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장. 적의 움직임 (9/16)

8장. 적의 움직임

거대한 튀니아 왕궁에는 총 3층의 지하 공간이 있다. 그곳은 파베스가 검은 마수나 산신들을 가두려고 파낸 곳이 아닌, 이미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고대 왕들 중 하나가, 어쩌면 이 왕국을 가장 먼저 만들었을 초대 왕이 이날만을 기다리며 만든 공간일지도 모른다.

이 공간은 튀니아의 오랜 역사를 함께한 장소였으나, 단 한 번도 그 존재가 알려진 적 없었다.

튀니아의 모든 국왕이 이곳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그 누구도 이곳에서 난 일들을 알리려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선왕만이 이곳의 존재를 반대했고, 이곳을 없애려 했으나 오히려 제가 갇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런 사실을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이곳에서의 일들은 지상으로 올라가지 못한 채 계속 이곳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칼리우스의 그림자는 오랜 시간 국왕의 보좌관을 감시해 이곳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마침내 그 안에 숨어들 수 있었다.

칼리우스의 말대로 지하 1층에는 온갖 연금술을 위한 장비들과 함께 뭔가를 해부하고, 소생하는 것을 적은 종이들이 책상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지하 2층에는 검은 마수와 실험대에 오른 산신들이 이미 반쯤 부패가 시작된 채로 악취를 내뿜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지하 3층에 내려갔다.

“여긴 뭐야?”

빛 한줌 들어오지 않는 매우 어두운 곳.

기척을 죽인 채 넓은 공간을 돌아다녔다. 감옥은 아니었으나, 쇠창살과 수갑이 벽면에 달라붙은 것은 꼭 감옥 같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로 둘러보던 중 그녀는 거대한 우리를 발견했다. 흰 천으로 둘러싸여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천천히 손을 가져가 천을 들추려던 찰나였다.

절그럭 절그럭, 쇠붙이들끼리 덜컹대며 부딪히는 소리가 안쪽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그륵, 그르륵, 그르르륵.

키엑, 켁, 카아아악…….

짐승의 소리 같기도 했으며 사람의 비명 같기도 한 기괴한 음성에, 손을 뻗으려던 그림자가 조용히 침을 꿀꺽 삼켰다. 단순히 한둘에서 나는 것이 아닌 여럿이서 내는 소리 같았다.

우리 안에서 내뿜어지는 것은 기괴한 음성뿐만이 아니었다.

“읍.”

코를 찌르는 악취에 그림자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시체 썩는 냄새 같지 않은가.

마저 손을 뻗어 천을 잡아내리려던 찰나, 문 쪽에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날랜 몸으로 얼른 천장 위의 구석으로 올라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그림자는, 이내 얼굴에 천을 뒤집어 쓴 남자가 병사들에게 끌려 들어오는 것을 목격했다.

이곳은 고문을 하는 장소인가?

“사, 사 살려주시오, 살려주십시오……!”

그는 곧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지 예상이라도 하고 있는 듯 울면서 애원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그런 사내의 애원을 무시하며 그를 나무 의자에 앉혔다.

팔과 다리를 의자에 연결된 수갑에 가두자 남자의 우는 소리가 더 커졌다.

“우는 소리를 그치게, 자네는 국왕 전하를 지키는 명예로운 군사 중 하나가 되려는 것이야. 이제 곧 전하께서 직접 내려오실 텐데 이리 나약한 모습을 보이려는 겐가?”

뒤이어 들어온 교주의 말에 병사들은 물론, 연구원들 역시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애써 남자를 외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국왕이 보좌관 함께 들어왔다. 호위 기사들이 왕의 옆에 서 그를 호위했다. 버루카가 고갯짓을 하자, 망토를 쓴 신도들이 방 한켠에 자리 잡고 있던 거대한 우리를 질질 끌어 중앙으로 끌고 왔다.

아주 멀리 있던 것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끼엑, 끽, 끼에엑, 이상한 짐승 소리가 들려왔다.

“국왕 전하, 전하의, 초대 왕의 오랜 바람이 마침내 이루어진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여태까지 수많은 연금술을 해왔으나, 이번만큼 아름다운 결과가 나온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이 모든 영광을 국왕 전하께 바칩니다.”

교주의 말에 파베스는 마저 하라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로 손짓을 했다.

“천을 걷어라!”

교주의 말에 신도들이 거대한 장막과도 같은 흰 천을 걷어냈다. 그 아래 감춰져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캬아아악!

그륵, 그르륵, 끼에에엑!

그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국왕의 옆을 호위하고 있던 호위병들이 얼른 전투태세를 갖추었고, 신도들은 파랗게 질려 주춤대며 뒤로 물러섰으며, 보좌관은 올라오는 구토를 막으려는 듯 제 입을 틀어막았다. 몸을 숨기고 있던 그림자 역시 제 눈을 의심했다.

‘저게 대체 뭐야?!’

철창 사이로 손을 내뻗으며, 배고픔과 살의로 꿈틀대는 하나의 덩어리 같은 것들. 서로를 물고 뜯은 것인지, 온통 시뻘건 피칠갑을 한 채 짐승의 소리를 내는 그것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두 눈은 하얗게 변해 있었고, 머리는 산발이었으며, 이빨은 살점과 피가 박혀 검게 변색이 되어 있었다. 마치 지능이라고는 없는 듯 계속 해서 그륵 대며 밖의 인간들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이를 드러낸 채 그 안에서 짐승의 소리를 내며 철창 사이에 얼굴을 박고선 살점을 뜯으려는 듯 이를 딱, 딱, 다물리는 행동을 했다. 그들은 매우 굶주려 보였다.

그 징그러운 광경을 경이롭게 보는 이는 교주와 국왕뿐이었다.

“아름답군!”

덩어리같이 달라붙어 손만 퍼덕이는 그것들을 보며 파베스가 한 첫마디였다.

의자에 묶인 사내는, 뒤로 고개를 뻗어 짐승인지 사람인지 모를 것들을 보곤 비명을 질렀다.

철창 안의 덩어리들은,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모두 자신과 동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저 돈 한 번 벌어볼 생각으로 따라온 것이었다.

국왕의 특별 기사단을 만든다기에, 그 기사단은 지위를 막론하고 그저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에, 그가 살던 작은 마을의 건실한 청년들이 모두 기쁜 마음으로 지원하지 않았던가.

‘얘야, 거기에 지원하지 말거라. 뭔가 좀 이상하다.’

그때 어머니의 말을 들었어야 할 것을.

‘어무이도 참. 국왕 전하의 특별 기사단이라잖아요.’

‘그러니까, 국왕께서 왜 훈련받은 기사들을 내버려두고 천한 우리들 중 기사를 뽑는다는 게냐.’

‘젊은 국왕이시잖아요. 그분은 산신을 토벌하고 새로운 철 문명을 받아들이시려는 분이세요. 새로운 시대를 열려고 하시니 신분을 중히 여기시지 않는 걸지도 모르죠!’

두둑한 은화 주머니까지 주기에 그저 신났을 뿐이다.

‘이것 보세요. 지원자들한테는 은화 주머니까지 줬다니까요? 어무이. 가서 돈 벌어올게요. 특별 기사단이니 봉급도 넉넉할 거예요.’

‘얘야…….’

‘매달 돈을 부칠 테니, 어무이. 이제 산에서 살지 마셔요. 부정을 타 이곳에서 살기는 불가능해요. 도시로 내려가 계세요.’

그들은 화전민이었다. 산신들이 사라진 산은 부정을 타 생명이 자라기 어려워졌고, 더 이상 농작이 불가능해지자 달리 먹고살 길이 없었다.

그런 그들을 딱하게 여긴 자비롭고 젊은 국왕께서 건실한 청년들을 특별 기사단으로 데려가겠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저 우리 안에는 기쁜 마음으로 같이 올라온 친구들과, 삼촌과, 아버지들이 있었다. 이제는 그저 눈을 까뒤집은 채 서로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괴물로 변했지만.

고개를 돌려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던 사내가 이내 서럽게 울며 구걸했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전하! 어찌 이러십니까! 저희는 그저 전하의 특별 기사단이 된다기에 왔을 뿐입니다. 이런 말은 없지 않았습니까!”

“어허, 이놈이 감히 누구에게 큰 목소리를!”

교주가 다그치려 하자, 국왕이 되었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내 기분이 좋으니, 친히 답해주마. 네 말대로다. 너흰 내 특별한 군대가 될 것이야. 그 누구도 이기지 못할 나의 특별한 군대 말이다. 내가 튀니아를, 더 나아가 세계를 거머쥐는 데에 큰 역할을 할 군대 말이다. 그러니 자긍심을 가지거라.”

“저, 저 꼴로 어찌 군대가 된단 말입니까! 내보내주세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발요! 어머니 혼자 계십니다. 저마저 저 꼴이 나면 제 어머니는 누가 지킨단 말입니까!”

파베스는 눈물로 호소하는 사내를 질린 얼굴로 보더니 이내 쯧 혀를 차며 어서 시작하라는 듯 손짓을 했다. 신도들이 그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읍읍! 입이 막히면서도 사내는 계속해서 생을 구걸했다.

“쯧쯔……. 힘을 준다는데도 두려워하는 꼴이라니.”

파베스는 못마땅한 듯 한심한 눈으로 눈물 콧물 질질 흘리는 그를 쳐다보며 혀를 찼다. 그의 시선이 이내 뒤의 우리로 향했다. 우리에 갇힌 이들은 지성과 이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듯 그저 연신 손을 뻗고,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내 신도들이 다시 천으로 우리를 가렸다. 시끄럽던 것들이 이내 아까 전보다는 조용해졌다.

“눈이 보이는 건가?”

“예. 천으로 가려두면 한동안 잠잠해집니다. 다만 명확한 시각으로 알아챈다기 보다는, 후각이 조금 더 발달한 느낌입니다.”

“흐음, 그렇군. 어서 시작해보게.”

이내 신도들과 교주들이 항아리와, 향 등의 실험에 필요한 것들을 단상 위에 하나둘 올려놓기 시작했다.

뜨겁게 달군 인두를 들어 사내의 이마에 갖다 대자, 그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인두를 떼니 주술의 기능을 하는 고대어가 써진 원형의 마법진이 이마 정중앙에서 열을 내뿜고 있었다.

“다들 코와 입을 천으로 가려주시지요. 매우 독성이 강해 깊게 들이마셨다간 두통이 일 것입니다.”

교주와 신도들 모두 천을 돌돌 말아 코를 막은 뒤, 두건을 두르듯 입을 가렸다. 그 자리의 모든 이들이 그렇게 하자, 숨어 있던 그림자 역시 심상찮음을 느끼고 얼른 두건을 썼다.

교주가 항아리에서 뭔가를 꺼냈다. 지독한 악취가 나는 그것은 일전에 그가 가둬둔 개의 일부였다.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해 보았으나, 가장 효과가 빠르게 나타나는 것은 향을 맡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교주는 개의 일부를 불에 태우기 시작했다. 타오를수록 역한 냄새가 나자 병사들 중 일부가 헛구역질을 하며 제 입을 틀어막았고, 버루카 역시 소매로 제 코를 막았다. 두건으로 입과 코를 막았음에도 그 독한 냄새는 그들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개의 일부는 재 가루로 변했다. 신도들은 그것을 모두 모으더니 이내 어떠한 약초를 빻아 그 진액과 가루를 섞었다.

진득하게 섞여진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체처럼 바뀌었다. 그것을 작은 함에 담은 교주는 이내 사지가 묶인 사내 앞으로 들이민 뒤, 마치 향을 피우듯 불을 붙이고 바로 끈 뒤 그 연기를 마시게 했다.

뜨거운 연기가 그의 얼굴에 곧바로 쏘였다. 증기와도 같은 그것은 사내의 얼굴을 달궜다. 화상 입은 이의 얼굴마냥, 사내의 얼굴이 금세 붉어지고 살이 일어났다.

짙은 연기를 모두 들이마신 사내가 고통스러운 듯 켁켁 대며 기침을 했다. 그러자 이마의 인두 자국이 마치 불에 타들어가듯 다시 한번 붉은 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자국 주위로 혈관들이 울퉁불퉁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사내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입에 거품을 물더니 이내 갈색의 평범한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그것은 마치 장님의 하얀 눈동자마냥 점점 희뿌옇게 사라지더니 이내 흰자위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컥, 커억, 큭…… 끄윽……!”

인두 자국은 마치 물에 번지기라도 하는 양, 사내의 피부 전체로 번져나갔다. 그 모양새는 마치 사람의 몸 전체에 글자가 퍼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마 정중앙에서부터 관자놀이와 목을 지나, 팔, 손끝, 복부, 그리고 이내 종아리와 발끝까지.

거대한 뱀이 지나가듯 꿀렁꿀렁, 천천히 인에 새겨진 고대 주술이 몸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마침내 그 변화가 끝이 났을 때, 의자에 묶인 사내는 우리에 갇힌 다른 이들처럼 지성과 이성을 모두 상실한 듯 보였다.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며 그륵, 그륵, 먹이를 찾는 눈빛이었다.

그 기괴한 광경에도 파베스는 그저 신기한 듯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리하면, 죽여도 죽지 않는 불사의 존재가 된단 말이지.”

“예, 전하. 인이 새겨진 이마 정중앙을 공격하거나 목을 죄다 잘라 내지 않는 한, 팔을 잘라도 움직이고, 다리를 잘라내도 공격을 멈추지 않는 존재입니다. 고대에는 이를 ‘불사체’ 즉, ‘죽지 않는 몸을 가진 인간’이라 불렀지요.”

죽지 않는 몸을 가진 인간이라니. 이토록 경이롭고 강력하며 아름답기까지 한 존재가 또 있을까! 파베스는 지금 제 눈앞에 있는 것이 자신이 그토록 원하고 선망하던 존재라는 것에 매우 기뻐하는 눈치였다.

“이들로 군사를 조직한다면, 가히 막강한 군사력을 얻게 되실 겁니다. 시체와도 같은 이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적군을 무력하게 만들 것입니다. 또한, 몇 번의 실험 결과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교주의 말에 국왕이 물었다.

“그게 무엇인가?”

“이들에게 물리면, 살아 있는 자들 역시 이들처럼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에 버루카와 다른 병사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저들처럼 변한다고? 물리기만 하면?

“하하하! 그래? 그리 변한단 말이지?”

“예, 실험을 하던 신도 셋이 물렸는데, 모두 저들과 같이 변했습니다. 마치 역병처럼 말입니다. 이는 고대 서적에는 없던 내용이었습니다. 이 점을 잘 이용만 하신다면, 적군들도 전하의 수족처럼 부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선대 왕들이 그렇게나 원했던 이 불멸의 병기를, 전하께서 드디어 손에 넣으셨습니다. 감축 드립니다, 전하!”

교주의 말에 신도들 역시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파베스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그 나약함에 도망치려 했으나, 나를 보라. 나는 드디어 해내지 않았느냐! 하하하!”

튀니아 왕족들에게는 전해 내려오는 고서가 하나 있었다. 이는 국왕이 될 자는 모두 알아야 할 튀니아의 숨겨진 역사들이었다.

파베스는 궁금한 것이 많았고, 그것을 접할 나이가 되지 않았음에도 아버지 몰래 그 고서를 읽고 말았다.

그때부터 그는 이 ‘불사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를 이용만 하면 그는 신도 두려워하는 자가 될 것이 분명했다.

신의 머리를 밟고 올라서는 것은 물론 죽음마저도 그가 관장하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신 그 자체가 되는 것이었다.

튀니아의 초대 왕은 생과 사를 다룰 줄 아는 이라 했다. 그것은 태초의 신에게 사랑받았던 그가 선물 받은 능력으로, 원래는 백성들을 널리 이롭게 하기 위해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에게 초월적인 능력은 화를 부르기 마련이었다.

그 능력을 이용하여 튀니아의 초대 왕은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만다.

그건 바로 죽은 이들을 되살리는 것. 사랑하던 죽은 왕비를 되살렸고, 그는 죽지 않는 군대를 만들어 다른 나라를 침략하려 했다.

튀니아는 그렇게 영역을 넓혀갔다. 이를 알게 된 신은 초대 왕을 벌하였고, 그 능력을 빼앗아 왕의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신하 다섯과 힘을 합쳐 루이나를 책에 봉인했다.

봉인된 금서와 함께 초대 왕은 죽음을 맞이했다. 신은 왕이 무덤에 거대한 성을 하나 짓고, 그 능력에 현혹되지 않을 다섯 명의 신하에게 거대한 묘지를 지키도록 명했다.

죽었다 살아난 왕비는 다시 죽게 되었고, 죽지 않는 군대는 그대로 땅에 매장되어 지금도 땅 어딘가에서 아우성 치고 있을 거라는 신화.

신은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대가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겁을 주려던 목적이었을지 몰라도, 파베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파베스는 자신이 이 고서를 읽게 된 것이 어떠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초대 왕은 하지 못했던 그 일을 자신이 성사할 운명.

천하를 손에 쥐고 주무를 그런 운명.

그는 신을 자신의 몸에 끼얹고, 불사의 군사를 조직해 모든 것을 장악할 것이다.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은 착실히 이행되고 있었다.

딱 하나 거슬리는 것은 아스펠 산의 새로운 신뿐이었다.

***

아스펠라는 약방 영감님이 전해준 약을 달여 매일 밤낮으로 탕약을 먹었다. 하지만 어째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증상이 완화되기는커녕, 악몽에 질린 낯빛만 점점 창백해졌다.

아스펠라는 주치의를 부른다 하여 자신의 증상이 나아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을 기억해내라는 듯 기억의 조각들은 아스펠라의 몸 깊숙이 박혀 들어갔고, 몸이 찔리는 듯한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면 어김없이 칼리우스가 그녀를 깨워 일으켰다.

그런 게 며칠 반복되자 아스펠라도 지치는 건 어쩔 수 없는지 항상 밝던 얼굴이 조금씩 침울해졌다.

그런 아스펠라가 걱정되었던 칼리우스는 어떤 식으로라도 그녀가 다시 활기를 찾았으면 했다. 그때 필립이 꽤나 좋은 아이디어를 냈다.

블레드 성에는 수많은 빈 방들이 있었다.

이곳에는 칼리우스의 어린 시절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을 거라는 유디티아 후작의 말에, 아스펠라는 성 곳곳에 위치한 방들을 둘러봐도 되겠냐고 칼리우스에게 물었다.

“내 어렸을 적이 궁금합니까?”

“네.”

“칼리우스는 어렸을 때부터 저 사나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지.”

옆에서 추임새를 넣는 유디티아 후작을 한번 흘겨본 칼리우스가 이내 둘러봐도 좋다며 허락했다.

그때부터 아스펠라는 종종 성의 빈 방들을 둘러보며, 칼리우스의 어린 시절을 엿보기 시작했다.

“와, 이게 아직도 여기 있었네. 우리 한나한테 보여줘야겠다!”

가끔 가다 유디티아 후작은 자신들이 이곳에서 어렸을 때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들을 발견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그것들을 제 아내에게 곧장 가져갔다.

추억에 잠긴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아스펠라가 어떤 기척에 잠시 방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무언가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기분에 그쪽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남쪽 복도에서 이어지는 갈림길에서, 아스펠라는 홀리듯 오른쪽으로 꺾이는 복도로 향했다. 발걸음을 걸을 때마다 낯익은 느낌이 들었고, 어째서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인지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

이내 복도를 접어든 아스펠라는 굳게 닫혀 있는 한 방문을 찾게 되었다. 아스펠라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댔다.

저도 모르게 이미 손잡이 문을 잡아 돌리자 잠겨 있을 거라 믿었던 문이 쉽게 열렸다.

“어?”

방 안에는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그저 여느 빈 방과 같이 가구들은 흰 면포에 덮여 있었다. 아스펠라는 잠시 방 언저리에서 두리번대다, 이내 한 발자국 내딛었다.

그녀 눈에 들어온 것은 원목 바닥에 난 생채기였다.

마치 누군가 이곳에서 거센 반항을 한 것처럼, 바닥 이곳저곳 날붙이에 까진 자국이 나 있었다.

몸을 숙여 원목 바닥의 틈을 쓸어내리던 아스펠라는 나무에 스며든 얼룩과, 갈라진 틈 에 말라비틀어진 검은 것을 발견했다.

그것에 손을 대는 순간, 어떠한 환영이 아스펠라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한 소년의 인영이었다.

아스펠라가 퍼뜩 몸을 일으켜 그 앞의 가구를 덮은 천을 잡아끌었다. 천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흘러내리자, 바닥에 자욱이 깔려 있던 불순물들이 공기 중에 부유했다. 기침을 하던 아스펠라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정면을 바라보다 이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경악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이게 왜 여기에?’

그것은 항상 꿈에서 나오던, 그녀가 누군가와 함께 문을 열고 숨는 장소였다. 사자 머리가 조각된 손잡이를 가만히 만지작대다 그녀는 천천히 고리를 돌렸다.

끼이익,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린 장롱 문을 살핀 아스펠라가 조용히 입을 틀어막았다.

이곳에 온 적이 있다. 분명했다. 그녀는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게 자신의 꿈과도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아스펠라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여길 온 적이 있었단 말이야?’

그렇다면, 자신의 꿈속에 나오던 그 소년은…….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데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헬렌이었다.

“그곳은 창고로 쓰는 곳이랍니다, 아가씨. 먼지가 많을 테니 이만 나오셔요.”

뒤돌아 헬렌을 쳐다보던 아스펠라가 물었다.

“혹시 예전에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나요?”

“……일전에 각하께서 괴한에게 공격당한 곳이지요.”

“그날 일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그 일에 대해서는 저도 잘 아는 바가 없습니다. 어쩌면, 집사는 알 수도 있겠네요. 그는 항상 이곳에서 일해왔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헬렌이 물었다.

“헌데, 그 일은 어찌하여 물으시는 겁니까?”

“제가……그날 있었던 거 같아서요.”

“네?”

“그날, 저도 이곳에 있었던 거 같아서요.”

“각하께서도 이를 아시나요?”

“아뇨.”

그러자 헬렌이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이내 꽤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건에 대해서는 제가 아닌 각하께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아가씨. 저녁 식사 후에 제가 허버트 씨를 데리고 찾아뵙겠습니다. 아가씨는 각하께 말씀 드려주시겠어요?”

“네.”

헬렌은 아스펠라가 그 방에서 나올 수 있도록 몸을 비켰다. 아스펠라가 방에서 나오자, 이내 그녀는 방문을 닫은 뒤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아스펠라는 태연해 보이나 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헬렌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 이내 뒷마당으로 나갔다.

그리고 아까 전 들어갔던 방의 창가에서 본 나무를 찾아갔다. 성을 빙 돌아 뒤쪽에 위치한 나무였다.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굵어진 몸체를 가진 나무에게 아스펠라가 다가가 물었다.

“너, 날 본 적이 있지? 여기 나무들, 날 알고 있는 거지?”

다짜고짜 묻는 질문에도 나무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 오랜만에 보는구나.]

“난 그날의 기억이 없어. 그날뿐만 아니라 그 전의 기억들도. 너희들, 혹시 아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

[말해주는 거 말고, 보여줄 수도 있는데.]

“……그게 가능해?”

[그래. 가능해. 내 몸에 손을 대. 그날의 저 방에서 일어난 일을 보여줄 테니까. 그럼 너의 기억도 돌아올 거야.]

그의 말에 아스펠라가 천천히 나무에 손을 댔다. 거친 나무껍질이 손에 닿자마자 아스펠라가 숨을 헉 들이마셨다. 기억들은 줄기와 가지를 뻗어 나갔다.

찰나의 순간, 모든 것을 받아들인 아스펠라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

누군가 아스펠라의 등을 둥글게 쓸며 토닥였다.

「아스펠라. 일어나야지.」

‘비르가……?’

아스펠라가 눈을 끔뻑이며 비비적대자, 비르가가 노인의 모습을 한 채로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원, 어찌 이렇게 매번 늦잠을 자는 건지. 그곳에 가서도 매번 늦잠 자면 안 된단다. 알았지?」

비르가의 말에 어린 아스펠라가 이내 우응, 소리를 내며 작게 웅얼거렸다.

‘나 그냥 안 가면 안 대까?’

「왜 그런 말을 하는 거니? 아스펠라.」

‘그티만, 난, 나눈 여기가 더 조은 걸.’

「그런 말 말거라. 인간은 인간과 어울려 살아야 해. 그렇다 하여 우리가 아예 못 만나는 건 아니잖니. 하벨 남작은 내가 해주지 못하는 것들을 네게 해줄 거란다.」

그의 말에 아스펠라는 시무룩해졌다.

오늘은 아스펠라가 하벨 남작 가문으로 입양되는 날이었다. 정확히는, 입양이 아니라 다시 돌아가는 것. 남작은 아스펠라를 자신의 잃어버린 딸이라 했다.

숲속에서 동물들과 놀던 아스펠라를 보자마자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번쩍 안아들며 소리쳤다. 내 딸! 그렇게나 찾아다니던 소중한 내 딸!

그는 이후 비르가에게 모든 사정을 설명했다.

막내딸이 태어나던 날, 자식을 잃은 슬픔에 빠진 시녀 하나가 그녀를 받았는데, 갓 태어난 아이를 보자마자 그대로 데리고 도망쳤다는 것이다.

이후 그녀는 아스펠 산으로 도주했고, 그곳에서 죽어버렸지만 아스펠라는 다행히도 살아남은 것이라고.

비르가가 신이라는 걸 몰랐던 하벨 남작은, 자신의 딸을 잘 보살펴 준 것에 보상을 하겠다며 비르가에게 금화 한 상자를 내렸다. 비르가는 금화는 되었으니, 아이를 데려갈 것이면 사랑으로 잘 보살펴달라는 말을 했더랬다.

‘비르가. 내가 틸어서 보내는 고 아니지?’

이제 겨우 다섯 살 난 아이가 과연 제 마음을 다 이해해줄지는 모르겠지만…….

비르가는 아스펠라가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아스펠라가 더 크기 전에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어찌되었든 야생의 아스펠 산. 언제까지고 그가 지켜줄 수만은 없었고, 산신들 중에서는 인간 아이를 키우는 비르가에게 불만인 이들도 있었다.

아스펠라는 언제 산짐승과 다른 신들에게 공격당한다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위험한 처지에 놓인 아이였다.

그러니 이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다시 인간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터. 자신이 싫어서 인간 세상으로 보내는 건 아니냐며 시무룩해진 아스펠라의 모습에, 비르가는 통통한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당연하지. 아스펠라. 난 널 매우 사랑한다. 하지만 네 친 가족이 있다면 그곳으로 돌아가는 게 네게 좋을 거라 생각했을 뿐이란다.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 같은 인간 가족과, 인간 친구들을 사귀는 것도 네게 좋은 경험이 될 거다.」

그렇게 말하며 비르가는 아스펠라의 머리칼을 정리해줬다. 바깥에서는 아스펠라를 데리러 온 남작의 비서가 기척을 내고 있었다.

「내가 항상 너를 지켜볼 테니 무서울 것 없다. 그리고 아스펠라. 인간들 앞에서는 인간의 말을 해야 한단다. 잊지 마렴.」

‘우응.’

「자. 씩씩한 모습을 보여줘야지.」

‘웅!’

아스펠라는 마차에 오르기 전 오두막 근처로 마중 나온 너구리 영감과, 쌍둥이 토끼 형제, 그리고 엄마 사슴과 아기 사슴에게 인사를 한 뒤 마차에 올라탔다.

다신 못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슬픈 건지. 어린 아스펠라가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

‘여보. 진짜 얘가 맞아요?’

‘맞다니까.’

‘근데 왜 사람 말을 제대로 못 해? 이건 다섯 살이 아니라 거의 두 살 수준인데?’

‘산신이라 한들, 결국엔 인간 세상과 단절된 산에서 산 늙은 노인이나 다름없는데 그에게 뭐 제대로 배우기나 했겠어. 사람 말 할 줄 아는 게 중요해? 그보다 더 대단한 걸 하는데. 자, 자 우리 공주님. 말은 차차 배우면 되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그렇게 말한 남작이 아스펠라를 번쩍 들어올렸다.

아스펠라는 인간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비르가는 노인의 모습보다는 원래 산신의 모습으로 지내는 일이 더 많았고, 자연스레 아스펠라가 하는 말은 짐승들의 말이었다.

인간에게 섞여 살아야 하니, 인간 말을 가르쳐주긴 했어도 아직 짐승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만큼의 수준에는 미치지 않았다.

그래서 아스펠라는 그들의 말보다, 그들이 아스펠라에게 보여주는 표정을 더 믿었다.

물론, 부모 되는 자들이 아스펠라를 꼭 껴안아줄 때는 비르가나 다른 동물 친구들이 그녀를 껴안아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지만.

그건 따듯함보다는 어쩐지 몸의 솜털들이 곤두서는 경계심이었다.

하지만 아스펠라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항상 비르가가 지켜본다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두려워 할 것 없었다.

비르가는 내가 여기서 행복하면 좋겠다고 했으니까, 행복해지자.

아스펠라가 새 가족을 만나 느낀 감정은 그뿐이었다.

비르가가 원하는 대로 행복해지자고.

맨 처음엔 그리 흘러갔다. 아스펠라는 육 개월 남짓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후작저에서 꽤나 많은 경험을 했다.

다섯 살 난 아스펠라에게는 과한 보석과 드레스들, 매일 매일 시중드는 시녀들과 수많은 디저트들.

‘미엘라, 우리가 왔어!’

‘우리 귀염둥이!’

아스펠라에게는 두 명의 오라버니가 있었다. 둘 다 그녀와는 나이 차가 꽤 나는 이들이었는데 한 명은 학술원 졸업을 앞둔 성인이었고, 둘째 오라비는 장남과 연년생이었다.

그들은 아스펠라를 과하게 아꼈다.

그들은 아스펠라에게 미엘라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자신의 이름이 아스펠라라고 어눌하게 말하는 그녀에게, 그 이름은 예쁘지 않다며 멋대로 미엘라라 부르기 시작했다.

아스펠라나 미엘라나 둘 다 좋았기에, 아스펠라는 스스로를 아스펠라라 불렀고, 남들은 그녀를 미엘라라 불렀다.

그들은 잃어버렸던 여동생을 되찾은 것에 매우 기뻐하는 눈치였다. 매일, 우리 미엘라가 앞으로 우리 집안을 일으킬 거야. 오빠들이 잘되도록 도와줄 거야. 미엘라 덕분에 우리가 힘을 거머쥐게 될 거야, 하며 예뻐했다.

아스펠라는 온 가족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다. 고작 육 개월의 시간인데, 산속에서의 생활보다는 더 신나는 것이 많은 후작가에서의 생활이 점점 더 좋아지려던 찰나였다.

언제나 그렇듯, 모든 불행은 행복이라는 가면을 쓰고 찾아왔다.

***

아스펠라는 인간의 언어를 금방 배웠다. 오히려 기본 회화를 익힌 이후부터는, 그 나이대의 어린애들보다 더 유창하게 말을 구사하는 수준이었다.

그런 제 딸이 남들보다 더 영특하고 특별하다 생각했던지, 남작은 아스펠라를 자신의 서재에 앉히고 꽤나 진지한 이야기를 했다.

‘자, 미엘라. 우리 공주님은 똑똑하니까, 아빠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들을 거라 생각한단다. 미엘라는 동물들과 대화할 줄 알지?’

비르가는 아스펠라에게 동물과 대화하는 것을 말하지 말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진짜 정체에 대해서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어린 아이가 왜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한 이유까지 모두 알 수는 없었다.

‘아빠는 미엘라가 동물들과 대화할 수 있다 하면 너무 기쁠 거 같아. 아빠가 본 게 맞지? 미엘라. 그때, 아빠랑 처음 마주쳤던 날 동물들과 대화하고 있었지?’

남작의 말에 아스펠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당시 아스펠라는 다섯 살이었고, 이제 막 가족이 생긴 참이었으며, 그들에게 사랑받고 싶었으니까.

‘그거 지금도 할 수 있니?’

‘네.’

‘또, 식물들이랑도 대화할 수 있지? 그치?’

‘웅.’

‘하하하하! 아유, 사랑스러워라! 역시 자물쇠라니까. 특별한 자물쇠라고! 이대로만 가면 봉인을 푸는 건 나일 거야!’

이제 그 묘지를 찾을 수 있다, 자물쇠가 있으니 국왕께서도 매우 기뻐하실 거야. 우리에게 큰 공로를 치하하실 거라고! 어쩌면 에르윈 대공보다 더더욱 예쁨 받을지도 몰라!

그때는 앞으로 더 사랑받을 거라는 생각에 그저 기뻤을 뿐이었다.

‘아버지, 그럼 저도 바로 승진할 수 있겠죠?’

‘어디 승진뿐이더냐. 국왕의 오른팔이 되겠지!’

그저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기뻐했기에, 자신 역시 기뻐했을 뿐이다.

***

첫째 오라비는, 학술원 졸업이 끝나자마자 곧장 국왕을 모시는 일을 할 예정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그들은 아스펠라에게 습관처럼 하는 말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그녀가 자물쇠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왕께서 긴히 찾으시는 것이 있는데, 그걸 찾는 일에 도움이 되면 첫째 오라버니는 국왕의 신뢰를 받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미엘라 너도 가족들에게 더 예쁨 받게 될 거라는 말이었다.

‘미엘라. 네게는 동식물과 대화하는 능력이 있잖니. 그걸 이용해서 그네들에게 말을 좀 걸어볼래? 초대 왕의 묘지가 어딘지 말이야.’

그 묘지를 알아야만 너도 예쁨 받을 수 있어. 에르윈 대공은 다 알고 있는 듯한데 입을 꾹 다물고 있다니까. 어째서 묘지에 대해서는 대공만 알고 있는 거야? 불공평하게.

그들은 어떠한 신탁에 대해 말했다. 네가 그 신탁에 등장하는 아이가 맞다면, 우리에게 그 묘지의 위치를 알려다오.

가족이라던 그들은 아스펠라를 ‘자물쇠’라 불렀다.

동물과 대화할 수 있고 식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아스펠라는 봉인의 문을 열 자물쇠였다. 문을 여는 것은 열쇠인데 왜 자물쇠라 부르는 것인지 묻자, 그야 자물쇠가 없어지면 문은 저절로 열리지 않겠니, 하며 그들은 아스펠라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있어 그녀의 능력이 사라진 것은 정말 예기치도 못한 일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능력이 사라진 것으로 보였으나, 사실 아스펠라는 갑작스럽게 능력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남작가의 저택에서 살게 된 이후부터, 바람의 말소리가 점점 더 작아지더니, 이내 어떤 말도 들리지 않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 몇 달이 지날수록 아스펠라가 들을 수 있는 말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

마침내는 그녀가 동식물에게 말을 걸어도 어떠한 대답조차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그때부터 아스펠라는 사랑받지 못하게 되었다.

항상 생글생글 웃던 얼굴들은 더 이상 아스펠라를 향하지 않았다. 노려보고 미워하고 경멸하고 한심스러워 하는 눈빛들이 어린 아스펠라를 따끔따끔하게 쏘아댔다. 벌에 쏘인 것 마냥 고통스러웠다.

그때 어머니가 말했다.

‘이러지 말고 다시 능력이 돌아오게 해 봐요. 잘만 쓰던 능력이 왜 사라졌는지. 얘가 인간 문명을 접하게 되어서 변한 것 아닐까요?’

‘그런가?’

‘산속으로 돌려보내면 분명 돌아오지 않을 게 뻔하니, 우리 지하에 가둡시다. 다시 산속에서 살던 것처럼 이런 문명들을 싹 빼앗아버리고 동물들만 들여보내면 다시 대화할 수 있지 않겠어요? 돈이 아깝잖아, 쟤한테 쏟아부은 돈이 얼만데!’

‘그래. 그러자.’

그들은 아스펠라를 차가운 지하에 가뒀다.

가두면서 하는 말이, 원망은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미엘라. 네가 능력이 사라져서 사랑받을 수 없는 거다. 알았지? 다시 능력을 쓰기 전까진 나오지 못해. 너한테 쓴 돈이 얼만데. 그 값어치는 해야 할 것 아니야.’

능력만 돌아오면, 다시 꺼내줄게. 알았지?

아스펠라는 그해 겨울을 그곳에서 보내야 했다. 지푸라기와 차가운 돌바닥을 침대 삼아 몸을 둥글게 말고 자야 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뜨거운 불구덩이에 떨어진 듯, 온몸이 열로 펄펄 끓었다. 그들은 가쁜 숨만 몰아쉬는 아스펠라를 내려다봤다.

한때 자신을 가장 예뻐해주던 네 명의 가족들은 걱정보다는 ‘이 골칫덩이를 어떻게 처리한담’ 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스펠라는 그제야 자신이 사랑받았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 나는 이용당했던 거구나.’

다섯 살짜리에게 그 사실은 많이 가혹했다.

‘아버지. 이제 곧 죽을 거 같은데요. 그냥 버립시다.’

‘젠장할, 그런 약해빠진 것이 국왕이라니. 아니 그 대단한 능력을 거머쥘 수 있다는데도 봉인을 열지 않겠다는 게 뭔 개소리냐고! 버리긴 뭘 버려!’

이미 국왕한테 미엘라에 대해 다 말했다고. 이대로 잘 키우다가 때에 맞게 죽여 봉인을 열기만 하면 되는데, 국왕이 뭐라 했는지 아느냐? 그 능력은 인간이 가져서는 안 된다는군! 자기는 봉인을 열기 위해 자물쇠를 찾는 게 아니라나 뭐라나!

‘이대로는 못 그만둬. 아까워서 어찌 그만둬? 난 그 묘지를 열어야겠어! 그 안에 어떤 게 들어 있는데!’

그렇게 말한 남작이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두꺼운 철문을 열 기력이 없어 아스펠라는 그저 다시 눈을 감았다.

***

아스펠라는 자신을 보러 온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으며 물었다.

‘어머니, 전 어머니의 자식인데 왜 이러시는 거예요?’

‘뭐? 누가 네 엄마니?’

어머니라 부르라던 여자는 아스펠라의 말에 코웃음 치며, 그녀가 쥔 치맛자락을 잡아챘다.

‘난 네 엄마 아니야. 널 낳은 진짜 엄마는 아마 산속에서 짐승들 밥이 되었을 걸?’

그러고 보니 넌 정말 네 엄마를 닮았구나. 그 짜증나는 금발 머리칼도, 그리고 곧이곧대로 모든 걸 믿는 바보 같은 성격도.

비아냥대던 여인이 혀를 한번 차곤 나가버렸다.

어쩐지. 친엄마가 아니었구나. 아스펠라는 이제 그런 것엔 놀랍지도 않았다.

그래. 애초부터 진짜 가족이 아니었던 거야.

비르가는 왜 안 오지?

난 이렇게 무섭고 두렵고 아프고 추운데, 왜 비르가는 오지 않는 거야?

날 지켜본다더니, 무섭지 않을 거라더니. 다 거짓말이야.

아스펠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소리 죽여 울었다.

그때 다신 열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문이 열렸다. 눈이 부실 정도의 빛과 함께 들어온 이는 비르가가 아닌 남작이었다.

‘휴, 아직 살아 있군. 이봐. 얠 끌어내.’

뒤쪽에서는 사냥꾼 같은 차림새를 한 투박한 사내가 들어왔다. 그들은 아스펠라를 짐짝 들 듯 어깨 위로 들쳐 멨다. 너무 가벼워 당황스러운 듯 남자가 물었다.

‘남작님, 정말 이 아이를…….’

‘다른 곳이어선 안 된다. 무조건 블레드 성이어야만 해.’

‘예. 그런데, 각하. 정말 왕자 전하의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아무리 왕족이라 한들, 그분은 이제 겨우 아홉 살 난 분이십니다.’

‘그 눈이 어딜 봐서 아홉 살이야. 자네도 봤을 것 아니야. 그건 아홉 살의 눈이 아니라니까. 착한 척하며 빌빌 떠는 국왕보다는 싹수 노란 왕자한테 기대를 걸겠어. 빨리 데려가.’’

내가 대공의 발목을 붙잡고 있을 테니 그 전에 바로 끝내야 해. 알았지?

남작의 말에 남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아스펠라를 데리고 마차 안에 들어갔다.

아스펠라는 제대로 몸을 고쳐 앉을 힘조차 없는 듯 의자에 축 늘어져 누워 있었다. 맞은편에 탄 사냥꾼 차림새의 남자를 가만 보니, 남작을 보좌하던 비서였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미안합니다, 아가씨.’

그는 짤막하게 말한 뒤, 어딘가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마차는 깊은 숲속에서 멈췄다. 그는 그대로 마차를 세운 뒤, 말 한 필만 남겨둔 채로 마차를 보내버리고 아스펠라를 안아들고 숲 안으로 들어갔다.

‘금방 끝내겠습니다. 절대 아프지 않을 거예요. 아주 조금만 따끔할 겁니다.’

미안합니다. 애기씨. 미안해요. 내가 어쩌다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답니다. 미안합니다. 저를 원망해도 좋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던 비서의 눈에 망설임이 보였다.

뒷길로 몰래 들어가듯 살금살금 주위를 살피던 비서가 이내 아스펠라를 땅에 내려놓았다. 모든 기력을 잃은 아스펠라가 도망가지는 못할 거라 방심했던 걸까. 땅을 파고 있던 그가 등을 보인 순간, 아스펠라는 정말 온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 그대로 뛰었다.

정말 열심히 뛰었다.

늑대들과 산속을 뛰어다니던 예전처럼, 네 발로 뛰어다니는 걸 먼저 배웠던 그때처럼 말이다.

손과 발은 돌부리에 채여 피가 맺히기 시작했지만 아스펠라는 개의치 않고 달렸다. 두 발과 두 손으로 땅을 딛고, 박차길 반복했다.

깊은 숲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울창한 잎과 가지에 하늘이 가려져 어디가 북쪽이고 남쪽인지를 알 수 없었다. 심지어는 자신이 어느 쪽으로 도망쳐왔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저쪽으로 가! 저쪽으로!]

그때 나무들이 아스펠라에게 말을 걸었다.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떨며 어느 한곳을 가리켰다. 아스펠라는 자신의 능력이 돌아온 것에 놀라워할 새도 없이 다시 그쪽으로 내달렸다. 입에서는 피 맛이 감돌았다. 눈앞이 흐릿했으나 지금은 살아야 했다.

조금 더 내달리자, 빛이 보였다. 그쪽으로 더 힘껏 내달렸다. 빛에 눈이 부셔 앞이 보이지 않았으나 그래도 내달렸다. 그리고 뭔가에 부딪혔다.

‘악!’

눈을 몇 번 끔뻑이며 얼른 몸을 일으키자 웬 남자애가 보였다.

어어, 위험한데. 비서가 죽이려고 올 게 분명한데.

‘집!’

아스펠라가 생각나는 대로 단어를 내뱉었다. 긴박한 나머지, 간단한 회화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집! 안, 안에! 안에 들어가!’

소년의 손을 잡고 달려가려 하자, 소년이 짜증스럽게 아스펠라의 손을 내쳤다.

‘넌 뭐야?’

‘나 아스펠라.’

‘뭐? 누가 이름을 물어봤……뭐야, 너 피나?’

그러다 제 손에 묻은 아스펠라의 피를 보더니, 이내 그녀가 다쳤다는 걸 인지한 듯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집! 콜록, 콜록, 집 가야해! 숨어, 나쁜 사람!’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할 정도로 숨 막혀 하는 어린애는 저보다 한참 작은 몸집을 가진 여자애였다.

‘나쁜 사람이 있다고? 숨어야 한다는 거야?’

아스펠라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숨어! 콜록, 콜록! 그러다 기침을 참을 수 없어 침을 퉤 뱉자, 입 안에서 피가 묻어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소년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빨리! 빨리이!’

‘알았어. 이쪽으로 와.’

소년은 아스펠라를 데리고 거대한 성 안으로 들어갔다.

‘큰일 났네. 아버지도 잠깐 자리를 비우셨는데. 이리 와. 일단 여기 숨어 있자. 걱정 마. 여긴 아무도 못 들어올 거야. 감히 대공가의 영지에 침입해서 범죄를 저지르려 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네.’

그렇게 말한 소년은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아스펠라의 손을 감쌌다.

‘진짜 큰일인데. 별관 쪽으로 가진 않겠지? 괜찮을 거야. 그쪽엔 집사가 있을 테니까. 이쪽 복도를 이용해서 별관으로 가자. 그곳엔 어른들이 많을 테니 상대적으로 더 안전할 거야. 자, 이렇게 하니까 덜 아프지?’

‘웅.’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네 발로 달렸어.’

‘뭐?’

‘살려면 막 달려야해.’

‘……어린애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데. 넌 몇 살이야? 이름은? 어디서 왔지? 아, 아까 아스펠라라고 했지. 옷을 보면 귀족 가문 애 같은데. 혹시 납치당했어?’

아스펠라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남작이 나를 죽일 거야. 아빠 아니야. 아빠 아니고 나쁜 사람이야.’

‘남작? 어느 남작.’

‘하, 하벨.’

‘뭐? 하벨? 하벨 남작이 왜…….’

말을 하던 소년은 이내 숨을 죽인 채 복도 끄트머리로 귀를 기울였다.

모두 별관에서 티파티를 하느라 본관의 사용인들은 이쪽 복도에는 없을 터. 그 상황을 알고 있던 칼리우스는 평소 사용인들의 조용한 발자국 소리와는 다른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챘다.

아버지에게 이런 식으로 몰래 숨어드는 이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걸 교육받은 터라, 멀리서 들려오는 발자국과 아른거리는 그림자만으로도 상대가 어떤 무기를 들고, 어떤 체구를 가진 이인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대공에게 검술 훈련을 받았다 한들, 어린애가 성인 남성을, 그것도 이 작은 어린애를 죽이려 할 만큼 극악무도한 자를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숨어야겠다, 아스펠라. 이리와. 얼른.’

칼리우스는 급한 대로 방문을 열고 그 안에 아스펠라를 밀어 넣은 뒤 방문을 잠그고 숨을 곳을 찾았다. 창고에 방치된 거대한 장롱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너무 눈에 띄지만, 어쩔 수 없지. 아스펠라, 이 안으로 얼른 들어가자.’

이제 곧 아버지가 이곳에 돌아오실 거야. 괴한이 방을 다 둘러보는 동안 숨어 있다가, 아버지의 마차가 들어오는 소리만 들리면 우린 나갈 수 있어.

아스펠라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미, 미안.’

‘뭐가 미안한데?’

‘나 때무네. 너도 같이 위험하자나.’

‘괜찮아. 대공가의 영지에서 무고한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내가 지키는 게 낫지. 아스펠라. 넌 몇 살이지?’

아스펠라가 천천히 다섯 손가락을 펴보였다.

‘난 아홉 살이야. 이 정도면 나이가 꽤 많은 거고, 나는 장차 대공 가문을 이을 거야. 그러니까 이런 걸로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원래 대공은 백성을 지켜야 하는 존재랬어.’

너무 무서워하지 말라며, 내가 못 지켜도 우리 아버지가 널 지켜주실 거야, 말하던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근데 너 참 작다. 진짜 다섯 살 맞아?’

‘응.’

‘널 학대한 거야? 하벨 남작가에 막내딸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게 너인가?’

‘응.’

‘뭐가 ’응‘ 이라는 거야? 전자? 아니면, 후자? 둘 다?’

‘응!’

칼리우스는 더 물어보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아스펠라는 답답한 듯 고개를 좌우로 내젓는 칼리우스를 보더니 일단 자신이 아는 말들을 일단 나열했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넘게 큰 남자애이니, 자신보다 더 많이 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내가 묘지를 찾아야 하는데 못 찾아서 그래.’

‘하벨 남작이 이딴 짓을 하다니.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말해야겠어.’

‘이짜나, 남작이 대공 발목을 잡을 거래써.’

‘뭐?’

그와 동시에 장롱 문이 벌컥 열렸다. 구석에 숨어 있던 아스펠라는 멱살을 잡혀 위로 들어 올려졌다. 칼리우스가 얼른 그 팔에 펄쩍 뛰어올라 있는 힘껏 물었다.

‘아아악!’

칼리우스는 그대로 남자가 놓친 무기를 쥔 뒤 아스펠라를 제 뒤로 숨기고 경계 태세를 갖췄다.

‘감히 대공가의 영지에 숨어들어 백성을 해하려 하다니. 모습을 드러내라!’

이내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자네는!’

‘일이 많이 복잡하게 되었군요.’

칼리우스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벨 남작의 비서 아니던가.

‘자네가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하벨 남작의 사주인가? 왜 이 아이를 해하려는 거지?’

필요에 따라서는 그 집 애도 죽여 버려.

내 생각엔 그 집 애새끼는 제 아비를 쏙 닮았거든. 대의, 대의, 그 망할 놈의 대의를 따지는 놈이지.

어차피 에르윈 대공 가문은 국왕과 같은 생각이야. 묘지가 열리는 걸 반대해. 그러니 다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거겠지. 기가 막히는군! 혹시 모르지, 자기네가 그 힘을 다 독차지 하려는 걸지도.

블레드 고성이 그 묘지일 줄이야!

에르윈 대공가 녀석들은 지들만 알고 있으려던 심산인 거라고!

그 재수 없는 대공의 얼굴이 제 아들 시체를 붙잡고 절망에 빠지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네.

하벨 남작이 원하는 대로 되어가는 건지. 어쩜 이렇게 딱 단둘이 이곳에 남았을까. 비서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이내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칼리우스가 살아선 안 된다 판단한 듯 씩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리면 위험한 법입니다.’

그렇게 말한 비서가 이내 빠르게 칼리우스가 겨눈 칼을 잡아챘다. 제 손이 칼날에 베여 피가 나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 그대로 칼리우스의 목을 잡아챈 그가 몸을 일으켰다.

‘하지 마! 그러지 마!’

그러지 마, 그 애한테는 그러지 말란 말이야!

이내 축 늘어진 칼리우스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초점 없는 눈은 텅 빈 채였다. 그가 죽었음을, 아스펠라는 확신했다. 그의 몸 위에서 희뿌연 뭔가가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도망가지 말았어야지. 너 때문에 죽은 거야. 하, 씨.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닌데 말이야.’

그렇게 말한 비서가 이내 구석에 몸을 둥글게 만 아스펠라에게 다가갔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더라.

날카롭고 긴 것이 아스펠라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 다음에는 몸 위로 눅눅한 흙이 쏟아졌다.

주문을 외는 목소리가 들렸다.

몸과 정신이 분리되는 듯한 기분이 들던 찰나, 주문을 외던 소리가 멎었다. 겁에 질린 비명이 들렸고, 빠르게 도망가는 발이 보였다.

이내 작은 몸이 들렸다. 아팠던 몸이 언제 그랬냐는 듯 편안해졌다.

‘비르가다…….’

「미안하다. 아가. 내 아가. 미안하다.」

비르가는 울고 있었다.

‘비르가는 거짓말쟁이야…….’

작고 마른 몸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비르가를 향한 시선은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얼마 가지 않아 아스펠라의 시간은 그곳에서 멈췄다.

그녀는 죽었다.

생물학적으로 완전히 죽은 상태였다.

몸은 차갑게 식었고, 얼굴은 생기를 잃고 창백해졌다. 사람이 죽으면 인간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검은 연기가 나오는데, 그 검은 연기들이 아스펠라의 눈과 입, 귀, 온몸의 땀구멍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비르가는 그 작은 몸집을 한참 동안 껴안고 있다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든 뒤 물었다. 정말 자신은 방관해야만 하는 것이냐고, 그게 맞는 것이냐고.

「전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중얼거린 비르가가 아스펠라의 입을 벌리더니, 그대로 자신의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끝에서 별같이 빛나는 작은 뭔가가 나와 목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그 빛은 아스펠라의 목구멍을 지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완전히 움직임을 멈춘 작은 심장을 그 빛이 파동 치듯 감싸자 다시 뜀박질이 시작되었다. 아스펠라의 모래시계는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멎었던 숨을 크게 들이마신 아이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눈을 떴다.

***

축축해진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린 아스펠라가 주변을 살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이는 칼리우스였다.

“……분명 죽었었는데.”

“아스펠라.”

“어떻게 살아 있는 거예요, 칼리우스?”

그렇게 말한 아스펠라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요. 아니. 미안해요. 나 때문에, 나 때문에 그날 당신이 죽었는데. 진짜로 죽었는데.

두서없이 중얼거리던 아스펠라의 모습에 칼리우스는 별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무 아래 쓰러져 있던 아스펠라를 발견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약재를 써 봐도 차도가 없고 의사를 불러도 소용이 없으니 눈을 뜰 때까지 칼리우스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옆에 있는 것뿐이었다.

이런 식의 무력함과 무능함은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는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그냥 두고만 보지 않을 거라 다짐했는데.

“아스펠라. 당신 근 일주일을 눈도 뜨지 않았습니다.”

지친 듯 말하는 칼리우스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옷은 이리저리 다 풀어 헤쳐져 있었고, 매일 하루에 두 번씩 면도를 하며 말끔한 모습을 유지하던 그의 턱 밑이 거뭇했다.

단정히 뒤로 쓸어 넘기던 머리칼은 손으로 헤집고 잡아당긴 듯 이리저리 삐죽거렸다.

아스펠라가 침대에 누운 채로 손을 뻗어 칼리우스의 턱을 매만졌다.

“엄청 삐죽 삐죽하네요.”

그 행동에 칼리우스는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미소를 지었다. 아스펠라는 잠시 아무런 말없이 그를 쳐다봤다.

그때 그 남자애가 당신이었다니. 아스펠라는 그날 죽었었다. 그 역시 죽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다시 살아났다.

‘나는 비르가가 살린 거야. 비르가가 나한테, 자신의 생명 일부를 나눠준 거야. 그럼 칼리우스는? 칼리우스도 그런 건가?’

아직 아스펠라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었다.

잃어버린 그날의 모든 기억들을 떠올렸으니 이제는 그 이후의 일을 더 자세히 쫓을 필요가 있다.

“칼리우스. 어떻게 살아 있던 거예요? 당신도 비르가가 살려준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칼리우스는 아직 모르는 듯했다.

“각하께는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아가씨께서 깨어나시면 그때 말하려 했거든요.”

집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허버트와 헬렌이 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아스펠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허버트는 제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가슴팍의 주머니에 살짝 집어넣었다.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아이가 아스펠라 양이었다니.”

허버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각하께서는 16년 전 그날, 돌아가셨습니다. 완전히 죽음을 맞이하셨죠.”

“내가 죽었었다고?”

“예. 하지만, 그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알아두셔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허버트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선대 가주께서는, 각하께서 이 이야기를 모르셨으면 했지만…….”

그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꺼냈다. 튀니아의 초대 왕과 관련된 이야기, 그리고 네 가문에 대한 이야기였다.

***

태초의 신에겐 사랑하는 네 명의 인간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충성스러운 신앙심을 가지고 신을 모셨다. 그는 이 네 명의 인간에게 자신의 권능 중 일부를 나눠 주었다. 그들이 인간 세상을 평화로 다스리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신에게 권능의 일부를 하사받은 네 명의 인간은 각각 사방위로 흩어졌다. 그들은 지하에서 올라와 혼돈을 야기하는 악귀들을 물리치고, 각각의 나라를 세워 평화로이 다스리라는 명을 받들게 되었다.

명을 받은 자 중 하나의 이름은 바로 루이나였다.

그가 자신을 따르는 다섯 명의 기사와 악귀들을 물리치니, 암흑이나 다름없던 지상 세계에 푸른 하늘과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고, 동굴이나 바위틈에 숨어 살던 짐승과 인간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을 한데 모아 신께 하사받은 권능으로 상처를 치료하고, 불타버린 씨앗들을 되살려 땅에 심으니 얼마 가지 않아 루이나가 다스리는 곳은 축복받은 땅으로 다시 태어났다.

더 이상 악귀들에게 공격받지 않게 되자 인간들의 수는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루이나가 이들 앞에서 자신이 대표자임을 선언하고 나라의 형태를 갖추니 이것이 바로 튀니아다. 그렇게 지상 세계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 평화가 깨지기 시작한 것은, 왕이 가장 사랑했던 왕비가 역병에 앓아눕고 난 뒤부터였다. 왕비는 시름시름 앓았고 이내 죽어가기 시작했다. 전국의 모든 의술자들을 불러 모아 그녀를 진찰하게 했으나 그 누구도 왕비의 병을 고치지 못했다.

결국 왕비는 죽었다.

루이나는 왕비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고 이미 황천을 지나 명계의 땅으로 가버린 왕비를 다시 한번 지상으로 불러오기 위해 그는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만다.

인간이 건드려서는 안 될 생과 죽음에 개입하고 만 것이다.

루이나는 신 모르게 그녀를 살리면 될 것이라 믿었고, 왕비는 그렇게 다시 살아났다. 멎었던 숨이 트임과 동시에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였고, 움직임 없이 축 처졌던 몸이 움찔대기 시작했다.

왕비가 살아나자 왕은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한번 죽어 육신을 떠난 영혼이 다시 그 몸에 돌아온들, 정신과 육체가 떨어져 있던 괴리는 어쩔 수가 없었다.

왕비의 영혼은 살아 있으나, 이미 이승에서의 시간이 다한 육체는 썩어가기 시작했다. 그건 어떤 연금술을 쓴다 한들 되돌릴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왕비의 몸은 썩어 들어갔다. 몸에서는 구더기가 피어났으며, 파리가 들끓기 시작했다. 제 몸이 악취가 나며 썩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왕비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왕은 아내의 자살이, 자신의 능력이 완벽하지 않아서. 아직 완벽한 권능을 얻지 못해서라 생각했다.

그날 이후부터 연금술사들을 불러들인 왕은 자신의 능력과 연금술을 더해 더 강한 힘을 얻고자 했다. 그는 불사체의 군대를 만들어 다른 왕국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자신과 비슷하나 각기 다른 권능을 부여받은 다른 세 명의 왕들을 죽여 그 능력을 취하면, 보다 더 강한 힘으로 다시 한번 제 아내를 되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보다 완벽하게 되살리리라.’

다섯 명의 충신은 그를 말렸으나, 루이나에게 그들의 간언은 그저 참언으로 들릴 뿐이었다.

이미 루이나의 능력은 신의 권능을 넘어섰다. 연금술과 실험, 그리고 다른 왕들의 능력을 빼앗음으로써 그는 부정 탄 능력을 갖게 되었고 그것은 지하의 악귀들보다도 악독한 힘이었다.

그는 차례대로 동쪽과 서쪽으로 가 나라를 세운 이들을 침략하여 그들의 권능을 빼앗았다. 남은 것은 남쪽의 권능자였는데, 루이나가 남쪽의 나라에 도착했을 땐 슬픔에 빠진 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쪽의 왕에게서 빼앗을 권능은 이미 신이 가지고 있었다.

태초의 신이 크게 분노하였다.

「내가 너희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너무 큰 힘을 주고 말았다. 이제는 나를 속여 시간을 거스르고 죽음을 거스르는구나. 그 힘을 다스릴 수 있으리라 믿은 것은 나의 착각이며 너희의 오만이었다. 분에 넘치는 힘으로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기에 이르니 모든 것은 나의 실수다.」

그는 자신이 네 명의 인간에게 주었던 모든 권능을 회수해 두 권의 책으로 만들어 봉인해버렸다. 힘이 봉인 당함과 동시에 루이나는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부정 탄 힘이 워낙 강하여 그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는 없었다. 신은 대신 무저갱을 열어 땅 속 깊은 곳에 루이나를 가둬버렸다. 마음을 잃고 어둠에 잠식된 루이나는 그곳에서 기어나오려 했으나, 신이 그를 봉인한 뒤 문을 닫아버려 나올 수 없었다.

불사체인 그의 군대와 함께 지하에 갇힌 루이나는 몇 날 며칠 동안 문을 열어달라 소리치고, 긁어댔다. 그 소리에 튀니아의 온 인간들이 귀를 막고 한동안 덜덜 떨어야 했다.

「보아라. 너희가 방관한 왕이 어떤 말로를 맞이했는지. 어찌하여 너흰 말리지 않았느냐?」

신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다섯 충신들을 꾸짖었다. 다섯 명의 기사는 자신들이 말리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호소할 뿐이었다.

「부정 탄 힘이 워낙 강하여 루이나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 없었다. 너희는 다신 이런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그가 다시 깨어나지 못하도록 지키거라.」

신은 무저갱에 갇혀 소리지르던 루이나가 지친 틈을 타 구덩이에 손을 넣고 그의 몸과 영혼을 다섯 갈래로 찢었다.

그것을 받아든 다섯 충신은 얼른 그것들을 멀리 떨어진 다섯 군데의 산에 파묻은 뒤, 신이 알려준 대로 봉인의 진을 쳐놓았다.

이후 다섯 명의 기사는 평생을 그 진을 지키다 죽었다.

그들은 죽기 전까지 신에게 과거의 일에 대해 사죄하며, 다시는 루이나가 깨어나지 못하도록 자신들이 지켜보게 해달라고 빌었고 신은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어 짐승의 몸으로 살아가게 해주었다. 그것이 바로 튀니아의 다섯 산신이었다.

***

“그 다섯 명의 충신들은 원래 인간이었기에, 그들의 자손들은 여전히 그들의 인간이었을 적 성을 따르며 가문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허버트는, 이내 그 다섯 충신이 인간이었을 때 가졌던 성을 하나둘 나열하기 시작했다.

“카일 에르윈, 리네아 유디티아, 루시프 하벨, 에리얼 블레드, 헤르미아 로잘린드.”

몇 세대를 거치며 사라진 가문도 있고, 아직까지 남아 있는 가문도 있었다.

“이곳 블레드 성은, 원래 블레드 가문이 관리하던 구역이었으나 멸문 후에 에르윈 가문이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칼리우스는 이 모든 일들에 대해 들어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가문의 후계자로서 갖춰야 할 덕목들을 배웠지만 오늘 허버트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은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럼, 그 산신들 중 하나는 에르윈 가문의 선조라는 말인가.”

“예. 맞습니다.”

기가 막힌 사실에 칼리우스가 허탈한 웃음을 내었다. 아스펠라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허버트가 나열한 성들 중에는 하벨 남작가도 있었다.

하벨 남작.

자신을 입양한 후 죽음으로 몰아넣은 가문.

이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이어져온 것이며, 어디까지 꼬인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허버트가 다시 말을 이었다.

16년 전, 이곳에서 일어난 일의 이야기였다.

***

「그가 다시 무저갱에서 지상으로 기어 올라오는 날에는 튀니아는 물론 전 세계에 불온한 기운이 퍼질 것이고 그것은 곧 멸망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니 그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문을 완전히 잠글 아이들을 내려 보내리라.」

그건 태초의 신이 인간에게 알려준 마지막 예언이었다.

그것을 끝으로 신은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인간에게 큰 실망을 한 태초의 신은 그렇게 산신들만 내버려둔 채 우주로 올라갔다.

대신 그 다섯 산신에게 각각의 능력을 주었다.

또한 다섯 기사 중 대장이자 아스펠의 주인이었고 가장 신앙심이 깊었던 비르가에게만 마지막 봉인 위치를 알려주었고, 이는 그와 그의 후손만이 알도록 했다.

에르윈 가문은 이후 가장 중립적이고 현명한 이를 가주로 뽑아 비르가에게 신탁을 전해 듣게 했다.

다섯 산신과 그들의 후예인 다섯 귀족 가문, 그리고 튀니아의 국왕 되는 자는 선조가 그리했듯 다섯 갈래로 찢어진 루이나의 영혼이 지하에서 기어 올라오지 않도록 지켜야 했다.

산신은 봉인을 지키고 그 후예는 자물쇠를 찾는다.

그것이 신이 그들에게 내린 벌이자, 속죄의 길이었다.

루이나가 봉인당한 이후,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아비와 달리 욕심 없고 선한 이였기에 그날의 일을 적어 후에 왕이 된 자에게만 이 사실을 알리기로 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며 몇몇 왕은 루이나의 힘을 탐했고, 그것을 연구하고 손에 넣으려 했다.

그리하여 어떤 시대에는 루이나의 힘을 탐했던 때도 있었고, 또 어떤 시대에는 그 힘을 잠재우려던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수십,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몇 번이고 다섯 가문과 왕은 치열하게 싸우고 협력하길 반복했다. 그 긴 시간 속에서 에르윈 가문만이 꿋꿋이 초심을 지켜왔다.

“사실 대부분 그 힘을 가지려 했지요. 신께서 내려 보낸 아이들이 문을 완전히 잠근다 하였는데, 반대로 그 아이들을 이용해 완전히 문을 열 수도 있었으니까요.”

700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봉인은 처음과 다르게 많이 약해졌다.

자물쇠가 내려온다는 신탁을 받아야 하는데, 신탁을 받는 귀를 가진 비르가가 오랫동안 자물쇠에 대한 신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봉인 아래 갇힌 루이나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그가 발광할 때마다 땅이 흔들려 지진이 나고 해일이 일었다.

자물쇠로 영원히 가두지 않는 한, 지진과 해일 같은 일들은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었다.

“그러다 선왕께서 즉위하시고, 이 사실을 알게 되셨을 때. 그분은 루이나의 힘을 완전히 봉인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선대 에르윈 각하와 유디티아 후작, 그리고 하벨 남작까지 모두가 선왕의 뜻을 따랐고 다들 예언에 등장하는 아이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다 하벨이 발견한 것이었다. 동물들과 대화하는 산의 아이를.

“이제 더 이상 루이나의 힘을 가지기 위해 싸우는 일들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남작은 생각이 조금 달랐다. 그는 반대로 그 문을 열어 힘을 손에 넣고 싶었다. 그 힘만 손에 넣으면 튀니아는 제국으로 몸을 불릴 수 있었으며 어떤 적을 만난다 한들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맨 처음 국왕을 설득하여 봉인을 열고자 했으나, 왕이 이를 허락할 리 없었다.

“하벨 남작이 변절했지만, 그가 정확한 마지막 봉인 장소를 알 리 없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이유에서인지, 하벨 남작이 마지막 봉인 장소를 알게 되었다.

“루이나의 다섯 갈래로 나누어진 영혼 중 마지막 되는 것은 이곳에 봉인되어 있습니다. 블레드 성은, 그 묘지 위에 올린 성입니다.”

이곳은 튀니아 영토의 정가운데에 위치한 성. 가장 중심이 되는 아스펠 산맥의 시작 지점으로 가장 성스러운 영토였다.

마지막으로 찢겨진 가장 큰 영혼이 이곳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자물쇠 되는 아이의 피를 흘러 넣으면 루이나의 봉인은 가장 완전한 형태로 잠그거나 열 수 있다.

봉인은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시작 지점의 봉인이 풀리면 나머지 봉인들이 풀리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그래서 날 여기까지 끌고 와 죽인 거군요.”

아스펠라의 말에 설명을 하던 허버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숨이 다한 도련님을 발견한 것은 선대 가주셨습니다.”

선대 에르윈 가주가 하벨 남작의 속셈을 눈치챘을 땐 너무 늦은 뒤였다.

피를 잔뜩 흘린 그를 침대에 뉘여 놓고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데, 그때 노인이 들어왔다.

평범한 노인이 아님을, 그 존재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모두가 알았다 했다. 노인의 품에는 작은 여자아이가 안겨 새근새근 잠자고 있었다.

그는 별다른 말없이 어린 칼리우스에게 다가와 천천히 입에 뭔가를 집어넣었다. 푸른빛이 아이의 입 속으로 들어갔고, 모두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칼리우스 님이 다시 숨을 쉬셨습니다. 분명 죽었음을 모두가 확인했는데.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노인은 나가기 전 에르윈에게 말했다.

「하벨을 벌할 필요 없다. 그를 미워할 필요도 없다. 그는 이미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고 있느니라. 자물쇠 되는 아이는 내가 데려가마.」

그렇게 말한 노인을 따라간 에르윈 대공이 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허버트는 그 말을 똑똑히 들었었다.

‘선조님. 루이나의 봉인은 사람을 타락시키도록 만듭니다. 그 위험한 것이 후세에게 전해지는 것은 볼 수 없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선조님께서는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아이를 이리 주십시오. 주기에 맞춰 죽여서 아예 문을 잠그도록 하겠습니다. 국왕께서 하지 못하시면 제가 하겠단 말입니다.’

「나는 이 아이를 줄 수 없다.」

‘선조님!’

「네가 칼리우스를 사랑하듯 나 역시 이 아이를 사랑한다.」

‘……그렇다면 말해주십시오. 선조님은 미래를 볼 수 있지 않으십니까. 오늘 선조님께서 칼리우스에게 생명을 돌려주셨습니다. 자물쇠 되는 아이를 데려가신다면 그 미래는 어떻게 됩니까.’

그러자 노인이 천천히 뒤돌며 말했다.

「자물쇠는 하나가 아니란다.」

‘예?’

「이 아이 하나 죽인다고, 다섯 갈래로 나뉜 봉인이 막아지겠느냐. 자물쇠는 다섯 개가 필요하다. 그 다섯 개의 자물쇠는 모두 우리 다섯 가문에서 나올 것이야.」

‘…….’

「이 둘은 이미 운명으로 묶여 있도록 태어났다.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도 죽을 운명이다. 그러니 한쪽을 살리면 다른 한쪽도 살려야만 하지. 나의 후손은 날 죽일 것이다. 나뿐만 아닌 모든 산신들을 토벌할 거다. 그 아이는 루이나의 봉인을 푸는 것에 앞장설 것이다. 네 아들을 죽일 것이냐?」

그 말에 에르윈 대공은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더니, 이내 노인이 발걸음을 떼도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어린 왕자를 주시해라.」

그렇게 노인은 복도를 천천히 걸어갔고 이내 그 모습이 사라졌다.

얼마 되지 않아 대공은 하벨가 자식들의 초상 소식을 들었다. 그의 아내는 미쳐버렸고 하벨 역시 자멸하고 말았다. 그간 축적해둔 부로 근근이 목숨만을 연명할 뿐이었다.

“하벨 남작이 그리되고 얼마 가지 않아 선왕께서 실종되셨습니다.”

그리고 선왕이 실종되자마자, 선대 에르윈 대공은 원로 귀족들과 선대 유디티아 원로 귀족과 가주를 불러다가 회의를 열었다.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모릅니다. 저는 그저 블레드 성의 집사이고, 제가 아는 것은 이것이 다입니다. 다만, 선대 에르윈 대공께서는 각하가 이 모든 사실을 모르길 바라셨을 뿐입니다.”

정확한 회의 내용은 모르나, 칼리우스는 물론 현재 유디티아 후작까지 이 모든 사실에 대해 모를 것은 확실했다.

아마 그들은 그대로 루니아의 봉인에 대해 함구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 존재조차 모른다면 그 누구도 힘을 탐하지 않을 테니까.

“원래 말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한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인가 봅니다. 제가 함구한다 하여 지켜질 침묵이 아니었으니…….”

인연이라는 건 정말 종잡을 수 없는 것이군요, 하며 이야기를 마친 허버트는 짧게 묵례를 한 뒤 방을 나갔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헬렌이 얼른 그 뒤를 따라갔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칼리우스는 여전히 이 모든 이야기들이 그저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막히고 황당한 듯 가만히 제 턱 부근을 매만졌다.

“허버트의 말대로 참 신기하네요. 인연이라는 거.”

아스펠라가 조용히 말하자 칼리우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사실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나는 아직 기억이 없거든요.”

“괜찮아요. 칼리우스는 그 일 기억하지 않아도 돼요. 기억해서 좋을 건 없어요. 좋지 않은 기억이니까요.”

그날의 전말에 대해서 자신이 기억했으니 되었다며 아스펠라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거 하나만 기억하면 돼요. 칼리우스가 그날 날 지켜줬었다는 걸.”

그렇게 말하는 아스펠라의 눈빛이 반짝였다. 끔찍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 사람치고는 개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한나가 후작저에서 지내지 않는다고?”

의사에 말에 파베스가 눈을 희번득 뜨며 물었다.

“예, 몇 주 전부터 두 분은 에르윈 대공 각하의 별장에서 지내시는 중입니다.”

“칼리우스의 별장? 블레드 성을 말하는 게냐.”

“예, 전하.”

“블레드 성에 갔다고. 거길 갔단 말이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짜증스러운 기색이던 그가 이내 오묘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해서, 한나의 상태는?”

“대공 각하께서 그곳에 따로 주치의가 있으니 제가 올 필요가 없다 하시어, 별장에 가신 이후부터는 다른 주치의가 공주님을 보필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하사받은 그 약재는 그곳의 의사에게 전달하였습니다.”

파베스는 이만 가보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의사가 나가자 국왕은 이내 혼잣말인지 아니면 옆의 보좌관에게 묻는지 헷갈리게 중얼거렸다.

“칼리우스가 뭔가 눈치를 챘나?”

그렇지 않고서야 왜 한나가 블레드 성에 있냔 말이야. 그의 말에 눈치를 살피던 버루카가 말했다.

“그저 우연일 수도 있지요, 전하. 선대 에르윈 대공은 그에게 아무 말 하지 않았을 겁니다. 칼리우스 님이 모르길 원했던 이니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우연일지도. 하지만 난 우연을 믿지 않는다. 우연이 아니라 운명을 믿지. 교주의 말대로 태중의 그 아이가 자물쇠였으면 하는군.”

“교주의 말을 너무 믿지는 마십시오, 전하. 그자는 남작가의 사람 아닙니까. 하벨 남작은 일전에도 선왕과 전하 두 분 다 배신한 적이 있습니다. 그 밑에서 일한 교주 역시 그럴지도 모를 인간입니다.”

버루카의 말에 파베스는 그의 충심에 대해선 별로 중요치 않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하벨이야 그랬지. 그자는 원래부터 멍청했어. 하지만 교주는 그렇게 머리가 나쁜 편이 아니야.”

파베스가 그를 곁에 두는 이유는 단지 충성심 때문이 아니었다.

“교주는 그 자물쇠를 직접 봤잖아.”

“직접 죽이려고도 했고요. 전하의 명령을 무시하고 그 자리에서 죽여 하벨 남작에게 힘을 가져다주려던 자였습니다. 게다가 실패까지 하여 결국 자물쇠를 놓치지 않았습니까.”

“너무 미워하진 말게. 그자는 그저 루이나를 맹신하는 이일 뿐이니까. 그 봉인만 열어준다면 그 누구에게라도 충성할 걸세. 이번에는 그게 나인 것이고. 하하!”

속 편한 소리에 버루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전하.”

교주는 국왕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닌, 루이나에게 충성하는 자였다.

“만일 봉인을 풀었을 때 그가 배신을 하면 어쩌려고요, 전하.”

“루이나의 봉인을 닫고 여는 것은 물론 그 힘을 다루는 것은 루이나의 직계 자식만 가능하다 하지 않던가. 국왕의 피를 물려받은 자가 나 말고 또 누가 있더냐. 계집이야 오래전에 처리했으니 나뿐이지 않겠어?”

그의 말에 달리 할 말이 사라진 버루카가 그래도 여전히 찜찜한 구석이 있는 인간이라며 우려했다.

“자네는 유독 교주를 미워하는군.”

“그야 모든 것이 미덥지 못한 자이니까요. 출신이 불분명한데다가, 왕비님도, 하벨 남작도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셨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자가 대체 뭐라고 그 자물쇠들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는 겁니까?”

“아스펠 산신이 죽은 칼리우스와 다른 자물쇠 하나를 살려냈다 하지 않았느냐. 사라 역시 동물과 대화를 할 줄 아는 아이였고. 마지막 자물쇠 역시 다섯 가문의 피를 물려받은 이들 중 하나가 될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블레드 가문의 일가는 모두 오래전에 멸문하였으며, 로잘린드 가문 역시 원로 귀족들만 근근히 미라처럼 살아 있다. 남은 것은 유디티아 가문뿐이었다.

“버루카. 그자는 내 어머니의 사람이기도 했던 자다. 이제 그만 의심을 거둬. 나 역시 그를 어린 나이부터 본 기억이 있으니 데리고 있는 것 아니겠어?”

“전 그 점이 더더욱 의심스럽습니다. 어찌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늙지 않고 있단 말입니까.”

“한때 주술사라 하지 않았더냐. 매일 연금술에 빠져 이런저런 주술을 제 몸에 실험하는 놈이다.”

내가 멍청이도 아니고 제대로 된 증거 없이 그의 말을 믿었을까.

파베스는 이제 슬슬 짜증이 나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됐네, 됐어. 이제 그만하게. 교주 험담은 나한테 큰 흥미로 다가오지 않아. 여차하면 죽이면 되는 일인 걸 왜 이리 징징대는가. 내게 흥미로운 것은 이제 자물쇠들을 거의 다 모았다는 것이다. 마지막 자물쇠만 찾아내면 나는 봉인을 풀고, 완벽한 힘을 얻을 수 있어.”

신은 네 개의 자물쇠를 보냈다 하였다. 그들의 희생으로 인해 루이나의 봉인은 완전해진다나. 그렇다는 것은 지금은 봉인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고, 그 넷만 사라지면 봉인 역시 열린다는 것을 뜻했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자물쇠들은 죽어야 할 존재였다.

“문제는, 어떻게 칼리우스를 죽이냐야. 태중의 아이야 손대는 건 쉬운 일이고, 사라는 이미 죽였고. 나머지 하나는 용케 잘 숨어 있는데.”

만일 칼리우스가 뭔가를 눈치 챈 거라면 조금 골치 아파질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파베스가 씩 웃었다.

“사냥제 때 그것들을 풀어놓아야겠군.”

***

“이제 아픈 건 다 나은 건가요?”

오랜만에 본 얼굴이 많이 핼쑥해졌다며, 한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스펠라가 아프다는 소식에 문병을 하고 싶었어도 칼리우스가 안에 들여보내지 않았으며 필립 역시 만삭의 임산부가 병자 곁에 있는 건 위험하다며 극구 말렸다.

그래도 이렇게 홀쭉해진 아스펠라를 보니, 그냥 그들을 무시하고 찾아가볼걸 하고 후회했더랬다.

아스펠라는 다정한 한나에게 이젠 진짜 쌩쌩하다며 양팔을 들어올리고 힘을 줘 알통을 보여주는 시늉까지 했다.

“잠깐 앓기만 했습니다. 이젠 정말 괜찮아요! 부인께서는 요즘 어떠세요? 이전처럼 악몽을 꾸거나 환청, 환시가 있으신가요?”

“아뇨. 너무 편안해요.”

평화로운 얼굴로 자신의 배를 둥글게 쓰다듬는 그녀의 모습에, 아스펠라도 조금 마음이 놓인 듯했다. 그때 후작이 문을 짧게 두드리곤 안에 들어왔다. 그는 한나의 볼에 입을 맞춘 뒤, 그녀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같이 배를 쓸어내린 다음 아스펠라에게도 인사했다.

“어딜 가려고?”

외출복을 입은 남편의 모습에 한나가 물었다.

“아. 후작저에 잠시 갔다 오려고. 거기서 당신 짐도 좀 가져오고.”

“그냥 비서한테 시키지.”

“그게 손님이 오셔서 말이야.”

손님? 누구? 한나의 말에 후작이 살짝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전하께서 잠시 오신다고 하더라고.”

“……오라버니가? 나도 가야 하나?”

“아냐. 사냥제 준비를 시찰하러 왔다가 잠시 들르시겠다더군. 여보는 만삭이라 힘들 테니까 여기 있어. 금방 다녀올게. 그냥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고 싶다 하셔서.”

“그래, 알겠어.”

“다녀올게.”

후작이 방을 나가자, 한나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아스펠라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꼭 제 남편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부인? 괜찮으세요?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괜찮아요.”

그런 사람치고는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때마침 시녀들이 탕약을 들고 왔다. 하루에 두어 번 막달의 임산부가 먹으면 좋은 귀한 약재들만 골라 탕약을 만든 것이었다.

시녀들이 건넨 것을 받아든 후작 부인이 잠시 냄새를 맡더니, 낯선 듯 고개를 뒤로 빼며 물었다.

“매일 먹던 것이 아닌데.”

“후작저의 주치의가 주고 간 것으로 달인 약입니다, 공주님. 국왕 전하께서 하사하신 귀한 약재라고, 꼭 드시라 하셨습니다.”

이내 시녀가 나가자, 한나는 잠시 약이 든 그릇을 쳐다보며 마실지 말지 고민하는 듯했다.

아스펠라는 한나가 약을 마시기 전에 얼른 주의를 돌리려 물었다.

“부인, 제가 이런 질문 굉장히 실례되는 걸 알면서도 묻는 걸 용서해주세요. 혹시, 부인께서는 국왕 전하가 두려우신가요?”

아스펠라의 말에 한나의 눈이 잠시 커졌다. 이내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런 말하면 안 되는 것 알지만. 나는 파베스가 무서워요. 그의 호의도 호의 같지 않고. 같은 피를 나눈 남매임에도 전혀 그 속을 알지 못하겠어요.”

그렇게 말한 한나가 잠시 제 손가락을 만지작대다 말을 이었다.

“아스펠라는, 가족을 두려워한 적이 있나요?”

그녀의 말에 아스펠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나가 잠시 먼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럼, 내 말을 믿어줄지도 모르겠네요. ……알다시피, 내 아버지. 그러니까. 선왕께서는 실종되신 지 오래예요. 원로 귀족들은 아버지가 사망했다고 여기고 파베스를 즉위시켰죠. 모두들 내 말을 믿지 않았어요.”

하긴, 누가 믿겠어요. 아홉 살 된 왕자가, 제 아비를 괴수로 만들었다는 걸, 아버지가 검은 마수로 변했다는 걸. 그냥 매일 어두운 밤이 무서워 벌벌 떠는 철없고 겁 많은 여자애가 꾸었던 수많은 악몽 중 하나라고 치부할 거예요.

“검은 마수요?”

“네. 검은 마수요. 근데 전 똑똑히 봤거든요. 그건 악몽이 아니에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그건 꿈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아스펠라. 당신도 내가 그냥 꿈과 현실을 착각한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한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이미 그런 식의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되는 일에 이골이 난 듯했다. 아스펠라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한나도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날 일에 대해 더 말해주세요.”

떠올리기 싫고 두려운 기억이라면 말해주지 않아도 된다 말했으나, 이번엔 한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말하고 싶어요.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았는데 이제 겨우 들어줄 사람이 생겼잖아요.”

***

그것은 에르윈 대공가의 장례식이 끝나고 몇 달 후의 일이었다.

사실 그 당시 한나는 밤을 무서워하는 보통의 아이들과 다를 것 없이, 어둠이 싫어 촛불을 켜고 자는 아이였다. 그녀가 잠이 들 때까진 시녀들이 옆에서 동화를 읽거나, 토닥여주거나, 자장가를 불러주곤 했다.

대공가의 장례식에 참석한 이후엔 조금 더 어둠이 무서워져 한동안 시녀들이 번갈아 교대를 서며 잠에서 깨는 공주를 달래야 했다.

‘공주, 아직도 혼자 잠을 못 자는 건가요?’

‘어머님…….’

그날은 유독 한나가 더 칭얼거린 날이었다.

왠지 몰라도 뭔가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시녀들이 흉을 보겠어요. 이렇게나 겁쟁이인 공주를 모신다고.’

어머니의 말에 한나가 시무룩해져 대답했다.

‘그치만 무서운걸요?’

‘뭐가 그리 무서운데요.’

‘그냥, 그냥 어두운 게 무서워요.’

‘대공가의 장례식이 꽤나 충격이었나 보네요. 오늘은 이 어미가 직접 재워줄게요.’

왕비 피올라는 제 어린 딸에게 우유를 마시게 한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런 뒤 그 옆에 앉아 천천히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공주는 그저 기뻐,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눈을 감았다. 왕비는 굉장히 무뚝뚝하고 엄한 사람이었고 이런 식의 다정함을 보이는 것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공주는 깊은 잠에 빠졌다.

잠든 것인지, 아니면 뭔가에 취한 것인지. 굉장히 몸이 나른했고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눈이 떠졌는데 깨어난 곳은 자신의 침실이 아닌, 차가운 동굴과도 같은 곳이었다.

‘우음, ……어머니?’

‘어. 깨버렸네.’

옆에는 파베스가 서 있었다.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쓴 그는 제 여동생이 깨어나자 싱긋 미소 지었다.

‘음, 파베스 오빠? 여긴 어디야?’

‘어머니. 한나가 깨어버렸어요.’

‘이런.’

골치 아파졌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왕비의 모습에, 한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직감적으로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고, 그녀는 얼른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절그럭.

팔과 다리에 절그럭 거리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움직일 때마다 들려오는 쇠의 마찰음은 어린애를 겁먹게 하기 딱 좋았다. 금세 두려워진 한나가 훌쩍이며 왕비와 제 오라비에게 말했다.

‘이거 좀 풀어주세요. 제가 왜 묶인 건지 모르겠어요. 저 무서워요. 무서워요 어머니. 오빠. 나 좀 풀어줘.’

그러자 파베스가 한나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한나. 풀어주진 못할 거야.’

‘흐윽, 왜에?’

‘왜냐면, 이제 곧 네 안에 신을 집어넣을 거거든.’

금방 끝나. 많이 아프진 않을 거야. 알았지? 그냥 악몽 꾼 거라 생각하면 편안할 거야. 파베스의 말에 한나는 싫다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한나. 울지 말렴.’

동굴을 가득 메우는 어린 울음소리에 왕비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횃불을 들고 돌계단을 내려왔다. 횃불에 비친 기다란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더니 이내 망토를 벗었다.

‘재워두라 했잖아요. 피올라.’

‘어쩔 수 없었어. 약발이 덜 들었나보지. 일단 빨리 시작하세요. 왕이 눈치채기 전에 끝내버려야 해.’

그러자 사내는 단상 바로 아래 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어떤 항아리를 들고 한나 옆에 오더니, 항아리를 덮고 있는 마개를 열었다. 그러자 이상한 연기 같은 것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연기라기에는 마치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 마냥 움직이는 모양새가 이상했다.

이윽고 사내가 이상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더니 작고 뾰족한 단검을 두 손으로 잡아들곤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

한나가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동굴 계단의 문이 벌컥 열렸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지상으로 이어지는 계단문이 부서지고 병사들과 국왕이 들어왔다.

‘아버지! 아버지! 살려주세요!’

거대한 연기는 한나의 몸 위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

“그 다음부터는 의식이 희미해졌어요.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죠.”

아주 드문드문 기억이 났지만, 그 기억의 조각들은 상상이나 허구가 아닌 진짜라고 한나가 말했다.

“단편적인 기억이지만, 확실했어요. 아버지는 진 안에 들어가셨고, 점점 몸이 짐승처럼 변하셨어요. 전 너무 무서워서 눈을 질끈 감았죠. 병사들의 비명 소리, 어머니의 고함 소리. 짐승의 울음소리까지.”

그러다가 정신을 잃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침대 위였다고 한다.

“꼬박 며칠을 앓았답니다. 몸이 회복하여 다시 일어났을 땐 아버지가 실종되셨다는 말을 들었어요. 몇 개월 뒤에는 사망 판정을 받았고 어머니가 대신 왕위를 이으셨어요.”

한나는 몇 번이고 그날 일에 대해 말했으나, 귀족들 대부분은 허무맹랑한 공주의 말을 믿지 않았다.

심지어 그 자리에 있었던 파베스마저 한나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말했다.

대신 중 한 명은 한나의 말을 믿기로 한 것이었는지, 왕궁 전체를 뒤져 지하 공간을 찾아다녔지만 그 어떠한 곳에서도 돌 제단이나 진이 그려진 흔적은 없었다.

왕비는 그런 한나를 안타깝게 쳐다보며 말했다.

‘공주, 어둠이 무서워서 또 악몽을 꿨나 보군요. 나와 왕자는 공주를 해치지 않습니다. 부디 그런 말은 말아주세요. 이 어미는 매우 슬프답니다.’

딱 한 명 유디티아 선대 후작만은 예외였는데, 그는 왕비의 대관식 날 한나에게 몰래 속삭였다.

‘공주님. 그날 일은 묻어두십시오. 아셨지요? 제가 이곳에서 꺼내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는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구십시오. 그들이 묻거든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십시오.’

“그분의 말대로 더 이상 그날 일을 말하지 않았어요. 얼마 가지 않아 전 학술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왕궁에서 나올 수 있었어요. 공주임에도 기숙사에서 지내니 꽤나 말이 많았죠.”

하지만 왕비도, 왕자도 그날 이후부터 그녀를 딱히 건드리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평소처럼 대했기에 어쩔 땐 본인도 헷갈릴 정도였다며 한나가 씁쓸하게 말했다.

“근데 그건 정말 망상이 아니었거든요.”

맨 처음엔 자신을 믿지 못했다. 공주님의 말을 믿는다고. 그런 이들에게 넘어가면 안 된다 말하던 유디티아 선대 후작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마친 한나가 고개를 들어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자신의 말을 믿는지 안 믿는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부인의 말을 믿어요.”

“정말요?”

“네. 저는 검은 마수의 존재를 밝히기 위해 내려온걸요. 지금 부인의 이야기는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이 모든 이야기를 혼자 감내하셨다니…….”

아스펠라는 오랜 시간 동안 정서적 학대를 견뎌온 한나가 대단한 듯 손을 꼭 잡아 쥐었다.

“……검은 마수의 존재에 대해 밝히려 하신다고요?”

“네. 전 원래 아스펠 산에서 살았습니다. 모든 걸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전 그 검은 마수를 인간으로 돌려놓을 방법을 찾고 있어요.”

그러자 한나의 눈이 커졌다.

“그럴 수 있는 건가요?”

“그렇게 해야만 해요.”

“어떤 일인지는 말해줄 수 없는 거고요?”

한나의 말에 아스펠라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지금 당장 제가 말할 수는 없는 이야기예요. 죄송해요. 조금 이야기를 정리한 다음에 그 다음에 말씀드려도 될까요?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일이라서.”

아스펠라는 칼리우스도 없는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말하기보다는 파베스의 확실한 목적을 알아낸 다음 일련의 상황들을 정리해서 말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 생각했다.

그 생각을 이해한 것인지,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거 하나만 답해줘요, 아스펠라.”

한나가 이내 머뭇거리다 물었다.

“파베스가 날 해치려 하나요?”

그 말에 아스펠라가 동요하자, 그녀가 이 일을 알게 된다 하여 왕에게 따질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제발 그것만은 말해달라 애원했다.

한나의 그런 모습을 본 아스펠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후작저에 무슨 일이 생겨서 칼리우스가 우리를 이리로 데려온 건가요?”

“네.”

한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그래요. 언젠가는 또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둥근 배를 쓰다듬는 손이 덜덜 떨렸다.

“필립이 오라버니를 만나러 갔는데 무슨 일이 생기진 않겠죠?”

“혹시 몰라 칼리우스가 호위를 붙여놨다고 했어요. 너무 걱정 마세요, 부인.”

불안해하는 한나의 옆으로 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아스펠라가 말했다.

“모두 다 무사할 거예요. 나쁜 사람들만 빼고요. 그들만 제외하고 모두 다 행복하게 살 거예요.”

***

휴가를 마친 칼리우스가 에르윈 대공 성으로 복귀했다.

주인이 돌아오는 날에 맞춰 온 사용인들이 현관 앞으로 가 그를 맞이했다. 칼리우스가 들어오자 집사가 얼른 그의 외투를 받아들었고 시녀들이 인사를 올렸다.

그들 사이로 펠킨이 목례를 하며 걸어왔다.

“각하. 오셨습니까. 어, 아스펠라 양은요?”

“잠시 후작 부인과 할 얘기가 있다길래.”

자신의 목덜미 부근을 주무르며 여유롭게 가죽 장갑을 벗는 칼리우스와는 달리 펠킨은 어째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왜 그래?”

“각하. 일카이 군이요.”

“말했나?”

“말씀이야 드렸지만, 일카이 군이 매일 각하 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사실 지금도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다고요. 각하한테 직접 들어야겠답니다.”

그의 말에 칼리우스가 코웃음 쳤다.

“한번 들었으면 됐지, 그걸 왜 또 나한테 듣겠다는 건가.”

그러나 구원의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는 펠킨을 차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결국 피곤한 듯 목에 감긴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잡아당기던 칼리우스가 침실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서재로 향했다.

서재 문을 열자 일카이가 소파에 앉아 있다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췌해 보이는 모습이, 딱 봐도 혼란스러움에 잠도 못잔 것 같아 보였다. 일카이는 칼리우스가 소파로 와 상석에 앉을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훈련에 빠지라고 그 얘기를 들려준 건 아닌데.”

칼리우스가 나직하게 말하자, 일카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알려준 건가, 내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

“왜 제게 그 이야기를 해주셨습니까? 말씀대로라면 저는 현재 국왕에게 위험한 존재 아닙니까? 그냥 쥐도 새도 모르게 절 처리하시면 될 것을 왜 제게 진실을 알려주신 겁니까. 숨기려면 숨길 수 있는 분이시잖습니까.”

일카이는 그날 대공 성으로 돌아오는 동안 펠킨에게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콩가루 집안이라는 말이 이런 것인지. 그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누가 자꾸 뒤에서 뒤통수를 북을 때릴 때 쓰는 거대한 몽둥이로 갈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신의 친모는 달리아 로잘린드. 선왕의 정부셨습니다. 또한, 첫 번째 왕비인 피올라 로잘린드의 동생이기도 했고요.’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는 이야기였다.

국왕이 정말로 사랑했던 것은, 정략결혼을 한 피올라가 아닌 그녀의 여동생 달리아. 달리아가 성인이 되는 연회에서 마주친 두 사람이 서로 사랑에 빠졌다는 그런 진부할 정도로 막장인 로맨스였다.

왕은 왕비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로잘린드 가문은 외척 세력으로 몸을 불리려 했고, 자꾸만 다른 나라와 전쟁을 일으키려는 왕비가 못마땅했기 때문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천성이 부드럽고 유한 달리아는 국왕과 모든 면에서 잘 통했다. 국왕은 달리아를 궁궐로 불러들여 자신의 정부로 뒀다.

피올라는 제 여동생이 정부로 들어와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매이긴 했으나 둘은 별로 친하지 않았고, 왕비는 제 여동생을 연적 취급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교적 평화로운 일상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달리아와 왕비가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하면서부터였다.

둘은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았고, 피올라는 아들을, 달리아는 딸을 낳았다. 달리아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에 귀족들은 ‘그래도 왕좌 싸움은 한시름 덜겠군, 그래. 딸이니까.’ 하며 저들끼리 또 다시 왕궁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피올라의 견제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이 커가면 커갈수록 모든 방면에서 달리아의 딸이 월등했기 때문이었다. 사라는 파베스보다 말을 더 빨리 했으며, 글을 습득한 시기도 더 빨랐다. 네 살쯤 되었을 땐 혀의 근육이 덜 발달해 혀 짧은 소리가 났을 뿐, 단어 선택과 문장 구성력은 또래 아이의 능력을 훨씬 웃돌았다.

왕은 정부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공주의 작위를 하사했다.

당시 많은 귀족들이 그건 예법에 어긋난다며 말리려했으나, 평소 유했던 선왕이 처음으로 완고하게 뜻을 굽히지 않으며 제 딸을 공주로 책봉했다.

왕궁의 학자들이 어린 공주를 앞다투어 가르치고 싶어 할 정도로, 달리아의 딸은 매우 영특했다. 공주로 책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왕은 파베스와 사라 모두에게 동등한 후계권을 부여했다.

그때부터 왕비는 달리아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그녀와 그녀의 딸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그 행동이 왕궁의 모든 이들 눈에 띌 정도였다.

피올라는 한 번 더 왕과 합방을 하여, 연년생의 공주인 한나를 얻었으나 국왕은 파베스와 한나보다는 달리아와의 사이에서 난 자식을 더 아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쟁이 발발했고, 선왕은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직접 출정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 길지 않은 출정이었다. 반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기에 그 사이 무슨 일이 생기리라고 그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출정을 나갔던 선왕이 왕궁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달리아는 사라진 이후였다.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그 누구도 모르지만,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다.

왕비가 제 여동생을 죽였다.

선왕 역시 그리 생각했고 왕비를 질책했으나, 이렇다 할 증거가 없으니 그녀를 폐위할 방법 역시 없었다. 사라진 달리아를 찾아 온갖 수색대를 동원해 튀니아를 뒤졌지만 그녀를 찾을 순 없었다.

그러다 몇 개월 뒤, 왕궁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의 강에서 시체 두 구가 떠올랐다. 모녀였다.

시체는 퉁퉁 불어 머리칼이 모두 사라진 상태였으며, 얼굴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신이 입고 있는 옷이 생전에 입었던 옷과 같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달리아는 결국 죽은 것으로 판명 났고, 그녀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정부 달리아와 공주의 장례식은 일주일 동안 열렸다. 그 자리에 참석한 왕비는 그저 무감각한 눈으로 빈 관 두 개를 쳐다봤을 뿐이다.

그 이후 선왕은 큰 상심에 빠졌지만, 그렇다 하여 피올라와의 사이에서 난 자식들을 미워하지는 않았다.

그는 제 자식들을 싫어하지도 않았지만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저 튀니아의 왕자와 공주로서 대접을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3년 뒤, 선왕 역시 달리아가 그리했듯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귀족들은 혼란을 막기 위해 그가 깊은 병이 들었다 둘러댔고, 몇 달 후엔 병사했다고 발표했다.

여기까지가 펠킨이 일카이에게 말한 내용이었다.

“죽었던 왕의 정부가 사실은 살아남았고, 절 낳았다는 것 아닙니까.”

“맞아. 들은 그대로일세.”

“사냥제가 끝나면 왕궁으로 들어갈 거라는 말. 그거 진심으로 하신 말씀입니까?”

칼리우스는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카이는 칼리우스를 완전히 신뢰하지는 못하는 것인지 여전히 경계하는 얼굴이었다.

“각하께서는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신 분 아닙니까? 그래서 산신 토벌 작전을 수행하신 거고요.”

“내가 그때 물었잖아. 권력을 갖고 싶지 않냐고. 그때 넌 네가 뭘 하면 되겠냐고 물었지. 그래서 친히 말해주지 않았나. 내 사람이 되어 왕궁으로 들어가라고.”

그리 간단한 것을 뭘 그리 배배 꼬고 앉아 있냐며 칼리우스가 픽 웃음을 흘렸다.

“제 말은, 각하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나도 너와 신뢰를 주고받고 우정을 쌓거나 할 생각은 없다만. 뭔가 착각하는 것 같군. 자네와 나는 동등하지 않다니까.”

네 말대로 너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것도, 왕궁 위에 새기는 것도 나니까 할 수 있는 일이야. 칼리우스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는 국왕을 몰아낼 거다. 그리고 새로운 이를 왕으로 세울 거야. 그게 너는 아니니 걱정은 말고. 자네는 군주감은 아니니까.”

칼리우스의 말에 울컥한 일카이가 내가 뭐 어때서, 하려다가 이내 앞서 나온 말을 곱씹었다.

“그러니까 지금 역모를…….”

“어찌 보면 역모가 될 수 있겠지.”

태연하게 웃으며 말하자, 일카이가 더더욱 그를 의심하는 얼굴로 쳐다봤다.

“제 볼모는 아스펠라라고 말씀하신 저의가 뭡니까.”

“후에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겠다는 말이지. 네가 내게 충성만 맹세한다면. 사실, 그럴 수밖에 없을 거야. 네 볼모는 이미 죽은 누이가 아니라, 아스펠라일 테니까.”

그 말인즉 아스펠라를 인질처럼 잡아두겠다는 소리 아닌가.

일카이는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에게 가진 마음이 과연 어떤 것인지 영 믿을 수가 없었다. 진심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사랑하는 연인을 볼모라 들먹이며 사람을 조종하려 한단 말인가.

일카이를 잠시 쳐다보던 칼리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유리잔에 얼음을 넣고 그 위에 술을 부었다.

“오늘이 보름달이 뜨는 날인가?”

“……그렇긴 합니다만.”

“내가 저번에 검은 마수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지. 사라가 죽게 된 이유가, 파베스가 잡아둔 검은 마수를 풀어줘서였다고.”

일카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리우스는 다른 유리잔 하나에도 술을 준비했다. 이내 그 술잔을 일카이에게 건네며 물었다.

“펠킨이 검은 마수에 대해서도 말해줬나?”

“아뇨.”

“그 검은 마수는 자네 친부일세.”

“……예?”

“선왕이라고. 그 짐승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이십니까? 사람이 어찌 짐승이 된다는 겁니까.”

그의 말에 칼리우스가 그래, 사람이 어찌 짐승이 된다는 걸까. 회의감이라도 든 듯한 미소를 지었다. 유리잔에 든 술을 와인처럼 입안에서 굴리며 잠시 생각하는 듯 싶다가 이내 칼리우스가 말했다.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좋겠지. 와서 봐. 내가 말하는 게 뭘 뜻하는 건지를.”

칼리우스는 오늘 밤에 펠킨이 데리러 갈 테니 그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빈 유리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뒤 방을 나섰다. 일카이는 그 빈 잔을 칼리우스라도 되는 양 노려보다 이내 그 역시 한입에 독한 술을 털어 넣었다.

***

유디티아 후작은 오랜만에 후작저로 돌아왔다. 비서와 함께 복도를 걷던 그는 어쩐지 거대한 저택 전체에서 감도는 특이한 기운에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각하?”

“아니, 뭔가. 집이 좀 새롭게 느껴져서 말이야.”

그것이 불쾌하거나 찝찝한 느낌보다는, 어째 활기가 도는 듯한 기분이었다. 후작의 말에 비서가 아! 짧은 감탄사를 내며 말했다.

“온실이 완전히 새로워지긴 했습니다.”

“아, 아스펠라 양이 온실 정리가 다 되었다고는 했는데 내가 미처 확인을 못했군. 전하가 오시기 전이니 잠깐 보러 가세.”

비서와 함께 온실이 있는 복도로 들어선 유디티아는 정확히 자신이 칼리우스의 성에서 느꼈던 그 싱그러움과 안락함의 기운을 느꼈다.

“그 아가씨에게 무슨 신묘한 힘이라도 있는 건지, 다 죽어가던 온실을 아주 우림으로 만들어놨다니까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울창한 담쟁이와 나무들, 그리고 언제 메말랐었냐는 듯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는 꽃줄기가 보였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단기간에 죄다 살려놓은 거지?”

여기서 공기를 마시고 있으면, 정말 숲속에 들어온 것 마냥 머리가 맑아진다며 비서가 말했다.

아스펠라의 손길이 닿기 전 이 온실은 사실, 여러모로 께름칙한 장소였다.

한나가 아끼던 꽃들이 죄 죽어나가는 것이 불길하기도 했으며 이곳에서 붉은 눈의 무엇인가를 봤다는 이들도 꽤나 많지 않았나.

집사나 시녀장이 시종들의 입단속을 하긴 했어도, 후작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이제 그런 소문들은 잠잠해지겠군.”

보고 있기만 해도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은 기분에, 유디티아 후작의 얼굴이 밝아졌다. 한나가 이곳을 보면 정말 기뻐할 거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국왕이 도착했다며 집사가 달려왔다.

필립은 얼른 국왕을 맞이하기 위해 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전하. 오셨습니까.”

“뭘 그렇게 예의를 차리나, 오늘은 친구로서 잠시 보러온 것이라니까.”

방금 전까지 사냥제가 열릴 산 주변을 보고 온 것인지, 파베스의 신발 곳곳에 진흙이 묻어 있었다. 시종들이 얼른 와 그의 신발을 닦았다.

“이런. 진흙을 묻혀 미안하군.”

“며칠 전에 비가 많이 왔는데 지반이 약해지진 않았을까요?”

“그래도 오랜만에 열리는 사냥제인데, 이제와 무를 순 없는 법이지. 귀족들도 모두 기대하고 있는 중이고. 자네는 이번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게 참 아쉽네. 못 말리는 애처가라니까. 한나를 두고는 사냥을 못 간다니. 그렇게 사냥에 환장하는 이가.”

필립은 애처가라는 단어에 쑥스러운 듯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불참을 용서해주시지요.”

“어쩔 수 없지. 8년 만에 유디티아의 후계자가 태어나는데. 나 같아도 들짐승 잡는 것보다 아이를 택하지. 하하하! 나라의 경사나 다름없어. 공주가 아이를 낳는다니 말이야. 드디어 나도 조카가 생기는군.”

“전하께서도 하루 빨리 왕비를 들이셔서 후사를 보셔야죠.”

“난 천하를 손에 쥘 때까진 후사를 볼 생각이 없네.”

“그럼 하루 빨리 손에 쥐셔야겠습니다.”

필립의 말에 파베스가 호탕하게 웃어댔다. 파베스의 뒤에 서 있던 보좌관은 그 것이 농담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국왕은 천하를 손에 쥐고도 후사를 보지 않을 것이다.

후계자라는 것은 결국 누군가에게 자리를 넘겨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닌가. 그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신 그 자체가 되어 천하를 주무르고, 영원히 자기 밑에 둘 것이었다.

“헌데. 한나는?”

“아, 막달이라 움직이기가 불편하여 오늘은 저 혼자 오겠다고 했습니다. 혹 아내에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그건 아니고, 몸이 좋지 않다고 하니 걱정되어서.”

그렇게 말하던 파베스가 이내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아니면 기시감을 느낀 것인지 눈을 위로 치켜뜨곤 복도를 두리번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온실은 잘 가꿔지고 있나? 한나는 옛날부터 온실을 참 좋아했지.”

필립은 그가 하사한 토양을 죄 들어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에 그를 직접 온실로 안내했다.

현관 앞에서부터 이상하다 싶었는데, 온실로 이어지는 복도를 지날 때부터 파베스는 이 짜증나는 생명력이 온실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것이라는 걸 눈치챘다.

온실 문이 열리고 제 눈앞에 울창한 녹음이 펼쳐진 걸 봤을 땐, 뭔가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짜증남과 동시에 그렇게 찾아 헤매던 것을 찾아내 기쁜 감정이 들었다.

“전하, 온실이…….”

뒤에 서 있던 버루카 역시 같은 느낌을 받은 듯 조용히 파베스에게 말했다.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알아서 온다는 말이 맞았군.”

“예, 전하?”

못 들은 듯 필립이 되묻자, 중얼거리던 파베스는 이내 기쁜 듯 활짝 웃으며 필립에게 말했다.

“온실이 참 아름답게 잘 되어 있군. 한나가 여길 마음에 들어 하던가?”

“사실, 별장에 가 있는 동안 조경이 된지라 아직 한나는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좋아할 겁니다.”

“정원사가 참 솜씨가 좋네. 아무리 흙이 좋아도 식물을 만지는 이 손이 더럽다면 다 죽기 마련이거든.”

파베스는 정원 안쪽에서 나무를 손질하던 인부를 손짓으로 불렀다. 그가 공손히 왕에게 인사를 올린 뒤 그 앞에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섰다.

“자네가 이곳의 정원사인가? 여길 네가 가꾼 것이냐?”

“아닙니다. 저는 그저 나무를 손질하기만 했고, 이곳을 가꾼 분은 따로 계십니다.”

“그래? 누구더냐.”

“대공 가문에서 오신 아가씨이십니다.”

인부의 말에 필립이 살짝 당황하며 그에게 입을 다물라 눈치를 줬다. 인부는 자신이 뭘 잘못한지도, 애초에 실수를 한 것인지조차도 몰랐으나 얼른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숙였다.

“대공 가문에서 온 아가씨? 에르윈 대공 성에 여자가 있다는 말인가? 필립, 자네는 좀 아는 눈치로군.”

“몇 달 전에 아스펠 산이 불탈 때 갈 곳 잃은 화전민들 중 하나 아닐까 싶습니다. 그때 대공께서 화전민들 중 일부를 영지에 들여오셨잖습니까.”

“그래?”

“원래부터 이재민들을 받아주던 분이니까요.”

보기에는 무뚝뚝하고 차가워 보이지만 백성들한테는 온정을 베푸는 분이시라며, 아마 그 여인 또한 산속에서 살던 화전민들 중 하나일 거라 필립은 대충 둘러댔다.

사실 그 역시 아스펠라가 어디서 온 여인인지는 몰랐으나, 그나마 그럴싸하게 대답하려면 이 뿐이라고 생각했다.

“자네 표정을 보니 거기서 그치는 것만은 아닌 거 같은데?”

단순히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과 그를 수용해준 자비로운 대공에 그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말에 필립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저한테 물으셔도 제가 뭘 알아야 말씀을 드릴 텐데.”

“잘 알고 있는 거 같은데. 별장에서 칼리우스도 같이 지낸다지? 그 여인도 같이 휴곤혹스럽다가를 보낸 건가? 응?”

파베스의 집요한 물음에 곤혹스러운 듯 필립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눈치 없고 입 가벼운 필립이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촉이 섰다. 지금이 바로 그랬다.

“이것 참 서운하군. 나는 자네와 칼리우스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나만 쏙 빼놓고 둘만 뭘 알고 있으니 원.”

“전하, 그것이 아니고요.”

“난 그 여인이 칼리우스의 연인이든 뭐든 상관없네. 귀족과 평민이라고 갈라놓을 속 좁은 인간도 아닐 뿐더러.”

그렇게 말하던 파베스는 천천히 온실을 둘러보며, 푸릇푸릇한 나뭇잎들을 가만히 만지작댔다.

“그저, 어쩜 이리 생명력이 넘치는 식물을 가꿀 수 있는지 궁금했을 뿐이야. 참 이상하게도 요즘 왕궁의 온 정원과 온실 식물들이 죽어나가서 말이네.”

“그럼 제가 대공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관리인이 전하의 온실도 봐줄 수 있는지.”

“그래준다면야 고맙고.”

이내 파베스가 씩 웃더니, 이제 그만 가봐야겠다며 발걸음을 돌렸다.

“벌써 가시려고요?”

“자네도 빨리 한나한테 가고 싶어 하는 거 다 알고 있네. 그리 다리를 덜덜 떨어대며 불안해하는데 내 어디 눈치가 보여서 더 있겠나.”

파베스가 사람 좋은 얼굴로, 필립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아이가 부디 건강하게 태어나길 바라.”

“감사합니다, 전하.”

마차가 현관 앞으로 오자, 버루카가 얼른 문을 열었다. 파베스는 그 안으로 들어가 이만 출발하라는 듯 지팡이로 천장을 툭툭 쳤다. 이내 마차가 출발했다. 멀어지는 유디티아 후작저를 가만히 바라보던 파베스가 이내 시선을 거두자 버루카가 물었다.

“전하. 혹, 그 여인이라는 자가.”

버루카의 말에 파베스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기괴할 정도로 찢어진 미소였다.

“그래. 마지막 산신을 칼리우스가 숨기고 있었구나.”

“대공 성의 시종들을 몇몇 매수해놨을 텐데, 어찌 그동안 몰랐을까요.”

“그놈들은 매수한다고 매수되는 놈들이 아닌가 보구나.”

“대공이 눈치를 챘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잠시 생각에 잠긴 파베스가 말했다.

“일전에 그 화전민들. 그들이 사는 곳에 아직 사람이 있다 했던가?”

“예. 사내들이나 건강한 여인들은 모두 데려와 실험에 쓰는 중이고, 그곳에 남은 것들은 노인이나 어린애뿐입니다.”

이제 그쪽은 더 이상 실험체로 쓸 만한 이들이 없으니 다른 할렘가나 화전민, 혹은 이재민들 위주로 알아보겠다는 버루카의 말에 파베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실험체를 찾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허면 그네들에 대해 어찌 물으셨냐는 말에 파베스가 명쾌하게 대답했다.

“거기에 불 좀 질러라.”

불을 지르라고요? 버루카가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래. 거기에 불을 질러. 온정 베푸는 대공 나리께서 그들을 구제할 수 있도록 말이다.

***

“오늘 달이 뜰 때 사냥꾼을 데리고 와.”

칼리우스의 말에 펠킨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칼리우스를 쳐다봤다. 그가 무슨 재미없는 농담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지 이내 에이, 아유, 이상한 추임새를 넣으며 피식피식 웃었다.

“……에이. 재미없습니다. 각하.”

“재밌으라고 한 얘기 같아?”

그러나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는 칼리우스가 장난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펄쩍 뛰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펠킨이 격하게 반대했다.

“일카이 군한테 정체를 알린다니요, 각하! 너무 이릅니다! 아직 그가 각하를 따르겠단 말도 하지 않았는걸요.”

펠킨이 절대 안 된다며, 좋게 구슬려 회유하여 한 편으로 만드는 쪽이 더 안전하다 말했다.

“아스펠라 양은 일카이 군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계십니까?”

“아니.”

“그럼, 지금 이 결정 역시 모르고 계시겠네요?”

“응.”

펠킨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억, 어억, 이상한 소리를 내며 제 뒷목을 잡았다. 그의 과장된 행동에도 별 반응 없는 칼리우스의 모습을 보아하니, 그는 진심이었나 보다. 머쓱해진 펠킨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한번 물었다. 위의 대화가 반복된 지 벌써 세 번째였다.

“정말로 그리하시려고요?”

결국 아까 전부터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에 이골이 난 칼리우스가 대답 대신 선득한 눈빛을 보냈다. 한번만 더 같은 말을 하면, 개로 변하는 순간 널 물어버릴 거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제야 펠킨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물었다.

칼리우스가 쓰고 있던 안경을 접어 책상에 올려놓곤, 잠시 읽고 있던 문서들을 치우며 말했다.

“일카이는 숙이고 들어올 거다. 걱정할 필요 없다.”

“그렇게 확신하시는 분이 왜 굳이 변화하는 장면까지 보여주시는데요? 애초에 전하의 사람이 될 인물이면, 그런 비밀까지 말해주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걸 이용해 국왕 쪽으로 붙으면요?”

“국왕 쪽으로 못 붙게 하려고 보여주는 거다.”

펠킨은 그저 걱정되는 듯 발만 동동 굴렀다.

이내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칼리우스는 가서 일카이를 지하로 데려오라며 펠킨을 쫓아낸 뒤, 그 역시 지하로 내려갔다.

쫓겨난 펠킨은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한숨만 푹푹 내쉬며 일카이의 방문을 두드렸다.

다른 사냥꾼들은 모두 사냥제를 위해 벌써부터 무기 손질을 하는 듯 방 안에서 화살촉을 갈거나 무기에 기름칠 등을 하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일카이가 방에서 튀어나왔다.

펠킨은 영 마뜩찮은 표정으로, “각하께 안내하겠습니다. 절 잘 따라오십시오.” 하며 앞장섰다.

이 야심한 밤에 불러내어 보여줄 것이 대체 뭔가. 평소 항상 생글생글 유한 미소를 짓던 보좌관의 표정도 영 심상치 않았다.

“여긴, 그 깜장인지 하는 녀석이 지내는 곳으로 내려가는 길 아닙니까?”

이내 익숙한 길을 지나자 일카이가 물었다.

설마, 내가 건방지게 굴었다고 마수 밥으로 주려는 건가?

아니면, 후에 내 존재가 해가 될까 처리하려는 건가?

“깜장이라니요! ‘검은 마수’라고 불러주세요. ‘검은 마수’요! 아스펠라 양이 그렇게 부르는 거야 그렇다 치고, 저흰 깜장이라 부르지 말자구요.”

갑자기 울컥한 듯 말하는 보좌관의 모습에 일카이가 당황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보좌관님. 혹시 절 처리하라는 명을 받으신 겁니까?”

“……아무리 마수라 한들, 식성이 있겠죠. 먹으란다고 다 먹겠습니까. 일카이 군은 근육뿐이라 맛도 없을걸요.”

먹힐 걱정은 하지 말라며 펠킨이 괜히 그에게 화풀이를 했다.

이내 지하 문에 다다르자 경비병들이 얼른 돌문을 열었다.

“지금부터는 굉장히 위험할 수 있으니, 꼭 정신 붙들어 매십시오. 아스펠라 양이 없어서 저희는 다루지도 못할 겁니다.”

“예?”

돌문이 열리자, 그 안에서는 칼리우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마수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해 긴장했던 것과는 달리, 칼리우스가 나오자 일카이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각하께서 왜 여기 계십니까?”

칼리우스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가만히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이상해 보였는지 일카이가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러자 펠킨이 얼른 그를 막아섰다.

“보기만 하십시오. 더 가까이 가지는 마시고요.”

“아까 전부터 자꾸 영문 모를 말만 하시는데 대체-”

대체 뭔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물으려던 일카이는, 이내 들려오는 괴성에 몸을 굳혔다.

펠킨은 아예 눈뜨고는 못 보겠다는 듯, 질끈 눈을 감고 고개까지 돌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면서 한쪽 눈만 실눈을 떠 칼리우스와 일카이를 힐끔 쳐다봤다.

일카이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로, 몸을 기이하게 꺾어대는 칼리우스를 쳐다봤다.

“저, 저거 어디 아프신 거 아닙니까?”

일카이가 다시 다가가려 하자 펠킨이 또 한 번 그를 막아섰다.

“그냥 보기만 하시라니까!”

“예?!”

일카이는 그저 당황한 얼굴로 칼리우스를 쳐다봤다.

일카이의 얼굴은 당혹스러워 말문이 막힌 듯 입만 연신 벙긋대다, 이내 공포감에 파랗게 질렸다.

사람의 입에서 짐승의 울음소리를 들어 보았는가.

그저 단순히 짐승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닌, 진짜 짐승의 소리를.

일카이는 저것이 단순한 장난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하나뿐이었다.

“X발, 저게 뭐야……?”

칼리우스가 앞으로 몸을 기울이자, 등 뒤에서 뭔가가 툭, 툭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저건 뼈였다. 인간의 갈비뼈가 아닌, 거대한 들짐승의 뼈대였다.

제 몸을 제어하지 못하겠는 듯 몸을 이리저리 뚜둑뚜둑 꺾어대는 칼리우스가 이내 다시 한번 포효했다. 살갗 위로 덥수룩한 검은 털들이 창처럼 뾰족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검은 마수의 털은 웬만한 동물들의 털보다 훨씬 모질이 굵고, 뿌리가 드세어 그것이 살갗을 뚫고 올라 나오는 느낌이 어떨지는 차마 상상할 수도 없었다.

송곳니가 턱 밑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어지더니 이내 마치 개의 주둥이가 생기듯 코와 입 부분이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두발로 서던 것이 네발이 되었고, 발톱과 손톱은 멀리서도 그 날카로움이 보일 정도로 빛에 번뜩였다.

그리고 붉은 눈과 마주쳤다.

맨 처음 마수를 마주했을 때의 그 경외감과 두려움이 되살아나 닭살 마냥 살갗이 오도독 올라왔다. 그제야 일카이가 다시 한번 정신을 붙잡고 겨우 말을 내뱉었다.

“X발, 저게 뭐냐고…….”

그때쯤 칼리우스에게서는 인간의 모습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모든 변화를 마치자 지친 듯 그대로 땅에 쓰러져 끼잉, 끼잉 쇳소리만 내고 있던 그가 잠시 후 몸을 가누려는 듯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다가가려던 일카이는 펠킨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이제 나가야 합니다.”

“예? 그치만, 저렇게 낑낑대는 건 고통스럽다는 건데…….”

“상관없으니 얼른 나가야 합니다. 아스펠라 양이 없으면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고 공격하실 겁니다. 얼른요.”

그렇게 말한 펠킨은 얼른 일카이를 데리고 동굴 밖으로 나갔다. 병사들이 다급하게 돌문을 밀기 시작했다.

멀리 있던 짐승이 소리를 듣고는 몸을 일으켜 살의 가득한 눈으로 이곳을 쳐다봤다. 그대로 발돋움을 하더니, 입구 쪽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병사들과 함께 넷이서 문을 닫지 않았더라면, 그리하여 그가 벽에 머리를 박고 제 힘에 나가떨어지지 않았더라면, 조금이라도 넋 놓고 저것을 바라보기만 했었더라면……. 넷 다 죽은 목숨을 이었을 것이다.

병사 둘은 자신들의 덜덜 떨리는 손을 괜히 허벅지나 배에 문질렀다. 펠킨 역시 손수건으로 제 이마와 목덜미에 난 식은땀을 툭툭 닦아내리곤 안경을 고쳐 썼다.

그리고 한숨 돌린 일카이가 물었다.

“X발,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혼잣말인지, 아니면 펠킨에게 묻는 말인지 모를 정도로 눈에는 초점이 없었으며 목소리는 나직했다.

펠킨은 그가 육두문자를 뱉는 것에 십분 이해한다며 말했다.

“일단. 술을 좀 마시고 얘기합시다.”

진정하기 위해서는 술만큼 좋은 것이 없을 것이니.

펠킨이 술을 찾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맨 처음 일카이가 개로 변했을 때, 그리고 사라진 그가 몇 주 만에 돌아와서는 가장 먼저 한다는 말이 “여자를 데려와야겠다.”였을 때.

그 두 번의 상황 말고는 없었는데 이번에 새로 추가되었다.

‘각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겠지. 단순히 왕을 끌어내리는 일에 이용하시려는 것 말고도…….’

아무리 그래도……. 아, 결국 저 넋이 나간 애를 내가 추슬러주고 달래줘야 하잖아! 정말 너무하시네!

펠킨은 오늘 술을 아주 많이 마실 생각이다.

***

한편 아스펠라는 칼리우스가 보내준 마차를 타고 북쪽 산기슭으로 가고 있었다. 어스름한 밤이 되자 유독 밝은 달이 구름 한 점 가려지지 않고 떠올랐다.

아스펠라는 그 달을 보며 자신이 떠나온 길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아주 멀리 있어 보이지도 않을 에르윈 대공 성, 그 지하에서 짐승으로 변하며 고통에 몸부림칠 칼리우스를 떠올렸다.

‘오늘 저도 같이 있을게요. 당신이 변하는 그 자리에 있게 해줘요. 응?’

아스펠라는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그 고통에 공감하고, 나누고 싶었다. 칼리우스 혼자 그 고통을 감내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칼리우스는 생각이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그는 아스펠라가 제 그런 모습을 보는 걸 원치 않았다.

‘먼저 가 있어요. 인간으로 돌아오려면 적어도 다음 보름달이나 그 다음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럼 너무 늦어질 것 아닙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 있으세요. 저 역시 몸이 돌아오면 바로 북쪽으로 가겠습니다.’

지금쯤이면 변화를 하고 있으려나.

아스펠라는 그가 변할 때 어떤 과정을 겪는지 직접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지 않던가. 쉽게 변할 리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검은 마수의 본질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둠 아니던가.

아침부터 꼬박 하루를 달린 마차가 새벽 즈음 겨우 북쪽 산에 도착했다.

아스펠라는 자신을 따라 올라오려는 호위병에게 그럴 필요는 없다 말했다.

“하지만, 아가씨. 산이 매우 험준합니다. 제가 앞장서 풀들을 헤쳐 길을 만들겠습니다.”

그는 아무래도 아스펠라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인지, 여인의 몸으로 저 산을 오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말했다.

“저 정말 괜찮아요. 먼저 돌아가 계세요.”

아스펠라는 그렇게 말하며 그를 마차 안으로 들여보낸 뒤, 출발시켰다. 당황한 호위기사가 “아니, 잠시만요, 아가씨! 저 혼자 돌아가면 안 됩니다. 위험하십니다!” 하며 얼른 고개를 창문 밖으로 빼냈다.

“방금, 나무가 움직인 거 맞나?”

그는 아스펠라 뒤쪽의 산이 저절로 움직이며 길을 만드는 것을, 그 안으로 익숙하게 들어가는 아스펠라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각하께서 그 아가씨를 산까지만 호위하고 다시 돌아오라고 하시던데, 너무 위험한 것 아닌가?’

‘아. 아스펠라 아가씨? 걱정 붙들어 매라.’

‘하지만 여인 혼자서 어찌 산을 올라.’

‘아스펠 산에서 20년간 살았다는데 어떤 산을 못 오르겠냐. 그리고 보면 알 거다.’

‘뭘 보면 알아?’

‘그런 걱정이 하등 쓸모없다는 걸. 애초에 각하를 다루는 여인이 뭐 어디 보통 여인이겠어? 난 내 눈으로 직접 봐서 그분에 대한 걱정이 아주 쓸모없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 보통 사람이 아냐. 우리가 지킨다고 지켜지는 분도 아니고.’

어째서 동료 기사들이 그런 말을 했던 것인지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호위기사는 마차 안에 가만히 바로 앉아 제 눈을 비벼댔다.

***

불타버린 아스펠 산의 나무들이 그리했듯, 북쪽 산의 나무들 역시 뿌리를 움직이고 나뭇가지를 돌리며 아스펠라가 위쪽으로 올라가기 편하게 몸을 비켰다.

[네가 바로 그 아스펠라로구나?]

[소문만 들었는데. 직접 보게 될 줄이야.]

그들은 아스펠라를 신기해하는 듯했다. 인간이면서 산신의 영혼 일부를 받아 그 능력을 갖게 된 것도, 또한 산신들이 지키는 봉인의 일부인 자물쇠라는 것도 모두 아는 것 같았다.

“너희들 봉인에 대해 알고 있니?”

[그야 당연하지. 아스펠 산의 나무들보다도 우리는 더 아는 게 많아. 그쪽 나무들은 산불 이후로 이제 다시 태어나서 아는 게 별로 없지.]

“아스펠 산의 동물들이 이리로 피신 왔을 텐데.”

[너구리 할배 말하는 거지? 나무들이 지금쯤 전달해줬을 테니 네가 온 걸 알고 마중 나올 거야. 더 위로 올라가 봐.]

“고마워.”

[그나저나, 오랜만에 산신의 정기를 가진 애가 오니까 늙은이 몸에도 생기가 도는 걸.]

그렇게 말한 나무들이 아스펠라한테 자신들의 나뭇잎 중 가장 예쁜 나뭇잎을 따 선물하기 시작했다. 그들 나름의 환영 방식이었다.

아스펠라는 예쁜 나뭇잎들을 한 아름 받은 뒤, 다시 산 위로 올라갔다.

나무들이 알아서 길을 비켜주고, 땅들이 몸을 낮춰 평지처럼 만들어주니,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아스펠라는 산의 정상 부근에 도달했다.

위쪽으로 조금 더 걸어 올라갈 때쯤, 너구리 영감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영감!”

그 뒤로는 다람쥐며 사슴이며, 그렇게나 그리웠던 이들이 아스펠라의 이름을 부르며 환영하고 있었다.

[아스펠라. 오랜만이로구만.]

“영감, 얘들아. 너무 오랜만이다. 보고 싶었어.”

너구리 영감은 아스펠라가 들고 있는 색색의 나뭇잎들을 보더니, 그중 하나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나뭇잎을 받았구나?]

“응, 환영해주는 건가 봐.”

[그렇기도 한데, 이건 단순한 나뭇잎이 아니야. 너한테 이 산의 주인임을 인정해준다는 얘기지.]

“이 산의 주인?”

[산신들이 죄다 사라졌으니, 나무들도 따라야 할 주인이 있어야 할 거 아냐. 축하해, 아스펠라! 이제 아스펠 산도 북쪽 산도 다 네 거야.]

아스펠라는 제 치맛자락에 모아놓은 나뭇잎들을 가만히 쳐다봤다.

“영감. 아스펠 산이 다시 살아난 건 알고 있지?”

[응. 들었어. 산이 완전히 회복하게 되면 다시 돌아갈 거야.]

“나 기억이 돌아왔어. 영감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비르가와 함께 옆에 있었으니까 알고 있을 거야. 내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도, 봉인에 대한 것도. 영감은 알고 있지? 그날 왜 비르가가 칼리우스를 살렸는지, 그리고 왜 비르가가 칼리우스를 검은 마수로 변하게 했는지.”

아스펠라의 말에 너구리 영감이 잠시 침묵하다 이내 이야기가 길어지려는 것을 암시하는 듯, 자리를 피고 앉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연명해온 수명만큼 보통의 너구리들보다 덥수룩하고 길어진 자신의 털들을 작고 까만 손으로 빗어내리며 말했다.

[아스펠라. 네가 산신이 될 수 있었던 건 네 몸 속 안에 비르가의 영혼 일부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야. 원래 인간은 산신이 될 수 없어.]

너구리 영감은 아주 오래전의 일을 떠올렸다.

[너를 맨 처음 봤을 때를 아직도 기억한단다. 아주 갓난쟁이였을 때 말이야.]

어느 날 비르가는 작은 갓난아기를 들고 왔다. 모두가 그 아기는 버려진 아이라 생각했더랬다. 삶이 풍족하지 않은 인간들은 종종 아스펠 산에 자신의 아이들을 버리기도 했으니까.

수많은 갓난쟁이를 비롯해 어린 아이들, 늙은 노인들, 병자들이 그 산에 버려졌고 그들은 모두 죽었다. 비르가는 그들이 불쌍하다 하여 함부로 거둬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스펠 산의 산신들은 그저 자신들이 방관했던 왕으로 인해 세상에 퍼진 온갖 부정한 것들로 고통 받는 인간들을 보기만 해야 했다.

산신들은 그저 인간들을 방관해야만 하는 존재. 그들이 할 일은 그저 루이나의 봉인을 지키는 것.

해서 수많은 불쌍한 영혼들이 아스펠 산을 떠돌아다녀도, 비르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영혼들을 달래주는 것뿐이지 그들을 살려주는 것은 아니었다.

헌데 그랬던 비르가가 웬 아이를 데리고 온 것이다.

***

[비르가 님, 웬 아기입니까?]

너구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비르가와 함께했다. 산신이 존재하는 산에 사는 동물들은 그 영험함에 보통의 짐승들보다 수명이 몇 배는 길었다.

[제 12년 생 중에서 인간을 데려오신 것은 처음입니다. 저희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비르가 님이 인간을 거둬들이신 것을 보신 적 없다 하셨는데요.]

너구리의 할아버지는 50년을 살다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45년을 살다 돌아가셨으니, 자신까지 합해서 100년 동안 비르가가 인간에게 자비를 베푼 적은 없던 것이었다.

[이 인간 아이는 왜 거둬들이신 거예요?]

「얘는 단순한 인간 아이가 아니란다.」

비르가는 제 품에서 꼼지락대는 작은 갓난쟁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럼요?]

「봉인을 완전히 잠글 자물쇠 중 하나다.」

[봉인이라면, ‘루이나의 봉인’이요? 그 말씀은 즉 다섯 가문의 아이 중 하나라는 말씀 아니신가요?]

「그래. 맞다.」

[다섯 귀족 가문 중 어느 가문의 아이입니까? 왜 아이를 버린 걸까요? 자물쇠를 왜 버린 겁니까? 잘 키워서 봉인을 막을 때 써야죠.]

「글쎄다. 인간들에게는 더 이상 공감도 이해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지 오래라서 잘 모르겠구나.」

[신도 모르는 게 있습니까?]

「당연하지. 난 아무것도 모른다. 태초의 신만이 아시지. 우린 아무런 존재도 아니다.」

너구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산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면 누가 안단 말인가.

태초의 신은 다섯 기사에게 자신의 능력을 아주 조금씩 떼어줬다. 루이나에게 줬던 만큼이 아닌, 그들이 봉인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힘.

다섯 명의 기사는 죽어서 산신이 되었고 각각 능력을 이어받았다.

아스펠 산의 산신 비르가는 신탁을 들을 수 있는 귀를, 남쪽 산신은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을, 나머지 세 산신은 각각 바람과 물, 불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그러니 그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아무런 존재도 아니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이 인간 아이를 키우실 건가요?]

「그래야 하겠지. 자물쇠 아니더냐. 다른 자물쇠들을 모두 찾게 되는 날까지 아이를 길러야 하지 않겠느냐. 올해는 신탁이 내려왔더구나. 다섯 개의 자물쇠를 모두 내려보낼 테니 그 아이들을 봉인에 바치면 루이나는 완전히 지하에 갇혀 다신 올라오지 못할 거다.」

[그럼 이 인간 아이는 결국 죽겠네요?]

너구리는 꼼지락대는 아이를 보며 조금 가엽다고 생각했다.

「너무 가엽게 여기지 말거라. 그러라고 태어난 아이들이니까.」

큰 정은 주지 말라고 말한 건 비르가였으면서, 그는 아이에게 아스펠라라는 이름까지 지어줬다.

아이는 사랑스러웠다. 태초의 신은 마치 맨 처음 인간을 사랑했던 때로 돌아가 아이를 만든 것처럼 사랑스러운 아이를 자물쇠로 내려 보냈다.

산속 동물들 모두 아스펠라를 사랑했다. 귀엽고 작은 생명체가 옹알이를 하며 자신들과 대화할 때마다 그 사랑스러움은 배가 되었다.

너구리는 아스펠라를 사랑하면서도 이 점이 걱정되었다.

그녀는 자물쇠 아니던가.

아스펠라가 인간의 나이로 4, 5살쯤 되었을 때였다. 하벨 남작이라는 자가 찾아왔다. 그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있던 비르가가 감히 아스펠 산의 주인 되는 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국의 부랑자들이 산에 숨어 살다 발각되는 일이 적잖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이 노인 역시 그쯤 되는 이라 생각했던 건지. 자신이 인간의 모습을 한 산신임을 밝히지 않은 비르가에게 하벨 남작이 말했다.

‘어느 나라의 부랑자인지 모르겠으나, 이곳은 산신 비르가께서 다스리는 성스러운 산일세. 자네가 데리고 있는 그 아이는 내가 수년 전 잃어버린 아이 같은데.’

하벨 남작이 아스펠라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생모를 쏙 빼닮은 외모 때문이었다. 남작의 본처였으나, 그와 그의 정부로 인해 ‘아이를 안고 도망친 시녀’로 탈바꿈 되어버린 몰락한 귀족가의 여식.

몰락한 블레드 가문의 영애와 하벨 남작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그게 바로 아스펠라였다.

‘내 딸을 어디서 찾았는가?’

‘죽은 여인이 품에 안고 있는 것을 데려왔소.’

‘그 여인은 내 아이를 데리고 도망친 은혜도 모르는 여자였지. 다시 내 딸을 데려가마. 이국의 부랑자라는 것은 내 고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거라. 내 딸을 잘 키운 보상으로 금괴를 내리마.’

‘금은 되었소.’

그들의 대화를 듣던 어린 아스펠라가 비르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천진하게 물었다.

[비르가. 이 아저씨가 뭐라고 말하는 거야?]

인간의 언어로 대화를 하자 아스펠라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비르가가 손을 뻗어 아스펠라의 얼굴을 한번 쓰다듬었다.

[응? 비르가, 비르가아- 이 아저씨는 뭔데 이상한 옷을 입고 있는 거야? 옷이 엄청 요란해!]

남작은 짐승의 언어를 하는 아스펠라를 보며, 그저 이 노인을 따라 이국의 언어를 한다 생각했을 뿐이었다.

[비르가. 나 저 아저씨한테 보내려는 거야? 너구리 영감이 그러던데 저 아저씨가 내 진짜 아빠라는데 진짜야? 응?]

비르가는 잠시 침묵했다. 마차가 신기한 듯 그 주변을 동물들과 함께 맴돌며 킁킁 냄새 맡는 아스펠라를 한참 쳐다보다 말했다.

‘그래. 그리하단다.’

***

[그렇게 남작이 널 데려간 날, 비르가 님은 처음 눈물을 보이셨어.]

그들 모두 눈물을 흘렸고, 그와 동시에 그 인간 아이를 사랑하게 된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동물들은 아스펠라를 보내고 싶지 않아 울었고, 비르가 역시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

산신이 눈물을 뚝뚝 흘릴 때마다 그 거대한 몸집만큼 커다란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이후에 비르가 님은 몇 번 아스펠라 너를 보러 내려가셨었나 봐. 네가 그곳에서 잘 지낸다 하기에 우리 역시 너만 행복하다면 된 것이라 생각했어.]

하벨 남작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몰라도 봉인을 더 빨리 푸는 방법을 알고 있는 듯했다. 700년째가 되는 해까지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던 그는 아이를 이용해 루이나의 마지막 봉인 장소를 찾아 헤맸고, 아이가 제 능력을 쓰지 못하자 학대했다.

그걸로 모자라 마지막 봉인 장소를 알아내 그곳에 아스펠라를 데려가 죽인 것이다.

산에서 하벨 남작의 부정한 속셈을 알았을 때는 이미 아스펠라가 죽은 뒤였고, 비르가는 자신을 자책하며 아스펠라를 껴안았다.

그와 동시에 비르가는 또 한 번의 신탁을 내려 받았다.

다섯 개의 자물쇠 모두 다섯 가문에서 태어날 아이들인 것을. 이 아이들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뀐다는 것을.

[이후에 비르가 님은 다시 널 데리고 돌아와 살리셨어.]

비르가는 잠든 아스펠라에게서 그날의 기억을 지워버렸다. 또한 칼리우스에게서도 그날의 기억을 지워버렸다.

너구리가 어찌하여 기억까지 지우는지 묻자 비르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신은 우릴 또 시험 들게 하는구나. 어찌하여 자물쇠 될 아이들을 사랑하게 만들었을까. 그분의 뜻을 이젠 나는 모르겠다. 내가 어찌 이 아이가 그저 자물쇠가 되어 죽는 꼴을 보냔 말이야.」

[아마, 비르가 님은 아스펠라 널 너무 사랑해서 자물쇠로서의 기억들을 모두 잊게 하려 했나 봐. 고통스러운 기억도 모두 잊고, 그냥 아스펠 산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셨어.]

너구리는 그렇게 말하며 아스펠라의 손을 꼭 잡았다.

[아스펠라. 자물쇠고 뭐고, 그냥 우리랑 행복하게 살자꾸나. 어차피 네가 산신이 되었으니 다른 산들의 봉인도 네가 지키면 되잖아. 같이 아스펠 산으로 돌아가자. 네가 인간 세상에 오래 있을수록 우리와 대화하는 것도 힘들어질 거다. 네가 우리랑 대화할 수 있는 그 힘은 인간과 오래 지낼수록 약해진다는 것이야.]

영감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아스펠라가 물었다.

“자물쇠가 봉인을 완전히 잠글 수 있는 700년의 해가 돌아오는 게 정확히 언젠데?”

[일식이 찾아오는 날. 정확히 70일 뒤야.]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아스펠라는 잠시 손을 꼼지락거리다, 이내 결단을 내린 얼굴로 비장하게 말문을 열었다.

“……나 칼리우스를 사랑하게 됐어.”

[아스펠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이야?]

[안 돼! 아스펠라. 우리를 버리는 거야?]

아스펠라의 말에 동물들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아스펠라가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칼리우스를 사랑한다 해서, 아스펠 산을 떠나는 것도, 너흴 버리는 것도 아니야. 난 내 소중한 것들을 지킬 거야. 그러려고 너흴 찾아온 거고. 그리고, 봉인을 잠글 거야. 다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치만 네가 죽을 수도 있는걸?]

영감의 말에 죽지 않기 위한 다른 방법을 찾아볼 것이라 대답했다. 그게 가능하냔 말에 아스펠라는 슬쩍 웃으며 어깨만 으쓱였다.

그때, 짐승 울음소리가 산에 퍼졌다. 거대한 검정 몸집을 가진 것이 훌쩍훌쩍 산을 올라오더니 이내 아스펠라 옆으로 왔다.

“칼리우스!”

아스펠라가 그를 부르자, 동물들이 일제히 검은 마수로 변한 칼리우스를 쳐다봤다. 그러자 너구리 영감이 칼리우스의 주둥이 쪽으로 올라가, 그의 붉은 눈을 가만히 쳐다봤다.

마치 눈 안쪽 너머의 뭔가를 살펴보는 듯하던 영감이 이내 입을 열었다.

[자네. 거의 하나가 되었구만.]

***

칼리우스는 아스펠라가 말한 것을 떠올렸다.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마수로 변할 때 목소리들이 들린다고 했죠? 그들 말고 내 목소리만 떠올려요. 나만 생각해요.’

이렇게 하면 정말 아스펠라가 옆에 없어도 제 몸을 통제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칼리우스는 가만히 손안의 손톱보다 작은 보석 알맹이를 쳐다봤다.

북쪽 산으로 가기 전 아스펠라는 그에게 작은 보석 같은 것을 건넸다. 몸이 변하기 전에 이걸 먹어두면 조금은 제정신을 붙잡고 있기 편할 것이라고.

‘이게 뭡니까?’

‘예전에, 제가 악몽을 너무 심하게 꿀 때 비르가가 해줬던 거예요.’

비취색을 띠는 동그란 알맹이는, 마치 작은 환약 같은 모양새였다. 아스펠라가 약방 영감에게서 받은 약재를 먹고도 앓는 기간이 길어지면 비르가가 종종 먹였던 것이었다.

그건 일종의 결정체라 했다.

아스펠라는 그것이 비르가의 손바닥에서 작은 빛으로부터 시작해 만들어지는 것을 몇 번 봐왔다. 비르가는 산신 되는 자는 모두 만들 수 있는 거라 했다.

그는 아스펠라가 이것을 쓸 거라는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따금 그녀에게 자신을 따라 해보라는 말을 했더랬다.

「자, 손을 펼치고, 그 안에서 빛이 나온다고 상상하렴.」

아직 산신의 자격을 얻지 못한 아스펠라의 손바닥에서 빛이 나올 리 없었다.

‘비르가. 안 나오는 걸?’

「아직 네가 산신이 아니어서 그렇지. 언젠가는 가능할 거란다.」

아스펠라가 앓을 때말고도, 종종 오염된 강가나 땅을 보게 되면 비르가가 그것을 만들어 땅에 씨앗을 뿌리듯 뿌렸다고 한다.

‘비르가는 산신들이 종종 뭔가를 정화할 때 쓰는 결정체라고 했어요. 씨앗 같은 거래요. 저도 산신이 되었으니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해봤는데, 진짜로 만들어지더라고요.’

이걸 먹으면, 당신이 깜장이로 변하고 나서도 이성을 잃거나 날뛰지 않을 거예요. 저도 그랬거든요. 악몽에 몸을 주체 못하다가도, 비르가가 이걸 입 안에 넣어주면 제 몸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었어요.

‘칼리우스가 오늘 밤이 지나도록 북쪽 산으로 오지 않으면, 효과가 들지 않은 거라 생각할게요. 혼자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까 제가 저택으로 올게요. 그러니까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아스펠라는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또한 혼자 두지 않겠다고도 했다. 그 말은 마치 자신이 보살핌이 필요한 애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그게 같잖거나 불쾌하기보다는 이런 종류의 보살핌도 기분이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칼리우스가 피식 웃으며, 아스펠라가 준 것을 그대로 삼켰다.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고, 아무런 맛이나 영험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때맞춰 지하 돌문이 열렸다. 일카이와 펠킨이 보는 앞에서 칼리우스는 이내 자신의 몸에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칼리우스는 변화가 시작되기 전 일카이를 쳐다봤다. 펠킨은 자신은 아예 보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돌린 상태였고, 일카이와 눈이 마주쳤다.

‘잘 봐. 내가 말한 게 뭘 뜻하는 건지.’

칼리우스는 이내 제 몸의 뼈가 재배열되는 것을, 자신의 살밑에 파묻힌 혈관과 근육들이 수축했다 팽창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아스펠라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에서 짐승으로, 짐승에서 인간으로 변화를 거듭하는 시간이 점점 짧아졌다. 처음에는 꼬박 하루가 걸렸던 변화가 어느 순간부터는 몇 시간으로, 몇 시간에서는 이제 몇 분으로 줄어들었다.

그건 마치 저주가 풀리고 있다기보다는, 마수와 인간 사이에서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느낌이었다.

눈앞에 붉은 실핏줄들이 일더니, 이내 앞이 붉어졌다가, 암전이 찾아왔다.

아스펠라가 준 것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암전 후에 뿌옇던 시야가 점점 환해지더니, 이내 다시 밝아졌다. 아스펠라가 곁에 있었을 때처럼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었다.

“각하! 각하!”

저 위쪽에서 펠킨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정신이 드시면 이리 와주시고, 계속 개새끼이시면 그대로 계십시오!”

“미쳤습니까, 보좌관님?! 아까 전에 문 쪽으로 들이받으려 했던 거 보셨잖습니까!”

“아니, 제정신이 드실 지도 모른다고 하셨다고요.”

칼리우스는 티격태격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어, 어어, 아이씨, 오잖아요! 빨리 우물 문 닫읍시다! 문을 닫으려는 일카이와, 아니, 제정신이면 여기 올라오신다 했다고요. 각하, 각하십니까, 개새끼이십니까?! 하며 물어대는 펠킨은 목소리와 말투를 보아하니 술을 진탕 마신 느낌이었다.

아무리 자신의 방식이 불만이라 해도 그렇지 저렇게 술에 절다니. 칼리우스는 기가 막히다는 듯 한숨을 한번 내쉬곤, 그대로 발돋움을 하며 벽을 탔다. 며칠 전 보수 공사를 마쳐 더 높아진 우물에도 끄덕 않는 듯 거대한 몸뚱이가 우물 문을 부수고 위로 올라왔다.

그 위에 주둔하고 있던 펠킨과 일카이, 그리고 혹시 몰라 대기시켜둔 대공가의 호위 기사들은 칼리우스가 동굴 밖으로 나오자 긴장한 듯 숨죽인 채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짐승으로 변하기 전, 펠킨을 불러 아스펠라를 찾아갈 것이니 변화를 마친 후에도 우물 문을 열어두라 명했다.

‘하지만, 아스펠라 양도 없는데 이성을 되찾으실 수 있을까요?’

‘이게 효과가 있다면 가능하고. 그렇지 않으면 네가 날 동굴에 가둬놔야지.’

펠킨은 긴장한 얼굴로 제 앞의 거대한 마수를 쳐다봤다. 지금 저 안에 든 것이 그저 짐승인지, 아니면 통제가 가능한 칼리우스인지 알기 위함이었다.

“각하?”

천천히 손을 뻗으며 펠킨이 묻자, 칼리우스가 이내 그를 바라보다 주둥이로 손을 툭 치고는 훌쩍 북쪽 산을 향해 언덕을 넘어갔다.

병사들이 보좌관님! 각하십니까? 짐승이 아니고요? 하며 걱정되는 듯 물었으나, 펠킨은 감동받은 듯한 얼굴로 칼리우스의 촉촉한 코가 닿았던 손을 꼭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시다.”

“근데 왜 우세요?”

일카이가 질린 표정을 지으며 펠킨을 쳐다봤다. 꼭, 말 안 듣고 속 썩이던 자식이 처음 감사의 마음을 전해 감동받은 부모의 표정이었다.

“매번 날 잡아먹으려고만 하시던 분이, 처음으로, 소, 손에 코를……. 훌쩍. 자 다들 들어갑시다. 이제 아스펠라 양을 만나러 갔을 테니 조금은 안심입니다.”

펠킨은 여기서 말고 안에 들어가서 또 술판을 벌이자며 병사들을 다독였다.

일카이는 알싸하게 올라오는 취기를 겨우 누르며, 칼리우스가 사라진 북쪽을 가만히 바라봤다.

‘네 볼모는 이미 죽은 누이가 아니라, 아스펠라일테니까.’

에르윈 대공이 왜 그런 자조적인 표정을 지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일카이는 짙은 붉은색 눈썹을 찡그리곤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펠킨이 두고 간 술병들을 챙기고 그 뒤를 따랐다.

***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을 가르며 칼리우스가 커다란 앞발로 땅을 박차고 뒷발로 땅을 굴렀다. 발을 구를 때마다 훌쩍훌쩍 작은 산등성이를 넘어 금세 북쪽 산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아스펠라의 체취를 따라가니, 그곳에 아스펠라가 있었다.

“칼리우스!”

아스펠라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냐며 기쁜 듯 그에게 쪼르르 달려와 목덜미 쪽에 폭 파묻혔다. 아스펠 산에 살던 동물들이 일제히 칼리우스를 쳐다봤다.

그중 너구리 영감이 칼리우스의 주둥이 쪽으로 올라가더니, 이내 그의 붉은 눈을 가만히 쳐다봤다.

[뭐야?]

[자네. 거의 하나가 되었구만.]

“하나가 되었다니?”

짐승은 짐승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마음의 창인 눈을 들여다보면 그 확실한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칼리우스의 경우엔 그 두 가지가 거의 붙었고, 결합되기 직전이라 말했다.

[내가 그래서 이놈 맨 처음에 봤을 때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했잖아.]

“영감!”

아스펠라가 그런 말 하지 말라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부르자, 너구리 영감은 불안하고 초조한 듯 짧은 다리로 반복적으로 원형을 그리며 빨빨댔다.

너구리는 잠시 아스펠라의 눈치를 살폈다.

[원래 검은 마수는 비르가 님의 분신 같은 거야. 따라다니는 그림자라고나 할까. 지금 인간 세상에 활개 치는 마수들도 한때는, 산신한테 능력을 부여받은 작은 분신들이었지.]

산신들은 봉인을 지키기 위해 산으로부터 멀리, 오래 나와 있지 못한다. 그들이 부여받은 사명은 봉인을 지키는 것 외에도, 부정 탄 힘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것.

하여 산신은 자신들의 분신을 만들려 했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그랬듯, 더 큰 힘을 탐해서 문제였어. 그래서 비르가 님께서는 일종의 안전장치를 해뒀지.]

애초에 신을 따라다니는 그림자, 그들의 분신으로 만들어진 검은 마수.

저주와 축복의 양면성을 지닌 힘은, 어둠에 먹히면 그대로 짐승이 되나 그 어둠에 잠식되지 않으면 자기 마음대로 능력을 쓸 수 있다.

[빛이 되려는 자는 그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도 버텨낼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어. 그런데 이 그림자가 매우 짙어서 한번 약한 지점을 들키게 되면 한없이 먹히는 거야.]

그러자 너구리의 말에 칼리우스가 물었다.

[그럼 내가 지금 약한 지점을 들켰다는 건가?]

[그걸 내가 어찌 알아. 본인만 아는 거지…….]

힐끔, 마수로 변한 칼리우스를 보며 말하고는 아스펠라 뒤로 몸을 숨기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비르가 님은 단 한 번도 분신 만드는 것에 성공하지 못하셨어. 결국엔 다들 어둠에 먹혀서 진짜 마수가 되었고, 인간들한테 사냥 당했지. 아마 자네도 그렇게 어둠에 먹히게 될 걸? 아스펠라. 내가 그래서 맨 처음에 가까이 하지 말라 했잖아…….]

“영감! 그걸 말이라고!”

아스펠라가 성을 내자 너구리 영감은 작고 까만 앞발을 안절부절못하더니 괜히 비비적댔다. 아스펠라는 맨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말해주지 않은 거냐 영감을 타박했다.

[나, 나도 몰랐어! 에르윈 가문의 애가 검은 마수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구! 억울하다, 이 영감님은 억울해. 아스펠라.]

그러면서 키엥, 키엥 우는 소리를 내며 앞발로 세수하듯 얼굴을 쓸었다.

아스펠라가 여전히 화가 난 듯 양손을 허리에 올린 채 너구리를 노려보자, 영감은 잠시 또 한번 힐긋, 칼리우스와 아스펠라를 번갈아 보며 눈치 살피곤 말했다.

[아무튼, 자네도 빨리 이겨내지 못하면 금방 먹힐 거야. 어둠에 완전히 먹히면 아스펠라랑 말도 안 통해. 짐승도 인간도 아닌 이상한 혼종이 되는 거니까.]

스스로 뭘 무서워하는지, 그걸 어서 알아내야 할 거야.

굳이 알아내려 하지 않아도 칼리우스는 잘 알고 있었다.

「지키지 못해 스스로를 저주한 자여, 무저갱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하나. 너는 지키는 존재다. 인간의 마음을 품은 짐승의 피가 대지에 스며들 때 너는 비로소 다시 인간이 될 것이다.」

그는 지키지 못하는 것이 두려웠다.

이전에는 죄책감과 후회로만 남았던 것들이, 이제는 아스펠라라는 대상이 생기자 두려움으로 변했다.

그는 아스펠라를 지키지 못할까 두려운 것이었다. 정확히는 아스펠라가 죽을까 무서운 것이었다.

‘걱정 마요, 칼리우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내가 당신 곁에 계속 있을 거니까. 난 절대 당신을 혼자 두지 않을 거라고요. 그러니, 괴수가 된다 한들 두려울 것 하나 없어요.’

파베스로부터 지키지 못할까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자신 때문에 아스펠라를 잃게 될까 두려웠다.

한없이 다정한 아스펠라의 마음을, 사랑한다 말해주는 저 여인의 마음을 볼모삼아 겨우 제 옆에 두고 있는 꼴이 될까 봐.

***

국왕의 마차는 이내 후작저의 영지를 완전히 빠져나갔다.

마차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유디티아 후작은 곧장 마차를 준비하라 일렀다. 급히 출발하는 통에 집사가 얼른 외투를 가져와 그에게 건넸다. 마차에 올라타 지팡이로 마부와 연결된 창문을 내린 후작이 말했다.

“아버님의 묘지로 가거라.”

그의 말에, 뒤를 따르려던 비서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선대 후작님의 묘지요?”

“그래.”

“바로 부인께 가는 것이 아니라요?”

“아이,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묘지로 가자니깐.”

비서는 갑자기 왜 묘지를 가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일단 마부에게 그리 향하라 일러뒀다. 이내 마차가 출발했다.

열두 살 때의 일이 필립의 뇌리를 스쳤다.

‘아버지, 이 책은 무엇인가요?’

‘이놈, 또 숨긴 초콜릿 찾으려 아비의 서랍을 뒤진 것이냐.’

아들이 가져온 낡은 고서를 보며 당황하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어어, 으음 죄송해요.’

‘……그걸 읽었니?’

‘아뇨! 너무 어려운 단어 투성이라, 헤헤.’

‘초콜릿은 찾았더냐?’

‘하나 찾았어요!’

‘그래. 초콜릿이라도 찾았다니 다행이로구만. 책은 이리 다오. 아직 네가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야.’

‘근데 이건 무슨 책인데요, 아버지? 네? 네?’

‘어허. 초콜릿 하나 찾자고 아비의 서랍을 헤집는 꼬맹이가 알 만한 내용이 아니야.’

선대 유디티아 후작은 언제나 제 아들의 가벼운 입방정을 걱정했더랬다. 결국 그는 궁금하다며 알려달라던 아들에게 절대 말해주지 않더니, 나중에 그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그날 일을 다시 꺼냈다.

‘그 두꺼운 책을 기억하느냐, 필립. 이 썩을 걸 염려하여 초콜릿 좀 숨겼더니 이 아비의 서랍을 죄 들쑤신 그날 네가 찾은 책 말이다.’

필립은 기억한다고 답했다.

그 책은 어린 필립의 뇌리에 강하게 박힌 책이었다. 아주 낡고 여러 권의 책을 간책마냥 한데 이은 뒤 두꺼운 자물쇠를 단 책이었다.

이후로도 필립은 아버지 몰래 서랍에서 그 책을 읽어보려 했으나, 이후 단단히 잠긴 자물쇠를 열 재간도, 열쇠도 없어 포기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하나 꺼내 아들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게 뭡니까?’

‘열쇠다. 네가 그렇게 읽고 싶어 하던 그 책의 열쇠. 필립. 하지만 지금 당장 읽지는 말거라.’

읽지도 말라는 책의 열쇠는 왜 주시는 건가.

‘이 책을, 내 석관에 같이 넣어주거라. 열쇠는 지니고 있으되, 때가 아니라 판단되면 읽지 말거라. 네가 결단을 내릴 만한 능력이 생기지 않는 한, 네 결정의 결과를 감당할 능력이 되지 않는 한 읽지 말거라.’

‘어떤 결단 말입니까?’

‘누굴 따르고, 누굴 지킬지에 대한 확실한 결단 말이다. 아비는 한심하게도, 그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만 끌다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그렇게 말한 선대 후작은 아들의 손을 꼭 잡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유언치고 모호한 말이었다. 필립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그 책을 석관에 넣어 아버지와 함께 땅에 묻었다.

그때 당시엔 아버지의 말대로 결단을 내릴 만한 능력도, 자신이 내린 결정을 감당할 만큼의 정신력 또한 없다는 매우 객관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니, 그것만큼은 철저하게 지키겠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그 책을 확인해 봐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늘 파베스가 후작저를 방문했을 때. 그리고 한나의 상태를 물어봤을 때, 온실을 둘러봤을 때. 그의 모든 표정들이 전과는 달라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미세한 표정과 행동의 변화가 눈에 보였으며, 가장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파베스 머리 위로 보이는 이상한 검은 것이었다.

‘저게 대체 뭐야?’

당황한 그는 티를 내지 않았으나 파베스가 있는 내내 신경 쓰였다.

머리 위로 보이는 그 검은 것은 연기라고 부르기엔 이상하게 점성이 있는 듯 보였다. 그것은 둥글게 몸을 말다가도, 파베스의 머리 위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거나 목덜미를 타고 어깨 쪽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이전에는 본 적 없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다가 떠오른 것이, 한나가 어렸을 때 꾸었다던 그녀의 악몽이었다.

‘연기처럼 반투명한 것이었는데, 연기와는 다르게 이상하게 꾸물꾸물 내 몸을 올라오려고 했어. 정말 징그러웠다니까. 필립 오빠는 내 말 믿어?’

‘응, 당연하죠! 나는 공주님이 하는 말은 다 믿어요!’

어린 한나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때는 당연히 믿는다 했지만, 사실 모두가 그랬듯 그 나이대 어린애들이 종종 꾸는 현실과 구분 불가능할 정도의 생생한 악몽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때의 한나가 묘사했던 것과 자신이 본 것이 퍽 비슷한 생김새 같았고. 그는 그때 아버지가 남긴 그 책을 떠올렸다.

내가 이 책을 열 준비가 되긴 했나?

유디티아 후작은 목에 걸고 다니던 열쇠를 꺼내 조용히 음각 부분을 만지작댔다.

‘내 어린 시절의 친구 필립이 아닌 유디티아 후작에게 물을게요. 내가 당신과 결혼하면, 당신은 날 지킬 수 있겠어요?’

‘뭐로부터 지킨다는 말씀이세요, 공주님?’

‘……내 오라비로부터요.’

그때도 그저, 오랜 첫사랑과의 결혼을 위해 그리하겠다 답했지만, 오늘에서야 그는 제대로 된 확답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묘지에 도착한 유디티아는 그대로 아버지의 석관이 있는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각하, 대체 여긴 왜요? 어, 어어! 각하! 석관을 왜 여시고 그러세요! 어어어! 각하!”

“보지만 말고 같이 좀 열어, 얼른.”

두꺼운 석관 문을 열자, 그 안에 작은 오크나무 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필립은 곧장 석관의 문을 열었다.

비서는 난데없이 아버지의 석관을 파헤치는 후작의 모습에 기겁하며 그를 말리다가, 체격에 밀려 뒤로 나동그라졌다.

“아니, 각하. 원로 귀족들이 알면 어쩌시려고요!”

“너랑 나만 조용히 하면 될 일인데 뭘 그러냐.”

필립은 이내 관 안에 보관된 두꺼운 책을 꺼냈다. 비서는 그것이 무엇이냐며 고개를 슬쩍 들이밀었다. 필립은 네가 볼 것이 아니라며 그를 슬쩍 밀어내고는, 자넨 다시 관이나 제대로 정리해둬. 하곤 마차로 돌아갔다.

필립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열쇠를 빼내 자물쇠에 넣었다. 열쇠는 꼭 맞았고, 자물쇠는 열렸다.

필립은 낡은 책장을 천천히 넘기며 내용들을 읽어 내려갔다.

아버지가 그토록 숨기려 했던 것.

하지만 결국엔 드러나게 될 진실이었다.

천천히 내용을 읽던 필립의 얼굴이 석고처럼 굳어지기 시작했다.

책 안에는 빼곡하게 글들이 써 있었다.

유디티아 후작 가문은 원래 왕실의 기록을 담당하던 직책을 가진 가문이었다. 선조 때부터 그 일을 해왔다고 했고, 지금 그는 ‘가정에 충실하라’는 국왕의 명령으로 강제 휴직에 들어간 상태였다.

선조 때부터 쓰여진 왕실과 귀족 회의의 이야기들. 모두 믿기 어려운 것 투성이였다. 어째서 이런 이야기들을 자신은 몰랐는가. 왜 아버지는 직접 말해주지 않으신 건가.

“각하, 안에 무엇이 써져 있길래 그리 인상을 찌푸리십니까?”

혼자 무거운 석관을 낑낑대며 닫고 온 것에 조금 서운한 티를 내던 그의 비서가 힐끔 책을 쳐다보자, 유디티아 후작이 얼른 책을 덮었다.

“귀족 회의를 열어야겠다.”

“예? 귀족 회의를요? 갑자기 귀족 회의는 왜요?”

“원로 귀족들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아야 한다. 아니, 그 전에 대공을 먼저 찾아가야겠다. 그가 이걸 알고 있을지…….”

평소 진중한 성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후작의 표정은 진지했다. 비서는 그럼 어디로 가야 하느냐 물었다. 후작저로 돌아가 귀족들을 소집할지, 아니면 대공 성으로 가야 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후작 부인이 있는 블레드 성으로 갈지.

잠시 고민하던 필립이 말했다.

“일단 블레드 성으로 가자. 한나를 거기서 데려와야겠다.”

***

너구리 영감의 말이 끝나자, 분위기는 조금 침울해졌다.

아스펠라는 혹시라도 칼리우스의 기분이 상했을까 그의 곁으로 가 가만히 털을 쓰다듬고 있었다. 짐승들은 너구리 영감에게 어서 더 말하라는 듯 주둥이로 툭툭 그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쳐댔다.

“왜 그래?”

너구리 영감이 이내 우물쭈물 말했다.

[사실, 몇 주 전에, 온통 철로 무장한 놈들이 북쪽 산에 온 적이 있어. 이상한 것은, 그렇게 중무장을 해서는, 그냥 마을 사람들만 데려갔다지 뭐냐. 저기 밑에 사는 화전민들 말이야.]

“화전민들을?”

그러자 참새가 푸드득 날아오더니, 자기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며 짹짹댔다.

[인간 남자들만 데려가더니, 며칠 뒤에 와서는 젊은 여자들도 데려갔어! 거긴 이제 노인이랑 애들밖에 없더라고.]

[그냥 일꾼으로 고용하거나 징집한 건가 싶었는데, 얘가, 얘가 지나가다가 봤대!]

그러자 이번엔 올빼미가 나와 아스펠라에게 자기가 또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며 부엉부엉, 울어댔다.

[그놈들, 밤에는 아무한테도 안 들킬 거라 생각하나 본데, 이 몸은 야행성이고 조류 중에서 밤에 나처럼 눈 밝은 이는 또 없을 거란 말이지. 어떤 커다란 우리 같은 것에 사람들이 가득 갇혀 있는데, 잘 보니까 저쪽 마을에 살던 인간들인 거야!]

그것들 말이야 모두 상태가 이상하더라고. 맨 처음에는 짐승인가 헷갈릴 정도였어. 부엉이는 자신이 목격한 것들을 말했다.

[걔넬 끌고 지하로 들어가서 그 이후부터는 모르지만. 인간이 아니었어. 분명 저기 저 마을에 살던 인간들이었거든? 근데 진짜 고약한 냄새를 풍기면서 눈도 풀려 있고, 몸은 썩어 들어가 있었어.]

부엉이는 아주 잠깐이었으나, 우리 안에 든 인간들을 목격했다. 그들은 튀니아 왕궁 어딘가에 갇혀 있을 거라 말하자 아스펠라와 칼리우스가 가만히 서로를 쳐다봤다.

서로 무슨 생각하는지는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파베스가 뭔가 실험을 하고 있는 듯하군.]

알만 했다. 아마 산신들의 힘을 인간에 옮기는 실험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자 부엉이가 고개를 내저으며, 아니야. 그런 것보다 더 부정한 실험이야. 짐승의 눈으로 가서 직접 보면 알게 될 거야.

더럽고 불쾌한 기운이 왕궁을 감싸고 있다니까. 뭐가 되었든 튀니아의 국왕은 매우 위험한 놈 같으니까 조심해. 가까이 가지 마. 왕궁 근처도 가지 말고, 국왕 근처에도 가지 마.

짐승들은 모두 아스펠라에게 그 근처에 지나가기만 해도 부정 탈 것 같다며 절대 그와 엮이지 말라 당부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튀니아 국왕은 루이나의 봉인을 풀 생각인 거야.”

[뭐?! 그런 미친놈이 다 있나!]

“그러니 자물쇠인 칼리우스와 날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어떤 식으로든 엮이게 되어 있어. 그러니 대비를 해야지. 국왕을 막고, 봉인이 열리지 못하게 하고, 죽지 않을 방법을.”

어쩌면 암담할지 모를 미래를 생각하니 또다시 분위기가 침울해졌을 때였다. 아스펠라가 흠칫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댔다.

이윽고 다른 짐승들은 물론 칼리우스까지 북쪽 산의 이상한 기류를 눈치 챈 듯했다.

[아스펠라! 저쪽 아래에서 불이 나고 있어!]

들짐승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와 아스펠라에게 보고했다.

[저쪽은 인간들이 사는 곳이야!]

그 말에 칼리우스는 아스펠라를 등에 태우고 훌쩍 달려 불이 난 곳으로 향했다. 칼리우스는 활활 타오르는 불씨들 사이에서 비릿한 철과 피의 냄새를 맡았다.

작은 마을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노인들과 어린아이들이 제대로 불을 피하지 못해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칼리우스는 두꺼운 털가죽과 꼬리로 붕붕 흔들어 낸 바람을 통해 불씨들을 막았다. 아스펠라는 미처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 노인들을 부축했고, 그들을 공터로 모았다.

아스펠라의 뒤를 따라온 너구리 영감과 다른 들짐승들은 얼른 강가에서 물을 길어다가 산 근처로 퍼진 불들을 끄기 위해 애썼다. 물론 그것 역시 칼리우스가 흙 밭에 구르듯 불붙은 곳에 드러누우니 얼마가지 않아 사그라들었다.

화전민들은 갑자기 나타난 아스펠라와 집채만 한 거대한 마수, 그리고 이들과 어울리지 않는 들짐승들의 모습에 당황한 듯 멍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봤다.

그때 한 아이가 칼리우스를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어, 포포다, 포포! 포포, 어디 갔었어!”

“포포가 아니다, 해리. 이리 오거라. 가지 마.”

“포포 맞다니까? 포포, 맞지!”

아이는 할아범의 손을 뿌리치고는 그대로 칼리우스에게 달려와 반가운 듯 그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포포 맞잖아! 검은 포포!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더니! 포포다, 포포야!

그중 제일 나이 들어 보이는 노파가 아이들의 부축을 받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스펠라를 보더니, 그녀의 손을 꼭 잡고는 감사하다며 인사했다.

“고맙소……. 아가씨 덕분이 아니었으면 모두 죽었을지 모르오…….”

노인의 말에 아스펠라가 마을 사람들을 둘러봤다. 노년에 접어든 이들 몇몇과 어린애와 갓난쟁이들뿐이었다. 너구리 영감이 아스펠라의 치맛자락을 툭툭 잡아당기며 아까 전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라는 듯 눈치를 줬다.

“어쩌다 불이 난 거예요?”

“그건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너희들 또 불 근처에서 놀았느냐?”

노인이 어린애들에게 묻자 아이들이 억울하다며 도리질 쳤다. 노인들은 집이 죄 타버렸는데 보수할 이들도 모두 끌려가버려 이를 어찌하냐, 하며 곡소리를 냈다.

그러자 칼리우스가 앞발로 아스펠라의 손을 톡 치며 말했다.

[아스펠라. 이들을 내 영지로 데려가야겠어.]

“걱정 마세요, 여러분. 당분간 머물 거처를 마련해 드릴게요. 저흰 에르윈 대공 각하의 사람입니다. 각하께서는 이재민들을 위해 매번 영지 일부를 내어주시니 마을이 복구될 때까지 그곳에서 머무르시면 될 거예요.”

그러자 노인들과 아이들이 다행이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자신들을 구해준 이들이 악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아이들은 슬금슬금 검은 마수와 들짐승 옆으로 와 신기한 듯 손가락으로 콕콕 찔러보거나, 털을 쓰다듬기도 했다.

아스펠라는 그중 검은 마수가 무섭지도 않은지, 익숙하게 그의 꼬리에 매달리는 어린아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있잖아. 아까 너 포포라고 했잖아. 포포도 검은 마수야?”

“웅. 요기 아야 한 앤데. 착한 애야. 포포랑 똑같이 생겼어.”

아이는 한쪽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포포 잘 도망갔으려나아. 착한 애였는데.”

선왕이 마수로 변한 뒤로 산에 기거한다는 것은 알았으나 이곳에서 사람들과 지냈을 줄은 몰랐다. 아스펠라는 몸을 낮춰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포포가 도망갔어? 어디로?”

“포포 동쪽 산으로 도망갔어. 무서운 아저씨들이 잡으러 왔거든.”

“무서운 아저씨들?”

“응! 엄청 무거워 보이는 갑옷이랑 무기를 들고 와서는 우리보고 포포 아냐고 물었어. 우린 모른다고 거짓말 했지. 포포 숨겨주려고 했거든.”

“포포를 왜 숨겨주려고 했는데?”

“응. 마을 이장님이- 그렇게 하래.”

아이는 천진하게 어, 얘는 요기가 안 아야 하네? 너도 포포 친구니? 하며 이내 칼리우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스펠라는 더 물어보려 했으나, 아이의 집중력은 그리 길지 못했다.

새벽이 다 되어가는 시간, 잠을 자다 뛰어나왔던 아이들은 졸린 듯 점점 꾸벅꾸벅 눈을 끔뻑이며 몸을 가누질 못했다. 노인들 역시 아까 전의 난리에 피곤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몇 안 되는 인원이기에 칼리우스가 동트기 전까지 두어 번 왕복하면 에르윈 대공 성에 모두 데려갈 수 있을 것이었다.

칼리우스는 잠시 주변을 살피다, 아스펠라에게 말했다.

[불 낸 놈들이 아직 주변에 있는 것 같아.]

그의 말에 아스펠라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너구리 영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영감은 귀를 쫑긋 기울였다. 이내 자신들에게 맡겨두라며 작은 앞발을 주먹 쥐듯 휘둘러보였다.

너구리와 다른 동물들은 작당 모의를 하는 것마냥 둥글게 모여 저들끼리 쑥덕이더니, 이내 수풀 안으로 들어갔다.

“해 뜨기 전에 얼른 갔다 와요. 저들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칼리우스는 아스펠라와 저 작은 짐승들이 과연 수풀 너머에 있는 왕궁의 병사들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까 걱정하는 듯했다.

“걱정말고요. 얼른.”

아스펠라는 칼리우스의 등에 어린애들과 노인 몇을 태웠다. 아직 남은 이들이 있었기에 칼리우스 역시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이제 동트는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이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시간 역시 짧아지니까.

이내 칼리우스가 다녀오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더니, 훌쩍 산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

버루카는 제 아들을 시켜 오밤중 북쪽 화전민의 마을로 가 불을 지르라 명했다.

“그치만, 아버지, 그곳은 에르윈 대공의 영지 쪽 아닙니까? 동쪽 끝부터, 북쪽까지는 에르윈 대공의 영지입니다. 대공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조사하게 되면 일이 조금 더 복잡해지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대로 불을 지르고, 그 사실이 에르윈 대공에게 알려지면 칼리우스는 무조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 들 것이었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모두 없고 어린애와 노인만 남은, 딱 의심 사기 좋은 마을이었다.

“게다가, 그곳에는 지금 노인이랑 어린애들뿐입니다. 만일 불을 제때 피하지 못하면요?”

“그러니 네가 가서 보고 있어야지. 전하께서 아무 이유 없이 그곳에 불을 지르라 하겠느냐.”

에르윈 대공의 사용인들은 영 매수하기 어려우니, 매수한 이들을 대공의 저택으로 접근시키려는 의도였다.

칼리우스 에르윈은 제 영지의 백성들을 아끼는 편이었고, 이재민이 발생하면 그들을 자신의 영지로 데려와 일을 시키고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이였다.

‘뭔가 눈치를 챈 거 같은데, 정확히 어떤 것을 알았는지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그러니 내 쪽에서 먼저 빵 쪼가리들을 흘려보는 거다. 까마귀가 부디 그걸 잘 주워 먹어줘야 할 텐데 말이야.’

버루카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보고 있던 아들 민튼이 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이게 맞는 일인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버루카가 아들을 쳐다봤다.

“그 말은 꼭 전하의 명을 받들지 못하겠다는 뜻 같구나.”

“아버지도 보셨잖습니까. 지하의 그 인간들, 그건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국왕 전하께서는 정확히 뭘 하시려는 겁니까? 단순히 막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 생체 실험을 하는 것입니까?”

버루카는 제 아들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손을 훽 내저었다.

“그건 네가 궁금해할 것이 아니다. 넌 국왕의 사람이야. 왕궁의 호위 기사다. 네가 할 일은 그저 왕을 호위하는 것뿐. 그 이상의 질문을 가질 자격은 없다.”

“아버지!”

“왕궁 안에선 날 그리 부르지 말라했다. 공과 사를 지키거라. 의구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입 밖에 내지 마라. 그것 또한 공과 사를 지키는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민튼은 아버지의 말에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그리하겠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그는 동료와 함께 북쪽 화전민 마을로 왔다.

왕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기에 그곳에 불을 지른 뒤, 혹여나 마을 사람들이 제대로 대피하지 못해 죽어버릴까 노심초사하며 근처 수풀에 몸을 숨겼다.

“이래도 되는 게 맞을까, 민튼?”

“왕의 명령이니 따라야지.”

“다들 대피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 다들 노인이고 어린애들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아까 전에 마을 이장한테 가서 미리 말해뒀으니까 알아서 하겠지.”

기사 하나는 푹 한숨을 내쉬며, 왕궁의 기사라길래 사람 지키는 일을 할 줄 알았다 생각했다며 푸념을 늘어놨다.

“이건 뭐, 괴물 같은 거 만드는 거나 보고 앉아 있고. 왕궁의 다른 이들은 아마 상상도 못할 거다. 지하에 그런 괴물들이 있다는 걸.”

“자네 아버님도 꽤 충격 받으신 것 같은데. 어찌 그런 것들을 보고도 전하는 웃으실 수 있는 거지?”

“우리랑 생각하는 것이 다르니까.”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일 수도 있지.”

그의 말에 민튼 올리오가 제 동료를 쳐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가 할 일은, 불을 지르고, 다음날 저들이 대공한테 인도되는 걸 확실히 본 뒤, 보좌관님께 보고하는 일이야. 사족은 달지 마라. 그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

“야, 무섭게 왜 그렇게 말해.”

“그러니까 조용히 있어. 저들이 대피하지 못하면 우리가 대피시켜야 하니까.”

둘은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시간을 죽였다. 왕궁의 호위 기사들이라 불리는 이들이 하는 짓 치고는 꽤나 멋없었다.

웅성대는 소리와 함께 불이 타오르고 가축들이 울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초가집에 붙었던 불들이, 초겨울 바람에 불씨가 날려 나무에 옮겨 붙었다.

어째 일이 점점 커지는 듯하여 당황하는 순간, 거대한 그림자 같은 무언가가 훌쩍 하늘을 가르며 날아와 바닥에 착지했다.

그것이 꼬리를 흔들고 몸을 바닥에 비비자, 강력한 바람이 인 것인지 불씨들이 사라졌고 수풀 위로 타오르던 불도 사라졌다.

예상치 못한 마수의 등장에 기사들은 당황했다.

“저, 저거. 저거 선왕이신가?”

“아니야. 조금 더 몸집이 작잖아.”

“구분이 돼? 저렇게 시커먼 것이? 어째야 하지? 저런 게 올 거라는 말은 없었는데.”

그들은 일단 몸을 숨기고, 상황을 지켜보자는 것으로 결론 냈다. 무턱대고 저 거대한 마수에게 적의를 보였다간 자신들은 죽음 목숨일 듯했다.

민튼 올리오는 보조관과 국왕이 대화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검은 마수가 한 마리 더 있을 거라고요? 그 말인즉슨―’

‘그래. 내 아버지처럼 신의 은혜를 입은 존재가 또 있다는 거지. 그런 게 날뛰면 곤란해. 사로잡아 내 수중에 둬야 나중에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다.’

국왕은 검은 마수의 존재를 매우 꺼려했다.

‘신의 은혜를 입은 존재’라 칭하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비아냥이었다. 파베스는 이성을 잃고 짐승이 되어 날뛰는 존재가 된다 해도,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다면 개의치 않는 듯했다. 또한 어떻게든 저 거대한 마수로 변하는 힘을 손에 넣기 위해 갖은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니 제 아비인데도 쇠사슬로 묶고 고문을 일삼는 패륜을 하는 것이겠지.

천하의 국왕 전하께서 질투와 시기로 미쳐버릴 만큼 부러워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 짐승으로 변한다는 검은 마수였다.

“저 여자는 뭐지? 검은 마수랑 같이 다니나 봐.”

“일단 오늘은 여기서 철수하고, 국왕께 이에 대해 보고하자.”

검은 마수와, 그 옆의 여자애. 이 둘의 존재가 심상치 않으니 국왕 전하께서도 이에 더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들은 숨죽인 채로 몰래 몸을 일으켰다. 혹여나 낙엽을 밟아 소리라도 날까 천천히 조심조심 걷는데, 무언가가 물컹한 것이 발에 밟혔다.

‘왜 바닥이 물컹하지?’

하며 무의식적으로 아래를 내려다 본 기사가 이내 새파랗게 질려 뒤로 나자빠졌다.

“배, 배, 배배배, 뱀! 난 파충류에 약하다고!”

어디서 기어 나온 것인지, 거대한 구렁이들이 그들의 발목을 죄어오는 것 아니겠는가.

나자빠진 기사의 목으로 기어 올라오며, 그들은 마치 거대한 생쥐를 잡아먹으려는 듯 천천히 그를 옥죄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민튼이 검을 빼들어 뱀들을 쳐내려 할 때였다.

“으아악!”

거대한 나뭇가지들은 마치 자아가 있는 것마냥 가지를 움직여 그의 검을 움켜잡아 빼앗았다.

나무가 살아 움직이다니.

그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약에 취해 환시를 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더랬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엔 너구리가 다가와 그들 머리에 보자기를 씌웠다. 뱀들은 마치 밧줄이라도 되는 양 몸을 꽉 옥죄었고 사슴은 그들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다.

그들은 민튼과 그의 동료를 이끌었다. 이내 어딘가에 도착한 듯 짐승들이 멈췄다.

“거꾸로 매달자. 거꾸로 매다는 게 제일 효과적이래.”

한 여자의 말에 민튼 일행의 몸이 거꾸로 들어 올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자기가 벗겨졌다.

“보자기까지 씌울 필요는 없다니까, 영감.”

[그냥 한 번 해보고 싶었어.]

웬 미친 여자가, 끼륵 끼륵 울어대는 너구리와 대화라도 하는 양 말하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냐!”

“그건 내가 물어야 하는 거죠. 당신들이 저 마을에 불 질렀죠? 왜 지른 거죠? 누가 사주했어요?”

“불이라니. 우리와는 무관한 일이오.”

그러자 나뭇가지들이 회초리 마냥 그들의 엉덩이와 종아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따갑고 아픈지, 다른 기사 하나가 곡소리를 냈다.

웃긴 꼴이었다. 차라리 그들에게 무기라도 쥐어졌다면 이런 꼴을 당하고 있진 않을 텐데.

민튼은 고개를 들어 자신들의 처지를 살폈다.

“무슨 약을 쓴 것이냐!”

저와 동료를 거꾸로 매달아 회초리질 하는 것이 나무라니. 믿겨지는가?

나무가 사람마냥 줄기를 휘둘러 사람을 때린다니. 이게 말이 되냔 말이다.

[이것들아, 니들이 어디서 왔는지 다 알고 있다, 이놈들아! 좋은 말 할 때 고하지 못해?! 더 회초리질을 해야 정신을 차리겠구만! 구렁이야, 가서 혼쭐내 주거라.]

너구리 영감이 호통쳤지만, 기사들에게는 그저 짐승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까 전의 구렁이들이 나뭇가지를 타고 기어올라가더니, 이내 기사들의 몸 위로 꾸물꾸물 대며 그들의 갑옷 사이로 들어갔다.

차가운 맨몸에 닿는 뱀의 감촉과 그 움직임이라니.

어지간해선 비명 지르지 않는 민튼도 흐억!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옷 안에서 고개를 쳐든 뱀이, 뾰족한 송곳니를 보이며 캬악,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걘 독이 있어요. 물리면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온몸이 마비될 거예요. 숨도 못 쉰 채로 죽을 걸요?”

아스펠라가 태연하게 말했다.

아까 전 뱀에 질색하던 기사 하나는 이미 거품 물고 기절한 지 오래였다.

“그분 좀 깨워줄래?”

아스펠라가 기절한 이를 보며 말하자, 나뭇가지가 그의 뺨을 툭툭 쳤다.

거품 물고 기절했던 이는 몇 번 뺨을 맞자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껌뻑이다가 아까 전과 별반 다를 거 없는 상황에 울부짖었다.

“제발! 난 뱀은 질색이야. 싫어, 싫다고! 차라리 손톱을 뽑고 발가락을 잘라!”

나무가 쉴 새 없이 매질을 하고, 뱀이 혀를 날름대니 그는 아주 죽을 노릇이었다. 그렇다 하여 쉽게 저의 임무를 발설했다면 왕궁에서 일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민튼은 여전히, 이 모든 것들이 환시라 생각한 듯 입안의 볼 살을 아작아작 깨물며 환시에서 벗어나려 했다.

“환시가 아니라니까요.”

아스펠라는 답답한 듯 그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그 앞으로 다가와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피를 소매로 툭툭 닦아주며 친절하게 말했다.

“사실, 당신들이 누구의 사주를 받고 있는지는 다 알고 있어요. 국왕이죠?”

너무나도 쉽게 말하는 아스펠라의 모습에, 민튼이 당황하여 눈을 끔뻑였다.

“그럼 왜 우릴…….”

“그거야, 벌은 받아야죠. 죄 없는 화전민들을 데려간 걸로도 모자라, 터전까지 빼앗아서야 되겠어요? 당신들 때문에 만일 북쪽 산까지 타버렸다면 수많은 생명들이 죽는 거라고요.”

“…….”

“산 하나에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사는 줄 알아요? 금방 꺼져서 다행이었지. 어떻게 불 지를 생각을 해요? 동식물들은 통각이 없는 줄 알아요? 나무랑 풀도 다 느낀다고요. 인간들이 못 들을 뿐이지, 비명도 지른다고요.”

민튼은 여전히 거꾸로 매달린 상태로 아스펠라를 봐야 했다.

미친 여자가 맞는 건가?

“우릴 죽일 거요?”

“음, 아뇨. 전 생명은 웬만해선 죽이지 않아요. 다만, 칼리우스가 올 때까지는 이러고 있어야겠어요.”

“칼리우스? 칼리우스 에르윈? 당신 대공의 사람인가?”

아스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튼은 자신이 살아서 돌아가지는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보좌관과 국왕의 예상대로 대공은 뭔가를 눈치챘고, 오히려 한발 앞서나갔으니 지금 자신들이 이 꼴 난 것이 아니겠는가.

저쪽은 아예 포기한 듯 멍한 얼굴로, 살려줘, 집에 갈래, 죄송해요, 같은 말만 남발하는 걸로 보아 이미 넋이 나간 듯했다.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볼까 싶어 몸에 힘을 줘 팔과 다리를 감싼 나뭇가지들로부터 벗어나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그때 거대한 몸체를 가진 검은 마수가 땅 위로 착지했다. 마수는 거꾸로 매달린 그들을 보자 바로 사납게 이를 보이며 그르륵 댔다.

‘젠장, 잡아먹히는 건가.’

민튼은 왕궁의 기사로서, 보좌관 가문의 장남으로서 제대로 된 업적 하나 세우지 못하고 마을에 불 지르러 왔다가 개밥으로 끝나는 인생이 덧없다 느껴졌다.

눈을 질끈 감고 몸이 씹히는 고통을 감내하려 이를 악물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어째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슬쩍 눈을 뜨자 바로 앞에 있던 붉은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헉!”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두려움과, 마치 제 속내를 모두 꿰뚫린 듯한 기분에 민튼이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뒤로 뺀 검은 마수가 여자에게 갔다. 여자는 그와 대화라도 하는 양 조용히 눈을 마주쳤다.

“민튼? 보좌관의 아들이라고요? 저 사람이요?”

자신의 정체까지 알아낸 여자의 모습에 민튼이 다시 한번 몸을 꿈틀대며 반항했다. 그래봤자 돌아오는 것은 알 수 없는 너구리의 울음소리와, 그에 맞춰 회초리처럼 움직이는 나뭇가지였다.

‘젠장,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꼴이야!’

민튼은 이 나이 먹고도 엉덩이를 맞는 수치와 분노, 그리고 맡은 임무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낙심까지, 심적으로 힘이 들었다. 차라리 아까 전 동료의 말대로 손톱이나 발을 들어냈으면 이 악물고 참아냈을 것이다.

이내 칼리우스와 조용히 눈빛을 맞추던 아스펠라가 알겠어요, 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민튼에게 다가왔다.

“대공이 당신에게 물어볼 것이 있으니, 같이 가야겠어요. 지금 풀어줄 건데, 반항해봤자 아무 소용없을 거예요. 당신이 도망친다 해도 이곳엔 수많은 나무들이 있으니까요.”

괜히 도망쳤다가 아까 전처럼 회초리 맞지 말고 평화롭게 대공 저택으로 가지 않겠냐는 아스펠라의 말에 민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얘들아. 내려줘.”

그러자 민튼과 그의 동료의 발목과 다리를 옥죄던 나뭇가지들이 스르륵 움직이며 그들을 바닥에 떨궜다. 그러나 여전히 뱀들은 그들의 목덜미에서 언제든 공격하려는 의지를 보이며 혀를 날름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환시에, 정말 여자의 말대로 이게 현실인지 혼란스러워진 민튼이 물었다.

“이건 무슨 능력인 거지? 환시가 아니라면 어떻게 나무들이나 동물들을 조종하는 건가?”

그의 말에 아스펠라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

“조종하다니요. 전 조종 같은 거 안 해요. 굳이 능력이 뭐냐고 묻는 거면 이들과 대화할 수 있다는 정도겠죠.”

“조종을 안 하는데 어떻게 움직이는 거요?”

“원래 다 움직일 수 있어요. 다른 인간들은 그들이 움직이지 못한다, 말하지 못한다 생각하니까 못 보는 거고요.”

보려고 하질 않는데, 어떻게 보겠어요.

아스펠라의 대답에 민튼은 괜히 주변의 나무들을 둘러봤다. 아까 전 신나게 제 엉덩이를 때리던 나무들이 마치 그의 시선에 반응이라도 하듯 슬그머니 나무줄기를 들어 올렸고, 민튼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댔다.

“그럼 대공가로 가죠.”

아스펠라가 칼리우스의 등에 올라타며, 민튼과 실신한 동료에게 제 뒤에 타라고 손을 내밀었다. 민튼이 아스펠라의 손을 잡으려 뻗는 순간, 칼리우스가 그대로 그와 동료를 입에 물었다.

기절했던 동료는, 자신의 몸이 내려오는 느낌에 슬그머니 정신을 차렸다가 자신이 거대한 마수에게 물려 있다는 것을 확인하곤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먹, 먹힌다!”

“인간은 맛없어서 안 먹어요! 걱정 마요!”

아스펠라가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이내 칼리우스가 다시 산을 넘기 위해 발돋움을 했다. 거대한 몸집이 힘을 줘 땅을 박차니 하늘 높이 올라갔다.

“흐아아악! 떠, 떨어진다!”

“제발 입 좀 다물어. 자네 정말 어떻게 왕실 기사가 된 건가!”

“미, 민튼, 난 고소공포증이 있단 말이야!”

마수의 주둥이에 몸이 반쯤 물린 채로 제 몸이 하늘 높이 올라갔다.

“절대 안 떨어뜨리니까 걱정 마요! 떨어뜨려도 금방 주울 수 있어요!”

이 여자는 친절한 건지, 아니면 눈치가 없는 건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민튼은 지금 이 모든 상황들 중 어느 것 하나 정상적이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에르윈 대공 성에 끌려가게 되면, 갖은 고문을 받게 되는 걸까. 민튼은 눈을 질끈 감고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듯 천천히 숨을 골랐다.

‘만약, 에르윈 대공이 전하의 계획을 눈치챈 거라면, 전하께서 하시는 일을 막으려 하는 건가?’

민튼은 여전히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왕은 자신이 모시는 분이었고, 주인의 명령이니 여태껏 의심 없이 일을 해왔으나, 이제는 잘 모르겠다.

왕권을 견고히 하고 막강한 군사를 만들어 나라를 지키고 싶다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어째 그의 명령들을 수행할수록, 왕이 원하는 것은 단지 나라를 지킬 힘이 아닌 모든 것을 손에 거머쥘 힘인 것처럼 느껴졌다.

둘 다 강력한 힘인 것은 분명하나 추구하는 방향은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특히나, 화전민들을 상대로 한 실험을, 그 결과를 바라보는 국왕의 눈빛엔 대의고 뭐고 없이 오로지 광기와 집착만이 남아 있었다.

‘오히려, 내가 이렇게 잡힌 것이 잘된 일인 건가.’

그런 생각이 들던 차에, 그의 몸이 땅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퉤, 하고 민튼과 동료를 뱉어 낸 칼리우스는 아스펠라가 내려오기 편하도록 몸을 낮췄다.

멀리서 펠킨과 병사들이 뛰어왔다.

“아, 아니! 자네는 민튼 경 아니오?”

아직 술이 덜 깬 것인지, 얼굴이 새빨간 펠킨이 당황한 듯 물었다. 아니 경이 산에 불을 질렀단 말입니까? 왜요? 왜 그런 짓을 한 겁니까?

펠킨의 질문에 민튼은 어째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할 말이 없어 고개 돌린 채로 침묵하자, 병사들이 다가와 그와 다른 기사를 포박하곤 눈을 가린 채 어디론가 끌고 갔다.

그들은 대공 성의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공허한 바람이 마치 유령마냥 그들 사이를 지나갔다. 어쩐지 으스스한 분위기와, 새벽 직전 아래로 떨어진 기온에 그들은 몸이 묶인 상태로 덜덜 떨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내 철창문이 열리더니 몸에 무엇인가 덮어졌다.

“칼리우스가 직접 심문하기 전까지는 잠시 이곳에서 지내야 해요. 추우면 이불은 더 가져다 줄 테고, 음식은 넉넉하게 줄 거예요.”

아스펠라는 민튼과 다른 기사에게 이불을 넉넉하게 둘러주며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벗겨주었다. 그런 뒤 그들을 묶고 있던 밧줄을 풀고 식판을 쥐어주었다.

보통 포로를 대할 때 이런 친절을 베풀지는 않는지라, 민튼은 가만히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이상한 여자였다. 귀족 영애는 아닌 듯한데, 대공 성의 병사들이나 보좌관도 그녀를 따르는 것 같고, 결정적으로 그 에르윈 대공의 이름을 막 불러댄다.

게다가 동물들과 대화를 하는 듯 보이고, 검은 마수와 같이 다니며, 아까 전엔 말도 안 되는 신묘한 힘으로 순식간에 훈련받은 기사 둘을 제압했다.

마녀인가 싶다가도, 원래 마녀란 존재가 이렇게 친절을 베풀기도 하나? 의심이 들었다. 혹은 어떠한 식으로 자신을 홀려 내려 하는 것인지. 민튼은 의심의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봤다.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혹, 아까 맞은 엉덩이가 많이 아프신가요?”

친절한 것인지, 아니면 사람 골리기에 아주 탁월한 능력을 가진 것인지. 아스펠라는 어디 엉덩이가 아픈 것이냐며, 병사들을 불러다가 이분의 엉덩이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철창 안으로 들어왔다. 이러다간 외간 여자와 남정네들 앞에서 정말 엉덩이라도 까 보일 것 같아 민튼이 수치스러운 듯 씩씩대며 소리쳤다.

“어, 엉덩이가 아픈 것이 아니오!”

“그럼요?”

“당신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소. 마, 마녀인지, 아니면 사람인지.”

자신이 미치거나 환시를 본 것이 아니라면, 이 여인은 결코 평범한 인간이 아닐 것이다.

“그런 게 뭐 중요한가요. 어차피 이곳에서 나가지도 못하실 마당에.”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궁금했다는 말이오. 절대 엉덩이가 아파서 그리 쳐다본 것이 아니라.”

“좋으실 대로 생각하세요. 마녀든 인간이든. 전 그냥 아스펠라거든요.”

그렇게 말한 아스펠라는, 엉덩이는 안 아프신 듯하니 따로 의원을 들이거나 하지는 않을게요, 하고 생긋 웃고는 밖으로 나갔다.

민튼은 아스펠라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며 억울한 듯 씨이, 볼멘소리를 내었다. 옆에 가만히 누워 있던 동료가 슬그머니 다가와 말했다.

“저 여자, 마녀 맞지?”

“몰라, 나도.”

“역시 에르윈 대공이로군. 검은 마수부터 마녀까지……. 국왕 전하께서도 꽤 고전하시겠는 걸?”

뱀이 무섭다며 울다 기절하다를 반복하던 이가 이제 와서 냉철한 척 말하는 것이 고깝긴 했으나, 그의 말대로 칼리우스 에르윈은 생각보다 강한 무기들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에르윈 대공이, 전하와 척을 지려는 거라면…….’

민튼은 고민하는 듯했다. 어쩌면 정말 에르윈 대공이라면, 국왕을 저지할 수 있지 않을까? 국왕이 만들고 있는 그 끔찍한 이들과 맞설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온갖 고심을 하고 있는 민튼과는 반대로 그의 동료는 이불을 몸에 돌돌 말며 편히 드러누웠다. 그 모습을 본 민튼이 물었다.

“자네는 걱정도 되지 않는 건가?”

“걱정하고 자시고, 아까 그 여자의 말처럼 우린 이미 여기서 나가지도 못하는 것 아닌가. 에르윈 대공이 물어보면 아는 것을 답하고, 모르면 모른다 답하고. 그뿐이지.”

“국왕 전하의 명들은 모두 극비다.”

“난 말야. 아까 전에 펠킨 경이 우리한테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물었을 때 창피해서 답을 할 수가 없었어. 그리고 바로 깨달았지. 내가 지금 떳떳치 못한 일을 하는구나.”

이러려고 왕실 호위 기사 된 것은 아니라며, 그는 자신을 변절자라 욕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한 그는 이내 민튼의 이불도 슬그머니 제 쪽으로 가져갔다.

민튼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창살 너머 보이는 대공 성을 바라보다, 이내 제 동료한테서 제 이불을 도로 뺏어왔다.

***

아스펠라는 이들이 무슨 교화가 필요한 수감자들이라도 되는 양, 하루의 일정 시간 동안은 산책할 기회를 주거나, 책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왕궁의 기사라는 것은 단순히 검만 잘 다룬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손가락이 잘리고, 발톱이 들려도 이 악물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이들이 산책 좀 시켜준다고 감사히 여기며 다 불겠습니까?”

펠킨은 파베스의 수족이니,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며 반대하고 나섰지만 어째서인지 아스펠라는 그들이 도망가지 않을 것을 믿었다. 더 나아가 입을 열 것이라며 확신하고 있었다.

민튼은 산책하던 도중 정원 손질을 하고 있는 화전민들과 마주쳤다.

사실 그 누구도 이들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으나 그들 모두 고마운 마음에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었다. 그들은 정원 손질을 하다 말고 왕궁의 갑옷을 입은 민튼과 다른 기사 한 명을 쳐다봤다.

설마 자신들의 터전에 불을 질렀다고 따질 셈인가. 그런 수치를 주기 위해 일부러 산책을 시키는 것인가 생각하던 찰나 한 노인이 다가왔다.

“여쭙고 싶었는데, 이제야 만나 뵙게 되는군요. 왕궁에서 나오신 분 맞으시죠?”

“…….”

“제 아들이 마지막으로 갔는데, 아들놈은 쓸 만하십니까? 천하게 태어나 못 가르친 것이 많은지라, 높으신 분들께 실수하지는 않았을까 걱정입니다. 마을 이장님은 잘 지낼 거다, 말만 하시는데 아무래도 어미 마음은 다 큰 애나 작은 애나 뭍에 내놓은 마음은 같은지라.”

노인은 자신들이 이곳에 포로로서 잡혀온 것을 모르는 듯했다. 마을에 불을 낸 장본인이라는 것도.

그러니 더더욱 마을의 젊은이들, 제 새끼들이 어찌되었는지 모를 것이다.

그들은 모두 주름진 얼굴을 하고서 손을 연신 가슴께에 기도하듯 잡곤 민튼과 그 옆의 기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산신들이 사라지고 몇몇 산들이 부정을 타기 시작하면서 화전민들의 겨울나기는 이전보다 훨씬 혹독해졌다.

칼리우스는 자신의 영지에 있던 이들에게 구휼 차원에서 밀이나 빵, 혹은 말린 고기를 주었지만, 그것들 중 일부가 도중에 국왕에 의해 빼돌려지는 것은 차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북쪽 산의 화전민들은 사실 대다수가 다른 영주에게서 도망친 이들로 이뤄진 무리였기에 직접 찾아가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으며, 아무리 칼리우스라 한들 거대한 영지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매년 겨울, 구휼에 의존하던 화전민들은 식량이 오지 않자 불안에 떨었고, 이에 국왕은 선심 쓰듯 이들에게 조금의 식량을 준 뒤 마을에서 일정량의 체력이 되는 이들을 죄다 데려간 것이었다.

마을의 그 누구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왕이니까. 국왕이니까. 이 나라의 군주이자 자신들의 왕이었으니까.

자비로운 국왕께서 자식들을 어여삐 여기어 데려갔다는 그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이들을 보며, 민튼은 목이 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혹여 무례를 저지르더라도, 넓은 아량으로 기사 나리께서 봐주십시오. 먹고 살기 급급하여 예의범절이니 뭐니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이 어미 탓입니다.”

사내들은 병사로, 여인들은 시녀로. 그쯤이면 대단한 출세라고 다들 기뻐하는 얼굴이었는데 민튼은 거기다 대고 댁들 자식들은 모두 사람 거죽만 뒤집어 쓴 괴물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민튼은 가만히 정원 한켠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던 아스펠라와 눈이 마주쳤다.

이내 그녀가 다가와 왕궁의 기사분이시니, 넓은 아량을 베푸실 거라며 노인들을 데리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민튼은 그 자리에 오래도록 가만히 서 있었다.

얼쯤하게 서 있던 그의 동료가 민튼의 어깨를 툭 잡았다.

“산책 시간이 끝났다고 돌아오라는군. ……민튼?”

“…….”

민튼은 이내 천천히 발걸음을 돌려 감옥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접 음식을 들고 온 아스펠라가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식사 시간이에요.”

아스펠라가 식판을 내려놓자, 다른 동료는 군말 없이 빵에 잼을 묻혀 샐러드와 함께 입에 쑤셔 넣었으나 민튼은 그러지 않았다.

“입맛이 없으세요?”

생글생글 웃으며 물어보는 아스펠라를, 오히려 야속한 눈으로 노려보며 그가 물었다.

“일부러 이러시는 겁니까?”

“무엇을요?”

“화전민들이랑 일부러 마주치게 하는 것이요. 산책이니 뭐니, 저희가 교화가 필요한 흉악범도 아닌데 웃기는 행동만 하고 있잖습니까.”

웃긴 꼴. 민튼이 말하길 그것을 웃긴 꼴이라 했다. 아스펠라는 잠시 그를 내려다 보다 식판을 내려놓곤, 허리를 낮춰 그와 눈을 마주쳤다.

“흉악범이 아니라고요?”

항상 웃고 있던 아스펠라의 얼굴에 조소가 담겨있었다.

“당신들이 가담한 짓이 흉악한 일이 아니라면, 왜 그분들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하시는 건데요? 설마, 제가 진짜로 왕궁에서 그 사람들을 징용해갔다는 걸 믿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죠?”

“…….”

“당신들은 흉악하기 그지없는 분들이 맞답니다. 그리고 일부러 그런 것 맞아요. 사람이라면, 양심이라는 것이 있는 인간이라면 조금은 죄책감을 받았으면 해서요.”

그것을 그저 웃기는 행동이라고만 치부하다니 자신의 뜻이 온전히 전해지지 못해 유감이라며, 아스펠라는 눈썹을 아래로 죽 내렸다.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 안에 경멸과 비난의 표정이 모두 담겨져 있었다.

이내 아스펠라가 몸을 일으켜 그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감옥을 나가버렸다.

민튼은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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