반지는 아빠 거야. 원래 아빠 거였는데 엄마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어. 원래 주인이 나타났으니 이제 보관함은 할 일을 다했겠지?”
“그래서 카르샤가 가질 수 있는 고야?”
“응. 이제 그 안에 카르샤가 소중히 하는 걸 담아서 보관해.”
“그럼 이거는 아빠 갖다 줘?”
카르샤가 작고 오동통한 엄지와 검지로 반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주면 엄마는 너무 기쁠 것 같아.”
반지의 동그란 원형 안으로 보이는 엄마가 세상 행복해 보였다.
정말 아빠가 맞긴 한걸까. 카르샤는 엄마를 위해 기꺼이 그 털북숭이 아저씨에게 이 반지를 가져다주기로 마음먹었다.
카르샤는 아스펠라의 손을 잡고 꽤나 힘겨운 결정을 내렸다는 듯 칼리우스가 있을 방으로 향했다.
“지금쯤 들어가면 될 것 같은데.”
아스펠라가 카르샤의 등을 톡톡 두들기며 힘내라는 듯 주먹을 들어 아래로 미당겼다.
카르샤는 그다지 내키지는 않는지 침을 한 번 꼴깍 삼키더니 아주 신 과일을 먹은 표정을 짓곤 조약돌 같은 주먹을 들어 문을 콩콩 두들겼다.
“들어오시오.”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 문을 열었다. 옷매무새를 만지고 있는 칼리우스와 딱 눈이 마주쳤다.
어, 어라? 이상하다? 카르샤는 마치 다른 이를 찾고 있는 듯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털북숭이 아저씨는 어디로 가고 저 멀끔한 사람이 서 있는 건가.
“들어와도 된단다.”
눈이 마주치자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가 초승달처럼 곱게 휘었다. 카르샤는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들어 뒷짐을 진 채로 슬금슬금 방안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이고, 갖다 주라고.”
주먹을 불쑥 들이밀자 칼리우스가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카르샤는 여전히 칼리우스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다 얼른 손에 힘을 풀고 그 위에 반지를 톡 떨궜다.
손이 닿는 건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서였다.
“이건…….”
“아빠 거라구, 엄마가 나보고 직접 갖다주랬어여.”
“그래. 고맙구나. 무척 소중한 거였거든.”
다시 한번 부드럽게 입꼬리를 당겨 미소 짓는 칼리우스의 모습에 카르샤의 눈이 동그래졌다. 카르샤는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문을 향해 소리쳤다.
“이제 됐지?!”
엄마가 잘했다는 듯 엄지를 치켜 올리며 들어오자, 카르샤는 얼른 아스펠라 뒤로 가 숨더니 슬쩍 고개를 내밀고 칼리우스를 힐끔 쳐다봤다.
펠킨의 말대로 초상화보다 훨씬, 훨씬,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되게 잘생겼다. 진짜 내 아빠 맞는 거지?’
그러다 칼리우스와 또 한번 눈이 마주쳤다. 자신과 같은 황금빛 눈동자가 해사하게 빛나며 미소를 지어주자 카르샤는 얼굴이 빨개지는 느낌이 들었다.
칼리우스가 아주 작은 손짓으로 이리 오라는 듯 신호를 보냈다. 카르샤는 그쪽으로 갈지 말지 고민하다 이내 소리쳤다.
“일카이 삼똔한테 갈래!”
어쩐지 몸이 배배 꼬이는 듯 하여 카르샤가 방을 뛰쳐나갔다.
달리는 동안 카르샤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딸기처럼 아주 빨갛게 익어있었다. 막상 아빠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어색하기만 하고, 엄마나 일카이 삼촌에게 구는 것처럼 응석을 막 부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싫다는 건 아니다. 아까 전의 아빠는 털북숭이라서 좀 무서웠는데, 지금은 무섭기는커녕….
“뭐야 꼬맹이. 왜 이렇게 달려?”
한참을 달리다 일카이의 허벅지에 퉁, 하고 부딪히고 말았다. 뒤로 넘어지려는 걸 일카이가 작은 머리통을 잡아 세웠다.
“그렇게 달리다가 코 깨진다.”
“삼똔.”
“오냐.”
카르샤는 슬그머니 일카이를 올려다봤다. 일카이 삼촌도 정말 잘생겼는데, 아빠를 보고 난 직후라 그런가.
“아빠만 못하는 미모.”
어린아이의 악의 없는 폭로에 일카이가 딱밤을 놓았다.
“아야.”
“알아 임마. 너도 벌써 아빠 편이냐.”
카르샤는 자신의 정수리를 문지르며 일카이의 손을 잡곤 뒷마당 정원을 거닐었다. 카르샤는 그동안 칼리우스가 털북숭이 아저씨에서 최고 미남 아빠로 돌아온 것이 얼마나 신기했는지에 대해 쫑알쫑알 얘기하고 있었다.
일카이는 그런 카르샤를 귀엽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카르샤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일카이에게 손짓을 했다.
잠시 다리를 접어 눈높이를 맞추자, 카르샤가 일카이의 어깨를 툭툭 위로하듯 두들겼다.
“뭐냐 꼬맹아?”
“삼똔. 나 사실 다 알아. 울 엄마 좋아했지? 그치만 단념해야지. 우리 아빠 돌아왔어. 그래도 카르샤가 삼똔 많이 좋아하니까 속상해하지는 말구.”
이 자그마한 꼬맹이가 눈치는 더럽게 빠르네. 일카이는 헛웃음이 나오는 걸 꾹 참으며 물었다.
“지금 나 위로해주는 거야?”
“웅.”
그러자 일카이는 자신의 머리통을 들이밀며, “기왕 위로할거면 제대로 좀 위로해줘” 했다.
카르샤는 저보다 한참 큰 일카이의 머리통을 쓱쓱 문대며 말했다. 아이 착해. 아이 울지 말기.
어린애가 뭘 알고서는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오히려 카르샤의 위로 때문에 일카이는 눈물이 쏙 나오려는 걸 참느라 고생이었다.
물론 이 눈물의 의미는 그저 마침내 모두가 해피엔딩이 되었다는 안도감 때문이지, 결코 칼리우스가 돌아와 결국 아스펠라를 뺏겼구나 따위의 지질한 눈물이 아니었다.
일카이 역시 아스펠라 만큼이나 그의 귀환을 반기고 있었다.
맨 처음 자신의 부하들의 손에 끌려온 칼리우스를 본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3년 전, 봉인이 끝난 후 튀니아 백성들 대부분은 바리케이드 안쪽에서 생을 부지했다.
국정을 소홀히 하지 않는 한나나 그런 그녀를 잘 보좌하는 유디티아 후작 덕분에 백성들은 곧 안정을 되찾았고, 불사체로부터 대항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모색했다.
여전히 불사체들이 어디선가 출몰하고, 그에 물린 이들이 마찬가지로 같은 존재가 되는 끔찍한 세계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속에 평화는 조금씩 움트고 있었다.
아스펠라만 빼고.
그 당시의 아스펠라는 정말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칼리우스를 떠나보내고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채 그를 두고 도망쳐 나온 것도, 이후 그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도 너무나 힘들어 했다.
그를 잃어가면서까지 세상을 구하려 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사체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이 세상에 그녀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에르윈 대공이 죽었으나 시신은 찾지 못한 상태였기에 그를 사칭하며 선동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고, 그럴 때마다 상처받는 건 아스펠라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칼리우스를 사칭한다는 놈의 낯짝을 보고, 감히 어디 그의 발톱의 때만큼도 안 닮은 놈이 대공을 사칭하려 들어? 하며 주먹이든 발차기든 하려고 했다.
헌데 짙은 흑발과 수염이 얼굴을 덥수룩하게 덮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로 보이는 황금빛 눈동자는.
‘이런 미친.’
‘대장, 어떻게 할까요 이놈을?’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빨리 묶은 거 풀어, 내가 모실 테니까.’
‘예?!’
칼리우스를 보자마자 일카이는 하던 것들을 모두 멈추고, 그 상태 그대로의 칼리우스를 아스펠라의 집으로 데려갔더랬다.
‘진짜 칼리우스 에르윈 맞지?’
각하라 불러야 할지, 이름을 불러야 할지.
‘그냥 칼리우스라 부른다……?’
‘그렇게 해.’
‘좋아. 그래서 당신 어떻게 돌아온 거야? 그때 봉인으로 같이 들어간 거 아니었나? 상자 뭐시기로. 아. 절대 왜 돌아왔냐고 따지는 건 아니고. 혹시나 루이나의 봉인이 풀리기라도 한 건가?’
일카이는 그날 칼리우스가 봉인의 진 안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봤다. 이후에 바닥에 주저앉아 비를 맞으며 엉엉 우는 아스펠라의 모습도.
분명 그는 루이나와 같이 봉인되었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봉인 속에서 나왔단 말인가.
혹여나 루이나가 풀려나와 또 세상의 종말이니 뭐니 골치 아픈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때 칼리우스가 입을 뗐다.
‘아스펠라의 목소리를 따라 걷다 보니 이곳이었지. 루이나가 풀려날 일은 없을 거다.’
‘그걸 어찌 알아?’
‘자물쇠로 확실히 잠겼으니까.’
칼리우스는 루이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봉인에서 나가는 게 아니야. 난 아예 네 몸 깊숙이 동화되어 버린 거지. 이대로 네가 죽으면 나도 같이 죽도록. 상자가 부서지면 그 안의 것도 같이 부서지도록. 그리 설계된 거야. 그러니 최대한 오래 살아봐. 기왕이면 행복하게.」
‘확실하지?’
‘그래. 확실해. 내가 할 일은 최대한 길고 행복하게 사는 거랬다.’
‘누가?’
‘…루이나가.’
일카이는 그의 말을 모두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뭐, 문제없는 거면 됐어. 따라와.’
‘어딜 가는 거지?’
‘아스펠라를 그렇게 찾아댔잖아.’
‘여기가 아스펠라가 사는 집이야?’
일카이는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우스의 등을 툭 떠밀었다. 그리곤 천천히 마당을 배회하는 칼리우스의 뒷모습을 말없이 쳐다봤다.
아마 지금쯤 아스펠라랑 꼬맹이는 빨래를 널고 있을 텐데.
그를 보고 아스펠라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하는 중이었다.
칼리우스를 보자마자 엉엉 울어대려나. 아님 신나서 펄쩍 뛰려나.
‘아스펠라는 잘 지내고 있나.’
‘곧 만나러 가니까 대답 안 할 거야.’
물론 카르샤의 존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일카이의 아주 작은 심술이었다.
아스펠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하지만, 이제 칼리우스의 연적이 될 생각도 없고, 감히 그럴 수 있다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제 일카이에게 있어 아스펠라는 그저 행복했으면 하는 소중한 존재였으니까.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잘 숨겨왔다 생각했는데, 이 작은 꼬맹이한테 들키고 말다니. 창피하면서도 세 가족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제 머리를 톡톡 쓰다듬어주는 카르샤를 번쩍 들어 목마를 태운 후 일카이가 물었다.
“야, 근데 정말 네 아빠만 못하는 얼굴이야 내가? 삼촌 이래봬도 인기 얼마나 많은데.”
“응. 삼똔도 잘생긴 건 인정해줄게. 그치만 오늘 아빠 보니까 아빠가 제일 잘생겼어.”
“야 너 정말 너무한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털북숭이 아저씨라면서.”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누가 아스펠라 딸 아니랄까봐. 칼리우스의 얼굴이 제 취향 저격인 것까지 똑같다니.
일카이는 입을 삐죽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
다음날, 칼리우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출장에서 돌아온 펠킨은 칼리우스를 보자마자 마치 엄마 잃어 버렸던 아이처럼 그 자리에서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흐어어어엉, 왜 이제야 돌아오셨습니까아아아!”
그렇게 말하며 칼리우스에게 팔을 뻗어 엉금엉금 다가와 그를 꽉 껴안았다.
칼리우스는 살짝 질린 얼굴을 했지만 그래도 아주 오랜 시간 친우이자 보좌관이었던 펠킨의 마음을 이해하는지라 손을 들어 툭툭 그의 등을 때렸다.
이후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민튼이 달려왔다. 민튼 역시 답지 않게 토끼처럼 큰 눈을 한 채로 그를 멀리서 바라보다, ‘정말 에르윈 대공이 맞소?’하며 네 번 정도 되물었다.
결국 카르샤가 ‘민튼 아저씨 바보야? 왜 자꾸 똑같을 걸 묻는 거야아!’ 혼을 내고 나서야 조금씩 믿는 눈치였다.
그 이튿날에는 왕궁으로 향했다.
한나는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던 터라, 왕의 서재에서 그들을 맞이하자마자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유령을 본 듯 한참동안 멍하니 칼리우스를 쳐다보다 소리쳤다.
“이런 미친!”
배다르기는 해도, 같은 피가 흐르긴 하는 건지 일카이와 아주 똑같은 반응이었다.
유디티아 후작은 칼리우스를 보자마자 말없이 마른세수를 하며 알 수 없는 행동을 이어갔다.
‘오 세상에.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하며 고개를 내저었다가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하며 제 볼을 꼬집다가 ‘그래. 안 죽었다니까. 내가 맞다니까. 난 자네가 안 죽었다 생각했지’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또 ‘하지만 분명 같이 봉인되었다면서’하며 또 부정하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러다간 하루 종일 그런 말을 반복할 것 같아 칼리우스가,
“필립. 그만 좀 칭얼대.”
질린 표정을 짓고 나서야 이내 그는 ‘뿌애애애앵!’ 이상한 소리를 내며 칼리우스를 끌어안았다.
칼리우스는 자신이 없었던 이후의 시간들에 대해 제대로 듣게 되었다.
루이나의 봉인에 성공하였으나 불사체들은 역병처럼 번지기 시작했고, 해서 2년간은 미친 듯이 전쟁에 가까운 싸움이었다는 걸.
자라나는 아이들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불사체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는 기초 훈련을 받게 되었고, 소중한 이를 잃은 이들은 남녀 할 것 없이 불사체 사냥을 위해 기사단에 입단하게 되었다는 걸.
수많은 싸움과 죽음을 통해 불사체들의 약점들을 더 알아내었고 이제 사람들의 목표는 불사체들의 근거지가 되어버린 바리케이드 바깥의 영토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봉인 이후에도 세상은 평화를 되찾지 못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칼리우스는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칼리우스는 저 멀리서 흰 개와 놀고 있는 카르샤를 발견했다.
“카르샤가 하양이를 엄청 따라요. 둘이 죽고 못 산다니까.”
아스펠라는 그 둘을 보며 흐뭇하게 말했다. 칼리우스는 그런 하양이와 카르샤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내 카르샤가 던진 공이 칼리우스 발치로 데구루루 굴러왔다.
공을 가지러오려던 하양이는 칼리우스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개가 무언가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는 건 느껴졌지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순 없었다. 마수였던 시절에는 분명 짐승과 대화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못했다.
칼리우스는 천천히 자신의 손을 접었다 폈다. 개로 변할 수 있는 능력은 사라졌다.
문득 궁금해진 칼리우스가 물었다.
“아스펠라. 당신은 아직도 숲이나 동물들과 대화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아스펠라가 제 곁에 와서 코를 킁킁대는 하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봉인이 끝나고 얼마간은 가능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들리지 않게 되었어요.”
더 이상 아스펠 산의 동물 친구들과 이전처럼 대화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여느 인간들처럼 그들의 목소리는 그저 짐승의 언어로만 들렸다.
아스펠라는 산신의 언어를 잃어가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아스펠라는 너구리 영감을 찾아갔다. 아스펠라가 없을 때는 산의 모든 짐승들이 너구리 영감에게 의지하지 않았던가. 그건 아스펠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넌 원래 인간이었잖아, 아스펠라야. 애초에 산신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원래 인간과 짐승이 사용하는 언어는 다른 거란다. 이건 네가 완전히 인간 세상에 녹아들었다는 증거지.]
‘내가 인간 세상에 완전히 적응했기 때문이라고?’
[널 보내줘야 한다는 건 이 영감도 참 슬프지만, 그래. 넌 이제 인간들과 가족을 꾸렸고 그들을 마냥 미워하지 않잖느냐.]
‘하지만 영감, 이대로 영감이나 다른 친구들과 대화할 수 없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일 거야.’
[왜 슬프니? 언어로 대화할 수 없다하여 영영 만나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우린 여전히 가족이고 네 친구이며 곁에 있을 거다.]
너구리 영감과의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산을 내려온 이후부터, 아스펠라에게는 더 이상 짐승의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쉽겠네요.”
“그렇진 않아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으니까. 능력이 없어도 충분히 대화할 수 있는걸요.”
그렇게 말한 아스펠라가 몸을 숙여 공을 집더니 이내 멀리 던졌다. 하양이가 다시 공을 물으러 달려갔다. 멀리서 카르샤가 소리쳤다.
“하양이, 이리로 가져와! 이리루 가져와아!”
카르샤의 말에 다시 쏜살같이 달려가 꼬리를 흔들며 얼굴을 핥아대는 하양이였다.
칼리우스는 잠시 제 옆의 아스펠라 손을 잡았다. 굳이 말을 하진 않았지만 두 사람은 그저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금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직 평화로운 세상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고, 언제든 상황이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들은 평화로웠고,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