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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그 이후를 기다린다는 것 (15/16)

에필로그. 그 이후를 기다린다는 것

봉인이 열리는 것을 막았지만, 세상의 모든 재앙이 사라지고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던 역병과 불사체들이 눈 녹듯 사라지는 동화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봉인 이후 나아진 상황은 하나도 없었다.

수도를 봉쇄하고 갖은 방법을 썼으나, 그 모든 불사체들을 단번에 없애는 일은 불가능했다.

결국 수도는 봉쇄하는 것을 넘어 아예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불사체의 저주와도 같은 증상은 빠른 속도로 변이를 거듭하며, 역병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불사체에 물려 같은 종류로 변화하였고, 그 확산을 막기 위해 귀족들은 물론 백성들까지 신분을 막론하고 힘을 모았다.

새로운 거점을 만들고 왕위에 올라 정식으로 튀니아의 왕이 된 한나는 무너져가는 튀니아를 재건하는 데 힘썼고, 그 나름의 성과를 얻기 시작했다.

한나는 공주의 별장으로 사용되던 작은 성을 증축하여 왕궁을 지었고 그 주변으로 새로운 도심을 만들어 나갔다.

일카이는 로잘린드 가문의 후계자로서 왕실 기사단에 입단하였고, 그는 민튼과 함께 옛 수도를 탈환하기 위해 ‘언데드’ 기사단을 조직했다.

사람들은 위기 속에서 서로 힘을 모아 나름의 생존 방식을 세워 나갔다.

그렇게 3년하고도 반년의 시간이 흘렀다.

***

순찰을 마친 일카이는 여느 때처럼 초콜릿 한 통을 들고 말에서 내려왔다.

그를 맞이하기 위해 나온 펠킨이 그의 겨드랑이에 끼워진 초콜릿 상자를 보고 말했다.

“아스펠라 님께서 한소리 하실걸요?”

“뭐 어때.”

“어휴…….”

펠킨은 이 주책맞은 사내의 행동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일카이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저택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카르샤!”

우렁차게 이름을 부르자, 계단 쪽에서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짧은 다리가 우다다다 뛰어 내려왔다.

일카이는 익숙한 듯 그대로 양팔을 벌렸고, 짧고 통통하기까지 한 다리는 그대로 발돋움을 하며 계단 위에서 그의 품으로 다이빙하듯 뛰어들어 안겼다.

“삼쬰!”

“카르샤!”

“일카이 삼쬰이다! 삼쬰! 이번에도 카르샤 썬물 사와쪄?!”

모래색의 동그란 뒤통수가 일카이의 품을 이리저리 부비작대며 파고들다 이내 뿅, 하고 고개를 들었다. 금색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당연하지. 자, 어때? 삼촌이 최고지?”

일카이는 아까 전 그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에게 초콜릿 상자를 건넸다.

“꺄악! 초콜리잇!”

신이 나는지 발까지 동동 굴러가며 아이가 초콜릿 상자를 꼬옥 껴안았다.

“엄마한테는 비밀이다? 하루에 하나씩만 먹고, 먹으면 양치질 똑바로 하기.”

“웅웅. 약똑하께!”

짧고 통통한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리며 짧은 혀를 굴려 “핑키 뜨웨(pinky swear)!” 소리쳤다.

일카이는 그런 아이의 머리통을 강아지나 고양이 쓰다듬 듯 이리저리 쓰다듬었다.

“삼촌이 최고지?”

“웅웅! 일카이가 체고야!”

그러자 계단 위에서 못마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고는 무슨. 자꾸 초콜릿 주지 말라니까. 밥 안 먹고 초콜릿만 먹는단 말이야. 정말이지 펠킨이랑 일카이 둘 다 말 안 듣는 건 네 살짜리 카르샤랑 똑같군.”

아스펠라였다.

“아스펠라 님! 저는 분명 말렸습니다! 로잘린드 경이 뭐 어떠냐면서 제 말 무시한 것뿐입니다!”

펠킨이 후다닥 달려와 본인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며 억울한 듯 소리쳤다.

일카이는 뭐 이런 고자질쟁이가 다 있나 하는 얼굴로 그를 흘겨봤다.

아스펠라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자신의 어린 딸에게 말했다.

“카르샤. 너 저번에 초콜릿 금지 당하지 않았었나?”

“이잉, 엄마아! 한번만 봐주세여. 카르샤 초코릿 좋아하자나여.”

“애교도 소용없어.”

“히잉. 약똑하께. 양치질두 잘하구, 저녁도 잘 머글꼬야. 웅? 웅?”

카르샤는 토끼처럼 커다랗고 별처럼 빛나는 눈으로 아스펠라의 치마에 매달려 애원했다.

금색 눈동자는 유독 떼를 쓰고 애교를 피울 때 빛이 나는 것 같다.

아스펠라는 카르샤의 눈빛에 매우 약했기 때문에 결국, 이번에도 카르샤의 승리다.

“……진짜 약속이야. 안 그럼 진짜 금지니까.”

“웅!”

아스펠라는 아이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내려주며, 가서 먹어도 좋다는 듯 고갯짓을 했다.

아이는 누구에게 초콜릿 박스를 빼앗길세라 부리나케 달려갔다.

“어휴, 저 초콜릿만 보면 환장하는 건 누굴 닮은 건지.”

아스펠라가 조용히 중얼거리자, 일카이가 누구겠냐며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아스펠라가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일카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거 참, 카르샤 가졌을 때 하루 종일 초콜릿만 먹은 사람이 어디의 누구더라.”

결국 일카이가 일깨워 주자 아스펠라는 슬쩍 어깨를 으쓱였다.

“잠깐 산책이나 좀 하자.”

일카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스펠라에게 따로 이야기할 게 있다는 소리였다.

두 사람은 잠시 저택 마당으로 나가 천천히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들판을 거닐었다.

일카이는 그날 순찰을 돈 이야기를 아스펠라에게 전해주곤 했다.

봉쇄된 수도 안으로 들어가 어느 지점을 확인했는지, 어느 지점엔 불사체들이 얼마만큼 남아 있고, 어느 지점까지 탈환이 가능할지.

“……그리고, 이번에도 칼리우스와 관련된 건 못 찾았어. 블레드 성도 다시 한번 둘러보고, 에르윈 대공 성도 가봤지만 거기에 그는 없었어. 흔적도 없었고.”

아스펠라는 아직 칼리우스가 살아 있다 믿었다.

아직 그를 느낄 수 있다고. 그는 튀니아의 어딘가에 분명 살아 있을 거라고.

루이나를 봉인한 새로운 상자가 되긴 했어도, 그는 분명 돌아올 거라고.

하지만 그동안 칼리우스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아스펠라는 가만히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매만졌다.

실망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직감을 확신하는 듯했다.

“분명 아직 살아 있어. 일카이. 그저 바람을 말하는 게 아니고, 정말 어딘가에 살아 있어.”

“누나.”

“정말이야.”

일카이는 그저 아스펠라를 바라보다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나 말대로 대공은 아직 살아 있을 거야.”

“……카르샤가 조금만 더 크면 나도 곧장 언데드 기사단에 입단할 거야. 아무래도 내가 직접 수도에 들어가 봐야겠어.”

“응. 그래. 그러자. 나보다는 누나가 더 잘 찾을 거야.”

일카이는 아스펠라를 다독이듯,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아스펠라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 이내 말을 이었다.

“카르샤가 자꾸 아빠에 대해 궁금해해. 금색 눈동자를 빛내며 아빠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제대로 된 답을…… 못 해주겠어.”

“아스펠라…….”

“고작 몇년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부터 그의 얼굴이 흐릿해져.”

아스펠라는 그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매일 밤 그날의 일을 떠올린다.

빗속에서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칼리우스의 얼굴, 그의 손길과 입맞춤을 매일 떠올리는데, 어째서 인간은 망각하는 걸까.

점점 칼리우스의 얼굴이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그의 이야기만 나오면 활발하다가도 곧장 시무룩해지는 아스펠라였다.

일카이는 잠시 아스펠라를 바라보다, 이내 아주 큰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올 거야! 대공은 돌아와. 무조건 돌아와! 귀신이든 불사체가 되든, 무조건 돌아온다! 안 그럼 내가 아스펠라랑 카르샤 꼬셔서 새 남편, 새 아빠할 거니까! 무조건 돌아와야지! 제가 안 돌아오고 배기겠어?”

그의 외침에 아스펠라가 살풋 미소 지었다.

그래. 그는 돌아 올 거야. 내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으니까.

***

칼리우스가 봉인의 일부가 되고, 그가 그녀의 곁을 떠난 날.

수도는 불에 타고 그곳의 모든 것이 폐허가 되었다.

그와 함께 살던 에르윈 대공 성과 블레드 성까지. 모두 처참하게 불에 탔고, 무너져 내렸다.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었다.

……입덧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칼리우스를 잃었고,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힘겨워하던 시기도 있었다.

몇 날 며칠 방에 틀어박혀 울다가 잠들고, 또 울다가 잠들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이었다.

맨 처음에는 입덧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저 제대로 먹지 않아 위가 약해진 것이라 생각했지만, 몇 달째 하지 않는 생리와 심해지는 구토감.

한나는 그것이 임신이라는 걸 알려줬다.

그녀의 뱃속엔 칼리우스와의 결실이 움을 틔고 있었던 것이다.

의사는 임신 3개월 정도 된 것 같다는 진단을 내렸다.

아스펠라는 천천히 자신의 배를 쓸어내렸다.

납작했던 배가 점점 더 불러왔고, 그녀는 아이를 낳았다.

아스펠라의 머리색과 칼리우스의 눈을 꼭 닮은 건강한 여자애가 태어났다.

아스펠라는 아이에게 ‘카르샤’라는 이름을 붙였다.

카르샤는 칼리우스의 아주 세세한 부분을 닮았다.

삐쳤을 때 삐뚜름하게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사람을 노려본다든가, 웃을 때 아주 옅게 코를 찡그린다든가, 곤란할 때는 눈썹을 만지작댄다든가.

가장 닮은 부분은 역시 눈매였다. 금색 눈동자부터 묘하게 눈꼬리가 올라간 것까지.

카르샤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칼리우스가 어떤 얼굴이었는지 곧장 기억이 났다.

그래서 가끔 아스펠라는 카르샤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기 힘들 때가 있다.

칼리우스의 얼굴이 희미해져도, 다시 카르샤의 얼굴을 보면 그와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니까.

그러나 아스펠라는 그 기억을 잊으려 하지도, 그 일로부터 도망치려 하지도 않았다.

이별과 죽음에 아파하지 말라. 허무에 빠지지 말라. 그럼에도 생은 끝없이 이어진다…….

아스펠라는 현재를 살아가야 했다.

“엄마. 아빠는 어떤 사람이어써? 웅?”

세 살치고는 말을 빨리 배운 카르샤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었다.

“엄마. 카르샤 아빠 닮아써? 아니면 엄마 닮아써?”

아스펠라는 아이의 통통한 뺨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카르샤는 엄마랑 아빠 둘 다 닮았지. 엄마와 아빠가 사랑해서 낳은 아이니까.”

“그럼, 카르샤 보면 아빠가 생각 나?”

“응. 아빠 생각 나.”

“압빠 보고 시퍼?”

“보고 싶지.”

“후응. 그렇구나.”

“카르샤도, 아빠 보고 싶어?”

“사시일, 궁금하긴 해! 카르샤는 펠킨도 있구, 민튼도 있구, 일카이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빠가 궁금하긴 해써! 하지만, 슬프지는 않아! 엄마가 그만큼 카르샤 더 예뻐해 주자나.”

무슨 세 살짜리가 생각하는 게 이렇게 깊은지.

아스펠라는 카르샤의 뺨에 입을 맞추곤 아이를 끌어안았다.

카르샤는 아직 할말이 남은 듯했다.

“그치만 엄마는 압빠 기다리는 거지? 엄마는 카르샤를 제일 사랑하지만, 그다음으로 압빠를 가장 사랑하니까. 카르샤 다 보여. 엄마, 아빠 기다리쟈나. 나도 엄마를 제일 사랑하니까, 엄마랑 같이 압빠 오는 거 기다려줄 쑤 이써. 그티, 하양아?”

그러자 하양이가 왕왕 꼬리를 흔들며 짖었다.

카르샤는 아예 아스펠라의 손을 잡고, 저택의 뒤뜰로 나갔다.

“여기서 아빠 돌아오면 줄 화관 만드는 거 오때? 그러면 엄마도 기다리는 거 덜 지루할 꼬야. 하양이는 여기서 보초서면 대구. 그치?”

“그래. 그러자.”

현재를 살아가며 과거의 그를 기다린다는 것은 꽤 힘든 일이었지만, 혼자가 아니었기에 아스펠라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살아 있다.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

아스펠라와 카르샤는 함께 빨래를 넣어 놓은 뒤뜰에 나와 매일 화관을 만들었다.

오늘은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함께 그를 떠나보냈던 날과 달리 구름 한 점 없이 청량하고 푸르렀다.

그날 이후 아스펠라는 종종 하늘을 올려다보는 습관이 들었다.

아스펠라는 평소처럼 늦은 오후, 카르샤와 함께 뒤뜰에 나와 화관을 만들었다.

“하나는 엄마 꺼, 또 하나는 카르샤 꺼. 마지막은 아빠 오면 줄 꺼.”

시들면 엮고 또 시들면 엮고.

이제 화관 만들기에는 익숙해진 것인지, 카르샤는 오늘도 엄마 옆에 쪼그리고 앉아 집중하여 화관을 만들었다.

작은 손으로 오밀조밀 만들던 카르샤는 “후하! 힘들다!” 하며 작은 손으로 땀을 훔쳤다.

그러다 얼른 아스펠라의 옷을 잡아당기며 하늘을 가리켰다.

“엄마. 오늘 하늘 완전 파래.”

“그러게. 파랗네.”

“바람도 완전 불어!”

카르샤가 코를 킁킁대며 바람 냄새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아스펠라 역시 눈을 감고 가만히 코를 킁킁댔다.

유난히 푸른 하늘에, 초겨울의 바람을 타고 능소화 냄새가 퍼졌다.

그런데 저택의 뒷마당에는 능소화가 피어 있지 않았다.

아스펠라가 천천히 눈을 떴다.

빨랫줄에 걸려 있는 흰색의 이불보 너머에 기다란 그림자가 졌다.

바람이 불어 이불 사이로 실루엣이 보였다. 아스펠라는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이불이 걷히며 그 뒤의 사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황혼이 내려앉는 푸른 하늘의 역광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스펠라는 그가 누군지 단숨에 알았다.

그는 살아 있다.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그래. 그는 돌아올 거야. 내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마침내…….

그대, 가장 영원성에 가까운 원형의 존재여.

이별과 죽음에 아파하지 말라. 허무에 빠지지 말라. 그럼에도 생은 끝없이 이어진다.

아스펠라는 그대로 그에게 달려갔다.

넓은 품이 그녀를 꽉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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