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잊힌 그날의 일(1) (7/16)

6장. 잊힌 그날의 일(1)

에르윈 대공 가문의 별장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존재해왔던 고성이었다. 그 앞에는 튀니아의 3대 호수에 든다는 블레드 호수가 있는데, 성 역시 그 호수에서 이름을 따와 ‘메멘토 블레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메멘토 블레드는 그간 관리만 될 뿐, 별장으로서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다. 칼리우스는 그동안 중독자처럼 일만 해왔으며, 많은 이들이 그에게 별장을 보여달라, 그곳에 초대를 해달라 편지를 보내와도 죄 무시했다고 한다.

“우리 대공 각하께서는 영애들한테 인기가 지대하게 많아서, 아주 매일 매일 집에 찾아오는 영애부터, 구혼서를 보내는 영애에, 심지어는 별장에 초대해달라는 이들도 넘쳤지.”

인기가 얼마나 많은지, 에르윈 성에 놀러 가면 매번 새로운 영애들이 칼리우스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며 신난 유디티아 경이 입을 놀렸다.

“아마 튀니아에서는 칼리우스만큼 영애들과 데이트 많이 해본 사내가 없을 겁니다. 하하하! 바쁘다면서 할 건 다 한다니까. 저 얼굴 보고 달려드는 영애들이나 귀부인도 얼마나 많았던지, 여자라면 이제 질릴 정도라 말하던 그 칼리우스가―”

“여보, 신난 건 알겠는데 제발 좀 다물어요.”

유디티아 후작 부인이 제 남편의 허벅지를 꽉 꼬집으며 복화술 하듯 말하자, 그제야 후작은 아차 싶어 아스펠라와 칼리우스의 눈치를 살폈다.

칼리우스는 그저 눈을 감고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다 필립을 노려봤고, 아스펠라는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급하게 저택에서 나오느라, 마차가 채 준비되지 못하여 넷이 한 마차를 타느라 이런 사달이 난 것이었다.

그 블레드 성에 놀러가는 것에 너무나도 들떠 이것저것 떠들던 유디티아 경이 결국 펠킨의 걱정대로 거대한 폭탄을 하나 투척하고 말았다.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으려던 찰나, 아스펠라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어쩐지, 여인을 대하는 것이 되게 능숙하시더라고요.”

“그, 그쵸? 영애들도 그 무심한 얼굴, 다정한 태도에 다들―”

“필립. 여보. 제발.”

입을 열면 열 수록 당신은 재앙을 불러일으킬 뿐이니, 제발 입을 다물라며 후작 부인이 남편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별장에 도착했다.

유디티아 경은 얼른 마차에서 내려 제 아내를 부축한 뒤, 마중 나온 별장의 시종들을 따라갔다.

후작 부인은 제 남편을 따라가려다가, 이내 발걸음을 돌려 아스펠라에게 말했다.

“제 남편이 조금, 아니. 많이 눈치가 없을 뿐이지만 결코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랍니다. 아스펠라 양. 죄송해요.”

“아뇨 죄송할 것까지야…….”

“……각하는 가볍게 여인을 만나거나 하는 분이 아니에요. 그러니, 제 남편의 말을 깊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후작 부인은 짧게 목례를 한 뒤 발걸음을 옮겼다.

아스펠라는 가만히 후작 부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먼저 앞서 걸어가던 유디티아 후작이 얼른 뒤뚱거리는 제 아내를 부축했다.

알고 있다. 유디티아 경이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칼리우스가 자신을 가볍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그래도 만나던 여자가 매번 바뀌었다니.’

조금 억울하고 불공평한 기분이 드는데, 왜 그런 기분이 드는 걸까? 아스펠라는 본인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댔다.

“아스펠라?”

제 이름을 부르는 칼리우스의 목소리에 아스펠라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를 쳐다봤다. 칼리우스는 아스펠라가 마차에서 내리기 쉽도록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스펠라는 그제야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왔다. 아스펠라는 그를 올려다보며 뭔가 말하려 입을 우물거렸다.

“칼리우스, 혹시 전―”

“대공 각하!”

하지만 이내 멀리서 뛰어오는 늙은 집사의 외침에 묻히고 말았다. 칼리우스가 아스펠라, 뭐라고요? 물으려 했으나 이내 집사가 감격스러운 얼굴로 호들갑을 떨어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머리가 하얗게 흰 늙은 집사가 달려와 숨을 몰아 내쉬며 말했다.

“각하, 어찌 기별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물론 언제든 환영이지만! 아아, 이럴 줄 알았다면 어제 식료품을 더 잔뜩 사놨어야 했는데!”

“영감. 진정하고 안내나 해.”

칼리우스는 저보다 한참 작은 늙은 집사에게 진정하라는 듯 그의 어깨를 꾹 누르며 말했다. 겨우 진정한 집사는 숨을 고르며 손수건을 꺼내 안경을 닦았다.

“아아, 그렇죠. 예, 그런데 이 아가씨는 어느 가문의……?”

아스펠라를 보더니 안경을 슬쩍 고쳐 쓰곤 묻는 집사에게 칼리우스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 정인이야.”

“정, 정인!”

집사는 또 한 번 흥분한 듯 입을 떡 벌리곤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아스펠라는 풍성한 수염이 바르르 떨리는 영감에게 드레스 자락을 들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스펠라입니다.”

“아아, 안녕하십니까. 아스펠라 영애, 저는 이 블레드 성의 관리인 허버트 렌달입니다. 편하게 허버트라 불러주시지요.”

허버트는 얼른 안으로 모시겠다며 칼리우스와 아스펠라를 안내했다.

에르윈 성만큼은 아니었으나 매우 화려한데다가, 고풍스러운 느낌이 나는 곳이었다. 아스펠라는 어쩐지 이곳의 성이 낯이 익은 듯 연신 주변을 두리번댔다.

이층 계단을 올라가 복도를 따라 거닐자, 앞장서던 집사가 발걸음을 멈췄다.

“이곳은 아스펠라 영애께서 머무르실 곳입니다.”

짐꾼이 아스펠라의 방에 작은 짐 가방을 내려놨다.

“만찬 때 데리러 오겠습니다, 아스펠라.”

칼리우스의 말에 아스펠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곤 문을 닫았다. 그대로 침대에 털썩 드러누운 아스펠라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어쩐지 낯이 익은 곳이네.”

중얼거리던 아스펠라는 불쑥, 유디티아 경의 말을 떠올렸다.

“여기가 그 많은 영애들이 오고 싶다 하던 그 별장이라고?”

뭐 얼마나 많은 영애들이 그랬길래 그렇게까지 호들갑을 떠시지? 아스펠라가 괜히 입을 삐죽였다.

무심한 얼굴이나 다정한 태도에 다들 뭐? 다들 뭐 어쨌는데? 쓰러지기라도 했나? 흥.

아스펠라는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아 발로 허공을 퍽퍽 걷어찼다.

스무 살 인생 동안 이렇게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함은 처음이었다. 그것이 질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

판도라라는 여인이 있었다 했다.

대장장이 신을 시켜 진흙으로 빚어진 그녀에게 신들은 저마다 한 가지씩의 선물을 주었다. 옷과 손재주, 아름다움, 거짓과 속임수, 호기심 등 많은 것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굳게 닫혀 있는 작은 상자를 선물 받았다.

호기심을 가진 판도라는 그것을 열지 말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상자를 열고야 만다.

상자 안에 들어 있던 온갖 재앙과 악덕들이 튀어나왔고, 그로 인해 인간 세상에는 불행이 퍼지게 되었다.

또 페로의 거대한 성에 사는 푸른 수염에게 시집온 한 여자는 푸른 수염에게서 열쇠 꾸러미를 받았다 했다.

다른 방들은 다 열어도 되지만 절대로 한 방만은 열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호기심으로 인해 결국 그 방문을 열고 만다.

그곳에는 푸른 수염의 전 아내들 시체가 즐비했고, 피가 흥건했다. 그 방에 들어간 것을 들킨 아내는 푸른 수염에게 살해당할 위협에 처하게 되었다지.

요지는, 결코 열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떤 호기심으로 문을 열었다간 결국 파멸을 자초한다는 것이다.

지금 아스펠라의 꼴이 딱 그랬다. 열어서는 안 되는 문을 자꾸만 열고 싶어 기웃기웃 손잡이를 만졌다가, 이내 손을 뗐다가, 다시 만지작대기를 반복했다.

그건 이 블레드 성의 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칼리우스가 예전에 만났던 여인들…….’

어쩌면 판도라의 상자나 푸른 수염의 닫힌 문보다 더 파국을 일으킬지 모르는 ‘내 애인의 전 애인들’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귀족영애들이겠지. 뭐.’

단순하지 않나. 분명 곱게 자란 귀족가문의 영애들일 것이다. 특이할 것 없지 않나.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하긴 나이가 몇인데…….’

혈기왕성한 스물네 살의 사내가, 돈도 많고 지위도 높은데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한 남자가 여태까지 여자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을 리 없지 않나.

산에서만 살아온 자신과는 달리 귀족들은 여기저기, 연회며 파티며 살롱이며 잘들 놀러다니지 않던가.

아스펠라는 곰곰이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능숙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지.”

눈빛, 손짓, 말투까지. 칼리우스는 어느 것 하나 서투른 부분이 없었다.

정작 아스펠라는 어쩔 줄 몰라 이리저리 몸을 배배 꼬는데도 말이다.

어디 그뿐이던가? 처음 같이 밤을 지낸 그 다음 날에도 칼리우스의 얼굴만 봐도 자꾸 그날의 밤이 떠올라 쑥스러워하는 자신과는 달리, 칼리우스는 실실 웃으며 여유를 부리지 않던가.

묘하게 불공평하다 생각했던 것의 원인을 알 것 같다.

“이거 진짜 불공평한데.”

다른 여자들한테도 이랬을 거 아니야.

“아니, 뭔가 진짜 억울한데?”

그 여자들한테 써먹었던 방법으로 날 꼬신 거 아냐?

우수에 찬 애처로운 눈빛이며, 자신을 툭툭 건드려보는 발짓이나 손짓, 꿰뚫는 듯한 눈빛까지.

아스펠라의 눈썹 한쪽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일 때 나타나는 칼리우스의 버릇과 같았다.

머릿속에서 뭉게뭉게 피어나는 칼리우스와 예전 애인들의 연애 스토리를 상상하려던 찰나였다. 바깥에서 문을 두들기더니 이내 칼리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스펠라.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아스펠라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네.”

문을 열고 들어온 칼리우스가 아스펠라를 보며 슬쩍 미소 지었다.

“만찬이 다 준비되었다는군요.”

그렇게 말한 뒤, 침대에 앉아 있는 아스펠라 앞으로 가 무릎을 구부리며 눈높이를 맞췄다.

“어디 아픕니까?”

아스펠라의 얼굴을 살피던 칼리우스는 어딘지 모르게 안색이 좋지 않아 보여 걱정되는 듯,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아스펠라는 그런 칼리우스를 마주보며 저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칼리우스의 손이 이마에 닿자 괜히 얼굴이 또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원래 이렇게까지는 아니었는데.

“아뇨. 아프지 않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표정이 좋지 않은 겁니까. 별장이 마음에 안 들어요?”

진짜 몰라서 묻는 건가.

아스펠라가 지그시 칼리우스를 쳐다봤다.

제 입으로 묻기에도 뭣한 내용이었다. 다짜고짜 몇 명이나 만나봤냐, 언제부터 이렇게 능숙했냐 등 묻기에는 영 모양새며 타이밍이며 맞지 않았다.

“아뇨. 별장은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그럼? 설마, 필립의 말을 신경 쓰고 있는 건 아니죠?”

픽 웃으며 묻는 칼리우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스펠라는 곧 죽어도 제 입으로 물어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의 얼굴은 ‘설마 전 애인까지 신경 쓸 정도야? 그 정도로 나한테 빠진 거야?’ 라고 묻는 듯한 느낌이었다.

자신이 뭔가 굉장히 순박하고, 찌질하고, 집착적이게 된 느낌인지라 아스펠라의 인상이 와그작 구겨졌다.

“아뇨, 칼리우스 나이가 몇인데요. 살면서 전 애인 한 명 없겠어요? 누구나 다 있는걸요.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는 편 아니에요. 걱정 말아요.”

참으로 도도하고 새침스러운 말투였다. 칼리우스는 잠시 아스펠라를 쳐다보더니, 이내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행입니다.”

다행? 다행이라니?

또 한 번의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으나 아스펠라의 자존심이 꾹꾹 내리 눌렀다. 아, 판도라의 심정이, 푸른 수염 아내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구나.

하지만 난 결말이 뻔히 보이는 짓은 하지 않을 거야. 아스펠라가 다짐했다.

“그럼, 식사하러 갈까요?”

칼리우스가 손을 내밀었다. 아스펠라는 잠시 그의 손을 바라보곤 이내 제 손을 올려놨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난 아스펠라의 손을 잡곤 제 왼쪽 팔에 팔짱을 끼웠다.

아스펠라와 함께 일층의 식당가로 내려가던 칼리우스가 아스펠라를 슬쩍 쳐다봤다.

‘살면서 전 애인 한 명 없겠어요?’

생각해 보니 아스펠라에게 전 애인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물어보질 않았다.

그런 것 하나 하나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자의 첫 경험에 병적으로 집착하거나, 순결을 잃은 여자는 더럽다는 둥의 개소리를 지껄이며 제 아랫도리 간수 못 하는 남자들을 한심하게 여기는 편이었다.

‘다른 남자가 있었을까.’

정복감을 채우기 위한 호기심보다는, 자신 말고도 다른 남자가 아스펠라의 이런 사랑스러운 모습들을 봤을 생각을 하니 조금 기분이 오묘해졌다.

정말 아스펠라가 다른 누군가와 사귄 적이 있었을까? 만약 있었다면 그는 어떤 놈이었을까.

검은 마수로 지냈을 때의 아스펠라만이 평생 아스펠라의 모습이라고만 생각해왔다.

짧은 생각이었다. 생각해 보니 일카이 같은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 아닌가.

인간과는 담을 쌓고 지냈다고 말은 한들, 아스펠라의 말투를 보면 그녀 역시 이전에 다른 누군가를 사귄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쉽게 물어봤다가는, 여자의 처녀성에 집착하는 한심한 남자로 오해받을까 걱정되었다. 칼리우스는 그런 것에 연연하는 것이 아닌, 아스펠라가 진심으로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한 적이 있는지에 대해 궁금했다.

필립의 말에도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질투나 소유욕은 없어 보였다.

‘나만 그런가?’

칼리우스는 자신만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인지 조금 억울해졌다.

‘생각해 보니 나만 매달리는 것 같고.’

아스펠라만 보면 그저 웃음이 나오고, 자꾸만 만지고 싶어진다. 그냥 하루 종일 껴안고만 있어도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마구 든다. 그런 감정을 몇 번이고 겨우 억눌렀던가.

하지만 아스펠라는 어째 그렇지 않아 보였다. 언제나 차분하고, 그저 자신이 툭툭 건들 때만 반응해주는 편이었다.

자신을 바라 볼 때의 눈빛보다 징징대는 온실 속 담쟁이를 바라볼 때의 눈빛이 더 그윽하지 않던가.

생각해 보면 일카이도 그랬다. 개처럼 꼬리를 흔드는 것은 일카이며 칼리우스며 결국엔 도긴개긴이었다.

사랑한다고 말은 해줬으나, 그건 어쩌면 자신을 어여삐 여겨서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딱하고 안쓰러운 존재. 자신이 품어주지 않으면 그 누구도 품어주지 않을 테니까.

뭐, 그런 식으로라도 아스펠라를 곁에 둘 수야 있다면 상관은 없지만.

‘아스펠라가 나한테 조금 더 집착했으면 좋겠는데.’

필립의 눈치 없는 헛소리에 조금 더 동요하고, 화를 내주던 질투를 하던 뭔가의 반응이 좀 왔으면 한다.

‘나이 처먹고 이런 생각이나 하다니. 가관이군.’

이내 자조적으로 픽, 웃음을 흘렸다.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된 건지.’

여자들에겐 관심조차 없지 않았던가.

10살이 될 무렵 대공가문의 가주가 되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느라 너무 일찍부터 철이 들어야만 했다. 원로 귀족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는 얕보여서는 안 되었다.

말랑하고 풀어진 모습 따위는 허용되지 않았으니까.

뽀얀 분내를 풍기고, 향기로운 향수를 뿌리고, 살랑살랑 부채질을 하며 저에게 손을 내미는 영애들은 많았으나, 그녀들의 손을 잡는 여유 따윈 없었다. 또한 그럴 마음도 없었다.

언젠가는 가문을 위해, 후계자를 잇기 위해 이들 중 한 명과 결혼은 해야겠지. 그런 생각만 했을 뿐.

몸에 밴 매너와 매뉴얼에 따른 행동. 가식적인 미소와 형식적인 대화. 그뿐 아니었던가.

매일 구혼서를 보내는 영애들은 바뀌었고, 종종 그녀들과 티타임을 가졌으나 그 이상의 것은 없었다.

같이 호수 길을 산책하거나 서로 말을 타고 숲을 거닌 적은 있어도, 그녀들의 눈을 바라본 시간보단 회중시계를 꺼내 보거나, 말의 갈기를 쳐다보는 시간이 더 길었다.

멍하니 시간이 지나가길 바라며, 그 형식적인 시간들이 알아서 끝나길 기다리며.

해서 에르윈 대공성의 안주인이 누가 되든 상관없었다. 물론 칼리우스가 검은마수로 변한 뒤부터는 그마저도 없어졌다.

이 모든 감정들은 아스펠라가 처음이다.

자신이 검은 마수로 변한다는 사실을 이기적이게 숨기면서까지도, 스스로를 ‘깜장이’라 부르는 멍청한 연기를 하면서까지도 아스펠라를 곁에 두고 싶었다. 불우한 유년기를 이용해 동정을 받아 아스펠라의 마음을 얻고 싶었다.

옆에서 알짱대는 자그마한 개새끼한테도, 다섯 살이나 어린 일카이한테도 우스꽝스러운 질투를 보일 정도로 소유욕이 생겼다. 아스펠라를 만지면 만질수록 독점욕은 물론 육욕까지 가득 그를 채웠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이후, 사실 매일 물고 빨고 할 생각만 머릿속에 그득 차 있었다. 남들이 그의 머릿속을 열면 기함할 정도로 온갖 음탕한 생각들이었다.

칼리우스 본인 역시 이렇게나 욕정이 강한 이였는지는 몰랐다. 욕정뿐만이 아니었다.

그냥 아스펠라를 만나 그녀를 사랑하게 된 순간부터 자신이 이렇게나 이성적이지 못한 사내였는지, 여자 앞에서 이렇게나 한없이 한심해질 정도로 자기절제가 불가능한 사내였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아스펠라는 그래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다.

‘나만 안달 났지.’

봐라. 지금도 아스펠라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필립의 눈치 없는 발언으로 조금 기분이 상해 보여, 그것에 기뻐하려던 찰나 오히려 자신이 말려들지 않았나.

“……첫사랑이 따로 있습니까?”

“네?”

“첫사랑이요.”

아스펠라는 왜 그런 걸 물어보냐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다 이내 머릿속에 말도 안 되는 경쟁심이 일고 말았다.

‘잠깐.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칼리우스가 첫 번째인데. 뭔가 이걸 그대로 말해주긴 억울한 거 같은데. 분명 칼리우스는 내가 처음이 아닐 거란 말이지.’

치기인 것일까. 유치하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아스펠라는 괜히 자신이 그를 만나기 이전까진 모든 것에 관심도 흥미도 없었으며, 이 모든 것을 칼리우스를 통해 깨달았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솔직한 것이 제일이라 배웠으며 그것에 동의하는데도 어째 이런 부분에서는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넌 뭐야?’

‘아스펠라.’

‘이름 말고. 넌 뭐냐고.’

‘……다섯 살. 아스펠라.’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에, 아스펠라는 잠시 상념에 빠졌다.

어쩌다 만난 것인지, 누구인 것인지, 어떻게 생긴 것인지조차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하나 없었으나 종종 이렇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소년이 하나 있다.

그건 아스펠라가 잊고 싶어 하는 시절 중에서 유일하게 기억하고 싶어 했던 이였다.

결과적으로, 비르가가 매번 그날 일을 떠올리며 악몽을 꾸는 아스펠라를 위해 기억을 지워버리는 바람에 소년의 얼굴까지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네. 있어요.”

첫사랑이라 불릴 만한 기억은 아니었으나, 기억도 안 나는 그 어린 시절의 소년을 아직까지 종종 떠올리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일단 첫사랑이라고 치자.

긍정의 대답에 칼리우스의 낯빛이 오묘해졌다.

“제가 예전에, 잠시 입양되었을 때 만났던 어린 남자애예요. 칼리우스와 나이가 꽤 비슷하겠네요.”

“꽤 오래전 일인데도 기억하나 보군요.”

“……네. 잊을 수 없는 애였거든요.”

잠시 아스펠라를 쳐다보던 칼리우스가 이내 짧게 헛기침을 하곤 물었다.

“입양 된 적이 있었습니까?”

“정확히는, 절 버렸던 부모한테 다시 돌아간 거였죠. 결국엔 또 버려졌지만.”

쓸쓸해 보이는 아스펠라의 얼굴에, 칼리우스는 괜히 이야기를 꺼냈나 싶다가도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소중한 만큼 조심스러워지는 것뿐이지.’

‘나도 가족이 있었거든. 인간 가족. 결국엔 쓸모없다고 버려졌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스펠라가 이렇게까지 사람의 호의를 믿지 못하게 된 것이었을까.

칼리우스는 그날 일에 대해 더 묻고 싶은 듯했으나 이내 식당에 도착해 묻지 못했다.

유디티아 후작 부부가 미리 내려와 기다리고 있다가 아스펠라와 그를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아, 자네 드디어 왔군! 나 참, 안 내려오는 줄 알고 내가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유디티아 후작은 제 아내에게 한소리 들은 것인지 조금 풀이 죽은 얼굴로 앉아 있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버트가 시녀와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간단하게 식사에 대한 설명을 해준 뒤 그는 언제든 불러달라며 벽 쪽 근처에 가 대기했다.

아스펠라는 일전에 칼리우스에게 배운 대로 커트러리를 쥐고 천천히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전처럼 그릇까지 함께 썰지 않았다.

식당 안이 조용해지려던 찰나, 유디티아 후작이 입을 열었다. 남편이 입을 떼기 위해 숨만 들이켜도 후작 부인은 불안한 듯 그를 유심히 쳐다봤다. 언제든 제 남편의 입을 막기 위해 커트러리를 쥔 손에 잠시 힘을 뺐다.

“그나저나, 칼리우스. 자네 이곳에 오는 게 몇 년 만이더라? 거의 15년 만 아니던가?”

“종종 들리긴 했으니 아예 안 온 것은 아니야.”

“그래도 이곳에서 휴가를 보내는 건 15년 만 아니던가? 그렇지, 허버트?”

필립의 질문에 허버트가 답했다.

“예. 주인 어르신께서 이곳에서 정식 휴가를 보내시는 건 15년 만이 맞으십니다.”

“불미스러운 사건만 아니었으면, 아마 매년 여기서 연회도 열렸을 텐데 말이야. 아, 자네 그때 난 상처 아직도 남아 있지 않던가?”

“여보, 그런 얘기는 좀….”

후작 부인은 혹시라도 칼리우스가 불편해할까, 얼른 그의 눈치를 살피며 남편을 말렸다.

“괜찮아. 기억도 잘 안 나는 일이니까.”

칼리우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기억이라도 안 나서 다행이지. 난 그때 내 친구를 잃는 줄 알고 얼마나 울어댔는지 아는가? 내 기억 상 가장 많이 운 것은 허버트였지만 말이야.”

“저도 그때 정말 놀랐습니다. 다행히 지금 이렇게 장성하셨지만요.”

아스펠라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댔다. 유디티아 경은 그런 아스펠라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아, 이 녀석이 열 살 때쯤 여기 놀러왔다가 괴한한테 습격을 당했거든요.”

“저희의 불찰이었습니다. 설마 이곳에서 대공의 후계자를 공격하려 들 줄이야. 게다가 범인까지 놓치고. 정말이지 면목 없습니다.”

“몇 년이나 지난 일로 아직도 그리 사과하지 말게.”

칼리우스는 기억도 안 나는 사건이라며, 그저 이곳에 찾아오지 않은 이유는 바빴기 때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럼 기왕 이곳에서 지내는 겸, 연회를 여는 건 어떤가? 이 아름다운 풍경과 성을 우리끼리만 보기엔 조금 아깝지 않나.”

필립의 말에 칼리우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맘때쯤이 딱 블레드 성을 감싼 숲이 가장 아름다울 때 아닌가. 이참에 정식으로 아스펠라 양을 소개시킬 겸. 아스펠라 양, 어떠십니까?”

“글쎄요. 저는 연회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궁금하긴 하네요.”

이따금 동화책을 접했을 때나 보았던 귀족들의 연회 장면. 그런 그림들을 보며 백성들은 공주가 되기도 하고 왕자가 되기도 하며, 용맹한 기사가 되기도 화려한 영애가 되기도 했다.

반짝이는 샹들리에와 온갖 보석, 그리고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귀족들과 악단의 경쾌한 연주. 그곳에서 싹트는 사랑까지.

이상과 현실이 정확히 들어맞지는 않을 테지만, 아스펠라는 그런 그림들을 보며 가끔 자신 역시 저 자리에 들어가 있으면 어땠을까 상상하곤 했었다.

부러워한다기보다는 호기심 정도.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스펠라의 반응을 살핀 칼리우스가 이내 재고하는 듯 뾰족한 자신의 턱 부근을 가만히 매만졌다.

필립의 말은 대개 영양가도 없으며 딱히 도움이 될 만한 것도 없고, 대부분 억지인 경우가 많았으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귀족들에게 정식으로 소개 시킨다라.

“……사냥제가 끝나고 왕실 연회가 열리기 전에 하면 하면 되겠지. 그때쯤 후작 부부의 아이도 태어났을 테니까.”

“어머. 그때까지 이곳에서 지내도 되는 거야?”

“후작 저택의 온실이 완성될 때까진 이곳에서 지내. 아스펠라도 그렇게 하는 편이 좋다 말했으니까.”

언제 단호하게 거절했냐는 듯 칼리우스가 말을 바꿨다. 그러자 한나도 이번엔 신나는 듯 손뼉을 쳤다.

“기쁘네. 내 아이가 튀니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에서 탄생 축하를 받는다니!”

“딱 좋은 생각이야. 아스펠라 양도 왕실 연회에 바로 참석하기보다는 이곳에서 데뷔탕트하는 것이 덜 부담스럽겠지. 하하!”

필립도 딱 좋다며 제 아내와 양손을 잡고는 신나서 말했다.

모처럼 후작의 말로 인해 넷 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

타다다닥, 타다다닥. 네 손가락으로 오르간을 치듯 순서대로 책상을 두드리던 파베스의 얼굴에는 근심이 서려 있었다.

그를 지켜보던 버루카가 국왕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전하?”

“…….”

대답 없이 숨을 훅 내쉬던 파베스가, 이내 책상 위에 있는 집기들을 모두 옆으로 쓸어내렸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문서들이 팔랑대며 공중에 떴다 추락했다.

분노를 참지 못해 씩씩대던 국왕은 후, 한숨을 내쉬며 스스로를 다스리려는 듯 제 헝클어진 긴 머리칼을 뒤로 쓸어내렸다. 이내 기다란 옷자락을 한번 쳐내며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국왕의 서재에서는 아스펠 산의 전경이 보였다. 초가을이 지나자 나뭇잎들이 하나둘 녹색 옷을 벗고 붉은 자락을 꺼내 입기 시작했다. 천천히 황혼에 물들 듯 변화하는 아스펠 산은 매우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것이 문제였다.

죄 타버려 앙상해야만 하는 아스펠 산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그 민둥산에서 우거진 산으로 변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생명력을 내뿜는 것이 그의 눈에 보일 정도였다.

“아직도 숨어 있는 신을 찾지 못했느냐?”

“……전하. 교주의 말대로 산신은 알아서 전하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니 조급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버루카의 말에 왕은 흘기듯 그를 쳐다봤다.

“대체 그게 언제란 말이냐? 내 그놈을 수중에 둬야 마음이 놓일 텐데 원, 나타나질 않잖아.”

파베스는 일이 더 이상 늦춰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매일매일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버루카를 불러 확인하는 것은, 나라의 안위나 변경의 방위가 아닌, 아스펠 산신에 대한 단서를 잡았느냐였다.

버루카가 입을 우물거리기만 하자, 국왕은 쯧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서재 앞을 지키던 경비병이 문을 두드렸다. 버루카가 얼른 밖으로 나가 확인을 한 뒤 들여보냈다.

파베스는 그러든 말든 관심 없는 듯 여전히 아스펠 산을 마뜩찮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전하. 유디티아 경의 주치의입니다.”

버루카의 말에 그제야 얼굴이 피며 파베스가 고개를 돌렸다.

유디티아 후작의 주치의는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린 뒤 힐긋 왕을 쳐다봤다.

“의사 셀먼,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파베스가 손짓을 하자, 버루카가 주치의에게 말했다.

“유디티아 후작 부인의 상태에 대해 말하거라.”

주치의는 후작 부인에 대한 소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몇 번이나 이곳에 끌려와 후작 부인의 상태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태중의 아이는 잘 자라는 듯하지만, 이상하게도 공주님의 몸 상태는 좋지 않습니다. 마치 아이가 모체의 모든 양분을 가져가는 듯한 그런 느낌입니다.”

원래 임신이라는 것이 여인의 몸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라지만, 후작 부인의 경우는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

후작이 걱정할 것을 염려해 후작 부인은 최대한 상태를 말하지 말라 했지만, 주치의는 이대로 가다간 아이를 출산할 시 무조건 죽을 거라 말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국왕이 물었다.

“증상이 어떠하던가?”

“일단 잠을 전혀 못 주무십니다. 일전에 보고한 대로 자꾸만 악몽을 꾸신다는데, 요즘엔 그 정도가 심해져 낮에도 환영을 보실 정도라 합니다. 몸도 점점 말라가시고, 어쩐지 몸에 붉은 반점 같은 것들도 생기시고…….”

그렇게 말한 주치의는 이상하게 그렇게 말라가는 몸에 비해, 섭취하는 음식의 양은 비대하게 많아졌다 말했다.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파베스가 이내 물러가라는 듯 손짓하자, 버루카가 말했다.

“이제 그만 나가보게. 국왕 전하께서 공주님의 상태를 걱정하시어, 몇 가지 약재를 내려줄 터이니 그걸 후작 부인에게 달여 먹이거라.”

“감사합니다, 전하.”

주치의 말에 파베스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됐네. 내 여동생을 내가 챙겨야지. 내겐 아주 소중한 누이 아니더냐.”

그 미소에 주치의는 별다른 의심 없이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시종을 따라 약재를 받으러 가면서, 누이를 챙기는 다정한 국왕의 모습에 감명받은 듯했다.

주치의가 나가자 파베스는 아까와는 달리 조금 기분 좋은 얼굴로 산을 쳐다봤다.

“한나가 부디 좋은 결과를 가져다줘야 할 텐데 말이야.”

그러나 누이를 챙기는 그 다정해 보이는 국왕이, 사실은 제 여동생을 제물 삼아 신에게 양분을 먹이고 있음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유디티아 후작에게 내려준 그 토양과 약재들은, 일전에 항아리에 갇힌 개의 일부를 태운 것이었다. 이미 신이 깃들어 다리 몇 개 잘라 태운 것으로는 죽지 않는, 이제는 더 이상 이승의 육신이 아닌 짐승.

일부를 태워 재로 만든 것을 토양에 섞어 유디티아 후작의 저택에 뿌리 내리도록 하면, 그중 가장 순수한 생명력을 가진 이를 잠식하듯 먹어치울 것이다.

가장 순수한 생명력,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태중의 아이.

태중의 아이는 그 악한 기운이 깃든 채로 모체를 장악할 것이고, 이윽고 태어나는 아이는 신에게 가장 먹음직스러운 양분이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한나의 아이는 파베스가 깨우고자 하는 봉인을 막고 있는 자물쇠 중 하나였다.

자물쇠인 아이를 죽여야 봉인이 쉽게 풀릴 텐데. 공주와 후작의 소중한 첫 번째 자식을 태어난 후에 죽이는 것보다는, 몸이 약했던 공주의 비극적인 유산인 척 꾸미는 일이 더 쉬운 일이었다.

하여 파베스에게 한나와 태중의 아이는 다른 의미로 소중했다.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날 텐데. 부디 탈이 없었으면 하는군.”

중얼거리는 파베스의 눈빛에는 일말의 죄책감이 없어 보였다.

버루카는 별다른 말없이 시종들을 들여보내 어지럽혀진 서재를 치우도록 했다.

-3권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