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장. 목 안에 박힌(1) (10/16)

9장. 목 안에 박힌(1)

아스펠라는 요 며칠 동안 일카이를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평소 같았으면 아스펠라가 저택에 돌아온 시점부터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것이냐, 왜 나만 두고 휴가를 간 거냐, 이젠 나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냐 기타 등등 온갖 투정을 들을 줄 알았는데 웬걸.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양아. 그동안 일카이 어땠어?”

하얗고 짧고 통통하기만 했던 하양이는 어느새 꽤 몸집을 불리고, 길어진 다리와 성숙해진 주둥이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을 두고 별장에 간 것에 며칠간 삐져 말도 안 하던 하양이는 드디어 아스펠라를 용서한 듯 아스펠라의 손에 코를 문대고 핥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일카이? 무슨 기분 안 좋은 일 있는 거 같았는데.]

하양이는 그간의 일카이를 떠올렸다.

평소에는 들떠서 항상 반쯤 위로 치켜 올라가 있던 짙은 눈썹이 슬금슬금 내려오더니, 올라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말없이 와서 나를 쓰다듬으면서 한숨만 푹푹 쉬던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일전에 별장에서 마주쳤을 때의 그의 얼굴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약재를 가져다 준 것에 인사도 할 겸, 안부와 그날의 일에 대해서도 물어볼 겸 그를 찾아다녔지만, 그는 아예 이곳에 없는 듯했다.

[냄새도 옅어졌어.]

아스펠라를 따라오던 하양이 역시 일카이를 며칠간 보질 못했다며 코를 킁킁댔다.

“저기. 혹시 일카이가 어디로 갔는지 아시나요?”

아스펠라는 결국 일카이의 동료들을 찾아가 물었다. 그들은 아스펠라를 보자 저들끼리 눈치를 살피며 네가 둘러대라는 듯 서로를 밀쳐댔다.

그러다 그중 한 명이 결국 지고 만 것인지 제일 앞으로 밀려나왔다.

사내는 얼쯤하게 헛기침을 하더니 저보다 한참 자그마한 아스펠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일카이는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고향이요?”

“갑자기 유모를 만나러 간다나…….”

그들은 아스펠라의 표정을 살피려는 듯 가만히 그녀를 쳐다봤다.

모르는 건가? 이 여자는 일카이에 대해 모르는 건가? 일카이가 말 안 한 건가? 에르윈 대공이 말 안 해줬나?

“아스펠라 양. 혹시 일카이에 대해 들은 얘기 없습니까?”

“들은 얘기요?”

아스펠라가 전혀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자 그들은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며, 요즘 그 녀석이 늦은 사춘기가 온 거 같다며 말을 돌렸다.

그러더니 다들 갑자기 할 일이 생겼다면서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아 참. 나는 우리 말순이 씻겨주기로 했지.”

“나는 칼이나 좀 갈아야겄다.”

“그럼 나는 무기상이나 다녀와 볼까.”

아스펠라는 그들이 자신을 피하려는 것임을 눈치챈 듯 별다른 말없이 일카이를 만나면 저가 찾는다고만 전해달라 한 뒤, 하양이와 함께 제 갈 길을 갔다.

복도 끄트머리로 아스펠라가 사라지자 그들은 다시 슬그머니 뭉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모르는 것 같지?”

한 사내의 말에 다른 이들이 음, 음. 근엄한 목소리로 까끌까끌하게 난 수염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카이는 왜 말 안 했을까?”

“그거야 우리도 모르지. 안 믿는 거 아닐까?”

“안 믿는 놈이 우리한테는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말해?”

아스펠라에게 약재를 가져다준다며 원정 훈련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구태여 간 이 아니던가. 뿌듯한 표정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죽상을 하고선 돌아왔다.

일카이가 걱정되었던 동료들이 하루 종일 그를 보채고 달래며 물어도 입 꾹 다물고 있더니, 결국 그날 새벽 잠자리에 들려던 이들을 모두 깨워 말했다.

‘나, 국왕의 이복동생이래. 누나도 당연 그렇고. 그리고, 국왕이 우리 누나를 죽였대.’

‘뭔 소리야? 너 무슨 꿈 꿨어?’

‘꿈 꾼 거 아니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야.’

처음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며, 장난쯤으로 치부하던 이들도 진지한 일카이의 얼굴을 보자 이내 말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에르윈 대공이 알려준 거야? 그 사람은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데?’

‘누나한테서 편지가 왔대. 보좌관이 아까 보여주는데 필체도 누나의 것이 맞았어.’

‘아니, 잠깐만, 진짜로? 진짜로 네가 국왕의 이복동생이라고?’

‘유모한테 확실히 물어보러 갈 거야. 나 혼자 다녀올 테니까 형들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훈련에서 빠지고 잠시 다녀오겠다는 그를 붙잡는 이들은 없었다. 모두 이 무슨 콩가루 집안이냐, 막장이냐 생각은 했어도 몇몇은 사라의 행동들을 가만히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사라는 꽤 작은 산골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는 사람치고 귀족들 못지않은 예법을 알고 있었다. 알파벳은 물론 고대어도 읽을 줄 알고, 비싼 디저트가 무슨 맛인지도 알고 있었다.

‘국왕이 전 대장을 죽였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국왕이 누나를 죽였어. 이유 같은 건 중요치 않아. 중요한 건 내가 복수해야할 상대는 국왕이라는 거야. 그 애꾸눈 검은 마수가 아니라.’

‘하지만, 사라의 상태는 완전히 검은 마수한테 공격당한 모양새였잖아.’

‘……국왕이 뭔가 손을 쓴 거겠지. 그 검은 마수는…….’

말을 하다 마는 통에 동료들이 빨리 말하라며 일카이의 무릎을 찰싹 때렸다. 그러나 그는 관객의 호기심만 잔뜩 유발해놓더니, 대뜸 침대에 드러누우며 등을 보였다.

‘몰라. 잘래. 아. 머리 아파. 생각하니까 머리 아파.’

‘야! 그래서 결론은 뭔데!’

‘몰라. 대공이 자기 사람이 되라고는 하는데. 나도 모르겠다. 에이씨.’

‘대공의 사람이 되라고? 밑에서 일하라는 거야?’

‘그렇겠지, 뭐.’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으니, 빨리 제대로 설명하라며 드러누운 그의 등짝을 몇 번 때리자 일카이가 등을 긁적이며 짜증스럽게 일어났다.

그리고 소리를 빽 지르며 한다는 소리가.

‘대공이 내 후견인 비슷한 걸 해주겠대. 나보고 사냥제가 끝나면, 귀족 회의에 참가해서 몰락한 외가를 물려받으란다! 이제 됐냐! 나도 뭘 어째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던 일카이는 근심에 찬 얼굴을 하더니, 며칠 전날 밤에는 또 한 번 창백하게 질려 얼빠진 얼굴로 돌아왔다.

또 무슨 일이냐 묻는 그들에게 이번엔 아무런 대답도 안 하더니 그대로 짐을 싸 오밤중에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분명 에르윈 대공이 불러서 간 거 우리도 알고 있는데, 또 뭔 소리를 했길래 새카맣게 탄 애가 티가 날 정도로 창백해졌을까?”

“그날 좀 이상하긴 했어. 보좌관도 완전 술에 취해 있었고.”

“그리고 그날 새벽에 아스펠라 양이랑 검은 마수가 돌아왔잖아.”

일카이가 그러는 게 분명 아스펠라와 관련된 일인 줄 알았는데 오늘 자신들에게 천진한 얼굴로 그의 안부를 물어보는 걸 보니, 아스펠라 역시 모르는 듯했다. 심지어 일카이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조차도.

“…….”

“일카이야 그렇다 치고, 에르윈 대공은 왜 말하지 않았을까?”

“아스펠라 양 몰래 뭔 짓을 꾸미려는 건지도 모르지.”

사낭꾼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일카이는 그들의 대장이기도 하나, 사냥꾼 조합에 맨 마지막으로 합류한 막내였다. 이들은 사라의 동료였기에 어린 시절의 일카이와 놀아준 적도 많았다. 물론, 본인은 전혀 기억도 못한다만.

아무튼 과장 조금 보태서 일카이를 업어 키웠던 이들이다.

“아무튼 애 표정이 좋지 않았던 건 사실이잖아.”

“난 우리 애가 대공의 장기 말로 이용되는 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하지만 그렇다 하여 대공이 일카이를 후원하는 것에 반대하는 건 또 아니었다. 정확히 대공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일카이에게 몰락한 가문을 돌려주겠다는 것인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으니까.

적어도 그들은 에르윈 대공이 일카이를 굉장히 성가셔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거대한 에르윈 대공 성에는 수많은 사용인들이 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대다수는 이재민 출신이었다.

그들은 밤중에 검은 마수의 등에 매달린 채 이곳으로 온 화전민들을 배척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러했다는 듯 익숙하게 그들의 몸 상태를 봐주고, 숙소에 남는 침대와 이불을 내어줄 뿐이었다.

노인들은 이런 환대가 익숙지 않아 저들끼리 눈치만 살피고 있었지만, 며칠 지나니 익숙해진 것인지 저들끼리 정원 손질을 하거나, 가축들을 돌보는 등의 소일거리들을 찾아 하기 시작했다.

공터에서 짚을 꼬아다가 공처럼 만들어 놀고 있던 아이들은 여기저기를 누비는 하양이와 함께 공놀이를 하고 한참을 신나게 놀았다.

그러다가 지하에서 올라오는 아스펠라를 발견하고 얼른 그쪽으로 달려갔다. 막상 가놓고선, 말을 걸기 어려운 듯 우물쭈물하고 있자 아스펠라가 먼저 물었다.

“왜 그러니?”

가장 키가 큰 애를 선두로 세운 뒤, 다른 아이들이 일렬로 그 뒤에 숨었다. 큰 애에게 빨리 말하라며 콕콕 찌르자 아이가 공을 만지작대며 말했다.

“저기, 그, 포포 친구랑 놀면 안 되나요?”

“포포?”

포포가 누구냐고 물으려던 찰나, 아스펠라가 기억난 듯 아! 작게 감탄사를 했다. 그러다가 이내 신기한 듯 되물었다.

저번에 더 묻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물어볼 수 있을 듯했다.

“너흰 검은 마수가 무섭지 않니?”

“어, 네, 안 무서워요. 포포 친구니까요.”

“포포 친구일지 아닐지, 어떻게 알아?”

“똑같이 생겼잖아요. 포포 친구랑 놀면 안 돼요?”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같이 놀고 싶어 한다니. 아스펠라는 가만히 아이들을 내려다보다 그래, 그렇게 하자, 하며 활짝 미소 지었다.

그러다 아차 싶어 아이들 옆의 하양이를 쳐다봤다. 하양이가 검은 마수를 보고 경기를 일으키거나 충격 먹으면 어쩌지?

[포포?! 포포가 누구야?! 포포가 누군데? 너희 나보다 포포가 더 좋아? 나보다 더 귀여워? 나보다 멋져? 어디 나도 포포라는 놈 좀 보자!]

하양이가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컹컹 짖어댔다. 아스펠라는 허리 숙여 하양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양아. 좀 많이 큰 친구긴 한데…… 너랑 비슷한 과야. 나쁜 애는 아니니까 한번 만나볼래?”

[그래! 좋아!]

***

펠킨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몰라, 당장이라도 뒷목을 잡고 쓰러질 기세였다. 그는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천천히 아스펠라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 아스펠라 양. 이게 대체 뭔 일입니까? 왜, 왜 각하께서 저 꼬맹이들이랑…….”

그는 차마 입 밖에 낼 수도 없는 듯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리 개로 변했다 한들, 명색이 에르윈 대공이라는 사람이 방방 뛰며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아이들은 칼리우스가 무슨 놀이터라도 되는 양 신나서 거대한 검은 마수의 몸 위에 올라타고, 미끄러졌다. 그 옆의 작고 하얀 개 역시 신나서 칼리우스에게 컹컹 짖어댔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한동안 얼이 빠져 있던 펠킨은 아스펠라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 모습을 함께 구경했다.

“나오셔도 되는 겁니까? 아니 저 꼬맹이들은 무섭지도 않나.”

“칼리우스도 동의했고, 잠깐만 나와서 놀기로 했어요. 사실 알아볼 것도 좀 있고요.”

“알아볼 것이요?”

“네. 여기 애들은 물론, 노인들도 모두 검은 마수를 봐도 놀라지도, 무서워하지도 않더라고요. 아무래도 칼리우스 말로는 검은 마수로 변한 선왕과 알고 지낸 것 같다더군요. 마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을까요?”

그러자 마을의 이장 되는 노인이 시종들에게 부축 받으며 다가오더니 아스펠라의 질문에 답했다.

“정확히는, 그분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아스펠라 양. 저를 보자고 하셨다고요.”

아스펠라는 노인이 앉기 쉽도록 의자를 빼주며 물었다.

“숨기고 있었다니요?”

“예. 오래전에 한 여자 사냥꾼한테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여인이 부탁이라면서 그를 숨겨 달라 했습니다.”

화전민들을 노리는 이리 떼나, 거대한 곰들로부터 위협당하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오래전 부정을 타 출입이 금지된 남쪽 산에서부터, 갈 곳을 잃은 짐승들과 그 신을 따르던 작은 신들이 나머지 산들로 뿔뿔이 흩어졌다.

몇몇은 부정 탄 기운을 가진 채로 와버려 북쪽에서 거주하던 화전민들 또한 여러 위험에 처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거대한 멧돼지 떼가 화전민들의 밭은 물론 마을 주민들까지 공격하려던 찰나, 도와준 이가 있었다고 한다. 여자 사냥꾼과 아주 거대한 검은 짐승이었다.

“신기하게도, 그 검은 짐승은 주기적으로 인간이 되었다가, 다시 짐승이 되기를 반복하더군요. 그가 사람이 될 때는 마을에서 함께 지냈고, 짐승으로 변할 때 즈음엔 항상 그 여자 사냥꾼이 찾아왔습니다.”

“검은 마수를 받아들이기 어려우셨을 텐데, 이곳 아이들은 무서워하질 않는군요? 맨 처음엔 다들 저 모습을 보고 부정신이라고 생각하던데.”

펠킨이 신기한 듯 묻자 나이 지긋한 노인이 홀홀 웃으며 말했다.

“저희 마을 사람들은 산신님의 보호 아래 살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분은 저희에게 특별한 힘을 주셨습니다.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힘이지요. 미약하나마 저 역시 볼 수 있답니다.”

노인은 자신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그 안에 깃든 영혼이 어떠한 영혼인지를 볼 수 있다 말했다.

“두렵고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 생각되었기에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 년 정도 같이 지냈을 겁니다. 저희들은 그와 많이 친해졌어요. 우린 그를 포포라고 불렀어요. 아이들이 검은 마수일 때의 그와 잘 어울린다며 지어준 날부터 그게 그의 이름이 되었거든요.”

그렇게 말하던 노인은, 포포와 많은 정이 들었을 때 그가 이 마을을 떠나야 했다고 말했다.

“누군가 그를 쫓는다고 하더군요. 사실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 이 깊은 화전 농가까지 온 거겠지요. 헌데 여기서 더 있다간 들킬지 모르니 자신은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 하더이다.”

그렇게 그는 동쪽의 산으로 떠났다고 한다. 그곳의 산신에게서 그를 숨겨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무서운 병사들이 우리 마을에 찾아왔어요. 검은 마수에 대해 알고 있냐고 물었죠.”

항상 유하게 웃고 있던 노인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그렇게 지독한 영혼은 처음 봤습니다. 그 주변엔 정말 검은 그림자만이 드리워져 있었어요. 죽음과도 같은 것이었죠. 세상 온갖 부정은 다 모아놓은 것 같았어요. 인간이었지만, 그 안에 든 건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근처 동굴에서 검은 마수의 흔적을 찾아내었고, 마을 사람들을 협박해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냈다고 한다.

“동쪽 산신이 그를 지켜준다는 약속을 했으니, 사실 안심해서 알려준 것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에르윈 대공이 산신 토벌 작전을 수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산속에서만 살던 그들이 이방인을 통해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이미 동쪽 산신 역시 토벌 된 이후였다고 말했다.

“해서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대공 각하의 성에 검은 마수가 존재한다니.”

아스펠라가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그럼 저 마수한테서는 어떤 영혼이 보이세요? 위험한 영혼일까요?”

노인은 저 멀리서 아이들과 놀고 있는 검은 마수를 가만히 쳐다봤다. 이내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불온한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많이 혼란스러워하는군요. 잘 지켜보셔야 할 겁니다. 보아하니, 아가씨가 주인 되시는 분인가 봅니다.”

그 말에 아스펠라 옆에 있던 펠킨이 조용히 입술을 항문처럼 오므리며 웃음을 참았다. 아스펠라는 “주, 주인이라뇨! 주인까지는 아니고요. 그냥 친한 사이예요.” 하며 손을 내저었다.

검은 마수와 깊이 사랑하는 사이라고 하는 것도 보통의 사람들에겐 이상하게 들릴 것 아닌가.

“그렇군요. 아가씨를 참 잘 따르길래. 그럼 대공 각하가 주인이겠군요.”

펠킨은 웃음을 참지 못하겠는 듯 결국 급히 자리를 떴다. 아마 분명 사람 없는 곳으로 가서 배를 부여잡고 한참 웃어댈 것이다.

대공 각하의 주인이 아스펠라 양이라니, 어찌 보면 맞는 말이겠네요! 하며.

노인에게 모든 걸 설명하기엔 복잡하니 아스펠라는 그냥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놀던 아이들이 아스펠라에게 손을 흔들었다. 칼리우스는 제 몸 위로 올라오고, 갈기를 잡아 그네 마냥 흔들며 노는 아이들을 체념한 듯 가만히 땅에 엎드려 낮잠을 자려는 듯했다.

아스펠라는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면서, 앞으로 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광경을 가만히 미소 지으며 눈에 담았다.

[아스펠라!]

멀리서 아이들과 함께 놀던 하양이가 그녀에게 달려왔다.

하양이는 의외로 검은 마수를 보고도 까무러치지 않았는데, 아마 자신이 강아지였을 때보다 훨씬 몸이 자라 그와 맞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아스펠라의 치맛자락을 물고 잡아당기며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려 하자, 아스펠라는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양이는 발걸음을 옮기는 아스펠라 옆에 찰싹 붙어 가다가, 잠시 뒤를 돌아 노인을 쳐다봤다.

노인은 하양이를 지긋이 쳐다보다 이내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가 하얀 개와 눈을 마주친 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하양이는 다시 뒤돌아 아스펠라를 쫓았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검은 마수를 놀리는 아스펠라를 향해 컹컹 짖으며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지팡이를 쥔 노인의 손이 잘게 떨렸다.

“어찌하여…… 그 작은 몸으로 다시 태어나신…….”

***

일카이는 칼리우스의 정체를 알게 된 그날 이후 동료들에게 당분간 훈련을 빠지겠다는 말을 남긴 채로 바로 대공 성을 빠져나왔다.

그런 뒤 그는 오랜만에 누이와 어머니, 그리고 유모와 함께 살던 마을에 돌아갔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텃밭에서 일을 하고 있던 유모가 후다닥 뛰어나와 맞이했다.

“아이고, 우리 도련님이 오셨네!”

혼란스러워 하는 얼굴을 보이면 유모가 분명 갖은 걱정을 할 것이 뻔하기에, 일카이는 최대한 표정을 갈무리했다. 굳이 애를 쓰지 않아도 유모 얼굴을 보니 안도감이 찾아왔다.

“유모도 참, 사냥꾼한테 도련님이 뭐야.”

“오랜만에 오셨어요, 아유, 이렇게 오실 줄 알았으면 뭐 좀 준비해두는 건데.”

일단 집에 들어가자며, 유모가 신나서 그를 잡아당겼다.

“됐어. 유모 얼굴 보려고 온 거야.”

집에 들어가니 익숙한 어린 시절의 냄새들이 났다. 그는 이곳에서 어머니와 누이와 유모와 넷이서 함께 살았다.

“이리로 오셔요. 도성에서 여기까지 꽤 멀 텐데 시장하시겠네.”

“내가 뭐 밥 얻어먹으려고 온 줄 알아? 유모나 밥 잘 챙겨먹어. 어째 더 마른 거 같다.”

“아이고. 마르기는요. 삼시 세끼 우리 도련님이 매달 부쳐주는 돈으로 고기 사먹느라 얼굴이 빵빵해졌는데.”

“그럼 다행이고.”

일카이가 모든 것을 알고 왔을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유모는 그저 오랜만에 그가 돌아와 신난 듯 이것저것 푸짐하게 한 상을 차렸다.

일카이는 가만히 유모를 바라봤다. 언제나 사라와 일카이에게 귀하고 특별한 분들이니 뭐든 잘할 거라 말하던 유모였다.

‘유모는 알고 있겠지? 알고 있으니 그리 말한 거겠지?’

“드셔 봐요. 어떤지. 요즘 내가 늙어서 그런가 간을 영 못 맞추겠는 거 있죠.”

“유모 음식 솜씨는 언제나 최고지.”

“아유, 어쩜 이리 말도 예쁘게 하실까. 해서, 왜 오늘은 혼자 오셨대요? 이번엔 둘이 오는 줄 알았더만.”

“…….”

“홍홍, 왜요. 저번에 말했던 그 산속에 산다는 어어엄청 예쁘다고 한 아가씨요. 그 아가씨한테 고백은 해봤어요? 벌써 사귀는 사인가? 하긴, 이렇게 잘생긴 사내가 고백하는데 어느 누가 마다하겠어요?”

주책맞은 소리를 하면서도 유모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빨리 결혼하셔서, 토끼 같은 도련님 자식들 보는 게 이 유모 소원입니다.”

일카이는 유모를 어머니처럼 따랐다. 실제로 그와 사라를 키운 것은 유모였다.

어머니는 항상 의자에 앉아 멍하니 창문만 바라봤고, 제 자식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땐 그저, 어머니가 누이와 저를 사랑하지 않고 아버지만 그리워하는 줄 알았다.

‘뭐, 그 점은 다르지 않은 건가.’

유모는 언제나 어머니를 감쌌고, 안쓰럽게 여겼다. 그녀가 발작을 일으키거나 산발이 되어 마을을 돌아다니면 언제나 다정하게 돌봐주고 집으로 데려왔다.

‘어머니는 우릴 사랑하지 않는 거야?’

‘아니에요. 왜 안 사랑하시겠어요. 그저 너무 많은 충격을 받아서 그래요. 아가씨와 도련님을 지키느라 너무 많은 일을 겪었어요.’’

자신이 그 빈자리를 채워주겠다던 유모에게, 이제는 모든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전에 말한 그 여자애한테는 대차게 까였어.”

“네?! 아니, 우리 도련님이 뭐가 부족해서요?”

“여기저기. 어쩔 수 없었다고. 상대방이 무려 에르윈 대공인지라.”

“에르윈, 대공이요? 저번에도 말했듯이, 도련님. 귀족들이랑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마세요. 접점도 만들지 마시고요. 위험하시다니까요.”

“알아. 하지만 능력이 있어서 자꾸만 주목을 받는 걸 어쩌냔 말이야.”

일카이가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 짓자, 유모는 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애는 실패했으니, 다른 뭐라도 얻어야 하지 않겠어?”

“다른 거요?”

“이번에 열리는 사냥제에 대공의 사냥 팀으로 출전하게 되었거든. 승리자의 팀에는 여러 가지 부상이 주어진다는데. 상금은 물론이고 평민에게는 기사 작위까지 준다더라고.”

유모도 이제 이런 산속에서 나와 도성에서 살자. 요즘 부정신이다 뭐다, 말도 많잖아. 일카이의 말에 유모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사냥……제요?”

“그래. 사냥제. 10년 만에 열리는 사냥제라 그런지 규모가 크더라고. 국왕도 볼 수 있대. 내가 살면서 튀니아의 국왕을 바로 앞에서 볼 일이 이때 말고 또 있겠어?”

일카이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말하며 유모의 반응을 살폈다.

“내 실력으로는, 승리하는 건 물론 국왕의 눈에도 들 수 있을 정도라고 하더라.”

“그, 그래요?”

유모가 눈에 띄게 동요하는 것에 일카이는 더 이상 억지로 입꼬리를 잡아 올리며 웃어 보일 수 없었다.

유모는 일카이를 보지 않은 채 괜히 빗자루로 바닥을 쓸며 말했다.

“그래도, 사냥제라는 거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물론 우리 도련님이야 워낙 출중하시니까 독보적이겠지만요, 그래도 저는, 거기 가지 않으셨으면 해요.”

“왜?”

“사라 아가씨와 로즈 님의 기일과 겹치잖아요? 오, 오랜만에 도련님이랑 같이 무덤이나 정돈하러 갈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고?”

일카이의 말에 빗자루 질을 하던 유모의 손이 멈췄다.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그냥…… 늙은이가 외롭다, 이 말 하는 거죠.”

“내가 국왕의 눈에 띄면 안 되는 게 아니라?”

“…….”

“유모. 내가 19년 만에 내 진짜 이름을 알게 되었지 뭐야.”

“그게 무슨 뜻이셔요?”

“내 성 말이야. 난 성씨가 없었잖아.”

유모가 천천히 뒤돌아 일카이를 쳐다봤다. 동요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빗자루를 꽉 쥔 손이 연신 부들거렸다.

“성이라뇨.”

일카이가 조용히 침을 삼켰다. 물어봐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말을 뱉어야 하는데 목에 가시가 박힌 것마냥 자꾸만 턱턱 막혔다. 하지만 이윽고 일카이는 내뱉었다.

“……일카이 로잘린드. 맞지? 어머니는, 로즈가 아니라 달리아 로잘린드이고.”

로잘린드가 성이라니. 나처럼 시커멓고 커다란 남자애한테는 좀 안 어울리는 성 같아. 능청스럽게 말하긴 했으나, 일카이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유모는 빗자루를 떨구곤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찌 안 것인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한 얼굴이네.”

“도련님.”

“유모. 누이가 왜 죽었는지 알아? 짐승한테 습격 받았어. 유모가 충격 받을까 봐 내가 그때 보여주지도 않았잖아. 그냥, 사냥을 하다 사고로 죽은 거라고 했잖아.”

근데 그거, 국왕이 한 짓이야.

검은 마수로 변하는 아버지를, 튀니아의 선왕을 이용해서 사라를 죽인 거라고.

“유모는 왕궁에서 어머니를 모셨던 이였겠지. 그러니까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도 알고 있을 거고. 어머니가 뱃속에 나를 가진 채로, 그곳에서 누이와 도망치던 날에 대해 말해줘.”

유모는 다리가 풀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카이는 얼른 그녀를 부축하여, 의자에 앉힌 뒤 물을 떠다 건넸다. 그날 일을 상기하니 목이 벌써부터 메여왔다.

유모는 물을 들이마시곤 숨을 고른 뒤, 잠시 일카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달리아 님이, 공주님과 도망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단지 정치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가문에서 버려진 것도 아니고요.”

선왕의 정비였던 피올라 왕비는 사라를 탐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를 예뻐하여 그런 것은 아니었다.

“왕비는, 공주님을 죽이려 했답니다. 주술사를 데려와 진을 그리게 하고, 그 위에 공주님을 뉘였어요. 제물로 바치려던 셈이었는지……. 그걸 달리아 님께서 발견하셨고, 다행히 공주님은 무사하셨습니다.”

그 이후 달리아는 사라와 함께 왕궁에서 빠져나와 도망친 것이었다.

“선왕께서 돌아오셔서 이 모든 일을 전해들으시고 격노하여 피올라 왕비를 별궁에 가뒀지요. 그런 뒤 달리아 님을 찾으러 사방을 돌아다니셨어요. 결국엔 찾아내셨지요.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셨어요. 결국 못 찾고, 죽은 걸로 꾸미셨습니다.”

가짜 장례식을 열고, 가짜 추모를 했다.

“선왕께서 달리아 님을 찾아내셨을 땐 이미 도련님을 임신하고 막달에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선왕께서는 조용히 저를 달리아 님께 보냈어요. 그분과 아이들을 잘 지켜달라고요.”

그렇게 말한 유모는 침대 밑에 있던 달리아의 유품들 사이에서 오래된 노트를 꺼냈다.

“달리아 님의 일기입니다. 사실, 일기라고는 하나 아가씨와 도련님한테 쓴 편지들이에요. 달리아 님이 돌아가신 이후로는 사라 아가씨가 이 일기장을 쓰셨지요. 도련님은 일기 쓰는 것이 제일 싫다고 쳐다도 안 보셨잖아요.”

한번 읽어 보셔요, 하며 유모가 노트를 건넸다.

종이들을 접어 간책으로 엮은 낡은 다이어리. 일카이는 잠금 부분의 실들을 돌려 뺀 뒤 노트를 펼쳤다.

“유모는 아버지가 검은 마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믿기진 않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라 아가씨께서는 그 마수가 선왕이시라는 걸 아셨어요. 아가씨는 원래 동물과 대화할 수 있으셨잖아요.”

그렇게 말한 유모가, 분노와 슬픔에 찬 얼굴로 말했다.

예전 왕궁에서 일했을 때, 피올라 왕비가 주술사와 함께 대화하는 것을 몰래 엿들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사라를 자물쇠라 불렀다. 그것이 정확히 뭘 뜻하는지 알 수는 없어도, 적어도 사라를 노리는 이유라는 것은 알 것 같았다.

“파베스 님도 그걸 알고 있으니 아가씨를 죽인 게 분명해요. 이제는 사라 아가씨로도 모자라 도련님까지 노리려 할 게 분명하다고요. 그런데도 사냥제를 나가시겠다는 말씀이세요?”

유모는 제발 나가지 말라며, 차라리 다른 나라로 배 타고 떠나자고 일카이를 설득했다.

“전 정말 도련님과 아가씨를 제 자식처럼 키웠어요. 달리아 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제게 두 분을 지켜달라 했는데, 사라 아가씨를 지키지 못해 얼마나 죄스러웠는데요.”

그러니 도련님만이라도 지키게 해달라며 유모는 애원했다.

“제 마음도 이해해주셔요. 복수하고 싶으시겠지만, 국왕은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아니에요.”

“미안해, 유모. 하지만……. 다 알고도 모른 척 할 수가 없어.”

일카이는 유모가 건넨 노트를 제 짐 사이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난 에르윈 대공을 따라 왕을 끌어내릴 거야. 내 출신이 그것에 이용된다 하면, 나는 그걸 이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도련님…….”

“솔직히, 어미가 정부라 할지라도 국왕의 피를 물려받은 거잖아? 천한 사냥꾼에서 인생 역전할 수 있는 기회 아니겠어? 출세하게 되면 유모를 데리러 올게. 기대하고 있어.”

일카이는 일부러 철없는 척 웃어 보이며 말했다.

유모는 그런 일카이를 가만히 보다 이내 뭔가를 결심한 듯 턱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그것이 도련님 뜻이라면 이 유모는 따라야죠. 도련님의 피는 고귀합니다. 선왕의 진짜 피를 물려받은 분이, 가짜 후계자를 몰아내려는 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가짜 후계자? 현재의 국왕을 말하는 거야?”

일카이의 물음에 유모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어디까지나 떠도는 소문이었지만, 저는 그 소문이 사실이라 믿습니다. 파베스 왕자는 선왕의 그 어느 부분도 닮지 않았어요.”

원래 궁에서는 아주 은밀하게 소문이 도는 법이었다.

윗분들에게 소문 도는 것이 들켰다간 모두 경을 칠 것이 뻔하니 그들 모두 눈치를 챘어도 침묵했을 뿐.

피올라 왕비와 선왕은 몇 번이고 합방을 했다. 그때마다 왕비가 준비해가던 차와 향이 있었는데 그것이 모두 수면제와 관련된 것이라는 걸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수면제라니. 합방 하는 사이에 수면제를 먹여 무엇을 하겠는가?

한 시녀는 왕비의 방에서 숨겨진 비밀 문을 발견했다. 왕비의 방에 비밀 문이 있다는 것은, 그녀가 은밀하게 어딘가로 나가거나 누군가가 그 방에 들어온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그리고 피올라는 왕비가 되기 전부터, 아끼는 주술사 한 명이 있었다.

그녀는 마치 그를 제 시종이라도 되는 양 데리고 다녔는데, 그 누구도 주술사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항상 후드를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채로 왕비를 그림자처럼 따랐기 때문이었다.

‘새벽 즈음 왕비님 방 앞을 지나가면, 그 안에서 웬 사내의 목소리가 들린대.’

간혹 자신이 직접 들었다거나, 인영을 보았다는 시녀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실종되거나 간혹 왕궁 연못에서 시체로 떠오르곤 했다.

“선왕 전하도 어렴풋이 눈치채셨을 겁니다. 어쩌면, 파베스 왕자가 자신의 아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요.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주술사가 친부일 겁니다.”

***

“버루카는 자네를 영 믿지 못하는 눈치더군.”

파베스의 말에 그 뒤에 서 있던 교주가 살풋 미소 지었다. 그러자 버루카가 당황스러운 듯 교주와 국왕을 번갈아 쳐다봤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교주가 픽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버루카는 그저 헛기침을 할 뿐이었다.

“제가 그의 기대에 못 미치나 봅니다.”

“어흠, 흠.”

“자네의 그 불분명한 출신도, 그 능력도, 모두 거짓이라 믿는 듯해. 하지만 걱정은 말게. 나는 자네를 아주 못 믿는 건 아니니까.”

그의 말에 교주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파베스는 우리 안에서 버둥거리는 인간 거죽을 뒤집어 쓴 짐승들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 교주를 쳐다봤다.

“그렇다고 또 아주 믿는 건 아니야. 자네가 어머니를 죽인 것 역시 잊지 않고 있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알고 있네. 그 교린지 뭔지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거겠지.”

파베스는 자신을 따르는 교주와 그 신도들이 정확히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버루카의 말대로 모두 출신이 불분명한 것을 떠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들은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는 법이 없었으며, 저들끼리 있을 땐 그 어떤 사담도 하지 않았다.

그들을 감시하여 정체에 대한 실마리라도 알아내려 했으나 여태까지 알아낸 것이라곤, 저 교주가 어머니와 매우 가까웠다는 것뿐.

파베스는 아직도 그가 어머니를 죽이던 순간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충격과 공포, 분노가 일기 보다는 그저 죽었고, 죽였고. 그 두 가지 사실로만 다가왔다.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어머니가 그의 손에 죽임 당했을 땐 내가 죽지 않아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더랬다.

“자네가 죽이지 않았다면 내가 죽였거나, 혹은 내가 죽임 당했겠지.”

“…….”

“자네는 날 꼭두각시로 부리고 싶은 건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루이나의 봉인을 풀 만한 재목을 찾아다녔을 뿐이고, 후에 루이나 그 자체가 되실 분에게 충성하는 것뿐입니다. 피올라 왕비는…… 제 역할을 제대로 완수하지 못했을 뿐이고요.”

“그래. 맡은 바 역할을 제대로 못하면 죽는 거지. 네놈의 방황도 여기서 끝이겠구나. 이제 곧 봉인이 열릴 테니 말이야.”

그의 말에 교주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파베스는 정면을 향한 상태로, 눈만 힐긋 그를 쳐다봤다.

‘주술사를…… 믿지 마…….’

배신당한 표정으로 피를 토하던 피올라는 마지막 힘까지 짜내어 제 아들에게 기어갔다. 제 아들을 껴안으려던 건지, 아니면 목을 조르려던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를 믿으면 안 돼……. 이용당하지 마라…….’

그는 어머니를 사랑하지도, 믿지도 않았지만 그때 피올라가 보인 눈빛은 진심이었다.

저놈이 숨기는 게 대체 뭘까?

도대체 무슨 속셈이기에 아직까지도 발톱 한 번 내보이지 않고 있단 말인가.

파베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우리 안의 덩어리를 가만히 바라봤다.

‘뭐가 되었든, 난 봉인을 풀고 힘만 손에 넣으면 돼.’

파베스가 손짓하자, 온몸을 철갑으로 두른 두 사람이 우리 앞쪽으로 들어갔다.

한 명이 작은 철창문을 열자 다른 한 명이 짐승을 제압할 때 쓰일 법한 올가미가 달린 긴 죽창을 우리 안의 사람들에게 휘둘렀다.

이내 올가미에 걸려든 이가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며 속절없이 끌려 나왔다.

목이 졸려 캑캑대면서도 연신 손을 허우적거리며 병사들의 피와 살점을 취하고 싶은 듯, 썩은 동태 눈깔마냥 희뿌연 눈을 번쩍 뜨며 소리를 질러댔다.

다른 병사들이 몰려와 그를 제압하기 위해 거대한 창들로 그 몸을 쑤셔댔다. 날카롭고 뾰족한 것이 온갖 장기를 찌르며 안쪽을 헤집어도, 그는 어떠한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죽여도 죽지 않고, 몇 번이고 베고 찔러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며, 오로지 공격하고 싶다는 욕망에 장악된 이들은 그야말로 최고의 인간 병기였다.

불사체가 포박되어 실험대 위에 올랐다. 그것이 움직여 인간을 물지 못하도록 입에는 재갈을 물리고, 머리와 목, 팔과 다리는 각각 실험대 위의 두꺼운 벨트로 고정시켜 놓았다.

온몸에 철갑을 두른 의사가 실험대 옆으로 와서는 국왕에게 인사를 한번 한 뒤, 실험인지 수술인지 결국엔 정상적이지 않은 행위들을 시작했다.

불사체의 몸에 칼집을 낸 뒤 그 피를 호스에 연결하자 검붉은 혈액들이 호스를 타고 유리병 안으로 뚝뚝 떨어졌다.

금세 꽤 많은 양의 혈액들이 병 안에 모였는데, 피 위로 검은 연기들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의사는 그 피를 소분하기 시작했다.

혈액과 썩어가는 고깃덩이의 냄새를 맡고 온 파리들이 주변에 어른거리자 국왕의 옆에 서 있던 버루카가 인상을 찌푸리며 파리들을 내쫓았다.

“전하. 이런 것들을 꼭 보셔야겠습니까. 그저 피를 뽑고 소분하는 것뿐입니다.”

“재밌지 않느냐. 무료한 왕궁 생활 중 유일한 내 낙이다.”

불사체들을 해부하고, 재조립하고, 그것에서 피를 뽑는 등의 보기 역겨운 실험들을 직접 관찰하는 것은 파베스의 고약한 취미였다.

비위도 참 좋지. 저 광경을 보며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는다니.

버루카는 조용히 제 코를 틀어막았다.

의사는 실린더 같은 길고 작은 유리병에 담긴 혈액들을 밀봉한 뒤, 화려한 금장으로 장식된 약통에 하나 둘 끼워 넣기 시작했다. 의사는 약 가방의 뚜껑을 닫기 전 그것들을 국왕 앞으로 가져갔다.

파베스는 그 혈액들이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 만족스러운 미소로 한번 쓰다듬고는 이내 교주를 쳐다보며 물었다.

“헌데, 이걸 왜 지금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이냐?”

파베스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 혈액들을 사용하고 싶은 듯했다. 이것만 쓴다면 저 우리 안의존재들이 수십, 수백으로 늘어날 것 아닌가.

“아직 이 존재에 대해 더 연구를 한 뒤에, 완벽히 다룰 줄 알게 되었을 때 사용하셔야지요.”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온 것을 목전에 두고 또 기다리라 하니, 파베스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이 혈액을 사용하고 싶었다.

“이제 곧 사냥제가 열리고, 이들이 날뛸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참아주십시오.”

“그래. 내 몇 년을 참았는데 단 며칠을 못 참을까.”

그는 모여 있는 유리병 중 하나를 꺼내들며 그 안에 찰랑대는 것을 가만히 쳐다봤다.

“헌데 이거 하나는 내가 가져가마. 내 아버지께 선물을 하나 드릴까 해. 그 정도는 봐줘도 되지 않은가, 교주?”

“전하!”

그 말을 들은 버루카가 창백하게 질려 그를 말리려 했으나 국왕은 말린다고 말려질 인물이 아니었다.

선왕은 검은 마수다. 지금도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아 아다만트 석과 온갖 철 구속구로 겨우 이곳에 잡아둔 존재 아니던가.

이 혈액으로 그가 만일 저 우리 안의 존재들과 같아진다면 더 위험해질 것이다.

위의 이유만이 아니더라도 버루카가 파베스를 막으려는 이유는 또 있었다.

“전하, 아무리 지금은 짐승의 모습이라 해도, 전하의 친부이며 한때 이 나라의 선왕이었던 자에게 어찌 그런 것을 사용하신단 말입니까.”

아무리 선왕과의 사이가 돈독하지 않았다 한들,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짓이었다.

버루카는 자신의 뜻에 동조라도 해달라는 듯 고개를 들어 반대편에 있던 교주를 쳐다봤다.

“그리하시지요. 너무 날뛰게만 하지 마십시오.”

“아니, 말려도 모자랄 판에 그게 무슨 말이오, 교주!”

교주의 말에 파베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혈액이 든 유리병을 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전하. 정말 그걸 마수에게 사용하실 셈입니까? 만일 날뛰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것이 여태까지 몇 번이고 날뛰었는데 어디 도망친 적이 있더냐? 아버지는 말이야, 그것이 문제다. 정이라는 것이 무어라고 참…….”

파베스는 검은 마수가 자신을 결코 죽이지 못할 것을 아는 듯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검은 마수는 파베스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서 도망쳤으면 도망쳤지, 제 아들을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선왕은 원래 사람이 착했다. 그것이 그의 패착이었다.

파베스는 쯧쯧 혀를 차며 검은 마수를 가둬놓은 방으로 향했다. 버루카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쳐다봤다.

“더 안 말리시려고요?”

뒤에서 교주가 물었다. 굳이 돌아서서 그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그가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을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버루카가 경멸하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교주는 그런 버루카의 표정을 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말린다고 말려질 분입니까. 그냥 포기하세요. 전하께서는 하고 싶으신 것은 꼭 하셔야 직성이 풀리시니까요. 그 점은 참 피올라 왕비를 닮았군요.”

“교주는 지금 웃음이 나오시오?”

“웃지 못 할 것은 또 뭡니까.”

“허.”

“참 인간들은 재밌는 존재 같습니다.”

교주의 말에 버루카가 어이없다는 듯 “댁도 인간인데 뭔 알 수 없는 소리요?” 하며 국왕의 뒤를 따랐다.

“아닌가. 피올라가 아니라, 날 닮은 것인가?”

교주가 작게 중얼거렸다.

***

밤이 깊어지자 칼리우스는 동굴에서 나와 아스펠라를 등에 태우고 뒷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칼리우스의 따듯한 털에 몸을 뉘이곤 가만히 달을 쳐다보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갑자기 칼리우스가 고개를 들어 먼 곳을 가만히 쳐다봤다.

검은색 귀는 어떤 소리에 반응이라도 보이듯 쫑긋쫑긋 움직이기도 했다. 그의 털 속에 파묻혀 있던 아스펠라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왜 그래요?”

[뭔가가 날 부르는 것 같아서.]

아스펠라 역시 귀기울여봤으나, 들리는 소리라고는 바람소리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보통의 청력을 가진 아스펠라와 개의 청력을 가진 칼리우스가 듣는 범위가 다른 것은 당연했다.

그저 잘못 들은 것인가 생각하려던 찰나, 다시 한번 그가 반응했다.

아우우우-

하울링 소리는 분명 누군가의 도움을 요청하는 듯했다.

칼리우스는 본능적으로 저 소리를 내는 이를 구하러 가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그에게 몸을 기대고 있던 아스펠라가 뒤로 미끄러졌다. 엉덩방아를 찧은 아스펠라가 제 엉덩이를 문지르며 칼리우스를 불렀다.

“칼리우스?”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군요.]

“어딜요?”

칼리우스는 자신에게만 들리는 저 소리가 구조 요청이라는 것을, 그 도움을 요청하는 자가 자신과 같은 종족이라는 걸 느꼈다.

[아스펠라. 성에 데려다 줄 테니 등에 올라타요.]

칼리우스는 주둥이로 아스펠라를 제 등에 태우더니, 이내 훌쩍 산 아래로 내려와 성의 뒤뜰에 내려주었다.

아스펠라는 그가 어디로 가려는지 알 것만 같아, 칼리우스의 검은 털을 붙잡으며 당부했다.

“위험한 짓은 하지 마세요.”

[네. 무슨 일인지 보고만 오겠습니다.]

아스펠라는 이것이 파베스가 파놓은 함정이 아닐까 걱정되는 듯했다.

사실 칼리우스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걸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처절한 구조 요청을, 그는 차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또한 종족을 구하려는 짐승의 본능이 자꾸만 그에게 빨리 가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동이 트기 전까진 돌아오겠다며 칼리우스가 이내 울음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땅을 박차며 날아오르듯 뛰어가기 시작했다.

아스펠라는 거대한 몸이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걱정스러운 듯 그쪽을 바라보다 이내 성 안으로 들어갔다.

새벽녘이 되자 금세 추워져서 아스펠라는 방으로 돌아가 두꺼운 로브를 걸쳤다.

침대에 앉아 가만히 창밖만 바라보던 그녀는 어느새 능선 위로 주황빛이 번지는 것을 발견했다.

동이 터오고 있었다. 해가 뜨면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한낮은 깊은 밤처럼 칼리우스의 큰 몸과 새카만 털을 가려주지 못할 것이다.

혹시라도 그가 다른 누군가에게 공격 받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던 찰나였다.

쿵! 거대한 것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아스펠라 역시 곧장 바깥으로 나갔다. 복도를 달리고 계단을 내려가 곧장 마당 쪽으로 향하니…….

“칼리우스!”

아스펠라는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몸을 가누질 못해 머리를 땅에 박은 채 퍼덕대던 짐승은, 제 주변으로 다가오는 병사들을 향해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마냥 이를 보이며 그르렁댔다.

주둥이 사이로 피가 섞인 거품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의 몸통에서 흘러나온 비릿한 피가 녹색 잔디를 붉게 물들였다.

“각하!”

펠킨 역시 그의 상태에 충격 받은 듯, 가까이 다가가려 했으나 칼리우스는 그 누구도 제 곁에 오지 못하도록 연신 컹컹 짖어댔다.

아스펠라가 천천히 그와 눈을 마주치며 다가갔다.

“나예요. 칼리우스. 나예요!”

끊임없이 말을 걸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이상했다. 비르가가 그리했던 것처럼 자신 역시 결정체를 만들어 그에게 먹였고, 그로 인해 칼리우스는 아스펠라와 떨어져 있어도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있었을 터였다.

“칼리우스…….”

하지만 지금 제 앞의 검은 마수는 그저 부상당한 짐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스펠라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으며,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조차 혼란스러워하는 듯했다.

“칼리우스, 나예요. 아스펠라.”

아스펠라가 조금 더 천천히 가까이 다가가자 칼리우스가 아까 전보다 더 위협적으로 짖어댔다. 그가 짖을 때마다, 핏물이 아스펠라의 옷에 후드득 튀었다.

“아스펠라 양! 가까이 가지 마세요. 못 알아보시는 것 같습니다!”

펠킨이 위험하다며 아스펠라를 말렸지만 아스펠라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펠킨은 그 광경을 발만 동동 구르며 지켜보면서도, 병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려는 듯 그들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병사들이 펠킨의 지시에 따라 천천히 무기를 쥔 채로 다가가자 그 낌새를 눈치챈 마수가 앞발을 휘두르며 그들이 제 쪽으로 다가오지 못하도록 했다.

“아스펠라 양!”

“할 수 있어요, 보좌관님! 제가, 제가 할 수 있어요.”

아스펠라는 절대 그를 공격하지 말라며 조금 더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갔다.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며 붉은 눈동자와 마주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저 안에 든 것이 짐승이든 칼리우스든 이젠 상관없으니, 그저 그가 뭘 그리 경계하고 두려워하는지 알고 싶었다.

“내가 도와줄게요, 내가 도와줄게요.”

아스펠라가 눈을 마주친 채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러자 검은 마수가 뭔가를 대답하려는 듯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여전히 위협적이고 두려운 짐승의 소리였으나, 아스펠라는 그가 뭘 말하려 하는지 알아들었다는 듯 조금 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목에 뭐가 박힌 거예요? 제가 빼줄게요. 빼줄 수 있어요.”

아스펠라는 천천히 개의 콧잔등에 제 손을 가져다댄 뒤, 천천히 그가 진정할 때까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코를 킁킁대던 짐승은 아스펠라에게서 위협적인 느낌을 받지 않은 것인지 이내 퍼덕대던 움직임을 멈췄다.

“옳지. 이제 입을 벌려줄래요?”

천천히 주둥이 부근을 쓰다듬으며 아스펠라가 말하자, 짐승이 길고 거대한 주둥이를 쩌억 벌렸다.

송곳니는 물론 이빨 사이사이 진득한 핏덩이와 피거품이 잔뜩 끼어 있었다.

아스펠라는 그 안에 제 팔을 천천히 집어넣었다.

다들 아스펠라가 뭘 하려는 것인지 몰라 그저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나 차마 소리 내어 물어볼 수 없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아스펠라는 마수의 주둥이 안으로 제 팔부터 어깨까지 모조리 집어넣었다.

마치 뭔가를 찾는 듯 천천히 입 안을 더듬었다.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유디티아 후작저의 온실에서 맡았던 악취와 비슷한 냄새가 느껴졌다.

이내 뭔가가 손에 잡혔고, 목구멍 깊숙이 박힌 그것을 빼내려 힘을 줬을 때였다.

콰득!

“윽!”

“아스펠라 양!”

아스펠라가 힘을 줌과 동시에, 고통스러운 듯 퍼덕거리던 마수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기겁한 펠킨과 병사들이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듯 달려들려 하자, 아스펠라가 그대로 오지 말라며 소리쳤다.

그러더니 다시 마수의 주둥이를 천천히 쓸어내리며 그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내가 안 아프게 해줄게요.”

천천히 미소 짓던 아스펠라가 마수의 입 안에 박힌 것을 잡고 다시 한 번 힘을 주었다.

대신 아까 전처럼 잡아 빼려하기보다는 마치 녹이려 하는 것처럼 손을 댔다.

어째서인지 확실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아스펠라는 결정체를 만들 때와 같은 방법을 사용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쯤 송곳니가 박힌 어깨가 뻐근하게 아파왔으며, 피가 많이 흘러 어지럽기도 했으나 멈추지 않았다.

‘결정체를 만들려면 일단 머릿속에 작은 돌멩이를 그려야 한다.’

‘돌멩이? 어떤 돌멩이? 깨끗한 돌멩이, 아니면 더러운 돌멩이?’

‘상관없다. 다 같은 돌멩이니까. 그 돌멩이를 쥐고 그 안에 빛을 집어넣는 상상을 하렴. 은하수의 수많은 별들 중에서 가장 빛나는 하나를 잡아다가 돌멩이 안에 집어넣는 거야.’

빛이 스며든 돌멩이는 이제 이전과는 전혀 달라지겠지.

어떤 빛을 넣는지에 따라 각기 다른 빛을 내뿜을 거다.

어린 아스펠라가 궁금한 것이 있는 듯 고개를 갸웃대다 비르가에게 물었다.

‘그럼, 어둠을 집어넣으면 어두워지겠네?’

‘어둠은 조약돌 안에 들어갈 수 없단다. 그건 조약돌 안에 이미 존재하는 거지. 우린 빛을 만드는 거야. 빛은 어둠에서만 태어나니까.’

그와 동시에 아스펠라의 손에 잡힌 단단한 것에서 작은 빛이 일었다.

딱딱한 표면이 바스락거리며 그 사이로 빛을 내뿜었고, 그것들은 녹는 것마냥 진득하게 아스펠라의 손가락 사이로 흐르기 시작했다.

입을 다물고 몸을 퍼덕이던 검은 마수 역시 제 목구멍 안에 박혀 있던 것이 고통과 함께 점점 사라지자 천천히 다문 입을 벌렸다.

아스펠라가 물린 손을 빼내자 뒤에 있던 사람들이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거 봐요. 내가 이제 괜찮아질 거라 했잖아요.”

아스펠라는 잘 참았다며 그의 콧잔등을 다른 한 손으로 천천히 긁었다.

마수는 이내 그런 아스펠라를 쳐다보며 다리를 절뚝대더니, 이내 몸을 틀어 뒷산 쪽으로 달려갔다.

“빨리 쫓아가세요, 이미 다른 곳의 부상이 심해서 멀리 도망가진 못할 거예요!”

아스펠라의 말에 병사들이 얼른 그의 뒤를 쫓았다. 펠킨이 달려와 기우뚱 옆으로 쓰러지려는 아스펠라를 부축했다.

“이게 뭐예요 진짜!”

“아니, 왜 다친 건 전데 보좌관님이 울어요…….”

펠킨의 안경 너머 눈이 그렁그렁하다. 아스펠라가 놀리듯 물어도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있기를 선택했다.

“진짜 우시는 거예요? 칼리우스가 걱정되는 거면, 많이 다치긴 했어도 죽진 않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

“난 지금 아스펠라 양을 걱정하는 거라고요! 흐어어엉! 이봐, 당장 가서 의사를 데려오거라!”

팔이 잘리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냐며 펠킨이 눈물 콧물을 줄줄 쏟기 시작했다.

그게 그렇게 울 일인가? 이제 곧 스물여섯이나 될 남자가 이런 걸로 울 일인가 싶다가도, 오죽 놀랐으면 이렇게 울겠나 싶어 아스펠라가 어색하게 그를 달랬다.

“울지 말아요. 보좌관님.”

“진짜, 두 분 다 왜 이렇게 제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십니까. 각하는 왜 저런 꼴이 되신 거고, 아스펠라 양은 왜 자기 몸 소중한 줄 모르고! ……흑, 근데 그건 뭡니까?”

그간 쌓이고 쌓여왔던 걱정과 속상함과 서러움에 훌쩍 대던 펠킨이 아스펠라의 손에 쥐여진 것을 물었다. 아스펠라는 그제야 제 손에 들린 것을 쳐다봤다.

“칼리우스의 목구멍 안에 박혀 있던 거예요.”

“진흙입니까?”

손바닥을 펴자, 온통 찐득한 것들 투성이였다. 뭔지는 모르겠으나 이게 평범한 진흙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진득한 것들을 손가락으로 헤집자, 그 사이로 작은 총포탄이 나왔다.

“이렇게 작지 않았는데.”

아스펠라가 중얼거렸다. 그녀가 맨 처음 손에 쥐었을 때는 손바닥으로 다 감싸지 못할 만큼 컸다. 성인 남성의 주먹만 한 크기였다.

이내 그녀는 제 손 안에서 여전히 찐득대는 정체불명의 것을 몇 번 더 뒤적였다.

악취의 근원인 듯한 역한 냄새가 올라오자 펠킨은 얼른 닦아야겠다며 제 손수건을 건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스펠라가 중얼거림과 동시에 멀리서 병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각하를 찾았습니다!”

병사들은 인간이 된 칼리우스를 부축해 돌아왔다. 그의 몸은 여기저기 찢어져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각하?! 아직 돌아오실 시기가 아닌데…….”

“칼리우스!”

아스펠라는 칼리우스에게 가려는 듯 펠킨의 부축을 마다하고 그쪽으로 걸어갔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 그대로 정신을 잃고 고꾸라졌다.

“아스펠라 양!”

비밀을 품느라 조용했던 에르윈 대공 성이, 새어나가려는 비밀 때문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 모든 난리가 잠잠해질 때 즈음엔 천천히 떠오르던 해가 대공 성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펠킨은 혹시 몰라 얼른 정찰병들을 영지 주변에 풀었으며, 다른 이들을 불러다가 혹시나 저잣거리에서 간밤의 일을 목격한 이가 없는지 알아보도록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반지하의 철창 사이로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민튼이었다.

선혈이 낭자한 대공가의 새벽녘을 목도한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에르윈 대공이 검은 마수인 건가?”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아 몇 번 더 중얼거리며 제 옆의 기사를 툭툭 치며 재차 물었다.

같이 목격한 동료 역시 제가 지금 뭘 본 건지 아직 실감나지 않은 듯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이게 대체 뭔 일이야?”

“…….”

“큰일 난 것 아닌가? 에르윈 대공이 검은 마수라면, 우리 정말 먹힐지도 모르겠네.”

그의 동료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더니, 이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다시 후다닥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민튼은 그러지 않았다. 가만히 아까 전 자신이 본 것들을 곱씹더니, 이내 미친 사람처럼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 ……하하! 하하하! 에르윈 대공이 검은 마수였어!”

“자, 자네 미쳤나? 얼른 입 다물고 이리 오게! 비밀을 들킨 것을 알아버렸다며 우릴 아예 죽일 수도 있지 않은가!”

동료의 말에도 민튼이 호탕하게 웃다 그를 보며 말했다.

“이게 어찌 단순한 우연이겠는가.”

“뭐?”

“이건 우연이 아닌 거야.”

알 수 없는 말만 내뱉으니, 동료는 그가 아주 미쳐버린 것이라 생각해버렸다.

극도로 두려운 존재를 바로 앞에서 목격했으니, 무서워서 완전히 돌아버린 것이로군!

그리 결론내린 동료가 알았으니 이리 오라며, 얼른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아 당겼다.

“우린 그냥 대공이 물어보는 대로 대답할 거 다 대답하면 되는 걸세. 어쩌면 대답할 거 다 대답해도 죽을지 모르는 상황인데 웃음이 나오냐? 빨리 와, 아주 대놓고 다 목격했다고 자랑이라도 할 테야?!”

그러나 민튼은 오랫동안 앓던 이가 빠진 것마냥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란을 듣고 위로 올라갔던 병사들이 다시 감옥으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창살을 쥐고 있던 민튼이 얼른 그들을 불렀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와중에 자신들을 불러대는 민튼이 성가신 듯, 병사들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뭐요?”

“에르윈 대공 각하를 만나야겠소. 내 모든 것을 다 말할 테니 풀어주시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그의 동료는 물론 병사들도 모두 의아한 눈치였다.

***

아스펠라는 꿈과 현실 사이 어딘가에 애매하게 놓인 기분이었다.

분명 의식은 있으나 눈을 뜨기 힘들었고, 열감이 느껴져 몽롱했다.

펠킨의 긴박한 목소리와 시녀들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 그리고 의사가 그녀의 어깨를 꿰매기 위해 달그락거리는 소리까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몸 위에 거대한 돌덩이를 올려놓은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아스펠라는 천천히 눈을 떠 제대로 맞춰지지 않는 초점으로 뭔가를 찾으려 했다.

“아스펠라 양. 정신이 드십니까?”

“……으……아…….”

꿰매지는 것은 어깨일 터인데, 어째 제 입도 같이 꿰매진 것인지 입 한번 열기가 힘들었다. 아스펠라는 천천히 입을 우물거리며 겨우 말을 뱉었다.

“카, 리우……스, 는요?”

제대로 듣기 위해 가까이 귀를 가져다 댄 펠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잘 계십니다.”

“거짓, 말.”

마지막으로 그의 모습을 봤을 때 온통 여기저기 찢겨지고 피투성이 아니었던가.

아스펠라는 몸을 일으키려는 듯 움찔댔지만 도무지 움직일 수 없었다.

고작 어깨 좀 찢어졌다고, 이렇게나 아플 일인가.

그러나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펠킨이 얼른 말했다.

“아스펠라 양. 움직이지 마세요. 짐승의 송곳니에 있는 독 같은 것이 퍼져 앓고 계시는 중입니다. 이럴 때는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그의 말에 아스펠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펠킨을 쳐다봤다.

한곳을 집중해서 봐야 조금 시야가 깨끗해졌는데, 아스펠라는 그제야 그가 펑펑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보좌관님, 왜…… 우세요?”

“그야 두 분 다 너무 걱정되니까요!”

펠킨이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소리쳤다. 마음 약한 사내였다. 물론 우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스펠라의 시중을 들던 시녀 앨리스 역시 펠킨 옆에 서서 훌쩍대며 에이프런으로 제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저 진짜, 괜찮아요.”

아스펠라야 본인의 모습을 볼 수 없으니 왜 이들이 이렇게 우는 것인지 알 수 없을 터였다.

아마 본인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거울을 가져다 줬다면, 우는 이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아스펠라는 마수에게 물린 자국에서부터 위로는 날갯죽지를 지나 가슴께까지, 아래는 팔뚝을 지나 손목, 손가락까지 온통 푸르고 검게 변했다.

의사는 독에 감염된 것 같다고 하였을 뿐, 확실한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칼리……우스는, 칼리우스는 상태가 어떤가요?”

아스펠라는 펠킨이 우물쭈물하는 것을 발견했다. 설마 죽진 않았겠지.

물어봐야 하는데 또 다시 앞이 가물가물해졌다. 눈꺼풀이 무거워지더니 의지에 맞지 않게 결국 감겨졌다.

펠킨과 시녀가 얼른 아스펠라를 다급하게 불렀으나, 아스펠라의 정신은 다시 아득해졌다.

***

아스펠라는 어떤 장소에 도착했다. 돌덩이로 내리누르는 것 같던 몸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벼워졌고, 무겁던 눈꺼풀이 절로 번쩍 떠졌다.

울창한 잎사귀들과 그에 가려져 드문드문 보이는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꿈인가?’

이런 식의 꿈은 오랜만이었다. 아스펠라는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수목들과 그 아래 바닥이 투명하고 깨끗한 강물이 보였다.

강물 아래로는 거대한 물고기들이 천천히 연꽃 줄기들 사이를 지나가며 유영하고 있었다.

아스펠라는 이곳이 자신이 알던 아스펠 산이 아니라는 걸 금세 깨달았다. 아스펠 산에는 이런 곳이 없었다.

‘아스펠 산? 아니, 여기가 지상이 맞긴 하나?’

아스펠라는 거대한 수목들을 올려다봤다. 물 아래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매우 두꺼운 줄기를 가지고 있어, 적어도 몇 백 년 이상의 수명을 이어온 것처럼 보였다.

아스펠 산의 가장 오래된 나무도 이들에 비하면 아주 자그마했다.

지상이 아닌 건가? 설마, 내가 독이 퍼져 죽어 저승으로 온 것인가.

아스펠라는 퍼뜩 제 몸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듯 팔을 들어올렸다. 상처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러다 깨달은 것이 자신의 몸이 제 나이에 비해 많이 작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어린애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에 아스펠라가 얼른 강물에 제 모습을 비췄다.

‘진짜 어린애의 모습이 되었잖아?’

아스펠라가 제 얼굴을 부여잡고는 중얼거렸다. 이내 내가 어렸을 땐 이렇게 생겼었구나, 생각하며 강물을 거울삼아 한참 동안 이리저리 제 얼굴을 쳐다봤다.

그때 잔잔하던 강물에 파문이 일었다.

고개를 들자 저 멀리 수목 사이로 빛나는 무엇인가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숨 쉬는 것까지 까먹은 아스펠라는 가만히 몸을 굳힌 채로,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렸다.

멀리서는 환한 빛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거칠게 일어난 갈색의 두꺼운 나무줄기들 사이를 지나 그것이 가까워지면서 빛 안쪽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르가인가?’

아니다. 비르가는 아니었다.

비르가보다도 더 따듯한 존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따듯하긴 했어도, 안도감을 주진 못 해 아스펠라는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다가오는 빛을 바라봤다.

찰박, 찰박, 물 위를 걷던 인간의 것과 같은 모양새의 발이 이내 아스펠라 앞에 멈춰 섰다.

빛 때문에 눈이 부셔 눈살을 찌푸리자 천천히 빛이 사그라들었다. 아스펠라는 그제야 그것을 제대로 마주볼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동시에 사람 같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기도 했다.

가장 먼저 마주친 눈에는 흰자위가 없어 온통 어둠뿐이었는데, 마치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한데 모여 은하수가 흐르듯 반짝거렸다.

핏기라고는 없는 백색의 피부는 반투명하여 꼭 깊은 바다에서 산다는 해파리 같았다.

잘 바라보면 몸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옷 또한 입고 있지 않아 몸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그 안은 생물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을 내장 기관은 물론 뼈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안에는 그저 거대한 구체만이 보일 뿐이었다.

물 위에 길게 끌려오는 머리카락이 빛의 원천인 것인지, 황금빛의 머릿결이 파도처럼 굽이칠 때마다 빛이 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스펠라가 겨우 입을 열어 물었다.

‘신이십니까?’

튀니아의 산들을 지키는 산신이 아닌, 그들마저도 따른다는 태초의 신.

아스펠라는 한눈에 그를 보자마자 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자 그가 대답 대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제가 죽었나요?’

그녀의 말에 신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내 그가 아스펠라 옆을 지나 땅을 밟자, 반투명했던 그의 몸이 보통의 사람마냥 핏기가 돌며 살색이 되었다.

빛이 나는 황금빛 기다란 머리칼 역시 보통의 금발처럼 변해 꼭 진짜 인간처럼 보였다.

그는 땅에 주저앉더니, 이내 아스펠라에게 이리 오라는 듯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들겼다.

아스펠라가 얼른 그 옆으로 가기 위해 짧은 다리를 일으켜 그쪽으로 도도도 달려갔다.

풀썩 자리에 앉자 그가 아스펠라의 머리통을 둥글게 쓰다듬어줬다.

비르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비르가와 전혀 닮은 곳도 없는데, 이상하게 그 손길만큼은 비르가 같았다.

아스펠라는 어쩐지 고양이나 개가 된 것처럼 눈을 꼭 감고는 그가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느꼈다. 이내 손길이 사라지자 아쉬운 듯 제 머리통을 문지르던 아스펠라가 또 한번 물었다.

‘제가 죽은 게 아니면, 신님은 왜 제 꿈에 나오셨나요?’

그는 대답 대신 아스펠라를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왜 말을 하지 않느냐고 물으려 했으나, 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스펠라는 그의 생각을 알아들을 수 있는 듯했다.

‘꿈이 아니라고요? 여기가요? 그럼 여긴 어딘데요?’

이곳은 신이 사는 곳이라 했다.

‘혼자 사세요?’

「혼자 산단다.」

‘왜요?’

글쎄, 고민하더니 이내 다 떠나갔다고 했다.

아스펠라는 정말 애가 된 것처럼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아 연신 질문을 해댔다.

그가 크게 두렵지도 않았으며, 자신이 죽은 것도 아니라니 안심되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옆에서 재잘재잘 묻고 떠드는 아스펠라를 가만히 쳐다보던 신이 이내 살풋 미소 지었다. 그가 입을 활짝 열고 웃음을 내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숨소리 같은 것만 쌕쌕 나올 뿐이었다.

어린아이의 몸이 되어 시선이 낮아진 터라, 그와 눈을 제대로 마주칠 수 없었는데 사람의 형상으로 변한 그는 눈알도 없었다. 눈 안이 텅 비어있었다.

무섭기보다는 왜 없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먼저 들었기에 아스펠라가 또 한번 질문을 던졌다.

‘신님. 왜 눈이 없으세요? 왜 말을 못하세요? 듣는 건 가능하신가요?’

그러자 신이 생각이 아스펠라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눈이 없다. 혀가 없어 말을 하지 못해 목소리를 잃었고 듣는 것 또한 불가능하단다. 우리가 하는 대화는 오로지 생각으로 주고받는 거야.」

‘왜 신이 그런 것들이 없어요?’

「너희들을 만들기 위해 내어주었지.」

‘누구한테요?’

「너희들한테.」

아스펠라는 잠시 작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너희들이라는 건, 자물쇠인 걸 말씀하시는 거죠? 루이나의 봉인을 막기 위해 저희를 내려보내셨다고 들었어요. 저희가 죽어야 봉인이 완전히 잠기는 거라고요.’

그러자 신이 잠시 아스펠라를 가만히 쳐다봤다. 아스펠라의 오동통한 볼을 쓰다듬더니, 이내 그 볼에 입을 맞췄다.

「너흰 자물쇠가 아니고, 나 자체란다. 난 육신마저 없다. 너희가 곧 나이기 때문이지. 그것을 자각하면 알게 될 거란다.」

아스펠라는 눈을 끔뻑였다. 이내 신의 텅 빈 눈이 생긋 웃더니 초승달처럼 휘었다.

그러다 자신의 모습을 자각한 듯 살짝 뒤로 물러나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기다란 머리칼이 얼굴을 가렸다.

「이 모습이 많이 추하지. 두려웠겠구나. 미안하구나.」

‘그렇진 않아요.’

아스펠라가 몸을 일으키더니, 신의 머리칼을 정리해주었다.

‘하나도 안 무섭고 안 추한데요?’

그러자 신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아스펠라에게 이곳을 보여주겠다며, 작은 손을 붙잡고 거대한 숲을 거닐기 시작했다.

아스펠라는 눈이 없어 보이지도 않을 텐데 어찌 안내해줄 수 있느냐 물었다.

「네가 볼 수 있잖니? 아까 전에 말했듯 내가 곧 너희란다. 정확히는 나의 일부가 너희에게 들어갔으니 결국엔 같은 것이라 볼 수 있지.」

신이 사는 곳은 생각보다 좁았다.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왔던 지점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아스펠라는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것이냐고 물었다. 우리가 그럼 반대쪽의 바닥도 돈 건가요? 궁금해 하는 아스펠라를 보던 신이 제일 높은 나무의 줄기를 톡톡 두들겼다.

그러자 나무가 가지들을 뻗어 둘을 데리고 높이 올려줬다.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간 아스펠라는 마치 구름 위에 올라온 듯했다.

신은 풍성한 녹음을 내려다보는 아스펠라의 어깨를 톡톡 두들기며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켰다.

푸른 하늘 대신, 밤이 온 것처럼 어둠 투성이였는데 주변에 수많은 별들이 작게 빛났다.

아스펠라는 신이 가리키는 곳을 가만히 쳐다봤다. 거대한 원형 구형이었는데, 그 안에는 푸른빛, 녹색빛, 흰빛이 군데군데 퍼져있었다.

‘예뻐요!’

아스펠라는 참 예쁜 구슬이라며 손뼉을 짝짝 쳤다. 그 어떤 아스펠 산의 절경과,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보다도 아름다운 구체였다. 저것도 별이냐 묻는 아스펠라에게 신이 대답했다.

「아름다운 별이지. 난 저길 참 좋아해. 그래서 매일 이렇게 이곳에 올라와 저길 바라본단다. 사랑스러운 곳이야.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렇게 말한 신은 이내 조용히 그 구체를 바라봤다. 아스펠라 역시 그런 신을 따라 가만히 푸르고 녹색을 띠는 구체를 바라볼 뿐이었다.

조금 시간이 지났을까, 어떤 작은 빛이 신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 빛은 인간을 축소시켜놓은 것처럼 손바닥만 한 존재였다.

신은 그를 자주 봐왔던 것처럼 익숙하게 제 손을 내려 그 위로 올라오게 했다.

아스펠라가 고개를 갸웃대며 손 안의 작은 존재를 쳐다보자, 그것이 아스펠라의 콧잔등에 손을 뻗었다.

‘사라?’

그것이 몸에 닿자마자 아스펠라는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름을 부르니 빛은 답이라도 하는 것마냥 신의 손바닥 위에서 폴짝폴짝 뛰어댔다.

‘정말 사라에요? 사라 맞죠? 일카이의 누나 사라인거죠?’

아스펠라가 그 작은 빛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내 빛은 신의 손바닥에서 펄쩍 뛰어올라 팔뚝으로 올라가더니, 그대로 그의 몸 안으로 사라졌다.

‘어! 사라졌다!’

아스펠라가 소리치자 손이 빙긋 웃음 지었다.

「사라진 게 아니고 원래 몸으로 돌아온 거다.」

아스펠라가 고개를 들어 신을 쳐다봤다.

‘궁금한 것이 있어요. 신님께서 이렇게 불완전한 이유가 우릴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자물쇠인 저희들이 모두 죽으면, 신님은 다시 완전해지는 건가요?’

그러자 신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의 반은 저 땅 아래 있단다. 그리고 나머지 반이 이리로 와 너희를 만든 것이지.」

그렇게 말한 신은 아스펠라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아이야. 너는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고,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 아이란다. 그러니 나의 모든 말들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너에게 상자를 보냈단다. 새로 담을 수 있는 상자란다. 아마 네게 꼭 필요할 것이다. 네 안에 넘쳐나는 것을, 이곳에 담으렴.」

‘새로 담을 상자요?’

그래. 이제 곧, 상자가 열릴 거다.

신은 이제 그만 돌아갈 시간이라며 아스펠라의 작은 몸통을 안아들었다.

다시 나무줄기를 타고 내려와, 아스펠라는 처음 눈을 떴던 거대한 수목이 있는 강가로 돌아왔다.

‘신님, 만약에 봉인이 열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만약, 세상이 온갖 부정한 것들 투성이가 되면요?’

신은 아스펠라를 땅에 내려주었다.

「내가 곧 너희니, 굳이 알려 하지 않아도 알게 될 거란다.」

그런 뒤 그는 천천히 자신이 건너왔던 수면을 밟았다. 그러자 마치 허물을 벗는 것처럼 인간의 거죽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신의 몸은 아스펠라가 맨 처음 봤던 그 신비로운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스펠라는 그가 한 말을 곱씹으며 신이 다시 나무들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모습이 사라짐과 동시에 환한 빛이 아스펠라를 덮쳤다.

다시 눈을 떴을 땐, 화려한 부조들로 장식된 대공가의 천장이 보였다.

“아스펠라 양!”

“아스펠라!”

눈앞에 얼굴을 들이대는 펠킨과 일카이의 모습에 아스펠라가 눈을 끔뻑였다.

드디어 깨어나셨다면서, 앨리스가 얼른 주치의를 부르러 후다닥 방을 뛰쳐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너 진짜!”

언제 돌아왔는지 모를 일카이는 아스펠라를 보자 화를 내며 그녀를 꽉 껴안았다.

기겁한 펠킨이 얼른 떨어지라며, 아직 환자인 걸 잊은 것이냐며 그를 떼어냈다.

일카이는 얼른 아스펠라를 도로 눕혔다. 그리고 아스펠라가 입을 열 때까지 두 남자는 가만히 기다렸다.

한참 동안 눈을 끔뻑이던 아스펠라는 그제야 현실 감각이 돌아온 듯, 천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몸을 일으켰다.

일카이가 얼른 부축해 침대 헤드에 받쳐주자 아스펠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칼리우스는 괜찮나요?”

그 질문에 일카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지금 그걸 먼저 걱정할 때야?”

아스펠라는 몽롱한 기운이 들었다. 일카이가 화를 내도 그저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그치만, 난 아무렇지도 않은걸.”

“무슨 소리야! 어깨가 완전 썩어 문드러질 것마냥 색이 이상했는데! 붕대를 몇 번이나 갈았는지 알아? 나, 네가 완전히 죽는 줄 알고…….”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이내 조용히 침만 삼켰다. 아무래도 울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는 것처럼 보였다.

“걱정시켜서 미안.”

아스펠라는 제 어깨를 두껍게 감싸고 있는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그러자 펠킨과 일카이가 뭐하는 것이냐며 저지하려 했지만, 아스펠라는 개의치 않고 마저 붕대를 풀었다.

마수에게 물려 반쯤 너덜거리던 어깨가, 그 상처로부터 검고 푸르게 변해 썩어가듯 악취 나던 팔이,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해져 있었다.

팔은 원래의 혈색으로 돌아왔고, 마수에게 물렸던 상처는 피가 새어나오지도, 곪지도 않았다.

의사가 와서 아스펠라의 상처를 살펴본 후 놀랍게도 상처가 아물고 있다는 소견을 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독은 모두 빠진 것 같습니다. 이제 덧나지 않도록 소독만 제때 해주면 아무 문제없을 것입니다.”

그 말에 펠킨과 일카이는 다행이라며 한숨 돌렸지만, 아스펠라는 당연히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한 반응이었다. 그보다는 칼리우스의 상태에 대해 더 궁금한 듯했다.

“보좌관님. 칼리우스는요?”

“각하께서는 아직, 상처가 깊으셔서요. 의사 말로는 정신을 차리는데 며칠 걸릴 거라 하셨습니다. 아스펠라 양은 조금 더 몸이 회복되시면 그때 뵈러 가시지요.”

펠킨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괜히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하는 것을 보니 어째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요?”

“아닙니다. 일단 좀 쉬십시오.”

“칼리우스 몸도 검게 변했어요?”

“금방 괜찮아지실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펠킨은 더 이상 이 건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은 건지 이만 자리를 피했다. 그의 행동에 아스펠라는 더 걱정이 되어 아무래도 칼리우스에게 가봐야겠다며 박차고 일어나려 했지만, 일카이가 어깨를 누르며 막아섰다.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거 없잖아. 일단 네 몸부터 회복해. 어깨가 다 나은 거랑 별개로 너 지금 얼굴 완전 피곤해 보여. 며칠 잠 못 잔 사람같이. 약 기운이 아직 덜 빠졌을 테니까 더 누워 있어.”

“……일카이, 나-”

“네가 대공 걱정하는 거 잘 알고 있어. 그래도 지금은 그냥 쉬어. 내가…… 옆에 있어줄게.”

아스펠라는 꿈에서 사라를 만났다는 말을 하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일카이의 말을 듣는 순간부터 아스펠라는 다시 졸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나 긴 꿈을 꾸었는데도 아직 잠이 부족한 것인가. 아스펠라는 다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대공 성에 돌아왔을 때, 창백한 아스펠라를 보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일카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는 아스펠라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

얼마 전.

어쩌면 당분간은 유모를 보러올지 못할 거라는 말과 함께, 일카이는 대공 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향 마을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살던 작은 마을 어귀에서 낡은 손수건을 흔드는 유모에게 마찬가지로 팔을 휘적이며 흔들어준 뒤, 말고삐를 잡아 흔들었다.

대공 성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일카이의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었다. 그를 태우고 다니는 말이 똑똑한 녀석이 아니었다면 필시 오지로 향했을 것이었다.

‘네 볼모는 이미 죽은 누이가 아니라, 아스펠라일 테니까.’

맨 처음엔 설마 아스펠라를 이용해 자신을 수족으로 삼으려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알려준 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의 출생의 비밀은 물론 자신이 아스펠라를 좋아하는 마음까지 이용하려고 하는 비열한 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때 동굴에서 봤던 그 눈빛은 마치…….

‘잘 봐둬. 네가 지켜야 할 것은 아스펠라다.’

그런 눈빛이 아니었던가.

대공은 마수로 변하는 자신을 완전히 믿을 수 없기에 그런 표현 또한 서슴지 않은 것이었다.

“진짜 아스펠라한테 진심인가 보네.”

일카이가 중얼거렸다. 대공은 그런 모습을 저한테 보여주면서까지 아스펠라를 지키고 싶어 했던 것이다.

검은 마수에서 인간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걸까. 일카이는 사라가 썼던 노트의 내용을 가만히 떠올렸다.

‘만약 그대로 대공이 인간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아스펠라는 그를 포기할까?’

정확히 아니라 단언할 수 있었다. 아스펠라는 그가 짐승이든 인간이든, 칼리우스 에르윈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옆에 있을 것이다.

“아, 진짜. 왜 이렇게 어려운 거야! 난 그냥 풋풋한 연애를 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일카이가 억울한 듯 빽 소리를 질렀다. 첫사랑 치고 너무 어려운 것 아닌가. 그러나 이내 스스로도 결정 내려야 했다.

“재수 없는 칼리우스 에르윈.”

혹여나 다른 이들의 귀에 들어갈까 작게나마 중얼거려 본다.

“내가 아스펠라를 계속 좋아할 걸 알고 그러는 거 아니야. 하. 진짜 웃기고 있어…….”

웃긴다며 허탈한 웃음소리를 내는 사람치고 전혀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착잡하고,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가 대공 성에 도착했을 때였다.

동이 터오를 무렵인지라 조용할 거라 생각했던 대공 성이 왜인지 모르게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대문을 지나 현관으로 들어오니 정원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마당에 핏물이 미처 빠지지 않아 불그스름한 잔디가 눈에 들어왔다. 물을 뿌렸는데도 비릿한 피 냄새가 짙었다.

시종들은 분주하게 이리저리 돌아다녔고, 정찰병들이 비서실에서 나왔다 들어가길 반복했다. 일카이는 다들 아침부터 왜들 이러나 싶어 의아해하면서 방으로 올라갔다.

“뭐야, 다들 안 자고 있었어?”

숙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직 잠을 자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새벽녘부터 일어난 것인지 사냥꾼들이 모두 한곳에 둥글게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일카이가 들어오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들 왜 그래?”

“대장. 어제 정말 난리도 아니었어.”

무슨 난리? 하며 영문을 모르는 일카이가 짐을 하나 둘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들은 얼른 일카이에게 달려가 어젯밤 자신들이 목격한 것을 그대로 말했다.

검은 마수가 어디서 공격을 받고 왔는지, 완전히 흥분한 상태로 아스펠라 양도 알아보질 못하고 공격했더랬다.

아스펠라 양은 어깨가 다 먹히듯 물렸는데도 아픈 소리 한번 내지 않더라.

“아스펠라를 공격했다고?!”

일카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사냥꾼들은 더 놀랄만한 건, 그 검은 마수가 이내 대공으로 변했다는 것이라며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한다 말했다.

“사냥제가 끝나는 대로 얼른 나가자. 검은 마수로 변하는 대공이라니. 더 엮여봤자 좋을 것 하나 없어, 대장.”

“보좌관 나리한테는 함구하겠다 각서라도 쓰면 되잖아. 아니 이미 다들 알고 있었던 건지 시종들은 조용히 뒷정리를 하고, 보좌관은 정찰병을 보내 목격자가 없는지 알아보고 있다니까?”

“우린 지금까지 속고 있던 거라고!”

하지만 일카이가 놀란 것은 마수가 인간으로, 그것도 에르윈 대공으로 변했다는 것보다는 그 마수가 아스펠라를 공격했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아스펠라를 물었다니, 그래서 아스펠라는? 아스펠라는 괜찮아?”

“말도 마. 아주 피를 철철 흘리면서 실려 가는- 근데, 대장. 아스펠라 양을 걱정하는 것도 걱정하는 거라지만, 일단 검은 마수가 대공이라니까?”

“그래서?”

“이미 알고 있었어?”

동료들이 일제히 일카이를 쳐다봤다. 대장. 정말 알고 있었던 거야? 그들은 며칠 전 창백하게 질려서 돌아왔던 그를 떠올렸다.

혹시 그때 본 것이냐며 묻자 일카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들갑 떨던 사냥꾼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이미 알고 있었다 하니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어떻게 할 거야?”

누구 한 명이 묻자 일카이는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미안한데, 일단 아스펠라가 깨어나고 나서 다시 얘기하면 안 될까?”

그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일카이는 곧장 아스펠라의 방으로 향했다.

방 가까이 가자 피 냄새가 물씬 느껴졌다. 피 냄새 말고도 생전 처음 맡아보는 이상한 악취까지 났다.

사냥꾼이었기에 남들보다 조금 더 예민한 후각을 가지고 있는 일카이는 이 악취가 마치 사체에서 나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설마. 설마 죽은 건 아니지.’

일카이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미 열려 있는 문 사이로 시녀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앨리스는 눈물 콧물 쏟아가며 시뻘건 핏물을 새로 갈기 위해 나왔다. 일카이가 천천히 방문 앞으로 갔다.

의사와 시녀들이 아스펠라를 빙 둘러싸고 있어 아스펠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펠킨에게 다가간 일카이가 그의 멱살을 잡아 올리듯 그를 돌려세우며 물었다.

“뭔 일입니까, 이게? 아스펠라를 공격하다뇨. 대공이 왜요? 대공이 왜요!”

“나, 나도 어째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

펠킨 역시 혼란스러워보였다. 항상 깔끔하게 손수건으로 땀을 닦던 그는, 이젠 그런 체면치레를 할 여유도 없는 듯 맨손으로 이마 위에 맺힌 식은땀을 벅벅 닦아 내렸다.

“각하는 어디선가 공격을 받고 돌아오셨고, 아스펠라 양이 그런 각하를 도우려다가…….”

“아스펠라가 죽은 건 아니죠?”

“죽은 건 아닙니다만, 상태가 좋지도 않지요.”

의사와 시녀들 사이로 아스펠라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어깨 부근은 시체마냥 꺼멓게 변했고 그곳에서부터 악취가 나오는 것 같았다.

펠킨은 몇 번이나 아스펠라와 칼리우스의 방을 오고가며 그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일카이는 칼리우스의 방에는 딱히 가지 않았지만, 한 층이나 차이가 나는 그 먼 거리에서도 그의 비명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다.

“아아악! 아악!”

공포에 몸부림치는 듯한, 마치 짐승이 인간의 목소리를 내는 것 같은 기괴한 소리였다.

대공 성 가득히 그의 비명소리가 들릴 때마다 다른 이들의 얼굴에 수심이 짙게 드리웠다.

다시 한번 아스펠라의 방으로 돌아온 펠킨에게 일카이가 물었다.

“대공은 어떻습니까.”

펠킨은 대답할 여력도 없는 듯 조용히 고개만 내저었다. 죽었냐 묻기에는, 간간히 들려오는 발작 소리가 너무나도 컸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즈음에 펠킨은 거의 탈진한 상태였다.

“제가 아스펠라 옆에 있을 테니, 보좌관님은 각하 쪽에 가 계시든지 아니면 눈 좀 붙이시든지 하세요.”

일카이의 말에 펠킨은 짧고 조용히 묵례를 한 뒤 방을 나섰다. 바깥에서 정찰병이 보좌관님! 하며 부르는 소리가 났고, 아마 급한 발걸음 소리가 나는 걸로 보아 제대로 쉬지는 못할 것이었다.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아스펠라를 내려다보며 일카이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아스펠라.”

대답 없이 누워 있는 아스펠라는 쌕쌕거리며 간헐적이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일카이는 하루가 지나도록 그 옆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붕대에서 피가 새어 나오면 얼른 의사를 불러다가 새 붕대를 감게 했고, 열이 펄펄 끓는 듯하면 직접 대야에 물을 받아와 물수건을 올려줬다.

그렇게 꼬박 하루가 지나고 이틀째가 되던 날. 아스펠라가 눈을 떴다.

약 기운에 취한 것인지, 아니면 아직 열병이 덜 나은 것인지, 잠이 덜 깬 것인지.

아스펠라는 마치 이곳이 현실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려는 듯 한참 동안 눈을 끔뻑대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걱정되던 찰나 아스펠라가 드디어 입을 열었는데.

“칼리우스는 괜찮나요?”

고작 칼리우스의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

일카이는 울컥,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이 들어 화를 내고 말았다. 널 이런 꼴로 만든 게 지금 누군데,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데.

신기하게도 멀끔히 나은 제 몸에 안도하거나 기뻐하기보다는, 그런 것엔 관심 없고 그래서 칼리우스는 어떤데요? 하고 묻는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가 대공 걱정하는 거 잘 알고 있어. 그래도 지금은 그냥 쉬어. 내가…… 옆에 있어줄게.”

일카이의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는 건지, 아스펠라는 다시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

***

칼리우스의 상태는 사실 많이 좋지 않았다. 여기저기 칼로 베인 듯한 상처도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아스펠라의 어깨처럼, 온몸이 검게 변했기 때문이다.

깊이 팬 상처를 꿰매기 위해 의사와 시종들이 그의 몸을 포박하듯 누르며 수술을 시작했다.

평소의 에르윈 대공이라면 이 악물고 고통을 감내했겠지만, 그는 이리저리 발악을 해댔다.

칼리우스가 눈을 번뜩일 때마다, 그의 눈동자에는 붉은 빛이 감돌았다. 야생의 살기를 내뿜는 그 눈빛은 꼭 인간 거죽을 뒤집어 쓴 짐승의 그것 같았다.

겉모습은 칼리우스 에르윈이지만, 그 안은 오로지 검은 마수인 것이다.

펠킨은 초조한 듯 발만 동동 구르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맨 처음에는 검버섯 같은 것이 몸 곳곳 반점 마냥 작게 피어오르더니, 이내 그 영역을 점점 넓혀가기 시작했다. 그때 즈음부터 칼리우스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의사 말로는 지쳐 잠이 든 것 아니면 고통에 기절한 것 둘 중 하나라고는 하지만, 그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스펠라의 상처에서처럼 그에게서도 같은 악취가 났다. 그 냄새는 워낙 독해 이따금 자신들이 지금 송장을 지키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펠킨은 어쩌면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르윈 대공가의 주인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펠킨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느끼고 있었다.

펠킨은 대공의 보좌관이었고, 이 일을 다른 귀족들이 알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정찰병들을 풀어 계속해서 혹시나 관련된 말이 오고가지 않는지 알아야 했고, 칼리우스를 공격한 이는 대체 누구인지 추론도 해야 했다.

일하는 것은 감내할 수 있었지만, 갈수록 시체 썩는 내를 풍기는 칼리우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은 참기 어려웠다.

아스펠라에게 칼리우스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은 아스펠라가 이 모습을 봤다간 분명 그대로 기절할 것이 분명했다. 건장한 일카이마저 칼리우스의 상태를 보러 왔다가 견디지 못하고 나가지 않았던가.

그렇게 칼리우스가 깨어나지 않은 지 나흘째가 되던 날, 펠킨은 결국 무너졌다.

지나가는 시종이나 시녀들이 보든 말든 개의치 않고 칼리우스의 방 앞에 쪼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정식으로 그의 비서 일을 하기 시작한 건 열여섯 때부터였지만, 전 대공가의 비서였던 아버지와 이곳에서 일하셨던 어머니 때문에 거의 칼리우스와는 기억도 안 나는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오던 사이였다.

친구이며 스승이며 모셔야 할 주인. 이 정도면 꽤나 진득한 사이 아니던가.

칼리우스가 평생 죽지 않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사실, 칼리우스는 산신을 토벌하러 이곳저곳 다니던 이였고 심각한 중상도 몇 번 겪었었다.

그러나 그때는 펠킨이 울지 않았다. 그땐 그가 죽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우는 와중에도 시취 때문에 코가 아려오는데 저게 산 상태인지 죽은 상태인지 감히 확인조차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실 의사도 더 이상 방도가 없다며 손을 놓은 지 며칠 되었다.

만약 지금 들어가서 확인했을 때 칼리우스가 죽어 있는 상태라면 어쩌지?

“흐윽. 으으윽, 흐어엉.”

결국 펠킨은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보좌관의 체면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이 그냥 무섭고 울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그를 뚝 그치게 한 것은 아스펠라였다.

“보좌관님. 제가 들어가 볼게요.”

“흐윽, 헙, 아, 아스펠라 양? 아직 누워계시지, 흡, 왜 오셨어요.”

“펠킨이 우는 소리가 내 방까지 들려요. 제가 들어가 볼게요. 들어가게 해주세요.”

아스펠라의 말에 펠킨이 훌쩍이며 물었다.

“마, 만약 돌아가셨으면…….”

“그럴 일은 없어요.”

“그걸 어찌 확신하십니까아…….”

“알 수 있어요. 칼리우스는 안 죽어요. 이런 일로.”

도대체 어떤 증거를 들어 저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스펠라는 펠킨을 일으키며 말했다.

“울지 마시고요.”

“흡, 흐윽.”

감정을 주체 못 해 헐떡이듯 우는 펠킨의 등을 토닥인 뒤 아스펠라가 방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훅 끼치는 부정한 기운과 악취에 아스펠라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펠킨은 문을 열자마자 한층 더 심해진 냄새에 결국 바닥에 구토를 하고 말았다. 멀리서 일카이가 달려왔다.

“아스펠라! 너 아직 몸도 낫지 않았다니까. 상처가 더 아문 뒤에 간호를 하든 그 옆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든 안 말리겠다고.”

방문 앞으로 다가간 일카이 역시 냄새와 기운 때문에 윽! 짧은 비명을 내지르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웬만한 악취에는 익숙해졌을 일카이도 절로 뒷걸음치는 이 역한 냄새와 불쾌한 기분을 아스펠라는 어떻게 저렇게 참고 있는 건가.

“아스펠라.”

일카이는 더 이상 가까이 갈 수조차 없는 듯, 보이지 않는 경계선에 서서 아스펠라의 이름을 불렀다.

네 몸을 좀 더 생각해. 너도 지금 아파. 그러나 아스펠라는 생긋 미소 지었다. 정말 이런 것들은 하나도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나 정말 괜찮아. 그리고 칼리우스한테는 내가 필요해.”

“뭐?”

그걸 대체 어찌 아느냐는 표정을 짓자 아스펠라가 말했다.

“알 수 있어. 느껴지거든.”

“그딴 걸 어떻게 느껴!”

아스펠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문을 닫았다. 일카이는 문을 열려는 듯 가까이 다가가려다 이내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곤 바닥에 널브러진 펠킨을 부축했다.

“이봐요, 형씨. 일어나요. 가서 세수라도 하든 깨끗한 공기라도 맡고 옵시다.”

“하, 하지만 아스펠라 양은.”

“몰라요 나도. 사랑의 힘이든 뭐든.”

동화 속에서나 가능한 거지 그런 건. 일카이가 중얼거리다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

문을 닫은 아스펠라는 잠시 그곳에 기댄 채로 저 멀리 있는 침대를 바라봤다.

이내 심호흡을 하던 아스펠라가 천천히 칼리우스가 있는 곳으로 발을 내딛었다.

상체가 드러난 채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그는 멀리서 보면 그저 검은 형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가자 그제야 자신이 알던 칼리우스의 모습이 보여 아스펠라는 탄식하듯 입을 틀어막고 인상을 찌푸렸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아스펠라 역시 펠킨처럼 주저앉아 울고 싶긴 했으나 마냥 운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칼리우스에게 조금 더 다가간 아스펠라는 그의 몸 곳곳에 피어난 검은 것들을 살펴봤다.

분명 이상했다. 자신의 오른팔 역시 이와 비슷했다고 들었는데 왜 그녀는 자연히 치유가 되었고, 칼리우스는 그러지 못한 걸까.

의자를 끌어와 앉은 아스펠라가 식은땀이 흐르는 그의 이마를 마른 수건으로 천천히 닦았다.

사실 칼리우스의 병세가 어떤지 모르고, 의사도 못 고치는 걸 자신이 고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만일 칼리우스가 선왕의 구조 신호를 받아 그에게 갔고 그 선왕을 억압하고 있는 이가 국왕이며, 국왕이 칼리우스를 공격한 것이라면?

아스펠라는 칼리우스의 증상을 가만히 나열하기 시작했다.

고열이 나고, 거품을 물고, 온몸에 검버섯 같은 것들이 몸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

의사는 꼭 독을 섭취한 것 같다는 말을 했었지.

‘그때 내가 칼리우스의 목에서 빼낸 건 단순한 총알이 아니었어.’

진득하게 달라붙는 것들로 뭉쳐진 것. 그것들은 아스펠라의 손에서 꿈질대기도 했었다. 아스펠라는 그 꿈질거리는 것들이 낯이 익었다.

‘어렸을 때 그걸 본 것 같은데.’

어렴풋이 나는 기억에 아스펠라는 마치 서류를 찾기 위해 서랍 속을 마구 뒤지는 것마냥, 제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긁어대기 시작했다.

“아!”

그러다 문득 떠오른 기억에 눈을 번쩍 떴다.

“비르가!”

한참 고뇌하던 것을 발견했을 때의 감탄사처럼 비르가의 이름을 외친 아스펠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대로 창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새들이 창가로 날아왔다.

[아스펠라. 왜 그래?]

아스펠라가 자신들을 부르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낀 새들이 물었다.

“너희 예전에 비르가가 나한테 먹였던 열매 기억해?”

[열매?]

“응.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비르가가 종종 먹였던 열매 말이야. 작고 검은데 동그랗고 진득한 열매. 그걸 먹고 내가 한창 앓았었잖아.”

[아. 남쪽 산에서 가져온 걸 말하는 거구나?]

“응. 그거. 내가 뭘 먹고 나았지? 비르가가 약초 같은 걸 먹였던 거 같은데. 보랏빛이 나는 거 말이야.”

아스펠라가 칼리우스의 검게 변한 모습을 보며 받았던 기시감은 모두 아스펠라가 과거 겪었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녀가 여덟 살에서 아홉 살 정도로 어렸을 때의 기억으로, 애써 떠올리지 않는 한은 잘 기억도 안 나는 일이었다.

산속에는 수많은 풀과 나물, 버섯들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약초이기도 하나 독초인 것도 많았다. 비르가는 종종 아스펠라에게 독초를 먹이며 독에 내성이 생기도록 해왔다.

수많은 독초를 조금씩 꾸준히 먹어오며 아스펠라는 점점 독에 대한 내성이 생겼지만, 유독 하나가 고역이었다.

작고 검은 블루베리 같은 알맹이였는데, 진득하게 손에 달라붙어 찝찝한 열매였다.

아스펠라는 그걸 먹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맛도 없을 뿐더러 먹고 난 이후에는 온몸에 검은 반점이 오돌토돌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아스펠라가 먹기 싫다 거부하면, 비르가는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먹어 내성을 생기도록 해야 한다며 완강하게 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보랏빛이 나는 작은 꽃이 달린 약초였어. 근데 우리는 그거 손 못 대, 아스펠라.]

“왜?”

[그건 산신들만 들어갈 수 있는 성역 안에 있으니까.]

성역. 거대한 아스펠 산의 세 봉우리 중 가장 높은 두 번째 봉우리의 정상에 있다는 그곳. 비르가는 살아생전 한 달에 한 번 씩 그곳에 꼭 혼자 갔었다.

짧으면 반나절, 길면 거의 하루를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던 비르가는 때때로 매우 쓸쓸한 표정을 하고 돌아오곤 했다.

거기서 뭘 하고 오는지는 아스펠라가 아무리 조르고 졸라도 얘기해주지 않았다.

아스펠라는 항상 그곳을 궁금해 했는데, 비르가는 아스펠라가 성역에 관심을 보일 때나 그곳에 대해 은근슬쩍 물어볼 때마다 단호하게 말했다.

‘거긴 아직 안 된다.’

‘도대체 왜에!’

‘네가 아직 갈 데가 아니야.’

그럼 도대체 언제쯤 갈 수 있냐는 말에 비르가는 평생 그곳에 가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스펠라는 성역 안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곳이 얼마나 위험하고, 험준한 곳에 있다고 해도.

“성역이든 뭐든, 난 칼리우스를 살려야 해.”

***

하지만 성역으로 떠나기도 전에 아스펠라는 그녀의 방 안에서부터 발이 묶였다.

일카이가 그 몸으로는 성 앞마당까지도 못 갈 거라며 길길이 날뛰었기 때문이었다.

일카이가 과장하거나, 에르윈 대공이 죽기를 바라 말리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로 아스펠라의 상태는 그 높은 산을 오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절대 안 돼! 차라리 내가 다녀올게. 내가 다녀오면 되는 거 아니야?”

“거긴 산신들만 들어갈 수 있는 성역이라니까.”

아스펠라는 그의 모습을 외면하려는 듯 눈을 감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고집을 피웠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고집이었다.

“산신이고 뭐고, 너부터가 지금 몸이 성치 않다는데 그 높은 산을 혼자 올라가겠다고?”

“일카이, 방금 전까지 내가 다 설명했잖아.”

“루이나의 봉인이고 자물쇠고 뭐고, 난 잘 모르겠다. 정 가야겠으면 조금이라도 몸을 회복한 다음에 가라니까?”

성역이라는 것이 어디 산 중턱 가까운 길목에 위치한 것도 아닐 테고, 성역 안에 들어간다 한들 곧장 약초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일카이는 칼리우스와 비등한 거대한 체격으로 마치 수문장이라도 된 양 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아스펠라가 그를 밀어내고 방 밖으로 나가려 할 때마다 작은 몸이 통통 힘없는 공처럼 튕겨져 나갔다. 그러나 아스펠라 역시 한 치의 양보 따윈 없었다.

“모르겠으면 그냥 날 보내주면 되는 거야. 게다가 몇 번이나 말했듯 난 정말 괜찮고, 우리한텐 시간이 없어. 칼리우스를 저 상태로 며칠이나 더 있게 하라고? 내가 그 꼴을 어떻게 보니?”

그렇게 말한 아스펠라는 마저 산에 오를 준비를 했다.

커다란 보따리에 여러 가지 연장들과 여분의 바지와 구급약 등을 챙겼다.

일카이는 그 뒤에 서서 답답하다는 듯 제 머리만 헝클였고, 펠킨은 멀리서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보좌관님도 뭐라 말 좀 해보세요. 일단 얘조차 어깨 상처가 다 낫지 않았는데……!”

“…….”

“허. 그래. 당신은 아스펠라보다 에르윈 대공이 더 중요하긴 하겠지.”

“일카이. 애처럼 굴지 마. 펠킨도 너무 개의치 말고요. 약초에 대해 알았으니 찾는 건 시간문제야. 산에 오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고. 걱정해주는 건 고마워. 하지만 막지는 말아줘.”

“아스펠라.”

“그렇게 정 걱정되면, 성역 전까지만 같이 가주면 되는 거잖아. 그치?”

문제는 그 성역이 어떤 곳인지 아스펠라는 물론 다른 짐승들조차도 모른다는 것이었지만, 아스펠라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칼리우스가 죽을지도 몰라. 저건 단순한 독이 아니란 말이야. 고칠 수 있는 건 나뿐이야. 약초를 가져올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확고한 아스펠라의 말에 일카이는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말린다 하여 말려질 것이 아니었다.

아스펠라는 자신의 상태가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의 눈으로 봤을 땐 전혀 괜찮지 않았다.

혈색이 돌아왔다고는 하나 무리하면 식은땀을 줄줄 흘려대고, 독 기운이 사라졌다고는 해도 마수의 송곳니에 뚫리다시피 부상당한 어깨는 조금만 과하게 움직여도 붕대 밖으로 피가 새어 나왔다.

더군다나 정신을 차리자마자 칼리우스의 병간호를 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직접 산까지, 그것도 정상까지 오른다니.

‘제 상태는 다 무시하면서까지 그렇게 에르윈 대공을…….’

자신보다 에르윈 대공이 더 먼저인 아스펠라에게도 화가 났지만, 그런 아스펠라를 말릴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

아스펠라는 제대로 몸을 회복할 새도 없이 곧장 산을 오르기로 했다. 아스펠 산의 성역에 그 약초가 있다면 가져오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산이 자신을 도와줄 것이란 확신이 있었고, 칼리우스를 이대로 방치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있었다.

일카이의 부탁에 사냥꾼들은 흔쾌히 동행을 받아들였다.

그들과 함께 말을 타고 출발하려는 아스펠라에게 펠킨이 다가왔다.

평소 광대가 볼록 튀어나올 정도로 웃는 얼굴이거나, 혹은 억울한 표정을 짓던 펠킨이었는데, 내내 침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아스펠라의 눈치를 살피면서 불안하고 초조한 듯 손은 매만지며 연신 안절부절못하던 그가 겨우 입을 떼 말했다.

“아스펠라 양.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합니다. 말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가 있나요. 에르윈 대공 성엔 칼리우스가 절대적으로 필요한걸요.”

펠킨은 자신이 더 적극적으로 아스펠라를 말리지 못하는 것에 죄책감을 가지는 듯했다.

“감사 인사는 제가 약초를 가져온 뒤에, 칼리우스가 다 나으면 그때 들을게요. 전서구를 보낼 테니, 매일 칼리우스의 상태를 알려주세요.”

아스펠라는 그렇게 시무룩한 표정 짓지 말라며 그의 축 처진 어깨를 다독였다.

펠킨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스펠라 양. 몸 조심히…… 다녀오셔야 합니다. 꼭이요. 무, 무리하시라고 하는 말 아닙니다!”

“알아요.”

싱긋 미소 지은 아스펠라가 고개를 돌려 칼리우스의 방 창문을 쳐다봤다. 그리고 애써 슬픈 마음을 다잡으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장례 치를 준비를 하는 것도 아니니 울지는 않을 거다.

‘얼른 다녀올 테니, 그때까지만 버텨줘요.’

아스펠라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

아스펠 산은 완전히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했다. 일카이와 사냥꾼들은 땅까지 검게 불타버렸던 이곳이 모두 회복된 것이 그저 신기하고 두렵다는 얼굴로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실 그들이 이렇게 놀란 것에는 단순히 산의 풀과 나무들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산이 아스펠라를 대하는 태도였다.

그들은 마치 진짜 살아있는 것처럼 나무줄기와 뿌리를 움직여 아스펠라 앞에 길을 만들어줬다. 나무들이 단체로 움직일 때마다 거대한 소리가 났다.

주인을 맞이하는 것처럼, 짐승들이 마중 나와 아스펠라 옆을 떠나지 않았다.

일카이는 씩씩하게 올라가는 아스펠라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봉인을 막기 위해 태어난 자물쇠 되는 아이가 있다는 거잖아. 그중 하나가 누나였고, 그래서 살해당한 거고, 아스펠라랑 에르윈 대공 역시 자물쇠라는 거고. 그럼 나머지 한 명은 누구지?’

일카이는 조금 이상하다 생각했다.

‘신화에 나오는 가문에 다섯 가문인데, 왜 자물쇠는 넷이야. 나머지 하나는?’

아스펠라에게 묻자, 그녀는 잠시 뭔가에 홀린 듯이 멍한 얼굴로 일카이를 쳐다보더니 이내 작게 중얼거렸다.

‘나머지 하나는, 상자야.’

그러나 이윽고 스스로가 무엇을 말한 것인지 잊은 듯,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아무렇지 않게 다른 말을 이어갔더랬다.

아스펠라는 하벨 가문에 입양된 아이. 칼리우스는 에르윈 가문의 가주. 누이와 자신은 튀니아의 국왕과 로잘린드 가문의 핏줄을 이어받은 자.

‘나머지 한 명은 나일수도 있는 건가?’

작은 퍼즐들 수십 개가 맞춰지지 못해 머릿속을 잔뜩 어지럽혔다. 생각하고 결정 내려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에르윈 대공은 대체 무슨 이유로 날 귀족으로 내세우겠다는 거야.’

일카이는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던 중 비틀거리는 아스펠라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이것 봐, 내가 아직 몸이 덜 나았다고 했잖아!”

“그냥 잠깐 발을 헛디딘 것뿐이야. 고마워.”

아스펠라가 별일 아니라는 듯 헤헤, 웃으며 제 어깨를 잡은 일카이의 품에서 슬쩍 나왔다.

그리곤 다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뭐가 그렇게 급한지. 아스펠라의 얼굴에는 칼리우스를 향한 걱정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멀어지는 아스펠라의 등 뒤에 대고 일카이가 소리쳤다.

“좀 천천히 가! 네 몸 좀 먼저 생각하라고!”

기껏 걱정해줬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어, 알았어- 대충 무마하려는 듯한 성의 없는 대답이었다.

***

산에 오른 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 밤을 맞이했다.

아무런 장비도 없이 튀니아에서 가장 높은 산을, 그것도 병자의 몸으로 오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나무와 수풀들이 몸을 비켜주며 길을 만들어준다 한들, 고도가 높아질수록 힘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쉬울 거라 생각하고 온 것은 아니었으나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아스펠라의 분홍빛 입술은 하얗게 부르트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등산 중간 중간 적절한 시간의 휴식을 취하고, 해가 지면 무조건 침낭을 펼치고 잠을 자기로 합의를 봤으면서 아스펠라는 자꾸 약속을 어기려 했다.

조금 더 올라가고 나서 쉬어도 될 것 같다고. 밤이 되어도 반딧불이가 비쳐주니 더 올라갈 수 있다고.

“웃기지 마, 아스펠라. 우리 약속한 거 잊었어? 우리가 지금 힘들어서 쉬어가자고 하는 것 같아? 너 환자야. 환자. 자꾸 이러면 그냥 둘러메고 내려갈 줄 알아.”

그럴 때마다 일카이가 진심으로 화를 내며 아스펠라를 말렸고, 강제적으로라도 휴식하게 하고 잠을 재웠다.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니었다.

아스펠라는 그 며칠 대공 성에서 나왔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칼리우스의 상태가 적힌 전서구를 확인하고 보내길 반복했다.

“나 정말 괜찮은데.”

“괜찮기는 개뿔이. 솔직히, 산의 동물들도 졸졸 네 뒤를 따르면서 너 말리는 거 다 알거든?”

얘는 동물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 그걸 어찌 안 건가. 화들짝 놀란 아스펠라가 괜히 아니야. 아니라니까, 하며 강한 부정을 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아니야 그런 거. 힘내라고 응원해주는 건데.”

“응원은 무슨. 응원을 그렇게 애처롭게 해? 놀란 표정 보니까 맞구만. 걔네도 널 걱정하는 거지. 그러니까 제발 고집 좀 부리지 마.”

말리는 것은 일카이 뿐만이 아니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나무와 동물들 또한 아스펠라를 말렸다.

사슴이나 토끼들은 아스펠라의 바지 자락을 물고 애처롭게 늘어지기도 했고, 나무들은 길을 내어주다가도 이따금씩 뿌리를 들어 아스펠라를 막기도 했다.

[아스펠라. 성역에는 뭐가 있는지 우리도 몰라. 거긴 일반적인 나무들은 살 수도 없어. 짐승들도 거기선 살지 않아. 하늘을 나는 새들도 성역 부근은 비켜 지나가는 걸.]

아주 높은 하늘을 나는 새들도 성역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거긴 온통 어두운 연기뿐이라며 위험할 수도 있다고 다들 아스펠라를 말렸다.

[아무리 네가 산신이 되어 성역에 들어갈 수 있다고는 해도, 넌 일단 인간이야. 비르가와는 다르단 말이야.]

“비르가는 내가 들어갈 수 있을 걸 알았으니 약초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려준 거겠지. 비르가의 행동들에는 모두 다 이유가 있어.”

아스펠라는 거칠어진 숨을 조절하며 묵묵히 위로 올라갔다.

위로 올라갈수록 숨이 달려 입으로 거친 숨을 내쉬어야 했다. 그녀가 살던 첫 번째 산봉우리와는 달리 두 번째 산봉우리는 땅 자체가 워낙에 울퉁불퉁하고 거칠었다.

점점 발을 헛디디는 일도 많아졌고, 뒤에서 일카이가 받쳐주는 일도 잦아졌다.

건장한 사냥꾼들도 지치는지 이따금 거대한 바위에 앉아 땀을 닦고 쉬기도 했다.

일카이 역시 짐을 풀고 쉬려 했으나, 쉬면서도 계속 발만 동동 구르는 아스펠라의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아스펠라.”

“응?”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네 말대로라면 그 에르윈 대공이 독 좀 먹었다고 뒤지겠어? 원래 그런 인간들이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걸.”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렇게 발 동동 구르면 보는 사람까지 불안해진다.

위로인 듯 위로 아닌 그의 말에 아스펠라가 조금 불안함이 누그러진 듯 동동대던 발걸음을 멈추고 바위에 앉았다.

그러더니 일카이가 건네는 빵 쪼가리를 받으며 으레 누이가 동생을 훈계하듯 말했다.

“말 좀 예쁘게 해 정말. 뒤진다는 말이 뭐니.”

“뭐 어때. 듣는 사람이라곤 우리 형들이랑 너랑 나무들밖에 없는데.”

“아무리 그래도, 벽에 똥칠이라니.”

“그럼 뭐 요절하라고 빌기라도 할까?”

장난스럽고 얄밉게 말하는 그의 말투에 아스펠라가 아프지 않게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정말 철들려면 멀었다니까. 웃으며 말하는 아스펠라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일카이 역시 피식 웃으며 입에 빵을 우겨넣었다.

***

짧은 휴식이 끝나고 그들은 쉬지 않고 산을 올라갔다.

겨울이 다가올수록 일몰은 더 빨리 시작되었다. 밤이 되자 반딧불이들이 몰려와 등불마냥 앞을 비췄다.

사냥꾼들은 앓는 소리 한번 내지 않고 산을 오르는 아스펠라와, 그들 주변을 맴돌며 길을 비춰주는 반딧불이가 그저 신기한 듯했다.

아우우우-

멀리서 늑대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냥꾼들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여 저마다의 무기를 손에 쥔 채로 경계하기 시작했다.

“아스펠라. 너무 빨리 올라가지 마. 늑대들이 공격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괜찮아. 공격 안 해. 예전에 나랑 약속했거든.”

조금 추워져 코를 훌쩍이는 아스펠라에게 일카이가 제 겉옷을 벗어줬다.

아스펠라는 사양하려다 이내 제 몸에 반 강제로 입혀지는 외투를 꼭 잡고선 고마워, 작게 중얼거리곤 다시 위로 올라갔다.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사냥꾼들은 차가운 새벽이슬을 조금이나마 막아줄 공간을 찾으러 수풀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꽤 아늑해 보이는 동굴을 발견한 듯 멀리서 일카이를 불렀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다시 올라가자.”

아스펠라는 그러지 말고 더 위로 올라가고 싶었으나, 피곤한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키지는 않으나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아스펠라는 그제야 몸 이곳저곳이 쑤시는 것을 느꼈다.

“으으…….”

어깨 부근을 붙잡고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일카이가 다가왔다. 다른 동료들은 눈치 봐가며 땔감을 더 구해오겠다는 둥의 변명을 하곤 자리를 비켰다.

“붕대 갈아줄게.”

“나 혼자 할 수 있어.”

“뭘 혼자 할 수 있어. 진짜 고집 작작 피워라, 걱정하는 사람 사심 가득한 변태로 만들지 말고.”

의사 대동하는 건 미안해서 싫다, 그렇다고 다 낫고 나서 가는 것은 더 싫다는 고집을, 대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산에 오르기로 절충한 것 아닌가.

일카이는 눈이라도 감고 갈아줄 테니 어깨를 보여 달라며 진지한 얼굴로 말하더니, 이내 아스펠라를 근처 개울가로 데리고 갔다.

“걱정하는 사람한테 도움 필요 없다 하는 것만큼 너무한 거 없다. 빨리. 너 지금 피 배어 나온 거 다 알고 있어. 내가 마수만큼은 아니어도 한때 인간 개 코라고 불리던 사람이거든?”

아무리 늑대들이 널 공격 안 하겠다 약속을 했다 한들, 세상 모든 짐승들이 네게 우호적이겠어? 그렇게 나 상처 입은 인간이다 하는 냄새를 폴폴 풍기는데.

일카이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듯하여 아스펠라가 슬쩍 어깨를 내보였다.

그의 말대로 이미 붕대에는 피가 배어 있었다.

일카이가 이럴 줄 알았다며 쯧 혀를 차곤 천천히 붕대를 풀고 챙겨온 천으로 상처 부위를 깨끗이 닦았다.

핏물이 들면 강가에서 천을 빨아 다시 피를 닦아내길 반복했다. 그리고 연고를 치덕치덕 바른 뒤 다시 붕대를 감았다.

엉성하고 거친 듯 했으나 은근 세심하게 붕대를 감아주던 일카이는 이내 다 끝났다며 아스펠라의 등짝을 으레 동료에게 하듯 후려쳤다.

“악! 아프잖아!”

아스펠라가 등을 만지작대며 그를 노려보자 일카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 아무리 내가 편해도 그렇지. 아직 어깨도 다 안 나았는데.”

“아 그렇구나. 난 또 다 나으셔서 이렇게 등산하시는 줄 알았네요, 누나.”

“너 진짜 자꾸 이렇게 유치하게 굴래?”

“흥.”

일카이는 새침하게 콧방귀 끼고는 먼저 동굴로 들어갈 테니 잘 찾아오라며 자리를 떠났다.

아스펠라는 씩씩대며 그를 노려보다가도, 이내 고맙고 미안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물곤 다시 옷을 추슬렀다.

동굴로 돌아간 아스펠라는 일행과 저녁을 간단하게 먹은 뒤 잠자리에 누웠다.

언제 침낭까지 챙겨온 것인지, 일카이는 너 침낭 안 챙길 줄 알았어. 이럴 줄 알고 내가 두 개나 준비했거든? 얼른 자라. 하며 손수 침낭을 펴 이부자리를 만들어주고 아스펠라를 그 위에 눕혀 애벌레처럼 돌돌 말았다.

“겨울이니까 최대한 이불로 돌돌 말아. 안 그러면 입 돌아가니까. 진짜 대책 없다, 아스펠라. 잠도 안 자고 산 오를 생각인거 다 아는데, 그렇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거든?”

그러니까. 자라. 어? 괜히 또 에르윈 대공이 아파 죽으면 어쩌나 그딴 생각하느라 날 밤 새지 말고. 자라고. 몸 회복이 중요하다고.

마치 제가 아스펠라의 주치의 혹은 친 오라비라도 된 양 구는 일카이의 모습에 사냥꾼 동료들은 스멀스멀 웃음이 나오는 것을 꾹 참았다.

“알았어. 알았다니깐.”

아스펠라가 조용히 이불을 끌어 모으곤 자는 척 눈을 꼭 감았다.

“진짜 새벽녘에 훌쩍 거리면서 울지 마.”

“운적 없거든!”

“아니면 말고. 원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랬다.”

일카이가 심술 맞게 이죽대곤 사냥꾼 동료와 아스펠라 사이에 떡하니 장벽처럼 누웠다.

“진짜 내가 애도 아니고…….”

“어휴, 아스펠라는 좋겠다. 나는 아스펠라 이렇게 걱정해주는데 지는 대공만 걱정하고. 어휴.”

다 들으라는 식의 말에 아스펠라가 할 말이 사라져 입을 다물자, 일카이의 왼쪽에 누운 동료가 일카이의 어깨를 콕콕 찌르며 장난스레 말했다.

“대장. 우리가 대장 걱정해줄게.”

“아 필요 없어.”

“그래. 필요 없지. 우리 같은 것들은 그냥 동굴 입구에서 춥게 바람 막아주는 용도지.”

“아니 그런 게 아닌 거 알잖아, 형.”

“아이고. 업어 키웠더니. 돌아오는 건 필요 없다는 말이야.”

아스펠라는 마치 엽편소설 속의 우스꽝스러운 인물들처럼 서로 말을 주고받는 목소리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살짝 미소 지었다.

일카이의 말대로 잠시 칼리우스가 걱정되어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으나 얼른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훌쩍 거리는 소리가 나면 정말 일카이에게 한 소리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시끄러운 듯 뒤척이던 일카이는 잠시 고개를 돌려 아스펠라 자리를 확인하려다 이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얘 어디 갔어.”

그가 손수 펴줬던 두꺼운 모포 침낭은 깔끔하게 개어져 있었다. 일카이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 근처를 살폈다. 아스펠라는 보이지 않았다.

“아씨, 진짜!”

일카이가 제 머리를 이리저리 헝클이며 짜증을 냈다. 저 홀로 먼저 출발하면 어쩌란 말인가. 다른 동료들 역시 일카이의 소리를 듣고 하나둘 깨어났다.

“대장. 여기 뭐라 써져 있는데?”

동료들 중 하나가 아스펠라가 바닥에 써놓고 간 글을 발견해 일카이를 불렀다.

일카이는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가 그것을 확인했다. 바닥에는 나뭇가지로 쓴 듯한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일카이. 여기까지 같이 와줘서 고마워. 다른 사냥꾼 분들도 정말 감사합니다. 그치만 알다시피 이 위에서부터는 산 정상 부근이야. 성역에는 산신을 제외한 이는 들어올 수 없다고 하잖아. 빚지는 거 같아서 헛걸음 시키고 싶지 않았어. 먼저 내려가 있어. 그리고 알다시피 나 정말 괜찮아.>

“장난하냐!”

일카이가 양손을 허리에 올린 채로 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뭐가 그렇게 빚지는 게 싫다고. 그거 좀 지면 어때서. 내가 좋다는데!”

“대장…….”

씩씩대던 일카이는 이내 고개를 쳐올리곤 가만히 숨을 들이쉬며 심호흡을 했다.

“이제 어쩔 거야? 진짜 내려갈 거야?”

“난 기다릴래. 형들은 먼저 내려가도 좋아.”

“야. 네가 여기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내려가냐.”

“어차피 훈련 말고 딱히 할 것도 없고, 또 아스펠라 양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일단 다 같이 기다리자.”

그들의 말에 일카이가 말했다.

“그럼 일단 나는 성역 근처까지 만이라도 가볼게. 잠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줘.”

일카이는 무기 몇 가지와 작은 짐만 들고선 그대로 아스펠라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성큼성큼 걸어 올라가던 일카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 나는 안중에도 없네.”

마지못해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어쩌겠는가. 걱정되니 따라갈 수밖에.

간밤에 비가 왔던 건지, 아니면 안개 때문에 습해진 것인지. 아스펠라가 걸어 올라간 발자국이 드문드문 드러났다. 일카이는 그 발자취를 따라갔다.

도중에 나무들에 가려져 길을 헷갈릴 때면, 신기하게도 나무들이 아스펠라를 반길 때처럼 슬쩍슬쩍 몸을 움직여주거나, 나뭇가지로 아스펠라 간 방향을 알려줬다.

“뭐야. 너희 왜 나한테도 길 비켜주냐?”

일카이가 신기한 듯 물었으나,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머쓱해진 일카이가 뒷목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아스펠라를 쫓아가라는 거 맞지? 그렇게 알아듣는다?”

일카이는 그대로 발자취를 쫓았다. 이놈의 산봉우리는 얼마나 높은 것인지, 한참 걸은 느낌인데도 여전히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체격 좋은 그의 입에서도 거친 숨소리가 토하듯 튀어나왔다.

아스펠라는 대체 여길 어쩌려고 혼자 간 것인가. 혹여나 발을 헛디뎌 엎어져 굴러 떨어진 건 아닐까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참이었다.

퉁!

뭔가에 맞고 일카이가 뒤로 튕겨 나가떨어졌다.

“뭐야?!”

벌떡 일어난 그는 당황스러운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 길 너머로 아스펠라의 발자국이 보이는데. 일카이는 자신이 부딪힌 듯한 곳에 손을 휘저었다.

뭔가가 손에 닿았다. 보이지는 않으나 마치 벽처럼 딱딱한 뭔가가 만져졌다.

“이게 뭐지?”

천천히 벽을 만지던 일카이는 이곳이 아스펠라가 말한 성역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일카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투명한 벽 너머 아스펠라의 발자국을 바라봤다.

-4권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