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4장. 다가오고 있는 것
5장. 밝혀진 것들
6장. 잊힌 그날의 일(1)
4장. 다가오고 있는 것
칼리우스는 아침 식사 후 곧장 집무실로 와 어제 다하지 못한 일들을 하고 있었다. 펠킨은 잠시 심부름을 보낸 터였던지라 보좌를 할 이도 없어 꽤나 빠듯했다.
한창 열중하다 잠시 집무용 안경을 벗고는 의자에 기대앉아 있을 때였다.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펠킨이나 시녀겠거니, 생각하여 권태로운 목소리로 들어와, 나직하게 말했다. 그는 여전히 등받이에 고개를 뒤로 젖힌 상태로 눈을 감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이는 별다른 인기척을 내지 않았다.
“뭔가.”
빨리 용건만 말하고 꺼지라는 듯 칼리우스가 여전히 고개를 젖힌 채로 물었다.
“저기.”
눈이 번쩍 뜨였다.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마치 그녀가 올 줄은 예상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아스펠라. 여긴 어쩐 일로. ……그건 왜 들고 있습니까?”
아스펠라가 간식 든 쟁반을 들고는 얼쯤하게 서 있었다. 설마, 사용인들이 아스펠라를 얕잡아 보고 이런 걸 시킨 건가 싶어 칼리우스가 얼른 인상을 찌푸렸다. 아스펠라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예상이 간 듯 얼른 말했다.
“제가 가져다 드리고 싶다 말했어요.”
“그걸 왜 아스펠라가.”
그러자 아스펠라가 말똥말똥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사실 아스펠라 본인도 명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칼리우스에게 편의를 봐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인사하고 싶었고, 그래서 인사를 하러 가는 도중에 시녀와 마주쳤다.
어차피 자신이 가는 곳이었기에 제가 가져다주겠다며 받았을 뿐이다.
굳이 시녀까지 올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 복잡한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기에는 뭔가 모양새가 웃긴 듯하여 아스펠라가 짧게 함축하여 대답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고.
칼리우스의 얼굴이 조금 묘하게 변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뚝뚝하고 차가운 인상이었으나 어째 안색이 조금 밝아진 듯 보이면서, 그가 대충 헝클어 넘긴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귀 끝이 조금 붉게 변해있었다.
“많이 바쁘시면 두고 나갈게요.”
“아니. 잠깐 있다 가요. 아스펠라.”
칼리우스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아스펠라 앞으로 가 쟁반을 받아 든 뒤 그녀를 에스코트하여 소파로 갔다.
“앉으세요.”
아스펠라를 소파에 앉힌 뒤 칼리우스가 벽 한켠에 있는 콘솔로 향했다. 작은 바처럼 만들어진 곳이었는데 칼리우스는 그곳에서 술잔을 들려다 이내 머그잔으로 바꿔 들었다.
비치해둔 우유에 초콜릿을 빻아 가루로 만들어둔 것을 탄 뒤 아스펠라 앞에 내려놨다.
“감사합니다.”
“해서, 할 말이라도 있는 겁니까.”
칼리우스는 아스펠라가 들고 온 케이크 접시를 앞에 놔주곤 포크를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저, 이건 제가 먹으려고 들고 온 게 아닌걸요.”
“드세요. 아스펠라가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니.”
아스펠라는 그런 게 어딨냐며 칼리우스를 잠시 쳐다봤다. 칼리우스는 자꾸만 아스펠라에게 뭔가를 먹이려고 했다. 먹을 생각이 없었으나, 결국 그녀는 칼리우스의 성화에 이기지 못했다.
아스펠라는 포크를 옆으로 세워 케이크를 잘라 입안에 넣었다. 폭신한 치즈 카스테라 위에 달콤한 꿀과 과일들이 올려져 있는 것이었다.
대공 성에서 지낸 후로 앨리스가 매번 디저트를 들고 오는데, 여태까지 그 디저트들이 겹친 적이 없었다.
아스펠라가 포크를 내려놓을라 치면 칼리우스가 맛이 없는 거냐, 새로운 걸 가져오라 시킬까, 하며 물었다. 아스펠라는 결국 치즈케이크를 다 먹는 수밖에 없었다.
케이크 접시가 비고 나서야 칼리우스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습니까. 먹을 만합니까?”
“저 혼자 먹기에도 황송할 맛이에요.”
그 말에 칼리우스가 살풋 웃으며 앞으로 치즈케이크는 매일 준비해둬야겠군, 생각했더랬다.
“한 개 더 가져오라 시킬까요?”
“아뇨! 아뇨. 그러지 마세요.”
아스펠라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자신을 할 얘기가 있어 온 것일 뿐 케익이나 뺏어먹자고 온 것이 아니라는 말에 칼리우스가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제야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된 듯 칼리우스가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아스펠라는 포크를 가지런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편의 봐주신 거에 감사하다고 제대로 인사드리고 싶어 온 거예요.”
“그런 인사 안 해도 됩니다.”
어차피 다 아스펠라를 이 저택에 어떻게든 있게 하려고 한 것들이니까요. 칼리우스는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당황한 아스펠라가 아, 아뇨. 그래도 인사는 드려야죠, 하며 어제 일에 대해 꺼냈다.
“저, 항상 아스펠 산에서 살면서 이렇게나 세상이 넓고 다양한 인종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비르가가 말만 해줬지, 저는 겁이 많은 편이라 실제로 사람을 만나는 건 무서웠거든요.”
아스펠라가 손을 꼼지락댔다.
“사람이 무섭습니까.”
칼리우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왜 사람이 무서운지. 아스펠라는 말하고 싶지 않아 얼른 말을 돌렸다.
“대공, 아니. 칼리우스. 정말 고마워요. 제가 경험해보지 못할 것들을 모두 해 본 날이었어요. 산이 불타서, 제가 계속 울상이니까 그것 때문에 번거롭게 해드린 것 같아 죄송한 마음도 있지만. 감사합니다.”
아스펠라는 어쩐지 말문이 자꾸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칼리우스가 빤히 쳐다볼 때마다 자꾸 말이 막힌다. 손에 땀도 난다. 예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어제 이후부터 이상하게 그가 쳐다보는 눈빛에 점점 더 긴장된다.
“아스펠라.”
그가 이렇게 나직하게 이름을 부르면,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도 든다. 아스펠라가 눈을 몇 번 빠르게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어제 말한 건, 그냥 단순히 그대 기분을 풀려고 말한 게 아닙니다.”
“네?”
“아스펠라는 산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죠. 아마, 어제 본 대부분의 것들이 처음일겁니다.”
네, 맞아요. 아스펠라가 대답하자 칼리우스가 느른하게 기댔던 등받이에서 몸을 뗐다. 앞으로 몸을 숙여 아스펠라와 얼굴을 가까이했다.
“어제도 말했을 겁니다. 나는 아스펠라가 모르는 모든 것들을 알려줄 수 있다고요.”
“…….”
“나는 아스펠라가 앞으로 내게 더 많이 요구하고 원하고 궁금해 하길 바랍니다.”
그대가 원하는 모든 걸 난 다 줄 수 있다니깐.
내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요.
그 말이 어찌나 유혹적인지. 아스펠라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칼리우스가 손을 들어 아스펠라의 턱을 매만지다 이내 떡 벌어진 입술을 손수 닫아줬다.
아스펠라가 화들짝 놀라 뒤로 몸을 빼며 제 턱을 매만졌다.
“아뇨. 제가 바라기만 하는 건 도리에 맞지 않아요.”
그놈의 ‘도리’. 산속에서만 살아 사회성은 꽝이면서 뭘 자꾸 도리를 찾는다는 건지.
“이미 칼리우스에게는 제가 많은 빚을 졌어요.”
“그걸 왜 빚이라고 생각할까.”
“그게 빚이 아니면 뭐겠어요.”
“수작질이라 생각하세요, 그럼.”
칼리우스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아스펠라는 마치 벽에 대고 대화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스펠라는 이렇게 뭔가를 받기만 하는 건 영 맞지 않았다.
‘넌 지금 우리한테 빚을 진거야.’
‘그 빚을 갚을 생각은 안하고, 감히 우릴 배신하려 들어?’
‘어쩌면 능력도 다 거짓말일지도 모르지. 하, 산신이 키운 아이래서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그들도 맨 처음엔 정말 다정했다. 아스펠라가 잠이 들 때까지 옆에서 동화를 읽어주기도 하고, 그녀를 위한 옷가지를 매번 사오기도 했으며, 아스펠라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었다.
넌 우리 가족이라고. 우린 널 정말 사랑한다고. 변치 않을 거라고. 그러나 아니었지 않나.
이유 없는 호의는 없었다.
적어도 아스펠라가 봐온 인간들이란 그랬다. 누군가 아스펠라에게 하나를 주면 그들은 아스펠라가 그 배는 돌려주길 바랐다. 주지 못하면 차갑게 돌아섰다. 어디 돌아서기만 할 뿐인가?
‘얘 봐. 능력을 제대로 못 쓰잖아. 그동안 너무 복에 겨워서 그런 거야.’
‘어디 좀 가둬두면 다시 능력이 생겨나지 않을까?’
아스펠라는 컴컴하고 어둡고 좁은 곳에 갇혀 있던 그 옛날을 떠올렸다. 손이 절로 곱아들어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아스펠라. 그날 일에 대해선 기억하지 말거라. 없던 일로 치거라. 너는 인간 세상에 내려간 적이 없던 거야. 이 모든 것들은 그저 지독한 악몽이었던 걸로 생각하거라. 내가 도와주마.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도와주마.」
만약 그것이 악몽에 불과한 것이었다면, 아스펠라는 지금 이 순간은 달콤한 꿈쯤 될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영원하지 않을 거다. 제 앞의 다정한 칼리우스도. 달콤한 디저트들도, 친절한 앨리스도.
언젠가는 꿈에서 깨어날 때가 올 거다. 그걸 몰랐던 때는 나중에 깨어났을 때 매우 고통스러웠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고 어째서 이렇게 되었던 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아스펠라는 꽤 나이를 먹었고, 그때의 상처를 잊지 않고 있다.
“……수작질이라면?”
아스펠라의 질문에 칼리우스가 대답했다.
“아스펠라를 얻기 위한 수작질로 생각하세요.”
그 말에 아스펠라가 잠시 고개를 숙였다. 쑥스러워하는 것인가, 생각하며 그저 웃어넘기려던 칼리우스는 이내 아스펠라의 어깨가 잘게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칼리우스가 손을 뻗어 아스펠라의 얼굴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 아스펠라가 먼저 물었다.
“혹시, 칼리우스는 제가 동물과 대화하는 것이 탐나시나요?”
“네?”
칼리우스가 황당한 듯 되물었다.
“그걸 내가 왜 탐냅니까?”
“그럼 대체 저한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죠?”
허. 칼리우스가 어이가 없어 한숨을 내뱉었다.
이 여자. 자존감이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건지, 아니면 의도된 연기인 건지. 사람이 순진한 듯싶다가도 여우같이 구는데.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다.
“아스펠라.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겁니까?”
“네?”
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할 때마다 칼리우스의 속만 타들어갔다.
“내 입으로 굳이 듣고 싶다면야 얼마든지 말해주죠.”
아스펠라가 긴장한 듯 침을 꼴깍 삼켰다.
“나는 고작 짐승들과 대화하는 아스펠라의 능력이 탐나는 게 아니고. 그 순진한 얼굴이, 녹색 눈동자가. 정돈 안 돼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맨발로 땅을 밟는 게 일상인 당신이 탐나는 겁니다.”
칼리우스는 더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달싹였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아스펠라의 몸이 탐납니다. 내 침대에 당신을 눕히고 싶습니다. 그 침대에 당신을 꽁꽁 묶어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싶어요.
알몸이 된 당신이 애타게 내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내가 아니면 잠들지도 못하게, 나 아니면 살 수 없게 만들고 싶다고요.
하지만 뒷말은 모두 삼켰다. 이 모든 것들을 말했다가는 아스펠라가 기함하며 벌벌 떨 것이 분명했다.
“……그 말은 저를 이성적으로 좋아하신다는 거예요?”
아스펠라의 질문에 칼리우스가 결국 폭발했다.
“이런 젠장,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습니까. 네. 좋아해요. 아스펠라. 몇 번이나 말했겠지만 당신은 날 영 믿지 못하는 것 같으니 말해줄게요. 반했습니다. 좋아해요. 당신을 원해요. 알겠어요?”
탕! 칼리우스는 답답한 마음을 결국 테이블을 내려치는 것으로 해소할 수밖에 없었다.
아스펠라, 당신 정말 답답하군! 짐승들한테는 그렇게나 솔직하고 거침이 없으면서 왜 이렇게 인간들한테만 유독 이러는 거야? 어깨를 부여잡고 묻고 싶었는데.
“……딸꾹!”
“…….”
아스펠라가 딸꾹질을 하는 바람에 못 하게 되었다.
테이블 내려치는 소리에 놀란 아스펠라의 딸꾹질은 좀체 멈추지 않았다. 칼리우스는 이 난장판인 고백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화를 내며 고백하는 본인이나, 그게 무서워 딸꾹질하는 아스펠라나.
“아스펠라. 참 다채롭군요.”
칼리우스는 살면서 인내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은 그의 능력으로 손쉽게 얻어내지 않았나. 24년 인생 일생일대의 인내심을 그는 지금 경험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저 앞에서 딸꾹질을 참느라 제 입을 틀어막는 아스펠라가 예뻐 보이는 이유는 또 뭔가. 칼리우스는 자신의 콩깍지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질리긴 질려도 벗겨지진 않으니 그도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후에 당신이 내게 얼마나 가혹했는지 알길 바랍니다.”
“……딸꾹! 딸꾹! 그, 그게― 딸꾹!”
“이만 나가보세요. 아스펠라.”
칼리우스가 지친 듯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아스펠라는 방을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서재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온 아스펠라는 그대로 방문에 몸을 기댔다. 방 안에서 칼리우스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문에 기댄 아스펠라가 잠시 숨을 고르다 이내 소매를 들어 눈을 벅벅 닦았다.
본인도 안다. 답답하게 구는 거. 칼리우스가 지금 자신 때문에 화가 났다는 것도 안다.
칼리우스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것을 알고 있다. 일카이가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것도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자꾸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의심이 들지 않나. 믿지 말라고. 과거의 일을 똑같이 반복하고 싶냐고. 그런 생각이 자꾸만 아스펠라를 잠식하는 것 아니겠는가.
아스펠라도 그냥 속 시원히 그들의 감정을 받아줄 수만 있으면 좋겠다마는,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변하기 마련이니까.
「인간은 완벽하지 않은 존재란다. 부정적인 것들로 가득 찬 존재들이지. 그렇기 때문에 악하고 나약해. 해서 우리가 지켜야하는 존재이기도 하지.」
그들의 나약함에는 죄가 없다. 다만, 신들의 기대가 너무 높을 뿐.
「그러니 아스펠라. 기대하지 말거라. 인간에게 뭔가를 받기만 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네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리해야 한단다.」
비르가는 아스펠라 만큼이나 인간을 믿지 않는 신이었다. 어디 비르가 뿐일까. 사실 신들 대부분은 인간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유구한 세월을 살아온 만큼 인간들과도 인연이 길었다.
그들 역시 맨 처음에는 인간들을 너무 많이 사랑하고, 아꼈으며, 기대했던 때가 있다 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신들의 말로는 결국 인간들에게 토벌되는 것이거나, 혹은 인간들로부터 은둔하는 것 아니었던가.
그러니 자신 역시 그들에게 기대를 갖지 말고, 마음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배웠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왜 칼리우스가 화를 냈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왜 방을 나왔을 때 눈물이 나왔던 건지. 왜 이리 서러운 감정이 드는 것인지. 아스펠라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
‘멍청한 놈, 그때 화를 내는 게 아니었는데.’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에, 왜 제 마음을 자꾸 가벼운 걸로 치부하는지 알 수 없는 그 답답함에 큰 소리가 나와 버렸다.
어찌나 놀랐던지, 아스펠라가 화들짝 어깨를 움츠리지 않았나. 심지어는 딸꾹질까지 했다. 아스펠라가 사람을 믿지 못하는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텐데, 자신이 너무 성급했었다며 칼리우스가 자책했다.
그 자책에 정점을 찍은 것은 아까 전 반응을 살피려 부른 앨리스가 한 말 때문이었다.
아가씨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던데, 무슨 일 있으셨나요?
“미치겠군.”
그 이후부터 정무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칼리우스가 결국 문서를 내려놓고 안와 부근을 꾹꾹 내리 눌렀다.
울었다니. 아스펠라가 울었다니. 내가 울린 거잖아.
울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그의 기분은 난생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온몸의 피가 모조리 빨려나가 살 거죽만 남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온 펠킨은 그런 칼리우스를 보고 각하, 어찌하여 얼굴이 이렇게 파리하게 질리셨습니까! 얼굴이 폭삭 삭은 느낌입니다. 이 잘생긴 얼굴이 어찌하여! 하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날의 저녁 식사 자리는 정말이지 가시방석과도 같았다.
“너 왜 그렇게 눈이 빨개, 아스펠라. 울었어?”
눈치라고는 없는 일카이가 아스펠라의 양 볼을 잡더니 이리저리 둘러보며 물었다.
“안 울었어.”
“아니, 딱 봐도 울었는데? 뭐야? 왜 울었어? 어떤 새끼가 울렸어?!”
마치 들으라는 듯, 어떤 놈이야? 응? 누구야, 말해. 누가 네 눈에서 눈물을 뽑았어? 아주 눈이 팅팅 부어올랐구만! 하며 큰 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다른 사냥꾼들도, 그러게, 눈이 완전 부어올랐네. 어디 아픈 건 아니죠? 하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아니 진짜 안 울었다니까……!”
아스펠라가 얼른 일카이의 손을 밀어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스펠라는 시무룩하게 풀이 죽은 상태로 음식을 깨작깨작 먹었다. 칼리우스는 그런 아스펠라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눈이 부었잖아.’
일카이의 말대로 항상 동글동글 맑은 아스펠라의 두 눈이 통통하게 부어올랐다. 몇 번이고 손으로 문지른 것인지 눈 주변도 빨갛게 손자국이 나 있었다.
‘눈이 붕어가 됐네. 나 때문이겠지. 미칠 노릇이군.’
방에 가서 소리 죽여 울었을 아스펠라를 상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칼리우스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아스펠라의 어깨가 움찔댔다. 혹여나 저를 향한 화가 덜 풀려 한숨을 내쉰 것이라 생각한 것인지, 아스펠라의 눈이 또 다시 그렁그렁해졌다.
결국 아스펠라가 식사를 다 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속이 좋지 않아, 먼저 일어나는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바라요.”
“어, 어어, 아스펠라!”
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후다닥 식당을 빠져나갔다. 뒤에 서 있던 시녀 앨리스가 당황한 듯 아가씨?! 하고 아스펠라를 부르며 뒤를 따랐다. 일카이 역시 따라가려는 듯 얼쯤하게 의자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그의 동료가 이럴 땐 눈치껏 모른 척 해줘야 하는 것이라며 잡아당겨 그를 도로 앉혔다.
칼리우스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달려 나가 말릴 틈도, 말을 걸 틈도 없었다.
“하…….”
칼리우스는 들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곤 손깍지를 껴 이마를 기댔다. 미치겠군. 그가 나직하게 말하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던 펠킨 역시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일카이는 그런 칼리우스를 쳐다보다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얼마 가지 않아 칼리우스 역시 입맛이 없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펠킨이 얼른 그 뒤를 따랐다.
“뭐야? 뭔 일이야?”
일카이가 중얼거리자, 옆의 동료가 그거네, 딱 보면 그거잖아. 하며 말했다.
“보아하니 둘이 뭔 일 있었네.”
그의 말에 일카이의 미간이 더 와작 구겨졌다.
“알고 있어 그건 나도. 내가 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내 짜증이 난 것인지, 에이씨! 작게 욕지거리를 하며 일카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여자가 울 땐 건드리는 거 아닌데 대장. 어쭙잖은 위로 했다간 오히려 욕먹어.”
“누가 아스펠라 찾아간대?!”
일카이가 씩씩 대며 식당가를 나갔다. 동료들은 쯧쯔, 혀를 찼다.
“어떡하냐, 우리 대장.”
둘 사이에 껴서 이도저도 아니게 되었는데, 본인은 아직 모르는 것 같다.
***
누가 봐도 심기 불편한 얼굴로 칼리우스는 의자에 앉아 한숨만 내쉬길 반복했다.
“저, 각하. 그냥 이러실 거면 정무 보시지 마시고 아스펠라 양을 찾아가는 것은 어떠실까요?”
평소와는 달리 문서 하나를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계속 넘겼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읽었다가를 반복하지 않던가.
“……하…….”
펠킨의 말에 칼리우스는 또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모습은 또 처음인지라, 펠킨은 그저 신기한 듯 조금 멀리 떨어져 근심에 차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쳐다봤다.
그때 누군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칼리우스의 날카로운 눈빛이 문을 향하기 전에 펠킨이 얼른 문밖을 확인했다.
“일카이 군? 이 시간에 왜…….”
“각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예? 제가 전해드릴 테니 제게 말씀해주시죠.”
“아뇨. 제가 직접 뵙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만.”
펠킨이 곤란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지금 각하께서 심기 불편하셔서, 오늘은 그냥 돌아가세요. 잘못 건드렸다간 무슨 사달이 날 줄 알고요. 펠킨은 중요한 얘기가 아니라면 내일 얘기하자며, 지금은 때가 아니니 어서 돌아가라 그의 등을 꾹꾹 눌러댔다.
그러나 가란다고 갈 일카이가 아니었다.
“아뇨. 저 지금 얘기해야겠습니다.”
“아니 일카이 군. 왜 이렇게 고집이…….”
“펠킨, 들어오라 해.”
서재 안쪽에서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펠킨이 힉, 숨을 들이쉬며 일카이를 올려다봤다. 당신이 이제 큰일 났어요, 하는 듯한 눈빛이었으나 일카이는 콧방귀를 뀌곤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인가?”
“아스펠라에 대해 여쭤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일카이의 질문에 칼리우스가 천천히, 깊게 숨을 들이 마쉬다가 다시 내쉬었다. 이내 감았던 눈을 뜨며 요요한 눈빛으로 일카이를 쳐다보더니,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펠킨에게 말했다.
“자네는 잠시 나가 있어.”
“……예…….”
펠킨은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에 눈치를 살피다 이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뭔가.”
“아스펠라를 진심으로 대하시는 것입니까?”
“그건 왜 묻나.”
“……만일 그냥 가볍게 찔러보시는 거면, 그러지 말아주십시오.”
칼리우스가 픽, 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팔짱을 끼며 등받이에 느른하게 기댔다.
“왜?”
“그야 저는―”
“설마 그 같잖은 약혼자니 뭐니,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의 말에 일카이가 입을 꾹 다물더니 그를 쳐다봤다. 칼리우스는 화를 꾹 참으려는 듯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일카이를 쳐다봤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그리 말하면 사람들이 그대로 믿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정말로?”
“…….”
“나 참. 귀엽네.”
칼리우스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귀엽긴 한데, 일카이. 기어오르는 건 여기까지만 하게나. 자네가 무슨 자격으로 내게 아스펠라에 대한 진심을 묻는 건지는 모르겠군.”
봐주는 건 여기까지야. 어딜 감히 사냥꾼 따위가 대공에게 먼저 질문을 하고, 마음대로 이 집안을 휘젓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다며 칼리우스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제 행동이 분수 모르는 짓이라는 걸요.”
“그걸 아는데 그리 행동해? 생각보다 멍청한 구석이 있군.”
“저는 아스펠라를 좋아합니다.”
느른하게 웃던 칼리우스의 얼굴에서 일말의 미소도 사라졌다. 일카이는 긴장된 듯 주먹을 그러쥐며 말을 이었다.
“그 같잖은 약혼자 연기. 아스펠라가 원해서 한 겁니다. 각하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해서. 제가 제안했고, 아스펠라가 받아들여 그리 한 겁니다.”
“그래서.”
“자격을 묻지 않으셨습니까? 아스펠라를 좋아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럼 저도 그 자격 생기는 것 아닙니까?”
대공의 마음과 제 마음. 둘 중 누가 더 무거울진 모르겠지만요.
그렇게 운을 뗀 일카이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무례를 무릅쓰고, 이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스펠라를 가벼운 마음으로 대하지 말아주십시오. 그저 단순히 신기하다 하여, 쥐고 흔들―”
“왜 내가 그녀를 가벼운 마음으로 대한다는 건지 모르겠군. 난 단 한 번도 가볍게 대한 적 없어.”
칼리우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에서 걸어 나와 천천히 일카이 앞으로 걸어왔다. 그 앞에 선 칼리우스가 일카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가 아스펠라를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네.”
“…….”
“내가 아스펠라를 쥐고 흔드는 게 마음에 안 들면, 아스펠라가 내게 흔들리지 않게 만들어보던지. 자네가 가진 자격은 그거뿐일세. 내가 흔들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
그런데도 흔들리면, 그건 자네가 자격 미달이라는 거겠지.
칼리우스의 말에 일카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애초에 거짓말을 하려거든 합을 좀 맞춰야하지 않겠어?”
“…….”
씩 미소 지으며 칼리우스가 검지로 제 눈 쪽 관자놀이를 톡톡 두들겼다.
“약혼한 사이치고는, 너무 한쪽만 이글대잖아. 보기 안타까울 정도로.”
이내 일카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칼리우스가 이만 가보라는 듯 어깨를 툭툭 치자, 일카이가 얼른 뒤돌아 서재 문을 박차듯 나가버렸다.
성큼성큼 빠른 발걸음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칼리우스가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어린 애를 상대로 화풀이를 해버렸다.
“젠장.”
스스로가 한심스러운 듯 칼리우스가 작게 욕지거리를 했다.
벌컥 열린 서재 문 끄트머리에 펠킨의 얼굴이 빼꼼 들어왔다.
“저, 각하?”
설마 치고받고 싸운 건 아니시죠? 하며 묻는 그의 모습에 칼리우스가 혀를 차며 소파에 앉았다.
“미쳤나. 내가 열아홉 살짜리랑 치고받게.”
게다가 어떤 미친놈이 대공한테 주먹질을 하겠는가. 칼리우스가 잠시 생각하다 펠킨에게 물었다.
“어느 쪽으로 가던가?”
“바깥으로 나가던데요? 무슨 얘기를 하셨길래 사냥꾼의 얼굴이 저렇게 붉으락푸르락 합니까?”
“그냥 제 주제 좀 깨닫게 해줬다.”
“아직 어려서 귀족 무서운 줄 모르는 듯합니다. 각하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주시지요. 그도 나중에 알겠지요. 대공이라는 직위가 얼마나 높은 지위인지.”
“아니. 그거 말고.”
“예? 그럼요?”
“나한테 아스펠라에 대한 진심을 묻지 않던가. 지가 뭐라고 그걸 물어.”
칼리우스가 비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펠킨은 일카이의 무례한 행동보다, 아스펠라를 들먹인 것에 더 화가 난 것에 당황한 듯 입을 떡 벌렸다.
“그, 그렇군요.”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군.”
아스펠라는 울고, 어린놈은 기어오르고. 칼리우스가 천천히 제 목을 단정하게 감싼 크라바트를 풀며 중얼거렸다.
“저, 각하. 아스펠라 양에게 진심인 것은 맞으시죠?”
그의 질문에 칼리우스가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지금 내 꼴을 보고도 그딴 질문이 나오나, 펠킨?”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그게 아니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막은 모르겠지만, 하며 펠킨이 운을 띄었다.
“제가 걱정하는 건……. 각하, 아스펠라 양에게 진심으로 다가가시려면 저주에 대해 말씀하셔야할 것입니다.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잖습니까.”
솔직히, 갑자기 애완견 돌봐준 것에 감사하다며 청혼하는 귀족을 누가 진심으로 믿겠습니까? 왜 아스펠라 양이 필요하고, 왜 그녀여야만 하는지, 확실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모든 사실을 밝히면, 아스펠라 양도 분명 이해해줄 것입니다. 펠킨의 말에 칼리우스가 듣기만 해도 피곤한 듯 안와 부근을 손바닥으로 꾹 내리 눌렀다.
펠킨이 뭘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그 저주를 내린 장본인이 아스펠라가 그토록 따르던 비르가란 말이다. 그 모든 이야기들을 빠짐없이 말을 했을 때도 아스펠라가 이해를 해줄 것이라고?
산신 토벌이라는 것은, 그저 단순히 신을 죽이고 산에서 쫓아내는 걸로만 알고 있는 이들이 대다수다. 아마 아스펠라도 그저 단순히 죽이기만 한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아니다. 그게 아니란 말이다.
산신 토벌이라는 건, 신을 산 채로 잡아다가 온갖 고문을 하는 거다.
신이 고통을 받을 때마다 눈물마냥 떨어지는 결정체가 있는데 그것들을 한데 모아 새로운 무기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눈물과도 같은 결정체는 투명한 유리 같기도 했으나 매우 단단했다. 날카롭게 가공하면 세상 모든 것을 뚫을 수 있었고, 방패처럼 넓게 가공하면 그 어떤 뾰족한 것들도 막아냈다.
또한 각 산의 신마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데, 그 결정체를 통해 신들과 비슷한 능력을 얻어낼 수 있었다.
국왕은 그걸 이용해 나라를 막강하게 만들고 싶어 했다. 그 무기들이라면 어떠한 군대도 막강해질 수 있으리라.
비르가는 그걸 막기 위해 왔다가 죽은 것이다.
아스펠 산의 산신을 놓쳤다 했을 때, 국왕이 얼마나 안타까워했는데.
그건 그를 고문하여 그 결정체를 얼마 얻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아깝군, 아스펠 산신의 능력은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던 국왕에게 칼리우스는 뭐라 대답했던가.
아직 살아있을 수 있으니, 살아있다면 다시 잡으면 된다. 어차피 많이 약해져있을 것이다.
비르가가 자신에게 건 저주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그저 신을 죽이면 저주도 풀리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모든 걸 아스펠라에게 말하라고?
아스펠라가 상처 받을 게 분명하다. 분명 자신을 경멸할 것이다. 끔찍한 눈으로 어떻게 그런 짓을 하고도 자신에게 사랑한다 고백할 수가 있느냐고 물을 것이 분명했다.
칼리우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은 안 돼.”
아스펠라가 나 없이 살 수 없을 정도가 아니라면. 그때가 아니라면 말할 수 없어.
후에 아스펠라가 그의 마음을 받아줄 때. 자신의 마음을 그에게 줄 때. 사랑에서 애증으로 변한다 하더라도 그때 말해야 한다.
호감은 식기 쉬우나, 사랑은 애증으로 바뀌잖나. 증오를 해도 그 앞에 사랑하는 그 마음은 계속 있지 않은가. 그렇게 된다면 쉽게 그를 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래. 아스펠라가 자신을 사랑하게만 만든다면, 최악은 피할 수 있다.
칼리우스에게 있어 가장 최악인 것은 아스펠라가 그를 버리는 것뿐이니까.
“각하…….”
“혹시라도 아스펠라에게 허튼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펠킨.”
아무리 자네라도, 그건 용납할 수 없으니까.
칼리우스의 말에 펠킨이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이내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칼리우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스펠라를 보러 가야겠어.”
울던 그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는지, 결국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의 방으로 이어지는 동쪽 복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펠킨은 그런 칼리우스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칼리우스를 모신지 16년 째. 아주 어렸을 때부터 칼리우스는 영특한 아이였다. 영특하고 용맹한 아이가 권력을 쥐고 자라니 더할 나위 없이 대단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펠킨은 칼리우스가 내린 모든 결정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제로 칼리우스의 선택들은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과연 이번에도 그럴지는 모르겠다.
펠킨이 처음으로 칼리우스의 선택이 틀릴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코 그걸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자신이 그 둘 사이에 낄 자격이 없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펠킨이 할 일은 그저 칼리우스에게 충성하는 것뿐.
***
아스펠라는 방으로 오자마자 그대로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새 주인의 심경을 눈치챈 것인지 하양이가 꼬물꼬물 이불을 비집고 들어와 아스펠라의 얼굴을 마구 핥았다.
“저리 가, 하양아. 지금 놀아줄 기분이 아니야. 미안해.”
[아스펠라! 아스펠라! 왜 우는 건데!]
“아직 안 울었어.”
[그치만 눈이 빨갛고 눈물이 맺혀있는데! 내가 맞춰볼게. 그 무서운 남자가 그랬지!]
내가 그놈 아주 혼내줄려고 왕왕 짖었는데, 근데 엄청 세더라고! 눈도 엄청 새빨갛고! 엄청 무서워! 엄청 나쁜 놈이지! 하며 하양이가 꼬리를 휙휙 흔들어댔다.
[아스펠라, 진짜루 우는 거야?]
“안 운다고…….”
[아냐. 내가 봤을 땐 우는 거 같아! 울지 마! 내가 핥아줄게!]
“이씨, 안 운다고 안 울어! 안 운다고! 흐어어엉!”
결국 아스펠라가 온몸을 이불로 돌돌 말아 바위처럼 엎드렸던 몸을 활짝 피며 소리쳤다. 안 운다니까! 하양아, 너 왜 자꾸 그렇게 말해! 나 진짜 울 것 같다고! 아스펠라가 그렇게 소리치며 결국 와앙 울음을 터트렸다.
“씨, 그래 나 운다! 울어! 막 우는 중이야!”
결국 인정하고 말았다. 이제 속이 후련하냐면서 작은 강아지에게 괜히 화풀이를 했다. 봐, 나 운다고 됐지 하양아, 그렇게 말하는데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정신 사납게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왕왕 짖던 하양이가 조용해졌다.
아스펠라는 왜 이렇게 조용하냐며 눈을 벅벅 닦고는 하양이를 쳐다봤다. 신나서 아스펠라를 귀찮게 굴던 하양이는 어느새 두툼한 베개 사이로 몸을 숨기곤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너 뭐해? 그렇게 물으려던 아스펠라가 몸을 곧추 세웠다.
“아스펠라.”
“헉.”
뒤에서 낮은 음성이 들렸다. 분명 칼리우스의 목소리였다. 아스펠라는 박쥐처럼 몸에 둘렀던 이불을 다시 제 몸에 뒤집어쓰고 천천히 뒤를 돌았다.
“울었네요.”
칼리우스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아스펠라가 얼른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이게 지금 뭐하는 거냐며 칼리우스가 물었다.
아스펠라는 대체 그가 언제 들어온 것이며, 언제부터 이 꼴을 다 본 것인지, 창피함에 얼굴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야속함에 괜히 하양이를 쳐다보는데, 하양이는 마치 잘못한 강아지가 주인 눈치를 보는 양 슬쩍 고개를 돌린 채로 아스펠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스펠라. 얼굴 좀 보여주세요.”
“시, 싫어요.”
어떻게 이 얼굴을 보여주나.
아스펠라는 절대 안 된다며 몸을 더 작게 말았다. 칼리우스에게는 그 모습이 강가에 떠밀려온 조약돌 같았다. 작고 하찮은데 집에 들고 가고 싶은. 아스펠라는 몸집도 작은 편이었던지라 몸을 둥글게 마니 침대 위에 베개와 얼추 비슷한 크기였다.
그 말인즉슨, 그 정도는 칼리우스가 집어들 수 있다는 말이었다.
번쩍 몸이 들림과 동시에 이불이 젖혀졌다.
“꺅!”
“이러다 숨 막혀서 졸도합니다.”
“그럴 일은 없어요.”
아스펠라는 산발이 된 제 머리카락을 얼른 정리하며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도대체 칼리우스는 제 방에 왜 찾아온 것인가. 아직도 화가 안 풀려 그렇게 노려보고, 한숨까지 내쉬었으면서.
“얼굴이 이렇게 벌건데도요?”
“…….”
칼리우스의 커다란 손이 아스펠라의 얼굴을 감쌌다. 아스펠라는 두꺼운 이불 아래 얼굴을 묻고 그 상태로 엉엉 울어 빨개질 대로 빨개진 상태였다.
아직 커다란 눈동자에서는 미처 떨어지지 못한 눈물들이 방울져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칼리우스는 그런 아스펠라의 모습에 또 괜히 마음이 약해졌다.
아스펠라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얼른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저 때문에 화가 났죠, 죄송해요. 제가 사실은 이러한 일이 있어 사람을 믿지 못하는데, 그래서 대공이 아무리 제게 진심인 척 다가와도 믿지 못할 거 같아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믿고 싶기도 한데, 믿기지도 않아요.
그런 말을 하면 살다가 이렇게 답답한 여자는 처음이라며 질릴 것이 분명했다.
아스펠라가 코를 훌쩍이며 입을 달싹이는데, 칼리우스가 먼저 말했다.
“내가 먼저 말할게요, 아스펠라.”
아스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이 흐리멍텅하여 비비적대자 칼리우스가 그러지 말라며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리곤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제발 답답하든 이기적이든 하나만 하라고 하려나?
“미안합니다. 아스펠라.”
“……왜 칼리우스가 사과하세요?”
예상 밖의 말이 나와 아스펠라가 당황했다. 칼리우스가 미안해할 것은 없었다. 산신 토벌을 한 장본인이지만, 그건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고 이해하려 했다. 비르가도 그런 이유로 인간을 미워하지 말라하지 않았던가.
또한 그는 처음부터 아스펠라에게 제 마음을 솔직하게 말했고, 아스펠라를 위해 모든 편의를 봐줬다.
그걸 자꾸 애매하게 반응하며 답답하게 굴고, 그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스펠라 자신이었다. 그러니 사과를 할 거면 자신이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아스펠라의 질문에 칼리우스가 잠시 그녀를 묵묵히 내려다봤다.
“내가 잘못한 거니까요. 큰 소리를 내 미안합니다. 내 감정을 너무 강요하기만 했네요. 당신한테 적응할 시간을 줬어야 했는데.”
그렇게 말한 칼리우스가 말을 이었다.
“아스펠라. 날 무서워하는 걸 알고 있습니다.”
무서워?
내가 칼리우스를 무서워하는 거였나? 아스펠라가 눈을 깜빡였다. 기다란 금색 속눈썹 사이사이 눈물이 끼었다. 칼리우스는 아스펠라의 얼굴을 감싼 채로 엄지로 그 눈을 꾹 눌러줬다.
“내가 산신 토벌로 많은 신들을 몰아냈으니까요. 그래서 날 믿기 힘들겠죠. 이해합니다. 당신이 날 믿지 못하는 거, 그게 당연한 겁니다.”
“…….”
칼리우스가 이내 아스펠라의 눈에서 손가락을 치웠다. 잠시 그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가 이내 선명해졌다.
“그러니까 기다리겠습니다.”
“…….”
“당신이 날 믿을 수 있을 때까지.”
칼리우스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과거로 돌아가 산신 토벌을 막을 기회가 있더라도 그는 아마 똑같이 산신을 토벌했을 것이다.
신들은 무용하다.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과 발전뿐이니까.
다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아마 더 빨리 아스펠라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를 어떻게든 더 빨리 제 옆에 뒀을 거다.
그러니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더 빨리 그녀에게 모든 걸 털어놓지 않는 걸. 후에 파란을 불러일으킬지는 몰라도, 후회하지 않을 거다.
칼리우스는 그리 생각했다.
그리 생각하며 아스펠라의 이마에 잠시 입을 맞췄다.
“뭐, 뭘 하신…….”
아스펠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팅팅 부어 동그랗게 뜬 눈이 이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작은 손으로 그가 입 맞춘 이마가 간지러운 듯, 당황스러운 듯 문질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계속 이 자리에 있겠다는 건 아닙니다.”
아스펠라가 나한테 올 생각이 없으면, 오게끔 만들어야죠. 줄로 잡아당겨야지 않겠습니까. 생긋 웃으며 칼리우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무게에 매트리스가 크게 움직였다. 아스펠라는 몸이 기우뚱 침대 위로 엎어졌고, 칼리우스는 아직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해 멍한 아스펠라를 보며 픽 웃고는 방을 나갔다.
아스펠라는 방금 뭐가 제 이마에 닿은 건지 한참 생각했다.
물론 뽀뽀를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비르가는 종종 어린 아스펠라의 오동통한 볼에 입을 맞춰주거나, 이마에 입을 맞춰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도 했었다.
다른 동물 친구들도 아스펠라에게 종종 뽀뽀를 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깜장이는 혀로 얼굴을 막 핥아대기까지 하는데. 평소 동물들과 끌어안는 것이 익숙해 스킨십에는 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칼리우스가 이마에 입을 맞췄을 때는 아까 전 서러워서 나오던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이마 부근이 열이 나는 것처럼 뜨겁다.
[아스펠라. 얼굴 엄청 빨개!]
숨어 있던 하양이가 슬그머니 다가와 아스펠라의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아까 전 칼리우스가 입 맞췄던 이마 부근도 할짝대며 아스펠라의 얼굴 전체를 축축하게 만들었다.
살갗이 닿는 건 익숙한 일인데.
왜 이렇게 얼굴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가.
칼리우스의 입맞춤은 비르가와 다른 동물들과는 결이 달랐다. 불순한 목적이 다분한 것이 느껴지는데도 거부할 수 없었고, 또 그 불순함에 불쾌감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아스펠라가 콩닥 콩닥 뛰는 제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스펠라. 내가 도와주마. 다시는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그 감정을 도려내주마. 그리하면 인간에게 쉽게 마음을 주지 않을 거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다. 미안하구나, 아스펠라. 미안해. 내가 어리석었다. 인간을 믿는 것이 아니었는데.」
분명 비르가가 그런 감정들이 생기지 않도록, 아스펠라의 마음 하나를 가져가지 않았던가.
그로 인해 아스펠라는 인간에게 깊은 정을 가지지 않도록, 그리 된 것 아니었던가?
설마 비르가가 죽어 그 효력이 약해진 걸까.
아스펠라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울림에 설렘을 느끼기보다는, 두려움을 먼저 느꼈다.
***
먹구름이 달을 가려 칠흑과도 같은 밤이 찾아왔다.
커다란 단지가 달구지에 실려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 안에서 어찌나 고약한 악취가 나는지, 이를 운반하던 사제들이 수건으로 코를 막고도 헛구역질을 계속 해댔다.
이내 그들은 달구지를 들고 왕궁 뒷문으로 들어갔다.
뒷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악취 나는 단지에 기함을 하며 그들을 멈춰 세웠다. 사제들은 그들에게 뭔가를 건넸다. 이미 서로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 형식을 갖추기 위함이었다.
“이게 진짜 그거요?”
병사 하나가 문서를 읽고선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사제들에게 물었다. 하나같이 망토를 뒤집어 써 얼굴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 지난 몇 년간 몇 번이나 이곳을 드나들었는지 알고 있었기에 따로 얼굴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병사의 질문에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한 번 봐도 되겠소?”
“놀라지 않을 자신 있으면 그리하시오.”
그 말에 허세 가득 찬 병사 하나가 얼른 달구지 위로 올라가 그 안의 가죽 뚜껑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악취가 너무 심해 눈이 아릴 정도였다.
구멍 안을 한참 들여다보던 병사가 이내 흐어어억! 비명을 삼키며 뒤로 나가 떨어졌다. 그러자 사제들이 킥킥 비웃었다. 병사들을 얼른 지나가라는 듯 길을 비켰다.
다른 병사가 나가떨어진 병사를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이봐, 진짜 그게 맞아?”
바닥에 엎어졌던 병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국왕 전하께서 단단히 미치셨군. 진짜로 저걸 만드셨을 줄이야.”
“진짜로 그게 맞냐고.”
“맞아. 맞다고. 세상에, 자네. 자네도 봤어야해. 그건 틀림없는…….”
“틀림없는 뭐? 왜 말을 하다가 마는가?”
“……저런 건 이승에 불러와서는 안 되는 거였어. 국왕 전하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지.”
횡설수설하는 병사의 말에 동료가 얼른 그에게 이만 자리를 비키자며 끌고 갔다. 이제 곧 진짜 뒷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교대를 마치고 돌아올 시간이다.
“우리는 오늘 이곳에 온 것이 들키면 안 되잖나.”
“얼른 갑세.”
그의 말에 병사는 달구지가 자취를 감춘 쪽을 쳐다봤다.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마냥 그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그런 게 이승에 내려와서는 안 되는데.
그가 그리 중얼거렸다.
한편 달구지를 이끌던 사제들은 곧 마중 나온 병사들과 함께 별궁으로 갔다. 별궁이라 하지만, 선왕이 승하한 이후 쓰이지 않는 폐궁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도르래로 단지를 내린 후 지하로 내려갔다.
그 아래에서는 파베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국왕 파베스를 보자 그들이 얼른 넙죽 인사를 올렸다.
파베스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얼른 단지 쪽으로 향했다. 절로 고개가 돌아가며 인상이 찌푸려지는 악취가 꽃향기라도 되는 듯 그가 황홀하게 그 냄새를 맡았다.
“성공했나 보군.”
“예, 전하.”
그가 파리마냥 손을 문지르며 기대에 벅찬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수많은 실패를 거치고 난 뒤에야 성공한 것이다. 이걸 만들기 위해 그동안 몇 명의 사제와 주술사들이 죽어나갔던가. 온갖 고대 문헌을 찾아보고 거기 나온 공식을 따라 몇 번의 실험을 강행했던가.
그 부작용의 여파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그로 인해 파베스는 뭘 잃어야 했는지.
이제 그런 것들을 보상받을 때가 되었다. 자신의 부모와 맞바꿔 인간이 넘지 말아야 할 마지막 선까지 넘으며 얻으려한 힘을 드디어 거머쥘 때가 된 것이다.
“이걸 이용하면 정말 불사의 군대를 만들 수 있다는 거지?”
“이놈은 아스펠 산의 산신을 강령한 것입니다. 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신을 부정 타게 만들었으니, 이제 이걸 재료 삼아 불사체를 만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불사체를 만들어 봉인을 풀기만 하면 되는 거로군.”
산은 신의 육체. 신이 산을 지키는 것이 아닌 신 자체가 산인 거다. 산의 영혼이 실체화 한 것이 산신이며, 그 영혼을 죽이면 산은 그저 껍데기가 될 뿐.
영혼이 부정 타버린 산은 이전처럼 그 힘을 내뿜지 못한다. 그러니 그들이 꽁꽁 숨기고 있는 봉인 역시 얼마가지 않아 모습을 드러낼 것이었다.
“헌데 전하.”
“뭔가.”
“아무래도, 아스펠 산에는 신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뭔 소린가. 어찌 산에 두 명의 신이 있을 수가 있어. 불가능한 일이다.”
영혼이 두 개 붙은 샴이라도 된다는 것인가. 파베스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자 사제들이 말했다.
“교주님께서 분명 느끼셨다합니다. 그날, 분명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시선이 있었다 했습니다. 그건 짐승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자네들 말이 맞다면, 그럼 지금 아스펠 산의 신이 버젓이 살아 있다는 것 아니냐.”
그렇게 되면 제대로 된 필멸신이 만들어지지 않겠구나. 아직 산을 보호하는 신이 하나 더 있는 것이니. 파베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마 산이 불타면서, 다른 신 하나도 같이 내상을 입었을 겁니다. 티가 날 것입니다.”
“어떻게 티가 난다는 건가.”
“아마 스스로를 숨기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껏 그 힘을 숨기고 숨어왔을 텐데, 산이라는 육체가 망가지면서 그 힘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할 테지요.”
깨진 독에서는 계속해서 물이 흐르지 않겠습니까.
분명 눈에 띌 것이라며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그들이 말했다.
“산신들은 인간으로 변할 수 있다지?”
“예. 영혼이니 짐승으로든 인간으로든 모두 변할 수 있지요.”
“산은 죄 불에 탔으니, 인간으로 변해 무리에 섞여 사는 것이 안전하다 생각할지도 모르겠군.”
능력을 주체 못하는 인간은 분명 눈에 띄기 마련일 텐데, 아직까지는 악착같이 금 간 몸으로 힘을 막고 있는 건지, 아니면 누가 보호해주고 있는 건지.
“급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하. 어차피 모든 것은 전하의 뜻대로 흘러갈 것입니다.”
이제 곧 신이 되실 분 아니십니까.
사제들의 말에 파베스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나는 곧 봉인을 풀고, 신이 될 자니까.”
그러나 아스펠 산의 신이 하나 더 있다는 걸 알아버렸으니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
그날 밤 아스펠라는 꿈을 꿨다. 꿈에서는 비르가가 나왔다.
비르가와의 재회는 이전에도 몇 번 꿈에서 했던지라 그렇게 애달프지는 않았다. 아스펠라는 싱그러웠던 아스펠 산의 언덕을 거닐었다. 익숙한 언덕을 올라가자 광활한 초원과도 같은 꽃밭이 펼쳐졌다. 드넓은 밭 중간지대쯤, 노인의 모습을 한 비르가가 앉아 있었다.
비르가가 아스펠라에게 이리 오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구나.」
‘비르가. 아스펠 산이 불타버렸어요.’
「그래. 알고 있단다.」
‘영감을 비롯한 다른 친구들도 모두 피신을 갔어요. 다른 산은 안전할까요?’
「글쎄, 우두머리 산신들은 대부분 죽고 그 아래 작은 신들만 남아서 확실하진 않구나.」
아스펠라는 익숙하게 비르가의 무릎에 누웠다.
온통 타버린 현실과는 달리 꿈속 아스펠 산은 생기가 푸릇푸릇 아지랑이 마냥 올라오는 곳이었다.
비르가가 아스펠라의 긴 금색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스펠라. 넌 산의 아이임을 잊지 않았겠지.」
‘네. 언젠가는 다시 산으로 돌아갈 거예요. 평생 이곳에서 지낼 생각 없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나는 네가 산의 아이임을 잊지 말라했을 뿐, 이곳에서 지내는 것에 간섭할 생각은 없단다.」
‘…….’
아스펠라는 비르가의 말에 괜히 딴청 피우며 눈을 꼭 감았다. 비르가가 아스펠라를 내려다봤다. 원래 신의 영혼은 산맥들이 이리저리 뻗어있는 것과 같이 여러 갈래의 영혼으로 나뉘어져 있다.
비르가는 자신의 영혼 일부를 아스펠라에게 주었기 때문에, 아스펠라 안 어딘가에 영원히 비르가도 함께 할 것이다.
아스펠라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거대한 아스펠 산을 다스리면서 말이다.
「아스펠라.」
‘네.’
「누군가 나의 영혼 일부를 강령했다.」
그 말에 아스펠라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비르가의 영혼을 강령했다니. 신의 영혼을 강령했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인가.
‘지금, 비르가의 영혼이 어딘가에 빙의되었다는 말인가요?’
「그래.」
‘누가 대체 그런 짓을 한 거죠?’
비르가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모르겠구나. 꽤나 강력한 주술사가 탐색을 하지 못하도록 결계를 몇 개고 쳐놨다.」
아스펠라 안에 깃든 비르가의 영혼은 지금 아스펠라가 그들 눈에 띄지 않도록 숨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또한 본체인 아스펠 산이 그리 타버렸으니, 비르가는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아스펠라. 나는 오로지 네 안에서만 존재해야 하는 걸 알고 있지? 널 예전만큼 온전히 지키지 못 한단다. 이제는 네가 스스로를 지켜야 해.」
‘비르가. 비르가는 예언가이기도 하잖아요. 앞으로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질지 말해주세요.’
「그럴 수는 없다, 아스펠라. 모든 걸 다 알고 맞이할 수는 없어. 내가 미래를 보는 것은 그저 겸허히 받아들이기 위함이다. 아스펠라, 너는 인간이기도 해. 인간들은 그 거대한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할 거다.」
그때 깨닫지 않았느냐.
비르가의 말에 아스펠라가 반성하는 듯 고개를 떨궜다. 비르가가 손을 내밀어 아스펠라의 턱을 제 쪽으로 들어올렸다.
비르가는 아스펠라에게 두 번의 생을 줬다.
원래 그래서는 안됐었는데, 너무 오래 인간의 몸으로 살아와서 감정마저 인간처럼 변한 것이었을까. 아스펠라는 원래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완전한 인간도, 완전한 신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
비르가는 아스펠라에게 두 번의 생을 줄 때, 자신이 한 짓으로 인해 초래될 모든 일들을 미리 엿봤다. 알고서도 아스펠라를 살려준 이유는.
「아스펠라. 널 아주 많이 사랑한단다.」
결국 비르가가 인간의 감정을 가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다시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포대에 싸여 버려진 갓난아기를 보는 순간, 그 아이를 들어 올리는 순간. 비르가는 자신이 이 아이를 위해 죽음도 불사할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저도 비르가를 엄청 사랑해요.’
「내가 널 사랑함은 믿어 의심치 않느냐.」
‘당연하죠!’
「헌데, 왜 에르윈 대공은 믿질 않느냐.」
아스펠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비르가! 그런 건 왜 물어보시는 건데요! 대체 그건 어떻게 아신 거예요?! 하며 소리쳤다. 말괄량이 딸이 이웃집 소년과 간질간질한 사이라는 걸 전해들은 엄마 마냥, 비르가가 실실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고, 네가 나인데. 내가 어찌 모르겠느냐. 에르윈 대공이 이 맨질한 이마에 입도 맞추지 않았느냐.」
‘비르가!’
「하하하!」
‘너무해요. 제가 왜 그러는지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 비르가도 그랬잖아요. 인간은 믿는 게 아니라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면서요. 괜히 조금이라도 기대했다가 결국 상처받는 건 저일 텐데. 싫어요. 그런 건.’
아스펠라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비르가는 그런 아스펠라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뭐든 마음 가는 대로 해라. 아스펠라. 그렇게 일어나지도 않을 일로 겁먹어서야 쓰겠느냐.」
날 보렴. 내게 그렇게 말은 했지만, 결국 나도 인간인 너와 함께하지 않았니.
너는 사람을 가릴 줄 알아야 한단다. 그때야 네가 하도 이놈 저놈 정을 주니 걱정되어 한 말이지. 이렇게 그 누구에게도 마음 주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때의 넌 먹을 것을 주면 따라가는 똥강아지들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
‘비르가!’
아스펠라가 씩씩 성을 냈다. 그래. 원래 이게 비르가였지. 비르가는 신이면서도 어쩜 이렇게 장난도 많고 짓궂은지 모를 정도로 아스펠라 골리는 걸 좋아했었다.
「살다 보면 스스로도 이해 못할 선택을 하기도 한단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다른 산신들도 마찬가지야. 가끔은 그런 선택에 져주기도 해야지.」
‘왜요. 끝이 안 좋을 게 뻔한데.’
「허허, 미래도 못 보는 것이 말은 잘하는 구나. 이리 염세적인 것은 너구리 영감한테 배운 건지.」
비르가가 아스펠라의 코를 쭉 잡아당겼다.
「벌써부터 오랜 세월을 산 신처럼 굴지 마라. 평생 그 작은 오두막에서 틀어박혀 살라고 내 널 살린 줄 아느냐.」
새로운 것이 궁금해지지 않았느냐.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말았으니 배우고 싶겠지. 비르가의 말에 아스펠라가 입을 꾹 다물었다.
허면 그리해라.
너희는 흐르는 물과도 같지 않느냐. 바다로 갈지 강으로 갈지, 혹은 그대로 고여 썩은 웅덩이가 될지는 모두 각자가 정하는 거다.
「너무 갇혀 살지 말거라. 아스펠라. 내가 널 이렇게 만든 것만 같아 미안하구나.」
그 말에 아스펠라가 그렇지 않다며 비르가의 손을 잡았다.
비르가의 손은 차가웠다. 매우 차가워 오랜 시간 잡고 있으면 손이 시려울 정도였다. 비르가의 손은 원래 항상 차가웠다.
어디 손만 차갑던가. 몸에서는 냉기 비슷한 것이 나와 여름에야 좋았지만 겨울이 되면 아스펠라 혼자 온몸에 이불을 꽁꽁 싸매고 비르가와 떨어져 지내야 했다.
비르가가 잠시 제 손을 맞잡은 아스펠라의 손을 내려다봤다.
「아스펠라. 손이 조금 차가워진 듯하구나.」
‘그래요? 전 잘 못 느끼겠는데.’
「……이제 그만 돌아가 보거라.」
비르가의 말에 아스펠라는 조금만 더 같이 있자며 응석부렸다. 비르가는 아스펠라에게 약했다. 그래. 그러자꾸나. 아스펠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비르가가 말했다.
***
항상 하양이의 혓바닥을 보는 것으로 아스펠라는 아침을 맞이한다. 침 범벅이 된 얼굴로 부스스 잠에서 깨면 앨리스가 세숫대야를 들고 들어왔다. 그럼 아스펠라는 침대에 앉아 얼굴을 한 번 씻어 내리고는, 앨리스가 건넨 우유를 한 컵 마신다.
그런 뒤에는 시녀들이 와서 아스펠라에게 드레스를 고르도록 했다. 드레스를 고르고,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빗어 잘 정돈하면 식당으로 내려간다.
이제 이런 것쯤에는 익숙해져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물론, 상석에 앉은 칼리우스의 실루엣을 보자마자 삐그덕거리며 걷는 통에 엎어질 뻔 했지만, 다행히 앨리스가 얼른 잡아준 덕에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앨리스가 의자를 빼주면 의자에 앉아 포크와 나이프를 대충 쥐고 제 앞에 놓인 고기를 썰면 되는 것 아닌가. 아직까지 잘 하고 있다. 어제의 일 같은 거, 전혀 마음 두고 있지 않다는 듯 자연스레 잘 넘기고 있다.
물론 그건 아스펠라만의 생각이었다.
칼리우스는 이미 식당에 들어오다 말고 멈칫하곤, 이내 대나무마냥 뻣뻣하게 들어오는 아스펠라를 보고 웃음을 참았다.
이내 잘 넘기고 의자에 앉는 듯하더니, 그대로 커트러리를 주먹 쥔 채로 집고는 어색하게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칼리우스는 그 모양새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아스펠라 맞은편 일카이를 쳐다봤다. 포크와 나이프는 번쩍번쩍 빛이 났다. 그야 그걸 쓰지 않고 손으로 고기를 잡아 뜯어대니 뭐가 묻을 일이 없을 것이다.
그제야 칼리우스는 난장판이 된 자신의 식탁이 눈에 들어왔다.
사냥꾼들은 허겁지겁 손으로 닭다리를 잡고, 아스펠라는 나름 예의 차려 커트러리를 쓰려고는 하는데, 제대로 쥐는 법도 몰라 그릇 긁는 소리가 났다.
끼기기, 끼기긱, 끽, 끼긱.
평소에도 이렇게 식탁 예절이 개판이었던 건가. 왜 이제야 눈에 들어왔지? 칼리우스가 뒤에 있는 펠킨을 불러다가 물었다.
“원래 이렇게 식탁이 시끄러웠었나?”
“예, 각하. 그동안 아스펠라 양만 보시느라 모르셨군요.”
사냥꾼들이야 어차피 언젠가는 나갈 이들이라 그렇다 쳐도. 아스펠라에게는 가정교사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리우스가 무슨 생각 하는 건지 얼추 예상한 펠킨이 물었다.
“가정교사를 데려올까요? 기초부터 가르칠만한 여인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러도록 해라.”
아스펠라가 한창 질긴 고기를 자르려고 할 때였다. 여전히 그릇에서는 끼긱, 끽,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보다 못한 칼리우스가 결국 아스펠라의 그릇을 가져가 직접 고기를 썰었다.
자신이 하던 것과는 달리 정말 간결하고, 조용히, 차분하게 썰리는 고기를 보며 아스펠라가 멋쩍은 듯 머리카락을 돌돌 말았다.
이내 칼리우스가 다시 조용히 아스펠라 앞에 그릇을 놨다. 그릇 위의 고기는 정확히 정사각형으로 네모 반듯하게 잘려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던 일카이가 조만간 아스펠라에게 물었다.
“아스펠라. 하양이랑 같이 훈련하는데 따라올래? 이제 슬슬 원정 훈련도 갈 생각이라 너 심심하면―”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카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칼리우스가 가로챘다.
“유감스럽게도 아스펠라는 앞으로 교육이 있어서 그건 안 될 것 같군.”
칼리우스의 말에 일카이가 훽 고개를 돌려 그를 한번 흘겨보곤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아스펠라는 처음 듣는다는 소리였다.
“무슨 교육이요?”
“한 달 뒤에 연회가 열립니다. 단순한 귀족들의 친목을 위한 연회라면 신경 안 쓰겠는데. 하필 사냥제가 끝나는 직후에 왕실에서 열리는 연회인지라.”
아스펠라는 연회라는 단어를 곱씹다가, 이내 자신은 그런 자리와 어울리지도 않고 부담스러우니 참석하지 않겠다 말했다.
그러자 칼리우스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거기서 아스펠라 양을 정식으로 소개하지 않으면, 귀족들은 저들 좋을 대로 떠들어댈 텐데요. 아마 대공의 첩이라든지, 정부라든지. 뭐 그런 식으로 떠들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일카이가 이쪽도 할 말은 있다는 듯 끼어들었다.
“아니 여기 약혼자가 버젓이 있는데―”
하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일카이의 말은 칼리우스에게 그 어떤 타격도 주지 못했다. 칼리우스는 산뜻하게 일카이의 말을 무시하며 아예 아스펠라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안 그래도 이상한 말이 나돌고 있는데, 난처한 제 입장도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아스펠라.”
그렇게 말한 칼리우스가 스캔들은 딱 질색이라며 말하자 뒤에서 펠킨이 가만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각하께서 ‘밑밥’까지 까시는군. 대단한 정성이시다.
아스펠라는 귀족들이 자신의 존재를 벌써 알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믿지 못하는 듯 물었다.
“벌써 말이 나돈다고요? 어떻게 제 존재를 이렇게나 빨리…….”
“모두들 대공가에 관심이 많으니까요.”
칼리우스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실제로 귀족들은 에르윈 대공가의 모든 것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칼리우스가 뭘 먹고, 뭘 입고, 뭘 싫어하고 좋아하는지 등은 귀족들 사이에서 돌고 돌며 회자된다. 그야 튀니아의 젊은 대공 아닌가.
그의 영광은 오래 갈 것이고, 그러니 다들 그 영광에 한줄기 빛이라도 받고 싶어 하거나, 혹은 그 영광을 제 것으로 빼앗고 싶어 하거나.
호시탐탐 칼리우스에게서 트집 잡을 거리를 찾는 하이에나도 있는 반면, 그의 모든 것을 따라하거나 그의 눈에 들고 싶어 하는 아첨꾼도 있었다.
대공 성에 웬 여자가 드나든다는 소문은 이미 파다했다. 아스펠라가 이곳에서 얹혀 살게 된 이후부터는 그 여자가 대공과 동거를 한다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그것도, 그렇고 그런 의미로.
일카이가 그 부분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의 대공에 대한 관심은 선망을 넘어 집착과 광기에 가깝기도 했다. 일카이 역시 귀족들 가문에 불려간 요 며칠간 제일 많은 질문을 받은 것이 그 성에 진짜 대공의 여자가 사냐는 것이었다.
괜히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아 일카이는 모르쇠로 잡아뗐지만, 아마 그럴수록 소문은 점점 더 몸집을 불릴 게 뻔했다.
자신 때문에 스캔들에 시달릴 칼리우스를 생각하자 아스펠라가 미안한 듯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너무 미안해하진 마세요, 아스펠라. 그럴 각오도 없이 그대를 내가 이곳에서 지내게 했겠습니까. 다만, 계속 숨겨두는 것보단 정식으로 소개하는 게 더 이상의 소문을 만들지 않을 것 같아 내린 결정입니다.”
펠킨은 그런 칼리우스의 말에 참, 말은 잘하셔. 하며 혀를 내둘렀다.
애초에 칼리우스는 그걸 노리고 아스펠라를 저택에 들인 것 아니던가?
어차피 귀족들은 아스펠라의 존재를 물고 늘어질 거고, 아스펠라는 앞으로의 안전을 위해 계속 이곳에서 지내는 수밖에 없을 거다.
대공 성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귀족들에게는 이미 좋은 먹잇감이 된 것이거늘.
“네. 그럼 그렇게 할게요. 교육은 언제부터 하는데요?”
아스펠라는 아까 전 그릇을 썰어버릴 듯한 행동이 귀족들의 놀림감이 될 거라는 걸 알았다. 내가 비웃음 당하는 건 상관없지만, 그럼 날 들인 칼리우스도 같이 비웃음 사는 거 아닐까? 그런 폐는 절대 끼쳐서는 안 되지.
비장하게 마음을 먹었다. 귀족들에게 흠을 잡히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칼리우스에게 보답하는 길이라면.
언제부터 교육을 하냐 묻는 아스펠라에게 칼리우스가 즉답했다.
“오늘 당장부터요.”
그러자 펠킨이 조금 당황하여 칼리우스에게 물었다.
“저, 각하. 교사가 오늘 당장 올 수 있을지는―”
“아. 가정교사를 따로 구할 필요 없다.”
“네?”
“내가 직접 가르치지.”
“예?!”
펠킨이 저도 모르게 큰소리 내어 물었다가 얼른 입을 합, 닫아버렸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대공 각하. 각하께서 아스펠라 양을 교육하신다니요.
그 어떤 선례에도, 가주가. 귀족이, 심지어 대공이 평민을 교육하는 일은 없었다.
“딱히 문제 될 건 없지. 나만큼 예법을 잘 아는 이가 또 있겠는가. 굳이 귀찮게 가정교사를 구할 필요는 없어.”
듣고 보니 또 맞는 말이었다. 칼리우스는 대공가의 후계자로 완벽한 교육을 받고 자란 이였다. 펠킨이 그래도 되는 것이냐며 고민하는 동안 아스펠라가 웬일로 칼리우스의 말에 동조했다.
“네. 저 때문에 굳이 돈까지 쓰시면서 선생님을 구할 필요는 없으세요. 저한테 그렇게 돈 쓰지 마세요. 지금도 충분히 큰 빚을 지고 있으니까요.”
그런 아스펠라의 말에 펠킨도, 일카이도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이 돈이 없어서 가정교사를 안 부르고 직접 가르치겠다고 하는 거겠는가. 펠킨은 언젠가 아스펠라에게 기회가 된다면 대공가의 금고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 넓은 방 안에 가득 차고도 남아 지하에 던져놓다시피 한 것이 금화이며 보석이니, 제발 그런 말씀 마시라고.
일카이는 지금 당장 아스펠라 귀에 대고 소리치고 싶었다. 지금 대공이 아스펠라에게 쓰는 모든 돈은 정말이지 푼돈에 가까운 것이며, 그 의도에는 모두 불순한 마음이 있는 것이라고.
너만 모른다, 너만. 이 모든 게 대공의 계략인 걸 너만 몰라.
일카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해해주니 고맙군요, 아스펠라.”
칼리우스는 아스펠라가 눈치가 없어, 대공가의 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도 못할 정도로 돈에 무지하여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아스펠라는 ‘돈이 정말 많다’라는 의미가 ‘금화가 한 박스’ 혹은 정말 많아 봐야 ‘두 박스’ 정도라고만 생각하는 편이었다.
약초를 팔아 최소한의 살림살이만 하는데, 동화 혹은 이따금 은화 몇 닢 말고는 본 적이 없을 테니 말이다. 심지어 아스펠라는 살면서 은화를 봤을 때가 맨 처음 칼리우스가 준 옷가지들을 모두 되 팔았을 때뿐이었다.
일평생 산에서만 살던 이가 귀족들은 계략 속에 살아간다는 걸 어떻게 알겠는가.
***
식사를 마친 아스펠라는 칼리우스와 함께 그의 서재로 올라가 얼추 어떤 교육부터 시작할지 얘기하기로 했다.
물론 그건 칼리우스의 명분이었고 실제로는 아스펠라가 일카이를 쫄래쫄래 따라가지 못하도록 얼른 수를 쓴 것뿐이다.
일카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열의를 보이는 아스펠라의 모습에 전의를 상실한 듯 더 이상 별말이 없었다. 대신 아스펠라의 수업에 끼려는 수작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은근슬쩍 아스펠라 옆에 서서 같이 이층 계단을 올라가려는 일카이의 어깨를 꾹 누르며, 그보다 조금 더 높은 시점에 자리 잡은 칼리우스가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냥제에서 국왕의 눈에 들어야 앞으로도 그 명성을 유지할 테니, 자네들은 모의 훈련장에 가서 연습이라도 하는 건 어떻겠는가. 그쪽 지형이라도 외워둔다던지.”
그러자 일카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받아쳤다.
“튀니아의 모든 산 지형들은 일일이 꿰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저도 기본적인 예절 교육을 받아야 각하의 명성에 먹칠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아까 전에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일카이의 말에 칼리우스가 초승달처럼 눈을 휘며 뒤쪽의 사냥꾼들을 불렀다.
“자네들, 일전에 보니 무기들이 낡은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펠킨을 불렀다.
“펠킨. 일카이 경을 금고로 안내해라. 내 사냥 팀의 무기가 낡은 꼴은 못 보겠으니까.”
칼리우스는 마치 메시아라도 된 양 사냥꾼들에게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 기회에 필요한 것들 모두 사들이게나. 금액 걱정은 하지 말고.”
그의 말에 사냥꾼들이 신나서 환호했다. 감사합니다, 대공 각하! 역시 대공 각하가 최고십니다! 칼리우스는 시혜적인 태도로 일카이의 어깨를 다시 한 번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가는 김에 향수 전문점도 가던지.”
“예?”
“그런 향으로는 영 사랑받지 못할 걸세.”
일카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일카이 군이라 할 땐 언제고 존대해주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심지어 향기 지적까지 받았다.
저들 대장이 이런 수모를 겪는데도 뒤에 선 사냥꾼들은 그저 신나서 대장! 빨리 와! 보좌관님께서 금고로 데려가주시겠대! 여기 무기고도 따로 있대, 빨리 와! 하며 불러댔다.
칼리우스는 어서 가지 않고 뭐하냐는 듯 생긋 웃으며 그의 어깨를 슬쩍 밀었다.
일카이는 대공인 그에게 차마 대놓고 화를 내지 못해 그저 분한 듯 주먹 쥔 손을 부들부들 떨다, 이내 겨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감사히 명 받들겠습니다.”
“그래요. 사냥제에서 기대하겠습니다.”
저 가증스러운 존댓말과 미소! 뒤돌아 계단을 내려가던 일카이가 하! 짧은 고함을 내질렀다.
방해꾼을 처리하여 기쁜 듯 칼리우스가 다시 아스펠라를 에스코트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아스펠라는 그런 칼리우스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후각이 정말 예민하신가 봐요.”
“싸구려 향수 냄새는 영 못 맡겠어서.”
그렇게 말한 칼리우스가 아스펠라를 내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일카이 군이 아스펠라에게 잘 보이고 싶나 봅니다. 향수까지 뿌리고.”
아스펠라가 나직하게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그저 남동생 같은 아이죠. 귀여운 친구예요.”
“귀엽다. 하하. 네. 귀엽네요. 같잖고.”
그의 말에 더 이상 대꾸할 수 없었다. 아스펠라는 일카이에게서 그 어떠한 향도 맡지 못했다. 그건 아스펠라의 코가 둔감해서가 아니었다.
일카이는 순간적인 욱함으로 인해 칼리우스의 말에서 비아냥 말고 다른 것은 깨닫지 못한 듯했다.
일카이는 향수를 뿌리지 않는다.
그가 뿌리는 건 오로지 딱 하나.
‘시중에 팔지 않아서 귀족들은 모르는, 사냥꾼들만의 영업 비밀이랄까. 이건 작은 동물들 용이 아니야. 맹수들 용이지. 그중에서도, 마수 정도 되는 녀석들 말이야. 오로지 최상위 포식자들을 자극할 때만 쓰는 일종의 자극제 같은 거지. 인간이나 소동물에게는 무향이고 아무런 영향도 없어.’
아스펠라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칼리우스는 그저 기분 좋은 듯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 있었다.
서재로 들어와 소파에 앉은 아스펠라 맞은편에 칼리우스가 앉으며 물었다.
“말은 교육이라고 하지만, 춤이나 이런 건 배우고 싶지 않다면 미리 말하세요. 억지로 연회에서 춤을 추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뭘 배우나요?”
칼리우스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글쎄요. 그대가 그릇도 같이 썰지 않고 고기를 써는 방법이라던지.”
그의 말에 아스펠라가 달리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손을 꼼지락댔다.
“저, 사실. 배우고 싶은 게 있는데.”
“뭡니까.”
“저 글을 읽을 줄 몰라요. 쓸 줄도 모르고요.”
아스펠라는 글을 배우고 싶다 말했다.
맨 처음 대공의 도서관을 들어갔을 때 높은 천장에 닿을 정도로 수많은 책이 있는 것에 놀랐다. 책이 뭔지는 아는데, 글을 읽고 쓸 줄 몰라 그 책들의 용도를 알 수 없었다.
“고대 언어는 비르가한테 배운 적이 있었는데 알파벳은 배운 적이 없어요. 그래서 배우고 싶어요.”
비르가는 아주 먼 고대부터 아스펠 산에서만 살던 신이었다.
예전에 비르가가 인간 세상에 섞여 살 때는 고대 언어를 썼기에, 아스펠라에게 가르쳐 줬지만 비르가 역시 인간이 새로운 알파벳을 쓸 때부터는 인간 세상에서 벗어나 산속에서만 살았기에 알지 못했다.
아스펠라가 알파벳을 모르는 건 당연했다.
“아스펠라. 고대 언어를 읽을 줄 안다고요?”
“네.”
칼리우스는 그게 더 신기했다. 고대 언어는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워서, 어렸을 적 애 좀 먹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걸 배웠으니 아마 알파벳은 더 쉽게 배울 거다.
“알겠습니다. 글을 알려줄게요. 또 다른 건 배우고 싶은 게 없습니까?”
“식사 예절도요.”
아스펠라가 눈을 도록 굴리며 말했다. 다시는 그릇도 같이 썰고 싶지 않아서요. 아스펠라의 말에 칼리우스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아 진짜 재수 없어!”
일카이가 공중에 대고 소리쳤다. 주어를 밝히지 않아 뭐가 재수 없는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다른 사냥꾼들은 얼추 알 듯도 해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 대공 각하는 역시 씀씀이가 다르셔.”
“그러니까. 아까 보좌관님이 하신 말씀 들었지? 이런 궤짝이 셀 수 없이 많아서 천 박스 이후부터는 안 셌다고.”
“돈이 얼마나 많은 걸까?”
“돈만 많은 거면 부럽지도 않지. 다 가졌…….”
저들끼리 쑥덕대던 사냥꾼들이 일카이의 눈초리에 입을 다물었다. 일카이는 씩씩대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다. 이내 그의 두꺼운 어깨가 축 처졌다.
조합의 대장이긴 해도, 나이는 젤 어리지 않았던가. 이제 열아홉 막 첫사랑을 시작한 청년에게 장난이 너무 심했나 싶어 얼른 동료들이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대장. 그래도 대장은 아직 어리니까.”
“어려도 너무 어리긴 하지만, 그래도 대공을 이길 수 있는 건 그거 하나뿐이지.”
“그치만 대공 말고 다른 사람들이랑 비교했을 땐 결코 빠지지 않아.”
썩 효과 있는 위로는 아니었다. 오히려 일카이의 자존심을 발로 즈려밟는 수준이었다.
일카이도 안다. 자신이 대공에 비해 한참 모자라다는 것을.
그래도 재수 없는 건 재수 없는 거다.
“여우라니까? 아니, 뱀이야 뱀. 구렁이라고 완전.”
일카이의 말에 사냥꾼들이 이번엔 동조를 해줬다.
“능글맞긴 하더라. 바로 보좌관 시켜서 우리 내보내는 실력이 장난 아니긴 했어.”
“우리가 뭐에 혹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아.”
“대공 정도 되는 사람은 사람을 이용할 줄 안다니까.”
그러니까 우린 입다물고 마저 무기나 고르자고. 그렇게 말하며 일카이를 쏙 빼곤 대장장이에게 이것저것 주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직도 할 얘기가 많아보였다.
“아까 전 그 무기고 봤지? 군대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뭔 놈의 총이며 검이며 그렇게나 많을까.”
“아, 왜 대충 얘기 들어보니 집에 뭔 커다란 개를 키운다면서. 아스펠라 양도 그래서 온 거 아니야. 그놈 날뛸 때 대비해서 준비해둔 거겠지.”
저들끼리 고개를 끄덕이던 사냥꾼들은 통 끼질 못하는 일카이가 걱정스러운 듯 다시 한 번 그를 저들쪽으로 잡아당기며 말했다.
“에이, 대장. 너무 기죽지 말고.”
“기 안 죽었어!”
“에이. 그러지 말고 대장도 뭐 하나 주문해. 우리가 또 언제 이만한 돈을 들고 주문 제작을 하겠어? 주문 끝나고 우리 향수점도 갈까? 응?”
그들은 남동생 달래듯 일카이에게 말했다.
요즘 유명한 향수점 내가 알아뒀어. 뒷골목에 있는 덴데 거기서 향수만 맞추면 이성이 아주 줄을 선대. 귀족들도 웃돈 주면서 우선으로 맞춰 달라 할 정도라니까.
그들의 말에 일카이가 잠시 제 몸의 냄새를 킁킁대며 맡았다.
“나한테서 악취 나?”
“아니?”
“근데 왜 그 남자는 그딴 말을 해서 사람 기분 잡치게……!”
일카이가 씩씩대더니 대장장이에게 온갖 주문서를 내밀었다. 조용히 담금질을 하던 대장장이가 꽤 돈이 나갈 텐데? 하며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일카이는 칼리우스에게서 받은 궤짝을 떡하니 올려놨다.
“우리 대공 각하께서 나한테 기대를 거신다는데, 그에 보답은 해야지.”
일카이가 이죽댔다.
칼리우스가 준 금궤는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무겁고 커다래서 그동안 사고 싶었으나 너무 비싸 사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주문 제작하고, 사들여도 반이 넘게 남았다.
칼리우스가 남은 금궤를 본다면 돈을 쥐여줘도 이것밖에 쓰지 못한다니. 이래서 먹어본 이가 그 맛을 안다 하는 거겠지, 하며 비아냥거릴 것 같았다.
일카이는 어째 원하는 모든 무기들을 갖게 되었음에도 더 울적해진 마음으로 대공 성에 들어왔다. 문득 올려다 본 대공 성은 너무나도 커다랬다.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에 일카이의 낯빛은 점점 시궁쥐마냥 회색빛으로 변했다.
‘아씨. 나는 애새끼인데다가 가진 거라곤 쥐뿔도 없는 평범한 사냥꾼인데. 젠장. 이건 완전히 불공평해. 불공평한 거 아니야? 적어도 비슷한 놈들끼리 경쟁을 해야되는 건데 이건 완전히…….’
칼리우스에게 뭔가 대단한 비밀, 그것도 모두가 경악하고 충격에 빠질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일카이가 그보다 잘난 것은 없을 것이다.
패기 좋게 아스펠라의 약혼자 행세를 하며 이곳에 발을 들이긴 했으나 칼리우스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 듯 했다. 아니. 오히려 아닌 것을 눈치채고 저를 놀리려는 듯 보였다.
‘자격지심인가.’
일카이가 푹푹 한숨만 내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 아스펠라가 있었다.
“아스펠라?”
“일카이. 무기들은 잘 샀어?”
“아……대공 나리께서는 돈이 오지게 많더라고. 너 대공의 금고 봤어? 진짜 장난 아니야.”
아스펠라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씩 웃으며 일카이에게 말했다.
“궁금하긴 하네. 그런데 일카이. 너, 저번에 말한 그 자극제 있잖아. 마수들을 불러내려고 쓴다는 그 향수 같은 거. 그거 조금만 얻어갈 수 있을까? 많이 쓰진 않을 거야. 잠깐, 뭐 좀 확인하려고…….”
“확인? 뭐를?”
“어, 있어. 그런 게.”
단호하게 얼버무리는 아스펠라의 모습에 일카이가 입을 삐죽대다 이내 서랍에서 병을 꺼내 건넸다. 아스펠라는 그 안의 찰랑대는 금빛 액체를 잠시 쳐다보다 이내 고맙다며 주머니에 넣었다.
일카이는 그런 아스펠라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거 혹시―”
“참, 깜장이한테 물어볼 질문 같은 거 미리 생각해 두는 게 어때?”
“아. 그래. 뭐부터 물어야 할까?”
아스펠라는 말을 돌리며 일카이와 함께 질문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일카이는 아스펠라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으나, 사냥꾼으로서의 감으로 그녀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의문을 오래가지 못했다.
아스펠라가 제 옆에 앉아 같이 누이의 일에 대한 질문지를 작성하는데, 그때마다 몸에서 향기가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스펠라. 너 혹시 향수 뿌려?”
“아니.”
“그래? 되게 좋은 향기 난다. 숲 냄새 같기도 하고. 꽃 냄새 같기도 하고.”
일카이는 숲의 여신이 있다면, 딱 이런 향기가 나지 않을까 생각했더랬다. 제 코를 간질대는 향기는 이내 그의 가슴도 충분히 간질이게 만들었다.
“대공이 연회를 빌미로 너한테 수작부리는 거야.”
일카이의 말에 아스펠라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래. 내 눈에도 보이는데, 아스펠라 너 정말 모르는 거야?”
“…….”
“만약 대공이 널 귀족들 앞에서 난처하게 만든다면.”
“그럴 일은 없어, 일카이. 그리고, 우리 약혼한 사이로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고. ……그래서 그냥 사실대로 말했어. 미안.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그러니까 그 역할에 너무 책임감 갖지 않아도 돼.”
칼리우스뿐만 아니라 이 성의 모두의 눈에도 우리 둘은 전혀 약혼 관계로 보이지 않나 봐.
그동안 웃긴 꼴만 보인 것 같아.
아스펠라가 허무하다며 쿡쿡 웃음을 흘렸다. 그녀에게는 별일 아니었으며, 딱히 중요한 일도 아닌 것처럼 보였으나 일카이는 달랐다.
“……책임감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닌데.”
일카이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웃느라 못 들은 아스펠라가 뭐라고? 되물었지만, 일카이는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이제부턴 약혼자인 척 못하는 거네?”
“아무래도.”
어쩐지 미안한 기색을 보이는 아스펠라의 모습에 일카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인간은 진짜 눈치하난 더럽게 빠르고, 약삭빠르다니까. 아, 창피해. 오늘 아침에도 약혼자니 뭐니 내가 떠들어댔잖아.”
일카이는 별일 아닌 듯 일부러 태연한척 웃으며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런 그를 보며 아스펠라 안도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창피할 것까지야.”
“당연히 창피하지! 나 혼자만 완전……나 혼자만 심취한 것처럼 보일 거 아냐.”
“안 그랬어. 내가 먼저 말한 거라고 다들 알고 있는걸. 넌 그냥 날 위해서 장단 맞춰준 것뿐이잖아. 아무도 너 우습게 안 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아주 혼쭐을 내주겠다며 아스펠라가 말했다. 활짝 웃는 아스펠라의 얼굴을 바라보던 일카이가 이내 슬쩍 따라 미소 지었다.
“……그럼 다행이고.”
입 안에 쓴맛이 감돈다. 어색하게 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
칼리우스가 출장을 갈 때가 아닌 이상은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2시까지 칼리우스와 글자 공부를 하기로 약속했다. 그 후 칼리우스가 정무를 볼 때면 아스펠라는 그의 서재에서 함께 자습을 해야 한다.
자습은 오후 4시까지. 일카이는 뭔 놈의 공부를 하루 종일 하냐며 아스펠라에게 사서 고생한다 말했다. 글자 같은 거 몰라도 된다고.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인데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공부하는 게 질리지도 않냐고.
하지만 아스펠라는 질리지 않았다. 물론 고대 언어와는 전혀 다르게 꼬부랑대는 글자를 쓰기 영 어려웠다. 깃털 펜을 쥐는 방법도 힘이 들었고, 집중하느라 고개를 숙이면 깃털 펜이 자꾸 얼굴을 간지럽히는 것도 거슬렸다.
칼리우스는 자세를 바로 해야 글씨도 잘 써진다며 제법 엄격한 수업을 했다. 알파벳 획을 긋는 순서부터, 필기체의 모양까지. 아스펠라가 등을 구부정하게 구부리면 기다란 나무 막대기로 허리를 톡, 건드렸다.
어째 아스펠 산을 등반하며 약초를 캘 때보다 의자에 바로 앉아 한 글자 한 글자 쓰는 것이 더 힘이 든 듯하다. 아스펠라는 이마에 땀까지 흘려가며 알파벳을 외우고, 썼다.
삐뚤빼뚤 했던 필체는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부드러워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아름다움에 가까운 칼리우스의 필체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지만, 칼리우스는 매의 눈으로 아스펠라의 숙제들을 살펴보면서도 의외로 칭찬은 관대하게 해줬다.
“역시 빠르게 배우네요. 내일부터는 기초 단어들 들어가도 되겠습니다. 잘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정말 아이를 칭찬이라도 하듯 아스펠라가 숙제를 다 해올 때마다 초콜릿을 줬다.
초콜릿이라는 걸 처음 먹었을 때 아스펠라는 정말이지 큰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꿀보다 달콤한 것이 있을 줄이야.
아마 초콜릿을 먹기 위해 이를 악물고 숙제한다는 걸 칼리우스는 모를 것이다.
그렇게 글자를 배우기 시작한지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스펠라는 칼리우스가 준 초콜릿을 입안에 넣고 천천히 녹여 먹고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깜장이요. 초코라는 이름도 참 잘 어울릴 것 같네요.”
제가 초콜릿의 존재를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도 아마 깜장이의 이름을 초코로 지었을 거예요. 아스펠라의 말에 칼리우스가 속으로 늦게 알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둘 다 비등하게 별로였지만 그래도 초코보다는 깜장이가 낫지 않을까.
“그런데 요즘 깜장이를 못 본지 오래 되었는데.”
“2주 좀 넘었을 뿐인데 뭐가 오래 못 봤다는 겁니까. 빨리 집중해서 받아쓰세요. ‘사과.’”
아스펠라가 깃털 펜을 조심조심 움직이며 글자를 썼다.
그러더니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듯 철자를 쓰면서도 말을 이었다.
“깜장이는 요즘 잘 지내나요? 제가 보고 싶다하지는 않던가요? 그래도 제가 깜장이를 돌보기 위해 온 것도 있는데 이렇게 얼굴도 못 보니까…….”
“산.”
칼리우스는 아스펠라의 질문에 답도 안하고 다음 단어를 불렀다. 아스펠라가 저도 모르게 입을 삐죽댔다.
“깜장이 혼자 오래 내버려 두면 외로움 잘 타는데.”
“아스펠라.”
“넵.”
“개.”
아스펠라가 다시 집중하여 단어를 받아썼다. 머릿속에서는 깜장이를 생각하고 단어 철자를 떠올리느라 정신없었다.
“틀렸습니다. 거기. 뒤집어 썼잖아요.”
칼리우스의 지적에 아스펠라가 글자 위를 찍찍 선을 긋고는 다시 바로 썼다.
“저주.”
“아, 저주? 저주 철자가…….”
아스펠라가 헷갈리는 듯 깃털 끝자락을 살짝 깨물다가 이내 떠오른 듯 얼른 받아 적기 시작했다.
“거짓말.”
“거……짓, 말. 다 썼어요!”
아스펠라가 얼른 종이를 건네자 칼리우스가 쓴 단어들을 확인했다. 종이를 살펴보던 칼리우스가 슬쩍 물었다.
“……외로움 잘 타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네?”
“개요. 그게 그리 말했습니까?”
“아뇨.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눈이 외롭다고 말하더라고요.”
아스펠라는 칼리우스에게 건넨 종이에 동그라미가 쳐질 때마다 입꼬리가 올라갔고, 직선이 그어질 때마다 시무룩해졌다.
“눈이 외롭다고?”
“네. 깜장이는, 혼자 있는 걸 외로워해요. 그리고 슬퍼 보이는 것이 상처도 많이 받았나 봐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던 건지……. 아, 아니. 칼리우스를 비난하려는 건 절대 아니고요. 칼리우스가 학대 했을 거라고 생각 안 해요.”
아스펠라가 얼른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채점을 마친 칼리우스가 이내 아스펠라에게 종이를 건네며 말했다.
“학대라뇨. 그 큰 놈을 제가 어떻게 통제합니까. 방치했을 뿐이지.”
“방치도, 학대의 일종이에요.”
“……그런가요.”
“이제부터 잘 놀아주시면 되죠. 사람마다 사정이 있으니까요.”
너무 죄책감만 갖지 말고, 이제부터 추억을 만들자며 칼리우스의 속도 모르고 아스펠라가 말했다. 그러다 이내 좋은 수를 떠올린 듯 손뼉을 짝, 치며 물었다.
“그럼, 나중에 다 같이 놀러가는 건 어때요? 사람 없는 곳에 간식 싸들고 가면, 깜장이도 좋아할 거예요. 다 같이 노는 건 처음이니까요.”
아스펠라의 말에 칼리우스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깜장이가 그 작은 개를 먹지는 않을까 걱정인데요.”
“아…….”
잘 먹은 탓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하양이를 먹는 깜장이라니. 아스펠라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농입니다. 나중에, 나중에 가능하면 그리하죠.”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칼리우스는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만 하겠다며 책을 덮었다. 그러자 아스펠라가 방금 전의 말에 대해 아직 더 할 말이 남아 있는 듯 입을 우물거렸다.
“저, 장난이 아니라 정말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건데.”
“뭐가 말입니까?”
“칼리우스랑 깜장이랑 다 같이 놀러가는 거요.”
아스펠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그를 쳐다봤다. 칼리우스는 그런 아스펠라를 쳐다보다 이내 픽 웃음을 흘렸다.
“네. 그리하죠.”
“언제가 좋을까요?”
“아스펠라가 책 한 권 필사를 모두 끝내고 속독을 할 수 있을 때쯤이요.”
장난스럽게 대꾸한 칼리우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도 개의치 않는 것인지 아니면 미처 신경 쓰지 못한 것인지, 아스펠라는 짐짓 생각에 잠긴 모양새였다.
“다음 주부터는 문장 받아쓰기도 충분하겠네요.”
“…….”
“아스펠라?”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골똘히 생각에 빠진 듯한 아스펠라의 어깨를 살짝 잡자, 아스펠라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빼냈다.
“뭘 그렇게 놀랍니까.”
“아, 그냥 뭔가를 좀 생각하다보니.”
무엇인가가 바닥에 통통, 튕겨져 나왔다. 작은 유리병이 칼리우스의 신발 앞코 부분에 데구루루 굴러와 멈췄다. 그를 본 아스펠라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향수?”
엄지와 검지로 들어 올리며 묻자 아스펠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우스는 별다른 의심 없이 아스펠라에게 건넸다.
향수병을 받아든 아스펠라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자신의 팔목에 향수를 뿌렸다. 그와 동시에 어색하게 말했다.
“향수, 시향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향수를요?”
“네……저한테는 향기가 잘 맡아지지 않는 것 같아서요.”
칼리우스는 별다른 의심 없이 아스펠라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아스펠라가 발걸음을 옮기자, 훅 풍겨오는 독한 냄새에 칼리우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사냥꾼이 준 향수입니까?”
“네?”
“같은 냄새가 나.”
그렇게 말한 칼리우스는 이내 아스펠라의 손을 끌어다가 서재 구석에 있는 수전 앞으로 데려갔다. 아스펠라의 손목을 물속에 담근 뒤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듯 칼리우스가 후,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합니다, 아스펠라. 냄새를 참을 수가 없어서.”
“……그렇게나 독한가요?”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군요. 향수가 맞긴 한 겁니까?”
칼리우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스펠라의 몸에서는 온갖 짐승 냄새가 폴폴 났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이상하게 짜증이 치밀어오르는 듯한 불쾌한 향이었다.
향수가 맞긴 한 건가?
그의 말에 아스펠라가 나직하게 말했다.
“저한테는 아무런 냄새도 맡아지지 않는데.”
“아무 냄새가 안 난다고요? 이렇게 독한데?”
그렇게 말하던 칼리우스가 이내 잠시 표정을 굳히곤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향수가 아닌가 보군요.”
“……아뇨, 향수 맞아요.”
아스펠라는 얼른 향수를 받아들곤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리우스는 방을 나가려는 아스펠라를 붙잡는 듯 물었다.
“자습은 안 할 겁니까?”
“오늘은 하양이랑 좀 놀려고요. 그동안 별로 못 논 거 같아서요.”
칼리우스가 고개를 갸웃댔다.
“그럼 그동안 저녁 내내 미로정원에서 술래잡기를 한 건 아스펠라와 흰 개 말고 또 누굽니까.”
“원래 강아지들은 활동적이라 계속 놀아줘야 한단 말이에요.”
아스펠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중얼거리더니 얼른 인사를 하고 후다닥 방을 나갔다.
칼리우스는 아스펠라가 얼른 도망가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종이들을 정리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거기엔 아스펠라가 도서관에서 가져온 책들도 있었다.
먼지가 자욱하게 앉은 걸 보면, 아마 책장 꼭대기에서도 구석에 박힌 걸 찾아내 가져온 모양이었다.
제목은 쓰여 있지 않고 책등에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칼리우스는 도서관의 모든 책들을 다 읽었기 때문에 그게 무슨 책인지 알았다.
“주술서를 왜…….”
칼리우스는 아스펠라가 꽂아둔 책갈피 부근을 펼쳤다. 강령 주술들을 모아둔 챕터였다.
그 아래 깔린 또 다른 책을 펼치자, 아스펠라가 책에 달린 끈으로 갈라놓은 부분이 펼쳐졌다. 인간이 짐승으로 변하는 것에 관한 주술 및 저주, 그리고 종족에 대한 글이었다.
이걸 왜 읽는 거지? 칼리우스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다 이내 아스펠라가 나간 자리를 쳐다봤다.
설마, 뭔가 눈치를 챈 건가.
***
아스펠라는 오전 공부와 오후 자습을 하고 4시 이후부터는 하양이와 함께 저택 정원을 빙빙 돌며 산책한다.
성 앞의 미로 정원과 일반 정원을 한 바퀴 돌면 두 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는데, 어쩔 때는 세 시간이 넘을 때도 있었다. 그만큼 넓은 곳이었다.
맨 처음 겁도 없이 미로 정원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 성내가 한바탕 발칵 뒤집힌 적도 있었다. 칼리우스는 밤늦게까지 그 넓은 미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아스펠라 때문에 수색대까지 꾸려야 하나 했건만, 정작 아스펠라는 식물들의 도움으로 상처 없이 잘 빠져나왔더랬다.
그날 이후로 아스펠라는 이 저택의 모든 것에 함부로 도전하지 않기로 했다. 모험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스펠라는 천천히 산책로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아스펠라는 천천히 손 안에서 유리병을 굴렸다. 이리 저리 매만지다 이내 슬쩍 꺼내 쳐다봤다.
아까 전 칼리우스가 이 병을 집어 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그 향수를 뿌리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 반,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 반.
그리고 그가 자신의 손을 잡아다가 물로 씻기는 모습까지 봤을 때의 그 마음은 뭐라 표현해야 할까.
아스펠라가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후각이 엄청 예민한 걸지도 모르지. 그는, 산신 토벌까지 한 사람이니까 보통 인간들보다는 더 비범할 거야.’
그렇게 믿고 싶었다.
비르가의 예언은 워낙에 비유와 은유가 많이 들어간 예언이라 해석하는 이 나름인데다가, 칼리우스가 고작 강력한 힘을 갖기 위해 스스로에게 주술을 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신은 저주를 내리지 못해. 그러니 저주를 받은 것도 아닐 테고. 스스로 주술을 걸 만큼 힘에 집착하는 사람도 아닌 것 같고.’
그렇게 스스로 자기합리화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마음이 가벼워지거나 후련해지기는커녕 어째 점점 더 물 먹은 솜 마냥 무거워지는 기분이다.
아스펠라는 다시 주머니 안에 집어넣고 위로 한참 고개를 꺾어야 그 끝이 보이는 에르윈 대공 성을 올려다봤다.
이곳에서 지낸지 몇 주 정도 지났지만, 아직 에르윈 대공 성의 극히 일부만 둘러봤다.
에르윈 대공 성은 칼리우스 그 자체였다.
매우 넓고 화려하고 커다랗지만, 가보지 못한 곳이 많았으며 알지 못하는 것 투성이였다.
그녀가 경험해본 것은 극히 일부뿐.
앨리스 말로는 뒤쪽에 별궁부터 구 에르윈 성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했는데, 그걸 다 둘러보려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 구경 만 해도 아마 한 달은 넘게 걸릴 거라고 했다.
뭣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여기가 왕궁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큰 성이었다. 그러니 튀니아 왕궁은 또 얼마나 화려하고 넓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워낙에 넓은 성인지라 막 돌아다녔다가 길 잃는 이들이 종종 있다고 들었다. 아스펠라는 미로 정원에서도 길을 잃는 마당에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는 아스펠라와 달리 이제 막 제대로 발을 디디며 뛰어다닐 수 있게 된 하양이는 한창 호기심이 넘칠 때였다.
“하양아. 너무 멀리 가지 마. 그러다가 길 잃으면 어쩌려고 그래.”
아스펠라가 한마디 하자 작은 개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자긴 이제 정원에는 질렸다는 말까지 패기 있게 했다. 정원에서 떨어진 꽃을 물고 다니는 것도 이제 질린다던 작은 개는 이내 중정 모퉁이를 돌더니 어디론가 달려갔다.
아스펠라가 얼른 그 뒤를 따랐다.
“같이 가자니까! 너 아직 어려서 냄새로 길 쫓는 방법 모르잖아!”
저 녀석은 누굴 닮아 저렇게 고집이 센 건지. 아스펠라가 얼른 지지 않고 강아지 뒤를 따랐다. 하나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에르윈 성은 증축을 하면서 구 에르윈 성과 이어지는 중정 부근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앨리스가 말한 ‘종종 길을 잃는 사용인’들은 모두 이 부근에서 길을 잃는 것이었다.
아스펠라는 3층 자신의 방, 일카이와 동료들이 지내는 방, 식당가, 도서관, 칼리우스의 서재, 깜장이가 지내는 지하 동굴 말고는 다른 곳에 가본 적이 없었다.
성이 궁금하다면 펠킨이나 다른 이들이 안내를 해주겠다고는 했지만, 막상 여러 일들이 겹치며 그럴 기회가 없었다.
“큰일 났네.”
하양이의 꼬리를 쫓아 비슷비슷해 보이는 중정의 기둥들을 몇 개 지나가니 전혀 모르는 곳이 나왔다. 이 주변에는 식물들도 없어 아스펠라에게 도움 줄 이들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평소 보던 에르윈 대공 성과는 달리 냉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관리가 아예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쓰이지 않는 곳이라 상대적으로 손길이 적게 가는 듯 조각품이나 액자들 위에 먼지가 드문드문 올라와 있었다.
복도를 밝히는 촛불들도 죄 꺼져있었다. 오랜 시간 불을 붙이지 않은 건지 심지들이 긴 상태 그대로였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아 어둡지는 않았지만, 해가 지기 시작하면 암흑이 찾아올 만한 곳이었다.
긴 복도를 한참 걸었다. 보이지 않는 하양이를 찾아 한참 계단을 오르고, 다시 내려가길 반복했다.
“얘가 진짜 어디로 간 거야.”
산의 지리에는 빠삭했으나 성의 지리는 알 리 만무한 아스펠라가 당황스러운 듯 연신 하양이의 이름을 불러댔다.
그러다 옆의 벽면을 쳐다봤다. 거대한 액자가 벽에 붙어있었다.
인자한 미소를 하고 있는 은발의 잘생긴 사내와, 검은 머리를 가지런히 틀어 올린 우아해 보이는 여인, 여인의 무릎에는 은발의 작은 어린애가, 아비 앞에 서 있는 흑발의 소년이 그려진 초상화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보고 있는 소년이 칼리우스의 어린 시절이라는 것쯤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귀족들은 이렇게 초상화로 자신들의 모습을 남긴다던데. 그게 사실이었구나. 아스펠라가 신기한 듯 초상화를 한동안 쳐다봤다.
어린 시절의 칼리우스는 꽤나 낯설었다. 한껏 어른스러운 척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통통한 볼 살이, 짤막한 키가 눈에 들어왔다. 그에게도 이런 귀여웠던 시절이 있었을 줄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칼리우스는 태어났을 때부터 완벽하게 태어났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이지 않나.
“어머니를 닮은 거였구나.”
아버지 쪽은 유한 인상과 서글서글해 보이는 눈이었지만 어머니 쪽은 날카롭고 냉철해 보이는 눈이 칼리우스와 꼭 비슷했다. 머리 길고 드레스 입은 칼리우스네. 그렇게 생각을 하던 찰나 무릎에 앉은 작은 어린애를 보며 고개를 갸웃댔다.
칼리우스에게, 동생이 있었구나. 동생은 칼리우스와 반대로 아버지 쪽을 쏙 빼닮았다.
저택에서 마주친 적은 없는데. 같이 지내지 않는 걸까. 아, 결혼을 했다면 출가했을 수도 있겠다. 나이 대는 아스펠라와 비슷할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칼리우스는 본인 얘기를 한 적이 없네.’
항상 칼리우스가 이것저것 물어보는 편이었고, 아스펠라가 답하는 편이었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의 가족이라든지, 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부모님은……돌아가신 걸까.’
아마 그러니 그가 가주를 이어받은 거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왜 돌아가셨을까, 언제 돌아가셨을까, 그때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등의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대공을 향한 관심이 지대하다 했지.
그들은 칼리우스의 이런 가정사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알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아스펠라가 초상화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에서 하양이의 왕왕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계단을 내려가 다시 한참 걷다 보니, 거대한 볼룸에 도착했다. 아스펠라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그 용도를 몰라 신기한 듯 슬쩍 발을 내딛었다.
음산하고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곳이었다. 아스펠라는 어쩐지 비명소리가 연기처럼 은연히 퍼지는 기분에 살짝 몸을 떨었다.
거대한 샹들리에가 여기저기 깨진 상태로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한번 땅에 떨어진 것을 급하게 수습하느라 대충 고정해놓은 듯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모양새였다.
고개를 돌리자 깨진 창문들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 밖을 쳐다보니, 북쪽 산신이 관리하는 산들 중 하나가 보였다. 대충 이곳이 에르윈 대공 성의 북쪽 어딘가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 넓은 볼룸의 바닥에는 깨진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거대하고 긴 창문들은 죄 부서져 있고, 유리 파편이 떨어진 위치로 보아, 뭔가가 바깥에서 안으로 뚫고 들어온 것만 같았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볼룸 중앙 계단과 이어지는 벨벳 커튼은 불에 타 이리저리 구멍이 뚫리고 찢겨지고 그을렸다.
여긴 왜 이런 상태로 방치가 되어 있는 걸까?
칼리우스의 성격이라면, 이런 더러운 상태로 내버려둘 것 같지 않은데. 아스펠라가 그리 중얼거릴 때였다.
[아스펠라! 아스펠라! 이리 와봐, 내가 대단한 걸 발견했어!]
“하양아! 너 정말 어디 갔었니!”
[빨리! 이리 와봐! 진짜 대단해!]
한참을 찾아도 안보이던 하양이가 달려와 아스펠라의 치맛자락을 물고 당겼다. 결국 하는 수 없이 그가 이끄는 곳으로 향했다.
둘이 도착한 곳은 유리가 잔뜩 깨진 야외 온실이었다.
“세상에…….”
온실이라고는 하나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않아 여기저기 시든 식물들도, 죽은 식물들도, 악착같은 생명력으로 살아남은 식물들까지 죄 한데 모여 있었다.
깨진 창문 사이로 비를 맞고 햇빛을 받았으나 가지치기를 하지 못해 울창하게 온실 천장까지 뒤엎은 담쟁이 넝쿨을 둘러보며 아스펠라가 혀를 내둘렀다.
사람 손길만 잘 받았어도 아름다운 온실이었을 것이다.
아스펠라의 귀에는 서글프게 우는 식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찌나 다들 구슬픈지, 그 사연을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니?”
아스펠라가 담쟁이 넝쿨에 손을 얹고 물었다.
그러자 마치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늙은 노인처럼, 담쟁이 넝쿨이 담담하게 말했다.
[여긴 버려진 곳이야. 다들 죽을 날만 기다려. 엘리샤가 오질 않으니 그 누구도 오질 않아. 엘리샤가 죽었으니 우리도 죽은 것과 다름없어.]
[근데 넌 어떻게 우리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거지?]
[넌 누구지? 칼리우스와 무슨 사이야?]
***
칼리우스가 후, 한숨을 내쉬자 앨리스와 펠킨, 그리고 주변에 있던 다른 시종들이 서로 눈치만 보며 잔뜩 몸을 움츠렸다.
“펠킨. 내일 당장 지도 설계사를 데려와라.”
그렇게 말하자 펠킨이 예, 각하! 하며 얼른 몸을 바로 세워 대답했다.
아스펠라가 또 성에서 길을 잃었다. 다음번에는 그냥 지도를 쥐여줘야겠다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칼리우스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내가 잘 보고 있으라 했잖아.”
“죄, 죄송합니다. 각하.”
“……됐다. 미리 언질을 하지 않은 내 탓이 제일 크니.”
아스펠라에게 제대로 주의를 주지 않은 자신의 탓이었다.
급히 증축 공사 기간을 단축시키느라 구 에르윈 성에서 현 에르윈 성으로 이어지는 중정 길이 미로처럼 복잡해졌다는 걸, 그로 인해 여기서 길을 잃는 이들이 허다하니 그쪽은 되도록 가지 말라 말했어야 하는 걸.
“보나마나 그 개새끼 쫓아가다 그리로 빠졌겠지.”
아스펠라는 평소 성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편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 작은 개는 뽈뽈뽈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지 않나.
그때 허락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 개는 꼭 칼리우스가 검은 마수라는 걸 알기라도 하는 양 칼리우스를 피해 다녔다. 어쩌다 마주치면 무서워 바들바들 떨다가도, 또 아스펠라 앞에서는 제가 아스펠라를 지켜주겠다는 듯 경계하며 짖어댔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살랑살랑 꼬리만 흔들어대면서, 심지어는 일카이한테도 배를 까면서 저한테만 저렇게 경계를 하니.
아스펠라는 그것과도 대화를 하는데, 혹여나 그 작은 것이 뭐라 말이라도 흘리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각하, 곧장 사용인들을 별궁과 폐궁으로 보냈습니다. 별일 없을 거예요. 너무 걱정 마십시오.”
펠킨이 하는 말은 그닥 위로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별궁 쪽으로 갔으면 다행이기라도 할 텐데, 폐궁은…….
“아가씨께서 돌아오셨어!”
시종들 중 하나의 외침을 들은 칼리우스가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우려와는 달리 아스펠라는 상처 하나 없이 돌아왔다. 품에는 하양이를 안고선, 무슨 일 일어났냐며 동그랗게 눈을 뜨곤 칼리우스에게 물었다.
아스펠라를 데려온 것은 일카이와 사냥꾼들이었다. 일카이가 아스펠라에게 한마디 했다.
“넓은 성에 혼자 다니지 말라니까! 걱정했잖아!”
“미안, 얘 쫓아가다보니……. 저 찾느라 이렇게 모인 거예요? 저 진짜 괜찮은데, 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
아스펠라의 말에 앨리스가 얼른 아가씨, 제가 얼마나 놀랐는데요. 폐궁은 불타 위험한 곳도 많아서― 하다가 얼른 제 입을 틀어막았다. 괜한 소리 하지 말라며 다른 시녀들이 앨리스의 허리춤을 꼬집었기 때문이다.
일카이는 아스펠라의 어깨를 잡고 몸을 빙빙 돌려가며 어디 다친 덴 진짜 없어?! 하고 물었다.
“옷에 뭐 이렇게 재가 많이 묻었어? 너 어디 잿더미에서 뒹굴다 왔냐?”
일카이의 그 말에 칼리우스는 아스펠라가 간 곳이 폐궁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재가 있는 곳은 그곳 말고는 없을 테니까.
칼리우스가 가만히 중앙 계단에서 아스펠라를 내려다봤다.
“어?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아스펠라가 툭툭 드레스 자락에 묻은 재를 털려는데, 일카이에게 손을 잡혔다.
“너 손은 또 왜 이래?”
“응?”
그의 말에 손을 내려다보자 손등에 베인 상처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언제 이게 생긴 건가 본인도 경위를 모르는 상처라 어?! 하며 놀란 듯 제 손을 살폈다.
아까 그 넓은 곳을 기웃대다가 베인 건가.
그러다 칼리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피까지 나잖아. 내 방 가자. 붕대랑 연고 다 거기에 있으니까.”
일카이가 더 흉 지기 전에 소독도 해야 해, 빨리 가자. 하며 아스펠라 손을 잡아끌었다. 아스펠라의 시선은 칼리우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칼리우스가 말했다.
“사냥꾼이니 응급처치는 잘할 겁니다. 혹시 모르니 주치의는 보내두겠습니다.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이군요.”
무표정하던 그가 이내 생긋 미소 짓고는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아스펠라는 칼리우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이층으로 올라갔다.
일카이는 방으로 가는 내내 아스펠라에게 잔소리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냥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다들 허둥지둥 대며 아스펠라가 사라졌다 말하지 않던가.
놀라서 사냥을 마치고 온 복장 그대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
“작작 돌아다녀라. 아니면 어딜 간다고 말을 하고. 사람 놀라게 할래?”
“낸들 알았나. 하양이를 혼내. 요놈.”
아스펠라가 일카이에게 하양이를 건넸다. 일카이는 잠시 무시무시한 눈으로 낑낑 눈치를 보는 하양이를 쳐다보다 이내 큰 손을 번쩍 들어 복슬복슬한 턱 아래를 긁었다.
“네가 자꾸 봐주니까 얘가 고집만 세지잖아.”
“뭐 어때. 아빠니까 봐줘야지.”
“허, 내가 왜 하양이 아빠야?”
“네가 데려왔으니까. 그치? 그치―”
하양이도 눈치는 있는지라 얼른 일카이가 배를 뒤집어 깠다. 아스펠라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일카이는 아스펠라를 제 침대에 앉힌 뒤, 협탁 아래 넣어둔 구호 상자를 꺼내들었다.
이리저리 연고를 뒤적대 꺼내더니, 듬뿍 연고를 펐다. 그리곤 아스펠라의 손등을 들어 올려 상처 부근에 호호, 작게 바람을 불었다. 세심한 모습이 커다란 덩치와 대비되어 웃음이 나왔다.
일카이는 조심스레 손등에 연고를 펴 발랐다.
“아파?”
“그냥 조금 따끔.”
“이렇게까지 베였는데 어떻게 그걸 모르고 있었어?”
일카이는 제가 다 아픈 듯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호들갑이야. 별로 안 아팠어. 아스펠라의 말에 일카이가 괜히 꽥 소리를 질렀다. 다치지 말라고! 아프든 말든 네 마음인데 걱정시키지 말라고! 그 말에 아스펠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일카이의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누나가 다쳐서 걱정했구나? 미안. 말하자 일카이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일카이.”
“응?”
“칼리우스가 많이 화난 것 같은데, 진짜 화났을까?”
“그건 또 뭔 소리래. 화가 난 것처럼 보이면 화가 난 거겠지. 왜 그걸 나한테 물어?”
“그냥, 네가 봤을 땐 어떤가 싶어서.”
“평소랑 똑같이 재수 없던데. 다들 너 찾는 와중에 서재에 앉아 있기나 하고.”
일카이가 이죽대며 붕대를 마저 돌돌 감았다.
“화가 났겠지? 내가 막 돌아다닌 거니까. 게다가 숨기고 싶어 하는 듯했고.”
“…….”
일카이는 계속해서 붕대를 돌돌 둘러맸다.
“아!”
너무 세게 감은 건지, 붕대가 상처를 눌러 아스펠라가 아픈 듯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제야 일카이가 미안, 하며 얼른 붕대를 도로 풀었다.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감는 도중 일카이가 물었다.
“아스펠라.”
“역시, 사과하러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일카이 네 생각은―”
“……아스펠라.”
“왜?”
침대에 앉은 아스펠라 앞에 구부려 앉아 있던 일카이가 아스펠라를 올려다봤다.
“……대공이랑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마.”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몰라서 묻는 거야 진짜?”
보기 드물게 진지한 눈빛이었다. 아스펠라는 잠시 침묵하고 그를 내려다봤다.
“……네 누나에 대한 일은 내가 꼭 알아볼―”
“야.”
“그게 아니면 왜?”
아스펠라는 다 알면서도 물었다. 그건 우회적으로 선을 긋는 행동이었고 일카이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내 고개를 숙인 일카이가 가만히 제 손에 들린 아스펠라의 손을 만지작댔다.
그러더니 이내 다시 붕대를 마저 감고는 말했다.
“친구니까 걱정돼서 그런다.”
“…….”
“네 말대로 누나 같아서. 됐냐? 대공은 귀족 중의 귀족이야. 우린 평민이고. 지금이야 대공이 친절하게 굴고, 이 집안 사람들이 우리한테 우호적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귀족들은 어떨지 몰라.”
나중에 가서 상처받지나 마. 그게 제일 꼴사나워.
일카이의 말에 아스펠라가 말했다.
“나도 그 정도는 알아.”
“아는데, 왜 그래?”
서운해 하는 눈빛이다. 못된 말 골라서 하는 건 자기면서, 왜 아스펠라에게 서운해 하는 눈빛을 보내는 건가.
“…….”
“…….”
침묵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아스펠라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치료해줘서 고마워. 나 이만 가볼게.”
아스펠라가 자리를 뜨자 하양이는 일카이와 아스펠라 사이에서 어딜 가야할지 모르겠다는 듯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며 낑낑댔다. 일카이가 개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따라가. 아스펠라도 고민 많을 테니까.”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말하자 하양이는 이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일카이의 손에 코를 한 번 꾹 누르고는 아스펠라를 쫓아갔다.
***
아스펠라는 곧장 칼리우스가 있을 서재로 향했다. 그러나 막상 서재 앞에 도착하자 문을 열고 들어갈지, 말지 고민했다.
그의 표정은 분명 화가 난 것이었다. 함부로 저택을 돌아다닌 것도, 걱정을 끼쳐 모두에게 헛수고를 하게 한 것도. 아스펠라는 제대로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발치에서 하양이가 말했다.
[왜 굳이 사과해? 큰 잘못도 아닌데. 우린 잘못한 거 없어. 그냥 돌아가자, 아스펠라. 나는 대공 무섭단 말이야. 어엄청 큰 괴수가 보인단 말이야아!]
하양이가 아스펠라 드레스를 물고 고집을 피웠다. 아스펠라는 하양이가 제 드레스를 잡아당기든 말든 심호흡 한 번 하고 서재 문을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펠킨이 문을 열었다.
“아스펠라 양?”
“시간이 좀 늦긴 했지만, 대공 각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혹시 가능할까요?”
“이런. 대공 각하께서는 이미 침실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나머지를 정리하느라 남아있는 거고요.”
그의 말에 아스펠라가 아, 그렇군요. 하며 고개를 떨궜다. 잠시 아스펠라를 내려다보던 펠킨이 슬쩍 말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그건 아니고. 그냥 오늘 일에 대해 사과드리고 싶어서요.”
“아스펠라 양이 사과하실 게 뭐가 있습니까. 너무 죄송해하지 마세요. 제대로 언질을 드리지 못한 저희 잘못입니다. 내일 지도 설계사가 와 성의 지도를 만들 예정이니, 다음부터는 그걸 참고하시면 길을 잃지 않으실 겁니다.”
펠킨은 그렇게 말했지만 아스펠라의 찝찝한 마음은 영 나아지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스펠라의 옷에 잿더미가 묻은 걸 확인한 순간부터 칼리우스의 얼굴이 굳어지지 않았나.
그건 분명 아스펠라가 구 에르윈 성에 들어간 것을, 볼룸에 들어갔다 나온 것을 알아챈 듯한 눈빛이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해요, 보좌관님. 그래도 역시 내일 다시 한 번 대공께 사과를 드려야 할 것 같네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스펠라의 말에 펠킨이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내일은 대공이 없을 텐데.
자신이 대공이었다면 아스펠라 양에게 어떤 식으로 말해서 마음의 짐을 덜어줄까. 고민하던 찰나 매우 칼리우스가 했을 법한 생각을 떠올렸다.
“아, 아스펠라 양!”
돌아가려는 아스펠라를 부르자, 아스펠라가 뒤를 돌았다.
“그렇게 마음 쓰이시면, 지금 그냥 각하를 찾아가보심이 어떠십니까?”
아스펠라가 가만히 눈만 깜빡이며 그를 보자 펠킨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게, 내일 아침 일찍부터 대공 각하는 출장을 가시느라, 몇 주 동안 저택을 비우실 예정이거든요. 갑작스럽게 정해진 출장이라 짐도 싸야 하고 이래저래 내일은 바쁘실 거예요. 아직 각하께서는 안 주무시고 계실 겁니다.”
그래도 어찌 이 밤에 대공의 침실을 찾아간단 말인가.
“제가 침실까지 찾아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대공께서도 불편해하실 것 같아요.”
“예? 각하께서는 정 반대 아닐까요? 헙.”
생각한 것을 여과하지 않고 그대로 뱉어버린 펠킨이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니까 제 말은, 아스펠라 양께서 계속 마음 쓰시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 것 같다는 말입니다. 다른 뜻이 아니라―”
그러다 펠킨이 하, 자포자기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스펠라 양도 아시죠? 각하께서 아스펠라 양을 매우 특별하게 여기시는 걸요.”
“…….”
이야기가 갑자기 왜 그리로 튀는 것인지 몰라, 아스펠라가 예? 하며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펠킨은 지금 제가 뭔 소리를 하는 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칼리우스는 언제나 결과 주의자였다. 과정이 어떻든 결과만 만족스러우면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 밑에서 보고 배운 것이 뭐겠는가. 과정이야 좀 어설프게 뚝딱대도 결과만 괜찮다면야.
“대공 각하께서는 아스펠라 양에게 절대 화를 낼 수 없으십니다. 혹여나 화가 나시더라도 아스펠라 양에게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티도 내지 않으실 거고요.”
하지만 서운해 하실 수는 있으시겠죠.
각하께서 아무리 잘난 분이라 하셔도, 아스펠라 양 앞에서는 그냥 평범한 남자입니다. 아스펠라 양의 아주 사소한 행동이나 말 하나하나 신경 쓰고 계심을 아스펠라 양도 알아주세요.
그렇게 말한 펠킨이 잠시 주저하다 이내 말했다.
“……대공 각하는, 아스펠라 양의 사과 말고 다른 걸 원하실 겁니다.”
“다른 거요?”
“폐궁에서, 뭔가를 보셨죠?”
아스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 말에 아스펠라가 잠시 뜸을 들였다. 펠킨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뭔가를 알아가는 데에도 타이밍이 중요하지요. 각하께서 내일 출장을 가시면 한동안 못 보실 텐데 지금이 가장 기회 아니겠습니까. 제가 방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스펠라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펠킨이 얼른 칼리우스의 방으로 에스코트하기 시작했다. 아스펠라는 이게 지금 맞는 선택인가 싶었다. 아스펠라 옆에 가만히 앉아있던 하양이가 얼른 그 뒤를 따라갔다.
***
단정하게 입고 있던 베스트와 재킷을 벗자 시종들이 얼른 옷가지를 챙겼다. 칼리우스는 그들을 모두 물린 뒤 잠시 피곤한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다란 다리를 소파 앞 협탁 위에 턱, 턱 올려놓고는 안와 부근을 꾹꾹 눌렀다.
뭔가 짜증나거나 피곤하거나 골치 아픈 일이 생길 때 자주 하는 그의 버릇이었다.
구 에르윈 성은, 18년 전 사건이 일어난 그 이후부터 바로 폐쇄된 곳이었다. 새 에르윈 성의 증축 막바지에 열린 연회 날, 그 끔찍한 참사가 벌어지고 곧장 칼리우스가 그곳으로 향하는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그는 아직 공사가 다 끝나지도 않은 새 에르윈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폐궁을 모조리 허물어버릴까 생각해봤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곳에는 칼리우스의 어린 시절이 모두 담겨있었다.
폐궁은 여전히 18년 전 그날에서 멈춘 채로 그 누구도 발걸음하지 않았다. 그렇게 근 몇 년 동안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존재를 잊고 있었는데 오늘 다시 선명해졌다.
그 기억은 칼리우스를 고통스럽게 하거나 슬프게 만들지는 않았다. 다만 그냥 피곤하게 만들 뿐이었다.
악착같이 숨기고 싶은 어두운 과거도 아니었다. 그 일은 이미 귀족들 사이에서 매우 유명했던 사건이었으니까.
아스펠라가 그곳에 간 것 역시, 칼리우스에게는 별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칼리우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혹시나 큰 사고를 당했을까 걱정한 것이었지 무탈하게 돌아온 거면 그걸로 된 거다.
분명 그럴 것이 분명한데. 왜 이렇게 피곤함이 몰려든단 말인가.
결국 그는 오후 정무를 다 보지 못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칼리우스는 잠시 제 손을 펴 살펴봤다. 손등에 솟아난 핏줄들 사이로 혈액이 빠르게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심장 소리가 빨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건 검은 마수로 변할 주기가 다가온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내일. 늦으면 내일 모레.
‘각하. 그건 아스펠라 양에게 너무 가혹한 일 아닙니까? 늦게 알게 될수록 아스펠라 양이 받게 될 충격과 상처는요.’
일전에 펠킨이 그리 말한 적 있었다.
‘네가 아스펠라를 걱정이나 하고. 아스펠라가 여러모로 인기가 많구나.’
나도 마냥 속이기만 하는 것에 가책을 느껴. 아스펠라가 하루라도 더 빨리 날 사랑해줘야 나도 더 빨리 말하지 않겠어? 네 말대로 아스펠라에게는 너무 가혹하잖아.
칼리우스의 말에 펠킨은 완전히 질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주 오랜 세월 그의 옆에서 보좌하던 펠킨마저도 그런 표정을 짓는데, 아스펠라는 어떤 표정을 짓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걸 실토할 생각은 없다.
지금 알아서는 안 돼. 분명 날 떠날 거야.
모든 걸 알게 돼도 날 함부로 버릴 수 없을 때. 그때 말해야지. 그래야 아스펠라가 날 쉽게 떠나지 않지.
이쪽도 여유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저 경계심 많고 눈치 없는데다가 사연까지 있는 여자를 완전히 넘어오게 만들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시종들이 두고 간 셔츠로 갈아입기 위해 포에트 셔츠를 벗을 때쯤이었다.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아마 펠킨이나 시종이겠지 싶어 칼리우스가 별 신경 쓰지 않고 대답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는 들렸다. 각하. 하며 펠킨의 목소리가 들렸다. 칼리우스는 그가 들고 온 문서들을 내놓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펠킨이 서재에서 정리한 문서를 칼리우스의 손에 넘기며 말했다.
“각하.”
“뭐야.”
“아스펠라 양께서 잠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와 계십니다.”
“저기―”
펠킨의 말과 동시에 아스펠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스펠라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칼리우스가 얼른 뒤를 돌았다.
“아스펠라? 그대가 이 시간엔 왜…….”
예상 못한 일이었다. 아스펠라가 왜 여기까지? 하며 펠킨을 쳐다보자 펠킨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펠킨. 네가 보기에 아스펠라가 불쌍한 것 같으면 큐피드 역할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이쪽 방면에서는 나보다 경험이 많다며. 그리 자신 있게 말하지 않았나?’
그때 펠킨은 제가 어찌 큐피드 역할을 한단 말입니까! 절대 못 해요! 하며 씩씩대지 않았나. 그랬던 이가 오늘은 꽤나 기특한 짓을 하고 있다.
“자네는 잠시 자리를 비켜주게.”
“예, 각하.”
펠킨은 아스펠라 옆에서 뽈뽈대는 작은 강아지도 번쩍 들어 나갔다. 강아지는 나가기 싫은지 발버둥쳤으나 당해낼 수 없었다.
적막이 흘렀다. 아스펠라는 어색한 듯 몸을 빳빳이 세워 문 앞에 서 있었다.
“이리 오세요.”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에게 이리 오라며 손짓하자 아스펠라가 그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파는 방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까지 가는데 이상한 긴장감이 아스펠라의 몸을 휘감았다.
칼리우스의 서재는 몇 번이나 드나들었고, 워낙 공적인 장소였기에 거부감이 없었는데.
그의 침실은 처음인데다 워낙 사적인 장소인지라 뭔가 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칼리우스가 저번 아스펠라의 침실을 찾았을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그때는 서러운 마음에 엉엉 울고 있어서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칼리우스는 그저 달래주기 위해 온 것이었고 물론 이마에 입을 맞추긴 했지만, 별다른 긴장감이 돌거나 이유를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들지는 않았었다.
헌데, 지금은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호랑이를 잡으러 온 사냥꾼이 아닌, 자신이 소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등받이 쪽으로 몸을 돌려 팔을 얹고 저를 보며 미소 짓고 있는 칼리우스 앞에 겨우 도달했다. 칼리우스가 아스펠라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할 말이 있으시다고요.”
“네.”
“무슨 급한 일이기에 침실까지 오셨습니까?”
그의 질문에 아스펠라가 도통 안절부절못하여 눈을 깜빡이고 괜히 드레스자락을 만지작댔다. 어떻게 운을 띄워야 할지 몰랐다.
그 와중에 칼리우스는 왜 저리 헐벗고 있는 건가. 평소에 항상 단정하게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우던 재킷과 베스트를 벗어 던지고 왜 포에트 셔츠까지 벗어 상의를 죄 탈의한 상태란 말인가.
그러다 아스펠라가 아, 맞다. 여긴 그의 침실이고 이제 막 자려던 참이었나 보구나, 하며 생각했더랬다.
“갑자기 죄송해요. 주무시려던 참인데 제가 방해가 되었나요? 그리 급한 건 아니니까……. 다, 다음에 다시 말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싶은 아스펠라가 결국 포기하려는 듯 꾸벅 인사를 올렸다.
보좌관님의 말대로 타이밍이라는 게 중요하긴 한데, 적어도 지금 이 시간은 아닌 것 같았다. 이제 막 스물 된, 이성과는 그 어떤 접점도 없던 아스펠라 아니던가.
상의를 탈의해 우락부락한 근육이 죄 보이는 남자와 그 남자의 가장 사적인 침실에 단둘이 있다는 것은 아스펠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 건 굳이 교육받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뭔가 위험하다.
‘각하께서는 아무리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절제력도, 인간성도 잃은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니 그 부분은 너무 걱정 마세요. 각하는 아스펠라 양이 허락하지 않으면 손도 제대로 못 잡을 걸요? 각하만큼 안전한 사내는 없을 겁니다.’
아니요, 뭐가 위험한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뭔가 위험한 것 같은데요. 보좌관님. 절대 안전하지 않을 것 같은 걸요. 아스펠라는 펠킨이 한 말을 떠올리며 생각했더랬다.
“저, 그럼 실례했습니다.”
아스펠라가 꾸벅 인사를 올리고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의 왼 손목을 낚아챘다.
“괜찮으니 말하세요.”
“아, 아뇨.”
“아스펠라. 왜 이렇게 눈을 못 마주치고 안절부절못합니까?”
“각하께서 옷을…….”
옷을 안 입으셨잖아요. 아스펠라가 눈을 꼭 감으며 말했다.
사내의 탈의를 처음 본 것은 아니다. 산에서 살다보면 사냥꾼들도 심심찮게 마주치는데다가, 이따금 개울을 나가면 죄 시꺼멓고 커다란 가슴을 내놓고 멱 감는 이들도 더러 있지 않았나.
그때는 그냥 크고 튼실하나 부담스러운 살덩어리들이라 생각했는데, 왜 칼리우스의 살덩이는 이렇게 사람 목을 타게 만드는 것인가. 너무 무던한 성격 아닌가? 아무리 사내들은 가슴을 내놓고 잘만 다닌다 해도, 저렇게 큰 가슴은 좀 가려야하는 것 아닌가?
“아. 미안합니다.”
아스펠라의 말에 칼리우스가 셔츠를 꿰어 입었다. 아스펠라는 칼리우스가 손을 놓자마자 붙잡혔던 제 손목을 만지작댔다.
칼리우스가 새 셔츠로 갈아입은 뒤 소파에 앉으라 말했다. 확실히 그가 옷을 좀 입으니 아까 전보다는 덜 민망해졌다.
어쩌다보니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소파에 앉게 된 아스펠라가 잠시 그를 쳐다봤다. 칼리우스가 어서 말하라는 듯 손짓했다.
“그게. 원래는 사과를 드리려고 서재를 찾아갔었는데, 안 계시더라고요.”
아스펠라는 대체 어떻게 운을 띄워야 할까 고민했다.
“아스펠라.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당신이 폐궁에서 다칠까 걱정했을 뿐이니까. 사과하려 오신 거면 그만 돌아가도 됩니다. 설마 그것 때문에 이리 걱정했을 줄이야. 제가 어찌 아스펠라에게 화를 냅니까?”
펠킨의 말대로 칼리우스는 아스펠라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다정했고, 이따금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로 아스펠라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아스펠라는 그런 그의 모습이 더 사람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용케 길을 찾아 왔군요. 대부분은 수색해서 데려와야만 나올 수 있었는데.”
“……온실의 식물들이, 나가는 길을 알려줬습니다.”
“아, 그 온실. ……그것들이 다른 말도 하던가요?”
“그냥 나가는 길만 알려줬어요…….”
말끝을 흐리던 아스펠라가 잠시 고민했다. 내가 이런 걸 물어도 되나? 너무 오지랖에 주제 넘는 짓이 아닐까?
칼리우스는 붕대를 칭칭 감아 동그래진 아스펠라의 오른손을 쳐다보며 물었다.
“손등은, 괜찮습니까?”
“네. 괜찮아요.”
“상처가 덧나면 안 될 텐데.”
그의 말은 들리지 않는 것인지, 아스펠라가 다소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저, 초상화를 봤습니다. 그리고, 연회장도 들어갔어요.”
아스펠라는 마치 잘못한 아이가 미리 제 죄를 털어놓기라도 하듯 하나하나 말했다. 정작 칼리우스는 아스펠라의 말에 별 반응이 없었다. 전전긍긍 앓는 아스펠라를 잠시 쳐다보던 칼리우스가 물었다.
“궁금합니까?”
“네?”
“그 초상화랑, 불타버린 연회장에 대해 궁금해 하는 눈치인 것 같은데. 아스펠라는 내가 이렇게 떠먹여주지 않으면 절대 못 물어볼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한 칼리우스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궁금하십니까?”
“……네.”
“왜요?”
“…….”
“아스펠라. 그게 왜 궁금한지 대답해주세요. 그럼 나도 말하겠습니다.”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의 붕대 감은 손에 제 손을 올리며 물었다. 그의 금색 눈동자를 마주보는 아스펠라는 마치 그의 말에 주술이라도 걸려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홀리듯 아스펠라가 대답했다.
“……칼리우스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요.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어떤 삶을 산 건지, 왜 혼자인지, 왜…….”
그러자 칼리우스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다 알려줄게요.”
***
“어허, 이놈, 그렇게 깨무는 것 아니다.”
펠킨은 하양이와 함께 칼리우스의 침실이 있는 4층 전체 복도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하양이는 펠킨의 손가락이 장난감이라도 된 양 이리 깨물고 저리 깨물고, 할짝대다가 코를 문대다가 난리가 났다.
그런 녀석이 귀여워 펠킨이 함박웃음 짓고는 하양이의 배를 문질렀다.
“원래 개 종류가 이렇게 귀여웠던가? 고놈 참 귀엽네.”
펠킨이 본 개 종류라 함은 검은 마수로 변한 칼리우스나, 사냥개들뿐이었다. 그런데 이놈은 어찌나 애교가 많고 이리 통통한지.
“너 아스펠라 양이 아주 밥을 잘 주나 보구나. 배가 이리 통통해서야 돼지 아니냐.”
왕왕! 아스펠라의 이름에 하양이가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개들이 유독 아스펠라 양을 따르는 건가? 대공 각하만 해도…….”
대공이라는 말이 나오자 하양이가 그르르, 불만인 듯 이를 보이다가 펠킨의 손을 왕 깨물었다.
“아야, 이놈. 뭐야. 대공 각하가 싫은 거냐? 얘기 꺼내지 마? 응? 가만 보니 이놈은 왜 이렇게 대공 각하를 싫어하지? 아, 같은 수컷이라 그런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칼리우스의 방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는 조금 충격을 받은 건지, 아니면 울기라도 한 건지 눈시울이 붉어진 아스펠라가 나왔다. 문을 열어준 칼리우스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펠킨과 눈이 마주쳤다.
펠킨은 붉어진 눈의 아스펠라를 보고 당황한 눈치였다.
“아, 아스펠라 양? 우셨습니까?”
칼리우스와 아스펠라를 번갈아 쳐다보던 펠킨은 칼리우스의 포에트 셔츠가 조금 과하게 젖혀진 것을 보았다. 설마, 설마 각하께서 파렴치한 짓을 한 건 아닌가. 아무리 초조하고 급하더라도 인간된 도리를 저버린 것인가 하며 기함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그럴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으니 쓸데없는 생각 말라는 눈빛으로 칼리우스가 말했다.
“아스펠라 양을 방까지 모셔다주게, 펠킨.”
“예, 각하.”
펠킨은 얼른 아스펠라를 에스코트했다. 옆에서는 하양이가 왕왕 짖어댔다.
[아스펠라! 뭐야! 대공이 무슨 짓했어! 나 걔 완전 싫어! 위험한 놈이라고. 내가 혼내줄게! 왜 눈이 빨개!]
“아스펠라 양, 혹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펠킨이 다시 한 번 아스펠라에게 물었다.
“네?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그냥, 듣다보니 감정 몰입이 되어 눈물이 나왔을 뿐이에요.”
아스펠라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사람에게는 좀 무심한 편이지 않았던가. 시장 바닥에서 굶어 죽어가는 노숙자보다 먹지 못해 마른 떠돌이 개에게 더 동정을 주는 편 아니었던가.
“각하께서 얘기를 해주시던가요?”
“네. 감사해요, 보좌관님. 오늘 물어보길 잘했던 거 같아요.”
“다행이군요.”
펠킨은 칼리우스가 뭘 어떻게 했길래 아스펠라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지 궁금했다. 더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건 주제 넘는 일이라 생각해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아스펠라의 방에 도착했다.
“그럼, 많이 피곤하실 텐데 쉬십시오, 아스펠라 양.”
아스펠라가 감사하다며 꾸벅 인사를 올렸다. 앨리스가 와서 침대 안에 열을 가한 쇳조각 몇 개를 감싼 수건을 넣어 이불을 침구를 데웠다.
몸을 씻은 아스펠라가 새 옷으로 갈아입고 따듯하게 데워진 이불에 몸을 뉘였다. 마찬가지로 뽀송하게 목욕을 마친 하양이가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스펠라. 대공이랑 무슨 얘기 했어? 아까 전에 그 식물들이 말해준 거 그거 얘기했어?]
“응.”
[난 대공 별로야. 좀 무서워. 위험한 사람이야.]
“그래?”
[응! 생긴 것도 무섭고. 그리고 눈도 뾰족뾰족하고…….]
그렇게 말하던 작은 강아지가 이내 칼리우스의 시선을 떠올린 듯 몸을 부르르 떨며 아스펠라 품속으로 들어갔다. 아스펠라가 캐노피 천장을 쳐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렇게 무섭고 위험한 사람은 아니야. 하양아.”
그저,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뿐이지. 아스펠라가 중얼거렸다.
폐궁에서 길을 잃고, 버려진 야외 온실에 갔을 때 담쟁이들이 아스펠라에게 물었다. 넌 칼리우스와 무슨 사이냐고. 어떻게 우리와 대화를 할 수 있냐고.
아스펠라는 간단히 자신에 대해 소개했다. 자신은 아스펠 산에서 살다 온 이며, 산신 비르가의 가족이다. 그러자 그 안의 식물들이 동요했다.
[산신? 산신의 가족이 여길 왔단 말이야?]
[칼리우스가 그걸 허락했다고?]
산신이 엘리샤를 죽였는데, 칼리우스가 산신의 가족을 들여보냈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아스펠라가 묻자 담쟁이가 말했다. 산신이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였다고 했다. 북쪽 산신이 갑자기 쳐들어와 그들을 죽였다고 했다.
‘산신이 왜 사람을 죽여? 그럴 리가 없어. 산신은…….’
산신은 살생을 하지 않는다. 그게 원칙이랬다. 헌데 어찌하여 북쪽 산신이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담쟁이가 자세히 말하려는데 다른 식물들이 말렸다.
[담쟁이야 말하지 마. 무서워.]
[그래. 무서워. 말하지 마.]
그들은 진심으로 무서워하는 듯 했다. 그날 일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고. 너무 무섭다고. 그러자 담쟁이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자세한 건 칼리우스한테 물어봐. 난 더 이상 말 못해. 너 길 잃은 거랬지?]
그렇게 말한 담쟁이가 아스펠라에게 폐궁에서 나가는 법을 알려줬다. 그리로 나가면 야외 정원으로 이어지니, 그곳에서는 에르윈 성으로 가는 길이 어렵지 않을 거라고.
[빨리 가버려. 난 칼리우스가 무서우니까.]
그들은 다들 경계를 하고 있었고, 무서워했다.
아마도 그날의 참사를 두려워하는 거겠지. 칼리우스에게 그날 얼마나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 지에 대해 들었다.
두려울 것 없어하던 칼리우스가 처음으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날 일에 대해 말하는 그는 차분하고 침착했으며 담담해보였지만 그 아래 짙게 깔린 무기력과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날은 칼리우스의 생일이었으며, 대공 성에서는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고 했다. 수많은 귀족들이 참석해 차기 대공 후계자에게 선물과 인사를 했고, 그중에는 당시 어렸던 왕자 파베스도 있었다.
튀니아의 온 왕족과 귀족이 모인 그날. 그는 부모님과 형제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지옥 구덩이에 빠진 사람들 마냥 비명을 지르고 절규하는 귀족들, 깨진 유리창, 떨어진 샹들리에, 그 밑에 깔린 이들에게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
아버지를 밟은 채로 포효하는 산신과, 커튼을 타고 오르는 뜨거운 불길. 우는 동생과 쓰러진 어머니. 그들 사이에서 칼리우스만 살아남았다 했다.
그날 일은 너무나도 끔찍했고 수많은 귀족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었기에 그 누구도 그 일에 대해 함부로 떠들지 못했다.
파베스가 국왕이 된 후 산신 토벌을 명령했을 때 찬성한 귀족들 대부분이 그날 대공 연회에 참석했던 귀족들이었다 했다.
‘토벌 작전이 시작되고 가장 먼저 북쪽 산신을 찾아갔습니다.’
산신에게 왜 그날 제 가족을 죽였냐고 물었다고 한다. 산신은 지키지 못한 네 잘못이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고 한다. 어쩔 수가 없었다고.
‘그렇다고 내가 산신을 토벌한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건 아닙니다, 아스펠라.’
그렇게 말한 칼리우스가 잠시 뜸을 들이나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비르가에 대한 일은 미안합니다. 가족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의 말을 곱씹던 아스펠라가 후, 길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옆에 있던 하양이는 곤히 잠든 후였다. 긴 시간 동안 아스펠라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분명 궁금하던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에 대한 후련함보다는 무엇인지 모를 또 다른 의문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온실 식물들은, 왜 칼리우스를 무서워하는 거지? 단순히 그날의 일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굳이 따지자면 칼리우스가 아닌, 그의 가족을 죽인 산신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 아니었던가.
‘산신은 어떻게 여기까지 내려온 거지?’
다 말해준다더니.
결코 그는 다 말해주지 않았다.
‘왜? 내가 모든 걸 알면 그를 떠날 것이라 생각하는 걸까.’
뒤척이던 아스펠라가 이내 그만 생각하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에 대해 알게 되었고 조금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으나 속이 후련하지는 않았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를 동정하고 공감했다는 것에 왠지 모를 죄책감도 느껴졌다.
마음이 많이 복잡했다.
***
아스펠라가 돌아간 뒤 칼리우스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 멍하니 뭔가를 생각했다. 시간을 죽이는 듯 했다. 그는 아스펠라의 마지막 질문을 곱씹었다.
‘칼리우스, 혹시 제게…… 더 말해주실 건 없으신가요?’
아스펠라의 눈빛을 가만히 쳐다보던 칼리우스가 이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당신한테 다 말해주겠다고는 했지만.’
‘…….’
‘아스펠라한테 최악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아서요.’
내 밑바닥까지 드러내기엔 아스펠라, 당신은 그 속을 알려주지 않잖아요. 칼리우스의 말에 아스펠라가 이내 어색하게 미소 짓다 물었다.
‘제 속을 알려주면, 칼리우스도 다 말해주실 거예요?’
칼리우스는 그때 아스펠라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이미 눈치를 챘을까.
뭘 알고 있으니 그리 물어보는 걸까.
그럼 이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언제쯤 멈춰야 할까.
방을 밝히던 양초들이 죄 꺼졌다.
다들 잠에 들 시간인데 칼리우스는 꽤 오랜 시간동안 소파에 무기력하게 앉아있었다.
‘거짓말쟁이.’
누군가 칼리우스에게 그리 속삭였다. 여자의 목소리기도 했고 남자의 목소리기도 했고 어린아이의 목소리기도 했다.
‘잘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최악이야.’
‘우리가 누구 때문에 죽었는데.’
그들은 입을 모아 칼리우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했잖아.’
언제까지 모두를 속일 거야? 언제까지 그 여자를 속일 건데? 언제가지 숨길 수 있을 거 같아? 결국엔 다 알게 될 거야. 그날 모든 원흉은 너 때문이라는 걸. 네가 한 짓이잖아!
이내 자리에서 칼리우스가 일어났다. 방 한켠에 비치된 수납장에서 제일 독한 꼬냑을 꺼냈다. 너무 꽉 채우지 않았나 싶을 만큼 술을 따른 칼리우스가 그대로 한 번에 술을 삼켰다.
‘네가 피한다고 해서 그날 일의 진실이 사라져?’
빈 유리잔을 내려놓은 칼리우스가 다시 술을 따랐다. 아스펠라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너 때문에 죽었잖아. 이 살인자야. 네가 산신을 불러들인 거잖아! 네가, 네가!’
술이 왈칵 유리잔에서 넘쳐흘러 책상을 흥건히 적셨다. 줄줄 흐르는 술이 툭, 투둑 칼리우스의 바짓단과 신발 위로 떨어졌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던 칼리우스가 이내 술병과 유리잔을 집어던졌다.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온 방에 울려퍼졌지만 그 누구도 달려오진 않았다.
“……불러들인 건 잘못이 아니야.”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지키지 못한 게 잘못한 거지.”
그때는 어렸다. 뭘 몰랐다. 그저, 재밌는 것을 알려준다는 말에 신나서 따라했을 뿐이다. 파베스가 울면서 사과했잖아. 미안하다고.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칼리우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내 마른세수를 하며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산신을 다 죽였다고 네 죄가 사라진 게 아니잖아.’
‘나는 형아가 매우 매우 고통스러웠으면 좋겠어. 저주받은 그 몸으로 평생 고통 속에 살다가, 혼자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칼리우스는 그런 말에 귀담아듣지 않으려 했다. 저건 진짜 그의 가족이 아니다. 그저 그의 나약한 마음 중 한구석이 만들어낸 환청이고 허상이다.
‘네가 강하다고? 너처럼 나약한 인간은 없을 거다. 그러니 저주를 받은 거지. 가족도 지키지 못하고, 미움받을까 솔직해지지도 못하는 널 누가 사랑해? 그 여자가 널 진짜 사랑해주겠어?’
거짓투성이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공감해주던 아스펠라가 눈물 흘리던 것이 떠올랐다. 그 눈물을 보며 아스펠라가 자신을 동정하는 것이, 공감해주는 것이 기뻤으며, 그 기쁨을 느낌과 동시에 스스로의 혐오감도 짙어졌다.
‘솔직히 말해봐. 너 그 여자 마음 사려고 우리 판 거지? 우리한테 미안한 감정은 단 하나도 없지?’
결국 칼리우스가 조금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만.”
칼리우스의 금안에 붉은색 이채가 띠었다.
나한테 그딴 건 통하지 않아. 칼리우스의 말에 이내 조용하던 목소리들이 동시에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비명으로 변했고 마침내 울음으로 변했다. 그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일순간 조용해졌다.
저주에 걸린 이후부터 종종 몸이 변하기 직전 이런 식으로 그를 어지럽히려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아마 이성을 잃게 만들던 검은 마수가 그를 약하게 만들려고 수를 쓰는 것 같았지만, 칼리우스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저 불쾌감만 줄 뿐이다.
칼리우스가 지치는 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곤 새 술병을 꺼내들었다.
가만히 창가 앞에 서서 구름에 가려진 달이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살폈다. 마치 뭔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가만히 창밖 풍경을 쳐다보던 칼리우스가 이내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얼른 들고 있던 새 꼬냑 잔을 한 입에 털어 마신 그가 이내 책상 위에 잔을 내려놨다.
그런 뒤 책꽂이 쪽으로 향했다. 책 하나를 빼내자 책꽂이가 움직이더니 이내 옆으로 움직이며 열렸다. 책장 뒤에는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깊은 계단이 있었다. 칼리우스는 브라스 촛대를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다시 책꽂이가 드르륵,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펠킨이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대답이 들리지 않자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칼리우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그가 이내 바닥에 산산조각난 술병과 유리잔 파편을 쳐다봤다.
마수에서 인간으로 변할 때는 펠킨이 내려가지만, 인간에서 마수로 변할 때는 칼리우스 혼자 내려간다.
펠킨은 딱 한번 그가 맨 처음으로 인간에서 마수로 변하는 장면을 봤다.
마수에서 인간으로 돌아올 때보다 몇 배는 더 징그럽고 기괴하며 두렵다. 딱 한번 봤을 뿐인데도 그때를 떠올리면 펠킨은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으며, 처음 몇 주 동안은 칼리우스가 무서워 말도 걸지 못했었다.
펠킨이 조심스레 바닥에 떨어진 파편들을 치웠다. 이내 안쪽에서 굉음이 들렸다. 끄아아아악, 낮고도 커다란 비명 소리가 책장 뒤 계단을 통해 흘러나왔다.
짐승의 비명과 사람의 비명이 한데 섞였다. 흡사 폭풍우 치는 밤에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의 절규 같은 소리였다.
그 끔찍한 소리가 새어나올 때마다 펠킨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펠킨은 칼리우스가 마수로 변하기 전, 15년 전의 그 일로 고통받고 있는 걸 잘 알고 있다. 칼리우스는 자신은 그 일에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그리 고통스럽지 않다고 말했지만 그건 스스로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펠킨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때 당시는 펠킨의 아버지가 에르윈 대공의 보좌관이었다. 펠킨과 칼리우스 그리고 파베스는 어린 시절엔 삼총사마냥 셋이 붙어 놀러 다녔다.
짓궂은 꼬마 남자애 셋이서 온갖 놀이를 하며 놀지 않았던가.
“……각하, 그건 각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깨진 유리 조각을 바라보며 펠킨이 중얼거렸다.
칼리우스는 스스로를 속인다. 스스로를 속이면서 더 고통받고 있었다. 그건 그의 무의식이 자기 자신한테 내리는 벌이었다.
펠킨은 칼리우스가 그날 일에 대해 아스펠라에게 모든 걸 제대로 털어놓았다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나약함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감추려고 한다. 이미 충분히 강한데도 더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아마 그의 정신 어딘가가 폐쇄된 궁의 볼룸에 여전히 묶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 궁을 허물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
긴 시간 동안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이는 아스펠라 말고도 있었다.
일카이는 제 동료들이 천둥과도 같은 코골이를 하며 숙면에 취하는 동안 몇 번이고 침대에서 뒤척거렸다.
자신이 지금 왜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 자신이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지. 생각할 것이 워낙에 많아 잠잘 시간도 아까웠기 때문이다.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곤 양팔을 접어 머리 뒤로 기댔다. 진지하게 고민을 해볼까 하는데 옆의 사냥꾼들이 너무 시끄럽게 굴어 영 집중할 수가 없다. 괜히 열이 뻗친 건지, 일카이가 제 베개를 들어다가 옆 침대 동료에게 던졌다.
그러든 말든 묵묵히 코를 골며 자는 제 동료들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아 씨, 나는 누구 때문에 잠도 못 자는데…….”
정작 아스펠라는 한창 꿈나라에 있겠지. 일카이가 후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잠에서 깬 동료가 그에게 물었다.
“잠 안 자냐…….”
그 말에 일카이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형. 나 별론가?”
“뭔 소리야. 빨리 잠이나 자.”
“대답해 빨리.”
“씨이, 너 잘생겼어. 됐냐?”
“아니 그런 거 말고. 남자로서 매력이 없나? 나 누님들한테 꽤 인기 있는 편이잖아.”
그렇지? 응? 나 매력은 있지? 내가 너무 애같이 구나? 그런 편이야? 응? 아, 형 빨리 말해봐. 일카이의 재촉에 잠시 인상을 찌푸리던 동료가 물었다.
“너 진짜 그 여자 좋아하는 거야?”
“뭐?”
일카이가 정색하자 그가 등을 돌려 누우며 말했다.
“어휴, 포기해라. 포기해.”
일카이가 내가 언제 아스펠라 좋아한대? 그런 말도 안 했구만.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라고. 하며 씨알도 안 먹힐 변명을 늘어놨다. 결국 아까 등을 돌려 누웠던 동료가 훽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야. 대공이 탐내는 여자야. 네가 무슨 수로 그 여자를 갖겠냐?”
“아스펠라가 물건이야? 걘 누구 소유도 아니거든?!”
“……그래. 누구 소유도 아닌 것 같긴 하더라. 근데, 그래도 꿈 깨라. 그 여자 너한테 관심 없어.”
“그걸 어떻게 알아?”
“솔직히 말해줘?”
동료의 말에 일카이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봐.”
“솔직히, 들이대는 남자가 둘이야. 하나는 겁나 잘생기고 돈도 많고 지위도 높은 대공이고, 한 놈은 뭐, 잘생겼는데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인데다가 사냥꾼이야. 둘 다 호감 면에서는 같은 점수라 쳐. 그럼 누굴 고르겠냐?”
그러자 일카이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뭔 소리야?”
답답한 듯 동료가 주먹 두 개를 말아 쥐고는 다시 설명했다.
이쪽 주먹이 호랑이, 이쪽 주먹이 토끼.
네가 지금 이 두 마리 짐승 중에서 한 마리를 골라야 한다고 생각해봐. 너 뭐 잡을 거야? 둘 중 하나만 고를 수 있고 둘 다 확실하게 잡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말이야.
그러자 일카이가 대답했다.
“호랑이지.”
“그래. 대공이 호랑이고, 너는 토끼야.”
이제 알아들었냐? 동료의 말에 일카이가 가만히 생각하다 나머지 베개 한 짝을 던졌다.
“아 왜 성질이야. 현실을 직시하라고.”
“대공이 아스펠라를 가지고 노는 거면 어쩔 건데?”
“낸들 아냐? 원래 치정 문제에는 얽히는 거 아니다. 마음 접고 자라. 네가 낄 자리 없어 보인다.”
네가 잘난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대공한테는 상대가 안 되더라, 일카이. 미안하지만 이건 널 진정으로 아끼니까 하는 말이야.
“그 정도야?”
“그래. 네가 신분이 대폭 상승해서 왕자나 국왕이 되거나 아니면 공작의 양자가 되는 게 아닌 이상 절대 불가능해. 아스펠라 양도 잘 보니까 대공한테 마음이 더 있는 것 같던데.”
“그치만 신분 차이는 어떡해.”
“뭔 상관이냐. 같은 남자가 봐도 잘생겼지, 돈도 많지, 다정하지. 다른 귀족들이 눈칫밥 좀 주면 어떠냐. 그리고 감히 그러지도 못할 걸. 대공이 얼마나 무서운데.”
너 대공이 산신 토벌 하는 거 실제로 본 적 없지? 그의 말에 일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본 적 있어. 북쪽 산신 토벌 때였는데. 용병은 아니었고 그 자리에 어쩌다보니 있었거든. 너 그 장면 봤으면 지금 이렇게 건방지게 굴지도 못해.
진짜 무서운 남자야. 피도 눈물도 없다는 게 그런 걸 의미하는 거라고.
“……뭘 봤는데 그렇게 얘기할 정도야?”
일카이의 말에 사내는 잠시 2년 전 북 산신 토벌 때를 상기했다. 조합에 들어가기 전 한창 오만하고 건방졌을 때 제가 직접 산신을 잡겠다며 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물론, 당연히 그 거대한 몸집과 보는 것만으로도 경외를 일으키는 모습에 사지가 부들부들 떨리고 오금이 저려 돌처럼 굳었었다.
그대로 수풀 사이에 숨어 그저 신을 해하려 했던 자신이 얼마나 멍청했던 건지, 또한 지금의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 자괴감에 빠져있을 때였다.
군사를 이끌고 온 에르윈 대공은 두려움 따윈 없었다. 오로지 증오로 가득 찬 그 얼굴로 북 산신의 명치를 칼로 뚫지 않았나.
산신의 피를 뒤집어 쓴 채로, 가만히 숨을 고르던 그 모습을 봤어야 한다.
그 얼굴에 걸린 미소를 봤어야 한다.
병사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북 산신의 목을 잘라냈다. 장정 열 명이 하루 종일 톱질을 해야 겨우 잘리더라. 산신은 목이 잘리고도 숨이 붙어 있었다.
에르윈 대공의 군대는 그날 그곳에 진을 치고 하루 밤을 보냈다.
그때까지도 사냥꾼은 온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했다.
모두가 잠들었을 때 대공이 산신의 목이 나동그라져있는 공터로 나왔다. 둘은 뭔가 대화를 하는 듯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날 불러낸 건 네놈들이지 않았느냐. 날 속이고, 날 함정에 몰아넣었지.」
에르윈 대공이 뭐라 말을 하자 신이 이리 대답했다.
「넌 원래 살아 있을 아이가 아니로구나. 그래. 너였구나. 네가 그 자물쇠들 중 하나였어. 에르윈 가주가 속였구나. 모두를 속였어. 비르가도 날 속였구나.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여, 너는 언젠가 신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나조차도 신의 뜻을 알지 못해 그가 두려운 것을, 너도 느낄 것이다. 두려움과 공포와 무기력으로…….」
에르윈 대공이 그대로 검을 빼들어 북 산신의 눈알을 찔렀다. 검을 휘둘러 그에 묻은 피를 털어낸 대공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그 자비 없는 공포에 덜덜 떨던 사냥꾼은 혹여 발각되어 같은 꼴이 날까 숨 쉬는 것조차 멈췄다.
“형! 대공이 뭘 어쨌길래 그러냐고.”
그의 회상은 일카이의 부름으로 끝이 났다. 잠시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있던 그가 얼른 입을 닫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이불을 끝까지 올린 뒤 말했다.
“아서라. 새치 혀 잘못 놀렸다가 뽑히는 놈 한 두 번 본 게 아니야. 너도 자꾸 파고들지 마. 상대가 안 되는 분이라는 것만 알아둬. 네가 지금 열아홉 살이고, 어려서 뭘 모르는 것 같은데. 진짜 네 안전을 위해 충고하는 거야.”
그렇게 말한 동료는 이제 진짜 말 걸지 말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일카이가 할 말이 사라진 듯 멍하니 그의 등만 쳐다봤다.
도대체 뭘 봤길래 저렇게까지 학을 떼고 파랗게 질려 말하는 건가.
그렇게나 위험하고 무서운 인간이면, 오히려 더더욱 아스펠라를 말려야 하는 것 아닌가?
만일 아스펠라가 대공에게 진심이 되면 어떡하지?
일카이가 답답한 듯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아까 전 대공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며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하던 아스펠라가 떠올랐다.
“젠장, 손 치료해준 건 난데.”
고맙다는 말은 기대도 안 했건만, 걱정하는 사람 앞에서 다른 사람 걱정을 하는 건 정말 너무한 것 아닌가? 일카이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괜히 한번 아까 전 동료를 흘겨봤다.
신분이 대폭 상승하지 않는 이상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니. 그렇게나 대공에게 비할 바가 안 된단 말인가. 왠지 우울해지는 마음에 일카이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입을 삐죽댔다.
***
아스펠라가 일어날 때쯤 대공의 마차가 저택 밖으로 나갔다. 앨리스는 대공이 급한 일 때문에 아침 일찍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식당으로 내려가자 펠킨이 칼리우스가 미리 적어 두고 간 편지를 아스펠라에게 건넸다. 일카이는 잠을 제대로 못잔 건지 퀭한 눈으로 나와 풀 죽은 듯 답지 않게 깨작거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편지를 뜯은 아스펠라가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급하게 출발해 인사를 하지 못하고 가는 점 이해해주길 바란다며, 폐궁의 야외 온실을 잘 부탁한다는 글이 써져 있었다.
“뭐라고 써져 있습니까?”
펠킨도 내용이 궁금했는지 아스펠라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스펠라가 읽기 쉽도록 평소 흘기듯 쓰는 필기체가 아닌 정갈한 글씨체로 써진 편지였다. 그의 필체가 써진 종이 부분을 손으로 살짝 쓸어내린 아스펠라가 얼른 말했다.
“폐궁의 야외 온실을 관리하기로 했거든요. 열심히 온실을 복구해볼게요.”
“폐궁의 온실을, 복구하신다고요?”
“네.”
“그, 그렇군요.”
펠킨은 대체 칼리우스가 무슨 생각인 건지 알 수 없었다. 근 몇 년 동안 버려진 곳을 갑자기 왜?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거길 관리하라고 한단 말인가.
‘혹시, 각하께서 조금은 그날 일에 대해 이겨내신 건가?’
각하께서는 누구보다 그 온실을 꺼려하실 텐데……. 아무쪼록 칼리우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야 상관없겠지. 그리 결론 내린 펠킨이 이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온실 관리인을 불러들일까요?”
“아뇨. 제가 직접 하고 싶어요.”
아스펠라는 삽이나 양동이, 흙을 옮겨 담을 통과 씨앗 몇 가지만 있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 했다. 어쩐지 신나 보이는 아스펠라였다.
식사를 마치고 깜장이를 보러 가려던 아스펠라가 정원에서 애꿎은 꽃잎만 따는 일카이를 불렀다.
“일카이. 오늘 깜장이 보러갈 건데, 같이 내려갈래?”
“그래.”
잠시 시무룩하던 일카이가 이내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아스펠라 옆으로 오며 물었다.
“대공은 언제 돌아오는데?”
“한번 출장 가실 때마다 적어도 한 달은 걸리는 것 같아.”
“무슨 출장이길래 그렇게 오래 간대?”
“모르지. 대공 각하잖아. 할 일이 많으시겠지.”
그러자 일카이가 기분 좋은 듯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 달? 적어도 한 달이라고? 그럼 한 달이 넘을 수도 있겠네.
그러다가 이내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린 듯, 작게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대공이 한 달 넘게 아스펠라 옆을 비우는 최적의 시기에 자신이 딱 붙어 있으려 했건만, 생각해보니 그 역시 사냥제 참가 때문에 동료들과 원정 훈련을 떠나야했다.
아씨. 뭐 이래 진짜!
일카이가 짜증난 듯 씩씩대다가 이내 아스펠라에게 말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아스펠라를 독점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아스펠라. 온실을 가꾼다고 했지?”
“응.”
“그럼 우리 시간 나면 같이 씨앗이나 모종 사러 시장에 갈래?”
“그래, 좋아.”
아스펠라의 말에 일카이가 신나서 작게 세리머니를 했다. 그건 일카이가 정말 기분 좋을 때만 나오는 제스처였다. 아스펠라는 너도 온실 좋아하나 보구나? 하며 물었다.
일카이는 어제는 눈치 없는 아스펠라가 야속했고 오늘은 그런 그녀가 좋았다.
“어. 엄청 좋아해.”
“진짜?”
“응. 내가 우리 엄마 닮았거든. 우리 엄마도 온실 가꾸기 되게 좋아했어. 가난한 평민이 웬 온실이겠냐 싶겠지만 옛날엔 저택에 엄청 큰 온실도 있었다고 하더라고.”
뭐, 그건 누나랑 엄마랑 유모가 했던 말이고. 내가 기억하는 건 꽃을 엄청 좋아하는 엄마 모습이 다야.
일카이의 말에 아스펠라가 잠시 그를 올려다봤다.
“너 알고 보니 도련님이었구나?”
“몰락한 가문도 도련님 취급 해주는 건가? 아무튼, 나 꽃 심고 이러는 거 잘해. 사냥 배우기 전에는 맨날 마당에 꽃만 심었으니까.”
그러니까 나 꽤나 쓸모 있을 거야. 일카이의 말에 아스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네가 원래부터 사냥꾼 집안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
“엄마 죽고 나서는 바로 삼촌이랑 누나 따라서 사냥꾼 조합에서 지냈어. 거의 사냥꾼 집안에서 태어난 거나 다름없어.”
아스펠라가 일카이를 올려다봤다.
“어머니는 언제 돌아가셨어?”
“내가 여섯 살 때쯤인가. 원래 몸이 안 좋으셨어.”
“그렇구나.”
“누나가 고생 좀 했지. 나 돌보고 엄마 병 수발드느라.”
그렇게 말한 일카이가 잠시 입안에 뭐가 난 듯 혀를 굴리다가 샐쭉 웃어보였다. 아스펠라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래도 누나가 널 많이 아꼈나봐.”
“응?”
“그림자 없이 자란 게 티가 나.”
“그래?”
“응. 네 주변은 언제나 환해.”
아스펠라의 말에 일카이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더니 이내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 날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하더라, 등의 점진적 제 자랑이 시작되었다.
그 모습이 그저 귀여워 아스펠라가 가만히 쳐다봤다.
은은한 시선에 일카이가 제 자랑을 멈추곤 빨개진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스펠라. 이제 그만 쳐다봐.”
“왜? 계속해. 듣기 좋은걸.”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일카이가 스스로의 잘남에 대해 자랑스레 얘기할 때마다 마냥 재수 없거나 밉지가 않다 느껴졌다. 물론 귀찮기는 하나, 남들이었으면 불쾌하고 호감도 떨어졌을 말들이 이상하게 일카이가 하면 오히려 조금 귀엽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펠라의 말에 일카이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일부러 저를 놀리는 거라 확신한 일카이가 크흠, 헛기침을 하며 괜히 말을 돌렸다. 멍석 깔아주면 못하는 것이 제 자랑이다.
“근데, 갑자기 온실은 왜 가꾸기로 한 거야? 폐궁의 온실이면 거의 무너진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충분히 살릴 수 있을 거 같아. 살리고 싶었거든. 그리고 보여주고 싶었어.”
아스펠라가 그렇게 대꾸하면서, 한 달이면 온실 형태를 갖추기엔 적당하겠다. 중얼거렸다.
칼리우스가 출장에서 돌아올 때쯤에는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그럴듯한 온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
어젯밤 칼리우스는 아스펠라에게 폐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말해줬다. 버려진 온실에 대한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폐궁의 온실은 어머니가 가꾸셨던 곳입니다. 엘리샤는 어머니의 애칭이거든요.
피아에를리샤. 제 어머니의 이름입니다. 어머니가 그 온실을 정말 아끼셨어요. 저 역시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곳에서 놀기도 했고요. 물론, 산신이 습격했을 때 그곳도 같이 무너졌지만.’
그렇게 말하는 칼리우스의 얼굴에는 쓸쓸함과 그리움이 묻어있었다.
또한 죄책감을 느끼는 건지, 항상 능글맞고 요염하게 올라가 있던 입매가 스륵 내려왔다.
아스펠라는 칼리우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한때 사랑하는 가족과 살던 따듯한 보금자리가 모조리 불타고 부서지고 바스라지는 걸 목격한 그 심정이 어떠한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펠킨도 그렇고 다른 이들이 폐궁을 허물자는 말도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그 성을 허물면, 그 성에서의 기억도 모두 사라질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일 년, 이 년 미뤘고 어쩌다보니 지금까지 남아있던 겁니다.’
이제는 진짜 허물어야겠죠.
그때의 애가 아니니까.
아스펠라는 칼리우스가 너무 쓸쓸해 보여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덥썩 잡았다. 아스펠라의 돌발 행동에 놀란 칼리우스가 길고 날렵한 눈을 살짝 동그랗게 뜨며 쳐다봤다.
‘그 마음 누구보다 잘 이해해요, 칼리우스. 저 또한 아스펠 산을 잃었으니까요.’
‘이해해줘서 고맙군요.’
씁쓸하게 미소 짓는 칼리우스를 안타깝게 쳐다보던 아스펠라가 말을 이었다. 여전히 그의 손을 양손으로 꼭 쥔 채였다. 내가 너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슬퍼한다, 그걸 나타내기 위함이었을까. 칼리우스는 아스펠라가 꼭 쥔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아스펠라는 조금이라도 그가 위안을 얻었으면 했다.
‘저, 그래서 말인데요. 폐궁의 야외 온실을 제가 가꿔보는 건 어떨까요?’
‘……예?’
‘폐궁은 불가능하겠지만, 야외 온실은 제가 살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머니가 많이 아끼셨던 장소라면서요. 추억도 많이 깃들었을 텐데 이대로 방치하는 건 상처를 방치하는 것과 같은 것 같습니다.’
충분히 살릴 수 있는 곳이다. 아스펠라가 자신감에 차 말했다.
아스펠라는 불타버린 산을 지키지 못한 무력감이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였다. 칼리우스는 가족을 잃은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둘 사이의 유일한 공통점인 보금자리를 잃은 그 상처가, 온실을 다시 가꿈으로써 조금이라도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
진지하게 그의 손까지 꼭 잡으며 의견을 피력하자, 칼리우스 역시 재고해보는 듯 했다.
이내 칼리우스가 그래줄 수만 있다면야, 고맙겠습니다. 하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때 그의 미소를 떠올리며 아스펠라가 말했다.
“이번 달은 조금 바쁠 수도 있겠는걸.”
온실을 가꾸는 것은 처음이지만, 아스펠 산의 아이가 못 다룰 동식물이 어디 있을까. 아스펠라가 들뜬 마음으로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일카이는 아스펠라가 갑자기 신나고, 어쩐지 볼이 상기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저게 깜장이를 만나러 가서 좋은 건지, 아니면 온실을 가꿀 생각에 설레서 그러는 건지, 시장 갈 생각에 조급해진 건지, 아니면…….
일카이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앞서 나가는 아스펠라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러다 어젯밤 동료와의 대화가 떠올라 괜히 한숨만 푹 내쉬었다.
***
펠킨은 아스펠라와 일카이를 데리고 지하 동굴로 내려갔다. 이렇게 깊은 지하 계단이 대공 성 밑에 깔려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 한 일카이가, 이 정도면 마수도 숨길만 했겠네, 하며 혀를 내둘렀다.
이내 그들은 커다란 돌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펠킨이 아스펠라에게 말했다.
“그럼, 한 시간마다 확인 차 내려오겠습니다.”
“네. 감사해요.”
펠킨은 거대한 지하 동굴을 둘러보는 일카이를 잠시 걱정스러운 눈으로 살펴봤다. 대공이 허락했으니 별다른 말은 하지 않는 것이지만, 사실 펠킨은 일카이가 이곳에 내려오는 것을 반대하는 쪽이었다.
‘각하. 일카이 군은 사냥꾼입니다. 사냥꾼은 촉이 발달한 부류 아닙니까. 만일 뭔가를 눈치채기라도 한다면 어쩌시려고요.’
오크몬드 사냥꾼들이 에르윈 성에 들어온 날, 펠킨은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아내 칼리우스에게 보고했다. 그들이 튀니아 최고의 사냥 조합이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보통의 인간들보다 훨씬 더 예민한 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자그마한 것으로도 짐승에 대한 것을 추론하여 그들을 쫓아가는 것이 사냥꾼 아니던가.
특히나 일카이는 그저 수더분하며 젊음과 체력과 체격으로 대장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고작 그런 걸로 대장 자리에 앉기에는 그 밑에 부하 자리의 다른 사냥꾼들 역시 만만찮았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사냥해본 귀족들은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의 출신이 미천하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왕실 근위대장까지 올라갔을 이라고 말했다.
사냥할 때의 일카이는 매우 날카롭고 예민한 관찰력을 뽐낸다고 했다. 움직이는 것 또한 매우 날쌔다고.
에르윈 대공이 산신 토벌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놈이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두어 번 사냥을 함께 해봤다던 공작이 그리 말할 정도라면 그의 실력은 이미 검증된 것이다.
펠킨은 일카이가 언젠가는 칼리우스에게 큰 위험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하지만 칼리우스는 그것보단 다른 것에 더 관심 있었다.
‘아니. 사라에 대해 숨기는 게 있는지, 조금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카이는 대공을 대놓고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라 경이 정말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고 있었을까요?’
‘편지 내용을 보면 그렇게 써져 있잖아. 아버지의 저주를 풀 수 있었는데 실패했다고. 자긴 이제 곧 죽을 거라고.’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정리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어떤 파란을 초래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주에 관한 연구는 한데 모아 간책으로 만들어 저와 일카이만이 아는 곳에 숨겨뒀습니다.
존경하는 대공 각하. 제 동생을 부디 각하의 사람으로 받아주십시오. 그가 우리의 이복형제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십시오. 하여 건방지게도 제가 감히 이런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아마 각하께서 이 편지를 읽고 계실 때쯤에는, 그 간책이 틀림없이 필요하시겠지요…….>
‘그렇다면 사라 경은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무려 5년 전의 일인데요. 각하께서 저주를 받은 건 3년 전 아니십니까?’
미래를 내다본 것도 아니고 사라는 어떻게 그 모든 일을 미리 알았을까? 펠킨이 그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
한편 동굴 안에 들어간 두 사람은 가만히 깜장이를 기다렸다. 일카이가 아스펠라에게 물었다.
“왜 안 나타나지?”
“아마, 숨은 걸지도 몰라. 평소랑은 전혀 다른 냄새가 나니까.”
그렇게 말한 아스펠라가 양손을 입에 가져다 댄 뒤 이름을 불렀다. 깜장아! 깜장아! 괜찮아, 나와도 돼. 안전한 사람이야. 네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니까 이리 나오렴.
조금 지나자 검은 마수가 안쪽 동굴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장성한 성인 남자의 키를 한참 웃돌 정도로 거대한 몸체를 가진 검은 마수는 윤기 나는 검은 털과 피로 물든 듯한 새빨간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길게 뻗은 주둥이 아래 뾰족하고 거대한 송곳니와 이빨들은 사람을 긴장케 만들었다.
“저걸 깜장이라 부르는 네가 참 대단하다.”
경외와 두려움을 일으키는 모습에 일카이가 잠시 당황한 듯 주춤댔다.
하양이를 떼놓고 오길 잘한 듯싶다. 계단 근처까지 신나서 꼬리를 살랑 흔들던 놈이 몇 번 계단 안쪽 냄새를 맡고 학을 떼며 도망가지 않던가. 아마 그 작고 하얀 강아지가 저 깜장이란 괴수를 봤다면 개거품 물고 기절했을 것이 분명했다.
“허, 허…….”
일카이는 제 오금이 살짝 저려오는 걸 느꼈다. 그게 정상이었다. 어째 광장에서 봤을 때보다 몸집이 더 커진 듯하다.
“깜장아!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응? 어디 아픈 덴 없고? 미안해. 더 자주 오고 싶었는데…….”
아스펠라는 깜장이의 주둥이를 꽉 껴안으며 그의 미간 사이를 슬슬 쓸었다. 마치 오랜 가족을 재회한 듯한 모습에 일카이는 할 말이 사라졌다.
검은 마수는 아스펠라에게 커다란 주둥이를 한번 들이대곤, 눈을 감고 아스펠라의 손길을 느꼈다. 그러다가 다시 한 번 일카이를 쳐다보고는 이빨을 드러내 낮게 그륵 댔다. 잔뜩 인상 쓴 얼굴이 누가 봐도 그를 경계하고 환영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지 마, 깜장아. 너한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대서 온 거야. 절대 널 안 해칠 거야.”
한참 일카이를 쳐다보던 검은 마수가 이내 고개를 훽 돌려버렸다. 그리고는 아스펠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마치 네놈 같은 건 상관도 안 하겠다는 듯 무시하는 모양새라 일카이가 빈정이 상했다.
재수 없는데다가 아스펠라한테만 꼬리 흔드는 꼴이 제 주인이랑 꼭 닮았군. 일카이가 속으로 생각했다.
“일카이. 겁먹은 거야? 얼른 와. 깜장이는 무서워할 필요 없어.”
속편한 아스펠라는 어느새 앞발을 베고 엎드린 깜장이에게 기대 갈기를 만져주고 주둥이를 쓸어주며 온갖 애정을 퍼붓고 있었다.
그러면서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일카이에게 얼른 이리 와서 물어보라며 손짓했다. 일카이가 이내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
***
3구 촛대를 들고 계단을 내려간 칼리우스가 이내 지하 동굴에 도착했다.
칼리우스 방의 비밀 통로에서 이어지는 이곳은 원래 이럴 용도로 사용할 목적이 아니었다. 이곳은 선대 에르윈 가주가 자신의 아내인 피아에를리샤를 위해 지하 동굴 정원을 만들기 위해 준비한 곳이었다.
어머니는 이곳을 지하 정원으로 만들 생각에 매우 설레 했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보며 행복해 하셨다.
보렴, 칼리우스. 저 강에 작은 나룻배를 띄울 거란다. 밤이 되었을 때의 동굴을 본 적 있니?
밤의 동굴은 정말로 아름답단다. 수많은 별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 같지.
정원이 완성되면 우리, 나룻배를 타고 정원을 돌아다니자. 어때? 생각만 해도 너무 아름다울 것 같지 않니?
어머니의 말씀대로 밤의 동굴은 아름다웠다.
동굴을 가로지르는 지하 강물은 은하수가 그대로 쏟아진 듯 흐르고 있었으며, 기둥처럼 솟아 있는 석주들 사이로 광물들이 반딧불이처럼 빛을 띠었다. 높은 천장 일부가 뚫려 지상으로 연결되어 보이는 밤의 하늘에서는 달이 은은하게 동굴 전체를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낭만을 품고 있는 장소는 이제 칼리우스가 벌을 받기 위한 곳으로 변했다.
칼리우스가 촛대를 떨어뜨리며 몸을 수그렸다.
작은 인간의 몸에서 거대한 마수로 변신하는 것은 정말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몸 안에서 뭔가가 잔뜩 뚫고 나오며 그의 몸을 터트릴 것 같았다. 이내 칼리우스가 주저앉았다. 온몸을 기괴하게 뒤틀자 몸 안에서 뼛조각들이 툭, 툭 튀어나왔다.
이를 악물어 봐도 결국엔 고통에 찬 비명이 흘러나왔다.
이내 몸에 털이 돋아나며 몸집이 점진적으로 커지길 반복했다. 얼굴이 일그러지며 금수의 모습으로 변했다.
끼잉, 낑, 끼이이잉…….
지친 듯 칼리우스가 그대로 쓰러졌다. 모습이 변한 직후에는 너무 고통스럽고 뜨거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으로서의 이성을 완전히 잃는다. 자아가 두 갈래로 나뉘는 느낌이 들며, 인간 칼리우스는 온몸이 결박당해 구석에 처박힌다.
그의 몸을 장악하는 검은 마수는 살의에 가득 찬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해 계속해서 동굴 벽에 제 머리를 가져다 박거나, 애처롭게 울어댔다.
그러다 기절하고, 다시 깨어나 자해를 하고 또 기절하기를 반복한다.
그게 아스펠라가 동굴에 오기 전까지의 일들이었다.
기절한 칼리우스의 귓가에 아스펠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깜장아, 깜장아! 참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이지만 칼리우스의 귀가 저절로 반응했다.
아스펠라가 그의 곁에 다가오면 칼리우스는 신기하게도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결박당해 처박혀 있던 그의 몸이 풀리는 기분과 함께, 정신이 점점 돌아오기 시작한다.
몇 번이나 머리통을 동굴 벽에 박는 바람에 눈앞이 아직 흐릿하고 뿌옇게 보였지만, 그는 아스펠라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스펠라의 냄새가 짙어졌다. 가까워졌고 이내 그녀의 손길이 저를 쓰다듬는 걸 느꼈다. 안도감이 찾아왔다.
그와 동시에 아주 지독한 냄새가 풍겨왔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본능적으로 경계를 하자 아스펠라가 얼른 갈기를 쓸어주며 안심시켰다.
‘아. 그 사냥꾼이군.’
흐릿했던 눈이 점점 초점을 맞추자 당황한 듯한 일카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당황한 눈빛 속에 두려움과 혐오도 언뜻 보였다.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마주할 때면, 순간적으로 검은 마수가 그의 몸을 장악하는 느낌이 든다. 아스펠라 곁에서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그녀는 검은 마수를 보고도 절대 두려워하거나 혐오하지 않기 때문일 걸까.
아무튼, 검은 마수의 상태에서 일카이를 봐도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변함없었다.
저 지독한 냄새를 솔솔 풍기는 인간이 빨리 꺼져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스펠라 옆에 엎드려 앉자, 아스펠라가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 일카이가 가까이 와도 되지?”
그러라는 듯 콧김을 내뿜으며 눈을 감자 아스펠라가 얼른 일카이를 불렀다. 일카이가 다가와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얼쯤하게 서 있었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앉아 있어, 일카이.”
아스펠라의 말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일카이가 칼리우스에게 물었다.
“어, 안녕. 까, 깜장아.”
안 그래도 깜장이라는 이름이 영 마음에 안 드는데, 마음에 안 드는 놈이 깜장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니 어째 수치스럽고 짜증이 난다.
일카이는 조금 친해지겠답시고 제 냄새를 맡을 수 있게 손을 슬쩍 뻗었다.
[손 치우라고 해. 냄새 이상하니까.]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에게 말했다. 아스펠라가 당황한 듯 깜장이와 일카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일카이는 깜장이가 저를 보고 또 낮게 그르르 대는 걸 분명 들었고, 당황한 아스펠라의 얼굴도 봤다.
“얘가 뭐래? 얘 지금 내 욕 했어?”
동물과 대화는 못해도, 얼추 분위기는 읽을 수 있지 않나. 일카이의 말에 아스펠라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직은 마음을 다 안 연 것뿐이야.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라.”
[내가 이웃집 개새끼도 아니고 손 내밀면 배 보여줄 줄 알았냐고도 전해주겠어, 아스펠라?]
“너, 너랑은 친해지고 싶지만 그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대.”
[통역 한 번 대단하군.]
칼리우스는 안간힘을 다해 좋게 전하려는 아스펠라가 그저 웃길 뿐이었다. 아스펠라의 말을 영 믿지 못하는 일카이가 미심쩍은 눈으로 깜장이를 쳐다봤다.
[물어볼 거 빨리 물어보고 꺼져.]
“궁금한 게 있으면 성심성의껏 답변해주겠대.”
그 말에 일카이가 진짜로? 진짜 그렇게 말하는 거 맞아? 눈으로 나한테 욕하는 거 같은데 그렇게 착하게 말한다고? 하며 바닥에 앉았다.
그러더니 이내 품속에서 꼬깃꼬깃 접은 종이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물어보려는 것이 아닌 건지, 그 안에는 물어볼 것들을 정리해놓은 듯했다.
“그냥 물어보면 되는 거야, 아스펠라?”
“응. 사람 말은 다 알아듣거든.”
“……그럼 먼저 첫 번째. 너, 에르윈 대공의 성에서는 언제부터 지냈어?”
[그건 왜 물어보는데?]
“그건 왜 물어보냐는데?”
“아, 우리 누나가 대공 밑에서 일했을 때랑 시기가 겹치는지 궁금해서. 만약 겹치는 시기가 아니라면 잘 모를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칼리우스는 이내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꽤나 세심하게 물어볼 생각인가 보군. 마음 같아서는 아무것도 모르니 앞으로 이곳엔 얼씬도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사라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건 칼리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꽤 오래 됐어.]
“꽤 오래 됐대. 아마 정확한 건 기억이 안 나나봐.”
“그럼 혹시 대공 밑에서 일하던 용병들에 대해 기억해? 머리카락은 짙은 갈색이고, 나랑 비슷하게 생겼어. 얼굴에 주근깨도 있고. 이름은 사라야.”
[기억해.]
“기억한대, 일카이!”
그러자 일카이가 조금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눈 한쪽이 애꾸인 검은 마수를 알아? 혹시, 검은 마수들끼리는 멀리서도 서로를 부르거나 할 수 있어?”
[부를 수는 없지만 알고는 있어. 사라가 그 검은 마수와 가깝게 지냈으니까. 그 검은 마수가 사라를 죽였다는 게 사실인가? 네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게 맞는 거야?]
아스펠라는 깜장이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일카이에게 전했다. 일카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내 누이는 몸이 반으로 뜯겨지다시피 해서 죽었어. 그건 필시 짐승의 짓이 맞아.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거라고. 죽기 전에 검은 마수를 반복해서 불렀어. 그래서 그가 한 짓이 아닐까 생각하는 거야.”
손이 살짝 떨렸고, 그 손에 들린 쪽지가 이내 구겨졌다.
[굳이 나한테 와서 묻는 이유가 뭐지?]
아스펠라가 일카이에게 물었다. 일카이. 왜 대공을 바로 찾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묻는 거야? 그 말에 일카이가 콧방귀를 끼며 답했다.
“대공은 믿을 수 없어. 누이가 죽은 그날, 대공을 만나고 왔었으니까. 그는 누이의 장례식에 오지도 않았어. 조합 대장이 죽었다고 전보까지 보냈는데, 보통 아무리 용병이어도 몇 년을 함께 일했으면 최소한의 성의라도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닌가? 사냥꾼에게는 볼일 없다는 건지.”
일카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게 진짜 에르윈 대공이었어?]
“일카이, 네 누이가 그날 만난 이가 진짜 대공인지 확실하냐는데?”
“누나는 귀족들을 사적으로 만나지 않아. 다만 에르윈 대공만은 예외였지. 둘이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 단 한 번도 거짓말 한 적 없는 사람이야. 그리고, 대공을 만나러 갈 때는 항상 같은 옷을 입고 갔거든. ……설마,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나?”
[절대 그럴 리 없어.]
일카이의 말에 검은 마수가 대답했다.
[그런 사이 아니야, 아스펠라. 사라가 죽은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런 사이는 전혀 아니었으니 오해하지 마.]
잠시 당황한 듯 멍하니 땅바닥을 쳐다보던 아스펠라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일카이에게 말을 전했다. 그러자 일카이가 발끈하여 물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사라는 따로 연인이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그를 만나러 가는 걸 숨기려 둘러댄 걸지도 모르지.]
대답을 전해들은 일카이가 절대 그럴 리 없다며 말했다.
“항상 화려한 마차가 누이를 데리러 왔었어. 아직도 생생히 기억해. 누이는 마차가 올 때마다 나보고 숨어 있으라 했거든.”
[……사라에 대해 더 말해봐.]
일카이는 제 누나에 대해 기억나는 걸 말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몸이 매우 약했고, 정신적으로도 많이 아픈 사람이었다. 그래서 실질적인 가장은 사라였다. 사라는 열 살 때부터 사냥을 배웠다. 재능이 상당해 조합의 사냥꾼들이 곧잘 데리고 다녔으며 그녀가 열넷이 되었을 때쯤엔 사냥도 같이 했다.
열아홉에는 조합의 부대장이 되었고, 스물이 되었을 때는 대장이 되었다. 조합 최초의 여자 사냥꾼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때쯤 사라가 대공의 용병으로 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가 사냥을 하게 된 건 누이가 죽고 나서부터였어. 누이는 내가 사냥꾼이 되는 걸 싫어했거든. 그냥 평생 작은 산속 마을에서 유모와 함께 살길 바랐어.”
귀족들은 지긋지긋하고 역겹다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 정말 탐욕스럽기 그지없다고. 그런 이들을 네가 상대할 필요는 없다며,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조용히 살길 바란다고 했다.
그랬던 사람이 언제부턴가 밤만 되면 누군가를 만나러 갔다.
항상 일카이가 자는 걸 확인하고 가는 걸로 보아 연인을 만나러 가는 거라 생각했다.
자는 척 하며 몰래 창밖을 내다본 일카이는 누이가 귀족의 마차로 보이는 것에 올라타는 걸 확인했다.
후에 누이에게 그날 마차를 봤다, 누굴 만난 것이냐 묻자 누이는 조금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이내 대공을 만나고 온 것이라 대답했다. 그러더니 일카이의 어깨를 잡고선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일카이. 마차가 오면 무조건 숨어. 알았어? 만약 내가 없을 때 집에 그런 마차가 오면, 아니. 그냥 집에 유모와 네가 아는 사냥꾼들 외의 다른 사람이 오면 무조건 숨어. 알았어?!’
‘그럼 엄마는?’
‘……너만 숨으면 돼. 너만. 엄마는 괜찮아. 알아들었니? 무조건이야. 약속해.’
누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면 일카이는 제대로 된 이유도 모른 채 그리하겠다며 똑같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잠시 어린 시절 회상을 마친 일카이가 이내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사실, 내가 대공의 저택에 들어온 이유는 아스펠라 때문도 있지만―”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검은 마수의 눈이 잠시 커졌다.
“죽은 누이한테서 편지가 왔기 때문이야. 지금 이걸 말해도 되나 싶지만, 아스펠라. 이 편지 안에는 네 이야기도 있어.”
“내 이야기가?”
아스펠라는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듯 물었다. 하지만 나는 네 누이를 만난 적이 없는데. 잠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검은 마수가 아스펠라에게 말했다.
[아스펠라. 편지 내용을 보여줘.]
“일카이. 편지 내용을 보여달래.”
그러자 일카이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미안하지만, 편지 내용은 다 보여줄 수 없을 것 같아. 어찌되었든 넌 대공의 애완견이잖아. 나는 그저 누이와 검은 마수에 대해 알고 있는지만 물으려 했던 거고, 저 검은 마수 자체를 믿진 못하겠어.”
[에르윈한테도 사라의 편지가 하나 왔어.]
대공한테도 사라의 편지가 도착했다는 말에, 일카이의 표정이 굳었다. 아스펠라 역시 말을 전하면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나눈 이야기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을 뿐이다.
검은 마수에게 공격받아 죽은 불행한 누이와, 그 누이의 복수를 하려는 남동생의 이야기에서만 그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공한테, 누이의 편지가 왔다고?”
[그 역시 너한테도 편지가 온 줄은 모를 거다. 편지 내용을 보여줘. 그렇다면 나 역시 그의 편지 내용을 알려주마.]
아스펠라가 말을 전하자 일카이가 영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려주겠다는 건데? 대공이 그렇게나 널 신용한단 말이야?”
[아니면 그냥 네가 직접 찾아가 말하던지. 네가 그를 믿지 못하겠으니까 나한테 온 것 아닌가?]
일카이에게 말을 전한 아스펠라가 자신 역시 그 편지 안에 어째서 제 이야기가 있는 건지 궁금하다고 말을 덧붙였다.
이내 일카이가 결심한 듯 말했다.
“그래. 대공보다는 네가 더 믿을만할 거 같다. 자, 아스펠라. 여기서부터 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아스펠라가 잠시 당황했다. 아직 모든 글자를 다 읽을 줄 아는 건 아닌데. 네가 읽어줄래, 일카이? 하려던 아스펠라는 깜장이가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스펠라. 편지를 보여줘. 내가 읽어볼 테니.]
“응? 너 글도 읽을 줄 알아?”
[……어쩌다 보니.]
대충 말을 뭉뚱그리는 그의 모습에 아스펠라는 살짝 의아함을 가졌지만, 이내 그의 눈앞에 종이를 가져갔다.
칼리우스는 빠르게 편지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라가 비르가를 만난 적이 있던 것 같군.]
“일카이의 누이 분께서 비르가를 만난 적이 있다고?”
아스펠라가 얼른 그 부분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어려운 단어 몇 개는 넘어가고, 대충 눈에 읽히는 것으로는, 비르가, 상처, 치료, 구제, 보답, 미래 등이었다.
아스펠라가 문득 떠오른 것이 있는 듯 아,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큰 몸집으로 변할 때는 산신으로서의 위엄을 위해서고 강력한 힘을 사용할 때이며, 노인의 모습을 할 때는 인간 세상에 내려갈 때. 비르가는 종종 원래 모습인 늑대의 모습으로 산 이곳저곳을 누비는 걸 좋아했다.
“언제인지 알 것 같아. 비르가가 늑대의 모습으로 다니다가 사냥꾼들이 쏜 화살에 맞은 적이 있었거든.”
그때 누가 상처를 치료해 줬었는데, 그게 누이 분이었나 봐. 그렇게 말한 아스펠라가 그래도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비르가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미래를 귀뜸해준 건가?”
일카이가 답답한 듯 제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아니, 누이는 왜 이렇게 말을 돌려서 쓴 거야? 그냥 정확히 어떤 미래고 어떤 놈이 나쁜 놈이다, 뭘 어떻게 해라! 이렇게 알려주면 좋을 것을.”
“신의 예언은 정확한 미래를 알려주지 않아. 해석하기 나름이지. 게다가 미래를 아는 대신 그걸 모두 누설했다가는 규칙을 어기게 되니까.”
“규칙?”
“응, 산신 너머 저 우주의 규칙이랬어. 비르가도 그래서 정확한 미래를 알려주진 못해. 그저 볼 뿐이지.”
아스펠라가 그렇게 말하며 동굴 천장 너머를 가리켰다.
“왜 규칙을 따르는데?”
“산신 말고도 우주 너머 태초의 신이 있으니까.”
일카이는 더 이상 얘기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는 동안 칼리우스는 마지막 단락의 글을 읽어 내려갔다.
<일카이. 예견된 미래는 무조건 그대로 흘러가진 않는다고 하더구나. 난 수많은 갈래 중 하나의 미래를 봤고, 어떻게 끝이 나는지 알게 되었어. 그 미래는 어두웠다. 그래서 나는 운명이라는 걸 거스르려 한다.
내 선택이 잘못되었다 생각하지는 않아. 그러니 너도 나의 선택을 너무 원망하지 않았으면 해. 때로는 포기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 있으니.
검은 마수를 쫓아가렴. 대공도, 아스펠라 양도 모두 한곳에서 모이게 되어 있다.>
사라 역시 모든 것을 자세히 알지는 못한 것 같았다. 다만 칼리우스가 신의 저주를 받고 검은 마수로 변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일카이의 편지에는 쓰지 않는 듯 했다.
그녀가 본 미래는 정확히 어떤 것이지?
“깜장이. 이제 너도 누이가 대공한테 어떤 편지를 보낸 건지 알아봐 줘. 그리고 추신 글 봤지? 내가 왜 대공을 안 믿는지.”
<대공의 사람이 되어야겠지만, 그를 너무 믿진 말아라. 대공은 원래 그 자신 말고 누구도 믿지 않아. 그리고 딱히 널 좋아하지도 않을 테니 잘 보이려 애쓰지 마. 대공은 원래 재수가 좀 없다.>
일카이가 친절하게 추신 글을 읊어줬다. 아스펠라가 풉,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사라도 원래 재수 없었어.]
아스펠라가 일카이에게 전달했다.
“……깜장이도 대공이 재수 없는 거 동의한대.”
[아스펠라.]
“대공이 재수는 좀 없지만, 알고 보면 참 좋은 사람이야. 그치, 깜장아?”
아스펠라가 마수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검은 마수는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좋은 사람인 건 모르겠고, 깜장이 너 알고 보니 사람 볼 줄 아는구나? 우리 꽤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앞으로 잘 부탁한다. 나도 종종 내려와서 놀아줄게.”
내가 내일부터 원정 훈련만 가는 게 아니었으면, 매일 와서 아스펠라랑 같이 놀아주는 건데. 너무 서운해 하지는 말고. 일카이의 말에 칼리우스는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말해봤자 제 입만 아플 일이었다. 칼리우스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자신의 선택에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
한편, 펠킨은 제가 모시는 대공이 면전에서 재수가 없다느니, 놀아준다느니 등의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열심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아스펠라와 일카이를 지하 동굴에 데려다주고 난 뒤 성으로 올라온 펠킨은 칼리우스의 그림자들을 불렀다. 그들은 주로 몰래 잠입하여 정보를 빼오거나 하는 등의 매우 특수한 상황에서만 부르는 이들이었다.
칼리우스의 성격상 몰래 숨어들어 쥐새끼마냥 정보 빼오는 것을 싫어해 웬만한 일이 아니면 그들을 불러내진 않았다. 다만, 이번은 예외였다.
그들 중 우두머리가 어느새 펠킨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다가오는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지만 펠킨은 놀란 기색을 숨기고 태연하게 말했다.
“각하께서는 이번 일을 매우 신경 쓰고 계시다네.”
“예, 펠킨 님.”
“한 치의 실수도 없어야 할 것이야. 물론 더더욱 그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되고. 상대가 상대인 만큼 쉽게 빈틈을 보이지 않을 거다.”
만일 정체가 발각되면 이들은 그 자리에서 무조건 자결해야 한다. 그리 교육받았고 실제로 그렇게 최후를 맞이한 이들도 존재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언제나처럼 무운을 비마.”
이내 그림자가 사라졌다. 펠킨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모든 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뤄져야 했다. 칼리우스가 내린 전제가 모두 들어맞아야 했다.
그 전제 중 하나는, 국왕 파베스가 이 모든 일들의 원흉이며, 앞으로 일어날 모든 것들의 주범이라는 것이었다. 가장 큰 전제였으며 그것이 맞지 않는 한 모든 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펠킨은 과연 그게 맞을지 계속해서 의구심이 들었다.
아무리 칼리우스가 틀린 적이 없다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재차 물었다.
‘각하, 그게 정말일까요? 정말, 전하께서 그렇게까지 하시려는 걸까요? 만약 아니면요? 일이 하나라도 틀어지면 어쩝니까?’
칼리우스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다 죽는 것 아니겠느냐.’
살면서 그렇게나 권태롭고 무심하게 반역에 임하는 이가 있을까. 아마 칼리우스 밖에 없을 것이다.
***
아스펠라는 일카이의 도움을 받아 폐궁의 온실을 한 차례 솎아냈다. 깨진 유리창 조각을 치워내고 그 밑에 깔린 덤불들이나 죽은 식물들을 거뒀다. 수리업자가 와서 새 유리벽을 설치하자, 외관만 번듯해졌는데도 나름 그럴싸했다.
온실 안의 식물들은 갑자기 찾아온 사람들과 변화에 당황한 듯 웅성거렸다. 아스펠라는 그들에게 자신이 이곳을 다시 전처럼 돌려놓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러자 벽을 타고 올라간 거대한 담쟁이 넝쿨이 물었다.
[칼리우스가 그걸 허락했어?]
“응.”
그러자 다들 진짜로? 걔가? 으, 난 칼리우스가 너무 무서워 등의 저번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아스펠라는 주변을 둘러보곤 자신밖에 없는 걸 확인한 뒤 물었다.
“저번부터, 왜 자꾸 칼리우스가 무섭다는 거야?”
[몰라서 물어? 칼리우스가 아무 말도 안 해줬어?]
“응.”
[그럼 우리도 말 못해. 말했다가는 저번처럼 온 줄기들이 뿌리까지 뽑히고 말거야.]
아무튼 걔는 진짜 무서워. 무섭다고 하며 식물들이 불안해했다.
아스펠라는 너무 오래 방치되어 원망스러운 마음이 든 것이라 치부하고, 마저 온실을 정리했다.
그 다음날이 되자 일카이와 함께 시장에서 사온 새로운 씨앗들과 모종을 심기 시작했고, 그 다음날에는 묘목을 데려오기도 했다.
하루 종일 흙바닥을 토닥대고 삽질을 하던 일카이가 물었다.
“이것들이 자라려면 꽤 오래 걸리겠다, 아스펠라. 설마 여기서 정원사 일도 대신해주지는 않을 거지?”
그의 물음에 아스펠라가 그게 대체 뭔 소리냐고 되물었다.
“생각해 봐. 네가 평생 깜장이를 봐주지는 않을 거 아니야.”
“못할 게 뭐가 있어?”
“그럼 계속 여기서 지낼 거야? 만약에 대공이 다른 귀족 영애와 약혼이라도 하면?”
“그거까진 생각 안 해봤는데.”
아스펠라의 말에 일카이가 진지하게 삽을 내려놓곤 아스펠라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더니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스펠라를 지긋이 바라보다 이내 후, 한숨을 내쉬었다.
“아스펠라. 설마 대공과 결혼할 생각이야?”
“뭐? ……아, 아니?!”
“어째 대답에 공백이 있다? 예전에는 곧잘 말하더니. 아무튼,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널 깎아내리려는 게 아니야. 넌 정말 충분히 멋진 여자거든?”
일카이가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근데 네가 멋진 여자인 것과, 대공이 널 지금 마음에 들어 하는 것과, 혹여나 네가 대공을 좋아하는 것은 모두 별개야.”
귀족은 귀족끼리. 평민은 평민끼리. 그게 암묵적인 규칙 아니던가.
그걸 깨는 이들은 그 어떤 높은 작위의 인물이어도 다른 귀족들의 입방아에 안 좋은 식으로 오르내렸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고, 언젠가는 사랑이 끝이 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만, 너만 바보 되는 거야. 알아?”
“…….”
그렇게 말하는 일카이는 아스펠라를 통해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듯 했다.
아스펠라가 물었다.
“일카이. 네가 경험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데, 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그의 말에 일카이가 머뭇거리다 이내 대답했다.
“……우리 엄마.”
“응?”
“우리 어머니가 그랬어.”
일카이의 표정이 잠시 아득해졌다.
“난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지만, 정말 증오해. 엄마를 제대로 지켜주지도 않았고, 우릴 버렸어. 가난한 삶 때문에 원망하는 게 아니야. 아버지 때문에 엄마는 미쳤어.”
우리 엄마는 그 아버지란 놈 때문에 미친 거라고.
일카이가 중얼거렸다.
누이는 아버지에 대해 아는 듯했으나 언제나 비밀로 숨겼다. 그를 돌봐주던 유모 역시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어머니는 매일 멍한 눈으로 창밖 너머 누군가를 기다렸다.
이따금 정신이 드는 날에는 사라와 일카이에게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귀한 분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너희도 귀한 이가 될 것이라 말했다.
어렸을 땐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귀족들의 부름을 받고 그들의 세계에 조금씩 발을 담그게 되면서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의 처지가 어떠한 것인지도.
가문조차 없는 한미한 집안의 딸. 그리고 그와 정반대되는 고위 귀족의 사랑.
어머니에게는 평생의 사랑이었어도, 귀족에게는 그저 잠깐의 유희였을 것이다.
자신을 보호해주거나 기댈 가문도 없던 어머니는 버려졌다. 그 충격에 미쳐 정신이 나갔을 것이고, 누이는 너무 일찍 철이 들어야했다.
“누이가 나한테 뭘 숨기려 한 것인지 알 것 같아. 아마 고위 귀족들 중 한 명이 내 아버지겠지. 그러니 산에 숨어 사는 거고. 누이는 내가 사냥일 하는 걸 반대하기도 했었으니까. 귀족들과의 접점이 없었으면 했던 거겠지.”
그렇게 말한 일카이가 비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근데 난 오히려 그 아비 되는 인간 얼굴 좀 보고 싶어서 더 쌔빠지게 귀족들 집 드나드는 거야. 혹시 몰라? 그 집 유일한 아들이 죽어서 내가 가문을 물려받게 될지.”
이죽대는 일카이를 아스펠라가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다 이내 손을 들어 그의 등을 토닥였다. 발뒤꿈치를 든 뒤 일카이의 정수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뭐야?”
“참 고민 많았겠다, 속상했겠다 싶어서.”
“속상하진 않아.”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스펠라가 생긋 웃자, 일카이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러더니 이내 아! 진짜 이게 아닌데! 하며 성을 내기 시작했다.
“아스펠라! 나는 지금 너한테 경고해주고 있는 거야. 너, 너한테 위로 받자는 게 아니고! 앞으로 머리 막 쓰다듬거나 등 토닥대지 마.”
“알았어. 이제 절대 안 그럴게. 미안.”
“아니 아예 그러지 말라는 건 아니고. 아무튼, 내 말 알아들었어? 요지는―”
“일카이. 나 걱정해줘서 고마워. 넌 정말 좋은 사람이야. 네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알아들었어. 나도 알아.”
“…….”
“네 말대로 난 멋진 여자라 생각하기로 했거든. 난 멋진 여자니까, 천하의 대공이 날 좀 좋아할 수도 있는 거지. 그렇다고 거기에 매달리지는 않을게.”
아스펠라가 제 어깨 위에 손을 올린 일카이의 손을 꼭 잡으며 말을 이었다.
맨 처음엔 그의 마음을 믿지 않았다.
말도 안 되니까.
천하의 대공이 나를 왜 좋아해? 내가 어디가 좋아서? 내가 뭐라고.
근데 그렇게 생각하니까 스스로를 자꾸 깎아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스펠라는 더 이상 그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신분을 뛰어넘는 위대한 참사랑을 믿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믿기로 했다.
“나도 정말 오랫동안 고민했어. 뭘 믿어야 할지. 이제부터 나는 나를 제일 믿을 거야.”
모든 것은 아스펠라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고 결정이었으니,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후회를 한다 해도 그것 역시 자신의 선택이었다. 아스펠라는 자신이 이런 것으로 무너지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아스펠라의 말에 일카이는 잠시 침묵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살 많은 것도 누나는 누나인 것인지, 자신보다 생각하는 것이 어른스러웠다.
“내가 걱정하는 건 잊지 마.”
“응.”
“누나는 눈치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도통 모르겠어. 맨날 나만…….”
말끝을 흐린 일카이가 이내 다시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애꿎은 땅만 모종삽으로 파냈다. 그러다가 훽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연상이 좋아?”
“응?”
“연상만 좋은 거냐고. 그러니까, 남자 볼 때 말이야!”
“그건 아닌데, 왜?”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래. 연하도 남자는 맞잖아.”
아스펠라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는 또 신나서 마저 흙을 파낸 뒤 모종을 심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웃음을 참던 아스펠라도 제 자리로 돌아가 씨앗을 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