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에르윈 대공 성
“이런 제기랄.”
에르윈 대공 저택으로 들러온 일카이가 내뱉은 말이었다.
다른 팀원들은 천장도 황금이야! 이런 미친, 이게 대공 저택이면 왕궁은 대체 어떤 곳일까? 대장 이것 봐, 집 안에 분수대가 있다고! 하며 감탄하기 바빴다.
“귀족 집 처음 와봐? 저번에 헨리 공작의 저택에도 갔는데 비슷하구만, 뭘 그리 놀라?”
“비슷하기는! 공작 저택도 놀라웠지만 대공 저택은 진짜 왕궁이라 해도 믿겠는데?”
“시끄러워. 입 다물어.”
“어휴 대장, 부러운가 보구만.”
“…….”
일카이가 훽 뒤돌아 제 팀원들을 노려보자, 그제야 팀원들이 얼른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한숨을 푹 내쉰 일카이가 저 앞에 가고 있는 아스펠라와 칼리우스를 노려봤다.
이놈의 복도는 또 왜 이리 긴 건지.
그들의 안내를 따로 해주던 펠킨이 슬쩍 일카이의 눈치를 살폈다.
“흠흠, 일카이 군은 나이가 어느 정도 되십니까?”
“그건 왜 물으십니까.”
“젊어 보이는데 사냥 조합 대장인 것이 신기해서요.”
확실히 신기한 일이긴 했다. 오크몬드 사냥 조합은 튀니아에서 가장 내로라하는 사냥꾼들만 받아주는 곳이었다.
워낙에 날고 기는 이들만 모아 놓다 보니 귀족들은 종종 그들을 자신의 저택에 초대하여 같이 사냥을 하거나, 사냥 대회가 열릴 시에는 자신의 편이 되어주길 바라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조금 있으면 스무 살 됩니다.”
이런 성인식만 갓 치른 어른애로구만. 그 큰 사냥 조합을, 이런 어린애가 이끈다고? 펠킨이 다시한번 일카이를 흘깃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저 인상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펠킨이 고개를 갸웃댔다.
“아스펠라 양과는 어느 정도 만나셨습니까?”
“대공 각하께서 물어보라 하십니까?”
“어휴, 아뇨. 그냥 진짜 약혼한 사이인가 해서요. 하하.”
까칠하기는. 펠킨이 속으로 더럽고 치사하다며 욕지거리를 했다. 그는 대공의 직속 보좌관이자 비서. 직급으로 치자면 후작과 백작 그 사이쯤인 거다.
아무리 사냥꾼 조합의 대장이래도 일단 귀족이 아닌데 경어 사용해주는 것에 감지덕지할 일이지, 뭐 저리 오만하게 굴어? 대공 각하는 무슨 생각으로 이 남자까지 들이신 거지? 펠킨은 제 주인의 머릿속이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저기요, 보좌관님.”
“네?”
“대공 각하께서 아스펠라에게 청혼했다는 얘기 알고 있습니다.”
“아, 들으셨군요.”
진짜 두 사람이 연인 사이라면, 일카이의 무례한 행동들도 이해가 가기는 할 것 같다.
“아스펠라를 대공 저택으로 불러들이시려고, 키우시던 개를 이용하시는 것 같은데.”
“아.”
“혹시, 이번 산불도―”
“그만요. 일카이 군.”
펠킨이 일카이의 말을 끊었다.
여전히 사람 좋게 웃는 얼굴이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일카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일카이 군이 그런 오해를 할 수는 있겠네요. 아무래도 약혼자다 보니. 그런데, 방금 그 말은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감히 튀니아의 대공 각하께서 일개 평민 여자 하나를 사로잡으려고 산에 불까지 지를 분이라는, 그런 오만하고 무례한 언사는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
일카이는 순간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걸 자각했다.
미친놈. 내가 정말 미쳤나 보군.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대공씩이나 되는 이. 튀니아에서 국왕 다음으로 높은 남자.
“저희 대공 각하는 그런 얕은 수를 쓰는 분이 아닙니다. 만일, 진정으로 아스펠라 양을 이 저택에 묶어놓고 싶으셨다면, 아마 그 약혼자부터 죽이셨을 겁니다. 그리하셔도 되는 분이시니까요. 그 누구도 감히 각하께 손가락질 하지 않을 거고요.”
에르윈 대공은 그래도 되는 사람이었다. 아스펠라의 의사 따윈 묵살하고 그대로 잡아다가 자신의 침실로 밀어 넣어도 그 누구도 그를 나쁜 놈이라 감히 욕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펠킨은 저도 모르게 욱하고 말았다. 아스펠라 양이 그런 일을 당해도 되는 사람이 아닌데도, 순간적으로 제 주인이자 친우인 그를 욕보이는 일카이의 말에 울컥하고 만 것이다.
솔직히, 펠킨은 칼리우스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정말 아스펠라 양을 사랑하시기라도 한 것인가?
그 마음이 진심인 것인가?
“…….”
“그러니. 그런 오해는 없길 바랍니다. 일카이 군.”
“……무지한 놈의 무례를 용서해주시지요,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감히 대공 각하를 욕보이려 한 말은 아닙니다.”
“네. 그러셔야죠. 저도 조금 말실수를 한 것 같네요. 다른 분들은 모두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주시죠. 아스펠라 양이 몽타주 작성을 끝날 때쯤 만찬이 나올 테니까요.”
펠킨은 그렇게 말한 뒤 일카이와 팀원들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펠킨이 문을 닫고 나가자 일카이가 푹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를 이리저리 헝클였다.
***
아스펠라는 자신이 꿈에서 본 망토를 쓴 사람의 팔에 그려진 문신을 떠올리기 위해 애를 썼다. 눈을 감고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찬찬히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화가는 아스펠라가 말하는 대로 얼른 묘사를 하기 시작했다.
“완성 되었습니다. 한번 봐주시지요, 아가씨.”
화가가 아스펠라에게 스케치한 것을 보여줬다. 아스펠라가 찬찬히 그림을 살펴봤다.
“네. 맞아요. 이런 문양이었어요.”
아스펠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리우스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아스펠라가 있는 소파쪽으로 향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아스펠라는 제 뒤쪽에서 몸을 수그려 몽타주를 확인하는 칼리우스의 모습에 살짝 긴장한 듯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는 아스펠라의 등받이 쪽에 팔을 올려둔 채로 있었는데, 칼리우스의 포에트 셔츠에서 나온 기다란 끈이 아스펠라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아스펠라가 몸을 움찔댔다.
칼리우스는 꼿꼿이 몸을 세운 아스펠라를 살짝 내려다봤다. 손에는 몽타주 그림을 들고 있으면서 영 관심 없는 듯 시선은 아스펠라만 쳐다보고 있는 것 아닌가.
그 기묘한 분위기에 몽타주를 그리던 화가가 눈치를 본 듯, 저는 바깥에 나가 있겠습니다. 대공 각하, 하며 자리를 떴다. 칼리우스는 헛기침을 하며 급히 자리를 뜨는 화가의 뒤꽁무니를 보다 이내 다시 시선을 돌려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아스펠라의 머리통 근처로 왔다.
칼리우스가 가만히 숨을 들이쉬면 아스펠라는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내 칼리우스가 나직하게 물었다. 낮은 음성이 아스펠라의 귓가에 울렸다.
“아스펠라.”
“네?”
“향수 뿌렸습니까?”
칼리우스가 묻자 아스펠라가 제 몸의 냄새를 킁킁 맡았다. 그녀는 향수를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향수를 사지도 않을 뿐더러, 뿌리지도 않는다.
“냄새가 나나요? 아무 것도 안 맡아지는데, 후각이 되게 좋으신가 봐요. 향수 안 뿌렸습니다. 아, 일카이가 뿌린 향수 냄새가 밴 건가?”
“…….”
사냥꾼이 뭔 향수를 뿌린다는 거지? 칼리우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린놈이 아스펠라를 보러 온다고 멋을 낸 건가. 그 꼴을 생각하니 웃기지도 않았다.
“어울리지 않는 향이군요. 몽타주가 모두 완성되는 대로 각 도시의 이교도들 검문이 들어갈 겁니다.”
“범인이 빨리 잡혔으면 좋겠어요.”
“몸은, 이제 괜찮습니까? 머리가 아프다거나, 메슥거린다던지.”
“네. 이제 몸은 괜찮아요.”
아스펠라가 달리 할 말이 있는지 손을 꼼지락 거렸다.
“저, 대공 각하.”
“말씀하세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택이 있는 동안 제가 뭐라도 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칼리우스가 고개를 모르 기울이며 아스펠라를 내려다봤다. 고개를 살짝 치켜들어 대공과 눈을 마주친 아스펠라가 얼른 눈을 내리 깔았다.
“뭐라도 하고 있잖아요. 개도 보살펴 주고.”
“그거 말고도 뭐라도 하고 싶습니다. 사용인으로서 일하게 해주세요.”
“일? 그대가요?”
“네.”
아스펠라는 이렇게 신세만 지는 건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다.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는데 그 숙식의 정도가 일반적인 호의가 아니었다. 깜장이를 돌본다고는 하지만, 누가 자기 집 개를 며칠 돌봐준다고 커다란 방과 양질의 음식, 그리고 매일 다른 드레스와 보석을 제공한단 말인가.
“됐습니다. 저택에 사용인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칼리우스의 말에 아스펠라가 다시 한번 말했다.
“하지만, 대공 각하께 너무 받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깜장이도 제가 좋아서 만나는 거고. 지금도 충분히 빚지고 있다 생각합니다. 제가 뭐라도 하지 않으면 이런 호의, 많이 부담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러자 칼리우스가 몽타주가 그려진 종이를 소파 앞의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의 몸이 앞으로 수그려지며 아스펠라와 얼굴이 가까워졌다. 아스펠라가 깜짝 놀라 몸을 빼내려 하자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의 목덜미를 쥐었다.
아스펠라의 고개는 뒤로 완전히 젖혀져 그 위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칼리우스와 맞닿을 정도였다. 목을 죄지도 않았는데 목이 콱 막힌 기분이다.
“아스펠라. 순진한 건지, 아니면 사람 속 태우는 걸 좋아하는 건지. 내가 뭘 요구할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
투박한 손이었으나 아스펠라의 목덜미부터 턱끝까지 훑는 손길은 매우 부드러웠다.
아스펠라는 그의 행동에 불쾌감을 느끼기는커녕, 얼굴이 불같이 화끈거려졌다. 마주친 눈을 피하기란 어려웠다. 그의 금색 눈동자는 아스펠라를 홀리기라도 하는 듯 요염하게 바라봤다.
칼리우스는 웃지도 않고 물었다. 장난으로 골리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내 침방 시녀라도 하라 하면, 할 것입니까?”
“……그런 거 안 시키실 거 아니까요.”
아스펠라의 말에 칼리우스가 결국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손을 치웠다. 아스펠라의 고개가 정면으로 돌아왔다. 아스펠라는 잠시 화끈거리는 제 목덜미를 매만졌다.
“어차피 당신은 내 손님으로 온 겁니다. 부담 갖지 마세요. 나한테 부담이 될 만한 것들은 전혀 아니니까.”
아스펠라가 이곳에서 평생을 놀고먹고 사치를 부려도 부담이 될 만한 것은 없을 곳이었다. 에르윈 대공의 금고는 마르지 않는 셈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아스펠라는 달리 할 말이 사라져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나저나, 약혼자와는 어쩌다 만나게 되었습니까.”
“아, 그건―”
“많이 어리더군요.”
“……가끔 욱할 때가 있지만, 평소에는 의젓한 사람이에요.”
“‘진짜’ 약혼자는 맞습니까?”
“네?”
아스펠라가 당황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칼리우스가 생긋 웃으며 집무 의자에 몸을 느른하게 기댔다.
그녀는 보통의, 일반적인 약혼 사이의 연인을 본 적이 없는 걸까. 사냥꾼을 쳐다보는 눈빛에 이성적인 애정과 육욕이라고는 하나 없는 그 눈빛을, 정녕 자신이 눈치채지 못 할 거라 생각하는 걸까. 칼리우스는 이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에 어디 한번 장단이나 맞춰주자 생각했더랬다.
“뭐, 그 약혼자가 진짜라고 한들, 사람 마음은 금방 움직이니까요.”
“그런 식이면 각하의 마음도 언제든 움직이지 않을까요?”
“한번 두고 보세요 그럼.”
아스펠라는 그새 대공이 거짓말을 눈치 챈 건가, 유심히 그를 쳐다봤다. 저 여유로운 미소며, 나른한 태도며. 마치 너희 둘이 연인일 리가 절대 없다는 듯.
“아뇨. 일카이는 절 구해준 사람이에요. 생명의 은인과 사랑에 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게다가, 일카이는 잘생겼으니까.”
“아, 약혼자가 잘생겼습니까?”
아스펠라는 차마 그를 보며 일카이가 잘생겼다는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없었다. 미형으로 치면 솔직히 일카이보다도 그가 한 수 위였다. 아스펠라가 눈을 굴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칼리우스가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골리듯 말했다.
“생명의 은인과 사랑에 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죠. 아스펠라 말대로.”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런 식이면 깜장이가 아스펠라에게 고백해도 되는 겁니까?”
“예? 갑자기 깜장이가 왜―”
“나와 결혼하느니 깜장이랑 결혼하겠다 했잖습니까. 제가 개만도 못하나봅니다. 속상하네요.”
“그건! 그건 그냥! 각하를 욕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고 그냥…….”
아스펠라가 속으로 펠킨을 욕했다. 아니 그걸 곧이곧대로 각하면 어쩐단 말인가!
“보좌관께서 그리 말을 전한 건가요?”
칼리우스는 대답 대신 가만히 웃기만 했다. 아스펠라는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손톱만 튕겼다.
“아스펠라 양과 결혼하려면 내가 개라도 되어야겠네요.”
“각하……!”
골리려고 작정한 것인지, 칼리우스의 입에서는 짓궂은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일국의 대공이 본인 입으로 나는 개만도 못하다, 개가 되어야겠다 그런 말을 앞에서 듣고 있는데 어느 누가 편히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말씀 말아주세요, 각하. 그렇게까지 저랑 결혼하실 이유도 없잖습니까. 각하를 원하는 귀족 영애들이 많고 많을 텐데, 저는 가문도 없을 뿐더러 그저 산에서 살던 평범한 백성입니다.”
정말로 저는 깜장이가 대공의 애완견인줄도 몰랐습니다. 결혼하고 싶어서 그 애를 봐준 건 더더욱 아니고요, 그런 보상은 받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 건 보상이 아닙니다 각하.
아스펠라는 이참에 다시 한번 확실히 선을 그었다.
“게다가, 제가 일카이와 약혼하지 않았다 해도 각하의 청혼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습니다. 애초에 각하가 제게 청혼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애초에 사는 세계가 다른 걸요.
아스펠라가 말을 끝내고 슬쩍 칼리우스를 쳐다봤다. 화나서 나가라 하려나.
“이유가 있으면요?”
“네?”
“꼭 당신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면. 재고라도 해볼 겁니까.”
칼리우스의 말에 아스펠라가 대체 그 이유가 뭐냐 물었다. 설마 또 되도 않는 깜장이 핑계를 대려는 건가.
“반했습니다.”
“……하아.”
아스펠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람을 가지고 놀려는 속셈이면 칼리우스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
“그래. 안 믿을 줄 알았습니다.”
칼리우스는 또 그런 아스펠라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만난 적이 없으니까요, 각하! 언제 절 봤다고 반하셨다는 건데요?”
“……처음 봤을 때부터. 진심입니다. 내 말이 지금 장난같이 느껴지는 거면 나의 문제겠지. 그걸 고치면, 조금 진지하게 받아들일 겁니까.”
칼리우스는 지금 당장 내가 그 깜장인지 까망인지 그 개새끼다, 하며 말하고 싶었다. 네가 날 구했을 때 그때부터 네게 반했다. 내 마음을 받아줘라. 그런 말을 하면 아스펠라의 표정이 어떻게 될까.
그럼 왜 검은 마수로 변하는지 그 경위를 얘기해야 하고, 그럼 자신이 저지른 짓들을 말할 수밖에 없다. 아스펠라에게 그걸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비르가를 죽였어 아스펠라. 그 하얀 털에 쇠로 만든 총알을 박고, 창을 던지고 밧줄로 동여맸어. 그가 흘린 피를 물감 삼아 승기를 그렸어.
언젠가는 얘기를 해야 될 거다. 저주를 풀기 위해서 그녀가 필요하니까.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칼리우스는 이제 저주가 풀리든 말든 그런 것엔 관심이 없어졌다. 그냥 이 여자를 제 곁에 두고 싶다.
평생을 숨기고 살아도 된다. 저주가 악화되어도 상관없다.
적어도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혹은 평생을 개새끼로 살아도 되니 이 여자가 제 곁에 있기를 원한다.
아스펠라는 그저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저는―”
“당장 대답 안 해도 됩니다. 오늘은 피곤할 테니 이만 들어가서 쉬세요. 식사 시간이 되면 시종들이 찾아갈 겁니다.”
이만 나가보라 말하자 아스펠라는 멈칫대다 이내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서재를 빠져나갔다. 칼리우스는 가만히 이마에 손을 받치고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어쩌고 싶은 건지를 도저히 모르겠으니 답답했다.
이게 그냥 소유욕인지, 아니면 사랑인지. 혹은 짐승의 본능일 뿐인지.
***
기사 하나가 급한 발걸음으로 왕궁 복도를 걸어갔다. 그는 곧 왕이 있는 서재로 갔다. 다급한 손길로 문을 두드리자 보좌관이 나왔다. 보좌관 역시 그를 기다린 눈치였다.
“찾았는가?”
“예, 찾아냈습니다.”
보좌관이 얼른 들어오라는 듯 문을 활짝 열었다. 서재에서 양발을 책상 위에 떡하니 올리고 독서를 하던 국왕 파베스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민튼 경. 좋은 소식을 가져온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야.”
“민튼 올리오, 국왕 각하를 뵙습니다.”
“아, 그런 인사치레는 됐네.”
“국왕 각하. 검은 마수를 찾아냈습니다.”
그의 말에 파베스가 읽던 책을 덮었다. 그리고는 책상에서 다리를 내린 뒤,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양손을 포개 손깍지를 꼈다.
“어디 있던가.”
“동쪽 헤르스 산에 숨어 있었습니다.”
“어떻던가. 그새 더 커졌던가?”
“……생포하느라 병사 스물이 죽었습니다, 각하.”
민튼 경의 병사들은 일반 병사들과는 결이 달랐다. 국왕의 밀명을 위해 엄선된 최고의 체격과 체력, 힘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 스물이 죽었다는 것은, 일반 병사로 치면 오십이 죽은 것과 같았다.
그 말을 들은 파베스의 눈이 커졌다. 스물이 죽었다고? 하하하하! 호쾌한 그의 웃음소리가 서재를 가득 메웠다. 보좌관은 그런 국왕의 모습을 못 본 척 시선을 돌렸으며, 제 부하들의 죽음을 알리던 기사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그래, 네 부하 스물을 죽인 그 괴수는 어디에 뒀나.”
“지하 감옥으로 이송 중이긴 하나, 워낙에 크고 흉포하여 잠시 환각제로 기절시켜뒀습니다.”
“지금 당장 보러가야겠군!”
국왕은 어린애처럼 신나서 펄쩍 의자에서 튕겨 올라왔다.
“각하. 너무 위험합니다. 괴수가 얼마큼 커졌는지, 게다가 그 능력치가 어느 정도 되는지 안전을 검사하고 만나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국왕의 보좌관이 얼른 그를 말렸다.
“버루카. 내가 아직도 열여섯짜리로 보이는 건가?”
“각하, 신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님을 잘 아시지 않으십니까.”
“아니. 난 지금 꼭 봐야겠어. 다시 잡기까지 내 병사 몇을 허비했는지 너희들도 잘 알지 않느냐.”
파베스는 기어코 그 야밤에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왕궁의 뒷문으로 빠져나가 그 뒷산을 한참 오르다보면 거대한 동굴과도 같은 곳이 나온다. 그 누구도 왕궁 뒷산에 거대한 괴수를 잠재워놓은 감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었다.
계단을 한참 내려가자 짐승의 냄새가 코를 마비시킬 정도로 풍겨왔다.
국왕은 제 코를 틀어막으며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이윽고, 이 거대한 동굴에 꽉 찬 검은 마수를 마주했다.
그는 경이로운 것을 보는 듯 허, 작게 감탄하며 그를 쳐다봤다. 그러나 국왕과는 반대로 보좌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으며, 차마 그 괴수 쪽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다량의 환각제를 그 앞에 태워 향을 피운 것인지, 흉포한 괴수는 눈을 까뒤집고 혀를 반쯤 내민 채로 온몸이 사슬로 동여매져 있었다.
“이번엔 탈출하지 못하도록 제대로 손 써놨겠지?”
“아다만트 석으로 만든 수갑과 족쇄를 썼으니, 쇠사슬과는 다를 겁니다 각하.”
그래. 그래야지. 이놈을 또 놓칠 수는 없지 않느냐. 국왕이 그리 말하며 제 앞의 괴수를 쳐다봤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 5년 만인가요?”
국왕이 뒷짐을 진 상태로 나긋하게 물었다. 괴수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데도 그는 이미 여러 번 말을 건 것처럼 굴었다.
파베스는 저 구석에 박혀 있는 자신의 보좌관을 쳐다봤다. 쯧쯧. 늙어서 그런지 어쩜 저리 겁이 많아졌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국왕이 이내 제 보좌관을 불렀다.
“버루카! 이리 와서 자네도 인사하지 그래. 오랜만에 만나는 것 아닌가.”
“저, 각하…….”
“어허. 자네도 한때 모셨던 분 아니던가.”
“각하!”
“물론, 지금은 그저 짐승에 불과하지만. 그쵸, 아버지?”
국왕의 말에 버루카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저기 저 환각제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커다란 괴수는, 버루카가 모셨던 주군이자, 국왕 파베스의 친부. 튀니아의 선대 왕이었다.
파베스는 그 괴수가 자신의 아버지라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아버지라 부르긴 하지만 그건 마치 자신이 기르던 개에게 이름을 ‘아버지’라 지은 것만큼이나 의미 없는 단어였다.
“아버지.”
파베스가 손을 뻗어 검은 괴수의 갈퀴를 쥐었다. 인간의 몸은 그에 비해 너무나도 작았기에, 손을 활짝 펴 잡아봤자 검은 털 몇 가닥뿐이었다.
인간의 두려움과 공포, 혐오 등 온갖 부정한 것들을 한데 모아 섞은 듯한 짙은 검정 털을 바라보던 파베스가 중얼거렸다. 평소와는 달리 광기가 잔뜩 깃든 얼굴이었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도망가지 마세요. 검은 마수는 흔한 게 아니거든요.”
그 모양새를 보고 있던 보좌관 버루카는 가만히 눈을 질끈 감았다. 늙은 노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비밀이며 진실이었다.
아직도 버루카의 눈에는 젊은 시절 선왕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인품이 좋고 가신들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알며 백성들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했던 선왕 기디언. 그가 신의 저주를 받아 검은 마수가 되기까지의 그 모든 일들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하여 다시 잡히셨습니까, 전하, 어찌하여…….’
버루카는 그저 통탄스러울 뿐이었다.
‘지금 꼴을 보십시오, 전하. 전하께서 원하시던 것이 이런 것입니까? 전하께서 믿으셨던 왕자 전하의 본모습이 이런 것이었습니까? 대신 저주를 받아, 그가 뭔가를 깨닫길 바라셨습니까? 그렇다면 실패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실패하셨다고요.’
저 커다란 몸집 안에 아직 인간으로서의 기억이 남아 있는지, 사라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했다. 짐승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이가 아닌 이상 검은 마수의 속내를 알 수 있는 이는 없을 거라고.
버루카는, 차라리 저 검은 괴수에게 선왕으로서의 기억은 모조리 없기를 바랐다. 저를 잡아 연구하려는 저 광기 어린 눈을 한 이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도, 자신이 그 아들을 위해 대신 저주를 받은 것도.
기억이 남아 있다면 그건 너무나도 큰 벌이 아니겠는가.
***
아스펠라가 제 방으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들이 아스펠라에게 만찬 때 입을 드레스를 고르라며 드레스가 잔뜩 걸린 행거를 방에 들여왔다.
“만찬 때 입을 드레스요?”
“네. 이중에서 마음에 드시는 것이 없으면, 다른 옷을 선별하여 가져오겠습니다. 이 옷은 어떠신가요?”
아가씨가 안 입으면 모두 버릴 것들입니다, 라고 말하는 통에 아스펠라는 결국 입는 수밖에 없었다. 시녀들은 아스펠라의 머리를 다시 빗겨주고 묶어줬다.
미처 신경 쓰지 못해 몰랐는데, 거울을 보자 아스펠라는 꽤나 꾀죄죄한 제 몰골에 화들짝 놀랐다. 어젯밤 발작을 일으키고 눈 뜨자마자 바로 화재 현장에 다녀온 것을 깨달았다.
이런 얼굴로 아까 전 대공과 그리 가까이 붙어 있었단 말인가.
‘아니, 얼굴에 재는 왜 묻은 거지? 아, 이런! 다람쥐가 내 얼굴을 만졌을 때 묻었나 보구나.’
얼굴 몇 군데에는 작게 다람쥐의 발자국으로 재 가루가 묻어 있었다. 시녀들은 그런 아스펠라의 얼굴을 보며 살짝 웃음 짓고는 수건에 물을 묻혀 얼굴 이곳저곳을 닦아줬다.
아스펠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분명 대공도 이 발자국들을 봤을 것 아닌가.
“아가씨께서는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로 활동적이신 분 같아요. 처음에 머리카락 사이에서 나뭇잎이 나와 신기했는데, 이제는 다람쥐 발자국이 얼굴에 찍혀 있네요. 동물을 좋아 하시나 봐요.”
“죄송해요. 번거로우시죠. 제가 산속에서 지내서.”
“어머, 전혀요. 이게 원래 저희 하는 일인데요.”
시녀들의 말에는 비아냥이나 비웃음이 없었다. 그녀들은 그저 아스펠라가 신기할 뿐이었다. 대공가의 시녀라 함은 원래 낮은 귀족 계급 가문의 여식들도 더러 있는 편이라 들었다.
아스펠라는 시녀들이 저를 아가씨라 불러야 하는 것에 혹시라도 불편을 느낄까 얼른 말했다.
“저, 아가씨라 안 부르셔도 돼요.”
아스펠라는 20년 평생을 아가씨라 불려본 적이 없다. 그러니 이런 귀한 대접에 마음 놓고 그걸 즐기기도 어려웠다.
“네? 하지만 아가씨는 앞으로 대공 각하의 신부님이 되실 분 아니세요?”
“아니에요! 혹시 대공 각하께서 그리 얘기하셨나요?”
“그건 아니지만, 저희들도 눈치가 있지요.”
그렇게 말하며 시녀들이 저들이 다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꼬았다. 아스펠라는 왜 저들이 저렇게 몸을 배배 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번 기회에 단단히 선을 그어 놔야지, 하는 마음으로 아스펠라가 짐짓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그저 이 댁 애완견을 잠시 맡으러 온 것이고, 대공 각하와 혼인할 일은 없습니다. 각하께서 뭐가 부족하셔서 신분도 가문도 없는 저와 결혼하시겠어요? 저는 사실 이런 대접 받아본 적이 없어 어색해요. 절 편히 대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
그러자 시녀들의 얼굴이 조금 시무룩해졌다.
“그러시군요.”
“네. 무엇보다 당신들도 평민 출신의 대공비를 모시고 싶진 않잖아요.”
“네? 아뇨. 저희는 그런 것 상관 안 해요. 이 저택의 사용인들은 대부분 고아 출신이거나 할렘가나 이재민 출신이거든요.”
시녀들은 그러면서 모두 선대 가주와 현재 대공 각하가 아니었으면 이곳의 시종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부정신의 출연으로 쑥대밭이 된 마을의 생존자들, 혹은 산신의 분노로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가족을 잃은 이들, 전쟁이 나 오갈데가 없는 이재민들까지.
“보통 상급 귀족들은 사용인들도 가려서 받긴 하죠. 그런데 저희 대공 각하는 안 그러셔요. 출장을 가실 때마다 그곳의 이재민들을 데려와 일자리를 제공해주시고요. 사람에겐 귀천이 없다 생각하시는 분이세요. 대공 각하는 저희들의 생명의 은인이에요.”
아스펠라는 칼리우스가 그렇게까지 정이 많고 인간을 아끼는지 몰랐다. 한편으로는 인간을 그렇게나 아껴서 산신들을 죽이고 다닌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녀들이 잠시 생각에 잠긴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이 저택의 모든 이들은 칼리우스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하는 이들이다.
모두 그에게 생명을 빚졌기 때문이다.
그가 아니었으면 어차피 죽었을 목숨, 대공이 거두어주셨으니 이 목숨 대공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생각이다.
그들은 칼리우스가 저주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산신을 죽여 저주를 받아 매번 온몸의 뼈가 뚝뚝 끊기고, 재배열 되며 인간에서 짐승으로 변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칼리우스가 맨 처음 짐승으로 변한 날, 사용인 중 하나가 그에게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 칼리우스는 제정신으로 돌아와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해 진심으로 고통스러워했다.
오히려 피해를 입은 사용인이 송구스러울 정도로 사과했고, 보상했다.
그날 이후 칼리우스는 이 저택의 사용인들을 모아 자신의 저주에 대해 말했다. 자신의 저주가 두려워 떠날 이는 떠나도 된다 말했지만 그 누구도 떠나는 이가 없었다.
‘자네들이 공격받을 일은 없을 거다. 앞으로 내가 짐승으로 변하는 날엔 지하로 내려갈 거다. 만일 하나라도 내가 인간을 공격하게 된다면, 그땐 그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날 죽여라.’
내가 탈출하여 백성들을 공격하게 되어도 죽여라.
이 저택에서 도망치려 해도 죽여라.
그날 이후 이 저택의 사용인들은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총과 검을 사용하는 법을 배웠다. 물론 그 누구도 실전에서 쓰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게 몇 개월 동안 칼리우스는 누구 하나 죽이지 않고 지하에서 신의 처벌을 감내했었다. 그랬던 대공이 몇 달 전 기어코 탈출하고 말았다. 펠킨은 파랗게 질렸고, 이내 일이 커질 시에는 그를 죽여야 한다는 말을 했다.
검은 마수가 민가에 나타났다는 제보를 받았고, 사냥꾼들이 그를 포획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들 정말 대공을 죽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그가 인간에게 공격을 심하게 받고 아스펠 산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소식을 접한 보좌관 펠킨의 얼굴은 그야말로 몇 십 년 동안 빛을 못 본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넓은 아스펠 산의 어디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며, 공격받아 상처가 난 곳이 곪아 언제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들 돌아오지 않는 대공만 애타게 기다렸다.
여담이지만, 펠킨은 대공이 돌아올 때까지 앓아 누웠다.
그리고 몇 주 후 인간이 된 대공이 상처 하나 없이 말끔히 저택에 돌아왔고, 그 몇 주 후에는 작은 여자가 대공과 함께 이곳으로 왔다.
시녀장 헬렌이 그녀를 밤손님으로 착각한 날, 펠킨이 와 아스펠라에 대한 이야기를 짤막하게 설명했다. 앞뒤 설명 없이 그저 아스펠라 양은 대공 각하의 생명의 은인이다. 그러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이 저택의 모든 사용인들은 칼리우스가 아스펠 산에 숨어들었을 때 그를 도와준 여인이라는 걸 눈치챘다.
헬렌은 아스펠라에게 함부로 대한 죄로, 한동안 대공 성이 아닌 에르윈 가 소유의 별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웬만한 일에는 화내지 않고 그저 권태롭게 넘기던 칼리우스가 처음으로 그들에게 보인 처벌이었다.
그걸로 보아 칼리우스가 아스펠라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확실했다. 어디 그뿐인가. 아스펠라는 전혀 모르겠지만, 그녀가 이 저택에 드나든 이후부터 칼리우스는 착실히 아스펠라를 위한 온갖 가구들이며 보석이며 드레스들을 죄다 사들이고 있지 않나.
하도 상인들이 들락날락하며 드레스와 보석을 갖다 바치니, 귀족들 사이에서 대공에게 숨겨진 여자가 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대공 가문의 시녀들이 시내에 나가면 다들 그 숨겨진 여자가 누구냐 물어댔다.
모두가 칼리우스 대공의 숨겨진 여자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아스펠라에 대한 것은 함구하라는 명령을 받았기에 그들은 그저 모르쇠로 일관할 뿐이었다.
시녀들은 아스펠라 앞에서 대공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에게 관심이 지대한 걸 넘어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아스펠라만 빼고 다 안다.
“아가씨께서는, 대공 각하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 말에 아스펠라가 잠시 아까 전 칼리우스를 떠올렸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들었던 요상한 감정도 함께 떠올려졌다. 심장께 부근이 간질간질하기도 하고, 배 안에 작은 나비들이 요리조리 날아다니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괜히 긁적댔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의 지휘 아래 병사들의 공격을 받아 죽어가던 산신들과 비르가를 떠올리면, 그가 정말로 원망스럽고 밉다.
비르가는 인간을 미워하지 말라 했고, 자신 역시 겉으로는 그를 원망하지 않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그를 많이 원망했다.
필시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잔혹한 인간일 거라 생각했는데, 칼리우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자꾸만 예상을 벗어나는 사내였기에 혼란스러웠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 진득한 눈빛이, 깊은 눈동자가 자꾸만 아스펠라를 흔들었다.
“원래 마음이란 것이 그렇게 복잡하죠.”
시녀들은 그런 아스펠라에게 다정히 말했다.
“지금 이렇게 혼란스러워하셔도, 언젠가는 그 마음이 확실해질 거예요.”
아스펠라는 어쩐지 그녀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이 따로 있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준비가 끝날 때쯤, 누군가 방문을 작게 두드렸다.
시녀들이 방문을 열어보더니, 대공 각하! 작게 탄성을 내지르며 얼른 허리를 꾸벅 숙이며 옆으로 비켜섰다. 화장대에 앉아 있던 아스펠라도 예상 못한 듯 일어났다.
“대공 각하!?”
“만찬 준비가 끝났다고 하더군요. 같이 내려갈까 해서요.”
같이 내려가다니. 그가 있던 서재는 2층에 있고 식당도 2층에 있다. 아스펠라가 있는 방은 5층에 있는 곳이다.
“준비 다 되었습니까?”
“네.”
칼리우스는 아까 전보다 깔끔해진 아스펠라를 봤다. 얼굴에 다람쥐 발자국이 난 줄도 모르고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게 꽤 귀여웠는데.
“그럼 내려가죠.”
그렇게 말하며 살짝 비켜섰다. 아스펠라가 먼저 방을 나가자 칼리우스가 그 뒤를 따랐다. 시녀들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저들이 더 신났다.
“봤지? 봤지? 각하께서는 분명 마음이 있다니까.”
칼리우스가 저렇게나 미소를 잘 짓는 사람인지는 몰랐다며 시녀들이 놀라워했다. 항상 무표정하거나 권태로운 얼굴인 분도, 마음에 드는 여인 앞에서는 저렇게나 잘 웃어주시는 구나.
“그런데, 너 아까 온 사냥꾼들 봤어? 보니까 거기 대장이랑 저 아가씨랑 약혼한 사이라던데?”
“누가 그래?”
“란셀 경이 말해줬어. 아까 화재 현장에 나갔을 때 그 사냥꾼 중에 얼굴 잘생긴 남자가 아가씨를 꽉 껴안았다는 거야. 그때 대공 각하 표정이 어마무시했대.”
왜 아까 다른 시녀들도 잘생겼다고 말한 그 사냥꾼 말이야. 그 남자래. 근데 열아홉 살이래. 완전 어린애 아니야? 아가씨가 능력도 좋아.
시녀들은 어쩌면 대공 각하의 순수한 첫사랑 이야기에서 삼각관계 치정극으로 변모할지 모르는 이 상황이 그저 재미났다.
자신들이 에르윈 대공가에서 일하게 된 이후로 가장 변수가 많이 생기는 일이었다. 대공 각하는 출정을 떠날 때마다 그 어떤 적을 만나도 언제나 승리를 쟁취해왔는데, 과연 사람의 마음도 그리 쉽게 쟁취할 수 있을까.
***
만찬 때가 되자 넓은 식당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사냥꾼들은 자신들 역시 만찬에 초대한 칼리우스의 아량에 감탄하고, 지나치게 넓고 화려한 식당을 보고 또 한번 감탄했다.
일카이는 아직 내려오지 않은 아스펠라와 칼리우스가 신경 쓰이는지, 제 동료들이 식탁 위에 놓이는 음식들을 보며 감탄을 할 때도 조용히 팔짱을 낀 채 오른 다리를 건들건들 떨어댔다.
아니 뭔 대화를 이렇게 오래 해.
설마 아직도 둘이 같이 있는 건가?
어느새 내려와 있던 펠킨과 눈이 마주친 일카이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훽 돌려버렸다. 펠킨은 이제 겨우 열아홉 되어 철이 덜 들고 자존심만 센 그가 본가에 있는 제 동생과 비슷하여 슬쩍 웃음이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리우스와 함께 아스펠라가 내려왔다.
‘뭐야. 완전 아스펠라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놨잖아?’
칼리우스의 옆의 아스펠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항상 꾀죄죄한 아스펠라만 봐왔던 일카이는 단정하게 머리를 틀어 올리고, 고급 드레스를 입은 아스펠라를 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 옆의 칼리우스와 대화하며 내려오는 그 모습이 꽤나 잘 어울렸다.
‘이런 우라질.’
저 둘에 비해 자신은 어떤가. 그는 제 모습과 함께 동료들을 죽 훑어봤다. 꾀죄죄한 몰골, 짐승의 가죽을 가공 없이 그대로 두른 의복, 허리춤에 찔러 넣은 단도. 혁대로 둘러맨 탄약들.
이 식당은 물론 이 집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아스펠라와 칼리우스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칼리우스는 직접 아스펠라가 앉을 의자를 빼줬다. 아스펠라는 어색해 하면서도 그의 호의에 미소로 답하며 의자에 앉았다.
일카이는 뚱한 얼굴로 그 둘을 쳐다봤다. 그러다 아스펠라와 눈이 마주쳤다.
‘아, 왜 또 예뻐가지고는.’
일카이가 고개를 훽 돌렸다. 얼굴은 평소와 똑같았는데, 귀 끄트머리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 꼴을 보던 그의 동료들은 다들 하나같이 사랑에 빠졌구만, 하며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았다.
칼리우스 역시 그런 일카이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정작 아스펠라는 일카이에게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식사가 시작되었다. 칼리우스는 대공가의 주인답게 점잖고 무게 있는 목소리로 사냥꾼들에게 식사를 권했다. 다들 정신없이 고기를 뜯는 모습을 보며 일카이는 영 입맛이 돌지 않았다.
먹는 둥 마는 둥 제가 지금 고기를 썰고 있는지 아니면 그릇을 썰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식사에 집중하지 못했다.
“내가 그대들을 저택에 초대한 이유는, 앞으로 3개월 뒤에 열릴 사냥제 때문이오.”
칼리우스가 사냥꾼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물론 칼리우스는 일카이와 그의 사냥꾼들을 제 저택에서 지내게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아스펠라의 약혼자라고 본인을 소개했을 때부터, 칼리우스의 머릿속에서는 일련의 계획이 세워졌다.
사실 그 계획은 그저 심술이었고 장난이었다. 너희들이 그렇게 나오면 나 또한 이리 나올 것이다 하는 유치한 장난이었으나 실제로 그는 사냥꾼들이 필요했다.
10년 주기로 튀니아 왕궁에서는 사냥대회가 열린다. 오랜 전통이었다. 새로운 국왕이 즉위하고 나서 처음 맞이하는 사냥제였다.
원래는 사냥을 하여 신께 제물을 바침으로써 나라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축제였지만, 국왕 파베스는 신께 올릴 제단을 없애버렸다. 이제 더 이상 신을 위한 제물이 아닌, 국왕을 위한 대회로 변해버렸다.
대신에 국왕은 참가 자격을 귀족들만이 아닌 일반인들도 가능하도록 해뒀는데, 이 사냥제에서 승리한 이들은 평민의 경우 왕실 근위대의 일원으로 받아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전국의 사냥꾼들은 물론 개인 기사들까지 모두 올해 열릴 사냥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귀족들의 경우엔 이로 인해 국왕의 눈에 들 절호의 기회였으니 당연히 놓칠 리 없었다.
하지만 칼리우스는 이미 국왕의 총애를 받는 이였으며, 더 이상 높이 올라갈 작위가 필요 없는 대공씩이나 되는 사람이었다.
굳이 사냥제에 참가할 필요가 있던가.
일카이는 자신이 느낀 그대로를 물었다.
“대공 각하께서 사냥제에 출전할 이유가 있습니까? 이미 모든 것을 쥔 분 아니십니까.”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사실 칼리우스 역시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었다. 평소 귀족들과 교류를 활발히 하는 편도 아니었고, 사냥에 큰 흥미를 느끼는 편도 아니었다.
그러나 국왕이 원했다. 국왕은 칼리우스가 이 대회에 참가하길 바라고 있었다.
“나는 사냥제에서 이기고 싶어 참가하는 게 아니야.”
칼리우스의 대답에 신나서 고기를 뜯고 맛보던 사냥꾼들이 그를 쳐다봤다. 아스펠라 역시 예상 외의 답변에 잠시 칼질을 멈추곤 그를 쳐다봤다.
“국왕은 이번 사냥제에서 생포한 산신을 풀어놓을 거다.”
그 말에 아스펠라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칼리우스는 그런 아스펠라의 반응을 예상한 듯 잠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자 부대장이 얼른 냅킨으로 입을 닦고는 우렁차게 말했다.
“아하! 그래서 저희를 부르셨군요! 그렇죠. 일반 사냥꾼들과는 달리 저희는 산신이든 마수든 다 잡을 수 있습지요. 맡겨만 주십시오!”
그의 말에 결국 아스펠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대로 박차고 일어나듯 식당을 빠져나가자 칼리우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더니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겠다며 얼른 아스펠라 뒤를 따라갔다.
일카이 역시 아스펠라를 따라가려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펠킨이 그 앞을 막아섰다.
“사냥꾼 여러분들은 마저 식사를 하시지요. 대장 분께서는 저와 잠시 대화 가능하실지.”
꽤 진지한 얼굴에, 일카이는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아스펠라!”
칼리우스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아스펠라를 불렀다. 그가 몇 번이나 이름을 불렀지만, 아스펠라는 들은 체도 하지 않으며 복도를 걸어갔다.
저택의 지리도 모르면서 그녀는 그저 내키는 대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하든 그 자리를 뜨고, 칼리우스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결국 칼리우스에게 붙잡혔다.
“아스펠라.”
“…….”
아스펠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바보였다. 잠깐이라도 그가 다정하다 생각한 자신이 멍청했다. 생포한 산신을 사냥제 때 풀어 사냥한다고? 그건 그냥 가지고 놀겠다는 거 아니야.
단지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생명을 놀잇감으로 여긴다는 것 자체가 아스펠라는 불쾌했다.
“각하께서 산신 토벌을 하는 이유는 알겠어요. 왕명이니 거역하기 힘들겠죠.”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산신의 생명을 놀잇감으로 삼아도 되는 건 아니에요. 사냥제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기에는 너무 거북했습니다. 감히 먼저 자리를 떠 죄송하지만 이해해주세요.”
그렇게 말한 아스펠라는 이만 손을 놓아달라 말했다.
칼리우스는 그런 아스펠라의 손을 놓기는커녕 더 강하게 잡았다. 아스펠라가 손을 비틀어 빼려 했지만 그의 힘이 원체 강해 불가능 했다.
“놔주세요, 각하.”
“왜 그렇게 산신들 편을 들지?”
그가 물었다. 아스펠라는 그의 질문에 황당한 듯 그를 바라봤다.
“당연한 것 아닌가요? 산신들은 아무 죄가 없어요. 이기적인 인간들 편을 들 이유도 없고요.”
“당신도 인간이잖아.”
“……저는 단 한번도 당신들과 같은 인간이라 생각한 적 없어요.”
칼리우스는 아스펠라가 왜 이렇게까지 인간들과 섞여 살지 못하는지, 왜 비르가가 죽고 난 뒤에도 문명 속에 들어오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젠가 산신들은 모두 사라질 거다. 시대의 흐름이 그렇다. 인구가 많아지면 당연히 영토를 위해 싸울 거고, 터전을 늘리기 위해 산을 깎아내릴 거다. 당연한 것 아닌가?
평생을 산속에서만 살 게 둘 수는 없다. 칼리우스는 적어도 아스펠라가 인간의 문명에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금 배려 없고 급하더라도.
그래야 그녀가 제 옆에 있을 수 있으니까.
아주 이기적인 생각이었으나 상관없다.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다.
하지만, 이런 말을 곧이곧대로 아스펠라에게 했다간 경멸 어린 눈빛을 받는 건 기본이고, 오히려 아스펠라가 도망갈 수도 있다.
“당신이 오해한 겁니다. 산신을 장난감으로 생각한 적 없어요.”
칼리우스가 이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아스펠라는 여전히 그를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난, 그 산신을 도망가도록 풀어줄 생각입니다.”
“……네?”
아스펠라의 눈에 당황스러움이 퍼졌다. 그래. 아직은 아스펠라에게 신뢰를 얻어야 할 때다. 자존심 상하게도 짐승일 때보다 신뢰를 얻지 못하는 자신이 아니었던가.
“국왕은 산신들을 장난감처럼 여깁니다. 산신이 아닌 자신이 신으로 추앙받길 원하고요.”
“…….”
“내가 해온 일들에 회의감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반성해서 변했다 하면. 당신은 믿어줄 겁니까?”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물론, 아스펠라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런 감정들이 들진 않았다. 그저 신을 분노케 하여 저주에 걸렸구나. 그 정도뿐이었지 제가 한 일에 뼈저리게 후회하고 반성하진 않았다.
다만 아스펠라에게 자신이 해온 일들을 말해야 하는 날이 왔을 때, 느낄 감정들이 수치와 죄책감이라는 걸 깨닫게 되자 그것들이 옳은 일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을 뿐이다.
칼리우스의 말에 아스펠라가 당황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정말 산신을 풀어줄 생각이에요?”
“네.”
“하지만, 어떻게요?”
“글쎄요. 그런 건 차차 생각해보죠. 당신이 잘하는 거 하나 있잖습니까.”
그게 뭐냐는 눈빛에 칼리우스가 말했다.
“동물과 대화할 수 있잖아요. 산신이랑 대화해보세요.”
아까 전까지만 해도 잔뜩 경계어린 눈빛을 보내던 아스펠라가 누그러졌다.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오해한 것에 미안함을 느꼈는지 아스펠라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퍼뜩 놀라 얼른 그를 쳐다봤다. 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 걸 어찌.
“새삼 놀라고 그럽니까. 아스펠라 양이 그럼 무슨 수로 그 짐승을 길들이겠습니까? 뭔가 통하는 게 있으니 가능한 거겠지.”
그렇게 말한 칼리우스가 이내 손을 건넸다.
“그럼. 돌아갈까요?”
“……함부로 판단해서 죄송해요.”
그 말에 칼리우스가 살풋 미소 지었다. 죄책감 비슷한 것이 들기는 했으나, 이번 일로 아스펠라의 신뢰를 아주 조금이라도 얻었으니, 그걸로 된 거다.
***
일카이는 제 앞을 막아선 펠킨과 함께 잠시 식당 밖으로 나왔다.
“제게 하실 말씀이 뭐죠?”
일카이의 말에 펠킨은 잠시 일카이의 얼굴을 쳐다봤다. 언뜻 보면 전혀 닮지는 않았는데. 그리 생각하던 펠킨이 물었다.
“오크몬드 사냥 조합의 전 대장과 어떤 관계인지 묻고 싶습니다.”
“그걸 왜 궁금해 하십니까?”
“그야, 전 대장이 대공 각하의 밑에서 일하던 분이셨으니까요.”
그의 말에 일카이는 전혀 몰랐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누이가 대공의 밑에서 일했었다고요?”
“정확히는, 초기 산신 토벌 작전 때 용병으로요. 그녀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5년 전인데, 그 이후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그 뒤 오크몬드 사냥 조합에서도 자취를 감췄다고 하고요. 그런데, 누이라면…… 혹, 친족이십니까?”
“제 친누이입니다.”
그의 말에 펠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친누이는 현재 어디에 계시는지.”
일카이는 여전히 불신의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친누이의 행방은 왜 물으십니까. 혹, 누이가 대공께 죄라도 지었습니까?”
“아니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분만큼 사냥 방면으로 뛰어난 사람이 없기에.”
“누이는 죽었습니다. 5년 전에요. 공격받아 죽었습니다.”
잠시 놀란 듯 숨을 고른 펠킨이 이내 차분히 물었다. 사라 경이 공격받아 죽었다고? 그 강한 분이?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혹, 공격받은 이유가.”
“검은 마수한테 공격받아 죽었습니다. 짐승한테 몸이 찢겨 죽었지요.”
펠킨의 눈이 이내 잠시 커졌다. 일카이는 그런 펠킨에게 물었다.
“누이가 대공의 밑에서 일했었다니 전혀 몰랐던 일입니다만, 검은 마수에 대해 경께서 아는 것이 있으십니까.”
“아뇨. 저희도 그저 그 검은 마수를 쫓고 있을 뿐입니다. 사라 경에 대한 소식은 정말 유감입니다. 정말로 강한 분이셨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펠킨은 먼저 자리를 비켜도 되겠냐 물었다. 일카이는 그러라는 듯 묵례를 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이내 펠킨은 급히 자리를 떴다.
“누이가 대공의 밑에서 일했었다니. 전혀 몰랐었던 일이군.”
일카이가 중얼거렸다. 그때 당시 그는 열넷으로 오크몬드 조합에서 잔심부름이나 하던 꼬맹이였다.
현재 일카이의 모습으로는 상상할 수 없겠지만, 성장이 매우 더딘 편이었기에 그때만 해도 사냥꾼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아주 작고 마른 꼬맹이. 그에 반해 누이 사라는 강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 강한 누이도 검은 마수에게 결국 죽임을 당했지만.
일카이는 잠시 복도에서 이어지는 야외 중정을 쳐다봤다. 달빛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대로 식당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는 잠시 중정 근처를 배회하다 이내 안쪽 정원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벤치에 앉아 있는 아스펠라가 보였다.
일카이의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갔다.
“아스펠라!”
“아. 일카이.”
일카이는 얼른 아스펠라 옆으로 가 앉았다. 대공이 그 뒤를 따라간 걸로 알고 있는데 혼자 있는 걸 보면…….
“대공은 어디가고 혼자 있어?”
“입맛도 없고 생각할 게 있어서 잠깐 나왔어.”
아스펠라는 뭔가를 고민하는 듯 가만히 달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일카이는 그런 아스펠라를 가만히 쳐다봤다. 이곳이 대공의 저택만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사냥제 때문에 기분 상했지.”
“아. 응. 근데, 내가 오해한 거였어. 사냥에서 승리를 하려는 게 아니고 산신을 풀어주고 싶으셨대.”
그러자 일카이가 그다지 믿지 못하겠는 얼굴로 말했다.
“산신을 풀어줘?”
“응.”
흐음, 일카이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칼리우스 대공이 산신 토벌에 승리하고 돌아오는 행렬을 본 적 있다. 아스펠라는 그 광경을 아마 본 적이 없으니 저렇게 그를 쉽게 믿을 수 있는 거겠지.
그때, 산신을 죽여 그 모가지를 잘라 전리품으로 들고 오던 대공을 보고 일카이는 이렇게 생각했더랬다.
‘완전히 살인귀나 다름없군.’
사냥꾼이라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눈이었다. 그 눈은 사람의 눈이 아닌, 짐승의 눈이었다. 짐승의 눈빛을 한 인간이라니. 불가능하지 않나.
그러나 대공은 그런 눈빛을 가진 이였다.
“너무 대공을 믿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아스펠라.”
일카이의 말에 아스펠라가 그를 쳐다봤다. 단순히 질투를 해서 보이는 어린 눈빛이 아니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아스펠라가 잠시 입을 달싹였다. 일카이는 혹여나 자신을 마냥 어린애로만 봐 잔소리를 하려는 건가 살짝 긴장했지만, 의외로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안 믿어.”
나는, 인간은 원래 안 믿어.
아스펠라의 말은 꼭 그녀 자신은 인간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
펠킨의 표정은 마치, 알아서는 안 될 것을 안 것처럼 충격과 초조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설마, 설마, 하며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듯 해보였다.
그는 그대로 대공이 있을 서재로 향했다. 서재에 안 보이자 도서관으로 향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사실을 알려야 했기 때문에 펠킨의 발걸음은 다급했다.
“각하!”
도서관의 책장 계단에서 고서를 꺼내고 있던 칼리우스에게 펠킨이 달려왔다.
“각하.”
파랗게 질린 그의 얼굴을 보아하니 답은 이미 얻었다는 듯 칼리우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맞더냐.”
“예, 각하. 저, 그런데…….”
“해서, 사라는 어디에 있지? 그 여자라면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 조금 더 일찍 눈치챘어야 했는데―”
펠킨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사라 경은 죽었다고 합니다. 각하. 5년 전에……검은 마수의 공격을 받고요.”
그의 말에 칼리우스가 잠시 멈칫했다.
“그 여자가 죽었다고?”
“예, 각하.”
“검은 마수에게?”
“그렇다고 합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칼리우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펠킨 역시 예, 저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하며 숨을 골랐다.
“아니야. 검은 마수가 사라를 죽였을 리 없어. 아마 파베스의 짓일 거다.”
“몸이 찢겨 죽었다고 합니다. 동생이 직접 확인했다 했고요.”
“그렇다면 파베스가 검은 마수에게 무슨 짓을 한 걸지도 모르지. 그래야 말이 돼.”
칼리우스가 골치 아픈 듯 안와 부근을 꾹 내리 눌렀다. 사라에게 동생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여자는 평소 그런 것에 대해 말하진 않았으니까. 아마 다른 사냥꾼들도 함구한 것으로 보아 칼리우스가 생각한 대로 동생의 존재는 비밀에 부쳐야 했을 것이다.
“이거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잖아.”
기가 차다는 듯 비소를 지으며 칼리우스가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그 사냥꾼은 국왕의 이복동생이라는 거군.
“단순히 자존심만 센 어린놈인 줄로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골치 아픈 놈이었네.”
“그가 자신의 출신에 대해 알고 있을까요?”
“아니. 모를 거다. 파베스 또한 모르고 있겠지. 모르고 있으니 그 녀석이 살아 있는 것 아니겠어?”
만일 둘 중 하나가 서로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면, 하나는 이미 죽었어야지 않느냐.
“사라 경은 알고 있었을까요?”
“그 여자는 알고 있었어. 그러니 내게 이런 편지를 보냈겠지.”
칼리우스의 손에는 낡은 편지가 들려 있었다. 그 편지는 오랜 시간동안 한참을 돌고 돌았기에 그에게 도착했을 땐 이미 낡을 대로 낡아 있었다.
***
몇 달 전. 칼리우스가 아스펠 산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쯤, 그에게 낡은 편지가 하나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편지를 전달한 이는 과거 칼리우스의 밑에서 일했던 초기 산신 토벌 용병 중 하나였다.
‘이게 뭔가?’
‘저도 대공 각하께 전달하라는 지시만 적혀 있어 내용은 모릅니다. 각하.’
은퇴한 사냥꾼의 말로는 누구에게 이 편지를 전해, 누구는 누구에게 이 편지를 전해라 등의 마치 연결 놀이라도 하는 듯 했다고 했다.
자신 역시 멀리 떨어져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동료에게 이 편지를 받았는데, 그는 편지의 내용에 대해서는 말이 없고 오로지 딱 하나, 사라가 보냈다는 말만 했다고 한다.
이유도, 영문도 모른 채 사라의 편지를 전달하러 왔다기엔 큰 각오라도 하고 온 듯한 표정이었다.
편지의 내용은 가관이었다.
“각하. 사라 경의 유언장이나 다름없는데, 그 편지를 일카이 군에게 주실 겁니까?”
“아니.”
“예? 하지만 일카이 경도 알아야하지 않습니까? 이 편지를 읽고 그 사내가 각하의 편이 될지 어찌 아십니까.”
“지금이야 내 사람이 된다 해도 아무런 쓸모가 없어.”
적재적소에 말을 배치해야 체스에서 이기지.
“어느 순간에 어떤 진실을 알려주고, 무슨 사연을 알려주는지, 그 타이밍이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얻고 이용하는데 중요해. 지금 이 편지처럼 말이야.”
칼리우스가 살풋 웃으며 편지를 제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사라 경의 유언이잖습니까. 펠킨의 말에 칼리우스가 어쩌라는 식으로 태연하게 말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어, 펠킨.”
그러니 원망도 비난도 못 하지. 그의 말에 펠킨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이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첨언하지 않겠다는 듯 한걸음 물러선 펠킨이 물었다.
“그럼 각하, 이제부터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대로 일카이 군을 계속 머물게 할 것입니까? 설마, 정말로 사냥제에 일카이 군까지 동행시킬 것입니까?”
“당연한 것 아닌가.”
국왕 파베스가 제 이복동생을 보고 파랗게 질릴 것이 분명한데, 그 재미난 광경을 칼리우스가 놓칠 리 없었다.
“파베스는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사라뿐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을 거다.”
다른 귀족들이 일카이의 외모를 보고도 눈치 못 채는 것은 당연했다. 선왕의 정부에 대한 것은 극소수의 귀족들만 알고 있었고, 그 극소수의 귀족들은 대부분 가주의 자리에서 내려와 요양이나 하고 있을 테니까.
몰랐겠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왕의 정부가 끈질기게 살아남아 아이까지 낳았다는 걸. 왕비도 몰랐을 거야. 그냥 그 여자는 죽었다고만 보고 받았겠지.
하지만 이번 사냥제에서 사라와 선왕을 반반씩 쏙 빼닮은 어린 녀석이 나타난다면?
칼리우스는 제 오랜 친우이기도 했던 파베스에게 악감정은 없었다. 자신이 저주를 받게 된 것도 그의 탓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친우고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 하여 그에게 충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평생을 사냥꾼으로 살아온 일카이가 왕위에 오를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펠킨은 칼리우스가 대체 어느 쪽을 택하려 하는 것인지를 알아챌 수 없었다.
“각하께서는 어찌하실 겁니까?”
“난…….”
난 내 것만 건드리지 않으면 돼. 그건 썩 명쾌한 답변이 아니었기에 펠킨은 답답했다.
“뭐가 되었든 간에 주도권은 내가 쥐고 있어.”
***
아스펠라는 칼리우스를 찾기 위해 한참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펠킨과 함께 나오던 그와 마주쳤다. 칼리우스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이가 아스펠라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곤 맞이하기라도 하는 듯 발걸음을 빨리했다.
“아스펠라?”
“아. 여기 계셨군요.”
“무슨 일입니까?”
칼리우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지금쯤이면 식사를 마치고 방에서 쉬고 있을 시간인데 그녀의 말투를 보면 꼭 자신을 찾아다닌 것처럼 보였다.
“깜장이를 보러 가고 싶어서요.”
“왜요?”
“그야, 깜장이를 돌보는 건 제 일이기도 하고, 또 보고 싶기도 해서요.”
아스펠라의 말에 칼리우스 뒤에 서 있던 펠킨은 제가 다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어찌나 꿀꺽 삼키는지 목구멍에서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아스펠라와 칼리우스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칼리우스는 대놓고 어색한 티를 내는 펠킨을 흘겨보며 살짝 혀를 찼다.
근면성실하고 충성스러운 신하이자 친구이지만 거짓말에는 영 소질이 없다.
“깜장이는 지금 자고 있습니다. 그 녀석은 꽤나 포악해서 잠결에 누가 들어오면 제 주인도 못 알아보고 무는 놈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레 아스펠라를 에스코트했다. 어찌나 거짓말을 저리도 자연스럽게 하는지 펠킨은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물론 아주 거짓말은 아니다. 칼리우스는 실제로 눈뜬 직후에는 정말 성질이 더럽다.
‘각하께서는 거짓말을 해도 아주 없는 말을 지어내진 않으시는군.’
펠킨이 속으로 구시렁댔다.
“깜장이가 그런다고요? 저랑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아까 전에 제가 보고 왔으니 굳이 내려갈 필요는 없습니다. 당분간 지하에는 내려가지 마세요.”
“왜요?”
“그야 제가 집을 비우는 날이 아니니까요. 아스펠라, 내가 저택을 비워 깜장이를 돌보지 못할 때만 봐 달라 했잖습니까.”
칼리우스는 뻔뻔할 정도로 거짓말을 뱉어냈다.
아스펠라 양이 깜장이와 친하다지만, 명색의 제가 주인인데 저도 친해지긴 해야죠. 아스펠라는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는 건지 그걸 또 곧이곧대로 믿었다.
“아, 그렇겠네요.”
펠킨은 아스펠라가 순진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아직 그의 정체도 모르는 걸 보니 답답하기도 했다가 또 안타깝기도 했다.
칼리우스는 알겠다며 대답한 아스펠라의 얼굴이 조금 시무룩해진 것을 눈치챘다. 그렇다고 없는 깜장이를 보여줄 수도 없는데다가, 자유자재로 변신이 가능한 그런 편리한 저주도 아니었다.
“깜장이가 보고 싶습니까?”
“네. 사실, 산이 타버리고 동물들도 한동안 못 볼 생각에 우울하기도 하여……. 이럴 때 깜장이 털이라도 좀 쓰다듬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아서요.”
개과라서 그런지 쓰다듬어주는 걸 되게 좋아하더라고요. 신나서 배까지 까는 걸 보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아요.
“푸흡.”
아스펠라의 말에 펠킨이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다가 아차 싶어 얼른 제 입을 틀어막았다. 칼리우스의 서슬 퍼런 눈빛이 저를 향한 것을 알고는 슬그머니 보폭을 줄이며 뒤로 빠졌다.
어느새 펠킨은 눈치껏 자리를 비켰다.
“쓰다듬고 있으면 기분이 좀 나아지겠습니까?”
칼리우스의 말에 아스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펠라는 깜장이를 쓰다듬고 그 커다란 몸체에 몸을 기대 북슬한 털을 만끽하고 싶었다. 한참 조잘조잘 말을 해도 묵묵히 들어주면서 간간히 촉촉한 코를 들이밀면, 울적했던 기분도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그럼 쓰다듬으세요.”
“감사해요……으응?!”
“뭐합니까. 얼른 쓰다듬지 않고.”
분명 깜장이를 주체로 말한 것이었는데, 아스펠라 앞에 들이밀어진 것은 깜장이의 기다란 주둥이도, 촉촉한 코도, 북슬북슬한 검은 갈기도 아닌, 칼리우스의 머리통이었다.
칼리우스는 친절하게 허리까지 수그려 아스펠라가 제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도록 했다. 당황한 아스펠라가 주춤대자, 이제는 손수 그녀의 손을 들어 제 머리 위에 얹고는 그녀의 손을 잡아 제 머리를 쓰다듬기까지 했다.
“뭐, 뭐 하시는―”
“쓰다듬으면 기분이 좀 나아진다면서요.”
“그거야 깜장이를!”
“제 머리털도 검으니 깜장이라 생각하세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요, 제가 어찌 대공 각하의 머리통을 개처럼 쓰다듬는단 말입니까.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아무도 뭐라 못할 겁니다.”
아스펠라는 얼른 손을 빼내려 했지만, 이상하게 제 손에서 사락사락 움직이는 칼리우스의 머릿결이 생각 외로 굉장히 부드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은색 머리칼에 윤이 나는 것도, 의외로 가는 모발이 손가락 사이사이 들어왔다 빠지는 감촉도, 정말 의외로 기분이 좋아 나중에 가서는 저도 모르게 그의 머리통을 쓰다듬고 말았다.
그러다 저를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칼리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금색 눈동자가 요요히 빛났다.
당장이라도 저를 집어삼킬 것처럼 쳐다보는 눈빛은 깜장이보다 더 짐승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 너머 일렁이는 원초적인 욕망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분명했다.
아스펠라의 손은 그의 머리칼에서 흘러내려 그의 얼굴 근처로 내려와 있었다.
검은 머리 밑에 자리한 조각 같은 그의 얼굴을 잠시 동안 넋이 나간 채로 쳐다봤다. 어느새 칼리우스의 얼굴이 아까 전보다 더 가까워졌다.
화들짝 놀란 아스펠라가 이내 상체를 뒤로 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칼리우스가 아쉬운 듯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이내 수그렸던 허리를 폈다.
“기분이 좀 나아졌습니까?”
“다, 당황해서 울적한 기분이 죄 사라졌습니다.”
“그것 참 다행입니다. 개보다 못하진 않죠?”
“그건!”
아스펠라가 야속한 얼굴로 칼리우스를 노려보려다가 이내 안 보여 성이 난 듯 하, 하며 작게 탄식했다. 그리고는 화끈거리는 제 얼굴에 손부채질을 해댔다.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칼리우스는 굳이 먼저 가겠다는 아스펠라를 붙잡지 않았다. 목덜미까지 빨개졌는데 아마 못 가게 막는다면 울음을 터트릴지도 모를 테니, 안타깝지만 여기서 그쳐야겠다고 생각했다.
후다닥 계단을 올라가는 아스펠라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칼리우스가 가만히 제 손을 들어 아스펠라가 쓰다듬었던 제 머리통을 만지작댔다.
개로 있었을 때보다 사람으로 있을 때의 감각이 더 마음에 든다.
“내가 배까지 깠었나.”
칼리우스가 중얼거렸다.
***
아스펠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손가락 끝부터, 손바닥, 손목을 타고 팔목을 지나 어깨를 넘어 얼굴까지 열감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귀 끝이 알싸하게 따갑다.
잘 익은 토마토마냥 벌게진 제 얼굴을 다른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발걸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아스펠 산을 등산하는 것처럼 계단을 두 칸씩 껑충껑충 뛰어 올랐다. 빨리 방에 돌아가 조금이라도 이 뜨거운 얼굴을 식혀야 하는데, 이놈의 성은 뭐가 이리 계단이 많고 층고가 높은 건가.
손으로 부채질까지 해 가며 아스펠라가 계단을 올라 복도로 꺾어 들어갔다. 발걸음은 마치 화가 난 사람마냥 거침없었다.
“진짜, 아니, 진심인 건가?”
저도 모르게 입에서 질문이 튀어나왔다.
“진짜로?”
그럴 리가 없잖아. 말이 되는가? 한눈에 반했다고? 왕국의 대공이나 되는 사람이, 꾀죄죄한 몰골과 흙을 뒤집어쓰고 머리도 대충 풀어 헤쳐, 아스펠 산에 사는 미친 여자라 불리기도 하는 자신을?
“말도 안 돼.”
그래. 말도 안 되고말고. 첫눈에 반했다는 소리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평생 연애 하지 않은 아스펠라도 알고 있다.
첫눈에 반할 이유가 없는데. 아스펠라가 중얼거렸다.
그래. 대공은 그냥 내가 신기하고 재밌으니 쿡쿡 찔러보는 거야. 왜, 어린애들이 개울가에서 개구리 콕콕 찔러보는 것처럼. 신기할 거 아니야. 귀족 중의 귀족 대공 각하신데. 나처럼 사회에서 동떨어져 산속에서만 사는 게.
얼마나 신기하겠어? 동물들이랑 대화를 한다는데.
그러니까, 일종의 호기심인거지.
그렇게 중얼거리다 이내 잠시 바쁜 발걸음을 멈춰 섰다.
“……바보 같아.”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일카이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나는 인간은 믿지 않는다고. 그런데 지금 아스펠라의 행동은 마치 대공을 믿고 싶어 오히려 그에 대한 반동으로 그를 밀어내는 모양새였다.
“믿지 않기로 했잖아.”
그날의 일을 잊은 거니. 아스펠라가 스스로를 자책하듯 중얼거렸다. 인간은 믿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순수한 호의는 정말 매우 희박한 것이며, 대개 그만큼 원하는 것이 있는 거다.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 그토록 뼈저리게 느꼈잖아.
‘그럼 우리가 널 왜 데리고 왔겠니?’
‘나 참, 능력이 사라졌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니? 그럼 네가 무슨 쓸모가 있다고.’
‘이렇게 되면 국왕 전하한테 보이나 마나잖아.’
‘쓴 돈이 아깝군.’
3년 만에 다시 돌아온 아스펠라를 보면서, 비르가는 한참 그녀를 껴안고 울지 않았던가.
「아스펠라. 미안하다, 내가 미안하구나, 아스펠라. 날 원망하거라. 인간에 대한 원망보다 널 놓으려 한 날 원망하거라. 다신 널 보내지 않으마. 다시는…….」
기대를 해서는 안 돼.
아스펠라가 고개를 내저었다. 과거를 상기하자 그 뜨겁던 얼굴이, 빨갰던 얼굴이 점차 원래 의 얼굴색으로 돌아왔다.
아스펠라가 양쪽 손바닥을 들어 열을 마저 식히려는 듯 제 양 뺨에 올렸다. 여전히 열감이 느껴졌지만, 쿵쾅대는 심장도, 삐질삐질 올라오던 땀도 사그라들었다.
이내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을 때였다. 복도 끝에서부터 일카이가 그녀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아스펠라!”
아스펠라는 잠시 숨을 고른 뒤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카이는 달리는 듯하면서 걷는 것 같은 요상한 발걸음으로 아스펠라 앞에 섰다.
이내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스펠라를 보더니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너 얼굴이 왜 이래.”
“내 얼굴이 왜?”
양 뺨은 발그레하게 붉어져 있는데 표정은 마치 상처받은 사람처럼 차갑게 내려앉지 않았나. 아스펠라는 시침 뚝 떼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되물었다.
“아니, 그보다 너한테 말해줄 게 있어.”
“무슨 얘긴데 그래.”
“여기선 조금 그렇고, 이리 와 봐.”
일카이가 주변을 잠시 둘러보더니 얼른 아스펠라의 손을 잡고 제 방으로 향했다. 아스펠라가 화들짝 놀라 그의 등을 쳤다. 악! 외마디와 함께 일카이가 제 등짝을 매만지며 뒤돌았다.
“왜 때려?!”
“내 손 막 잡지 마. 그냥 여기서 말해. 이 시간에 내가 네 방 들어간 거 다른 사람들이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자 일카이가 어이가 없단 투로 말했다.
“미안한데, 내 방은 어차피 다른 동료들도 다 같이 쓰는 중이거든? 그리고, 우리 지금 약혼한 사이거든? 아무리 구라여도, 최소한의 연기는 좀 해야 되지 않겠어? 네가 대공을 속이려면 말이야.”
그 말에 아스펠라가 도르륵 눈을 한번 굴려 생각하는 듯싶다 이내 그를 따라 방에 들어갔다. 장정 수십은 들일 수 있을 정도의 넓은 방에는 일카이의 동료들이 소파며 침대며 늘어져있었다. 그러다가 아스펠라가 들어오자 갑자기 침구 정리부터, 방청소를 해댔다.
아스펠라는 얼쯤하게 그들에게 목례를 하곤 안에 들어왔다.
동료들은 일카이를 여자 친구 데려온 집안의 막내 동생, 혹은 아들을 보듯 저들끼리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멀찍이 떨어져 둘을 구경했다.
“도대체 무슨 얘기인데 그래?”
아스펠라가 방 거실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일카이가 맞은편에 앉으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아무래도 대공이 우리 누나를 죽인 검은 마수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해. 아니, 분명 알고 있어. 대공도 그 검은 마수를 찾아다닌다 했거든.”
“뭐?”
“게다가 누나가 대공 밑에서 용병으로 일했었더라고. 용병인지, 기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누나를 경으로 부르는 걸 봐서는 꽤나 높은 직급까지 올라갔던 것 같은데.”
일카이의 말에 아스펠라가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대공의 비서가 말해줬어. 아마 대공이 먼저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뭐, 닮았으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 같지만.”
일카이가 미심쩍은 얼굴로, 뭔가 더 알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는데, 그 비서. 아닌 척 잡아떼더라고. 뭘 숨기고 있는 걸까? 하며 중얼거렸다.
“아무튼, 대공이 내 누이가 죽은 줄 모르는 건지, 누이의 행방을 묻더라고.”
그렇게 말한 일카이가 잠시 아스펠라를 쳐다보다 말을 이었다.
“대공이 키우고 있다는 그 검은 마수랑, 사라을 죽인 검은 마수가 뭔가 관련이 있는 것 같아.”
그러니까 이번에 검은 마수를 돌보게 될 때 나도 좀 같이 데려가. 일카이의 말에 아스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내가 먼저 내려가서 너와 함께 와도 되냐 물어볼게. 깜장이는 낯을 잘 가리거든.”
“그래.”
일카이는 진심으로 애완견 돌보듯 말하는 아스펠라의 모습에 잠시 신기한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다가 저기 두 번째 방 안쪽에서 옹기종기 모여 아스펠라와 일카이를 지켜보던 동료들과 눈이 마주쳤다.
음흉한 눈빛으로 보는 것이 꼭 저를 놀리는 것 같아 일카이가 짐짓 위협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래봤자 동료들에게 겁을 주진 못했다.
아스펠라가 더 이상 할 얘기 없으면 가보겠다 하자 일카이가 얼른 따라 일어섰다. 아까 전 아스펠라의 잘 익은 토마토 같은 얼굴이 영 신경이 쓰였던 것 같다.
“너 근데 진짜 무슨 일 있었어?”
“아니야, 그런 거.”
복도를 지나 거실을 나가려던 아스펠라는 콘솔 위에 잔뜩 올려진 향수들을 쳐다봤다. 문득 아까 전 아스펠라의 몸에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향기가 난다고 했던 칼리우스의 말이 떠올랐다.
“향수를 많이 좋아하나 보네?”
그러자 일카이가 콘솔 위를 힐끔 쳐다봤다.
“향수? 저거 향수 아니야.”
“그럼?”
“저건 사냥 할 때 뿌리는 거야. 정확히는, 짐승들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한 용도로 쓰는 향. 맡아봐. 인간은 구분도 못할 걸.”
그렇게 말하며 일카이가 아스펠라에게 향수를 뿌려줬다. 그의 말대로 딱히 맡아지는 향이 없었다.
“오늘도 이거 뿌렸었니? 그러니까, 아침에 화재 현장에서 봤을 때 말이야.”
아스펠라의 말에 일카이가 답했다.
“어제 뿌리긴 했지.”
“그런데, 위압감을 주는 향을 쓰면 오히려 동물들이 도망가지 않아?”
그러자 일카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이건 그런 작은 동물들 용이 아니야. 맹수들 용이지. 그중에서도, 마수 정도 되는 녀석들 말이야.”
오로지 최상위 포식자들을 자극할 때만 쓰는 일종의 자극제 같은 것이었다.
검은 마수 같은 종류들은 특정 냄새를 맡으면 도망가거나 피하기보다는 오히려 맞서거나 사냥하고 싶어 하는데, 일카이가 뿌린 것이 바로 그 향이었다.
그의 말에 아스펠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간은 구분을 못한다고?”
“대부분 구분 못해. 후각이 사냥개만큼 발달한 정도가 아니면. 그런데, 왜?”
“아니야. 나 이만 갈게. 그만 쉬어.”
아스펠라가 얼른 인사를 하며 방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일카이가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듯 아스펠라! 다급하게 이름을 부르려 했으나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긴 복도를 지나 제 방으로 돌아온 아스펠라가 소파에 앉아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아스펠라.’
‘네?’
‘향수 뿌렸습니까?’
‘냄새가 나나요? 아무것도 안 맡아지는데, 후각이 되게 좋으신가 봐요. 향수 안 뿌렸습니다. 아, 일카이가 뿌린 향수 냄새가 밴 건가?’
인간은 구분하지 못하는 향. 에르윈 대공은 그걸 어떻게 맡았을까?
깊게 생각하려던 아스펠라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설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그가 맡은 향이 저 향이라는 확신도 없고, 일카이는 사냥을 하다 왔었으니 다른 짐승 냄새를 묻혀왔을 수도 있지.
그래. 그럴 거야.
인간이 마수로 변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죽기 전 비르가가 아스펠라에게 남긴 유언은 인간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 말고도 하나 더 있었다.
비르가는 죽기 전 제 눈앞을 스쳐지나가는 먼 미래를 모두 훑어봤다. 그리고 자신이 본 길고 긴 미래 중 하나의 조각을 아스펠라에게 말해줬다.
「인두겁을 쓴 짐승은 이승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죽이거라.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순간, 튀니아의 모든 신들이 전멸할 것이다.
신을 잃은 산의 강물은 바닥이 보이도록 마르고 나무들은 썩어 비틀어질 것이며 보금자리를 잃은 짐승들은 인간들을 공격할 것이다.
산의 아이야. 너는 네가 산의 아이임을 잊지 말거라. 죽음이 있어야 생이 있고 생이 있어야 죽음이 있다. 너는 지켜져야 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지키는 존재란다.
인간을 미워하지 마렴. 어여삐 여기거라.」
비르가는 더 이상 예언을 하지 않았다.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그의 몸이 바스라졌기 때문이다.
***
둥둥둥둥.
규칙적인 북을 때리는 소리가 눅눅한 동굴 안쪽에서 울려 퍼졌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온통 검정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돌로 만들어진 제단 앞에 모여 있었다.
곧 두 사람이 개 한 마리를 끌고 왔다.
말라비틀어진 개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제 다리로 버텨 섰으나, 결국 개 목줄을 쥔 이들의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낑낑, 앓는 소리를 내던 개는 그렇게 제단 위에 눕혀졌다.
그들은 개의 사지를 잡아 밧줄로 고정시켜놓은 뒤 함부로 몸을 뒤척이지 못하도록 입에 마개를 씌웠다. 개는 자신의 미래를 알기라도 하는 양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이제 곧 신으로 다시 태어날 지니, 두려워할 것 없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가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내 그가 손짓을 하자 사제들이 사람 하나 들어가도 충분할 커다란 단지와 작은 단지 하나를 들고 왔다.
커다란 단지는 제단 옆에 둔 뒤, 작은 단지의 뚜껑을 열어 그 안에 든 흙을 한 움큼 쥐었다.
영험한 아스펠 산에서 가져온 흙이었다. 우두머리는 마치 그 흙의 기운이라도 느끼려는 듯 흙을 쥔 손을 제 코에 가져가 한참을 킁킁 맡아댔다.
“아직 기운이 있구나.”
아직 아스펠의 성스러운 기운이 남아 있어. 산이 모조리 타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중얼거리던 그가 이내 별 것 아니라는 듯, 뭐. 괜찮네. 이정도만 되어도 문제없어, 하며 혼잣말을 해댔다.
우두머리가 손을 내밀자 뒤에 서 있던 다른 이가 그에게 작은 칼을 건넸다.
칼을 건네받은 그는 천천히 제단 위에 묶여있는 개 앞으로 다가갔다. 며칠을 먹지 못해 갈비뼈가 앙상한 개가 몸을 움찔댔다.
어두운 동굴 안을 비추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촛불 몇 개뿐인 곳에서, 후드까지 뒤집어쓴 이의 눈만이 빛났다. 푸른빛이 감도는 눈동자에 벌벌 떠는 개가 들어왔다. 이내 날카로운 칼이 번뜩였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개의 비명소리가 온 동굴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결코 숨이 끊어지진 않았다. 개의 몸 곳곳에 난 작은 상처들에서는 피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커다란 단지 안에 개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위에 아스펠 산의 흙을 뿌리기 시작했다. 개는 아직 죽지 않았다. 온몸의 자상에서 피가 흘러내려 아스펠 산의 흙 속으로 번지고 있었으나 치명상은 아니었다.
우두머리는 단지 입구에 뚜껑 대신 질긴 가죽 천을 덧씌웠다. 그 위에 숨구멍이라도 뚫어 주는 양 작은 구멍 몇 개를 뚫었다.
그들은 동아줄에 소동물의 시체를 엮어 단지를 빙 둘러싸도록 둘렀다. 그런 뒤 우두머리가 단지 앞에 서서 고대 언어를 읊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제들이 단지 앞에 무릎을 꿇고 몸을 바닥에 납작 엎드린 뒤 마찬가지로 고대 언어를 외워댔다.
“신성한 생명이 꺼져가는 흙에 고통과 두려움으로 점철 된 가련한 것의 피를 보내니 그 흙은 곧 타락의 기원이 될 것이며 그 기원은 모든 것을 종말로 몰고 갈지어니,
신성한 생명이 사라진 신이여 다시 이 생명체에 깃들어 육체를 가지소서. 나약한 이승의 육체를 먹고 더렵혀진 세상의 모든 것을 멸하여 다시 정화하소서!”
“멸하소서, 멸하소서!”
둥, 둥, 둥, 둥.
북을 치는 소리는 여전히 계속해서 동굴 안을 메웠다.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고, 고대 언어를 읊는 목소리들 또한 빨라졌다. 이내 동굴 안을 환히 밝힌 촛불들이 일렁대기 시작했다.
일렁대던 촛불들 사이로 불온한 기류가 휘몰아쳤다. 북을 치던 이는 그 음습한 기운에 겁을 먹은 주변을 둘러보며 몸을 으슬으슬 떨어댔다. 그가 북을 치는 속도가 느려지자 우두머리가 소리쳤다.
“북을 더 빠르게 쳐라!”
이내 그 기운은 사제들을 한 바퀴 돌고 우두머리의 목전에 다가왔다. 보이지 않았으나 불순한 어떤 것이 그들을 휘감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우두머리는 아까 전에 읊던 고대 주문을 반복적으로 외웠다.
이내 단지 안에 들어가 있던 개가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키엥, 켕, 케엑, 낑, 컹, 컹! 그 커다란 단지가 흔들릴 정도로 발광을 하다, 개는 이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숨이 멎어가는 듯한 작고 가녀린 소리가 단지 안에서 들려왔다. 우두머리는 잠시 후드를 내리고 가죽에 뚫린 구멍에 눈을 가져다댔다.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단지 안에서 붉은 눈동자가 빛났다.
헉.
숨을 들이켠 우두머리가 이내 뒤로 주춤대며 물러났다. 사제들이 얼른 그를 부축했다. 그저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것뿐인데도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괜찮아. 하, 하하…… 하하하! 성공했어, 성공했다고!”
드디어 강령에 성공했다!
우두머리의 눈빛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드디어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어! 그의 말에 사제들이 얼른 다시 한 번 바닥에 납작 몸을 붙이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강령된 신이 아닌, 그들의 우두머리인 교주에게 올리는 기도였다.
100일 동안 물만 먹여 겨우 숨만 붙여놓은 개 한 마리를 잡아다가 죽지 않을 만큼의 자상을 입힌다.
그런 뒤 영험하고 신성한 힘을 가졌으나 타락하게 된, 모든 산줄기의 근원이 되는 아스펠 산의 일부와 함께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단지 안에 담근다.
그리고 죽은 신을 불러내어 그 기운을 개에게 씌운다.
숨구멍만 아주 작게 뚫어둔 채로 며칠 동안은 물조차 주지 않는다. 그럼 개는 잔뜩 목마르고 굶주려 죽어갈 것이다. 죽기 직전이 돼서야 음식을 준다.
그 음식은 다른 신의 사체나 혹은 부정 탄 남쪽 작은 신들의 일부, 또는 인간의 시체.
물 대신 피를 먹이고 음식 대신 사체를 먹이면 개 안에 자리 잡은 죽은 신의 영혼은 점점 악한 기운을 불리게 된다.
부정 탄 산신의 영혼은 이제 꼭두각시가 되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이리저리 이용될 예정이었다. 그들은 이것으로 금지된 주술을 행하여 혼란을 야기하고 두려움을 역병처럼 퍼트릴 것이다.
“베르델 님.”
한 신도가 그를 부르자, 우두머리가 말했다.
“그 이름은 버렸다고 하지 않았느냐.”
“죄송합니다. 교주님.”
“무슨 일이냐?”
“이렇게 하면, 정말 봉인을 풀 수 있을까요?”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다시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으냐?”
교주의 말에 신도가 입을 꾹 다문 채로 부정하지 않았다. 교주가 나직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돌아가고 싶겠지. 남쪽으로. 우리의 고향으로. 하지만 우린 그곳에서 쫓겨났다. 내가 버린 것이 아니라 우린 쫓겨난 것이다.”
“교주님.”
“그러니, 그곳에서의 생활은 이만 잊어라. 잊을 때도 되었다.”
봉인은 풀릴 거다. 자물쇠들을 모두 모았으니, 굳게 잠겨있던 봉인은 당연히 열릴 수밖에.
***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도 아스펠 산에서는 짙은 검은 연기가 계속해서 피어올랐다. 에르윈 대공 성의 아스펠라 방에서는 검게 타버린 산의 일부가 매우 잘 보였다.
아침에 눈을 떠 일어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검은 아스펠 산이었기에, 아스펠라는 영 마음이 좋지 못했다.
튀니아 왕국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며, 모든 산줄기의 근원이 된다는 아스펠 산이 불타버리자 온 나무들과 동물들이 동요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어디 그뿐일까, 자꾸만 마음 한구석이 허하고 불안하며 초조한 느낌이 들었다.
아스펠라는 창밖을 보며 한숨지었다. 제 심장 부근에 손을 올리며 산이 불탔을 때 느껴졌던 그 고통을 상기했다.
아스펠라가 대공 성에 머물게 된 이후로 아예 그녀의 전담 시녀가 된 앨리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직 남들은 자고 있을 시간에 벌써 일어나 창밖을 보고 있는 아스펠라를 보며 앨리스가 물었다.
“아가씨, 벌써 일어나셨어요?”
아스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앨리스는 기운 없는 아스펠라의 모습이 걱정스러운 듯 안쓰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다 이내 검게 타버린 아스펠 산을 쳐다봤다.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물론 전혀 괜찮은 얼굴이 아니었다.
“저 오늘 아침 식사는 빠질게요. 몸이 좋지 않아서요.”
“네? 그치만…….”
각하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삼시세끼는 잘 먹여야 당부하셨는걸요. 앨리스는 이를 어쩐다, 하는 얼굴로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아스펠라는 실제로 몸이 좋지 않았다. 정말 그녀의 말대로 산과 아스펠라가 연결되어 있는 것 마냥 산이 불타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몸이 굉장히 무겁고 나른했다.
무기력했으며 우울했다. 아스펠 산에서 항상 느껴지던 그 싱그러운 기운이 사라졌다. 생명력을 잃고 시름시름 앓는 것이 아스펠라에게도 전염된 것 같았다.
결국 앨리스는 아스펠라를 방에서 데리고 나오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아침 식사가 시작되기 전 몇 번 더 우유나 쿠키 등을 가져갔지만 아스펠라는 모두 거절했다.
아침 식사에 아스펠라가 나오지 않자 칼리우스가 물었다.
“아스펠라가 늦는군.”
그러자 앨리스에게 말을 전해들은 펠킨이 칼리우스에게 가까이가 작게 말했다.
“그게, 아스펠라 양이 몸이 좋지 않아 오늘은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셨답니다.”
칼리우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펠킨에게 되물었다.
아스펠라가 몸이 좋지 않다고? 펠킨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 그런데 앨리스 말로는, 몸이 아프시다기 보다는 심적으로 우울하신 것 같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렇게나 아끼던 아스펠 산의 대부분이 불에 타버리고, 가족처럼 지내던 동물들도 다른 산으로 피신을 가버렸으니 우울할 만하지.’
칼리우스가 그렇게 생각하며 일카이를 힐끗 쳐다봤다. 그는 제 동료들과 함께 식사에 나온 거위 다리를 뜯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래. 한창 자랄 때니 잘 먹어야겠지만.’
칼리우스는 득실대는 사냥꾼들이 처먹는 꼴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내려온 것이 아니다.
저주에 걸린 이후부터 점점 몸이 야행성으로 바뀌어가는 탓에, 아침 일찍 뭔가를 하는 것이 칼리우스에게는 힘들었다. 그러니 이곳에 내려온 이유는 단 하나. 아스펠라와 삼시세끼 식사를 같이 하고 싶어서였을 뿐.
결국 칼리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카이는 성의 주인이 일어나자 거위를 뜯다 말고 그를 쳐다봤다. 칼리우스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많이들 시장해보이니, 난 개의치 말고 마저들 드시오. 나는 입맛이 없어 먼저 일어나겠소.”
말투는 정중했으나, 일카이를 내려다보는 그 눈빛에는 약간의 무시와 경멸이 섞여있는 듯 했다.
니들을 게걸스럽게 계속 처먹으렴. 마치 며칠 동안 굶은 걸인들 마냥. 나는 너희랑 겸상은 못하겠다. 그런 느낌이 은연중에 드러났다.
사실 칼리우스도 그걸 숨길 생각이 없었다.
칼리우스가 펠킨과 함께 자리를 떴다. 일카이가 잠시 들고 있던 고기 뼈다귀를 내려놓자 그의 동료들이 작게 말했다.
“대공 각하한테 미움 받나 본데. 대장? 설마 진짜 대공 각하께서 아스펠라 양한테 관심이―”
“형. 그냥 다물고 마저 고기나 먹어.”
괜히 제 동료의 입에 고기를 쑤셔 넣어주며 일카이가 입을 다물게 했다. 동료는 저보다 한참 어린 일카이가 그리 행동해도 개의치 않은 듯 그래, 고맙지 뭐. 하며 신나게 고기를 뜯어댔다.
대공의 성이라 그런지 음식의 때깔부터가 다르다니까! 저들끼리 그렇게 말하며 신나서 식사를 해댔다. 일카이는 칼리우스가 나간 자리를 한참동안 쳐다보다 작게 중얼거렸다.
“거 되게 거슬리네.”
***
아스펠라는 그날 오후가 되도록 그저 창밖에서 불타버린 아스펠 산만 쳐다봤다. 쉽게 우울감이 사라질 듯 보이지는 않았다.
칼리우스가 오전 정무를 마칠 때쯤 앨리스가 찾아왔다.
“대공 각하.”
앨리스는 넙죽 인사를 올린 뒤에 칼리우스가 고하라 한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아스펠라 아가씨께서는 오전 5시경 기침하셔서 오전 11시경에 우유 한 모금만 마신 것 말고는 딱히 드신 음식이 없습니다. 점심도 딱히 입맛이 돌지 않는다 하여 거르실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일어나신 뒤부터는 하루 종일 창밖만 보시면서 한숨을 내쉽니다.
앨릭스는 걱정 그득한 얼굴로 어쩌죠, 하며 칼리우스의 눈치를 살폈다.
“……충격이 클 테니 당분간은 하고 싶은 대로 놔둬라.”
“예?”
칼리우스가 보인 반응은 의외였다. 잔뜩 걱정하거나, 안절부절못하거나, 혹은 아련한 눈으로 아스펠라의 처지를 가엾게 여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냉소적인 반응 아닌가.
하지만, 대공 각하. 아가씨께서는 아침도 거르시고 점심도 거르시고 저녁도 거르셨단 말이에요. 앨리스의 말에 칼리우스가 안다. 네가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 하며 이만 나가봐, 손을 공중에 휘휘 내저었다.
앨리스는 얼른 다시 한 번 꾸벅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왔다.
시녀가 서재를 나가자마자 칼리우스는 펠킨에게 오후 업무들을 가져오라며 손짓했다.
“각하. 점심 식사라도 하시고 마저 하시지요.”
“됐어. 빨리 가져와.”
결국 펠킨도 같이 점심 식사를 거른 채 곧바로 오후 업무에 들어가게 되었다. 시녀들이 샌드위치 등을 가져왔으나, 칼리우스는 손도 대지 않고 업무에 집중했다.
원래 공과 사를 정확히 구분하는 것이 칼리우스의 장점이긴 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한창 우울한 사람을 저리 내버려둬도 되는 것인가.
그 옆에서 보조를 하고 있던 펠킨이 그리 생각했을 때쯤이었다.
꼬르르르륵.
펠킨의 배에서 불충한 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배를 움켜쥔 그가 칼리우스의 눈치를 슬쩍 보다가 이내 그의 테이블 위에 올라 있는 샌드위치 네 조각을 쳐다봤다. 꿀꺽. 저도 모르게 입에 고인 침을 삼키다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났다.
칼리우스가 문서들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먹어.”
“예? 아, 아닙니다. 각하께서도 끼니를 거르시고 업무를 보시는데―”
꼬르르르륵.
다시 한 번 불충한 소리에 펠킨이 제 배를 꼬집기 시작했다.
“그냥 먹으라고. 네가 옆에서 계속 그런 소리 내는 것보다는 혼자 일하는 게 더 집중이 잘 될 거다.”
그렇게 말하며 칼리우스가 트레이를 건넸다. 펠킨은 결국 못 이기는 척 받으며 소파로 가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펠킨의 시선은 여전히 칼리우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정말 평소와 다름이 없으시군. 정말 공과 사를 잘 구분하실 줄 아는 분이셔. 나도 이런 모습은 본받아야겠는 걸. 제 주인에 대한 충성 가득한 마음을 품고 있을 때쯤이었다.
여전히 칼리우스가 문서에만 시선을 둔 채로 물었다.
“펠킨. 오늘 저녁이 야시장이 마지막 날인 것이 맞던가?”
“예? 야시장이요? 그렇죠.”
“저녁 때 잠행을 나가야겠으니, 채비 해둬라.”
“갑자기 잠행을 가신다고요?”
야시장에 잠행을 나가 무얼 한단 말인가. 거기는 노예 거래도 없고 마약 거래도 없고, 오로지 그 근처 백성들이 놀기 위해 만들어진 곳 아니던가.
그냥 축제가 아닌가?
각하께서는 그런 것을 가장 쓸데없다고 안 좋아하시더니 그곳에는 왜…….
펠킨이 퍼뜩 고개를 들어 칼리우스를 쳐다봤다. 두 손에는 가지런히 샌드위치를 든 채로 물었다.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가기 시작한다.
“설마, 각하. 아스펠라 양이 우울해하시니까…….”
그래서 오후 업무도 빨리 보시려 한 거군요! 칼리우스는 그의 말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문서들을 결재할 뿐이었다. 펠킨이 소파에 앉아 제가 다 간질간질해지는 대공의 행동에 히죽대며 웃자, 칼리우스가 서슬 퍼런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히죽대지 말고 와서 빨리 일이나 해.”
“아유, 네. 당연하죠. 우리 각하께서 아스펠라 양과 야시장 데이트를 하셔야 하는데. 그냥 여기부터는 제가 할까요?”
펠킨은 칼리우스의 이런 모습은 처음인지라 조금 놀리고 싶었다. 오랜 시간 그와 함께 자라고 보좌하며 알고 있었지만, 칼리우스는 정말 무서우리만치 공과 사를 지키던 사람 아니던가.
“됐어. 내가 일을 떠넘길 사람으로 보이나?”
사실, 칼리우스는 공과 사에서 ‘사’가 없는 사람이었다. 산신 토벌을 위해 출정을 떠나거나 혹은 집무실에 앉아 정무를 보는 것이 그의 인생의 전부였다.
“에이, 그럴 리가요. 각하. 제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그냥, 각하께서 이런 모습 보이시는 게 처음인지라 기뻐서 그럽니다.”
펠킨이 눈빛은 처음 데이트를 나가는 아들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부모님과도 같은 눈빛이었다. 칼리우스는 그 시선을 역겨운 것이라도 마주한 듯 오만상을 찌푸렸다.
“제발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왜요?”
“네가 꼭 날 업어 키운 것 같은 눈빛이니까. 우린 동갑이거든?”
“이런 쪽으로는 사실 제가 더 경험이 많지 않습니까, 각하.”
펠킨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각하께서는 그 잘생긴 얼굴을 십분 활용하지 못하시어, 한 번도 영애들과 데이트를 해보신 적이 없잖아요.
“하극상도 이런 하극상이 없군.”
칼리우스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펠킨을 쳐다봤다.
“여인과의 데이트는 처음이시잖습니까? 그것도 마음에 둔 여인을. 데이트는 일반 잠행과는 전혀 다르죠, 각하.”
집무를 보는 와중에 애인과 데이트한 횟수라거나, 데이트 장소 등의 이야기가 나오다니. 펠킨이야 워낙 샛길로 잘 새는 편이라 그렇다 쳐도, 칼리우스의 성정 같았으면 이런 대화는 애초부터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애인의 첫 글자만 나와도 칼리우스가 단칼에 잘랐을 테니까.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뭐가 다르단 말이냐.”
그런 것에는 하등 관심 없던 사람이, 슬쩍 펠킨에게 묻는 것 아니겠는가. 펠킨은 슬슬 자신의 연애 비기들을 흘려주기 시작했다. 데이트는 말이죠, 각하. 펠킨이 신나서 얘기를 시작했다.
그 말을 꽤나 진지하게 듣고 있는 칼리우스의 모습을 보니 펠킨이 퍽 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커다란 몸집으로 날뛰는 산신들을 제압하는 최고의 장군이며, 튀니아 왕국의 대공 자리에 오른 에르윈 가문의 가주이기도 하지만, 그 수많은 단단한 껍질 안에는 여타 다른 청년들과 다를 것 없는 말랑한 구석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 대공 각하라 하지만, 그도 결국엔 스물넷의 청년일 뿐.
그보다 한 살 더 많은 펠킨은 마치 제 남동생에게 조언을 하듯 한참을 조잘댔다.
칼리우스가 그런 그의 말에 토를 달거나, 질린 얼굴을 하지 않고 진심으로 집중하여 그의 말에 귀 기울인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한참 동안 펠킨의 강의를 듣고, 오후에 볼 집무까지 몰아서 죄 끝내버렸다.
칼리우스는 잠시 제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본 그가 이게 뭔 헛짓거리인가, 자조했다.
그러다가 이내 우울해하는 아스펠라를 떠올렸다.
아마 분명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멍하니 아스펠 산만 보고 있을 거다.
누군가는 그런 아스펠라를 보면서 웬 유난이냐 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칼리우스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도, 칼리우스에게도 아스펠 산은 특별한 곳이었으니까.
야시장을 간다 하여 우울한 그 마음이 원래대로 돌아올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주의를 다른 곳에 돌렸으면 하는 마음이니까. 칼리우스는 그런 생각으로 아스펠라의 방에 발걸음을 옮겼다.
***
해가 점점 아래로 기울었다. 아스펠라는 오늘 앨리스의 성화에 못 이겨 하루 종일 우유 한잔과 쿠키 몇 조각을 먹은 것 말고는 달리 먹은 것이 없었다.
배는 고팠으나 식욕이 들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의 모습은 어째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왔다.
지금쯤 너구리 영감과 다른 이들은 안전하게 다른 산으로 피신을 갔을까. 범인이 다른 산까지 노리지는 않을까. 온갖 걱정이 아스펠라의 머리에 가득 찼다.
바람결에 나무와 대지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실려 왔다. 아스펠라는 결국 창문을 닫고 말았다. 고개를 떨군 채로 창문 앞에 둔 소파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 조용히, 묵직하게 문을 두드렸다.
아스펠라는 또 앨리스겠거니 싶어 들어와요, 하고 무기력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앨리스가 아닌 에르윈 대공이었다. 아스펠라가 얼른 몸을 일으켜 예를 취하자 칼리우스가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살짝 손을 들어 올렸다.
“몸이 좋지 않다고요?”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듯 집요하게 쳐다봤다. 아스펠라는 그 시선에 긴장이라도 한듯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아 꼭 쥔 뒤 말했다.
“네.”
“주치의라도 불러야겠군요.”
“그 정도로 아픈 건 아닙니다, 각하. 괜찮습니다. ……그저, 심적으로 좋지 않아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게 말하는 아스펠라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칼리우스가 그런 아스펠라를 가만히 쳐다보다 이내 목적을 꺼냈다.
“아스펠라. 잠행을 나갈 건데, 같이 나가겠습니까.”
“잠행이요?”
“항구 근처 치안이 잘 되어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요. 게다가 오늘이 야시장 마지막 날이기도 하고.”
10개국을 돌아다니는 무역선이 여정을 마치고 들어오는 날, 그 무역선에서 내린 수많은 상인들이 각 나라의 물품과 음식을 만들어 판다.
일 년에 딱 한 번 일주일간 열리는 것인데, 백성들 사이에서는 <10개국 축제>라는 이름이 붙여질 정도로 인기가 많다.
아스펠라는 그 야시장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약방 영감에게 약초를 팔고, 그 돈으로 생필품 몇 가지를 살 때가 아니면 인간 사회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또한 야시장이 열리는 시간이 되면 산을 내려가야 하기에 굉장히 위험했고, 인파의 냄새를 짙게 묻히면 동물들이 싫어했다.
너구리 영감이나 다른 짐승들처럼 후각이 발달하지 못한 아스펠라는 모를 테지만, 인간의 냄새는 짐승들에게 꽤나 독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야시장이요?”
아스펠라의 눈이 살짝 빛났다가 이내 다시 가라앉았다.
“아뇨. 저는 그냥 여기에 있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역시 몸이 많이 좋지 않나 보군요. 가서 주치의를 데려와라.”
칼리우스가 방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앨리스에게 말했다. 앨리스가 네, 각하, 하며 자리를 뜨려 하자 아스펠라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뇨, 정말 몸은 안 아파요! 그냥, 무기력해서 그러는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러니 오늘은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은 칼리우스에게 통할 리 없었다.
칼리우스는 지금 당장 주치의를 불러 오만 진찰을 하고 귀한 약재를 받아먹을 테냐, 아니면 나와 잠행을 나갈 테냐 싶은 막무가내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스펠라가 고민하자, 칼리우스가 앨리스에게 자리를 비켜보라는 듯 손짓을 했다.
“아스펠라. 산이 불타 슬픈 마음은 알겠으나, 이러는 건 그대한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아.”
그건 아스펠라도 안다. 하지만 이렇게 속이 상해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는데 어찌한단 말인가.
“나는 아스펠라를 좋아하는 사람이니 당신이 이렇게 우울해하는 걸 마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훅 치고 들어오는 칼리우스의 말에 아스펠라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럴 때일수록 뭐라도 해서 주의를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오늘 야시장 가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 생각하는데.”
“…….”
“장담하건대, 분명 당신도 즐기게 될 겁니다. 재밌는 곳이니까.”
그렇게 말한 칼리우스가 뒷짐 진 오른손을 아스펠라에게 내밀었다. 아스펠라는 그가 내민 손을 쳐다보다 이내 그의 큰 손 위에 제 손을 올려놨다.
***
일카이는 오늘 훈련에 영 집중하지 못했다.
“이봐, 일카이. 자네 오늘 왜 이리 집중을 못 하는 건가?”
“죄송합니다, 하벨 님.”
튀니아의 사냥꾼들은 의외로 귀족들과 접점이 많은 편이었다. 튀니아의 귀족들은 사냥에 남다른 애착이 있었다. 선왕 때는 신께 제물을 바치고 자신의 기상을 알리는 용도로서, 현 국왕 때는 산신 토벌에 뜻을 같이 한다는 의미로서.
그러니 사냥꾼들 중에서도 가장 으뜸인 이들만 들어올 수 있다는 오크몬드 사냥 조합은, 귀족들의 대련 상대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영애들에게는 근육이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눈요깃거리가 되고, 영식들은 사냥꾼에 뒤지지 않는 자신의 용맹함을 뽐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칼리우스는 일카이와 다른 사냥꾼들이 귀족들과 대련하거나, 그들과 함께 사냥하는 것을 금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관대했다.
해서 오늘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예정대로 하벨 남작과 사냥 대련을 하러 온 것이다. 사냥 훈련은 하벨 남작 소유의 숲에서 이뤄졌다. 물론, 아스펠라가 영 마음에 걸려 제대로 집중하지는 못했다.
결국 하벨 경이 훈련을 중단했다.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하벨 남작은 너그러운 편이 아니었기에, 욕설을 듣거나 어쩌면 한 대 맞을 거라 생각한 일카이가 가만히 고개를 수그렸다. 그러나 웬 걸. 하벨 경이 오히려 일카이의 어깨를 격려하듯 툭툭 치는 것 아니겠는가.
자그마한 체구의 하벨 남작이 저보다 배는 큰 남자의 어깨를 두드리는 모습은 꽤나 이질적이었다.
“괜찮네. 사람이 살다보면 고민도 있고 그러지.”
일카이는 그런 하벨 남작을 내려다봤다. 이 인간이 왜 이러지? 보통 때 같았으면 온갖 쌍욕을 하거나 정강이를 발로 차는 등의 폭력도 쓰는 인간 아니던가.
“그나저나, 자네. 이번에 에르윈 대공 각하의 성에 들어갔다면서? 대공과는 어떤 인연인가? 사냥제 때 그분의 팀으로 나가는 것인가? 각하께서는, 아직 팀을 다 꾸리시지는 않으셨지?”
아직 자리는 있는가? 각하와는, 많이 친한가? 대공이 자네를 아끼는 편인가? 지금 대공은 어디 계시지? 하벨은 욕설 대신 질문을 연달아 해댔다. 일카이는 저를 올려다보는 욕심 가득한 눈을 알아챘다.
일카이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하나 잠시 생각했다. 아스펠라를 따라갔다고 얘기했다가는 그 여자는 또 누구냐 물을 테고. 약혼자라 둘러대면 분명 스캔들을 만들어대기 뻔하고.
그러나 칼리우스를 엿 먹이고 싶어 괜히 거짓말 했다가는 자신 역시 피 볼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제 누이가 예전 대공 각하 밑에서 용병으로 일한 적이 있어 그 인연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니, 누이가 있었는가?”
“네. 전 오크몬드 대장이었습니다.”
“그래? 몰랐던 일이군. 아무튼, 대공 각하께서 자네들에게 거처까지 내어줄 정도면 꽤나 친근한 사이인가 보구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저 대공 각하께서 꽤나 너그러우신 분이시겠지요.”
너그럽다고 말하는 것과는 달리 일카이의 표정이 비아냥거리는 듯한 모양새에, 하벨은 고갤를 갸웃댔다. 친한 거야, 만 거야.
“아무튼, 자네. 이번에 각하께서 사냥제 때 같은 팀이 될 다른 귀족들을 찾는다 하시면―”
하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카이가 대답했다.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하벨 남작님.”
“허허허, 그래. 눈치가 빨라 참 좋아. 응.”
하벨이 다시 한 번 일카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내 다시 훈련을 시작하자며 그가 화살을 붕붕 공중에 휘둘렀다. 일카이는 그런 하벨 남작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남작이라고는 하나 한물 간 남작 가문 아니던가.
그저 돈 쥐여 주고 불러만 주면 군말 없이 가는 편이었던 일카이라 별 생각 없었지만, 하벨 남작의 부름에 더 이상 답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봐, 대장. 이제 하벨 가에는 오지 말자고.”
저렇게 사교계에 재기할 생각으로 불러들이는 이들은 우리와 맞지 않아. 다른 동료들이 지나치면서 거들었다. 일카이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응. 알겠어.”
“게다가 께름칙하기도 하잖아.”
동료의 말에 일카이가 을씨년스러운 하벨 남작가의 저택을 쳐다봤다. 비가 온 날도 아니고, 분명 대공가의 저택에서 출발했을 때만 해도 해가 쨍쨍했는데, 하벨 남작의 저택에 온 뒤부터는 저 먹구름 가득 낀 하늘만 줄곧 보고 있지 않나.
덕분에 동물들도 겁을 먹고 예민해져 사냥하는 것이 영 재밌지가 않았다.
하벨 남작가는 원래 이렇게까지 몰락에 가까워진 가문은 아니었다고 들었다. 12년 전만 해도 사교계에서 무시하지 못할 위치를 가진 이들이었다고 한다.
헌데 이 집안의 후계자들이 줄줄이 초상을 치르며 그대로 가세가 기울었다고. 남작 부인은 제 아들들을 잃은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어느 날 갑자기 반 미쳐버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머리가 희끗해진 하벨 남작은 제 후계자들을 모두 잃었고, 미쳐버린 부인은 더 이상 후계를 낳을 수 없었으며 그 누구도 남작의 후처로 들어올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남작마저 죽으면 이 가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서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것을 그냥 두고만 볼 순 없었는지, 이번 사냥제를 발판 삼아 조금이라도 재기하기 위해 발악하려는 속셈인 듯했다.
“신의 저주를 받았다는 소문도 있다고.”
동료의 말에 일카이가 그런 헛소리도 있냐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진짜라니까? 12년 전에 이 저택에 신이 내려와서 직접 저주를 내렸대. 아마 아스펠 산의 신일 걸? 남작부인은 그날 거품 물고 기절했다더라고. 그래서 이 집 하인들도 대부분 도망쳤잖아.”
자식이 셋이었는데, 장남은 눈을 찔러 자살하고, 차남은 제 귀에 만년필을 꽂고 자살하고, 딸 하나는 실종, 미쳐버린 남작 부인까지.
얼마 안 가 사라질 가문이야. 이런 가문과 엮여봤자 좋을 것 하나 없어. 오늘은 대충 하고 돌아가자고. 동료의 말에 일카이 역시 말 위에 올라타며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타앙!
총포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산속에 있던 까마귀들이 일제히 검은 몸집을 퍼덕거리며 하늘을 메웠다.
깜짝 놀란 일카이와 다른 사냥꾼들은 동요하는 말을 진정시키며 얼른 남작이 있을 숲 안으로 들어갔다.
숲속 깊은 곳에서 또 한 번의 총포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하벨 남작의 외침이 들렸다.
“잡았네! 잡았어!”
일카이가 말고삐를 몰아 하벨 남작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는 뭔가에 겁이 질린 듯한 얼굴로 기다란 사냥총을 든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일카이는 한숨을 내쉬곤, 그를 잠시 한심스럽다는 눈으로 흘겨보다 정중하게 말했다.
“각하, 제가 숲에서 사냥할 때는 총보다 활을 쓰시는 것이 좋다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까.”
몸집이 매우 큰 짐승을 상대할 게 아니면 총을 쓰는 것은 꽤나 효율이 떨어지는 행동이었다. 일카이는 총소리 덕에 주변 소동물은 죄 도망쳤을 테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며 파하려던 참이었다.
“내, 내가 죽였어! 주, 죽였다고! 저주는 없어질 거야! 없어진다고!”
중얼거리던 하벨 남작이 일카이의 옷가지를 잡아당기며 애원했다.
“자네, 가서 화, 확인 좀 해보게. 죽었는지. 신이 죽었는지! 이런 젠장, 내가 신을 진짜 죽였어! 이제 저주도 사라지는 거라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일카이가 한숨을 내쉬며 하벨 남작이 가리킨 수풀 너머 쪽으로 향했다.
“하…….”
“죽었나? 죽었어? 죽었지? 내가 신을 죽인 거 맞지? 대공 각하께서도 날―”
“신은 무슨 신입니까. 그냥 떠돌이 개입니다.”
일카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하벨 남작이 슬그머니 다가와 제가 쏜 짐승을 내려다봤다. 그건 신이 아니었다. 그저 흰 털을 가진 개였다. 먹이를 들고 가는 중이었는지 입에는 쥐 한 마리가 물려 있었다. 일카이는 잠시 다가가 개의 축 처진 젖을 확인했다.
어미 개군. 어미 개를 죽인 거야. 일카이는 근처 일대를 살폈다. 하벨 남작은 갑자기 정말 미쳐버리기라도 한 것인지 아닌데, 분명 신이었는데, 흰 털을 가진 신이 날 보고 죽이려 했는데, 하며 중얼거렸다.
근처 일대를 뒤지던 일카이가 결국 새끼 강아지들을 찾아냈다. 새끼를 밴 짐승이나, 아직 어린 새끼를 키우는 어미 짐승은 건들지 않는 것이 사냥하는 이의 예의 아니던가.
“미안하다.”
일카이는 잠시 작은 것들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얘네를 이곳에 방치했다간 또 틀림없이 짐승 밥이 되거나 까마귀들이 쪼아 먹을 텐데.
원래 야생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라지만, 일카이는 어째 꼬물거리는 작은 강아지들을 보며 알 수 없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여기 두고 갔다간 저 미친 노인네가 또 신을 죽였다, 뭐다 하며 난리를 칠 것이 뻔했다.
“……아스펠라가, 좋아하려나.”
***
아스펠라는 창밖을 쳐다봤다. 아직 항구 근처도 아니었으나, 아스펠라에게는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야시장으로 가는 길목에는 온갖 상점들이 있었다. 그건 아스펠 산의 근처에 있는 자그마한 동네 시장과는 결이 달랐다.
건물들은 동네 시장처럼 흙이나 지푸라기, 혹은 천막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화려하고 단단하고 드높은 건물들이 보였다.
창문에 딱 달라붙어 밖을 쳐다보는 아스펠라를 보며 칼리우스가 나직하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제야 아스펠라가 제 모습을 자각한 것인지 슬그머니 창문에 딱 붙은 제 양손을 떼어냈다.
얼마 안 가 야시장 길목으로 들어가는 곳에 도착했다. 사람이 어찌나 득시글거리는지 아스펠라와 칼리우스는 마차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원래, 데이트의 묘미란 그런 겁니다 각하. 사람 많은 곳에서 인파에 이리저리 치이면서 무언가가 생겨나는 것이지요.’
칼리우스는 펠킨의 능글맞은 눈빛과 말투를 떠올렸다. 그닥 신뢰가 가는 말은 아니었다. 무언가가 생겨나기는커녕 지독한 인간 냄새 때문에 칼리우스는 코가 아릴 지경이었다.
온갖 냄새들이 코를 마비시켰다. 이국에서 온 향신료 냄새부터 음식 냄새, 사람들의 땀 냄새, 향수 냄새까지.
이리저리 어깨를 치이고 다니는 통에 칼리우스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그러다가 제 소매를 슬그머니 잡아오는 아스펠라의 손길에 얼른 옆을 내려다봤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여 중심을 잃은 아스펠라가 저도 모르게 그를 잡은 것이다. 그와는 달리 아스펠라는 야시장이 신기한 듯 눈을 토끼처럼 동그랗게 뜨고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칼리우스는 아스펠라의 손을 들어 제 팔에 팔짱을 끼도록 했다. 아스펠라가 화들짝 놀라며 팔을 빼려 하자 그가 팔을 빼지 못하도록 하며 말했다.
“아스펠라. 인파가 많으니 휩쓸릴 수 있잖습니까. 미아 되고 싶으십니까. 팔짱 끼세요.”
사심 따위는 없는 듯 무표정하게 말했다. 아스펠라도 그의 말에 동의하는 것인지 더 이상 팔을 빼지 않고 얌전히 칼리우스에게 팔짱을 꼈다.
아스펠라의 눈은 이리저리 굴러다니느라 바빴다.
여태까지 본 적 없는 이국의 색채가 물씬 느껴지는 곳이었다. 머리에 얹은 저 동그란 것은 무엇이지? 저 사람은 어떻게 불을 입 안에 넣은 걸까?
아니, 어떻게 피리로 뱀을 조종할 수 있는 거지? 이 독특한 향기는 뭐지? 저 특이한 패턴의 러그는 어느 나라 것일까. 저 사람의 생김새며 피부색은 튀니아 인과는 완전 다르잖아. 아니 저 사람은 또 아까 저 사람과 전혀 다르게 생겼잖아?
칼리우스에게는 별 신기한 것도 아닐 것들이었다. 그저 사막 지대를 넘어온 이의 터번이었으며, 묘기를 부리는 서커스단이었으며, 향신료였으며, 이국에서 넘어온 양탄자였으며, 중간지대의 사막을 넘은 이와, 동쪽 바다에서 건너온 이였을 뿐이었다.
칼리우스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들이 살고 있는 이 커다란 구체의 세상에서는 다양한 인종이 있고 각기 다른 문명과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
하지만 아스펠라는 아니었다. 아스펠라에게 세상의 전부는 아스펠 산과 아스펠 산 근처의 작은 시장뿐이었다.
“아스펠라?”
“어,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있죠? 전 처음보는 사람들이에요. 어떻게 생김새가 이렇게나 다르고 피부색이 다른 거예요?”
아스펠라에게는 온통 새로운 것뿐이었다.
“어떻게 밤이 되었는데도 이렇게 낮처럼 밝을 수가 있는 거죠?”
아스펠 산에서는 사람들 사는 곳이 자그맣게 보인다. 밤이 되어서도 어둡지 않고 마치 반딧불이들이 모여 있는 것처럼 빛나는 곳. 어린 아스펠라는 그곳이 신기해 밤이 되면 높은 곳까지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곤 했었다.
지금 이곳을 산에서 쳐다보면 딱 반딧불이 같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신기합니까?”
칼리우스의 말에 아스펠라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아스펠 산에 대한 것을 잠시나마 잊은 듯하여 칼리우스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스펠라는 길거리에 즐비한 음식들이 신기한 듯 쳐다봤다. 평소 시장을 돌아다닐 땐 길거리의 음식들 같은 건 별로 궁금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음이 동했다.
어쩌면, 하루 종일 제대로 안 먹은 탓도 있을 것이다.
“아스펠라. 오늘 하루 종일 안 먹었죠?”
“네.”
“뭐라도 먹어야겠군요.”
그렇게 말한 칼리우스가 먹고 싶은 것을 사오라며 아스펠라에게 돈을 주려던 참이었다.
‘각하. 무슨 일이 있으시더라도 아스펠라 양에게 돈 줄 테니 너 하고 싶은 거 해라. 이런 식으로 하시면 안 됩니다.’
펠킨의 말이 떠올랐다. 아스펠라 양은 아직 문명에 적응하기 힘들어합니다. 각하께서 나서서 보여주셔야지 아스펠라 양이 의지도 하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칼리우스는 난생 처음으로 스스로 길거리 음식을 사기에 이르렀다.
음식을 팔던 이국의 상인은 커다란 몸집의 남자가 주머니에서 대충 금화를 우르르 꺼내 저에게 내미는 것을 보고 웬 횡재냐, 하기 보다는 겁에 질리고 말았을 것이다.
칼리우스는 상인이 덜덜 떨며 음식을 공손하게 주든 말든 옆에 있는 아스펠라에게 쥐여주었다.
“많이 먹어야겠습니다. 아스펠라.”
아스펠라의 앙상한 팔뚝을 쳐다보던 칼리우스가 중얼거렸다. 아스펠라는 언제나 죽지 않을 정도로의 식사만 해왔기 때문에 마른 편이었다. 이렇게 작고 마르니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여 비틀대지.
아스펠라는 양념이 묻어 있는 길고 매끈한 줄 같은 것을 호록 입에 넣으려다 칼리우스의 지긋한 시선에 부담스러운 듯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치여 비틀댔다. 그런 아스펠라의 어깨를 칼리우스가 감쌌다. 그러자 아까 전보다 사람들에게 치여 비틀대는 일이 없어졌다.
“감사합니다. 각하.”
“아스펠라.”
“네?”
“고마워요, 칼리우스. 해보세요.”
그의 말에 국수를 먹던 아스펠라가 사례가 들린 듯 켁켁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이국의 상인은 두 커플의 대화를 제대로 알아들은 순 없었으나 얼른 물을 따라 아스펠라에게 건넸다.
아스펠라가 물을 들이켜곤 숨을 고른 뒤 못 들은 척 네? 하며 물었다.
“칼리우스라고 해보라고요.”
“제가 어찌 각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단 말입니까.”
아스펠라는 당황할 뿐이었다. 그녀가 귀족 신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어도 한 나라의 대공이나 되는 자가 얼마나 높은 신분인지는 안다.
대공의 존함을 막 불렀다가는 목이 달아나는 경우도 있을 거라고. 왕 다음으로 높으신 분이라고. 약방 영감이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지 않은가.
“못 부를 건 없죠. 난 아스펠라가 내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좋겠습니다.”
정 못하겠으면 대공으로서 명령해도 되는 겁니까. 본인이 그렇게 해달라는데 못해줄 건 또 뭡니까. 그렇게 말하며,
“나의 간절한 부탁입니다. 아스펠라.”
뻔뻔하게 구는 것 아니겠는가.
칼리우스의 말에 아스펠라가 할 말이 사라진 듯 눈을 깜빡였다.
매번 일카이, 일카이. 어린놈의 이름은 잘만 부르면서 제 이름 못 부를 건 없지 않나. 칼리우스는 자신이 이렇게나 유치한 질투를 한다는 것이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가지만, 이해하려 노력할 생각도 없었다.
“앞으로는 내 이름으로 부르세요. 아스펠라.”
아스펠라가 대답을 못하고 있자 칼리우스가 생긋 웃으며 대답을 종용했다.
“대답.”
“……네.”
칼리우스가 그 뒤에 뭔가 잊은 말이 없냐는 듯 뚫어지게 쳐다보자 아스펠라가 결국 후,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네. 칼리우스.”
그제야 칼리우스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호선이 그려졌다.
아스펠라의 요기가 끝나고 두 사람은 또 한참 이곳저곳 기웃댔다.
아스펠라에겐 너무나 신기하고 새로운 곳 투성이였고, 칼리우스에게는 진부하고 지루한 것 투성이였으나 그에게는 아스펠라가 새로웠으니 둘 다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잠행이었다.
밤늦게까지 야시장의 불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스펠라는 더 있고 싶었으나 점점 내려오는 눈꺼풀에 눈을 몇 번 느리게 감았다 뜨거나, 고양이가 세수하듯 제 손으로 눈을 부비기도 했다.
결국 칼리우스가 마차가 있는 쪽으로 반 강제로 아스펠라를 데리고 갔다.
마차에 타자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늘 어땠습니까?”
칼리우스의 질문에 아스펠라는 졸다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너무 재밌었어요. 예전엔 이런 곳 별로라고 생각했었는데 제 생각이 짧았나 봐요.”
아스펠라는 자신의 세상이 새삼 얼마나 좁았는지 깨닫게 되었다며 말을 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지금 자신의 처지가 아닐까. 얼마나 넓은 세상이 있는지 가늠도 채 되지 않는다.
세상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 평생을 비르가와 함께 산속에서 지낼 거니 알 필요 없다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도 그에 맞춰 변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걸 이제야 깨달아 조금 씁쓸하다며 아스펠라가 말끝을 흐렸다.
아스펠라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바닥을 쳐다봤다. 여기저기 걸어다니느라 흙투성이가 된 자신의 신발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칼리우스의 커다란 신발이 아스펠라의 두 발 사이로 천천히 들어왔다.
그의 신발이 아스펠라의 신발을 톡 쳤다. 아스펠라가 고개를 들어 칼리우스와 눈을 마주쳤다. 창틀에 턱을 괸 채로 아스펠라를 쳐다보고 있던 칼리우스가 요요하게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아스펠라. 세상은 넓습니다. 지금 이곳은 아주 작은 티끌에 불과해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아스펠라가 모르는 모든 것들, 내가 다 알려주겠습니다. 나는 다 보여줄 수 있어요. 아스펠라에게 이 넓은 세상을 가져다 줄 수 있어.
당신이 세상을 원하면 나는 세상을 줄 수 있고, 사람을 원하면 사람을 줄 수 있습니다.
“말만 하면 모든 것이 당신의 뜻대로 될 거야.”
유독 그의 눈빛이 빛나 보이는 이유는, 창문 너머 보이는 야시장의 불빛 때문일 걸까. 아스펠라는 그의 말과 눈빛에 목이 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스펠라는 그의 신발이 다시 한 번 제 신발을 톡 치는 것을 느꼈다. 아스펠라의 시선은 여전히 그에게로 향해 있었다. 여전히 칼리우스는 창틀에 턱을 괸 채로 나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내 그의 신발은 아스펠라의 치맛자락 안으로 들어왔다. 신발 옆구리를 톡 치던 그의 발짓이 어느새 아스펠라의 복숭아뼈를 스치듯 건드리더니 이내 종아리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자, 장난이 지나치시네요, 칼리우스.”
아스펠라가 긴장한 듯 몸을 움츠리면서도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살짝 놀란 듯 가만히 아스펠라를 쳐다보던 칼리우스가 픽 웃음을 흘리며 다리를 바로 했다.
“미안합니다. 장난이 지나쳤습니다.”
그 후로 칼리우스가 아까 전처럼 아스펠라를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아스펠라는 이상하게 몸이 긴장되었다. 졸음이 쏟아지던 것은 오간데 없어졌다.
정작 맞은편의 칼리우스는 창문에 턱을 괸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지 않은가.
피곤했을 터였다. 아스펠라가 야시장을 돌아다니며 온갖 것에 신기해하는 동안 칼리우스는 점점 더 독해지는 인간 냄새들과 온갖 음식과 향신료 냄새에 머리가 다 아플 정도였으니.
어디 그뿐인가. 마수로 변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인간일 때도 그에 영향을 받는 것인지 청각이 그 전과는 달리 매우 예민해졌다. 아주 작은 소리들까지 모두 그의 귀에 와 꽂혔다.
후각과 청각 모두 예민해지는데 아스펠라 앞에서 표정까지 관리하느라 꽤나 애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스펠라는 그런 칼리우스의 고충을 알 리 없으니 그저 야속할 뿐이었다.
사람을 이렇게나 긴장하게 만들어놓고, 저는 잠이 오는 것인가?
아스펠라가 그를 살짝 노려봤다.
칼리우스의 얼굴을 제대로 보는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그 전에는 자신이 여태까지 봐온 인간들 중 가장 잘생겼다는 걸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스펠라는 저도 모르게 칼리우스의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눈썹이 짙고 곱게 났으며 얼굴의 뼈들은 어쩜 저리 조각처럼 들어가고 나왔을까. 콧대가 매우 높구나. 입술이 도톰하네. 갈라진 부분 없고 매끈한 것이 엄청 말랑해 뵈는…….
그러다 퍼뜩 놀라며 얼른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스펠라는 제 앞에서 무해하게 잠든 칼리우스를 보면서도 절대 긴장을 놓지 못했다. 마치 잠든 맹수를 지켜보는 사냥감이 될 초식동물의 기분이란 것이 이런 걸까.
‘역시. 단둘이서만 있는 건 이상하게 긴장된단 말이지. 자꾸 목도 막히고, 심장도 이상하게 뛰고. 내가 그를 무서워하는 건가?’
하긴. 누구라도 대공 앞에 서면 무서워할 것이 분명했다.
‘……빨리 대공 성에 도착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아스펠라는 이상하게 졸고 있는 칼리우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가만히, 창밖으로 지나가는 수많은 불빛과 건물들에는 관심 없는 듯 그만 쳐다봤다.
***
마차는 새벽쯤 되어서야 대공 성에 도착했다. 칼리우스는 이미 졸릴 대로 졸려 눈이 풀린 아스펠라를 부축해줬다. 아스펠라는 저 혼자 숙면을 취한 칼리우스가 야속하면서도 연신 그의 부축을 받아 계단을 올라갔다.
칼리우스는 사람이 걸으면서도 졸 수 있다는 걸 발견해 신기한 듯 쳐다봤다.
“저 정말 혼자 올라갈 수 있어요.”
“이 정도 부축은 해야 내가 점수를 따지 않겠습니까.”
칼리우스의 말에 아스펠라가 하는 수 없이 얌전히 그의 부축을 받았다. 방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들이 욕조를 들고 왔다.
“아가씨. 주무시고 계시면 저희가 깨끗이 씻긴 뒤에 눕힐게요. 편히 있으셔요.”
이런 호사에 점점 익숙해지는 기분이라 아스펠라는 이럼 안 되는데,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편히 있으라던 시녀들은 한밤이 되어서야 온 아스펠라에게 신나서 이것저것 물었다. 대공 각하와 야시장 잠행은 어떠셨냐, 대공이 달리 하신 말씀은 없었냐. 아스펠라는 최대한 열심히 대답해주려 했으나 점점 내려오는 눈꺼풀에 지고 말았다.
앨리스를 비롯한 시녀들은 대공 각하와 신비에 싸인 산속 소녀와의 로맨스를 기대했던 것 같다. 시녀들 사이에서 돌고 있는 로맨스 소설이 꼭 아스펠라와 대공 각하의 이야기인 것 같아 저들끼리 설레발을 쳐댔다.
여기 그 인기 있는 로맨스 소설보다, 우리 대공 각하랑 아가씨 이야기가 더 재미지다던 이들은 잠행을 가장한 데이트 이야기를 듣지 못해 아쉬운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
아스펠라는 누군가 제 얼굴을 마구 핥아대는 기분에 겨우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오늘 새벽쯤 대공 성에 도착해 시녀들이 씻겨주던 것 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이후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목욕 도중 잠들었던 걸까. 아스펠라는 새 잠옷으로 갈아입혀진 채로 푹신한 침대에서 눈을 떴다.
“으응…….”
아까 전부터 축축한 느낌이 든다. 얼굴을 누가 자꾸 핥는다. 아스펠라가 끙, 고개를 돌려 확인하려하는데 촉촉한 검은 콩 같은 알맹이가 눈앞에 들이닥쳤다.
“응……?”
검은 콩 세 개가 아스펠라의 눈앞에 다가오더니, 이내 분홍 혀가 날름 볼을 핥았다. 뭐, 뭐지? 아직 잠결에 상황 파악을 못하는 중인데 이내 익살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까지 늦잠 잘 거야?”
일카이의 목소리였다. 아스펠라가 몸을 일으켜 눈을 비비적대며 제 앞을 확인했다. 일카이가 웬 작고 꼬물대는 강아지 한 마리를 아스펠라에게 들이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제 얼굴을 이리도 축축하게 만든 것이 이 작은 강아지라는 걸 깨달았다.
“강아지? 왜 강아지가 여기에……. 일카이 네가 데려온 거야?”
아직 비몽사몽한 아스펠라는 눈을 밝히며 물었다. 일카이가 그대로 아스펠라에게 바둥거리는 강아지를 넘겼다. 아스펠라가 얼른 강아지를 안아들었다.
작은 녀석이 어찌나 꼬리를 빠르게 흔드는지. 아스펠라는 침대 위를 킁킁대며 연신 꼬리를 흔들어대는 강아지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오다 주웠어.”
일카이의 대답에 무슨 그런 대답이 있냐며 아스펠라가 핀잔을 주면서도, 강아지가 마음에 드는지 눈을 떼지 못했다.
“어미 잃은 개인데, 그냥 두면 죽을 거 같아서 데려왔어. 네가 좋아할 것 같았거든.”
원래는 어제 보여주려 했는데. 네가 늦게까지 안 돌아와서 못 보여줬어. 일카이가 그렇게 말하며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어제 대공이랑 야시장에 갔다면서?”
“아, 응. 내가 걱정됐었나봐.”
“……나도 걱정했는데.”
“고마워, 일카이. 얘 너무 귀엽다.”
아스펠라는 제 무릎 위로 올라와 계속 저를 할짝대려는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쩌다 어미를 잃었을까, 이렇게 작은 아이가.”
아스펠라의 말에 일카이는 강아지를 쳐다봤다.
하벨 남작이 신을 죽였다며 실성한 듯 소리치는 동안 일카이는 그 주변에 있을 새끼들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마침내 근처 수풀에서 어미가 꼼꼼히도 숨긴 새끼들을 찾아냈다.
이제 막 뛰기 시작한 것인지, 저들끼리 둥지처럼 만들어놓은 곳 주변을 뛰어다니는 꼬물대는 작은 것들은 어미가 없으면 얼마 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어찌하면 좋을까, 아스펠라에게 얘네를 가져다주면 좋아하려나. 생각하던 찰나.
하벨 남작이 중얼거리다 일카이 쪽으로 다가왔다.
‘어? 새끼잖아. 새끼네?’
남작의 눈은 풀려 있었다. 일카이가 다른 동료들의 부름에 잠시 뒤를 돈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오냐, 너도 한번 당해 봐라! 내 새끼들 죽인 복수다!’
그는 그대로 제 허리춤에 있던 시퍼런 칼날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기겁한 일카이가 그대로 남작을 밀쳤다.
넷 중에 셋은 이미 죽은 후였다. 형제들 사이에 파묻혀 있던 마지막 한 마리만이 살아남았다. 일카이는 작은 새끼를 제 품 안으로 밀어 넣으며 남작을 내려다봤다. 혐오 가득한 눈빛과 목구멍까지 차고 올라오는 욕지거리를 겨우 억누르며 말했다.
‘불필요한 살생은 하지 않는 게 사냥입니다, 저희가 추구하는 사냥과는 맞지 않으신 듯하니 다음부터는 오지 않겠습니다.’
하벨 남작은 밀쳐져서 땅바닥에 엎어진 후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바닥에 몸을 납작 엎드리곤 양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며 벌벌 떨었다.
‘완전 맛이 갔잖아?’
일카이는 그 꼴을 보며 혀를 찼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건가.
‘부, 분명 흰색 개였다고. 신이었다니까. 자네, 내 말을 안 믿는 건가. 그 신이 우리 가문의 아들들을 잡아 죽였다고. 그딴 년 하나 잘못 들인 이유만으로……!’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아 결국 동료들이 남작을 부축해 저택으로 돌아갔다. 멀리서 남작의 비서가 창문을 통해 본 것인지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내려왔다.
하벨 남작의 비서에게서는 제를 올릴 때 쓰는 향이 어렴풋이 났는데, 일카이는 향 이외에도 이상한 악취를 맡았다. 그러나 아주 순간적으로 맡아진 냄새였기에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혹여나 트집이라도 잡힐까 얼른 표정을 갈무리했다.
지금은 비서에게서 나는 이상한 냄새보다도, 제 옆에서 부들부들 떠는 하벨 남작의 상태가 더 중요했다. 갑자기 사냥꾼들 탓으로 돌리게 되면 어쩐다. 일카이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싶어 골머리를 앓았다.
‘갑자기 남작님께서―’
그러나 비서는 이런 일이 익숙한 듯 물었다.
‘흰 개를 보셨습니까?’
‘아. 네. 맞습니다.’
‘남작님께서는 흰 개만 보시면 발작을 일으키십니다. 그래서 영지에 개가 못 들어오도록 철저히 관리하고 있었는데, 들어왔나 보군요. 남작님은 저희가 부축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비서가 비틀대는 남작을 건네받으며 말을 이었다.
일카이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뱀의 시선처럼 어딘지 모르게 음험해 보였다. 비서는 이내 상황에 맞지 않게 입꼬리를 당겨 천천히 미소 지었다. 입술이 얇은 이였기에, 그가 입꼬리를 한껏 당겨 미소 지으니 기괴함이 한층 더해졌다.
‘어디 가서 말을 옮기거나 하실 분들은 아닐 거라 믿습니다. 그러니 다른 귀족들도 오크몬드 사냥꾼들을 믿고 부르는 거겠지요.’
그럼 이만 조심히들 가십시오. 그렇게 말한 비서가 얼른 제 주인을 데리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봐. 맞잖아. 저주 받았다니까. 저 비서도 말이 많더라고. 하여튼 뒤가 구린 것들이야.’
일카이를 툭 치며 그의 동료 사냥꾼이 말했다.
정말 저주를 받은 건가.
잠시 어제의 일을 회상하던 일카이는 강아지를 데려오게 된 경위에 대해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어미를 잃은 건 안타깝게 됐지만, 그래도 꽤나 좋은 주인이 생길 테니.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는 마라, 강아지야. 일카이가 그리 생각하며 아스펠라에게 말했다.
“이름이나 지어줘 봐.”
그의 말에 아스펠라는 저를 하염없이 쳐다보는 강아지를 내려다봤다.
“하양이 어때?”
“……너무 대충 짓는 거 아니야?”
“왜. 잘 어울리는데. 이제부터 넌 하양이야. 하양아.”
아스펠라의 말이 그저 좋은 듯 작은 개는 연신 왕왕! 짖으며 침대 위를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작은 다리로 침대를 펄쩍 뛰어 내려가 짖기 시작했다.
작은 개는 잔뜩 털을 세우고 꼬리를 위로 치켜든 채로 짧은 이까지 보이며 경계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아스펠라가 강아지를 부르려던 순간이었다.
“이게 뭐지?”
그 자리에는 칼리우스가 서 있었다. 칼리우스는 자신은 들인 적 없는 자그마한 강아지를 차갑게 내려다봤다.
“이 집에 짐승은 금지인데.”
“검은 마수도 키우는 마당에 작은 개가 안 될 건 또 뭔지.”
작게 중얼거리던 일카이를 칼리우스가 빤히 쳐다봤다.
칼리우스의 시선은 가끔 인간의 것이 아닌 것 같아 일카이가 저도 모르게 압도당했다. 마치 사냥을 하다 거대한 곰이나 호랑이를 마주했을 때와 비슷하게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일카이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칼리우스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곤,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늦잠을 잔다기에 몸이 좋지 않은가 하여 살펴보러 왔는데. 그건 아닌 듯하군요.”
다정한 말투로 말하다가도,
“저건 뭡니까.”
“어미 잃은 개입니다. 너무 작아서 혼자 뒀다간 분명 죽을 것 같아 데려왔습니다.”
마치 추궁이라도 하는 듯한 것이 웃겼다. 고작 작은 개 한 마리에 저렇게 정색할 일인가. 일카이가 아스펠라 대신 대답하자 칼리우스는 그의 대답에는 관심 없는 듯 계속해서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그의 성질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일카이 말고도 하양이도 마찬가지였는지, 작은 개는 칼리우스가 방으로 들어온 그 이후부터 계속해서 으르렁대고 있었다.
아마 어미한테 배운 대로 위협을 하는 중일 것이다. 이빨을 드러내고, 인상을 구기고, 네 다리를 넓게 한껏 벌리는.
물론 그 모양새는 위협적이기보다는 하찮고 귀여워보였다.
하지만 작은 강아지는 정말 전력을 다해 위협을 하고 있었다. 칼리우스가 한 발자국 더 다가가려 하자 미친 듯이 짖기 시작했다.
그건 아마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지 않은 인간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귀찮은 듯 칼리우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개를 쳐다봤다. 그러자 개가 이내 낑낑 대며 얼른 꼬리를 말고 아스펠라에게 뛰어갔다.
아스펠라는 작은 강아지가 벌벌 떠는 것이 안타까운 듯 강아지의 엉덩이를 토닥댔다.
“이미 사람 손을 타버려서 야생으로 돌려보내기에도 힘들 것 같아요. 여기서 같이 지내면 안 될까요? 절대 각하를 귀찮게 하거나 방해가 될 일은 없을 거예요.”
이내 잠시 머뭇대던 아스펠라가 슬그머니 칼리우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제발요……. 칼리우스.”
아스펠라는 이 작고 하얀 강아지를 차마 품에서 떨어뜨릴 수가 없었다. 윤이 나는 하얀 털을 보는 순간 비르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스펠 산이 타버려 가족같이 지내던 동물들이 모두 피신을 가 혈혈단신이나 다름없게 되었지 않은가. 이래도 안 되겠냐 싶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칼리우스가 곤란한 듯 개를 쳐다보다 이내 허락했다.
“그 녀석이 내 저택을 헤집고 다니지만 않는다 약속하면. 아스펠라 마음대로 하세요.”
그의 말에 아스펠라가 활짝 미소 지었다.
칼리우스는 잠시 강아지를 쳐다보다 이내, 점심은 거르지 말라며 한마디하고는 내려갔다. 칼리우스가 나가자마자 일카이가 투덜댔다.
“뭐지? 개를 데리고 온 건 난데 왜 칼리우스가 득을 본 기분이지?”
“무슨 소리야, 일카이. 고마워.”
아스펠라는 저도 모르는 사이 두 남자를 조련할 수 있게 되었다. 본인은 아직 자각이 없어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속이 탄다고 해야 할지. 일카이는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앨리스가 의복과 세숫대야를 들고 올라왔다.
일카이는 잠시 강아지와 함께 쫓겨났다.
이리저리 제 다리 아래서 신발창을 뜯고 노는 걸 보며 일카이가 볼록 튀어나온 강아지의 배를 만지작댔다.
“야. 네가 잘 도와줘야 해. 알았어? 내가 네 생명의 은인이니까 도와야한다고.”
그러더니 한 번 더 중얼거렸다.
“하양이가 뭐야, 하양이가. 진짜 웃긴다니까.”
***
아스펠라는 자신이 얼마나 칼리우스의 마음을 애타게 하는지도 모를 만큼 순수하고 순진했다. 분명 칼리우스도 이 점을 알고 있기에 아스펠라의 무신경한 행동들을 참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순진한 것 맞나?
아스펠라의 방을 빠져나와 복도를 거닐던 칼리우스가 이내 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제발요……. 칼리우스.’
애원하던 아스펠라의 얼굴을 보고 더 이상의 할 말이 모조리 기억나지 않았다.
그딴 개새끼 하나 키우는 게 그렇게나 간절할 일인가.
그런 생각과 함께, 이미 커다랗고 검은 개새끼도 키우면서 그 작고 하찮은 건 왜? 한 놈은 너무 크니까 이제는 작은 놈을 키우고 싶다는 건가?
설마, 그새 나한테 줄 애정이 식은 건가.
그러다 문득 아스펠라 옆에 붙어 있던 일카이를 떠올렸다.
그놈은 아침부터 여자 방에는 왜 들어가 있는 거지? 또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나는 멍청하게 왜 그걸 허락한 거지? 마지막엔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책하는 걸로 끝이 났다.
칼리우스가 원한 건 이런 것이 아니었다.
어젯밤 아스펠라와 함께 밤늦게까지 잠행을 나갔고, 아스펠라는 기뻐했고, 신나 했다.
모든 것이 신기한 어린아이처럼 여기저기 둘러보다가도, 사람들이 많아지면 움츠러드는 그 모습이 퍽 사랑스러웠다.
아스펠라의 작은 입술이 붙었다 다물렸다 하며 제 이름을 발음하는 것이 궁금해 이야기했다. 딱딱한 칭호를 둬 거리를 두지 말고, 제 이름을 불러주길.
실제로 아스펠라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은 매우 감미로웠다.
칼리우스. 원래 제 이름이 이렇게나 부드럽고 구슬이 산들바람 마냥 발음 되던가. 가만히 아스펠라를 제 곁에 묶어놓고 하루 종일 제 이름만 부르게 하고 싶다는 육욕이 전신으로 뻗쳤다.
시도 때도 없이 발정하는 개새끼마냥 온갖 음탕한 생각이 제 머릿속에 펼쳐지는데, 정작 본인은 아무런 생각도 없어 보이는 것이 야속해 조금 짓궂은 장난을 쳤다.
톡, 신발을 건드리자 아스펠라는 놀란 얼굴로 저를 쳐다봤다. 또 한 번 건드리면 가죽 신발 안의 발가락들이 꼼지락대는 실루엣이 보였다. 복숭아뼈 근처를 건드리자 발을 안으로 오므린다. 입술을 살짝 깨문다. 그리고 종아리를 건드리자 얼른 치마 자락을 손으로 잡아 내리며 당황하던 모습.
당신도 조금은 나와 같아졌으면 한다.
그런 생각이었다. 칼리우스가 속으로 얼마나 많은 한숨을 내쉬었는지 아스펠라는 감히 상상도 못할 것이다.
겨우 누그러뜨리지 않았던가. 살다 살다 자는 척까지 해 가며 제 입안 살을 몇 번이고 깨물어대지 않았나.
여기서 덮치면 진짜 짐승 되는 거라고. 금수만도 못한 거라고.
소중히 대해야 한다고. 이 저택의 어느 금은보화도, 심지어 국왕이 하사한 도자기도 그런 취급은 못 받을 거다. 칼리우스에게 있어 아스펠라는 정말로 조심해야할 유리 인간이나 마찬가지였다.
혹여나 급격한 관계의 변화에 깨지고 터져버릴까 조심하고 있는데.
누구는 이제 겨우 이쯤 되면 아침에 찾아가도 이상하게 보지 않겠지, 하며 조심스레 방으로 찾아간 것인데.
‘그 새끼는 뭔데 자꾸…….’
둘이 약혼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아스펠라가 그를 보는 눈에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없는데 사랑하는 사이는 개뿔이.’
문제는 반대쪽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일카이 쪽은 아주 대놓고 꼬리를 살랑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스펠라가 순진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일카이의 마음을 혹시라도 정말 받아주면 어떡하는가. 물론 그런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 이쪽도 준비해둔 것이 있겠지만.
‘눈치가 없어 다행이군.’
흰색의 자그마한 개를 안아주며 신나서 제 얼굴을 핥든 말든 꺄르르 웃는 아스펠라를 보며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정말 눈치가 없고 순진한 것이 맞나?
칼리우스가 다시 한 번 자신에게 되물었다.
제 이름에 꿈쩍도 못하게 될 줄이야. 아스펠라의 입에서 나오는 그의 이름은 단순히 듣기 좋기만 한 것이 아닌, 파급력까지 갖춘 것이었다.
기가 막힌 듯 칼리우스가 허,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이거 원 아스펠라에게 마음껏 휘두르라고 무기를 쥐어준 셈 아닌가.
‘그런 무기라면, 뭐. 마음껏 이용해도 좋지.’
……그런 생각까지 도달한 칼리우스는 이내 자신의 현실을 자각해버린 것인지, 탄식하는 한숨을 나직하면서도 길게 내뱉었다.
이게 지금 무슨 꼴불견이냐.
이 무슨 우스꽝스러운 사고란 말인가.
이게 지금 스물넷이나 된 성인 남성이, 튀니아 왕국의 에르윈 대공이 할 생각이란 말인가.
겨우 스물 된 여자애한테 제 이름 불리는 것이 기분 좋아 몸을 배배 꼬는 것이. 겨우 성인식 마친 열아홉 된 어린 남자애한테 일일이 질투하는 것이.
이게 진짜 원래 자신이 맞냔 말이다.
칼리우스는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어이가 없는 것과는 별개로, 아스펠라를 원하는 욕망은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보다 더 추한 꼴이 되어도 상관없다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만 얻어낼 수 있다면.
어쩌다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식당가로 아스펠라와 일카이가 내려왔다. 칼리우스는 아스펠라 뒤를 졸졸 따르는 작은 개를 그닥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쳐다봤다.
여기서 키우도록 허락하긴 했으나, 원래 이곳은 짐승들이 찾아오지 않는 성이었다. 본능적으로 칼리우스가 맹수라는 걸 알아채는 건지.
“크르르르, 왕! 왕!”
지금도 저렇게 잔뜩 털을 세우고 칼리우스에게 짖어대지 않나.
“하양아. 왜 그래. 성의 주인이셔. 널 여기서 지내도록 허락해주신 분이라고.”
아스펠라가 진정하라는 듯 강아지의 등허리를 쓸어내려주며 말했다.
칼리우스는 시큰둥한 눈으로 개를 쳐다봤다.
“이름이, 하양이입니까?”
“네. 잘 어울리죠?”
깜장이와 하양이라니.
“아스펠라는 참 직관적인 걸 좋아하는군요.”
그런데 왜 사람이 직관적으로 들이대는 건 반응이 없는 건지 모르겠군. 칼리우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제 늦게까지 깨어있었을 텐데 피곤하지 않느냐, 앞으로 야시장 말고도 다른 곳에 데리고 가주겠다 등의 간지러운 말들을 내뱉으려 한 칼리우스의 계획이 저 하양이 때문에 죄 망가졌다.
게다가 아스펠라 옆에서 고기 같은 것을 잘 받아먹다가도, 칼리우스와 눈이 마주치기만 하면 미친 듯이 짖어대다가 혼자서 낑낑 앓기까지는 해대는 통에 아주 성가셨다.
“얘가 정말 왜 이럴까.”
당황한 아스펠라는 하양이를 안심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결국 칼리우스가 개를 쳐다봤다. 눈에 아주 살짝 이채가 띄는 듯하더니 이내 강아지가 잠잠해졌다.
죽기 싫으면 입 다물어. 그런 뜻을 대충 알아들은 것인지 강아지는 더 이상 칼리우스에게 이를 보이거나 그르렁대지는 않았으나, 이제는 아예 꼬리를 말고 아스펠라에게 안겨 있었다.
아스펠라는 칼리우스의 속이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물었다.
“하양이를 산책시킬 때 정원을 돌아다녀도 될까요?”
“그러도록 하세요.”
어째 저택 구석구석을 보여주려 했던 그의 계획이 물거품 되었다만.
“아스펠라.”
일카이가 슬쩍 아스펠라에게 뭔가를 눈치 주는 신호를 보냈다. 칼리우스는 이제 완전히 질린 듯 또 뭘 하려고, 하는 눈빛으로 아스펠라와 일카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아스펠라가 칼리우스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 혹시. 깜장이를 돌보러 내려갈 때, 일카이도 같이 내려가도 될까요?”
“일카이 군은 왜요?”
칼리우스가 짜증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그 검은 마수가 제 누이를 죽였던 검은 마수와 알고 있을 것 같아서요.”
일카이의 말에 칼리우스가 잠시 눈썹을 삐뚜름하게 한쪽만 치켜 올렸다. 일카이가 가만히 그의 반응을 살폈다.
아스펠라의 눈빛이 반짝였다.
“일카이의 누이가 검은 마수에게 살해당했다고 해서요. 깜장이가 뭔가를 알고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일카이가 만일 숨기고 있는 것을, 깜장이를 통해 알아낼 수도 있겠지. 그렇게 된다면 차후에 그를 이용할 때 조금 더 수월해질 것이다.
결론을 내린 칼리우스가 아스펠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도록 하세요. 아스펠라가 원한다면.”
그 말은 마치 아스펠라가 원하는 일이면 뭐든 상관없다는 듯 들렸다.
‘아스펠라가 모르는 모든 것들, 내가 다 알려주겠습니다. 나는 다 보여줄 수 있어요. 아스펠라에게 이 넓은 세상을 가져다 줄 수 있어.’
‘당신이 세상을 원하면 나는 세상을 줄 수 있고, 사람을 원하면 사람을 줄 수 있습니다. 말만 하면 모든 것이 당신의 뜻대로 될 거야.’
어젯밤 칼리우스가 했던 말과 겹쳐 들려 아스펠라는 이내 긴장한 듯 몸을 바로 세운 뒤, 애꿎은 포크로 주름지는 수프 겉 표면을 살살 긁었다.
“가, 감사합니다.”
일카이는 그런 아스펠라를 가만히 쳐다봤다. 어쩐지 기운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어 가만히 포크로 고기만 발라대고 있는데, 하양이가 달려와 일카이의 발밑에서 배를 까고 재롱을 부렸다.
일카이는 지금 귀여워해줄 기분이 아니라는 듯 발목 위로 올라오려는 하양이를 대충 쓰다듬었다. 칼리우스는 그런 개를 하찮은 눈으로 쳐다봤다.
“어째 주인인 아스펠라보다 일카이 군을 잘 따르는 것 같군요.”
“주인은 전데요? 제가 데려온 거고, 아스펠라와 같이 기르는 것입니다.”
그의 말에 칼리우스가 눈썹을 슬쩍 올리더니 이내 같잖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어쩐지. 꼬리 흔드는 꼴이 참…….”
“…….”
“원래 개는 주인을 닮는 법이죠.”
칼리우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생각해보니 닮은꼴이 많았다. 자신만 보면 어쭙잖은 실력으로 저를 경계하는 것도, 작은 이빨을 연신 으르렁대는 것도, 아스펠라한테만 꼬리 흔드는 것도.
칼리우스의 말에 일카이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금니를 악문 것 마냥 발음이 뭉개졌다.
“예. 잘 키워서 사냥개로 쓸까 합니다. 지금이야 애새끼지만, 잘 훈련받은 개는 맹수 모가지도 뜯으니까요.”
각하 말씀대로, 개는 주인을 닮는 법이잖습니까.
두 남자가 서로를 노려보며 기싸움을 하든 말든 아스펠라는 조용히 식사를 마저 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