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7장. 잊힌 그날의 일(2) (8/16)

목차

7장. 잊힌 그날의 일(2)

8장. 적의 움직임

9장. 목 안에 박힌(1)

7장. 잊힌 그날의 일(2)

아스펠라는 이상한 꿈을 꿨다.

어린 아이의 몸에 들어간 그녀는 무언가로부터 계속 도망쳤다. 뒤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운 것이 쫓아오지만, 안간힘을 써 내달려도 그림자가 그녀의 다리를 잡고 놔주지 않았다.

긴박했다. 빨리 도망쳐야 하는데 무거운 다리가 좀체 움직이지 않았다.

겨우 몇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손톱만 한 빛이 일더니 이내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해졌다. 어두운 수풀이과 찐득한 진흙바닥도 대리석으로 바뀌었다.

아스펠라는 가만히 제 드레스자락을 쥐었다.

‘넌 뭐야?’

황당한 표정 반, 신기한 표정 반으로 누군가 물었다. 어린 소년의 목소리였다. 이내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그가 한번 더 물었다. 아스펠라는 뭐라 답해야할지 몰라 가만히 침묵했다.

‘여기 시종의 자식이야?’

이내 흙투성이인 아스펠라에게 다가온 목소리의 주인공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실로 이상한 꿈이었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그가 그리 행동하는 것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아스펠라는 누군가에게 쫓긴다고 설명했다. 나쁜 어른이 날 죽이려고 한다고.

그 말을 들은 소년이 말했다.

‘이리 와. 여기에 숨으면 못 찾을 거야.’

‘정말? 정말로?’

소년은 아스펠라의 손을 잡고 문을 열었다.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쫓아오는 것이 보인다. 소년과 아스펠라는 이번엔 같이 도망쳤다.

꿈속임이 분명한데도, 그걸 자각하고 있음에도 아스펠라는 너무 두려웠다.

둘은 좁은 어딘가로 들어갔다.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겁에 질린 아스펠라는 혹여나 숨소리라도 새어 나갈까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 작은 손길이 아스펠라의 등을 토닥였다.

아주 잠깐, 안도감이 들었으나―

‘잡았다, 이 쥐새끼 같은 것!’

―이내 잡히고 말았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버둥거리는 그의 몸집. 거대한 손은 아스펠라를 껴안고 있던 소년의 멱살을 쥐어 올렸다.

아스펠라는 엉엉 울어댔다.

‘도망가!’

소년의 말에 아스펠라는 다시 달리려 했으나 이내 실패했다.

‘꺄아아악!’

소년은 바닥에 내팽개쳐져 피를 흘렸으며, 아스펠라의 몸은 공중으로 붕 떴다.

‘너 때문에 저 애까지 죽었잖아. 젠장!’

그 이후부터는 어떻게 되었더라?

아스펠라는 어디론가 끌려갔고. 거대한 손에 들린 날붙이가 번뜩였다. 이내 고통이 몸을 장악했다.

“흡……!”

아스펠라는 급히 숨을 들이마시며, 천천히 눈을 떴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녀는 가만히 제 심장 부근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이맘때쯤엔 항상 이런 꿈을 꾼다. 그러나 이게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는 것을 아스펠라는 알고 있다.

이건 기억의 조각인 것이다. 비르가가 완벽하게 지우지 못한, 아스펠라의 죽음 이전의 기억들.

“약방 영감님을 찾아 봬야 되는데…….”

이런 꿈을 꾸기 시작하는 것은 이제 아스펠라의 몸이 심하게 앓기 전이라는 걸 경고하는 것과도 같았다.

아스펠라는 천천히 머리를 정리하고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의 시녀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시녀의 모습에 아스펠라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당신은…….”

아스펠라를 보자 깍듯이 인사를 한 이는 다름 아닌, 시녀장이었던 헬렌이었다.

“블레드 성의 시녀장 헬렌입니다.”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헬렌의 모습에 아스펠라 역시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히스테릭해 보였던 첫인상 그대로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운 진녹색의 드레스에는 어떠한 장식도 없었다.

아스펠라는 일전에 그녀에게 그리 좋지 않은 오해를 받은 적이 있었기에 저도 모르게 긴장한 듯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런 아스펠라를 바라본 헬렌이 이내 가져온 세숫대야와 타월을 협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일전의 일은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제 무지로 인해 아가씨께 실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일전에 사과 받았으니, 더 이상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고, 그때의 상황이었다면 제 정체를 오해하실 만도 했겠죠.”

난데없이 나타난 누더기의 여자가 대공의 에스코트를 받는다니.

아스펠라는 차후 앨리스에게 시녀장이 왜 그런 오해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귀족 남자들 중에서는 간혹 길에서 여자를 데려와, 처지를 딱하게 여기며 첩으로 데리고 있는 것이 유행 아닌 유행이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남녀를 바꾸어서도 자주 있는 일이라 했다.

남편을 잃고 돈 많은 과부가 된 백작 부인은 매일 하렘가로 가 잘생긴 청년들을 물색한다고. 마치 악세사리 모으듯 하나둘 모으기 시작해 저택 안에 하렘을 만들기까지 했다고.

구원자 행세를 하며 시혜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이 튀니아 귀족들 사이에서는 꼭 소설 속 사랑이야기 같아 좋아한다는 말까지.

아스펠라는 이제 그때의 헬렌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는 한다며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헬렌이 처음으로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뇨. 제 잘못이 맞으며 그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히 사과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때 제 행동은 거의 화풀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화풀이요?”

“네. 아가씨께서 오시기 전에, 각하의 약혼 문제가 있었거든요.”

헬렌은 시녀장이긴 했으나, 사실 원래 칼리우스의 유모나 다름없는 이였다.

그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헬렌은 이곳의 시녀장으로 지내왔고, 부모와 형제를 모두 잃은 칼리우스가 이곳의 주인이 되도록 잘 보필한 것 역시 그녀였다.

어린 펠킨이 비서 노릇을 할 수 있도록 키운 것 역시 그녀와 지금은 죽고 없는 선대 가주의 비서였다.

비서가 죽고 난 뒤로 칼리우스는 헬렌에게 조금 더 많은 권력을 주었다. 일개 시녀장이 어찌 그럴 수 있느냐 하지만, 헬렌은 그랬다. 그리하여 헬렌이 뭔 짓을 해도 칼리우스는 웬만해선 넘어가는 편이었다.

“약혼 문제요?”

“예.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후작 영애와의 혼담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시고, 그 뒤에 아가씨를 데려오셨거든요.”

그렇게 말한 헬렌이 이내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털어 놓았다.

“각하께 말씀 들었습니다. 아가씨께서는 저주에 대해 알고 있으시다고요.”

“네.”

“전…… 참으로 주제넘게도, 그저 각하께서 그 영애와의 혼담을 이어가셨으면 했습니다. 사실 이건 저뿐만 아니라 원로 귀족들도 그리 생각했습니다.”

헬렌은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헬렌뿐만 아니라 그녀 나이대와 비슷한 에르윈 가문의 원로 귀족들과 친인척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귀족은 귀족과 결혼해야만 한다고, 그 귀한 피를 이어가야 한다고.

억지로 하는 약혼도 아니었으며, 억지로 약혼 시킨다고 곧이곧대로 할 칼리우스의 성정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엔 칼리우스 역시 그 영애와 약혼하겠다 말한 데다가 이전에 만났던 영애들과는 달리 그 사이가 매우 각별했다.

이미 가문의 원로들끼리 얘기까지 끝마치고, 약혼식을 발표한 몇 달 후에는 곧장 결혼까지 올리려 했을 정도로 진전된 일이었다.

원래 귀족들의 결혼이라는 것은 단순한 사랑이나 연애를 위해서가 아닌 외부적인 면이 더 크지 않던가. 그러니 칼리우스가 약혼을 파기하겠다 했을 때의 상황은 모두에게 있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그가 주기적으로 검은 마수로 변하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는 에르윈 대공 가문의 핏줄을 이어야 할 책임이 있었으니까.

“사실 저택의 사용인들은 각하가 검은 마수로 변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원로 귀족들은 모릅니다. 그들은 본심으로는 에르윈 대공 가문을 언제든 내리 누르려 하는 이들인지라 들켰다가는 골치만 아파질 테니까요.”

칼리우스는 저주에 걸린 이후, 그 증세가 심각해질 때마다 약혼을 파기해야 한다 말했다.

물론, 헬렌은 이기적이게도 그냥 결혼을 해야 한다, 가문을 이을 후계자는 있어야 할 것 아니냐, 말했지만 그는 좀처럼 설득당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때는 그런 시기에 아스펠라를 데려온 것으로 보아, 일부러 혼담을 파기한 뒤 하렘가에서 아무 여자나 데려와 구색을 맞추려는 줄 알았다고 했다.

변변찮은 가문조차 없는 여자라면 비밀을 알게 된다 한들 제 발로 하렘가로 돌아가진 않거나, 후에 입을 막아야 할 때도 귀족 영애보다는 덜 위험할 거라는 생각으로 데려온 건가 싶어 칼리우스에게도 실망한 상태였다고.

게다가 출신조차 모르며, 귀족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를 여자를 귀부인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것도 싫었고, 이 거대한 에르윈 대공가의 안주인이 되어 기고만장해질 여자를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 화풀이를 아스펠라에게 하고 말았다고.

“제 짧은 생각이었습니다. 늙어서 총기가 흐려져 나온 행동이었지요. 후에 아가씨가 어떤 분이신지 듣고 난 뒤에야 정말 죄송스러웠습니다.”

이제는 그런 생각 따위는 고쳐먹었다며 헬렌이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스펠라는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칼리우스한테 약혼까지 했던 영애가 있었구나.’

아스펠라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녀가 뭘 생각하는 것인지 눈치챈 듯한 헬렌이 이내 살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너무 개의치 마시지요. 이 늙은이가 또 실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말한 헬렌이 아스펠라에게 물 묻힌 타월을 건넸다. 아스펠라는 얼굴을 닦은 뒤, 다른 타월로 식은땀이 흘렀던 목덜미 부분까지 씻고 헬렌의 도움을 받아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곳에서 지내시는 동안은 이 헬렌이 아가씨를 보필할 테니, 부디 편히 대해주시지요.”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준비를 거의 다 끝내 갈 즈음, 칼리우스가 아스펠라를 데리러 왔다.

헬렌이 얼른 물러났다.

“블레드 성의 호수는 정오가 될 때까지도 안개가 어스름한데, 보러 가겠습니까.”

그의 말에 아스펠라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블레드 성은 에르윈 대공성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중 가장 으뜸은 고즈넉한 블레드 성을 감싼 거대한 호수와 그 주변의 울창한 숲이었다.

지형의 특징 때문인지는 몰라도, 거대한 호수 위 짙게 깔린 안개는 점점 고개를 치켜드는 햇빛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태양빛을 받아 이따금 안개 속의 수증기들이 반짝반짝했다. 그것은 마치 한밤의 별들이 호숫가에서 몸을 씻다가, 때를 놓쳐 올라가질 못해 낮에도 빛나는 것 같았다.

몽환적인 안개와 그 아래 푸른색을 띤 호수 길을 아스펠라와 칼리우스 단둘이서 거닐었다.

“정말 너무 아름다워요.”

아스펠라는 감동받은 듯한 눈빛으로 주변을 빙 둘러보며 말했다. 그녀의 반응에 안심한 칼리우스가 픽 웃으며 뒷짐 진 상태로 아스펠라 곁에서 천천히 걸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입니다.”

두 사람은 별다른 말없이 또 한참을 걸었다.

아스펠라가 이내 먼저 말했다.

“아침에 헬렌을 만났어요. 원래는 대공성에 계시던 분 아니었나요? 혹시 그날 일 때문에 좌천 같은…….”

“본인 역시 그리하겠다 해서 데려온 것뿐입니다.”

그날 일을 떠올린 듯 짧게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내 다시 특유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들어온 칼리우스가 말을 이었다.

“이번엔 그런 식으로 대하진 않을 겁니다. 내 정인이라고 단단히 일러뒀으니.”

그의 말에 아스펠라가 “뭘 또 그렇게까지 말을…….” 하며 부끄러운 듯 애꿎은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아까 전에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후작 영애와의 혼담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는 이야기. 깊은 사이는 아니었다지만…….

“약혼녀……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 말에 잠시 칼리우스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묘한 표정으로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네. 있었습니다.”

그는 별다른 말없이 태연하게 답했다. 그리 깊은 사이는 아니었다 등의 덧붙이는 말도 없이, 그저 짧은 대답에 아스펠라가 당황했다.

오히려 당황해야 할 사람은 칼리우스 아니었던가?

이런 것엔 신경 쓰는 남자가 아닌가? 아스펠라가 그리 결론을 내린 뒤 말을 이었다.

“저 때문에 혹여 그 가문과 사이가 나빠진다거나 하진 않았죠? 일방적인 파기라고 들었어서요.”

“그런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달리 물어볼 것은 더 없습니까?”

“네? ……네.”

“그래요? 정말?”

“네.”

“진짜로?”

“아, 그렇다니깐요.”

아스펠라는 어쩐지 놀림받는 기분이 들었다. 아스펠라의 반응을 살펴본 칼리우스가 이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헬렌이 제대로 말을 전달하지 않았나 보군.”

이런 반응을 보려고 말을 흘리라 한 것이 아닌데 말이야.

사냥감을 놓쳐 아쉬워하는 짐승의 눈빛으로 칼리우스가 아스펠라를 바라보다 씩 미소 지었다.

“아스펠라. 이만 들어갑시다.”

지금쯤이면 아침 식사가 다 준비되었을 거란 말에, 발걸음을 돌려 다시 성으로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오랜만에 보네. 꼬마야.]

아스펠라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아스펠라?”

놀란 눈으로 주변을 살피는 아스펠라의 모습에 칼리우스 역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아스펠라에게 물었다.

“나무들이 무슨 말이라도 합니까?”

더 이상 나무들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칼리우스가 이곳에 오랜만에 와서 기쁜가 봐요.”

나무들이 반기는 것 같아서요. 아스펠라가 나무들을 가리키며 말하자 칼리우스가 픽 미소 지었다.

아스펠라는 목소리가 말한 그 ‘꼬마’가 칼리우스일 거라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다시 멈췄던 발걸음을 옮기던 아스펠라가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몇 년 동안이나 방치되어 있었다는 게 아쉽네요.”

“가족들이 살아 있었을 땐 자주 왔다고 하더군요.”

“기억이 잘 나지 않으시는 거예요?”

“저번에 필립이 얘기한 대로, 강도한테 습격당한 이후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필립이 원래 모든 일을 유난스럽게 말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날 일에 대한 것은 단순한 유난이 아니었다.

실제로 칼리우스는 습격을 받은 뒤 일주일 정도 눈을 뜨지 못했다.

겨우 눈을 떴을 때, 그는 아홉 살 이전의 일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몇 개는 드문드문 기억나는 듯했으나, 모두 안개가 낀 것마냥 희뿌옇게 기억나는 그런 애매한 상태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습격 당일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육하원칙에 근거한 질문을 하면 칼리우스는 그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할 뿐이었다.

대공의 후계자가 습격받았다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큰 사안이었기에 국왕은 얼른 조사원을 파견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결과는 나오지 못했다.

어째서인지 대공 부부는 자신의 아들이 그날 일에 대한 기억을 찾는 것을 그리 바라지 않는 듯했다. 대공가의 후계자를 공격한 강도를 잡겠다는 의지도 없어 보였을 뿐더러 모두 그날 일을 숨기려는 듯했다.

불미스러운 일이니 스캔들이 불거지는 걸 막고자 함이었을까?

그 사건 이후부터 칼리우스는 이곳에 오지 못했다. 대공 부부가 이곳에 오는 것을 극도로 꺼려 했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적엔 이곳을 꽤나 좋아했던 기억 정도는 남아 있던 칼리우스는, 기억도 안 나는 사건 때문에 이곳에 오지 못해 꽤 속상했다.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난 뒤 가족들이 모두 죽고 말았다. 그 이후 이곳은 칼리우스의 기억 너머 그리 중요치 않은 장소가 되었다.

“그래도 이제나마 와보네요. 그것도 당신이랑.”

이내 칼리우스가 씩 웃으며 말하자, 아스펠라 역시 그를 따라 슬쩍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칼리우스는 얼른 그 손을 잡고선 둘은 다시 성안으로 들어갔다.

한편, 아스펠라는 아까 나무들이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과거를 이야기하는 순간의 칼리우스에게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아닌데. 칼리우스 말고 너 말하는 건데.]

나무들이 잔잔하게 잎사귀를 떨었다. 초가을이 지나 이제는 조금 선선한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돌자 붉은 잎사귀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 일이 일어났던 바로 그 계절에,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 칼리우스였다.

***

아침 식사를 마치고 아스펠라는 한나와 함께 잠시 단둘만의 티타임을 가졌다. 유디티아 후작은 싫다는 칼리우스를 구태여 끌고 나가 오늘 피크닉 할 자리를 물색하기로 했다.

“그냥 시종들을 시키거나, 아무 곳에 앉으면 되는 것을……. 필립은 꼭 저렇게 자신이 직접 해야겠대요. 칼리우스만 귀찮게 되어 어째요. 어휴.”

말은 나무라는 듯하면서도, 후작 부인은 그저 제 남편이 사랑스러운 듯 미소를 머금고 찻잔을 들어올렸다.

“부인이랑 관련된 일은 모두 직접 하고 싶으신가 봐요.”

“그이가 원래 좀 그래요. 귀찮지만, 귀여운 남자예요. 그나저나 참 풍경 좋네요. 오랜만에 문을 열어 두니 환기도 되는 것 같고.”

한나는 잠자리가 바뀌어 피곤할 줄 알았는데, 어째 몸이 더 가벼워진 기분이 든다며 꽤나 활발한 모습을 보여줬다.

“후작님께 이야기 들었어요. 부인께서 악몽도 자주 꾼다고 하시던데.”

“네. 아무래도 아이를 가진 이상 전과 같은 몸은 아니어서 그런지 요 몇 주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거든요.”

어째 임신 초기 때 입덧 하던 것보다 지금이 더 힘들다며, 후작 부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불룩한 배를 쓸어내리며 태중의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다 상관없으니, 건강하게만 태어나렴.”

아스펠라는 그런 후작 부인을 가만히 쳐다보다 물었다.

“두렵지는 않으신가요? 아이를 낳는다는 건 꽤나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잖아요.”

“어머. 당연히 무섭죠. 제 몸에서 생명이 나오는 건데 어찌 무섭지 않겠어요? 전 맨 처음 임신했다는 걸 전해 들었을 때 무서워서 울음을 터트렸다니까요. 필립의 머리채를 잡고 왜 나만 이래야 하냐고 엉엉 울어댔어요.”

그러나 마냥 두려움만 느낀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자신의 몸 안에 또 하나의 생명이 자라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하지만 무서운 만큼, 기쁘기도 했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똑 닮은 아이가 태어나는 거니까요. 신기하지 않나요? 서로를 반씩 꼭 닮은 존재가 태어난다는 것이. 말 그대로 사랑의 결실이잖아요.”

하지만 유디티아 후작의 부산스러움은 닮지 않았으면 한다며 후작 부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성격만은 나나 내 남편은 안 닮았으면 좋겠어요. 음. 칼리우스는 너무 딱딱하고, 오라버니는 집착하는 성격이다 보니……. 으음, 그래. 아스펠라를 닮으면 딱 좋겠네요.”

“절요?”

아스펠라는 예상하지 못한 듯 눈을 끔뻑이며 저를 가리켰다. 그러자 후작 부인이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어떤 사람일 줄 알고…….”

“칼리우스가 좋아하는 사람이잖아요. 그 칼리우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라는 건, 그것만으로도 좋은 사람이라는 걸 입증하거든요.”

사람은 끼리끼리 만나는 거랬어요. 후작 부인이 첨언했다.

“대공이 좀 딱딱한 면은 있어도, 사람은 참 좋거든요. 그러니, 아스펠라도 좋은 사람이에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녀의 말에 아스펠라가 쑥스러운 듯 찻잔 손잡이만 가만히 매만졌다. 그런 아스펠라를 보며 싱긋 웃던 한나가 물었다.

“칼리우스와 결혼할 거죠?”

“네?!”

“뭘 그렇게까지 놀라셔요. 정인이다 뭐다, 우리한테까지 소개시킬 정도면 칼리우스는 결혼하고픈 마음이 차고 넘치는 것 같은데.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죠?”

후작 부인의 말에 아스펠라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곳에 들어오게 된 이유가 칼리우스의 그 밑도 끝도 없는 청혼 때문 아니었던가.

아스펠라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찻잔 안 꽃잎이 동동 뜬 차를 내려다봤다.

“좀 복잡해요. 마음이 통한다 해서 모든 게 해결되진 않을 테니까…….”

후작 부인은 모를 거다. 칼리우스가 주기적으로 짐승으로 변한다는 것도, 아스펠라가 사실은 산신이라는 것도.

아스펠라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칼리우스와 함께 대공성에서 평생을 살게 될 경우엔 산신의 자격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결혼하지 않고 아스펠 산으로 돌아간다면, 칼리우스는 분명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지고 쫓아올 기세였다. 그렇게 되면 에르윈 가문은 가주를 잃게 될 것이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우리 둘만 생각합시다.’

그날 칼리우스는 그렇게 말했다.

저주고 산신이고 뭐고 다 논외로 치고, 일단은 우리만 생각하자고. 사랑하는 서로의 마음만 생각하자고.

“칼리우스는 지금 이 순간만 생각하자고 했지만, 그건 불가능하잖아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떤 복잡한 일이 얽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고민할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때가 되면 답은 저절로 나오거든요. 마음이 확실해지면 모든 답이 나올 거예요.”

지금은 방금 전 아스펠라가 한 말대로, 둘만 생각하세요.

그렇게 말한 한나가 이내 주먹을 불끈 쥐더니 말했다.

“지금 이 풋풋하고 쑥스러움 가득한 연애를 잔뜩 만끽하시라구요. 아아, 정말 부럽다니까요. 난 그런 게 없었어요. 결혼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연애를 하게 되었죠.”

“정말요?”

“네. 우리 결혼 초기에는 얼마나 어색했는데요. 필립은 그걸 아직도 마음에 걸려하더라고요. 참, 다정한 남자 같으니라고.”

“전 당연히 두 분 다…….”

“연애결혼인 줄 아셨죠? 호호, 전혀 아니랍니다. 귀족들 중에서 연애결혼은 별로 없어요. 극히 드물죠. 대부분 정략결혼이에요. 그래도 저 같은 경우는 어떻게 운이 좋은 건지 사람이 좋은 건지,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요.”

후작 부인은 오라버니에게 등 떠밀려 한 결혼이라 했다.

“솔직히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전 그때 진짜 도망갈까 생각도 했다니까요.”

물론 지금은 그와 결혼하길 잘한 것 같다며, 후작 부인이 호탕하게 웃음소리를 냈다.

아스펠라가 잠시 한나를 쳐다보다 물었다.

“국왕 전하와는 사이가 많이 좋으신가 봐요. 일전에 비옥한 토양까지 하사하셨다고 후작님께서 그러시던데.”

“오라버니는 좋은 분이죠. 아마도요.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긴 하지만……. 국왕이라는 큰 짐을 진 분이니까요.”

말과는 달리 표정은 불안해 보였다. 그녀는 제 오라비를 두려워하는 듯했다. 잠시 회상에 잠긴 듯 후작 부인의 눈빛이 아득해지며 멍하니 한곳을 바라봤다.

“부인?”

“……참. 우리 이제 연회 준비를 하는 건 어떨까요, 아스펠라? 연회는 처음이라 들었는데.”

“아, 네. 맞아요. 처음이에요.”

처음이라는 아스펠라의 말에 한나가 손뼉을 치며 신난 듯 “연회는요, 그 당일 무도회보다는 준비하는 기간 동안이 더 재미난 법이죠!” 하며 말을 돌렸다.

“연회는 아직 멀지 않았나요? 적어도 두 달 정도는 남은 것으로 알고 있는걸요.”

아스펠라의 말에 한나가 손을 내저었다.

“어머. 지금부터가 시작이랍니다. 연회는 귀족들의 전쟁터나 다름없는 곳이죠. 아스펠라 양.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잔뜩 무기를 장전해야 하지 않겠어요?”

단순히 하하호호 웃으며 떠들고, 음식을 먹고, 와인을 마시고, 악단에 맞춰 춤만 추는 놀이터가 아니랍니다. 후작 부인의 말에 아스펠라가 눈을 끔뻑였다.

“이런. 아스펠라 양. 이런 상태로 연회에 출정했다간 너덜너덜해질 거예요.”

“왜요?”

“왜냐뇨? 귀족들은 하이에나예요. 뭣 하나 꼬투리 잡고 악착같이 물어뜯으려 하죠.”

아마 그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칼리우스밖에 없을 거예요. 후작 부인이 진저리 치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나 위험해요?”

“물론 마냥 위험하진 않죠. 재미난 일도 많아요. 사람을 다룰 줄만 안다면요.”

후작 부인은 아스펠라에게 너무 큰 걱정은 하지 말라 안심시켰다. 누가 대공 각하의 연인을 감히 함부로 대하겠는가.

“그래도 경계를 늦춰선 안 돼요.”

그러니 결론은 내일부터 당장 연회 준비를 시작할 것이라는 소리였다. 다소 개연성 없는 결론에 아스펠라는 의문을 가지다가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가 열리면 귀족들은 모두 다 오겠죠?”

“그럼요. 아무래도, 에르윈 대공이 주최하는 연회니 다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올 거예요. 귀족들 사이에서는 왕궁 연회보다 대공성의 연회가 더 귀하다는 말이 돌 정도니까요.”

아스펠라는 잠시 손가락을 꼼질거리다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그…… 예전에 칼리우스와 약혼까지 하셨던 분도 오시겠죠?”

“칼리우스가 그 영애에 대해 말했나요?”

“아뇨, 그냥, 헬렌이 말해줬어요.”

“헬렌이 왜 그런 말을 굳이 했는진 모르겠네요.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닐 텐데.”

다들 눈치 없는 게 유행인가? 중얼거리는 한나의 말에 아스펠라가 얼른 그런 것이 아니라 손을 내저었다.

“사소한 오해가 있었거든요. 오해를 풀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된 것이에요.”

“그래요? ……음,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예상치 못한 약혼 파기에 한동안 좀 시끄럽긴 했지만, 결국엔 잠잠해졌어요. 그 누구도 아스펠라를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아스펠라를 보며 한나가 얼른 말했다.

“설마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거나 그런 괜한 소리는 하지 말아요, 아스펠라. 원래 이 바닥이 그래요. 더한 것도 많은걸요.”

한나는 시무룩해진 아스펠라를 보더니 이내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아스펠라는 겨우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정작 묻고 싶은 것은 제대로 묻지 못했다.

그래서, 그 약혼녀와 칼리우스의 사이는 대체 어땠는지. 정말 헬렌의 말대로, 다른 영애들과는 달리 정말 서로 좋아했던 것이 맞았는지.

하지만 그런 것을 묻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며 유디티아 후작이 들어왔다.

“여보! 한나! 내 자기! 내가 아주 좋은 자리를 찾았어요, 우리 꿀벌이랑 같이 피크닉이나 갈까요오?!”

아스펠라가 같이 있는 것에도 개의치 않는 듯 제 아내에게 애정 담뿍 담긴 말을 해댔다.

뒤에서 같이 들어오던 칼리우스가 질린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난 자네가 참 대단해.”

“고맙네, 칼리우스!”

“칭찬으로 한 말이 아닐 텐데.”

칼리우스는 필립과 강제로 이곳저곳 양지 좋은 곳을 찾느라 지친 듯해 보였다.

그럴 만 했다. 그가 바란 휴식이라는 것은 아스펠라와 함께 그저 저택 주변을 조용하게 돌아다니거나, 같이 나룻배를 타거나, 단둘이 책을 읽거나 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기타 등등 여러 가지 계획이 있었는데 첫날부터 후작에게 끌려가 실패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같이 좋은 장소를 찾는 내내 입을 쉬지 않는 필립 때문에 그는 아직도 귓가가 윙윙 울리는 것 같았다.

“왜 둘이 피크닉 가는데 내가 같이 장소를 물색해야 하냐고.”

“그야 이 성의 주인은 자네 아닌가. 당연히 자네도 같이 찾아야지. 자, 여보. 얼른 갑시다. 지금이 딱 좋은 시간대야.”

후작은 새초롬하게 대답하곤 얼른 제 아내를 부축했다. 거동이 불편한 제 아내를 위해 휠체어까지 가져온 후작의 다정함을 아스펠라는 그저 미소로 지켜봤다.

후작 부인은 ‘이것 봐요, 이이가 이렇다니까. 난 몰라 정말.’라는 듯 당혹스러운 반, 기쁨 반의 눈빛으로 아스펠라와 눈을 마주친 뒤 이내 남편과 함께 방을 나갔다.

칼리우스는 피곤한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몇 시간 내내 혹사당했던 제 귀 안에 물이 들어간 듯 툭툭 옆통수를 쳤다.

아스펠라가 다가오자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정말, 필립은 말이 너무 많아…….”

아스펠라는 고생했다며 그의 머리칼을 천천히 헝클어뜨렸다.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의 복부에 얼굴을 부비작대자 아스펠라는 간지럽다며 그를 밀어냈다. 그럴수록 칼리우스는 제쪽으로 더 가까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러자 아스펠라가 그의 힘에 의해 앞쪽으로 넘어갔다. 아스펠라를 품에 안고 넓은 소파에 드러누운 칼리우스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저기, 칼리우스. 후작 부인이 진짜 국왕의 친 여동생이 맞나요?”

아스펠라는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려는 듯 물었다. 사실 아무리 곱씹어 봐도, 한 배에서 태어나 한 핏줄을 나눈 이에게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배 다른 남매라면 정말, 백 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 쳐도, 어찌 제 가족에게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네. 맞습니다.”

“그럼 정말 국왕은 자기 여동생을……!”

역시나 바뀌는 것 하나 없었다. 국왕은 제 여동생을 제물로 삼든 실험체로 보든, 아무튼 사람이 아닌 도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부인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도 단순히 태중의 아이 때문만은 아닐 텐데, 국왕도 이를 알고 있겠죠?”

“보고받고 있었을 테지요. 그 주치의가 끄나풀일지는 모르지만.”

국왕은 사람 좋은 척 연기하며 주변인들을 이용할 테니, 자신이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는 이들도 많을 것이라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의 품에 파고들며 이제부턴 유디티아 후작 가문의 주치의는 들이지 않을 테니 걱정 말라고 말했다.

아스펠라는 국왕의 만행에 대해 더 비난하고 싶어 했지만, 어째 칼리우스의 행동이 점점 아스펠라를 간질이는 듯해 더 이상 그에 대한 욕을 할 수도 없었다.

칼리우스는 마치 죄 빠져버린 몸의 기운들을 다시 모으려는 것처럼 아스펠라를 꼭 껴안고 널브러져 있었다.

아스펠라는 이제 그만 일어나야 하지 않겠나 싶어 슬쩍 몸을 일으키려다가도, 절대 품에서 놔주지 않고 오히려 더 제 가슴팍으로 밀어 넣는 칼리우스 때문에 꼼짝 없이 잡혀 있어야 했다.

코앞에 바위만 한 가슴 두 개가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아스펠라의 손은 정확히 그 가슴 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어째 몇 번이나 만져봤음에도 불구하고 이 감촉부터 크기는 영 적응되지 않았다.

어째 내 것보다 더 커 뵈는데.

그리 보이는 것만이 아닌, 실제로 더 큰 것이 분명할 것이다.

아스펠라는 문득 두 사람의 자세가 제삼자가 볼 경우 매우 요상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후작 부인을 보필하러 유디티아 후작저에서 온 시녀들이 도착한 것인지, 바깥에서는 조금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혹시라도 그네들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이 광경을 보면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아스펠라는 얼른 머리를 굴렸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칼리우스는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입꼬리 끄트머리에 미소를 걸치며 말했다.

몇 시간 동안이나 그 시끄러운 필립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짓은, 두 번은 못할 짓이었다.

아스펠라는 슬쩍 고개를 들어 제 아래 눈을 감고 있는 칼리우스를 쳐다봤다.

창밖에서 유디티아 후작과 부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자기! 지금 호숫가랑 당신이랑 너무 잘 어울려! 명화 같아! 세상에!

시끄러운 데다 목청도 좋고 호들갑 떠는 것도 수준급이었다.

“한나도 대단해. 저런 남자랑 어떻게 사는 건지.”

칼리우스 역시 고개를 돌려 창문 저 멀리서 주접 떠는 필립을 쳐다봤다. 새끼손가락만큼 작아 보이는 거리였으나, 필립이 뭘 하는지는 너무 잘 보였다.

그는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교차하며 액자 같은 사각형 형태를 만든 뒤, 그 안에 제 아내를 담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화가를 불러야겠군! 세상에! 내 자기 너무 아름다워!

아주 멀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스펠라는 후작 부인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도 예측할 수 있었다. 아마, 쑥스러운 듯 고개를 내저으며 “당신 때문에 못살아.” 하면서도 연신 남편의 주접을 즐길 것이다.

정말 죽이 잘 맞는 한 쌍의 부부 아닌가.

“그래도 후작님은 부인을 엄청 사랑하는 게 보이잖아요.”

“부럽습니까?”

“으음, 보기는 좋던데요.”

“……그래요?”

“네. 사랑받는 게 바로 보이니까…….”

아스펠라의 말에 칼리우스가 충격받은 듯 몸을 반쯤 일으키며 물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아스펠라의 허리가 뒤로 슬쩍 꺾였다. 칼리우스가 얼른 허리 뒤쪽을 받치며 진지하게 물었다.

“내가 주는 사랑은 아직 부족합니까?”

“아니, 그건 아니긴 한데.”

“알고 보니 꽤 욕심쟁이였군요. 부족했다니. 알겠습니다. 필립처럼 주접 떠는 것이 취향이었군요.”

그렇게 말한 칼리우스가 이내 아스펠라의 목덜미에서 얼굴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나도 자기라고 불러줄까요?”

“네? 아, 아뇨. 괜찮아요.”

아스펠라는 정말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칼리우스의 얼굴로 유디티아 후작처럼 ‘자기’, ‘내 사랑’, ‘꿀벌’이라는 애칭을 부르거나 비음 잔뜩 섞인 목소리로 ‘사랑해요옹’ 같은 말투를 한다고 상상하니 영 이상했다.

“전 지금의 칼리우스로 만족하는 걸요?”

아스펠라의 말에 칼리우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유디티아 후작은 좀 귀엽게 생긴 편이라 그런 게 잘 어울리는데…….”

그러나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필립이 귀엽게 생겼다고요?”

“네? 아니. 생김새로는요.”

“그 덩치가?”

“덩치가 커도 귀여운 남자는 있어요.”

칼리우스의 얼굴이 미묘하게 뾰루퉁해졌다.

“흐음. 그새 그런 것까지 다 보고. 그래. 내가 하면 귀엽지 않으니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군요.”

칼리우스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드러누웠다. 아스펠라는 이제 그만 일어나자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의 허리를 제 쪽으로 당겼다.

이내 두터운 손이 허리 부근을 지분대기 시작했다. 아스펠라는 제 허리를 주무르는 칼리우스의 손길에 당황하면서도, 제 볼에 입을 맞추는 칼리우스를 밀어내지 않았다.

“아니, 왜 여기서…….”

아스펠라의 볼에 칼리우스의 날렵한 콧대가 닿았다. 그는 아스펠라의 볼에 쪽쪽 민망한 소리가 날 정도로 입을 맞추며 목덜미 쪽으로 다시 얼굴을 내렸다. 아스펠라가 어깨를 움츠리며 그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허리 쪽을 지분대던 손이 점점 위로 올라왔다. 아스펠라의 몸이 아까 전보다 더 크게 움찔거렸다. 살덩이를 쥔 칼리우스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그의 머리카락을 쥔 아스펠라 역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칼리우스는 제 머리칼을 잡아당기는 아스펠라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 듯 조금 더 거세게 살덩이를 주무르고 쥐었다.

“여기서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된다 하면서도 그를 껴안는 아스펠라의 행동은 말과 영 달랐다. 칼리우스는 그런 모순적인 아스펠라의 모습에 픽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아스펠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자기. 오늘 밤에는 내 방으로 오세요.”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나직하게 울리자 아스펠라의 온몸에 난 털이 쭈뼛 곤두세워졌다. 아스펠라가 얼른 제 귀를 막으며 칼리우스를 쳐다봤다.

그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헝클어진 제 옷을 툭툭 털고는 아스펠라를 일으켜 세웠다.

양 뺨이 달아올라 붉어지고, 머리는 헝클어졌으며, 옷가지가 조금 내려간 아스펠라를 정돈해주더니 이마에 입을 짧게 맞추곤 말했다.

“나머지는 이따가.”

그렇게 말한 그는 먼저 방을 나갔다. 여유롭게 뒷짐까지 지곤, 답지 않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발걸음은 가벼웠다.

아스펠라는 그런 칼리우스를 멍하니 쳐다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진짜 너무 능숙하다니까…….”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

‘오라버니는 좋은 분이죠. 아마도요.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긴 하지만. ……국왕이라는 큰 짐을 진 분이니까요.’

한나는 그렇게 말하긴 했으나, 사실 아스펠라에게 털어놓지 못한 것이 있다.

그녀는 제 오라비를 두려워했다. 사실, 두려워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싫어했다.

혐오했다.

이제 와서 좋은 오라버니인 척 연기하는 그 꼴도 보기 싫었다.

해서, 유일한 튀니아의 공주이자 국왕의 친동생인 그녀는 후작과 결혼한 이후 국왕을 따로 만난 적이 없다.

“여보? 한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한나가 가만히 휠체어에 앉아 사색에 잠긴 듯하자 이를 걱정스럽게 여긴 유디티아 후작이 물었다.

“혹시 몸이 좋지 않은 거야? 안에 들어갈까?”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오늘 아스펠라 양이 나한테 오라버니에 대해 물어봤거든.”

“국왕 전하에 대해?”

“내가 그의 여동생인 걸 몰랐던 눈치더라고.”

칼리우스는 우리가 아스펠라에게 그렇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고 판단했나 봐. 그 인간, 딱 보니 다른 귀족들에게 아스펠라를 소개시켜주는 것도 내키지 않아 하던데. 그러면서 아스펠라 양이 연회가 궁금하다 하니 준비하는 것 좀 봐.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한나의 말에 유디티아 후작이 맞장구를 치며 해맑게 미소 지었다. 한나는 그런 제 남편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아스펠라 양은 참 사람이 좋은 거 같아.”

“그 칼리우스의 성질머리를 죄 받아주는 걸 보면.”

“어머, 필립. 칼리우스는 아스펠라 앞에서 기도 못 펴던 걸.”

“원래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 앞에선 기도 못 펴는 거야. 나처럼 말이지.”

필립이 자랑스레 제 가슴팍을 툭툭 치며 고개를 치켜올렸다. 뿌듯해 보이는 미소를 짓는 것이 그저 귀여운 듯 한나가 제 남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런 사람이 결혼하고 2년 동안 나한테 말도 안 걸었어?”

“아, 아이, 여보오! 나는 옛날부터 당신을 좋아했는데, 자기가 나 싫어하는 줄 알아서 그랬다니까아!”

억울한 듯 소리치며 항변하는 필립이 제 아내에게 진심을 알아달라며 울먹대기 시작했다.

“알아. 장난이야 장난. 자꾸 그런 반응 보이니까 재밌어서 그래.”

아내의 말에 입을 삐죽대던 유디티아 후작은 문득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한나. 그때 왜 나랑 결혼한 거야? 그러니까, 전하께서는 나랑 칼리우스 둘 중 하나를 골라 결혼하라 했었잖아. 근데 왜 나랑…….”

그는 꼼짝없이 칼리우스와 한나가 결혼하는 꼴을 봐야 하는 줄 알았다며, 인생에서 그렇게나 피 말랐던 적은 없다 말했다.

국왕은 한나가 법적으로 결혼이 가능해진 열일곱 살의 나이에 제 연년생 여동생을 반강제로 혼인시키기로 했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결혼 상대는 총 네 명. 에르윈 가문의 가주 칼리우스, 유디티아 후작가의 후계자 필립, 접경국의 왕자와 아주 먼 해안국가의 늙은 왕.

다들 공주가 에르윈 대공을 고를 거라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그녀의 선택은 유디티아 후작이었다.

“그때 나는 아직 후계자였을 뿐인데, 게다가 칼리우스는 그때부터 인기가 많았잖아.”

“칼리우스는 오라버니랑 그때 너무 친했어.”

한나는 칼리우스를 무서워했다.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겠다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기운이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 친한 학술원 친구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칼리우스와 단둘이 있을 때면 어색했으며 조금 껄끄러운 관계였다.

그때 그녀는 오라버니에게서 도망치고 싶었고, 도망친 이가 오라버니와 꼭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싫었다. 그렇다고 왕국을 떠나는 것은 죽어도 싫었으니.

“결정적으로는 당신이 조금 더 내 취향이었지.”

한나의 말에 유디티아 후작의 입이 귀에 걸렸다.

“당신이 칼리우스를 무서워해서 다행이었네! 그러고 보니 한나는 왜 그렇게 전하와 칼리우스를 무서워해?”

필립과 결혼하고 나서 칼리우스가 그렇게까지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으나, 그녀는 여전히 제 오라버니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칼리우스는 이제 안 무서워. 이번에 아스펠라 양을 보고 느꼈지. 다만 오라버니는…….”

제 오라비만 떠올리면 한나는 입 안에 가시가 돋은 느낌이 든다.

말하고 싶지만 절대 말하지 못한다. 누가 믿기나 하겠어.

‘오빠! 파베스! 뭐 하는 거야!’

‘저리 가 있어. 쓸모도 없는 게 귀찮게 하지 말고.’

‘그러지 마! 아버지!’

거대한 마법진이 제 아비를 삼키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의 몸이 기이하게 뒤틀리며 뼈들이 새로 맞춰지는 것을, 이윽고 사람이 아닌 짐승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한나는 두 눈으로 목격했다.

그녀는 파베스의 옷가지를 잡아당기며, 오빠가 좀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버지를 도와달라고.

하지만 그런 아버지를 보는 파베스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슬픔보다는 희열과 부러움이 담겨져 있는 것을 보고 말았다.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인지 그 전후 사정은 기억나지도 않았다.

아버지였던 짐승의 붉은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한나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땐 차가운 바닥이 아닌 푹신한 침대였으나, 한나는 그것이 악몽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사라졌다. 선왕은 실종되었고 당시 열한 살인 오라비가 왕의 직책을 맡아야 했지만, 그러기엔 귀족들의 입김이 너무 세다고 생각한 왕비가 선왕의 자리에 임시로 올라갔다.

어머니는 뭔가 아는 듯했으나 결코 말하지 않았다.

한나는 어머니에게 그날 일을 모두 고했으나 어머니는 믿지 않았다. 아니, 외면하는 듯했다.

파베스를 찾아가 그날 일에 대해 물어도 ‘이런, 한나. 악몽을 꿨나 본데?’ 씩 웃으며 말했다.

한나는 악몽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한나. 자꾸 그렇게 악몽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면 정신병원에 보내버려야 할지도 몰라. 왕족이 정신병원에 갇힌다니. 정말이지 왕실의 수치겠지?’

하지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으며 자신을 꿈과 현실 구분 못하는 어린애 혹은 더 나아가 정신병자 취급을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선왕의 실종은 대외적으로 선왕이 병들었다는 것으로 포장되었고, 나라의 안정을 위해 3년 후에나 그가 죽었다는 공표를 했다.

2년 뒤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며 파베스가 국왕으로 즉위했고, 어린 왕의 즉위식 날 한나는 그의 눈빛에서 광기를 발견했다. 파베스에게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생각은 파베스가 왕비를 맞이한 이후 더 강력해졌다.

튀니아에서는 왕비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금지나 다름없다. 그녀의 죽음이 너무나도 기이하고,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 귀족들은 물론 백성들 사이에서도 나돌았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는 아버지,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원인불명의 병’ 때문이었지만.

왕비의 장례식 날 관에 누워 있는 그녀의 시체가 너무나도 빠르게 썩어 들어가며, 죽었던 시체가 눈을 뜨고 비명을 지르던 장면은 귀족들 모두가 똑똑히 목격했다.

이후 의사들이 그저 자연적인 현상이라 얼버무렸으나, 그걸 누가 믿겠어?

귀족들이 파베스를 두려워하는 이유도 그날 일 때문이 클 것이다.

“오라버니를…… 파베스를 두려워하지 않는 귀족이 있을까?”

한나가 되묻자 필립이 이내 없을 거라며 슬쩍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한 명이 떠오른 듯 말했다.

“칼리우스?”

“흐음, 그래. 어쩌면 칼리우스만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신, 아직 눈치채지 못했나 보구나?”

“응? 뭘?”

“칼리우스는 아스펠라 양 때문에 엄청 겁쟁이가 될 걸. 이제까지 두려울 것이 없던 남자였으니까.”

한나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지켜야 할 게 있는 사람은 그걸 지키기 위해 한없이 강해지다가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한없이 약해지기 마련이었다.

***

유디티아 후작 부부가 블레드 성에서 긴 휴가를 보내는 동안 아스펠라는 후작저의 온실을 찾아갔다. 부정한 흙들을 죄 걷어내니 예전처럼 불쾌한 기운들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아스펠라는 온실을 한번 빙 둘러보며 아직 살아남은 식물들 위에 손을 올려놨다. 눈을 감고 그들과 대화를 해보려 시도했으나 다들 묵묵부답이었다.

아스펠라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동식물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아스펠라와 대화하길 원하는 전제조건이 있어야만 했다.

이들이 말을 하기 싫어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뭔가가 있는 것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아스펠라가 다정하게 말했다.

“걱정 말렴, 내가 너희들을 지켜줄 테니까.”

다행히 블레드 성이 후작저와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스펠라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으로 와 온실을 보살폈다.

아스펠 산의 흙을 가져와 땅의 기반을 정화시키고 그 위에 새로운 씨앗을 심었다. 푸릇한 싹이 움트길 기도하며, 아스펠라는 매일 이곳을 찾아왔다.

후작저의 사용인들은 매일같이 찾아와 혼자서 이것저것 뭔가를 심고, 옮기는 아스펠라가 신기한 듯 저들끼리 쑥덕댔다.

대공 각하와 함께 있는 것을 보니,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어느 가문의 영애가 저렇게 맨손으로 흙을 만지고, 손톱 밑에 흙이 껴도 개의치 않아 하던가.

맨발로 땅을 걷기도 하며 혼잣말로 식물들에게 중얼거리기까지 하는.

그러나 그 기묘한 행동에도 어째 불쾌하거나 무섭다기보다는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을 식물에 비유하자면 딱 푸릇하고 사랑스러운 새싹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아무튼, 후작저의 사용인들의 모든 관심사는 아스펠라가 있는 온실로 향해 있었다.

“대공 각하의 온실도, 저분이 관리하신대.”

“그럼 직업이 정원사이신 건가?”

“아냐. 저번에 대공 각하께서 존대를 하시던걸? 그리고 매번 이곳에 데려다주고, 데리러 오는 것을 봐.”

이제는 돌아가지도 않고 아예 죽치고 앉아 아스펠라가 일을 끝낼 때까지 기다리고 있지 않던가. 그게 어디 고용주와 고용인의 사이겠냐며 저들끼리 추론을 해댔다.

대체 저 아가씨의 정체가 뭘까?

이내 아스펠라가 새로운 씨앗을 모두 심은 것인지, 온실에서 나오며 흙투성이가 된 자신의 손을 툭툭 털었다.

아스펠라가 나오자 칼리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렸다는 듯 아스펠라 옆에 찰싹 붙어, 후작저의 사용인들이 쳐다보든 말든 다정한 손길로 아스펠라의 머리칼에 붙은 낙엽을 떼어냈다.

칼리우스의 손에 낙엽이 들리자, 제 할 일을 하는 척 지나가던 사용인들이 “봐, 지금 봤어?!” 저들끼리 신나 속닥이다가 얼른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스펠라는 칼리우스가 눈에서 양봉을 해도 충분할 것 같은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든 말든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

“씨앗은 모두 다 심었어요. 아마 며칠 뒤에는 다 자라있을 거예요. 그런데, 정말 이렇게 하는 게 도움이 될까요? 정말 국왕이 저에 대해 눈치를 챌까요?”

칼리우스는 아스펠라에게 대공 성에서 보여줬던 만큼의 능력을 이곳에 쓰라 말했다. 귀족들 사이에서 소문이 날 만큼. 그래서 국왕의 귀에 들어갈 만큼.

그렇게 하면 파베스는 아스펠라의 존재에 대해 눈치를 챌 것이다.

아스펠라는 아직 칼리우스에게서 정확한 계획을 듣지 못했으나, 일단 그의 말대로 유디티아 후작저의 온실을 울창하게 가꾸기로 했다.

“사람들이 절 무서워하면 어쩌죠?”

사실 아스펠라는 이 온실을 가꿀 때 에르윈 성의 온실만큼 만들어내는 것에 걱정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단 며칠 만에 씨앗에서 싹이 자라고 그 싹이 순식간에 성체로 자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에르윈 성의 사용인들은 칼리우스의 변화를 알고 있는 만큼 이런 초자연적인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나, 이곳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에르윈 성과 후작저의 사용인들은 다르니까요. 만약, 후작 부부가 절 무서워하면 어쩌죠?”

아스펠라는 유디티아 후작이나 후작 부인이 저를 마녀로 생각하면 어쩌나 걱정하는 듯했다. 칼리우스는 태연하게 말했다.

“여기 매달 개로 변하는 놈도 있는 걸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귀족들은 식물을 잘 자라게 하는 여인보다는 짐승으로 변하는 대공 쪽에 더 관심을 가질 겁니다. 아마 내 모가지를 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여겨 아스펠라가 도망가도 모를 걸요.

아스펠라는 뭐 그런 무서운 말을 태연하게 하냐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내 말은,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일단은 파베스에게 당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아스펠라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사람들을 위해 능력을 쓰는 것처럼 구세요.”

칼리우스의 말에 아스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이 한번 퍼지면 파베스가 접근할 겁니다. 그때쯤엔 내가 손을 써둘 거예요. 당신이 위험해질 일은 없을 겁니다.”

아스펠라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사냥제에 참가하는 거죠?”

“내키지 않는다면 한나와 같이 별장에서 지내도 됩니다.”

“아뇨. 저도 한번 봐야겠어요. 국왕이라는 사람의 낯짝을요.”

아스펠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얼마나 미치광이일까. 분명 눈은 풀려 있으며 성질 고약해 보일 거야.

“그런데 칼리우스. 국왕을 저지하려면……그를 죽여야겠죠?”

“그렇지 않겠습니까.”

왕을 죽여야 한다는 것은, 즉 반역을 일으키는 것인데 칼리우스는 어째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만약 실패하면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아스펠라는 어쩜 저렇게 확신에 차 있을 수 있는 건지 궁금했다.

희미하게 미소 짓는 입매가, 저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저 눈빛이, 대체 뭘 숨기려는 걸까.

후작저의 사용인들은 사이좋게 딱 붙어 나가는 저 둘이 감히 국왕을 몰아낼 궁리를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

일카이는 며칠간의 원정을 마치고 대공성에 돌아오자마자 아스펠라를 찾아다녔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모습에 일카이는 결국 펠킨을 찾아가 물었다.

“보좌관님. 아스펠라 보셨습니까?”

일카이의 말에 펠킨이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아스펠라 양은 잠시 각하와 함께 블레드 성에 계십니다. 며칠 뒤에 돌아오실 예정이니 너무 걱정 마시지요.”

“휴가를 갔다고요? 단둘이?”

“단둘이는 아니고요, 유디티아 후작 부부 내외와 함께 가셨습니다.”

펠킨의 말에 일카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들고 있던 약방 영감이 준 약재 꾸러미를 들어올리며 중얼거렸다.

“이거 빨리 먹여야 한댔는데.”

“그게 뭔가요?”

“저도 모릅니다. 약방 영감 말로는 이걸 꼭 먹여야 한다고 했을 뿐이라. 아스펠라는 정확히 언제 돌아오는데요?”

“글쎄요……. 각하께서 꽤 오랜만에 가신 휴가인지라 한 일주일 정도는 계시지 않을까요?”

그의 말에 일카이는 약방 영감의 말을 떠올렸다.

‘이맘때쯤이면 항상 앓아. 아마 보름달이 들 때쯤부터 시작될 거야. 앓기 시작하는 초반에 약을 먹여야 좀 덜 앓으니 자네가 꼭 좀 전달해주게.’

보름달이 뜨기까지는 이제 나흘 정도 남지 않았는가.

일카이는 결심한 듯 이내 펠킨에게 물었다.

“블레드 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

성안으로 돌아온 아스펠라를 반기는 것은 수많은 상인들이었다. 아스펠라는 응접실 안에 바글바글 개미들처럼 들끓는 상인들을 보며,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놀란 눈으로 한나를 쳐다봤다.

“어머, 아스펠라! 드디어 왔군요!”

방 안쪽에서 수많은 상인들에게 둘러싸인 한나가 아스펠라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스펠라가 한나 곁으로 다가갔다. 유디티아 후작은 제 아내에게 어울리는 보석들을 하나하나 직접 고르며 “이건 어때? 이건 마음에 들어?” 하며 일일이 물어보고 있었다.

한나는 아스펠라 뒤를 졸졸 따라온 칼리우스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칼리우스. 필립 좀 말려줘. 당신이 부른 상인들이잖아.”

아스펠라의 연회 준비를 위해 불러들인 상인들이었는데, 어째 유디티아 후작이 제일 신나 보였다.

칼리우스는 상인들을 둘러보더니, 이내 허버트를 불렀다.

“대금을 모두 치루고 다 돌려보내.”

그 말인즉슨 그들이 가져온 물건을 모두 사들인다는 뜻이었다. 상인들이 더 신나서 물건들을 꺼내 보였다. 칼리우스는 복작대는 것이 그저 피곤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허버트가 일단 물건들을 모두 놓고 가라며, 대금을 치룰 테니 따라오라 하자 장터마냥 시끄럽던 응접실이 그제야 조용해졌다.

시종들이 들어와 상인들이 두고 간 온갖 패물들을 한데 정리한 뒤, 조용히 하나하나 꺼내 보이기 시작했다.

필립과는 달리 칼리우스가 괜찮아 보이는 것은 오른쪽, 별로인 것은 왼쪽으로 무심하게 고갯짓을 했다. 칼리우스의 안목은 워낙에 빼어났기에, 한나는 제 남편의 안목보다 칼리우스의 안목을 더 믿는 편이었다.

얼추 패물들을 나눈 칼리우스가 별로인 것들은 창고에 넣어두라 명한 뒤 고개를 돌려 말했다.

“필립. 내 별장을 장터로 만들지는 마.”

“미안. 너무 신이 났어. 참, 한나가 아까 전에 아스펠라 양한테 어울릴 만한 드레스들을 모두 골라놨는데!”

“원래는 아스펠라 양이 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그치들이 다른 가문도 돌아야 한다고 지금이 기회라고 장사를 하지 뭐야. 내가 일단 제일 예뻐 보이는 것들만 빼뒀어요. 마음에 들게 골랐을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말한 한나가 시녀들에게 드레스들을 가져오라 손짓했다. 시녀들은 드레스가 잔뜩 걸린 행거와 함께 옷감이 들린 박스들을 들고 왔다.

“아스펠라 양은 처음 하는 데뷔탕트잖아요?”

“칼리우스. 자네도 와서 빨리 같이 골라줘.”

이런 건 혼자 고르는 것보다 다 같이 고르는 것이 묘미라며 후작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칼리우스는 의외로 유심히 옷감들과 드레스 디자인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데뷔탕트라니. 아스펠라는 그 단어만 떠올려도 긴장되는 듯 잠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괜히 제 두 손을 만지작댔다.

‘데뷔탕트를 하게 된다는 건, 다른 귀족들도 다 만난다는 소리겠지?’

아스펠라가 생각하던 찰나, 칼리우스가 물었다.

“아스펠라. 이건 어떱니까?”

칼리우스가 드레스 하나를 꺼내 보였다. 아스펠라의 금발과 녹안에 잘 어울릴 만한 진녹색의 실크 드레스였다.

작은 장미 덤불 모양의 자수가 치마 밑단과 소매 부분에 자잘하게 수놓아져 있고, 장미색의 벨벳 리본이 가슴팍에 포인트로 달린 드레스는 빛의 각도에 따라 녹색으로 보이다가도, 진한 푸른빛을 띠는 특이한 원단이었다.

“마음에 들어요.”

과한 러플이나 켜켜이 쌓인 레이스 장식을 부담스러워하는 아스펠라의 마음에도 쏙 들면서, 그렇다고 사람이 소박해 보이지만은 않는 무거운 실루엣을 가진 형태였다.

“딱 어울리네! 장미 덤불 속에 파묻힌 거같이! 아스펠라 양이랑 칼리우스가 손잡고 들어가면, 아마 다들 한바탕 난리가 나겠군!”

“그럼 칼리우스도 비슷한 색의 옷으로 맞추면 되겠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거예요!”

한나는 벌써 상상만 해도 짜릿한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후작도 맞장구를 쳤다.

“하하, 칼리우스한테 구혼했던 영애들이 배 아파하겠는데!”

딱 여기까지만 말하면 참 좋았을 것을.

“엘린이 울지도 모르겠네!”

일순간 방이 조용해졌다. 한나는 경악하는 얼굴로 제 남편을 쳐다보다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질렀고, 유디티아 후작은 헙, 숨을 들이키며 제 입을 때렸다.

엘린이 누군진 모르겠으나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아마, 일방적으로 파혼 통보를 받았다던 영애 아니겠는가.

“아, 아니 내 말은, 아스펠라 양이 매우 아름다울 거라고……그, 그래서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한 쌍이 될 거라고…….”

수습은 불가능했다.

아스펠라는 애써 부글부글 끓는 속을 꾹 내리 누르며 싱긋 미소 지었다.

“네. 저도 이 드레스가 마음에 드네요. 참.”

그렇게 말한 아스펠라는 저도 모르게 야속한 마음에 유디티아 후작을 노려봤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쯤 되면 다른 누구한테 사주라도 받는 것 아닌가?

‘왜 자꾸 과거 일을 들먹이는 거야, 씨이.’

혹여나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저런 말은 하는 것이라기엔, 유디티아 후작이 보여 주는 호의에는 정말이지 순수함 그 자체가 느껴졌다.

뭐 얼마나 눈치가 없으면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대신 미안해하는 한나의 눈빛에 아스펠라는 별수 없다 생각했다.

때마침 만찬 시간이 되었고, 식사를 마친 후작 부부는 자신들이 머무는 별관으로 돌아갔다.

마차에 탄 한나가 제 남편의 등짝을 찰싹 내리치더니, 이내 창문 밖으로 배웅 나온 칼리우스에게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미안해. 어떡하면 좋아. 아스펠라 양도 이번엔 정말 화난 눈치던데. 정말이지, 내가 당신 입조심하라고 했잖아!”

한나의 고함에 필립이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칼리우스에게 말했다.

“미안해……. 그, 그치만 칼리우스, 자네가 나한테 계속 나불대라고 했잖아.”

“나불대라는 게 이런 걸 말하는 거겠어, 여보?!”

못살아 진짜! 한나의 성에 후작은 더 쪼그라들었다.

칼리우스가 픽 웃으며 말했다.

“네 그 눈치 없음이 유용할 때가 생기다니. 오래 두고 볼 일이군. 잘했네, 필립.”

그렇게 말한 칼리우스는 이만 마부에게 출발하라는 듯 마차를 툭툭 두드렸다.

한나가 “잠깐, 너 설마!” 하며 물으려 했으나 이미 마차는 출발하고 말았다.

칼리우스는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다 이내 얼른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발걸음이 가볍다.

***

아스펠라는 침실로 들어왔다. 간단히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누워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갑자기 퍼덕이며 몸을 일으키더니, 침대에 앉아 베개를 주어패기 시작했다.

골목대장 꼬마들끼리 서로 투닥거리듯, 아스펠라는 한참 동안이나 베개를 붙잡고 주먹으로 연신 때려댔다. 끄트머리를 잡고 매트리스에 내려치기도 했으며, 박치기를 하다가, 또 다시 주먹으로 정중앙 부분을 가격했다.

빵빵하게 거위털이 차 있던 베개가 이리저리 쪼그라들었으며, 거위 털 몇 가닥이 허공에 휘날렸다.

그래도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것인지 아스펠라가 중얼거렸다.

“아니, 근데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거지?”

유디티아 후작이야 원래 눈치 없는데다가 말실수를 잘 한다지만, 아스펠라는 어째서인지 후작 말고도 계속 뭔가에 화가 나 있는 기분이 들었다.

본인이 지금 정확히 뭐에 화가 나 있는지 모르겠으니 그저 답답한 마음이었다. 살면서 이런 감정은 처음 느껴보지 않던가.

“왜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싫다고 느껴지는 거지? 어떤 사람일 줄 알고.”

아스펠라가 중얼거렸다.

“……난 왜 칼리우스한테 화가 나는 거지?”

그의 잘못이라고는 하나 없는 것 아니던가. 다른 이성을 만나는 것이야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 아니던가.

게다가 칼리우스는 어디 저처럼 산속에서만 평생을 살았던 것도 아니니, 다른 여인을 만났든, 다른 여인과 공식적인 혼담을 주고받았든 그건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런데, 어째 계속 부글부글 몸 안쪽에서 용암이 끓는 기분이었다.

답답하다.

묻고 싶은 것을 묻지 못해 답답하다!

아스펠라는 급체라도 한 것마냥 주먹을 쥐고 제 가슴팍 부근을 퍽퍽 내려쳤다.

“베개로는 부족해요?”

낮은 음성에 아스펠라가 화들짝 놀라며 문 쪽을 쳐다봤다. 칼리우스가 문에 기댄 채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와 있었어요?”

“침대에서 퍼덕이는 순간부터.”

그럼 완전 처음부터 다 봤다는 것 아닌가. 아스펠라가 눈을 도르르 굴리더니 이내 야속한 듯 웅얼거렸다.

“문 두들기지.”

“문 두들겼는데요. 이름도 부르고. 근데…… 열심히 베개를 때리느라 못 들은 것 같아서.”

“가만히 아스펠라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며 칼리우스가 대답했다.

아스펠라는 빨개진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진정했어요.”

“진짜요?”

“네.”

“들어가도 됩니까, 그럼?”

“…….”

잠시 눈만 깜빡거리며 생각에 잠긴 듯한 아스펠라가, 이내 결심한 듯 말했다.

“아뇨.”

“왜요?”

“말하기 전까진 못 들어와요.”

뭘 말해야 하냐는 눈빛으로 아스펠라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에, 아스펠라가 이내 비장한 얼굴로 물었다.

“진짜 영애들이랑 데이트 많이 해봤어요?”

“구혼서를 보낸 이들이랑은 한 번씩 만나봤습니다. 나도 계승할 가문이 있다 보니, 아예 안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원로 귀족들 성화도 있었고요.”

그는 꽤나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더니, 이내 한 발자국 안으로 들어오는 것 아닌가.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질문 하나 할 때마다, 한 발자국씩 가는 걸로.”

능글맞은 그의 행동에 기분이 상해 나가라고 하고 싶은데도, 이상하게 궁금한 것은 너무 많았다. 정확히 무엇이 궁금한 건지 본인조차도 모르면서.

아스펠라가 이내 그를 쳐다보다 물었다.

“그중에서 따로 오래 만난 영애가 있어요?”

“다들 한 번씩 차 마시고 산책하고, 거기서 끝났습니다.”

대답한 칼리우스가 한 발자국 옮기려하자 아스펠라가 으응, 소리를 내며 아직 부족하다는 듯 손짓을 했다.

“……대개 상대 쪽에서는 더 만나길 원했지만. 그때 저는 일에 조금 더 치중하느라. 딱히 만나고 싶은 영애도 없었고, 애초에 영애들의 구혼서를 받아들인 것도 나나 펠킨이 아닌 에르윈 가문의 원로들이었습니다. 이후 산신 토벌 작전에 투입되어 성에는 더더욱 머무르지 않게 되었고요.”

답변이 되었습니까? 그의 질문에 아스펠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제야 칼리우스는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뾰로통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손만 까닥이는 그 모습이 맹랑하여 칼리우스는 웃음이 터지려 했으나, 워낙 진지한 아스펠라의 모습에 애써 웃음을 참았다.

“엘린은 누구예요?”

“파르나스 후작가의 영애입니다. 장녀라 후작 가문의 차기 가주가 될 여인이죠.”

“……공식적인 약혼까지 했던 분 같은데.”

“네. 약혼까지 한 사이긴 했죠.”

그 사이가 매우 각별했다던데. 그 각별하다는 뜻은 도대체 어디까지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스펠라는 알아봤자 자신이나 칼리우스의 사이에 하등 도움 안 되는 이 진실, 그리고 그걸 궁금해하는 자신에 둘 다 화가 치밀었다.

그러는 사이 칼리우스는 놓치지 않고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아스펠라 앞까지 몇 발자국 안 남은 상태.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으면서 뒷짐을 지고 질문을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그분이랑 사이가 많이 좋으셨다 들었는데…… 왜 약혼 파기를…….”

“아스펠라. 궁금한 건 그게 아닐 텐데요.”

그렇게 말한 칼리우스가 “아직 요령이 없군요.”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손 잡았어요?”

“네. 아무래도 2년 가까이 만나긴 했으니까.”

아스펠라의 입이 떡 벌어졌다. 2년을 만났다고? 2년 가까이 각별한 사이로?

아스펠라는 꽤나 놀란 듯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뽀뽀했어요?!”

질문을 마치자마자 아스펠라는 자신이 판도라가 된 기분이었다. 상자를 막 열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너무 궁금해서 열어선 안 되는 상자를 열고 말았구나. 결국 그 안에 든 걸 확인했을 때의 기분이란 이런 걸까.

뽀뽀하지 않았겠는가. 아스펠라는 다른 누구와 입을 맞춰본 적이 아예 없었지만 처음 칼리우스와 입을 맞췄을 때 ‘아, 되게 잘한다!’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더랬다.

그건 필시 경험이 많아서였을 터.

“아뇨. 안 했습니다. 나, 아스펠라가 다 처음인데.”

“거짓말.”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습니까? 어째 거짓말이길 바라는 느낌인데.”

“그럼 왜 그렇게 능숙한데요? 난 스킨십 하나하나 조심스럽고 설레는데, 칼리우스는 영 이거저거 많이 해본 솜씨던데요? 동정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아요. 기대도 않는다고요. 딱히 그런 거에 연연하진 않지만……. 그치만, 적어도 소중하면 조심스러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 혼자만 조심스러운 거 같아요. 칼리우스는 절 막 만지는 게 쉬운가요?”

내가 쉬워 보이나요?

이렇게까지 말하려던 것은 아니었으나,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그동안 꾹 참아왔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불공평하다 여긴 것은 이런 것이었다. 아스펠라는 그를 만질 때마다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고 조심스러운데, 저쪽은 그렇지 않아 보여서.

아스펠라는 사랑이란 단단한 땅에 깊은 뿌리를 내린 미모사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너무 뜨겁지도 않고 너무 춥지도 않은 반그늘에서 조용히 싹트는 사랑 말이다. 너무 많은 빛을 받아서도 안 되나, 그렇다고 빛이 부족하면 잎을 꾹 닫아버리는 것.

지반이 마르지 않게 적당히 적셔가며 잘 키우면 잎들이 만개한다. 그것이 사랑스럽고 신기해 툭툭 건드리면 부끄러운 듯 잎을 닫아버린다.

너무 많이 건드리면 쉽게 지쳐버리니, 이따금 신경을 써주면서도 가만히 바라봐줘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아스펠라 앞까지 다가온 칼리우스가 씩 웃으며 아스펠라를 내려다봤다.

“아스펠라를 쉽게 여긴 적 없습니다.”

하지만 칼리우스는 그렇게 멀리서 가만히 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뿌리 채 뽑아, 화분에 옮겨 심은 뒤 자신의 침실에 두고 매일매일 바라보는 편이었다.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다가, 건들고 싶을 땐 툭툭 건드려야 한다. 그 반응이 재밌기 때문이다.

“그냥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겁니다. 난 좋아하면 계속 만지고 싶어요. 아스펠라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으니 이제부터는 자제하겠지만, 굳이 마음을 서로 확인한 우리가 자제해야 할 필요가 있나 생각합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아스펠라 옆에 앉더니, 이내 아까 전의 난리로 산발이 된 아스펠라의 머리칼을 조용히 정리했다.

“능숙하다는 말은 나쁘지 않네요. 내가 잘했다는 건가? 아스펠라를 기분 좋게 만들었나 보죠?”

“…….”

“그리고 본인은 신경 안 쓴다곤 하지만 엄청 신경 쓰는 것 같아서 말하겠습니다. 나 동정입니다. 다른 여자랑은 입도 맞춘 적 없고 같이 뒹군 적도 없습니다. 아스펠라가 다 처음이에요. 이제 좀 의문이 풀렸습니까?”

“진짜요?”

“네.”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아스펠라는 잠시 마뜩잖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지금 저 되게 같잖다고 생각했죠? 이런 걸 물으니까……. 너무 어린애처럼 굴었나요?”

“아뇨. 아주 좋은걸요. 계속 그렇게 질투해주세요.”

“질투요?”

“네. 질투요.”

기분 좋은데요. 내가 아스펠라 이외의 인물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화내주는 게.

칼리우스의 말에 아스펠라가 충격받은 듯 눈을 끔뻑였다.

이게 질투란 말인가?

아스펠라는 살면서 질투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 없었다. 그야 당연한 것이, 다른 누군가를 미워해볼 정도로 부러워해본 적이 없지 않은가.

아스펠라는 그제야 자신이 무엇에 그렇게 화가 났던 것인지 알게 되었다.

칼리우스를 완전히 독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당연히 몰랐던 그의 과거에 대해 모두 알고 싶어 하고, 그가 다른 여인들을 만났다는 사실과 누구 하나는 그의 처음을 취했을 것이라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부러움이 고양되어 격렬한 적의까지 느끼다니.

아스펠라는 살다살다 이렇게나 유치한 감정을 느끼게 되어 당황스러워 보였다.

“계속 그렇게 질투도 해주고, 집착도 해줬으면 합니다.”

그의 말에 아스펠라가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싫어요.”

“왜요?”

“이건 제가 알던 제가 아니란 말이에요. 전 원래 이런 감정 느껴본 적 없는데, 칼리우스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여러 감정들이 나타난단 말이에요.”

평화로운 들판과도 같았던 아스펠라의 내면이 어째 울퉁불퉁 산등성이가 솟아오른 것처럼 변하고 말았다.

아스펠라는 평소의 무심하고 무던한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지금의 자신은 너무 감정 기복이 심하다.

“아스펠라. 내가 일전에 그러지 않았습니까. 당신도 딱 나만큼만 겪어봤으면 좋겠다고. 그게 이제야 왔나 보군요. 예상보다 많이 늦어졌습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우스가 이내 아스펠라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럼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아스펠라도 날 만지고 싶어 안달 나겠네요. 조금만 더 기다려볼지, 아니면 자꾸 도망치는 당신을 잡아둘지 고민됩니다.”

아스펠라의 몸이 침대 뒤로 넘어갔다. 칼리우스의 양팔에 갇힌 아스펠라를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미묘했다.

“그동안 내가 그랬습니다.”

“네?”

“나는 사냥꾼한테도 질투했고, 그 하얀 개새끼한테도 질투했고, 너구리 영감은 물론 온실 속의 화초들한테도 질투했어요. 인간인 나보다 마수로 변하는 날 더 좋아하는 듯해 이대로 입 다물고 깜장이로 지낼까 생각도 할 정도로요.”

당신은 감히 상상도 못 할 것이라 말한 칼리우스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스펠라. 내가 너 때문에 어디까지 유치해 지는지 당신은 정말 상상도 못할 거야.”

“……그게 무슨 뜻이에요?”

“무슨 뜻이긴. 당신한테 절절 맨다는 소리지. 봐요. 지금도 내가 질투를 구걸하기 전까진 아무 생각도 없었잖아.”

고작 질투 좀 느낀 거 가지고 그렇게 창피할 필요는 없었다.

칼리우스는 아스펠라한테 질투받고 싶어 별짓을 다 하지 않았던가. 헬렌이고 필립이고, 아스펠라에게 과거 일을 흘리도록 유도하지 않았는가.

“솔직히 지금 난, 당신이 어렸을 때 만났다는 첫사랑도 짜증 나. 난 당신이 모두 처음인데 그대는 아니잖아.”

한쪽 손으로 아스펠라의 말랑한 뺨을 쥐었다. 아스펠라의 입이 볼살에 붕어처럼 오므라들었다. 칼리우스는 그런 아스펠라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도 이렇게 변했는데 당신도 같이 변해야지. 공평하게.”

“…….”

“이런 말 하니까 질립니까, 내가?”

아스펠라가 고개를 도리질했다. 칼리우스의 눈이 곱게 접히더니 초승달 모양이 되었다. 그 안에 이채를 띠는 금안이 유혹적이었다.

“나도 아스펠라가 뭔 짓을 하든 질리지 않으니 걱정 말고 질투하세요. 난 그런 거 좋아하거든.”

그동안은 너무 평소와 같아 서운할 지경이었다고 말한 칼리우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아스펠라가 얼른 그를 따라 상체를 들어올렸다. 그가 잡은 뺨이 아프진 않았으나, 빨갛게 볼에 자국이 남았다.

“……첫사랑 아니에요. 거짓말 한 거예요. 사실 얼굴도 기억 안 나요.”

“그래요?”

아스펠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너무 경험 없으니까, 괜히 지고 싶지 않았거든요. 근데…… 진짜 칼리우스 동정이에요?”

“네.”

“근데 왜 그렇게 능숙해요?”

“그야 아스펠라 보면서 맨날 상상했으니까요.”

원래 이렇게까지 직설적이고 말을 걸러 하지 않았던가 싶을 정도의 발언에 아스펠라가 잠시 멍해졌다.

이런 변태 같은 말을 들으면 사람이 좀 별로여야 하는데, 칼리우스는 그마저도 소화했다.

제 눈에 콩깍지가 낀 걸까. 아스펠라는 발그레 볼을 붉힌 채로 헛기침을 했다.

“첫사랑이 없다 그랬으니, 그럼 아스펠라도 내가 처음이겠군요.”

칼리우스가 요사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스펠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전에 입양되었다는 얘기는 뭡니까?”

이번엔 자신이 궁금한 것들을 답해 줄 차례라며 칼리우스가 물었다.

“예전에, 입양된 적이 있었어요. 비르가는 인간인 내가 인간의 손에 자라는 게 좋다 생각해서……. 근데 잘 기억은 안 나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들은 절 사랑하는 듯했지만 결국은 버렸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비르가가 옆에 있었거든요.”

아스펠라는 잠시 초점을 잃은 채로, 뭔가 곰곰이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눈동자는 칼리우스가 아닌, 그 남자애를 바라보는 듯 바닥 아래쪽을 향한 채로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그 남자애는, 옆집이었던가? 아니, 어디서에서 만났던 애예요. 같이 도망갔었던 아이. 같이 도망갔었는데……어떻게 되었더라?”

뿌연 안개처럼 스며드는 잊힌 기억에 아스펠라가 인상을 찌푸리자 칼리우스는 그만 말해도 된다며 아스펠라를 다독였다.

“하지만, 칼리우스는 다 말해줬잖아요.”

“그렇다고 억지로 기억도 안 나는 일을 떠올리게 하고 싶진 않습니다.”

아스펠라의 기다란 머리칼을 살살 쓸어내리며 칼리우스가 말했다.

아스펠라는 그런 칼리우스를 잠시 가만히 쳐다보다 이내 갑자기 그를 껴안았다. 물론, 몸집이 작아 아스펠라가 먼저 껴안았음에도 불구하고 안긴 듯한 폼이 되었지만.

칼리우스가 당황한 듯 큰 손으로 아스펠라 등 언저리를 배회하다 이내 어설프게 끌어안았다.

그렇게나 들이댈 때는 언제고, 막상 아스펠라가 먼저 스킨십을 하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오호라!’ 아스펠라는 뭔가를 깨달은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그날 밤 아스펠라는 칼리우스의 품에 껴안긴 채로, 창밖 너머 보이는 커다랗고 흰 달을 가만히 쳐다봤다.

자신을 껴안고 있는 이 든든한 팔뚝과 커다란 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스펠라는 깊은 잠에 들 수 없었다.

불안할 거 하나 없는 이 평화로움 속에서, 아스펠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건 질투나 적의 같은 감정이 아니었다. 마치 이전에도 이곳에 와본 듯한 데자뷔 같은 느낌.

창 너머 보이는 산의 풍경, 화려한 성의 천장 부조, 특히나 바깥에서 들려오는 고성의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까지. 심지어는 창 밖에서 들려오는 바람의 소리까지도 익숙한 느낌이었다.

아스펠라가 뒤척일 때마다 칼리우스는 아스펠라의 등이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마침내 아스펠라는 피곤함이 뚝뚝 떨어지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런 아스펠라의 얼굴을 천천히 들여다보던 칼리우스도, 몇 번 머리를 뒤로 넘겨 정리해준 뒤 역시 잠을 청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 때였다.

바스락대며 움찔대는 기척에 칼리우스가 눈을 떴다.

“아스펠라?”

“……지, 마……. 하지…… 마!”

아스펠라는 마치 뭔가에 붙잡힌 듯 도망치려 손을 허우적대고 있었다. 칼리우스는 아스펠라를 진정시키기 위해 얼른 몸을 일으켜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아스펠라!”

“아아악!”

잔뜩 공포에 질린 얼굴로, 자지러지듯 비명을 지르는 통에 바깥에 있던 집사와 시녀들이 문을 두드렸다.

“아스펠라!”

“사, 살려줘, 살려줘요! 살려주세요! 헉! 허억, 허억……!”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의 어깨를 잡고 흔들자, 아스펠라가 번쩍 눈을 뜨며 얼른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헉, 헉. 밭은 숨을 몰아 내쉬며 상황을 파악하려던 아스펠라가 잠시 후, 거친 숨을 꾹꾹 삼키며 숨을 골랐다.

칼리우스는 아스펠라를 일으켜 등을 쓸어주며,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아스펠라의 어깨 위에 로브자락을 덮어준 뒤 시종들에게 물을 떠오라 시켰다.

“아스펠라, 나 좀 봐요. 응?”

어깨를 덜덜 떨며 몸을 웅크리는 아스펠라의 모습에 칼리우스가 잔뜩 당황했다.

혹여나 또 아스펠 산에 무슨 일이라도 발생하여 저번처럼 발작을 일으킨 걸까. 다른 이를 불러 아스펠 산 쪽을 확인해보라 말하려던 찰나였다.

“아니에요, 칼리우스. 아스펠 산이 아니라…….”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아스펠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그냥, 악몽이에요. 별거 아니에요.”

헬렌이 데운 물을 가져와 아스펠라에게 건넸다. 아스펠라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었다. 별거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치고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별거 아니기는, 당신 지금 이렇게 떠는데! 헬렌, 가서 의사를 불러와.”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정말이에요.”

아스펠라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어차피 의사가 와도 제대로 된 병명조차 모를 것이다. 애초에 이건 병이 아니었다.

아스펠라의 눈빛을 읽은 칼리우스가 이내 헬렌을 내보냈다.

따듯하게 데운 물을 마시고 조금 진정한 아스펠라가 말했다.

“예전부터 계절이 바뀌는 이맘때쯤 항상 꾸던 꿈이에요. 잃어버린 기억이지만, 예전의 일이 단편적으로 꿈에 나타나는 건데……항상 이래왔어요. 증상이 심해지면, 약방 영감님을 찾아가면 돼요.”

“증상이라뇨?”

“가끔, 심장 부근이 심하게 아플 때가 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아스펠라가 자신의 심장 부근을 가리켰다. 살이 부풀어오른 하얀 흉터가 유난히 진해 보인다.

“언제 생긴 상처입니까?”

“입양된 이후에요. 비르가가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어서 왜 생긴 건지 몰라요. 기억나는 것도 없고. 그런데 이렇게 가끔 꿈으로나마 단편적으로 떠올라요. 그리 좋지 않은 기억이니 무의식적으로 악몽처럼 떠올려지나 봐요.”

그러니 너무 걱정 말라며, 원래 이런다며, 진짜 별거 아니라고, 항상 이래왔다고, 매년 겪는 거라 이제 익숙하다고, 너스레웃음을 지었다.

칼리우스의 얼굴이 심각해질수록 아스펠라의 말도 빨라졌다.

“저 진짜 괜찮다니까요.”

결국 아스펠라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걱정되면 이렇게 손 잡아주세요. 그럼 저도 악몽 안 꾸고 잘 수 있을 거 같아요.”

칼리우스는 한숨을 내쉬다 이내 아스펠라의 손에 깍지를 끼곤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아스펠라가 생긋 웃으며 피곤한 듯 다시 눈을 감았다.

심장 부근에 살이 저렇게 부풀어 오를 정도의 흉이 진 것이라면, 그건 죽으라고 공격한 것이 아닌가. 마치 찔러 넣은 것처럼 짧고 깊은 상처였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괜찮을 리가 없지 않은가.

***

다음 날이 되자 아스펠라는 어젯밤 언제 그렇게 앓았냐는 듯 쌩쌩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아마 칼리우스를 의식해서 평소보다 더 과하게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칼리우스는 서재에서 창밖으로 아스펠라와 유디티아 부부가 피크닉 하는 것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필립이 근처에서 꽃을 꺾어 오면, 아스펠라가 능숙하게 화환을 만들고, 한나가 신기한 듯 박수를 치며 저들끼리 신나게 놀고 있었다.

그러다 아스펠라가 고개를 들어 유리창 너머 칼리우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칼리우스는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로 있다가 이내 손을 가만히 들어 보였다.

마치 ‘나 잘 있다’ 보고라도 하는 듯한 아스펠라의 모습에 픽 웃음을 흘리던 칼리우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뒤돌았다.

소파에는 펠킨과 일카이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아침 일찍부터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

“그게, 일카이 군이 이걸 꼭 전해드려야 한다고 해서요. 각하.”

펠킨이 얼른 칼리우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휴가를 방해해서 죄송하지만, 아스펠라한테 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아스펠라를 만나게 해주시면 제가 직접 전달하겠습니다.”

일카이를 가만히 쳐다보던 칼리우스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보다, 마침 자네를 불러들이려 했는데. 잘 와줬어.”

“절요?”

갑자기 태도를 바꿔 온건한 모습을 보이는 칼리우스에 일카이가 미심쩍은 눈빛을 보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귀찮은 떨거지’, ‘귀찮은 애새끼’ 혹은 ‘귀찮은 방해꾼’ 등의 시선으로 훑어보던 대공 아니었던가.

“그래. 내가 자네한테 긴히 할 말이 있었거든.”

적당한 때를 찾지 못해 참 애석한 상황이었는데. 자네가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오니 지금 말해야 하는 거겠지.

그 눈빛에 장난스러움은 묻어나지 않았다.

“사라에 대한 얘기야.”

“제 누이요?”

“어쩌면 네가 그렇게 궁금해한 누이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고.”

그의 말에 일카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비밀이라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저를 쳐다보는 일카이의 모습에 칼리우스가 씩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출생의 비밀일지도 모르겠군.”

“각하!”

칼리우스의 말에 펠킨이 당황한 듯 얼쯤하게 몸을 반쯤 일으켰다. 마치 그를 말리려는 듯한 모양새에 일카이가 고개를 돌려 펠킨과 칼리우스를 번갈아 쳐다봤다.

“……출생의 비밀이라뇨?”

“내가 걱정이 되는 건, 자네가 모든 걸 알았을 때 과연 사라처럼 행동할 수 있냐는 거야.”

그러자 이를 반대하는 듯 펠킨이 끼어들었다.

“각하, 잠시만요. 어찌 이런 건에 대해 저와 상의도 없이.”

“그럼, 알려주지 말라는 것이냐, 펠킨.”

혼란스러운 상황에 일카이가 벌떡 일어났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누이의 죽음에 대해 한 핏줄을 나눈 동생이 알 권리는 당연히 있는 것인데, 제 앞에서 알려줄지 말지 서로 상의를 하시다뇨. 이런 식으로 각하께 휘둘릴 생각 없습니다. 제 누이의 죽음을 볼모 삼아 절 괴롭히시려는 것 같은데…….”

“앉아. 내가 할 일이 없어서 그딴 걸 볼모 삼아 자넬 괴롭히겠나? 널 괴롭혀서 얻는 게 뭐가 있는데.”

알고 보니 꽤나 자의식 과잉인 면이 있다며 피식 웃는 칼리우스의 말에 일카이가 제 입술을 짓이기며 그를 노려봤다.

“내가 고민하는 건 자네의 그 하등 도움 안 되는 다혈질의 성격이야.”

대공인 칼리우스의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그 모습은, 칼리우스에게는 그저 당돌한 정도로 다가올지 몰라도 국왕 파베스나 다른 귀족들에게는 다르다.

“내가 자네 편의를 꽤나 봐준다는 거는 알고 있겠지. 그러니 감히 내게 그런 무례를 보이는 거겠지.”

일전에도 말했다시피, 내가 그런 널 봐주는 이유는 딱 하나야. 아스펠라가 그러지 않기를 바라니까.

칼리우스의 말에 일카이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칼리우스는 아까 전 일카이가 앉아 있던 의자를 가리키며 이제 그만 앉아, 하는 눈빛을 보냈다.

천천히 자리에 앉은 일카이가 잠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권력을 갖고 싶은가?”

“예?”

“권력. 신분 말이야. 사냥꾼 조합의 대장이라 한들 남작보다도 취급 못 받는 것이 현실이지.”

칼리우스의 말에 일카이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누구나 권력과 신분 상승을 원하지 않는가.

“기회를 주면 제대로 잡을 수는 있고?”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탁, 탁, 탁.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규칙적인 타음이 울렸다. 상석에 앉은 칼리우스가 이내 손가락과 함께 일카이를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며 창밖을 바라봤다.

“난 자네를 미워하지 않네. 성가시긴 하지만 꽤나 유용한 인물이 될 거라고 생각하거든.”

“…….”

“자네에게 아스펠라를 빼앗길 거란 생각 자체도 하지 않아. 그러니 내가 이런 제안을 하는 거고.”

멀리서 후작 부인과 활짝 웃고 있는 아스펠라를 보던 칼리우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일카이를 쳐다봤다.

“난 자네를 내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 기꺼이.”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후에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겠다는 말이지. 네가 충성만 맹세한다면. 사실, 그럴 수밖에 없을 거야. 네 볼모는 누이의 죽음이 아니라, 아스펠라일 테니까.”

꽤나 불친절한 설명이라 생각하려던 찰나, 이전의 것들보다 더 강력하고, 더 불친절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사냥제가 끝나면 넌 대공성을 떠나 왕궁에 들어갈 거다.”

“예? 잠시만요, 전 간다는 말도 하지 않았…….”

“국왕의 배다른 동생이자, 실종되었던 선왕의 정부 메리안의 아들로서.”

일카이는 잠시 뭔가에 뒤통수를 세게 후려 맞은 것마냥 멍한 기분이 들었다. 이내 든 생각은 ‘날 어지간히 놀리려는 심산이군.’이었다.

헛웃음을 지으며 칼리우스를 쳐다봤지만, 대공의 얼굴에 웃음기란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무슨…….”

“사라를 죽인 건 국왕이야. 그의 기억 속에 메리안의 자식은 그녀 하나뿐이었으니. 후에 불온한 싹을 미리 자르려던 속셈이었겠지.”

“누이는 권력에 욕심 없었습니다.”

“파베스도 그리 생각할까? 사라는 파베스가 가장 아끼는 것을 건드렸어.”

“아끼는 것을요?”

아낀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가장 집착하는 것이라 해야 할까.

“그래. 선왕이 잡아 놓은 검은 마수를 도망갈 수 있도록 몰래 풀어줬거든. 그러니 당연히 자신에 대항할 존재라고 생각했겠지.”

일카이는 더 이상 받아들이기 힘든 듯 고개를 내저으며 애써 제정신을 붙들려 했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검은 마수라면…….”

“그래. 사라를 죽인 그 애꾸눈 검은 마수. 그 마수는 자네의 친부일세. 선왕이라는 말이지.”

“예? 잠깐만요, 설명이 너무…….”

“자세한 설명은 펠킨이 해줄 거야. 시간이야 남아돌 테니, 천천히 성으로 돌아가면서 얘기 듣게나.”

일카이가 혼란스러워 하던 말던 그건 칼리우스가 알 바가 아니었다. 딱히 배려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 또한 들지 않았다.

그는 얼뜬 표정으로 창백하게 질린 일카이를 잠시 딱한 듯 바라보다 이내 시혜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꽤나 충격이 클 거야.”

“…….”

“아스펠라에게 전할 건 내가 대신 전해주지. 지금 자네한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칼리우스의 말에 멍하니 허공을 보던 일카이가 천천히 제 다리 옆에 두었던 약재 꾸러미를 건넸다.

“넋이 나갔군.”

나직하게 웃음을 흘린 칼리우스가 펠킨에게 데려가라는 듯 손짓했다. 펠킨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일카이를 조심스레 흔들었다.

“괜찮습니까?”

칼리우스는 시종들을 불러 일카이를 부축하라 명했다. 성인 남자 둘이 거구의 사냥꾼을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설명해줘. 꽤 충격이 클 테니까.”

“각하, 어찌 이렇게…….”

조금 더 친절하게 모든 걸 설명해줄 수 있지 않았냐는 눈빛이었다. 칼리우스는 그럴 필요가 있나 싶어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이 제일 적기라 생각해서 말해줬을 뿐이야.”

“정말 그뿐이십니까?”

“그럼 또 뭐가 있겠는가.”

단순히 지금이 제일 좋을 시기라서 말해준 사람치고는, 마치 원하던 장난이 먹혀 매우 만족스러워하는 소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은가.

“심술을 부리셨습니다.”

“나도 모르게 유치해지나 보군. 재미는 있네.”

“각하……!”

칼리우스는 이만 시끄러운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펠킨은 이내 더 이상의 말을 하지 못한 채 꾸벅 인사를 올린 뒤 서재 밖으로 나갔다.

등받이에 느른하게 기댄 칼리우스가 약재 꾸러미를 들어올렸다.

“주제넘긴…….”

아스펠라가 말했던 약방 약이 이건가. 수고스러움을 덜었다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빼앗긴 기분이 들었는지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

아스펠라는 잠시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칼리우스의 서재가 있는 이층 오른쪽 복도에서 일카이와 펠킨이 함께 내려오고 있었다.

“일카이!”

아스펠라는 오랜만에 보는 그의 모습에 얼른 그 앞으로 달려갔다.

훈련은 잘했어? 하며 물어보려던 그녀는, 보기 드물게, 아니 난생처음으로 하얗게 질려 손까지 덜덜 떠는 일카이의 모습에 덩달아 당황하여 펠킨을 쳐다봤다.

펠킨은 저를 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곤란하고 매우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일카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혼이 쏙 빠져 거죽만 남은 듯한 표정을 짓던 일카이가 움찔대며 아스펠라를 내려다봤다.

그는 이제야 아스펠라를 알아본 듯, 아, 짧은 탄식을 했다.

“너 어디 아파?”

아스펠라는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며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이라곤 하나 없는 사내가 마치 열병을 잔뜩 앓아 생사의 경계까지 갔다 온 표정이지 않은가.

일카이는 그런 아스펠라의 손목을 천천히 감싸 내렸다.

그러더니 이내 손을 꼭 잡고선 한동안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너 정말 왜 그래? 보좌관님, 얘 왜 이래요?”

“아, 그게 말이죠…….”

보좌관은 슬쩍 일카이의 눈치를 살폈다. 일카이는 오랫동안 아스펠라를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너 약재 전해주려고 온 거야. 훈련지 근처에서 약방 영감을 만났거든. 너 이맘때쯤 아프다면서. ……대공한테 전달했으니까, 올라가 봐.”

어색하게 미소를 짓고는 발걸음을 옮기려는 일카이를 아스펠라가 붙잡았다.

“너 얼굴이 너무 창백하잖아.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거야?”

“나도 몰라.”

“뭐?”

“……그냥, 좀 피곤한 거 같아. 나 먼저 대공성에 가 있을 테니까. 휴가 잘 보내고 와.”

일카이는 정말 별거 아니라며 애써 웃은 뒤 그대로 현관을 나섰다. 아스펠라는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뒤돌아 자신에게 인사하던 펠킨과 눈을 마주친 아스펠라는, 펠킨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잔뜩 서려 있다는 걸 확인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감정 표현은 확실히 하는 일카이가 저런 반응을 보인단 말인가.

아스펠라가 잠시 계단 너머를 쳐다보다 이내 위로 올라갔다.

서재 문을 두드리자 칼리우스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손수 문을 열어주며 반겼다.

“아스펠라. 안 그래도 당신한테 가려 했는데.”

“오는 길에 일카이를 만났는데, 애 상태가 영…….”

“별거 아닙니다. 아마 훈련 때문에 피곤한 모양입니다.”

아스펠라의 말을 끊어먹은 칼리우스가 이내 아스펠라의 손을 잡아끌며 방문을 닫았다. 별거 아니라기엔 영 찝찝했다.

앞선 두 사람과 다르게 칼리우스는 그저 생글생글 잘생긴 미소로 연신 아스펠라에게 질척댔기 때문이다.

“칼리우스. 자꾸 장난하지 말고요. 일카이랑 보좌관님 둘 다 잔뜩 굳은 표정이었단 말이에요. 단순히 피곤해서 나오는 표정이 아니었다고요.”

“그냥, 사라에 대해 잠깐 얘기를 나눴을 뿐입니다. 내가 받은 편지에 사라 경과 일카이가 내 저주에 대한 연구들을 적어둔 책이 있다고 해서요. 그 책을 찾으면, 저주를 풀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일카이한테 말했어요? 당신이 깜장이로 변한다는 걸요?”

“아뇨. 아직은. 그냥 누이의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을 말했을 뿐입니다.”

자세한 건 성에 돌아가서 얘기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되면 아스펠라도 부를게요.

칼리우스는 아스펠라에게 후작저의 온실 먼저 신경 써 달라 말했다. 아스펠라는 그리하겠다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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