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신이 내린 저주 (3/16)

2장. 신이 내린 저주

튀니아 왕국의 대공, 칼리우스 에르윈. 그는 국왕의 동갑내기 친척이자 친구였으며, 또한 충신이기도 했다. 국왕은 16살에 즉위한 이후부터 쭉 바라던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강력한 왕권이었다.

‘왕이 곧 하늘이어야 하는데, 이 ‘신’이라는 존재가 아주 골칫거리야.’

튀니아에서 가장 높아야 할 것은 바로 자신이어야 하는데, 신들이 그걸 방해한다는 말이었다. 실제로 튀니아의 왕궁과 거리가 먼 북쪽이나 남쪽의 지방에서는 아직도 신을 모시고 산다.

어디 그뿐이던가. 왕의 모든 결정에 사사건건 간섭하며, 국왕보다 신의 분노를 더 두려워하는 원로 귀족들에게, 누가 이 나라의 진짜 주인인지를 가르쳐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늙은이들의 잔소리도 이제 지겨워.’

‘원로 귀족들은 그저 무분별한 전쟁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뿐이겠지.’

‘그러니, 그게 싫다는 걸세. 칼리우스. 자네 역시 원로 귀족들의 안일함에 이미 물릴 대로 물리지 않았는가.’

국왕의 말에 칼리우스는 심드렁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저 몸뚱이 거대한 짐승들인데, 그런 것들을 숭배하다니. 이 나라의 주인은 바로 나인데 말이야. 칼리우스,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왕의 말에 칼리우스는 관망하는 눈빛으로 창밖의 풍경을 내다봤다.

죄다 산뿐이었던 튀니아 왕국은 새 국왕이 즉위한 이후부터 높은 건물들이 하나 둘 들어서고, 다른 나라와의 물건을 들여오고, 전쟁을 시작했다.

왕궁 밖을 나가는 기다란 병사들의 행렬과 새로운 무기들을 싣고 들어오는 마차들이 정신없이 이곳으로 드나든다. 그걸 반대하는 귀족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귀족 회의를 벌이며 상소문을 올려댔지만, 국왕은 그 기세를 꺾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신의 존재란 불필요한 것이었으며,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요소였다.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네.’

‘어허, 생각해본 적 없다니. 자네는 내 충신으로서 왕권을 강력하게 하기 위해 생각해야 하지 않나.’

‘그저 나보고 신들을 죽이라는 소리 아닌가. 돌려서 말할 필요 없어.’

‘하하하! 역시, 자네한테는 못 당하겠어.’

왕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래, 나는 그 커다란 짐승들이 신이라고 불리며 신성 취급 당하는 게 싫다네.

단지 왕권만을 위한 토벌은 아니었다.

인간들이 무기를 쥐고 전쟁을 하기 시작하면서, 또 산업이 발달하고 의식주에 대한 욕망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나무를 베어 건축물을 만들고, 광산을 무리하게 개발하여 동굴들을 허물고.

전쟁이 시작되면 그 일대의 모든 산들은 황무지가 되었다.

그럴 때면 그 ‘신’이라는 커다란 짐승들이 나타나 적군이고 아군이고 할 것 없이 모조리 쓸어버렸다. 그로 인해 죽고 다친 사람들의 숫자도 대단했다. 산을 깎아내 커다란 저택을 지으려 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모두 부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날린 국고만 얼마인가.

신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 다른 나라들이 발전할 때 얌전히 초가집에 농사만 짓고 제를 올리며 살 수는 없었다. 젊고 혈기왕성한 국왕에게는 원대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난 아주 강력한 왕권을 원하네. 이 작은 튀니아 왕국에 집권했던 수많은 왕들 중 하나가 아닌, 역사 속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그럴 만큼의 권력을 가졌던 왕으로 말이야.’

그러니 자네가 날 좀 도와주게. 우린 아주 오랜 친구 아닌가.

‘산신을 토벌할 적임자로는 자네라고 생각해. 그 이유야 본인이 제일 잘 알겠지? 칼리우스. 자네만 믿겠네.’

그날 이후 칼리우스 에르윈의 ‘신’ 토벌 원정이 시작되었다.

가장 처음으로 토벌한 것은 북쪽의 산신 티스타르. 산 아래 넓은 호수 밑에 가라앉아 있던 티스타르는 호수만한 몸채의 거북이다. 거북이 주제에 느릴 줄 알았더니 엄청나게 빠르고 흉포했다. 단단한 등껍질에는 어떠한 무기도 박히지 않아 애를 먹었다.

그 신을 죽이는 데에는 1년이 걸렸다. 칼리우스는 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병사들과 함께 티스타르를 공격했고, 결국 북쪽의 산신을 죽이는데 성공했다.

덕분에 한동안 멈춰있던 광산 개발에 가속도가 붙어 튀니아 왕국의 국고가 늘었다.

그 다음에는 왕궁의 첨탑보다도 길고 거대한 새 형태를 한 남쪽의 신을, 들판을 점령하고 있던 거대한 서쪽의 뱀을, 산속에 숨어 있던 집채만 한 호랑이를. 차례차례 토벌했다. 실패하면 재정비하여 또 가고, 또 가고. 신 하나를 죽일 때마다 사람들은 칼리우스를 영웅 취급했다.

그렇게 튀니아의 산신들을 없애는데 4년이 걸렸다. 그리고 딱 한 마리. 사방의 중점이 되는 한 곳, 이 도성의 근원지가 되는 아스펠 산에 거주하는 가장 크고 위협적인 신만이 남았다.

「우매한 인간들아, 티끌조차 되지 않는 작은 것들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셈이냐. 결국엔 스스로의 목을 조이는 거다. 돌아가라. 자연을, 신을 이길 수 없다. 위치를 알거라.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라는 걸 모르는 것이냐.」

칼리우스는 그렇게 거대하고, 두려운 신은 처음이었다. 개과의 형상을 한, 은빛의 털을 휘날리며 붉은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던 신에 맞서며 그는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모두들 정신 차리고 총을 장전해라.’

그는 애써 표정을 감춘 채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새로운 무기를 들고 온 병사들이 하나 둘 총을 장각하기 시작했다. 신호를 보내면 그들은 일제히 신을 향해 총을 쏘았다. 첫 번째 열이 총을 쏘면 두 번째 열이 나와 또 총을 쏘고. 그렇게 몇 십번을 반복했다.

창과 화살, 검으로만 싸우던 시대는 이제 지났다. 폭탄을 던지고 기름을 부어 산을 태우니 그 대단하던 신도 맥을 못 추렸다.

‘다들 멈추지 마라. 그저 덩치 큰 짐승일 뿐이다.’

칼리우스는 신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복수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다. 신을 지키려는 짐승들을 쳐내며 칼리우스가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커다란 신은 칼리우스에게 덤벼들었고, 그는 곧장 검을 빼내 휘둘렀다. 병사들은 계속해서 산을 태우고, 칼리우스는 신을 공격했다.

그렇게 2년 동안 고전했다. 지치면 재정비를 하고, 병사들을 다시 충원하고. 이제는 죽이고야 말겠다는 오기까지 들었다.

결국 신이 무릎을 꿇었다. 주저앉아 붉은 피를 토하던 신이 눈을 빛내며 칼리우스에게 말했다.

「이 날이 오고야 말았구나.」

신의 말에 칼리우스는 관심 없는 듯 눈썹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그는 국왕의 명령대로 신을 포박해 산 채로 궁에 데려갈 생각이었다. 멀리서는 병사들이 거대한 신의 몸을 조각내어 옮길 커다란 달구지를 겨우겨우 끌고 오고 있었다.

짐승의 모습을 한 산신의 육체는 잘라내고 토막낸다 하여 죽지 않는다지.

그 신비한 힘을 가진 이들을 국왕은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뭔가를 알아내고 싶어 하는 듯 했다. 특히 모든 산의 중심이 되는 아스펠산의 산신 비르가를 특히나 탐냈다.

비르가는 저 멀리서 오는 수백의 병사들을 가만히 보며 중얼거렸다.

「흐름은 피할 수 없나 보군.」

‘그래. 이제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신한테 기도만 올리고 앉아 있는 인간들은 사라질 거다.’

「그때 널 살리지 말았어야 했을까.」

아니. 이 또한 운명이고 흐름이겠지. 한낱 산신에 불과한 내가 거대한 삶의 흐름에 어찌 관여할 수 있을까. 신 역시 그 흐름에 따르는 것을….

그렇게 중얼거리던 비르가를 칼리우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봤다.

원망하는 표정도, 비아냥대는 표정도, 두려워하는 표정도, 안타까워하는 표정도. 그 어떤 표정이 없었으며 감정 또한 보이지 않았다.

칼리우스는 잠시 비르가의 붉은 눈을 쳐다보다 말했다.

‘원망하려거든 스스로를 원망해라.’

그러자 신의 눈에 이채가 돌더니 이내 칼리우스를 오롯이 쳐다봤다. 이내 앞발을 땅에 짚고 상태를 들어올렸다. 이미 기력을 잃고 죽어간다 생각했던 거대한 짐승이 몸을 일으키자 병사들이 당황한 눈치였다.

칼리우스는 침착하게 다시 검을 빼들었다.

비르가가 몸을 일으킬 때마다 몸 곳곳에서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지독한 악취와도 같은 피비린내에 병사들 중 몇몇은 헛구역질까지 해댔다.

「나는 여기서 죽지 않는다.」

그렇게 말한 비르가 이내 눈을 번뜩였다. 그러자 신이 말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 어떠한 음성이 들려왔다.

다른 병사들은 마치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음에 고통스러운 듯 머리통을 부여잡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오로지 칼리우스에게만 제대로 된 음성이 들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칼리우스는 온몸이 마비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르가는 마지막 힘을 다해 그에게 저주를 내렸다. 적어도 칼리우스는 그가 자신에게 한 말이 저주라고 생각했다.

「자연을 죽이려는 오만한 자여, 인간만이 유일하다 여기는 이기적인 자여. 짐승으로 살아갈지어다. 신의 피를 묻힌 자는 신의 부정을 모두 떠안을 거다. 오로지 파괴만을 쫒는 부정이 될 것이다. 네놈이 죽인 신들이 널 좀먹을 것이다. 오로지 자연의 딸만이 그것을 막을 것이다. 낮이 어두워지고 밤이 밝아지는 날 세상이 끝이 날 것이다. 지키지 못해 스스로를 저주한 자여, 무저갱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하나. 너는 지키는 존재다. 인간의 마음을 품은 짐승의 피가 대지에 스며들 때 너는 비로소 다시 인간이 될 것이다.」

그렇게 말한 산신은 포효하며 도망쳤다. 훌쩍 산을 넘어가는 그를 놓치고 말았으나, 이내 산신이 죽어갈 때 나는 기이한 울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온 산에 퍼지는 것으로 보아 얼마가지 않아 그 역시 죽었을 것이다.

칼리우스는 그저 죽어가는 짐승의 발악일 뿐이라 여겼다.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그저 자신을 겁주려는 것이라고. 원망하는 것이라고. 흐름을 놓쳐 죽어가는 나약한 것의 말은 중요치 않다 생각했다.

하지만 신의 유언은 저주였다.

처음 검은 짐승으로 변해 사람의 피를 묻혔을 때, 칼리우스는 깨달았다. 이것은 틀림없는 신의 저주라고.

짐승으로 변했을 때는 오로지 한 가지 본능만 느껴졌다. 죽이자.

그것은 신들의 분노였다. 자신을 향한 신들의 원망. 단순히 짐승의 모습만 할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짐승의 몸짓도, 살인의 충동도, 짐승으로서 있는 시간도 점점 늘어났다.

하루, 이틀 그렇게 점점 늘어나더니 이제는 한 달이 인간이면 나머지 한 달은 짐승으로서 살아갈 지경까지 왔다. 인간으로 돌아올 때는 그동안 신들의 몸에 낸 상처를 그대로 돌려받았다. 살이 치유되어도 또 새 상처가 나 피를 흘렸다.

총알이 뚫고 간 상처, 칼로 찢은 상처, 창으로 뚫은 상처, 불로 지진 상처. 산신 토벌을 하며 신들을 공격한 그대로를 돌려받았다.

제어가 되지 않아 짐승으로 변하는 날이면 스스로 지하로 내려가 돌문 안에 저를 가뒀다. 보름달의 빛을 받아야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기에 우물처럼 천정을 뚫고, 살육의 본능과 고통으로 발버둥 치며 달만을 바라봐야 했다.

거대한 짐승의 발악에 가까운 울음소리를 들을 때면, 에르윈 성의 시종들은 제 귀를 틀어막고, 두 눈을 감아야했다. 자신들의 주인이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괴수라는 것을 필사적으로 숨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다들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나타나 칼리우스를 구원해주지 않는 이상, 언젠가 그는 짐승으로 변해 다시는 인간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신들이 인간에게 가지는 분노는 고스란히 칼리우스에게 전해졌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부정신이 될 것이다. 그는 이제 인간이기를 포기해야하는 건가 생각했다.

아스펠라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짐승이 된 자신을 치료하고, 대화까지 나눌 수 있는 기묘한 여자. 아스펠라와 눈이 마주치면 분노로 들끓던 심장이 차분해졌다. 이성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죽어가던 신이 말하던 유일한 저주를 풀 수 있는 자연의 딸이 아스펠라라고 확신했다. 아스펠 산에 살던 유일한 인간. 산에 버려진 아이. 짐승이 된 자신에게 무방비하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던 그녀를 보며 칼리우스는 죄책감이 들었다.

아스펠라를 키웠다던 그 비르가라는 존재가 자신이 죽인 그 신이 아닐까.

한 달 만에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칼리우스는 저를 비추는 달빛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게 무슨 지독한 인연이란 말인가. 신의 저주라는 것은 실로 두려운 것이었다.

펠킨이 조심스레 물었다.

“대공 각하. 괜찮……으십니까.”

칼리우스는 대답 대신 피곤한 듯 헝클어진 머리칼을 위로 쓸었다. 옷을 마저 입은 뒤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스펠라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혹시라도 일어나셔서 오실까봐 수면향도 피워뒀고요.”

“그래.”

짐승의 모습에서 인간으로 돌아올 때도 쉬운 일 하나 없었다. 뼈가 다시 움직이며 인간이 되는 것은 미칠 것 같은 고통이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찝찝한 건지 칼리우스는 제 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옷 말고 그냥 로브만 가져오라니까.”

“아……깜빡했습니다.”

“됐으니, 몸을 좀 씻어야겠다.”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저택으로 돌아간 칼리우스는 펠킨을 비롯해 시종들을 모두 물린 채로 혼자 어두운 욕탕에 들어갔다. 생각이 많아진 듯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한동안 창밖을 바라봤다. 아스펠 산이 보였다. 이 저택의 본관은 아스펠 산이 항상 보이게끔 건축되었다.

왕이 하사한 저택이라 그렇다. 네가 토벌한 신들을 보며 보람을 느끼라는 뜻이었지만 칼리우스에게는 그저 제 죄를 마주하라는 것 같았다.

열일곱 살 때부터 8년 동안 신들을 토벌해왔다. 저주에 걸려서도 그걸 후회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죽어가는 와중에 악에 바쳐 저주나 내리는 신들을 한심하게 여기면 여겼지. 아스펠라를 만나고 어쩐지 물러진 기분이 든다.

칼리우스가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깜장이는 너무한 거 아닌가.”

이상한 여자.

대부분 기절하거나 죽이려 드는, 본인이 생각해도 흉측한 괴수를 도와주겠다고 손을 내밀다니. 날카로운 송곳니로 물어도 괜찮다며 오히려 저를 안심시키던 여자다. 사냥꾼들이 왔을 땐 울지 않았나. 빨리 도망가라고.

이 정도 덩치를 가진 괴수가 총 좀 맞았다고 자그마한 인간에게 죽임 당할 줄 아는 건가.

맨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냥꾼들을 따돌리고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는 그저 친절함이 몸에 밴 기묘한 여자라고만. 어쩌면 자신의 저주를 풀어줄지도 모르니 이용해야겠다고만.

‘그래. 딱 그 정도였어.’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실 칼리우스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은 처음부터, 아스펠라의 녹안을 본 순간부터, 제가 물어도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어주던 아스펠라의 손길을 받은 그때부터.

‘그녀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가.’

그럴 리가. 하지만, 설마…….

칼리우스는 국왕이 우스갯소리와 진담을 반 섞어 말했던 걸 기억한다. 넌 정말이지 누굴 사랑할 수가 없을 거라고. 그렇게 무던해서는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할 거라고. 자신도 인정하는 말이었다.

땀에 젖은 몸을 모두 씻은 칼리우스는 옷을 갈아입은 뒤 아스펠라의 방으로 들어갔다. 세상 곤히 자고 있는 아스펠라의 산발이 된 머리칼을 정리해주며 잠에 취한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젖은 머리를 말리지 않아 검은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아스펠라의 얼굴에 똑, 똑 떨어져 혹여라도 그녀가 깰까 얼른 조심스럽게 얼굴을 닦아줬다. 부드러운 살결이 차갑고 거친 그의 손에 온기를 더했다.

특별할 거 하나 없는 평범한 여자. 하지만 특별하고 평범하지 않은 여자.

“아스펠라. 당신이 정말로 내 저주를 풀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걸 빌미로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죄를 알면, 날 혐오하겠지.”

신은 이런 걸 바랐던 걸까. 칼리우스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아스펠라가 발로 찬 이불을 목까지 덮어준 뒤 방을 나갔다.

***

눈을 떴을 땐 아침이었다. 몸이 개운한 걸로 봐서는 푹 잔 거 같은데, 잠이 들었을 때랑 하늘의 색이 별 차이가 없다. 아직 날이 지나지 않은 건가 싶었는데 시녀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들어와 물었다.

“아가씨, 잘 주무셨나요?”

“혹시, 날이 바뀐 건가요?”

“네. 너무 곤히 주무셔서 깨울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깨지 않고 잔 적이 없어서 아스펠라는 당황했다. 시녀는 차마 사실은 아가씨가 일찍 깨어나실까 수면 향을 피웠거든요, 하고 말할 수가 없어 눈치만 보다 얼른 말을 돌렸다.

“저, 아가씨. 오늘 아침에 주인어른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아, 그래요?”

“네. 같이 식사를 하고 싶으시다고, 기다리고 계셔요.”

“이런, 얼른 옷을 갈아입고 나갈게요.”

시녀가 나가지 않고 생글생글 웃고 있다. 제가 돕게 해달라는 뜻이었다. 아스펠라는 부담스러웠지만 또 거절하면 터덜터덜 나갈 표정이 상상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도움이 필요한 부분은 없었지만 시녀는 별별 일을 다 도와줬다. 아스펠라의 머리칼을 빗겨주고, 침대를 대신 정리해주고, 리본을 바로 묶어주고.

아무리 생각해도 첫날 자신의 꼴을 본 사람들 아니던가.

오고가며 도성 사람들의 말을 들어봤을 땐, 귀족들이나 귀족 가문에서 일하는 시종들이나 사람 가리기를 그렇게 잘한다고 했다. 한번 보면 무시할지, 말지. 굽신거려야 할지, 말지. 딱 견적이 나온다고.

그렇다면 아스펠라의 첫인상은 이 저택의 말단 시종보다도 더 추레했다. 신분이 전부인 이 시대에, 대공이 있는 앞에서만 잘하고 평소에는 관심 가지지 않거나 무시를 할 법 한데도 저택의 시종들은 하나같이 아스펠라에게 깍듯했다.

“많이 부담스러우신가요?”

시녀는 곤란한 표정의 아스펠라를 보며 자신이 너무 과했나 싶어 물었다. 아스펠라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싫은 건 아니에요. 익숙치 않아서요.”

“이렇게 시중 받으시는 게요?”

“네. 아주 어렸을 때 빼고는……다들 너무 깍듯하게 대해주시네요.”

“대공 각하의 손님이시잖아요.”

“전 귀족 가문의 사람이 아닌 걸요. 너무 과하게 대접해주시지 않아도 돼요.”

“어머, 저희 저택에서는 신분으로 사람 나눴다간 대공님께 혼나요. 이 저택 사람들 모두 빈민가나 재난지역에서 온 사람들인 걸요.”

보통 대공씩이나 되는 가문에서 일하는 이들은 그보다 직위가 낮은 귀족 가문의 영식이나 영애들이다. 그런데 에르윈 대공가의 시종들은 하나같이 다 빈민가 출신이거나 재해를 입어 오갈 데가 없어진 사람들이었다.

“그래요? 그럴 줄은 전혀 예상도 못했어요.”

아스펠라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라 동그랗게 눈을 뜨고 물었다.

“주인 어르신께서는 무뚝뚝해 뵈셔도 되게 좋으신 분이세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왜…….”

왜 신들을 그렇게 다 죽였을까. 그게 어떤 걸 뜻하는 줄 알고. 아스펠라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시녀가 그 작은 소리를 들은 건지 치맛단을 정리해주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 준비 되었습니다. 내려가실까요?”

시녀와 함께 식당가로 내려가니 칼리우스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여태까지 계속 그랬던 것처럼 그는 자연스럽게 아스펠라를 보자마자 미소 지으며 의자를 빼줬다.

“손님을 두고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서 미안합니다. 아스펠라 양.”

“아뇨, 괜찮습니다.”

“그 ‘깜장이’는 좀 보셨나요?”

“네.”

“상태는 어떻던가요.”

“아직 덜 아문 상처들이 몇 보이긴 했는데……. 괜찮은 거 같아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어요. 아, 식사가 끝나고 보러 가시겠어요?”

“아, 그건―!”

아스펠라의 말에 칼리우스 뒤에 서 있던 펠킨이 당황해서 몸을 삐걱대며 손을 뻗으며 말했다. 아스펠라가 고개를 들어 펠킨을 쳐다보니 더더욱 당황한 표정으로 물들었다.

칼리우스가 차분하게 와인을 들이키며 말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새벽에 상태를 보고 왔는데, 당분간은 내버려 둘 생각입니다.”

“아, 그렇군요.”

“제가 없는 동안 아스펠라 양이 매일 돌봐주셨다고요.”

“어쩌다 보니 그리 되었습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좋아서 한 일인 걸요.”

아스펠라는 깜장이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왜 그날 밤은 찾아오지 말라던 거였을까. 혹시나 아픈 걸 숨기려는 걸까. 아스펠라는 걱정이 되어 식사가 끝나고 차가 나올 무렵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대공께서도 오셨고, 인사도 다 드렸으니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가기 전에 깜장이 상태를 좀 확인하고 싶습니다.”

“상태는 왜요?”

“마음에 걸려서요.”

“뭐가 말입니까.”

“……그냥 눈빛이.”

오지 말라던 그의 눈빛이 꽤나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단 말이다. 마치 다가올 무언가가 두렵고 쓸쓸하다는 듯한 그 눈빛. 아스펠라가 말끝을 흐리자 칼리우스는 집요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걸 느낀 아스펠라가 고개를 들자 그가 얼른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아침에는 별 이상 없었습니다. 더 이상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을 겁니다.”

“아, 네…….”

시무룩해진 아스펠라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만큼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칼리우스는 만족스러운지 식탁 테이블에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더니 씩 웃으며 물었다.

“그놈이 마음에 드십니까?”

“좋은 아이예요. 사실 그런 큰 덩치로 지하에만 있기에는 많이 갑갑할 것 같아요. 깜장이도 답답하니까 도망치다 도성에 나왔던 거 같고요. 차라리 아스펠 산에서 키우면 사람들 눈에도 안 띄고 마음껏 돌아다닐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스펠라는 이때다 싶어 하고 싶었던 말들을 했다.

대공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되니 최대한 돌려서 말했다. 아스펠 산에서 키우는 게 좋다는 말은 즉 자신이 데려가고 싶다는 말이었다.

햇빛도 잘 안 드는 지하에서 산책도 못하고 몰래 숨어 살 바에는 산에서 마음껏 뛰노는 게 좋지 않을까. 사냥꾼들도 아스펠 산은 잘 안 오려 하니까. 다들 아스펠 산에는 기묘한 힘이 있다고 여겨 저주라도 받을까 오지 않는다.

“하지만 저번에 젊은 사냥꾼들이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칼리우스가 여유롭게 웃으며 물었다. 기억한다. 자신을 죽이려고 아스펠 산에 불까지 지르려던 그 젊은 사냥꾼 무리. 그놈들만 아니었다면 아스펠라의 등을 할퀼 일도, 오두막을 부술 일도 없었을 거다.

그놈들은 실제로 아스펠라를 마녀라고 부르기도 하지 않았나.

“아, 그분들이랑은 얘기가 잘 되었어요. 이제 아스펠 산에서는 사냥을 하지 않으실 거예요.”

“얘기가 잘 되었다라…….”

“네. 그때 도와주신 이후로 몇 번 찾아오셨거든요.”

“사냥꾼들이 찾아왔습니까?”

“부상당했을 때만요. 무리의 대장인 분이랑 얘기가 잘 되어서 아스펠 산은 물론 깜장이를 봐도 사냥하지 않으실 거예요.”

“사냥하지 않을 거라고.”

칼리우스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픽 코웃음 쳤다. 과연 그럴까.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졌다.

“……안타깝지만 그 것을 아스펠 산에 풀어둘 일은 없을 겁니다. 대신에, 제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에는 와서 맡아줬으면 하는데.”

“맡아 달라고요?”

“예. 그 짐승은,”

그는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고민하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국왕한테 하사받은 거라 저택에서 키워야 합니다. 국왕이 주신 선물을 함부로 산에 풀어둘 수는 없으니까요. 그것이 갑자기 도성에 나가면 어쩝니까. 아스펠라 양이 그 거구를 제압할 수도 없을 테고요.”

“그 애는 그렇게―”

“그거야 당신 앞에서만 유한 척 구는 거겠죠. 짐승은 믿을 게 못 됩니다. 이성이 있는 인간과는 달라요.”

그는 짐승이 된 스스로가 역겨웠다.

오로지 뭔가를 죽이고 싶은 그런 욕망만 남은 것. 끔찍했다. 하지만 그 또한 형벌이었다. 칼리우스가 무뚝뚝하게 내뱉는 저 모든 말들은 자기혐오였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스펠라는 가만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짐승들과 인간은 엄연히 다르죠. 인간들처럼 자신들이 모든 것의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말하고는 스스로도 놀라 헉, 하며 입술을 막았다.

‘미쳤구나, 아스펠라! 네가 산속에서만 있다 보니 신분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자책하던 그녀는 슬쩍 칼리우스를 쳐다봤다.

무표정이다. 아스펠라는 얼른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욱하는 성질! 인간이 최고 우위에 있다고 생각해서 튀니아의 신들을 모두 죽인 대공을 완전 비꼰 거 아닌가.

아스펠라는 제 목을 사수하기 위해 얼른 입을 떼 사죄하려 했다.

“저, 제가 너무 오―”

“아스펠라 양은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까?”

“네?”

“이성을 가지고, 지능이 뛰어난 유일한 동물은 인간뿐이잖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자연을 해칠 특권을 가진 것은 아니죠.”

“산신 토벌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보군.”

짐승일 때 자신을 바라보는 아스펠라의 눈빛과 인간 에르윈 대공인 자신을 바라보는 아스펠라의 눈빛은 확연히 달랐다. 그렇게 유한 눈웃음과 상냥한 말투, 부드러운 손길로 만져줄 때는 언제고.

‘인간 에르윈 대공은 재수 없다 이거인가.’

그럴 만했다. 혐오하고도 남을 거다.

칼리우스는 아스펠라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이미 다 지나간 일. 죽은 신들을 다시 살려낼 수는 없으니 발전에 힘써야겠죠. 덕분에 지금의 튀니아 왕국이 되었으니까.”

아스펠라는 그가 따라준 차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드레스 자락을 꽉 쥐며 말했다.

“혹시, 깜장이는 전리품인 건가요?”

“네?”

“신들을, 자연을 이겼다는 그런 의미로 데려온 전리품인거냐고요.”

드레스 자락을 쥔 손이 부들부들 거렸다. 저건 화가 나서일까. 아니면,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일까. 둘 다인 건가. 칼리우스는 그런 아스펠라를 가만히 보다 말했다.

“……형벌일지도.”

예상 외의 답변이었다. 하지만 그게 긍정적인 대답은 아니었다. 어찌되었건 이 저택에, 저 남자의 밑에 깜장이를 계속 두는 것은 좋지 않다고 아스펠라는 생각했다.

“그래서. 맡아달라는 제안은 안 받을 겁니까.”

“받겠습니다.”

저택에서 풀어줄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 저 남자가 출장이라도 자주 가길 비는 수밖에.

“당분간은 한 달마다 자리를 비울 겁니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펠킨을 보낼 테니 와서 짐승을 보살펴주세요.”

“깜장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도 될까요? 물론 밤에만 나갈 거고, 나간다 해도 아스펠 산 정도만 다닐게요. 제가 잘 데리고 다닐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막 여기저기 부수고 다닐 애는 아니에요.”

“마음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아스펠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 깊이 인사했다. 슬슬 가야 할 거 같다. 산을 너무 오래 비웠다.

“며칠 동안 신세를 졌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마차를 준비해뒀으니 짐을 챙기고 가세요.”

칼리우스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펠킨을 불렀다.

분명 올 때는 아무것도 들고 온 것이 없다. 이곳에 와서 값비싼 드레스를 얻어 입었으니 지금쯤이면 다 말랐을 상대적으로 누더기 같은 원피스만 들고 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짐이 많은―”

“대공 각하의 성의이십니다.”

안 그래도 커다란 마차 안에 뭐가 많이 빼곡히 들어 있다. 비싼 수입 과일부터, 아니 보석이랑 천들은 다 뭔가. 산에 사는 사람한테 이런 걸 줘봤자 쓸모도 없지 않나.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어차피 다 아가씨 드리려고 산 거라서 안 가져가시면 쓰레기통 행이에요.”

짐을 싣던 시종들이 부담 갖지 말라며 웃었다.

“대공 각하께서 원래 사람한테 고마움 표시하실 때는 항상 돈으로 주시거든요. 그런데 저희가 돈만 주는 건 성의 없을 거다, 하니까 이렇게 사신 거 같아요. 그런데 여인의 선물은 처음이다 보니 이것저것 다 사셨어요.”

펠킨이 끼어들며 말했다.

아스펠라는 그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신기했다. 어쩜 저택의 시종들은 모두 그를 경외하고 따르는 걸로 보아 좋은 사람인 것 같다가도. 그러나 그는 신들을 죽인 그 무자비한 인간 아니던가.

‘……비르가도 대공에게 공격당한 거야.’

이 부근에서 신들을 공격하는 건 그 남자밖에 없었으니까.

커다란 저택을 올려다보는 아스펠라의 눈빛이 냉랭해졌다. 신들을 죽여 얻어낸 명예와 부라니. 그토록 불명예스러운 것이 있을까.

아스펠라가 마차에 타자 펠킨이 마부에게 출발하라 명했다. 마부는 곧장 대공 저택을 빠져나왔다.

서재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칼리우스는 가만히 빠져나가는 마차를 쳐다봤다. 어느새 서재로 돌아온 펠킨이 말했다.

“아스펠라 양이 출발하셨습니다.”

“그래.”

“정말로 계속 저택에 들이시게요?”

“그렇다니까.”

“근데 진짜로 아스펠라 양 곁에만 가시면 이성이 생기세요?”

펠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저주에 걸린 지 1년 째다. 그동안 짐승으로 변한 주인을 점점 통제할 수 없어져 곤란했다. 말을 할 수도 없고, 말귀를 알아먹는 것도 아니고. 붉은 눈을 빛내며 사람만 보이면 죽이려 들지 않았나.

결국 스스로 지하에 들어가고도 짐승이 되자 우물 위를 기어 올라가 기어코 도성에 나간 주군이었다. 사람들에게 발각이 되어 온갖 공격을 다 받던 사람이, 저 평범한 여자애의 곁에만 가면 이성이 돌아온단다.

몇 주 동안 그가 저택에 돌아오지 않아 발만 동동 구르던 펠킨은 사냥꾼들에게 쫓겨 온몸에 총알이 박혀 돌아온 주군의 모습에 기겁을 했다.

인간들이 낸 상처는 저주로 생긴 상처와는 달리 회복되지 않았다. 사람이 되어서도 몸 안에 박힌 총알들을 빼내느라 그 고생을 하지 않았나.

기껏 정신을 차린 주군이 한다는 소리가, ‘여자를 찾아와’였다.

***

대답이 없는 칼리우스에게 펠킨이 보챘다.

“네? 각하! 진짜로요?”

“방정맞게 굴지 마라, 펠킨.”

“궁금하니까 그러죠! 청혼은 거절당하신 거고요?”

아스펠라 앞에서는 온갖 점잔을 떨더니, 주군 앞이라고 아주 방정맞은 개 마냥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칼리우스를 귀찮게 했다. 그가 딱히 이렇다 할 대답을 해준 것도 아니었지만 펠킨은 칼리우스의 표정만으로도 보고 알 수 있었다.

“와, 대공 각하를 차다니. 아스펠라 양 대단하네요.”

“차이기는.”

차이는 수준이 아니라 완벽한 거부였다.

“시종들한테는 유하시던데, 유독 대공님한테만 냉랭하시던데요?”

“본인도 알고 있겠지.”

“뭘요?”

“내가 제 원수라는 걸.”

“네? 대공님, 무슨 실수라도 저지르신 겁니까?”

“실수가 아니라 거의 죄 수준이다.”

무슨 짓을 저지르셨길래 죄까지 나온단 말인가. 펠킨은 의아했다. 자신이 모시는 주군 칼리우스 에르윈 대공은 어디 가서 남에게 원수를 질 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 아닌가. 모두들 에르웬 대공을 은인이라 여기잖나.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무시무시한 산신들을 상대할 때는 피도 눈물도 없으면서 백성들한테는 무뚝뚝해도 유하게 굴었다. 부모를 잃은 아이를 만나면 입양처까지 알아봐줄 정도로 그렇게 정이 많은, 짐승에게는 무자비하지만 사람에게만은 온정이 넘치는 이였다.

‘어디 가서 사람들한테 죄를 저지를 분은 아니신데.’

하지만 저렇게 침울해 하는 칼리우스를 보면 정말로 무슨 죄를 짓긴 하신 건가 싶다.

칼리우스의 비서로 일한 지 이제 8년. 원래는 그의 종자였었다. 8년 동안 펠킨은 사실 제 주군이 남색을 하거나, 혹은 고자이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다. 저 잘생긴 얼굴로 영애, 영식들에게 온갖 추파를 받던 분인데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만나던 이가 없지 않았나.

혹시 저를 마음에 두고 있어서 그리 혼자 계신 거냐고 물어봤다가 맞을 뻔했던 적도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연애에는 관심도 없던 분이 갑자기 청혼 이야기까지 꺼낼 줄이야.

“각하. 아스펠라 양이 그렇게 좋으십니까?”

“뭐?”

번뜩이는 금안이 무섭다. 펠킨이 얼른 덧붙였다.

“아, 아니 솔직히 바로 청혼까지 하실 줄은 몰랐었고, 또 방까지 준비하라시길래…….”

아스펠라를 데려오겠다면서 쓴 돈이 얼마인가.

세상만사 귀찮아서 밖에 나가 쇼핑하지도 않고, 저택의 시종들 월급을 주는 것 말고는 돈도 잘 안 쓰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눈 뜨자마자 여자를 찾아오라고 하고, 곧장 이것저것 정도도 모르고 사들이기 시작했다. 드레스, 구두, 심지어 그녀를 위한 말도 준비했다지. 그렇게 준비는 많이 해놓고 정작 가장 중요한 호감은 못 얻은 것 같다.

‘저 얼굴이랑 물량 공세로도 호감을 얻지 못하면 도대체 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아마 아스펠라의 마음을 녹이는 건 검고 커다랗고 흉포한 그 괴수라는 걸 펠킨은 죽어도 알아채지 못할 거다.

***

아스펠라는 당황스러웠다.

“이런 걸 받아서 내가 언제 입는다고…….”

인부들이 놓고 간 선물들을 펼치니 온갖 것들이 다 나왔다. 저택에서 매일 갈아입었던 드레스가 끝이 아니었나 보다. 커다란 상자 안에서는 새 옷감들이 계속해서 나왔다.

“이걸 그대로 갖다 팔까.”

마음에 드는 옷감들은 몇 개 꺼내 몸에 대보기도 하고 오두막에 걸어보기도 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것 같은데?”

[아스펠라다!]

[아스펠라가 돌아왔어, 얘들아!]

아스펠라가 돌아오자 동물들이 다들 오두막 안으로 모여들었다. 다람쥐부터 사슴부터 너구리 영감도 빠지지 않았다.

“다들 오랜만이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미안, 미안. 깜장이가 걱정돼서 같이 있다 보니까 늦었어. 걱정해준 거야?”

[깜장이가 누구야.]

“저번에 내가 상처 치료해준 애.”

동물들은 설마 그 검은 마수를 말하는 거냐며 물었다. 아스펠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들 이름을 듣고 웃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건 다 뭐야?]

너구리 영감이 화려한 옷감들을 만지작대며 물었다.

“선물로 받은 거야.”

[누구한테?]

동물들은 오랜만에 돌아온 아스펠라의 집에 낯선 물건들이 많아 궁금한 지 여기저기 기웃댔다.

“깜장이의 주인한테.”

[아스펠라 결혼해?]

어린 사슴이 다가와 물었다. 아스펠라가 당황해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치만 인간들은 결혼할 때 비싼 거 선물한댔는데.]

[결혼하지 마, 아스펠라. 나 그 남자 얼굴 봤어. 그놈이지? 그치? 나쁜 놈이잖아! 산신들을 다 해친 그 나쁜 인간!]

[그 인간이 검은 마수도 괴롭히는 거야? 응?]

“얘들아, 진정해. 난 결혼도 안 할 거고, 그 대공이랑 아무 사이도 아닌데다가, 깜장이는 무사해.”

산의 동물들이 그에 대해 모를 거라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나무들이 말을 전해주고, 바람이 실어다준다. 인간들의 소문이 퍼지는 것보다 더 빨리 이야기가 퍼진다. 동물들이 사람 말을 못한다 하여 아예 말을 못하는 건 아니다.

다들 칼리우스 에르윈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무자비했고, 나쁜 인간이었는지.

[그놈이랑 가까워져봤자 좋을 거 하나 없다, 아스펠라.]

너구리 영감이 동물들 사이로 끼어들어오며 말했다.

“사정이 생겨서 당분간 그 집에 왔다 갔다 해야 할 거 같아. 깜장이를 봐주기로 했거든.”

아스펠라는 저택에서의 일을 말해주며 상황을 설명했다. 동물들은 오로지 칼리우스 에르윈을 조심하라고만 강조했다. 깜장이를 만나든 뭘 하든, 그 대공이라는 남자만은 절대 가까워지지 말라고.

너구리 영감의 성화에 아스펠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아스펠라는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산을 내려왔다.

산에 길이 생겨버려서 시간은 단축되었지만, 아스펠라는 이 길을 없앨 생각이다. 길이 생겨봤자 사람들만 많이 올라올 거다. 산에 사람들이 올라오는 건 원치 않는다.

소쿠리에 가득 담긴 건 약초가 아닌 선물 받은 옷감들이었다.

‘산신들을 해친 사람한테서 이런 선물 받고 싶지도 않고, 집이랑 어울리지도 않고, 입을 일도 없으니까.’

아마 값이 꽤 나갈 거다. 당분간은 약초도 캐지 말고 빈둥거릴 수 있겠다. 도성에 들어서기 전, 아스펠라는 선물 받은 드레스로 바꿔 입은 뒤 엉성하게나마 머리를 틀어 올렸다. 그리고 비싼 천에 팔 옷감들을 고이 접어 중개인이 있는 상점으로 들어갔다.

중개인은 아스펠라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더니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부인.”

“이것 좀 팔려고 왔소만.”

어설프게나마 반말을 하는 아스펠라에게 중개인은 두 손으로 정갈하게 그녀가 내민 옷감들을 살펴봤다.

“오오, 이 좋은 옷감들을 그냥 파시려고요?”

“너무 많아서.”

“아, 그러시군요. 잠시만요. 가격은 한 이정도면 되겠습니까? 그……. 원가보다는 쌀 수밖에 없는 것이 아무래도 중고다 보니―”

“이 정도면야. 돈이 급한 건 아니니까.”

아스펠라는 새침하게 웃으며 중개인이 건넨 돈주머니를 받아들었다. 중개인은 그녀가 꽤나 부잣집의 아가씨라 생각한 건지 문까지 열어주며 배웅했다. 마지막까지 새침한 표정을 유지한 채 아스펠라가 밖으로 나왔다.

두둑해진 주머니에 기분이 좋아졌다.

“책방에나 들러볼까?”

뭘 살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때였다. 투박한 손이 아스펠라의 어깨 위에 턱 하고 올려졌다.

“어이!”

“으악!”

깜짝 놀란 아스펠라가 얼른 가슴을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킬킬킬,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씨. 너였어. 하며 아스펠라가 훽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이다?”

능글맞게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이는 젊은 사냥꾼이었다.

“일카이! 놀랐잖아.”

“어디 놀러 가냐? 꼬질꼬질하게 돌아다니더니 오늘은 웬일로 깔끔하네.”

그는 아스펠라의 주위를 한 번 빙 둘러 보며 놀리듯 말했다. 평소에도 깔끔했다고. 아스펠라가 어이가 없는지 코웃음 쳤다. 일카이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 중개인 상점을 보고 눈치챈 듯 씩 웃었다.

“뭐야, 어디 귀족 가문이라도 턴 거야?”

“털기는!”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모습으로 뭔가를 팔러 올 리는 없잖아. 네가 귀족이랑 결혼할 리도 없고. 응? 요 몇 주 동안 보이지도 않더니.”

“훔친 거 아니고 받은 거거든.”

“누구한테?”

“말해봤자 안 믿을 걸.”

아스펠라는 제 갈길 가라며 그에게 손짓했다. 하지만 일카이는 제 갈길은 다 잊은 건지 아스펠라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두 달 전 등에 부상을 입은 아스펠라를 약방 부부에게 데려간 이후로 그는 종종 아스펠라에게 친한 척을 해대기 시작했다.

“왜 자꾸 따라와.”

“오랜만에 보니까 반가워서. 그나저나, 등에 흉터는 다 나았냐?”

“다 나았어. 그러는 넌, 얼굴에 그 멍은 뭐야?” 귀찮아서 대충 대꾸하려던 아스펠라는 그제야 일카이의 얼굴에 길게 난 흉터를 보고 물었다. 일카이는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아, 내가 또 유명하잖아. 유능한 사냥꾼으로.”

“…….”

“물론, 아스펠 산은 안 건드려. 장난으로 동물 죽이지는 않는다고? 귀족들이 요즘 사냥꾼들을 불러서 같이 사냥하는 게 유행인건지, 아무튼 귀족 나리들이 불러서 사냥 가르치다가.”

“널 때린 거야?”

“이래서 신분이 최고인거다. 쯧쯧. 하도 멍청하게 시위를 당기길래 몇 마디 했더니 때리는 거 있지? 어린놈이 그러는데 쥐어 팰 수도 없고. 까라면 까야지. 뭐. 별로 안 아파.”

어린놈이 때렸고, 별로 안 아픈 거 치고는 멍이 심했다. 아스펠라가 멍을 한참 동안 보자 일카이는 괜히 허세를 부렸다.

“별로 안 아프다니까― 이런 건 그냥 기합으로―”

“기합이 만병통치약이니? 미관에도 별로니까 따라와. 연고 발라줄게.”

“친구 걱정도 해주고?”

“친구는 무슨. 맨 처음엔 내 멱살이나 잡고 마녀라고 했으면서.”

“그건 미안하다니까― 솔직히 끼어든 건 맞잖아―, 아직도 서러웠어?”

얄밉게 물어보는 그의 모습에 아스펠라는 일카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조금 세게 찔렀다. 일카이는 제 옆구리를 부여잡고는 아스펠라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아스펠라, 그래서 그동안 어디 갔었던 건데? 응? 네가 아스펠 산을 몇주가 넘도록 비우는 일이 어디 보통 일이 아니잖아.”

“그냥 대공 가문에 가서―”

“뭐?! 에르윈 대공 가문?!”

어찌나 크게 소리지르듯 묻는지, 길목에 있던 사람들이 다들 에르윈 대공님이 뭐? 하는 눈빛으로 아스펠라와 일카이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스펠라는 얼른 그의 입을 막고 길목 안으로 들어갔다.

“미쳤어? 그렇게 큰 소리를 내면 어떻게 해!”

“미친 건 너지, 아스펠라! 너 거기가 어딘 줄 알고―!”

일카이는 마치 절대 가서는 안 될 곳을 간 것 마냥 화를 냈다. 아스펠라는 그가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것이 이해가가지 않았다.

“좋아서 간 거 아니야. 저번에 네가 잡으려던 그 검은 마수가 알고 보니 그 댁 애완견이어서 보살펴준 보답으로 초대받은 거라고.”

“……그 마수가 에르윈 대공네 애완견이래?”

“그래. 대공이 너무 과한 답례를 하는 바람에 몇 개는 팔러 나온 거라고. 너 어디 가서 떠벌리면 안 돼?”

그 미쳐 날뛰던 것이 대공네 애완견이라고? 일카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그에게 총알을 몇 발이나 박아댔는데. 일카이가 곤란한 얼굴로 아스펠라에게 물었다.

“설마 나 찾으러 다니진 않지? 지네 애완견 공격했다고.”

“걱정 마. 그런데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화가 아니라 걱정하는 거지. 그 대공이 귀족 사이에서 얼마나―”

말을 하려던 일카이가 멈추더니 가만히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아스펠라는 왜? 하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큰 눈을 깜빡였다.

“뭐, 됐어. 이제 네가 그 집에 갈 일은 없잖아? 그 대공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지는 네가 제일 잘 알 거고.”

“가끔씩 가서 깜장이만 봐주고 올 거야.”

“깜장이는 또 누군데.”

“검은 마수 이름.”

일카이는 대공의 취향이 꽤나 깜찍하다고 생각했다. 그 큰 놈을 키우면서 깜장이라고 부르다니. 귀족들 사이에 도는 소문만 봐서는 냉철하고 무자비한 인간일 텐데.

그는 젊은 영식들에게 기초 사냥법을 알려주는 일들을 하기도 했다. 그가 대장으로 속해 있는 오크몬드 사냥꾼 조합은, 사냥이 취미인 튀니아 귀족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했던지라 쥐뿔도 없는 천민의 출신치고는 꽤 성공한 편이었다.

일카이는 저번에 가르쳤던 영식이 한 말을 기억했다.

‘에르윈 대공가의 저택에서는 매일 밤 비명소리가 난다지. 그 집 하녀들은 안 그런 척 하지만 다들 달달 떤다는군. 뭐, 그래봤자 영애들은 모두 그 잘생긴 얼굴과 재력에 반해 눈만 빛내지만.’

‘그렇게나 산신들을 죽이고 다녔는데, 원혼이라도 붙은 거 아니야?’

그것이 그 깜장이라는 마수의 울음소리 때문인 걸까.

일카이는 모쪼록 아스펠라가 그 저택에 가까이 가지는 않았으면 했다.

아스펠라는 잔뜩 걱정하는 얼굴로 일그러진 일카이를 보며 말했다.

“정말로 깜장이만 봐주고 올 거야. 마음에 걸리거든. 그 애.”

아스펠라는 동물에 약하다. 사람한테는 맺고 끊는 게 확실하면서, 심지어 낯도 가리면서, 동물들은 그냥 지나치질 못한다. 이 일대의 길고양이들 밥도 다 아스펠라가 준다.

“넌 왜 그렇게 동물들이 좋아?”

일카이가 물었다. 아스펠라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딱히 이유랄 것이 없었다.

“그야, 나랑 같이 살아왔고― 그냥 좋아.”

“사람들은 안 좋아?”

“좋고 나쁠 것도 없어. 다만 인간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서.”

“그럼 난?”

“너? 넌……단순한 애지.”

“그거 칭찬이지?”

“그럼.”

일카이가 배시시 웃었다. 맨 처음에는 힘만 세고 무자비한 사냥꾼이라 생각했지만 또 그렇게 나쁘지만도 않은 사내였다. 아스펠라라고 세상 모든 인간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약방 부부도 좋아하고, 또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소녀도 좋아하고.

하지만 약방을 매일같이 찾아와 건물세를 무자비하게 올리며 가게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귀족이 싫고, 꽃을 판 소녀를 매일같이 매질하는 그 애의 아버지도 싫다.

산속에만 있는 그녀가 어찌 아냐면, 도성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수만 가지의 이야기들이 들려오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남의 일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도성에 나가면 아스펠라는 귀로 들려오는 여러 이야기들에 귀가 아프고 머리가 울린다.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쁜 사람이 있다. 선과 악은 모호하다. 인간들은 복잡하다. 아스펠라는 그래서 인간들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길목에서 나온 아스펠라는 상점에 들려 이것저것 사기 시작했다. 책은 물론 오랜만에 새 신발도 사고, 평소에 입기 편한 옷감도 샀다.

그동안 일카이는 아스펠라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며 물었다.

“네가 생각하기에 난 어떤 인간이야, 응?”

단순하다고 했던 것의 의미가 궁금한 것인지 일카이가 집요하게 물어댔다. 아스펠라는 귀찮은 듯 대충 대꾸했다.

“그냥 인간이다, 됐어?”

“뭐야. 진짜로 그게 끝?”

“……알고 보면 조금 착한 면도 있는 보통 인간.”

서운해하는 그의 표정을 보니 아스펠라가 옜다, 인심이다. 하며 덧붙여줬다. 일단은 그에게 도움을 여러 가지 받았으니까. 일카이가 기분 좋은지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살 거 다 산 거지?”

“응? 응.”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휘파람을 불어 제 말을 불렀다.

“태워줄게. 너 그렇게 큰 돈 들고 가다간 강도한테 털려.”

호의는 거절하지 않으니 아스펠라가 얼른 그의 손을 잡고 그의 뒤에 앉았다.

“그런데, 일카이.”

“왜.”

“왜 자꾸 친한 척 해?”

“얘 말하는 것 좀 봐라.”

일카이가 황당하다는 듯 픽 웃으며 말했다.

“친해지고 싶으니까 이러지.”

“왜?”

“몰라. 그 커다란 놈을 지키겠다고 달려드는 게 신기해서 그런 건지. 야, 꽉 잡아.”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말고삐를 잡아 당겼다. 말이 투레질을 하더니 번쩍 앞발을 들어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제 뒤에서 허리를 꽉 잡고 있는 아스펠라의 말을 곱씹었다. 왜 자꾸 친한 척 하냐니. 모르겠다. 그냥 멀리서 눈에 들어오길래.

재밌는 여자였잖아. 생긴 건 벌레만 봐도 울면서 도망갈 것처럼 생겨서는, 성인 남자들도 두려워서 벌벌 떨 짐승을 죽이지 말라며 자신한테 달려드는 것이.

일카이는 아직도 총구를 들이미는 와중에 그걸 막으려던 아스펠라의 모습이 인상에 남았다. 사람보다 짐승이 더 좋다던, 자신의 누이와 비슷했다. 그때는 지키지 못했지만.

일카이가 아스펠라의 존재를 알기 시작한 것은 아스펠라가 그의 존재를 알기 시작한 것보다 한참 전이다.

사실 사냥꾼들이나 도성 사람들 사이에서 아스펠라는 꽤나 유명하다. 본인만 모르고 있을 뿐이지만, 이 커다란 아스펠 산에 사는 유일한 여자애가 그녀뿐인지라 눈에 띄지 않으려 해도 안 띌 수가 없었다.

원래는 노모도 같이 살고 있는 것 같았는데, 작년부터 보이질 않는 걸로 보면 죽은 거 같다.

사냥꾼들도 마다하는 아스펠 산. 너무 높고 험준한데다가 위험한 짐승들도 많아 다들 가길 꺼려한다. 더군다나 아스펠 산에는 무시무시한 소문이 있지 않나.

산이 살아 있다고.

사냥꾼들끼리 종종 모임을 가질 때가 있는데, 아스펠 산에 들어갔다가 나무가 살아 움직이면서 자신을 공격했다고 하는 놈도 있었다.

아무튼, 안개가 짙게 깔려 대낮이 아닌 이상은 못 들어가는 그 산에 조그마한 여자애가 산다. 그것도 산 중턱에. 건너 건너 이야기를 들어보면 누가 거기에 애를 버렸고, 거기서 살던 노인이 거둬 키웠단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광장에서 잡아온 사냥감들을 상인에게 팔고 있을 때였다. 동료 녀석 하나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한 곳을 가리켰다.

‘이봐 일카이, 저 여자야. 쟤. 저 나뭇가지로 대충 머리 틀어 올린 금발. 왜, 그 아스펠 산에 혼자 산다는 여자애.’

‘생각보다 평범한데?’

산에서 평생을 살았다니 마음속으로는 거지꼴을 한 여자애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실제로 보니 되게 평범하다.

‘그럼 뭐 우락부락할 줄 알았냐? 그나저나 꽤 귀엽지? 산속에서 살아서 그런가 순진해 보이고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는 애 같은데.’

일카이의 옆에 있던 사냥꾼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제 턱을 문질렀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챈 일카이가 그의 목덜미를 거세게 잡아 내리누르며 말했다.

커다란 덩치의 일카이가 잡아 누르자 상대적은 작은 덩치의 남자가 아픈지 그의 손을 탁탁치며 항복했다.

‘허튼 짓 하지 말아라, 응? 남자 망신시키지 말고.’

‘아, 뭐 그냥 말만 해본거야! 누가 진짜 덮친대?’

‘으휴, 한심한 놈.’

이런 놈들이 태반이다. 혼자 산속에 사는 여자. 그거 하나만 노리고 호시탐탐 꾀려고 하는 이들. 아무것도 모른 채 장을 보고 있는 아스펠라를 보면서 속이 터졌다.

‘너무 안전 불감 아닌가? 여자 혼자 아스펠 산에 사는 것도 위험할 텐데, 이런 놈들이 언제 덮칠 줄 알고―’

그때가 아마 2년 전쯤 같다. 그때만 해도 별 관심 없었다. 그저, 아스펠 산에 산다는 것이 신기할 뿐. 그런데 몇 달 전, 총을 쏘지 말라며 저한테 달려드는 그녀의 모습에 관심이 생겼다.

보통은 그런 걸 죽이려 들잖아. 멱살을 잡으며 마녀라고 떠들어대든 말든 아스펠라의 시선은 마수가 향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걱정스러운 얼굴로.

약방의 노부부가 달려 나와 그러지 말라며 말리지 않았다면, 잔뜩 성난 그의 다른 동료가 정말로 아스펠라를 마녀 재판대에 보냈을 지도 모른다.

그 여자는 터덜터덜 산으로 돌아갔다. 일카이는 어쩐지 그 뒷모습에 눈을 뗄 수 없었다.

며칠 후, 동료가 그에게 말했다.

‘일카이, 그 검은 마수, 아스펠 산에 있다는데?’

검은 마수가 향한 곳이 아스펠 산이라는 얘기에 일카이는 곧장 아스펠라를 떠올렸다. 그건 그의 동료도 마찬가지였는지 그가 혀를 차며 말했다.

‘내 생각엔 그 여자 진짜 마녀 같아. 봤지? 그 마수 새끼 비호하는 거. 마녀가 아니고서야 그놈을 그리 대할 수는 없어. 동족이다 이거지.’

그의 동료는 그렇게 말한 뒤 사냥꾼들을 소집하기 시작했다.

‘대장은 너니까, 네가 이끌어줘야지 일카이.’

‘맞아. 우리도 이참에 큰 건 하나 해서 떼돈이나 벌자. 그 정도 크기면 국왕도 보상을 내릴 걸!’

삼삼오오 모인 사냥꾼들이 일카이에게 매달리며 빨리 아스펠 산으로 가자고 졸라댔다. 혈기왕성한 젊은 사냥꾼들은 아스펠 산을 두려워하거나 경배하기는커녕 정복해야 할 존재마냥 떠들어댔다.

일카이는 이런 이들을 말리기도 귀찮아 그리하라고 했다.

‘만일 누이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같은 사냥꾼이자, 그의 스승이기도 했던 누이라면 이들을 말렸을까. 사냥꾼들이 잔뜩 전투준비를 위해 온갖 덫과 무기를 챙기는 동안 일카이는 가만히 아스펠 산만 쳐다봤다.

아스펠 산을 지키는 신도 죽었겠다, 수호신의 가호를 못 받는 산은 그저 죽은 산이다. 동료들은 무장한 채로 말 위에 올랐다. 산을 오르며 말이 가기 힘든 길이 나오면 가차 없이 풀과 나무를 베며 올라갔다.

짐승의 냄새는 귀신같이 잘 맡는 이들의 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냄새 난다. 짐승의 냄새야!’

‘이봐, 저 위에 오두막이 있는 거 같아!’

사냥꾼들은 말에서 내려 무기와 횃불을 들고 안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일카이 역시 위로 올라갔다. 쿵, 쿵, 쿵! 거대한 짐승이 작은 오두막을 부수고 있었다. 옆에서는 작은 여자가 울면서 매달렸다.

‘저기 마수다! 마녀도 옆에 있어!’

다들 총을 장전하며 쏘려고 할 때였다.

‘잠깐!’

‘대장? 왜 그래?’

‘일카이?’

아스펠라를 쳐다보는 일카이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의 눈에는 울면서 마수에게 뭐라 말하는 아스펠라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의 입모양은 정확히 도망가라고 하고 있었다. 사냥꾼들을 멈춰 세운 그에게 동료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물으려 할 때였다.

‘아악!’

마수는 그대로 아스펠라의 등을 할퀴고는 달아났다.

‘어어? 도망간다! 잡아!’

다른 이들이 마수를 쫓으러 갈 때, 일카이는 바닥에 쓰러진 아스펠라를 둘러멨다.

‘괜찮아?’

‘도망……가라니까…….’

아스펠라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선 중얼거렸다. 그녀의 시선은 끝까지 마수를 향해 있었다.

‘이봐! 정신 차려!’

‘읏…….’

할퀸 상처에서 나온 피가 아스펠라의 등을 흠뻑 적셨다. 마수를 놓친 사냥꾼들 몇몇이 다시 돌아와 그에게 보고했다.

‘젠장, 그놈 도망쳤어! 그냥 산을 훌쩍 넘어가던데?’

‘이 여자는 뭐야? 한패 아니었어?’

일카이는 쓰러진 아스펠라를 고쳐 안아들며 말했다.

‘약방 노부부한테 간다. 너희들도 그만 쫓고 내려와.’

‘대장!’

‘이미 산을 훌쩍 넘은 놈을 뭐 하러 쫓아.’

‘그럼 그 여자는―’

‘넌 동족을 이렇게 갈가리 찢는 놈 봤냐? 빨리 내려가자. 이러다 이 여자 죽겠어.’

그는 얼른 아스펠라를 데리고 산을 내려왔다. 새벽에 약방 문을 쾅쾅 두드리자 잠에서 깬 영감이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내려왔다.

‘누, 뉘시오!’

‘이봐 영감. 이 여자 알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제 외투로 지혈한 아스펠라를 품에서 꺼내 보였다.

‘헉! 아스펠라! 무슨 짓을 한 거야, 자네들!’

‘시끄럽고 빨리 치료나 해. 우리가 한 거 아냐. 짐승이 할퀸 거지. 피 많이 흘렸으니까 지혈부터 해. 얼른.’

뒤이어 나온 마벨라 부인이 아스펠라를 보고 기겁하며 얼른 그에게서 받아들었다. 덩치도 작은 여자의 등이 잔뜩 뜯겨져 나갔다.

일카이는 그녀가 치료받는 동안 그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쌕쌕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앓는 소리 한 번 안 내는 아스펠라가 신기했다.

아스펠라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삼일 정도가 지난 후였다. 일카이는 아스펠라가 정신을 차린 이후로 매일 같이 약방에 눈도장을 찍었다.

약방 한켠에 임시로 마련된 아스펠라의 방 쪽으로 가자 살짝 열린 틈으로 아스펠라의 모습이 보였다. 작은 새들이 창가에 앉으니 아스펠라는 제가 먹던 빵조각을 잘게 부숴 그들 앞에 놓았다.

‘맛있니?’

짹짹짹, 짹짹!

새들의 말을 진짜 알아듣기라도 하는 걸까. 새들이 지저귀면 아스펠라가 쿡쿡 유하게 웃으며 대답을 해줬다.

‘그래. 앞으로 이 빵집에서 사다줄게. 몸? 몸은 거의 다 나았어.’

짹짹, 짹짹짹, 짹!

‘괜찮아. 그런데 오두막이 다 허물어져서 걱정이긴 하네.’

짹짹!

‘여기에 있는 건 좀…….’

일카이가 일부러 문 앞에서 발소리를 낸 뒤 문을 벌컥 열며 들어왔다.

계속해서 대화를 듣고 있자니 아무래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작은 새들이 뭐라고 저렇게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건지. 정신이 이상한 건가.

아스펠라는 일카이를 보자마자 얼른 빵조각을 치우며 아까의 유한 미소를 지워버렸다. 새들도 푸드덕 날아갔다. 뭔가 불한당이 된 거 같아 멋쩍어진 일카이가 털썩, 침대 앞의 의자에 앉았다.

‘이제 그만 와도 될 텐데요.’

‘와, 생명의 은인한테 너무 차갑네.’

그의 말에 아스펠라가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듯 손만 만지작댔다.

‘등은 좀 괜찮아?’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움직일 수는 있어요.’

‘그래? 다행이네.’

할 말이 없어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아스펠라는 그가 불편한 듯 눈만 굴렸고, 일카이는 딱히 할 얘기가 있어 찾아온 것이 아닌지라 가만히 눈만 껌뻑였다. 머릿속에서는 뭔가 말을 걸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집, 그래, 집!’

일카이가 생각난 듯 손을 튕기며 아스펠라에게 말했다.

‘오두막 그때 다 허물어졌잖아. 그치? 그 마수 새끼가 다 부숴서.’

마수 새끼. 그 말에 아스펠라의 눈이 살짝 처졌다. 아 그놈 이야기 꺼내면 이렇게 눈에 띄게 슬퍼하는데. 일카이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내가 그거 고쳐줄까?’

아스펠라가 당황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갑자기 집을 고쳐준다고?

‘네?’

‘너 혼자 그 집 못 고칠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여기서 살 것도 아니고. 그치?’

‘네.’

‘도와줄게.’

그가 팔을 꼬며 등받이에 기댄 채로 말했다. 입꼬리가 씩 올라간 표정이 뭔가 굉장히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갑자기 도와주겠다는 말에 아스펠라는 그의 호의가 의심스러웠다. 가늘게 눈을 뜨며 그를 살피는 표정에 일카이가 시침을 뚝 뗐다.

‘별 뜻은 아니고, 그냥 좋은 일 하는 셈 치는 거지. 그렇다고 무료는 아니야. 약초로 갚던지 하라고.’

‘그래도 되겠어요?’

‘다른 산의 약초라면 마다하겠지만, 아스펠 산의 약초라면 얘기가 다르지.’

아스펠 산의 약초들을 원하는 이들은 많다. 사냥꾼들은 부상이 잦은 지라 항상 효과 좋은 약초나 약들을 찾아다닌다 들었다. 아스펠라는 좋은 거래인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스펠라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일카이가 물었다.

‘그런데, 진짜로 아스펠 산의 약초들을 다 네가 따오는 거야?’

‘네. 그런데, 왜 자꾸 반말이세요?’

‘그럼 너도 해.’

일카이가 명료하게 대답했다. 그러더니 몇 살인데? 물었다. 아스펠라가 스물이라고 말하자 일카이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야, 한 살 누나네. 한 살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지. 너도 말 놔, 아스펠라!’

‘언제 봤다고 남의 이름을…….’

‘그럼 성을 알려주던지? 참고로 나는 성 없어. 그냥 일카이야.’

‘나도 성 없어.’

‘그럼 아스펠라라고 부르면 되는 거잖아. 그치?’

아스펠라는 뭔가 말려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부정할 수는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의 친분이 시작되었다.

아스펠 산의 입구에 도착하자 일카이가 말에서 내린 뒤 아스펠라를 내려줬다.

“아스펠라 너 너무 말랐다. 끼니는 제때 먹는 거야?”

“튼튼하니까 걱정 마셔.”

“이런 몸으로 잘도 약초를 캐네…….”

일카이가 그렇게 말하며 아스펠라가 산 짐들을 죄다 제가 들기 시작했다. 아스펠라는 괜히 부담스러워서 얼른 그의 팔을 잡아 내리며 말했다.

“안 들어줘도 돼. 나 그렇게 안 약해.”

“누가 너 약해서 도와준대? 넌 너무 호의를 호의로 못 받아들여.”

“……이게 자꾸 너, 너, 거리네.”

맞는 말에 아스펠라가 괜히 멋쩍은지 꼬투리를 잡았다. 일카이는 그런 아스펠라와 시선을 마주치며 씩 웃더니 말했다.

“누나 소리가 그렇게 듣고 싶어? 그럼 앞으로 만날 누나라고 불러줄게.”

“뭘 또 그렇게까지. 됐어.”

“이것 봐. 또 벽치네.”

일카이는 서운하다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원래 열 아홉 살이 이렇게까지 유치한가. 이 나이대 청년들은 대부분 성숙해 보이고 싶어 안달난 것이 아니던가.

“이봐요, 아스펠라 양. 내가 댁한테 잘해주는 이유는 뭐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라니깐?”

“누가 뭐래?”

“조금만 다가가면 아주 벽을 세우는데, 그 벽이 돌담 수준을 넘었어. 저기 저 높으신 왕궁의 철로 만든 벽이야. 응? 친누나 같아서 그런 건데 그걸 안 받아주다니.”

“누나가 있어?”

“있었지.”

그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잠겼다. 아스펠라는 얼른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살폈다. 얼굴은 평소와 같았지만 눈동자는 저 너머를 보고 있었다.

“그럼…….”

“죽었어.”

“미안.”

어쩐지 아픈 곳을 건드린 것 같아 아스펠라가 미안한 듯 사과했다.

“미안해 할 건 또 뭐야. 사회 생활 못 해본 티가 나네. 사람은 다 죽잖아.”

그렇게 말하며 아스펠라의 머리칼을 헤집어 놨다. 아스펠라가 어휴!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칼을 다시 정리했다. 가만히 산을 올라가던 아스펠라가 물었다.

“일카이. 네 누이는 어떤……분이셨어?”

생각해보니 일카이의 목에 걸고 다니던 목걸이는 그의 누이가 준 것이라고 했었다.

“드디어 관심 가져주는 거야? 나한테?”

“아니 뭐, 네가 누이분을 잘 따르는 것 같았길래.”

남매 사이가 각별했으니, 그런 것을 지니고 다니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일카이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할 때 목걸이를 쥐는 것 같았기에.

꽤나 소중한 물건이었고, 그걸 준 누이도 소중한 가족이었던 것 아닐까. 문득 그에 대해 궁금해졌다. 일카이는 아스펠라에게 이것저것 묻기는 했어도 저에 대한 이야기는 안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누나도, 사냥꾼이었어.”

그가 처음으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도 사냥 기술들을 누나한테 배웠어. 나이 차이가 좀 많았거든. 한 여섯 살 정도. 그래서 누나를 스승님처럼 모셨는데 항상 하는 말이 이거였어. 사냥꾼은 동물들과 대화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사냥꾼이 무기만 잘 다루고 덫만 잘 설치하면 되는 거지 뭘 또 대화씩이나 하냐고, 일카이가 그렇게 웃으며 말했다.

아스펠라는 그런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일카이의 누이인 사라는 뛰어난 사냥꾼이었다고 한다. 사냥꾼은 마냥 동물을 죽이는 직업이 아니라고. 때로는 동물을 살릴 줄도 알아야 한다던 그녀는 여타 다른 사냥꾼들과는 다르게 신념이 있었다.

다들 커다란 동물을 마구잡이로 잡아 자랑을 했지만 사라는 민가를 공격하는 동물이 아닌 이상 절대 먼저 살육을 하지 않았다. 민가를 공격하던 동물들도 곧장 죽이지 않고, 공격을 하기 전에는 가만히 동물의 눈을 쳐다봤다.

어렸던 일카이는 그게 궁금했는지 물어봤다.

‘누나. 도대체 왜 눈을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걔네랑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마을 사람들이 왜 멧돼지를 그냥 돌려보냈냐고 난리잖아.’

‘일카이. 사냥꾼은 동물들과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해. 그 민가를 공격한 동물이 어째서 그랬는지, 도움을 요청하는 건지 분노하는 건지.’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네.’

‘그 멧돼지는 단순히 사람이 미워서 공격한 게 아니야. 우리가 먼저 그들의 새끼를 데려가서 찾아온 거지.’

일카이가 말도 안 된다는 듯 피식 웃었다. 멧돼지한테 모성이라도 있다는 거야? 그렇게 묻자 사라가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그때를 상기하며 일카이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동물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던 사람이, 짐승한테 죽임 당했어. 근데 죽는 그 순간에도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 동물이랑 대화를 하래. 미친 거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매우 슬펐다. 아스펠라는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라 가만히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쳐다봤다.

“동물이랑 대화는 무슨. 그치?”

“……일카이.”

“그렇게 믿었어. 동물이랑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근데, 아니더라?”

앞서 걸어가던 일카이가 뒤를 돌더니 아스펠라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온 일카이가 물었다.

“아스펠라, 동물이랑 대화할 수 있지.”

“…….”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마수를 도울 리 없지. 마수의 총상을 치료해준 것도 너였지.”

일카이가 아스펠라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아스펠라는 당황했다. 잠깐, 마녀를 신고하면 주어지는 포상금이 얼마였더라? 순간 고문당하고 돌아온 비르가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누나! 마녀로 신고할 생각 없으니까!”

“무, 무슨…….”

“딱 하나만 도와줘.”

“뭘?”

“동물 하나만 찾아 줘.”

“어떤 동물……?”

“사라을 죽인 짐승.”

그의 눈빛이 요요하게 빛났다. 일카이는 그 짐승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이 도성까지 온 것이다.

“찾는데 어렵지는 않을 거야. 그놈도 검은 마수니까.”

“설마 깜장이?”

“그놈보다는 더 커. 더 크고, 눈동자는 그놈과 똑같이 붉은 색이지만 눈 하나가 없어.”

그렇게 커다란 몸집을 가진 녀석이 자취를 감췄다. 수소문해봤지만 사라가 죽은 뒤로는 아무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짐승 새끼가 내 누나를 죽였어. 찾아서 똑같이 만들어야 해.”

항상 장난기 다분하던 일카이의 눈빛이 분노로 물들었다.

사라가 어떻게 죽었는지, 당시 열네 살이었던 일카이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사라는 처참하게 죽었다. 겨우 숨만 붙어 사냥꾼들의 수레에 실려온 사라의 몸은 반으로 두 동강나 있었다.

‘일카이! 사라가……!’

그날 아침에도 사라는 동료 사냥꾼들과 마수를 잡으러 갔었다. 도성 근처에서 활개 친다는 커다란 마수. 사람들을 잡아먹으며 모두를 벌벌 떨게 한.

누이의 실력은 튀니아 왕국의 사냥꾼들 중 으뜸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속한 길드에 들어오려는 사냥꾼들이 항상 줄을 섰었다. 그런 대단한 누이가 마수를 잡으러 간다니 모두들 한시름 덜었었다.

이제 그 무서운 마수도 사라의 손에 잡혀 죽을 거라고.

하지만 두 동강이 난 건 사라였다.

‘누나, 누나!’

‘일카이…… 커흑……! 기억해둬라. 사, 사냥꾼은……동물과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해……그 마, 마수……그 마수를 찾아……찾아서…….’

‘누나? 누나! 사라! 사라!’

눈도 못 감고 죽은 그의 누이. 강한 사냥꾼 사라.

그녀는 도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숲에 묻혔다. 그 숲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동료들에게 그리 부탁했다고 한다. 그 숲에 묻어달라고. 무슨 일이 생겨도, 그 숲의, 도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그 숲에.

“아스펠라. 제발 부탁이야. 넌 동물들과 대화할 수 있으니 그놈을 본 동물들을 찾을 수도 있지 않겠어?”

“하지만 난 이곳에서 평생 살았는데도 그 일에 대해 몰랐는 걸.”

“너 아니면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그래…….”

일카이의 눈이 간절하다. 아스펠라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도울 순 있는 건 돕겠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마.”

“고마워.”

그가 아스펠라를 꽉 껴안았다. 어찌나 세게 껴안던지 키 차이 때문에 아스펠라의 발이 덜렁 들렸다.

“숨 막혀, 일카이.”

“아, 미안.”

당황한 아스펠라의 몸이 굳자 일카이가 얼른 내려놓고는, 신나서 다시 짐을 들고 산을 올라갔다.

***

그 이후로 일카이는 종종 아스펠 산에 갔다. 그의 동료들은 그 위험한 곳을 잘도 올라가는 일카이를 신기해했다.

“이봐, 대장! 오늘도 아스펠 산에 가는 거야? 애인 만나러 가냐? 응?”

“일카이, 솔직히 말해봐, 너 그 여자랑 사귀지? 저거 봐, 아주 바리바리 싸들고 가네.”

짓궂게 물어보는 동료들에게 일카이가 버럭 소리 질렀다.

“사귀기는 누가!”

“쟤 봐. 쟤는 당황하면 저렇게 군다니까. 사귀는 거 맞아. 야, 우리가 대장보다 나이는 많잖아! 연애 경험도 대장보다 많을 걸? 연애 상담이라도 좀 해줘?”

“아, 어쩐지. 저번에 아주 죽일 듯이 목을 내리 누르던데, 미안하다 대장―!”

일카이는 저를 놀리는 이들에게 손가락으로 욕을 한 뒤 말에 올라탔다. 말의 목 부분을 쓸어내려주며 일카이가 어색하게 말했다.

“자, 힐다. 아스펠 산으로 가자.”

그러자 말이 푸르르, 대답이라도 하듯 투레질을 하며 발을 굴렀다. 일카이가 신기한 지 눈썹을 위로 올리며 미소 지었다. 아스펠라의 말대로 천천히 마음을 여니 정말 말이 통하는 기분이다.

‘아스펠라. 동물이랑 대화하는 건 어떻게 하는 거야?’

‘글쎄…… 그냥 자연스럽게?’

‘뭐야 그게.’

‘자연스럽게 주변 동물한테 마음을 열어봐.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사라도 곧잘 자신의 말에게 이름을 붙여주며 말을 걸었었다. 그냥 혼잣말인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거 같다.

기분 좋게 아스펠 산으로 올라갔다. 더 이상 말이 올라가기 버거워 하면 그는 근처 개울가에 말을 풀어주고는 마저 산을 올라갔다.

한참 올라갈 때마다 새삼 아스펠라가 신기해졌다.

‘진짜 걔는 이 높은 델 어떻게 그리 쉽게 올라가지? 몸도 그렇게나 작고 말랐는데.’

헉, 헉 산이 높아질수록 체력이 좋은 일카이도 거친 숨을 내뱉었다. 워낙 높은 산이라 올라갈수록 산소가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오두막이 보이자 일카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머리를 정리하고 땀을 닦은 뒤에 잠시 숨을 고르고 오두막 문을 열었다.

“아스펠라!”

“아, 일카이구나.”

이제는 그가 와도 아무렇지 않게 반기는 아스펠라다. 일카이는 바리바리 싸온 음식들을 아스펠라에게 안긴 뒤에 제 체구에 비해 조금 작은 나무 의자에 털썩 앉았다.

“며칠 전에 누나의 예전 동료들을 찾아갔어.”

일카이가 그렇게 말하며 튀니아의 지도를 펼쳤다. 커다란 산맥들과 작은 산들이 하나하나 다 그려진 지도였다.

“아저씨들도 다들 그놈을 찾아다니는 것 같더라고. 뭐, 그쪽도 아는 거 없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두 번째로 목격했다는 장소가 이 산이었어.”

“이 산은…….”

“응. 지금은 못 들어가.”

에르윈 대공이 남쪽 산맥의 신을 죽인 이후로 남쪽 산은 출입이 불가능해졌다. 신이 죽고 난 뒤에 원인을 알 수 없이 산의 동식물들이 죽어가기 때문이다.

그 안에 들어간 인간들도 모두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지금은 왕국에서 입산을 금지했다.

“저기, 일카이. 그 마수에 대해 아는 동물들이 거의 없는 거 같아.”

아스펠라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아스펠 산의 동물들은 다들 수명이 긴데도 그 마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

일카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쩌면 아스펠라를 만나 누이의 복수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역시 실패인 걸까.

‘일카이……커흑……! 기억해둬라. 사, 사냥꾼은……동물과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해……그 마, 마수……그 마수를 찾아……찾아서…….’

찾아서 분명 복수를 해달라고 한 거겠지. 그 말을 했을 때 누이의 눈은 억울하고 분통해 했으니까. 아무래도 그 유언은 들어주기가 불가능할 것 같다. 7년이 지나도록 그 마수의 털 한 올도 찾지 못했으니.

“그 검은 마수는 알 수 있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일카이가 물었다.

“응?”

“그 깜장인지 깜순이인지 그놈 말이야. 같은 종족 같아 보였잖아. 아니, 분명 같은 종족일 거야.”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내가 내일 그 저택에 가니까 깜장이한테 한번 물어볼게.”

“……내일이 대공 저택에 가는 날이야?”

“응.”

“그 에르윈 대공이 뭐 이상한 짓은 하지 않지?”

일카이가 걱정된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스펠라는 그 모습이 웃긴지 그의 미간에 검지를 대고 꾹 누르며 놀리듯 말했다.

“내가 내 몸 하나 못 지키겠니? 이상한 짓하는데 내가 얌전히 거기 가겠어? 으이구.”

“아, 내가 걱정해주는 거잖아.”

마치 저를 남동생 보듯 구는 아스펠라의 모습에 일카이가 눈을 흘기며 아스펠라의 손가락을 쳐냈다.

“귀족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고상한 척 하지만 뒤로는 온갖 더러운 짓 하는 게 그놈들이라고.”

일카이가 툴툴댔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공이 그렇게까지 앞뒤가 다른 사람 같지는 않아.”

“왜?”

“깜장이가 일단 따르는 걸 보면.”

“뭐어? 뭐 그런 기준이 다 있어?”

“동물들이 따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괜찮은 사람들이야.”

새침하게 말하는 아스펠라의 모습에 일카이가 코웃음 치며 놀렸다.

“자기 자랑이네, 결국.”

“이게 진짜.”

아스펠라가 일카이의 관자놀이에 주먹을 대고 굴리기 시작했다. 악! 완전 아파! 하며 일카이가 두 손을 잡았다.

“아씨! 손도 작은데 맵기는 더럽게 매워서…….”

자신의 손으로 다 감싸지는 아스펠라의 주먹이, 저를 올려다보는 아스펠라의 모습이, 왜인지 부끄러워져 일카이가 얼른 손을 놓고 헛기침을 했다.

“대공 앞에서도 이렇게 푼수같이 굴어? 응?”

“뭐래, 너랑 대공이랑 같니?”

아스펠라는 괜히 점잖은 척 하는 그가 웃겨 비웃었다.

“다를 건 또 뭐야. 신분만 빼고 솔직히 얼굴이나 체격이나 내가 부족한 거 있어?”

물론 그 신분이 대단히 차이가 났지만, 일카이의 외모 역시 튀니아의 여인들이 한눈에 반한 에르윈 대공의 미모에 견주어도 뒤처지지는 않았다. 제가 잘생긴 줄 알기에 일카이 역시 귀부인이나 영애들에게 잘 보여 영식들을 소개받는 거다.

“대단한 자신감이네. 보기 좋아.”

아스펠라는 익숙하게 그의 근거 있는 자신감에 응수했다.

마치 소에게 여물 주듯이 태연하게 반응을 던져주자 그건 또 그것대로 자존심이 상했다.

“아니 진짜 자세히 봐봐.”

아스펠라가 부엌이라 하기엔 매우 협소한 곳에서 냄비를 꺼내자, 그가 벽에 손을 짚으며 잘생긴 얼굴을 들이밀었다.

짧은 붉은 머리칼과 구릿빛 피부. 그리고 녹색 눈동자가 빛났다. 영애들 사이에서는 장미라는 애칭도 붙었단 말이다.

일카이는 날렵하게 각진 옆선을 선보이며 자세를 잡았고, 아스펠라는 주섬주섬 과도와 감자들을 꺼내 그에게 안겨주며 말했다.

“예, 예. 잘생기셨어요. 잘생긴 일카이 씨, 얌전히 앉아서 감자나 좀 깎으세요.”

작은 테이블에 수북이 쌓인 감자들을 올려 놓은 채 하나하나 껍질을 깎던 일카이는 뭔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댔다.

‘이상하다, 이게 아닌데……?’

다른 영애들은 다들 눈빛만 보내도 얼굴을 붉히며 자지러지던데? 덥지도 않은데 다들 부채질을 연신해대며 묘한 눈길을 보내던데? 다들 일카이 군, 장미 군, 흑설탕 군 사랑스럽게 불러주던데?

일카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스펠라가 저를 ‘지나가는 사냥꾼’ 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확신했다.

일카이가 열심히 깎은 감자는 그대로 감자수프가 되어 저녁 식탁에 올라갔다. 요리사는 아스펠라. 야심차게 새로 도전해봤다며 음식을 올려놓은 그녀의 표정은 매우 뿌듯했다.

“이게 감자수프라고……?”

“그래. 네가 사온 재료들을 좀 넣어봤어.”

감자수프라기에는 색깔이 매우 어두웠다. 일카이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댔다.

“먹어도 되는 거 맞지?”

“당연하지.”

“일단, 잘 먹을게.”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수프였지만, 일카이는 일단 스푼을 들어 두툼한 건더기와 함께 떠먹었다.

“…….”

“나름 먹을 만하지?”

일카이는 대답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에 한참을 물고 있다가 음식을 삼키니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동안 이런 거 먹은 거야?”

“응? 뭐 이상해?”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혼자 살아왔다니까 요리를 잘 할 줄 알았다. 아스펠라는 그런 일카이의 반응이 이상해 제 그릇의 스프를 떠먹었다.

“맛만 있구만.”

“저기, 누나. 다음부터는 내가 요리할게.”

조금 충격적이기는 했으나, 일카이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아, 앞으로 저녁 식사는 매일 만들어줘야겠군.

“그런데, 대공의 집에 초대받아서 만찬도 안 먹은 거야?”

“먹었는데, 왜?”

“그럼 왜…….”

왜 이 음식의 문제점을 모르는 건데? 일카이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스펠라가 스프 그릇을 싹 비우는 동안 일카이는 깨작깨작 먹었다. 아스펠라와의 저녁 식사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왜 이제야 이 집에서 저녁 먹을 생각을 한 건지, 그는 조금 후회했다.

결국 배탈이 난 일카이가 앓았다. 창백해진 그를 보면서 아스펠라가 물었다.

“뭘 먹었다고 이렇게 탈이 난 거야, 대체? 오면서 뭐 먹었어?”

일카이는 차마 그 원인이 그녀의 수프라고는 말 못 했다.

“그, 글쎄…….”

“이상한 거 먹지 마.”

“으응…….”

“세상에, 식은땀 좀 봐. 너 내려 갈 수 있겠니?”

배가 아픈 와중에도 일카이의 잔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그럼 재워줄 거야?”

“그래. 자고 가.”

“진짜?”

“응. 침대에서 자.”

대범한 말을 한다. 일카이가 얼른 침대로 쏙 들어가 눕자, 아스펠라는 갑자기 문을 열더니 누군가를 불렀다. 그러자 갑자기 동물들이 우르르 들어온다. 침대위에 누워 있던 일카이가 화들짝 놀라 얼른 이불로 제 몸을 가렸다.

[뭐야, 이놈은? 요 며칠간 자주 찾아오더니 왜 아스펠라의 침대에 누워 있어? 응?]

너구리 영감이 아스펠라에게 물었다.

“뭘 잘못 먹었는지 체했대. 아픈 애를 그냥 보낼 순 없으니 재워주게. 같이 자자.”

[우와! 오랜만에 아스펠라랑 같이 잔다!]

새끼 사슴이 얼른 아스펠라에게 달려와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아스펠라는 익숙하게 구석으로 가더니 동물들 사이에 묻혀 포근하게 자리를 잡았다. 황당한 상황에 일카이가 물었다.

“아스펠라, 그러고 자려고?”

“응. 괜찮아. 침대보다 얘네가 더 따듯해. 이불 발로 차지 말고 자라, 배탈 나니까.”

아스펠라 옆에 서 있던 너구리 영감이 일카이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일카이는 어쩐지 자신을 매우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아 얌전히 이불을 덮었다.

‘이게 아닌데…….’

***

다음날 아침, 번쩍 눈을 뜬 일카이의 눈앞에 촉촉한 코가 킁킁대며 자리하고 있었다.

“으악!”

너구리 영감이었다.

[아스펠라. 이놈 일어났어. 남의 침대에서 잘도 처 자는구만. 어디 외간 남자가―]

“안색이 좋아졌네. 다행이다. 잘 잔 것 같네?”

“……어디 갈 준비하네?”

“어제 뭘 들은 거야. 오늘 대공 저택에 간다니깐.”

“아, 그렇지.”

일카이는 얼른 침대에서 내려가 이불을 개기 시작했다. 너구리 영감은 그가 알아들을 리 없을 텐데도 일카이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이봐, 자네는 예의를 모르나? 어찌 혼자 사는 여자의 집에서 자고 갈 생각을 해? 응? 하여튼 겉만 번지르르하게 생겨서는, 하여간 요즘 인간 수컷들은 능글맞기만 해서 문제야. 에르윈도 이놈도 다 똑같은 수작이지. 하나같이 생각하는 것들이―]

하지만 일카이에게는 일반적인 짐승의 울음소리로만 들렸다.

“너구리가 나한테 뭐라 말하는 것 같은데.”

일카이는 저를 보며 끼르륵 울어대는 너구리를 가리켰다. 아스펠라가 슬쩍 너구리 영감을 보더니 해석해줬다.

“네가 잘생겼대.”

[내가 언제! 아스펠라!]

“아, 진짜? 너구리한테도 통하는 미모인데 왜…….”

“됐고, 이제 갈 준비나 할래? 나도 조금 있다가 내려갈 거라―”

아스펠라가 대충 사과를 깎으며 말을 하려던 도중 누군가 오두막 문을 두드렸다.

[아, 그 병사 놈이다. 냄새가 딱 그놈이야. 왜, 그 대공 옆에 붙어 다니던 시종 말이야.]

너구리 영감이 코를 킁킁 움직이며 말했다. 문을 열자 영감의 말대로 칼리우스의 비서 펠킨이 서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스펠라 양!”

활짝 웃는 목소리의 남자는 아스펠라 뒤로 보이는 웬 남자의 모습에 식겁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갈무리 하고는 말을 이었다.

“대공 각하께서 편히 오시라고 마차를 보내셨습니다.”

“마차까지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대공 각하의 성의이십니다.”

성의고 나발이고, 자꾸 길을 만들어 놓으면 사람들이 위로 올라오려고 한단 말이다. 방긋 방긋 웃는 펠킨의 모습에 뭐라 할 수도 없어 아스펠라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려던 찰나였다.

“아, 댁들이 저기 길을 뚫었군요?”

“일카이!”

“얘는 그렇게 숲 훼손하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데.”

어느새 문가로 걸어 나온 일카이가 문설주에 팔을 올리며 씩 웃었다. 펠킨이 웃으며 말했다.

“이런,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아스펠라 양. 하지만 아스펠라 양을 빠르고, 안각하고, 신속히 모셔오라는 대공 각하의 말씀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스펠라는 얼른 일카이를 팔꿈치를 꾹꾹 누르며 뒤로 물러나라는 듯 신호를 보냈다. 일카이는 펠킨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아스펠라에게 작게 속삭였다.

“있잖아, 대공이 귀찮게 굴면 내가 약혼자라고 말해 버려.”

자신을 바라보는 펠킨의 눈을 보면 분명 당황한 눈치였다.

일카이는 그런 낌새를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다. 저렇게 다른 남자의 존재를 당황스러워 한다는 것은, 즉 대공이 아스펠라에게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고 있다는 것.

아스펠라는 일부러 펠킨 보라고 저한테 달라붙는 일카이의 옆구리를 콱 꼬집었다. 그러자 치명적인 척하던 일카이가 악!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아스펠라는 그러든 말든 차분히 펠킨에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나쁜 뜻으로 하신 일이 아니니까요. 다만 길을 낸 곳 외에는 건드리지 않으셨으면 해요. 앞으로.”

“네, 주의하겠습니다. 그럼, 가실까요?”

펠킨이 몸을 비키자 마차 앞에 서 있던 시종이 친절하게 마차 문을 열어줬다. 아스펠라는 마차 위에 올라타면서 일카이에게 까불지 말고 떠나라는 듯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다.

일카이는 상큼하게 무시한 채 손을 흔들며 말했다.

“다녀와, 아스펠라― 기다릴게―”

뒤이어 따라 탄 펠킨이 아스펠라와 눈을 마주치곤 다시 방긋 웃었다. 그리곤 천장을 툭툭 치자 마차가 빠르게 움직였다.

“저, 아스펠라 양.”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방긋방긋 웃고 있던 얼굴이 초조하게 바뀌었다.

“저분은 혹시 친동생?”

“아니요.”

“어떤……관계인지 묻는다면, 너무 실례겠죠? 네, 하하.”

어색하게 웃는 펠킨의 모습이 매우 곤란해 보인다. 아스펠라는 설마 아직도 대공이 그 청혼에 대해 포기하지 않은 건가 싶었다.

설마 그래서 곤란해 하는 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고민하던 아스펠라가 결국 일카이의 조언대로 말했다.

“약혼자예요.”

“네?!”

펠킨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아스펠라는 그게 그렇게까지 큰일인가 싶었다. 역시 그저 단순한 관심이 아니었다는 건가. 그래도 설마 대공씩이나 되는 인간이 약혼자까지 있는 여자에게 구애를 하진 않겠지 싶어 조금 더 일카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언, 언제부터…….”

“사실 등을 부상당했을 때 절 도와준 사냥꾼이었거든요. 어쩌다 보니 오두막도 수리해주고, 꽤 통하는 부분도 있고…….”

펠킨은 소매에서 하얀색 레이스 손수건을 꺼내더니 송글송글 땀이 맺힌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이런, 에르윈 대공 각하. 큰일입니다. 펠킨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

약 한 달 만에 다시 온 대공의 저택은 여전히 화려했다. 또한 이곳에만 오면 귀비 대우를 받는 것 역시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마차가 멈추자 대공 가문의 시종들이 쪼르르 달려와 마차 문을 열어주며 발판까지 대령했다.

펠킨이 먼저 내린 뒤 손을 내밀었다. 아스펠라는 그의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아스펠라 양, 도착했습니다.”

“대공 각하를 뵙고 깜장이를 만나야 하나요?”

“아니요. 대공 각하께서는 이미 가셨고, 후에 돌아오신 뒤에 잠시만 함께 지내다 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대공께서 오늘 하루는 저택에서 푹 쉬시다 저녁 때 부터 깜장이 님을 봐 달라 하셨습니다. 일단, 조금 늦었지만 아침 식사부터 하실까요?”

펠킨이 그렇게 말하며 아스펠라를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대단한 성찬이 그녀 앞에 펼쳐져 있었다.

펠킨은 아스펠라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그녀 뒤에 서 있었다.

“저기, 저한테 그리 신경써주시지 않아도 돼요. 이런 거 조금 불편한데다가, 또 괜히 비서님의 시간을 뺏는 것 같아서요.”

“아닙니다. 제 업무는 오늘 하루 아스펠라 양을 잘 모시는 것입니다.”

“그럼 비서님도 같이 드실래요?”

오는 길에 비서님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던 걸요, 할 수는 없어 아스펠라가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왠지 저 혼자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서요. 음식도 너무 많고.”

“아, 그래도 될까요?”

펠킨은 주저 않고 옆에 앉았다. 방구석에 서 있던 주방장이 얼른 그릇을 하나 더 가져왔다. 아침부터 아스펠라를 데리고 오느라 식사도 거르고 출발한지라 펠킨 역시 배가 고프긴 마찬가지였다. 펠킨이 맛있게 음식을 먹기 시작하자 아스펠라가 슬쩍 물었다.

“그런데, 대공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길래 또 매번 출장을 가시나요? 한 달에 한 번, 한 달 동안 가시는 거면, 이미 신들은 다 죽지 않았나요?”

에르윈 대공이 국왕에게 부여받은 임무는 오직 하나라고 들었다. 산신 토벌. 튀니아 왕국의 네 수호신들과 그들의 부하들까지 모조리 죽였으니 그가 할 일은 이제 놀고먹기뿐 아니었던가.

“아, 그것이…….”

펠킨은 뭐라고 둘러대야 할 지 얼른 머리를 굴려댔다.

“설마 산들을 깎아내고―”

“예? 아, 아니 그것은 아니고요.”

아스펠라의 경악하는 얼굴에 펠킨도 덩달아 경악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대공 각하께서 아스펠라 양의 눈에 들려고 얼마나 애를 쓰시는데요! 하지만 차마 그렇게는 말하지 못했다.

마수로 변하기 전 칼리우스가 한참 동안 주저하다 말했다.

‘펠킨. 자네가 잘 좀 말해.’

‘네? 뭐를요?’

‘뭐냐니, 아스펠라 말이야.’

날 완전히 자연을 파괴하는 파렴치한 쓰레기로 보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대공의 말에 펠킨은 그치만 각하, 아스펠라 양의 입장에선 자연을 파괴하는 파렴치한 쓰레기가 백번 맞는 걸요. 라고 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아마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펠킨은 그동안 그를 모셔온 세월 중에 그가 그렇게 곤란해 하는 것을 처음 봤다. 맨 처음 저주 때문에 개로 변했을 때도 돌아온 그의 표정은 무감각했다.

‘정말로 저주에 걸렸군.’

그게 다가 아니었던가. 갈수록 고통이 심해질 저주인데도 매번 아무렇지 않은 듯 굴더니, 고작 아스펠라의 냉담한 말투에 그런 말을 할 줄이야.

아닌 척하면서도 엄청나게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펠킨의 눈에는 보였다.

얼마나 오래 그를 보좌했는데.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그런데, 약혼자가 있을 줄이야…….’

예상치 못한 전개에 펠킨이 한껏 당황했다. 이미 칼리우스는 짐승으로 변해 펠킨과 대화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빨리 인간으로 돌아오셔야 할 텐데…….’

펠킨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비서님?”

“네? 아, 그것이 대공님께서는, 그…… 빈민촌을 구제하기 위해 커다란 시설을 만들고 계시거든요!”

“에르윈 대공께서요?”

“네. 그렇습니다. 원래도 백성들의 복지에 굉장히 큰 관심을 가지신 분이세요.”

아주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칼리우스는 실제로 기근이 발생하고 있는 지역에 작은 기관들을 설립해 그들을 도와 집을 재건하거나, 구휼할 음식을 나눠주는 일들을 하고 있으니까. 국왕 역시 그런 칼리우스의 행동들을 제재하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귀족들의 귀감이 되었다고 칭찬하기 바빴다.

“그렇군요.”

펠킨은 얼른 아스펠라의 표정을 살폈다. 어디, 그에 대한 평판이 조금은 나아졌을까? 여전히 아스펠라의 표정은 무관심 그 자체였다.

“아스펠라 양, 그 약혼자분이 대단히 미남이시더군요.”

“본인도 알고 있는 거 같더라고요.”

아스펠라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아까 아는 동생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연하가 취향이신…….”

“음, 네. 뭐.”

“아아, 연하. 연하가 취향이시구나…… 연상은……?”

누가 봐도 속이 보이는 질문에 아스펠라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비서님. 계속 신경써주시는 거 같은데 전 대공님과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중간 다리 역할을 하시느라 많이 고생하시는 거 같아서 이번 기회에 확실히 말해드릴게요.”

“네?”

“제가 확고하게 대답을 드렸는데도 대공님께서 뭔가를 바라시는 것이 있으니 비서님이 제게 이러는 거 아닌가요?”

아스펠라의 말에 펠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비단 칼리우스만이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내심 펠킨도 바라는 일이었다.

무릇 모든 동화에서 저주를 푸는 방법은 진실 된 사랑의 키스를 받는 것 아니던가. 펠킨은 이 저주의 해방은 진심으로 그를 사랑해주는 여인의 키스를 받는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물론 칼리우스는 펠킨의 말에 이렇게 반응했다지.

‘개로 변하는 것은 나인데, 왜 네가 개소리를 하고 있어?’

완전히 질린 표정으로 말이다.

갑자기 목이 타들어간 펠킨이 앞에 놓인 와인을 들이키려던 참이었다.

“대공님께 이리 전해주세요, 차라리 깜장이와 결혼하면 결혼했지, 대공 각하와 결혼할 생각은 없다고요.”

“푸흡! 콜록! 콜록……케흑…….”

“비서님! 괜찮으세요?”

펠킨의 입에서 와인이 분수처럼 쏟아졌다. 아스펠라가 벌떡 일어나 얼른 냅킨을 그에게 건넸다.

“감, 감사합니다. 아스펠라 양. 그런데 지금 뭐라고……?”

“네?”

“까, 깜장이 님과 결혼은 왜…….”

“뭐, 그만큼 확고하다는 뜻인 거죠. 실제로 친하지도 않은 대공 각하보다 깜장이가 더 감정적인 교류가 쉬우니까요. 아, 이렇게 말씀드리면 너무 무례한 말일까요? 전 각하를 비하하려는 뜻이 아니라…….”

“아니, 아닙니다. 아스펠라 양이 뭘 말하는지는 저도 알겠어요. 어, 음……그러면 저도 그리 잘 전해보겠습니다.”

그의 말에 아스펠라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진심으로 펠킨이 칼리우스와 자신의 사이에 끼어 하고 싶지도 않은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에서 벗어나길 빌었다.

“아마 이 정도면 대공 각하께서도 더 이상 비서님께 무리한 부탁을 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 깜장이가 에르윈 대공 각하이십니다, 아스펠라 양…….’

펠킨이 속으로 울었다. 제 주군이 사람으로 돌아오면 이 이야기들을 고대로 들려줘야 하는 것이 그의 업무인데 어쩜 하나같이 죄다 가망 없는 이야기들뿐이니, 그는 앞으로 칼리우스의 앞길이 매우 매우 고생길이 훤하다는 걸 직감했다.

***

아스펠라는 아침 식사를 끝내고 펠킨과 함께 에르윈 저택의 거대한 도서관을 둘러보게 되었다. 하늘이 곧장 보이는 유리 천장 아래까지 바로 오는 기다란 책꽂이들, 그리고 그 안에 가득찬 수백만 권의 책들에 아스펠라는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리며 감탄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책들이―”

“대공 각하께서 책을 좋아하셔서요. 아마 튀니아에서도 보기 힘든 고서들도 있을 겁니다. 왕궁 도서관과 비등할 정도로 다양한 책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와아…….”

“대공 각하께서는 아스펠라 양이 이곳을 마음껏 이용하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진짜요?”

“네.”

귀족들 중에 도서관을 보유한 이들은 대부분 자신이 이렇게 학문에 조예가 깊다, 자랑하기 위한 용도로 쓰인다고 들었다.

아마 일카이가 그리 말했던가. 자신이 가르치던 영식은 그렇게나 제 저택의 도서관을 자랑하며 허세를 부리더니 막상 책 내용에 대해서나 고서 종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도서관을 찬찬히 둘러본 아스펠라는 칼리우스가 그런 용도로 책을 모은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책을 꺼내 책장을 팔랑댔다. 현재 튀니아에서 통용되는 알파벳은 기초밖에 몰랐다. 비르가는 아스펠라에게 고대 언어를 가르쳐줬어도, 알파벳을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자신 말고 다른 누군가에게 배울 것이니, 굳이 지금 배울 필요는 없을 거라던 알 수 없는 말만 할 뿐이었다.

아주 기초적인 알파벳만 읽을 줄 아는 터라, 귀족들이 쓰는 단어의 뜻은 당연히 알지 못했다. 온통 꼬부랑대는 글씨들뿐이니, 아스펠라는 얼른 책을 덮은 뒤 다시 책꽂이에 집어넣었다.

그러다 책꽂이 아래에 위치한 먼지 뽀얗게 쌓인 두꺼운 책들을 발견했다.

“어머, 이런 책들도 있네.”

아스펠라는 사어나 다름없는 고대 언어로 씌여진 서적을 펼치며 신기한 듯 책장을 팔랑댔다. 고대 언어로 쓰인 책들은 워낙 구하기 힘들었다.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했던 아스펠라는 항상 이야기를 들려주던 비르가 죽은 뒤, 시장에 내려갈 때마다 서점에 들르곤 했었다.

귀족들이 사용하는 서점과는 달리 평민들이 이용하는 작은 서점은 양장본이 아닌 간책처럼 실로 종이다발을 묶은 형식이었으나 상관없었다.

아스펠라는 그저 이야기를 보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백성들 중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인지라 간책에는 글씨보다는 그림이 더 많았다. 아스펠라는 그런 간책의 그림들을 보며 혼자 이야기를 상상해나가곤 했다.

고대 언어로 쓰인 책은 수집하기를 좋아하는 귀족들이 죄 사들이거나, 혹은 암시장에서 은밀하게 거래되는 것들뿐. 이곳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쓰인 책을 발견하니 기쁠 뿐이었다.

아스펠라가 신난 얼굴로 책장을 휙휙 넘기자, 펠킨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스펠라 양이 좋아하실 것 같았습니다.”

“네?”

“아스펠라 양은 고대신화와 약초학에 관심이 많다고 대공 각하께서―”

아스펠라가 고개를 갸웃댔다. 대공한테 그런 말은 한 적 없다. 깜장이라면 이것저것 얘기하면서 말했겠지만. 펠킨 역시 얼른 눈치를 보며 말을 고쳤다.

“…….”

“대공 각하께서, 그리 예측하셨습니다.”

“그러신가요?”

“아마도 아스펠 산에 사시다 보니 누구나 예측할 수 있긴 하겠네요, 하하하!”

“아아, 그렇겠네요.”

펠킨이 얼른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칼리우스는 깜장이었을 때 들었던 아스펠라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지만, 에르윈 대공으로서는 몰라야 하는 것들이 정상이었다.

‘다음부터는 대공 각하께 너무 다 준비해놓지 말아야겠다고 말씀드려야지. 나 원…….’

***

아스펠라가 올 때마다 이 저택은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둔다.

꽃을 좋아한다는 그녀를 위해 매번 싱싱한 꽃들을 골라 매일 매일 바꿔주고, 베이지색 계열을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고급스러우면서도 부담스럽게 화려하지 않은 드레스와 신발들을. 나뭇가지로 머리를 틀어 올리는 걸 보고선 이국에서 사온 예쁜 비녀까지.

보다 못한 펠킨이 한마디 했다.

‘아니, 산속에서 살 여인한테 이런 걸 사줘봤자지요. 저번에도 보셨잖아요. 결국엔 다 팔아넘기시는 거.’

‘그냥 돈으로 주는 것 보다는 이게 더 성의 있어 보이잖나. 팔든 가지든 상관없어.’

아주 대단한 사랑꾼 납셨네.

표정은 매일 태연한 척 하면서도 물건 하나하나 고르는 손길이 섬세하고 표정이 진중했다.

‘그렇게 아스펠라 양이 좋으세요?’

‘좋기는 무슨……감사 표시지.’

감사 표시는 무슨…….

역시 제 주군은 감정 표현에 한참 서툴다. 그건 아마 한창 사랑받아야 할 나이에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이겠지.

누군가에게 사랑을 준다는 것이 고통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는 걸 너무 잘 알아버려서.

“저, 아스펠라 양.”

“네?”

“대공 각하께서 산신 토벌작전을 강행하시긴 했고, 또 그로 인해 산의 수호신들이 죽긴 했지만……물론 아스펠라 양께서는 이해 못하실 수도 있겠지만, 대공 각하께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도서관을 빙 둘러보며 책꽂이의 책을 이것저것 살펴보던 아스펠라에게 펠킨이 말했다. 아스펠라는 그런 펠킨을 가만히 쳐다봤다. 펠킨은 계속 말을 이었다.

“아스펠라 양께서는 자연을 소중히 여기시고, 산을 아끼시는 분이시니 대공 각하를 원망하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대공 각하가 그렇게 무자비한 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네. 이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대공 각하에 대해 그리 말하더군요. 다들 대공 각하는 좋으신 분이라고. 시종들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실제로 에르윈 대공 각하께서 제 사람들을 잘 보살핀다는 소리겠죠.”

“…….”

“어느 한 면만 존재하는 건 아니니까요.”

아스펠라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결혼은 싫어요.”

“에이.”

펠킨이 아쉽다는 듯 일부러 장난스럽게 한탄했다. 아스펠라는 펠킨이 대공에 대한 말을 늘어놓은 것이 정말로 자신과 그를 결혼시키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건 단순히 아첨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아마 대공은 정말로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비르가를 비롯해 모든 신들을 죽인 게 없어지지는 않지만.

***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다 점심 식사를 하고, 펠킨과 함께 저택의 산책을 하다 저녁 식사를 한 뒤에서야 아스펠라는 깜장이가 있을 지하로 내려갈 수 있었다.

여전히 두꺼운 돌벽과, 잔뜩 긴장한 채 들어가는 펠킨의 모습에 아스펠라가 말했다.

“비서님, 깜장이가 원래 난폭한가요? 저는 그런 걸 못 느끼겠어서요.”

“아아, 그것이……원래 난폭합니다. 매우요. 그런데 아스펠라 양만 나타나면 아주 얌전해지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지요.”

“그 정도예요?”

“네. 저도 못 알아보면서 아스펠라 양은 기가 막히게 알아보더라고요.”

씁쓸하게 웃으며 말하는 펠킨은 갑자기 울컥했는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같이 지낸 게 몇 년인데 아무리 그래도 기억 좀 해주지…….”

어렸을 때부터 알았던 시간이랑, 8년 동안 비서로서 보좌한 시간을 다 합치면 거의 10년 지기 아닌가? 펠킨은 어쩜 그런 자신보다 딱 한번 눈 마주친 여자에게 이성을 되찾는 제 주군이 야속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했다.

“그럼,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참. 잠은 무조건 저택의 방에서 주무셔야합니다.”

왜냐면 칼리우스가 무조건 그리 시키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네. 내일부터는 아침에 산책을 할 수 있을까요?”

“산책이요?!”

“네. 사람들 눈에는 안 띄게 할게요. 많이 갑갑해 할 것 같아서요.”

“음……네, 대공께서 허락하셨다면야.”

아스펠라는 마수가 있을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붉은 눈을 빛내며 그르렁대던 마수가 아스펠라를 보자마자 얌전해졌다. 펠킨은 이 광경을 볼 때마다 매번 놀라웠다.

“오랜만이야, 깜장아.”

펠킨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아스펠라는 그에게 팔을 벌리며 껴안았다. 윤기 나는 주둥이의 검은 터럭들을 슬슬 쓸자 이내 요요하게 빛내던 눈을 꼭 감고는 기분 좋은 듯 갸르릉 댔다.

“잘 지냈어? 응?”

한층 다정해진 목소리로 아스펠라가 그의 턱을 긁어주며 물었다.

[너무 미물 취급하는 것 같은데, 아스펠라.]

“미물 취급이라니, 귀여워하는 거에 덩치가 무슨 상관이야.”

아스펠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마수, 즉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의 손을 핥았다. 이건 딱히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정말 행동 하나 하나가 개의 본능 충실히 따라갈 뿐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뭔가를 죽이고 피를 보고 싶어 안달났었다. 매우 분노했고, 매우 몸이 아팠다. 그런데 아스펠라를 보자마자 그런 것들이 씻은 듯 사라졌다.

펠킨은 물론 저 앞을 지키는 병사들도 오금을 저리게 할 마수는 아스펠라 앞에선 아주 순한 양, 아니. 개가 되어 있었다.

[펠킨이 네게 잘 대접해 줬나?]

“응. 배 터지도록 먹고, 여기저기 산책도 하고. 도서관도 가고.”

[도서관. 마음에 들어?]

“엄청 좋았어.”

[어떻게?]

“일단 매우 넓고, 온갖 종류의 책들이 다 있더라고. 내가 매일 읽어주던 책 있지? 그런 책들이 수백, 수천 권은 있는 곳이야.”

아스펠라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이곳에만 갇혀 있을 마수에게 이것저것 얘기해줬다. 뭘 먹었고, 뭘 봤는지. 책이 무엇이고 나이프가 뭐고 포크는 또 뭔지.

칼리우스가 그걸 모를 리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잠자코 아스펠라의 이야기를 들으며 평화로움을 느꼈다.

“너무 나 혼자 떠들었나?”

[아니. 계속해. 네 목소리가 듣기 좋으니까.]

작은 입술로 오물오물 할 말이 그렇게도 많을까. 펠킨의 조잘대는 소리는 듣기 싫어 귀를 막는 칼리우스였는데 지금은 자장가 같다.

[아스펠라.]

“응?”

[역시 너와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나도. 있잖아, 비서님한테 얘기 들었어. 다른 사람들한테는 난폭하게 군다면서. 그건 그 사람들이 널 공격할까봐 경계하느라 그런 거야, 아니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분노만이 가득차서 정신차려 보면 뭐든 파괴하고 있어. 그런데 신기하게도 너만 보면 그런 마음들이 가라앉아. 왜 그러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무슨 존재인 건지 잘 모르겠어.]

그의 말에 아스펠라는 혹여나 그가 부정신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부정신들은 존재 자체가 ‘분노’로 이루어져 있어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신 아니던가. 하지만 부정신이라면 손에 닿는 모든 것들을 죽게 만든다. 그러나 아스펠라는 멀쩡했다.

[난 부정신이 되어 가는 거야. 그래. 나중에 너까지 알아보지 못하는 날이 오면 난―]

칼리우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부정신의 말로는 처참하다. 결국 그 분노는 본인까지 삼켜버려 스스로 썩어버린다.

그러자 아스펠라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아니. 넌 부정신이 아니야. 부정신이었다면 나도 이미 죽었을 걸? 부정신이 될 일도 없어.”

[그걸 네가 어찌 알아.]

“부정신이 되려면 가장 소중한 것들도 버려야하거든.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들이 부정신이 되는 거야. 그러니까 깜장아. 넌 널 부정하지 마.”

아스펠라는 그렇게 말하며 그를 껴안아줬다.

칼리우스는 그런 아스펠라의 말에 한참 동안 침묵을 하다 다소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칼리우스 에르윈은, 여전히 별로인가?]

“으응? 갑자기 그건 왜?”

[……그냥.]

차마 본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분명 아스펠라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이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 확실했다.

아스펠라는 콧바람을 내쉬며 말했다.

“흐음……글쎄. 사람 평판은 좋지만, 난데없이 청혼하는 건 조금 별로였어. 마치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거 같아서.”

[운명적인 사랑이라도 기대하는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그 남자가 비르가를 죽였다는 걸 용서할 수 없어.”

[그래…….]

“너무 속상해하지는 마. 그래도 주변 평판이 아주 좋은 걸 보면 적어도 그는 인간들에게만은 친절하다는 거니까. 나 말고 다른 여자가 더 잘 어울리겠지.”

[그건 아닐 거야.]

칼리우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스펠라는 깜장이가 콧방귀 뀌며 말하는 것이 웃긴지 풉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 일이 생각났는지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참, 오늘 아침 식사 때 비서님한테 내가 대공 각하와 결혼하느니 너와 결혼하겠다고 전해달라 했거든? 그러니까 비서님이 와인을 마시다가 뿜으시더라고.”

[……펠킨이 고생이 많네.]

한껏 당황했을 펠킨을 상상하니 칼리우스는 조금 미안해졌다.

“대공이 엄청 눈치를 준 건지, 되게 눈에 보일 정도로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라고.”

[그래? 대공이 널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은데. 그 정도로 비서한테 이것저것 시킨 걸 보면.]

“내 생각에는 널 다룰 수 있는 것 때문에 흥미를 가질 뿐, 보면 딱히 결혼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다가 진심도 없어 보였어.”

[에르윈이 의외로 진심일 수도 있잖아. 너한테.]

“에이. 나한테? 나에 대해 뭘 얼마나 안다고.”

[……많이 알 수도 있지.]

“그럴 리가. 아무리 너에게 내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해도 네가 날 더 잘 알 거야. 그리고 단지 안다는 것만으로 청혼을 하는 게 어떻게 진심이 되니?”

단호한 아스펠라의 말에는 틀린 것 하나 없었다. 칼리우스는 답답한 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입에서는 낑낑대는 소리만 나왔다.

[그가 가벼운 마음으로 말을 꺼낸 건 아닐 거야. 그럴 성격이 아니니까. 어쩌면 널 보고 한눈에 반했을지도 모르지.]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를 변호해야 하는데, 자신이 칼리우스임을 들키지 않아야 한다니. 그 모양새가 웃겨 자괴감이 들었다.

“아하하하! 한눈에 반하다니. 나한테?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대공이 오두막을 찾아온 날 그때 어떤 내가 몰골이었는지 네가 봤어야 해.”

[예쁘기만 하던데 무슨.]

“응?”

[……그렇다고 말하더라고.]

“대공이? 눈이 이상한 거 아닐까? 귀족들 중에 깔끔하고 예쁜 영애들이 얼마나 많겠어.”

[적어도 내 눈엔 네가 제일 예뻐.]

“귀엽게 굴기는.”

[귀엽다니……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사람, 짐승한테.]

말실수를 할 뻔한 칼리우스가 재빨리 말을 바꿨다. 다행히 아스펠라는 못 들은 건지 칭찬받아 기쁜 듯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런 말 들으니 기분은 좋다.”

[아첨 아니야.]

“네 눈에 예쁘게 보인다니 기분 좋네.”

아스펠라가 예쁘게 눈을 휘며 말했다. 사실 누구의 눈에 예쁘게 보이고 말고는 신경 쓰는 편이 아니었다. 예쁘게 보일 거란 기대도 안했고, 그리 보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대공이 예쁘게 봐준들 그에게 마음이 없어 별 감흥도 없었다.

하지만 깜장이가 그리 말해주니 진심으로 기분 좋은 듯 아스펠라가 활짝 미소 지었다.

그럴수록 깜장이로 불리는 칼리우스의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이러다가는 다른 의미로 진짜 까맣게 변할 것 같다.

아스펠라는 가만히 무릎을 모아 그 위에 턱을 괴곤 그를 쳐다봤다.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꿈뻑이며 자신을 쳐다본다.

순간 일카이의 말이 생각났다.

‘그 깜장인지 깜순이인지 그놈 말이야. 같은 종족 같아 보였잖아. 아니, 분명 같은 종족일 거야.’

일카이의 누이 사라을 죽인 그의 원수.

“깜장아.”

[왜.]

“혹시, 너 말고도 같은 종족이 또 있니?”

[……나와 같은 종족?]

“응. 너보다 덩치는 더 크고, 애꾸눈인……그런 애를 본 적이 있니?”

칼리우스가 가만히 생각했다. 그보다 더 덩치가 크고 애꾸눈인, 같은 종족이라.

[글쎄. 본 적은 없어.]

“그렇구나.”

[그런 애는 왜 찾는 거지?]

“아는 사람이 애타게 찾아다녀서.”

[애타게 찾아 복수를 하려는 거군. 맞지?]

아스펠라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우스는 붉은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나도 그렇게 찾는 인간이 있겠지.]

“깜장아.”

[무섭다.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보다, 내가 누군가의 소중한 이를 해쳤다는 걸 알게 될까봐. 뭐, 이미 해쳤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이미 너무 많은 죄를 저질렀다. 미안하다는 말조차 꺼낼 수 없을 만큼 미안했다. 함부로 사죄할 수 없을 정도로. 비르가는 이런 걸 원했던 걸까. 칼리우스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될 줄 알고, 이런 저주를 내린 걸까.’

그렇다면 신이 원하는 대로 되었다.

***

깜장이와 지내는 한 달은 아스펠라에게 매우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펠킨의 동행과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장소, 해가 질 무렵의 시간대가 필수 조건이었지만, 아스펠라와 깜장이 속의 칼리우스는 함께 산책도 했고, 아무도 오지 못할 들판에서 원반도 던지며 놀았다.

“완전히 개의 모습에 적응하셨어…….”

펠킨은 신나서 원반을 물고 오는 집채만 한 칼리우스를 멀리서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저주의 끝이 부정신이 된다는 것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이대로 개의 모습으로 평생 아스펠라 양과 사셔도 나쁘지 않을…… 헛, 미쳤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죄송합니다, 대공 각하, 이 불충한 비서를 부디 용서하세요!’

펠킨이 얼른 고개를 내저으며 알 리 없는 칼리우스에게 사죄를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에 행복감을 느끼는 것보다는, 또 다시 짐승이 될 때까지 마치 정해진 시간이 한정된 모래시계 같은 인생을 사는 것이 힘들 뿐이다.

유일한 안식처는 오로지 아스펠라뿐.

잔뜩 지쳐서 인간의 몸으로 돌아온 칼리우스가 펠킨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화려하고 향기로운 꽃들로 꾸며진 아스펠라의 방과는 달리 매우 어둡고 차가웠다. 저택 주인의 방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이었다.

침대에 누운 칼리우스가 아직도 힘겨운 듯 숨을 몰아쉬었다.

점점 변신하는 것이 더 힘들고 고통스러워진다.

여기서 더 고통스러워질 수 있을까, 생각하면 항상 그 상상을 뛰어넘는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의사라도 불러올까요?”

펠킨의 안부는 이제 필수가 되었다.

“의사를 부른다고 나을 것이 아니잖아. 아스펠라가 지하에 내려오지 않도록 잘 말해뒀겠지. 핏물도 다 닦고?”

“네, 하지만 각하, 언제쯤 말씀하시려고요? 만일 각하의 예상대로 아스펠라 양이 그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자연의 딸이라면―”

“그만. 그만 말해라. 펠킨.”

“각하……!”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칼리우스는 자신이 깜장이이며, 깜장이가 자신이라는 것을 아스펠라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점점 더 고통이 심해지시는 것 같아요.”

“알아.”

“단순히 비서로서가 아니라 10년 지기 친구로서 말하는 겁니다, 칼리우스 님!”

“펠킨. 쉬고 싶어. 방까지 부축해준 건 고맙군. 이만 나가보도록 해.”

그의 말에 펠킨은 더 이상 닦달할 수 없었다. 그의 상황을 잘 아니 재촉해봤자 기름에 불 붓는 격이었다. 누구보다 저주에서 풀려나고 싶은 사람은 그일 테니 말이다.

“……푹 쉬십시오, 대공 각하.”

펠킨이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나갔다.

칼리우스 역시 자신을 걱정해주는 펠킨을 그리 보내 마음에 걸리는 듯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몸을 고쳐 누웠다. 창문 가득히 비치는 달빛이 시려워 겨우 몸을 일으킨 그가 커튼을 치려고 할 때였다.

“아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소리가 저택 안에 들렸다.

칼리우스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스펠라라는 걸 단번에 알았다. 목소리가 저택 안에 울려 퍼졌을 때부터, 칼리우스는 그녀의 방 쪽을 향해 뛰고 있었다.

***

아스펠라는 이상한 꿈을 꿨다. 으슥한 밤, 하염없이 그녀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오는 어떤 이가 나오는 꿈이었다. 아주 멀리서부터 걸어오던 사람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 달빛이 환하게 지상을 비추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긴 망토로 온몸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일 거다.

‘누구지?’

궁금했던 그녀는 망토 속의 얼굴을 보려 노력했지만 몸이 무거워 꼼짝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망토를 쓴 이는 마침내 발걸음을 멈췄다. 아스펠라의 코앞에 왔지만 그녀는 여전히 망토 속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누구세요?’

아스펠라가 물어보려 했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망토를 쓴 이가 고개를 들었다. 눈까지 모두 가렸지만 환하게 웃는 입은 보였다. 비릿하게 미소 짓던 망토 쓴 이가 손을 들어 올렸다. 팔에는 온통 알 수 없는 문양들이 그려져 있었고 들어 올린 손에는 단도가 들려 있었다.

‘문신? 아니면, 그림?’

아스펠라는 망토 쓴 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불안감이 그녀를 둘러쌌다. 저 이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하지 마! 하지 마요!’

‘나의 피가 불이 되어 모든 것을 태우리라! 대지는 불바다가 되어 씨앗조차 남기지 않고 생명들을 모조리 먹어버릴 거다. 숭고한 자여, 모든 것을 목격한 자여. 그대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분노뿐이다. 그 분노는 종말의 시작이니, 부정적인 것들아 일어나라. 지하에서 올라오라!’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단도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불이 일었다.

‘안 돼!’

커다란 불은 땅을 타고 위로, 위로 올라갔다. 거대한 산이 불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아스펠라는 가슴 속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아, 아아……안 돼! 안 돼!’

고통스러운 비명이 그녀의 목을 타고 나왔다.

“아아아아아악! 안 돼! 안 돼! 아악!”

“아스펠라! 아스펠라!”

“아아악!”

아스펠라는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었다. 정갈했던 파자마가 이리저리 구겨져 단추고 리본이고 죄다 풀려져 있었다.

“아스펠라, 정신 차려!”

“아으윽! 놔, 놔!”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어떻게 꿈일까. 아스펠라는 자신을 잡는 이가 망토를 쓴 이라 생각해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러자 누군가 강하게 그녀를 껴안았다. 아스펠라는 고통스러워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아스펠라, 나야! 정신 차려!”

가물가물 감기는 눈 사이로 검은 털이 눈에 들어왔다.

‘깜장이? 아니지. 깜장이일 리가 없지……에르윈 대공……?’

금색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 칼리우스는 다시 한 번 아스펠라를 불렀다. 그녀의 눈이 점점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스펠라! 펠킨! 얼른 가서 의사를 데려와!”

“으윽……산, 산―”

“뭐라고? 산?”

“산이……아스펠 산이, 불타고 있…….”

칼리우스가 그 말에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붉은 화염과 함께 회색 연기가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아스펠 산이 불타고 있었다.

아스펠라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칼리우스는 힘없이 쓰러진 아스펠라를 품에 안았다. 아스펠라의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축 늘어진 그녀를 안은 칼리우스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대공 각하! 의사를 데려왔습니다! 아스펠라 양은…….”

저택 끝 방에 머물던 주치의를 데려온 펠킨은 잔뜩 두려움에 떠는 칼리우스를 발견했다.

그의 품에 쓰러진 아스펠라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다.

***

펠킨은, 살면서 이렇게까지 당황스러워 하는 칼리우스를 난생 처음 봤다. 쓰러진 아스펠라 만큼이나 창백한 얼굴로 제 품안의 작은 여자를 어찌할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산신들을 잡아 죽이며 온몸에 피 칠갑을 하던 그 남자와 동일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 할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홉 살,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이후로는 없지 않았나.

그 어떤 끔찍한 전쟁터에 나가도, 그 어떤 잔혹한 산신 토벌 작전에서도, 그는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이가 아니었다. 두려워하는 것도 없었을 뿐더러, 에르윈 대공가의 주인인 만큼 약한 모습을 절대 보이고 싶지 않아했으니까.

설령 십여 년을 함께한 펠킨에게도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저 작고 마른 여자가 뭐라고 저렇게까지 두려워한단 말인가. 뭐 얼마나 오래 만난 사이라고 저 커다란 손끝을 잘게 떨면서 여자를 침대에 뉘인단 말인가.

주치의가 칼리우스의 닦달에 얼른 왕진 가방을 들고 아스펠라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온통 식은땀을 흘리는 아스펠라의 얼굴은 사정없이 일그러져 제 가슴께를 꽉 부여잡고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며 숨을 들이쉴 때마다 고통스러운 듯 아악! 단말마와 같은 비명을 질렀다.

칼리우스는 그 모습을 보며 잘게 떨리는 손끝으로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마른세수를 하기도 했으며 의사에게 대체 무슨 일이냐, 병명이 뭐냐, 발작인 거냐 등의 닦달 비슷한 질문을 해댔다.

의사는 수염이 죄 빠질 것 마냥 연신 제 수염을 쓸어내렸다.

“몸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각하.”

“그걸 지금 말이라고, 저리 고통스러워하는데!”

칼리우스가 버럭 화를 내자 의사는 주눅이 들었는지 억울한 듯 다시 한 번 아스펠라를 진찰했다. 정말이다. 몸에는 이상이 없다. 맥박도 정상이며 눈에 충혈도 없으며 이렇다 할 전염병에 감염된 것도 아닌 듯한데…….

이런 증상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무리 대공의 주치의라 한들 처음 보는 증상을 어찌 고친단 말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칼리우스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 한숨 내쉬는 소리가 어찌나 무서운지. 주치의는 결국 울먹였다.

펠킨이 주치의를 다독였고, 칼리우스는 고통스러워 낑낑 앓는 아스펠라를 쳐다보다 이내 다시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아스펠 산은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 칼리우스는 아까 전 산이 불타는 것을 보자마자 그곳으로 사람을 보냈다.

지금쯤이면 진화 작업이 한창일 것이다. 동이 터오를 때쯤 되자 붉은 화염은 어느새 사그라들었고 대신 검은 연기가 떠오르는 태양을 죄 가려버렸다.

그리고 그때쯤 아스펠라가 눈을 떴다.

폐부를 찌르는 듯한 고통과 함께 숨을 쉬기 어려웠고 몸이 타들어가는 듯 고통스러웠다. 비명소리들이 잔뜩 들려왔다. 살려 달라 말하는 그것들은 아스펠 산의 나무들과 동물들이었다. 그들은 아스펠라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죽어갔다.

“헉……!”

번쩍 눈을 떴다. 몸에서는 아직도 화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어젯밤 자신이 잠을 청했던 그 방이다.

몸뚱이를 겨우 들어올렸다. 이마에서 뭔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물에 젖은 축축한 타올이었다. 옆을 보니 칼리우스가 팔짱을 낀 채로 앉아 선잠을 자고 있었다. 정갈하던 그의 포에트 셔츠가 여기저기 구겨지고 단추가 두어 개 풀려 있었다. 소매는 걷어붙인 걸로 보아 수건에 물을 적셔 물기를 짜고 이마에 올려준 것은 그였던 걸까.

아스펠라가 가만히 칼리우스를 쳐다보다, 이내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멍하니 하늘 위로 번져가는 검은 연기를 쳐다봤다.

악몽도 그저 불안감으로 인한 나쁜 상상도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아스펠 산은 불탄 거다. 에르윈 대공가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아스펠 산의 대부분이 새까맣게 타버렸다.

비명소리들이 아직도 귓전에 울리는 듯하다.

아스펠라는 허무하여 멍한 얼굴로 창밖만 쳐다봤다. 이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비르가와 함께 살던 그들의 집이 홀라당 타버렸다. 울타리처럼 그들을 지켜주던 나무들은 꺾이고 바스라졌으며 가족과도 같던 동물들은…….

“흐윽―”

이렇게나 무기력하고 무능할 때가 있을까. 아스펠라는 더 이상 아스펠 산을 쳐다볼 용기조차 없었다. 무릎을 접어 팔로 감싼 뒤 얼굴을 묻었다. 소리 내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분노이기도 했다. 누가 감히 아스펠 산에 그런 짓을.

그때 그녀의 고개가 들어올려졌다. 커다란 손이 아스펠라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잔뜩 충혈된 눈으로 제 머리통을 조심스레, 그러나 다급하게 들어올리는 이는 칼리우스였다.

“아스펠라.”

항상 보던 그와는 조금 달랐다. 굉장히 초조하고 불안해보였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스펠라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듯 집요하게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더니 아스펠라의 얼굴을 부여잡고는 물었다.

“어디 아파? 어디 아픈 건가? 어디가 아픈―”

“……아픈 곳은 없어요.”

작은 머리통이 한 손에 들어왔다. 얼굴은 이렇게 작으면서, 저를 올려다보는 눈은 왜 이리 큰 건지. 덕분에 얼마나 울었는지 가늠이 되었다.

칼리우스는 아차 싶어 얼른 그녀의 뺨에서 손을 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친 그의 손에 닿았던 말랑하고 부드러운 살이었다.

칼리우스는 괜히 제 손을 쳐다보다 이내 어색하게 괜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당신 어제 밤 내내 앓았습니다.”

아스펠라는 자신이 얼마나 아팠던 건지에 대해선 궁금치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을 향해 있었다.

“불은 모두 진화했으니 걱정 마세요.”

“……누가 불을 낸 거죠? 범인은 잡혔나요? 산은, 많이 탔겠죠……?”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칼리우스는 곤란한 듯 아스펠라를 쳐다보며 괜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산을 보러 가게 해주세요.”

칼리우스가 이를 허락할 리 없었다. 그 근처 일대 사람들도 위험해 출입을 금지시켰는데 거길 들여보내줄 리가. 칼리우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위험합니다.”

“거긴 제 집이에요.”

하지만 침대 매트리스에 무릎까지 꿇으며 부탁하는 아스펠라를 무시할 순 없었다. 분명 화재 현장에 가면 또 충격을 받고 울거나 기절하거나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 일수도 있을 텐데.

거길 들여보내준다니. 아직 잔불들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였다.

“아스펠라 양.”

“각하. 대공 각하. 제발 부탁드립니다.”

결국 칼리우스가 지고 말았다. 별 수 없었다. 저런 얼굴로, 저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애원하는 이를 제가 감히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작게 문을 두드리고 펠킨이 들어왔다.

정작 자신이 모시는 대공 각하는 잔뜩 피곤한 모습이었는데 펠킨은 깔끔한 상태였다. 방으로 들어오던 펠킨이 두 사람의 몰골을 보고 흠칫 놀랐다.

아스펠라는 눈이 벌겋게 부어 침대 매트리스 위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고 있었고, 대공은 난생 처음 보는 흐트러진 모습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스펠라 양! 눈을 뜨셨군요! 어디 아프시진 않고요?!”

어젯밤의 사달을 잊지 못하는 터라, 펠킨이 얼른 가서 주치의를 데려오겠다며 다시 방을 나가려했다.

“그럴 필요 없다, 펠킨. 나갈 채비를 해라.”

“예?”

“아스펠 산으로 갈 거다.”

그러자 아스펠라가 갸륵한 눈으로 대공을 쳐다봤다. 의도한 눈빛은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대공 각하!”

하지만 칼리우스는 어쩐지 자신이 휘둘려도 한참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부분에 있어선 펠킨도 동의할 것이다.

***

가는 동안 아스펠라는 말이 없었다. 칼리우스는 제 옷자락만 꽉 쥔 채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상태가 좋지 않은 듯한데, 그냥 돌아갑시다.”

“안 돼요. 꼭 봐야 해요.”

그제야 아스펠라가 고개를 들어 올려 칼리우스를 쳐다봤다. 애처로운 눈빛과 눈이 마주치자 칼리우스가 가만히 마른세수를 했다. 오늘따라 세수를 참 많이 하시네. 옆에 앉은 펠킨이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스펠라 양. 혹시라도 몸이 좋지 않으시면 바로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각하께서 어제 밤 내내― 악!”

펠킨이 제 발등을 부여잡았다. 어찌나 세게 밟으시던지, 발등이 으스러진 듯하다. 펠킨이 칼리우스를 쳐다봤다. 칼리우스는 시침 뚝 떼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이런 걸로 자신이 다정하고 그대를 아낀다는 걸 알려줘야지, 왜 숨기고만 있는 거야.

펠킨이 슬쩍 칼리우스를 흘겨봤다. 그러더니 이내 흠흠, 헛기침을 하며 다시 아스펠라에게 물었다.

“아스펠라 양, 혹시 지병이라도 앓고 계십니까?”

“아뇨.”

“그런데 어제의 발작은, 너무나도 당황스러웠습니다. 주치의도 원인을 도통 모르겠다던데.”

그러자 아스펠라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 이내 대답했다.

“아무래도, 저와 산이 연결되어 있는 거 같아요.”

황당한 대답에 펠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기울여 다시 한 번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빛이었다.

“꿈에 웬 망토를 쓴 사람이 나왔어요.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모르겠지만 팔을 내밀었을 때 이상한 문신 같은 게 새겨져 있었고요.”

아스펠라는 자신이 꿨던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뭔가 주문을 외우고, 그의 몸에서부터 불이 났어요. 그 불은 곧장 저한테로 옮겨 붙었고요. 온몸이 타들어가듯이 고통스러웠는데, 내가 아닌 산에 불이 붙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러니까, 제가 그 사람을 본 시점은 산의 시점이었던 거예요.”

말을 마친 아스펠라는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펠킨과 눈을 마주쳤다.

이해 못할 것이라 생각했고 믿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본인도 그럴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으니까. 하지만 어젯밤의 그 일은 정말로 산과 아스펠라가 연결되어 있지 않는 한 느끼지 못할 것이었다.

칼리우스는 잠시 아스펠라를 빤히 쳐다봤다. 아스펠라는 그런 그가 자신을 미치광이 취급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그 사람의 팔에 문신이 있었다고요?”

대공의 질문에 아스펠라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팔에 문신을 한 이들은 이교도일 확률이 높습니다. 이교도들 중 일부는 자신의 몸에 신의 언어를 새긴다고 하니까.”

“이교도요?”

“예. 산신이 아닌 다른 이를 신으로 믿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주술과 연금술을 맹신하고, 산신이 아닌 지하에 갇힌 부정 탄 것을 섬기는 이들이었다.

펠킨은 특정한 단체명도 알려지지 않아 그저 이교도라고 부를 뿐이라며, 매우 극소수인데다 원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찾기 힘든 이들이라 말했다.

“저도 그 이교도들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암암리에 그 명맥이 이어져온다는 소문은 있지요. 부정신 비슷한 것을 모시는 단체고, 워낙에 베일에 가려진 이들입니다.”

사실 거의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들이라, 실제로 존재하는 줄도 몰랐다는 말에 아스펠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만일 그 단체가 실제로 존재하는 단체이며 방화범의 정체가 그들이 맞다면, 그들은 더 큰일을 꾸미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팔에 문신을 하는 자는 그리 많지 않을 테니, 할렘가나 암거래가 주로 이뤄지는 곳들 위주로 조사해 봐.”

펠킨이 넵, 짧게 대답하며 칼리우스의 눈치를 살폈다. 설마 아스펠라 양의 저 허무맹랑한 말을 믿는 건가?

하긴, 대공 각하도 개가 되시는 마당에 저 아가씨가 산이 못 될 게 어디 있겠어…….

펠킨은 어쩐지 피곤한 느낌이 들었다.

에르윈 대공가의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마차가 나타나자 거리에 나와 있던 수많은 백성들이 절로 길을 비켰다. 다들 하나같이 길거리로 나와 시커멓게 타버린 아스펠 산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이제 막 다른 지방에서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일카이도 있었다. 산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얼른 지나가던 행인의 멱살을 잡고선 물었다.

“저 산, 왜 불탔어?!”

“아, 아니 왜 멱살을 잡― 그걸 내가 어찌 압니까! 아니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왜 말을 놓고―”

“그럼 저 안에 있는 여자는? 저기 여자애 하나 살았잖아!”

“아잇, 나도 모르오! 산이 저 지경인데 죽었겠지!”

그 말에 남자의 멱살을 쥐고 있던 일카이의 손에 힘이 빠졌다. 뒤에서는 그의 동료들이 부르고 있었지만 이미 일카이의 발걸음은 아스펠 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

아스펠 산으로 들어가는 언덕 부분부터 산의 중턱 3분의 1이 모두 타버렸다. 녹음 가득히 생명력을 뽐내던 식물들은 이미 그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모두 재가 된 것이다.

마차에서 내린 아스펠라는 경계선을 쳐둔 기다란 동아줄을 넘어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칼리우스가 따라갔다. 아스펠라는 산 초입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이 길을 따라 죽 불이 나있는 것을 보면 그녀의 오두막 역시 모조리 타버렸을 것이다. 마치 죽음의 신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같아 아스펠라는 걷는 도중 몇 번이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때마다 칼리우스가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지반이 약해졌습니다. 아스펠라. 그 이상은 올라가지 마세요.”

결국 아스펠라는 자신이 지내던 오두막까지 가지도 못한 채 그저 황망하게 산을 바라봤다. 비르가와 함께 지내온 모든 시간들과 추억들까지 같이 타버린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아스펠라!]

다람쥐였다. 작은 다람쥐는 그나마 덜 탄 나무동이에서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잔뜩 겁을 먹은 듯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내 아스펠라를 불렀다.

그를 발견한 아스펠라가 화들짝 놀라 얼른 다람쥐가 있는 나무동이로 몸을 수그렸다. 아스펠라가 손을 내밀자 그 위로 올라온 다람쥐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스펠라! 여기 오면 안 돼!]

“다들 무사하니? 도망은 갔을까? 어떻게, 산이 다 타버렸어…….”

[아스펠라! 울지 마! 우린 모두 무사해. 다행히 나무들이 죽기 전에 우리에게 말해줘서 산의 동물들은 모두 피신했어. 우린 당분간 아스펠 산을 떠날 거야. 그 전에 네가 알아둬야 할 게 있어!]

다람쥐의 작은 앞발이 아스펠라의 코를 쓰다듬으며 달랬다. 그러더니 이내 꽤나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누군가 널 죽이려고 해. 널 노리려 한다구. 나무들이 그랬어. 그 망토 쓴 인간이 널 찾아다녔다고. 당분간 너도 산을 떠나 인간들 곁에 있어. 지금의 산은 오히려 너한테 더 위험할 거야.]

“날 노린 거였다고? 산을 불태운 이유가?”

[그래. 널 노린 거야. 그러니까 당분간은 인간들 틈에 섞여 있어. 너구리 영감이 그렇게 하래. 차라리 재수는 없지만 대공의 집에서 지내. 그 인간은 인간들 중에서도 강하다며? 그런 놈 집에 함부로 불을 낼 순 없겠지.]

인간들은 자연한테 함부로 대해도 저들끼리 만들어낸 신분제 앞에서는 벌벌 떠니까. 다람쥐의 말에 아스펠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다른 산을 노리면 그것도 위험한 거 아니야? 차라리 날 노리는 거면 내가―”

[안 돼. 네가 무슨 생각인지는 알 것 같은데, 절대 그러지 마. 우린 걱정 말고! 약하지 않아! 우리도 반격을 준비할 거야! 다만, 불타버린 산은 부정신의 소굴이 될 테니까. 아스펠라. 알아들었지?]

아스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람쥐가 그럼 그때까지 몸 조심하구, 우린 언젠가 또 만날 거야. 하며 아스펠라의 코에 촉촉한 코를 맞대곤 이내 빠르게 사라졌다.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에게 다가왔다.

“아스펠라. 당신한테 제안할 게 있습니다.”

“…….”

“범인을 잡을 때까지 잠시 이 저택에서 지내는 건 어떻겠습니까. 당신 집도 불타버렸고―”

“네.”

칼리우스가 당황하여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이렇게 쉽게 승낙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아스펠라가 고개를 들어 칼리우스와 눈을 마주쳤다.

다람쥐의 말대로, 그래. 당분간은 대공의 저택에서 몸을 숨겨야겠어. 범인을 잡을 때까지는.

“네. 그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공 각하. 신세진 것은 어떻게든 갚겠습니다.”

“……갚을 필요는 없습니다.”

“저, 혹시―”

아스펠라가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아스펠라!”

대공가의 호위 기사들은 물론 펠킨까지 밀치며 커다란 사내가 달려왔다. 워낙에 빠르고 순식간이었던지라 펠킨이 데구루루 나가떨어졌다.

“일카이? 너, 왜―!”

달려온 일카이는 그대로 아스펠라를 꽉 껴안았다. 그걸 바로 눈앞에서 목격한 칼리우스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내가 진짜……너 때문에 심장 떨어질 뻔했다……. 어떻게 된 거야? 다친 덴 없고?”

일카이는 제가 껴안고 있던 아스펠라를 다시 품에서 꺼내 빙빙 돌리며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다친 덴 없어 보이네. 불이 났다면서. 오두막은? 네 그 이상한 동물 친구들은?”

“저기 일카이. 나 괜찮아. 불나는 동안 대공 각하의 저택에 머물고 있었고, 다들 대피했어.”

그러니까 이제 품에서 좀 놔줄래? 아스펠라의 말에 일카이가 응? 하며 되묻자, 칼리우스가 일카이의 품에서 아스펠라를 잡아챘다. 그러자 일카이가 놓치지 않고 아스펠라의 손을 잡았다. 아스펠라는 양쪽 사이에 낀 상태로 황당한 듯 둘을 쳐다봤다.

칼리우스는 아스펠라를 차마 제 품으로 안지는 못하고 얼쯤하게 팔만 잡은 상태로 일카이를 쳐다봤다.

“자네는 뭔가.”

일카이는 칼리우스의 의복을 쳐다봤다. 급한 마음에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얼른 주변을 둘러봤다. 대공 가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 저에게 다가오는 호위 기사들, 그리고 비싼 옷을 입은 사내의 저 내려다보는 듯한 눈빛까지.

‘아스펠라의 팔을 쥐고 있는 사내는 튀니아의 대공이구나.’

하지만 그렇다 하여 고개 숙일 일카이가 아니었다.

“오크몬드 사냥 조합 대장 일카이, 대공 각하께 인사드립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으나, 아스펠라를 잡은 손을 놓지는 않았다.

칼리우스는 그의 정체를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그가 마수로 변해 있을 때 두 번이나 마주친 적 있지 않은가. 아스펠라보다 어리기에 그저 사냥꾼들을 따라다니며 잡일이나 하는 막내인 줄 알았더니, 튀니아에서 가장 큰 사냥꾼 조합의 대장까지 맡고 있을 줄이야.

“자네 신분을 물어본 것이 아니네.”

“허면, 달리 제게 하문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상대의 의사도 묻지 않고 여인을 안는 자네의 예의를 물어본 걸세.”

그러자 일카이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를 지켜보던 펠킨이 기함할 정도였다. 어떤 미친놈이 감히 대공 각하 앞에서 저렇게 웃는단 말인가. 나이 오십 지긋한 공작도 에르윈 대공 앞에서는 말을 가리는데.

일카이가 호탕하게 웃자 칼리우스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아스펠라는 일카이가 진정 돌아버린 건가 싶어 얼른 그의 명치를 때렸다.

그러자 일카이가 웃음을 뚝 멈추곤 미소를 띤 채로 칼리우스에게 말했다.

“제 약혼녀를 안는 것이 대공 각하께는 불편하게 보일 수 있었나봅니다. 사과드립니다.”

“일카이!”

아스펠라가 다급하게 일카이의 이름을 불렀다. 일카이는 부름에 대한 대답이라도 하듯 이번엔 아예 아스펠라의 허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응, 누나?”

“죄송해요, 대공 각하. 얘가 아직 어리숙하여―”

칼리우스가 가만히 아스펠라를 내려다보다 이내 저와 눈높이가 비슷한 일카이를 내려다봤다. 그러다 펠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파랗게 질린 펠킨이 멍하니 서 있었다.

아직 대공 각하께 그 말은 하지 못했는데…….

이를 어찌하면 좋냐는 얼굴의 펠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스펠라는 자신이 시작한 거짓말이니 제대로 해명을 해야겠다, 생각을 하다 이내 제 허리에 손을 얹은 일카이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눈치챘다.

일카이를 힐끔 올려다보자, 그가 장단을 맞춰야 할 것 아니냐는 눈빛을 보냈다.

아스펠라는 대공의 저택에서 지내는 건 포기하고 그냥 일카이와 함께 당분간 사냥꾼 조합에서 지내거나, 혹은 약방 영감님을 찾아가야겠다 생각했더랬다.

그때 무표정이던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에게 말했다.

“아스펠라, 약혼자가 있었군요.”

“예, 대공 각하. 그게―”

“아무래도 약혼자가 있는 여인이 대공 저택에서 지내는 건 무리겠죠.”

“네……. 하여 송구스럽게도―”

그러자 칼리우스가 살풋 미소 지으며 아스펠라의 말을 끊었다.

“그럼, 약혼자도 함께 오시면 되겠네요.”

“예?!”

아스펠라가 화들짝 놀라 칼리우스를 쳐다봤다. 칼리우스는 그리하면 문제 될 건 없겠죠, 하며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안 그렇습니까, 일카이 군.”

사냥꾼들보다는 대공가의 철문이 더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약혼녀를 지키고 싶다면 함께 들어오는 것이 좋을 듯하군요.”

군, 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묻자 일카이 역시 칼리우스를 따라하기라도 하는 양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얼굴이 근육이 이상하게 움찔댔다.

“……제가 감히 대공 각하의 저택에 발을 들여놓아도 되겠습니까?”

“마침 내 저택의 사냥꾼들을 바꿀 참이었던지라. 실력 있는 사냥꾼이길 비네.”

“허면, 감사히 들어가겠습니다.”

지지 않겠다는 듯 일카이가 미소로 응수하자, 칼리우스가 낮은 웃음을 살짝 흘렸다. 펠킨은 살면서 저런 무서운 미소는 또 처음 봤다.

칼리우스는 당황한 듯한 아스펠라를 한번 쳐다보고는 이내 인심 썼다는 듯이 말했다.

“아스펠라. 약혼자와 같이 들어올 겁니까? 아니면 먼저 저택에 가 있을 겁니까.”

약혼자라는 단어를 쓰는 칼리우스의 어조는 당황과 질투보다는 오히려 퍽이나 약혼자겠다, 하며 비웃는 듯한 느낌이었다.

“……잠시 대화 좀 하고 와도 될까요, 대공 각하?”

“얼마든지.”

여유로워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칼리우스가 마차로 향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아스펠라가 얼른 일카이를 잡아끌었다.

“저 새끼 뭐야?!”

“너 미쳤니? 대공 각하셔, 그렇게 막말했다가 목이라도 날아가면 어쩌려고.”

“어차피 들리지도 않을 걸. 짐승도 아닌데 이 거리에서 들릴 리가.”

일카이가 이죽댔다. 보기 좋게 칼리우스에게 한방 먹었다. 아스펠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공 저택에서는 왜 지내야 하는데? 방화범이 널 노린다니. 뭔 소리야 그건?”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해줄게. 그건 그렇고 너 성질 좀 죽여. 응?”

“아니 저 남자가 먼저―”

“대공 각하.”

“……대공 각하가 날 먼저 무시했잖아.”

“언제?”

“방금 일카이 군이라고! 날 완전 어린애 취급했잖아!”

아스펠라는 대체 그게 왜 무시한 거냐는 듯 이해 못하는 얼굴이었다.

“너 아직 어린애 맞아. 열아홉 살이잖아.”

“성인식 치뤘어. 나도 성인이야. 그리고 앞으로 6개월 뒤에는 스무 살이고.”

아스펠라가 또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일카이는 그런 아스펠라를 보며 잠시 머뭇대다 물었다.

“꼭 대공 저택에서 살 필요는 없지 않아? 약방 영감 집도 있고, 뭣하면 우리랑 같이―”

“방화범의 정확한 정체를 모르겠어. 이 커다란 산을 태운 놈이야. 그것도 날 노리고. 자칫하다가 영감님도 위험해질 수 있고, 근거지도 없이 이곳저곳 옮겨 다니다가 노출되기라도 하면…….”

대공의 저택에 들어오기 싫은 거면 말해 줘 일카이. 내가 오해가 있었다고 말하면서 사실대로 털어놓을게. 아스펠라의 말에 일카이가 펄쩍 뛰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나도 들어갈 거니까. 오히려 잘됐어. 어차피 나랑 내 팀원들 모두 발 뻗고 잘 곳이 필요했거든.”

이참에 어디 그 대단하신 대공 나리 저택이나 구경하지 뭐. 일카이가 애써 여유로운 척 웃음을 지었다.

“근데, 너 대공이 좋아서 거기서 지내겠다는 건 아니지? 나 약혼자라고 소개한 이유가 대공 떨구려고 한 거 아니었어?”

“좋아서 지내기는 무슨. 아니야, 그런 거. 그 저택엔 깜장이도 있고, 대공이 방화범 조사도 한다고 했으니까. 게다가 대공의 집에 침입하기는 어려울 거 아니야. 그래서, 그래서 그런 거야.”

아스펠라가 얼른 대답했다. 일카이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답변인 듯 가자미눈으로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그때 펠킨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저, 아스펠라 양. 각하께서 몽타주를 그릴 화가를 섭외해놓으셨다고 되도록 빨리 저택에 들어왔으면 한다고 하십니다.”

“아, 네. 저 먼저 저택에 들어가기로 했어요. 일카이. 너는 동료들이랑 얘기 나눠보고 들어와.”

“아니 얘기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들어갈 거야. 나도 갈 거라고. 딱 기다려. 내 팀원들 불러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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