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다가오는 어둠
증축에 증축을 거듭하여 몸집을 불리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높은 첨탑을 정중앙에 세운 튀니아 왕궁은 마치 신의 궁전처럼 아름답고 화려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곳을 가득 메우는 건 아름다운 음율이나 무희들의 춤출 때마다 부딪히는 장신구가 찰랑대는 소리, 혹은 행복한 이들의 웃음소리가 아닌 공포와 분노 그리고 두려움으로 가득 찬 처절한 짐승의 울음소리였다.
“아, 오늘따라 유독 심한데.”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고.”
저 깊은 지하에서 올라오는 유령 같은 소리에, 지하로 내려가는 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고통스러운 듯 귀를 막아댔다.
“난 저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알고 싶지도 않네.”
“민튼 경 얼굴 봤는가? 완전히 창백하게 질려서는- 억!”
“어, 뭐- 억!”
재잘거리던 병사 둘이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억 소리만 낸 채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칼리우스가 앞발로 깔고 뭉갰기 때문이었다.
훌쩍훌쩍 산을 넘어 튀니아 왕궁에 도착한 칼리우스는 기척을 숨긴 채로 지하 계단 앞 보초서는 이들을 깔아뭉갰다.
혹여 죽었을까 싶어 슬쩍 앞발을 들어 확인하고선 그들을 툭툭 문 옆으로 치웠다. 인간들이 오고가는 문은 너무나 작으니, 검은 마수들이나 산신들을 옮길 때 쓰던 통로를 통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온통 어둠뿐인 거대한 굴 안으로 뛰어 들어간 칼리우스는 네 발을 이용하여 깊은 땅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거대한 지하 동굴 안에 묶인 선왕과 산신들. 그들은 구속구에 온몸이 결박당한 채로 땅바닥과 동굴 벽에 붙어 있었다.
동쪽 산신, 서쪽 산신, 그리고 구석에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북쪽 산신은 칼리우스가 그들과 대적했을 때보다 훨씬 더 상태가 좋지 않았다.
기척에 동쪽 산신이 조용히 머리를 들었다. 산신은 칼리우스를 보더니 이내 놀란 듯 살짝 눈이 커졌다.
이내 그의 정체를 알아챘다는 듯 산신이 말했다. 정확히는 산신의 음성이 칼리우스의 머리에 울린 것이었다.
[자네가 새로운 상자가 되었군.]
그의 말에 칼리우스가 되물었다.
[상자?]
[그래. 상자. 본인이 뭔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칼리우스는 아무런 대답이 없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그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얼추 짐작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쪽 산신은 기운이 없는 것인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서쪽 산신도, 구석에서 죽어가는 북쪽 산신도, 그저 체념한 듯한 눈으로 칼리우스를 쳐다볼 뿐이었다.
칼리우스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미안하오. 나는……. 그 말 밖에 못 하겠군.]
그의 말에 바닥에 묶여 있던 서쪽 산신이 눈을 번쩍 뜬 뒤 눈알을 굴려 그를 쳐다봤다. 구속구와 거대한 못에 날개가 박혀 움직이지 못하면서도 연신 푸드덕댔다.
칼리우스는 나름의 속죄라도 할 생각이었는지, 그들에게 다가가 산신들의 몸을 옥죄고 있던 구속구를 깨물어 부수려 했다. 그러나 구속구는 깨지지 않았다. 동쪽 산신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도망가라. 이건 함정이니.]
[하지만 도와달라 청하지 않았소.]
[그건 우리가 아니다. 알고 있지 않느냐. 우린 도움을 요청한 적 없다.]
칼리우스는 분명히 울음소리를 들었다. 처절한 구호 요청이었다. 칼리우스는 고개를 두리번대며 선왕을 찾았다. 산신들처럼 이곳에 구속되어 있을 것이 분명할 텐데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두리번거리던 칼리우스는 내팽겨쳐진 구속구를 발견했다. 깨부수거나, 망가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어둠 속을 응시했다. 그와 같은 붉은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 루비처럼 빛났다. 그것은 곧 굴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으로 몸을 드러냈다.
거대한 몸집을 가진 검은 마수의 입에서 침이 뚝뚝 떨어졌다.
검은 마수의 미간 정중앙에는 원형의 인두 자국이 붉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이 고통스러운 듯 앞발로 제 미간을 비비적대면서도, 공격 준비를 하려는 것처럼 몸을 낮춘 채 칼리우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칼리우스는 그와 대화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바로 깨달았다. 저것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던 이가 아니다. 선왕이 아니다.
저것은 검은 마수에게 완전히 먹혀버린 괴물이었다.
거대한 송곳니들끼리 부딪히고, 짐승들끼리 서로를 위협하는 날카롭고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대한 앞발을 휘두를 때마다 공중에서 붕, 붕 거대한 몽둥이를 휘두르는 소리가 났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서로를 할퀼 때면 두꺼운 가죽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지를 잃은 검은 마수는 입에 거품을 문 상태로 계속해서 칼리우스에게 달려들었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 머리를 굴려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눈앞에 움직이는 것을 죽이고 싶어 하는 듯했다.
[물리면 안 된다. 그것은 생명력이 넘치는 것을 죽이고 싶어 하는 존재다. 물리면 너 또한 그렇게 변할 거다.]
동쪽 산신의 음성이 칼리우스의 머릿속에 울렸다. 그의 육신은 여전히 벽에 축 늘어진 상태였다.
[머리를 공격해.]
산신의 조언대로 칼리우스는 검은 마수의 머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앞발로 머리를 후려치자 검은 마수가 벽면으로 날아갔다.
칼리우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몸 위로 올라가 목덜미를 깨물어 움직임을 통제하고, 앞발로 그의 머리를 짓눌렀다.
이대로 그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칼리우스는 거대한 입을 쩌억 벌려, 그의 머리통을 입에 넣고 으스러뜨리기 시작했다. 검은 마수가 발버둥 치며 몸을 비틀었다.
거대한 턱에 힘을 주자 뚜둑 뚜둑, 뼈가 바스라지기 시작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선왕을 죽이는 대신, 산신들이라도 구출해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였다.
탕!
총포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칼리우스의 몸을 스쳐지나갔다.
“쯧.”
제대로 맞추지 못해 안타깝다는 듯 작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어둠속에서 파베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칼리우스는 물고 있던 검은 마수를 놓고 그대로 파베스에게 달려들었다.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서 그를 죽여버리는 것이 어쩌면 제일 간단한 방법일지 모른다.
어차피 총알은 저에게 그리 위협적인 무기가 아니었으니까.
검은 마수에 비해 인간의 몸은 작디작으니, 앞발로 한 번 후려치기만 해도, 물기만 해도 몸이 두 동강 날 것이다.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런 칼리우스의 생각을 간파라도 한 듯 파베스가 비소 섞인 웃음소리를 흘리며 물었다. 그러더니 이내 다시 한번 총구를 들어 올렸다.
“무기라는 건 연구할 때마다 발전해서 참 좋다니까. 더 빨리, 더 많이 죽일 수 있도록. 너희 신들이 내 머리 위에 있도록 내버려 둘 것 같으냐?”
광기로 번뜩이는 눈동자를 빛내며 파베스가 소리쳤다.
칼리우스는 입을 벌리며 그에게로 달려갔다. 무기든 뭐든 저 머리통을 씹기만 하면 끝난다. 파베스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검은 마수의 주둥이를 향해 총구를 겨냥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다시 한번 총포 소리가 울렸다.
타앙!
총알은 그대로 입을 쩌억 벌리는 칼리우스의 목구멍 안에 박혔다.
***
“그 이후로 기억이 안 납니다.”
완전한 암전만이 찾아왔고, 그가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인간의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스펠라가 물었다.
“그럼, 성으로 돌아오기까지의 모든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건가요?”
“네.”
“이상하다. 분명, 내가 봤을 땐…….”
아스펠라는 말끝을 흐렸다. 분명 검은 마수는 아스펠라를 알아보는 듯했다.
고통에 몸부림치긴 했으나, 아스펠라가 박힌 총알을 꺼내주자 마치 고마워하는 듯 또, 미안해하는 듯 가만히 아스펠라를 쳐다보지 않았던가.
아주 찰나였지만 아스펠라는 분명 그렇게 느꼈다. 그것은 아스펠라를 알아보고 있었다.
아스펠라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깜빡이다, 이내 칼리우스가 눈을 떴을 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칼리우스. 아까 전에 내가 불러줬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계속 내 옆에서 이름을 불러줬잖아요.”
아스펠라는 멀뚱멀뚱 그를 쳐다봤다. 아닙니까? 칼리우스의 말에 아스펠라가 말했다.
“부르긴 불렀죠. 근데 그게 현실에서가 아니라, 꿈속에서 부른 것 같았는데.”
“꿈속?”
“네. 꿈속.”
칼리우스를 간호하던 아스펠라는 그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침상에 엎드려 슬며시 눈을 감았다. 부상 입은 몸으로 등반까지 하니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던지라 결국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것이다.
잠에 드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할 만큼 금세 잠에 빠졌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잠이 든 상태라는 걸 자각했더랬다.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어둡고 짙은 안개가 끼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밤인가? 아니면 짙은 안개에 해가 가려져 낮인데 밤처럼 보이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밤과 낮이 존재하지 않는 곳인가?
마치 성역의 초입 부근에 들어왔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두려움과 초조함 그리고 외로움을 느끼며 아스펠라는 허공에 손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익숙해진 시야에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수목들, 그리고 하얀 안개가 가라앉은 강가.
이곳은 태초의 신을 만났던 그 장소였다. 하지만 이전에 봤던 생명력이 넘치는 녹음의 숲은 아니었다.
‘같은 장소인가? 그럼 이곳에 신이 있는 건가?’
아스펠라가 천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던 도중, 저 멀리 안개에 다른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스펠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동그란 실루엣이 움찔대더니 이내 천천히 둥글게 만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어린애의 형상이었다.
‘루이나? 루이나의 꿈을 꾸는 건가, 내가?’
조금 더 가까이 가자 안개 사이로 드문드문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아이는 이곳이 어딘지 모르겠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대고 있었다.
아스펠라의 발바닥에 나뭇가지가 밟혀 파삭, 소리가 났다. 그 작은 소리를 들은 것인지 아이가 천천히 아스펠라 쪽으로 고개를 들렸다.
‘칼리우스?’
덥수룩한 검은 머리를 가진 소년이, 어둠 속에서 금색 눈동자를 밝히고 있었다. 루이나가 아니었다. 아스펠라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건 칼리우스야!
‘칼리우스!’
아스펠라가 크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소년이 두리번거렸다. 이내 그가 안개 사이로 자신에게 달려오는 아스펠라와 눈을 마주쳤다.
‘칼리우스.’
그와 동시에 아스펠라는 잠에서 깼다.
‘허억!’
숨을 들이마신 아스펠라가 얼른 칼리우스를 쳐다봤다. 뒤숭숭한 꿈자리에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지 걱정이 되었다.
칼리우스의 심장이 제대로 뛰고 있는지 그의 가슴께에 귀를 대보자 다행히 쿵쿵쿵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아스펠라.’
칼리우스가 깨어났다.
***
“칼리우스도 혹시, 꿈같은 거 꾸지 않았어요?”
아스펠라는 자신이 꿨던 꿈속 풍경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기다란 수목들이 우거지고, 그 아래 투명한 강가가 있는 곳이요. 그렇게 말한 아스펠라는 이내 자신이 꿨던 꿈 이야기를 했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돌아가 있었던 것과, 그곳에서 태초의 신을 만난 것, 그리고 사라로 추정되는 작은 영혼을 봤다는 것과 신이 했던 말까지.
“-이런 꿈을 꿨었는데. 혹시 칼리우스도 비슷한 걸 꾸지 않았을까 해서요.”
“네. 나도 그런 꿈을 꿨습니다.”
같은 꿈을 꿨다는 것에 아스펠라는 조용히 제 턱 부근을 매만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추리 소설의 탐정이 된 것처럼 이리저리 단서들을 조합하던 아스펠라가 이내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지, 손가락을 튕기며 아! 감탄사를 내뱉었다.
“왜 그럽니까?”
“제 생각엔 말이죠. 우리가 모두 이어져 있는 것 같아요. 태초의 신이 분명 내게 내가 곧 너희고, 너희가 곧 나라고 했거든요.”
「네가 볼 수 있잖니? 아까 전에 말했듯 내가 곧 너희란다. 정확히는 나의 일부가 너희에게 들어갔으니 결국엔 같은 것이라 볼 수 있지.」
“우린 같은 자물쇠로 태어났고, 그 자물쇠가 한 신에게서 나온 부산물이라면…… 우리 모두 이어져 있는 것 아닐까요?”
“이어져 있다고요?”
“내가 꿈속에서 칼리우스를 불렀다 했을 때, 칼리우스 역시 꿈속에서 내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잖아요.”
자물쇠는 총 넷. 사라와 아스펠라, 칼리우스. 나머지 하나로 추정되는 이는 한나와 유디티아 후작, 혹은 일카이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니 마지막 자물쇠 되는 이도 우리가 꾼 것과 비슷한 꿈을 꿨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만약 아스펠라의 가정이 맞다면, 이들이 꾼 꿈이 자물쇠라는 증표 같은 것이라면, 또한 그들이 모두 이어져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마지막 자물쇠 역시 꿈에서 부를 수 있다는 겁니까?”
칼리우스의 말에 아스펠라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뇨. 할 수 있어요.”
확실한 증거도 없었고, 이를 입증해볼 방법도 없었지만 아스펠라는 확신이 들었다.
***
한동안 대공 성을 떠나 있던 일카이가 돌아왔다. 그는 마부에게 말을 맡기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서재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칼리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리우스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그를 한 번 힐긋 쳐다보더니 잠시 만년필을 내려놨다.
“바로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경황이 없었군. 고맙네. 아스펠라와 함께 아스펠 산으로 갔었다지.”
“딱히 대공 각하를 위해서 간 것은 아닙니다. 감사 인사는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정말로 고마워서 하는 말이야. 아스펠라를 업고 내려왔다고 들었어.”
“……원래는 반대했습니다. 아스펠라가 워낙 가야된다고 고집을 부렸고 꺾을 수가 없어서 동행한 것뿐입니다.”
그의 말에 칼리우스는 그럴 것 같았다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얼마가지 않아 싸늘하게 바뀌었다.
“사담은 됐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자네한테 답을 듣고 싶은데.”
시간은 꽤 충분했던 것 같은데 아직 마음이 서지 않은 것이냐는 칼리우스의 말에 일카이가 잠시 숨을 들이쉬더니 이내 성큼성큼 칼리우스 앞으로 다가왔다.
결연해 보이는 얼굴에,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황소가 달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칼리우스 뒤에 서 있던 펠킨이 당황하여 왜, 왜 그리 가까이 오시는 겁니까, 일카이 군. 하며 그에게 물러나라 하려 했으나 칼리우스가 손을 들어올리며 되었다는 듯 신호를 보냈다.
이내 칼리우스 앞에 가까이 간 일카이가 콧김을 내뿜을 듯 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이거 하나는 알아둡시다.”
“뭐를.”
“만약 각하가 인간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아니, 왜 그런 재수 없는 말을 하십니까? 각하께서 인간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니요. 꼭-”
“펠킨.”
칼리우스가 나직이 이름을 부르자 펠킨이 속상한 듯 입을 꾹 다물고 뒤로 물러났다. 일카이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만약 인간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 저택 아스펠라한테 상속하세요. 다른 원로 귀족들 말고요.”
일카이의 말에 펠킨이 황당하는 듯 예에? 아니, 왜요? 그걸 왜 지금 정하시는 겁니까? 물론 아스펠라 양이 싫다는 것은 아니지만 왜 지금 이 시점에 불길하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난리법석을 떨었으나, 어째 칼리우스는 조용한 것이 꽤 진지하게 이 안건을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그리 하지.”
“진짜로요.”
“그래.”
“그리고 전 아스펠라를 청상과부로 만들지 않을 겁니다.”
아스펠라한테 더 잘생기고 돈 많고 다정하고, 이번엔 이상한 계략 같은 거 쓰지 않는 남자를 소개해주든지 아님 내가 들이대든지 할 거예요.
남들이 들으면 건방지다, 기가 막힌다 할 법한 얘기에도 칼리우스는 그저 씩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리하게. 나 또한 아스펠라를 청상과부로 만들 생각 없어.”
“아스펠라 양이랑 결혼하시려고요? 근데 과부라니요. 그런 불길한 단어 좀 사용하지 마십시오. 꼭 각하께서 어떻게 되실 것처럼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펠킨 혼자만 펄쩍 뛰어오르며 반대했더랬다. 결국 칼리우스가 펠킨을 내보냈다.
시끄럽던 서재 안이 조용해지자 일카이가 조금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당돌하게 이것저것 요구할 때와는 매우 달랐다. 잠시 침묵하던 일카이가 물었다.
“저한테 왜 그런 모습을 보여주신 겁니까? 그러니까, 마수로 변하는 모습 말입니다.”
굳이 비밀로 하자면 충분히 비밀에 부칠 수 있는 것 아니었던가.
“아스펠라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스펠라야 그렇다 쳐도 절 신뢰하고 있으시단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요.”
검은 마수로 변한 칼리우스가 훌쩍 산으로 떠났을 때 일카이는 뭘 어째야 하나 일종의 패닉 상태였다. 불난 데 부채질 하듯이 펠킨이 말했다.
‘참고로 아스펠라 양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외부인 중에서 이에 대해 아는 이는 일카이 군이 두 번째입니다. 각하께서는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니 부디, 진중히 고민해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만취한 상태로 일카이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주정을 부렸더랬다.
각하께서 왜 그런 모습을 보여주시는 건지 알 수가 없다며, 외부인은 위험하니 그 누구보다 철저히 관리해오시지 않았냐며.
‘아스펠라 양을 못 믿는다는 건 아닙니다. 일카이 군이 신뢰하지 못할만한 사람이라는 것도 아니고요. 그냥, 제 말은…….’
혀가 꼬부라져 그 뒷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일카이는 그가 뭘 걱정하고 뭘 속상해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더더욱 일카이는 확실히 알아야했다.
지레짐작하는 것이 아니라 칼리우스의 입으로 본인이 인정하는 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래야 연적에게 무릎 꿇고 그를 주인으로 맞이하는, 누가 보면 자존심도 없는 짓이라며 비아냥거릴 짓을 합리화할 수 있지 않은가.
“내가 자네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는, 아스펠라를 절대 혼자 두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야.”
“정확히 제게 어떤 걸 바라시는 겁니까. 저번처럼 아스펠라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상처 입혔을 때 아스펠라를 데리고 도망치라는 것입니까? 아니, 제가 느끼기에는 각하께선 어디로 멀리 떠나시기라도 할 것처럼 들립니다만.”
칼리우스는 일카이의 물음에 확실한 대답을 하진 않았다.
“……아스펠라는 보호가 필요하다. 국왕이 아스펠라를 노리고 있는데 산속 오두막보다는 대공 가문의 보호를 받는 게 안전할 테니까.”
무미건조하게 말하던 그는 잠시 고개를 돌려 가만히 창문을 쳐다봤다.
“이번 사건의 후유증일지도 모르고, 원래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만 감정에 동요가 생기면 어김없이 신체 일부가 짐승으로 변하고 있어. 점점 짐승에게 먹히고 있는 거지.”
아스펠라도 칼리우스도 서로 인지는 하고 있었으나 입 밖에 내고 있지는 않은 상태였다.
칼리우스가 장담할 수 있는 건 언젠가는 이번처럼 자신 때문에 아스펠라가 위험해질 것이라는 것뿐이었다.
“아스펠라는 날 사랑해.”
자랑이라도 하는 건가 싶어 일카이가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그러나 칼리우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오히려 차갑게 내려앉은 얼굴은 아스펠라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든 것을 후회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게 문제가 돼.”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제 것이 되면 그만일 거라 생각했었고, 그녀를 진심으로 원했다.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했으나 아스펠라가 자신에게 보여주는 그 헌신적인 사랑은 언젠가 그녀를 위험에 빠트릴 것이 분명했다.
아스펠라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본인은 괜찮다 했으나 그가 깨어난 이후 마치 교대라도 하듯 이번엔 아스펠라가 앓았다. 독기나 상처가 감염되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과로 때문이었다.
“아스펠라를 공격한 기억이 나.”
바로 앞에 아스펠라가 있었고, 그녀가 말을 걸었는데도 그는 아스펠라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 몸의 주체는 나였는데도 아스펠라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스펠라의 어깨를 물고 피를 보고 나서야 아스펠라라는 걸 깨달았어.”
“그건, 대공께서 공격을 받고 왔으니 혼란스러워서 그랬던 걸지도 모르죠.”
“앞으로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란 확신을 못 해. 내가 아스펠라를…….”
칼리우스는 말끝을 흐렸다. 항상 당당한 인상을 주었던 그의 고고한 턱이 드물게 아래로 수그려졌다. 칼리우스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었다. 스스로를 자책하는 듯했다.
이전에는 그런 것 따위 상관없이 그냥 아스펠라를 가지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을 얻고 그녀의 몸을 탐하고 싶었던 것이 우선이었다.
그냥 어찌되든 아스펠라 자체를 제 곁에만 두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이기적이었다는 것을 칼리우스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알면서도 모른 척 하고 싶었으나 이제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런 칼리우스를 보고 있던 일카이가 이내 제 뒷머리를 거칠게 헤집듯 헝클이더니 칼리우스에게 뭔가를 건넸다.
“이거. 누이가 각하께 필요할 거라고 말했던 그 책입니다. 안에 검은 마수에 대한 것들이 적혀 있습니다. 정확히 뭔 얘기인지는 저도 다 안 읽어봐서 모르겠지만.”
“고맙군.”
칼리우스가 책을 받아들려 하자, 일카이가 손에 힘을 주었다. 칼리우스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제가 선왕의 아들이고 국왕의 이복동생이라고 하셨죠. 만약……. 국왕이 선왕의 친아들이 아닐 경우엔 어떻게 됩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저도 확실한 건 아니지만, 유모 말로는 피올라 왕비에게 다른 연인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일카이는 유모가 해줬던 말을 그에게 그대로 전했다.
왕과 왕비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도, 그들의 합방에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많았다는 것도, 왕비 곁을 따라다니는 한 주술사가 있었다는 것도.
만일 파베스가 선왕의 핏줄이 아니라면, 그를 왕위에서 끌어내리는 일은 물론 귀족들을 납득시키는 것까지 훨씬 더 일이 수월해질 것이었다.
선왕의 핏줄이 아닌 자를 국왕으로 모신다는 건 귀족들에게 있어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도 같은 것 아닌가.
칼리우스는 이것을 단지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한나는 선왕을 쏙 빼닮지 않았던가? 외양은 물론 선왕이 가지고 있는 알레르기 따위의 병까지도 같았다.
문득 그는 한나가 어렸을 적 말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두운 방 안, 딱딱한 돌 위에 누워 있었던 자신. 멀리서 지켜보는 어머니와 오라비. 제 몸에 수상한 짓을 하려던 주술사와 그를 말리려던 아버지.
그때는 모두 그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한나는 선왕의 핏줄이 맞아. 만일 파베스만이 주술사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고 한나가 선왕과의 사이에서 난 아이라면, 왜 그때 한나에게 그런 짓을 하려 했는지 앞뒤가 맞는군.”
칼리우스의 말에 일카이가 당황한 듯 눈을 끔뻑였다.
“한나라면, 공주님 말씀이십니까?”
칼리우스가 고개를 들어 일카이를 쳐다봤다.
“그래. 한나가 자물쇠 중 하나라 생각해서 죽이려 했던 거다.”
“아스펠라 말로는 아스펠라도, 각하도 그 자물쇠라던데요.”
일카이의 말에 칼리우스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맞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루이나의 봉인에 가담했던 가문은 다섯 가문 아닙니까? 어찌하여 자물쇠는 네 개뿐인 겁니까?”
“자네 말대로 봉인에 가담한 가문은 다섯 가문이야. 자물쇠는 네 개가 확실해. 다섯 번째 존재는…… 아직 확실치 않은 가정일 뿐이다.”
“만약 다섯 번째 존재까지 있다고 치면, 나머지 두 명은 누가 될까요.”
“봉인과 관련된 다섯 가문에서 태어난 아이들 모두 다. 만약, 네 말대로 파베스가 국왕의 친아들이 아니라면…… 파베스 역시 그 후보에 오를 순 있겠군.”
칼리우스는 문득 이전에 아스펠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만일 봉인에 관련된 이들이 모두 다 연결되어 있다면.
혹시나 정말 만약에. 파베스가 그 마지막이라면, 그 역시 아스펠라와 자신이 꾸었던 꿈을 꾸지 않았을까.
칼리우스가 일카이에게 물었다.
“혹시 근래에 이상한 꿈을 꾼 적 있나? 거대한 신이 나오고, 기다란 수목에 강가가 펼쳐지는.”
“아뇨.”
“그런 꿈을 꾸면 바로 말하게.”
일카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려다 이내 물었다.
“그 자물쇠라는 사람들이요. 루이나의 봉인을 지키기 위해 뭘 해야 합니까?”
그의 말에 칼리우스가 잠시 침묵하다 답했다.
“상자를 잠가야겠지.”
“예?”
친절한 답변은 아니었으나 일카이는 칼리우스의 표정을 보곤 더 이상 묻지 못했다.
그는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자신을 무시하거나 농락하려는 행동이 아니라는 걸 느꼈는지 일카이는 조용히 그를 쳐다봤다.
생각에 잠긴 칼리우스의 표정이 마치 죽음을 준비하려는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죽는 건 아니겠죠. 그 자물쇠가 해야 할 일이요. 그렇게 되면 아스펠라나 각하도…….”
“죽지 않아. 적어도 자물쇠는.”
자물쇠 말고 또 뭐가 있는데요? 묻고 싶었으나 일카이는 그의 초연한 표정에 이상하게 말문이 막혀버렸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칼리우스는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물쇠는 상자를 잠가야 해.”
나직하게 그가 중얼거렸다.
***
민튼이 칼리우스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날 새벽의 사건 이후 근 일주일 만이었다.
사실 민튼은 그날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자신이 본 것이 맞는 걸까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물론 부질없는 의심이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것은 자신의 두 눈뿐 아니라 동료의 두 눈도 있었다.
도합 네 개의 눈이 버젓이 그 모든 광경을 똑똑히 봤는데, 그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환시를 본 것은 아닐까.
물론 그것 역시 새벽 내내 핏물이 밴 잔디에 물 뿌리는 정원사와, 저택을 누비는 정찰병들의 분주한 발걸음, 그리고 자신들을 감시하는 경비병들의 동요한 모습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이건 환시도 아니다.
동료는 그저 이거 정말 충격적이군, 대공이 검은 마수로 변한다니. 게다가 저 상처들은 또 뭐고? 우리 이러다 정말 잡아먹히는 거 아닐까? 등등의 걱정을 해댔지만 민튼은 오히려 기뻤다.
검은 마수가 칼리우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왜 가장 먼저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그날 이후부터 민튼은 지속적으로 병사들에게 대공을 만나게 해달라, 아니면 그 보좌관이라도 만나게 해달라 청했다.
“갑자기 왜 그렇게 적극적으로 변했어?”
동료는 어째 신나 보인다며 민튼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내가 신나 보이나?”
“그래. 드디어 미친 거야? 우린 이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데. 앞으로 여기서 살아나갈 확률은 아예 없다고.”
안 그래도 적의 끄나풀로서 이곳에 잡혀 들어온 데다가, 심지어 대공의 거대한 비밀까지 알아버리고 말았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자백한다고 쳐도 이미 대공의 비밀을 알아버렸는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리가.
“그러니 더더욱 만나 뵙게 해달라 청해야지.”
“왜?”
“우리를 죽이지 못 하도록 해야 할 것 아닌가.”
***
아스펠라는 계단을 내려가던 일카이와 마주쳤다.
“일카이!”
오랜만에 제대로 얼굴을 보는 듯해, 아스펠라가 반가운 듯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아스펠라.”
일카이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산에 같이 가줘서 고맙다고 제대로 말하고 싶었는데, 얼굴 보기가 영 어렵네. 사냥제 준비 때문에 많이 바쁜 거야?”
그와 함께 약초를 캐고 칼리우스가 눈을 뜬 이후부터 일카이의 얼굴을 보기가 영 어려웠다. 워낙 경황이 없었기에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으나 아스펠라는 블레드 성에서 만났을 때 창백했던 그를 떠올렸다.
항상 해맑게 웃고 있던 얼굴이 무표정으로 변해서 그런 걸까. 어째 그에게서 이전보다 성숙해진 분위기가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카이의 모습을 보고 드디어 철이 들었구나, 하며 기뻐하기보다는 불안한 것이 먼저였다. 아스펠라가 잠시 그의 얼굴을 살피다 물었다.
“내가 블레드 성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웃는 모습을 잘 못 보는 거 같은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그때 제대로 말 붙이지 못해 계속 염려되었다며 아스펠라가 일카이의 얼굴을 살폈다.
아스펠라를 쳐다보는 일카이의 눈에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서려 있었다.
적어도 아스펠라는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기에 그가 무슨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인지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다.
항상 능청맞게 장난이나 쳐대던 애가 어째 입 꾹 다물고 저를 지긋이 보는 것이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던지, 아스펠라는 일부러 과하게 그의 어깨를 장난 식으로 툭툭 치며 물었다.
“야, 왜 그래 진짜. 응?”
한참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일카이가 이내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입술을 한번 꾹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 그는 말하는 순간에도 말하지 말까, 아니면 결정을 번복해야 할까 고민했다.
“……나, 사냥제가 끝나면 대공 성에서 나갈 거야. 다른 동료들은 모르겠지만 난 그러려고.”
“응? 갑자기 왜?”
아스펠라로서는 매우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일카이가 이곳에서 계속 지내는 것도 딱히 말이 되는 일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갑자기 이곳에서 나간다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이었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항상 칼리우스와 되도 않는 신경전을 벌이던 아이 아니던가.
“혹시, 사라랑 관련된 일 때문에 나가는 거야?”
일카이가 가만히 아스펠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냥 나갈 때가 되어서 나가는 것뿐이야. 누이 일 때문이 아니라고 아주 말하진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그 일 때문만은 아니고.”
스스로 나가겠다 하니, 마냥 잡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지만 아스펠라는 어쩐지 아쉬운 감정이 들기도 했다.
“그래. 네가 나가겠다니까 말리진 않을게. 그래도 조금 갑작스럽긴 하다. 안 좋은 일 생긴 게 아니라면 된 거지.”
아스펠라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괜히 제 머리칼을 만지작댔다. 아까 전부터 자신을 쳐다보는 일카이의 눈빛이 평소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
결국 아스펠라가 물었다.
“평소의 너랑 좀 다른 것 같아. 분위기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걱정하는 게 기우일 수도 있겠지만 전혀 사정을 모르겠어.”
네가 맨날 장난 식으로 누나 같아서, 누나 같아서 말하던 게 세뇌 되었나. 네가 정말 내 친동생마냥 느껴져서 그러나봐.
그 말에 일카이의 속이 타들어가는 줄도 모른 채 아스펠라는 속없이 웃어보였다. 일카이는 목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어 괜히 헛기침 하며 애석한 미소를 지었다.
“아스펠라.”
“응?”
“에르윈 대공을 사랑해?”
갑작스런 질문에 아스펠라가 잠시 숨을 고르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대한 감정을 일카이에게 말하는 것이 쑥스러웠는지 아스펠라의 양 볼이 장밋빛 분홍색을 띠었다.
그 모습이 퍽 사랑스러웠고,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시리고 쓸쓸했다.
“……마음이 변치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
“응.”
아스펠라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괜히 제 목덜미 부근을 만지작댔다.
“너한테 이런 말 하려니까 되게 쑥스러운데, 응. 대공을 사랑하게 됐어.”
그리 말하는 아스펠라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그래. 그럼 된 거지.”
일카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사냥제가 끝나고 바로 나갈 거라, 제대로 인사 못할 지도 몰라. 그러니까 지금 말할게. 지금 아니면, 평생 제대로 말 못할 거 같아서.”
“뭔데?”
“널 좋아했어. 아니. 좋아해 지금도. 맨날 누나, 누나 거리면서 동생인 척 들이댔지만 그거 사실 죄다 사심 담은 행동이었어. 물론 너는 눈치 더럽게 없어서 몰랐겠지만.”
그의 말에 아스펠라는 가만히 눈만 동그랗게 뜬 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눈치였다. 그 모습마저 야속하기 보다는 귀여워 보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근데 그게 내 실수였던 건가 봐. 누나라고 하니까 그냥 남동생으로만 보네. 근데 뭐 어쩌겠어. 상대가 칼리우스 에르윈인데. 좀 불공평한 싸움 아닌가? 그래서 그냥, 깔끔하게 물러나기로 했어.”
“일카이.”
“물론, 한 발자국 물러나서 관전하는 것뿐이야. 언제라도 빈틈 보이면 바로 끼어들 거고. 그 전까지 네가 깜짝 놀랄 만큼 변해야지.”
아스펠라는 혹여나, 자신과 칼리우스 때문에 나가려는 것이냐 묻고 싶은 듯 안절부절하지 못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뭐, 둘이 알콩달콩 대는 모습 보기 싫은 건 맞지만, 그것 때문에 나가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말고. ……신분 상승의 기회가 주어졌길래, 얼른 그 줄을 잡아 쥔 거야.”
“신분 상승?”
“그래. 나 알고 보면 되게 사연 많은 남자라고.”
그렇게 말하던 일카이가 이내 평소의 그처럼 장난기 가득한 익살스러운 얼굴로 아스펠라의 머리카락을 헝클이듯 쓰다듬었다.
“나중에 가서 아, 돈 많고 잘생긴 연하남을 놓쳤구나, 내가 내 복을 발로 차버렸구나, 울지 마. 응?”
내가 저번에도 말했지. 내가 영애들 사이에서는 흑장미부터, 흑설탕부터 온갖 애칭은 다 가지고 있다고. 일카이의 말에 아스펠라가 푸흐 웃음을 터트리고 말했다.
“나중에 가서 나한테 흑장미라 부르지나 마. 어? 내가 대공처럼 옷만 갖춰 입으면 다 뻑 간다고. 진짜 후회하게 될 거야, 아스펠라.”
“누, 누가 그런 말을 한다고…….”
“후회 안 해도. 어차피 근처에 있을 테니까. 뭐, 그치만 나도 아주 장담은 못해. 좋아하는 여자 생기면 아스펠라 모른 척 하고 쫓아다닐지도 몰라.”
평소의 가벼운 말투와, 가벼운 표정을 지으며 자화자찬 식의 말을 해대자, 그제야 아스펠라는 원래의 일카이로 돌아온 것 같아 조금 안도하는 듯했다.
일카이는 또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이만 훈련을 하러가야겠다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스펠라는 그리하라며, 그래도 우리 아주 헤어지는 건 아니니 너무 슬퍼하지만은 않겠다 말했다. 그 말에 일카이는 아스펠라를 등진 채로 가만히 손을 뻗어 휘적휘적 흔들었다.
열아홉 끝자락, 애잔할 정도로 어느 한 쪽만 일방통행인 짝사랑이었지만 그래도 꽤 볼품없는 끝맺음은 아닌 듯하다.
이미 일전에 일카이에게서 그의 사정을 모두 들은 사냥꾼들이 멀리서 걸어오는 자신들의 대장을 어른 아들 맞이하듯 앞으로 달려왔다.
“대장! ……우, 울어?”
그리고 혹여나 목소리가 커 다 들리진 않을까 얼른 주변을 살폈다.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저들끼리 모이더니, 고개 숙인 일카이를 쳐다보며 사냥꾼들이 연신 당황한 듯 계속해서 물었다.
우는 거 아니지? 설마 진짜 우는 거야? 설마 대차게 까였어? 절대 싫대? 대장이 절대 남자로 안 보인대? 그러자 일카이가 숙였던 고개를 당당하게 치켜들며 말했다.
“울긴 누가 울어! 아직 까인 것도 아니구만.”
그러나 마치 매운 고추냉이를 한 주먹 퍼다가 먹은 사람마냥 코끝과 눈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사냥꾼들은 그런 일카이가 안쓰럽기도 했다.
사실 체격으로만 봐서는 절대 애 같지 않으나 일단은 그도 열아홉 소년 아니던가.
이제 겨우 성인식을 치르고 자신이 진짜 성인이 된 줄 착각하는. 한창 허세부리고 싶을 나이.
“대장, 너무 슬퍼하진 마. 첫사랑치고 꽤 쪽팔린 짓들은 하지 않았잖아. 걱정 마. 난 말이야 술 진탕 마시고 첫사랑 집 앞에 드러눕고 울고 그랬어.”
“대장 정도면 진짜 멋지게 끝낸 거야.”
그들은 일카이를 위로하려는 듯 한마디씩 얹었다. 삼촌들이 조카를 위로하는 모양새였다.
일카이는 나 진짜 안 울었다니까!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 차인 거 아니야, 내가 먼저 물러난 거라고.”
엄연히 다른 것이라며, 일카이가 조금 늦게 자존심을 챙기기 시작했다.
사냥꾼들은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으며, 그의 마지막 자존심만 지켜주자는 듯 그래, 대장이 먼저 물러난 거지. 엄연히 다른 것이지. 맞장구를 쳤다.
“그래서 에르윈 대공이랑은 무슨 얘길 한 거야? 어떻게 하기로 했어?”
“사냥제가 끝나면 난 여기 나갈 거야.”
“왜 여기서 나가는데?”
역시 아닌 척 했지만, 실연의 아픔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냐며 묻자 일카이가 눈을 부라렸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니 그럼 왜 대공 성을 나가? 네가 로잘린드 가문의 명맥을 잇게끔 도와주겠다면서. 근데 왜 여길 나가는데? 대공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왕이 널 죽일지 어떻게 알고?”
동료들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연신 질문해댔다. 일카이는 그들을 가만히 쳐다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여기서는 말 못해. 아무튼, 사냥제가 끝나면 난 나갈 거야. 이제 오크몬드 대장 자리에서도 사퇴할거고, 형들은 여기 있어도 돼. 대공도 별 상관 안 하는 것 같으니까.”
“네가 떠나는데 우리가 여길 왜 있어?”
“오크몬드 대장에서 사퇴한다니까.”
“그래도 그냥 대장해. 우리 대장.”
동료들의 말에 일카이가 꽤 감동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첫사랑은 좀 가슴 아프게 차였지만, 그래도 대장 곁에 우리가 있잖아! 어차피 여기서 결혼한 사람 아무도 없고 우리끼리 평생 우정을 다지자고.”
그러나 감동도 잠시 이내 일카이는 다시 한 번 난 차인 게 아니라고! 소리 질렀다.
***
현관 앞에서부터 안절부절못하던 집사가 왕궁에서 돌아온 버루카에게 얼른 달려왔다.
“주인 어르신.”
“민튼은 아직도 안 돌아왔는가.”
“도련님께서 오늘 막 돌아오셨습니다.”
자비로운 에르윈 대공이 며칠 전에 난 큰 불로 인해 오갈 데 없어진 북쪽 산의 화전민들을 기꺼이 받아줬다는 소문은 파다하게 났다.
하지만 제 할 일을 마친 아들이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 버루카는 걱정되던 참이었다. 그는 안도했다는 것을 숨긴 채 갈무리를 하곤 물었다.
“그래? 지금 어디에 있지?”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데 주인 어르신.”
집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왜 그러는가. 설마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던가 뭐, 그런…….”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닌데. 도련님께서…….”
“대체 뭔가?”
집사는 이내 도련님께서 직접 말하실 거라며 그를 서재로 안내했다.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가자 며칠 새 꽤 수척해진 민튼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도대체 어디 있었던 것이냐?”
버루카는 제 아들의 상태를 한번 살피곤 물었다.
그러자 민튼이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쳐다봤다. 그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집을 나가겠습니다.”
“뭐?”
버루카는 왜 이제야 집사가 입에 담는 것을 꺼려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난데없이 가출 선언이라니. 아들은 사춘기 소년도 아닐 뿐더러 부르주아들이 한다는 사업에 눈이 팔릴 정도로 치기 어린 사내도 아니었다.
“에르윈 대공의 밑으로 들어갈 겁니다. 그분에게 제가 본 모든 것들을 고했고, 미치광이 왕이 나라를 무너뜨리는 꼴은 보지 않을 것입니다.”
민튼은 칼리우스에게 자신이 본 모든 것들을 고했다.
국왕이 무슨 짓을 했고, 무슨 짓을 하려 하며, 또 어떤 짓을 할 예정인지.
그것이 그가 살 길이었으며 나아가 모든 이들이 살 방법이었다.
‘받아주십시오.’
민튼은 다짜고짜 칼리우스에게 자신을 받아 달라 청했다.
아직 회복이 덜 되어 침실에 누워 있던 칼리우스는, 제 앞에 기사 선언을 하듯 한쪽 무릎을 꿇은 민튼을 가만히 쳐다보다 물었다.
‘자넬 어떻게 신뢰하라는 건지 모르겠군. 자네의 아버지는 국왕의 보좌관 아닌가. 아비를 배신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제가 본 모든 것들을 한 치의 거짓말 없이 고하겠습니다. 받아주십시오.’
‘이제 와서 내게 받아달라 하는 이유는?’
칼리우스는 민튼을 제대로 신용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민튼은 아주 오랫동안 왕실, 그것도 국왕의 호위 기사 아니었던가.
오랜 시간동안 최측근으로 국왕을 보좌하며 보좌관인 아버지와 함께 국왕이 자행하는 수많은 일들을 봐왔을 것이다.
‘왜 이제 와서?’
‘국왕을 따르는 것이 튀니아가 살아남을 길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길이 튀니아를 죽이는 일이라는 것을 늦게라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날 따르면 튀니아가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예.’
‘그거 참 오만한 생각이군. 내가 나를 못 믿는데, 자네가 나를 믿겠다고?’
칼리우스가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민튼을 쳐다봤다.
‘각하께서 검은 마수로 변하시는 것을 봤습니다. 그 힘이라면 국왕에게 대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민튼의 말에 칼리우스가 픽 웃음을 흘렸다.
‘국왕에게 대적하는 건 내가 아니야.’
‘예?’
‘난 어디까지나 잘 따르는 개일 뿐이고. 목줄은 아스펠라가 쥐고 있네.’
그러니 나한테 와서 살려달라, 받아달라, 도와달라 할 것이 아니라 아스펠라한테 말해야 하지 않겠나.
칼리우스가 그렇게 말하며 제 옆에 앉아 있던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마치 ‘나 잘했지? 칭찬해줘.’ 같은 종류의 표정을 지으면서.
그 모습에 잠깐 충격받긴 했지만 민튼은 얼른 아스펠라에게 고개 숙였다.
아스펠라는 뭘 또 그렇게까지 말하냐며 부담스러운 표정을 짓다가도,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럼 민튼 경이 알고 있는 걸 모두 다 말해주세요. 정확히 국왕이 사냥제에서 뭘 하려는지, 그리고 지하 감옥 아래에 있는 검은 마수와 산신들을 데리고 뭔 짓을 하고 있는지.’
“네가 미쳤구나!”
버루카는 제 아들의 껍데기 안에 다른 뭔가가 들어간 건가 싶을 정도였다.
네 아비가 국왕을 섬기는 자인데, 아들이라는 놈은 국왕과 척을 지려는 이를 섬기겠다고?
그걸로도 모자라 이미 다 고했다니, 이것은 변절이며 반역이었다.
“네놈은 왕실 기사로서의 신의도 없는 것이냐.”
“신의? 신의라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데려다가 불사체니 군대니 뭐니 만들겠다면서, 살아 있는 시체로 만드는 것이 아버님이 말하는 신의입니까? 노인이나 애들을 이용하기 위해 그들 터전에 불을 지르도록 하는 것이 신의라고요?”
민튼은 지긋지긋했다. 지하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인간으로서 넘지 말아야 할 윤리적 선을 넘는 것 같았다.
“그 아래에서 자행되는 일들은 모두 악입니다, 아버지!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왕실 기사가 된 거지, 광기에 물든 국왕의 수족이 되려 왕실 기사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 민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는 당당하십니까?”
“뭐?”
“그 지하 아래 갇힌 검은 마수, 아니. 한때 아버지가 모셨던 왕의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시잖습니까.”
전 이제 국왕의 반역자이며 배신자니 아버지께서 국왕께 고해 절 처벌하여도 상관없습니다.
나라를 배신하느니, 왕을 배신하겠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전 죄를 짓지 않았고, 오히려 지금 그 죄를 씻기 위해 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것이니까요.
단호한 민튼의 말에 버루카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제 아들이 자신을 경멸의 눈으로 쳐다보고, 이내 서재 문을 나서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칼리우스는 자신의 몸에 이변이 생겼다는 걸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다.
“아직 인간으로 돌아올 시기가 아닌데 돌아왔다는 것은 어쩌면 저주가 사라지고 있다는 게 아닐까요?”
펠킨은 그렇게 물었지만, 칼리우스는 저주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이전보다 더 강해진 저주에 융합되는 듯했다. 정확히는 먹히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가슴부터 복부까지, 여기저기 찢어진 상처들은 빠른 속도로 흉터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거기서 그치면 좋았을 것을.
칼리우스는 자신의 몸 일부가 하루에도 몇 번씩 제멋대로 짐승과 인간의 몸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을 겪어야 했다.
그의 감정이 격해질 때는 어김없이 손이며 발이며 팔에 검은 마수의 일부가 튀어나왔다.
만년필을 쥔 손은 순식간에 검은 마수의 거대한 앞발로 변해 통제되지 않고 날뛰었다. 몇 번이고 자의에 반해 책상을 뒤엎었다.
펠킨은 그때마다 칼리우스를 도와 날뛰는 그의 팔을 잡아야 했다.
그의 몸 일부가 변할 때마다 그 일부는 칼리우스를 공격했다. 제 목을 조르려 할 때도 있었고 소중한 이를 공격하려던 때도 있었다.
가령, 아스펠라라던지.
감정이 격해진다는 건, 비단 화가 날 때뿐만이 아니었다. 일단 그의 몸이 평정을 찾지 못한 흥분 상태면 모두 해당되는 것이었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감정이 고조되어 몸이 밀착되면서, 아스펠라의 몸 이곳저곳 애무를 하기 시작하면.
‘아!’
갑자기 기다랗게 자란 손톱에 아스펠라의 가슴께 쪽이 찔려 피가 난 적도 있었다.
‘하나도 안 아팠는걸요? 그냥 가시에 찔린 것처럼 따끔했을 뿐이에요!’
심한 상처도 아닌 데다가, 아스펠라가 별것 아닌 듯 씩씩하게 말했지만…….
그날 이후부터 칼리우스는 아스펠라에게 닿는 것을 과하게 조심하기 시작했다.
해서 요 며칠간 칼리우스는 아스펠라 가까이 가지 않은 채 먼발치에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무슨 그림의 떡도 아니고!
답답해하던 아스펠라 역시 그가 그녀를 상처 입히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안 뒤부터는 별다른 말없이 그저 칼리우스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해서 오늘도 칼리우스는 하양이와 화전민 아이들과 놀고 있는 아스펠라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두려우십니까.”
어느 새인가 화전민 마을의 노인이 다가와 칼리우스에게 물었다.
칼리우스는 대답 대신 주름 자글자글 진 노인의 얼굴을 한번 쳐다봤다. 펠킨이 노인의 뒤를 따라와 말했다.
“대공 각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하셔서요.”
칼리우스가 가보라는 듯 고갯짓을 하자, 펠킨이 노인을 의자에 앉혀주곤 잠시 뒤로 물러났다.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칼리우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려 했다. 칼리우스는 되었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노인이 빙긋 웃고는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대공 치고 체면치레에 관심이 없어 보였고, 산골짜기 평민 노인 치고 대공 앞에 주눅듦이 없어 보였다.
칼리우스는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로 아스펠라를 가만히 쳐다보다 노인에게 물었다.
“자네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스펠라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본질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했다.
칼리우스가 잠시 머뭇대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노인을 쳐다봤다.
“나한텐 뭐가 보이는가.”
노인이 가만히 칼리우스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는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이를 봐왔지요.”
노인은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시작했다.
“오래 전 각하와 같은 것이 보이는 자가 한 명 있었지요. 한때 이 나라의 국왕이었던 분이셨습니다.”
“그의 정체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나 보군.”
“예. 그분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습니다.”
얇은 초승달 같은 주름진 눈이 슬쩍 떠지며, 항상 유하게 미소 짓고 있는 듯한 노인의 눈동자가 보였다.
“각하께서는 그 능력이 두려우십니까?”
“…….”
“먹히는 것이 두려우십니까, 아니면 저 아가씨를 다치게 하는 것이 두려우십니까?”
칼리우스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둘 다 두렵다.”
“안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감정을 경계에 쓰십시오. 회피에 쓰지 마십시오.”
결국엔 스스로를 두려워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이는 결국엔 그것에 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노인은 그렇게 말한 뒤 아이들을 한번 쳐다봤다.
“각하께서는 튀니아 왕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저 아가씨께서 말씀하시길, 각하께서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막으려 하신다고요.”
“장담은 못해.”
“선왕을 찾으러 왔던 병사들, 그리고 마을의 젊은이들을 데려간 병사들. 그들한테서는 비슷한 것들이 보였습니다. 모두 역병에 전염된 것마냥 부정한 기운이 병사들을 감싸고 있었고, 유령 같은 검은 것들이 주변을 날아다녔죠.”
마을의 젊은이들을 데려다가 좋지 않은 짓을 할 거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으나, 노인은 그들이 병사들을 따라가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만일 반항하면 온 마을을 학살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우두머리 되는 이는,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었습니다.”
“국왕을 말하는 건가.”
“아니요. 그이는 국왕이 아닐 것입니다.”
노인은 잠시 그때 망토 쓴 이를 떠올렸다.
“그는…… 한때 산신이었던 자입니다.”
자신의 두려움에 완전히 먹혀버린, 부정타버린 남쪽의 산신.
칼리우스는 놀란 듯 고개를 돌려 노인을 쳐다봤다.
“두려움에 먹힌 자는 그리 됩니다. 그러니, 그것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
야간 교대 경비병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잠들었을 깊은 새벽이었다.
기다란 모포를 두른 누군가가 등불 하나에 의지한 채 높고 가파른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지하 문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굳이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아는 듯 얼른 몸을 비켜섰다.
인영은 이내 지하 문을 열고 또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바닥 깊숙이 내려가는 길은 지하세계로 이어지는 황천 같았다.
왕궁의 가신들이나 시종들 대부분은 그저 왕권을 위해 산신들을 토벌했고, 그들을 생포해 지하 감옥에 가뒀다,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차마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굳게 닫힌 철문, 그리고 끝없이 아래로 이어지는 지하.
마침내 그는 어떤 문 앞에 당도했다.
병사들에게 고갯짓을 하자, 그들은 네 개의 자물쇠를 열고, 두꺼운 철문을 밀었다.
그 안에 들어가니 온통 고통에 찌든 짐승의 앓는 소리가 들렸다.
등불을 비추니, 벽 한 켠에 생포된 산신들과 검은 마수가 묶여 있었다.
미동도 않고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자신들에게 등불을 비추는 이를 쳐다봤다. 그의 손에는 거대한 인두가 들려 있었다.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던 이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새벽 가까이 되는 시간, 이곳을 찾은 이는 다름 아닌 교주였다.
교주는 잠시 그들을 가만히 둘러보다 이내 말을 걸었다.
“이렇게 혼자 자네들을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군. 마지막이 될 듯하여 찾아와 봤네.”
교주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산신들이 지친 듯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뻔뻔도 하구나.」
서쪽 산신과 북쪽 산신은 이미 몇 군데 몸이 토막 나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교주는 그런 그들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동쪽 산신이 교주를 쳐다보며 물었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인가.」
「배신자에게 무슨 대답을 바랄까.」
서쪽 산신이 교주를 노려봤다.
동쪽 산신은 아직 교주를 회유할 수 있다 생각한 것인지 연신 그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베르델. 더 이상 신을 저버리고 자신을 저버리는 짓을 하지 말게. 그 오랜 시간 동안 함께해 오지 않았는가. 왜 이제 와서 봉인을 풀려는 것인가.」
교주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적어도 자신을 경멸하고 원망하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난 자네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어. 산신의 능력을 뺏기고 내 산에서도 쫓겨나고 말았으니까. 난 날 그렇게 만든 비르가를 원망하지도 자네들을 원망하지도 않았네.”
「원망? 먼저 신을 저버리고 그 약속을 깬 건 베르델 자네였어! 어찌 신을 저버리고 산을 저버릴 수 있는가! 자네의 변절로 인해 남쪽 산은 온통 부정과 악으로 역병이 퍼졌네. 누가 누굴 원망한다는 건가. 어째서 이렇게 변한 건가. 베르델. 한때 비르가를 가장 따르고 신을 가까이 모시던 이 아니었던가.」
동쪽 산신의 말은 교주에게 그저 짐승이 그르렁대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한때 남쪽의 산신 베르델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그는 신을 저버린 그날 이후부터 부정을 타게 되었다.
“이해를 바라진 않네. 우린 결국 버려진 것들이라는 걸 인정하기 어렵겠지. 자네들은 그 모든 믿음들이 결국 허상이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을 테야. 그러니 내가 한 말을 무시하고 날 추방했겠지.”
하지만 내가 맞고 자네들은 틀렸어.
인간들은 사라져야 해. 우리가 사는 이곳은 버려진 곳일세. 그러니까 사라져야 한다고.
***
칼리우스의 그림자가 왕궁에서 돌아왔다.
그녀는 자신이 본 것들을 빠짐없이 제보했다. 지하실 아래에서 일어나는 실험들과 그 끔찍한 혼종에 대한 것은 물론, 요 며칠간 국왕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과 교주의 존재까지.
보고를 들은 칼리우스는 민튼의 증언과 대조하며 그가 거짓을 고하진 않았는지, 믿을 만한 자인지 가늠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민튼의 진술은 모두 진실이었다.
“혼종에 대해서는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각하.”
“괜찮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아는 이가 있으니.”
그렇게 말한 칼리우스가 서재 안으로 들어오는 민튼과 눈을 마주쳤다.
칼리우스의 그림자는 민튼을 보고 놀란 듯 자신의 주인과 그를 번갈아 쳐다봤다.
“저자가 여길 왜……. 각하. 저이는 올리오 가문의 장남 아닙니까.”
“이제 가문에서 나왔으니 걱정 마시오.”
민튼이 나직하게 말하며 칼리우스에게 묵례를 했다. 칼리우스는 그림자에게 이만 가보라며 손짓했다.
그림자는 영 민튼이 미덥지 못한지, 그를 지나쳐 가면서 말했다.
“일말의 양심은 있나 보군?”
완전한 경멸의 눈초리에 민튼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림자가 서재를 나가자 그가 칼리우스에게 물었다.
“저자는 누구입니까?”
“내 그림자다. 일전에 왕궁에 잠입시켰던. 오늘 막 돌아와 자네의 진술과 대조했네.”
“…….”
“거짓을 고하진 않았더군.”
“……꽤 오래전부터 국왕의 행동을 주시하고 계셨군요.”
칼리우스는 무심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아스펠라가 그리하라 했으니까.”
“아스펠라 님은 정확히 어떤 분이십니까?”
민튼은 대체 아스펠라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한 듯했다.
사실 그는 아직도 아스펠라의 명령에 맞춰 제 엉덩이며 종아리며 회초리질 했던 나무를 잊지 못 하겠다. 그의 동료는 아스펠라만 마주치면 저도 모르게 손으로 엉덩이를 가릴 정도였다.
“혹시, 아스펠 산의 산신 되는 분이십니까.”
칼리우스는 대답 대신 침묵했다. 그것은 긍정의 침묵이었다.
“국왕이 산신을 찾던가?”
“찾아서 죽이려고 합니다. 사냥제 때 만일 아스펠라 님도 같이 참여하게 되면, 국왕은 분명 그때를 이용해 아스펠라 님을 죽이려 할 것입니다.”
칼리우스는 잠시 침묵했다. 이내 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리 놔두진 않지. 내가.”
***
한나가 예정보다 2주 정도 빠르게 아이를 낳았다. 다행히 산모와 아이 둘 다 건강하다는 내용과 함께 긴히 할 말이 있으니 후작저로 와달라는 전갈이 도착했다.
아스펠라와 칼리우스는 곧장 후작의 저택으로 향했다.
가는 길 마차 안에서 아스펠라는 갓 태어난 아이는 난생 처음 본다며 긴장되고 기대된다는 듯 연신 조잘댔다.
“부인의 몸은 괜찮을까요? 아이를 낳는 건 꽤 위험한 일이라고도 하던데. 아프진 않았을까요? 아이를 보면 인사해야 할까요? 아이가 내 말을 알아듣긴 하나? 참, 낯선 이를 보고 울진 않을까요? 먹을 걸 주면 좋아하려나?”
그러나 후작의 저택에 도착하여 한나 품에 안겨 곤히 잠든 아이를 보는 순간, 아스펠라는 마차 안에서 고민했던 모든 것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스펠라는 숨죽인 채 가만히 몸을 숙여 아이를 바라봤다. 한나는 그런 아스펠라를 보며 생긋 미소 지었다.
“아스펠라 양, 갓난아기는 처음 보시나요?”
“네.”
“어때요?”
“신기해요.”
아스펠라는 쭈굴쭈굴한 민머리의 생명체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아스펠라가 본 갓 태어난 것들은 짐승들의 새끼뿐이었다. 늑대의 새끼나 너구리의 새끼를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갓 태어난 인간 아이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역시 어떤 생물체든 갓 태어난 것들은 마냥 귀엽지는 않구나.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예쁘기보단 기괴해 보이는 이 생명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콧대는 날 닮아서 참 다행이에요. 눈은 필립을 똑 닮았죠?”
아이가 힉, 히엑, 거리며 눈을 뜨더니 이내 한나를 보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아스펠라는 한나의 말을 영 이해하지 못한 듯 아이를 가만히 쳐다봤다.
어딜 봐서 부인의 콧대를 닯고 후작의 눈을 닮았다는 거지? 그냥 쭈굴쭈굴한데.
그런 아스펠라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양 한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역시 엄마 아빠한테만 보이나 봐요.”
한나의 말에 아스펠라는 잠시 생각했다. 나도 저 입장이 되면 그런 게 보이려나?
그러다 상상해봤다. 나와 칼리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서로를 똑 닮은 아이라…….
우리가 아이를 만들 수 있을까?
아스펠라는 보이지 않는 미래를 그리다 이내 슬쩍 미소 지었다.
한나는 아스펠라를 잠시 쳐다보다 한번 안아보겠냐며 물었다.
“제가 그래도 돼요?”
“만지면 깨질 도자기도 아닌걸요.”
한나의 말에 아스펠라가 슬쩍 시녀의 도움을 받으며 갓난아이를 제 품에 안았다.
한나의 품속에서만 보던 아이를 제가 직접 안으니 그 느낌이 달랐다. 아이는 매우 작고, 따듯했다.
“아이가 참 사랑스러워요. 듬뿍 사랑받는 아이가 되겠네요.”
***
유디티아 후작이 두꺼운 책 한 권을 칼리우스에게 건넸다.
한나와 아이에게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던 이가 웬일로 칼리우스를 따로 불러내더니 짐짓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게 뭔가?”
“아버지가 내게 남긴 책일세. 읽어보게나.”
칼리우스가 낡은 책을 펼치며 대충 책장을 넘겼다. 그러더니 이내 집중하여 몇 장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건 루이나의 봉인에 대한 다섯 가문의 회의록이나 다름없는 책이었다.
“선대 유디티아 후작이 남긴 책이라고?”
“자네는 저 내용들에 대해 알고 있었는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얼추.”
“그렇다면 역시 아스펠라 양이…….”
“필립. 이 책은 내가 가져가서 마저 읽어보도록 하겠네.”
칼리우스의 말에 유디티아 후작이 말했다.
“국왕 전하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한나가 했던 말이 모두 사실인 거야? 그렇다면 정말 선왕께서 마수가 되었다는 건가?”
유디티아 후작이 혼란스러운 듯 질문해댔다. 칼리우스는 그런 유디티아 후작에게 진정하라며 어깨를 잡았다.
허둥대는 유디티아 후작을 의자에 앉힌 뒤 칼리우스는 최대한 그가 이해하기 쉽도록 모든 이야기를 설명했다.
봉인에 대한 것은 물론, 자물쇠에 대한 것과 왕궁 지하실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실험들까지.
하지만 자신이 검은 마수임에 대해서는 아직 밝히지 않았다. 그에게 밝혀 봤자 좋을 것이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마치자 유디티아 후작은 충격 받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필립. 사냥제가 끝나면 귀족 회의를 열 거다.”
“귀족 회의를?”
오랜 시간 동안 열리지 않은 귀족 회의였다.
“뭘 하려고?”
칼리우스가 담담하게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왕을 끌어내려야지.”
서로 소중한 걸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의 말에 유디티아가 혼란스러운 듯하다, 이내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아스펠 산과 북쪽 산 사이의 거대한 공터에서는 요란한 악단 소리가 울렸다.
귀족들이 하나둘 마차를 타고 공터에 들어올 때마다, 악단은 음악을 연주했다.
사냥제라는 것은 이름만 사냥제지, 사실 귀족들의 축제나 다름없었다.
총 나흘 동안 이뤄지는 이번 사냥제는 국왕이 즉위하고, 산신 토벌까지 끝낸 뒤 열리는 사냥제인 만큼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마차에서 내린 귀족들은 배정받은 막사로 짐을 옮겼다.
“매일 살롱이나 볼룸에만 있다가 야외로 나오니 기분이 좀 새롭네요.”
“새롭긴요. 세상에, 말똥 냄새가 여기까지 나는 것 같아요. 난 내 저택이 아닌 곳에서는 잠을 잘 수 없는데…….”
까탈스러운 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여기 모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기분 전환이라 생각하세요, 경기를 보기만 해도 금은보화를 내려주신다는데. 우리 젊은 국왕 전하께서는 산신 토벌이 끝난 것이 매우 기쁘신가 봐요.”
돈이라는 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던가. 신나게 놀다 돌아가기만 하면 또 돈이 생긴다는데 마다할 것이 뭐가 있냐는 말이었다.
“기쁘시겠죠. 이제 그분 위의 존재가 없는데. 산신들이 죄 사라졌으니, 이제 국왕께서는 매우 막강한 힘을 누리시겠네요.”
“신전의 힘이 약해지다 못해 이젠 사라질 판이 되었으니, 왕권에 모든 힘이 몰리게 되겠지요.”
“매번 산신 들먹이며 참견하는 일도 이제는 못하겠군요.”
산신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귀족들의 힘이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를 방증하듯 몇몇 원로 귀족들의 표정은 영 마뜩찮지 않은 표정이었다. 어떤 귀족은 사냥제에 참가하지 않기도 했다.
화려한 막사들에 하나둘 귀족들의 짐이 들어찼다.
그중 가장 화려하고 커다란 막사가 있었는데, 이는 에르윈 대공이 지내는 막사였다.
대공의 막사 주변엔 그와 함께 참가할 사냥꾼들을 위한 막사들도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아스펠라는 칼리우스와 함께 준비된 막사로 향했다.
아스펠라는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어깨와 목이 움츠러들어, 마치 제 몸을 보호하기 위해 등껍질 안에 몸을 숨긴 자라 꼴이 된 것 같았다.
칼리우스는 그런 아스펠라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아스펠라. 그러다 목에 담 오겠습니다.”
“귀족들이 엄청 쳐다보잖아요…….”
그냥 시장통 사람들처럼 자신을 있는 듯 없는 듯 취급하면 본인도 덜 부담스러울 텐데…….
아스펠라가 마차에서 내린 이후부터,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아스펠라를 향해 있지 않은가.
“그럼 대공의 애인인데 당연히 쳐다보겠지.”
일카이가 그렇게 말하더니, 아스펠라한테 “당당하게 어깨 펴! 자라 같잖아!” 하며 어깨를 펴주곤 다시 하양이를 데리고 제 갈 길을 갔다.
“아마 공식적으로 보는 건 처음이라 다들 신기한가 보군요. 무례하게 굴진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진 마요. 아스펠라.”
생글생글 웃고 있는 칼리우스의 모습을 보니, 마치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펠킨은 짐꾼들과 함께 먼저 막사 안에 들어가 있었다.
이 짐은 이리로, 저 짐은 저리로. 넓은 막사 한켠에 커다란 트렁크 가방들이 몇 개 쌓였다.
“각하께서는 최고급 거위 오리털이 든 이불만 사용하시니 이 이불은 당장 치우거라.”
한창 짐을 정리 중인데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와 안으로 들어왔다. 펠킨이 화들짝 놀라 얼른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스펠라 양의 막사는 제가 안내해드리지요!”
“아, 제 전용 막사도 있나요?”
“그럼요. 당연하죠. 아직 혼인도 안 한 분들이 같은 막사 안에 계셨다간 귀족들의 눈에 불이 날 것입니다.”
펠킨은 그리 말하며 아스펠라의 전용 막사로 안내했다. 칼리우스는 그런 펠킨을 가만히 쳐다보다 후, 한숨을 내쉬었다.
아스펠라의 막사는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님 불행이라 해야 할지 칼리우스의 막사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보통 약혼한 사이라 하면, 이렇게 바로 옆에 붙은 곳에서 묵거든요.”
“그렇군요.”
“아, 굳이 약혼 사이가 아니라 해도 붙여준답니다.”
“네.”
아스펠라는 약혼이니 뭐니 별 생각 없는 듯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펠라의 막사 역시 칼리우스의 막사만큼이나 드넓었다. 막사 안에는 시녀 앨리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흘 동안 이곳에서 불편함 없도록 제가 잘 모실게요!”
앨리스의 말에 아스펠라는 잘 부탁한다며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사실 산에서도 살았던 그녀에게 이곳이 불편할 리는 없었다.
“그럼 저는 바로 옆의 시녀 전용 막사에 있을 테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불러주세요.”
앨리스는 꾸벅 인사를 하고 바깥으로 나갔다. 아스펠라는 가만히 침대에 앉아 막사를 둘러봤다.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찍찍! 찍찍!
그때, 침대 아래에서 나는 소리에 아스펠라가 얼른 아래로 몸을 숙였다.
“생쥐야!”
[아스펠라! 휴, 아까 전에 대공의 막사에 들어갔다가 시종 놈한테 밟혀 죽을 뻔했어!]
뭐 그런 유난 떠는 놈이 다 있담? 날 보더니 꺄악 소리 지르면서 온갖 난리를 피우는 거 있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던 생쥐는 수염을 쫑긋 세웠다.
[일단 아스펠라가 말한 대로, 국왕의 측근들 막사에 다른 애들을 잠복시켜 뒀어!]
“잘했어.”
[그놈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우리가 다 듣고 말해줄게! 사생활을 낱낱이 밝혀주겠어! 밤 말은 우리 생쥐들이 다 듣는다고. 야심한 밤에 무슨 짓거리를 하는지! 침대 위의 사정까지 모두 다!]
“아, 아니. 그렇게까진 안 해도 되고, 그냥 검은 마수나 봉인, 이런 이야기들만 전달해줘.”
[응!]
어째 의욕이 과해 보이는 생쥐가 자신만 믿으라며 제 가슴팍을 툭툭 두드렸다.
아스펠라는 그런 생쥐에게 테이블 위의 포도를 따 건넸다. 신난 생쥐가 먹을 것을 들고 막사 밖으로 뽈뽈 기어나갔다.
얼마 안 가 시녀들의 막사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꺄악 쥐다, 쥐! 놓쳤어! 이런 망할 놈의 쥐!”
다시 생쥐가 돌아오면, 봉변당하지 않도록 막사 사이로 다니지 말라 일러줘야겠다 생각하던 찰나였다.
뿌우우우-
사냥제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나팔소리가 들렸다.
***
사냥제가 시작되기 전, 귀족들은 국왕을 알현하기 위해 그의 막사로 가야 했다.
다들 입구가 펼쳐진 막사 위 왕좌에 앉아 있는 파베스에게 가 인사를 올렸다.
칼리우스 역시 그의 보좌관인 펠킨과 함께 그곳으로 갔다.
“칼리우스, 아주 오랜만에 보는군. 이리 얼굴 보는 게 어려워지다니. 산신 토벌 작전을 더 끌어야 했나 보네.”
토벌 작전이 끝난 이후로, 직접 얼굴 본 것은 처음이지 않냐며 파베스가 오랜 친우를 맞이했다. 칼리우스 역시 짧은 묵례를 하며 평소처럼 그를 대했다.
“밀린 정무를 보느라 휴가도 제대로 못 갔네.”
“거짓말하기는. 자네가 유디티아 부부와 함께 블레드 별장에서 휴가를 보냈다는 걸 모를 줄 알았나. 서운하구만.”
친구 좋다는 게 뭔가. 그럴 때 함께 쉬도록 불러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파베스는 가증스러운 말을 했다.
펠킨은 속으로 감탄까지 했더랬다.
‘우와, 칼 가는 거 다 알고 있는데도 저런 말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칼리우스 역시 한 가식 했다.
“그리 서운하다 하니, 내 따로 시간을 내어 초대를 해야겠군.”
“하면, 자네가 그 꽁꽁 숨기고 있다던 묘령의 여인도 보여줄 셈인가?”
“궁금한가?”
“궁금하지. 어디 나뿐인가? 귀족들 모두 한마디씩 얹고 갔네. 나에 대한 안부나 사냥제에 대한 찬사보다 자네랑 함께 온 그 여인에 대해 더 궁금해하지 뭔가? 예상치 못한 깜짝 손님이로군.”
사냥제에도 데리고 올 줄은 몰랐다며, 파베스가 호탕하게 웃어댔다. 칼리우스 역시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깜짝 손님……. 그래. 깜짝 손님이긴 하지. 자네도 보면 참 좋아할 걸세.”
“그래?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정도라니. 참 기대되는군.”
“너무 눈독들이진 말게.”
칼리우스의 말에 파베스가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오늘 연회에서 볼 수 있는 건가? 아. 가문이 없다고 들었는데. 정말 사랑이라는 건 참 대단해. 다른 이도 아니고, 자네가 그런 여인을 들이다니. 대체 어디서 만난 여인인가?”
그의 질문에 칼리우스가 대답했다.
“산에서 만났네.”
“산?”
“그래. 산. 누군가 아스펠 산을 불태웠거든. 갈 곳이 없어 내 성에서 지내라 했지.”
“그런 자비를 베풀었다고? 자네가? 초면에?”
“내가 키우는 개를…… 돌봐줬었거든.”
웃음기를 띠고 있던 파베스가 이내 천천히 입꼬리를 내렸다.
“자네가 개도 키웠었나?”
“어쩌다 보니.”
“이곳에 데려왔나? 내가 개를 좋아하거든. 정확히는 수집하는 걸 좋아하지. 안 그래도 나 역시 개를 하나 잡았지 뭔가. 좀 포악하지만, 자네는 좋아할지도 모르겠군.”
두 사람 다 서로 어떤 뜻을 품고 있는지 그 저의를 파악한 듯했다. 입 밖에만 내지 않았지 서로를 겨냥한 말들이었다.
칼리우스의 뒤에 서 있던 펠킨은 제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참. 한나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어. 한번 찾아가야 하는데 하필 사냥제가 바로 열리는 바람에. 오라비로서 영 역할을 못하는군. 자네는 바로 갔다지? 어떤가. 아이는 무사한가?”
왜, 아이 낳다 죽기도 하고 그러잖아.
덧붙인 파베스의 말에 칼리우스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
“아주 건강해. 산모와 아이 둘 다.”
“그래. 그럴 것 같더라고. 왕실 연회 때는 한나를 볼 수 있을까 모르겠네. 참 아쉬워……. 그 애한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장난스러운 웃음으로 꾸민 파베스의 얼굴은 비열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뭘 보여주고 싶어하는지 알 것만 같아 칼리우스는 겨우 목 끝까지 올라오는 경멸을 내리 누르며 웃음으로 응수했다.
***
사냥제는 총 나흘 동안 열리는 행사로, 맨 첫날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간단한 준비 운동을 하듯, 작은 연회와 서커스단의 공연 등이 이뤄지는 날이었다.
이날은 오로지 귀족들만이 참가할 수 있는 날이었기에 아스펠라는 이곳에 도착한 이후부터 종일 막사 안에 있어야 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 즈음, 바깥에서는 연회의 악단 소리가 흘러들어 왔지만 아스펠라는 침대에서 뒹굴대고 있었다.
그때 막사 밖에서 아스펠라에 대해 추측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내 둘은 목소리를 죽여 말하긴 했으나 저들끼리 대화를 하면서 점점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 막사에 있는 여인이 아까 전 에르윈 대공 각하께서 데려온 여인일세. 엘린에게 일방적인 파혼 통보를 하도록 만든 그 여인.”
“오늘 연회에는 참석하지 않는 건가?”
“몸이 좋지 않아 부득이하게 쉬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귀족 신분이 아니니 데려오지 못한 것 아니겠는가. 그런 여인에게 호위 기사를 네 명이나 붙여주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로구만.”
그들은 아스펠라와 칼리우스, 그리고 엘린 영애와의 관계를 ‘치정’으로 결론 내린 듯했다.
아스펠라는 그걸 아니라고 완전히 부정하기도 웃기고, 그렇다고 인정하자니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천으로 이뤄진 막사가 무슨 세상 모든 바깥 소음을 차단해주는 요술 천이라도 된다 생각하는 걸까.
바로 막사 앞에서 저리 떠들어 대는 이들 때문에 어찌 행동해야 할지가 고역이었다.
아스펠라의 막사를 지키고 있는 호위병들도 이 모든 이야기들을 듣고 있어야만 했다.
아무리 자신들이 모시는 대공 각하와 아스펠라의 사이가 그런 단순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해도, 일단 저들 앞에서 세 치 혀를 놀리는 이들은 귀족이었다.
호위병들도 아스펠라도 불편한 상황이었다.
초겨울인지라 밤이 이르게 시작되었다. 어느새 해가 스멀스멀 산 아래로 내려가, 막사 안의 불빛을 밝히자 아스펠라의 인영이 언뜻 그림자 져 보였다.
그들은 “오, 그림자가 보이는군요.” 하며 저들끼리 아스펠라의 그림자가 움직일 때마다 한마디씩 했다.
“아니 대공 좋다는 영애부터 귀부인까지 널리고 널렸는데 왜 연회에 데리고 오지도 못할 여인을 끼고 다니시는 건가? 뭐 얼마나 예쁘길래.”
“그냥 놀다 버릴지도 모르지. 번듯한 가문도 없는 여인이니 뒤탈도 덜할 거라 생각하셨을지도.”
“그럼 자네 동생인 엘린 영애는 뭐가 되는가. 일방적인 파혼을 당할 정도로 저 여인한테 빠져있는 것 아니겠어?”
사내 둘 중 하나가 엘린 영애의 친오빠였던 걸까.
“우리 엘린은 대공한테 퇴짜 맞은 이후부터 구혼서가 뚝 끊겼네. 시집가긴 글렀어. 외국 귀족을 알아보는 중일세. 대공 각하도 참 너무하지 않으신가. 마음이 이리도 쉽게 변하시다니.”
“공식적인 자리에 데리고 오기도 우스운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기셨구만. 어지간한 요부가 아닐까 싶네.”
“요염하게 생기기로는 우리 엘린도 마찬가지일세. 그 애를 얼마나 예쁘게 키웠는데. 쯧.”
이쯤 되면 그냥 대놓고 들으라는 건가 싶어 아스펠라가 벌떡 일어났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아이델라? 아르델라? 뭔 사창가에서나 들을 법한 마담 이름 같은…….”
“아스펠라입니다. 아스펠 산에서 자라 아스펠라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담의 이름도, 사창가에서 온 여인도 아닙니다, 저는.”
아스펠라가 막사 천을 들어 올리며 천천히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사내들은 아스펠라가 직접 나올 줄은 몰랐는지 맨 처음엔 깜짝 놀란 것 같았지만 이내 건방지다며 화를 내려는 듯하다가, 마지막엔 얼른 제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했다.
“어흠. 흠. 우리의 목소리가 꽤 컸나 보오.”
“아닙니다. 진즉에 나와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번듯한 가문도 없는 자인지라. 무지를 용서해주십시오.”
다른 한 명은 어색하고 창피한 듯 아스펠라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으나, 엘린 영애의 오라비 되는 자로 짐작되는 이는 “이런 건방진!” 하며 아스펠라에게 삿대질을 하며 다가왔다.
그러자 사냥꾼의 숙소에 가 있던 하양이가 언제 나타난 것인지 아스펠라 앞을 막으며 사내들에게 위협적으로 이를 드러냈다.
흰 개가 인상을 써가며 으르렁대자 그들은 당황한 듯 잠시 뒷걸음질 쳤다.
“자네 좀 취한 듯싶어. 우린 이만 가보겠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음은 그대 역시 같은 생각이겠지?”
“그럼요.”
아스펠라는 자신이 배운 예절 중 가장 공손해 보이도록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사내들이 사라지자 아스펠라는 다시 고개를 들고 멀어지는 이들을 가만히 노려봤다.
하양이 역시 아스펠라를 대신해 욕을 해주듯 컹컹 짖어댔다.
[저런 놈들은 확 그냥! 가서 엉덩이를 물어줘야 하는데!]
어디선가 박수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자 일카이였다.
“잘했어. 일부러 너 기 죽이려고 그러는 건데 용케 한 방 먹였네.”
“딱히 한 방 먹이려고 그런 건 아니었어. 참으려고 했는데 비르가가 준 이름을 모욕하려 하잖아.”
게다가 칼리우스를 이 여자 저 여자 찔러보기 좋아하는 호색한같이 말하는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막상 자신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 하며 헛기침하는 꼴이 우스웠다.
분명 다른 곳에 가서도 칼리우스 욕을 실컷 하곤 그 앞에서는 알랑방귀 뀌어댈 것이 뻔했다.
“……설마 내가 한 행동 때문에 칼리우스를 더 욕보이진 않겠지?”
“그럴 리가. 네가 안 나왔으면 내가 나왔을 거야.”
일카이가 픽 웃으며 말하곤 다시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아스펠라는 그런 일카이에게 달리 하려는 말이 있는 듯 입을 움찔댔지만, 이내 그녀 역시 막사 앞 호위병들에게 살짝 목례를 하고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아스펠라는 남는 시간 동안 혼자 단어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침대에서 뒹굴대길 반복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막사 천이 살짝 열리더니, 그 사이로 칼리우스가 보였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다른 귀족들이 보면 어쩌려고요.”
“아스펠라가 들어오지 말라 하면 안 들어가는 거고, 다른 이들 시선이 걱정돼서 안 된다 하는 거면 들어가고.”
“……들어와요.”
그러자 칼리우스가 씩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아스펠라 곁으로 가 앉았다.
그가 다가오니 포도주 냄새가 물씬 풍겼다. 칼리우스는 더운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단정히 매고 있던 크라바트와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술 냄새.”
아스펠라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원래 이렇게 술 많이 마시는 사람이었던가?
성에서 그가 술에 취한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혹여나 연회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건지 걱정되었다.
“냄새 심합니까?”
“답지 않게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
“주정 부릴 정도로 취하진 않았으니 봐줘요.”
그렇게 말한 칼리우스가 이내 “아, 아닌가. 취한 것 같기도 하고.” 하며 아스펠라의 어깨에 은근히 얼굴을 묻었다.
아스펠라가 졸린 거냐며 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졸릴 정도로 많이 마신 거예요……? 펠킨은 어딨어요?”
“혼자 귀족들 상대하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제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아스펠라의 손길이 좋은 듯 칼리우스가 고개를 부비적댔다.
평소에도 이런 적이 은근 많았기에 아스펠라는 그가 정말 취한 건지 취하지 않은 건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얼굴이 좀 빨간 거 같기도 한데.”
아스펠라는 슬쩍 투덜대며 칼리우스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뭘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 나는 혼자서 책만 읽고 있었는데 칼리우스는 연회가 꽤 재밌었나 보네요?”
그녀의 빛나는 녹색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칼리우스가 이내 제 양 뺨을 잡은 아스펠라의 손목을 살짝 쥔 채 그대로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스펠라가 뒤로 넘어갔다. 푹신한 베개가 머리를 받쳤다.
날은 어두워졌고 방 안을 비추는 등불이 그의 금안에도 비쳐 마치 그의 눈동자가 일렁이는 듯 보였다.
입을 맞추려는 건가?
아스펠라는 조금 쑥스러워하면서도 슬금슬금 입을 오므려 살짝 내밀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밖에서 보일 텐데.”
영 말과 행동이 맞지가 않아 칼리우스가 슬쩍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하지 마?”
“빨리 하라는 거죠.”
아스펠라가 칼리우스의 목에 팔을 감더니 그대로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쪽쪽쪽, 짧게 입술이 몇 번 붙었다 떨어지려던 찰나 이번엔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의 어깨를 잡더니 진득하게 입을 다시 맞춰오기 시작했다.
칼리우스의 목에 감긴 아스펠라의 팔이 힘을 줘 그를 더 세게 껴안았다.
달뜬 숨소리가 막사 안에 드문드문 들렸고, 딱 다물려져 있던 두 입술이 떨어지자 기다란 은사가 죽 흘러내렸다.
아스펠라는 잠시 멍한 눈으로 제 위의 사내를 쳐다봤다.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정염에 이글거리면서도, 언뜻 주저하는 듯한 표정이 함께 보였다.
이내 아스펠라가 그에게 팔을 뻗자 칼리우스가 다시 아스펠라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혹여나 바깥에 큰소리라도 들릴까 얼른 제 입술을 꽉 깨물던 아스펠라는 천천히 눈을 감고 제 목덜미, 쇄골에 입 맞추는 칼리우스를 느꼈다.
어깨 위에 걸쳐진 옷을 끌어내리자 하얗고 뽀얀 살결이 드러났다.
칼리우스는 아스펠라의 목덜미부터 시작해 움푹 파여진 쇄골, 그리고 알맞게 부푼 가슴을 입에 머금고 거세게 빨았다.
그가 지나간 자국이 붉고 축축하게 부어올라 마치 열꽃이 핀 것 같았다.
칼리우스는 그렇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을 좋아했다. 그럴 때마다 희열에 몸을 떨면서 입술을 깨무는 아스펠라의 모습도 좋아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번들번들해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스펠라의 상체를 보던 칼리우스의 얼굴이 이내 참담해졌다.
아스펠라는 더 이상 칼리우스의 입술이 제 몸에 닿지 않는 것을 감지하여 슬쩍 눈을 떠 그를 쳐다봤다.
“칼리우스? 왜…….”
그는 아스펠라의 어깨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송곳니에 살이 짓이겨져 흉터가 남은 아스펠라의 작은 어깨였다.
칼리우스가 손을 들어 그곳을 가만히 매만졌다. 아스펠라가 몸을 일으켰다.
“이런 걸로 죄책감 갖지 말아요.”
아스펠라는 그가 과하게 스스로를 자책하고, 저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그날 이후부터 칼리우스는 아스펠라와 진득한 스킨십을 피해오곤 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감당 못할 거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아스펠라.”
아스펠라는 그가 이렇게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런 죄책감 느끼라고 그 옆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야 그가 자신에게 죄책감을 덜지, 혹은 아스펠라가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끝까지 사랑하고 함께할 것이라는 걸 알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칼리우스. 어떻게 해야 당신이 덜 불안해할까.
“그러니 그렇게 미안한 얼굴을 보여주기보다는 날 더 기쁘게 만들어줘요.”
칼리우스가 잘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말한 아스펠라가 그의 팔을 끌어다가 자신의 허리를 두르게 했다.
칼리우스는 잠시 몸을 움찔대다가 이내 강한 힘으로 그녀를 껴안았다.
아스펠라는 칼리우스의 허벅지 위에 올라탄 모양새로 그를 껴안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한번 진득히 입술과 혀가 붙었다 떼어지고, 마치 구렁이 두 마리가 교미를 하듯 다리와 다리 사이, 팔과 팔 사이가 얽혀들었다.
천천히 침대 위에 아스펠라를 눕히고, 그 위에 배꼽을 맞추려는 순간이었다.
아스펠라의 도톰한 입술 사이로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찍!
“……찍?”
칼리우스가 눈을 번쩍 뜨자 그 앞에는 아스펠라의 봉긋한 가슴 대신, 회색 생쥐가 있었다.
어찌나 잘 먹고 다닌 건지 배가 오동통하게 튀어나온 생쥐.
“생쥐야!”
아스펠라가 얼른 생쥐를 손바닥에 올려둔 채 몸을 일으켰다. 로브 자락을 걸친 아스펠라는 이내 진지한 얼굴로 생쥐의 이야기를 들었다.
찍찍찍, 찍찍찍!
“응.”
찍찍!
“응.”
찍찍찍, 찍찍찍찍!
“알겠어. 수고했어.”
이내 생쥐는 뿌듯한 듯 기다란 코를 킁킁대더니 아스펠라가 건넨 치즈 조각을 받아들었다. 그러더니 떠나기 전 칼리우스를 지그시 쳐다보는 것 아닌가.
찍 찍찍 찍찍찍찍. 찍찍 찍 찍찍.
비장하게 찍찍 대던 생쥐는 이내 빠르게 바닥을 기어가더니 밖으로 사라졌다.
“생쥐들에게 국왕의 막사나 보좌관의 막사를 염탐하라고 시켰어요. 국왕의 몸에 이상한 상처가 있어서 의사가 계속 상주하고 있대요. 온몸이 검은 반점으로 뒤덮혔다는데…… 독이 퍼지고 있나 봐요.”
온몸에 독이 퍼지고 있는데도 사냥제를 감행한다니. 그 아둔함에 칼리우스가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칼리우스는 어째 생쥐가 나가기 전 찍찍대던 것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던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아스펠라에게 물었다.
“근데 나가기 전 나한테 뭐라 말하는 것 같던데요.”
아스펠라는 잠시 그의 눈치를 살피다 말했다.
“자기가 잘 지켜본다고 하더라고요.”
정확히는 ‘너 내가 지켜본다. 허튼 짓 마라.’였지만.
***
첫날엔 귀족들만의 잔치가 열리고 둘째 날엔 각 가문의 기사들이 나와 경연을 펼쳤다.
고대 스포츠 중 하나였던 마상 창 시합부터 시작하여 검술 대련, 그리고 사냥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검투 경기까지.
투기장을 조성하여 계급과 신분 할 것 없이 가면을 쓴 검투사들이 힘을 겨루는 것이었는데 최종 승자는 가면을 벗고 국왕이 하사하는 금괴를 받을 수 있다.
원래는 고대 노예들이나 범죄자들을 풀어놓고 즐기던 꽤 야만적인 장르였는데, 세대 교체가 끝난 튀니아의 젊은 귀족들은 무료한 일상에 자극적인 것을 원했다.
파베스는 그들을 위해 이 검투 경기를 열기로 했다.
이걸 보기 위해 귀족이 아닌 평민들 중에서 상인이나 자금을 모은 이들이 입장권을 사 들어 올 정도였는데, 왕이 즉위한 이후 처음 열리는 사냥제인 만큼 호화스러운 원형 경기장의 장식과 규모에 다들 신이 난 듯했다.
그들이 검투를 시작할 때면 귀족들은 누가 이길지 서로 판돈을 걸고 내기를 했다.
몇몇 자신감에 찬 귀족들은 자신이 후원하고 있는 기사가 어떤 가면을 쓴 자인지 밝히기도 했다.
개인 전투나 체력장을 통해 예선을 통과한 이들이 본선으로 출전하고 그곳에서 팀을 꾸려 토너먼트 방식으로 결승전까지 이어진다.
시합이 시작되고 각 팀이 출전할 때마다 맨몸으로 싸우거나, 화살 내기를 통해 점수 차를 벌리거나, 혹은 목검 검술 등의 각 종목이 매번 바뀌었다.
결승전에 나가는 이들에게는 신분과 상관없이 능력만으로 국왕의 호위 기사로 임명 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였다.
국왕의 기사가 되지 못해도 귀족 가문으로 스카우트 되거나, 혹은 이미 귀족 가문의 호위 기사인 자들은 높은 가문의 영애들과 결혼하여 작위를 받을 수도 있는 꽤나 파격적인 보상이 주어졌다.
물론 높은 보상을 받는 만큼 다방면에서 뛰어난 기량을 요구했다.
일카이 역시 이번 검투 경기에 출전했고, 여러 팀들과 겨뤄 이기며 꽤 선전하여 본선에서 결승전으로 올라갈 기회를 거머쥐었다.
열여섯 팀이 여덟 팀으로, 여덟 팀이 네 팀으로…….
결승전에 오르기까지 참으로 지독하게 긴 싸움이었다.
아스펠라는 귀족석인 칼리우스의 옆에 앉아 일카이의 시합을 지켜보았다.
본선 마지막에서는 맨몸 검투였기에 일카이의 몸에 부상 하나 없이 깨끗할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땅바닥에 굴러 흙투성이가 되고, 허벅다리나 팔뚝에는 칼에 베인 얕은 상처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상대편에서 강하게 휘두른 두꺼운 검을 방패로 막을 때는, 팔뚝이 징 울리는 듯한 울림이 전해졌다.
그러나 묘하게 칼과 칼끼리 거세게 튕겨내고, 서로의 몸을 방패로 찍어내리는 이 야만적인 싸움이 그에게는 꽤나 적성에나 맞는 듯 했다.
처음 출전하는 이 치고는 기세가 등등했고, 칼과 방패를 사용하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카이는 상대를 깔아뭉개며 결승전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관중석에서 호응을 받던 그는 기뻐하는 것도 잠시, 이내 속으로 욕지거리를 읊었다.
‘대진운 한번 최악이군.’
결승전에 나가는 것을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승전 상대는 본선에서 상대팀을 반쯤 묵사발 내 놓은 타조 팀 아니던가.
듣자하니, 이 시합의 승리자로 가장 유력한 이가 속해 있는 팀이었다.
본선이 끝나고 한 시간 정도 결승전에 오른 두 팀은 휴식 시간을 가졌다.
막사에 앉아 다친 부위를 대충 천으로 닦아내며 뻐근한 어깨를 휙휙 돌리던 일카이는 막사 천 너머 요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했다.
“프스! ……프스!”
입에서 내는 소리인 건가? 뭔 곤충의 소리 같기도 하고, 이리 오라는 신호 같기도 하고. 일카이가 슬그머니 막사 끝으로 몸을 옮겨 헛기침을 했다.
“어흠.”
“……일카이?”
“뭐야, 아스펠라?”
일카이라는 걸 확인한 아스펠라가 얼른 막사 천 사이로 슬쩍 들어오더니, 이내 얼른 일카이의 손에 뭔가를 쥐어줬다.
“이거. 꼭 바르고 해. 천으로 대충 닦지 말고! 그게 뭐야, 얼굴이.”
“이거 주려고 온 거야?”
손에 들린 것은 작은 통에 담긴 연고 두 개였다. 일카이가 피식 웃으며 묻자 아스펠라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다, 이내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 방법까지 친절하게 알려줬더랬다.
“왼쪽 연고는 상처 난 데 바르고, 오른쪽 연고는 근육통이 있는 곳에 바르는 거야. 헷갈리면 안 돼.”
잘못해서 근육통에 쓰는 연고를 상처에 바르면 지옥을 맛보게 될 거라며 경고까지 잊지 않았다.
일카이는 그 연고들을 공깃돌 굴리듯 손안에 굴리면서, 기분 좋은 표정으로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왜 그렇게 보고만 있어, 빨리 바르라니깐?”
“헤헤. 응.”
실없이 웃던 일카이는 오른쪽 연고 뚜껑을 열어 손가락으로 푹, 뜨더니 그대로 상처에 치덕치덕 발랐다.
아스펠라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악!”
“내가 오른쪽 거는 근육통 연고라 했잖아, 바보야!”
아스펠라는 얼른 물수건으로 연고를 닦아낸 뒤 결국 저가 직접 연고를 발라주기 시작했다.
일카이는 지옥을 맛봤음에도 불구하고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그저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그런데 아스펠라. 뭐 연고까지 준비하고 그래. 이런 건 기합으로 이기면 돼.”
“칼리우스가 전해주라고 해서. 지금쯤 아주 묵사발이 되었을 거라 하더라고.”
헤실헤실 웃던 얼굴이, 이내 와그작 구겨졌다.
“아 거 참 나를 뭘로 보고 그런데, 그 양반은?!”
칼리우스의 걱정은 일카이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이제 곧 시합이 재개되니 선수들은 준비하시오!”
막사 안으로 들어온 병사가 시합 준비를 알렸다.
아스펠라는 마지막까지 얻어터지지 말고, 꼭 이기라는 듯 일카이의 손을 꼭 잡아주곤 그의 투박한 손등에 입을 맞췄다.
원래 튀니아에서는 승리를 기원할 때 이런 행동을 한다.
지극히 일반적인 행동이었지만, 물론 일카이에게는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다.
“일카이. 몸 조심히 하고. 응? 너무 얻어터지는 것 같다 싶으면 그냥 기권해.”
“기권은 무슨! 내가 다 이겨.”
승리의 여신의 키스를 받았는데, 못 이길 게 뭐가 있나!
일카이의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변했다.
이내 다시 시합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경기장 반대쪽 양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전차를 이용한 단체전이었는지, 두 팀이 전차를 타고 원형 경기장 안으로 들어왔다.
“아. 이제 와서 말하지만. 저자는 우리 가문의 제1 호위 기사단장일세.”
귀족석 맨앞에 앉은 공작이 자랑스레 말했다. 그는 자신이 후원하는 타조 팀이 승리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다른 이들은 그럼 나머지 다른 팀은 누구의 후원을 받는 자인지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칼리우스는 일부러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곧 어린 시종이 와서 판돈을 걸으라며 각 팀의 가면을 본 딴 철통을 내밀었다.
귀족들은 아무래도 다른 쪽의 후원인이 스스로를 밝히지 않는 걸 보아 힘이 없는 이거나 출신이 분명하지 않은 이라 결론 내린 채 후작의 기사가 속한 팀에 돈을 걸기 시작했다.
저 고양이 가면도 이전부터 꽤 선전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공작가의 호위 기사단장을 이기진 못할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로 구성된 어중이떠중이들보단 공작가의 후원을 받는 팀이 더 신뢰가 갈 테니까.
아이가 재잘거리며 돈 통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귀족들이 돈을 집어넣을 때마다 타조 팀에게만 집중적으로 숫자판을 움직이고 귀족들의 이름을 체크했다.
고양이 팀에는 거의 판돈이 모이지 않았다.
아스펠라가 조용히 칼리우스한테 속삭였다.
“일카이가 저 고양이 가면 맞죠?”
칼리우스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아이가 가까이 다가오자 조용히 고양이 가면 쪽에 돈을 집어넣었다.
아이는 조금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칼리우스를 쳐다보다 얼른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러더니 혹여나 대공 각하께서 뭔가를 착각하신 것이 아닐까 하여 나지막하게 말했다.
“각하, 공작가의 호위 기사단장은 타조 팀입니다.”
“알고 있다.”
그렇게 말한 칼리우스가 조용히 검지를 들어 입에 올리자 어린 시종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우스가 고양이 팀에게 돈을 걸었다는 표시를 했다.
그러더니 자신 역시 고양이 가면에 얼마 되지 않는 돈을 걸었다.
공작가보다는 대공가의 안목을 믿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대공과 눈이 마주친 시종이 화들짝 놀라자, 칼리우스가 픽 작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원형 경기장에 시합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호른 소리가 길게 울렸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각자 판돈을 건 이를 응원하는 듯 관중석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일카이는 고양이 가면을 쓴 채로 제 앞의 타조 가면을 쓴 사내들을 쳐다봤다.
뒤쪽에서는 같은 고양이 가면을 쓴 일카이의 사냥꾼 동지들이 긴장한 듯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타조 팀이 타고 있는 전차는 그들의 전차보다 훨씬 더 공격적으로 생겼다.
‘살다 살다 검투사로 출전하게 될 줄이야.’
일카이 역시 긴장되는 듯 투구와 가면을 괜히 한번씩 고쳐 썼더랬다.
그는 맨 처음 검투사로 출전하라는 칼리우스의 말에 반대했다.
‘난 사냥꾼이지 검투사가 아닙니다. 그건 제 동료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냥 거대한 곰을 상대한다 생각하고 싸우면 돼.’
칼리우스는 어려울 것 없다며 속편하게 말했다.
마상 창 시합이나, 기술과 예를 갖추어야 하는 검술 대련과는 달리 검투 경기는 검을 들고 전차에 탈 뿐 육탄전이나 다름없는 시합이었다.
여기선 무기를 잡는 자가 지녀야 할 규칙이고 매너고 없다.
기왕이면 정식 소개 전에 귀족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주는 것이 좋을 거라는 칼리우스의 말에는 동의하는 바였으나 이런 방식이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어차피 광대가 될 거 기왕이면 최고의 광대가 되라는 거야 뭐야.”
일카이는 관중석을 쳐다봤다.
귀족들은 조용히 부채질을 하며 천막의 그림자 아래 앉아 있어 얼굴을 구분하기 어려울 법도 했지만 그는 바로 아스펠라를 찾을 수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한 번에 찾는 스스로가 기가 막힐 정도로 대단했다.
자조적으로 미소 짓던 일카이는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는 아스펠라에게 가만히 손등을 들어올렸다.
아까 전 승리의 키스를 해준 손등이다. 아스펠라는 그제야 픽 웃음을 흘릴 수 있었지만, 남들 눈에는 그저 주먹 쥔 손을 들어올린 것처럼 보였다.
물론, 곧바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타조 가면을 방어하느라 얼른 손을 내렸지만.
‘어디까지나 유흥의 일종인 경기라 하지 않았나. 경기의 절대 규칙인 그 누구도 살생을 하지 않겠다는 선서를 잊은 건가.’
사냥제 마지막 날의 여흥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에피타이저라기엔, 상대는 너무 진심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목검을 사용했으나 그들은 진검마냥 무자비하게 휘둘러댔다. 상대편의 가슴께를 찌르고, 목 부근을 내리치고.
전차끼리 부딪혀 말들이 흥분하거나 혹은 그 반동으로 인해 팀에서 낙오자가 생길 때마다 관중들은 환호했다.
아스펠라는 왜 일카이가 이 시합에 참가했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는 듯 그저 두 전차가 거세게 부딪히며 마찰음을 낼 때마다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칼리우스는 아직까지도 일카이에 대한 것을 아스펠라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가 파베스의 이복동생이라든가, 로잘린드 가문의 새로운 가주가 될 거라든가, 사냥제가 끝나면 왕궁으로 들어갈 거라든가. 적어도 사냥제가 끝나고 얘기할 생각이었다.
아스펠라라면 지금 칼리우스가 생각하는 계획이 너무 위험한 행동이고, 일카이를 사지에 모는 것이라며 극구 반대할 것이 뻔했으니까.
사냥제가 끝날 때쯤이면 이미 계획의 일부가 진행되었을 시기고, 무를 수도 없다.
아스펠라는 화려하고 거대한 전차를 가진 타조 팀의 전차에 상대적으로 자그마한 고양이 팀 전차가 부딪힐 때마다 저도 모르게 어깨가 몇 번이고 움츠러들었다.
“저 전차는 왜 저렇게 큰 거야…….”
하지만 빠르게 전차를 몰며 검투사들이 직접적으로 부딪힐 때마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황소 두 마리가 서로의 뿔을 부딪히며 힘 겨루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원초적이며 어찌보면 야만적이기까지 한 싸움은 아스펠라의 고개를 절로 돌리게 했다.
그럴 때면 칼리우스가 조용히 손을 잡아줬는데, 다른 관중석에 앉은 귀족들은 칼리우스와 아스펠라를 힐긋거리며 검투사들의 경기까지 같이 보느라 이리저리 눈이 바빴다.
각 대장들은 가슴팍에 나무판을 달고 있었다. 그걸 먼저 깨부수는 팀이 결승전에서 이기는 것이다.
팀원들은 서로의 대장을 지키기 위해 안달이었고, 각 대장들은 서로의 가슴팍을 노리느라 정신없었다.
서로를 스쳐지나가듯 맞닥뜨릴 때마다 전차에서 동료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갔다.
공작가의 호위 기사단장은, 의외로 쉽게 끝나지 않는 상황에 흥미로워 하는 눈치였다.
행동이나 체구, 그리고 전술 사용하는 방법으로 보아 정식 검술 수련이나 대련 방법을 배운 이는 아닌 것 같다.
오로지 힘 하나로 밀어 붙이는 고양이 가면의 정체가 궁금한 듯, 이내 그가 일카이의 얼굴을 향해 무기를 들이밀었다.
“꺄악!”
아스펠라는 얼른 자신의 눈을 가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관중석에서는 아슬아슬하게 피한 일카이를 향해 하나 둘 응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봐! 내가 너한테 돈을 걸었으니까 이겨야 한다고, 고양이!”
“버텨라! 버티라구! 잘한다!”
유연하게 허리를 뒤로 숙여 공격을 피한 일카이가 얼른 고삐를 잡아 돌리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상대 전차와 상당히 멀리 떨어진 일카이는 잠시 관중석의 칼리우스를 쳐다봤다.
칼리우스는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어째 자신에게 욕을 퍼붓는 듯한 일카이가 그려지는 듯 픽 비소를 보냈다.
어쩔 건가. 기왕 광대가 될 거, 최고의 광대가 되어야지.
그러나 서로를 조소 띠고 바라보는 일카이와 칼리우스와는 달리.
유독 안절부절 못하는 이가 있었다.
아스펠라였다.
상대 검투사들이 일카이에게 달려들 때마다 아스펠라의 엉덩이가 들썩이며, 당장이라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 소리치고 싶은 듯 입술을 벙끗 거렸다.
“이건 완전히 불평등한 시합이에요.”
아스펠라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 봐도 무방한 것이, 일카이와 상대팀의 전차부터가 엄청난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일카이의 팀이 타고 있는 전차는 주최 측에서 평등하게 내어주는 보통의, 사실 별 볼일 없는 고물 전차나 다름없었지만.
상대팀의 전차는 누가 봐도 대놓고 이기기 위해 가져온 전차였다.
저런 전차는 구하기도 어려울 텐데. 아니, 이날을 위해 제작이라도 한 건가?
“칼리우스. 전차도 마음대로 가져올 수 있는 거였나요?”
“보통은 주최 측에서 준비한 걸 사용하는 게 원칙이죠.”
아스펠라는 슬쩍 아까 전 타조 가면을 자랑스레 얘기하던 공작을 쳐다봤다.
제 양손을 팔짱 낀 채 여유롭고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관전하고 있었다.
“전차도 팀원 중 하나고 무기 중 하나 아닌가? 허허허. 여유가 되면 해주는 것이지 규칙 위반은 아니오.”
규칙 중에 각 팀원들은 무기를 정비하라는 부분이 있었고, 그 무기 중 전차도 포함되는 것이니 자신 역시 후원자의 입장으로서 든든한 무기로 정비해줬을 뿐이라며 공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이 후원하는 이가 대회에서 이기면 체면이 올라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뭐 이렇게까지 경쟁할 일이었던가. 그냥 놀자고 열린 연회 아닌가?
아스펠라는 괜히 공작을 몰래 한번 흘겨보다 사람들의 함성소리에 놀라 얼른 경기장을 쳐다봤다.
고양이 가면을 쓴 이 한 명이 전차에서 떨어져 나갔다.
다행히 어디가 부러지거나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으레 그랬듯 충격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 해 들것에 실려 나갔다.
아스펠라는 그게 일카이가 아니라는 것에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냥꾼 동료들에게 미안함이 들었다.
전차에 혼자 남은 일카이를 보며 초조한 듯 손을 움찔움찔 대다 이내 조용히 칼리우스의 소매를 잡았다.
아스펠라는 이런 식의 경기는 난생 처음 보는 데다가 이런 걸 즐기는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지성이 있는 고등 생물이라며 짐승들과 저들을 선 그을 땐 언제고. 그 어떤 짐승도 단순히 유흥을 위해 상대방을 공격하는 걸 즐기지 않는다.
“일카이가 걱정됩니까?”
“당연한 말씀을요.”
“여기서 지면 별 볼일 없는 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서 나가떨어지면, 권력을 쥘 기회도 날아가는 걸 일카이 본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칼리우스는 무심한 얼굴로 전차에 홀로 남아 상대 타조 팀을 버텨내는 일카이를 가만히 쳐다봤다.
일카이가 아스펠라를 절대 혼자 두지 않을 거라는 것과는 별개로 일카이의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가늠은 해야 했다.
또한 자신과 가문의 이름을 걸고 몰락한 로잘린드 가문을 다시 세워 새 가주로 후원하게 될 것인데, 이 정도 위기 해결 능력은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칼리우스는 지금 일카이의 기량이 어느 정도 되는 것인지 시험해보는 것이었다. 일카이 역시 이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고양이 팀의 전차는 타조 팀의 전차보다 훨씬 왜소한데다가 조악했다.
보통은 경기장에서 주는 것을 타고 오기 마련인데 저건 누가 봐도 귀족 나리께서 주문 제작한 특제 전차 같았다.
일카이는 일부러 제 동료들에게 전차에서 나가떨어지라 말했다.
‘대장, 혼자서 뭐하려고?’
‘그냥 빨리 떨어져.’
‘아니 그럼 대장 보호는 누가하라고!’
‘아 나한테 다 계획이 있어!’
그렇게 말한 일카이는 슬쩍 슬쩍 제 동료들을 전차 밖으로 밀어내면서도 혹여나 빠른 속도 때문에 그들이 다치진 않았을까 뒤까지 살폈다.
그러다 곧장 제 옆구리를 쑤시려는 기다란 나무창을 막느라 얼른 정면을 쳐다봤다.
“이거, 혼자 남아서 어쩌나.”
가면 너머 상대팀의 대장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후원자가 있는 팀이요? 예선이나 본선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막상 겨뤄보니 아예 근본 없는 이는 아닌 것 같군.”
목검끼리 맞대어 얼굴이 가까워지자 상대가 놓치지 않고 물었다. 일카이는 대답 대신 힘을 줘 상대방의 목검을 튕겨 냈다.
전차가 다시 멀어졌다. 일카이는 말을 몸과 동시에 세 명을 상대해야 했다.
기다란 창이 날아오자 일카이는 얼른 오른팔에 끼워둔 방패를 들어올려 가슴팍을 가렸다.
목검이라 해도, 건장한 사내들이 이리저리 흔드는 그 위력은 무시할게 못 된다.
나무 방패에 가해진 충격이 찌르르 그의 팔뚝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러나 방패를 들어 올린 그 찰나의 순간에 일카이는 얼른 다른 한 손으로 반격을 가했다.
타조 팀의 대장은 일카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일카이 팀의 팀원들은 마치 대장의 명령을 듣고, 기회를 봐 전차에서 뛰어내리는 것 같았다.
일카이가 신호를 주면, 그들 하나하나 일부러 목창에 맞고 자빠졌다.
관중석에서 본다면 마치 타조 팀이 선전하는 것 같이 보였겠지만,
오랜 시간 기사로서 살아왔던 타조 팀 대장의 눈에는 꼭 일카이가 뭔가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 자꾸 제 팀원들을 일부러 떨어뜨리지?’
상대팀의 팀원들을 떨어뜨릴 때마다 득점하고, 대장이 가진 나무토막을 부수면 100점을 얻는 시합 아니던가.
일카이의 행동은 스스로 상대팀에게 점수를 주는 행동과도 같았다.
후원자가 없는 이라면, 후에 자신을 받아달라 부탁할 요령으로 일부러 이러는 것인가?
‘뭐가 되었든 질질 끌지 말고 얼른 시합을 끝내야겠군.’
관중들의 재미를 위한 시간 끌기는 이미 충분했다.
타조 팀의 대장은 그대로 반대편 전차를 홀로 몰고 오는 일카이의 가슴팍을 노렸다.
타조 팀의 다른 동료들이 일카이의 얼굴 쪽으로 공격을 가하여 그가 이를 막기 위해 방패를 드는 순간, 허점을 노려 가슴팍의 나무판자를 노릴 생각이었다.
어차피 일카의 팀에는 그를 보조할 다른 팀원들도 없었으니,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방법으로 시합에서 이길 생각이었다.
상대팀의 대장은 시합에서 이기게 된다면 손쉽게 승리를 넘긴 저 치에게 뭐라도 대접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랬다.
일카이가 가까이 다가오자 타조 팀의 팀원들이 일카이의 얼굴을 공격하고, 대장이 그 허점을 노리려는 순간이었다.
일카이는 자신의 몸을 틀어 등을 보인 뒤 그대로 유연하게 팔을 뻗어 목창을 전차의 바퀴 사이로 집어 던졌다.
그 순간, 그가 탄 전차가 덜컹대더니 이내 뒤집어졌다.
거대한 전차가 뒤집어지자 그 안에 타고 있던 이들은 작은 콩이라도 된 것마냥 여기저기 튕겨져 나갔다.
타조 팀의 우두머리는 고삐를 잡아 쥔 터였기에 멀리 날아가진 않았으나, 전차가 나가떨어지면서 발 디딜 곳이 사라져 말에 매달린 꼴이 되어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나동그라진 전차를 살펴보니, 바퀴 안에 기다란 목창이 꽂혀 있었다.
전차를 공격하지 말란 규칙은 없었으니, 일카이는 그들이 타고 있는 전차를 공격해 모두 나가떨어지게 한 것이었다.
편법인 듯 편법 아닌 일카이의 행동에 일반석에서 흥분한 환호의 소리가 들렸다.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이들은 “그래 그거야! 전차를 공격하진 말란 법은 없었으니까!” 하며 일카이에게 “빨리 타조 팀 우두머리를 죽여!” 소리를 질러댔다.
일카이가 말고삐를 잡아당기자 전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반원을 그렸다.
채찍질에 말이 발을 더 빠르게 구르기 시작하며, 가면이 반쯤 벗겨진 상대팀의 우두머리에게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는 타조 가면이 부서져 얼굴에 겨우 매달려 있었고 말고삐에 매달린 채 경기장 이리저리를 끌려 다니다 결국 끈을 놓치고 말았다.
땅바닥에 데굴데굴 굴렀지만 얼른 몸을 일으켜 다시 제 쪽으로 돌아오는 말 위에 올라타려던 순간이었다.
퍼억!
소리와 함께 일카이의 전차가 그 옆을 지나갔고, 타조팀의 우두머리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이내 털썩 주저앉았다.
얼마가지 않아 가슴께에서 나무토막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잠시 조용했던 관중들이 다시 한번 시끄러운 환호를 보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스펠라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전차를 세운 일카이가 가면을 쓴 채로 칼리우스와 눈을 마주쳤다.
칼리우스는 그의 연출력이 재밌었는지 픽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소질이 있는 듯하다.
검투사로서의 소질도 그렇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소질.
벌써부터 세리모니를 하듯 목검을 들고 대중들을 향해 들어 보이는 저 능글맞음을 보면 아마 귀족들에게도 잘 스며들 듯하다.
“저건 반칙이지!”
공작이 분을 토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퀴에 창을 집어넣다니. 비열한 짓 아니오!”
“공작님 말씀대로 전차도 팀원 중 하나고 무기 중 하나 아닌가요? 경기의 규칙은 살생하지 않는다 뿐이었고 저이는 그저 팀원 중 하나이며 무기 중 하나를 무력화 시킨 것뿐이니 규칙 위반은 아니랍니다.”
아스펠라가 생글생글 웃으며 그가 했던 말 그대로 돌려 말하자 공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다른 귀족들 역시 맞는 말이긴 하다며 공작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몇몇은 기고만장하던 공작의 전차가 박살난 것이 재미난 듯 저들끼리 키득키득 웃기도 했다.
***
파베스는 권태로운 얼굴로 경기를 지켜봤다.
버루카가 다가와 검은 숲 안에 마수를 묶어두었다며, 내일 사냥이 시작되는 시점에 그것을 풀 준비가 완료되었다 말했다.
그때쯤 결승전 시합이 끝이 났고, 사람들은 고양이 가면을 향해 환호했다.
“공작의 팀이 타조 가면이라 들었는데, 전혀 다른 이가 승자가 되었군요.”
버루카는 공작이 배 좀 아파하겠다며 슬쩍 농담을 던졌지만, 왕은 그런 농담에 웃어줄 여유가 없었다.
“전하. 혹 몸이 더 안 좋아지신 것입니까.”
“그냥 지루해서 그런다.”
얼마 가지 않아 승리자가 국왕의 객석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파베스를 향해 허리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관중들이 가면을 벗으라며 입을 모아 외치자, 그 기대에 부응하려는 것처럼 그가 천천히 가면을 들어올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파베스는 별 관심이 없었다.
고양이 가면을 벗은 일카이가 그쪽을 향해 고개를 들기 전까지는.
“저, 저 얼굴은……!”
일카이의 얼굴을 확인한 버루카가 잔뜩 당황한 얼굴로 말을 버벅댔다.
자신의 눈을 의심이라도 하듯 안경을 고쳐 쓰며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크게 뜨길 반복했다.
“허.”
파베스는 짧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자신의 착각도 지레짐작도 아니었다. 멀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면을 벗은 사냥꾼의 얼굴을 보는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저자는 달리아와 선왕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였다.
시합의 승리자에게는 금괴와, 기사 작위가 주어진다. 파베스는 태연한 얼굴로 왕좌에서 내려와 일카이에게 기사 자격을 내렸다.
이름을 말하라는 병사의 말에 일카이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파베스를 쳐다봤다.
그의 눈에서는 경멸과 분노가 보였다. 내 누이를 죽인 놈. 내 어머니를 죽이려한 놈. 그런 눈빛으로 그가 이름을 말했다.
“일카이 로잘린드입니다.”
기사 패에 이름을 적던 서기가 재차 물었다. 가문의 이름을 들은 귀족들은 충격을 금치 못한 듯 저들끼리 쑥덕댔고, 일카이는 가만히 파베스를 쳐다봤다.
“로잘린드라면, 사라진 로잘린드 가문? 국왕 전하께서 버린 그 로잘린드 가문? 패망한 로잘린드 가문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국왕 전하와는 무슨 관계인가.
젊은 사냥꾼의 예상치 못한 출생에 대해 다들 궁금한 듯 했다.
“오크몬드 사냥 조합의 사냥꾼이며, 후원자는 에르윈 대공 전하십니다.”
***
하벨 남작은 기필코 이번이 귀족으로서 재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다.
여기서 그저 흥에 취해 거액의 금액을 판돈으로 턱턱 올려대는 귀족들의 돈을 따거나, 혹은 자신이 겨우 꾸린 사냥팀이 검투 경기의 승자가 되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거나.
남작은 자신을 몰락한 하벨이라 부르는 이들에게 아직 자신의 가문이 건재한 양 허세를 부렸다.
남작 부인 역시 이번이 자신이 살롱에 다시 초대받을 기회라 생각한 듯 어울리지 않게 온갖 보석과 레이스, 리본 등으로 치장하였다.
남작 역시 나름 유행한다는 옷들은 죄다 사들여 한껏 멋을 냈지만, 오히려 나이에 맞지 않아 우스워 보일 뿐이었다.
우스워 보이든 말든, 그들은 귀족들에게 눈도장을 찍긴 해야 했다.
그들이 살롱에 불러주지도, 연회에 불러주지도 않으니 빚을 내서라도 참가비를 내고 팀을 꾸려 사냥제에 참가하는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는 저택의 영지 일부를 팔아서 겨우겨우 귀족석의 끄트머리, 거의 일반석이나 다름없는 곳에 앉아야했다.
하지만 하벨 남작이 나름의 묘수라고 생각했던 것은 실패하고 말았다.
나름 큰돈을 주고 사들인 이들은 본선에서 떨어지고 말았고, 판돈이랍시고 건 돈은 죄 날려먹었다.
더군다나 마지막 날 사냥제에 참가할 사냥꾼들은 본선에서 패하자 그대로 내뺐다.
남은 것이라고는 귀족 체면의 마지막 발악이랍시고 분수에도 맞지 않은 호화스러운 차림새의 남작과 남작 부인뿐이었다.
하벨은 이제 진짜 망했구나, 망연자실하여 마른세수를 했다.
그때쯤 결승전에서 이긴 승자를 알리는 뿔 소리가 들렸고, 남작은 부러움 반, 질투 반의 눈초리로 승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어?!”
이리저리 박살난 고양이 가면 사이로 보이는 얼굴에서 순간 메시아의 빛이 일었다.
역시 아주 죽으란 법은 없는 것인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닌 건가? 신이 내게 기회를 다시 한번 주시는 건가?
저이는 자신의 저택에 왔던 그 사냥꾼이었다.
‘오, 오 뭐시기였더라? 됐고 그런 건 중요치 않다!’
승자가 일카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하벨 남작은 기뻐하며 누구보다도 빠르게 원형 경기장 가운데에 있는 그에게로 달려갔다.
“축하하네! 내 자네가 이길 줄 알았어! 나를 알아보겠는가? 왜, 나랑 같이 사냥도 하지 않았나!”
그는 일부러 일카이의 손을 잡고 등을 토닥이는 등 일부러 친분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눈이 퉁퉁 부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던 일카이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를 알아보는 듯했다.
“아. 하벨 남작님.”
“그래! 나일세! 나야! 우리 친한 사이였잖나. 막, 내 영지에서 사냥도 하고. 아! 내 저택에서 개도 한 마리 데려갔다고 하던데.”
“아…… 예…….”
일카이는 고까운 표정을 지으며 하벨 남작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내려 했다.
‘그러니까 이 남자가, 아스펠라를 죽이라 명했다는 거지?’
작은 아스펠라를 지하실에 가두고, 먹을 것도 주지 않고 한겨울에 담요 한 장으로 버티라 했던.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더러운 것을 만진 양 남작의 손을 쳐내고 말았다.
맨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 눈에 보이는 광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맨 처음엔 자식들을 잃고 부부가 미쳐버렸다 하여 안타깝게 생각했는데, 이젠 안타깝긴커녕 저들이 아직도 이 땅에 발 붙이고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살아간다는 것이 역겨울 정도였다.
하지만 남작은 일카이가 이렇게 대놓고 싫은 티를 내도 끝까지 질척거렸다.
“검투 경기 승자라니, 참 대단하군! 후원자는 누구인가? 아직 특별한 후원자가 없다면 내가-”
“계십니다. 에르윈 대공이요.”
“아, 참. 그렇겠지. 하하. 그렇지! 아직도 대공 성에서 지내는 건가?”
염치 불구하고 치근대던 남작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일카이의 눈빛에서 경멸을 발견했다.
눈치는 보이고, 하지만 이자를 놓칠 순 없고.
“왜,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겐가?”
“남작님. 제가 나중에 인사드리러 갈 테니 지금은 관중석으로 돌아가세요.”
일카이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말했다.
“아! 그렇군! 그래. 이제 메달 수여식을 해야 할 텐데 내가 너무 붙잡고 있었군! 하하하! 그래. 꼭 인사하러 오게. 기다리고 있겠네! 알았지? 꼭일세!”
남작의 말에도 일카이는 뒤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벨 남작은 멀어지는 일카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내 그는 국왕의 앞에 서서 기사 작위를 받고 있었다. 이런 일이. 내 구원자가 저놈이었구나!
‘보잘것없는 사냥꾼 출신이 시합에서 이겨 국왕에게 직접 기사 작위를 받는다니.’
이내 남작은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관중석 쪽으로 몸을 돌렸다. 조금의 희망을 가진 듯 기쁜 마음으로 제 아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아! 여보!”
그러자 남작 부인이 얼른 그의 팔을 잡아당겨 앉혔다.
“부인, 이번 검투 경기 승자가 저번에 내가 말한 그-”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여보!”
“내가 지금 뭘 봤는지 알아요?”
“뭘 봤길래?”
남작 부인은 잠시 저 멀리 떨어진 에르윈 대공의 자리를 슬쩍 쳐다보다 얼른 자세를 낮춰 제 남편에게 속삭였다.
“그 애라고요.”
“응?”
“그 애요! 그 애!”
남작은 그 애라고만 말하면 어찌 알아듣냐며 조금 짜증을 내었다.
그러나 부인은 그 애가 그 애 말고 달리 누가 있냐며 되려 더 성을 내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누군가가 듣기라도 할까 얼른 소리 낮춰 그에게 속삭였다.
“그 애요! 우리가 죽인 자물쇠!”
“……자물쇠?”
그러자 남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남작 부인은 아랑곳 않고 저 멀리 에르윈 대공의 좌석과 차양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여자를 가리켰다.
“긴가민가했는데, 맞아요. 어렸을 때 얼굴이 얼추 보인다고요. 그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니까요! 미엘라의 얼굴이 보인다고요.”
남작 부인은 마치 유령이라도 본 양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원래도 집 밖에 잘 나가지 않아 핏기 없던 얼굴이 이제는 아예 푸른빛을 띨 정도였다.
하벨 남작은 맨 처음 제 아내가 드디어 손쓸 방도조차 없을 정도로 미쳐버렸다 생각했다.
믿지 않았다. 하지만 남작 부인은 제 남편의 턱주가리를 잡고선 각도를 이리저리 틀며, 차양 안쪽의 여인 얼굴을 보여주려 했다.
“아, 진짜 아프다니까!”
“잘 봐 봐요. 보여요? 응? 보이냐고!”
“아니 정말 이 여편네가 미쳤나, 이미 죽은 애가 어찌…… 헉.”
에르윈 대공 옆에 앉아 있는 여인의 얼굴을 본 것인지, 하벨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때 비서가 죽이긴 했지만 정확히 확인하진 못했다고 했잖아요! 게다가, 그날에 대해 정확한 기억도 못하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도 안 하고요!”
“저, 저 애가 왜 저기에…….”
“대공이 옆에 끼고 다니는 여자애래요. 어쩜 좋아요, 만약 우릴 알아보기라도 하는 날에 복수랍시고 죽이려 들면 어쩌죠?”
“그, 그럴 리가.”
하벨 남작은 잠시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훔쳐낸 뒤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옆에서는 남작 부인이 이를 어떡하냐, 지옥에서 올라온 것이 분명하다 등의 미친 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저년이 살아있다는 건….’
하벨가가 몰락한 결정적인 이유가 왕가에서 외면 받았기 때문 아닌가.
그는 어린 왕자의 말만을 믿고 아이를 죽이려 했고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파베스는 약삭빠르게 이 일에 대해 모른 척하며 그를 빠르게 내쳤더랬다.
‘잠깐, 국왕도 아직 이를 알고 있을까? 자물쇠를 찾아다녔잖아.’
하벨 남작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그때 즈음 귀족들이 술렁댔다. 그는 얼른 그 흐름에 타기 위해 왜 그러는데, 왜 그러는데? 하며 그들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 사냥꾼의 이름이 일카이 로잘린드래요.”
“로잘린드? ……로잘린드?!”
로잘린드라면 피올라 왕비와 선왕의 정부였던 달리아 자매의 가문 아니던가. 하벨 남작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저 멀리 있는 국왕과 일카이를 쳐다봤다.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
시합의 우승자는 신분에 상관없이 만찬에 참석하여 국왕의 바로 옆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일카이는 평소의 평범한 사냥꾼의 옷차림과는 달리 진짜 귀족들이 입을만한 의복을 입고 참석했다.
연회장에 가기 전 아스펠라와 마주친 일카이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시커멓게 살이 타고 머리는 짧게 삐죽삐죽 대충 잘라낸 그가 옷만 번쩍번쩍하니 묘한 괴리감이 들었다.
“나 어때? 이상해?”
본인도 자각한 듯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아스펠라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거짓말 하지 마. 내가 봐도 우스꽝스러운데.”
“……로잘린드 가문을 이어받을 거라는 거 왜 나한테 말 안했어?”
아스펠라의 질문에 일카이는 괜히 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게…….”
“칼리우스랑 둘이 내가 반대할 줄 알고 그렇게 몰래 합의를 본 거야? 너 내가 시합 때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아스펠라가 조금 화난 듯 언성을 높였다.
시합이 끝나고 일카이가 자신의 가문을 밝힌 순간.
다른 귀족들이 그의 이름을 듣고, 또한 후원자의 이름을 듣는 순간, 아스펠라 역시 그들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
‘일카이 로잘린드?’
아스펠라는 다섯 가문에 로잘린드 가문이 속한다는 것만 알았지 그 외의 이야기는 칼리우스에게서 들은 적이 없었다.
시합이 끝나고 막사로 돌아오면서 아스펠라는 그제야 들을 수 있었다.
일카이의 어머니와 선왕의 관계는 물론, 앞으로 그가 뭘 할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왜 이제야 말하냐며 아스펠라가 묻자 칼리우스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스펠라를 지키기 위해서요.’
“날 지키기 위해서라니, 이유가 맞지 않잖아.”
“그게…….”
“국왕이 네 존재에 대해 알면 널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야. 사냥제가 끝나면 저택 나간다고 했던 이유가 설마 이것 때문일 줄이야. 입궁한다니. 귀족들 세계로 들어갈 거라니.”
파베스가 얼마나 미친놈인지 정말 모르는 것이냐며 아스펠라가 그를 나무랐다.
“아스펠라. 걱정해주는 건 고마워. 그런데 나도 한번 기회를 얻고 싶었어.”
“무슨 기회?”
“나도 내가 지키고 싶은 거 단순히 힘으로 밀어붙이는 거 말고, 다른 방식으로 지키고 싶어서.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나한텐 권력이었어. 신분이었고.”
“…….”
“대공이 억지로 밀어붙인 것도 아니었고, 내가 억지로 하겠다고 고집 피운 것도 아니었고. 우리 둘 다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거고. 그리고 한번 직접 대면해보고 싶었어. 내 누이 죽인 그 새끼.”
이번 기회 아니면 일개 사냥꾼이 어떻게 국왕과 눈을 마주치겠어?
일카이의 말에 아스펠라는 더 이상 그를 나무랄 수 없었다.
가만히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일카이가 그제야 방긋 웃었다.
이런 반응에서 그치는 걸 보니 아마 에르윈 대공이 다른 것에 대해선 말하지 않은 것 같다.
“연회 갈 거지?”
“아니. 나는 안 갈래.”
“왜?”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가 있거든. 그리고 요새 좀 피곤해서 한숨 자려고.”
아스펠라는 그렇게 말하며, 하양이랑 막사에서 쉬고 있을 테니 잘 다녀오라며 그를 배웅했다.
***
거대한 막사 여러 개를 이어붙인 아래, 그곳에서 만찬이 열렸다.
구석에는 작은 악단이 승자를 위한 세리모니의 음율을 연주하고 있었고, 그곳에 모인 귀족들은 기다란 테이블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오늘 낮의 일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오늘 경기에 대한 이야기부터 멸문한 로잘린드 가문에 대한 이야기까지.
온통 일카이에 대한 것이었다.
서로 침 튀기며 말을 해대던 귀족들은, 막사 안으로 칼리우스와 일카이가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 조용해졌다.
하벨 남작은 테이블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말을 붙이기에는 매우 먼 거리였다.
국왕의 바로 옆자리에 칼리우스가 가 앉고, 그 맞은편에 대회의 우승자인 일카이가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루카가 먼저 막사 안에 들어왔고, 그에 귀족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국왕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막사의 천이 젖히고, 호위 기사들과 함께 국왕이 행차했다.
귀족들은 얼른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면서도, 국왕과 일카이의 눈치를 살폈다.
국왕의 반응이 어떨지, 모두들 궁금해 하고 있었다.
파베스는 의외로 태연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간단하고 형식적인 축사를 올렸다.
파베스가 주석으로 만들어진 잔을 잡자, 시종들이 와 얼른 와인을 부었다. 그는 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이번 대회의 우승자인 일카이 로잘린드 경을 위해 축배를 듭시다.”
거기에는 일카이가 자신의 이복동생인 것에 대한 내용이라든가, 그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든가 하는 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귀족들은 태연한 국왕의 모습이 조금 아쉬운 듯 저들끼리 살짝 수근대면서도, 국왕을 따라 잔을 들어올렸다.
본격적인 만찬이 시작되었다.
파베스는 관행처럼 귀족들에게 이것저것 안부를 물어봤다.
형식적인 대답이 오고가면서도, 정작 귀족들이 궁금한 것들은 국왕과 일카이의 관계였다.
‘이복동생인 걸까?’
‘그렇다면 그 달리아 로잘린드의 아들인가?’
‘하지만 그 여자는 오래전에 죽었을 텐데.’
‘잘 보면 선왕과 닮은 구석도 보여.’
그들은 저들끼리 눈빛을 보내며 무언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칼리우스가 귀족들의 눈빛을 읽은 듯 말했다.
“국왕 전하. 이번 우승자인 로잘린드 경에 대해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만.”
그러자 파베스가 천천히 칼리우스와 일카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사라와 똑 닮은 얼굴을 하고 있는 일카이를 향해 말했다.
“아, 그래. 로잘린드 경. 내 그대에 대해 참 궁금한 것이 많아.”
“찬찬히 물어보셔도 됩니다. 저는 에르윈 대공께서 전하의 사람이 되라고 보낸 것이니까요.”
“나의 사람이 되라고 보냈다?”
“예. 전하.”
일카이의 말에, 파베스는 희번뜩 뜬 눈으로 칼리우스와 일카이를, 더 나아가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한 귀족들을 쳐다보더니 이내 광기가 서린 호탕한 웃음소리를 냈다.
“하하하하!”
그러나 그는 금세 정색하며 귀족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는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여성 편력에 대해서는 궁금치 않아. 내 어머니와 정부 달리아의 일은 두 사람 다 죽음을 맞이함과 동시에 같이 사라졌고. 몇몇은 내게 기대하는 장면이 따로 있는 듯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내 권력이 그리 뿌리가 얕은 것이라 생각하지 않네. 그렇지, 칼리우스?”
파베스의 물음에 칼리우스는 태연하게 와인을 마셨다.
“산신 토벌 이후로, 원로 귀족들 대부분이 국왕 전하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산신이 사라진다 한들 원로 귀족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국왕 전하의 오랜 친우이자 전하의 충실한 신하로서, 조금이나마 전하의 힘이 되어줄 만한 이들을 찾아나선 것뿐입니다.”
그렇게 말한 뒤 그는 잔의 둥근 부분을 손가락으로 툭, 치며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도 필요하지 않으셨습니까. 항상 원하셨죠. 불사와도 같은 강력한 군대를. 그래서 사라 경을 산신 토벌 작전의 용병에 채용하도록 허락하신 것 아닙니까? 그녀에게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 생각되어서요.”
귀족들이 놀란 듯 수근거렸다.
사라라면 오래 전에 죽은 달리아와 선왕 사이에서 난 공주 아니던가. 그녀가 살아 있었다고?
국왕도, 대공도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인가?
칼리우스의 말에 따르면, 파베스는 마치 오래전부터 사라 공주가 살아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물론, 공주를 자신의 신하로 임명하려 했다는 것처럼 들렸다.
“사라 공주가 살아 있습니까?”
귀족들의 질문에 칼리우스가 대답했다.
“유감스럽게도 사라 공주는 죽었소. 로잘린드 경, 자네가 그녀의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소? 자네 친누이니까.”
그러자 곳곳에서 작은 탄식과도 같은 소리가 터져나왔다.
“봐, 역시 이복동생 맞다니까!”
“그럼 로잘린드 경은, 국법에 따라 왕자가 되는 건가? 국왕 전하께서는 아직 후사를 보지 못하셨지 않나.”
“한나 공주님은 이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제 누이는.”
일카이가 입을 열자 귀족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그를 쳐다봤다.
“제 누이는 살해당했습니다. 누군가에게 말이죠.”
잔을 쥔 파베스의 손에 알게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평온한 얼굴로 파베스가 일카이에게 물었다.
“사라 공주를 죽인 이가 누군지 알고 있는가? 내 오랫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는데. 찾아내었을 땐 이미 운명을 달리했었지.”
그러자 일카이가 천천히 파베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파베스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며 올라갔다. 일카이는 그런 국왕을 쳐다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제 누이는, 사람이 아닌 것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짐승만도 못한 더러운 놈에게요. 하지만 누이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누이 덕분에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니까요.”
애매모호한 대답에, 귀족들은 그저 사라가 산신 토벌 작전을 수행하다 산신들에게 물려 죽었다는 말인가 생각하는 듯했다.
파베스는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는 일카이를 잠시 바라보다, 이내 비릿한 미소를 들며 잔을 들어올렸다.
“사라 공주를 위해.”
***
만찬이 끝나고 막사로 돌아온 파베스는 잠시 방 안에 서 있다가 갑자기 책상과 장식장 위의 온갖 것들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버루카는 그런 국왕을 차마 말리지도 못해 그 앞을 지키는 병사들의 입단속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칼리우스는 뻔뻔한 얼굴로 귀족들의 연회 자리에서 그 남자를 소개시켰다.
로잘린드 가문의 후계자이며 달리아의 얼굴과 사라의 얼굴, 그리고 선왕의 얼굴까지도 언뜻 보이는 그 어린 사냥꾼을.
대놓고 귀족들 앞에서 국왕에 반하는 세력을 만들겠다는 선포나 다름없었다.
자리가 끝나갈 무렵, 넉살 좋게 다가온 일카이가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비소를 띠며 형님이라 말하는 그의 모습에 기가 찬 듯 파베스가 하! 헛웃음을 지었다. 크게 한방 먹고 말았다.
“그년에게 동생이 있었다는 걸 왜 아무도 몰랐을까! 아주 눈 뜬 장님으로 살아왔군!”
파베스가 소리치자 버루카는 가만히 눈을 꾹 감았다.
“전하.”
“날 아주 우습게 취급하고 있을 게 분명해!”
달리아의 죽음에 대해 아직까지도 의문을 품고 있는 이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로잘린드 가문은 몰락하기 직전까지 달리아를 찾아 헤맸을 정도였으니까.
그 때문에 히스테리가 극에 달한 친모의 모습도 얼마나 오랫동안 봐왔는가.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달리아와 선왕의 아들놈이 나타날게 뭔가.
달리아가 도망쳤을 때 태중에 아이가 있었다는 건가?
“칼리우스 이 여우같은 새끼. 검은 마수도 분명 그놈과 관련 있는 게 분명해. 그래. 어쩌면 그 사냥꾼 놈이 지 아비랑 똑같이 검은 마수일지도 모르지.”
그것들을 둘 다 죽여야 해. 죽여야 한다고.
조용히 중얼거리는 파베스의 눈에 광기가 서렸다.
“전하. 일단 사냥제가 시작되면 그것이 풀려날 것 아닙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달리아의 아들이라 한들, 로잘린드의 후계자라 한들 전하께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버루카의 말에 파베스는 진정하려는 듯 산발이 된 머리칼을 양손으로 쓸어 넘기며 숨을 골랐다. 그러더니 문득 떠오른 듯 중얼거렸다.
“사라를 죽이라 한 것은 교주였는데.”
그녀가 자물쇠라고, 그 여자를 죽여야 한다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 교주가 그 여자에게 남동생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
‘공주를 죽여야 합니다. 달리아의 딸 말입니다. 루이나의 봉인을 푸는 자는 루이나의 피가 흐르는 자여야만 합니다. 공주는 자물쇠임과 동시에 루이나의 봉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이니 죽이셔야 후에 탈이 없으실 겁니다. 전하께서 모조리 힘을 차지하고 싶으시다면 말이죠.’
그렇다면 저 어린 사냥꾼에게도 루이나의 봉인을 열고 닫을 힘이 있다는 것 아닌가?
“교주가 날 속인 것인가. 응? 버루카. 그놈은 지금 어디에 있나. 교주를 불러와. 내 당장 지금 물어야겠어.”
“전하. 교주는 사냥제에 오지 않았습니다. 지하에서 산신들로 불사체를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유일한 자가 아니잖아!”
파베스가 제 분을 이기지 못해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병사들이 웬 늙은 남자 한 명을 끌고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이자가 막사 근처에서 수상쩍게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파베스 앞에 무릎 꿇은 이가 공포에 질려 덜덜 떨며 그를 올려다봤다. 하벨 남작이었다.
“저, 전하!”
“자네가 왜 이곳에 와 있는가.”
“그것이!”
“뭐, 안 그래도 물어볼 것이 있는 참이었으니.”
왕의 손짓에 병사들은 포박하고 있던 남작을 놓았다. 하벨 남작은 붙잡힌 손목이 아픈 듯 그들을 노려보면서 손목을 만지작댔다.
파베스는 가만히 하벨 남작을 내려다봤다. 가문이 몰락하는 와중에 어떻게든 아등바등 저의 눈에 들고자 빚까지 져가며 사냥제에 참가했다지.
아까 전 일카이에게 달려가 이것저것 아는 척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까 전에 보니 남작이 내 이복 아우와 친해 보이던데.”
“아, 예! 꽤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입니다.”
하벨은 일단 눈에 들기 위해 되는대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식사도 함께 한 사이고, 저택에 불러 사냥도 몇 번 했지요.”
그 말에 파베스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저택에 불러 사냥도 했다고?”
“예.”
“그럼 자네 비서도 그를 본 적 있던가?”
“예.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비서를 통해 알게 된 사냥꾼이었으니까요.”
하벨의 말에 파베스가 가만히 제 턱을 매만졌다.
“그자가 사냥꾼을 소개시켜줬다고.”
“예.”
골똘히 생각에 잠긴 파베스의 표정은 웃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알았으니 이제 그만 나가보라며 그가 손짓을 하자, 병사들이 하벨 남작의 어깨 위에 손을 턱 올렸다.
하벨은 아직 국왕의 눈에 제대로 들지 못했음을 느꼈다.
게다가 그가 이 야심한 시각에 국왕의 마사 주변을 배회한 데에는 단순히 사냥꾼에 관련된 것 말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저, 전하! 그리고 그 여자애를 봤습니다! 자물쇠 말입니다!”
“자물쇠?”
“예. 그때 그 미엘라라는 아이 말입니다. 제 딸이요. 블레드 가문의 영애 사이에서 낳은…….”
“그 애는 죽었다 하지 않았느냐?”
“비서 말로는 그랬지만 버젓이 살아 있더라고요, 오늘 저와 제 아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제 엄마를 쏙 빼닮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여자를 어디서 봤는데.”
“에르윈 대공의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세간에 떠도는 대공의 여인이요.”
그렇게 말한 남작은 얼른 국왕의 표정을 살폈다. 화들짝 놀라려나? 아니면 충격에 빠지려나?
그러나 남작의 기대와는 달리 국왕은 영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파베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산신이 아니고, 자물쇠라고? 아니, 둘 다인가?”
“예? 전하?”
잠시 침묵하던 왕은 이내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하벨에게 말했다.
“……그래. 내게 매우 중요한 정보를 가져다주었군. 하벨 남작. 그 공을 매우 치하하여 이번 사냥제 때 자네를 내 사냥팀의 수장으로 앉혀주지.”
“저, 전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만족할만한 결과를 가져와야 할 걸세.”
그렇게 말한 파베스가 하벨 남작의 앞에 작은 단도를 툭 던졌다.
그것이 뭘 뜻하는지는 아무리 하벨 남작이 멍청한 이여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주, 죽이라는 말씀이십니까? 하, 하지만 그년은 에르윈 대공의 보호 아래 있는데요?”
“그러니까 잘 죽여야겠지. 왜, 못하겠어? 그년 때문에 잃은 것들을 생각하면 화도 안 나나보지?”
못하겠으면 말아. 자네 말고 할 이는 많으니까.
파베스의 말에 하벨 남작이 불안한 듯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얼른 단도를 집어 품 안에 넣었다.
“그래. 잘만 하면 내 자네 가문을 구제해줄 테니까.”
“저, 정말이시죠? 그냥 죽이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그래. 죽여. 죽이기만 하면 돼. 그냥 칼로 찌르면 되는 일이다. 저번처럼 실패하지 말고.”
“예, 예!”
하벨 남작은 이내 비장한 표정을 짓곤 몇 번이나 재차 허리 숙여 인사한 뒤 병사들에게 끌려나갔다.
파베스는 그런 그를 쳐다보며 쯧쯔 혀를 찼다.
“자네도 이만 나가 봐. 피곤하니 혼자 있고 싶네.”
보좌관마저 나가고 파베스는 그대로 침상에 드러누웠다.
그러나 쉽게 잠에 들 수 없었다. 계속해서 몸을 뒤척이며 정체모를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일카이의 등장 때문인가, 아니면 또다른 의심 때문인가.
막사 안의 등불은 오랫동안 꺼지지 않았다. 이에 시종이 수면향을 들고 왔다.
“깊은 고민은 몸을 해칠 수 있습니다, 전하. 이제 그만 주무시지요. 안 그래도 요 며칠간 계속 잠을 설치시지 않으셨습니까. 혹 필요하시다면 의사라도 부를까요?”
“아니, 됐다.”
파베스는 이내 침소에 들었다. 그는 가만히 막사 천장을 바라봤다. 수면향의 냄새가 온 방 안에 맴돌았다.
그는 요 며칠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원래도 숙면을 취해왔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렇게 매번 같은 꿈을 꾸지는 않았다.
잠에 들면 매번 그 거대한 신이 나타난다. 그에게 베르델을 믿지 말라 말한다.
이번에도 아마 같은 꿈을 꾸겠지. 파베스는 께름칙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지금 잠드는 것이 두려운 건가. 이 내가 육체조차 없는 신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파베스는 가만히 몸을 세웠다. 그러더니 조금 있다가는 태아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내가 지금 뭘 두려워하는 건가.”
초점 없는 눈으로 중얼거리던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수면향으로 인해 마취된 짐승처럼 천천히 눈을 끔뻑이다 이내 잠이 들었다.
***
사냥제의 날이 밝았다.
총 이틀 동안 이뤄지는 행사는 각각 국왕의 사냥팀, 에르윈 대공의 사냥팀, 공작과 후작의 사냥팀 총 네 팀이 참여했다.
귀족들과 그리고 각 팀의 수장, 구성원들이 일렬종대로 말 위에 탄 채 시작점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칼리우스의 팀은 아스펠라와 일카이, 그리고 그의 사냥팀과 민튼 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민튼 경 아닌가? 어째서 에르윈 대공의 팀에 있는 거지? 보좌관은 국왕의 팀에 있는데 말이야.”
“그러게. 보좌관의 아들이라 당연히 국왕 전하의 팀일 줄 알았더니.”
“대공과 전하는 사촌이며 친우이기도 하니, 어쩌면 두 팀이 손을 잡았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대공께서는 그 로잘린드 가문의 후원자를 자처하지 않으셨나. 국왕 전하께서도 모르셨던 눈치던데.”
다들 에르윈 대공과 국왕, 그리고 로잘린드 가문의 관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국왕의 사람’이라 하면 가장 먼저 보좌관 버루카와 그의 아들 민튼 올리오 경이 나열되는데, 그런 이가 대공의 편에 선다는 것은 둘이 화합을 하겠다는 거거나 반대로 내부 분열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민튼 경이 본가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듣긴 했는데.”
귀족들은 저마다 들은 소문들을 주고받았다.
“어쩌면 저 여인도 그냥 평범한 여인이 아닐지도 몰라요. 봐요. 평범한 사냥꾼인 척하던 일카이 경이 로잘린드의 후계자라잖아요?”
일카이의 외모를 자세히 보면 볼수록 달리아는 물론 선왕의 얼굴도 보였다.
사라 공주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몇몇 원로 귀족들은 그가 선왕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에르윈 대공의 성에 실력 있는 기사가 얼마나 많은데 그 많은 이들을 물리고 사냥꾼을 데려왔을까 했더니,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저 옆의 소문만 무성한 여인 역시 무언가 특별한 피를 가진 이일 것이다.
그러니 대공이 데리고 있는 거겠지.
“안 그래도 사냥제가 끝나고 귀족회의가 열릴 거라는 소문이 있던데. 유디티아 후작이 12원로 귀족들을 모을 생각이라는군요.”
“게다가 왕실 연회가 열리기 전에 대공 연회까지 열리고요. 순서가 참 기묘하죠?”
귀족들은 저 멀리 출발선에 서 있는 이들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칼리우스는 제 오른쪽에 위치한 파베스와 그의 사냥팀을 흘긋 쳐다봤다.
밤새 잠을 설치기라도 한 듯 국왕의 얼굴은 창백했고 낯빛이 좋지 않았다.
그 뒤에는 보좌관 버루카가 제 아들을 쳐다보다 칼리우스와 눈이 마주치고 훽 고개를 돌렸다.
‘민튼이 이쪽에 와 있는 걸 파베스도 알 텐데, 반응이 이상하군. 다른 꿍꿍이라도 있나?’
칼리우스는 이상하게 넋이 나가 있는 듯한 파베스를 가만히 쳐다보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국왕의 사냥팀에는 때에 맞지 않게 긴 망토와 후드를 쓰고 있는 이가 있었다.
저건 또 뭐하는 놈인가 싶어 칼리우스가 그를 지긋이 쳐다봤다.
칼리우스의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망토를 뒤집어쓴 이가 몸을 움츠렸다.
어젯밤 일카이에게 진 팀의 후원자이기도 한 공작이 아스펠라를 힐긋 보며 칼리우스에게 말했다.
에르윈에 적대적인 이는 아니었으나 원체 말을 골라서 하지 않는 이로 유명한 공작이었다.
“에르윈 대공께서는 꽤 개방적이신가 보군요. 보통 이런 사냥제에는 아무리 애첩이라 해도 두고 오는 법인데.”
그러자 후작이 얼른 맞장구쳤다.
“한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신가 봅니다. 아무리 대공 각하셔도, 한창 불타오르실 나이이죠. 허허허! 보기 좋습니다!”
역시 젊은 게 좋다며 그들이 허허 웃으며 수염을 한번씩 쓸어내렸다. 여자는 빠지라는 것을 은근히 티내고 있었다.
그들은 아스펠라가 6살 때부터 활 쥐는 법, 덫을 놓는 방법을 배웠다는 건 절대 모를 것이다.
비르가는 아스펠라에게 종종 말했었다.
‘가끔 네가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널 공격하려는 이들이 있을 거다. 그들을 너무 미워하진 마라. 다만 널 죽이려 들면 너도 똑같이 해줘.’
‘미워하지 말라면서?’
‘미워하지 말라고 했지 죽이지 말라 하진 않았잖니.’
야생의 세계는 생각보다 혹독한 법이다.
인간이 가장 나약한 신체와 힘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스스로 지킬 정도의 사냥 능력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 비르가의 뜻이었다.
해서 아스펠라의 사냥 능력은 사실 남들에게 보이지만 않았을 뿐 사냥꾼들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진 않았다.
거의 평생에 걸쳐 단련된 폐활량과, 매일 절벽 가까이에서 약초를 캐며 얻은 자잘한 근육들, 일반인들보다 예민한 후각까지.
물론, 그래봤자 귀족들 눈에는 그저 어쩌다 운 좋게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은 애첩일 뿐이겠지.
아스펠라는 면전에 대놓고 무례를 말하는 이들 앞에서도 입을 꾹 닫는 수밖에 없었다.
주둥이. 저런 무례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이들은 입이 아닌 주둥이를 가지고 있는 거랬으니, 개의치 않고 제 할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사실 그리 화가 나지도 않았다. 아스펠라는 살면서 여러 종류의 무례를 이미 겪을 대로 겪어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칼리우스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애첩?”
칼리우스가 픽 웃으며 중년의 귀족들을 쳐다봤다. 어찌나 시선이 살벌하던지, 실실 웃던 후작과 괜히 심술을 부려보던 공작이 흠칫 몸을 움찔거릴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원로 귀족 중 하나인 우리를 때리기야 하겠어?’
그런 마음으로 고개를 쳐들며 당당하게 칼리우스와 눈을 마주치려 애쓰는 공작에게, 칼리우스가 세상 잘생긴 미소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첩은 나요.”
“……응?”
“내가 이 여인의 애첩이란 소리요. 예쁨 받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렇지 않았나? 로잘린드 경.”
칼리우스가 들으라는 식으로 일카이를 불렀다.
일카이 역시 그들을 쳐다보며 픽, 피식, 웃음을 흘리며 예, 잘 알지요. 아주 잘 압니다. 대공 각하. 하고 맞장구쳤다.
“그, 그런…….”
귀족들은 그 충격적인 대답에 이상한 소리를 내며 대공과 그 옆의 여인을 번갈아 쳐다봤다.
더 묻고 싶었으나 사냥제가 시작했음을 알리는 뿔 소리와 함께 출발선 앞의 병사가 거대한 국기를 크게 흔들었다.
칼리우스가 던진 폭탄에 후작과 공작은 멍하니 칼리우스와 국왕의 팀이 선두를 치고 나가는 꼴을 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먼저 제정신을 차린 후작이 얼른 말고삐를 잡으며 출발했고, 뒤늦게 공작이 출발했다.
“왜 그런 말을 해요. 괜히.”
아스펠라가 칼리우스 옆으로 말을 몰며 작게 속삭였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 있는 것이 통쾌하긴 했나보다.
“맞는 말인데 왜.”
“무슨…….”
“아스펠라도 딱히 부정은 안 하네요?”
골리듯 말하자 아스펠라가 아이참, 부끄러운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뒤에서 둘을 바라보던 일카이가 조용히 생각했다.
‘얼씨구. 둘만의 세상이야 뭐야.’
***
에르윈 팀의 주 목적은 사냥제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목적은 파베스가 풀어 놓은 정체불명의 것을 막는 것이다.
막아야 하는 것은 칼리우스를 공격했던 검은 마수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부정신이 되어가는 산신들일 수도 있었고, 민튼이 고한 불사체라는 존재들일지도 몰랐다.
거대한 몸집의 명마들이 발을 구를 때마다 모래 먼지들이 일었다.
칼리우스와 아스펠라가 한 팀이 되어 파베스가 풀어놓은 사냥감을 뒤쫓으면, 민튼은 국왕의 사냥팀과 제 아비의 뒤를 따라잡는다.
일카이와 사냥팀들은 사냥을 하는 척하면서 아스펠라가 보낸 전갈에 맞춰 그들을 보조하는 역할이었다.
그렇게 말 위에 탄 이들이 검은 숲이라고도 불리는 튀니아에서 가장 빽빽한 나무 숲 안으로 들어갔다.
국왕과 민튼, 일카이의 사냥팀이 먼저 숲으로 들어간 후 아스펠라와 칼리우스가 그 뒤를 쫓았다.
뒤이어 공작과 후작 팀 역시 숲 안으로 들어왔다.
거대한 몸집을 가진 귀족 가문의 명마들도 숲 안에서는 미물이나 다름없었다.
나무들은 모두 하나같이 몸집이 거대하고 줄기가 길었다. 대낮인데도 빽빽하게 하늘 위로 드리워진 나무들 때문에 햇빛이 보이지 않았다.
검은 숲이라 불리는 이곳은 튀니아에서 위험하다고 악명 높기로는 으뜸이었다.
아스펠라는 숲에 들어간 직후부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들어오지 마!]
[들어오지 마! 얼른 나가! 위험해!]
숲의 나무들이 아스펠라에게 경고했다. 그들은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불온한 기운이 온몸의 살갗 위로 쭈뼛 올라왔다.
아스펠라는 말고삐를 꽉 쥔 채 칼리우스를 쳐다봤다. 그 역시 이상한 기운을 느낀 것인지 조용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스펠라. 우린 저쪽으로 가볼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무조건 연막탄 쏴. 알았지?”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목이 보이자 일카이가 아스펠라 곁으로 말을 몰며 말했다.
일카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스펠라를 쳐다보다 칼리우스와 눈을 마주치곤 이내 말고삐를 잡아 당겨 반대쪽으로 향했다.
아스펠라와 칼리우스는 검은 마수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만일 그 검은 마수가 칼리우스를 공격했을 때와 같은 상태라면, 그가 인간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는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사람을 물어 죽이는 건 물론, 민튼의 말대로라면 어떠한 ‘병’같은 것을 전염시킬 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사체라는 것은 아직 완벽히 연구되지 않은 존재니 그만큼 인간 세상에 큰 두려움으로 다가올 것이다.
숲 안쪽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초입 때부터 느낀 이상한 기운이 점점 짙어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 안에 검은 마수가 있는 걸까? 그래서 그 존재가 이 끔찍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걸까?’
어쩐지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드는 것도 같아 아스펠라는 조용히 숨 들이쉬는 것을 참았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칼리우스를 쳐다본 그녀가 놀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칼리우스, 당신 손……!”
“괜찮아요. 아직은.”
칼리우스는 괜찮다 말했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손이 그렇지 않다는 걸 말해줬다.
튀어나오고 싶은지 칼리우스의 몸이 드문드문 검은 마수의 일부로 변하다 말다를 반복했다.
손등 살갗 아래 벌레들이 움직이는 것마냥 살과 혈관이 우글우글 움직였다.
뿌리 굵은 검은 털들이 튀어나오기도 했으며, 기다란 짐승의 발톱처럼 손톱이 길고 뾰족해지기도 했다.
이를 악물고 버티는 칼리우스의 송곳니가 길어졌다.
그가 인상을 찌푸릴 때면 콧잔등과 미간 사이에 기다란 주름이 져 마치 개가 사납게 짖기 위해 이빨을 드러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숲의 나무들 사이사이로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이 끔찍한 기운들이 칼리우스 안의 검은 마수를 자극하고 있었다.
***
주황색 리본이 묶인 화살이 짐승의 몸을 관통했다. 공작의 호위 기사들은 수풀 안으로 들어가 화살로 잡은 것을 들어올렸다.
멧돼지였다. 주황색 리본은 헤르센 공작의 팀 색깔이기도 했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그래. 괜찮다.”
공작은 자신이 쏜 멧돼지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의 활뿐만 아닌 그의 호위 기사들의 활도 멧돼지의 몸 이곳저곳에 박혀 있었다.
“검은 숲의 짐승들이라 그런가? 하나같이 괴이한 외양을 하고 있군. 눈은 썩은 동태눈깔 같은 데다가, 유독 흉포한 느낌이야.”
방금 전의 멧돼지 역시 유독 공격적인 놈이었다.
보통의 사냥감들은 먼저 도망가기 바쁜데 검은 숲의 짐승들은 마치 공격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상한 눈깔을 하고선 달려들지 않는가.
물론, 화살이나 총을 쏘면 금세 나가떨어졌지만.
공작은 온몸을 휘감는 이상한 기운을 느낀 것인지 슬쩍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떨었다.
“아직 초겨울일 텐데, 벌써 이리 한기가.”
“검은 숲이라 햇빛이 부족해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한기가 도시면 여우털이라도 둘러드릴까요?”
공작은 기사가 건넨 여우털을 목에 휘감고는 다시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잡은 짐승들을 시작점에 두고 온 기사가 돌아왔다.
“어떤가. 다른 팀들은 얼마나 잡았던가?”
“아직까지는 각하께서 선두를 달리십니다. 이상한 점은, 에르윈 대공의 자리에는 사냥감이 아예 없었다는 것입니다.”
“에르윈 대공이?”
공작은 이상한 듯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뭔가 이상한데. 그 건방진 젊은 대공 각하께서 왜 사냥을 안 하실까.”
산신 토벌이다 뭐다 한창 잘난 체하며 돌아다니지 않았던가.
공작이 알고 있는 에르윈 대공이라면 아마 이 검은 숲에 사는 짐승들은 죄 잡아들일 것이 뻔한데.
그러다 문득 그는 칼리우스의 팀에 민튼 경이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혹시, 이 사냥 대회의 진가가 단순히 사냥감을 잡는 것뿐이 아니라면?
국왕 전하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버루카의 아들이 칼리우스의 팀에 있다는 건, 국왕이 칼리우스에게 뭔가 귀띔을 해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더군다나 에르윈 대공의 사냥팀에는 로잘린드의 새로운 후계자까지 있었다.
만약 국왕이 자신의 이복동생을 원로 귀족들의 반대 없이 귀족으로 영입하고 싶었다면?
그래서 친구의 도움을 받아 이 사냥제에서 주목을 받게 할 생각이었다면?
“그래. 이 숲에 뭔가를 숨겨둔 거야!”
멧돼지는 감히 비교도 안 될 뭔가를 숨겨둔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걸 에르윈 대공의 팀이 잡아 귀족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게 만들 생각인 거다!
헤르센 공작은 그렇게 추론했다.
그렇게 밖에 추론되지 않는 상황 아니던가. 그러나 공작은 자신의 추론대로 상황이 흘러가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에르윈 대공을 따라가자.”
공작은 하늘 위에서 연막탄 터지는 소리를 들리자 얼른 고개를 들었다.
푸른색 연막탄은 에르윈 대공의 것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칼리우스는 숲 깊숙한 곳까지 벌써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자신의 기사들과 함께 대공의 자취를 따라가던 도중, 그는 잔뜩 겁에 질린 듯한 모양으로 숲 안쪽에서 도망쳐 나오는 후작과 마주쳤다.
“아니, 폴센 후작?”
“헤, 헤, 헤, 헤르센 공작! 나, 나, 나 좀, 저 좀 살려주십시오!”
그와 함께 있을 사냥팀은 보이지 않고 후작 혼자 말조차 없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공작의 말에 매달렸다.
놀란 말이 울며 앞발을 들어 올리자, 공작이 떨어질 뻔한 것을 그의 기사들이 겨우 부축한 뒤 말을 진정시켰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오!”
“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빨리 도망가야 해요! 거기 얼른! 나 좀 태워주게!”
폴센 후작은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기사에게 손을 뻗었다. 억지로 기사의 말에 같이 올라 탄 후작은 이번엔 빨리 도망가야 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빨리 도망가야 합니다. 얼른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람이 이렇게 넋이 나갔어? 후작, 다른 이들은 다 어쩌고 자네 혼자요?”
“여기 이상합니다, 공작. 빨리 도망가야 합니다. 죽은 것들이 막 살아 움직인다니까요!”
그와 동시에 수풀 안에서 후작의 사냥팀 일원이었던 자가 튀어나왔다.
그대로 말에 돌진하자 공작의 기사가 말에 떨어졌고, 캬아아악, 이상한 소리를 내던 후작의 사냥꾼이 그대로 기사에게 달려들었다.
다른 기사들이 얼른 그를 떼어내려 하자 후작이 말렸다.
“도망가야 합니다, 얼른요! 저, 저거한테 물리면 저렇게 변한다고요!”
기사들은 달려든 이가 물린 이의 목을 마구잡이로 물어뜯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다른 기사 한 명이 얼른 정신을 차리곤 달려든 후작의 사냥꾼의 머리통을 칼로 댕강 잘라 버렸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목을 뜯겨 죽은 줄 알았던 병사가 몸을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수풀 너머로 키아악, 카악, 끄어억, 이상한 소리를 내며 사삭사삭 수풀을 가르며 달려오는 짐승인지 사람인지 모른 것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공작은 후작의 말대로 나머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도망쳤다.
후작은 기사의 허리를 꼭 잡아 덜덜 떨며 자신이 본 것들을 빠짐없이 말했다.
맨 처음엔 그저 악명 높은 숲의 짐승들이라 매우 공격적인 거라고 대충 치부했었다.
하지만 잡은 사냥감들의 눈이 모두 동태눈깔마냥 뿌옇고 뒤집어져 있는 데다가, 그들의 몸 대부분에 이상한 문양들이 그려져 있었다.
“죽은 줄 알았는데 그게 덜 죽었던 건지, 아니면 죽었다 살아난 것인지……. 제 사냥꾼 하나를 물지 뭡니까.”
그 이후부터는 아까 전 봤던 것과 같은 장면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기이한 짐승에게 물린 사냥꾼이 점점 몸을 비틀고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이내 사람을 공격했다.
인육을 탐하는 지옥의 악마처럼 사람의 몸을 물어뜯어대더니, 이내 물려 뜯겨져 죽었던 이들도 하나 둘 몸을 일으키기 시작하더라는 것이었다.
남은 이들과 도망치고, 공격당하길 반복하다 보니 저 혼자뿐이었다던 후작의 말에 헤르센 공작은 믿을 수 없어 했다. 하지만 아까 전의 광경을 떠올리면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 한데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에르윈 대공 쪽으로 가는 중일세. 일단, 국왕 전하와 대공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
숲 안쪽으로 들어갈 때마다 말들이 불안한 듯 몸을 되돌려 돌아가려고 하거나 이따금 어떤 기척에 놀라 혼자 앞발을 들어올리기도 했다.
아스펠라와 칼리우스는 결국 말에서 내린 뒤 걸어서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칼리우스의 몸 일부는 이전보다 더 급격하게 검은 마수로 변해갔다.
마치 위험을 감지한 것마냥, 온몸의 신경 하나하나가 그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아스펠라는 그런 칼리우스가 걱정스러웠다.
검은 숲이라는 이름과 꼭 맞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빼곡한 어둠으로 가득한 곳을 가만히 쳐다보던 아스펠라가 저 멀리 무언가를 느꼈다.
그때, 아스펠라가 천천히 손을 들어 한 지점을 가리켰다.
“저기. 저기에 있는 것 같아요.”
더 깊은 안쪽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뒤쪽에서부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각하! 대공 각하!”
저 멀리서부터 무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민튼과 다른 호위 기사들이었다.
“각하. 검은 마수가 아니었습니다! 파베스가 노리는 것은 각하도, 아스펠라 님도 아니었습니다! 목표는 귀족들입니다! 불사체를 퍼트리려는 셈인 것입니다!”
민튼의 외침에 아스펠라와 칼리우스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서로를 마주봤다.
이내 그들 앞에 도착한 민튼이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화살, 국왕이 모두에게 내린 화살이요. 그 화살에 이상한 진액이 묻어 있습니다. 그 진액이 짐승의 몸으로 들어가, 그 짐승에게 물린 자들이 다들 불사체처럼 되었습니다!”
사냥제에는 규칙이 있었다. 왕이 내려준 화살만을 주로 사용할 것.
사냥을 한 모든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불사체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민튼 경. 불사체를 만들려면 대상에게 인을 새기고, 그 다음에 증기를 쐬는 것 아니었나요?”
“그 화살 자체에 인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의 말에 아스펠라는 얼른 배급받은 화살통을 열어, 화살들을 땅으로 쏟아냈다.
그러자 진녹색의 진액이 묻은 화살들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민튼은 얼른 그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화살촉 끝부분에는 아주 세밀한 모양으로 주술이 담긴 인이 새겨져 있었다.
“아무래도 파베스는, 여러 무기를 개발한 듯싶습니다. 더 이상 인을 새기고, 증기를 쐬지 않아도, 마치 역병처럼 퍼져나가는 무기요.”
그러자 아스펠라 역시 칼리우스의 목에 박혀 있던 그 검은 총알을 떠올렸다.
‘무기라는 건 연구할 때마다 발전해서 참 좋다니까. 더 빨리, 더 많이 죽일 수 있게 되잖아. 너희 신들이 내 머리 위에 있도록 내버려 둘 것 같으냐?’
더 이상 불사체를 만드는 것은 단순히 주술을 이용한 연금술의 일종이 아니었다.
그는 이 주술을 단순히 자신의 군대로 만드는 저주에 그치지 않고, 역병으로 만들어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칼리우스는 자신의 사냥 팀 전원에게 국왕이 하사한 것 외의 여분의 화살을 챙기도록 명령했었다.
하지만 그 화살의 수가 많은 것은 아니었기에, 그들이 해야 할 선택은 단 두 가지.
이 적은 숫자의 화살로 숲 안의 불사체들을 처리하거나, 다 같이 시작점으로 돌아가거나.
사삭, 사사삭.
수풀이 흔들렸다. 안쪽에서 무엇이 튀어나올까 경계하며 그들은 수풀을 주시했다.
몇 번 더 수풀이 흔들리더니, 갑자기 뭔가가 튀어나왔다.
“……일카이!”
짐승의 피를 뒤집어 쓴 일카이와 사냥꾼들, 그리고 넝마짝이 되어버린 듯 넋이 나간 후작과 공작이었다.
공작과 후작은 제 사냥꾼들을 모두 잃은 채, 이미 불사체들에게 몇 번 공격을 받았는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시작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검은 마수도 문제지만, 불사체가 되어버린 짐승들이 관중들을 공격할 겁니다.”
일카이가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주, 죽은 것들이 살아났어. 살아났다고……. 살아났어…….”
공작과 후작은 자신들이 무엇을 본 것인지 믿지 못하겠는 듯, 겁에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숲 안에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바람처럼 퍼졌다.
짐승의 울음소리 혹은 죽어가는 자의 절규와도 같은 그것에 모두들 얼어붙은 것처럼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소리야.”
공작과 후작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그 둘을 제외한 나머지 이들은 그 울음소리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스펠라. 다른 이들과 함께 시작점으로 돌아가세요.”
소리가 나는 숲의 저 안쪽으로 몸을 반쯤 돌린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에게 말했다.
“칼리우스는요?”
“저는 저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아스펠라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천천히 칼리우스 옆으로 다가갔다.
칼리우스의 몸은 왼팔과 얼굴 반쪽이 우글우글,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두 개의 영혼이 겹쳐진 것마냥 한쪽은 인간의 얼굴이, 다른 한쪽은 짐승의 얼굴이 이리저리 튀어나왔다.
“아스펠라. 얼른요.”
그의 말에 아스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머지 일행과 함께 말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이, 이보시오. 에르윈 대공. 몸이, 몸이 왜 그러시오?”
후작은 아까 전보다 더 겁에 질린 얼굴로 칼리우스에게 물었다.
칼리우스는 아직도 살아 있었냐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내 후작은 제 옆의 공작과 함께 다시 아까 전처럼 넋이 나간 채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사냥꾼들에게 휩쓸려 끌려갔다.
말이 묶인 지점으로 돌아간 아스펠라가 뒤를 쳐다봤다.
칼리우스의 모습은 이미 검은 마수가 되어, 숲 안쪽으로 훌쩍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
관중들은 귀족들과 사냥꾼들이 이 넓은 산을 누비며 얼마나 많은 수의 사냥감을 잡아올지, 또 얼마나 커다란 짐승을 가져올지 악단의 연주나 서커스단의 공연을 보며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왕좌에 앉아 있던 파베스는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며 관중들을 살폈다.
수많은 귀족들이 이곳에 와 있다.
원로 귀족들은 물론, 하는 것이라곤 그저 사치뿐인 버러지만도 못한 놈팽이들부터 돈에 눈이 먼 부르주아들까지.
강력한 왕권을 얻기 위해서는 일단 나라에 쓸모없는 이들부터 사라지는 것이 맞다.
파베스는 다시 시선을 돌려 검은 숲을 가만히 쳐다봤다.
숲 안쪽에서 각 팀의 상징 색깔을 담은 백린 연막제가 하늘 위로 올라올 때마다, 관중석의 심판은 어느 팀이 얼마큼 득점했는지 실시간으로 점수를 매기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대부분은 에르윈 대공 가문이 우세하거나, 국왕 전하의 사냥팀이 우세할 것이라 생각했건만 의외로 공작 가문의 선전에 다들 흥미진진한 듯했다.
숲에서 사냥감을 둘러메고 오거나, 달구지에 커다란 짐승을 지고 올 때마다 관중석은 얼마나 큰 것을 잡아왔는지 구경하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벌떡 일어났다.
“헤르센 공작의 사냥감이오-”
이번에도?
사람들은 다른 팀에 비해 수가 턱없이 모자란, 아니 사실은 텅 비어 있는 에르윈 대공의 사냥감을 모아놓은 자리를 쳐다봤다.
‘도대체 대공께서는 저 안에서 뭘 하시길래 사냥감들이 나오질 않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대공께서 사냥을 못 할 리는 없고.’
‘대체 뭔 일이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이윽고 거대한 멧돼지가 달구지에 실려 왔다. 멧돼지의 몸뚱이에는 공작 팀의 푸른색 리본이 묶인 활이 박혀 있었다.
“한데 아까 전부터 상태가 영 이상하지 않아?”
일반석에 앉은 평민 중 한 명이 울타리 바로 앞을 지나가는 달구지 속 짐승을 바라보며 제 옆의 동료에게 물었다.
“왜 하나같이, 눈이 저렇게 썩은 동태 같아?”
“악취도 심한 것이 좀 이상한데?”
아까 전부터 각 팀의 전령들이 들고 오는 사냥감들의 상태가 영 이상했다.
여름도 아닌데 부패가 그새 진행된 것인지 초파리부터 파리가 사냥감에 꼬이기 시작했다.
시종들은 그때마다 얼른 달려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쫓아냈다. 손짓만으로는 역부족이었는지 이내 그들은 깃발이나 천 따위로 짐승 시체 위를 덮어야 했다.
저기 멀리서 디저트를 즐기거나, 햇빛 아래 와인을 음미하거나, 기다리는 것에 지루함을 느껴 크로켓 시합을 하며 친목을 다지던 귀족들 중 일부는 사냥제에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해서 그들은 실려 오는 사냥감들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도, 저 숲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전혀 몰랐다.
어느 목청 좋고 눈썰미 좋은 평민 하나의 외침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저거 움직이는데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별로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사냥감이 죽고 난 후에도 움찔대는 일은 으레 있는 일이었으니까.
병사들이 기다란 죽창을 들어 쌓인 짐승들을 한 번씩 푹푹 찔렀다. 만일 아직 죽지 않았다면, 부상 입고 고통스러울 테니 편히 죽으라는 나름의 인도적인 처사였다.
“국왕 전하의 사냥감이오-”
“헤르센 공작의 사냥감이오-”
“폴센 후작의 사냥감이오-”
이어서 다른 사냥감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병사들은 이만하면 확실히 숨통을 끊었으리라 생각하여 죽창을 빼낸 뒤 다른 사냥감들을 받았다.
사냥감이 들어올수록 사람들의 수근거림은 여전했다.
‘아니, 대체 에르윈 대공의 팀은 왜 사냥감이 나오질 않아?’
그런 의문도 잠시.
“어……. 아직도 살아 있는데……?”
일반석에 앉아 비교적 사냥감들을 더 가까이 볼 수 있었던 이들은 하나 둘, 천 아래 그것들이 들썩이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어? 어어?”
움찔대던 것들이 점점 거세게 몸을 펄떡이기 시작했다. 소동물부터 사슴, 멧돼지까지.
당황한 병사들이 다시 한번 죽창으로 찌르고, 소총으로 쏘기도 했지만 그것들은 움찔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크게 몸을 퍼득대더니 이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어?”
꾸웨에에에에엑! 꾸웨에에에엑!
입에서는 걸쭉한 피를 흘리며, 눈은 썩은 동태마냥 희게 까뒤집은 짐승들이 몸을 일으켰다.
“아아악!”
거대한 멧돼지가 온몸에 들러붙은 파리와 함께 관중석으로 달려가던 찰나였다.
혼비백산한 관중들이 도망가려 저들끼리 밟고 밟히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이들이 자신들에게로 돌진해오는 멧돼지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으며 비명을 질렀을 때.
기다란 화살 하나가 그것의 머리통을 뚫었다.
그제야 멧돼지가 옆으로 기우뚱 몸을 기울이더니 이내 꿰에에엑, 다시 한번 울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식겁한 이들은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활 쏜 이를 쳐다봤다.
멀리서부터 활시위를 당긴 채로 또 다른 사냥감의 머리통을 날리던 이가 고삐를 잡아당기며 말을 멈췄다.
아스펠라였다.
‘불사체라고 한들, 그것들의 약점은 머리라고 합니다. 저도 왜 거기가 약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때 교주와 파베스가 하는 말을 들었을 땐 확실히 그곳만이 유일한 약점이라고 하더군요.’
불사체를 죽이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은 바로 머리, 정확히는 뇌가 존재하는 부근을 공격하는 것.
사냥제가 열리기 전 민튼은 자신이 알고 있는 불사체의 모든 정보들을 아스펠라와 칼리우스, 그리고 일카이에게 털어놨다.
‘만약 불사체를 풀어 튀니아에 혼란을 야기하려는 것이 왕과 교주의 목적이라면, 그 첫 번째는 사냥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사냥제는 더 이상 튀니아의 축제가 아니게 되었다.
이곳은 지옥도의 한 장면을 재현해놓은 현장이었다.
아스펠라는 활을 쥔 상태로 멀리 왕좌에 앉아 있는 파베스를 쳐다봤다.
그런 아스펠라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파베스가 씩 미소를 지었다.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미 늦었어.”
그와 동시에 검은 숲 안에서부터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머지않아 거대한 그림자가 사람들 위로 드리워졌다.
“검은 마수야!”
“꺄아아악!”
검은 털의 거대한 발이 훌쩍 허공을 가르고 땅에 착지하자, 땅에 지진이 난 듯 울림이 퍼졌다.
귀족이고 상인이고 할 것 없이 모두들 관중석에서 일어나 반대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검은 마수는 그대로 관중석을 밟고, 그 안의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것의 존재를 처음 보는 귀족들은 창백하게 질렸고, 몇몇은 그대로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하기도 했다.
몇몇은 거대한 짐승의 입 안에 상체가 반쯤 먹혀 들어갔고, 누군가는 발톱 아래 몸이 관통당해 죽음을 맞이했다.
아스펠라는 저 검은 마수가 칼리우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칼리우스는 어딨지? 아직 숲 속에 있는 건가?!’
설마, 아까 숲 쪽에서 들려온 비명 소리가 칼리우스의 소리였나.
아스펠라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짐승들의 머리를 향해 활을 쏘면서도, 계속해서 그들 너머의 숲속을 주시했다.
불사체에게 공격받은 인간은 온몸을 펄떡이며 발작을 일으키더니, 이내 그들처럼 희뿌연 동태눈을 하고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일어난 인간들은 짐승의 소리를 내며 도망가는 다른 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스펠라는 온통 비명과 울음소리가 난무하는 한가운데에서 지친 듯 숨을 골랐다.
불사체가 된 이들의 머리통을 날리고 있던 일카이가 아스펠라에게 소리쳤다.
“정신 똑바로 차려! 아스펠라!”
일카이의 목소리에 아스펠라는 다시 숨을 크게 들이쉬며 시위를 당겼다.
그때 미처 보지 못했던 불사체 하나가 아스펠라가 탄 말로 돌진했다. 말이 그대로 넘어지며, 아스펠라 역시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아윽!”
말에서 떨어지며 어깨를 다친 아스펠라는 얼른 다른 쪽 팔을 뻗어 화살을 집으려 했으나, 불사체가 다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이를 딱딱 부딪히며 고개를 들이밀던 불사체는 일카이가 던진 도끼에 맞아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일카이가 달려와 얼른 아스펠라를 일으켰다.
“괜찮아? 다친 데는?”
“……괜찮아.”
그러나 곧 괜찮지 않아질 것이 분명했다.
일카이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 아스펠라는 짐승 혹은 인간이었던 불사체들 수십 마리가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목격했다.
얼른 메고 있던 화살통에 손을 뻗었지만, 잡히는 것은 없었다.
“이런 씨발.”
일카이는 작게 욕을 읊조리면서도, 얼른 아스펠라를 제 품에 넣었다.
불사체들이 자신들에게 달려오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눈을 질끈 감는 것뿐.
그때 거대한 그림자가 아스펠라와 일카이 위로 드리워졌다.
달려오던 불사체들의 머리통을 순식간에 물어뜯고 흔들어 던지자, 그들은 모두 잠잠해졌다. 그건 그들에게 지성이 존재해서가 아닌, 마치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 앞에서 본능적으로 몸이 굳어져 주춤대는 것과도 같았다.
“칼리우스……!”
일카이의 품에서 고개를 든 아스펠라가 안도한 듯 그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아스펠라는 다시 숲을 바라보더니, 이내 칼리우스에게 소리쳤다.
“숲으로 다시 유인해요! 숲 안쪽으로!”
그가 제 말을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어쩌면 자신 역시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아스펠라는 몇 번이고 숲으로 선왕을 유인하라 소리쳤다.
일카이는 한손으로 아스펠라의 손을 잡고, 반대쪽으로 손 휘파람을 불렀다.
말이 달려오자 얼른 함께 말 위로 올라탔다.
“에르윈 대공이 왜 갑자기 변한 거야?!”
일카이가 당황하여 아스펠라에게 물었다. 이미 한 번 짐승으로 변했으니, 당분간은 변하지 않는 것 아니었던가.
아스펠라는 검은 마수가 되어 불사체들을 밟고, 목을 물어 흔드는 칼리우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칼리우스의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해. 언제 마수로 완전히 변할지 몰라. 아무래도, 부정한 기운이 옆에 있을수록 동화되는 것 같아.”
“위험한 거 아니야? 너조차 못 알아보고 공격하면!”
“둘 다 숲으로 유인해야 해. 파베스가 원하는 건 지금 나타난 검은 마수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거야. 불사체들을 이용해서!”
아스펠라는 비어버린 왕좌를 노려봤다. 그는 소동이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대피한 놈이었다.
불사체들을 이곳으로 불러내어 사람들을 죽이고, 혼란을 야기한 뒤, 그 모든 배후에 검은 마수가 존재하는 것마냥.
사람들에게 분노와 두려움을 품게 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스펠라는 민튼 경이 건넨 새로운 화살과 활을 받은 뒤, 관중석을 짓밟으며 포효하는 선왕에게 시위를 당겼다.
기별도 안 갈 고통이라 눈치 채지 못하자, 일카이가 세워져 있던 죽창 몇 개를 들어 그대로 그에게 던졌다.
그러자 거대한 붉은 눈을 빛내는 검은 마수 형상의 선왕이 일카이와 아스펠라 쪽으로 몸을 돌렸다.
구석에서 다른 불사체들을 처리하던 민튼이 소리쳤다.
“불사체들은 불에 반응합니다! 불로 유인하십시오!”
아스펠라와 일카이는 얼른 말의 고삐를 잡아 바닥에서 사그라지던 횃불을 들어올렸다.
바람이 불자, 사그라들던 횃불의 불씨가 조금씩 되살아났다.
횃불을 든 채로 선왕 앞을 이리저리 돌아다니자 그는 민튼의 말대로 불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마치 불쪽으로 뛰어들려는 것처럼 그들에게 달려오려 해서 칼리우스가 그의 목덜미를 물며 앞발로 머리를 내리쳤다.
선왕이 몸을 일으키며 다시 칼리우스에게 달려들었다.
두 마리의 검은 마수. 거대한 몸집들이 부딪히며 싸울 때마다, 막사며 무대며 모두 박살났다.
아스펠라와 일카이는 그들의 주변을 맴돌고, 이따금 선왕의 주의를 끌며 숲 속으로 유인했다.
칼리우스 역시 선왕이 숲 안쪽으로 들어가도록 그의 몸을 집어 던지기도, 후려치기도 했다.
수십 미터가 넘는 나무들이 힘없이 스러지기 시작했다.
아스펠라와 일카이 역시 그들을 따라 숲 안으로 들어갔다.
“아스펠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일카이가 묻자, 아스펠라가 짧게 대답했다.
“선왕을 생포해야만 해. 죽이지 말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저 미쳐 날뛰는 거대한 불사체를 생포한다니.
“할 수 있어.”
아스펠라가 일카이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도대체 뭘 어떤 식으로 할 수 있다는 건가, 의문이 들었을 때 일카이는 비로소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거대한 나무들이 우드득 우드득 가지와 줄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는 거대한 그물처럼 가지들이 서로 연결되었다.
땅이 갈라지듯 울리며, 그 아래에서 오랫동안 자랐을 뿌리들이 튀어나왔다.
그것들은 이내 날뛰는 두 마리의 마수들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꼬리와 발목을 감싸더니, 목덜미까지 옥죄기 시작했다.
나무들은 거대한 주둥이를 쩌억 벌려, 어떻게든 칼리우스를 물기 위해 발악하는 선왕의 주둥이를 동여매기 시작했다. 두꺼운 나무줄기들과 뿌리들이 그 몸을 빠르게 감쌌다.
끼에에에엑!
선왕이 고통스러운 듯 목이 졸리는 소리를 냈다.
나무들은 선왕의 몸에 달라붙어 점점 강하게 옥죄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왕의 온몸은 나뭇가지와 뿌리로 휩싸여 포박되고 말았다.
그러나 거대한 마수의 몸을 한 그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땅에 부딪힐 때마다, 기다란 나무들은 뿌리 채 뽑혀나가고 한없이 바스라졌다.
칼리우스는 선왕이 다시 몸을 세우기 전에 몇 번이고 주둥이로 그를 밀치며 숲의 끄트머리인 절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절벽으로 떨어지기 직전, 선왕은 겨우 포박을 풀고 칼리우스를 후려쳤다.
그와 동시에 나무들의 뿌리가 뽑히며 약해진 지반이 허물어졌고, 두 마리의 짐승은 동시에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칼리우스!”
아스펠라가 얼른 그곳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두 짐승은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다.
말에서 내린 아스펠라가 절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 아래 거대한 나무들의 줄기가 모여 거대한 주둥이마냥 입을 쩍 벌리더니, 이내 두 짐승을 집어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