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행해지는 미래
<너는 새로운 상자란다. 새로운 상자.
상자를 잠가야 해. 그걸 잠가야…… 더 이상 나오지 못해.>
……리우스.
칼리우스.
칼리우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칼리우스가 슬며시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바로 보인 것은 안도한 표정의 아스펠라였다.
“각하! 각하께서 눈을 뜨셨다! 누군가 물이라도 좀 떠오거라!”
아스펠라 옆에는 호들갑을 떨며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펠킨이 있었고, 그들 뒤에 일카이와 민튼이 서 있었다.
방 안과 천장을 둘러보던 칼리우스는 이곳이 대공성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가 다시 눈을 돌려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아스펠라.”
“응, 나예요.”
손을 뻗어 아스펠라의 얼굴을 어루만지려는데, 온몸이 마치 결박당하기라도 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기 힘들 거예요. 절벽에서 떨어져서.”
절벽?
칼리우스는 그제야 검은 마수와 함께 절벽 아래로 추락하던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는지 칼리우스가 천천히 아스펠라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선왕은요? 생포했습니까?”
아스펠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요. 다른 이들은요? 불사체들은?”
그날로부터 벌써 일주일 정도가 흘렀다고 한다.
아스펠라는 그날의 일에 대해 짤막히 설명했다.
불사체들은 사람들을 공격했고, 대부분의 귀족들은 대피에 성공했지만 수많은 관중들이 불사체에 물려 역병에 전염되었다.
그나마 얼마 지나지 않아 왕실 병사들에 의해 모두 진압이 되었다고.
“불사체들로 변한 귀족들이 몇 있었어요. 헤르센 공작이나, 폴센 후작…… 하벨 남작도요.”
아스펠라는 짤막하게 하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떨어진 칼리우스를 데리러 절벽 아래로 내려가려는 도중, 하벨 남작이 아스펠라에게 달려들었다고 한다. 그때는 불사체가 되기 전이었다.
하벨은 단검을 들고 아스펠라에게 미친 듯이 달려들었고, 결국 말에 생채기를 내어 일카이와 아스펠라가 함께 말에서 떨어졌다.
“자물쇠인 날 없애야 한다고 하더군요. 파베스에게 사주를 받았을 수도 있고요. 결과적으로, 하양이가 검을 들고 달려드는 그를 물었어요. 그 이후로는 몰라요. 불사체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거든요.”
그 이후 그냥 그를 버리고 갔다. 뒤에서는 비명이 들려왔고, 아마 그 역시 불사체로 변했을 것이다.
아스펠라는 그렇게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마쳤다.
하벨과 아주 짧은, 대화 아닌 대화를 나누긴 했으나 아스펠라는 그걸 떠올리고 싶지 않은 듯했다.
‘당신, 내가 정말 당신 딸이 맞나요? 단 한순간이라도 그때의 날 가족이라 생각한 적이 있어요?’
‘……넌 애초부터 내가 자물쇠를 가지기 위해 만든 아이다. 네 어미는 몰락한 블레드 성의 딸이었고, 다섯 가문 안에서만 태어나는 자물쇠를 위해 그 여자를 사왔지.’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죠?’
‘내가 봉인을 풀 거라는 걸 알고, 널 데리고 도망갔다. 하지만 결국 죽었지. 그리 될 운명이었던 거다. 너 역시 그리 될 운명이었는데, 망할 신이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그의 죽음에 유감은 없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칼리우스 역시 그랬다.
“그는 조금 더 고통 받을 필요성이 있었는데.”
칼리우스의 말에 아스펠라가 픽 웃으며 말했다.
“그런 저주받은 존재로 변한 것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어딨겠어요.”
“……그럼 이제, 그 불사체들을 왕실 기사단이 모두 진압했다는 겁니까?”
아스펠라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믿지 않는 눈치였다.
“사실 국왕은 그날 일에 대해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고 있어요. 이제 안전하다고만 둘러대고 있죠. 귀족들은 모두 겁에 질려 있고요. 유디티아 후작이 곧 귀족회의를 열 거예요.”
그러자 일카이가 뒤에서 맞장구 쳤다.
“딱 시기 좋을 때 깨어나셨네요.”
아스펠라 역시 다행이라는 듯 따라 미소지었다.
“내가 어떻게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 거죠?”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당신이 선왕이랑 같이 떨어지자마자, 저도 얼른 절벽 아래로 내려갔었는데. 도착했을 땐 선왕과 당신 모두 인간의 모습이었어요.”
“홀딱 벗은 남자 둘 끌고 오느라 얼마나 욕 봤는지.”
일카이의 말에 아스펠라가 슬쩍 어깨를 으쓱였다.
“둘 다 인간으로 돌아와 있었다고요? 선왕도요?”
“네. 아직 선왕은 깨어나지 못했어요. 하지만 숨은 붙어 있대요.”
이상했다. 칼리우스는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이리저리 인간과 짐승으로 변했다 하더라도, 선왕은 왜 이제야 인간으로 돌아온 걸까.
사라의 편지에 의하면 그는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이성이 없다 하지 않았던가.
아스펠라는 의아해 하는 칼리우스의 얼굴을 보자, 그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겠다는 듯 대답했다.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요. 온몸의 뼈가 다 박살났거든요. 그나마 나무들이 감싸서 다행이었어요. 그 대단한 회복력도 한몫하고요.”
의사에 의하면 어쩌면 선왕은 절대 못 깨어날 수도 있다고 한다.
온몸의 뼈를 맞추고, 다시 붙어야 하는데, 그때까지 선왕의 기력이 버틸지 모르겠다고 한다.
칼리우스의 회복력과는 달리 선왕의 회복력은 일반 사람들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인간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그 몸에서는 고문에 가까운 실험 자국들이 숱하게 발견되었다.
“혹시 몰라 물지 못하도록 최소한의 조치만 취했어요. 어차피 몸의 뼈가 모두 부서져 움직일 수는 없을 거랬거든요. 정신이 들면 알 수 있겠죠. 인간인지, 아니면 불사체인지.”
“그래서 곧장 유디티아 후작님께 기별을 넣었어요. 한나 님이 오실 거예요. 아무래도 공주로서 증언을 해주셔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때 시종이 문을 두드렸다.
“아스펠라 님! 눈을 떴다고 합니다! 선왕이 눈을 떴습니다!”
“타이밍 한번 딱 맞아 떨어지네요.”
아스펠라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
칼리우스는 아스펠라와 함께 휠체어에 탄 채로 선왕이 있는 병실로 향했다.
방 안에 들어가자 침대에 누워 미약한 숨을 내쉬는 선왕이 그를 쳐다봤다.
침대 밖으로 삐져나온 손은 검은 마수처럼 검은 털이 듬성듬성 났으며, 거대한 갈고리 같은 기다란 손톱도 날카롭게 나와 있었다.
몸의 일부는 아직 검은 마수로 남은 채였지만, 불사체가 아닌 인간의 눈빛이었다.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칼리우스의 말에 선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몸의 뼈가 죄 박살난 것 빼고는, 나름 건재하네.”
실없는 농담까지는 하는 것으로 보아 정말 살 만한 것인지. 칼리우스가 슬쩍 미소를 지어보였다. 선왕은 잠시 아스펠라를 쳐다보다 말을 이었다.
“그때 그 아이로구나. 하벨 남작의…….”
아스펠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사냥제에서의 일을 기억하시나요?”
그러자 선왕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온전한 마지막 기억은 자신에게 불사체의 실험을 행하던 파베스의 얼굴뿐이었다.
아스펠라는 사냥제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짤막히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던 선왕은 파베스의 목적이 뭔지 알고 있다는 듯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파베스는 봉인을 열려는 거군. ……그 애가 어렸을 때부터 부정한 힘에 집착한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막지 못한 내 죄일세. 다른 이들은 어찌 되었나? 달리아나 사라는? 피올라 왕비는?”
“모두 죽었습니다.”
칼리우스의 짤막한 대답에 선왕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잔기침을 하며 피를 쏟았다.
“쉬십시오. 곧 한나 공주가 올 것입니다.”
아스펠라가 칼리우스의 휠체어를 끌며 나가려는 순간, 거대한 갈고리 손톱이 칼리우스의 손목을 잡았다.
“칼리우스. 자네가 새로운 상자인 걸 잊지 말게. 나는 실패했어. 사라와 함께 시도하려 했지만, 나는 부족했네. 나는 부족하여 인간으로 돌아오지 못한 거였어. 그러니, 쿨럭. 자네가 새로운 상자야.”
선왕의 말에 칼리우스는 천천히 그의 손을 두어 번 두드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때맞춰 유디티아 후작 부부가 도착했다며 집사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말에 잔뜩 창백한 얼굴의 한나가 얼른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그녀는 기절하다시피 제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침대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칼리우스는 아스펠라에게 이만 나가자는 듯 손을 잡았다.
아스펠라는 잠시 멍한 얼굴로 선왕과 칼리우스를 쳐다보다 이내 휠체어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닫힌 병실 문 밖으로 흐느끼는 한나의 목소리와 함께 부녀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칼리우스는 잠시 침묵하는 아스펠라를 올려다봤다.
“아스펠라?”
“……아. 내 정신 좀 봐. 응접실로 갈게요. 유디티아 후작이 기다리고 있어요.”
칼리우스는 잠시 넋을 놓은 아스펠라가 걱정스러운 듯 쳐다봤다. 그녀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굳이 일부러 그것에 대해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아스펠라가 침묵하면, 자신 역시 침묵하는 것이다.
***
응접실로 가자 유디티아 후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필립은 칼리우스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내 휠체어 앞에 선 필립은,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어깨를 덥썩 잡았다.
칼리우스는 부서진 어깨뼈가, 한 번 더 으스러지는 기분이 들어 짧게 인상을 찌푸리며 신음을 삼켰다.
아스펠라가 화들짝 놀라 얼른 유디티아 후작을 제지하려 했지만, 유디티아 후작은 이미 본인만의 감상에 빠져 있었다.
“아스펠라 양한테 그동안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네. 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나!”
“그걸 어찌 얘기하나.”
칼리우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유디티아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소리쳤다.
“어찌 얘기하냐니! 그냥 얘기해주면 될 거 아닌가! 난 그동안 자네가 이렇게나 고통 받았을 줄은 몰랐네. 우린 친구 아닌가! 친구란 말일세. 내가 고작 자네가 검은 마수로 변한다 하여 두려워할 줄 알았는가! 전혀 그렇지 않아!”
“그 나이 먹고도 침대 밑 괴물이 무섭다고 그 밑의 공간을 틀어막는 자네인데 내 어찌 얘기해.”
“…….”
눈물 글썽이며 당장이라도 칼리우스를 으스러지게 안아주려던 유디티아 후작의 눈에서,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와 함께 정신 사나울 정도로 의리에 대해 떠들던 후작의 입도 조용해졌다.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칼리우스가 픽 웃으며 말하자 유디티아 후작은 잠시 그를 흘겨보다, 이내 눈물을 벅벅 닦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자네가 깨어나기 전에 뜻을 함께할 귀족들을 모았네. 아스펠라 양이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하여. 이번 대공 연회 때 그들이 올 거야. 그때까지, 선왕께서 버텨주실 수만 있다면…….”
현재 귀족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고 한다.
국왕의 말을 모두 믿고 그날의 일은 더 이상 반복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이들, 혹은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야 한다 생각하는 이들.
두 부류 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이 국왕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파베스는 그날 이후 검은 마수가 모든 것의 원흉이라 선동하며, 검은 마수를 토벌할 군대를 모으고 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보여주기 식의 행동이었다.
파베스가 노리는 건 더 이상 검은 마수가 아니다. 이제 곧 봉인이 열리는 날이 다가올 텐데. 그날을 위한 혼란을 만들려는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칼리우스와 일행들에게는 파베스의 그 모든 거짓말들을 증언할 유일한 증인이 있었다.
그 누구도 그 존재를 부정하지 못할 존재.
선대 튀니아의 왕.
***
일카이는 선왕의 병실 문 앞에서 어색하게 서 있었다. 문을 두드릴까 손을 올려보다가도, 이내 다시 발길을 돌리길 반복했다.
그러다가 문을 열고 나온 한나와 마주쳤다.
현재 국왕의 여동생. 그러니까, 자신의 이복 누이…….
한나와 일카이는 매우 어색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알게 모르게 닮은 구석이 있다는 걸 그들은 아직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한나는 얼른 눈물을 닦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안에 들어가 봐요. 아버님께서 기다리고 있으니.”
“……예.”
일카이는 짧게 묵례를 한 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캐노피 천을 걷으며 침실 쪽으로 다가갔다.
선왕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가, 일카이의 인기척에 슬며시 눈을 떴다.
굳이 서로가 누군지 소개하지 않아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사실인건지.
일카이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비슷한 얼굴의 선왕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달리아의 눈을 닮았어. 사라도, 너도.”
먼저 입을 연 것은 선왕이었다.
“그런가요.”
“넌 날 처음 보듯 하는 구나. 네가 다섯 살이 되기 전까진 꽤 자주 함께했었는데 말이야.”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래. 너무 어릴 때니까.”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사실 일카이는 선왕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말을 들었다 하여 아버지에 대한 없던 사랑이 생겨나지는 않았다.
지금은 오히려 남에 가까웠다. 매우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남.
“……사라는 내가 죽인 것이니?”
“당신은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고,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아마 파베스에게 조종을 당했거나 그런 상태였겠죠. 부정 탄 산신이 파베스의 뒤를 봐주는데 뭔들 불가능했겠습니까.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원망해 주거라. 원망 받아야 해. 아무도 지키지 못했으니까. 신의 뜻을 받들지도, 그렇다 하여 내 가족을 지키지도 못했다.”
선왕은 잔기침을 쿨럭 대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일카이는 선왕의 몸을 부축하며, 그가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도와줬다.
“누이는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그러니 당신도, 너무 후회하지는 마십시오. 모두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으니,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선왕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미래라는 것은, 결코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되었든, 미래가 ‘미래’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실제로 행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미래가 아니야. 그저 망상이지. 미래는 막지 못해. 그저 받아들여만 한다.”
일카이는 왜인지 모르게 불길한 말을 내뱉는 선왕을 천천히 눕혔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 짐승으로 살아와서인지 말에 두서가 없었다.
이후로도 그는 영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상자를 바꿔야 한다느니, 새로운 그릇이라느니.
“쉬세요. 피곤하신 것 같으니.”
일카이는 그저 제 아버지라는 사람을 보며 조금 딱할 뿐이었다.
다시 이불을 덮어준 뒤 나가려는데 선왕이 말했다.
“파베스는 내 자식이 아니야. 그는 피올라와 베르델의 자식이다.”
“남쪽 신……?”
“그래. 피올라가 왕궁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와 함께였지. 피올라는 애초에 날 사랑하지 않았어. 우린 애초에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다. 혹여라도 내가 달리아를 단순한 정부로 여겼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 나는 달리아를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셨다는 건 알아요.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당신을 원망한 적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에르윈 대공을 데려 올 테니 다시 한번 해주세요. 모두가 알아야 할 것 같으니까요.”
***
버루카는 아침 일찍부터 파베스를 찾아가 유디티아 후작이 비밀스레 귀족 회의를 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전했다.
“귀족 회의를 연다니. 혹 그가 반역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요?”
“후작은 그럴 만한 인재가 아니다. 겁이 많은 이니까.”
“그렇다면 공주가 대공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일까요?”
버루카의 말에 파베스는 침묵을 유지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버루카는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파베스는 이전보다 더 창백해진 상태였다.
“전하. 전에 입으신 부상이 더 심해지신 것은 아닙니까? 의사로는 부족하여 교주가 손을 써본다 하지 않았던지요?”
교주는 국왕의 부상을 치료해 보겠다면서 이것저것 그의 몸에 실험 같은 것을 했다.
그러나 어째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악화되어가는 것 같았다.
“버루카.”
“예, 전하.”
“내가 찾아보라 한 것은 찾았는가?”
그의 말에 버루카가 아, 짧은 감탄사와 함께 얼른 품에서 뭔가를 꺼내 건넸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피올라 왕비의 별채에서 발견했습니다. 벽의 비밀 공간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며칠 전, 파베스는 버루카에게 어머니가 살아생전 지내던 별채를 뒤집어엎어서라도 ‘그것’을 찾아내라 명했다.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이었기에 확실하진 않았지만, 피올라 왕비가 뭔가를 적었던 간책이 있었다.
일기와도 비슷한 것이었지만, 어머니는 하루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적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적는 것은 신의 말을 옮기는 것이라 말했었다.
파베스는 그 책 안에 교주의 정체에 대한 것이 적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시종들이 구 별채를 며칠 내내 뒤지고 뒤지다, 가구에 가려져 있던 작은 틈에서 마침내 찾아낸 것이다.
겨우 발견한 피올라의 일기가 파베스의 손에 들어왔다.
파베스는 버루카를 물린 뒤 그 자리에서 곧장 일기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믿었던 내게, 신이 다가왔다. 누구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장 첫 장의 문구였다. 낡아 변색된 종잇장을 넘길 때마다 그 안에 갇혀 있던 진실들이 하나씩 드러났다.
<나는 가장 특별한 아이를 낳은 것이다. 신의 아이. 이 아이는 언젠가 세상의 정점에 설 거야. 나의 사랑하는 파베스.>
<달리아가 공주를 낳았다. 애석하게도 왕은 파베스가 그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듯하다.>
<그분께서 내게 왕과 합방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야만 자물쇠를 낳을 수 있다고.>
<왕의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는 자물쇠야. 훗날, 내 아들을 도와 봉인을 열.>
<달리아. 이런 나를 용서해. 하지만 신의 뜻이야. 모든 것은 신의 뜻. 나를 절대 용서하지 마. 미안해.>
.
.
.
<신은 나를 저버렸다.
내 아이는 특별한 아이가 아니야. 이상적인 세계의 정점에 서는 것은 오로지 그 자신뿐.
아니 애초에 ‘세상’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신께서 원한 것은 자물쇠가 아니라, 상자였던 것이야. 루이나를 담을 새로운 아이를 원했던 거지. 그 아이를 자신의 꼭두각시처럼 삼아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무로 돌려보내기 위해. 자물쇠는 필요 없어. 루이나를 담는 건 상자니까.
그는 내게 상자가 아니면 필요치 않다고 했다.
파베스. 왜 너는 상자가 아니었니? 그에게 나와의 아이는 그저 도구였을 뿐.
그는 우릴 모두 다 죽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 아이가 더 이상 이용되는 건 볼 수 없다.
내 아이는 특별해야 하는데, 어째서 부속품이 되는 거지?
특별하지 않다면 존재하지 말아야 해. 나는 그런 부속품 따위 원한 적 없어.
이용되지 마. 특별해야만 해.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모든 걸 없애.
세상의 정점에 서야만 해.
신이 되어야 한다고.>
“하. 하하. 하하하….”
파베스는 눈을 선득히 빛내며 웃음소리를 흘려댔다.
자신이 결국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허탈감.
이 모든 것을 쥐고 흔들 강한 힘을 원했음에도 결국 그 부속품 밖에 되지 못했다는 분노감.
그제야 왜 아버지가 자신을 그렇게 마뜩찮은 눈으로 바라봤는지, 왜 선왕은 단 한번도 자신에게 다정히 아들이라고 불러주지 않았는지.
왜 어머니는 자신을 죽이려 했었는지.
이제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까지 이용되어 왔다는 것이로군. 자물쇠는 힘을 가질 수 없어. 나는 죽어도 힘을 가질 수 없다는 거잖아.”
파베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미 그의 눈에는 광기밖에 비치지 않았다.
그때, 문이 달칵 열리며 파베스의 서재 안으로 베르델이 들어왔다.
“전하. 몸 상태를 확인하겠습니다.”
파베스는 책을 덮으며 천천히 교주를, 정확히는 자신의 친부 베르델을 쳐다봤다.
태연한 눈빛으로 위장한 금색 눈동자 아래, 모든 순간 이용된 자의 광기와 분노가 서서히 끓어올랐다.
찰나의 순간 그는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될지 확신했다.
“내가 죽어가는 건가. 교주.”
“그럴 리가요. 검은 마수에게 물려 그 부정한 기운이 전염되긴 했어도, 이런 걸로 돌아가시지는 않을 겁니다.”
베르델은 천천히 파베스의 몸에서 떨어져 나오는 살점들을 채취했다.
파베스는 반쯤 썩어 들어가는 자신의 몸뚱어리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게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되는 건가.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문드러져가는 자신의 몸뚱이였다.
“그 썩어가는 것들은 왜 채취하지?”
“…….”
“날 가지고 마치 실험이라도 하고 있는 듯하군. 숙주 취급 같아 불쾌해.”
몸에서 살점들이 떨어져나가는데도 어떠한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이미 불사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파베스는 자신 역시 불사체의 실험, 그 일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베르델이 원했던 것은 루이나의 봉인을 담을 새로운 상자와도 같은 아이였다.
그러나 막상 태어난 아이는 상자가 될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특별하지 못한 존재였던 것이다.
기왕 왕자로 태어났으니 그 지위를 이용해먹을 대로 이용하다, 이내 완벽한 불사체의 역병을 몸에 담을 숙주로 이용하려는 것이다.
“……자물쇠들을 모두 찾았다. 네 명의 자물쇠. 하벨 남작의 딸과, 에르윈. 사라와 한나. 그것들을 다 죽이면. 내가 진정 봉인을 열 수 있는 것이 맞더냐.”
“예. 맞습니다.”
“……왜 거짓말을 하지?”
나직한 파베스의 물음에, 베르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그게 무슨 소리이십니까.”
“왜 거짓말을 하냐고 묻잖아.”
파베스가 천천히 몸을 수그리고 있던 교주의 목을 죄듯 잡았다.
“왜 나한테 거짓말을 하냐고. ……아버지.”
***
급하게 귀족 몇몇이 에르윈 대공의 부름을 받고 그의 성으로 향했다.
부름을 받은 이들은 모두 며칠 전 유디티아 후작의 설득으로 에르윈 대공과 뜻을 함께 하겠다 약속한 가문의 이들이었다.
원래는 대공 연회 때 모두 모이기로 했었으나 매우 긴박한 일이라는 서신을 받아, 아득한 밤인데도 불구하고 수도 근처에 사는 가주들은 대부분 모였다.
그들은 모두 응접실에 앉아 무슨 일로 자신들이 이 한밤에 모이게 된 것인지 추측하고 있었다.
“설마. 에르윈 대공이 죽은 것은 아니겠지?”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일세. 사냥제로 인해 헤르센 공작은 물론 폴센 후작도 행방불명되었어. 사실 말이 실종이지, 짐승한테 목이 물어뜯겼다는 걸 본 이가 한둘이 아니야. 하벨 남작도 그 이상한 짐승처럼 변했고.”
“대공은 그 검은 마수들의 싸움에 휘말려 같이 절벽에 떨어졌다 하지 않았던가?”
“검은 마수가 둘씩이나 된다니, 튀니아의 망조로군.”
곧 응접실 문이 열리고 나이 지긋한 집사가 인사를 한 뒤, 그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성 안쪽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자신들이 추측한 것이 사실인 양 믿는 듯했다.
곧 병실 문이 열렸다.
“……에르윈 대공!”
칼리우스는 늑대 두상이 조각된 은 지팡이를 짚은 채로 귀족들을 맞이했다.
부상으로 인해 지치고 예민해진 기색은 있어도 쇠약해져 다 죽어가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무사하시군요.”
“절벽에서 떨어졌다 들었는데, 이렇게 서 계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귀족 하나가 아스펠라에게 슬쩍 물어봤다.
아스펠라는 차마 그는 검은 마수라 회복 속도가 일반 인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라, 휠체어에 앉아 있으려 하지 않아서 한참동안 실랑이를 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하여 아스펠라는 어쩔 수 없이 둘러댔다.
“네, 부상이 깊지 않아 금방 회복하였으니 걱정 마세요.”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부상이 깊지 않다고요? 그것참 불행 중 다행이긴 합니다만…….”
귀족들은 에르윈 대공이 버젓이 살아 있다는 것에 안도했지만, 그렇다면 무엇이 그리도 긴박한 일인가 의아한 얼굴이었다.
“오늘 내가 경들을 부른 이유는, 일종의 증인이 되어 달라 청하기 위함이오.”
“증인이요?”
“무엇의 증인을 말하시는 겁니까?”
아스펠라는 대답 대신 조용히 침실로 들어가는 방문을 열었다. 귀족들이 천천히 그곳 안으로 들어갔다.
유디티아 후작과 일카이가 한나 옆에 서 있었고, 한나는 침대에 누운 환자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곧 필립과 일카이가 환자를 부축하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침대의 캐노피에 가려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 안의 사람이 이미 튀니아에서 망자 취급을 받는 이일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한나가 천천히 캐노피 커튼을 걷었다.
커튼이 걷히고 그의 얼굴이 공개되자 귀족들 모두 죽은 사람이라도 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귀족들에게 있어 선대 왕은 망자였다.
“서, 서, 서, 선왕께서 어찌……!”
“오, 신이시여.”
말을 더듬거나, 신께 기도를 올리는 제스처를 하던 귀족들은 자신이 혹 환시를 보는 건가, 아니면 꿈속인가 믿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시간이 없을 것 같으니, 경들께서 이해해주기 바라오.”
선왕은 매우 할 이야기가 많은 듯했다.
본인에게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직감이라도 하는 건지, 한시라도 더 빨리 자신이 아는 사실들을 말하려 했다.
그날 밤 수많은 이야기들과 가려진 인과관계들이 증인이 될 모두의 앞에서 흘러나왔다.
유디티아는 아버지가 남기고 간 서적을 그들 앞에 증거로 내보였다.
맨 처음 믿지 않던 다른 귀족들 역시 하나 둘 자신들이 듣고 있는 것이 단순한 허구나 망상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
귀족들은 해가 뜨고 나서야 에르윈 대공성을 떠났다. 그들 모두 아직 실감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밤새 잠을 자지 못한 것 때문인지 멍한 얼굴이었다.
아주 긴 이야기를 마친 선왕은 지친 표정을 하며 부축을 받아 다시 침대에 몸을 뉘였다.
그는 자신의 시간이 이제 끝나가고 있음을 알았다.
의사가 와 얼른 그의 몸을 진단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선왕의 가는 길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는 것뿐이었다.
방 안에서는 몸을 안정시키는 향들이 자욱했다.
유디티아 후작 부부는 간병석에 앉아 태어난 아이를 선왕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그럴 때면 선왕은 아이를 쳐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 역시 선왕의 생명력이 꺼져가는 것을 보았으나 슬픈 기색보다는 그 순간이라도 함께 있음에 감사하는 듯했다.
일카이 역시 그들 사이에 어색하게 껴 제 이복누이의 갓 태어난 아이를 신기한 듯 쳐다보곤 했다.
아스펠라는 멀리서 칼리우스와 함께 그들을 지켜봤다.
“칼리우스. 당신도 조금 쉬어요. 몸 상태도 성치 않은데 밤새 귀족들에게 설명하느라 무리했어요.”
눈 밑이 검게 변한 칼리우스의 얼굴을 매만지며 아스펠라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아스펠라 말대로 무리한 것은 사실이었는지, 칼리우스는 소파에 앉아 아스펠라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선왕이 언제 그들을 불러 어떠한 말을 남길지 모르니, 최대한 가까이 있어야 했다.
칼리우스는 가만히 자신의 미래를 생각했다.
“아스펠라. 당신한테 할 말이 있어요.”
“뭔데요?”
“다섯 가문 중 네 명의 아이가 자물쇠로 태어난다 하죠. 나머지 한 명은 루이나를 새로 담을 상자가 되는 거고요.”
“…….”
“때가 되면, 새로운 상자는 루이나를 담고 봉인에 같이 잠겨야 합니다.”
그러자 아스펠라가 슬쩍 몸을 비틀며 일어나더니, 이내 말을 돌렸다.
“참. 일전에 산에서 가져온 약초들이 있는데 그거라도 좀 달여 올게요.”
“아스펠라.”
칼리우스는 후다닥 자신에게서 도망치려는 아스펠라의 손목을 잡았다.
나직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아스펠라는 입을 꾹 다물고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저지른 짓에 대한 벌이라 생각합니다. 유일하게 만회할 기회이기도 하고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무슨 말인지 알잖아요.”
아스펠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칼리우스는 다시 그녀를 제 옆에 앉히곤 한쪽 손으로 고개 숙인 아스펠라의 턱을 잡아 올렸다.
“안 그러면 당신이 사랑하는 자연도 동물도, 모두 사라질 겁니다.”
“……하지만 그걸 지키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는데, 내가 어째야 하죠? 잘 모르겠어요 정말로. 당신을 보내줘야 할 때가 오면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상상조차 하기 싫은 듯 아스펠라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아스펠라 역시 알고 있었다. 끝까지 모르는 척하려 했으나, 성역에서 어린 루이나가 말한 것을 들은 이후부터는 네 명의 자물쇠, 그리고 한 명의 상자 될 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말았다.
그리고 새로운 상자가 바로, 칼리우스라는 것도.
비르가는 훗날 상자의 역할을 위해 칼리우스를 자신의 그림자로 만든 것이었다.
이전에는 선왕이 상자 되기를 시도했으나, 그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는 칼리우스가 해야만 했다.
이미 아스펠라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가득 차 분홍빛 뺨을 지나가고 있었다.
칼리우스는 그런 아스펠라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정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보내주면 됩니다.”
“못 하면요.”
“못 해도 해야 합니다.”
“그런 게 어딨어요…….”
아스펠라의 얼굴이 구겨진 종이마냥 일그러졌다.
칼리우스는 그런 아스펠라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 조용히 입을 맞췄다.
흐느끼는 아스펠라를 달래주기라도 하듯 천천히 입술을 머금던 칼리우스는, 그녀가 조금 진정이 된 듯하자 이마에 머리를 톡, 부딪히며 눈을 마주쳤다.
“아스펠라.”
“흑.”
“입술이 짜요.”
아스펠라는 이런 상황에서 농을 하는 칼리우스가 어이가 없는지, 허탈하게 웃음을 흘리면서도 그의 가슴팍을 아프지 않게 툭 때렸다.
축축해진 얼굴을 제 손으로 슥슥 닦아내리던 아스펠라는 숨을 고른 뒤 이제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칼리우스는 안도한 듯 아스펠라를 바라보며 살풋 미소를 지었다.
“보내줄게요. 칼리우스.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게 그거라면요.”
“고마워요.”
“대신에.”
“응?”
“대신에 나랑 결혼해줘요.”
아스펠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당황한 칼리우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스펠라. 뭘 하자고요?”
“결혼이요. 우리 빨리 결혼해요.”
“난 어차피 떠나야 해요.”
“상관없어요. 나랑 결혼해줘요.”
갑작스러운 청혼에 칼리우스는 설마 아스펠라는 자신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거라 생각하나 싶어 다시 한번 말했다.
“어차피 난 떠난다니까요. 돌아오지 못합니다.”
“알아요. 시기가 좀 그렇긴 하지만. 그러니까 빨리 결혼하자고요.”
“아스펠라?”
칼리우스는 잠시 아스펠라가 충격으로 인해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아스펠라. 어차피 내가 사라지면 이 성은 당신 것이 됩니다. 펠킨과 이야기도 끝났고요.”
“세상에, 내가 지금 고작 이딴 성 갖자고 청혼하는 줄 알아요?”
아스펠라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확실히 아스펠라는 빛나는 에르윈 대공성보다 산속 깊은 곳 초가집이 더 아늑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대체 왜 죽을 것이 분명한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는 것인가.
“나중에 재혼할 때도 힘들지 몰라요. 튀니아는 재혼이 불가능한-”
“누가 재혼한대요? 난 한 번 결혼하면 이혼도 재혼도 안 할 거예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칼리우스의 얼굴에 아스펠라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충동적으로 꺼낸 말은 아니에요. 그냥, 우리 사이가 그저 순간에만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아스펠라는 정식으로 부부의 서약을 맺고 싶다 말했다.
나중에 모든 게 다 사라져도…… 그래도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했고, 그래서 결혼했다는 사실은 정식으로 남을 테니까.
모든 이들을 증인 세워 그들의 사랑이 결코 ‘사랑했지만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가 아닌, ‘이 모든 일이 일어났어도 그들은 사랑해서 서로 결혼했고, 그래서 그녀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로 끝이 나길 바랐다.
“당신이랑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그건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적어도 우리가 결혼을 한다면…… 당신은 내 남편이, 나는 당신의 아내가 되는 거잖아요.”
아스펠라는 자신이 원하는 건 그뿐이라 말했다.
“……아이가 생긴다면, 아마 우리 둘을 닮은 아이겠죠?”
슬쩍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말하는 아스펠라의 모습에 칼리우스가 지금 농을 할 때냐 물었다.
아스펠라는 이게 다 당신한테서 배운 것이라며, 그래서 결혼해줄 거냐, 말거냐 빨리 대답이나 하라 그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혹시 청혼이 마음에 안 들어요? 너무 멋이 없었나?”
아스펠라의 말에 칼리우스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럼, 내 청혼 받아줄 거예요? 저 사실 청혼은 처음이라서. 책에서는 무릎 꿇고 반지라도 주던데……. 혹시, 저랑 결혼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고요.”
결혼까지 생각하진 않았던 건지, 도통 대답이 없는 칼리우스의 모습에 아스펠라는 혹여나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스펠라 양. 저와 결혼해주십시오.’
‘그대를 내 신부로 맞이하고 싶다는 소리입니다.’
사실 맨 처음 말도 안 되는 청혼으로 시작된 그와의 인연이었기에, 아스펠라는 자신의 청혼을 그가 곧장 받아줄 줄 알았다.
칼리우스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아스펠라를 가만히 쳐다봤다.
아스펠라는 눈썹을 꿈틀거리고 입술을 깨물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내 칼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후회했습니다. 맨 처음 당신한테 청혼한 거.”
전혀 예상 밖의 대답에 아스펠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녕 거절당한 것인가, 당황하고 놀란 얼굴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내가 당신한테 청혼하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이렇게 끝내려고 했는데.”
“…….”
“……자꾸만 나한테 기회를 주잖아. 당신이.”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의 약지를 매만지며 나직하게 말했다. 아스펠라는 그런 칼리우스의 손에 깍지를 끼며 눈을 마주쳤다.
“기회가 왔을 때는 잡아야죠.”
***
대공 연회가 열리기 이틀 전, 선왕은 모두가 지켜보는 곳에서 매우 평온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불사체의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감사하며, 행복하다는 짧은 말을 남겼다.
한나는 의연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오랫동안 품고 살았던 두려움과 의문이 풀려 후련한 모습이기도 했다.
칼리우스는 선왕의 장례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솜씨 좋은 장의사가 와 창백한 선왕의 시신을 단장했다. 선왕은 매우 멀끔한 모습으로 백합과 소금으로 가득 채워진 관 안에 안치되었다.
선왕은 죽기 직전 자신의 관을 귀족들에게 모두 보여주라는 말을 남겼다.
‘유디티아 후작의 기록서를 믿지 못하는 귀족들에게는 내 시신을 보여주거라. 내 시신만큼 확실한 증거는 없을 거다.’
해서 선왕의 시신은 잘 보존되어, 귀족들이 에르윈 성에 왔을 때 그들을 설득할 가장 강력한 증거로 쓰일 것이다.
관은 연회가 열릴 볼룸 맞은편의 작은 공실에 놓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대공 연회가 열렸다.
그저 귀족들에게 아스펠라와 일카이를 소개하려던 목적이었던 대공 연회는 목적이 바뀌었다.
명목상 대공 연회였으나, 사실상 연회가 아닌 집회나 다름없었다.
그동안은 귀족 회의가 존재하는 덕에 튀니아의 모든 권력이 국왕에게로 몰리지 않을 수 있었는데.
이번 사냥제의 사건으로 인해 원로 귀족 몇몇이 짐승들에게 공격받아 죽거나, 충격으로 인해 앓아눕기도 했다.
여전히 왕궁에서는 그날 사람들을 공격했던 그 기괴한 존재에 대해 어떠한 말조차 내놓지 않은 상태.
살아남은 귀족들 중 침묵하는 왕이 미덥지 못한 이들은 모두 이곳에 모였다.
“대체 사냥제에서 봤던 그것들은 무엇일까요?”
“국왕 전하께서는 그저 안전하다고만 하시니, 영 미덥지 못해요. 솔직히 그동안 튀니아를 지키고 승리를 이끈 것은 국왕이 아닌 에르윈 대공이잖아요?”
“분명 대공께서 계획이 있으시니 저흴 불러들인 거겠죠. 연회라고는 하지만, 아마 이곳의 그 누구도 그저 놀고먹으려 온 멍청이는 없을 거예요.”
모두들 불안에 떨고 있었다.
적어도 사람이 사람을 공격하며 인육을 탐하는 그 광경을 목격한 이들이라면 지금 자신들을 보호해주고 이끌어줄 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에르윈 대공이 적임자라 생각하는 듯했다.
사람이 모일만큼 모이자 아스펠라와 칼리우스가 이층 계단에서 내려왔다.
단상 위에는 이미 일카이와 유디티아 후작 부부가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들은 아스펠라와 칼리우스가 내려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족들의 시선 역시 모두 그들에게로 향했다.
지팡이를 짚으며 아스펠라와 함께 내려온 칼리우스는 이전보다 훨씬 회복된 몸으로 그들 앞에 섰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이 자리에 참석해주어 모두에게 감사하오.”
단상 위에 오른 칼리우스는 짤막한 인사와 함께,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여러분들이 이곳에 온 이유와 내가 이곳에 여러분을 초대한 이유는 같소. 진실을 알리기 위함이오.”
사냥제에서 본 그 정체불명의 것들.
그것은 결코 환시도 환영도, 그저 단순한 역병에 걸린 이들도 아니라는 말에 귀족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칼리우스는 불사체에 대한 것을 설명했다.
그들은 어떠한 주술로 인해 만들어진 죽지 않는 존재들이며, 주술에 걸린 이들의 이마에는 인이 새겨져 조종당하듯 움직이고, 그것들에게 물리면 그들처럼 인육과 피를 탐하게 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튀니아의 먼 신화 속, 그저 구전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신화의 일부였던 루이나의 봉인은 사실이었다는 것.
“봉인이 열리게 되면 모두가 죽을 것이오.”
그 말에 귀족들 대부분은 혼란스러운 듯 웅성거렸다.
대공이 미친 헛소리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귀에 이상이 생긴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 말도 안 되는 모든 일들이 사실이라는 것 아닌가.
이 모든 일을 꾸민 자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군중 속에서 누군가 소리쳐 물었다.
“그래서 대체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대공?”
칼리우스는 잠시 침묵했다.
끝없는 인과관계로 이뤄진 이야기, 확실하게 계획한 바를 적시에 터트리기 위해선 지금 이 자리에서 귀족들에게 모든 걸 명명백백히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파베스가 다른 수를 쓰기 전 한시라도 빨리 여론을 자신들의 편에 끌어들여야 하니까.
“국왕 파베스의 짓이오.”
“국왕 전하요?”
“그는 봉인을 풀고 힘을 얻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싶은 것이오.”
그의 말에 귀족들은 며칠 전 에르윈 대공 성에 왔었던 이들이 맨 처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선왕을 마주쳤을 때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나 에르윈 대공이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허풍이나 떨 사람은 아니었다.
그들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증거들이 필요했다.
“우리가 대공의 말을 믿을만한 증거를 보여주시오!”
누군가 그에게 소리쳤다.
칼리우스는 잠시 고개를 돌려 한나와 일카이를 쳐다봤다. 두 사람은 그리하라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칼리우스는 볼룸 맞은 편 공실의 문을 개방하라 명했다.
천장까지 닿는 높은 문이 열리자, 귀족들은 천천히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몇몇 귀족들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선왕을 만나 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귀족들은 모두 애도하듯 고개를 떨궜다.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간 귀족들은 넓은 방 정 가운데에 있는 대리석 관쪽으로 향했다.
“이보시오. 그 안에 무엇이 있소?”
문 바깥의 귀족들이, 안에 들어간 이들에게 물었다. 찬찬히 관 앞으로 다가간 어느 용기 있는 귀족이 그 안을 들여다보곤 창백하게 질렸다.
뭘 봤길래 그러나 궁금했던지 몇몇 다른 이들도 천천히 그 앞에 갔다.
“이보시오. 증거라는 게 대체 뭐요? 그 안에 뭐가 있냐니까?”
이내 관 안을 들여다보던 귀족 중 젊은 사내가 말했다.
“……선왕의 관이오.”
“뭐가 있다고요?”
“선대 왕의 관이 있다고요. 선대 왕의 시신과 함께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선왕은 이미 오래전에 실종되어 사망한 것으로 처리 되지 않았던가?
빈 관에 왕의 물품을 넣고 장례를 치르던 것을 똑똑히 본 원로 귀족들은 제 눈으로 확인하려는 듯 인파를 비집고 방 안에 들어왔다.
그 중 한나의 당숙인 원로 귀족이 앞의 영식을 밀치며 관을 쳐다봤다.
그는 선왕의 먼 사촌이었기에, 선왕의 얼굴을 잘 아는 이였다.
“시신도 못 찾은 사람이 이제 와…….”
이제 와서 나타났겠냐는 말을 하려던 원로 귀족은, 관 안에 버젓이 누워있는 선왕의 시신에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그의 시신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떠나, 가지런히 가슴팍 위에 모아져 있는 손은 인간의 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대체…….”
기다란 털로 뒤덮여, 거대한 갈고리 같은 손톱을 가진 그것의 일부는 꼭 사냥제를 쑥대밭으로 만든 검은 마수의 발과 비슷했다.
적어도 그날 사냥제가 열린 그곳에서 붉은 눈을 번뜩이며 사람들을 공격하던 검은 마수를 본 귀족들이라면 누구나 눈치챌 것이다.
지금 이 하얀 대리석 관에 누워있는,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선대 왕이 그 검은 마수라는 것을.
“선왕이 검은 마수라는 것과 국왕이 모든 일을 벌였다는 것이 무슨 연관이 있는 겁니까?”
관이 있는 방에서 빠져나온 원로 귀족이 물었다. 그러자 아이를 앉고 있던 한나가 후작에게 아이를 맡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당숙님께 했던 말, 기억하시나요?”
“공주님.”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실종되기 전. 제가 당숙님을 포함한 원로 귀족들에게 말했던 거요. 어머니와 오라버니가 주술사와 함께 절 죽이려 했고, 아버지가 절 지키려다 거대한 짐승으로 변했다고 했던 거요. 모두가 악몽이라 말했던, 그 이야기요.”
한나의 말에 당숙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듯 경악하는 표정을 지으며 단상 위의 한나를 올려다봤다.
“……이제, 믿으실 수 있나요 당숙님.”
한나는 원망하는 눈빛과 그와 동시에 통쾌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천천히 자리로 돌아갔다.
그저 질 나쁜 악몽이었고, 나약한 정신력을 가진 공주라 불렸던 한나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비틀거렸다. 아스펠라가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당숙은 여전히 믿을 수 없는 듯 고개를 내저으려 했다. 그는 자신의 의견에 동의를 구하려는 듯 주변 귀족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이건 말도 안 되는 것이오. 국왕이 무엇 때문에 제 아버지를 검은 마수로 만든단 말이오? 그게 가능한 것이오? 나라가 불온한 시기에 하나로 뭉칠 생각은 하지 않고, 마치 국왕 전하를 모함하려는 듯한 행동을 옳지 않다고 보오.”
칼리우스는 곤란한 듯 가만히 눈썹을 매만졌다.
“유감스럽게도 모함이 아니오.”
“대공!”
“증거들을 원한다면, 수없이 보여줄 수 있소. 원한다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야기 해줄 수도 있고. 하지만 믿고 안 믿고는 당신들에게 달려 있소.”
“…….”
“내가 할 일은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다 같이 살 길을 모색하자는 것이지, 믿지도 않을 이들을 모두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니오.”
드넓은 볼룸이 조용해졌다.
단순한 선동을 위한 연설이라기엔 지나치게 가식적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함께 힘을 합치자 설득하기에는 지나치게 친절하지 않았다.
“그럼 저희는 뭘 해야 합니까?”
당황한 귀족들 중 하나가 물었다. 칼리우스는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가짜 왕을 처단해야겠지.”
넓은 연회장에 아주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
누군가는 뜻을 함께하기로, 또 누군가는 반역에 가담하지 않겠다며 빠지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연회에 온 귀족들 이 모두 국왕에게 의심을 품은 이들이었다.
에르윈 대공과 유디티아 후작을 주축으로 귀족들이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열릴 왕실 연회에서 국왕에게 진실을 요구할 생각이었고, 더 나아가 왕좌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선왕의 친아들도 아니었으며, 그는 자신들의 백성들을 이용하여 금기된 주술과 실험을 행하였고, 불온한 역병을 터트려 나라를 혼란에 빠트리려 했기 때문이었다.
비밀리에 귀족 회의가 몇 차례 열리며 안건들이 통과되었다.
이제 그들은 굳게 닫힌 왕궁 문이 열릴 왕실 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왕궁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연결 다리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축이 되기로 한 가문의 가주들이 에르윈 대공 성을 거점 삼아 모여 회의를 거듭했다.
“뭔가 이상합니다. 왕궁으로 들어가는 다리가 아직까지도 내려오지 않고 있소. 거의 한 달이 되어가도록 저곳의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겁니다. 안에 들어간 이들은 나오지 않고, 밖의 이들 역시 안에 들어간 이가 없습니다.”
“국왕이 뭔가를 눈치 챈 것일까요? 해서 문을 굳게 닫은 거라면.”
“하지만 아무리 그런들, 언제까지 버티겠습니까? 저 안으로 식량을 조달하는 달구지 또한 없다 합니다. 길어봤자 몇 달입니다. 굶어죽을 생각으로 버티는 것이라면 몰라도.”
귀족들의 의견이 다리가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쪽으로 기울었을 때였다.
호위 기사 중 한 명이 다급하게 문을 두들겼다.
“각하! 왕궁 해자 아래에서 버루카 님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왕궁에서 빠져나온 듯싶습니다!”
왕의 보좌관이 왕궁 해자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상태로.
***
민튼은 들것에 실려 오는 자신의 아버지에게로 달려갔다.
“아버지!”
그는 해자 아래 바위에 부딪힌 듯 온몸이 너덜거릴 정도로 찢어지고, 부러져 있었다.
바다로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 갈비뼈가 부러진 몸으로 겨우 해자 아래쪽으로 헤엄쳐 왔었고, 다리 근처를 배회하던 이들에게 극적으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버루카는 사경을 헤매면서도 에르윈 대공 가에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
“아버지, 어찌 이런 모습으로……!”
“민튼……. 왕궁 문을, 열어선, 안 된다.”
피를 울컥울컥 토하면서도 자신의 생을 구걸하기보다는 왕궁으로 들어가는 다리를 이어서도, 그 문을 열어서도 안 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버루카의 소식을 들은 칼리우스는 물론 아스펠라와 한나, 필립까지 모두 병실로 내려왔다. 회의를 하고 있던 참이었기 때문에, 다른 귀족들 역시 버루카에게 물어볼 것이 아주 많다며 꾸역꾸역 인파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의사는 급히 출혈 부위를 지혈했다.
“출혈이 너무 심합니다. 상처가 한두 곳에서 난 것이 아니에요!”
“문을 열면, 다, 다, 죽……. 다, 죽어.”
“말하시면 안 됩니다. 조금이라도 출혈 부위를 줄여야 해요.”
버루카는 고개를 돌려 칼리우스를 쳐다봤다.
“에르, 윈, 대공.”
이리 와달라는 듯 다급한 손짓에, 결국 칼리우스가 그의 곁으로 갔다.
버루카는 칼리우스에게 성 안에서의 일을 전했다. 중간중간 피가 역류하여 발음이 뭉개지긴 했으나, 그는 악착같이 말을 이었다.
“와, 왕은 스, 스로 부, 불사체를 되기를 선택…… 했소.”
“파베스가 스스로 불사체가 되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말 그대로요, 스스로 불사체가 되는 주술을 행했소. 자기 자신에게 인장을 새기고, 불사체가 되어…….”
버루카가 국왕을 발견했을 땐 이미 그는 제 몸에 인장을 새긴 뒤, 스스로 호흡기를 달고 증기를 쐰 이후였다.
파베스가 불사체로 변한 뒤부터, 성 안 모두에게 마치 역병처럼 그것이 전염되었다고 한다.
맨 처음 불사체로 변한 왕으로부터 도망친 뒤, 그 후 버루카는 왕이 어찌되었는지는 모르는 듯했다.
그는 그저 불사체들로부터 겨우 몸을 숨기며 도망칠 곳을 찾다, 궁지에 몰리자 해자 아래로 몸을 던진 것이었다고 한다.
어째서 그가 스스로 불사체가 되는 것을 선택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버루카는 왕궁에서 도망쳐 나오기 전 파베스가 그토록 찾았던 피올라 왕비의 간책을 챙겨 나왔다.
그의 옷 안주머니에 피에 흠뻑 물든 책을 칼리우스에게 전했다.
“교주는, 도망쳤을 것이오. 그자는 쉽게, 죽을 자가 아니야. 불사체를 다룰 수 있는 자요. 그자가 모든 것의 원흉이오. 국왕은, 힘에 집착하다 결국, 미쳐버렸고, 나는 이제야…… 이제야, 원래부터 했어야 할 일을 하는군. 면목이 없소. 튀니아는 곧, 저주받을 것이오……. 나를 용서해주시오.”
그는 곧 넘어가기 직전처럼 숨을 헐떡거리더니, 이내 천천히 제 아들을 쳐다봤다.
칼리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이들과 함께 방에서 물러났다.
의사 역시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걸 알았기에 그저 아들과의 마지막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켰을 뿐이다.
***
상황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기에, 칼리우스를 비롯한 그 자리의 모든 이들은 마냥 버루카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왕이 불사체가 되었다니, 이게 대체…….”
“불사체에게 물리면, 그들 역시 똑같이 변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왕궁 안이 온통 불사체들로 득실대는 것 아니오?”
머리를 노리지 않는 한, 죽여도 죽지 않는 것들이 수도의 왕궁 안에 득실댄다는 것은 굉장한 비상사태였다.
“마, 만일. 불사체들이 왕궁 밖으로 나오기라도 하는 날에는…….”
모두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아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불사체가 왕궁 밖으로 나온다면 그때가 바로 튀니아의 멸망의 날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왕궁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내려오지 않는 이상, 괜찮지 않겠소?”
귀족의 말에 칼리우스가 대꾸했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막을 수도 없는 법이오. 그것들은 다리가 잘리고 팔이 잘려도 머리통이 날아가지 않는 이상 계속 살아 있으니까.”
“해자로 몸을 던져 왕궁 밖으로 기어 나오게 되면……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이 가장 먼저 물릴 거예요.”
아스펠라의 말에 다른 귀족들 역시 동의한다는 듯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대체 어찌한다.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칼리우스는 더 이상의 고민조차 할 시간이 없는 듯 짤막하게 말했다.
“일단 왕궁과 가장 가까운 민가는 모두 대피시키고, 사병들을 최대한 모아 임시방편으로 왕궁 근처에 바리케이드 먼저 구축합시다. 불사체에 대한 것은 그 이후에 생각해도 될 듯하오. 지금은 그저, 그것들이 민가를 공격하지 못 하게 하는 것에만 집중합시다.”
튀니아 왕궁에는 천 명 가까이의 인원이 기거하며 왕을 모신다.
거기에 가신들까지 더하면 적어도 지금 왕궁 안에는 천 명이 넘는 불사체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최악의 상황에는 튀니아의 수도를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 버루카와 민튼이 있던 병실에서 거대한 총포 소리가 울렸다.
“이게 무슨 소립니까?”
귀족 중 하나가 당황한 듯 물었다. 아스펠라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자비를 베푼거죠.”
“……자비라뇨?”
“인간으로서 최후를 맞이할 수 있는 자비요.”
***
연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카이는 에르윈 대공 성을 떠나 재건된 로잘린드 가문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르던 사냥꾼 동료들은 물론 칼리우스가 보낸 시종들과 호위기사까지.
칼리우스는 로잘린드 가문에 꽤 많은 돈을 투자했다. 하여 몰락했던 로잘린드 가문은 이제 막 새로운 가주와 함께 다시 과거의 영광을 누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대대로 제 3소대 대장을 맡아왔던 로잘린드 가문이 멸문한 후 공석이 된 그 자리를 정식으로 맡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며칠 전 칼리우스에게서 급히 계획이 바뀌었다는 전보를 받았고, 일카이는 바로 에르윈 성에 도착했다.
일카이 역시 버루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곧 수도에 닥쳐올 일을 아는 듯한 눈치였다.
“왕궁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모두 봉쇄중이던데, 아직까지 기어 나온 불사체는 없는 겁니까?”
“아직까지는 없네. 버루카 경 하나뿐이야.”
칼리우스의 말에 일카이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버루카 경도 물린 것 맞죠?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민튼 경이 직접 끝냈으니 걱정은 말게. 사체는 화장할 예정이고.”
칼리우스는 버루카가 죽기 직전 그에게 넘겼던 피올라 왕비의 간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읽어보라는 듯 눈빛을 보내자, 일카이는 천천히 책을 펼쳤다.
내용을 읽어내려가던 일카이가 이내 중얼거렸다.
“파베스 역시 자물쇠였던 거군요. 하지만 그 역시 불사체가 되어 있을 텐데, 정말 봉인을 다시 할 수 있긴 한 걸까요?”
네 명의 자물쇠 중 사라와 파베스가 죽었다. 절반의 자물쇠가 사라졌는데, 과연 루이나가 깨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걸까? 네 명 모두 다 필요하니 네 명씩이나 보낸 것 아닌가?
아스펠라가 서재 안으로 들어오며 대답했다.
“네 명 모두 있어야지만 봉인이 풀리는 걸 막을 수 있어.”
“하지만, 이미 두 명은…….”
아스펠라가 테이블 위에 두꺼운 사라의 간책을 펼치더니, 이내 사어가 된 고대어로 적힌 부분을 가리켰다.
“뭐라고 적힌 건데?”
“자물쇠 되는 아이가 죽으면, 그 혈육에게로 내려온대. 자식이 없으면, 같은 피를 나눈 형제가 자물쇠가 되는 거고. 애초에 다섯 가문의 피를 물려받은 이들만 자물쇠와 상자가 될 수 있는 거니까.”
아스펠라가 일카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사라가 죽었으니 일카이. 너 역시 자물쇠야.”
“그럼 파베스가 죽었으면, 한나 공주님도 자물쇠라는 거야?”
“자물쇠는 너, 나, 파베스, 그리고 한나 공주님이야.”
그러자 일카이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얼굴이었다. 에르윈 대공은 자물쇠가 아니라는 건가?
칼리우스의 시선이 아스펠라에게로 향했다. 아스펠라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말했다.
“칼리우스는 자물쇠가 아니야.”
일카이는 그럼 대체 뭐냐는 얼굴로 칼리우스와 아스펠라를 번갈아 쳐다봤다.
칼리우스는 곤란한 듯 제 눈썹을 슬쩍 문질렀다.
“그럼?”
“루이나를 담을 새로운 상자야.”
일카이는 그게 무슨 말인지 곧장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라 부르기에는 낯설지만, 아버지였던 선왕이 어째서 이성을 잃고 검은 마수에 잠식당했는지 직접 이야기를 들었기에 알고 있었다.
“괜찮은 겁니까?”
일카이는 아스펠라와 칼리우스를 번갈아 쳐다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두 사람 다 괜찮다는 대답은 없었지만, 자신들이 뭘 해야 할지는 알고 있는 듯 했다.
***
일카이는 정원 쪽에서 하양이와 함께 있는 아스펠라에게 다가갔다.
일카이가 오자 하양이가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둘 곁을 빙빙 돌았다.
일카이는 잠시 나뭇가지를 들어 저 멀리 던진 뒤, 아스펠라 옆에 앉았다.
힐긋 아스펠라를 쳐다보던 일카이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괜찮아?”
아스펠라는 별다른 말없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할 말이 있는 듯 손을 꼼지락거리던 아스펠라가 말을 이었다.
“칼리우스한테 청혼했어. 우리 결혼할 거야. 때가 되면, 그는 떠나야겠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부부가 되고 싶어서 내가 막무가내로 청혼했어.”
일카이는 픽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누나답네.”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어. 사실 내가 남자한테 청혼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든. ……칼리우스가 상자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다 관두고, 그냥 같이 다른 곳으로 도망갈까’였어.”
참 웃기지 않나. 산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던 자신이.
비르가의 뜻을 이어 어떻게든 루이나를 잠재우고 다시 평화로운 자연으로 돌아가려했던 자신이, 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그와 함께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신의 뜻이든, 자연이든 그 모든 것보다, 눈앞의 사내를 잃는 것이 더 두려웠다.
“그런 건 나답지 않잖아. ……사실 지금도 칼리우스가 루이나와 같이 봉인되어야 한다는 게 실감나지 않아. 언젠가는 그때가 올 텐데도. ……적어도 지금은, 다른 조건은 생각하지 않고 함께 하고 싶어. 부부로서 말이야.”
아스펠라는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내가 부부가 되길 원한다니. 인간 세상에 섞여들지도 못하던 내가.
일카이는 그런 아스펠라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맨 처음엔 완전히 미친 여자인 줄 알았던 거 알아? 총 든 사냥꾼들 앞을 막아서면서 검은 마수를 해치지 말라고 막무가내로 우릴 막아섰잖아.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싶었지.”
그의 말에 아스펠라가 픽 웃음을 흘렸다. 본인이 생각해도 확실히 미친 짓이었다.
“약초를 찾겠다고 성역에 올라갈 때도. 그 몸으로 산 정상까지 오르다니. 고집은 또 얼마나 센지.”
“그랬나?”
“그랬어.”
“미안.”
“그런 누나가 좋았어.”
“…….”
“소심하게 굴면서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막무가내로 나가는 점이.”
“…….”
아스펠라가 천천히 자신을 쳐다보자, 일카이가 얼른 양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미안한데 나 지금 고백하는 거 아니고, 과거형으로 말하는 거니까 착각은 하지 마.”
“누, 누가 착각한다고.”
“장난이야. 내 말은, 그러니까. 지금도 충분히 아스펠라는 아스펠라답다는 거야.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자조적인 사색하지 말고, 막무가내로 뭐든 해버려.”
일카이는 어색하게 아스펠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축 처진 어깨하지 말고 당당하게 어깨 펴. 이제 곧 결혼할 신부 치고 얼굴이 너무 죽상이잖아.”
“…….”
“그런 얼굴로 버진 로드 걸으면, 분명 다들 괴물한테 팔려가는 불쌍한 신부라 생각할 거야.”
일카이의 농담에 그제야 아스펠라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
버루카의 장례는 비밀리에 이뤄졌다.
그의 죽음 이후 칼리우스는 최대한의 사병을 모아, 왕궁의 해자 주변에 벽돌과 흙주머니로 담을 쌓도록 했다.
짧은 시간 동안 몇 차례에 걸쳐 귀족 회의가 열렸다.
그들은 국왕이 불사체로 변했으며, 왕궁 안이 불사체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말자는 결론을 내렸다.
혹여나 한 나라의 국왕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된 것이 알려져 백성들이 큰 혼란에 빠졌다간 다른 나라들이 침략을 해올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왕궁 안에 이변이 생겼다는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서도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국왕이 역병에 걸려 죽었다는 소문도, 사냥제에서 봤던 정체불명의 저주받은 생명체들이 국왕을 먹었다는 소문도.
드물게 에르윈 대공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도 함께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헛소문은 더 빠르게 퍼졌으며, 혼란이 커지기 시작했다.
부르주아들은 ‘쥐’들을 풀어 귀족들의 이야기를 몰래 들으려 했고, 귀족들이 무엇인가를 숨기는 것이 있다는 걸 확신한 ‘쥐’들은 모든 소문의 중심이 되는 칼리우스의 저택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대공 성에서 나오는 짐꾼이나 시종들에게 돈을 쥐어주며 이야기를 캐묻는 것은 물론, 일카이와 민튼에게도 소문에 대한 어떠한 말이라도 해달라며 말 위의 그들을 끌어내리듯 붙잡았다.
“망할 쥐새끼들. 불사체들만큼 독하다니까. 사람을 말 위에서 끌어내리고 말이야!”
일카이는 질린 표정을 하며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누군가 소매를 이리저리 잡아당긴 것인지 재킷은 비뚤어져 있었고, 깔끔하게 위로 쓸어 넘긴 붉은 머리칼이 이리저리 산발이 되어 있었다.
민튼 역시 뭔가에 잔뜩 시달려 멀미라도 한 창백한 얼굴이었다.
“다들 꼴이 왜 그래?”
놀란 아스펠라가 묻자 일카이가 씩씩대며 창가로 가더니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켰다.
에르윈 대공 성의 대문 앞에는 수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저 쥐새끼들이 뭐라도 알아내려고 아주 안달이 났어.”
일카이는 그들을 ‘쥐’라 불렀다. 사실 대부분은 ‘쥐새끼’라 불렀지만.
저들은 모두 귀족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귀족들이 흘리는 빵 부스러기 같은 스캔들을 주워 먹으려는 이들이었다.
“부르주아들이 ‘쥐’들을 고용했나봅니다. 아마 불안하고 궁금하겠죠. 왕궁 앞에는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수도의 귀족들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지방으로 내려가니까요. 뭐, 사실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요.”
민튼의 말에 일카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것들은 대공이 두렵지도 않답니까? 멍청한 건지, 아니면 배짱이 좋은 건지.”
“저게 원래 쥐들이 하는 일이니까요.”
그러가 기가 찬다는 듯 일카이가 코웃음 치며 물었다.
“지나가는 사람한테 뭐가 무례한 건지도 모르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옷깃 잡아당기는 것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요? 난 저것들이 지들 스스로 ‘기자’라 칭하는 것도 웃기다니까. 기자는 무슨. 쥐새끼가 딱이지.”
민튼이 애석하게도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대놓고 추잡하고 무례한 이들은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꽤나 급한가 봅니다. 그럴 만도 하겠죠. 우리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저들에겐 돈일 테니까요.”
펠킨은 골치 아픈 표정을 지으며 칼리우스에게 말했다.
“금방 치우겠습니다, 각하.”
“먹이가 없으면 알아서 사라질 테니, 수고 들일 필요 없다.”
“그렇게 자꾸 쥐들을 혼내지도 않으니 저것들이 영지에 들어오려 하죠. 각하는 이상한 데에서 무르시다니까.”
칼리우스는 백성들의 주의를 끌면서도, 그들에게 혼란을 야기하지 않고 제대로 된 진실만을 빠르게 전달할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에르윈 대공 성 철문 앞에 바글바글 쥐떼처럼 모여, 남 이야기에 코를 킁킁 거리는 저들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펠킨은 슬그머니 아스펠라와 칼리우스 사이로 들어오며 괜히 헛기침을 하더니, 코를 벌렁거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저들이 궁금해 할 만도 하지요. 대공 각하의 결혼식이라니, 아마 불사체니 뭐니 떠들어대도 대공 각하께서 결혼하신다는 것을 더 놀라워할 겁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창가로 고개를 쭉 내밀곤 정원을 내다봤다.
정원에서는 대공 성의 시종들이 한창 분주하게 식장을 꾸미고 있었다.
내일이면 에르윈 대공과 아스펠라의 결혼식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한동안 침울했던 성 안의 모두가 다 같이 반쯤 구름 위로 올라가 있는 것 마냥 묘하게 들뜬 표정을 하고 있었다.
***
솜씨 좋은 화가가 세밀한 붓터치 하나하나로 그린 듯한 화창한 날씨였다.
그날 에르윈 대공 성에서 칼리우스 에르윈과 아스펠라의 결혼식이 열렸다.
아침 일찍부터 성의 시종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결혼식 준비를 했고, 초대받은 소수의 귀족들은 하나 둘 마당 앞에 마련된 결혼식장 의자에 앉아 그들을 기다렸다.
모두들 오랜만의 경사에 들뜬 표정이었다.
이 시국에 결혼이라니, 미친 것 아닌가? 왕은 괴물로 변해 실종되었고 불사체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루이나의 봉인이 언제 풀릴지 모르는 이 마당에? 그렇게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자리에 모인 귀족들 모두 이 결혼식이 어떤 결혼식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날이니 기꺼이 축하하는 마음이었다.
“하객들이 벌써부터 왔어요.”
창문 너머로 도란도란 앉아 있는 하객들을 보며, 아스펠라가 긴장한 듯 중얼거렸다.
“어떡하지. 은근히 긴장되는- 흡!”
보정 속옷으로 허리를 꽉 조이는 앨리스 덕분에 아스펠라는 당장의 긴장감보다는 가쁜 숨을 내쉬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으세요.”
“되게 단단한데, 이게 대체 뭐죠?”
“고래 뼈로 만든 보정 속옷이에요. 단단하죠?”
아스펠라는 주먹을 쥐어 고래 뼈로 감싸진 자신의 복부를 통통 두들겼다.
꽤 단단한 것이 방패로 쓰기에도 적합하겠다, 생각되었을 정도였다.
보정 속옷 위에 이번에는 기하학적인 말총으로 만들어진 패티코트를 씌웠다.
풍성한 패티코트 덕분에 아스펠라는 마치 자신이 딸랑거리는 인간 종이 된 것 같다며 신기한 듯 이리저리 허리를 흔들기도 했다.
그 위에 준비해둔 드레스를 입자 상아빛이 감도는 흰색 벨 드레스가 예쁘게 자리잡았다.
“어머, 너무 예쁘다!”
한나가 박수를 짝짝 치며 기뻐하자, 아스펠라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조금 과하진 않은가요?”
“아뇨. 세상에 결혼식 날에 과하지 않으면 대체 언제 과하려고요. 앨리스. 이쪽에 레이스를 조금 더 달아주련?”
“네!”
한나는 매우 신중한 표정으로 이곳에 리본을 달라, 저곳에 꽃을 달라, 머리를 땋아라, 올려라, 입술 색은 연하게 하라, 아니. 진하게 해도 나쁘지 않을 듯해. 하며 아스펠라의 예식 드레스를 손봐줬다.
공주의 안목은 굉장했다.
한나의 참견과 앨리스의 손을 거듭할수록 더 화려해지는 드레스에, 아스펠라는 마치 동화 속 요정 할머니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야, 아스펠라 이제 곧 식이 시작…… 될 거래. ……요.”
일카이는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려다 드레스를 입은 아스펠라의 모습에 잠시 넋을 잃곤 바라봤다.
항상 반말이나 해대던 건방진 일카이였는데, 예식 드레스를 입고 단장을 마친 아스펠라가 꽤 낯설었는지 경어를 쓰기 시작했다.
“로잘린드 경! 신부가 준비하고 있는데 문을 벌컥벌컥 열면 어떡해요.”
“아, 죄, 죄송합니다!”
한나의 불호령에 일카이가 잽싸게 문을 닫았다.
아스펠라의 모습을 빙빙 돌아가며 보고 있던 한나는 이만하면 튀니아 공주의 심미안에도 꼭 맞으니, 다른 귀족들 눈에도 아름다울 것이라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어때요. 이제 곧 결혼을 앞둔 신부님의 심정은.”
한나의 물음에 아스펠라는 쑥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대며 몸을 배배 꼬았다.
“엄청 떨려요.”
누가 봐도 설렘으로 가득 찬 분홍빛 뺨이 사랑스러웠다.
이내 바깥에서 다시 한번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한나와 앨리스가 얼른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같이 잡아주며 밖으로 나갔다.
결혼식이 뭐라고 이렇게 떨릴 일인가.
아스펠라는 덜덜 떨리는 다리에 겨우 힘을 주며 엎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
일층에 도착하자 정원 너머 도란도란 앉은 하객들이 보였다.
정원 가득한 능소화 향기가 차가운 초겨울의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 아스펠라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켰다. 이내 천천히 눈을 떴다.
[아스펠라. 축하해. 행복해야 해.]
[사랑해, 아스펠라. 축하해.]
희미하지만 분명히 들려오는 소리에, 아스펠라는 안도한 듯 참았던 숨을 내쉬며 슬쩍 미소 지었다.
식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바닥에 깔린 붉은빛 카펫을 따라 정원으로 나갔다.
아스펠라는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끼며 한발자국 내딛었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한나를, 씩 웃으며 은근슬쩍 엄지를 들어 올리는 일카이를, 짧게 묵례하는 민튼을, 벌써부터 눈물 콧물 팡팡 터트리며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있는 펠킨을 지나자 저 멀리 단상 앞에 흰색 연미복을 입을 칼리우스가 보인다.
신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짓던 칼리우스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끝에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려앉았다. 칼리우스는 그것을 마치 봄날 제 손바닥 아래로 떨어진 벚꽃이라도 된 양 소중히 그러쥐었다.
두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창조한 신을 받드는 신자와, 이 자리에 함께한 하객들을 증인 삼아 서로의 사랑이 영원하고, 변치 않을 것임을 맹세했다.
서로의 손을 잡고 기도를 올린 뒤, 맹세의 잔에 따른 술을 바꿔 마셨다.
칼리우스는 아스펠라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증표를 끼웠다.
그 증표는 아스펠라의 눈동자와 같은 녹색 빛이 돌면서도, 각도에 따라 드문드문 황금빛을 띠는 보석이 박힌 반지였다.
아스펠라는 그것이 꼭 서로를 바라보는 자신들의 모습 같아 꼭 마음에 들었다.
***
본식이 끝나고, 수백 명의 귀족들로 가득 찬 연회장.
며칠 동안 열리는 화려한 연회는 아니었지만, 도란도란한 것이 나름의 매력이 있는 작고 소박한 연회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다들 적당한 취기가 올라 기분 좋게 장이 파하였고, 악단의 연주와 귀족들의 수다로 복작대던 에르윈 성이 조용해졌다.
연회의 뒷정리를 하기 위한 시종들의 빠른 발걸음과, 그릇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종종 들뜬 시녀들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원래라면 시녀들이 아스펠라를 데리고 가 그녀의 드레스와 치장을 벗겨준 뒤, 첫날밤을 위한 슬립 드레스를 입혀주는 것이 맞는 일이었다.
하지만 에르윈 대공은 제 아내를 어찌나 사랑하는지, 그런 것은 다 자신이 할 테니 너희들은 이만 모두 물러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술에 취한 아스펠라를 양팔로 받쳐 안은 칼리우스가 부부의 침실로 들어갔다.
***
촛불만이 비추는 방 안에서도 그의 금안은 빛을 내고 있었다.
아스펠라는 그 금색 눈동자를 좋아했다. 보고 있자면 한없이 드넓은 황금 갈대밭에 있는 느낌이었다.
에르윈 대공이 조금 흐트러진 아스펠라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아스펠라는 어쩐지 어깨가 움츠러드는 기분이 들었다.
술기운 때문인가. 그저 머리칼을 만지는 것뿐인데도 어지럽고 긴장이 되었다.
아스펠라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녀린 쇄골이 움푹 들어가며 골을 만들었다.
칼리우스의 뜨거운 입술과 숨결이 살에 닿자, 아스펠라의 몸에 전율과도 같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스펠라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아스펠라. 아름다워.”
아래쪽에서 금안을 요요하게 빛내며 그가 말했다. 정말 술기운 때문인가.
쇄골에 닿은 칼리우스의 입술이 제 이름을 부르자 정신이 아찔했다. 뜨거운 그의 숨결도 느껴졌다.
아스펠라가 조금 풀린 눈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칼리우스…….”
부끄러운 듯 괜히 입술을 잘근 깨무는 아스펠라에게 칼리우스가 입을 맞췄다.
말캉한 혀가 아스펠라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치열을 훑었다.
아스펠라가 어설프게 흉내내보겠다며 그의 혀를 핥아올리자, 그는 픽 웃으며 “여전히 서툴러” 짧게 말하곤 아스펠라의 옷가지에 손을 올렸다.
반사된 거울 속에서 화려한 드레스를 벗기는 조급해진 대공의 손이 비쳤다.
칼리우스 에르윈은 조급함을 모르던 남자였다. 모든 것에 권태롭고 여유로워 보이는 남자였다.
하지만 아스펠라를 만질 때면, 그녀가 그의 시야에 들어올 때면, 심지어는 제 시야에 없을 때도 그녀를 떠올리면 그는 항상 조급해진다.
이제 공식적으로도 제 아내가 되었으니 조급할 이유가 없는 게 확실한데도, 그는 여전히 아스펠라를 만질 때면 제어가 되지 않았다.
흰색의 러플 드레스는 아름답긴 했으나 그에게는 아스펠라의 몸을 가리고 있는 천 조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많은 전투로 인해 잔뜩 흉지고 부르튼 그의 거친 손이 흰색 실크 드레스를 잡아 뜯듯 벗겼다. 아스펠라의 뽀얀 살결이 드러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전히 두 사람은 격렬한 입맞춤을 하며 서로를 잔뜩 탐미하고 있었다.
칼리우스의 가슴께에 올려둔 손에서 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왔다.
“꺅!”
안 되겠는지, 칼리우스가 그대로 번쩍 아스펠라를 들어 침대로 향했다.
혹여나 금이 갈까, 부서질까 조심스레 제 아내를 뉘여 놓을 때는 언제고, 다시 한 번 거칠게 남은 옷가지들을 벗기기 시작했다.
살구색의 슬립까지 벗겨내자 아스펠라는 부끄러운 듯 제 가슴과 중요 부위를 손과 팔로 가리며 몸을 배배 꼬았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던 대공은 제 옷을 벗기 시작하며 아스펠라에게 다시 입을 맞췄다.
아스펠라의 두 손이 성글게 칼리우스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목덜미에서 쇄골을 지나, 잔뜩 헤벌어진 포에트 셔츠 자락 안으로 제 손을 집어넣었다.
단단한 그의 가슴팍이 아스펠라의 손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바들 떨리는 아스펠라의 손을 잡으며 칼리우스가 짓궂게 물었다.
“몇 번이고 만졌으면서 이제 와서 긴장되는 겁니까?”
아스펠라의 몸을 끌어안은 그의 손이 허리를 지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마치 뱀처럼 서로 얽힌 몸뚱이들이 천천히 움직이다가 이내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아스펠라의 가느다란 다리는 칼리우스의 허리를 감쌌고, 그녀의 허벅다리는 칼리우스의 손아귀에 잡혀 뽀얀 살들이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 튀어나왔다.
부부는 밤새도록 사랑을 나눴다.
에르윈 대공은 가녀린 제 아내를 도자기 어루만지듯 조심스럽게 몸 이곳저곳을 탐미했다. 아스펠라는 아침 이슬에 젖은 수선화처럼 물기어린 상태로 몸을 떨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다.
아스펠라는 제 위에서 움직이는 에르윈 대공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에르윈 대공은 그런 제 아내를 꽉 껴안았다.
“사랑해, 아스펠라.”
그가 작게 속삭였다. 아스펠라가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저도요. 칼리우스.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먼저 쓰러지듯 잠이 든 것은 아스펠라였다. 대공은 한참동안 제 품에서 빨개진 얼굴로 잠든 아스펠라의 얼굴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아스펠라는 잠결에 느껴지는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좋았다.
천천히 제 머리칼을 쓰다듬고, 조심히 제 얼굴을 어루만지고, 조물락 제 손을 만지작대고.
그의 손길 하나하나에 애정이 담뿍 묻어났다.
잠결임에도 불구하고 아스펠라는 쿡쿡 웃음이 흘러나왔다. 대공의 입술이 제 이마에 닿았다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스펠라는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는지 으응, 잠투정을 하며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칼리우스는 그런 제 아내를 꽉 껴안았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잠든 아스펠라를 바라봤다.
침상 위에 흩뿌려진 것 같은 모래색의 머리칼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도, 아스펠라가 얼굴을 찡그리면 행동을 멈춘 채 가만히 그녀 얼굴을 들여다보곤 했다.
긴장한 새신랑이었기에 잠이 오지 않는 건지, 아니면 잠들 시간조차 아까웠던 건지 본인조차 확실히 몰랐지만, 그는 그저 아스펠라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치는 행복감을 느꼈다.
아스펠라의 이마부터 눈썹을 지나 콧잔등, 입술을 찬찬히 조각품 대하듯 쓸어내리던 칼리우스가 조만간 무언가를 느낀 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동물적인 직감이 가까이에 불사체가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칼리우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기 전 아스펠라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뒤, 방문을 모조리 닫고 복도로 나갔다.
복도 벽에 장식으로 걸려 있던 검을 빼든 칼리우스는 천천히 짐승의 소리가 울리는 복도 끄트머리 쪽으로 향했다.
어째서 불사체가 이곳에 있는지 알 길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원래 그의 성에서 있었던 이들이 물린 것이 아닌, 침입자라는 것은 확실했다.
칼리우스는 아득한 복도의 어둠 너머, 마치 검은 숲에서 선왕을 마주했을 때처럼 끔찍한 것이 스멀스멀 자신의 몸을 잠식하는 것을 느꼈다.
살갗을 뚫고 바늘과도 같은 두껍고 뾰족한 검은 털들이 순식간에 그의 팔을 뒤덮었다.
기다란 손톱과 주체 못하는 힘으로 인해 칼리우스가 들고 있던 검은 마치 종잇장이라도 되듯 구겨지고 말았다.
칼리우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무용해진 검을 옆으로 집어 던졌다.
캉! 캉!
쇠붙이가 바닥에 떨어지자 그에 반응하듯 어둠속에서 붉은 눈들이 번뜩였다.
구름에 가려졌던 달빛이 거대한 유리창을 비추기 시작했다.
덕분에 온통 어둠뿐이었던 복도 끝에 무엇이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씨발.”
웬만해선 저급한 욕은 입에 담으려 하지 않는 칼리우스였지만, 그 광경을 본 순간 저절로 욕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기다란 5층 복도 반대편에는 수십의 불사체들이 붉은 눈과, 이마 정중앙의 붉은 인두 자국을 빛내며 기괴한 몸짓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들은 달빛을 받자 일제히 고개를 들며 칼리우스를 쳐다보더니, 이내 일제히 달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