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장. 백야행 (14/16)

13장. 백야행

“자, 잠시만요.”

누군가 아스펠라의 말을 끊었다.

아스펠라는 병상에 앉아 여유로운 얼굴로 물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지금 대공 부인께서는, 괴물로 변한 각하에게 공격당한 게 아니고 괴물로 변한 각하께서 불사체들로부터 부인을 지키려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사내의 말에 아스펠라가 정확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간단한 대답을 듣고도 아스펠라의 병상 앞에 모인 기자들은 영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어느새 병실에 들어온 일카이가 투덜거렸다.

“쥐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닐걸요, 부인.”

일카이의 말대로 사실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이런 종류가 아니었다.

그저 어디까지나 가십거리로 소비될 만한 내용이었다.

단순히 비극적인 첫날밤의 신부라 생각했는데 그 이면에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 있지 않은가.

“믿기 어려운 이야기여도 믿으셔야 합니다. 되도록 많은 정보를 백성들에게 알려서 그들이 대비할 수 있어야 해요.”

국왕은 스스로 불사체가 되기를 택했다. 그것이 끝없는 생명과 힘을 원한 이의 말로였다.

아스펠라는 도망간 베르델을 잡아야 했고, 그가 봉인 여는 것을 막아야 했다.

루이나의 봉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주기가 다가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두렵진 않으십니까?”

“다가올 재앙이요? 아니면 제 남편이요?”

아스펠라가 되레 질문하자 기자가 후자를 택했다.

“에르윈 대공 각하는 현재 실종 상태입니다. 대공 부인을 공격하고 그 거대한 몸집과 두려운 외형으로 백성들을 겁주고 있습니다. 그런 분이…….”

아직 그녀를 해친 남편은 잡히지 않았다. 거대하고 흉포한 그 몸집으로 결혼 첫날밤 제 아내를 창밖으로 집어 던진 이 아니던가.

괴물로 변해버린 대공이 또다시 이곳에 찾아오면 어떡하나.

두렵지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공 부인은 분명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맨 처음 부탁했던 그들이 해줘야 할 일이란, 이 무서운 괴물이 더 빨리 잡히도록 세간에 알리는 것이겠지.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아스펠라가 말했다.

“두렵지 않아요.”

으응?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방금 부인께서 막 눈물도 흘리시고, 그 커다란 괴물이야기도 하셨는데요?

부인이 눈물 흘리며 두렵지 않다고 하면, 그들이 머릿속으로 막 상상해놓은 헤드라인들은 모두 거짓이 되는 것이었다.

“두렵지 않으시다고요? 하지만, 검은 마수잖습니까. 거대한 개나 다름없는.”

“네, 개죠. 제 남편은 개로 변했죠. 그리고 그 개의 주인은 저고요.”

아스펠라의 말에 기자들이 놀란 듯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았다.

“부인을 공격했는데도 두렵지 않으시다고요?”

“네. 두렵지 않아요.”

“그럼 증오하시거나 분노하시는 건요? 결국 대공 각하께서는 부인의 가족을 죽인 거나 다름없잖습니까? 비, 비르가라는 그 산신이요. 다른 산신들도 모두 대공 각하가 잡아들이지 않았습니까?”

“자연은 원래 모든 걸 포용하는 법이죠.”

그들은 이쯤 되면 아스펠라가 두려워하지 않아 이상하게 여기는 듯했다.

비운의 대공 부인이 되어야 하는데, 왜 그렇게 굴지 않느냐는 식으로 그녀에게 따지고 들었다.

“하지만 눈물도 흘리셨잖아요!”

“아,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 높은 곳에서 떨어지셨잖습니까?”

“칼리우스가 얼른 아래로 몸을 던져 쿠션 역할을 해줘서, 부러진 곳 하나 없답니다.”

“그, 그치만 유리창이 모두 깨져 여기저기 베이셨잖아요?”

“불사체가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나, 남편 분께서는 실종되었잖아요?”

“확실히 지금은 개로 변하긴 했지만, 걱정 마세요. 그가 어디로 갔는지 짐작 가는 부분이 있는데다가 충분히 통제 가능해요.”

“…….”

그들은 할 말이 사라진 듯 그저 입을 떡 벌린 채로 서로를 바라봤다.

아스펠라는 기자들을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전 남편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거짓말을 늘어놓는 탐욕스러운 여인도, 그렇다고 괴물에게 팔려온 불쌍한 신부도 아니며 푸른 수염의 아내 역시 아니랍니다.”

그러다가 잠시 눈을 굴리더니 “미녀와 야수라면, 생각해볼게요.” 하며 농담 아닌 농담도 했더랬다.

그 여유로운 모습에, ‘쥐’라 불리는 기자 중 한 명이 물었다.

“그럼 저희를 왜 들이신 것입니까?”

불쌍한 여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도, 제 남편이 괴물이고 그를 죽여야 한다 선동하기 위해서도 아니면. 대체 자신들을 이곳에 들인 이유가 무엇인가.

아스펠라는 상큼하게 손뼉을 짝, 한번 마주치며 말했다.

“일해야죠. 일.”

일은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만? 하는 표정의 그들에게 아스펠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튀니아에서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상인들이나 은행원, 사업가 등의 부르주아들이 유서 깊은 귀족들의 세계에 알고 싶어 했다.

이들은 몰래 살롱에 들어가 이야기를 주워듣고 와 찌라시를 작성해 돈을 주고 사가는 이에게만 정보를 제공했다.

귀족들은 그들을 들개, 하이에나, 쥐새끼 등으로 부르며 멸시하기도 했고, 이따금 관심 받고 싶어 하는 귀족들은 돈을 주고 그들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취재하도록 했다.

아무튼 맨 처음 튀니아에서 ‘기자’라 함은 돈에 눈이 멀어 귀족들의 이야기를 몰래 숨어 엿듣는 이미지가 강했다.

조악한 인간들의 모임. 돈에 눈 먼 쥐새끼들. 혈통이라고는 없는 부르주아들의 개.

그들은 부르주아들에게 팔아넘길 정보를 위해서 직위만 귀족이고 돈은 없는 이들을 패물로 현혹하며 정보를 대신 알아달라고 할 정도였다.

어디까지나 엿들은 이야기였으니 내용에 신빙성도 없었으며, 돈을 받아도 욕을 먹고 돈을 받지 않아도 욕을 먹고.

그들을 직업군으로 쳐주는 이들도 없었으며 하물며 백성들마저도 이들을 무시했다.

바다 건너 다른 나라에서는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을 ‘기자’라고 부른다는 것을 어디서 주워듣긴 했기에, 그럴싸하게 자신들을 기자라고 포장하고 ‘일간지’라고 나름의 구색을 맞추긴 했다.

사실 죄다 손으로 휘갈긴 종이들을 꾸려놓은 것이라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거대한 후원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원래 이들은 모두 개인으로 돌아다니고 서로를 적대시 하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누가 더 자극적이고 많은 정보를 얻어 부르주아들에게 정보를 팔아넘기느냐로 경쟁하곤 했다.

백성들은 에르윈 대공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궁금해 하긴 했지만, 그들이 뭔가를 물어오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더랬다.

거대한 철문에 가로막혀 대공 부인의 이름만 부르짖다 터덜터덜 돌아올 것이라고.

그도 그럴 것이, 쥐새끼라 불리는 그들에게 에르윈 대공가가 문을 열어줄 리 없지 않겠는가.

헌데, 에르윈 대공가가 이들을 하나로 모아 하나의 회사를 설립했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어디 그뿐인가? 실력 좋은 목수들을 불러다가 활자를 만들도록 했다.

거대한 종이를 반으로 겹쳐 여러 장의 커다란 책처럼 만든 뒤 그곳에 활자를 찍는다더라.

“그걸로 대체 뭘 하려고?”

“소문에 의하면 대공 부인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쳤다는데.”

“귀족들의 말이나 몰래 엿듣는 쥐들을 대체 무슨 생각으로 후원까지 해주신다는 거야?”

그들은 아스펠라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정체불명의 검은 마수가 돌아다니고, 아직 사냥제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러니 백성들은 대공 부인이 미쳐버려서 저들을 구제해주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에르윈 대공 저택에서 하이에나처럼 온갖 찌라시를 들고 나올 줄 알았던 이들은 의외로 조용했다.

그리고 마침내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거대한 종이뭉치 같은 것들이 각 광장과 학술원, 부르주아의 집, 지방의 소도시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활자로 찍어낸 글이었다.

광장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이가 단상에 서 팔을 활짝 편 뒤, 거대한 종이를 들고 그곳에 적힌 글자들을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 앞에 모여 그가 무슨 말을 하나, 정확히는 저 거대한 종이로 뭘 하려는 건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종이 안에는 아스펠라가 그들에게 들려줬던 이야기의 일부가 적혀 있었다.

내용은 오랜 시간부터 이어져왔던 루이나의 봉인과 이제 곧 그것이 열릴 것이라는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후 사라진 국왕의 행방과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또한 검은 마수의 존재와 사냥제에서 일어났던 일의 실상, 에르윈 대공과 검은 마수의 연관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사체라 불리는 존재에 대해서까지.

매우 긴 이야기였기에 이야기가 실린 종이를 펼치면 웬만한 테이블을 다 덮고도 남을 정도였다.

글 중간중간 관심을 끌기 위한 삽화에서는 남쪽 산신이 변절하여 국왕을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그림과, 튀니아 왕궁의 끔찍한 지하 감옥 풍경, 그리고 루이나의 봉인이 풀려 재앙이 시작되는 그림과, 불사체들이 썩어가는 몸으로 걸어 다니는 그림이 실려 있었다.

그중 왕관을 쓴 국왕 역시 썩은 시체 무리에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아니 국왕 전하를 이렇게 그려 넣는 건 반역이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반역이고 뭐고 지금 실종되셨다잖아.”

“실종이 아니라 지금 이 그림처럼 되었다는 것 아니야?”

그러자 단상에 오른 이가 목소리를 더 크게 내며 헛기침을 하면서 주의를 끌었다.

“어흠흠! 마저 읽겠소!”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 조용해졌다.

단상에 오른 이는 마지막 장, 불사체에 대한 기사를 읽어내려갔다.

“불사체는, 상대의 의지를 뺏는 주술과 죽은 이를 되살리는 금지된 주술에서 파생된 것으로, 고대 주술이 적힌 뜨거운 인을 이마에 찍은 뒤, 아스펠 산신의 영혼을 억지로 강령하여 개의 육신에 집어넣고 부정신으로 만든 다음, 이 일부를 태운 연기를 마시게 한 이들이다.”

그는 이어서 이 불사체는 역병처럼 퍼지는 기운이 있어, 이것이 바로 그 사냥제를 습격했던 짐승들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읽어주었다.

“그럼 그 그것들은 산 것이여, 죽은 것이여?”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존재라잖아.”

“역병처럼 퍼지는 것이라면 위험한 것 아닌가?”

“저게 믿을만한 얘기는 맞아? 우리 같은 이들이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저거 다 그 들개들이 쓴 찌라시 아니야?”

그러나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는 에르윈 대공 부인이 직접 증언한 이야기이며, 한나 그레이스 라 튀니아 공주가 이를 보증한다, 라는 문구가 적혀 있으니 믿을 만한 것 아니냐는 말이 한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보고 뭘 어쩌라는 건가?”

듣던 이중 하나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러자 단상 위의 사내가 말했다.

“어디 보자, 아. 여기 적혀있네. 어…….”

<튀니아의 백성들은 불사체들의 습격에 대비해야 한다. 그들의 약점은 이마 정중앙에 새겨진 인두 자국이며, 다른 곳을 공격하지 말고 그곳을 공격해야 불사체가 주술의 힘을 잃게 된다.>

<물리게 되면 그자 역시 역병에 옮게 되는데, 인두 자국이 없어도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인육과 피를 탐하는 자는 모두 그 병에 걸린 것이다.>

<그런 이들은 머리를 공격해야 비로소 감염된 주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일단 임시방편으로 병사들을 매번 순찰 돌게 할 거라는데, 이틀 뒤부터 계엄령을 선포한다는군.”

“계엄령까지?”

이미 지나간 불미스러운 일에서만 그치지 않는 것에 사람들이 점점 더 그 주변으로 모이며 이야기가 퍼졌나갔다.

“이봐, 무슨 일인데 이렇게 모여 있어?”

“계엄령이 선포된다는군.”

“갑자기 왜?”

“불사체가 돌아다닌다잖아!”

신문은 점점 지방과 외곽 도시에도 퍼졌다. 에르윈 대공 부인의 후원을 받은 이들은 더 이상 숨어듣는 쥐새끼가 아니었다.

그들 중 몇몇은 지방의 소도시나, 작은 마을로 가 글을 읽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직접 말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렇게 튀니아 전역은 다가올 재앙에 조금이라도 대비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

불사체에 대한 것을 알게 된 백성들은 맨 처음 혼란에 빠졌지만, 곧 자경단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혹한기를 맞이하거나, 대흉년 속에서 살아남거나, 탐관오리들의 아래에서 짓밟히거나.

살면서 숱한 굴곡이 있었던 이들인지라, 살기 위해서는 똘똘 뭉쳐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민튼과 일카이의 지휘에 따라 낮에는 바리케이드를 함께 세우고, 밤에는 순찰을 돌았다.

어느새 왕궁 해자 주변에는 꽤나 높은 벽돌과 흙으로 쌓여진 장벽이 생겼다.

귀족들 역시 몇 백 년 동안 가문의 이름 하나로서 누리고 왔던 자신들의 특권이 이번 일로 인해 무너지는 것은 원치 않았던지, 물론 곧장 수도를 떠나는 이들도 심심찮게 있었지만.

꽤나 협조적으로 바리케이드를 쌓는데 필요한 물자나 인원을 보충해주는 이들도 많았다.

어느새 몸을 회복한 아스펠라는 창가에 서서 저 멀리 보이는 바리케이드를 바라봤다.

엄지손톱만한 크기로 보이는 저 화려한 튀니아 왕궁은 여전히 하늘을 찌르듯 높고, 황금빛을 뿜고 있었지만 이제 저 안은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자들로 득실대고 있을 것이었다.

연회 이후부터 에르윈 대공 성은 사건 해결을 위한 본부처럼 쓰였다.

한나는 이곳에서 귀족 회의를 열며 수도를 봉쇄할지 말지에 대한 회의를 했다.

지방으로 내려가 새로운 거점을 만들어야 할지, 아니면 저 왕궁 안의 수십, 수백, 수천이 되는 불사체들을 처리하고 이곳을 유지할지.

아스펠라는 어쩌면 이곳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창가에 서서 가만히 사색에 빠져 있는데, 창문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왔다.

칼리우스가 얼른 그 밑을 받쳐주긴 했으나 인간의 몸으로 그 높은 곳에서의 추락이 아무렇지 않을 리는 없었다.

뼈마디가 시리며 아파오던 찰나, 어깨 위로 담요가 덮어졌다.

고개를 돌리니 일카이가 있었다. 바리케이드를 만들다 온 건지 얼굴에 뽀얗게 흙먼지가 내려 앉아 있었다.

“조금 더 누워 있어. 아직 몸이 덜 회복 됐을 거야.”

“발목이 부러지지 않아서 참 다행이야. 의사 선생님 말로는 이제 목발 안 짚고 다녀도 된대.”

“그게 다 회복되었으니 대공을 찾아나서도 된다는 말은 아닐걸.”

일카이의 말에 아스펠라가 슬쩍 어깨를 으쓱이며 못 들은 척 했다.

“대공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아?”

“응.”

아스펠라는 마지막으로 본 칼리우스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다.

검은 마수의 몸이었고, 붉은 눈빛이었으나 그 안의 눈빛은 칼리우스였다.

칼리우스는 아직 마수에게 다 먹히지 않았다.

불사체들을 조종하는 부정한 기운에 동화되긴 했어도 그는 필사적으로 아스펠라를 지키려 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아스펠라를 받아준 뒤, 떠나기 직전.

그는 아스펠라에게 얼굴을 한번 부빈 채 그대로 훌쩍 떠났다.

어쩌면 더 이상 자신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피해를 줄이기 위해 떠난 것일 거다.

이제 아스펠라는 짐승이 된 칼리우스와 대화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있다.

“어디로 갔는데?”

“……남쪽 산으로 갔을 거야.”

“거긴 출입 금지된 산이잖아.”

“거기로 갔을 거야. 부정 탄 이가 가는 곳은 거기라 생각하니까. 베르델이 그곳에 있을 거라 생각할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곳이 자신을 가두기에 가장 안전한 곳일 거라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고.”

칼리우스는 최대한 사람들과 자신을 멀리 떨어뜨려놓을 생각이었을 것이다.

“나쁜 존재는 아니지만, 위험한 존재인 건 맞으니까. 남쪽 산에는 사람들도 들어오지 않을 거고.”

“그래서 지금 남쪽 산으로 가겠다는 거야? 데려 올 수 있을까? 남쪽 산은 부정 탄 곳이야. 불사체만 마주쳐도 그 부정한 기운에 짐승으로 변하는데, 남쪽 산의 기운은 더 위험하게 만들지도 몰라.”

“데려와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스펠라의 말에 일카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쉬운 일이 하나 없네.”

그의 말에 아스펠라가 힘내자는 뜻으로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세상이 망하는 걸 막으려는데 쉬운 일이 있겠어?”

아스펠라는 다시 천천히 창문 밖을 쳐다봤다.

봉인이 열리는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듯 항상 푸르던 하늘에 온통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고 피비린내와 함께 눅눅한 바람이 도시 사이를 맴돌았다.

부정 탄 남쪽 산에는 무엇이 있을지 모를 일이었고, 만약 그곳에서 칼리우스를 만난다 해도 검은 마수의 거대한 몸을 도대체 어떻게 산 아래로 끌고 내려올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문제가 있다 하여 가만히 앉아 고민하고만 있을 시간은 없었다.

아래로 추락하며 접질린 발목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아스펠라는 곧장 남쪽 산으로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아스펠라의 고집을 꺾지는 못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던 일카이가 아스펠라와 함께 남쪽 산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남쪽 산에는 출입을 금하는 밧줄이 산 초입을 따라 켜켜이 쳐져 있었다.

펠킨은 밧줄 사이로 들어가려는 아스펠라에게 말했다.

“정말 다른 인원은 필요 없으십니까? 아무리 제가 겁이 많다 한들 일단은 대공 각하의 보좌관으로서 여러 번 전장에도 참여했습니다. 분명 쓸모 있을 거예요.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아뇨. 펠킨은 에르윈 대공 성에 계셔야죠. 만약 칼리우스나 저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성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펠킨이잖아요. 오랫동안 보좌관으로 대공 성에 함께 하셨으니까요. 저는 일카이가 있으니 걱정 마세요.”

펠킨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잠시 아스펠라를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민튼은 그런 펠킨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산은 아스펠라 님을 해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어쩌면 로잘린드 경보다 아스펠라 님이 더 강할지도 몰라요.”

그는 맨 처음 아스펠라의 명령에 제 엉덩이를 회초리마냥 때리던 나뭇가지들을 떠올렸다.

그렇게 나무들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니, 약하게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스펠라 역시 민튼과의 첫 만남을 기억하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아스펠라는 일카이와 함께 밧줄을 넘어 남쪽 산으로 들어갔다.

남쪽 산의 초입에 들어가자 모든 산이 그러했듯, 나무들이 천천히 길을 만들었다.

다 죽어가는 부정 탄 산은 마지막 남은 신에게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아스펠라는 칼리우스가 남쪽 산의 성역으로 들어갔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일카이는 혹시라도 부정 탄 짐승들의 공격을 받지 않을까, 경계 태세를 갖춘 채로 걸어갔다.

꽤 오랫동안 길을 걸었을까.

아스펠라는 문득 안개가 제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개는 점점 더 짙어졌고, 곧 백지와 같은 하얀 풍경만이 보였다.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일카이가 소리쳤다.

“아스펠라! 괜찮아?”

“아무 문제없어!”

“안개가 걷힐 때까지 조금 몸을 피해야겠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앞으로 갈 수가 없잖아.”

아스펠라 역시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두 사람은 더듬거리며 가까스로 손을 잡아 서로를 확인했다.

“아래쪽은 아직 안개가 덜 낀 거 같으니, 잠시 내려가자.”

“……응.”

아스펠라는 백야뿐인 저 위를 잠시 바라보다, 이내 일카이와 함께 아래로 내려가 동굴을 찾은 뒤 그곳에 짐을 풀었다.

아스펠라는 잠시 안개를 가만히 쳐다보다 중얼거렸다.

“……안개가 맞나?”

안개는 좀처럼 걷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밤이 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하얀 안개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밖은 전혀 어두워지지 않았다. 마치 백야와도 같았다.

“어째 안개가 점점 더 짙어지는 것 같은데.”

일카이는 동굴 안쪽에서 돌과 장작을 가져와 불을 지폈다.

아스펠라 역시 펠킨이 혹시 모른다며 챙겨준 음식들을 가방에서 꺼냈다.

두 사람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잠시 동굴 밖을 쳐다보던 일카이는 아스펠라가 성역에 들어갔을 때의 일을 말해줬다.

“그때 말이야, 누나는 거기서 꽤 오랜시간을 보냈다고 했잖아?”

“응. 거기서 어쩌다 보니 루이나와 같이 놀아주느라. 체감상 반나절 정도는 함께 했던 것 같은데.”

“그런데 내가 성역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누나가 바로 나왔어. 성역 안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아.”

아스펠라 역시 성역에 들어갔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도 저렇게 짙은 안개 때문에 눈이 부셔서 앞을 향해 걷기 힘들 정도였지.

잠시 생각하던 아스펠라가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동굴 밖을 쳐다봤다.

‘……저 안개.’

아스펠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래?”

“저거, 안개가 아닌 것 같아.”

“안개가 아니라면 뭔데?”

“……입구. 성역으로 들어가는 입구 같아. 일카이. 여기 있어. 다녀올게.”

아스펠라가 나가려고 하자 일카이가 얼른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아스펠라는 괜찮을 것이라며 안심시켰지만, 일카이는 잠시 침묵하다 아스펠라에게 말했다.

“같이 들어가.”

“성역이야. 거긴 산신들만 들어갈 수 있잖아.”

“혹시 모르지. 누나랑 같이 들어가면 가능할지도. 여기서 누나가 대공을 데리고 돌아올 때까지 가만히 짐이나 지키려고 따라온 거 아니야. ……같이 가게 해줘. 지키고 싶어.”

아스펠라는 잠시 일카이를 바라보다, 이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담요를 찢어 서로의 손목에 묶어 연결시킨 뒤, 천천히 백야로 들어갔다.

***

그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한참을 걸었다.

온통 흰색 안개뿐이라 이곳이 산속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발에 채는 돌부리나, 나무, 수풀도 느낄 수 없었다.

아무리 손을 더듬거려 주변을 가늠해 봐도 만져지는 것은 없었다.

두 사람은 이따금 말소리를 내며 서로가 안전한지 확인했다.

끝도 없는 기다랗고 하얀 터널을 통과하듯 한참을 걷고, 또 걷고, 또 걸었을 때.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안개 속에서 하나 둘 풍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한 것마냥, 부정 타 모든 것이 시들어버린 남쪽 산과는 달리 온통 녹음 가득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풀 속에 쓰러져 있는 커다란 몸집을 발견했다.

“칼리우스!”

아스펠라와 일카이는 얼른 그에게로 달려가 걸치고 있던 담요를 그의 몸 위에 덮었다.

“칼리우스! 칼리우스! 정신 차려요. 칼리우스!”

두 다리는 아직 인간으로 다 돌아오지 못한 듯 짐승의 발톱과 털로 뒤덮인 채였지만, 그의 상체는 인간으로 돌아와 있었다.

불사체와 싸우며 그 역시 물렸는지 이곳저곳에 물어뜯기고 할퀴어진 자국이 나 있었다.

아스펠라는 얼른 주저앉아 그를 자신의 무릎에 뉘이고, 가슴팍에 귀를 대어 심장이 뛰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심장은 제대로 뛰고 있었다.

「그저 잠을 자고 있는 것뿐이니, 너무 걱정하진 말렴.」

낯선 음성에 아스펠라와 일카이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들 앞에는 청년의 모습을 한 루이나가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로 서 있었다.

“뭐야?”

일카이가 얼른 검을 빼들어 그에게 겨눴다. 일카이는 아직 이 청년이 누구인지 모르는 듯했다.

“일카이. 그러지 않아도 돼.”

“저 남자 알아?”

“……여긴 봉인을 보호하는 성역이야. 저분은 루이나의 일부일 거고.”

아스펠라의 말에 일카이가 고개를 돌려 미심쩍은 눈으로 루이나를 쳐다봤다.

그저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저이가, 봉인이 풀리는 날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어둠으로 집어 삼킬 존재라니.

그러자 루이나는 일카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듯 대답했다.

「생각보다 미남이라 놀란 듯하구나?」

“진짜 루이나 맞아요? 댁이?”

「그럼 맞지.」

“……저번에 아스펠라가 말해줄 땐 어린아이 모습이랬는데.”

「맞아. 아스펠라가 간 아스펠 산의 성역에는 어린 루이나가 있어. 난 다행히 청년의 모습 이지. 다른 두 군데에는 더 어리거나, 더 늙어 노인이 된 내가 있지. 모습은 중요치 않아. 어차피 다 한 몸에서 찢어진 거라.」

루이나는 오랜만에 손님이 와 매우 기쁘다며, 손가락을 따악 튕겼다.

그러자 주변이 순식간에 집 안의 모습으로 변했다.

「칼리우스는 조금 피곤할 테니 침대에 잠시 뉘여 놓으렴.」

일카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칼리우스를 질질 끌어다가 침대 위로 올려놨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까 전 녹음 가득한 들판이었던 곳이 평범한 가정집처럼 변했다.

신기한 건지 아니면 미심쩍은 건지, 일카이는 천천히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았다.

「열어봤자 아무것도 없을걸?」

그와 동시에 문을 벌컥 열자, 밖은 온통 그들이 걸어왔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흰 안개뿐이었다.

일카이가 문을 닫고는 물었다.

“우릴 여기 가두려는 셈입니까? 나가지 못하도록?”

「그럴 리가. 나가고 싶으면 나가도 좋아. 다만, 외로웠던 찰나에 오랜만에 만난 손님이라 대접을 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일카이는 그런 루이나를 께름칙한 얼굴로 바라보며 아스펠라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내려가자, 아스펠라.”

아스펠라는 침대에 누워 잠든 칼리우스를 쳐다보다 이내 루이나에게 물었다.

“……베르델에게 무슨 말을 했길래, 남쪽 신이 산을 버리고 부정 타게 만드는 거죠? 베르델이 왜 파베스를 이용하고, 봉인을 풀려는 건가요? 어떤 식으로 꾀어 낸 거죠?”

루이나는 잠시 조용히 미소 지으며, 벽난로에 불쏘시개를 집어넣고 헤집었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만이 방 안에 울렸다.

아스펠라는 남쪽에 봉인된 루이나가 남쪽 신을 타락시킨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파베스 옆에서 불사체를 되살리는 연구를 하고, 자물쇠들을 죽이려 했고, 아스펠 산에 불을 질러 비르가의 육체를 부정 타게 한 이가 남쪽 산신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베르델 역시 이곳 성역을 오랫동안 지켜왔을 테고 당신과 함께 했겠죠. ……베르델에게 무슨 말을 한 거예요?”

잠시 침묵하던 루이나가 아스펠라를 보며 말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단다. 그저 보여주기만 했지.」

“보여주다니, 뭘요?”

「그는 미래를 보고 싶어 했어. 나는 그저 그에게 미래를 보여줬을 뿐이야.」

그의 눈에서 흰자위가 사라지더니, 이내 온통 검은 눈동자로 변했다.

「네게도 보여주마. 아스펠라.」

루이나의 눈과 마주친 순간, 수많은 환영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불타는 왕궁, 끔찍한 비명소리.

시체 위로 날아다니는 파리와 어린아이의 시체를 붙들고 우는 어미.

가족을 제 손으로 죽여야 하는 가장과 죽고 싶지 않아 도망치는 이들.

끝없는 전쟁, 기아.

인간들의 싸움은 수십 수백 수천 년이 지나도 이어졌다.

선한 이들은 고통받고 악한 이들은 모든 걸 누리고 살았다.

그들은 여전히 싸우고, 서로를 죽이며 지독한 역병에 끊임없이 죽어나갔다.

환영이 보여주는 모든 미래는 생은 아무리 이어져도 결국 실패작이라 말하고 있었다.

“아스펠라! 아스펠라!”

일카이가 아스펠라의 어깨를 잡고 거세게 흔들었다.

정신 차리라는 듯 손바닥으로 뺨을 톡톡 두들기자 눈을 뜬 채로 기절해 있던 아스펠라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괜찮아?!”

“……허억. 허억.”

아스펠라는 잠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가만히 루이나를 쳐다봤다.

그는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로 아스펠라에게 물을 건넸다.

“지금 본 게 정말 미래가 맞나요?”

루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델도 이걸 본 거고요?”

「그래. 봤단다. 그날 이후 베르델은 이곳을 버렸단다. ……그는 신이 우리를 버렸다고 생각해. 인간들은 점점 더 악해질 거고, 끊임없이 같은 짓을 반복할 거란다. 나를 봉인하는데 성공해도, 네가 본 미래는 변치 않을 거다.」

그러자 일카이가 쏘아붙였다.

“아스펠라. 듣지 마. 무슨 미래를 본 건진 모르겠지만, 저자는 봉인에서 나오고 싶어 할 거야. 우리가 봉인을 잠그려는 걸 알고 있으니 일부러 저런 말을 하는 거라고.”

「난 봉인에서 나가고 싶어 한 적 없단다. 봉인을 여는 건 베르델이 원하는 것이지.」

아스펠라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물었다.

“봉인이 열리면 정확히 어떤 일이 생기죠?”

「땅 아래 봉인되어 있던 루이나가 깨어나겠지. 나는 인간으로서 죽지 못했단다. 지금 이 모습은 인간이었을 때의 모습을 신이 남겨준 것이고, 봉인 아래에는 인간이 아닌 루이나의 본체가 있지. 봉인이 열리면, 그것이 기어나올 거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루이나는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베르델이 그렇게 변할 줄은 몰랐단다. 진심이야.」

시무룩해진 얼굴로 말하는 그의 모습에 아스펠라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칼리우스를 쳐다봤다.

“칼리우스는 왜 아직도 안 깨어나죠?”

「불사체에 공격당해서, 그걸 정화시켜주었단다. 이제 곧 깨어날 것이니 너무 걱정 말거라.」

그렇게 말한 루이나는 아스펠라에게 이만 돌아갈 시간이라며 손가락을 튕겼다.

***

칼리우스가 눈을 떴을 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근래 들어 이런 식으로 눈을 뜨는 게 마냥 반갑지는 않은 듯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아스펠라가 그의 간호를 위해 방으로 들어오다 잠에서 깬 그를 발견했다.

“……아스펠라.”

칼리우스가 손을 뻗자 아스펠라가 생긋 웃으며 그의 곁으로 가 손을 꼭 잡았다.

칼리우스는 아스펠라가 추락했던 것을 떠올린 것인지, 이내 얼른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며 물었다.

“다친 곳은요? 그때 떨어졌잖아요. 불사체들한테 물리진 않았고요?”

“나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해요. 봐요. 다친 곳 없이 건강하잖아요.”

아스펠라는 그를 진정시키려는 듯 칼리우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사한 걸 확인하고 나서야 칼리우스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그때 떨어지는 걸 제대로 못 받은 줄 알고…….”

“칼리우스, 그 이후의 기억은 안 나요? 당신 남쪽 산으로 들어갔었잖아요. 성역 안에 들어가 있었어요.”

아스펠라의 말에 칼리우스는 자신이 떨어지는 아스펠라를 받아내고 마지막으로 이성이 끊기기 전, 남쪽 산으로 향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기억납니다.”

“왜 거기로 간 건지도 기억나요?”

“그냥, 그쪽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었어요. 날 부르는 듯한. 그래서 갔더니 안개밖에 보이지 않더군요. 거기서…… 루이나를 봤습니다. 처음 보는 이였지만, 보는 순간 그게 루이나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그대로 기억을 잃었고, 다시 눈을 뜨니 여기네요.”

칼리우스가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봤다.

온통 붉은 구름들이 아스펠 산의 꼭대기로 모이고 있었다.

아스펠라가 다가와 나직하게 말했다.

“이제 곧 봉인이 열릴 거예요.”

아스펠 산뿐만 아니라 나머지 네 개의 산 정상에도 모두 저런 식으로 검붉은 구름이 모이고 있었다.

“베르델은 찾았습니까?”

“아뇨. 하지만 블레드 성에 올 거라는 건 알고 있어요. 블레드 성이 모든 결계의 정중앙에 위치한 지점이니까요. 그곳에서 예전에 나와 당신을 죽이려 했던 것처럼, 아마 이번에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자물쇠들이 없으면 봉인을 열지 못하는 것 역시 사실이니까.”

분명 베르델은 불사체들을 이끌고 블레드 성으로 향할 것이다.

베르델과 그 무리들은 봉인을 열기 위해, 아스펠라와 칼리우스는 봉인을 지키기 위해.

아스펠라는 칼리우스에게 그동안의 일을 짧게 설명해줬다.

“이제 곧 수도가 봉쇄될 거예요. 왕궁 말고 다른 곳에서도 불사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바리케이드로는 소용이 없을 것 같아 수도를 봉쇄하고 불을 지를 거예요.”

몇 번의 회의를 통해 내린 결론이었다.

왕궁 안의 불사체들만 조심하면 될 줄 알았지만, 에르윈 대공성에 불사체가 나타난 이후부터 사람들이 실종되고, 실종자들이 불사체가 되어 백성들을 공격하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수도 바깥이 무조건 안전할 거란 보장은 없었으나, 적어도 베르델은 봉인을 열기 위해서라도 이곳에 계속 상주할 것이 분명했다.

그는 지금 몸을 숨긴 채 이곳 어딘가에서 계속해서 자신의 군대를 만들고 있었다.

다른 지역에는 불사체를 풀 이유가 없다 판단되었고, 그리하여 수도를 봉쇄하는 수밖에 없었다.

“봉인이 열리는 날에 맞춰, 우리가 신호를 보내면 수도에 불을 지를 거예요. 폭탄부터 불화살까지 가능한 건 모두 동원될 거고요.”

“봉인을 잠그지 못한다면?”

“……그때는 불사체고 뭐고, 모두 다 죽을 테니 상관없어요.”

아스펠라의 말에 칼리우스가 다시 한번 창밖을 쳐다봤다.

저 멀리 성안의 사람들이 검문소 밖으로 대피하는 행렬이 조그맣게 보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행렬이었다.

***

봉인이 열리는 날에 맞춰 새로운 상자와 자물쇠가 준비되어야 한다.

루니아가 봉인에서 깨어나면, 그의 묘지 되는 장소인 블레드 성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고 한다.

자물쇠들은 블레드 성의 지하에 새겨진 네 개의 진 위에 올라가 각자의 위치를 지켜야 하며, 봉인이 열릴 때에 맞춰 상자되는 이가 루이나와 함께 봉인 진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자물쇠 중 하나인 파베스는 불사체가 되었고, 그 행방조차 묘연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확신이 없는 계획이었다.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을지, 그리 하여 불사체를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을지, 봉인을 제대로 잠글 수 있을지.

한나와 일카이에겐 칼리우스가 새로운 상자가 될 것이라는 걸 굳이 말하진 않았다.

유디티아 후작과 펠킨, 민튼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눈치 없는 펠킨만 빼고 그들 모두가 눈치챘을 것이다.

날이 다가올수록 아스펠라의 눈이 빨개지는 횟수가 더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봉인을 잠그는 데 성공한다 해도, 누군가를 잃는 슬픔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조용히 그 슬픔을 준비했다.

며칠 동안 하늘에는 태양이 보이지 않았다.

황혼의 아름다운 주황빛이 아닌 피를 머금은 듯한 검붉은 구름에 온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때가 되었음을 직감한 이들은 블레드 성으로 향했다.

아스펠라와 칼리우스, 일카이, 펠킨, 한나와 민튼, 그리고 몇 명의 호위 기사들까지.

한나는 남편에게 아이와 함께 검문소 밖으로 대피하라 일러뒀다.

후작은 곧 죽어도 같이 있을거라 고집을 피웠지만, 한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자물쇠라 봉인을 막기 위해서 가는 건데, 당신은 왜 따라와요? 내가 죽으면 우리 사샤 당신이 키워야 할 것 아니야. 게다가 왕위도 이어야 할 거고. 그러니까 따라오지 마요.”

“하, 하지만 여보오!”

“따라오지 말라니까! 나…… 죽으러 가는 거 아니라는 걸 기억해요.”

한나의 말에 후작은 눈물범벅이 되어 검문소를 지나갔다.

남편과 아이가 안전하게 검문소를 나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한나는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아스펠라는 그런 한나에게 다가가 위로하듯 말했다.

“봉인은 성공할 거예요.”

그러자 한나는 고맙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스펠라의 손을 꼭 잡았다.

봉인이 성공한다는 것은 아스펠라가 영영 칼리우스를 보지 못하게 된다는 걸 뜻하기도 했으니까.

***

아스펠라는 블레드 성에 이런 식으로 돌아오게 될 줄은 몰랐다.

칼리우스와 행복한 휴가를 보냈던 장소가 원래는 그녀의 어머니가 살던 성이었던 것도, 이곳에서 자신과 칼리우스가 맨 처음 만났었다는 것도,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헤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도. 모두 예상치 못한 일들이었다.

그들은 성의 지하로 내려갔다.

오래전 에르윈 대공가에서 이 성을 인수했을 때, 칼리우스는 몇 년 동안 이곳에서 가족 휴가를 보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안의 비밀 장소들은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아버지가 절대 들어가지 말라 금하는 구역이 어디였는지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곳은 허락했어도 유독 허락하지 않았던 장소.

“여기가 바로 루이나의 묘지라는 거군.”

일카이는 묘지치고는 꽤 아름답다며 주변을 둘러봤다.

보통의 성이 가지고 있는 지하 감옥 같은 곳이 아닌, 마치 동굴에 마련된 지하 정원 같았다.

손길이 끊겨 꽃이나 수풀들이 무성하게 자랐지만, 모두 생명력을 머금고 있었다.

아름답게 조성된 정원의 중앙으로 향하던 중, 아스펠라는 바닥에 그려진 진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곳에 발을 디딘 순간, 온통 흰 안개뿐인 곳으로 바뀌었다.

저 멀리서 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가 보이지 않았으나, 그 빛을 목적지 삼아 걸었다.

그렇게 한참 걷자, 새로운 공간이 나왔다.

분명 지하 동굴로 내려왔는데도 불구하고 아주 높은 산의 정상에 올라온 것처럼 사방이 탁 트여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여긴 산인 걸까요?”

한나의 질문에 공간을 둘러보던 아스펠라가 중얼거렸다.

“여긴…… 성역을 이어주는 공간 같아요. 블레드 성은 루이나의 ‘묘지’ 같은 곳이랬으니까요.”

다섯 개의 봉인을 하나로 이어주는 공간.

묘지를 열고 나오는 루이나를 다시 잠재울 공간이었다.

아스펠라의 말을 정확히 이해는 못 했어도 얼추 알아들었다는 듯 한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지점에 다다르자, 거대한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그 비석을 중심으로 거대한 원형의 봉인 진 하나와 그것을 둘러싼 네 개의 작은 봉인 진이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아스펠라는 천천히 그 가운데에 세워진 비석 앞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고대 주술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그대에게 원형의 초상을 그려주었다.

그대, 마음의 눈으로 그것을 응시하면 그것은 그대를 위로 향하는 길로 인도할 것이다.

그것은 생과 사, 만남과 이별, 사랑과 미움.

모든 것의 근원을 제시하는 길이 될 것이다.

파도처럼 고통이 덮친다 해도 언젠가 파도는 쓸려나가기 마련, 그 아래 오랜 시간 침전된 모래가 그대의 몸을 견고히 잡아줄 것이다.

뿌리를 내리듯 그 모래에 다리를 내려라.……>

아스펠라는 그중 마지막 구절을 나직하게 읊었다.

“……그럼에도 생은 끝없이 이어진다.”

자신의 꼬리를 먹으며 태어나는 무한의 우로보로스처럼, 만남과 이별, 사랑과 미움, 생과 죽음 그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원형으로 이루어진 근원이며, 절망이 있기에 희망이 있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세상을 악으로 채울 루이나를 봉인한 뒤 그 위에 세운 비석이라기엔 봉인된 자에 대한 경고나 봉인을 열면 일어날 재앙에 대한 경고의 글이 아닌, 오히려 희망적인 글이었다.

아스펠라는 잠시 비석에 새겨진 글귀를 곱씹으며 천천히 글을 쓸어내렸다.

그때, 안개 너머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울음소리보다는, 죽지도 살지도 못한 자의 절규에 가까운 소리였다.

그것은 곧 안개를 헤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파베스?”

한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틀림없는 파베스의 얼굴이었다.

목에는 기다란 목줄을 맨 채로, 생기로 빛나던 눈동자는 희뿌옇게 변한 모습이었다.

산 자의 냄새에 코를 킁킁대며, 그것을 탐하기 위해 이를 따악 따악 부딪히며 손을 휘젓는 저이는 한때 국왕이었던 자였다.

파베스의 목에는 기다란 쇠사슬이 개 목줄마냥 채워져 있었다.

사슬의 끄트머리가 보일 때쯤, 베르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악랄한 악당의 비열한 미소도, 강력한 힘을 원하는 탐욕스러운 자의 얼굴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끝낼 준비를 마친, 죽음을 준비하는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파베스와 베르델의 뒤를 따라 머리에 붉은 인두자국을 빛내며 불사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들은 베르델의 조종을 받는 것인지, 그가 가만히 손을 들어 올리자 그 자리에 가만히 멈췄다.

민튼과 호위 기사들은 당장이라도 전투가 가능하도록 기다란 창을 앞으로 세워 그들의 머리를 노릴 준비를 했다.

아스펠라와 칼리우스 역시 챙겨왔던 활을 꺼내 들었고, 일카이는 조용히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한나는 혹시 몰라 챙겨온 신식 총을 장전했다.

베르델은 잠시 아스펠라를 바라보다 말했다.

“아스펠라. 남쪽 산의 성역에 들어갔더군. 그렇다면 너 역시 루이나를 만나 미래를 보았겠지? 그렇다면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는가? 넌 미래를 봤어. 이 모든 것들의 끝을 말이야. 저들에게 네가 본 것을 말했나? 네가 무얼 봤는지, 무얼 느꼈는지. 이들에게 모두 말했냐는 말이다.”

그의 말에 아스펠라가 대답했다.

“말하지 않았어.”

“왜? 이 모든 희생을 하여 살려낸 인간이라 한들 결국에는 모두 저들끼리 싸우고 죽이다 지쳐 멸망하게 된다는 걸,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신이 버린 곳이라는 걸. 왜 말하지 않았지?”

아스펠라는 천천히 그를 향해 활을 겨누며 대답했다.

“신이 버린 곳이든, 결국 멸망하게 될 운명이든. 그 끝은 우리가 정해. 당신이 아니고.”

대답을 들은 베르델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이내 그의 초점이 아스펠라에게로 다시 맞춰졌다.

동시에 어떠한 신호라도 받은 듯, 이리 저리 기웃대던 불사체들은 베르델이 주술을 외듯 중얼거리자 마치 감전이라도 된 양 퍼덕대더니 이내 아스펠라 일행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눅눅한 안개 속 물에 젖은 풀냄새만 나던 곳에 지독한 피 냄새가 번지기 시작했다.

안개는 마치 사방에 튀겨진 피를 흡수라도 하듯, 점점 더 붉은 빛을 띠었다.

몇 개의 머리통을 베고 찔렀는지 모른다.

베르델이 끌고 온 불사체는 수십 수백이 넘는 듯 끝없이 하얀 안개 속에서 튀어나왔다.

물리는 순간 그들과 같이 변한다. 적어도 자신의 죽음을 그렇게 맞이하고 싶지 않은 이들은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서로 동그랗게 대형을 짜 서로의 등을 지켜주면서도 사방에서 접근해 오는 불사체들을 공격했다.

에르윈 대공성에서 함께 온 호위기사들 중 몇몇은 이미 불사체의 모습으로 변해 불사체 무리에 섞여 있었다.

수적으로 열세해도 한참 열세했다.

칼리우스가 검은 마수로 변해 이리저리 헤집으며 그들을 물고 꼬리로 내리쳐도, 계속해서 밀려오는 불사체는 끝이 없었다.

다른 이들이 불사체를 처리하는 동안, 아스펠라는 숨은 베르델을 찾기 위해 연기 속을 주시했다.

그때, 안쪽에서 또다시 목소리가 들여왔다.

“분명 같은 미래를 봤을 텐데, 아스펠라 너는 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냐. 인간들은 지독하다. 마치 병균과도 같다.”

아스펠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활을 쐈다.

맞지 않은 것인지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봉인을 걸어 지키려는 이곳은 결국 네가 지키려던 인간들로 인해 또 다시 파괴될 거다.”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야!”

아스펠라가 다시 한번 연기 속으로 활을 쐈다.

조용한 안개 속에서는 잠시 동안 어떠한 목소리도 움직임도 없었다.

‘화살에 맞은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안개 속에서 베르델이 튀어나와 순식간에 아스펠라를 덮쳤다.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나는 신이었어. 이곳에서 하염없이 인간들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몇백 년, 몇천 년을 홀로 봉인을 지키며 인간들을 위해 그 긴 시간을 견뎠어! 그런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아니라고!”

아스펠라의 목을 조르며 소리치는 베르델은 그저 광인일 뿐, 한때 산신이었다고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이였다.

베르델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아스펠라는 그가 그동안 보고 느꼈던 것을 같이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허무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으며, 분노에 타오르고 있었다.

아스펠라는 손을 뻗어 옆에 떨어진 화살을 집으려 했다.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고, 어떻게든 손에 넣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목을 죄는 힘이 강해질수록, 아스펠라는 얼굴에 피가 쏠려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지킨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 끝을 알게 된 순간의 기분을 네가 아느냔 말이다! 이곳은 버려진 곳이야! 그들이 스스로 더 큰 고통을 만들어내기 전에 그저 이 세상을 없애려는 것이라고!”

흥분한 베르델이 억울한 듯 소리치는 순간, 아스펠라의 목을 죄는 손에 힘이 풀렸다.

아스펠라는 때를 놓치지 않고 얼른 화살을 잡아, 그대로 베르델의 관자놀이로 직행했다.

푹!

얇은 화살촉과 찍어내리는 힘이 약한 통에 그의 목숨을 한 번에 끊을 수는 없었다.

베르델은 잠시 주춤대더니 이내 아스펠라 위로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불사체들이 아스펠라에게 달려들었다.

“악!”

그녀의 입에서 짧은 비명소리가 나오는 찰나, 기다란 꼬리가 불사체들을 휩쓸 듯 그대로 날려버렸다.

“칼리우스!”

그것들이 다시 아스펠라에게 돌진하지 못하도록, 그녀 앞을 떡하니 막곤 달려드는 것들의 머리통을 아몬드 씹듯 씹어대는 칼리우스였다.

아스펠라는 얼른 베르델을 뒤집었고, 아직 미약한 숨이 붙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가 다시 한번 활을 집어들었지만, 이내 그의 눈에서 생명이 다해가고 있음을 확인했다.

굳이 그녀가 다시 한번 화살로 그의 머리를 내리치지 않아도 그는 죽을 것이다.

그 역시 알고 있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아스펠라에게 물었다.

“……허무하지 않더냐? ……네가 본 미래에 허무 말고, 도대체 뭐가 있었느냔 말이다.”

아스펠라는 쥐고 있던 화살을 내려놓고, 이내 그의 손을 잡아줬다.

베르델의 회한이 가득한 눈을 보는 순간, 그를 향하던 원망과 혐오가 안타까움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비르가가 한 말이 있어요. 미래를 보는 자에게 현재를 산다는 것은, 그저 우연의 연쇄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뿐이라고요.”

“내가 본 모든 것들이 그저 우연이라고?”

“모든 우연들이 모여 필연이 된대요.”

“……그렇다면 그 우연의 끝이 필연적으로 모든 것의 종말이라는 건, 더더욱 허무하지 않느냐?”

“미래가 ‘미래’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실제로 행해져야 해요. 그것이 행해지기 전까지는 어디까지나 예측이고, 상상일 뿐이죠.”

아스펠라는 그의 눈동자 너머 보이는 허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맨 처음 미래를 본 순간에는 허무와 절망만이 느껴졌었으니까.

베르델은 긴 시간 동안 지켜왔던 존재들이 결국엔 스스로 자멸하게 된다는 걸 본 순간,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잃고 말았다.

“내가 본 미래와 네가 본 미래가 다르지 않을 터인데. 너는 어째서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냐?”

베르델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 역시 원래 인간들을 증오하지 않았던가?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산을 태우고, 짐승을 사냥하고, 서로 죽이고, 편을 갈라 싸울 것이다.

어쩌면 봉인이 풀려 루이나가 모든 것을 먹어치운 이후의 세상이 더 깨끗할지도 모른다.

아스펠라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 알고도 살아가는 거예요. 생이 있으면 죽음이 있듯. 언젠가 모든 이들은 죽어요. 사랑이 있으면 미움도 있고,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어요. 이 세상 역시 태어난 순간부터 끝을 달려가겠죠. 다 알면서도 사랑하고, 순간을 즐기며 현재를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가능한 것인가?”

“가능해요. 사랑할 수 있는 마음만 있다면.”

“허무뿐인 미래를 다 알고도? 너는 미래를 다 보았잖느냐. 심지어 네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죽음 역시 보았잖느냐!”

“베르델. 당신은 두려움 때문에 그 일부만 봤군요.”

“……뭐?”

“그래요. 당신 말대로 언젠가는 다 죽음을 맞이해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어떤 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지도 다 봤죠. 그들을 잃을 때의 나의 심정, 그 슬픔과 고통까지 모두 느꼈어요.”

“…….”

“하지만 나는 그들이 남긴 것들도 보았어요. 칼리우스와 나를 쏙 닮은 아이, 일카이가 사랑하는 여자, 그 사이에서 난 아이……. 그 아이들이 같이 커가는 모습을 봤죠.”

“…….”

“인간의 삶은 거대한 원형이래요. 베르델. 우리는 계속해서 죽고, 태어나요. 하나의 물질로 구성되어, 죽으면 흩어졌다가 다시 모아 새로운 물질로 구성되죠. 그렇게 이 세계는 유지되어 온 거예요.”

아스펠라는 비석에 적혀 있던 문구를 베르델에게 읊어줬다.

“꼬리를 먹고 태어나는 우로보로스처럼 종말과 함께 새로운 발단이 시작될 것이다.

그대, 가장 영원성에 가까운 원형의 존재여.

이별과 죽음에 아파하지 말라. 허무에 빠지지 말라. 그럼에도 생은 끝없이 이어진다…….”

베르델은 가만히 그 구절을 곱씹듯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생은 끝없이 이어진다…….”

“네. 끝없이 이어져요.”

베르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중얼거렸다.

“……끝없이 이어지는 원형이라…….”

그의 눈에는 이미 생명력이 꺼져가고 있었다. 베르델의 시선이 아스펠라에게 향했다.

“그러하군. ……내가 본 것은 그 일부였던 것인가.”

“베르델. 그동안 봉인을 지켜줬던 건 감사했어요. 당신의 심정 역시 이해할 수 있어요. 우린 같은 것을 봤으니까. 하지만, 나와 내 소중한 이들은 현재를 살아갈 겁니다.”

아스펠라가 말을 마쳤을 땐, 이미 베르델의 숨은 멈춰 있었다.

초점이 사라진 눈을 그녀가 손수 감겨줬다.

아스펠라는 어쩌면 베르델은 봉인이 완전히 열려 세상이 그대로 멸망하는 것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절망이 틀렸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죽음을 맞이한 베르델의 얼굴에서 아쉬움이나 분노보다는 편안함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

베르델이 완전한 죽음을 맞이함과 동시에, 날뛰던 불사체들이 하나 둘 이마 정중앙에 붉게 빛나던 인장의 빛을 잃고 움직임을 멈추기 시작했다.

그가 죽으니 조종하던 주술 역시 힘을 잃은 걸까.

벼룩마냥 이리저리 튀어 오르며 이빨을 보이던 것들은 이전만큼 날뛰지 않았고, 비교적 쉽게 그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아스펠라! 봉인 진이 갈라지고 있어요! 곧 봉인이 열릴 것 같은데, 이제 그만 모여요!”

한나의 외침에 민튼과 남아 있는 호위 기사들은 불사체들이 봉인 진 근처로 다가오지 못하게 시체들로 급히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봉인 진 근처로 달려온 아스펠라가 한나에게 물었다.

“파베스는요?”

“여기 있어요.”

그녀는 가만히 파베스의 목에 걸린 쇠사슬 끄트머리 부분을 들어올렸다.

“이런 놈도 자물쇠가 될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

한나는 봉인 진 위에 파베스를 끌어다가 놓은 뒤, 무릎을 꿇도록 종아리 부근을 총으로 쐈다.

파베스는 그륵거리며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한나는 후련한 듯 그를 보며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미안해요. 언제나 한번쯤 이렇게 해주고 싶었어요.”

아스펠라의 시선을 의식한 듯 한나가 슬며시 웃으며 말한 뒤, 자신 역시 봉인 진 위로 올라갔다.

그때, 봉인이 열리려는 것인지, 지진이 일 듯 바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새겨진 주술 적힌 봉인 진이 쩌적 쩌적 갈라지기 시작했고, 비석 역시 흔들리다 이내 두 동강으로 갈라졌다.

쿠구구구구-

크게 땅이 한번 울리더니 이내 바닥 깊숙한 곳부터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가누기 힘들 만큼 거대한 요동에 모두들 제자리에서 겨우 버텨냈다.

핏빛 안개 사이로 귀를 먹먹하게 울리는 기묘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루이나가 깨어났다는 것은 확실했다.

“일카이! 칼리우스는?!”

아스펠라가 소리쳐 묻자, 저 멀리서부터 검은 마수의 모습을 한 칼리우스가 훌쩍 뛰어왔다.

그 모습을 본 일카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직 주인은 알아보는 것 같네.”

다시 한번 거대한 굉음이 들려왔다. 땅이 갈라진 틈 사이로 또다시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듣는 이들 모두 그 자리에서 몸이 얼어붙을 정도의 소리였다.

그것이 내는 소리로 짐작했을 때, 땅에서 기어나올 루이나의 크기는 단순히 ‘거대하다’라는 표현을 넘을 것이었다.

잠시 후, 드디어 갈라진 틈으로 루이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건장한 성인 남성의 키와 비슷한 길이의 거대한 손가락이 틈 사이로 올라왔다.

이내 그것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듯, 상체를 들어올렸다.

마치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을 보는 듯한 어둠 그 자체로 에워싸인 몸이었다.

루이나가 고개를 들어 올려 검은 눈동자뿐인 거대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루이나의 눈 안에서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반짝였다.

아스펠라는 그 눈이 꼭 오래전 신을 만났을 때 본 것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워.”

그 눈을 들여다보던 한나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한나 말대로, 종말을 가져올 거대한 몸집의 루이나는 아름다웠다.

이 초월적인 존재에 한나는 그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신에게 기도하는 것인지, 눈앞의 존재에게 기도하는 것인지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루이나 역시 태초의 신의 일부이며, 그를 가두고 있던 원래의 상자가 다름 아닌 태초의 신 그 자체였으니까.

이내 검고 불투명한 몸을 가진 루이나가 고개를 숙여 봉인 진 앞에 모인 네 명의 자물쇠와 새로운 상자를 바라봤다.

거대한 얼굴을 천천히 아스펠라에게 내민 루이나가 물었다.

그에게는 입이 없었기에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의 말이 머릿속에 울렸다.

「나를 가둘 것인가?」

아스펠라는 그럴 것이라 대답했다. 그가 묻는 것을 다른 이들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일카이는 저것이 분노하여 자신들을 공격하면, 그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생각하는 듯했다.

「나를 미워하는가?」

“미워하지 않아요.”

「나를 두려워하는가?」

“두렵지도 않아요.”

「그렇다면 나를 사랑하는가?」

아스펠라는 가만히 루이나의 눈을 마주했다.

그녀 앞의 눈동자는 아스펠라의 몸집보다도 컸지만 그녀는 그 검은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검은 별들 사이로 오랜 시간 동안 깊은 상자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루이나의 모습이 보였다.

“루이나. 당신은 재앙이 될 존재가 아니에요. 당신 역시 이 거대한 세계의 일부라 생각하니까. 그러나 균형은 필요한 법이에요. 다시 상자 안에 들어가서, 균형을 찾도록 도와줘요. 그렇게 되면 모두들 당신을 미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 속에서 사랑을 찾으려 할 테니까요.”

「……새로운 상자는?」

칼리우스가 천천히 루이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루이나가 천천히 마저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천천히 두 팔을 땅에 짚고 다리를 지탱하며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루이나의 몸은 아주 거대했기에 움직이는 모든 순간이 모두의 눈앞에 느리게 벌어졌다.

그의 몸에서는 마치 소나기 같은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비처럼 옷깃을 적시는 이 액체에서는 피 냄새도, 죽음의 냄새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녹음 가득한 숲에 온 것처럼 상쾌한 나무와 흙의 냄새가 났다.

「상자는 내 속으로 들어와야 해.」

몸을 완전히 일으킨 루이나가 말했다.

환한 빛이 봉인 진을 따라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내 거대한 빛이 일었다.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환하고 강력한 빛이었다.

칼리우스는 천천히 그의 손바닥 위로 올라가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아스펠라는 그런 칼리우스를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칼리우스.”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칼리우스가 천천히 뒤돌아 아스펠라에게 잠시 되돌아왔다.

머리 위로 비가 추적추적 내려 속눈썹에 빗방울이 맺혔다.

눈이 부셨으나 아스펠라는 겨우 눈을 떠 칼리우스를 바라봤다.

그는 어느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아스펠라 앞에 서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칼리우스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스펠라.”

“칼리우스…….”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칼리우스는 이제 다시는 어루만지지 못할 아스펠라의 얼굴을 가만히 쓸어내리다 이내 입을 맞췄다.

아스펠라는 흐느끼며 눈을 감았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턱을 타고 내려왔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빌었으나, 불가능했다.

그녀는 곧 자신의 입술을 머금던 따듯한 입술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

네 명의 자물쇠 되는 이들은 마치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있었던 것 같은 주술을 외우기 시작했다.

모두의 목소리가 하나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순간 매우 강한 빛이 일었다.

그 빛이 사그라들 때쯤, 봉인이 다시 잠겼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뜬 일카이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추적추적 내리는 비 사이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울고 있는 아스펠라였다.

처음에는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던 그녀의 흐느낌은 비가 사그라들수록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들 주변엔 이제 하얀 안개도, 불사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블레드 성의 지하 동굴 속에 있었다.

쿠구구궁!

이내 동굴이 크게 울렸다.

일카이는 그곳에 엎어져 울고 있는 아스펠라를 마냥 다독여줄 수만은 없었다.

“일어나, 아스펠라. 이제 곧 성안을 봉쇄하고 불을 질러야 하니까!”

그들은 불바다가 되기 전 수도를 빠져나가야 했다.

아스펠라는 엉엉 울면서도 다른 이들과 함께 지체 없이 블레드 성을 빠져나왔다.

지상으로 올라가 준비해 둔 말을 타고 그대로 검문소까지 쉼 없이 달렸다.

성벽이 일부 무너진 것인지 수도의 거리 곳곳에서 불사체들이 허우적대며 걷고 있었다.

일카이가 연막탄을 쏘아 올렸다.

봉인을 무사히 해냈다는 뜻이었으며, 그들이 블레드 성을 무사히 빠져나와 검문소 가까이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하늘 위로 노란색 연막탄이 터지자, 검문소 바깥에서는 문을 염과 동시에 수도의 모든 건물에 불을 지르기 위한 불화살과 폭탄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아스펠라는 일카이의 뒤에 탄 채로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분명 성에 들어가기 전만 해도 검붉었던 하늘이, 언제 그랬냐는 듯 청량한 하늘색을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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