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 10장. 목 안에 박힌(2) (11/16)

목차

10장. 목 안에 박힌(2)

11장. 다가오는 어둠

12장. 행해지는 미래

13장. 백야행

에필로그. 그 이후를 기다린다는 것

외전.

10장. 목 안에 박힌(2)

아스펠라는 자신이 성역에 들어왔다는 자각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느껴지는 무거운 적막과, 자신을 둘러싸 앞을 비춰주던 반딧불이들이 보이지 않는 것에 자신이 드디어 성역에 들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산을 오를 때만 해도 말리던 나무와 풀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니, 아예 아무런 존재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건지, 존재하지 않는 건지 그녀를 둘러싼 검은 안개 때문에 알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아스펠라는 발과 양손을 뻗어 천천히 앞을 더듬으며 나아갔다.

오감을 이용해 사물을 인지하는 것이 짐승만 못한 인간이었던지라, 아스펠라 역시 겁이 나는 것은 당연했다.

죽음의 늪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발바닥은 눅눅한 진흙 때문에 아래로 쑥쑥 들어갔고, 공기에 닿는 살갗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성역이라 하니 조금 더 성스럽고 아름다울 줄 알았는데.

‘루이나의 봉인이 있는 곳이라 이런 건가?’

한참 더듬더듬 짚어가며 앞을 나아가던 중, 손에 뭔가가 잡혔다. 잡혔다기 보다는, 거대한 벽이었다.

발꿈치를 들어 위를 더듬대며 올려다봤다. 짙게 깔린 검은 연기들 사이로 거대한 벽이 나타났다.

아스펠라는 눈을 가늘게 떠 위를 계속 쳐다봤다. 그러자 위에서 아주, 아주 미세한 빛이 보였다.

“저게 뭐지?”

약초에서 나는 빛인가? 아니면, 루이나의 봉인인가?

뭔지 확실치는 않았지만, 이상하게 저 위로 올라가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펠라는 자신의 직감을 믿고 천천히 벽을 타기 위해 손을 뻗었다.

보이지 않는 곳을 오르기란 쉽지 않았다. 위에 뭐가 있을지 알 수 없었으며 자신이 손을 뻗는 곳 역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스펠라는 맨손으로 벽을 더듬어가며 튀어나온 돌부리를 잡다가도, 발을 헛디뎌 주르륵 아래로 떨어졌다.

아래로 떨어질 때마다 입에서는 비명이 절로 나왔지만, 아스펠라는 다시 이를 깨물고 암벽을 등반했다. 천천히 몇 번이고 반복했을까. 손이 돌부리에 여기저기 까진 후에야 그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평평한 땅이 손에 잡히자 아스펠라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그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산봉우리 정상에 올랐다.

“…….”

정상에 올랐다는 기쁨도 잠시, 아스펠라는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지 못하겠는 듯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방금까지 온통 저를 감싸던 검은 연기들은 온데간데없이 푸른 들판과 하늘이 보였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절벽 위의 공간을 제외한 다른 곳은 온통 검은 연기로 뿌옇게 가득 차 있었다.

아스펠라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이것이 환영인지, 믿지 못하는 듯 천천히 발로 바닥을 톡톡 두들기며 걸어갔다.

절벽 위가 가짜가 아님을 깨달은 아스펠라는 약초를 찾기 위해 본격적으로 산 정상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한참 돌아다녔으나 보이는 것은 없었다. 약초라 함은 보통 우거진 수풀 사이나, 거대한 바위 아래 등에 있기 마련인데 계속 걸어가 닿은 곳은 산의 정상이 아닌 민가로 이어질법한 평지였다.

몇 시간 동안 헤맸을까. 아스펠라는 약초 비슷한 그 어떠한 것도 찾지 못해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여기가 아닌가?”

분명 여기가 맞을 텐데.

만약 여기가 아니라면 대체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약초를 찾지 못해 칼리우스가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피곤한 몸과 지친 마음에 아스펠라의 눈에서는 눈물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울어봤자 하등 도움 안 되는 것은 잘 알고 있는데도 속상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밤새 뒤척여 피곤했다. 몇 번이고 떨어지고 다시 오르길 반복해 어깨며 엉덩이며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상처 부위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옷을 적셨고, 아스펠라는 머리가 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되는데.’

조금 더 여기서 약초를 찾든지, 아니면 다른 산으로 가보든지 해야 하는데.

하지만 아스펠라의 몸은 영 따라주지 않았다.

지쳐 한계에 다다른 아스펠라는 들판 위 거대한 나무로 갔다. 그곳에 등을 기대앉아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지금이 벌써 저렇게 해가 떴을 시간인가. 아스펠라는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다.

“이상하네…… 아까 전부터, 구름이 안 움직이네…….”

의아한 점은 한두 군데가 아니었으나 아스펠라는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움직일 여력이 없었다. 약초는 보이지 않았고 온몸은 아팠으며 눈이 자꾸만 가물가물 감겨왔다.

아스펠라는 인형극이 끝난 인형이 나동그라진 것처럼 팔과 다리를 쭉 뻗은 채로 등을 기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누군가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면 아마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비르가가 아니잖아?」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아스펠라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언제 와 있던 건지 모르겠으나 웬 꼬마 아이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아스펠라는 겨우 힘을 줘 눈을 깜빡였다.

“루이…… 나?”

「그럼 여기에 갇힌 애가 나 말고 또 누가 있겠어?」

아이는 새침하게 말하며 짚과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공을 아스펠라에게 통통 굴렸다.

공이 데구루루 굴러와 아스펠라의 발에 닿았다.

「뭐 해? 나랑 놀아주려고 온 거 아니야?」

아스펠라는 지금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어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루이나가 저렇게 어린 애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는 뭐고, 봉인 아래 갇혀 있을 터인데 어째서 여기에 나와 있는 건가.

물어볼 것이 많았으나 아스펠라는 꿈쩍할 수 없었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왜?」

“너무 피곤하고 아파서.”

그러자 아이가 다가와 아스펠라를 가만히 쳐다봤다. 푸른 눈동자에 빛나는 금발을 가진 귀여운 아이였다. 그 귀여운 얼굴로 한다는 말이 독하기 짝이 없었다.

「같이 놀아줄 애를 보낼 줄 알았더니, 웬 병자를 보냈네, 귀찮게. 완전 시들시들해진 콩나물 같아.」

그러더니 이번 한 번만이야, 하며 아스펠라의 이마에 제 손을 올려놨다.

아스펠라는 그가 뭘 하려는지 몰라 몸을 움찔대며 경계하려 했으나, 그는 해사하게 웃으며 안심하라 말했다.

그와 동시에 따듯한 기운이 아스펠라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이마로부터 전신으로 퍼지는 알 수 없는 기운은 아스펠라의 몸을 따듯하게 데워주었고, 욱신거리던 어깨가 한결 가벼워졌다.

팔뚝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던 피 역시 멎은 듯했다. 아스펠라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놀아달라고 해준 것뿐이야. 이제 낫게 해줬으니까 나랑 놀아줘.」

“난 약초를 찾으러 온 거야.”

「알아. 그러니까 나랑 더더욱 놀아줘야지.」

악동이 지을만한 짓궂은 표정으로 루이나가 말했다. 그는 아스펠라의 발치에 있는 공을 주워들며 뒤돌았다.

「빨리 와. 한동안 비르가가 안 와서 심심했으니까.」

아스펠라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몸을 일으켜 그 뒤를 따랐다.

***

어린애와 놀아주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뭐가 이리 하고 싶은 것이 많은지. 공을 굴려라, 공을 차라, 손으로 집어서 주고받기 놀이를 하자, 화환을 만들어라, 꽃팔찌를 만들어 달라.

어린 루이나는 끊임없이 아스펠라에게 이것저것을 요구했다.

“나 이제 정말 가 봐야 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괜찮아. 여긴 시간이 안 흐르는 곳이라 네가 여기서 천년만년 살아도 바깥에서는 단 하루 정도 지날까 할 테니까. 그러니까 응? 응? 나랑 좀 더 놀자.」

아스펠라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또 뭘 하고 놀고 싶은데?”

「음. 이제 노는 건 질렸고. 재밌는 이야기 좀 해 봐. 바깥세상 이야기. 여기 하도 오래 전부터 갇혀 있어서 궁금해 죽겠어.」

“비르가가 안 말해줬어?”

「얘기해줬지. 근데 비르가는 원래부터가 재미없는 애였거든? 그래서 이야기 해주는 것도 완전 재미없지 뭐야.」

아이는 양팔을 제 머리 뒤로 가져다대며 아스펠라의 무릎에 드러누웠다.

「아스펠라. 네 얘기도 좀 해 봐.」

“내 얘기는 왜?”

「비르가가 맨날 네 얘기를 했으니까 어떤 애인지 좀 궁금했거든. 비르가가 죽었으니 네가 산신이 된 거겠지? 비르가는 어쩌다 죽었어? 여긴 외부랑 차단이 되어서 뭘 알 수가 있어야지.」

아이의 말에 아스펠라가 답했다. 산신 토벌 작전으로 인해 각 산의 산신들이 모두 토벌되었다고.

「산신 토벌? 그래. 그렇구나. 하긴 인간들 눈에는 그저 거대한 짐승이니까 여러모로 거슬렸겠지.」

분명 아이의 모습이긴 한데, 이따금 보이는 저 눈빛은 어린아이의 눈이 아니었다. 가만히 그를 쳐다보던 아스펠라가 물었다.

“그런데 넌 왜 아이의 모습으로 있는 거야?”

「그야 난 조각조각 나서 제 모습의 형상을 갖추기가 어려우니까.」

“다른 산의 성역에도 이렇게 어린 네가 있어?”

「몰라 나도. 네가 한번 가보든지.」

루이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이제 답해줬으니까 네가 말해줄 차례야. 빨리 재미난 얘기해줘! 하며 칭얼거렸다.

아스펠라는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고민하다 이내 비르가가 자기 전 들려줬던 동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루이나가 그거 말고오! 하며 버둥댔다.

「비르가랑 똑같은 이야기 말고. 맨날 들려주던 거만 들려줘서 질렸단 말이야.」

“비르가가 동화도 들려줬어?”

「당연하지.」

아스펠라는 대체 비르가가 여기서 뭘 한 건지 짐작할 수 없는 듯 가만히 입만 떡 벌렸다. 그런 그녀가 무슨 생각하는지 훤히 들여다보인다며 루이나가 코웃음 쳤다.

「왜. 봉인을 지키는 줄 알았더니 육아해서 놀란 듯 보인다?」

“아주 부정하지는 않을게. 솔직히 봉인되어 있다고 해서 난 네가 땅 아래 깊숙이 파묻혀 있을 줄 알았어.”

「여긴 상자야. 상자 안에 가둬진 거 맞고.」

“상자…….”

아스펠라는 상자라는 단어를 몇 번 반복하더니, 이내 외면하듯 고개를 내저었다.

항상 푸른 하늘에 움직이지 않는 구름만 쳐다보고 살아야 한다며 그가 불평을 늘어놨다.

여긴 항상 똑같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딱 하나 너나 비르가가 들어올 때 말고는 난 항상 여기에 혼자 있어야 한다고.

그의 말에 아스펠라가 물었다.

“그래서 여기서 나가고 싶어?”

「나가고 싶냐고? 안 내보내줄 걸? 딱히 나가고 싶은 생각은 없어. 난 날 잘 아니까. 다만 기왕 가둘 거면 좀 유흥거리도 넣어주던가. 재미없는 비르가가 안 오니 이젠 더 재미없는 애가 왔네.」

“…….”

「동화 같은 이야기 말고 네 이야기 좀 해 봐, 아스펠라.」

루이나의 말에 아스펠라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이내 운을 띄었다.

“나 검은 마수를 만났어. 다친 아이였고,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지. 아스펠 산에서 우린 만났어. 난 그걸 운명이라고 생각해.”

지루한 표정을 짓던 루이나의 얼굴에 흥미가 돌기 시작했다.

아스펠라는 천천히 칼리우스와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못된 왕, 검은 마수로 변하는 인간, 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 여자애.

동화 속에 나올 법한 등장인물이었으나 우습게도 이건 모두 현실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곧 루이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루이나는 아스펠라에게서 자신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그는 아무런 감상도,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스펠라의 무릎에 누워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루이나?”

혹시나 그의 이야기를 꺼낸 것에 기분이 상한 걸까. 아스펠라가 조금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가 다시 눈을 떴다. 푸른색이 도는 눈동자와 마주치자 아스펠라는 순간적으로 꿈에서 만났던 태초의 신을 떠올렸다. 이내 루이나가 입을 열었다.

「간만에 재밌는 이야기였어.」

그러더니 이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해독을 하기 위한 약초를 구하려고 여기 왔다는 거지?」

그의 말에 아스펠라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가 마음에 든 것인지, 그는 더 이상 아스펠라에게 이것저것 놀자며 붙들고 늘어지지 않았다.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다시 놀아달라 떼쓰기 전에 아스펠라는 얼른 약초를 받아 돌아갈 셈이었다.

「기다려. 내가 줄 테니까.」

생긋 웃던 루이나가 이내 작은 손을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자신의 가슴께로 집어넣었다.

검은 구멍이 생김과 동시에 몸 안쪽으로 손이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심장 부근에서 뭔가를 꺼냈다. 보랏빛을 띠는 그것은 아스펠라가 그렇게 찾아다니던 것이었다.

‘저게 왜 루이나의 몸속에 있는 거지?’

아스펠라가 충격 받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루이나가 말했다.

「왜 그렇게 놀라?」

“그게 왜 거기서 나오는데? 그, 그건 약초 아니야?”

루이나는 지금 그녀가 보고 있는 자신의 몸은 어디까지나 형태만 유지하고 있는 것일 뿐, 그 형태를 이루고 있는 건 아스펠 산의 부스러기들이라 했다.

「신이 날 이곳에 가둘 때 그의 일부가 떨어져 나와서 그런지 가끔 이런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약초들이 피어나. 난 그걸 모아뒀다가 비르가한테 주곤 했어. 이 약초는 이유는 몰라도 정화하는 힘이 있으니까.」

그는 아스펠라에게 약초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스펠라. 온몸이 검게 변하는 건 그냥 일반적인 독이 아니야. 부정 탄 산신이 사는 곳에서 시작된 전염병 같은 거지.」

“……남쪽 산신을 말하는 거야?”

「그래. 걔가 내뿜는 건 역병이라고. 네가 어렸을 적 먹어왔던 건, 역병이 잔뜩 퍼져 독을 품은 남쪽 산신이 흘린 부산물들이야.」

일반적인 독버섯 같은 게 아니라고.

싱긋 웃은 루이나는 아스펠라가 멀뚱하게 있자 이내 그녀 손에 약초를 턱 쥐어준 뒤 제 갈길 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데?”

「비르가가 전달하라는 거 전해줬으니까 난 이제 쉴래.」

“뭐? 너 내가 올 줄 알면서 일부러!”

「그치만 심심했단 말이야.」

어차피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아니라니까. 그렇게 말하자 아스펠라가 그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너 내가 자물쇠인 건 알아?”

「알고 있지.」

“아무렇지 않아?”

「이젠 아무래도 좋아.」

이 상자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어. 그렇게 말한 루이나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보통의 어린아이처럼 안녕! 잘 가! 또 놀러와! 참, 성역 벗어나면 상처들이 다시 돌아오는 거 잊지 말고! 하곤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절벽 아래에 자욱이 깔려있던 연기가 그를 감싸기 시작했다.

이내 아스펠라는 자신이 그렇게 애를 써 기어 올라왔던 절벽 아래로 돌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얼른 손을 펴보니, 루이나가 준 보랏빛을 띠는 약초가 들려있었다.

아스펠라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은 성역의 초입 부분이었다. 조금 아래로 내려갔을까. 저 멀리서 인영이 보였다.

“……아스펠라!”

일카이는 보이지 않는 벽 앞의 돌부리에 앉아 있다가 아스펠라가 오자 벌떡 일어났다.

아스펠라는 그를 막아서고 있던 벽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넘어왔다.

“일카이. 먼저 돌아가라고 글 써놨는데.”

“내가 어떻게 널 두고 가냐! 진짜 너는 정말……!”

한 소리 하려던 일카이는 생글생글 웃고 있는 아스펠라의 손에 들린 것을 쳐다봤다.

약초를 찾은 건가. 이내 일카이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아스펠라의 손을 끌어다 제 눈앞에 들어보였다.

“손이 이 지경이 되도록!”

루이나의 말대로 성역을 벗어나니 그의 힘이 사라져 아스펠라의 상처들이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스펠라가 비틀대자 화를 내던 일카이는 얼른 입을 꾹 다물고 아스펠라를 업었다.

“이렇게까지는 안 해도 돼.”

“됐고, 그냥 가만히 있어.”

아스펠라는 이내 일카이의 등에 얼굴을 기댔다. 피곤하긴 했으나, 제 손에 들린 약초를 슬쩍 들어 올려 기분 좋은 듯 헤실댔다.

“약초 찾아서 그렇게 기분 좋아?”

일카이의 물음에 아스펠라가 “응.”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인 뒤 혹여나 약초가 떨어지지 않도록 옆으로 멘 가방에 고이 집어넣었다.

“근데 좀 피곤하긴 하다.”

“한숨 자고 있어.”

약초를 찾아 긴장이 풀린 덕인지, 일카이의 말을 끝으로 아스펠라는 다시 눈이 가물가물 감기기 시작했다.

“근데 나 업고 아래까지 내려가기 무거울 텐데. 미안해서 어째.”

잠결에 웅얼거리며 일카이의 코웃음 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아스펠라는 잠이 들었다.

무겁기는 뭐가 무거운가. 업은 줄도 모를 정도로 가벼운 아스펠라였다. 쓰러진 이후로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텐데, 그 몸으로 산 정상까지 올라 약초를 기어코 캐내고 말았다.

손톱과 그 밑의 살이 들릴 정도로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손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건지, 그저 약초를 찾은 것이 기뻐 헤실거리며 웃는 모습이란.

일카이는 묵묵히 아스펠라를 업고 산을 내려갔다.

***

아스펠라가 눈을 떴을 즈음엔 말을 타고 있었다. 정확히는 잠든 아스펠라를 앞에 태운 채 그 뒤에서 말고삐를 쥔 일카이가 말을 몰고 있는 것이었다. 아스펠라가 퍼뜩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어? 더 자도 되는데. 이제 곧 대공 성에 도착해.”

가방에 약초가 잘 있는지 가장 먼저 확인한 아스펠라는, 이내 대공 성에 도착하자마자 누구보다 빠르게 말에서 내렸다.

“일카이, 고마워! 다들 고마워요!”

달려가면서도 그들에게 인사는 잊지 않았다. 다른 사냥꾼 동료들은 멀어지는 아스펠라에게 저마다 손을 슬쩍슬쩍 흔들면서도 일카이의 눈치를 살폈다.

마중 나온 펠킨이 얼른 아스펠라와 함께 성 안으로 들어갔다.

일카이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곤 이내 묵묵히 말고삐를 쥔 채 마구간으로 향했다.

***

별다른 변화가 없어 전서구를 보내지 않았다던 펠킨은 밤새 칼리우스를 지켜보느라 눈 밑이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아스펠라의 몰골을 보는 순간 그는 피곤한 기색을 낼 수조차 없었다.

“아, 아스펠라 양. 괜찮으신 겁니까?”

“네. 이제 이 약초만 빻아서 칼리우스한테 먹이면 상태가 나아질 거예요.”

“아니 제 말은, 각하도 각하지만 아스펠라 양의 몸 상태를 묻는 겁니다.”

“지금 쉰다 한들 발 뻗고 있진 못할 것 같아요.”

“아스펠라 양…….”

“그래도 칼리우스가 곧 깨어날 테니까요.”

아스펠라가 싱긋 웃고는 칼리우스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손을 깨끗이 씻은 뒤, 코에 수건을 두른 아스펠라는 비르가가 알려주었듯, 일카이와 다른 동료들이 채취한 아스펠 산의 다른 약초들과 함께 섞어 약초를 빻기 시작했다.

***

칼리우스는 꽤 이상한 꿈을 꾸고 있었다.

이게 꿈이라는 것은 스스로 자각할 수 있었지만 원한다고 하여 깨어나지는 못했다. 그는 이상한 수풀 속에서 일어났다.

몸을 일으키는데 몸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기시감에 손을 들어보이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그의 몸이 어려진 것이었다.

뭐야 이게? 칼리우스는 자신의 손을 가만히 접었다 폈다. 제 손이 맞나 싶었다.

‘뭐야?’

짜증스런 목소리로 칼리우스가 주변을 살폈다. 울창한 숲은 하늘을 빼곡히 가릴 정도로 자라나 있었다. 어두운 그늘이 진 상태였는데, 이상하게 주변이 어둡지는 않았다.

저 멀리서부터 어떤 빛이 숲 안을 밝게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칼리우스는 먼 곳의 빛을 가만히 응시했다. 점점 빛이 다가오는 기분이 들었다. 앞에 펼쳐진 거대한 수목 사이로 점점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강물 위로 고아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마치 사슴이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는 것처럼 가까워질 때마다 물 위로 파장이 일었다. 칼리우스는 저것이 사람과 비슷한 형상의 존재라는 걸 깨달았고, 그것이 조금 더 가까워지자 신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짐승의 모습을 한 산신과는 달리 인간의 형상을 한 그것은 반투명한 액체 같기도 했으며, 푸딩처럼 특이한 질감의 표면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새 신은 칼리우스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기다란 몸을 앞으로 수그려 작은 칼리우스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더니 손을 들어 칼리우스의 턱을 들어올렸다.

칼리우스는 그의 손을 탁 쳐내고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날 부른 건가?’

그러자 신이 고개를 갸웃댔다.

‘원래 내가 있던 곳으로 보내줘. 내가 죽은 게 아니라면. 가서 아스펠라가 무사한지 확인해야 해.’

「아스펠라는 무사해.」

신의 음성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 감각이 소름끼치는 듯 칼리우스가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는 그를 노려봤다. 신이 또 한번 고개를 갸웃댔다.

「신기하네. 분명 내 일부일 텐데 참 성깔 있구나.」

‘뭐?’

「하긴 너 말고도 성깔 있는 아이가 어디 한둘이었던가.」

신은 이내 칼리우스의 양쪽 어깨에 손을 집어넣더니 덜렁 들어올렸다.

‘뭐하는 거야?!’

칼리우스가 당장 내리지 못하겠냐며 버둥댔다.

「아스펠라는 무사하다. 그 애는 비르가의 밑에서 자랐으니 지금쯤 널 치료할 약을 캐왔을지도 모르겠구나. 어디 보자. 으음, 진전이 꽤 되었구나. 검은 마수가 널 반쯤은 먹어치웠다. 빨리 길들이지 못하면 주종 관계가 바뀌고 말 거야.」

칼리우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신이 다시 그를 내려놨다.

‘그게 눈에 보이는가?’

「그럼. 보이지. 다 보인다.」

신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그 안에 흐르는 수많은 별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칼리우스가 이내 휙 고개를 돌렸다.

‘아스펠라가 무사하다면 다행이군. 당신이 이곳에 날 부른 거면 이제 그만 돌려보내.’

「돌아가는 건 네가 할 일이다. 나가는 길은 네가 찾아야 해. 아스펠라는 잘만 찾던데 넌 어째 못 찾는 모양이구나.」

그렇게 말한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며 땅에 발을 내딛었다.

「나가는 길을 못 찾으면 여기서 나와 같이 살아도 좋다.」

‘봉인을 지키기 위해 우릴 보낸 거 아닌가?’

「그렇긴 하지.」

칼리우스는 눈앞의 존재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한 태초의 신 치고는 조금 실없다 느꼈다.

나가는 길을 직접 찾아야 한다니. 칼리우스는 주변을 둘러보다 이내 잠시 포기한 듯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평소 땅에 앉을 때처럼 한쪽 다리는 뻗고, 다른 한쪽 다리는 구부려 접은 뒤, 그 위에 오른쪽 손을 걸쳤다.

그 모양새가 꼭 어린애가 어른 흉내를 내는 것 같아 신이 살풋 미소 지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칼리우스가 신에게 물었다. 신은 구석에서 꿈지럭대며 뭔가를 하고 있었다.

‘내가 마수한테 반쯤 먹혔다고 하던데, 만약 다 먹히면, 선왕처럼 되는 건가?’

「그렇겠지.」

‘선왕은 어째서 검은 마수가 된 거지?’

「그거야 비르가가 알겠지.」

‘당신이 아는 건 없나?’

「그럼. 나는 이제 그저 보기만 할 뿐이란다.」

그렇게 말한 신은 이내 뭔가를 칼리우스에게 건넸다.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신이 다시 한번 그에게 건넸다.

「먹으렴.」

‘이게 무엇이오?’

「배가 고프지 않으냐?」

의지와는 다르게 배에서 꼬르르륵 거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칼리우스는 지금 이게 뭔 수치인가 싶어 조금 짜증스럽게 그가 건넨 것을 일단 먹기 시작했다.

신은 그런 칼리우스를 마치 어여삐 여기는 강아지 쳐다보듯 가만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곧잘 먹는구나, 하며 또 한 번 그에게 열매를 건넸다.

됐다고 거절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허기짐은 갈수록 심해졌다.

왜 이렇게 자꾸 배가 고픈 걸까. 혹여나 이 열매가 어떠한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닌가 싶어 칼리우스는 신을 경계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왜 그러느냐?」

하지만 신은 뭔가 꿍꿍이가 있다기 보다는 그저 오랜만에 손님이 와 신나서 이것저것 먹이려는 것 같았다. 더 먹거라. 맛이 없느냐? 여긴 이런 것뿐인데 어쩐다. 칼리우스는 그가 왜 이렇게 신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갈 길을 찾으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신이 말했다.

「어차피 못 찾아도 괜찮다.」

‘난 여기서 당신이랑 살 생각 없소.’

「아스펠라가 데리러 올 거다.」

‘아스펠라가 날?’

어떻게 데리러 온다는 거요? 칼리우스가 되묻자 신은 자신과 칼리우스를 번갈아 가리켰다.

「너희들과 나는 모두 이어져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자물쇠 되는 자도 이 꿈을 꾸고 있을 수 있다는 건가.’

「그렇지.」

‘그게 누구요? 유디티아 후작? 아니면, 그 둘의 아이?’

「자각하여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나도 어찌 생겼는지, 어떤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른단다. 칼리우스.」

아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군. 칼리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대로 정말 아스펠라가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당신은 미래를 알고 있지 않나?’

「알고 있지.」

‘루이나의 봉인을 풀려는 자가 있어. 그자가 성공하게 되면 봉인은 풀리고 루이나가 기어 나올 거라고. 애매모호한 말만 하지 말고 확실한 갈래를 알려주는 게 더 효율적일 텐데.’

「난 인간들을 사랑하지만 이따금 그들의 존재 이유를 모르겠단다. 너희를 만든 건 나인데도 말이야. 그래서 나는 가만히 보고만 있을 생각이란다.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점에서 시작하듯이 결국 하나의 점으로 끝난단다.」

‘…….’

「수많은 시작과 끝을 보았고 이제는 조금 지쳤다. 해서 이제는 그저 지켜보려 한단다. 살아남는 건 너희들의 의지야.」

그렇게 말한 신이 몸을 숙여 칼리우스와 눈을 마주쳤다.

「그치만 칼리우스. 네게는 조금 알려주마. 넌 상자다. 그릇이란다. 그 안을 가득 채운 것을 비울 줄 알아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란다. 넌 자물쇠가 아니야. 마지막 자물쇠 되는 아이는 따로 있어. 나는 다섯 명의 아이들을 내려 보냈다. 그 중 자물쇠는 넷이야. 나머지 하나는 무엇이겠니.」

저를 보고 상자니 그릇이니 빙 둘러 말하는 것에 칼리우스가 인상을 찌푸리려 할 때였다. 멀리서 아스펠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따라가렴. 아스펠라가 마중 나왔구나.」

칼리우스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따라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온통 어두웠으나 저기 멀리서 손톱만한 빛이 보였고, 목소리는 그곳으로부터 들려오는 것 같았다. 칼리우스는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이내 점점 빛에 가까워졌다. 눈이 부셔 찌푸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칼리우스!”

“……아스펠라.”

아스펠라가 보였다.

입술은 거칠게 부르트고, 눈은 새빨갛게 충혈 된 아스펠라는 깨어난 그를 보며 놀란 듯하다 이내 안심된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 놀랐잖아요.”

“아스펠라. 어깨는. 어깨 안 아픕니까? 내가 그때…….”

칼리우스는 아스펠라를 봐서 기쁜 것도 잠시, 그녀의 어깨에 돌돌 두껍게 말려진 붕대를 쳐다봤다. 그의 의지에 반하여 문 것이었으나 어찌되었건 그가 문 것은 변함없었다.

저 어깨에 이를 박아 살갗을 뚫어 피를 머금었던 기억이 난다. 아스펠라의 체취가 물씬 남과 동시에 그녀의 피를 맛봤다. 이제 자신을 두려워하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들어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얼굴을 양손을 감싸 올린 아스펠라가 천천히 들어 올려 눈을 맞추며 물었다.

“칼리우스. 나 괜찮아요. 하나도 안 아파요.”

“거짓말.”

“진짜인데. 어디보자 얼굴이, 아. 다행이다. 드디어 안색이 조금 돌아왔네.”

아스펠라는 천천히 칼리우스의 얼굴을 살폈다. 검은 반점을 넘어 온몸이 검게 변한 그는 독소가 점차 빠져나간 것인지, 확실히 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던 그의 주변에서도 더 이상의 악취는 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칼리우스와 이렇게 눈을 마주하고 있다.

둘은 꽤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본 채로 미소 지었다.

“약초도 안 들면 어쩌나, 안 깨어나면 어쩌나, 그런 생각 때문에 얼마나 무서웠는데…….”

웅얼거리는 아스펠라는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정도였다. 칼리우스는 그런 아스펠라의 부어오른 눈을 가만히 엄지로 쓸었다.

“아스펠라. 나 불러줘서 고마워요.”

“응?”

아스펠라는 뭔 소린가 싶었으나, 일단 지금은 칼리우스가 깨어난 것을 더 만끽하고 싶었다. 며칠 동안 밤낮 그 옆에 붙어서 약초를 먹여대지 않았는가.

먹이면 게워 내고 또 먹이면 게워 내고. 온몸의 핏줄이 죄 울퉁불퉁 일어나며 칼리우스가 붉은 눈을 번뜩이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 안의 독기가 약초를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반항한 것이었다.

펠킨과 일카이는 물론 시종들이 다닥다닥 달라붙어 발버둥치는 칼리우스를 붙잡으면, 아스펠라가 막대기로 그의 입을 억지로 벌린 뒤 그 안에 약초들을 달여 만든 액체들을 들이부었다.

‘뱉으면 안돼요, 삼키란 말이에요!’

아스펠라의 외침에도 이성을 잃은 칼리우스는 몇 번이고 이를 보이며 으르렁댔다. 그렇게 며칠을 반복하니 아스펠라는 만일 이것마저도 실패하면 어째야 하나, 매일 밤 제대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그 옆을 지켰다.

그 모든 고생은 이제 칼리우스가 일어났으니 되었다. 아스펠라는 그동안의 고생은 기억도 나지 않는 듯 그저 칼리우스의 얼굴을 매만지며 그와 부둥켜안았다.

멀리서 약을 들고 오던 펠킨이 아스펠라를 안고 있는 칼리우스를 보고 깜짝 놀라 그를 부르려 했다. “각하! 정신이 드신 겁니까!” 하지만 이내 먼저 와서 이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일카이에 의해 저지당했다.

일카이는 아무런 말없이 펠킨을 방 밖으로 끌고 나왔다.

“야, 약 드실 시간일 텐데.”

펠킨은 무표정한 일카이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지금은 둘만 있게 내버려 둬요.”

평소 같았으면 진즉에 먼저 훼방 놓았을 이가 오늘따라 얌전하다. 펠킨은 어째 갑자기 철이 든 일카이를 슬쩍 쳐다보다, 이내 문 앞쪽에 약을 뒀다.

그런 뒤 저 둘을 방해하지 말라 감시하려는 듯한 일카이의 등쌀에 밀려 결국 그와 함께 복도를 나서야 했다.

겨우 깨어난 자신의 주군을 만나지도 못하는 이 상황이 황당하긴 했으나, 일카이의 말대로 지금은 저 둘만 있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 더 나을 듯해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것. 이제 아스펠라를 좋아하지 않는 건가?

“거 왜 자꾸 힐긋힐긋 쳐다보십니까?”

일카이가 사납게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길래 진즉에 두 분 사이에 끼셨을 분이…….”

저도 모르게 본심을 꺼낸 바람에 펠킨이 화들짝 놀라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일카이는 그런 펠킨을 다시 한번 노려보더니, 이내 주눅든 것처럼 시선을 돌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냥. 낄 데 끼고 빠질 때 빠지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

“그냥 내가 낄 곳이 전혀 아니라는 걸 알았을 뿐이거든요.”

무심한 듯 말하나, 그 안에 상처받은 열아홉 청년이 보였다. 펠킨은 그런 일카이를 제 동생이라도 되는 양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토닥댔다.

“뭡니까?”

“아. 죄송. 저, 그럼 일전에 각하께서 생각해보라 하신 문제는.”

펠킨의 말에 일카이가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눈을 몇 번 깜빡이다 이내 대답했다.

“원래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듯이 그 반대도 있는 법이죠.”

“그 말은 좀 애매한 답변이군요.”

“뭐,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일카이는 저 멀리 마중 나온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분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게 딱 지금의 상황이었다.

스스로 자신이 그 두 사람 사이에 낄 수 없다는 걸 인정하기까지, 일카이의 그 대쪽 같은 자존심에 얼마나 금이 가고 부스럼이 생겼는지 모를 것이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아스펠라는 사흘 밤낮 그 옆에 딱 붙어 열이 나면 물수건을 올리고 몸이 차가워지면 이불을 끌어다주었다. 심지어 선잠을 자다가도 그가 조금이라도 뒤척이면 벌떡 일어나 상태를 확인하더라.

그 갖은 고생을 하고, 무리를 하면서 단 한번 불평불만도 없이.

그랬던 여자애가 칼리우스가 깨어나니 눈물을 보인다.

말없이 한동안 서로 눈을 마주치는 그 둘을 보며 일카이는 자신이 절대, 죽었다 깨어나도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애초에 일카이가 아스펠라를 만나기 전부터.

그래. 검은 마수와 아스펠라가 처음 만난 그날부터 자신이 이들 사이에 낄 자리는 없던 것이었다.

아스펠라 곁은 자신의 자리가 아니었다.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그 사실을 오늘 결국 인정하고야 말았다. 난 죽어도 안 되겠구나.

허탈한 웃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툭툭 내뱉어졌다. 일카이는 펠킨이 물었던 것을 곱씹었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어.

그는 아스펠라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그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접은 것도 아니다. 그냥 주제 파악을 한 것뿐이지.

아스펠라에게 있어 일카이는 그냥 지나가는 동네 사냥꾼 동생쯤일 거다. 무뚝뚝하고 불평 많지만 그리 나쁘진 않아요, 라고 말할 정도의 사이. 혹시나 그가 다쳐서 오거나 아프면 걱정은 해줄 사이.

그거 말고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 일카이의 주제는 그뿐이었다.

이성 관계에 있어 최하층에 위치한 ‘친동생 같은 남자’라는 주제.

그뿐일 주제를 칼리우스가 신분 상승 시켜주겠다는데,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는가. 그가 하라면 하는 거다. 아스펠라를 지키라면 지키는 거다.

그러면, 지나가는 동네 사냥꾼, 친동생 같은 사냥꾼 그쯤이었던 것이 아스펠라를 지킬 수 있는 사내로는 올라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걸로 만족하는 나도 참 나다.’

일카이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이내 말 위에 올라탔다.

“대장. 대공이 눈을 떴다면서. 아스펠라 양이랑 둘이 두고 와도 되겠어? 훈련 빠져도 괜찮아. 대장도 요 며칠 잠도 제대로 못 잔데다가-”

“아니야 형. 됐어. 나 괜찮아. 가자.”

***

침실에서 몸을 일으킨 이는 기다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죄 가린 채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현실과 잘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인지 제 손을 접었다 펴길 반복하다, 이내 현실임을 자각하게 되자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실로 이상한 꿈을 꾸었다.

아주 어두운 곳에서 눈을 떴는데 보이는 것이라고는 나무 몸통뿐. 고개를 들어봐도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아주 어두운 숲 안에 그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갈 수는 없었다. 숲인 듯 싶어 발을 내딛었으나 차가운 물이 발끝에 닿았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을 때에야 비로소 주변이 어스름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끊임없이 펼쳐진 물 위로 솟아오른 바위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상한 존재를 마주했다.

어느새인가 제 눈앞에 소리도 없이 다가온 그것은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아름답기도 두렵기도 했다. 별이 쏟아지는 듯한 검은 눈과 마주했을 때. 그것의 생각이 그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런데 그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잘 떠올려보면 기억이 날 듯도 싶어 한참동안 가만히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전하. 세숫물을 가져왔습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이 세숫물을 그 앞에 대령했다.

“전하?”

“가서 교주를 데려와라.”

“네.”

시종은 서둘러 세숫대야를 협탁에 놓은 뒤, 얼른 방을 나섰다. 국왕의 표정이 아침 일찍부터 일그러져 있다는 것은, 잘못하면 오늘 누구 하나 죽어나갈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버루카는 왕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기 위해 가려던 도중 다급한 발걸음의 시종과 마주쳤다.

시종은 얼른 자리에 멈춰서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서는 기침하셨느냐.”

“예, 버루카 님.”

“헌데. 다급해 보이는구나.”

“전하께서 즉시 교주를 데리고 오라 명하셨습니다.”

그의 말에 버루카가 가만히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이 아침부터 교주를 데려오라 하셨단 말이더냐?”

그의 말에 시종이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이만 가보라며 손짓을 하자, 시종은 마저 갈 길을 갔다. 버루카는 가만히 제 수염을 한번 쓸어내린 뒤 국왕의 침실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고 안에 들어가자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파베스의 모습이 보였다.

“전하. 아침 인사를 위해 가신들을 들여도 되겠습니까.”

그의 말에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던 파베스가 잔뜩 날 선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혹 어딘가 불편하신 점이 있습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시군요.”

“버루카.”

“예, 전하.”

“가신들의 인사는 됐어. 교주가 오면 내 물어볼 것이 있다.”

“요즘 들어 그자를 꽤 가까이 두시는 군요.”

최근 들어 파베스는 거의 교주에게 의지하다시피 하며 그에게 많은 일들을 일임했다. 불사체를 더 양성하는 것은 물론, 원래 버루카의 일이기도 했던 검은 마수와 생포한 산신들을 관리하는 것 역시 그에게로 넘어갔다.

버루카는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 때문에 불평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봤을 때 교주는 비밀 투성이였고, 정체불명이었으며,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이였다. 아무리 피올라 왕비 때부터 이곳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앞뒤 맞지 않는 것들 투성이였다.

버루카는 그 교주라는 자가 단순히 루이나의 봉인을 맹신하는 이교도에, 미쳐 버린 하벨 남작이 불쌍하여 그의 비서로 함께하고 있다는 걸 믿지 않았다.

그는 뭔가 더 께름칙한 존재였다.

하지만 버루카가 뭔가 더 말하려던 찰나 시종이 교주와 함께 도착했다. 파베스는 버루카를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말했다.

“교주 외의 다른 이들은 모두 방에서 나가.”

“전하.”

“나가라고 했어, 버루카.”

버루카는 별다른 항변도 못한 채 방에서 나와야 했다. 교주를 지나쳐가며, 그는 언제나 무표정에 가까운 그 얼굴을 스치듯 쳐다봤다.

저런 얼굴은 아무나 못한다. 저 표정 없는 얼굴은 마치 인간 거죽만 뒤집어 쓴 것 같았다.

이내 버루카가 방을 나가고 시종이 문을 닫고 나갔다. 방에는 교주와 파베스 단둘뿐이었다.

“저를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내 이상한 꿈을 꿨네.”

그의 말에 교주는 여전히 고개를 아래로 숙인 채로 물었다.

“이상한 꿈이라 함은.”

“신이 나왔어. 산신이 아니라 태초의 신 말이야.”

“태초의 신이라는 것은 어찌 아셨습니까.”

“한 번에 느낄 수 있더군.”

그렇게 말한 파베스가 고개를 들어 멍하니 창밖을 내다봤다. 그러더니 이내 중얼거렸다.

“베르델. 베르델을 믿지 말라.”

파베스의 중얼거림을 들은 것인지, 교주는 고개는 아래를 향한 상태로 천천히 눈만 치켜 올려 그를 쳐다봤다.

“그것이 내게 그렇게 말했다. 정확히는 그 생각이 내 머리로 흘러들어왔어. 베르델은 남쪽 산을 말하는 것 아닌가. 그곳의 산신은 오래전에 부정 타 죽었잖아.”

“그랬지요.”

“헌데 자네 역시 남쪽 산에서 오지 않았던가. 자네라면 내가 왜 이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 알고 있을 듯하여 불렀네.”

이건 단순히 개꿈만은 아닌 것 같거든.

파베스는 피올라 왕비가 살아생전 그에 대해 했던 말을 언뜻 기억했다. 남쪽 산에서 왔다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신도들을 이끌고 이곳에 자리 잡았다. 피올라 왕비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맞이했고, 그는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연스레 피올라와 파베스의 수족이 되었다. 파베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자네 나한테 숨기는 것이 있는가?”

“그럴 리가요.”

파베스는 한참 동안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그는 원래 사람을 믿지 않았다. 애정을 갖는 편도 아니다. 어머니가 눈앞에서 죽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으며, 제 여동생의 태중의 아이가 자물쇠 될 아이라 생각하여 죽이려 했던 것이 그였다.

하지만 교주는 꽤 신뢰하는 편이었다. 이전에는 버루카의 말에도 별다른 의심 없이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그가 미심쩍어 졌다.

적어도, 태초의 신을 마주한 오늘 이후부터는 그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정의 변화가 없는 교주에게 파베스가 말했다.

“거짓은 고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뭐, 자네가 숨기는 것이 없다면 없는 거겠지. 네가 날 속여 얻을 게 뭐가 있겠어. 신을 직접 마주하니 나라도 아주 태연하지는 않은 듯하군.”

“검은 마수에 맞서 싸우신 날이 얼마 지나지 않지 않았습니까. 그때 부상당하신 것이 아직 다 낫지 않으셔서 심신이 약해져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태초의 신이라는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면, 이미 저희의 모든 계획을 알고 있다는 것인데 어찌 방관만 하고 있겠습니까.”

그 말도 일리가 있는 듯해 파베스는 마른세수를 하며 제 복부를 쳐다봤다.

붕대로 칭칭 감아둔 것이 그새 피가 새기 시작했다. 귀찮은 듯 혀를 차자 교주가 바깥에서 시종에게 의사를 불러오라 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왕진 가방을 들고 달려왔다.

“자네는 이만 가 봐도 좋아. 자네 말대로 너무 예민해져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자네 할 일을 하게.”

“예, 전하.”

교주가 물러가고 곧 버루카가 들어왔다.

“전하. 또 상처가 터진 것입니까.”

“그리 격하게 움직인 것도 없는데 잘 좀 꿰매 봐라. 의사라는 것이 상처 하나 제대로 못 꿰매느냐?”

“죄, 죄송합니다. 전하.”

의사는 이른 아침부터 진땀을 빼야 했다. 국왕의 복부 중앙부터 옆구리, 등의 절반가량에 짐승에 물려 찢긴 자국이 훤했다. 거대한 송곳니가 살갗을 갈라놓았지만 이건 그냥 파베스의 말대로 살을 잘 꿰매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상처는 꿰매고 또 꿰매도 자꾸만 곪아 터졌다. 일반적인 증상이 아닌, 검은 반점들이 복부 곳곳에 검버섯마냥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의사는 대체 이게 어디서 난 상처냐 물었으나 보좌관은 물론 다른 이들 모두 그냥 입을 다물고 상처나 치료하라 그를 압박할 뿐이었다.

“전하. 아무래도 상처가 곪는 것이 심상치 않습니다. 시간을 조금 더 주시면 약재들을 모아 제가 치료해보겠습니다.”

“그냥 상처만 꿰매.”

결국 의사는 기다란 낚시 바늘 같은 것을 불로 지져 소독한 뒤, 기다란 실을 꽂아 왕의 복부로 가져갔다. 상처 사이로 흘러나오는 악취에 의사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고 호흡을 멈춘 채 상처를 꿰맸다.

입으로 조금씩 숨을 쉴 때마다, 상처가 무슨 독기를 내뿜기라도 하는 것마냥 입 안도 바짝바짝 바르는 기분이 들었다.

어찌저찌하여 우여곡절 끝에 상처를 다시 꿰매긴 했으나, 이 상처가 또 언제 터질지 모를 일이었다. 의사는 조금 두려운 눈으로 국왕을 쳐다봤다.

“나가 봐. 버루카는 잠시 남고.”

의사와 시녀들이 핏물이 낭자한 침대보와 옷가지를 들고 나갔다. 로브자락을 대충 걸친 채 파베스가 술을 들이켰다. 버루카는 참다못해 한마디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상처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곪는 게 아니라 부정 탄 기운이 있는 독처럼 몸을 잠식하는 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버루카는 파베스의 상처가 어쩌다 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선왕, 아니. 검은 마수를 불사체로 바꾸려 하셨습니까. 그래서 그날 밤에 그곳에 계신 것이었죠?”

“그래. 교주도 딱히 반대하지 않았기에 궁금하여 해봤다. 불사체의 능력을 가진 마수는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할지.”

새로운 검은 마수가 나타난 것은 뜻밖의 일이었지만, 아주 예상 못한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파베스는 새로운 검은 마수를 불러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한들 어찌 제 아비였던 자에게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그런 버루카의 표정을 읽은 것인지 파베스가 물었다.

“날 원망하고 있는가?”

“원망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제가 어찌 국왕 전하를.”

“아비도 몰라보는 패륜아라 생각하는 건 아니고?”

“아닙니다, 전하. 제가 걱정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단지 너무 교주를 믿으시는 건 아니신가 하는 노파심 때문입니다. 그때 새로운 마수가 나타나 전하를 공격하려는 바람에 무기를 사용하셨다고는 했지만, 그 무기는 보고된 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국왕이 교주에게 과하게 의지하고 있다 생각했고, 어쩌면 교주가 국왕에게 주술을 걸어 이용하고 부추기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버루카는 그날 일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한바탕 난리가 났을 때 피투성이가 된 왕을 교주가 부축해 온 것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버루카.”

“또 그자를 옹호하시려는 거면 듣지 않겠습니다.”

“자네 말대로 교주에 대해 좀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어.”

갑자기 교주에 대한 태도가 바뀐 파베스의 모습에 당황했다. 이렇게 바로 받아들여질 줄은 몰랐던지 버루카가 물었다.

“그의 과거에 대해 조사하란 말씀이신지요?”

“그전에 남쪽 산신에 대해서 먼저 좀 알아보거라.”

“남쪽 산신은 이미 아주 오래 전 부정을 타 다른 산신들에게 공격받고 죽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남쪽 산신은 십여 년도 전에 사라진 존재였다. 가장 먼저 부정 타 버린 산신.

정확한 그날의 일은 아무도 모르지만, 남쪽 산신은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부정신이 되어버렸고 그가 날뛰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산신들이 그를 죽인 걸로 알려져 있다.

그가 죽은 이후부터 남쪽 산 전역에 역병 같은 부정이 돌기 시작하지 않았던가.

국왕이 열 살이 되었을 때 즈음의 일이라 지금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버루카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파베스는 잠시 꿈에서 들었던 이름을 중얼거렸다. 아직 그 꿈에서 다 헤어나오지 못한 것 같았다.

***

칼리우스의 몸은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니었다. 맨 처음 눈물 흘리며 그저 깨어난 것에 감사하다던 아스펠라는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를 혼내기 시작했다.

“위험한 짓은 절대 하지 않기로 약속했으면서, 사람을 이렇게 걱정시키면 어떡해요.”

그것부터 시작해 항상 칼리우스는 위험한 일을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며 그동안 쌓인 것들을 모두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플 때 칼리우스가 걱정했듯이, 나도 걱정한다고요. 그런데 이게 뭐예요.”

나긋나긋한 목소리였으나 아스펠라의 미간이 그녀가 단단히 화가 났음을 알려줬다.

칼리우스는 그저 잘못했다, 미안하다, 많이 걱정했냐 반복해 말하다가 이내 이런 걸로는 그녀를 달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아스펠라의 눈치를 살피다 이내 허리나 복부를 부여잡고 가만히 신음을 삼켰다.

그러자 조목조목 따지던 아스펠라가 화들짝 놀라 얼른 그를 부축했다.

“아파요? 어디가? 응?”

“배 아파요.”

“배?”

“옆구리도 아프고. 아스펠라. 좀 더 이리로.”

칼리우스가 으윽, 앓는 소리를 내며 아스펠라에게 손짓했다. 아스펠라는 또 어딘가의 상처가 터진 건 아닌가 싶어 얼른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의 허리에 슬쩍 손을 올리더니 그대로 제 쪽으로 당기며 같이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이렇게 안고 있으면 금방 나을지도…….”

몸이 아파도 그 능글맞음은 변하지 않은 것인지, 칼리우스가 자연스럽게 아스펠라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스펠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며 붕대로 감아 둔 그의 상처 부위를 살짝 힘을 줘 눌렀다.

그리고 칼리우스가 윽, 소리를 내며 힘을 빼자 얼른 그 품에서 빠져나와 단호하게 말했다.

“다 나을 때까진 신체 접촉 일체 금지. 그리고 지금 칼리우스가 해야 할 건 능글맞게 구는 게 아니라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는 거예요.”

“아스펠라. 왜 이렇게 단호해졌습니까.”

“빨리 말해줘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예요?”

칼리우스는 단호한 아스펠라의 모습에 더 이상 질척대는 것을 멈추고 그날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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