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밝혀진 것들
밤이 되면 아스펠라는 어김없이 깜장이의 곁에서 잠을 잤다. 일카이는 자신 역시 이곳에서 자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아스펠라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사실 아스펠라에게 쫓겨나기 보단, 끌려간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원정 훈련이고 사냥제고 뭐고, 대공도 없어 심심할 텐데 내가 계속 누나 옆에 있을까? 하며 아스펠라에게 끼를 부리던 일카이는 결국 동료들에게 뒷덜미를 붙잡혔다.
대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래도 되는 것이냐며, 다들 일카이의 머리통을 한 대씩 쥐어박았다. 가기 싫다는 그를 아스펠라가 겨우 다독였고, 그는 거의 포로 이송이라도 하듯 제 동료들에게 포박당해 떠나고 말았다.
제 주변을 맴돌며 정신을 쏙 빼놓던 두 남자가 사라지자 아스펠라의 일상은 꽤나 평화롭고 조용해졌다.
[그 사냥꾼이, 원정 훈련을 떠났다고?]
“응 꽤 길게 간다더라.”
깜장이는 요 며칠간 쉬지 않고 아스펠라를 쫄래쫄래 따라오던 일카이가 드디어 떨어져나가 후련한 것인지, 저도 모르게 꼬리를 붕붕 흔들어댔다.
“왜 이렇게 꼬리를 붕붕 흔들어? 일카이가 가서 좋은 거야? 걔가 마음에 안 들어?”
[싫다기 보단, 같잖을 뿐. 아스펠라. 이리 가까이 와. 떨고 있잖아.]
“그러게. 이제 슬슬 추워지나 보다.”
아스펠라가 어깨를 부르르 떨며 소름 돋은 제 팔을 쓸어내렸다.
[그러니까 돌아가서 자라니까. 매번 여기서 자는군.]
“침대보다 네가 더 폭신하고 따듯하다니깐.”
깜장이 곁으로 가 그의 털을 베고 눕자 약동하는 심장 소리가 느껴지며 따듯한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스펠라는 그런 깜장이의 털에 얼굴을 비비다가 이내 잠시 내외라도 하듯 얼른 몸을 일으켰다.
[왜 그래?]
“아니야…….”
아스펠라가 평소처럼 얼굴을 비벼대지 않자, 칼리우스는 앞발로 아스펠라의 몸을 꾹 누르며 제 몸에 기대도록 했다.
“일카이한테는, 듣기 좋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내 속을 내가 모르겠어.”
검고 윤이 나는 털을 매만지며 아스펠라가 나직하게 말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만약, 내가 대공과 결혼하게 되면 다른 귀족들이 분명 대공을 깎아내릴 게 분명해. 출신도 불분명한 여자를 들인다니. 그치?”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어.]
“난 신경 써야 해.”
[왜?]
아스펠라가 잠시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를 떠올리는 듯 했다.
“……미움 받고 싶지 않으니까. 난 가끔……그가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아서 걱정돼. 그가 생각했던 만큼의 사람이 아니라서 실망하게 되면 어떡해?”
[아스펠라.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예전엔 그랬었거든. 그런 일 반복하면 꼴사납잖아.”
아스펠라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코를 훌쩍이며 눈가가 붉어진 모습에 당황한 검은 마수가 제 주둥이로 아스펠라의 겨드랑이 부분을 파고들더니, 이내 위로하듯 코로 얼굴을 문대기 시작했다.
“너무 다정하게 대해주니까, 나도 그만큼 뭔가를 보답해야할 거 같아.”
[보답할 필요 없어. 네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검은 마수가 말끝을 흐렸다.
[그가 믿음을 주지 못하나?]
“아니. 그건 아니야. 칼리우스는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야. 그냥, 내가 그걸 아직까지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뿐이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소중한 만큼 조심스러워지는 것뿐이지.”
[같은 실수라면?]
“나도 가족이 있었거든. 인간 가족. 결국엔 쓸모없다고 버려졌어.”
이내 아스펠라는 하루 종일 온실에 쭈그리고 앉아 있어서 힘들었다며 말을 돌렸다.
검은 마수는 그런 아스펠라를 잠시 보다, 이내 제 꼬리로 덮어줬다.
***
꿈에 비르가가 나왔다. 평소와는 달리 푸른 들판이나 정원도 보이지 않았다.
암흑 속에 산신의 모습으로 서 있던 비르가가 이내 아스펠라에게 말했다.
‘아스펠라, 더 이상 내가 막을 수도, 널 숨겨줄 수도 없게 되었단다.’
아스펠라는 비르가에게 물어볼 것이 참 많았지만, 비르가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그의 몸은 죽던 그날처럼 조각조각 부서지기 시작했다. 제 몸이 부서지는 것을 개의치 않으며 비르가가 말했다.
‘아스펠라. 내 영혼은 이제 부정당했다. 더 이상 그 무엇도 수호할 수 없다. 이제부터는 네가 주인이다. 악한 것이 널 찾으려 들 것이야. 잊지 말아야 한다. 네가 산의 아이라는 것을, 이 비르가의 딸이었다는 것을…….’
그는 이내 뽀얀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아스펠라는 더 이상 꿈속에서조차 비르가를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아스펠라가 잠에서 깼다.
[아스펠라. 왜 울고 있는 거야?]
밤새 아스펠라를 지켜본 그는,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는 아스펠라의 모습에 당황한 듯했다. 이내 눈을 몇 번 더 깜빡인 아스펠라가 제 눈을 비비적대며 일어났다.
“그냥, 이제 더 이상 비르가를 못 보게 된 게 슬퍼서.”
[비르가를?]
“……누군가 비르가를 강령술로 소환했어. 내 안에 있던 비르가의 영혼마저 사라진 걸 보면, 이제 완전한 부정신이 되었을지도 몰라. 숲의 방화와도 관련이 있을 거야. 어쩌면 대공과 일카이에게 온 편지와도 이 모든 것들이 이어져 있을지도 모르지.”
아스펠라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산이 불탔을 때와 비슷한 고통이었으나, 그것이 통각보다는 공허함으로 다가왔다.
이제 진짜 자신이 알던 비르가는 없는 거다.
아스펠라는 착잡한 마음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사라가 말하고 싶은 건 뭐였을까. 사라를 죽였던, 일카이가 쫓는 검은 마수 역시 이 일에 연관 있는 걸까? 비르가를 부정신으로 만들어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혼란스러운 듯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손에 축축한 뭔가가 닿았다. 눈을 떠 확인하자 깜장이가 혀로 아스펠라의 손을 핥고 있었다.
그제야 제 손에서 피가 나는 것을 확인했다. 어찌나 세게 쥐었던지, 손톱자국대로 살이 움푹 패고, 연한 살 부분은 이미 찢어져 피가 나오기도 했다.
[아스펠라.]
“괜찮아.”
아스펠라가 손바닥을 그에게 맡겼다.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아스펠라를 데리러 펠킨이 내려왔다. 거대한 돌문이 열리자 아스펠라는 깜장이에게 온실 일만 마치고 바로 내려오겠다며 그의 콧잔등에 입을 맞추곤 나갔다.
칼리우스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스펠라가 나간 자리를 쳐다봤다. 그와 동시에 빨리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자신의 커다란 앞발로는 아스펠라의 눈물을 닦아줄 수도 없었으며, 날카로운 발톱 때문에 얼굴을 어루만질 수도 없었다.
***
온실로 간 아스펠라는 조금 놀란 듯 문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봤다.
일 때문에 빠진 일카이 대신, 자신도 거들겠다며 부츠에 장갑까지 끼고 온 펠킨이 마찬가지로 놀라 물었다.
“아스펠라 양, 분명 며칠 전에 씨앗을 심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네. 맞아요…….”
“제가 식물에 대해 뭘 몰라서 그러는데, 원래 식물들이 이렇게 한 달도 안 되서 다 자라나고 그러나요?”
“그럴 리가요.”
그럼 대체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펠킨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갔다. 어제 작은 묘목을 옮겨 심었다는데, 이미 수십 년은 흐른 듯한 거대한 나무가 온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며칠 전 아스펠라와 일카이가 씨앗을 뿌린 것들은 이미 녹음이 푸릇하고 줄기가 장대하게 올라와 있었다.
펠킨은 단 며칠 만에 성체의 모습으로 자라는 식물들이 존재한다는 말도, 그런 방법이 있다는 말도 들어본 적 없었다.
당황한 것은 아스펠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몸만 자란 것이 아니라, 비실대던 온실의 다른 식물들도 마치 언제 상했냐는 듯 푸릇푸릇한 생기를 잔뜩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펠라!]
[아스펠라가 왔어!]
제대로 목소리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시름시름 앓던 이들이 아스펠라를 반기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아스펠라. 네가 한 거잖아! 고마워, 정말 살 것 같아. 이렇게 몸에 생기가 도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내가 했다고? 반문하려던 아스펠라는 어젯밤 자신이 꾼 꿈을 떠올렸다. 비르가는 더 이상 자신이 막을 수도 숨길 수도 없을 거라고 했지. 또한 이제는 네가 주인이라고 말했다. 어젯밤 꿈을 되새기며 중얼거리던 아스펠라가 퍼뜩 생각난 듯 펠킨에게 말했다.
“보좌관님, 아스펠 산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
일카이는 원정 훈련지로 가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가던 도중, 잠시 요기를 하기 위해 동료들과 아스펠라와 처음 만났던 아스펠 산 앞의 작은 마을 시장으로 들어갔다. 말을 타고 천천히 인파에 섞여 가고 있는데, 멀리서 약방 영감이 일카이를 발견하고는 얼른 달려 나왔다.
“아이고, 자네! 자네, 이보게!”
“뭐야, 영감?”
저 영감이 원래 자신을 이렇게 반겼던가 곰곰이 생각했더랬다. 아닌데. 저번에 아스펠라를 치료하라고 데려갔을 때에도 날 마뜩찮게 쳐다봤는데. 일카이가 고까운 얼굴로 말에서 내리며 물었다. 사람을 양아치 취급할 땐 언제고 이렇게 맞이해준담?
“왜 그래?”
영감은 잔뜩 파랗게 질려 있었다.
“산에 불이 났는데 아스펠라가 영 내려오질 않잖아. 내가 직접 들어가보려 하는데도 웬 병사들이 산 주변을 딱 둘러싸고 있고. 아스펠라는? 아스펠라 본 적 있슈?”
“아. 아스펠라라면 걱정하지 마. 아주 따신 곳에서 밥 잘 먹고 뽈뽈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이따 영감 소식 전해줄게.”
일카이의 말에 약방 영감이 대체 그 애가 산이 아니면 어디서 지내고 있느냐고 물었다. 산속에 버려진 아이였고 키워준 노인마저 죽어, 연고라 해봤자 약방 영감이나 일카이 말곤 없지 않던가.
“설마, 아스펠라가 자네랑 살림이라도 차린 건가?”
약방 영감은 아까 전보다 더 파랗게 질려 물었다. 그게 뭐 그렇게 충격 받을 일인가 하여 울컥한 듯 일카이가 소리쳤다.
“낸들 안 그러고 싶은 줄 알아?! 정작 눈치 없는 아스펠라는 그딴 거 신경도 안 쓰고 딴 놈이랑 시시덕대는데. 에잇, 젠장!”
일카이가 짜증스럽게 발바닥에 채이는 돌부리를 발로 찼다. 약방 영감이 아, 아님 말고. 하며 그의 눈치를 살피다 물었다.
“그럼 아스펠라가 지금 안전한 곳에 있는 건 맞지?”
“아 거참. 엄청 안전한 곳에 있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
그러자 약방 영감이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럼 다행이고. 요즘 세상이 뒤숭숭하잖나. 일전에 웬 망토 뒤집어 쓴 것들이 아스펠 산에 사는 여자애에 대해 이곳저곳 물어본다는 말이 돌아서 내가 어찌나 마음 졸였는데. 거기다가 산에 불까지 난데다가, 아스펠라는 보이지도 않고! 게다가 저것 보게. 그 새카맣던 산이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온 것부터 기묘한 일들 투성이잖나.”
그렇게 말한 영감이 손가락을 들어 산을 가리켰다. 그 시선을 따라간 일카이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이내 그래도 믿을 수 없는 듯 눈을 비비적거리곤 다시 산을 쳐다봤다.
“뭐야. 다 타버린 거 아니었나?”
산의 대부분이 까맣게 타, 몇 주 동안이나 검은 연기가 하늘을 메우지 않았던가.
그랬던 곳이 언제 그랬냐는 듯 푸릇푸릇한 녹음을 띠는 것은 물론, 나무들도 모두 이전처럼 장성해 있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불이 났을 때도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네. 그렇게나 활활 타오르던 불이 비가 온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저 혼자 갑자기 꺼져버리는 것이, 꼭 불이 조종당하는 느낌이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보게. 다 타버린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니까.
이건 분명 이상 징후라고!
“아스펠라가 저곳에서 지내지 않는다니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구만.”
“영감. 아까 전에 한 말 다시 말해봐.”
“뭘?”
“망토 뒤집어 쓴 놈들에 대해 다시 말해보라고. 그놈들이 아스펠라에 대해 물어봤어?”
갑자기 제 멱살이라도 쥐어 잡을 기세로 다가오는 일카이의 모습에, 당황한 약방 영감이 주춤댔다. 그가 그러든 말든 일카이는 커다란 몸체를 위협적으로 앞으로 수그리며 영감을 재촉했다.
“아스펠라 이름을 아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냥……다른 상인들한테 그 오두막에 사는 인간에 대해 아냐고 물어봤대. 언제부터 살았는지, 뭐 그런 거 말이여. 그런데 워낙에 이 시장통이 좁잖아. 이방인은 경계한다 이거야. 다들 입 꾹 다물고 모른 척 했다니까 걱정 말고. 응?”
영감의 말에 일카이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놈들은 뭔데 아스펠라에 대해 묻고 다니는 거지?
그러고 보니, 아스펠라가 분명 몽타주 뭐시기도 그리지 않았던가? 일카이는 잠시 생각하다 영감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그 인간들 또 오면 다음에 인상착의라든지, 아니면 뭔가 특징 될 만한 것들 좀 잘 찾아봐요.”
“왜? 위험한 놈들이야? 우, 우리가 잡아서 족칠까?!”
“쯧, 시장통 영감들이 위험한 짓을 해서 뭐 하게. 됐고 그냥 특징만 잘 외워뒀다가, 또 물어보거든 그냥 이번처럼 잡아떼고 바로 나한테 말해줘. 알겠지?”
“알겠네.”
영감은 그렇담 연락은 무슨 수로 하냐며 눈을 빛냈다. 아무래도 심상찮은 일에 동참하는 것이 늙은 영감의 모험심을 자극했을지도 모른다. 일카이는 잠시 영감이 과연 믿을만한 사람인가 고민하다가도, 이내 아스펠라를 아끼는 마음은 충분해 보여 자신의 전서구 한 마리를 건넸다.
“이거 내 전서구야. 물리지 않게 밥만 제때 주고. 그것들이 찾아오면 여기 발목에 쪽지 써서 보내. 내가 있는 곳은 알아서 찾아올 거야.”
“오오, 알겠네!”
영감이 조심스레 전서구를 품에 안고는 일카이가 말에 오르자 물었다.
“그런데 자네, 아스펠라 좋아하는 건 맞지?”
“……뭐?!”
“아이, 아스펠라 좋아하는 것 맞냐고 묻잖아. 반말 따박따박 하는 건 재수 없지만, 사람은 착한 것 같고, 꽤 믿음직스러운 놈 같아서 말해줄 게 있네.”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영감의 말에 일카이가 떫은 감을 먹은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말할 게 뭔데요?”
“가까이 좀 오게.”
일카이는 말에 올라탄 상태로 옆으로 몸을 기울여 숙였다. 영감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아스펠라는 사실, 사람을 잘 못 믿을 걸세. 예전에 친부모가 찾아갔다가, 또 다시 버린 적이 있거든. 애가 산속에서만 살아서 그렇지 원래 출신 자체는 귀족이야.”
“뭐요?”
“그 귀족 가문에 씨가 말랐다는 소문이 돌던데, 잘하면 아스펠라가 그 가문의 가주가 되지 않겠어?”
“이걸 왜 나한테 얘기해주는데요.”
“자네는 그 조합인지 뭐시기인지 때문에 귀족들이랑도 곧잘 어울린다면서. 혹시 아는가. 아스펠라의 친부모가 있는 저택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을지.”
아무튼, 내 말은. 아스펠라의 마음을 얻으려면 뭐 꽤나 힘이 들 거다, 이런 말일세. 그래도 자네가 진심이라면 언젠가 아스펠라도 받아주지 않겠는가. 게다가 버려졌다 해도 귀족 영애야. 그 집안 아들놈들이 싹 죽어버리면 그 저택부터 영지까지 다 아스펠라 거라고.
나는 솔직히 그 귀족 놈들이 싹 죽고 그 모든 게 다 아스펠라한테 갔으면 하네. 아스펠라가 그놈들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 했는데. 한동안 심하게 앓아 비르가가 한약재까지 지어갔다니까.
자네 아스펠라한테 잘하게나. 아픔이 많은 아이야. 혹시라도 아스펠라의 친부모를 찾거든 얼굴 한 번씩 갈겨주면 더 좋고.
그렇게 말한 영감이 주먹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스펠라한테는 비밀로 해. 내가 말해줬다는 말은 말고. 나도 자세한 건 모르니까 그 애 입으로 직접 듣는 게 제일 좋긴 하겠다만, 아스펠라는 그런 걸 영 말하진 않거든.”
일카이는 조금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참, 그럼 아스펠라한테 이것도 좀 전달해주게. 내가 그 애 주려고 몇 개 준비해둔 게 있거든. 이맘때쯤이면 항상 앓아. 아직도 예전의 그 일 때문일 거야.”
“근데, 나 훈련 끝나고 돌아가면 적어도 보름 정도 걸릴 텐데.”
“딱 시기가 맞아 떨어지는구만. 원래 이런 걸로 마음도 얻고 좀 그래야지. 연하는 이런 걸로 마음을 얻는 수밖에 없다고. 의외의 믿음직스러운 모습 말일세.”
영감은 후다닥 약방에 들어가, 약재들을 묶은 꾸러미를 일카이에게 건넸다. 일카이가 조용히 약재들을 받아든 뒤 짧게 목례를 하곤 이내 말고삐를 잡아 쥐었다.
뒤에서는 영감이 전서구를 꼭 연락 주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일카이는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아스펠라가…… 귀족 영애였다고?’
산속에 버려진 아이라 하지 않았던가? 아니, 영감은 부모가 아스펠라를 찾아갔다가, 다시 버렸다고 했지. 그럼 두 번 버려졌던 건가.
일카이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아스펠라는 참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자신이 제 이야기를 들려줄 만큼의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을까.
한숨이 푹 내쉬어졌다. 영감에게 돌아가서 한탄하고 싶었다. 내가 이런 약재를 전달해준다 한들, 아스펠라는 제 마음을 몰라줄 것이라고. 아마 그 작은 머리통을 가득 메운 것은 자신도, 깜장이도 아닌 칼리우스 대공일 것이라고.
그러니까 그 난장판이 된 온실을 고쳐주겠다는 것 아니야.
일카이는 씨앗이나 모종을 심는 고된 작업 내내 양 볼을 붉힌 채로 일하는 아스펠라를 봤다. 단순히 작업이 재밌어서 짓는 미소가 아니었다. 어떤 상대를 떠올리며 설레하는 얼굴이었다.
에르윈 대공이 이를 보고 조금이라도 기뻐하길 바라는 얼굴 아니던가.
자존심이 상했다. 아스펠라에게나 칼리우스 대공에게 자존심이 상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자존심이 상했다.
견고한 마음에 조금이라도 생채기를 내보겠다고 별 말 다 꺼냈던 자신이 한심했다. 그렇다고 흔들릴 아스펠라가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도…….
***
아스펠라는 펠킨과 함께 아스펠 산 근처로 향했다.
마차에서 내린 아스펠라가 얼른 푸릇한 잔디들을 밟으며 산의 초입으로 들어갔다. 펠킨이 얼른 그 뒤를 따랐고, 뒤이어 호위 병사들이 따라갔다.
“아스펠라 양! 같이 가셔요!”
“죄송해요, 보좌관님. 이 위는 위험하실 것 같으니 저 혼자 잠깐 다녀올게요.”
“예? 아니, 잠시만요!”
“금방 내려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스펠라가 성큼성큼 산을 타고 올라갔다. 펠킨을 비롯한 다른 호위병들은 우거진 수풀을 잘도 헤치며 들어가는 아스펠라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다들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아니, 어떻게 저렇게 산을 잘 타지?
펠킨은 멀어지는 아스펠라를 가만히 쳐다봤다. 기분 탓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째 아스펠라가 발을 내딛고 손으로 수풀을 헤집으려 할 때마다 산이 알아서 바닥을 평평하게 만들어주고 저절로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제 눈을 비비적대던 펠킨이 중얼거렸다.
“나무들이 움직이는 건가?”
그렇게 느끼는 것은 펠킨 뿐만 아니었다. 아스펠라 역시 산이 뭔가 많이 달라져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건 마치 비르가의 등을 타고 산을 돌아다녔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아스펠라가 발을 내딛으면, 바닥이 저절로 단단해짐과 동시에 평평해진다. 그녀가 발돋움을 하기 수월하도록 배려라도 해주는 양.
어디 그뿐인가. 수풀이 저절로 움직이며 길을 만들어주지 않는가. 아스펠라가 뒤돌아 자신이 왔던 길을 쳐다봤다. 온통 나무뿌리와 수풀로 우거져 아래가 보이지도 않았다.
[아스펠라. 어서 와.]
그들은 아스펠라를 환영하고 있었다.
[아스펠라가 돌아왔어!]
환영하다 못해 경외하고 있는 듯 했다. 아스펠라는 그렇게 자신과 비르가가 살던 오두막이 있는 지점까지 올라갔다.
숲은 모두 타기 직전으로 돌아왔으나, 그녀가 살던 오두막 부분만 새카맣게 그을린 자국이 여전했다. 아스펠라는 그곳에 다가가려 그을린 곳에 발을 내딛었을 때였다.
아스펠라가 발을 내딛자 그을린 땅이 비옥하게 변하며 그 위에 새싹과 새순이 돋기 시작했다. 아스펠라가 당황하여 발을 뗐는데도 불구하고, 새싹은 어느새 자라서 거대한 수풀이 되었으며 새순은 점점 뿌리를 바닥에 내리더니 이내 묘목으로 자라기 시작했다.
아스펠라 주변을 알 수 없는 기운을 담긴 바람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바람은 산의 모든 나무 사이를 지나다녔다. 쏴, 쏴아 소나기가 내리는 듯한 시원한 소리가 울리더니 이내 나무들이 잎을 떨며 말했다.
[아스펠라. 이제 네가 주인이야.]
그들의 말에 아스펠라는 비르가가 뭘 말한 것이었는지 확신하게 되었다.
“내가……산신인 거야?”
그녀는 비르가의 대를 이어 아스펠 산의 신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아스펠라가 믿을 수 없는 듯 제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자신은 평범한 인간 아니었던가? 평범한 인간이 어찌 산을 지키는 수호신이 될 수 있는 건가. 그것도 온전한 인간인 상태에서.
[아스펠라. 우리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어. 다만, 네 부름을 받고 우린 다시 자라난 거야. 생명을 얻은 거라고. 이제 네가 아스펠의 주인이야.]
[우리에게 불을 지른 그놈들이 우리가 예전으로 돌아온 걸 확인하곤 또 불을 지를지 몰라. 아스펠라는 위험하니까 계속 몸을 숨기고 있어.]
그들의 말을 들은 아스펠라는 조금 더 자신의 능력을 확인해보려는 듯, 땅에 손을 대고 잠시 집중했다. 이내 손 안을 간지럽히는 느낌이 들어 들어올리자, 작은 새싹이 땅을 비집더니 고개를 내밀었다.
“……아무래도, 어떻게 된 건지 너구리를 찾아가봐야 할 것 같아.”
너구리 영감은 비르가가 아스펠라를 주워오기 전부터 함께했었다고 하니까. 아마 그라면 어째서 인간인 아스펠라가 산신의 대를 잇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산신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산신이 누군가에게 멋대로 능력을 위임한다 하여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산신의 영혼을 가진 자여만 했다. 인간은 그게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영감은 지금 북쪽에 있을 거야.]
[하지만 아스펠라, 조금 시간을 두고 움직이는 게 좋을 거야. 갓 각성한 산신을 차지하려는 작은 신들이 있으니까.]
산신을 따르고 모시는 작은 신들. 산신 토벌로 인해 주인을 잃은 작은 신들은 방황하며 작은 부정신이 되거나,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만행을 저지른다 했다.
그들 눈에 띄어봤자 골치만 아파질 테니, 당분간은 저택에서 얌전히 지내야 할 것 같다.
아스펠라는 그들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
“그럼 난 언제쯤 이곳에 돌아올 수 있어?”
[언제든 돌아와도 좋아. 다만, 지금은 시기적으로 좋지 않을 뿐. 아스펠라. 그 인간의 집이 싫은 거야? 그 인간이 널 힘들게 해? 설마 막 때리고 그러는 거야?]
“아니야, 그런 거.”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스펠라. 산에 결계를 쳐둬. 이제 이 산은 네 몸의 일부나 다름없어서 또 불이 나면 너도 같이 아플 거야. 결계 치는 방법은 알고 있지?]
아스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르가는 어린 아스펠라에게 산에 결계를 치는 방법을 알려줬었다. 어떻게 진을 그리고, 어떤 나무를 골라야 하는지. 마치 수업이라도 하듯이.
[이제부터 아스펠라는 산신이니까. 조금만 더 안전해지면 바로 산으로 돌아와, 아스펠라. 다시 이전처럼 우리끼리 행복하게 살자.]
***
한참을 내려오지 않는 아스펠라 때문에 펠킨과 호위 병사들은 안에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닌지 발만 동동 굴렀다. 이내 우두둑, 두둑, 이상한 소리가 나기에 고개를 들어 산을 쳐다보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나무들이 슬금슬금 움직이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다.
뿌리를 다리마냥 움직이고, 나뭇가지가 팔이라도 된듯 휘두르고 접으며 길을 만든다. 수풀들 역시 사삭사삭, 소리를 내며 제 몸을 숨기고 비틀며 돌부리 하나 없는 깔끔한 길을 만들어냈다.
그 안에서 아스펠라가 타박타박 걸어나왔다. 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아닌, 그냥 산책 나가듯 너무나도 쉽게 내려왔다.
“아, 조금 늦었나요?”
걸어 내려오던 아스펠라가 입을 떡 벌린 채로 저를 보고 있는 이들을 쳐다보며 어색하게 물었다. 말로 설명해봤자, 저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펠킨은 궁금한 것이 매우 많았으나 뭐부터 물어야 할지 몰라 일단 조용히 마차로 아스펠라를 안내했다. 그는 마차에 타 대공 성으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여전히 멍하니 창문 밖의 아스펠 산 정경만 쳐다봤다.
아스펠라는 아무래도 그가 큰 충격을 받은 듯해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보좌관님, 괜찮으세요?”
“예?……아, 어, 예……그러니까……아스펠라 양, 환시가 보이는 약을 피웠다거나 한 건 아니시죠?”
“제가 그런 걸 쓸 이유가 없죠.”
“그쵸. 그렇죠. 근데 어떻게 나무가……나무가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나무에 원래 발이 있었던가? 원래 움직이는 종인가요? 본인이 생각해도 멍청한 질문을 하면서도 펠킨은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 아스펠라 양은 참 신비로운 분이시군요. 각하의 저주도…….”
작게 중얼거리던 펠킨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아스펠라는 다행이도 못 들은 듯하였다. 펠킨은 조용히 제 입을 한 대 때렸다. 그러다 아스펠라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물었다.
“아스펠라 양. 그나저나, 산이 원래대로 돌아와서 기쁘시겠습니다.”
“네? 네. 너무 기뻐요.”
“저, 그럼 혹시 방화범을 잡게 되면 산으로 돌아갈 예정이십니까?”
“……어, 음. 네. 그래야겠죠……. 그게 아니면 성에 머물 이유가 없으니까요…….”
아스펠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펠킨이 그런 아스펠라를 보며 잔잔하게 말했다.
“대공 각하께서 꽤 섭섭해 하시겠습니다. 아스펠라 양이 돌아간다고 하면.”
“그럴까요?”
“그럼요. 하지만 돌아가지 않으셔도 저희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하하!”
“……감사해요.”
***
그날 아스펠라는 에르윈 대공 성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깜장이가 있을 지하 동굴로 내려갔다. 별다른 일이라고는 없었는데 몹시 피곤했다. 아스펠라는 저를 맞이하는 깜장이에게 쓰러지듯 몸을 맡기며 그의 몸에 드러누웠다.
[피곤한가?]
“응.”
[피곤할 정도로 온실을 가꿀 필요는 없어.]
“그것 때문이 아니야.”
[그럼. 설마 사냥꾼이 널 귀찮게 하는 건가?]
“그것도 아니야.”
아스펠라는 여전히 검은 마수의 거대한 몸체에 몸을 드러누운 채로, 제 치맛자락이 말려 올라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다리 한쪽은 이쪽에 다른 한쪽은 저쪽에, 훌렁훌렁 외투를 벗어던진 채로 늘어진 아스펠라였다.
“깜장아.”
[……말해.]
“언젠가 내가 산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때 너 나랑 같이 갈래? 여긴 너무 좁잖아. 산에서 살면 인간 세상에 내려갈 일도 없을 거고, 게다가 아스펠 산은 사람들이 잘 오지도 않아.”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산으로 돌아갈 건가?]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가야 하니까.”
아스펠라가 그렇게 말하며 틱틱 손톱을 튕겼다. 칼리우스는 아스펠라가 그러는 것을 보며 하지 말라는 듯 코로 손을 꾹꾹 눌렀다. 아스펠라가 깜장이의 기다란 주둥이 끝 콧잔등에 얼굴을 기대며 말했다.
“나는 산에 돌아가야만 해.”
나직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조금 섭섭함이 담겨있었다. 웅얼웅얼 말할 때마다 느껴지는 아스펠라의 떨림이 칼리우스에게도 전해졌다.
[이곳에서 살기 싫은가?]
아스펠라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부족한 게 뭔지 말해. 그 남자는 네가 원하는 모든 걸 해줄 수 있어.]
“부족한 건 하나도 없어.”
[그럼 대체 뭐가 문젠데?]
“나.”
이내 아스펠라의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나야. 문제는 나. 나는 산에 무조건 돌아가야만 해. 왜냐면……내가 산신이 되었거든. 산신은 산을 수호하는 신이야. 막대한 책임을 진 거라고. 나는 산에 돌아가서 예전처럼 살아야 해.”
이내 아스펠라가 코를 훌쩍댔다.
“근데, 근데 이상하게 산에 돌아가는 건 정말 기쁜 일인데 왜 이렇게 속상한 거지? 산에서 아예 못 나오는 것도 아닌데 정말 속상해.”
[아스펠라…….]
“아무래도 내가 잠깐 꿈을 꿨나 봐. 그러니까, 어떤 꿈이냐면, 흐윽, 이곳에서 사는 꿈 말이야. 평범한 사람들처럼…….”
이내 아스펠라가 꺼이꺼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스펠라 스스로조차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서럽게 울게 될지도, 이런 걸로 섭섭해 할지도 몰랐다.
분명 산에 올라갔을 때는 괜찮았다. 오히려 불타버린 산이 돌아와 기뻤는데, 마차에서 돌아오는 길목부터 조금씩 뭔가가 쩌적쩌적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제 마음에서 나는 소리 말이다.
“정말 나도 내 속을 모르겠다. 산에 그렇게 돌아가고 싶었는데 막상 그렇게 되니까 왜 이렇게 섭섭한 건지. 그러니까, 깜장아. 나랑 같이 가자.”
[……….]
“너랑 같이 가면, 내가 좀 덜 슬플 거 같아.”
아스펠라는 잠시 입 안에서 말을 굴리듯 오물거렸다.
“상상은 해봤어. 만약 내가 이곳에서 칼리우스와 함께 살면 어떨지. 재밌을 수도 있고, 설렐 수도 있고, 혹은……끔찍할 수도 있겠지. 온전히 사랑만을 믿기엔 인간의 마음은 너무나 변덕스러우니까.”
사랑을 맹세한다 한들, 그 맹세는 그저 허구에 불과하니까. 대공의 마음이 변할 수도, 내 마음이 변할 수도 있겠지. 아스펠라가 담담하게 이어갔다.
“그럴 바엔 그냥 이렇게 추억으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안 그래? 깜장이 너랑 예전에 대공 각하의 저택에서 지냈던 이야기, 간간히 시장통 사람들에게서 이야기도 전해 듣고, 나는 지나가는 사람으로서 사는 그런 거 말이야.”
아스펠라의 말에 칼리우스는 어린 시절 읽던 낭만 희곡을 하나 떠올렸다.
길고도 복잡한 관계였고 그 속에서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그저 신들의 장난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들은 다시 잠에서 깨어나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사랑하던 이들에게로 돌아가는 희곡.
“난 그것만으로도 만족해.”
애초에 서로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나는 산에, 칼리우스는 성에.”
정반대의 위치잖아.
아스펠라는 그렇게 말하며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 깜장이의 털에 고개를 파묻었다.
[거짓말 하지 마.]
“이제부터는 추억거리를 만든다 생각할래. 그게……맞는 일일거야. 그러니까 깜장아. 너도 잘 생각해봐. 난 대공 성에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아스펠라는 입 안이 껄끄러운 듯, 혀로 마른 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깜장아. 나랑 같이 산으로 가자. 응? 그럴 수 있는 거지? 너랑 대공은 언제까지고 함께 할 순 없을 거 아니야. 내가 잘 말해볼게. 널 데려갈 수 있게 해달라고.”
[……아스펠라, 나는…….]
그렇게 말한 아스펠라는 잠시 그의 눈을 쳐다보다, 이내 회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가 뭔가 말하려 했으나 아스펠라는 이만 잠을 자야겠다며 말을 돌렸다.
아스펠라는 그렇게 검은 털에 얼굴을 묻었다.
이내 작게 한숨을 쉬는 숨소리가 들렸으며, 제 몸 위로 따듯한 꼬리가 덮어지는 것을 느꼈다. 손가락을 꼼질거려 제 손바닥 안에 가득 들어찬 검을 털들을 가만히 쓸었다.
***
칼리우스는 제 품에서 잠든 아스펠라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어떻게 해야 당신을 계속 이곳에 둘 수 있을까.
산을 불태워야 하나?
이대로 널 아무데도 가지 못하게 가둬야 할까.
무릎을 꿇고 절절하게 빌며 네 친절함과 동정심을 유발할까.
어떻게 해야 우리가 그저 한여름 밤에 꾼 꿈같은 관계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까. 우리는 그런 얕은 것이 아니야. 그저 낭만적인 관계만도 아니야.
[아스펠라, 넌 나의 구원자야.]
하지만 내가 널 무저갱에 같이 끌고 갈 것 같기도 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과 함께 떨어졌으면 좋겠어.
칼리우스는 차라리 그렇게 해서라도 단둘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겠다고 생각했었다. 아스펠라를 어떻게든 소유하고 싶다는 그런 생각.
사실, 산이 불탔을 때도, 아스펠라가 자신의 몸이 타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덕분에 그녀가 이곳에 계속 머물 수 있지 않았던가.
이제 아스펠라를 사로잡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널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
이제는 모르겠다.
그렇게까지 해서 소유하고 싶은 마음과 비등하게 아스펠라가 그저 웃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녀가 고통스러운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에 칼리우스는 피식, 자조적인 웃음소리를 흘렸다. 고개를 들어 우물 위 아주 자그마한 달을 쳐다봤다. 달 너머 하늘 어딘가에 있을 신에게 기도했다.
신이시여, 이 모든 것이 내가 받아야 할 벌이라면. 그 속에서 아스펠라만은 빼주십시오.
내가 부디 그녀를 잠식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
구슬픈 개의 울음소리가 바람소리에 실려 왔다.
아우우우― 아우우우―
그 미약한 소리를 느낀 것인지, 무거운 아다만트 광석으로 만들어진 구속구에 이리저리 온몸을 휘감기고 속박당한 검은 마수가 깨갱 깨갱 발작을 일으키더니 이내 아우우우, 하울링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공명이라도 하는 듯했다.
애꾸눈의 검은 마수의 돌발 행위에 그 주변에 있던 신도들과 연구복을 입은 이들이 당황하여 우왕좌왕했다. 이내 온몸을 무장한 병사들이 와서 기다란 창으로 괴수의 몸을 이리저리 찔러댔다.
“뭐야 갑자기?”
연구실 안에 들어온 국왕이 귀를 막으며 물었다.
거대한 몸체를 떨어대며 우는 통에 귀가 아파왔다. 병사들이 꼬챙이나 불쏘시개로 쑤셔대도 검은 마수는 좀체 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봐요, 아버지. 입 좀 닥치라니까. 조용하다가 갑자기 왜 이래?”
“죄송합니다, 전하. 얼른 조용히 시키겠습니다.”
“잠깐.”
파베스가 잠시 뭔가를 떠올린 듯 제 턱을 매만졌다.
“자네가 일전에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검은 마수는 개과의 짐승이 몸집이 커진 것이니 행동 양식은 같을 거라고.”
그러자 연구원 하나가 예, 그렇습니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파베스의 눈이 번뜩였다. 입꼬리를 한껏 올려 관자놀이까지 기다란 미소가 그러졌는데, 그 모양새가 워낙 기괴했다. 연구원은 파베스의 저런 광기 가득한 얼굴을 이미 알고 있다. 저것은 그의 비상한 머리가 아주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리면서 기뻐할 때 나오는 미소였다.
“그렇다면 저건 제 동료를 부르는 것 아닌가?”
“예……? 아! 확실히, 저 울음은 제 동료를 부르는 울음 같습니다, 전하. 송구합니다. 저희가 더 빨리 눈치를 챘어야 했는―”
“검은 마수가 한 마리 더 있다는 건가! 하하하하!”
연구원의 말에는 관심이 없는 건지, 파베스가 검은 마수 앞으로 달려가 물었다.
“아버지, 누굽니까? 누가 또 그런 축복을 받았단 말입니까? 응? 신도 참 너무하시지. 이렇게나 원하는 나 같은 인간에게는 그런 축복을 내려주지도 않으면서, 다른 것들에게는 잘도 내려주는군!”
온몸에 털이 나고 뼈가 재배치되며 이성을 잃은 괴수로 변하는 것을 ‘축복’이라 부르는 이는 파베스 그 하나뿐일 것이다.
파베스는 아예 병사의 창을 빼앗고는 직접 검은 마수를 푹푹 찔러대며 소리쳤다.
“말해! 말하라고! 내가 아닌 또 누가 선택 받은 거야!”
미치광이나 다름없는 그의 행동에 병사들은 물론 그 안의 연구원들까지 눈을 질끈 감았다. 뒤이어 들어온 국왕의 비서 버루카가 깜짝 놀라 얼른 파베스를 말렸다.
“전하! 이러다 마수가 죽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귀중한 연구 자료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얼른 그의 창을 빼앗자 파베스가 거친 숨을 내쉬며 제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어차피 창이나 칼로 저 몸을 뚫는다 해도 저것들은 잘 죽지도 않아. 참 부럽기도 하지. 저리 강하다니.”
“전하. 그저 몸집이 커진 괴수일 뿐입니다. 전하께서는 곧 신이 되실 텐데 어찌 미물을 부러워하신답니까.”
“그래. 그렇지. 맞아. 버루카 자네 말이 맞아. 나는 곧 신이 될 왕인데 말이야―”
말끝을 늘리던 파베스가 이내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책상 위의 문서들을 옆으로 죄 쓸어버렸다. 유리관들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바닥 아래로 떨어졌다.
“근데 망할 아스펠 산이 다시 살아났잖아!”
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파베스가 발광을 했다.
“아스펠 산에 산신이 있다는 소리 아니야. 이 망할 것들아, 일 제대로 처리 안 해? 내가 도대체 언제까지 실패를 맛봐야 하는 거야.”
아스펠 산이 복구가 되었다고!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 아스펠 산에 산신이 있다는 거잖아! 그렇게 되면 기껏 강령한 저 영혼의 힘이 나약해지잖아!
당장 가서 그 망할 산신을 잡아와! 그 목을 따서 내게 가져오라고!
파베스는 오늘 아침 아스펠 산이 이전처럼 돌아왔다는 말도 안 되는 보고를 받고는 하루 종일 분노로 치를 떨어야 했다.
대체 흙까지 불타버릴 정도로 새카맣게 타버린 산이 어찌 하루 만에 복구된단 말인가.
그건 필시 산신의 짓이었다.
“신이 날 방해라도 하려나 보구나.”
하지만 어디 두고보라지. 누가 과연 이기게 될지. 난 최초로 인간에서 신이 되는 자가 될 거다. 파베스가 실소하며 중얼거렸다.
“날 실망시켰던 만큼, 얻은 결과가 있어야 할 것이야. 실험들은,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 거겠지?”
“예, 전하. 모두 연고 없는 이들로 모아 이제 막 실험 준비를 마쳤습니다. 시작하는 대로 바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말하는 과학자의 말에, 파베스가 쯧, 혀를 차며 기다란 로브 자락을 휘날리곤 계단을 올라갔다. 다른 연구원들은 엉망이 되어버린 테이블 위를 정리하며 저들끼리 두려움을 삭혔다.
버루카는 잠시 벽에 구속된 검은 마수를 조용히 올려다봤다. 그러다 마수와 눈이 마주쳤다. 그 마수는 제 아들을 증오하고 원망하는 눈이 아닌,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이냐. 검은 마수는 그리 묻고 있었다.
버루카는 차마 그 눈을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다. 참혹한 그 모습에 이내 눈을 질끈 감고는 파베스의 뒤를 따랐다.
***
아스펠라의 온실 속 식물들은 날이 갈수록 생기를 띠고, 무럭무럭 자라났다. 온실뿐만이 아니었다. 불에 탄 이후로 죽은 땅이나 다름없었던 야외 온실 주변에도 푸릇푸릇한 새싹이 돋아났고, 밤사이에 잔디가 길게 자라났다.
새카만 폐궁 주변에 푸릇한 녹음이 짙게 일자, 에르윈 성의 시종들도 궁금한 듯 그곳을 일부러 지나치거나, 슬쩍 와서 구경하기도 했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무성해지는 온실이 두려울 법도 한데, 이상하게 온실 주변의 반경에 들어가는 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안락함이 그들 몸을 따듯하게 감쌌다.
이게 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지를 못해 다들 아스펠라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아스펠라가 온실 문을 열기 전까지, 한두 명이 점점 모이더니 이내 바글바글해졌다. 그들은 모두 뭔가에 이끌리듯 이곳에 도착했다. 누구는 그리운 향기가 나서 왔다고 하고, 누구는 어디선가 따듯한 기운이 나서 왔다고 하며, 심지어는 노랫소리 같은 것이 들려와 왔다고 했다. 죄다 각기 다른 이유로 이 온실 앞에 모인 것이다.
“다들 왜 모여 있는 거죠?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아스펠라가 인파를 가르며 물었다. 혹여나 온실 안쪽이 쑥대밭이 된 건가, 아니면 그새 식물이 무럭무럭 자라 유리창을 뚫은 것인가 걱정하는 마음과 달리 사용인들은 아스펠라에게,
문을 열어주세요, 안이 너무 궁금해요! 뭔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말했다.
당황한 아스펠라가 열쇠를 꽂아 문을 열자 사람들이 모두 입구에서 머리만 쭉 빼고 그 안의 향기를 음미하듯 들이켰다.
스읍― 하아아아―!
다들 감탄사에 가까운 숨을 내뱉으며 저마다 황홀에 빠졌다.
“세상에, 어쩜 이렇게 향기롭죠?”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야. 마치 어머니의 품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라고!”
“난 따듯한 물에 목욕까지 마치고 이불 안에 들어온 느낌인데.”
“난 알몸으로 들판을 뛰노는 것 같아!”
아스펠라는 그들의 말에 당황했다. 확실히 온실 안의 풀 내음이 좋긴 했으나, 이렇게 눈을 감고 몸을 떨 정도인가? 앨리스가 냄새를 맡다 이내 아스펠라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아가씨. 이렇게 최고의 온실은 처음이에요. 무슨 마법이라도 부리신 건가요? 냄새를 맡고 있으면 행복했던 기억이 막 떠올라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원래 식물들에게서는 좋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거든요.”
주방 하녀장이 아스펠라에게 다가와 물었다. 이렇게 좋은 곳에서 자란 허브들을 몇 개 따다가 음식을 해도 되겠냐는 것이었다. 아스펠라가 흔쾌히 온실 한켠에 가꾼 로즈마리 몇 잎을 따 건넸다.
그들은 하녀장의 손에 놓인 잎의 냄새를 킁킁 맡아댔다.
다른 누가 보면 이곳에서 마약을 키우는 줄 알 것이다. 아스펠라는 더 오래 있다간 진짜 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른 이들을 모두 내보냈다.
“도대체 이게 뭔 일이야.”
아스펠라가 중얼거리자 식물들이 그제야 말했다.
[아스펠라. 이것도 네 능력인가 봐. 네 손길이 닿은 이후부터 알 수 없는 기운이 몸에서 흘러나와.]
[좋은 거 아니야? 우리 덕분에 이곳의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걸.]
“행복을 넘어 거의 취한 것 같은데? 흐음, 위험한데. 이렇게 능력 조절을 못하는 건.”
아스펠라의 말에 다른 식물들은 그저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저들끼리 꺄르르 신나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그들의 말에 아스펠라도 별 수 없어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나저나, 이 광경을 보면 대공이 엄청 놀라겠다.”
분명 불모지나 다름없던 그 온실이, 한 달 새에 이렇게 우거진 정글처럼 변해버렸으니……. 그러자 깔깔대고 시끄럽게 신나 떠들던 식물들이 대번에 웃음을 그쳤다.
[칼리우스도 여기 와?]
“당연하지. 이 온실은 그분의 소유인 걸.”
[우린 아스펠라 소유할래. 칼리우스는 무서워.]
“얘들아. 왜 그렇게 그분을 무서워하는데?”
[칼리우스한테 물어봐. 우린 무서워서 말 못 해. 칼리우스가 말하면 우리 불 지른댔어.]
“뭐?”
식물들이 조용해졌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했다. 아스펠라가 당황하여 얘들아? 얘들아? 하며 불렀으나, 그들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담쟁이는 칼리우스가 한 말을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살다 살다 내가 식물들한테 말을 걸다니. 미칠 노릇이군.’
칼리우스는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혼자 큭큭 웃어대다 이내 잔뜩 말라버린 식물들에게 말했다.
‘아스펠라한테 그 얘기를 했다가는, 너희 다 불 질러 버릴 줄 알거라.’
그들은 그때 아스펠라가 누군지도 몰랐다. 한참 전의 일이었는데 나중에 한 여자가 이곳을 찾아오고 나서야 칼리우스가 말한 아스펠라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우린 아스펠라가 누군지도 몰랐는데, 칼리우스가 한참 전에 와서 말했어.]
“뭘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거야 말 못하지. 칼리우스가 말하면 불 지른댔는데. 걘 아주 무서워. 무섭다고. 아스펠라, 우리 재미난 이야기 하자. 무서운 이야기 말고.]
아스펠라는 제대로 말도 안 해줄 거면서 간만 보는 식물들이 야속했다. 칼리우스에게 직접 물어보기에는 껄끄러울 이야기일 것이 분명한 것이었다.
“궁금한데.”
[궁금해?]
“너희 나 놀리니?”
[마, 말하면 절대 안 되는데. 우린 아스펠라가 너무 좋아서. 아스펠라가 부탁하면 들어줄지도 모르지.]
우린 아스펠라 말은 거역 못하거든. 아스펠라가 잘 자라나라, 하면 잘 자라나는 수밖에 없듯이. 그렇게 말한 식물들이 물었다. 아스펠라. 궁금해? 우리가 말해줄까? 아스펠라가 우리 지켜준다 약속하면 말해줄게.
그들의 말에 아스펠라가 잠시 고민했다.
“아니. 말하지 마. 나중에 칼리우스가 말해주겠지. 믿어보려고.”
제 3자를 통해서 이야기를 듣는 건 싫어. 아스펠라의 말에 식물들이 에이, 재미없어. 에이. 하며 잎을 떨었다.
아스펠라는 어쩐지 아스펠 산의 식물들과는 달리 온실의 식물들은 짓궂은 것 같다 생각했더랬다.
***
아스펠라의 온실은 생각보다 파급력이 강했다.
그곳에 가면 온갖 묵은 때가 벗겨지는 기분이 든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향기로운 냄새가 하루 종일 코언저리에 머문다 등의 소문을 듣고, 다른 시종들도 찾아왔다.
그들은 아스펠라에게 온실 안에 들어가도 되냐 물었고, 아스펠라는 기꺼이 허락했다.
아스펠라는 하루 종일 온실을 가꾸면서 그들을 맞이해야 했다.
요란한 방문에 가장 정점을 찍은 것은, 펠킨이었다. 펠킨은 온실에 들어오자마자 펑펑 눈물을 흘렸다. 당황한 아스펠라가 왜 우냐 물었고, 펠킨은 그녀가 건넨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너무 기뻐서요! 소리쳤다.
한참 울고 난 뒤에야 진정한 펠킨이 코를 훌쩍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아스펠라 양. 아무래도 이 온실에는 신묘한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신묘한 힘이요?”
“예. 그렇지 않고서야 다들 이렇게까지 반응할 리 없잖습니까.”
“그런가요? 전 그냥 식물들이 잘 자라길 원해서 열심히 가꾼 것뿐인데. 걱정스러운 것은 제가 마녀라고 여겨지진 않을까 하는 거예요.”
“마녀요? 그럴 리가요! 이렇게 행복을 주는 마녀가 어디 있답니까?”
펠킨은 절대 걱정 말라며 아스펠라를 다독였고, 그의 말대로 시종들은 아스펠라를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제가 감히 그 금손을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그, 금손이요?”
“네. 시녀들 사이에서 아스펠라 아가씨의 손이 특별한 손, 즉 모든 것을 금처럼 귀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하여 금손이라고 불리고 있어요.”
아스펠라의 손을 잡으면 그 좋은 기운을 받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낭설까지 돌기 시작했다. 아스펠라는 마치 살아있는 토템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앨리스가 꺅! 정체모를 소리를 지르며 조심스럽게 아스펠라의 손을 양손으로 공손하게 잡았다.
“감사해요, 아가씨!”
“아뇨, 제가 한 것은 딱히 없는 걸요.”
“네? 무슨 소리세요! 아가씨가 오고 나신 이후부터 이 저택에 환해졌는걸요! 대공 각하도, 펠킨 보좌관님도 항상 수심 깊은 얼굴로만 다니셨는데. 그런 분들이 웃으시잖아요. 아스펠라 아가씨는 저희 저택에도 생명력을 주셨어요.”
역시 금손이 맞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자 아스펠라는 괜히 기분 좋아져 저도 모르게 쑥스러운 듯 애꿎은 머리만 배배 꼬아댔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앨리스.”
순수해 보이는 그런 아스펠라의 모습에, 앨리스의 활짝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내려왔다. 이런 아가씨를 언제까지 속여야 하는 거지?
만약, 모든 걸 알고 배신감에 이곳을 떠나면 어떡하지?
앨리스는 아직 할 말이 더 남아있는 듯 입을 달싹거렸다.
“진심이에요, 아가씨 덕분에 주인 어르신이 정말 많이 밝아지셨어요……. 마수도, 마찬가지고요.”
“그런가요? 깜장이는 제가 오기 전에 어떻게 지냈나요? 물어도 말해주질 않아서요.”
“저희는 잘 몰라요. 그냥, 지하 동굴에만 계셨거든요.”
그렇게 말하던 앨리스가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가씨는 에르윈 대공 성의 무기고를 보신 적 있으신가요?”
앨리스의 말에 아스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펠킨에게서 성의 안내를 받던 도중 의도치 않게 발견한 무기고. 보통은 지하에 꼭꼭 숨겨둘 텐데, 에르윈 성의 무기고는 일층의 거대한 방이었다.
누구라도 쉽게 들어와 무기를 챙겨갈 수 있을 정도로 개방된 곳.
“네.”
“……거기 있는 모든 무기들은, 모두 지하 동굴의 마수를 위해 준비해둔 것이에요. 언젠가……언젠가는 죽여야 할 날이 올 수 있다고. 각하께서 저희에게 직접 무기 다루는 법까지 알려주셨죠.”
앨리스가 제 손톱을 틱틱 튕겼다.
그 무기고는 온갖 검과 총포, 그리고 탄약들이 방 안 가득 들어차 있다. 모두 칼리우스가 직접 고른 것이다. 언젠가 자신이 더 이상 통제 불가능한 검은 마수가 되어, 다시는 인간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미련 없이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에르윈 성의 사용인들은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무기를 다를 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저는 그 무기고가 열리는 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각하께서도 분명 그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마수도, 그렇게 생각할 거고요……. 각하는 아스펠라 아가씨가 그 무기고가 열리지 않도록 막아줄 분이라 생각하세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른 이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는 걸요. 아가씨가 이 저택에서 계속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그들은 아스펠라가 가져온 아주 작은 변화들이, 넝쿨 가지가 뻗어나가듯 점점 영역을 넓히는 것을 느꼈다.
“제가 이런 말 하는 건 정말 주제넘은 행동이지만, 제가 각하를 모신지 올해로 20년이 되었습니다.”
앨리스는 열네 살이 되었을 무렵, 어머니를 따라 이곳에 들어온 날을 기억한다. 자신보다 어린 소년은 튀니아에서 국왕 다음으로 강력한 권력을 쥔 아이였다.
“각하는 정말 오랜 시간동안 혼자 계셨어요. 혼자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계셨고요.”
그 아이가 웃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앨리스가 봐온 칼리우스는 그랬다.
“그런데, 아가씨가 오신 뒤부터는 정말 많이 변하셨어요. 저는, 각하께서 행복해지셨으면 해요. 오갈 데 없는 저희 모녀를 받아주신 선대 대공의 아드님이시니까요.”
“왜 그런 말을 제게…….”
“아까도 말했듯이, 아가씨만이 가능하시니까요.”
앨리스가 아스펠라의 손을 다시 한 번 꼭 잡았다. 아까 전처럼 금손이니 뭐니, 하며 신성한 영물을 만지는 것처럼 대했던 것과 달리, 마치 당부하고 부탁하는 듯한 애원의 손길이었다.
“아가씨. ……각하를 떠나지 말아주세요.”
“앨리스?”
“버려진 온실을 다시 만개하게 만드신 것처럼. 그리해주세요.”
주인 어르신이 들어가 계신 동굴 안에 손을 내밀어주세요.
그렇게 말한 앨리스가 허리를 잔뜩 숙여 인사를 한 뒤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앨리스가 나간 자리를 가만히 쳐다보던 아스펠라가 이내 제 손을 내려다봤다.
그런 말을 하는 저의가 대체 뭘까.
***
저녁 식사를 마친 아스펠라는 내일 칼리우스가 돌아올 거라고 펠킨에게 전해 들었다. 아스펠라는 지하 동굴로 내려가 깜장이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말해줬다.
온실에서 특별한 향기가 난다는 것도, 모두들 그 온실을 좋아한다는 것도.
“그런데, 온실 식물들이 대공을 좀 무서워하는 것 같아.”
[무서워한다고?]
“응. 시끄럽게 떠들던 애들이 대공의 이름만 들어도 잠잠해질 정도야. 무섭대. 자기들은 말 할 수 없다면서 자꾸 나보고 직접 물어보래.”
나한테 허튼 말 했다가는 죄다 불태운다고 협박까지 했나 봐. 근데 대공이 왜? 나한테 숨기는 게 뭐가 있어서. 아스펠라의 말에 검은 마수가 대답했다.
[……떳떳하지 못한 이야기인가 보지.]
그렇게 말한 마수는 얼른 말을 돌렸다. 그래서 온실이 어떻게 며칠 만에 그렇게 다 자랐다는 건데? 며칠 전에 씨 뿌렸다면서. 그의 질문에 아스펠라가 제 양손바닥을 쫙 펼쳐 보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신이 된 이후에 생긴 능력 같아. 아스펠 산도 모두 복구되었다고 말해줬지? 그날 꿈에 비르가도 나왔고. 이제 내가 뭘 해야 할지 점점 감이 잡히는 듯해.”
[…….]
“방화범을 빨리 잡게 되면, 생각보다 더 일찍 이곳을 나가게 될 거야. 그전까진 조금 더 온실을 손봐야지. 대공도 그 온실을 보고 기뻐하려나?”
다른 사람들처럼 가장 행복한 것을 느낄 수 있을까?
검은 마수는 아스펠라의 질문에 잠시 침묵하다 모르겠다 답했다. 아스펠라가 물었다.
“너는 대공에 대해 잘 아는 듯하면서도 어떨 때 보면 잘 모르는 것 같아. 나도 그래. 대공에 대해 점점 알아간다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그의 속을 모르겠어.”
깜장이의 꼬리털을 손으로 빗질하며 중얼거렸다.
“그에 대해 전부 알려고 하는 건, 욕심이겠지? 그래. 욕심일 거야. 어차피 난 산으로 돌아갈 건데.”
[자꾸 산으로 돌아갈 거란 말 좀 하지 마.]
그의 말에 아스펠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물었다.
“왜 그렇게 예민하게 말해? 나 안 따라 올 거야?”
[모르겠는데.]
“그게 뭐야.”
[네가 오라면 가야지.]
칼리우스는 자신이 이대로 아예 짐승이 되어 아스펠라와 함께 산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짐승으로서의 삶을 원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대공으로서 져야 할 모든 책임과, 제 귓전에 소리치는 망령들로부터 도망치는 삶이어도, 아스페라와 함께라면 기꺼이 도망자의 삶을 택하겠다.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그치? 행복할 거야.”
[……너랑 함께라면 뭐든.]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는 깜장이의 시선에 아스펠라는 잠시 기분이 묘해졌다.
뭐지, 이 기분? 어디서 많이 느껴본 기분인데. 아스펠라는 깜장이의 털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깜장이를 바라봤다. 자신을 온전히 쳐다보는 그의 붉고 깊은 눈빛 너머 뭔가가 있다. 이전에도 품었던 의문들이 한층 더 짙게 아스펠라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생각하고 싶지도, 의심하고 싶지도 않았으나 그것들은 마치 아스펠라가 풀어놓은 미끼를 문 물고기들 마냥 떼 지어 달려들었다.
아직 어떠한 확증도 없다. 오로지 심증뿐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내 산신으로서의 책임감이 그녀에게 물었다.
‘만약 깜장이가 칼리우스라면? 그가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비르가의 예언 속 괴물이라면 어쩔 거야? 너 이대로 세상이 끝나도 상관없어?’
그러나 반대쪽의 무언가가 반박했다.
‘검은 마수가 예언 속의 존재인지는 확실치 않아.’
속편한 소리 하고 있군. 정신 못 차리지? 네가 평범한 인간인줄 알아?
넌 산신이야! 이제 인간이 아니라고! 비르가가 사랑 놀음에 빠지라고 그때 널 살린 줄 알아?
내면에서 서로 다른 두 개의 자아가 싸우기라도 하듯 혼란스러웠다.
아스펠라가 꽤 오랜 시간동안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있자, 칼리우스가 걱정스러운 듯이 아스펠라를 불렀다.
[아스펠라.]
“…….”
[……아스펠라?]
아스펠라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계속해서 생각에 잠긴 듯 제 손가락만 틱틱 튕기고 있었다. 불안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칼리우스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아스펠라를 불렀다.
“……….”
[아스펠라! 어디 불편한 건가?]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스펠라는 한참 더 깜장이의 눈을 쳐다보다 이내 조심스럽게 물었다.
“깜장아, ……너 혹시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않니?”
[무슨 뜻이지?]
그에게서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한 채였다.
아스펠라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품고 있던 의심을 꾹꾹 내리 눌렀으나, 이제 그것마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을 내밀기 위해서는 알아야만 했다.
저 붉디붉은 눈 안에 뭘 숨기고 있는 걸까. 칼리우스의 미소에는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는 걸까.
아스펠라가 천천히 입을 뗐다.
“……널 가만히 보면, 대공과 네가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아니. 마치 동일 인물 같아. 그런데 말이 안 되잖아. 대공은 인간이고, 넌 짐승인데. 이상하지? 내가 미친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그치만 잘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야.
나는 왜 대공과 너를 같은 시공간에서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건지, 왜 대공은 검은 마수를 사냥할 때 쓴다는 일카이의 향에 반응하는 건지, 그리고 날 보는 지금 너의 그 눈빛이 왜 대공과 같은지.
아스펠라는 잠시 말을 끊고 그를 쳐다봤다.
아니라고 말해.
[…….]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거잖아. 만일, 대공이 검은 마수로 몸이 변하는 인간이라면, 비르가의 예언 속 그 위험한 존재라면.”
아니라고 말하라니깐! 아스펠라가 속으로 소리쳤다.
[…….]
“나는 그분을, 너를 죽여야 하는 걸. 난 그러고 싶지 않아.”
아스펠라는 깜장이가 무슨 대답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듯 계속 그를 바라보며 행동을 기다렸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혹시 미친 거야 아스펠라? 혹은 대공이 재수가 없어도 개 취급이라니. 평소 깜장이와 으레 주고받는 그의 험담마냥 넘길 수 있도록.
하지만 깜장이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칼리우스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내일 대공이 돌아온대. 그러니 우린 당분간 만나지 못할 거야. 그치?……맞는 거지?”
[…….]
“널 만나면 만날수록, 대공에 대해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많아져. 가까워지기는커녕 더 멀어지는 기분이야. 너나 그 사람이나, 뭘 숨기고 있는 걸까?”
[내 밑바닥까지 보여주기엔―]
“나도 내 속을 보여주지 않으니까? 그럼 그 속, 보여줄게.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앞으로 행동할지를.”
아스펠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펠킨에게 돌문을 열어 달라 말했다.
펠킨이 문을 열어주며, 아스펠라 뒤에 있던 깜장이를 슬쩍 쳐다봤다.
아스펠라는 그동안은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 깜장이를 바라보는 펠킨의 눈빛이 단순히 두려워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뭔가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보좌관님, 내일 대공 각하께서 돌아오신다고 하셨죠?”
“네. 내일 아침 일찍 돌아오실 예정입니다.”
“저 그냥 오늘 밤까지 깜장이와 같이 있어도 될까요?”
“예?”
당황한 펠킨이 슬쩍 깜장이를 보다 말했다.
“그, 각하께서 아스펠라 양의 잠자리에 신경 쓰라고 하셨어서.”
“그래도 아침 일찍 여기서 나가면 되잖아요.”
“오늘은 아닌 듯합니다. 아스펠라 양. 여름과 달리 밤이 되면 일교차도 심하고요.”
“그런가요? 하긴, 대공 각하를 만나는데 깜장이의 냄새가 배면 좀 그러려나요?”
“아, 예, 아무래도. 그렇죠?”
아스펠라는 어색하게 웃는 펠킨을 보며 이내 따라 미소 지었다.
펠킨은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구나.
그동안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고 싶었다. 무의식적으로 그런 물음 자체를 억누르려 했다. 그럴 리 없다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갈수록, 어째 더 아래로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칼리우스가 자신에게 숨기고 싶어 하는 것도, 자신이 모른 척 넘어가려 했던 것도. 이제 여기서 끝내야 한다.
어쩌면 자신 역시 그 둘을 따로 생각하며 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알면서도 아니라고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래서는 안 된다.
숨기고 억눌러봤자 어차피 모든 운명은 예정대로 흘러간다는 것을, 시간이 흐르면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아스펠라는 결단을 내렸다.
“펠킨 보좌관 님.”
방 앞에 도착한 아스펠라가 펠킨을 불렀다.
“예, 아스펠라 양?”
“……대공 각하께 인간으로 돌아오시면, 서재에서 만나자고 말 좀 전해주시겠어요?”
“……예?”
“참, 말실수를 했네요. 출장에서 돌아오시면요.”
아스펠라가 애써 입꼬리를 당겨 미소 짓고는 방 안에 들어갔다. 펠킨의 얼뜬 얼굴을 본 아스펠라가 그대로 문을 닫았다.
***
방에 돌아간 아스펠라를 앨리스가 얼른 맞이했다. 따듯하게 데운 침실, 숙면에 들게 하는 향유를 뿌린 욕조까지 잘 준비되어 있었다. 아스펠라는 얌전히 목욕을 하고, 데운 우유를 한 컵 마신 뒤 따듯한 침대 안에 들어갔다.
아스펠라는 눈을 감고 몸의 긴장을 푼 뒤 잠에 든 사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왜 이제야 자신이 이 모든 걸 깨달았을까 기가 막히다가, 서운하다가, 이내 속상해졌다.
이 저택의 모든 이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조금 있자 다른 시녀가 조용히 들어와 앨리스에게 물었다.
“아가씨는 잠드셨어?”
그러자 앨리스가 가까이 다가온 것인지, 눈을 감은 상태로도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스펠라는 숨소리를 죽이며 필사적으로 잠든 척 연기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앨리스가 말했다.
“응. 잠드신 거 같아.”
그녀들은 아주 작게 속삭였다.
“오늘은 각하께서 돌아오시는 날이니까, 다들 맞이할 준비 제대로 해야 해. 가자.”
“저기, 우리 언제까지 아가씨를 속여야 할까?”
앨리스의 말에 다른 시녀가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각하께서는 아가씨가 알기를 원치 않으시니까.”
“그치만, 난 아가씨한테 조금 죄송해. 아무것도 모르시는데.”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겠니? 두 분의 일이야. 우린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자, 얼른 나와.”
앨리스는 한동안 조용히 잠든 아스펠라를 쳐다보다 이내 방문을 닫고 나갔다.
‘다들 알고 있었군.’
저택의 이들은 칼리우스가 검은 마수로 때마다 변화를 겪는다는 걸 알고 있었어.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복도를 지나다니는 발걸음 소리가 조용해질 무렵.
아스펠라가 번쩍 눈을 떴다.
침대에서 일어난 아스펠라가 이내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다시 천천히 내쉬었다.
이내 높은 매트리스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얇은 슬립 위에 로브를 걸친 뒤, 이내 한 번 더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복도는 어두웠다. 모두들 잠자리에 든 듯한 아주 어두운 복도. 아스펠라는 촛대를 들고 걸음을 옮겼다. 이따금 바람이 창문을 스쳐지나가 스산한 소리만 감도는 계단을 내려와 칼리우스의 서재로 향했다.
문을 열고 그곳에서 칼리우스를 기다렸다.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가 오기 전까지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생각들을 정리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아스펠라는 자신의 감정을 정리해야 했다.
지금 그에게 느끼는 것이 배신감인지, 분노인지, 증오인지, 혐오인지, 수치스러움인지.
혹은 연민이나 동정일까?
산신을 토벌한 그가 저주를 받아 꼴좋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양손을 꼭 쥔 채 가지런히 앞에 모은 상태로 아스펠라는 계속해서 자신을 돌아봤다.
조금만 생각하면 금세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애초에 아스펠라처럼 비르가에게 신의 능력을 일정량 ‘부여’받은 것이 아닌 이상, 인간이 동물들과 대화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자신에게 다가온 것도, 모두 다 그가 깜장이라는 전제가 붙으면 충분히 이해 가능한 일이었다.
아스펠라는 그동안 칼리우스와의 대화와, 마수인 깜장이와의 대화를 죽 돌이켰다. 사소한 것은 차치하고 그 둘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산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이곳에 남아달라고. 자신을 두고 가지 말라고.
오늘 낮에 앨리스가 한 말의 저의 역시 알 것 같다.
앨리스는 후에 모든 걸 알게 된 자신이 이곳을 떠나지 않았으면 했던 것이다.
그를 미워하지 말라고. 그에게 손을 내밀어달라고.
가만히 칼리우스의 책상 앞에 서서 창문으로 비치는 달빛을 쳐다보고 있는데,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묵직한 발걸음이 안으로 들어왔다. 주저하는 것인지 평소 빠르고 거침없던 그의 보폭이 줄어들었다. 그러다 이내 결심한 것인지 천천히 아스펠라에게 다가왔다.
아스펠라의 뒤로 다가와 멈춘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스펠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막 인간으로 돌아와 피곤하실 텐데 죄송해요.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당신을 놀리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알아요. 진심이랑 거짓말을 아예 구분할 줄 모르는 바보는 아니니까요.”
아스펠라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칼리우스가 조금 흐트러진 차림새로 서 있었다. 매우 지친 표정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표정이기도 했다. 아스펠라는 그런 칼리우스를 잠시 올려다보다 이내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물었다.
“언제였어요? 저주를 받은 게.”
“……산신들을 죽인 후부터.”
“점점 상태가 악화되는 건가요?”
칼리우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펠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깜장이라는 이름을 질색했는지 이제야 알겠네요.”
“아스펠라. 나한테 화났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뇨. 이해해요.”
아스펠라의 말에 칼리우스가 잠시 가만히 아스펠라를 쳐다보다 이내 픽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녀를 비웃는 것이 아닌, 자조적인 미소였다.
“이해 못 해, 당신은.”
“이해한다니까요?”
속 편한 소리를 잘도 하는군. 칼리우스가 그리 생각하며 아스펠라를 내려다봤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아스펠라가 주춤대며 뒷걸음질 쳤다. 아스펠라가 그럴수록 칼리우스는 점점 더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내 엉덩이가 책상에 걸리며 더 이상 물러서지 못하게 되자 아스펠라는 그 위로 주저앉았다. 칼리우스는 아스펠라가 앉은 책상 위에 양손을 올려놓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아스펠라의 몸이 그가 다가온 만큼 뒤로 기우뚱하다 이내, 무게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아스펠라는 제 위로 드리워진 커다란 칼리우스를 올려다봤다.
달빛을 그대로 받아 그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다.
포에트 셔츠 자락이 식은땀에 달라붙은 것도, 고통이 덕지덕지 묻은 듯한 미간의 주름도, 아직 눈동자가 채 돌아오지 못해 붉은 기운을 띠고 있는 것도.
사방이 조용했다. 들리는 것은 오로지 아스펠라의 숨소리와 짐승이 숨을 고르는 듯한 거친 소리뿐이었다.
칼리우스는 이채를 띤 눈으로 조용히 아스펠라에게 말했다. 아직 잔 고통이 남은 듯 아스펠라를 가둔 양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해 못 한다고. 내가 얼마나 비겁한 인간이지, 당신은 전혀 모릅니다. 모르니까 이 꼴사나운 내 모습을 밑바닥까지 보고 싶어 하는 거겠죠.”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었는데, 왜 숨기려 하신 거예요?”
“마지막까지 당신이 몰랐으면 해서요. 이 꼴을 최대한 숨기고 싶어서요.”
칼리우스가 한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말끝마다 스스로를 향한 분노와 혐오가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이내 자조적으로 웃으며 그가 말했다.
“내가 우스울 겁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 발악하는 날 기어코 잡아내는군요.”
아스펠라가 천천히 그의 손을 잡아 내리며 눈을 마주했다.
“당신이 우스운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할게요. 그러니 말해주세요. 모든 걸.”
“내 입으로 내가 저지른 추잡한 짓들을 말하라는 겁니까?”
“여태까지 절 속인 것에 조금이라도 죄책감이 있다면 그리하셔야죠.”
“말하면 당신은 날 떠날 거야.”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데요? 아무것도 모른 채 당신을 떠나기보단 차라리 실컷 미워라도 하게 알려주세요.”
그런 마음으로 내게 말하지 않은 것 아닌가요? 아무런 감정 없이 당신을 떠나기보단 차라리 애증의 마음이라도 갖기를. 그쵸? 그래서 그렇게 연기까지 하며 날 속인 것 아닌가요?
아스펠라의 말에 칼리우스는 부정할 수 없었다.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슬퍼 보인다. 아스펠라는 그 눈을 마주한 채로 말을 이어갔다.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내가 지금 무슨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했어요.”
날 속인 거잖아요. 이 저택의 모두가.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당신과 사랑에 빠져 이곳에서 지내길 바라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아스펠라의 말에 칼리우스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를 가둔 양팔을 거두려는데 아스펠라가 그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근데 마냥 미움만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미워하고 잔뜩 욕하고, 기회만 된다면 흠씬 때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다가도,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어요. 그때 맨 처음 만난 그 검은 마수가 느끼고 있던 그 혼란스러움과 두려움을 당신이 느끼고 있었다는 게, 그걸 혼자 감당했다는 게.
아스펠라는 무기고를 떠올렸다.
자신을 죽일 무기들은 스스로 고르고, 사람들을 훈련시킨다는 것이 어떠한 기분일지.
아스펠라는 알 수 없었으나 이해하고 싶었다.
내가 이대로 당신을 떠나면. 혼자 그걸 다 감당하겠죠?
깊은 무저갱에 빠지는 칼리우스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되었어요, 칼리우스. 당신을 마냥 미워할 수만도 없게 되었네요.”
그의 손을 잡은 상태였던 아스펠라가 다른 한 손으로 칼리우스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칼리우스는 그런 아스펠라의 녹색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무서워요. 솔직히. 당신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천천히 그의 이목구비 하나하나 만지작대던 아스펠라가 이내 그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의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끝이 잘게 떨렸다.
“그런데도 알고 싶어. 당신에 대한 모든 걸 알고 싶어요. 당신을 동정해서 곁에 남으려는 게 아니라―”
“…….”
“사랑해서 같이 있고 싶어요.”
아스펠라는 결국 그 단어를 입 밖에 내고야 말았다. 자신이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 말을, 내뱉고 만 것이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러니 알려줘요. 당신이 숨긴 진짜 이야기를.”
아스펠라는 다시 한 번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말했다.
“칼리우스. 당신을 사랑해요.”
그와 동시에 혀와 혀가 얽혀들었다.
자신의 밑바닥까지 드러내게 하려는 아스펠라의 얄궂은 혀를 칼리우스가 다물라는 듯 막으며 입을 맞췄다. 그러자 아스펠라가 어색하게 그의 입술을 받아내며 손을 뻗어 칼리우스의 목덜미를 껴안았다.
따듯한 입술이 차가운 아스펠라의 입술을 덮었다. 혀가 입술 사이를 가르고 안으로 침범했다.
그 안의 혀뿌리까지 삼키려는 듯, 서로의 타액을 주고받으며 한참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촉촉한 살덩이들끼리 붙었다 떨어지는 마찰음이 서재 안을 가득 메웠다.
혼란스러웠으나 아스펠라는 그의 입술을 놓지 않았다. 자신을 소중하게 쓸어내리는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우발적이고 본능적인 감정만이 둘 사이에 흘렀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억누른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의 관자놀이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왜 울고 있는지 묻고 싶었으나, 그의 입술은 이제 아스펠라의 입술과 턱을 지나 그녀의 목덜미 부근을 지분대고 있었다.
부드러운 살결이 칼리우스의 손아귀에서 짓이겨졌다.
거칠면서도 상대를 배려한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감각에 아스펠라의 입술 사이로 새된 소리가 흘러나왔다.
칼리우스가 여전히 아스펠라의 살에 입술을 댄 채로 말했다. 그의 숨결에 아스펠라가 몸을 떨었다.
“아스펠라. 날 떠나지 않겠다고 말해요.”
자그마한 아스펠라 몸 위로 칼리우스가 제 몸을 드리웠다. 배와 배가 맞닿았고, 팔이 겹쳐졌다. 아스펠라의 작은 손바닥 위로 그의 큰 손등이 덮이며 손가락이 얽혀들었다.
나른해지는 아스펠라의 귓가에 칼리우스의 목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그 낮은 울림에 아스펠라의 팔뚝부터 허벅지까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날 떠나지 않는다고 해.”
그렇게 하면, 자신의 밑바닥까지 드러내주겠다며, 자신의 추접한 그 끝까지 아낌없이 내보이겠다며 칼리우스가 애원했다.
그것은 일종의 매달림이었다. 멀리서 보면 큰 칼리우스의 몸집에 아스펠라가 매달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가까이서 보면 오히려 그가 아스펠라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었다.
“아스펠라. 날 버리지 마요.”
“칼리우스…….”
“제발. 아스펠라.”
아스펠라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겨우 들어 그를 쳐다봤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져 있었다. 처절함으로 점철된 그의 얼굴에 어쩐지 아스펠라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비겁하기 짝이 없는 칼리우스의 행동에도 아스펠라는 그저 그를 껴안을 뿐이었다.
이 남자를 자신이 품어주고 싶었다.
그러고 싶은 명확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 자기 합리화도 채 하지 못했다.
그저 사랑해서라는 멍청한 변명밖에 떠오르지 못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자신이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아스펠라는 그 역시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떠나지 않을게요.”
그의 등을 껴안으며 아스펠라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버리지 않을게요.”
아스펠라의 단호하고도 맑은 눈동자를 마주한 칼리우스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과는 달리 아스펠라는 강하다. 그녀라면 무저갱의 입구에 매달려 추락할 일만 남아 있는 자신을 구해줄 것 같았다. 기꺼이 손을 뻗어 저를 건져내 줄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둘 다 저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칼리우스. 내게 말해줘요.”
아스펠라가 헐떡이며 말했다. 칼리우스는 기꺼이 그리 하겠다 답했다.
***
그건 아주 어린 시절, 철없는 소년들끼리 한 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적어도, 시작은 그랬다. 당시 아홉 살 난 어린애들에게는 아부와 아첨으로 가득 찬 연회장보다는 저들끼리 이곳저곳 성 안을 들쑤시며 노는 것이 더 재미났다.
에르윈 대공 성의 도서관은, 왕실 도서관 못지않게 온갖 고서와 금서, 그리고 절판된 책들의 보관소로 유명했다. 심지어 왕궁에는 없는 책이 이곳에 존재하기도 했다.
하여,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어린 왕자는 종종 이곳에 들러 칼리우스와 함께 하루 종일 책을 읽기도 했다.
왕자는 무예에 관심이 없었다. 칼리우스가 기사 훈련을 할 때에도 의자에 앉아 심드렁하게 책 읽는 것이 다였다.
‘파베스. 하루 종일 뭘 그렇게 읽는 거야?’
훈련을 마친 칼리우스가 목검을 들고 그에게 다가왔다. 파베스는 읽고 있던 고서를 덮으며 이죽대는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가 장난거리를 떠올렸을 때 하는 습관이었다.
‘아. 칼리우스. 내가 마침 아주 재미난 걸 발견했는데.’
‘재미난 것?’
‘그래.’
칼리우스는 그런 파베스가 또 무슨 꿍꿍이를 벌이려는 것인지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지었다.
‘보나마나 또 장난이겠지. 파베스. 대공 성에서는 자제해. 성의 시종들이 너만 오면 긴장하잖아.’
‘뭐야, 애늙은이 같은 말이나 하고.’
‘왕자면 왕자답게 굴어.’
‘아버지랑 똑같은 말을 하는군.’
그래서 정말 관심 없는 거야? 이건 그동안의 장난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야. 파베스가 양팔을 넓게 벌리며 과장했다. 정말이지 대단한 거라고. 너도 분명 신기해할 거야.
그렇게까지 말하자 칼리우스도 조금 궁금해졌다.
‘대체 뭔데 그래?’
파베스가 씩 웃으며 말했다.
‘신을 골리는 거지!’
‘뭐?’
‘신 말이야. 신. 산신. 너 산신 본 적 있어?’
칼리우스가 고개를 내젓자 파베스도 자신 역시 본 적 없다며 말했다. 지나가던 펠킨을 불러 세운 파베스가 물었다.
‘야, 펠킨. 너 산신 본 적 있냐?’
‘아뇨, 왕자님. 산신은 산에서만 사는 거라 저희는 못 보죠.’
‘그거 참 이상하지 않아? 분명 신화에 따르면 산신은 매우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다는데, 아무리 산속에 숨어 있다 해도 그 모습조차 보이지 않잖아. 그런데 인간들은 그 신을 아주 맹신한다 말이지.’
그런데 그 보이지도 않는 산신을 믿는 사람들 덕에 신전만 몸집을 부풀리잖나. 신자들은 몸집 커다란 짐승들인 산신한테 기도하고 제를 올리지.
이상하잖아.
‘안 그래? 진짜 이상하지 않아? 짐승의 모습이라는데,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사람들이 왕보다도 산신을 따르냐고. 국가를 다스리는 그들의 주인은 왕인데 말이야.’
파베스의 질문에 펠킨은 그저 멍청한 얼굴로 어……그러게요? 하며 반문했다.
‘칼리우스, 너도 궁금하지? 산신이 진짜 존재하긴 하는 건지, 존재하면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다들 그러는지.’
아홉 살짜리 꼬맹이들은 호기심이 많았다.
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귀족들의 지겹도록 평화로운 삶에서는 더더욱 이런 호기심이 몸집을 부풀리기 마련이었다.
‘어른들도 궁금해할 거야. 다만 직접 확인할 용기도 없으니까 그냥 말해주는 대로 믿는 거지. 바보 같아. 우리가 보여주는 건 어때?’
파베스의 말에 칼리우스가 물었다.
‘어떻게 보여줄 건데?’
‘여기 이 책에 산신을 불러내는 방법이 있어. 그런데 나는 고대어를 다 배우지 않아서 완벽히 못 읽어.’
칼리우스는 파베스의 손에 들린 책을 펼치며 말했다.
‘내가 알아. 난 고대어를 다 배웠으니까.’
그들은 고서에 적힌 대로 준비물을 가져와 온실로 향했다. 녹음이 가장 짙은 곳에, 진을 그리고 그 위에 제물을 놓으면 신이 와서 제물을 받아간다는 것이었다.
칼리우스는 책에 적힌 대로 집안에서 가장 녹음이 짙은 온실 정가운데에서 돌로 땅을 가르며 책에 나와 있는 진을 그렸다. 그저 왕자의 장단에 맞춰주는 장난에 불과했었다. 펠킨이 부들부들 떨며 근처에 있던 비둘기를 잡아왔고, 파베스가 새를 돌로 내리친 뒤 진 위에 올려놨다.
그러자 옅은 빛을 띠며 진의 모양대로 빛줄기가 나오더니, 이내 아주 작은 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이게 신이야?’
칼리우스가 황당한 듯 물었다. 작은 신은 산신과는 달리 인간보다도 작은 수호령에 불과했다. 그는 자아가 없는 것인지 반쯤 투명한 몸집으로 자신을 불러낸 세 꼬마 소년들을 쳐다봤다. 입도 존재하지 않아 대화조차 불가능했다.
흥미가 없어진 듯 칼리우스는 손으로 휘휘 작은 신의 몸집을 치웠다. 작은 신은 너무나도 나약하게 칼리우스의 손에 맞고 팅, 팅 진 밖으로 튕겨나가더니 이내 파스스 사라졌다. 그러자 기절한 줄만 알았던 비둘기가 얼른 몸을 일으키더니 이내 푸드득 날아갔다.
‘너무 약하잖아. 재미없어.’
‘왜? 난 재밌는데. 진을 더 크게 그리고, 제물을 더 큰 걸로 가져오면 산신이 나오지 않을까?’
그러나 파베스는 달랐다. 파베스는 뭔가를 더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연회 날에 다시 모이자. 그때는 더 큰 신을 모두에게 보여주는 거야. 이로써 신이 존재한다는 건 확신했잖아? 어때, 칼리우스? 네가 신을 불러낸 걸 알면 모두가 놀랄 거야.’
파베스의 말에 칼리우스는 잠시 고민하다 그래, 그러자, 대답했다.
그렇게 연회 날이 되었고, 수많은 귀족들이 모였다.
약속한대로 칼리우스와 파베스 그리고 펠킨이 한군데에 모였다.
‘저기, 칼리우스 님, 왕자 전하. 그냥 돌아가요. 네? 위험한 거 같아요.’
펠킨은 이만 돌아가자며 칼리우스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겁쟁이야. 넌 장차 날 보좌해야 하는데 이렇게 겁이 많아서 어쩔래? 나중에 전투지에 가서도 나한테 보호해달라 할 거야?’
‘그건 아닌데…….’
‘저번처럼 별일 없을 거야. 너도 신기하긴 했잖아?’
‘그렇지만…….’
펠킨이 영 마뜩찮은 표정으로 칼리우스를 바라보자, 칼리우스가 이내 인상을 찌푸리며 펠킨을 제 옆으로 끌어와 앉혔다.
‘난 대공의 후계자야. 그러니까 아버님만큼 용맹해야 한다는 거지. 너는? 넌 네 아버지만큼 훌륭한 보좌관이 되고 싶지 않아?’
말도 안 되는 논리였으나 그 나이 대에는 그 논리가 먹히는 때였다.
‘되고 싶어요!’
‘그럼 가만히 앉아 있어. 구경이나 해.’
칼리우스는 파베스와 함께 매우 커다란 진을 그렸다. 진을 수식하는 것은 수학적 계산과 비슷한 것으로, 진 안에 그려 넣는 배수의 값이 클수록 불러들일 수 있는 존재가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칼리우스는 그 수를 더 크게 계산하여 파베스에게 어떤 자리에 어떤 배수를 넣을지를 알려줬다.
그렇게 둘이서 큰 진을 완성했다.
‘이제 이 안에는 어떤 제물을 넣어야 하지?’
파베스의 질문에 칼리우스가 물었다.
‘저번처럼 비둘기도 살아났으니까, 더 큰 걸 넣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더 큰 거?’
‘나랑 펠킨이 헛간에 가서 더 큰 동물을 가져올 테니 넌 진을 지키고 있어.’
칼리우스가 그렇게 말하며 펠킨의 옷을 잡아끌었다. 그런 뒤 헛간으로 가 제가 생각하기에 큰 제물인 말을 데려왔을 때였다. 온실 문을 열자, 웬 인간이 진 안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었다.
당황한 칼리우스가 물었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파베스는 태연하게 말했다.
‘얜 그냥 지나가던 시종이야. 여길 마음대로 들어와서는 나한테 감히 질문을 하잖아. 어차피 저번의 비둘기처럼 일어날 텐데 문제없을 걸?’
‘뭐? 아무리 그래도―’
그와 동시에 지반이 울렸다. 거대한 빛과 함께 땅이 용솟음치고 섬광과도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어떠한 눈과 마주치는 순간, 칼리우스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눈을 떴을 땐 다들 도망치는 중이었고 나는 바로 연회장으로 뛰어갔습니다.”
칼리우스는 담담하게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불이 나 있었고, 동생과 어머니가 갇혀 있어 손을 뻗으려 했는데, 닿지 않았어요.”
연회장은 지옥 그 자체였다. 서로 도망가기 위해 밟고 밟히는 귀족들, 비명과 고함소리, 처절한 울음소리가 모두 한데 섞여 있었다.
‘어머니!’
칼리우스는 어떻게든 불길 속에 갇힌 그들을 빼내려 했다.
‘칼리우스!’
‘형아!’
‘칼리우스, 네가 산신을 불러낸 거니?! 정말 네가 부른 거야?! 칼리우스, 칼리우스……. 너라도 도망쳐! 살아남아야 한다. 칼리우스! 아스펠 산에 가서 신을…….’
불길 속에서 어머니가 소리쳤지만,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천장의 거대한 목재가 어머니와 동생 위로 떨어졌다. 그제야 칼리우스는 자신이 불러낸 것이 이 모든 재앙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이후 유모가 그를 잡아 끌었고, 그렇게 칼리우스만이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그 온실 속 식물들이 날 무서워하는 이유는 아마 그것 때문일 겁니다. 내가 모든 일을 벌인 사람이니까요.”
파베스는 엉엉 울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대공의 장례식을 치르던 칼리우스는 그런 파베스에게 말했다. 네 탓이 아니고, 내 탓이야. 내가 진을 그렸으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사과하지 마, 파베스.
더 이상 이 이야기를 꺼내지도 말고.
이건 없던 일로 하는 거야.
이 이야기를 기점으로 칼리우스의 산신 토벌 이야기가 이어졌다. 제가 과거 불러냈던 북쪽 신을 직접 죽인 이야기. 그 북쪽 산신이 그에게 한 말부터 자신이 저주를 받게 된 시점의 이야기까지.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것들을 칼리우스는 천천히 아스펠라에게 말했다.
말을 하는 동안 그는 아스펠라를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자신을 버리지 말라며 매달릴 때는 언제고 이제는 외면하려는 듯 했다.
아스펠라의 얼굴이 어떤 얼굴일지 짐작이 가 도무지 그녀를 쳐다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저주가 악화되는 건요? 어떤 식으로 악화되는 건데요?”
“점점 더 괴수로 변하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폭력성도 짙어지고요.”
“하지만, 맨 처음 말고는 당신은 폭력적이지 않았어요. 오히려, 어째 인간일 때보다 더 얌전…… 헙.”
아스펠라가 제 입을 막고선 슬쩍 칼리우스의 눈치를 살폈다.
“……예를 들면 그렇다고요.”
칼리우스가 그제야 천천히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황당해하는 눈빛이었다.
“아스펠라. 이제 내 밑바닥까지 다 봐버렸네요.”
그의 말에 아스펠라는 잠시 침묵하다, 이내 칼리우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새벽 어스름한 추위에 오들오들 어깨를 떠는 아스펠라를 껴안으며 칼리우스가 말했다.
“이제 놔주지는 못해요. 내가 싫어져도 어쩔 수 없습니다.”
먼저 말해 달라 한 건 아스펠라였잖아요. 어린애의 어리광과도 같은 말에 아스펠라가 푸흐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몸을 더 파고들었다.
바닥의 찬기가 올라와 춥다가도, 칼리우스의 옷가지를 맨몸으로 깔고 누워 그의 몸 안에 파고들면 금세 몸이 뜨듯해졌다.
“당신한테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산신들을 고문해서 무기를 만든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으니까요. 네, 솔직히 충격적이에요.”
아스펠라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칼리우스는 그녀가 말을 이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그치만, 칼리우스를 비난할 생각은 없어요. 당신의 독단이 아니었을 뿐더러, 비르가는 이 또한 흐름이라고 했으니까.”
아스펠라는 이내 고개를 들어 칼리우스를 쳐다봤다.
“이런 걸로 도망가지 않아요. 애초에 혐오스럽지도 않고 우스꽝스럽지도 않았어요.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아스펠라의 말에 칼리우스가 그녀의 맨 어깨를 쓸어내리다가 이내 긴장한 듯 쳐다봤다. 아스펠라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짓다 이내 생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가 그동안 깜장이를 너무 허물없이 대한 것이 창피하다는 거예요. 세상에, 언제까지 그런 연기를 할 생각이었어요? 내가 깜장이한테 얼마나 별 모습을 다 보여줬는데.”
“나도 지금 당신한테 배 까보인 거 창피하니까 피차일반이라 칩시다.”
칼리우스의 말에 아스펠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우리, 이제 숨기는 거 없는 거죠?”
칼리우스는 잠시 일카이에 대해서 말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지금은 굳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둘 사이에 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스펠라, 당신이 아직 말하지 않았잖습니까. 당신도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저요? ……칼리우스가 나한테 말하지 않은 만큼 나도 좀 더 애태울게요.”
아스펠라의 말에 칼리우스가 흠,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이내 아스펠라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결로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스펠라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기다란 금발이 허리께까지 찰랑댔다. 흰 살결에, 달빛이 비쳐 부서지듯 몸 아래 흐트러지는 머리칼에. 칼리우스는 잠시 그 끝자락을 매만졌다. 희고 말랑한 알몸을 제 옷자락으로 드문드문 가린 아스펠라가 잠시 그를 내려다봤다.
짧은 시선이 마주치고, 칼리우스가 손을 뻗어 아스펠라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줬다.
“아스펠라.”
“네?”
“사랑합니다.”
“…….”
“당신이 산신이든 뭐든, 상관없어요.”
아까 전, 아스펠라는 그가 깜장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산신이 된 것도, 그가 예언 속의 괴수가 맞다면 그를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도 서글펐다.
아스펠라는 왜 괴수가 되었냐며 애꿎은 칼리우스의 가슴팍만 퍽퍽 때려댔었다.
다행히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스펠라의 그치지 않을 것 같았던 눈물샘이 마르긴 했지만, 여전히 아스펠라는 그 점을 마음에 걸려 하는 듯 했다.
“당신의 말대로 예언 속의 괴수가 나라 해도, 그래서 내가 당신의 손에 죽게 된다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왜 그런 말을 해요. 당신의 저주를 풀 생각을 해야죠.”
“안 풀리면요?”
“풀려요. ……내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
다음날 아스펠라는 침대에서 눈을 떴다. 가만히 눈을 비비적대고 있는데 어젯밤 기억과 뭔가가 달랐다.
차갑고 딱딱한 바닥 위 칼리우스의 옷가지가 아닌 폭신한 매트리스와, 말려 올라갔던 슬립 원피스가 아닌 두꺼운 파자마 원피스까지.
“응?!”
퍼뜩 이상함을 느낀 아스펠라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살펴보니 자신의 방이었다.
“뭐지?”
설마 어젯밤의 모든 일이 꿈이었던 건가 싶은 찰나, 앨리스가 방에 들어왔다.
“아가씨, 잘 주무셨어요?”
평소와 다름없는 앨리스의 모습에, 정말 자신이 꿈을 꾼 건가 하여 아스펠라가 당황했다. 설마 그럼 어제 칼리우스와 함께 보낸 밤도 모두 꿈인 건가?
아스펠라는 제 머리를 긁적대며 앨리스가 건넨 우유를 한 컵 마신 뒤, 일상복으로 갈아입으려 파자마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뒤에 선 앨리스가 아스펠라를 도와 파자마를 벗겨주려던 찰나였다.
“자, 자, 잠깐만요!”
“네?”
“옷은 저 혼자 입을게요!”
잔뜩 빨개진 얼굴의 아스펠라가 후다닥 파자마 자락을 여미며 제 몸을 가렸다. 앨리스는 네? 제가 도와드릴게요, 하며 순진한 얼굴로 아스펠라의 옷을 잡아당겼다.
“아가씨는 약간 덤벙대시는 구석이 있어서, 제가 옆에서 도와드려야겠어요. 저번에도 혼자 입을 수 있으시다면서 속치마가 죄 밀려나왔잖아요.”
이만하면 이제 시중 받는 것에 익숙해지실 때가 되었다며 앨리스가 별일 아닌 듯 사람 좋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아스펠라는 앨리스가 가까이 오면 올수록 더 제 옷을 여미면서 단추를 채웠다.
“앨리스, 제가 진짜 할 수 있어요! 아, 그보다 온실 열쇠를 줄 테니까 먼저 가서 문 좀 열어줄래요?”
그러자 앨리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제가 그래도 돼요?”
“네. 문 열어주시고, 주방 하녀장 님께 허브 몇 가지만 드리면 돼요. 빨리 가셔야 할 거예요. 아침 식사 전에 드리기로 했는데 제가 늦잠을 자서…….”
아스펠라의 말에 앨리스가 그럼 제가 얼른 가져다 드릴게요! 하며 방을 나섰다.
아스펠라는 그제야 후, 안도의 숨을 내쉬며 슬쩍 거울 앞에 섰다. 주춤대며 제가 여미고 있던 파자마 자락을 열자, 아스펠라의 안 그래도 붉던 얼굴이 한층 더 불타올랐다.
“미, 미쳤어.”
스스로도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한 번 파자마를 여미곤 아스펠라가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다가 또 한 번 확인해보고 싶은 듯 이내 파자마를 벗어 내렸다.
아스펠라의 종아리를 스쳐지나가며 똬리를 튼 것 마냥 파자마가 떨어져 내렸다.
거울 속의 자신을 잠시 가만히 쳐다봤다.
아스펠라의 몸 군데군데 붉은 자국들이 열꽃처럼 피어올라 있었다. 아무리 아스펠라가 뭘 모른다고는 해도, 이 자국이 뭘 의미하는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이 자국을 본 다른 이의 반응이 어떨지는 예상할 수 있었다.
그것들을 슬쩍 매만지며 아스펠라가 중얼거렸다.
“꿈은 아니었네.”
아스펠라의 손가락이 붉은 자국을 지날 때마다 몸이 움찔거렸다. 그 부위가 아파서가 아니라 어젯밤의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살면서 그런 행위를 해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아스펠라는 두려움과 고통이 먼저일 것이라고 생각했더랬다. 하지만 생각보다 너무 기분이 좋은 감각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칼리우스에게 매달리고 애원하던 자신이 떠올랐다.
‘아! 칼리우스, 제발……!’
‘후……아스펠라. 여기가 좋습니까?’
어느 지점을 쿡쿡 누르면 아스펠라가 자지러졌다. 자신의 목소리에서 이런 소리가 나올 수 있었던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새된 소리였다.
‘읏, 응! 거, 거기……!’
‘또 어디가 좋아, 응? 더 말해줘요.’
간밤을 떠올리다 이내 창피한 듯 도리질친 아스펠라가 얼른 앨리스가 두고 간 옷을 껴입기 시작했다. 그러다가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칼리우스의 얼굴을 어떻게 보지?”
그냥 보면 될 것을. 아주 단순한 문제였으나 아스펠라는 그의 얼굴을 보고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그것조차 몰랐다. 평소처럼 굴어야 하나? 아니면 조금 더 친근하게? 그냥 나가지 말까?
야속한 머리는 계속해서 어젯밤의 일들을 상기시켰다.
‘이쪽……그, 그렇게 하면! 아! 아아!’
그의 허리에 알아서 휘감기는 자신의 다리도, 그 다리가 헤벌어져 흘러내릴라 치면 거세게 잡아 다시 제 허리 위로 올리는 칼리우스의 팔도, 그의 단단한 가슴팍, 두꺼운 팔뚝이 기둥이라도 된 듯 꼭 잡은 채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까지.
처음 느껴보는 생경한 감각들이 몸을 이리저리 파도처럼 덮칠 때마다, 아스펠라는 그저 두려웠다. 자신의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고, 자신의 몸이 이대로 터질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부드럽게 제 몸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며 안심시켜주던 칼리우스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땀에 흠뻑 젖은 그의 얼굴이 자꾸만 아스펠라를 달아오르게 했다.
‘아스펠라. 아직.’
‘이, 이제 그만― 아!’
‘아직 부족해.’
칼리우스는 계속해서 아스펠라의 몸을 탐했다. 그녀가 지쳐 늘어지듯 쓰러져도 그 작은 몸을 놓지 않고 계속 파고들었다.
아직 부족하다고, 당신을 더 원한다고. 그리 말하는 칼리우스는 아스펠라를 완전히 장악했다. 멀리서 보면 마치 하나의 덩어리처럼 두 몸이 딱 달라붙어 있었다.
한 치의 틈 따위 없이 맞물린 살.
그는 아스펠라를 으스러지게 껴안았고, 제 흔적을 잔뜩 남겨놓았다.
그와 아스펠라만이 알 수 있는 소유의 흔적이었다.
그때를 떠올리자 아스펠라는 어쩐지 배 안에 수십 마리의 나비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몇 번 그런 감각을 느낀 적은 있었지만, 오늘은 유독 팔랑팔랑 날개짓을 하는 것들이 많은 느낌이다.
어쩐지 절로 몸을 웅크리게 되고, 다리를 오므리게 되었다.
여전히 거울 앞에 주저앉은 채로, 아스펠라는 조금 몽롱한 눈으로 저를 쳐다봤다. 목덜미에 남은 그의 자국을 가만히 매만지다 이내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앨리스가 그새 돌아온 것인가 싶어 아스펠라는 잠깐만! 하며 얼른 옷을 마저 입은 뒤, 머리를 풀어 목덜미를 가렸다.
“들어와도 돼요!”
아스펠라의 말에 문이 열렸다. 앨리스가 들어올 것이라 생각한 아스펠라는, 여전히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것에 정신이 없었다. 리본이 이쪽으로 들어가는 건가? 아니, 이쪽 구멍인가요? 하며 앨리스에게 묻는데, 조용히 누군가 허리춤의 리본을 매만졌다.
앨리스의 손길과는 전혀 다른 손길에 아스펠라가 고개를 들어 거울을 쳐다봤다.
“칼리우스……!”
“시녀는 어딜 가고 당신 혼자 옷을 입고 있습니까?”
지금쯤이면 준비를 마쳤을 줄 알았는데, 아직 옷의 리본들조차 제대로 여미지 못한 모습에 칼리우스가 픽 웃으며 물었다.
“아, 그게. 앨리스는 잠시 다른 곳으로 내보냈어요.……까 봐.”
“잘 안 들립니다.”
“자국이……보일까 봐…….”
아스펠라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말했다. 기다란 머리칼에 드리워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나, 머리칼이 앞으로 쏠려진 덕분에 목덜미가 드러났다.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의 뒷목의 톡 튀어나온 뼈를 한 번 손으로 쓸어내렸다.
아스펠라의 어깨가 크게 움찔댔다.
칼리우스는 그런 그녀의 반응에 쿡쿡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무슨 자국이요?”
“네?!”
아스펠라가 진정 몰라서 묻는 거냐는 야속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거울 속 칼리우스를 쳐다봤다. 칼리우스는 뻔뻔하게도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걸로 보아 저를 골리려는 심산인 것이 분명했다.
칼리우스는 마찬가지로 거울 속 아스펠라를 바라보면서 그녀의 머리칼을 슬쩍 들어 올렸다.
“아. 여기 자국이 있네요.”
한손에 들어오고도 남는 가는 목을 슬쩍 쥐다가 아스펠라의 턱까지 쓸어 올린 칼리우스가 이내 아스펠라의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이게 다 무슨 자국입니까?”
“알면서 묻는 건 무슨 심보예요.”
아스펠라가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그의 얼굴을 마주하냐며 어젯밤 일을 상기하곤 혼자 쑥스러워 몸을 배배 꼬지 않았던가.
그런데 칼리우스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심지어는 능글맞은 얼굴로 이 자국이 무슨 자국이냐 묻는다.
“……칼리우스가 낸 자국이잖아요.”
아스펠라는 뭔가 억울하고 불공평한 기분이 들어 입을 내밀고 툴툴댔다.
그러자 칼리우스가 고개를 숙여 아스펠라의 목덜미에 입술을 지분거리며 물었다.
“아, 내가 낸 자국이었군요.”
“드레스가 파여서, 목덜미 쪽은 가려지지도 않고……. 난 곤란한데 칼리우스는 장난이나 치고…….”
“미안해요. 귀여워서 그랬습니다.”
어젯밤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올 땐 언제고,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양 새빨개진 얼굴로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귀여웠다.
칼리우스가 조금 더 밀착하며 아스펠라의 허리를 양손으로 끌어안았다. 아스펠라의 등이 칼리우스의 단단한 가슴팍에 닿았다.
어젯밤 일이 또 머릿속에서 자동 반복 될 것 같아 아스펠라가 저도 모르게 몸을 곧추세웠다.
잔뜩 긴장한 아스펠라의 모습이 거울에 너무나도 잘 보여, 칼리우스는 이만 그만두기로 했다. 여기서 더 했다가 어차피 안달 나는 쪽은 자신일 것이다. 그대로 아스펠라의 몸을 뒤에서 감싼 채로 그녀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준 칼리우스가 말했다.
“옷은 다 정리되었으니, 내려갈까요?”
그의 말에 아스펠라는 얼른 몸을 돌리며 괜히 제 목덜미를 만지작댔다. 목이 타는 기분이 들었고 입 안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그런 저와 달리 칼리우스는 어째 여유가 넘쳐 보인다.
역시 뭔가 불공평한 느낌이 들었으나, 아스펠라는 애써 그런 마음을 무시하기로 했다.
***
아침 식사를 한 뒤 아스펠라와 칼리우스는 같이 폐궁의 온실로 향했다.
칼리우스가 그쪽으로 향하는 것을 본 펠킨과 다른 사용인들은 모두 조금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들끼리는, 아무리 온실이 푸릇푸릇해진다 한들, 아스펠라만 갈 것이라 생각했지 이렇게 칼리우스가 바로 그녀를 따라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항상 망자처럼 그곳에 존재해왔던 폐궁은 칼리우스의 어린 시절 기억 그대로였다. 낮에 이곳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아스펠라는 이따금 칼리우스의 발걸음이 느려지는 것 같으면, 뒤돌아 그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렇게 하여 온실에 도착했다.
아스펠라에게 온실 안의 식물이 단 며칠 만에 자라났다는 말을 듣긴 했으나, 이 정도일 줄을 몰랐던 것인지 칼리우스 역시 놀란 눈치였다.
“그새 또 새로운 싹이 자랐네.”
아스펠라가 이제 씨앗을 심지 않아도 알아서 움트는 새싹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안으로 들어와요, 칼리우스. 그 앞에 서 있지 말고.”
문 앞에 가만히 서 있던 그를 잡아 끈 아스펠라가 온실 안의 정중앙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곳에는 티 테이블과 의자 두어 개가 놓여있었다.
“보좌관님께서 예전 온실이 어떻게 생겼었는지 알려주신 대로 한 번 복구는 해봤어요. 모든 게 이전과 똑같지는 않겠지만, 어떠세요? 조금, 비슷한가요?”
의자에 앉아 온실을 둘러보던 칼리우스가 이내 싱긋 웃으며 답했다.
“네. 매우 비슷합니다.”
이내 손을 뻗어 높은 화단 위의 능소화를 만지작댔다. 아스펠라는 그 꽃이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꽃이라고 첨언했다.
“능소화 향기가 참 좋아요. 맡아보세요. 다들 이 능소화 향기가 제일 좋다 하더라고요.”
아스펠라의 말에 칼리우스가 몸을 수그려 꽃줄기를 제 쪽으로 기울였다. 눈을 감고 향기를 음미하는 그의 모습에 아스펠라는 괜히 또 저 혼자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내 칼리우스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난 아스펠라 체취가 더 좋은데요.”
“……자, 장난치지 말고요.”
“진짠데.”
자리에서 일어난 칼리우스는 이내 온실 한 바퀴를 빙 둘러보았다. 워낙에 넓은 곳이었기에 한참을 돌아야했다. 이 넓은 곳을 단 며칠 만에 녹음으로 가득 채운 아스펠라의 능력에 감탄하던 칼리우스는 이내 어느 한 부분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자신이 그렸던 진의 자국은 당연히 방치된 시간만큼 지워지고 흐려졌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정확히 그 자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칼리우스는 그곳에 가만히 서 바닥을 내려다봤다. 아스펠라는 그가 뭘 떠올리는 지 알 것 같은지 그의 주변에 다가가 조심히 그의 손을 잡았다.
“칼리우스.”
“……내가 그날 기절했을 때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아스펠라, 당신은 식물들과 얘기할 수 있으니 알아봐 줄 수 있습니까?”
아스펠라가 고개를 끄덕인 뒤, 벽에 수많은 가지를 뻗은 담쟁이를 쳐다봤다.
“들었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넌 정확히 기억할 것 같은데. 말해줄 수 있겠어?”
[난 쟤 무서운데. 말하면 우리 불태운댔어.]
“칼리우스. 불태우지 않겠다고 말해줘요. 무섭대요. 말하면 칼리우스가 불태울까 봐.”
아스펠라의 말에 칼리우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불 안 태워.”
[진짜? 진짜 불태우지 않을 거야? 진짜지?]
아스펠라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담쟁이가 말했다.
[우리도 그때 무서워서 다들 숨어가지고, 정확히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일단 본 건 말해줄게. 칼리우스랑 펠킨은 신이 나오자마자 그대로 기에 눌려 기절했는데, 웬 다른 꼬맹이 하나가 신을 화나게 만들었어.]
아스펠라는 담쟁이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칼리우스에게 전달했다.
칼리우스는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들었다.
[머리카락이 금발인 작은 꼬맹이가, 신의 눈을 보고도 기절하질 않았어.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신 앞에 버티고 서서 북쪽 산신의 약점인 목 아래 부분을 총으로 쐈어.
그러면서 자기한테 힘을 달래. 자기도 신으로 만들어 달라 그러는 거야. 산신은 약점을 공격받아서 막 피를 흘렸어.
푸른색 피가 이곳저곳 튀었지. 그 푸른색 피가 소환한 진에 닿자, 이상한 빛이 또 나왔어. 산신이 막 아프다면서 이리저리 뒹굴다가 이내 부정신으로 변했어.
부정신으로 변해서 여길 막 헤집더니 온통 부수고 나가버렸어.
사실 칼리우스랑 펠킨이 잠깐 나가 있는 동안 그 꼬맹이가 진에 뭘 또 따로 그렸어. 근데 그게 뭔지는 우리도 몰라.
우리는 계속 칼리우스한테 말했어. 위험하니까 하지 말라고.
그치만 칼리우스는 우리 말을 못 알아듣잖아! 그날 이후부터 칼리우스는 여기 안 왔어. 다시 왔을 때는 엄청 무서워졌어. 막 무서운 냄새도 풍기고, 얼굴도 무서웠어.
그러더니 우리보고 아스펠라한테 말하면 다 불태운다잖아! 억울했다고! 이제 그러지 마!]
담쟁이의 말에 다른 식물들도 이제 그러지 말라며 입을 모았다.
그들의 완곡한 표현까지 빠짐없이 칼리우스에 전달한 아스펠라는 잠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칼리우스는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분노하는 것 같다가도, 허탈해하는 얼굴이다가도, 슬퍼하는 듯했다.
“칼리우스, 괜찮아요?”
그는 터덜터덜 걸어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힘줄이 튀어나올 만큼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이내 화를 삭이려는 듯 가만히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기다가, 이내 제 무릎에 팔을 괴고 얼굴을 감싸 쥐었다.
걱정스러웠는지 아스펠라가 얼른 다가가 쪼그려 앉아 아래에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천천히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칼리우스.”
“……파베스가 힘에 집착하는 건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다. 그가 유독 또래에 비해 산신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역시 그들이 가진 힘을 탐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파베스는 신이 부럽다 했었다. 초월적인 힘을 가진 그들의 능력이 부럽다고. 탐이 난다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파베스는 그랬고, 칼리우스는 그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넘어간 것이다.
“칼리우스, 당신 탓이 아니에요. 알고 있죠? 그건 당신 탓이 아니에요.”
“내 가족은, 파베스의 실험에 희생이 된 거군요. 그것도 모르고 난 그놈의 명령에 따라 산신들을 죄다 죽이고 다녔고. 꼴사납네요. 이제라도 알아, 다행이라 해야 할지…….”
허탈하게 웃는 칼리우스가 이내 아스펠라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힘에 의해 아스펠라는 어정쩡하게 들려 그의 품에 안기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아스펠라는 천천히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칼리우스는 잠시 그렇게 아스펠라를 껴안고 있다 그녀를 내려놨다. 어쩌다보니 그의 허벅지 위에 앉게 된 아스펠라는 혹시라도 칼리우스가 운 건 아닐까, 조심스레 그의 눈가를 쓸어줬다.
“울진 않았습니다. 아스펠라.”
픽 웃어본 칼리우스는 이내 평소의 능글맞고 뻔뻔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칼리우스, 괜찮은 거 맞죠?”
“괜찮습니다.”
“이제, 죄책감 갖지 마세요. 응? 그런 걸로 스스로를 미워하지도 말고.”
아스펠라가 천천히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칼리우스는 그런 아스펠라를 올려다보다, 이내 아스펠라의 뒷목을 꾹 아래로 내리며 짧게 입을 맞췄다.
“네. 아스펠라가 그리하라면 그리하겠습니다.”
“장난치지 말고요!”
아스펠라는 이 진지한 상황에서도 그런 장난이 치고 싶냐며 자리에서 이러나려 했으나, 칼리우스는 그녀가 제 가슴팍이며 어깨며 퍽퍽 내려치든 말든 아스펠라의 허리를 꼭 안고 놔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아스펠라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얼굴을 부비는 것 아니겠는가.
아스펠라가 빨개진 얼굴로 이젠 아예 그의 등을 주먹으로 때렸다. 물론 솜방망이로 때리는 것 마냥 그 어떤 타격감도 주지 못했지만.
칼리우스가 고개를 들어 아스펠라에게 물었다.
“장난 아니고 진짜 뽀뽀하고 싶었습니다. 아스펠라는 나랑 뽀뽀하고 싶지 않은 건가요?”
매우 진지한 얼굴로 물으니 아스펠라는 또 당황하여 그건 아니라 답했다.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요!”
“그래도 뭐요. 우리 둘밖에 없는데.”
“우리 둘밖에 없긴 하지만,”
아스펠라는 괜히 온실을 한번 쓱 둘러봤다. 아무도 없는 건 맞긴 맞으나, 식물들이 있었다. 괜히 이 낯간지러운 일들을 식물들이 보는 앞에서 했다고 생각하자 아스펠라가 얼굴을 슬쩍 붉혔다.
아스펠라가 식물들을 신경 쓴다는 사실을 눈치챈 칼리우스가 눈을 곱게 접으며 물었다.
“왜요. 식물들이 더 하라고 부추기기라도 합니까?”
“부추기기는 뭘 부추겨요. 식물들이 뭘 안다고…….”
[우리도 알 거 다 알거든?]
[알아서 안 볼 테니까 마저 해도 돼, 아스펠라! 우린 이렇게 고개 돌리면 돼!]
식물들이 슬쩍슬쩍 줄기를 돌렸다. 아스펠라는 못들은 척 무시하면서 그의 품에 나오기 위해 다시 한 번 몸을 일으켰다. 물론, 칼리우스가 놔줄 리 없었다.
“나만 진심인가 봅니다. 난 계속 그대와 붙어먹고 싶은데.”
“부, 붙어먹다니.”
“어젯밤이랑 태도가 영 다릅니다. 아스펠라는. 내킬 때만 품겠다는 겁니까? 응? 아스펠라. 말해 봐요. 내가 이러는 거 싫어?”
칼리우스가 느른하게 웃음을 흘리며 아스펠라의 허리를 조금 더 제 쪽으로 미당겼다. 아스펠라가 칼리우스의 가슴팍에 손을 올려놓곤 잠시 주춤댔다.
“싫은 건 아니고요.”
“그럼요?”
칼리우스의 입술이 아스펠라의 귓가에 닿을락 말락, 간지럽히자 아스펠라가 슬쩍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비틀었다.
“그냥 조금 부끄러운…….”
그와 동시에 아스펠라의 턱이 칼리우스의 손에 잡혔다. 커다란 손에 들어오는 작은 얼굴을 엄지로 쓸던 칼리우스가 이내 조금 더 진득하게 입을 맞춰왔다.
아스펠라의 허리를 쥔 손이 이내 옆구리를 살살 쓸어내렸다. 그의 무릎에 앉아 있느라 발이 땅에서 동동 떠 있던 아스펠라는, 곱아든 발을 주체 못 해 발을 구르듯 움직였다.
“아스펠라. 안아주세요.”
칼리우스가 잠시 입술을 떼고 나직하게 말하자, 아스펠라는 그의 가슴팍에 올려뒀던 제 팔을 둘러 목덜미를 껴안았다. 주먹 쥔 아스펠라의 손에 땀이 물씬 배어나왔다. 가녀린 어깨가 이따금 들썩 거렸다.
아스펠라의 옷 위에서 지분대는 그의 손길이 조금 더 거칠어지며, 아스펠라의 목덜미에 파고든 칼리우스가 다시 한 번 그 붉은 자국에 입술을 대려는 순간이었다.
벌컥!
“대공 각하, 여기 계십니― 어이쿠.”
문이 빠르게 열림과 동시에 다시 닫혔다.
아스펠라는 그대로 얼음이 되었고, 칼리우스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아스펠라의 이마에 입을 맞추곤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얼굴이 갓 딴 산딸기마냥 새빨개진 아스펠라는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다, 다, 다시는 이런 곳에서 안 할 거예요!”
아스펠라가 결국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괜찮습니다, 아스펠라. 못 봤어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난 몰라! 내가 미쳤지. 저 얼굴에 홀려서…….”
비르가가 잘생긴 인간 남자를 제일 경계하라고 했는데, 그 중요한 가르침을 내가 잊고 있었어. 아스펠라가 중얼거리며 칼리우스의 옆구리를 때렸다. 칼리우스는 그런 아스펠라를 달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 약속까지 해야 했다.
“미안해요, 아스펠라. 내가 너무 과했습니다. 너무 좋아서 주체를 못했어요. 다음부턴 안 들키게 잘 할게요.”
“뭘 안 들키게 잘해요, 글쎄! 안 한다니까.”
“진짜 안 할 겁니까? 기분 좋았으면서.”
어쩜 저렇게 사람이 능글맞을까. 아스펠라는 혀를 내둘렀다.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유연하게 말을 돌리면서도 사람을 홀리려 들지 않는가.
“……뭐,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아스펠라는 얼른 못 들은 척 하며 문을 열고 나갔다. 밖에서는 펠킨이 여전히 시야를 온실 반대쪽에 둔 채로 기다리고 있다가, 칼리우스가 나가자 얼른 말했다. 아스펠라 역시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펠킨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죄송합니다, 대공 각하. 친우 분께서 오셔서요.”
칼리우스는 그런 펠킨을 마뜩찮게 쳐다보다 물었다.
“친우라니? 누구.”
칼리우스의 말에 아스펠라 역시 같은 물음으로 펠킨을 슬쩍 쳐다봤다. 보좌관님 말고 다른 친구도 있단 말이야? 이곳에서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지내면서, 칼리우스에게 친구에 대해선 그 어떤 말도 듣지 못했는데. 심지어 찾아오는 이들도 없었다.
“유디티아 경께서 오셨습니다.”
그의 말에 칼리우스가 또 한 번 후,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고작 그놈 때문에 아스펠라와의 시간을 방해 받은 것인가.
“바쁘다 하고 돌려보내.”
“예? 하지만 유디티아 경께서 오래 전부터 연락을 주셨고 그동안 각하께서 계속 미루시는 통에, 오늘은 꼭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야겠다고 하셨습니다.”
아스펠라는 찾아오는 이들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찾아와도 그가 죄 돌려보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스펠라가 슬쩍 칼리우스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래도 멀리서 오셨을 텐데, 전 신경 쓰지 말고 친구 분이랑 만나고 오세요.”
그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야, 칼리우스! 왜 이리 안 만나주나 했더니. 여인이 생겨서였군!”
갈색 머리를 뒤로 대충 넘긴 사내가 멀리서 성큼성큼 다가왔다. 칼리우스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동시에 펠킨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아니, 유디티아 경! 제가 응접실에 계시라고 했잖습니까!”
“어? 아니, 또 보나마나 바쁘다고 거짓말하고 날 내보낼 게 뻔해서 이번엔 내 친히 직접 잡으러 왔지. 하하, 친구 얼굴 보는 게 이렇게나 어려워서야! 국왕보다도 만나기 힘든 대공이라니!”
“왜 왔어.”
“뒤에 계신 여성분은 어느 가문의 영애이신지? 아, 이런.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필립 유디티아입니다.”
“아, 저는 아스펠라라고 해요.”
남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성격으로 보이는 이 해맑은 남자는, 아스펠라를 보자 얼른 기사들이 레이디에게 인사를 올리듯 한쪽 무릎을 살짝 굽혀 손등에 입을 맞추는 시늉을 했다.
칼리우스가 짜증스럽게 그의 손을 쳐낸 뒤 아스펠라를 제 뒤로 숨겼다.
그런 그의 행동을 유심히 보던 유디티아 경이 놀림거리를 발견한 장난꾸러기마냥 눈썹을 위아래로 꿈틀대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칼리우스. 약혼녀를 꽁꽁 숨겨둘 셈이었나 보군! 하하하! 웃기는 녀석이라니까! 아스펠라 양! 미모와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군요!”
귀청이 떨어질 만큼 호탕하게 웃는 그는 칼리우스의 뒤에 숨겨진 아스펠라에게 이리저리 몸을 돌리며 인사했다. 원래 이렇게 정신 사나운 귀족도 있는 것인지 아스펠라가 정신이 혼미해져 연신, 예, 저,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유디티아 경, 하며 인사를 받아줬다.
칼리우스는 그저 이 상황이 매우 불쾌한 듯 정신 사납게 움직이는 필립을 멈춰 세운 뒤 물었다.
“무슨 용건으로 왔어?”
“우리 사이에 뭐 용건이 있어서 오나. 그냥 하도 연회나 살롱에 나오질 않으니 죽었나 싶어 찾아온 게지. 그나저나, 저 온실은 또 뭔가?”
그러고 보니, 여긴 구 에르윈 성 아닌가. 폐쇄된 걸로 아는데 자네가 여긴 왜 들어와 있어? 저 온실은 또 유달리 녹음이 졌군. 들어가 봐도 되는가?
단 일 분도 쉬지 않고 말하는 그의 행동에 칼리우스가 지친 듯 그리하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스펠라는 이렇게 기가 빨린 듯한 칼리우스가 처음이라 슬쩍 그를 쳐다봤다.
칼리우스와 비등한 크기의 체격을 가진 사내였다.
함께 산신 토벌을 했던 기사인 건가?
어쩌다 저런 사람이랑 칼리우스가 친해진 걸까. 정말 공통점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그런 아스펠라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유디티아 경이 빠르게 아스펠라 앞으로 가 물었다.
“이 온실은 아스펠라 양이 관리하신 겁니까?”
“네? 네…….”
“역시! 에르윈의 차기 안주인이다 이건가! 하하하! 칼리우스, 그래서 자네가 이 온실까지 맡긴 거였군. 다른 영애들은 이쪽에 발도 못 붙이게 하더니!”
다른 영애?
아스펠라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다른 영애들이 칼리우스를 찾아오기도 하는구나. 귀족들끼리는 남녀 상관없이 막 집에 놀러오고 그러는가 보지?
……설마 사귀던 사이였을까?
아스펠라가 잠시 깊은 고민에 빠졌을 때였다. 펠킨이 슬쩍 아스펠라 눈치를 살폈다.
‘큰일 났다. 유디티아 경은 눈치 더럽게 없기로 유명하신 분인데.’
유디티아 경이 입을 잘못 놀렸다가 깨진 연인이 몇이고 싸운 부부가 몇 쌍이던가. 아스펠라의 표정이 살짝 굳은 것을 확인한 펠킨이 이번엔 칼리우스를 슬쩍 쳐다봤다.
‘어떡하지. 각하는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닌데, 이런 쪽으로는 또 무심한 편이라서 여자의 마음을 잘 알지도 못할 텐데……!’
일단 저 눈치 없는 유디티아 경으로부터 아스펠라를 피신시켜야겠다는 생각할 때였다. 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유디티아 경이 이내 충격 받은 듯 입을 떡 벌린 채로 숨을 들이켰다.
아스펠라의 온실에 들어가는 이들은 저마다 묘사하는 것은 다 달라도 하나같이 가장 최고의 순간, 가장 기뻤던 순간의 감정을 느꼈다 증언했다.
유디티아 경 역시 그걸 느낀 것인지 그는 감격스러운 듯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더니 아스펠라에게 고개를 훽 돌려 물었다.
“아스펠라 양…….”
이번엔 잔뜩 진지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칼리우스가 이 이상은 오지 말라는 듯 앞을 가로막자, 이내 그가 여전히 아스펠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아스펠라 양. 저희 집 온실도 혹시 봐주실 수 있습니까?”
***
튀니아 왕국의 귀족에게는 정말이지 수많은 취미가 있지만, 그중 으뜸은 ‘남에게 하는 자랑질’이라며 유디티아 경이 말했다. 도서관이나 미술관 등의 계보를 이어 온실이 그 ‘자랑질’하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뭐, 사실 아무리 자랑한다고 한들, 에르윈 성을 이길 만한 이는 없겠지만요. 아. 국왕께서는 한번 겨뤄보실 만도?”
그러자 칼리우스의 뒤에 서 있던 펠킨이 정정하라며 말했다.
“애초에 각하는 남에게 자랑하면서 우월감을 느낄 정도로 자그마한 자존감을 가진 분이 아닙니다만, 유디티아 경.”
“그렇긴 한데. 뭐, 내 말은 그렇다고. 아무튼 아스펠라 양. 저는 아까 전 온실 문을 열자마자 정말 엄청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냥 평범한 온실이 아니라, 뭔가, 가장 높은 산에 올라 세상 만물을 내려다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유디티아 경은 그렇게 말하곤 잠시 차를 홀짝였다.
야외에서 소란스럽게 하지 말고 응접실로 돌아가자는 펠킨의 말에 칼리우스와 아스펠라, 펠킨과 유디티아 경 네 사람이 모여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티타임이 시작되었다.
칼리우스는 그냥 성에서 내쫓으면 될 걸 왜 응접실까지 들이냐며 투덜대다가도, 아스펠라가 ‘그래도 친구 분께서 오셨는데, 너무 박하게 굴지 마세요.’하자 입을 꾹 다물었다.
필립은 그런 둘을 힐긋힐긋 번갈아 쳐다보면서도 말을 멈추진 않았다.
절대 쉬지 않는 그의 입에, 칼리우스가 완전히 질린 표정을 지었다.
“내가 저래서 저놈이 오는 걸 싫어하는 겁니다, 아스펠라.”
칼리우스가 조용히 아스펠라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활발하신 분 같아서 좋은 걸요.”
“저게 좋다고요?”
칼리우스가 충격 받은 듯 되묻자 아스펠라가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 느낌이었다. 한쪽은 몽실몽실 분홍빛 기류가 감돌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수다스러운 남정네 둘이 오랜만에 대화할 상대를 만나 신이 난 상태였다.
필립의 온실 예찬에 펠킨이 뛰어들었다.
“아, 뭔지 알 것 같습니다, 그 기분. 온실 문 열었을 때 느꼈던 그 벅차오름과 경이로움!”
“펠킨, 자네도 그걸 느꼈단 말인가?”
“어디 저와 유디티아 경뿐이겠습니까? 이 성의 모든 시종들이 다들 난리 났었습니다. 온실이 아니고 천국이라면서, 아스펠라 양의 손은 금보다도 귀한 손이라고요.”
“그런 반응이 충분히 나올 만한 장소였어. 일반적인 온실과는 달라. 그저 꽃 몇 송이 심어놓고, 조경해놓은 그저 그런 온실이 아니었어.”
둘은 꽤 죽이 잘 맞는 것인지 그 후로도 계속해서 온실에 대한 칭찬과 온실을 가꾸는 이의 마음가짐에 대해 토론을 해댔다.
“요지는, 아스펠라 양이 진심으로 식물을, 더 나아가 생명을 사랑하는 온 마음을 다해 길러내 그런 대단한 온실이 나온 것이라고요. 그런 건 아무나 하는 것도, 가능한 것도 아니죠.”
펠킨의 말에 필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아스펠라 양! 아까도 말했듯이, 제 저택의 온실도 좀 부탁드립니다!”
조용히 칼리우스와 함께 쑥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예찬하는 말을 들으며 차를 마시던 아스펠라가 우렁찬 필립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필립, 제발 목소리 좀 낮춰.”
칼리우스가 짜증스럽게 말하자, 필립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제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전투지에서 말하는 것이 아예 습관이 되어…….”
“온실을 부탁하신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 아예 엎고 새로 만드는 건 아니고요, 요 근래 이상하게 온실 속 식물들이 죽어나가서요. 아무리 실력 좋다는 조경사를 데려와도 이거 원, 문제를 짚지 못하니……제 아내가 온실을 정말 좋아하는데, 자꾸만 식물이 죽어 태교에도 좋지 않은 것 같고. 한동안 못 들어가게 막아뒀더니 영 속상해합니다.”
필립의 말에 아스펠라가 안타까운 듯 눈썹을 아래로 내렸다. 칼리우스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한나는 그냥 네가 눈치가 없어 속상한 거다. 온실은 무슨.”
“예. 제 생각도 그런 것 같은데요, 유디티아 경. 며칠 전에 결혼기념일 잊으시고 사냥 나가셨다가 뺨 맞으신 이야기 온 튀니아에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좀 만회해보고자 온실이라도 꾸미려 한 거라고!”
그날 이후로 각방 쓰고 있단 말이야. 두 달 뒤가 아내의 생일이라, 만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유디티아 경이 시무룩해져 말했다.
“제발요. 아스펠라 양. 이러다가 애가 태어나도 얼굴도 안 보여줄 것 같아요.”
“아스펠라는 조경사도 정원사도 아니야. 네가 이런 걸 부탁할 만한 사람도 아니고.”
다른 이를 알아봐. 그렇게 온실의 식물이 죽어나가는 거면 비료나 흙의 문제 아니겠어? 칼리우스는 단호하게 말하며 이제 그만 돌아가라 말했다.
“제발요, 아스펠라 양!”
“……네, 그렇게 할게요. 어려운 일도 아니고. 부인과 화해하셔야죠.”
아스펠라의 말에 칼리우스와 필립의 희비가 교차했다.
“아스펠라. 귀찮은 일을 맡을 필요는 없습니다. 저놈은 나한테 그렇게 중요한 인간도 아닌데다가―”
“억지로 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제가 해드리고 싶어서요. 제 온실로 성 안의 사람들이 위안을 얻듯이, 다른 분들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하려는 거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스펠라가 무리하는 것이 아니라며 칼리우스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자 망설이던 칼리우스가 슬쩍 미소 지으며 알겠습니다, 그럼. 아스펠라 뜻이 그렇다면야, 하고 다정하게 말했다.
필립과 펠킨은 그런 칼리우스를 충격 받은 듯 쳐다봤고, 칼리우스는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무표정으로 돌아와 필립에게 이제 그만 꺼지라고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일단 오랜 시간 전우였던 것은 맞았기에 칼리우스는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착실하게 그를 배웅해줬다.
아스펠라를 먼저 들여보낸 칼리우스에게 필립이 슬쩍 물었다.
“그런데, 자네 괜찮겠어?”
“뭐가.”
“아스펠라 양은 귀족이 아니잖아.”
그의 말에 칼리우스가 선득하게 눈을 빛내며 그를 쳐다봤다. 만일 아스펠라에 대해 천한 핏줄이라든지, 족보도 없는 출신이라든지, 어디서 굴러먹었을지도 모를 여자라든지 등의 말을 했다간 그를 죽여버릴지도 모를 눈빛이었다. 필립이 얼른 진정하라며 양손을 들어올렸다.
“내 말은, 나는 물론 아스펠라 양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다른 귀족들이 그녀를 깔볼지도 모른다는 말이야. 만에 하나 둘이 결혼이라도 한다고 쳐. 아무리 남편이 대공 각하라 한들, 귀족들은 아스펠라 양을 공격하려 들 거라니까?”
어디 그뿐일까? 너도 같이 끌어내리려 할 걸. 그들이 그렇게나 중요시 하는 게 ‘순혈’이잖아. 그거 때문에 너랑 나도 좀 고생했고.
난 어머니가 귀족이 아니었고, 넌 어머니가 순수 튀니아 귀족이 아닌, 외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공격 받았으니까. 사실 아직도 에르윈 가문이 대공 칭호를 단 것을 싫어하는 이들이 많아. 국왕 전하도 그래서 같은 이유로 초반 집권 때 욕 좀 보셨고.
폐쇄적인 튀니아의 귀족들이 아스펠라 양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난 그게 좀 걱정된다는 걸세.
필립의 말에 칼리우스가 짧게 대꾸했다.
“자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애초에 그녀를 다른 귀족들에게 보여줄 생각도 없어.”
“뭐? 설마, 평생 사교계에 들이지도 않을 생각은 아니지? 아니, 너 결혼은 할 거지?”
“아스펠라가 허락만 하면.”
“그렇다면 더더욱 사교계가 중요하지! 평생 아스펠라 양을 친구나 또래 부인들 없이 혼자 지내게 할 거야?”
“혼자? 내가 있는데 무슨 혼자야. 성에 다른 이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의 말에 필립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봐, 칼리우스. 내 짧은 시간동안 파악한 거라 차마 더 참견하진 않겠다만, 너무 속박하는 것은 둘 다에게 좋지 않을 거야.”
“아스펠라와의 관계는 알아서 할 테니, 자네는 부부 침실부터 들어가기나 하지 그래.”
픽 웃은 칼리우스가 이내 출발하라는 듯 마차 몸체를 탕탕 두드렸다. 너 진짜 못됐어, 이 나쁜 놈아! 유디티아 경이 소리치며 멀어졌다.
***
유디티아 경이 돌아가고 아스펠라는 도서관에 갔다.
어젯밤의 기억은 그 부끄럽고 쑥스러운 일 말고도 하나 더 있지 않았던가. 어제 칼리우스는 아스펠라에게 자신의 저주에 대해 말했다.
비르가를 공격해 그의 은빛 털이 붉게 물들었을 때, 그는 고아한 붉은 눈동자에 칼리우스를 온전히 담으며 그리 말했다고 한다.
「자연을 죽이려는 오만한 자여, 인간만이 유일하다 여기는 이기적인 자여. 짐승으로서 살아갈지어다. 신의 피를 묻힌 자는 신의 부정을 모두 떠안을 거다.
오로지 파괴만을 쫒는 부정이 될 것이다. 네놈이 죽인 신들이 널 좀먹을 것이다. 파괴된 자연이 널 삼킬 거다. 자연의 딸만이 그걸 멈출지어다.
두려운 것이 없다 믿는 자여, 스스로의 두려움을 모르는 자여, 그 오만으로 인해 너는 두려움을 깨닫게 될 것이다. 너로 인해 자연의 딸의 피가 흐를 것이다.
낮이 어두워지고 밤이 밝아지는 날 세상이 끝이 날 것이다. 지키지 못해 스스로를 저주한 자여, 무저갱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하나. 너는 지키는 존재다. 인간의 마음을 품은 짐승의 피가 대지에 스며들 때 너는 비로소 다시 인간이 될 것이다.」
비르가의 말은 칼리우스의 뇌리에 각인이라도 되듯 새겨졌다 했다.
산신들이 죽기 전에 그에게 한 말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비르가가 한 말은 토씨 하나 잊히지 않고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고 했다.
‘그래서, 검은 마수가 되어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당신이 내 저주를 풀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우스는 결코 자신의 저주만을 풀기 위해 아스펠라의 마음을 얻으려 했던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당신을 이렇게까지 사랑하게 될 걸 알고 이런 저주를 내린 건지도 모르지요.’
칼리우스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아스펠라에게 다시 한 번 비르가의 일을 사과했다. 아스펠라는 그런 칼리우스를 꽉 껴안아 위로해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다만, 오늘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산신들은 인간을 저주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저주라는 것 자체가 남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마음 아니던가. 산신은 그런 부정한 마음을 갖지 않는다. 산신들은 아무리 인간을 원망해도 저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주는커녕 자비를 베풀었다.
「어떤 이는 만지면 뭐든지 황금으로 변하는 능력을 가지고 싶어 했고, 그리하여 황금 손을 얻게 되었다. 그가 만지는 모든 것들은 황금으로 변했지. 나뭇잎을 만져도 황금 나뭇잎이 되었고, 궁전의 대리석 기둥을 만지면 황금 기둥으로 변했어.
그는 제 능력에 감탄하며 행복해했지만, 곧 절망에 빠졌단다.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은 황금으로 변했으니까. 달콤한 과일을 먹으려 하면 딱딱한 황금으로 변했고,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 하면 황금으로 변하니 물조차 마실 수 없었어.
사랑하는 자식을 안았더니 아들마저 황금으로 변하고 말았으니, 탐욕에 눈이 멀어 감당하지 못할 능력을 가진 인간은 결국 스스로 파멸에 이르기 마련이란다, 아스펠라.」
신이 준 능력을 감당 못하고 스스로의 탐욕에 빠져 결국엔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인간들은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믿을 뿐이다.
「하지만 그 능력은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신은 인간을 벌하려고 그런 능력을 주는 게 아니야. 그들이 뭔가를 깨우치길 바라는 거지.」
깨우치는 자는 그것이 저주가 아님을 알게 되고 비로소 힘을 얻게 된다. 그러나 깨우치지 못하는 자는 그대로 자신이 저주에 걸렸다 믿고 무저갱에 빠지는 거라고. 그런 인간들을 볼 때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르가는 말했다.
그 말을 떠올린 아스펠라가 중얼거렸다.
“그럼 칼리우스도 저주를 받은 게 아니라, 뭔가를 부여받은 걸 수도 있어.”
게다가 비르가는 예언의 신이기도 하다.
물을 다스리고, 불을 다스리고, 대지를 다스리며, 바람을 다스리는 사방의 산신들과는 달리 비르가는 머나먼 미래를 예언할 수 있었다. 그러니 비르가가 하는 모든 말들은 미래를 본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아스펠라는 고서를 모아놓은 책꽂이를 하나하나 훑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검은 마수로 변하는 힘이라……. 낮이 어두워지고 밤이 밝아지는 날, 세상이 끝난다고 했지. 게다가 지금은 누군가 비르가의 영혼을 부정신으로 만들기 위해 강령했다고 했어.
사라는 비르가한테서 예언을 듣고 칼리우스와 일카이에게 편지를 남겼고.
우리 셋은 하나의 일에 연관이 되었다는 거야.
“아, 어려워.”
아스펠라는 복잡한 일들에 도리질을 하며 제 양쪽 눈을 꾹 눌렀다. 그때 뒤에서 아스펠라의 손을 잡아 내리며 칼리우스가 감은 눈에 입을 살짝 맞추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칼리우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럴 일 없어요. 내가 펠킨한테 이번엔 방해하지 말라 했거든요.”
칼리우스가 씩 웃으며 말하자, 아스펠라 역시 그를 따라 씩 미소 지었다. 그러더니 이내 뒤 돌아 칼리우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럼 우리 둘밖에 없는 건가요?”
“네. 아스펠라.”
“그럼 칼리우스가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요구가 좀 많아서요.”
아스펠라가 살살 그의 얼굴을 쓸며 나직하게 말하자, 칼리우스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는 아마 대담한 아스펠라의 유혹에 당황한 듯 했다.
이내 아스펠라의 허리를 잡으며 칼리우스가 말했다.
“어떤 요구든 다 들어드릴게요.”
“정말이죠?”
“네.”
“그럼 여기 고서들 중에서 주술서와 고대 신들에 대한 부분들을 다 발췌해서 정리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스펠라가 제 뒤의 책장을 양손으로 정중하게 가리키며 말했다.
“……네?”
얼빠진 칼리우스의 얼굴에 아스펠라는, 책 몇 권을 고르더니 아예 그의 품에 안겨주면서 말했다.
“말했잖아요, 어제. 내가 칼리우스의 저주를 풀 거라고요. 물론 전 깜장이의 모습도 좋아하지만, 더 악화되어서 고통 받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싶진 않으니까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예언 속의 그 괴수가 당신이라면, 저는 산신으로서 당신을 막아야 하니까.
아스펠라의 말에 칼리우스가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본격적이군요, 아스펠라.”
“당연하죠. 저는 사랑하는 사람을 제 손으로 죽이고 싶지 않다고요.”
그렇게 말한 아스펠라 역시 두꺼운 고서 몇 권을 들고 책상으로 향했다. 칼리우스는 자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 노력하는 아스펠라의 모습은 좋지만, 겨우겨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만큼 조금 더 서로 붙어 있을 시간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더랬다.
“우리 어제 막 마음을 확인했는데요, 아스펠라.”
“그래서요?”
“조금 더 여운을 느껴도 늦진 않을 것 같은데.”
능글맞은 그의 말에 아스펠라가 생긋 웃더니, 이내 정색하며 말했다.
“그러다가 진짜 개 되는 수가 있어요, 칼리우스. 전 칼리우스가 진짜 개가 되면 깜장이라고만 부를 거예요.”
저주가 점점 더 악화되어서 평생 개로 살게 되면, 칼리우스가 좋아하는 것들 아무것도 못할 걸요? 아스펠라의 진지한 얼굴에 칼리우스가 결국 조용히 앞에 앉아 책장을 팔랑대기 시작했다.
잠시 고서를 읽어내려가던 아스펠라가 물었다.
“혹시 저한테 아직 얘기 안 한 것들이 더 있나요? 제가 어제는 당신의 저주에 대해서나, 과거에 대해서만 물었지만. 솔직히 이 모든 것들이 예언에 따르면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는 것 같은데. 그럼 일카이는 왜 연관된 건지 모르겠어요.”
단순히 사라의 동생이라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사라를 죽인 검은 마수도 정확한 정체를 모르겠고요.”
“그건 좀 더 나중에 얘기할 생각이었습니다. 일카이 군도 직접 들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그 얘기를 하면 그가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있을지가 걱정입니다.”
“다혈질이긴 해도 멍청한 애는 아니에요.”
아스펠라의 말에 칼리우스가 쿡쿡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가 멍청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스펠라. 당신 말대로 일카이 군이 다혈질이라 걱정하는 겁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 분명 죽이려 들 테니까요.”
“누굴요?”
“국왕을요.”
“……국왕이요?”
자세한 전후 사항은 모르겠으나, 아스펠라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눈은 동그래지고 입은 떡 벌어졌으나,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일카이가 빨리 지방에서 돌아와야 할 텐데.”
어떤 내용일 것인지 예상 갔다. 그 전까지는 절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었으나, 만일 맞다면 어째서 셋이, 아니, 넷이 연관된 것인지 얼추 알 것 같다.
“비르가를 강령한 사람은, ……국왕 전하일까요?”
“확실한 증거는 아직 없지만, 그럴 겁니다.”
“왜 그런 짓을 하려는 걸까요? 이미 튀니아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왕이면서 대체 뭐가 부족하다고.”
“……굳이 이유를 대라면 더 큰 힘을 원해서겠죠. 어렸을 때부터 신에 대한 집착을 보이긴 했어도 그건 그냥 재미일 거라 생각했는데. 재미에서 그치는 정도가 아니었나 봅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우스가 조용히 책장을 넘겼다.
“파베스라면 아마 내가 저주 받은 것을 부러워할지도 모르겠군요.”
자조적인 표정을 짓는 칼리우스에게 아스펠라가 말했다.
“칼리우스. 어쩌면 당신은 저주에 걸린 게 아닐지도 몰라요.”
아스펠라는 아까 전 자신이 세운 가설을 칼리우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신들은 인간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저주를 하는 것이 아닌, 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뿐이라고. 다만 그 힘을 감당 못하는 인간만이 자멸하고 마는 것이라고.
“신들은 저주를 거는 순간 자신들도 부정신이 되는데, 그것만큼 산신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없으니까요. 물론, 남쪽 산신은 결국 그렇게 되어버렸지만요.”
“아스펠라. 저번에도 말했듯이, 산신 토벌을 주된 목적은 왕권 강화였습니다. 그러니까 신들을 모두 죽인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토벌하고 생포했을 뿐.”
그의 말에 아스펠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직 살아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몇몇은요. 산신이든 그 밑의 신들이든 파베스는 죄 잡아들이길 바랐으니까. 아마, 실험을 하고 있을 겁니다. 아직 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으니까요. 일카이 군이 찾는 검은 마수 역시 잡혔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래서 말했잖습니까, 다가올 사냥제 때 당신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말한 칼리우스는 잠시 미소 짓더니 말했다.
“이게 저주가 아니면 대체 뭘까. 기적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데.”
“칼리우스…….”
“덕분에 당신을 만날 수 있었으니 신의 선물이 맞긴 하는가 봅니다. 혹은―”
비르가의 말은 잊지 않고 있다.
「두려운 것이 없다 믿는 자여, 스스로의 두려움을 모르는 자여, 그 오만으로 인해 너는 두려움을 깨닫게 될 것이다. 너로 인해 자연의 딸의 피가 흐를 것이다. 산산조각 난 유리들이 그녀의 몸에 박힐 것이고, 너를 향하는 그 눈에 공포가 서릴 것이다.
넌 스스로를 두려워할 것이다.」
가장 끔찍한 형벌일지도 모른다.
아스펠라는 신이 저주를 내리지 않는다 했지.
하지만 칼리우스는 그 말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점점 마수의 몸집을 불리는 자신이 아스펠라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으니까.
“칼리우스?”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런 일은 생겨선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칼리우스는 그리 생각하며 아스펠라의 손을 잡았다.
***
유디티아 경과의 약속대로, 아스펠라는 그의 저택에 초대받게 되었다.
마차가 유디티아 가문의 정문을 지나 대문 앞에 도착할 때쯤, 유디티아 경이 직접 맞이하러 나왔다.
칼리우스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마차에서 내려 아스펠라가 내려올 수 있도록 에스코트 했다. 유디티아 경은 칼리우스를 보자마자, 켁, 목이 졸리는 소리를 내며 질린 얼굴을 했다.
“아니, 자네도 따라왔나?”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하고 아스펠라를 초대한 것 아니었던가?”
“아니었는데, 그냥 아스펠라 양만 초대한 것인데.”
“유감스럽게 되었군.”
전혀 유감스럽지 않은 얼굴로 칼리우스는, 앞으로 아스펠라 양을 초대할 때마다 나도 같이 올 거야, 라고 통보했다. 자네 할 일 많지 않은가? 하며 묻던 유디티아 경은 칼리우스가 미소 지으며 들어 올린 출장 가방을 보고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칼리우스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물었다.
“한나는?”
“막달이라 움직이기 힘들어해서, 내가 쉬라고 했어. 방에 있으니 잠깐 인사라도 하고 가지 그래? 요즘 태교를 하려면 잘생긴 얼굴을 봐야한다고 어찌나 난리던지.”
그렇게 말하던 유디티아 경은 손바닥 짝, 치며 아스펠라에게 말했다.
“제가 아스펠라 양에 대해 얘기를 했더니, 제 아내가 아스펠라 양을 꼭 만나고 싶어하더라고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온실에 가시기 전에 잠시 제 아내를 만나주실 수 있을까요?”
“네, 그럼요.”
아스펠라가 생긋 웃으며 말하자 필립은 역시 누구와는 다르게 참으로 친절하세요,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다시 한 번 그를 보며, 모든 귀족들이 칼리우스처럼 묵직한 인상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스펠라는 유디티아 경을 따라 그의 아내가 있다는 살롱 안에 들어갔다.
후작 저택은 인테리어부터 칼리우스의 성과는 정반대로, 온통 화사한 벽지와 소품들뿐이었다. 분홍빛이 감도는 실크 벽지로 둘러싸인 벽, 거대한 샹들리에의 크리스탈이 빛을 받아 무지개를 만들고, 흰색 대리석 바닥 위의 노란 벨벳 소파에 앉은 한 여인이 그들을 보자 화색을 띠며 몸을 일으켰다.
“어머! 대공 각하!”
여인 주변에 앉아 그녀의 머리를 빗기고 다리를 주물러주던 시녀들이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여보! 그렇게 일어나면 허리에 안 좋다니까아!”
유디티아 경이 후다닥 그쪽으로 뛰어가 제 아내의 손을 잡아주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러나 후작 부인은 그런 남편의 말을 무시한 채 오랜만에 보는 칼리우스가 그저 반가운 듯 그를 반겼다.
대충 들은 바에 의하면, 후작과 후작 부인 그리고 칼리우스는 학술원의 동기인 듯했다.
칼리우스가 다가가 후작 부인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군, 한나. 그새 배가 더 불렀어.”
“이제 진짜 막달이야. 앞으로 몇 주 뒤에는 나올 거래. 무서워 죽겠어. 맨날 심호흡하는 연습도 한다니깐.”
그렇게 말하던 한나가 칼리우스 뒤쪽의 아스펠라를 보고 반가운 듯 손뼉을 쳤다.
“당신이 그 아스펠라 양이로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아스펠라는 퍼뜩 드레스 자락을 살짝 집으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안녕하세요, 후작 부인.”
“온실을 가꿔주신다고요. 정말 감사해요. 다른 이들은 하나같이 영문을 모르겠다면서 포기해서 고민이었는데……. 필립한테 얘기 들었어요. 대공 각하의 온실이 그렇게나 천국 같다고요.”
“과찬이세요. 그냥 정성을 들였을 뿐인 걸요.”
“저희 온실도 잘 부탁드려요.”
“네.”
한나는 제 옆의 시녀들에게 빨리 차를 내오라며 그들을 내보냈다.
한나는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찬 듯, 후, 숨을 깊게 내쉬며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그녀의 배는 정말로 크게 부풀어 있었고, 막달인 만큼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어 보였다.
유디티아 경은 제 아내가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거나 인상을 쓰면 안절부절못했다.
“여보, 의사를 불러올까?”
“됐어, 필립. 방금 전에 왔다 갔잖아.”
“그래도!”
“여보.”
후작 부인이 그만하라는 듯 그를 부르자, 유디티아 경이 조용해졌다. 칼리우스는 이런 일들을 자주 봐왔다는 듯 익숙하게 못들은 척 무시했다.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앉은 후작 부인이 아스펠라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손님이 오셨는데 몸이 영 힘들어서 이렇게 밖에 못 앉겠어요.”
“아뇨, 더 편히 계셔도 되는데…….”
아스펠라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나의 부푼 배에서 연신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아스펠라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한나가 살풋 웃으며 물었다.
“만져볼래요? 필립을 닮아서 그런지 엄청 산만해요. 배가 이리저리 움직인다니까요. 발로 어찌나 차대는지.”
“발로 찬다고요? 아기가요?”
“어머, 아스펠라 양. 임산부를 본 적이 없나 보군요?”
“네. 이렇게 가까이에서는요. 아, 제가 너무 뚫어지게 쳐다봤나요? 죄송해요.”
신기한 듯 제 배를 쳐다보다 화들짝 놀라는 아스펠라의 모습에, 한나가 생긋 웃으며 이리 손을 줘보라며 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곤 아스펠라의 손을 끌어다가 제 불룩한 배 위에 올려놓았다.
“움직이죠?”
아스펠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묻자, 손바닥 아래 꼬물꼬물 확실한 태동을 느낀 아스펠라가 눈이 동그래져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중의 아이는 마치 한나의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 소리에 맞춰 발을 통통 움직였다.
“마치 후작 부인의 목소리를 알고 있는 것 같아요.”
“네. 맞아요. 저뿐만 아니라 필립의 목소리에도 반응하는 걸요?”
그러자 유디티아 경이 신나서, 꿀벌아! 아빠야! 아빠!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자 정말로 그의 목소리에 답하기라도 하듯 톡톡 두드리는 것 아니겠는가.
아스펠라는 경이로운 듯 입을 떡 벌렸다가 이내 신기함에 미소를 지었다.
“아가 이름이 꿀벌이에요?”
“이름은 아니고, 애칭 같은 거죠.”
“애칭……. 꿀벌이는 좋은 꽃을 잘 찾아왔네요. 두 분 다 너무 좋은 분들이니까요.”
아스펠라의 말에 한나가 환하게 웃으며 필립과 눈을 마주쳤다. 그런 부부를 가만히 쳐다보던 아스펠라 역시 잔잔하게 미소를 띠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들이 다과와 찻잔이 놓인 수레를 끌며 방 안에 들어왔다.
수다를 떨며 티타임을 가지는 동안, 칼리우스의 시선은 계속해서 아스펠라를 향해 있었다.
***
시간이 조금 흘러, 피곤해진 한나가 침실로 돌아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디티아 경은 아내의 안색이 좋지 않자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얼른 시종에게 의사를 부르라 명했다.
“몸이 많이 약해졌나 보군.”
칼리우스의 말에 유디티아 경이 가만히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임신 때문이라고는 하는데 원래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어. 최근 들어 빈혈도 심한데다가, 악몽도 자주 꾸고, 잠도 잘 못 자는 듯 하고, 심하면 하혈까지 할 때도 있는데……의사 말로는 별다른 질병은 없다고 하고…….”
이제 곧 막달인데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그게 제일 걱정이라고 유디티아 경이 말했다.
“……한나는 자꾸만 내가 걱정하니까 일부러 더 괜찮은 척해서, 뭐라도 해주고 싶었어.”
유디티아 경의 말에 아스펠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얼른 온실을 보러 가요, 후작님.”
아스펠라는 꽤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른 온실을 가꿔서 후작 부인과 태중의 아이에게 보여줘야죠.”
두 주먹을 꽉 쥐며 말하자, 잠시 시무룩해져 있던 유디티아 후작도 덩달아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펠라는 기필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온실을 아름답고 싱그럽게 꾸미리라 다짐했다. 제 손바닥을 톡톡 차던 그 경이로운 느낌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아스펠라는 가만히 제 손바닥을 매만졌다.
유디티아 경은 저택 안쪽에 위치한 온실로 그들을 안내했다.
온실로 접어드는 복도부터 기시감이 드는 듯 아스펠라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댔다.
“아스펠라?”
어딘가 불편한 기색에 칼리우스가 묻자 아스펠라가 별일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유디티아 경이 온실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훅, 얼굴로 끼치는 이상한 냄새와 공기의 흐름에 아스펠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대체 무슨 냄새지?
그 이상한 냄새를 칼리우스 역시 맡은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냄새인가, 필립?”
“냄새? 무슨 냄새가 나는가?”
마치 뭔가가 썩어가는 냄새였다. 짙은 암모니아 냄새는 물론, 비린내까지 더해졌다.
“여기서 시체 썩는 내가 진동하는데, 아무런 냄새가 안 난다고?”
칼리우스의 말에 유디티아 경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코를 킁킁대기 시작했다. 정말 안 나는데? 아무런 냄새도 안 나. 그냥 흙냄새뿐인데, 하며 고개를 갸웃댔다.
필립은 그 냄새를 맡지 못하는 듯 했다. 아스펠라는 이것이 평범한 일반인이 맡지 못하는 악취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역한 냄새를 맡지 못할 리 없지 않은가.
다행스럽게도, 악취는 금세 코를 마비시켰다. 어느 정도 악취에 익숙해진 듯 아스펠라가 그 안으로 들어가 두리번거렸다.
하나같이 색이 바래고, 시들해진 온실의 식물들. 그것들은 녹슨 철마냥 부식되어가듯 잎줄기가 하나 둘 떨어졌다. 어디 그뿐인가. 온실 벽과 화단 곳곳에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담쟁이들은 마치 붉은 핏줄들이 벽면을 가득 메운 것처럼, 유독 뻗어나간 가지들이 붉었으며 잎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아직 초가을인데도 담쟁이들이 죄 떨어져나갔습니다.”
필립의 말에 아스펠라가 담쟁이 벽 앞으로 향했다. 발바닥에는 바스락, 바스락 낙엽 진 담쟁이가 밟히는 것이 아닌, 눅눅한 습기를 잔뜩 머금어 진흙 같은 상태의 잎사귀들이 밟혔다.
‘진흙? 아니. 진흙보다는 뭔가 더 끈적한데…….’
끈끈한 것들이 아스펠라의 신발 밑창에 달라붙었다. 발걸음을 하나하나 뗄 때마다 거미줄 같이 질고 긴 얇은 실들이 쩌억, 쩌억 이상한 소리를 내며 늘어났다.
이상한 점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아스펠라는 고개를 돌리며 넓은 온실을 둘러봤다.
‘아무도 말을 안 해.’
식물들 모두 침묵하고 있다. 보통은 자기네들끼리 떠들기 마련인데, 이곳의 식물들은 그러지 않는다. 원래 식물들은 조잘조잘 떠들어대며 그 싱그러움을 내뿜지 않던가.
‘다 죽은 것들처럼 조용해.’
그들이 숨을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아스펠라는 화단의 흙을 만졌다. 물기를 머금지 못하고 마치 볕에 바짝 타버려 생명력을 잃은 흙 같았다. 흙들은 서로 뭉치질 못하고 손 안에서 바스라졌다.
유디티아 경은 아스펠라 뒤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스펠라 양, 복구가 가능할까요?”
“어렵긴 하겠지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일단 죽어버린 식물들부터 솎아내야겠습니다.”
아스펠라의 말에 유디티아 경이 인부들을 불러냈다. 그들은 죽어 있는 온실 식물들을 모두 솎아내기 시작했다. 칼리우스는 인부들이 눈앞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해도 상관없다는 듯, 아스펠라의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문서를 팔랑댔다.
아스펠라는 가끔 인부들에게 가 이쪽 식물은 이리로 옮겨주세요, 하며 위치를 지정해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건 단순하게 식물들이 시드는 것이 아니라니까.”
“이 양반이 진짜, 조용히 하고 마저 옮기기나 해.”
“아니,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코가 벌겋게 딸기처럼 붉은 사내의 말에 아스펠라가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방금 그 말이 무슨 뜻이죠?”
사내 둘은 아스펠라가 오자 공손하게 손을 모으곤 인사를 한 뒤 저들끼리 투닥거렸다.
“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가씨.”
“책잡으려 묻는 것이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예요. 뭘 봤는지 말해주시겠어요?”
아스펠라의 말에 코가 빨간 사내가 이내 눈치 보다 말했다.
“그것이, 며칠 전의 일이었는데 말입죠.”
사내가 얼른 그날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직 새벽조차 찾아오지 않은 오밤중, 그는 친구들과 도박장에 갔다 몰래 하인들만 아는 개구멍을 통해 들어왔다고 한다. 그 개구멍은 이쪽 온실 뒤쪽 창고와 연결되는 부분이라, 하인들이 지내는 숙소까지 가려면 무조건 이 온실을 지나가야 했다.
그날도 몰래 온실을 지나가려던 사내는, 온실 문이 열려 있는 것을 확인하곤 문을 잠그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
아니, 이 양반 문도 제대로 안 잠그고, 이러다 바깥에서 짐승이라도 들어오면 주인 어르신께서 분명 화내실 텐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문고리를 잡는 순간―
‘허억!’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붉고 커다란 눈동자.
그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알딸딸하게 취해 있던 모든 취기가 날아가는 것은 물론,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공포감을 맛봤다.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정도였다. 너무 두려운 것을 보면 사지가 마비된다는 것이 사실이었던 걸까.
사내는 그렇게 바닥에 주저앉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자세로, 문틈 사이의 눈동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온몸의 솜털들이 주뼛 몸을 세웠으며 오금이 저려왔다. 이러다 정말 죽겠구나, 식은땀이 정수리부터 흘러 턱 끝까지 내려왔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졌고, 등 부분의 옷감은 물씬 젖어 딱 달라붙어 있었다.
그 눈. 그 붉은 눈은 그저 사내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근데, 그 눈이 말입니다. 갑자기 어느 순간 사라졌지 뭡니까! 이건 완전 귀신의 농간이라고요.”
사지를 마비시키던 그 시선이 사라졌다. 언제 어떻게 사라진 것인지조차 보지 못했다. 사내는 그저 두려움에 벌벌 떨었고, 어느 순간 몸이 움직이자 그 눈동자 또한 사라져 있었을 뿐이었다.
사내는 이내 주저앉아 기어가듯 도망쳤다.
“그 눈을 마주친 이후부터 여기 온실 식물들이 죄다 말라비틀어지고 죽어간 겁니다.”
그의 말에 옆에 있던 사내가 아니 그런 짐승이 없었잖나, 주인 나리께서도 짐승이 한 짓이 아니라 하셨잖아! 이놈 말 들으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술에 절은 데다가 도박으로 일당 날려서 괜히 심술부리는 거라고요.
동료의 말에도 딸기코 사내는 연신 억울하다며, 자신이 본 것은 진짜라 주장했다.
“저 정말 거짓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가씨! 진짜입니다!”
“그럼 그날 이후 나도 같이 밤 샜는데 왜 나는 못 보는데?”
“아, 자네는 좀 가만히 있어!”
사내들이 투닥거리며 실랑이를 벌였다. 아스펠라는 확실히 식물들의 상태가 자연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저 단순히 관리를 못하거나, 풍수에 맞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마치 부정신이 지나간 자리처럼. 그래. 남쪽 산처럼 말이야.’
아스펠라는 직접 남쪽 산을 가보진 못했었다. 비르가가 그쪽에 가길 허락하지 않아 얘기를 전해들었을 뿐이었다.
부정신이 된 남쪽 산신이 지나간 자리는 끈적한 액체들이 흘러나와 산의 식물들을 죄 눅눅하게 죽이고 있다고. 마치 녹슨 철처럼 부식되어가는 몸으로 이곳저곳에 저주를 뿌린다고.
그렇지만 부정신이 유디티아 경의 온실을 노리는 이유가 뭔가.
아니, 애초에 이런 흙이 유디티아 경의 온실에 있는 이유는 뭐지?
그때 유디티아 경이 아스펠라 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흙을 들어내는 인부들을 보며 아쉬운 듯 혀를 찼다. 거대한 포대 자루에 삽으로 퍼 나르는 흙들은 금세 두툼하게 위로 쌓였다. 소생 불가능한 흙으로 판정받아 죄 걷어낸 것이었다.
“이것 참 아깝게 되었구만. 국왕께 하사 받은 토양이었는데.”
“후작님, 이 토양을 국왕전하께 하사 받으신 거라고요?”
아스펠라가 얼른 그에게 되물었다. 필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희 아내가 온실을 좋아하는데다가, 원래 여기서 태교하는 걸 좋아했었거든요. 지금은 몸이 좋지 않아 방에서만 주로 생활하지만. 한나가 온실에서 주로 시간을 보낸다 하니, 국왕 전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토양입니다. 아무래도 여동생이다 보니, 신경 써 주신 것이지요.”
“여동생이요?”
“아, 예. 한나는 국왕 전하의 하나뿐인 여동생입니다.”
그의 말에 아스펠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럼 제 여동생에게 그 부정한 흙을 보낸 거란 말인가.
‘국왕은 정말 회생 불가능한 쓰레기구나!’
이건 그냥 죽으라고 보낸 진짜 ‘저주’ 같은 것 아니었던가.
“안타깝네요. 이걸로 온실 토양을 싹 갈은 뒤에 한동안 식물이 더 잘 자랐거든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렇게 되고 말아서…….”
아스펠라는 더 이상 필립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대충 그의 말에 그렇군요, 안타깝네요, 금방 좋아질 거예요. 대꾸하고는 조용히 칼리우스 곁으로 돌아갔다. 일에 집중하고 있는 칼리우스의 소맷자락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기자, 칼리우스가 고개를 돌려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왜 그럽니까?”
“저기, 칼리우스. 아무래도 국왕 전하께서 후작 부부에게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 같아요.”
아스펠라가 칼리우스만 들을 수 있게 작게 속삭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성에 돌아가서 해드릴게요. 일단 이 집에서 후작 부부를 벗어나게 해야 하는데, 뾰족한 수가 없어서요.”
이 흙에 섞인 정체불명의 것으로 인해 온실이 죽어가고 있으며, 이 집의 시종은 무언가의 붉은 눈을 보았다 했고, 임신한 후작 부인의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이는 모두 국왕이 뭔가를 획책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체 뭘 바라는 거지?
무턱대고 후작 부부에게 당신들은 지금 국왕의 계략에 빠져 저주를 받고 있다, 국왕은 나쁜 놈이다, 위험한 놈이다,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대로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아스펠라의 정체와 능력에 대해서 말해야 했으며,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칼리우스의 정체도 알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게다가 모든 걸 다 말한다 한들, 부부가 제대로 납득할 거란 보장도 없었다.
칼리우스 역시 이를 알아들은 것인지 잠시 문서를 내려놓고 유디티아 경을 불렀다.
“필립. 자네 한동안 한나와 별장에 가 있는 건 어때?”
“갑자기?”
“여름휴가 못 갔다 하지 않았나. 이맘때쯤이면 단풍놀이하기 딱 좋겠군.”
“별장이 아직도 수리중이라, 딱히 갈 곳도 없어. 한나도 막달이라 몸도 안 좋고. 올해는 그냥 여기서 연말까지 지내려고.”
유디티아 경은 그렇게 말하며, 자네 입에서 웬일로 휴가라는 말이 나온대? 맨날 나한테 일이나 하라고 하던 사람이 말이야, 하며 웃었다.
칼리우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이내 내키지는 않으나, 어쩔 수 없이 말했다.
“그럼 내 별장으로 오던지.”
“응? 자네 별장에?”
“그래. 이번에 휴가를 갈 생각이었거든. 자네도 한나와 같이 오는 건 어때? 임산부가 오기에도 편안한 길일 거야.”
한나도 마침 환기가 필요하지 않겠나. 온실이 대충 모양새를 갖춰갈 때까지 만이라도 거기서 지내는 건 어때. 칼리우스의 말에 유디티아 경의 눈이 커졌다.
칼리우스의 별장은 호수 앞에 위치한 곳으로 그 뒤에는 울창한 숲과 들판이 있어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는 가족을 잃은 뒤로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그러니 그 별장에서 연회가 열리는 일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그 별장을 판 것도 아닌지라 귀족들은 그저 그 아름다운 곳을 보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런데 어린 시절 이후 단 한 번도 가지 않은 그 별장에 가겠다는 것이다.
꽤나 솔깃한 듯 유디티아 경이 그를 힐끔힐끔 보면서 중얼거렸다.
“……자, 자네 별장? 거기 아무도 안 들여보내주더니……. 아스펠라 양이랑 단둘이 가지, 우린 왜?”
“아스펠라가 단둘이서는 안 갈 것 같아서. 싫으면 말―”
심지어 친구 부부를 초대하면서까지 가려 하다니! 유디티아 경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칼리우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쏜살같이 말을 가로챘다.
“그렇다면 내, 한나한테 지금 바로 물어보고 오겠네!”
혹여 그 짧은 사이 칼리우스가 변심이라도 할까 유디티아 경은 빠르게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실에 돌아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것을 보아하니, 한나의 허락도 맡았나 보다.
“우리 언제 출발하는가? 한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다던데!”
멀리서 달려오며 유디티아 경이 천진하게 물었다. 칼리우스는 잠시 아스펠라를 쳐다보더니 이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 바로 출발하지.”
그의 말에 아스펠라가 물었다.
“지금 별장을 간다고요?”
“그리 먼 곳은 아닙니다. 에르윈 성과도 가깝고요. 바다와 호수가 보이는 곳입니다. 안 궁금합니까?”
“궁금하긴 해요.”
“며칠 지낸 뒤에 저 둘만 내버려두고 다시 성에 돌아오죠.”
그의 말에 아스펠라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은 그럼 자신은 짐을 싸야겠다며 또 다시 후다닥 온실을 나가버렸다. 그가 나가고, 온실 흙을 퍼 나르던 인부들도 할 일을 모두 끝냈다. 아스펠라는 거대한 포대 자루에 들어 있는 흙들을 다시 한 번 살폈다.
이게 흙이 맞나?
아스펠라가 손바닥에 흩어진 흙냄새를 킁킁 맡았다.
흙보다는 조금 더 가루지고, 메마른 느낌.
이게 대체 뭐지? 아스펠라는 흙 곳곳에 섞여 있는 작고 미세한 가루들을 가만히 쳐다봤다.
흙에 섞인 것은 재.
그래. 재가 맞는 것 같다. 손 안에 검게 그을리는 자국이 남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를 태운 재였다. 그렇다면 대체 뭘 태운 걸까?
「온갖 고통에 찌든 신을 산 채로 불태우면 부정이 잔뜩 담긴 재로 변한단다. 부정신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고 난 뒤에 부정신이 되는 거지. 그 재를 조심해야 해. 그 재가 섞인 흙과 공기는 지독한 악취를 풍기니까.」
일전에 비르가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건 신을 산 채로 불태운 재를 섞어 만든 흙인 거다.
「그런 흙은 다른 생명력을 빼앗으며 몸집을 불린단다. 인간이든, 식물이든 죄다 흡수하지. 몸을 다 불린 이후에는 부정신으로 다시 태어난단다. 정확히는, 그 영혼이 주변에 깃들어.」
이는 신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야, 아스펠라.
신이 분노에 잠식되어 부정신이 되는 것이 아닌, 인간이 만드는 부정신이란다. 그런 부정신은 만든 이의 꼭두각시가 되지.
국왕은 후작에게 실험을 하고 있던 것이다.
다시 태어난 부정신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부정신의 영혼이 인간에게 깃들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아냐, 후작은 별다른 증상이 없었는데? 그럼……후작 부인한테 실험하고 있던 건가?’
아스펠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짐승만도 못한 새끼…….”
아스펠라가 분노로 치를 떨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국왕이 노리던 것은 후작 부인 혹은 태중의 아이였던 거다. 둘 중 누구한테라도 부정신이 덧쓰인들, 어떠한 부작용이 일어난들, 일이 틀어졌을 때 건장한 후작보다는 조금 더 쉽게 감출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그렇게 되게 두지 않을 것이다.
아스펠라는 손에 묻은 흙을 탁탁 털고는 뒤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