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검은 마수와 아스펠라
녹음이 활개 치는 곳,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메아리쳐 돌아오고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면 진한 흙냄새와 습한 나무껍질 냄새가 코 안으로 들어온다.
아침마다 뿌옇게 내려앉은 안개가 나무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모든 생명체를 깨우는 이곳, 신들이 산다고 불리는 산 아스펠이다.
아스펠에 사는 소녀, 올해로 스무 살이 된 아스펠라는 오늘도 새벽안개를 맞으며 눈을 떴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전날 강가에서 떠온 물로 세수를 한 뒤, 긴 금발 머리칼을 정갈하게 빗었다.
그 다음, 허름한 나무 옷장에서 몇 없는 깔끔한 옷을 꺼내 입은 뒤 곧장 두터운 망토를 걸치고 외출 준비를 했다.
커다란 소쿠리를 양 어깨에 메고, 두껍고 긴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천천히 산을 내려오기 시작하자 작은 다람쥐들 여럿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오늘은 시내에 나가려고. 자, 선물.”
망토 주머니를 뒤적이며 도토리 열댓 알을 바닥에 놓자 다람쥐들이 신나게 챙기기 시작했다. 다람쥐 중 한 마리가 도토리에는 관심이 없는지 유심히 아스펠라를 쳐다보며 찍찍, 울었다.
“뭘 사올 거냐고? 이번에 캔 약초들을 팔러가는 거야. 뭘 사올지는 모르겠는데. 왜, 궁금해? 같이 가볼래?”
마치 다람쥐와 대화라도 하는 것 마냥 아스펠라는 혼잣말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다람쥐가 그녀의 손을 타고 올라왔다. 아스펠라는 쿡쿡 웃으며 다람쥐를 제 망토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산을 다시 내려왔다.
한참 내려가면 보이는 강의 돌담을 건너고, 또 다시 산을 내려가고, 아직 노랗게 물들지 않은 푸른 억새밭을 지나 들판을 내려가면 드디어 도시가 나온다.
“힘들다. 그치?”
잠시 쉬어가기 위해 들판에 자리를 펴고 집에서 싸온 빵과 물을 꺼내 우물우물 먹으며 아스펠라가 말했다. 빵 조각을 떼어내 다람쥐에게 슬쩍 건네자 다람쥐가 얼른 조각을 받아들었다. 아스펠라는 그런 다람쥐가 사랑스러운지 빵빵한 볼을 쓰다듬었다.
“자, 이제 다시 가자.”
다시 무거운 소쿠리를 메고 도시의 시장으로 향했다.
아스펠라는 이 주일에 한 번 이렇게 도시의 시장에 나가 산에서 캐온 약초들과 나물을 판다. 꽃이 만개하면 그중 싱싱한 걸 꺾어 팔기도 한다.
그녀가 자주 가는 약방 주인은 아스펠라를 보자마자 반가운 듯 얼른 맞이했다.
“아스펠라!”
“영감님! 오랜만이에요.”
“이번에는 왜 이리 늦게 왔어, 한 달이나 오질 않아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약방 영감은 이 주마다 꼬박 오던 아스펠라가 한 달간 보이지 않아 걱정스러웠는지 그녀를 보자마자 한달음에 달려가 온갖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우리 마누라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네가 걱정돼 죽겠다. 욘석아.”
“에이 참, 영감님도.”
아스펠라는 그런 영감의 잔소리가 익숙한 지 생긋 웃으며 무거운 소쿠리를 바닥에 내려놨다. 영감은 소쿠리를 열고 그녀가 캐온 약초 하나하나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이리도 싱싱한 걸 캐오다니.”
“값 많이 쳐주세요.”
“당연하지.”
영감은 이 도성 내의 약방에서 아스펠라에게 약초를 공급받는 유일한 이였다. 동시에 그만큼 인기 있는 약방이었다. 두툼한 돈주머니를 건네던 영감이 싱글벙글 웃다가도 아스펠라를 보자 다시 시무룩해졌다.
“얘야, 아스펠라. 정말로 내려올 생각 없는 것이냐?”
영감은 아스펠라의 거친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진심이었다. 영감이 아스펠라와 인연이 있는지는 올해로 8년째다. 14살의 어린애가 웬만한 성인 남자들도 학을 떼며 못 가져올 약초들을 한아름 가져왔을 때가 아직도 기억난다.
아스펠라는 그의 진심을 알기에 쉽게 거절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영감과 영감의 부인이 아스펠라를 볼 때마다 매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익숙하게 거절했다.
“영감님, 저 진짜 괜찮아요. 그리고 전 아스펠라잖아요? 아스펠 산의 아이라는 뜻의 아스펠라가 아스펠을 떠날 순 없죠.”
일반인들이 아스펠 산에 들어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스펠 산은 신이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고 거대한 나무들과 투명한 강, 진귀한 약초들이 있지만 너무나도 험준해 그곳에 올라가려는 이들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아스펠 산의 하부에서만 약초를 캘 수 있었다. 아스펠라처럼 산의 상부에 살 수 있는 이들은 아스펠라를 키운 노인 비르가가 유일했고, 이제는 아스펠라가 유일하다.
“걱정 마세요. 저보다 이 산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아스펠 산의 제 마당이나 마찬가지예요. 거기 사는 동물들은 제 가족이고요. 제가 위험에 처하면 산이 절 보호할 거예요.”
아스펠라의 눈빛을 본 영감은 더 이상 내려와 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 넌 산의 아이니까. 아스펠라. 그래도 항상 조심해라. 아직 그 검은 마수 잡히지 않았다고 하더라. 조심해야 한다고. 응?”
“네, 알겠어요.”
“아주 아주 위험하고 커다랗고 흉포한 놈이랬다고.”
“네.”
“……가봐라. 해 지면 위험해질 테니까.”
영감은 돈주머니를 소쿠리 안에 넣어주곤 손을 흔들었다. 아스펠라는 그런 영감님이 매번 고마워 꽉 껴안아주곤 약방을 나왔다.
“헌데, 아스펠라야. 그 사냥꾼이랑은 사귀는 거냐?”
문 앞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영감님이 궁금한 듯 물었다. 혹시라도 애인이 있다면 그 위험한 산에서 내려와 살진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는 것 같았다. 아스펠라가 소리를 빽 질렀다.
“절대 아니거든요!”
***
약방 영감이 두둑하게 돈을 챙겨준 덕에 아스펠라는 이것저것 살 수 있었다. 텃밭에 심을 씨앗이나 빵을 만들 수 있는 재료 등을 사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오늘은 무겁게 와서 또 무겁게 돌아가네.”
소쿠리에 가득 담기도록 여러 가지를 사댄 아스펠라가 기쁜 얼굴로 말했다. 다람쥐는 소쿠리 위에 올라서 신나는지 뽀송한 엉덩이를 씰룩 흔들었다.
[그럼 오늘 가서 다 같이 파티하는 거야?]
“으음, 그럴까?”
[야호! 얼른 돌아가자, 아스펠라! 다들 불러서 놀자!]
산속 오두막으로 돌아가 주변 동물들과 파티를 열 생각을 하니 아스펠라도 신나졌다. 시장에서 나와 다시 산으로 향하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아스펠라를 불렀다.
“이봐! 아스펠라!”
뒤를 돌자 일반 남성의 몇 배는 커다란 체격을 가진 남자가 어울리지 않게 붕붕 손을 흔들며 아스펠라에게 다가왔다.
생글생글 웃고 있던 아스펠라의 얼굴이 귀찮은 놈을 만났다는 듯 꿈틀거렸다.
“뭐야. 생명의 은인한테 그딴 표정이나 짓고.”
사냥꾼의 복장을 한 남자가 아스펠라의 볼을 반죽마냥 잡아 당겼다.
“올 을리디 머 일카이 (볼 늘리지 마 일카이.)”
그러자 남자가 쿡쿡 웃으며 아스펠라의 볼에서 손을 뗐다. 아스펠라가 조금은 얼얼해진 볼을 만지작대며 그를 노려봤다.
“그놈의 생명의 은인 소리 좀 그만해. 너 다른 사람들한테는 우리가 무슨 대단한 인연이라도 된 것 마냥 말하고 다니지?”
“생명의 은인 맞지. 그 정도면 대단한 인연도 맞잖아? 나 아니었으면 너 이미 저승길이었어.”
“그렇긴 한데, 그건 진짜 고맙긴 한데. 그래도! 약방 영감님은 너랑 내가 깊은 사이인 줄 안다고.”
아스펠라는 제 속 타는 마음도 모른 채 실실 웃고 있는 일카이를 보자 할 말이 사라졌다.
“깊은 사이 아니야?”
“…….”
“난 깊은 사이인 줄 알았는데.”
“내 말은, 우리가 연인인 줄 안다는 거야.”
“그런 소문 나쁘진 않네.”
그때 아스펠라 옷 속에서 다람쥐가 툭 튀어나와 뭐라 소리쳤다.
찍찍찍, 찍찍찍!
[야, 이 자식아! 우리 아스펠라한테 수작 부리지 마!]
물론 일카이에게는 찍찍대는 소리로만 들릴 뿐이다. 일카이는 아스펠라 품속의 다람쥐를 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야. 또 쥐새끼 데리고 다녀?”
“다람쥐야.”
“다람쥐든 쥐새끼든. 찍찍대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일카이의 말을 알아들은 다람쥐가 한층 더 성나서 소리쳤다.
[다르거든?! 무식한 사냥꾼 주제에 감히 누굴 넘봐!]
“저렇게 작은 놈은 몇 마리 잡아다가 구이 해 먹으면 맛있는데.”
“일카이!”
아스펠라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일카이는 항복하겠다는 듯 양 손을 들어 올리며 생글생글 웃었다.
“아, 알았어 알았어. 아스펠라는 동물을 사랑하니 내가 입 다물게.”
[저, 저놈이 지금 구, 구이를 해 먹겠다고 그러는 거야, 아스펠라? 나 구이로 먹혀?]
다람쥐가 울먹거리며 다시 아스펠라 품속으로 들어갔다.
“왜 부른 거야. 할 말 있어서 부른 거면 빨리 말해.”
아스펠라는 지치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카이와 다람쥐의 보이지 않는 싸움은 예전부터 오래된 일이었다. 중간에서 양쪽 말을 다 알아듣는 그녀만 고통스러울 뿐이다.
“딱히 할 말 있어서 부른 거는 아니고. 그냥 보고 싶어서 부른 건데.”
“…….”
“얼굴 봤으니 됐다. 난 간다―”
“……뭐 저런…….”
아스펠라는 황당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품속에서 다람쥐가 슬며시 고개를 꺼내 물었다.
[아스펠라. 설마 저놈이랑 사귈 건 아니지?]
“얘는. 그냥 내 주변에 있다 보면 검은 마수랑 마주칠 확률이 높아서 저러는 거야. 빨리 가자. 파티나 하게.”
[응!]
사냥꾼 일카이는 그저 능글맞은 놈일 뿐이다. 일전에 자신 때문에 검은 마수를 놓쳐 놀리는 게 분명하다. 아스펠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흥, 콧방귀 한 번 뀌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들판을 지나, 노을 지는 억새밭의 풍경을 보고 강을 건너 산을 올라갔다. 날이 어두워져도 그녀는 걱정하지 않는다. 밤이 되면 반딧불이들이 나와 그녀의 길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산에 버려진 아이, 작은 소쿠리에 광목 천으로 대충 둘둘 말아 산속 깊은 곳에 버려졌던 그녀를 아스펠의 동물들이 비르가에게 데려왔다.
비르가는 그 아기에게 아스펠라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아스펠 산의 아이, 아스펠라. 아스펠라에게는 비르가와 산의 동물들이 가족이다.
반딧불이의 도움을 받아 어두워진 산을 쉽게 오르던 아스펠라는 이상한 기운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가만히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며 귀를 기울였다.
“……숲이 동요하고 있어.”
눈을 뜬 아스펠라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다람쥐 역시 그 기운을 눈치챈 것인지 가만히 그녀의 손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멀리서 사슴이 뛰어왔다.
[아스펠라! 아스펠라!]
“무슨 일이야?”
[위험해, 누군가 오두막에 있어! 무서운 인간들이야. 다들 철의 냄새를 풍기고 있어. 다들 겁을 먹었어!]
“철의 냄새?”
[철의 냄새, 피의 냄새...아주 지독한 놈들이야. 얼른 피하자, 아스펠라! 분명 산을 없애버릴 거야.]
사슴이 긴박하게 말하며 아스펠라의 망토를 입에 물고 잡아당겼다. 아스펠라는 그런 사슴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괜찮아. 아마 병사들이겠지. 내가 가서 알아볼게. 혹시 모르니 너희는 오두막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렴.”
그렇게 말한 뒤 아스펠라는 전보다 더 빠르게 산을 올랐다. 오두막에 근처에 가자 시큰한 철 냄새가 아스펠라의 코를 괴롭혔다. 인상을 찌푸린 아스펠라는 손으로 코를 막으며 위로 올라갔다.
작은 오두막을 철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아스펠라는 그들 사이를 헤쳐지나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시죠?”
작은 오두막 안을 꽉 메우는 커다란 체격의 남자가 창가에 서 있다. 아스펠라는 경계하는 목소리로 날카롭게 물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갑옷을 입고 있는데 이 남자만 정갈한 옷을 입고 있었다. 단정한 옷을 입은 남자는 아스펠라의 목소리에 천천히 뒤를 돌았다.
“아스펠라?”
남자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아스펠라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어두운 오두막 안은 병사들이 가져온 횃불이 방 안을 밝혔다. 덕분에 어두워도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짙은 흑발과 짙은 눈썹을 가진 남자. 호박색의 아름다운 금안을 가진 남자의 눈매는 사납게 올라가 있었다. 잘생겼지만, 매우 무섭게 생긴 남자였다. 아스펠라는 그를 보자마자 어디선가 만난 적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절 아시나요?”
“잘 압니다.”
“전 그쪽을 모르는데요.”
“괜찮습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한 발자국 다가왔다. 아스펠라가 들고 있던 나무 지팡이를 들어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듯 행동하자 남자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니 픽 웃었다. 그리곤 이내 예의를 갖춰 인사를 하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댄다.
“아스펠라 양. 저와 결혼해주십시오.”
아스펠라는 기가 막히는 제안에 황당한 지 제 귀를 한번 후비더니 다시 물었다.
“지금, 뭐라고요?”
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신호를 눈치채지 못한 건지, 아니면 무시한 건지 다시 한 번 확인 사살했다.
“그대를 내 신부로 맞이하고 싶다는 소리입니다.”
“미쳤군요.”
“매우 이성적인 상태입니다.”
“예의도 없고요.”
예의 없다는 말에 남자가 고개를 모로 기울인다. 지금 예의가 없다고? 무엇이? 이해하지 못한 듯 가만히 아스펠라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한다.
“그대를 내 신부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그런 예의 말고요! 세상에 날 언제 봤다고 청혼하는 거죠?”
남자의 외모는 누구든지 한번 본다면 뇌리에 박힐 인상이었다. 결코 유해보이지 않는 진한 인상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아스펠라는 무릎을 꿇은 남자에게서 도망치듯 뒤로 물어나며 말했다.
“전 남의 집에 함부로 발을 들이는 모르는 이의 청혼을 받아주지도 않을 뿐더러, 이 산속에 무장을 한 채 횃불까지 들고 온 이들과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나가주세요.”
오두막 문을 열어 주려던 순간이었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스펠라를 바라보는 눈빛이 요요하다. 마치 이리의 눈빛 같아서 아스펠라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두 달 전에, 부상당한 개를 한 마리 치료해주지 않으셨습니까.”
묵직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모습에 아스펠라가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다시 뒤를 돌았다. 부상당한 개? 남자가 말을 이었다.
“검고, 제법 덩치가 큰 개요.”
“네. 기억나네요.”
“흉포한 놈이지만, 제가 기르던 개입니다.”
“그 개가요?”
“네.”
남자가 느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흉포한 놈이지만, 제가 기르는 개입니다. 아스펠라는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모습이 자신이 치료해줬던 그 개와 겹쳐보였다.
그 개도 남자처럼 짙고 윤이 나는 검은 털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눈동자는 호박색의 그의 눈동자와는 달리 붉게 빛나고 있었다.
피로 물든 달이 뜬 것처럼. 아마 본 사람들은 다들 기겁하고 달아났을 정도로 두려웠다.
두 달 전. 평소처럼 약초를 영감님에게 넘겨주기 위해 오랜만에 도성으로 내려왔을 때의 일이었다.
***
도성으로 내려오는 길, 아스펠라는 사람들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나같이 창백하게 질리거나, 잔뜩 화나 쇠도끼를 들고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아스펠라는 원래 사람들에게 그렇게까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 편이었다. 아스펠라는 의외로 인간에게 냉담한 구석이 있어 자신과 관련 없는 일에는 나서는 편이 아니었다.
그저 무슨 일이 생겼나 보다, 하는 거리감을 가진 채로 약방에 들어갔다.
‘아스펠라 왔구나.’
영감의 말에 약재를 나누고 있던 마벨라 부인이 제조실 안에서 뛰쳐나왔다.
‘아스펠라! 무사하구나. 세상에, 신이 도우셨어! ……어째 얼굴이 야윈 것 같아?’
‘에이, 아주머니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와서 빵이라도 좀 먹으렴.’
얼른 부엌에 들어가 음식을 내온 마벨라 부인이 아스펠라를 테이블에 꾹꾹 누르며 말했다. 영감이 돈을 준비하는 동안, 마벨라 부인은 여느 때처럼 아스펠라를 설득했다. 그것은 바로 도성에 내려와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것, 혹은 자신들의 양녀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아스펠라, 요즘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산속에 혼자 있다가 변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저 정말 괜찮아요. 마벨라 아주머니.’
마벨라 부인은 손을 내젓는 아스펠라를 보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요즘 도성에 흉흉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아, 오는 도중에 사람들 표정이 다들 안 좋더라구요.’
‘그래. 어제 검은 마수가 뒤집어 놓고 갔어. 그 흉포한 놈이 여길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다음에 아스펠 산으로 향했다는 소리가 들어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아스펠 산으로 왔다고요?’
‘들어간 건지는 모르겠고, 그쪽으로 향했다는데……. 무서워서 다들 가까이 가지도 못해. 그 마수가 잡히기 전까지만이라도 나와 살렴. 응?’
마벨라 부인은 별 생각 없어 보이는 아스펠라가 답답한 건지, 그 마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개 같기도 하고, 늑대 같기도 하다는데, 온몸의 털이 검대. 길게 튀어나온 주둥이는 어찌나 긴지, 송곳니도 엄청 뾰족해서 한번 물리면 분명 죽을 거야! 사냥꾼들도 어찌하지 못해 당하기만 했대.’
‘그 정도예요? 부상당한 사람들도 있나요?’
‘그건 아니지만, 보기만 해도 부정을 타는 기분이니 다들 죽이려드는 거지. 이번에만 벌써 두 번째야. 아마 이런 일이 한번 더 생기면 에르윈 대공께서 나서겠지. 그분은 이런 마수들을 몇 번이나 죽였다니까. 지금도 사람들이 대공한테 간청하고 난리란다.’
튀니아 왕국의 대공, 칼리우스 에르윈.
왕의 친척이자 전쟁 영웅.
왕의 명령으로 마수들을 물리친다는 에르윈 대공은 백성들 사이에서도 구원자나 영웅이라 불리지만, 아스펠라에게는 조금 다르다.
‘그저 살육을 즐기는 인간일 뿐. 피해도 안주는 신들을 죽이는 주제에 영웅은 무슨.’
하지만 그걸 소리내어 말했다간 목이 달아날 수 있으니 꾹 참는다. 얼른 빵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아스펠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군요. 아주머니 말씀대로 조심할게요.’
‘조심해서 될 일이 아니래도. 우리가 불편한 거라면, 집이라도 알아봐줄 테니―’
‘아뇨. 제가 아주머니랑 영감님을 왜 불편해해요. 다만 저는 아스펠 산이 제일 편할 뿐이에요. 저 정말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만 가 볼게요.’
마벨라 부인의 볼에 작별 인사로 입을 맞춘 뒤 아스펠라는 약방을 나왔다. 광장 한켠에서는 곡괭이나 삽, 쇠스랑 등을 들고 모인 사람들과 그 앞에서 선동하는 한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아스펠라는 불안한 마음에 쉽게 그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검은 마수가 아스펠 산 쪽으로 갔습니다! 그놈은 부정신인 게 분명해요! 내버려두면 우리 도성 사람들에게 역병이 퍼질 겁니다! 에르윈 대공께 갈 것도 없어요! 우리끼리 처단합시다!’
우워어어어! 소리를 지르며 횃불까지 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어스름한 주황빛이 점점 산 아래로 내려가더니 이내 어둠이 찾아왔다. 횃불과 농기구들을 나눠주며 사람을 모으고 있을 때쯤, 어디선가 늑대 울음소리가 났다.
아우우우―
그것은 모든 이들의 오금을 저리게 할 소리였다. 매우 날카롭지만 묵직하고 비통한 울음소리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투지가 넘쳤던 사람들이 가만히 침을 꿀꺽 삼켰다.
아우우우―
그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오자 한 사람이 기겁을 하며 허공을 가리켰다.
‘으, 으아아악! 마수다, 마수, 마수야!’
커다란 몸집을 가진 검은 것. 그것은 순식간에 몰려 있는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악!’
도성 사람들 모두가 기겁을 하며 손에 들린 무기들을 무차별적으로 휘둘렀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검은 것의 살가죽을 뚫을 수는 없었다. 검은 마수는 길고 커다란 주둥이로 사람들을 이리 휙, 저리 휙 날렸다. 몰려 있던 이들은 어느새 파하여 서로 도망가기 바빴다.
그때 젊은 사냥꾼 한 명이 나타났다.
‘다들 비켜, 내 이놈을 오늘 죽이고야 말 테니까!’
그는 그대로 수석총을 장전하더니, 이내 마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하는 소리와 함께 마수가 뒤로 주춤댔다. 뒤에 있던 사냥꾼이 장전된 총을 다시 한 번 그에게 쐈다. 두 사냥꾼은 그렇게 번갈아 가며 마수에게 총을 쏴댔다.
총알이 나가는 소리가 날 때마다 마수의 입에서 낑낑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스펠라는 어쩐지 마수가 가여워졌다. 그 비싼 수석총을 몇 개나 들고 온 건지, 얼른 화약을 쑤셔 넣곤 신나서 마수에게 총구를 겨눴다.
‘이제 그만하세요!’
‘뭐야? 저리 안 비켜?’
‘죽인 사람도 없고, 피해도 주지 않았다면서요! 왜 이렇게 잔인하게 구는 거죠!’
‘뭐라고? 보는 것만으로도 부정을 타게 만드는 마수 아니야! 비켜! 저런 건 바로 죽여야 나중에 탈이 없어!’
‘하지 마세요!’
아스펠라는 다시 마수에게 총구를 들이밀려는 젊은 사냥꾼을 저지했다.
‘아니 이 아가씨가 미쳤나! 위험하니까 저리 꺼져! 이런 놈을 살리면 역병이 퍼진다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보는 것만으로도 역병이 퍼진다니!’
아스펠라는 자신을 떼어버리려는 두 사냥꾼과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죽은 사람도, 다친 사람도 없는데 고작 부정을 탈 거 같다고 죽이려 하다니.
‘위험한 동물이 아니에요! 혼란스러워 하는 것뿐이라고요!’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야! 어, 어어! 도망가잖아!’
검은 마수는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훌쩍 훌쩍 건물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다른 사냥꾼은 혀를 쯧 차더니 아스펠라에게 화를 냈다.
‘이봐 아가씨, 당신 뭔데 남의 일을 방해해? 어? 마녀야? 저 마수랑 한패냐고!’
‘난 마녀도, 저 마수와 한패도 아니에요. 다만 피해도 주지 않았는데 무섭게 생겼다고 공격하는 게 말이 되냐는 거죠!’
그러자 제 동료에게 비키라는 듯 손짓한 젊은 사냥꾼이 아스펠라의 멱살을 잡으며 말했다. 그보다 훨씬 체구가 작은 아스펠라의 발이 덜렁 들렸다.
‘하, 세상 천사 납셨네. 피해를 줄지 안 줄지 어떻게 알아? 검은 마수라고. 저렇게 큰 놈 봤어? 저걸 잡아다가 왕한테 바치면 돈이 얼만데!’
젊은 사냥꾼이 잔뜩 화가 났는지 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아스펠라에게 화를 냈다.
‘저건 사람들을 공격할 마음이 없어요!’
‘그걸 아가씨가 어떻게 알아?’
‘난…….’
‘왜, 동물들이랑 대화라도 하나 보지? 진짜 마녀 아니야? 응?’
젊은 사냥꾼이 잔뜩 비아냥댔다. 아스펠라는 진짜라고 말했다가는 정말로 마녀 재판에 넘겨질까 걱정이 되어 입을 꾹 다물었다.
웬 젊은 사냥꾼한테 멱살이 잡혀 대롱대롱 붙들려 있는 아스펠라를 본 약방 영감과 마벨라 부인이 얼른 뛰쳐나와 그들을 말렸다.
젊은 사냥꾼은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아스펠라를 쳐다보더니 쯧, 혀를 차곤 영감쪽으로 밀쳤다. 그리곤 구시렁대며 사냥꾼들과 갈 길을 갔다.
아스펠라는 자신을 일으켜주던 영감님과 마벨라 부인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네가 동물들을 유난히 아끼는 마음은 잘 안다만, 상대를 보면서 해야지. 다음번엔 그 마수를 보거든 곧장 도망치거라. 응? 사냥꾼들도 웬만해선 그냥 못 본 척 해. 저들이 마수 다음으로 흉포한 인간들이라고.’
‘네.’
시무룩해진 마음으로 터덜터덜 산에 돌아온 아스펠라는 이상한 기운에 고개를 들었다.
‘다들 왜 그래?’
가만히 눈을 감고 나무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다.
‘누가 와 있다고?’
쏴아아아― 바람 소리에 흩날리는 나무들이 아스펠라에게 뭔가 말을 해댔다. 아스펠라는 코 끝에서 희미하게 돌아다니는 피 냄새를 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람쥐가 나무에서 내려와 찍찍대며 말했다.
[아스펠라! 검고 큰 놈이 쓰러져 있어!]
얼른 다람쥐의 안내를 받으며 그가 말한 곳으로 향했다. 땅바닥에 피를 흘리며 널브러진 커다란 검은 동물. 검은 마수였다. 마수는 아스펠라의 기척을 느끼자마자 번쩍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총에 많이 맞았는지 땅바닥을 피로 흠뻑 적셨다.
아스펠라는 검은 마수를 처음으로 마주했다.
검은 털은 밤보다도 짙고, 길게 나온 주둥이 사이로 보이는 송곳니는 초승달보다도 뾰족하게 빛났다. 아스펠라를 담은 붉은색의 눈동자는 루비처럼 아름다웠다. 홀린 듯 그에게 손을 뻗은 아스펠라에게 마수가 이를 드러내며 그녀의 팔을 콱 깨물었다.
[아스펠라!]
동물들이 다가오려는 것을 아스펠라가 저지했다.
‘크르르르…….’
마수의 눈동자는 냉혹했다. 불신으로 가득 찬 그 눈동자는 다가오지 말라는 듯, 경고하는 것 같았지만 아스펠라가 천천히 나지막이 말했다. 물린 왼팔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내가 도와줄게.’
가만히 오른손을 뻗어 제 손의 냄새를 맡게 해준 아스펠라는 그가 경계를 풀 때까지 그 자세를 유지했다.
‘도와줄게. 여기 박힌 총알들을 빼줄게. 알았지? 널 해치려는 게 아니야. 난 널 도울 거야.’
마수와 눈을 마주치며 아스펠라가 천천히 커다란 얼굴을 쓰다듬었다. 한참 동안 붉은 눈동자의 마수가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걸까. 마수는 입을 벌려 팔을 놔줬다. 그리곤 피가 나는 그녀의 팔 부분을 슬쩍슬쩍 핥아주기 시작했다.
‘고마워. 이제 내가 너의 상처를 봐도 되니?’
그러자 검은 개가 엎드려 누웠다. 아스펠라는 천천히 그의 상처들을 살폈다. 털이 검어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모두 알아내기까지 오래 걸렸다. 그 사이 아스펠라 곁으로 몰려들은 동물들이 물었다.
[아스펠라, 피가 나……. 위험해. 커다랗고 검은 녀석이야. 부정신이면 어떻게 해?]
‘난 괜찮아. 얘들아, 가서 약초 좀 캐올래?’
[응!]
동물들이 약초를 캐러가자 아스펠라는 입고 있던 망토를 벗어 펼쳤다. 웬만한 늑대보다 큰 덩치였기에 그 위로 올리는 건 힘든 일이었지만, 아스펠라는 낑낑대면서도 작은 망토 위에 그를 올렸다.
‘근처에 내가 사는 오두막이 있어. 거기로 갈 거야. 가서 치료를 해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
아스펠라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낑낑대며 망토를 끌었다. 다른 동물들도 와서 밀고, 당기며 마수를 오두막까지 데려왔다.
겨우겨우 오두막 안으로 들여온 아스펠라는 마취 풀을 태워 향을 피운 뒤, 얼른 핀셋을 꺼내왔다. 허름한 벽난로에 불을 지핀 뒤에 그 위로 핀셋을 소독한 뒤 그대로 마수의 살갗을 뚫은 총알들을 하나하나 빼내기 시작했다.
어찌나 괴로워하는지, 뜨겁게 소독된 핀셋이 상처를 후비고 들어와 총알을 빼낼 때마다 마수가 킹킹대며 발버둥 쳤다. 아스펠라는 그럴 때마다 온몸으로 그를 누르며 도망가지 못하도록 했다. 산속의 밤은 기온이 뚝 떨어져 벽난로를 때워도 추웠지만 오늘 아스펠라는 땀으로 흠뻑 젖었다.
제 몸뚱이의 두세 배는 되어 보이는 거구의 마수를 있는 힘껏 제압하느라 진이 빠졌기 때문이다. 크르릉대며 발버둥 치던 마수도 점점 진이 빠져 숨만 쌕쌕 내뱉었다. 마지막 다섯 번째의 총알을 빼냈을 때는 기절한 후였다.
아스펠라는 동물들이 뽑아온 약초들을 돌로 곱게 빻은 뒤 상처 위에 올리고 천으로 감싸줬다. 그리고 냇가에 가서 물을 길어온 뒤에 깨끗하게 털들을 닦아줬다. 다시 물을 길러 간 아스펠라에게 다람쥐가 다가와 물었다.
[아스펠라. 왜 저걸 도와준 거야?]
‘도와달라고 말했거든.’
[쟤가? 언제?]
‘눈빛이 그렇게 말했어. 위험하지도, 나쁘지도 않아. 그저 혼란스러워하고 두려워하는 거뿐이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 눈빛으로…….’
아스펠라는 싱긋 웃으며 말한 뒤 다시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고, 밤새 낑낑대는 마수의 붕대를 갈아주느라 꼬박 밤을 샜다.
***
어쩐지 포근하고 과하게 따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스펠라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제야 자신이 밤새 간호를 하다가 그만 마수에게 기대 잠이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몸을 일으키려던 아스펠라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마수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보석처럼 붉은 눈동자였다. 여전히 아스펠라를 경계하는 듯했지만, 어제보다는 확실히 누그러진 모양이다.
‘잘 잤니? 어때, 몸은 좀 괜찮고?’
아스펠라는 윤기 나는 그의 털을 결을 따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을 쓰다듬자 마수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당분간은 여기에서 쉬렴. 도성에 왜 자꾸 가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봤자 어제 같은 꼴만 볼 거야. 인간들한테 너무 가까이 가지 마. 인간들은 위험해.’
그러자 마수가 슬쩍 눈을 뜨며 아스펠라를 바라봤다. 그 눈빛은 마치 너도 인간이면서 무슨 소리하는 거냐,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스펠라는 가만히 웃으며 보드라운 털에 얼굴을 비볐다.
‘참 따듯하다. 벽난로를 때운 것보다 더.’
킁, 하며 마수가 콧김을 내뱉었다. 아스펠라는 그의 곁에서 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를 느끼다 이상한 안정감에 저도 모르게 다시 잠에 빠졌다. 점심때쯤 되자 마수는 배가 고팠는지 배에서 천둥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스펠라가 쿡쿡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바깥으로 나갔다.
‘자, 고기라고는 이거밖에 없어.’
아스펠라는 예전에 잡아 손질해둔 멧돼지 고기를 건넸다. 아스펠 산에서 간혹 그녀를 죽이려 드는 짐승들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아스펠라는 태연하게 사냥하여 그날의 요리로 쓴다.
대부분 아스펠라가 인간이라며 무조건 죽이려 드는 짐승들이었다. 아마 부정신의 영향을 받아 뭐든 파괴하려 들던 놈일 것이다.
아스펠 산의 동물들이 두려워하는 부정신, 부정을 몰고 다니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신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마수는 아스펠라가 건넨 고기를 한입에 꿀꺽 삼켰다. 워낙 덩치가 커서 그런 건 입맛 돋우는 용도도 못된다. 아스펠라 역시 당황했다.
‘지금 당장은 더 이상 고기가 없는데, 채소도 먹지?’
그러자 마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펠라는 씩 웃으며 얼른 여러 약재를 타 만든 스튜를 커다란 통에 가득 만들었다. 고기처럼 보이는 이것은 도톰한 버섯이다. 마수 역시 이게 고기인가 채소가 싶어 날카로운 발톱으로 스튜 건더기들을 콕콕 찌르더니 허겁지겁 핥아먹기 시작했다.
‘어때. 나름 채식도 할 만하지?’
아스펠라의 농담에 마수는 대답이라도 하듯 붉은 눈동자를 감았다 떴다. 그는 그렇게 커다란 통에 담긴 스튜를 단 몇 분 만에 비우더니 새침하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스펠라는 뭔가 자신이 시종이 된 기분이었다.
피가 배어나온 붕대를 갈아주던 아스펠라는 자신을 바라보는 마수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디서 왔니? 아스펠 산의 동물들도 다 널 처음 본다고 하던데. 주인이 있는 거야?’
그러자 마수가 다시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야? 그럼, 어느 산에서 온 거야?’
마수는 그것도 아니라는 듯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컹! 짖었다.
‘산에서 온 것도 아니고? 주인도 없고, 야생도 아니면 대체 뭔데?’
붉은 눈동자가 다시 아스펠라를 담았다. 그녀는 어쩐지 그 눈빛이 슬퍼 보여 저도 모르게 그의 커다란 머리통을 살살 쓸었다.
‘갈 곳이 없으면 이곳에 있어도 돼.’
아스펠라의 말에 마수는 아스펠라에게 얼굴을 비볐다. 그러다가 아스펠라가 부상당한 팔을 움찔대자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낑낑대며 그 부분을 핥기 시작했다.
‘괜찮아. 별로 안 아파. 너도 날 죽이려고 문 게 아니잖아?’
죽이려고 문 것이라면 아마 진즉에 팔 하나가 잘려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아스펠라는 도성에서 공격받던 그를 본 순간부터 마수가 자신을 죽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확신이었다. 마수는 사람들을 죽일 생각이 없다. 오히려 스스로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걱정해주는 것 자체가 네가 나쁜 존재가 아니라는 거지.’
아스펠라가 후후 웃으며 촉촉한 마수의 코를 톡, 만졌다.
***
안 그래도 작은 오두막에 절반이나 자리를 차지하는 마수가 들어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사이 마수는 꽤나 빠르게 회복했다. 수석총을 다섯 발이나 맞고도 생명을 유지한 것 자체가 신기했지만, 아마 아스펠라의 뛰어난 약초지식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 마수는 간단하게 뛸 수도 있는 정도로 회복했다. 그 사이 그들은 대화를 할 정도로 친밀해졌다. 아스펠라를 따라 산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던 마수가 말했다.
[등에 타, 아스펠라.]
‘진짜?’
[네 발걸음은 너무 느려.]
‘이게.’
가끔은 하루종일 산을 타느라 힘들어하는 아스펠라에게 등을 내주기도 했다. 그녀를 등에 태우곤 쏜살같이 산의 상부로 올라갔다가,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아스펠라와 친하게 지내던 동물들과도 이제는 곧잘 마주했다.
물론, 아스펠 산의 동물들은 대개 그를 매우 두려워했지만.
아스펠 산의 동물들 중 나이 지긋한 너구리는 종종 아스펠라를 찾아와 잔소리를 해댔다.
[아스펠라, 저 검은 마수에 대해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검은 마수를 들이다니, 비르가 님이 아시면 기절하실 거다!]
‘비르가는 분명 나와 같이 행동했을 테니 걱정 말아요.’
[신의 저주를 받은 거라구, 분명 나중엔―]
너구리 영감은 잘 말하다가도 검은 마수와 눈이 마주치면 꼬리 빠지게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런 일상이 반복되는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마수의 등을 타고 산에 올라 편히 약초를 캐고, 상처를 치료해주고, 너구리 영감의 잔소리를 듣고, 숲속의 동물들과 담소를 나누고.
검은 마수가 그녀의 집에서 지낸지 삼 주 정도 지났을까.
여느 때보다 많이 캔 약초들을 가지고 아스펠라는 도성으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검은 마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스펠라의 치맛자락을 물고 놔주지 않았다. 무서운 눈으로 경계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온순한 대형견 같다.
‘안 돼. 도성엔 나 혼자 가야 해. 금방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그러자 검은 마수가 낑낑대더니 이내 치맛자락을 놔줬다. 아스펠라는 그런 마수의 털을 한 번 쓰다듬어줬다. 마수는 등에 타라는 듯 주둥이로 제 등을 가리키면서 아스펠라의 다리를 툭툭 쳤다.
‘태워다 준다고? 뭐, 나야 좋지.’
아스펠라는 대신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곳까지만이라고 당부했다.
마수는 발이 빨라 아스펠라 혼자 갔다면 네다섯 시간 정도 걸릴 거리를 한 시간 만에 도달했다.
‘금방 다녀올게. 기다리지 말고 얼른 돌아가 있어.’
산으로 돌아가 있으라며 아스펠라가 손짓을 하자 그는 얌전히 돌아갔다. 아스펠라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 가벼운 발걸음으로 약방을 갔다.
‘아스펠라. 오늘따라 묘하게 표정이 밝구나?’
마벨라 부인이 아스펠라의 볼을 쭉 잡아당기며 물었다. 아스펠라의 말랑한 볼이 늘어났다. 그래도 좋은지 아스펠라는 싱글벙글 웃는다.
‘그러게요. 저도 오늘따라 기분이 좋네요!’
‘저번에는 하도 시무룩해져서 가길래 걱정했는데, 음. 그래. 넌 원래 밝은 아이였지. 비르가가 키운 아이니까. 그나저나, 팔은 왜 그래? 다친 거야?’
‘아, 음……네. 어쩌다 보니!’
‘세상에. 조심해야지. 짐승한테 공격당한 건 아니고?’
‘네, 아니에요.’
검은 마수의 빠른 회복력과 달리 아스펠라는 평범한 인간인지라 회복이 더뎠다. 마벨라 부인은 상처에 바르라면서 수입 연고를 건넸다.
약초를 건네고, 돈을 받은 뒤 오늘은 검은 마수를 위해 고기들을 많이 샀다. 소쿠리에 생고기를 잔뜩 담고 가려던 아스펠라는 저번에 그 두 사냥꾼이 사람들을 모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벼웠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아까 전에 검은 마수를 들판 쪽에서 봤다는 소리가 있어. 그놈은 분명 아스펠 산에 있는 거야! 이번에는 진짜로 잡자고! 잡아서 국왕각하께 진상하면 큰 상을 받을 거야. 분명해!’
‘아예 아스펠 산에 불을 지르자!’
‘와아아아!’
아스펠라의 발걸음이 다시 빨라졌다. 그녀는 있는 힘껏 달렸다. 수석총과 도끼, 화살을 들고 있는 그들로부터 모두를 지켜야 했다. 비르가가 그렇게 사랑했던 아스펠 산에 불을 지르려고 한다. 그녀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동물들도 같이 죽여버릴 게 분명하다.
숨이 너무 차 목이 찢어질 것 같아도 아스펠라는 뛰었다. 남자들은 말을 타고 올 기세였다. 그들보다 뒤처지면 절대 안 된다. 아스펠라는 그들이 사람을 모으기 시작한 때부터 쉬지 않고 달렸다. 몸을 무겁게 만드는 소쿠리는 집어던진 지 오래다. 아스펠라는 죽을힘을 다해 산으로 뛰어갔다.
한참을 뛰다 토할 거 같아 잠시 숨을 고르다가도 다시 뛰어갔다.
산의 강을 건너 더 위로 올라갔다. 그새 그녀의 냄새를 맡고 내려온 검은 마수가 아스펠라에게 반가운 듯 꼬리를 흔들었다.
‘가, 얼른 도망가. 사람들이 널 죽이러 오고 있어. 얼른! 산의 동물들한테도 말해야 해. 여길 불 지를 생각인가 봐.’
아스펠라는 말을 하다가 다리에 힘이 빠진 건지 주저앉았다. 산 초입부분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타고 달려온 거다. 아스펠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수는 아스펠라를 제 등에 태우더니 훌쩍 산 위로 올라갔다. 아스펠라는 얼른 동물들을 모아 대피할 것을 말했고, 동물들이 도망치려는 동안 작은 오두막에서 몇 안 되는 귀중품들을 챙겼다. 대부분 비르가가 남기고 간 유품이었다.
오두막 문을 열고 나오니 아직도 검은 마수가 기다리고 있다.
‘가! 난 사람이라 괜찮지만 그들은 널 죽일 거라고! 얼른!’
밀리지도 않는데 아스펠라는 그를 꾹꾹 밀어댔다. 그래봤자 저만 밀릴 뿐이었다. 소리치는 아스펠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사이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저기 있다! 저기 검고 큰 마수가 있어!’
‘저놈이 확실해, 이번에는 내가 진짜로 죽여버릴 거다! 하하!’
사냥을 한다는 것에 신이 난 남자들이 말을 더 빠르게 몰았다. 아스펠라가 더 간절하게 부탁했다.
제발 도망가! 그러자 검은 마수가 고개를 돌려 아스펠라의 얼굴을 한번 핥았다. 반가웠다는 듯이 인사를 하던 검은 마수는 남자들이 가까이 오자 갑자기 오두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얼른 도망가라고!’
아스펠라는 울 듯이 소리쳤다.
‘저기 있다! 저기 여자도 같이 있어!’
사냥꾼들이 오두막 근처로 달려올 때였다. 마수가 발톱을 세워 아스펠라의 등을 할퀴었다.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아스펠라가 비명을 질렀다.
‘아악!’
아스펠라의 등이 금세 피로 물들었다. 아스펠라는 등을 부여잡고 바닥에 넘어졌다. 달려온 사람들이 아스펠라에게 얼른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아가씨, 괜찮아?!’
‘아윽…….’
상처는 꽤나 깊었다. 아스펠라는 정신을 잃기 전 흐릿해진 시야로 마수를 눈에 담았다. 마수의 붉은 눈이 슬프게 빛났다.
‘……도망……가라니까…….’
아스펠라는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는 약방 부부가 그녀를 간호하고 있었다. 아스펠라는 부르튼 입술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제가 왜…….’
‘사냥꾼이들이 널 데려왔어. 저번에 너와 우리를 기억하고선 말이야.’
‘그 검은 마수는…….’
‘사냥꾼들 말로는 도망갔단다.’
‘……아스펠 산은!’
자리에 누워 있다 벌떡 일어나던 아스펠라는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얼른 말을 멈추고 몸을 수그렸다.
‘산은 무사해. 불은 안 났어.’
‘……다행이네요.’
아스펠라는 정말로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올 정도로 안도했다. 그 검은 마수는 어떻게든 도망쳤고, 산은 불에 타지 않았다.
‘다행은 무슨! 네 등이 얼마나 너덜너덜했는지 아니!’
‘그건 괜찮아요.’
그러자 누군가 잔뜩 비웃는 말투로 말했다. 아스펠라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그러니까 짐승들을 살려줘 봤자 배신이나 당하는 거야, 아가씨.’
멀리서 사냥꾼이 걸어왔다. 젊은 나이의 사냥꾼은 지난번 아스펠라의 멱살을 잡았던 이였다. 동시에 부상당한 아스펠라를 약방 부부에게 데려온 이이기도 했다. 배신이라는 말에 아스펠라가 그를 노려봤다. 그러자 그는 꽤나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날 노려봐 봤자지. 이미 검은 마수는 도망쳤다고. 그러게 저번에 죽일 수 있을 때 죽였어야 했는데. 하필 끼어들어서는. 뭐, 몸은 괜찮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제가 한 일을 후회하진 않거든요.’
‘그때는 나보고 사람 공격할 생각 없다고 단언하던데, 이번에는 틀렸나 보네.’
아스펠라는 그렇게 말하는 사냥꾼이 꼴보기 싫어 고개를 돌렸다. 사냥꾼은 핏자국이 배어나온 아스펠라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다 약방 영감에게 말했다.
‘어이, 영감. 쟤 피 샌다. 붕대나 갈아줘. 다음번에는 내 그 마수의 모가지를 따서 광장에 자랑할 테니, 그때 보자고 아가씨.’
사냥꾼이 킬킬 웃고는 그대로 방을 나갔다.
영감님은 새 약초를 가져와 부인에게 건넸다. 마벨라 부인은 아스펠라의 피 묻은 붕대를 푸른 뒤 약초를 빻아 연고와 함께 발라줬다. 연고가 상처에 문질러질 때마다 따가워 아스펠라가 몸을 움찔댔다.
아프지만 밉지는 않았다. 그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아스펠라는 알고 있다. 분명 사냥꾼들에게서 의심을 사지 않도록 만든 게 분명하다. 쓰러지기 전에 본 그 눈빛은 매우 미안해하는 표정이었으니까.
마녀 재판이 열리는 이곳. 마수를 보호했다는 게 알려지면 아스펠라는 틀림없이 마녀로 몰려 화형당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반대로 마수에게 집을 잃고 공격당한 이라면 아마 대부분은 마녀라 생각하지 못할 거다.
사냥꾼들은 얼른 그녀를 보호했고, 마수는 한참 동안 그들과 대치하다 도망갔다고 한다.
아스펠라는 몸이 다 낫지 않았음에도 얼른 산으로 돌아갔다. 약방 부부는 극구 말렸지만 아스펠라는 의외로 고집이 센 편이었다.
오두막은 사냥꾼들이 임시로 고쳐줬다고 한다. 아스펠라는 그들을 찾아가 감사인사를 한 뒤, 한동안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검은 마수가 혹여나 돌아오지는 않을까, 혹여나 총을 맞고 어디서 앓고 있지는 않을까. 하지만 마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에 오늘, 그 마수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남자가 찾아 온 거다.
***
“정말로 그쪽이 기르는 개라고요?”
“네. 워낙 훈련이 안 되어, 길들이는 중이었는데 어느 날 목줄을 끊고 달아나더군요.”
남자가 태연하게 말했다. 아스펠라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 애는 주인이 없다고 하던데요.”
“누가 그러죠?”
“그건…….”
“마치 그것과 대화라도 한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그의 금안이 요요하게 빛났다. 아스펠라는 괜히 뜨끔하여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개와 제가 무슨 상관인가요?”
“제 개를 잘 보살펴 주셨으니 답례를 하고 싶습니다.”
“답례로 청혼을요? 이름도 신분도 밝히지 않는 분이. 하.”
아스펠라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코웃음 쳤다.
“아, 소개가 늦었군요.”
남자가 씩 웃으며 말했다.
“제 이름은 칼리우스 에르윈입니다.”
그리고는 아스펠라의 작은 손을 잡으며 손등에 입을 맞추는 시늉을 했다. 아스펠라는 그제야 그의 약지에 끼워져 있던 반지의 문양이 대공 가문의 문양이라는 것을 알았다.
칼리우스, 에르윈? 아스펠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칼리우스 에르윈이라고?
튀니아 왕국의 대공 말인가? 왕의 친척, 백성들의 영웅, 하지만 아스펠라가 제일 싫어하는 그 에르윈 대공.
“……에르윈 대공이시라고요.”
아스펠라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생각보다 너무 젊지 않나?
소문만 무성한 에르윈 대공은 중년의 나이 정도 되어 보일 줄 알았는데, 아스펠라와 비슷한 또래 같았다. 아스펠라는 멍, 하니 그를 쳐다보다 다시 정신을 붙잡으며 물었다.
“대공씩이나 되는 분이 당신의 개 좀 보살펴줬다고 일반 백성에게 청혼을 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습니다.”
“등을 많이 다치셨을 텐데요.”
“그걸 어찌.”
“기르는 개가 말해줬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동물들이랑 교감을 할 수 있는 인간은 아스펠라뿐이다. 예전엔 비르가도 가능했지만, 비르가는 2년 전에 죽지 않았나. 동물과 교감할 수 있는 이였다면 아스펠라가 단숨에 알아챘을 것이다.
“동물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저렇게 철 냄새가 폴폴 나는 갑옷을 두른 병사들을 대동하고 산에 오르진 않았을 테지요. 횃불을 들고 오지도 않았을 테고요.”
“어찌되었든 등에 큰 상처가 난 것은 맞지 않습니까?”
“…….”
“기르던 짐승이 저지른 잘못이니, 책임은 주인이 져야지. 몸에 큰 상처를 내었으니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책임지실 필요 없습니다. 커다란 흠이 될 만한 것도 아니고요. 그보다 개는 무사한 것 같으니 다행이네요.”
“여인의 등을 그렇게 찢어놨는데도 그 짐승이 걱정되십니까?”
“짐승들은 잘못 없어요. 절 공격한 건 오히려 절 보호하기 위함이었으니까요.”
“공격했는데, 보호하려 했다?”
칼리우스는 피식 웃으며 한쪽 입꼬리를 당겼다. 잘생긴 얼굴이기에 뭘 해도 잘생겨보였지만, 아스펠라에게는 그런 게 그리 통하는 편은 아니었다.
“아무튼, 그런 걸로 보상받을 생각 없으니 돌아가 주시죠.”
문을 열어주며 아스펠라가 말했다.
고작 개를 돌봐줬다고 결혼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하지 않나. 게다가 아스펠라는 인간 세상에 섞여 지낼 생각이 전혀 없다. 그녀에게는 비르가와 동물들과의 추억이 있는 이곳만이 지낼 장소다.
“그 개가 잘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문을 열어줬는데도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이던 칼리우스가 물었다. 그의 물음에 아스펠라는 구미가 당기는 건지 살짝 멈칫했다.
“……잘 지내니 주인이 찾아와 인사를 하신 거겠죠.”
“사람을 해치려했다고 보고받아 벌을 받고 있는 중인데.”
“……개를 벌주고 있다고요?!”
아스펠라가 경악했다. 그러나 칼리우스는 경악한 아스펠라를 보며 정말로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택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개가 잘 지내는지 확인도 하실 겸. 사실 요 며칠간 개가 아픈 것 같은데 의사들도 도통 이유를 모르더군요. 아, 그 개가 그대를 잘 따르니 당신이라면 개의 상태를 봐줄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의식의 흐름이 이상한 사람인가 싶었다. 하지만 벌을 받고 있다 하니 아스펠라는 그 마수가 눈에 밟혔다.
“……확인만 하고 전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좋습니다.”
남자가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듯 박수를 짝 치며 미소 지었다. 아스펠라는 왠지 모르게 속은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람쥐가 창문을 타고 쪼르륵 들어와 아스펠라의 어깨위로 올라왔다.
[저놈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따라가는 거야, 아스펠라?]
“마수가 아픈 것 같은데 의사들도 손을 못 댄다잖아.”
마지막으로 본 마수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그때 자신을 보던 그 루비 같은 눈동자 너머 보였던 아득한 외로움, 지독한 두려움. 아스펠라는 그 마수를 놓을 수가 없다.
대공에게서는 그 마수의 냄새가 짙게 났다. 아마 정말로 기르기 때문에 그리 냄새가 나는 걸 거다. 아스펠라는 자꾸 눈에 밟히는 마수를 만나기 위해 대공가로 향했다.
칼리우스가 오두막을 나가 문 옆에 서 있던 자신의 비서에게 뭐라 말을 한다. 그러자 비서가 병사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하산할 테니 다들 준비해라.”
“예!”
새들의 지저귐과 강물이 흘러가는 소리, 바람소리만 들리는 이 곳에 철갑옷이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병사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나무들 사이로 울렸다. 그 소리에 놀란 새들이 푸드덕대며 오두막 위를 날아갔다.
아스펠라가 손가락을 뻗자 새가 그 위로 앉으며 부산스럽게 짹짹 울어댔다.
“다들 너무 동요하지 말라고 해줘. 이 사람들은 산을 해치지 않을 거래. 난 금방 돌아올 테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게 아스펠라가 작게 말했다. 새는 이해한 건지 더 이상 불안한 듯 날개를 퍼덕이지 않고 잔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칼리우스 대공과 눈이 마주쳤다.
“마치 동물과 대화라도 하는 것 같군요.”
그의 말에 아스펠라가 얼른 새를 보내주며 둘러댔다.
“설마요. 마녀도 아니고.”
튀니아에서는 존재하지도 않는 마녀를 재판한다. 아스펠라는 동물들과 교감할 수 있지만 그녀가 사람을 홀리고, 아이들을 잡아먹고, 그 피로 목욕하지는 않는다. 아니, 애초에 그런 존재는 없었다.
마녀는 스스로 마녀라 하는 것보다 주변에서 마녀라 하는 일이 더 많다.
혼자 사는 여자, 돈 많은 과부, 너무 아름다운 여인, 성질 고약한 여성. 똑똑한 소녀. 누구나 다 마녀가 될 수 있다.
아스펠라는 마녀라고 재판 받은 여자들이 어떻게 죽는지 안다.
고문 받고, 화형 당한다.
“이 세상에 마녀는 없습니다. 무고한 여자들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낸 비겁한 허상이지.”
칼리우스 대공의 말에 아스펠라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저 무뚝뚝하고 날카로운 남자가 그런 말을 다 하다니.
과거 마수가 아스펠라에게 물었었다.
[왜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나가 살지 않는 거지? 이 산속이 뭐가 좋다고.]
‘사람들 눈에 내가 정상이 아니니까. 동물들과 교감을 하고, 약초에 빠삭하고, 혼자 살고, 책을 좋아하는 여자는 마녀로 몰려.’
[마녀?]
‘응. 마녀. 참 웃겨. 마녀가 존재한다면 들키지 않게 꽁꽁 숨기고 살아가겠지. 무려 마법을 쓰는 마녀라면서? 인간이 그걸 어떻게 알겠어. 진짜 마녀라면 사람들 사이에서 모르게 살아갈 거야.’
마녀로 몰린 여자들은 대개 사회에서 여자들에게 바라는 걸 하지 않는 사람들인 거야. 아스펠라가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예전에 비르가도 잡혀간 적이 있었어. 참 웃기지. 그때 우리 오두막을 다 헐어버렸거든. 내가 그렇게 무고하다고 주장했을 때는 믿지도 않았는데, 약방 영감님이 나서니까 그제야 믿어주더라.’
몇 년 전 누군가 비르가를 마녀라고 일러바쳤다. 마녀를 잡아가는 병사들은 증거도 없으면서 비르가를 잡아갔다. 약방 영감님이 겨우 빼냈을 땐, 이미 고문을 많이 당한 이후였다.
‘……비르가는 그때 이후로 몸이 약해졌어. 많이 고문당했었거든. 나이도 많은 분을 그렇게…….’
아스펠라의 목소리에 기운이 없어졌다. 실제로 비르가는 건강했었지만 그 일 이후로 눈에 띄게 약해졌다.
[비르가가 누구지?]
‘날 키워준 사람. 내 어머니이자 아버지이자 자매임과 동시에 형제였지.’
[지금은―]
‘응, 다시 자연으로 돌아갔어.’
[슬프지 않나?]
‘더 이상 비르가의 육체를 볼 수 없는 건 슬프지만, 그래도 이 아스펠 산의 일부가 되었으니까. 항상 내 곁에 있고 날 보호해주는 건 변함없어.’
아스펠라는 그때 자신을 바라보던 마수의 눈빛과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에르윈 대공의 눈빛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짧은 회상을 마친 아스펠라가 픽 웃으며 말했다.
“그런 말을 하시다니. 대공께서 여인이었다면 진즉에 잡혀가셨을 거예요.”
“그대도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까?”
“글쎄요. 전 제 몸을 사리는 편이라.”
“몸을 사리는 여인이 그런 괴수의―”
칼리우스는 말을 하려다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아스펠라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자 다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런 괴수를 보살피다뇨.”
“키우는 개에게 괴수라고 칭하는 주인은 처음 봤습니다.”
“뭐, 좋아서 기르는 게 아니다 보니.”
그렇게 말하는 칼리우스의 표정은 정말로 끔찍한 짐을 떠맡은 얼굴이었다. 아스펠라는 그런 표정을 짓는 대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 그 역시 다른 인간들처럼 부정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을 게 뻔했다.
“일단 갑시다. 저택으로.”
칼리우스가 아스펠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귀족가문의 영애를 다루듯 에스코트 해줄 셈이었지만 아스펠라는 그런 그를 지나치며 말했다.
“이 밤중에 산을 어떻게 내려가시려고요?”
“시대가 많이 발전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말과 동시에 아스펠라와 칼리우스 앞에 커다란 마차가 도착했다. 아스펠라는 당황했다. 이게 무슨……. 사람도 올라오기 벅찬 이 아스펠 산의 중턱에 어떻게 마차가 올라올 수 있지.
“……설마 길을 내셨습니까?”
아스펠라는 믿고 싶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여인의 몸으로 혼자 올라오기엔 많이 험준하지 않습니까.”
아스펠라는 하고 싶은 말이 매우 많았지만 일단은 탔다. 먼저 마수의 상태를 확인하고, 따질 건 저택에서 나오기 직전에 따져야겠다.
마차가 출발했다. 아스펠라가 항상 다니던 길의 반대쪽에는 나무와 풀이 다 잘리고 뽑혀 길이 나 있었다. 이걸 대체 언제 다 만들어낸 건가.
“길은 대체 언제 만드신 거죠?”
“오늘 올라오면서요.”
시장에 나가 있는 동안 길을 내었다니. 아스펠라가 화가 난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산을 훼손한건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도 길을 내야 할 거 같아서요.”
“왜 굳이 길을 내시는 거죠?”
길 같은 거 없어도 잘만 다녔다. 인간 편하자고 마음대로 산의 생명들을 해치다니. 아스펠라는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목소리에서는 꾹꾹 눌러 담은 화가 미처 숨기지 못하고 튀어나왔다. 칼리우스는 그런 아스펠라를 빤히 쳐다봤다. 아스펠라는 그와 시선을 마주치기 껄끄러워 고개를 돌렸다.
칼리우스가 말했다.
“그대가 청혼을 거절하면 매일 같이 오려고요.”
“절 좋아하십니까?”
“…….”
“이상하네요. 절 좋아하시는 것 같진 않은데 왜 제게 청혼하시는지. 더 높으신 귀족 가문의 영애들이 많을 텐데요. 전 제일 낮은 신분입니다.”
“그래서, 대답은.”
“네. 당연히 거절입니다.”
“아스펠라 양은 의외로 인간에게는 냉담하군요.”
칼리우스가 중얼거렸다. 동물들에게는 그렇게 친절하게 웃어주더니. 사람을 대할 땐 눈빛부터 차갑지 않나.
“제가 대공 각하의 저택에 가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개의 상태를 확인하러 가는 것입니다.”
그 말인즉슨, 네가 좋아서 가는 것이 아니니 착각 말라는 것이었다. 칼리우스는 그리 말할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 개를 그리 싸고도는 이유가 뭘까요.”
“…….”
“대답하지도 않네.”
“개의 이름은 뭔가요?”
“이름?”
칼리우스가 눈썹 한쪽을 삐뚜름하게 올리며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개의 주인이니 이름을 붙여줬을 것 아닌가.
“이름…….”
칼리우스는 한참 동안 생각했다. 이름 같은 거 없는데. 그러다가 뭔가 떠오른 것이 있는지 턱끝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대가 지어주지 그래요.”
“제가 어찌 감히 대공 각하의 애완견 이름을 짓는단 말입니까.”
“그 개가 그대를 잘 따르니까. 나보다 그대를 더 좋아하더군요. 그런데……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미안해하던데. 집도 그렇고, 등도 그렇고.”
“……진짜로 그 개와 대화를 하십니까?”
“안 알려줄 겁니다.”
기묘한 남자다. 아스펠라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정말로 그 개가 말해준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아스펠라를 찾아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서 이름 지어주세요. 나도 언제까지고 개라고 부르기는 조금 껄끄러웠던 참이니.”
“그럼…….”
아스펠라가 천천히 입을 뗐다.
칼리우스 대공은 그녀가 개의 이름을 무어라 지을지 기대라도 하는 건지 빤히 쳐다봤다.
“―깜장이라고 할게요.”
“……까, 깜장이?”
카리스마 넘치던 잘생긴 얼굴이 와르르 무너졌다. 황당해서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잠깐만, 그렇게 크고 무섭게 생긴 놈에게 깜장이라고?
아스펠라는 진지했다.
“네. 까만 털을 가졌으니까요.”
“……조금 더 어울리는 이름이 있을 텐데요.”
“아뇨. 깜장이가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전 직관적인 이름을 선호하는 편이라서요.”
“그런 건 귀여운 생물에 어울릴 텐데.”
“귀여웠어요. 제 눈엔.”
칼리우스의 입꼬리가 씰룩댔다. 웃음을 꾹 참으려던 그는 결국 푸흡,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스펠라는 그게 왜 웃긴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깜장이라. 예상을 한참 벗어난 이름이라 당황했습니다. 귀여웠다니. 그게요? 하하하!”
진짜 귀여웠다. 무심한 척 하면서 아스펠라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첫날 아스펠라의 팔뚝을 문 게 두고두고 미안해서 아스펠라가 연고를 바를 때마다 옆에서 낑낑대고, 어떻게든 보답을 하려고 매번 등에 태워주고.
“정말로 귀여운 아이예요. 사람들은 깜장이의 겉모습만 보고 괴물이라 욕하지만.”
아스펠라는 자꾸만 웃는 칼리우스가 한층 더 미워졌다. 주인이라면서, 아무리 원해서 키운 게 아니더라도 자신이 키우는 생물에 조금 더 애정을 쏟아야하지 않나?
칼리우스는 한참을 웃다가 이내 정색하며 헛기침을 하더니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뭐, 그럼 그렇게 하죠. 깜장이.”
그는 그렇게 말하고 한참을 곱씹듯 깜장이라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
마차가 정문을 지나가고도 저택이 나오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아스펠라는 광활한 들판을 내다봤다. 관리가 전혀 되지 않는 황무지 같은 땅이었다. 아스펠라는 눈을 감았다. 들판에 마구잡이로 자란 식물들이 뭐라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세상에, 이 비옥한 땅을 이런 식으로 방치하다니…….’
여기에 농사든 정원이든 뭐든 심으면 엄청나게 잘 자랄게 분명했다. 아스펠라는 들판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는 칼리우스를 슬쩍 쳐다봤다. 그는 창밖이 궁금하지도 않은 건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가만히 책만 읽었다.
저 멀리서 보이는 저택은 벌써부터 화려했다. 마차가 속도를 올렸다.
에르윈 대공의 저택은 정말로, 정말로 엄청나게 대단했다. 아스펠라는 살면서 이런 곳을 처음 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항상 자그마한 오두막과 약방만 다녔으니까. 제 오두막의 천 배는 넓어 보이는 거대한 저택에 아스펠라가 입을 떡, 벌렸다.
저택보다는 성이 더 어울렸다.
마차가 저택의 앞마당에 도착했다. 저택의 모든 시종들이 나와 대공을 맞이했다. 대공은 마차에서 먼저 내려 아스펠라가 높은 마차에서 내려올 수 있도록 손을 잡아줬다. 아스펠라는 그런 호의들이 대부분 부담스러워 눈치를 봤다.
시종들은 칼리우스를 보자 허리를 있는 대로 숙이며 인사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주인어른.”
세상에. 이런 대접을 받는 사람이구나. 사실 아스펠라는 대공이라는 신분이 얼마나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워낙에 사회와 동떨어져 살기도 했지만, 아마 아스펠라 말고도 일반 백성들 역시 마찬가지 일 거다. 마치 거대한 아스펠 산의 나무들이 총 몇 그루인지 가늠할 수 없는 것처럼.
칼리우스는 익숙하게 시종들의 인사를 받았다. 시종들은 칼리우스 뒤에 딸려온 작은 여자를 쳐다봤다. 웬 허름한 누더기 같은 옷을 입은 여자가 뻘쭘하게 서 있지 않나. 그것도, 대공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아스펠라는 괜히 눈치가 보여 슬쩍 고개를 숙였다. 이런 대우를 받는 사람한테 너무 말을 편히 한 것 같아 얼른 제가 했던 말들도 곱씹어 봤다. 혹시나 무례하다며 잡아가면 어떻게 하나.
칼리우스는 아스펠라를 가리키며 시종들에게 말했다.
“잘 모시도록.”
“예, 주인어른.”
시종들은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다가도 얼른 고개를 숙였다. 천하의 칼리우스 에르윈 대공이 저런 누더기 꼴의 여자를 에스코트하는 이유가 뭘까. 하지만 높으신 분이 그리 말하니 극진히 대할 뿐이다.
시녀들이 아스펠라 옆으로 오더니 생글생글 친절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 이리로 오시지요.”
아스펠라는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표정으로 칼리우스와 시녀들을 번갈아봤다. 그러자 칼리우스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해치진 않을 겁니다.”
그거야 당연해야 할 일 아닌가!
하녀들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아스펠라를 어디론가 모셨다.
그곳은 다름 아닌 목욕탕이었다. 아스펠라는 제 몸에서 냄새가 나는 건가 싶어 얼른 코를 킁킁댔다. 매일 냇가에서 몸을 씻는데.
“제 몸에서 냄새가 심한가요?”
아스펠라의 질문에 하녀들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다만 저희 대공 각하께서는 워낙 청결과 후각에 예민하셔서요. 꼭 이해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불쾌한 표정 짓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아스펠라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대공가의 저택답게 목욕탕도 엄청났다. 아스펠라는 무슨 목욕탕 주제에 제 오두막 보다 넓은 건지 황당할 뿐이다.
하녀들은 송구스러울 정도로 친절하게 아스펠라를 대했다.
“아가씨, 옷을 벗기겠습니다.”
“제, 제가 혼자 할게요!”
누가 자신의 시중을 들어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스펠라는 당황하여 얼른 하녀들에게 손을 내둘렀다. 그러나 하녀들은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될 일입니다. 주인어른의 손님이신데 어찌. 저희가 시중을 들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세, 세상에, 진짜로 벗기시려고요?”
“어머, 그럼요.”
세상에, 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옷을 벗겨준 이는 없었다. 아스펠라는 남이 옷을 벗겨 주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듯 어색하게 몸을 틀었다.
하녀들이 아스펠라의 옷을 벗기다 깜짝 놀랐다.
커다란 흉터가 등과 팔뚝이 나 있다. 아직 다 아물지 못해 붉은 기가 감도는 흉터. 어디 그뿐이었을까. 심장 부근에도 작지만 깊어 보이는 흉터가 울퉁불퉁 나 있었다. 이 작은 몸집에, 어려보이는 나이에, 무슨 짓을 하고 다니면 이렇게 흉터들이 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얼굴에 드러났다.
아스펠라는 괜히 창피해져 헛기침을 했다. 고참으로 보이는 하녀가 아스펠라의 커다란 흉터에 물이 직접적으로 닿지 않도록 도톰한 수건을 대줬다. 그네들은 표정을 갈무리하고 다시 아까 전처럼 유하게 웃으며 말했다.
“발부터 천천히 들어가시죠.”
욕조라기엔 너무 넓다. 스무 명의 성인이 들어가고도 남을 거 같다. 아스펠라는 발끝부터 천천히 퍼지는 따듯함에 저도 모르게 감탄을 했다.
“크으…….”
“물 온도가 맞으시나요?”
“네.”
하녀들은 아스펠라의 머리칼을 감겨주고, 몸을 마사지해줬다. 매일 약초를 캐고 산을 오르느라 뭉친 어깨와 다리근육이 시원하게 풀리며 온몸이 노곤노곤해졌다.
머리를 감겨주는 손길은 또 왜 이리 부드러운지. 잠이 솔솔 오는 것이 꼭 마법을 부리는 것 같다. 슬금슬금 눈꺼풀이 감길락 말락 할 때쯤이었다.
갑자기 욕실 문이 열리고 중년의 시녀장이 들어왔다.
눈이 위로 올라가있고 머리에는 어떠한 장식도 없이 하나로 묶어 올린 모습은 굉장히 까칠해보였다. 그녀는 신경질적인 눈초리로 아스펠라를 쳐다봤다.
“주인 어르신께서 잠시 급한 일이 생겨 부득이하게 식사는 함께 못 하실 거 같다 하시더군요.”
“네,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는 이 집의 애완―”
애완견을 만나기 위해 따라온 것뿐이라 말하려는데, 시녀장이 말을 뚝 끊어냈다.
“그러시겠죠. 허면, 식사를 이곳으로 가져올까요. 아가씨?”
마치 비아냥대듯 아가씨라 부르는 어조에 힘이 들어가 있다. 아스펠라는 그녀가 왜 자신에게 저런 태도를 취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식사를 욕탕에서 한다고?
원래 귀족들은 욕탕에서 음식을 먹기도 하나?
“네. 그렇게 해주세요.”
사실 아스펠라는 음식을 어디서 먹건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녀장이 피식 웃으며 그럼 그렇지. 중얼거리며 훽 나가버렸다.
시녀장의 돌발 행동에 아스펠라의 시중을 들던 하녀들도 잠시 주춤대며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스펠라는 그들이 왜 이러는지 그저 이해하지 못할 뿐이었다.
목욕을 하면서 음식을 먹은 뒤, 아스펠라는 그들에게 이끌려 샤워 가운만 입은 채로 어떤 방에 이끌려갔다. 거긴 수많은 드레스와 장신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까 전 그 뾰족뾰족한 시녀장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 방의 모든 것은 다 아가씨 것입니다.”
“네?”
“아가씨를 위한 방도 따로 마련되어 있고요. 자, 얘들아. 옷을 입혀 드려라. 밤이 오지 않았니.”
시녀장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아스펠라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하녀들에게 말했다. 하녀들은 갓 목욕을 마치고 축축해진 아스펠라의 몸을 수건으로 닦아준 뒤 기다란 머리칼을 말리기 시작했다.
몸집도 자그마한 아스펠라에게 일곱 명의 하녀들이 다닥다닥 붙었다. 이 밤중에 화장은 왜 하는 건지. 계속 눈을 감고 있으라는 말에 아스펠라는 변변찮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그대로 따랐다.
원래 귀족들은 잠을 자기 직전에도 허옇게 분칠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들었던 지라. 사실 시장통에서 주워 들은 귀족들의 이야기에는 워낙에 허무맹랑한 소리가 많았기에 이런 것들도 그 중에 하나인가 생각했다.
“귀족들은 이런 옷을 입고 자나요?”
아스펠라는 속이 훤히 비치는 드레스자락을 보고 당황하여 물었다. 뭔가를 막 입히기에 잠옷을 입혀주나 싶었는데, 확실히 외출복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지만 잠옷이라기엔 몸이 편하지도 않았다.
“방으로 모실게요.”
거울 한번 보지 못한 채 방으로 향했다.
머리에 장식을 잔뜩 올려 고개를 숙이지도 못하고 기울이지도 못했다. 귀족들은 자면서도 품위를 지키기 위해 불편하게 앉아서 잔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지라, 아스펠라는 이것 역시 일부러 몸을 불편하게 하여 흐트러지지 않게 하려는 의도인가 생각했더랬다.
하녀들은 아스펠라를 침대에 앉힌 뒤 방문을 닫고 나갔다. 어두운 방안을 비추는 건 촛불 몇 개뿐이었다.
이러고 자라는 건가? 아스펠라가 당황하여 거기 아무도 없어요?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엉거주춤 침대 이불을 들추고 그 안에 들어가 몸을 뉘였다.
“귀족들은 원래 이렇게 잔단 말이야? 불편하기도 해라.”
이불 속에서 버석거리는 재질도 불편하고, 중요 부위를 가리기 위해 옷을 입는 건데 그마저도 기능을 못하니. 아스펠라는 결국 안 되겠다 싶었는지 머리에 잔뜩 올린 장신구를 뜯어내듯 빼고 옷가지도 싹 벗어 차곡차곡 갠 뒤 침대 옆 협탁에 놔뒀다.
완벽한 알몸이 되긴 했지만, 예의 옷 같지도 않은 것과 잔뜩 무겁게 올린 장신구들을 차고 있을 때보다는 훨씬 편했다.
부드러운 실크로 만들어진 푹신푹신한 이불의 감촉이 여실 없이 느껴졌다. 대충 약방 영감님이 주셨던 이불들을 기워내 숨이 잔뜩 죽은 이불과는 차원이 다른 감촉. 귀족들은 이 좋은 걸 매일매일 덮고 자는구나. 아스펠라가 기분 좋은 듯 침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침대는 아스펠라 혼자 자기에 과하게 넓었다.
여기라면 깜장이랑 너구리 영감이랑, 사슴과 다른 산속 동물들과 함께 자도 좁지 않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며 아스펠라는 문득 깜장이를 떠올렸다.
원래 깜장이를 보러 온 건데, 아아, 오늘은 너무 일이 많았으니까 자고 나서 만나볼까. 아스펠라는 꾸벅꾸벅 졸려오는 잠결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한창 잠에 취해 있을 때였다. 침대에 뭔가가 풀썩하고 쓰러지듯 떨어졌다. 덕분에 잠에서 깬 아스펠라가 으응, 아직 잠결에 취한 소리를 내며 이불 속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침대 위로 쓰러진 뭔가는 꾸물꾸물 대며 휙, 휙 뭔가를 벗기 시작했다.
천이 쓸리는 소리가 나는 것을 보면 옷을 벗는 건가.
잠에 취해 몽롱하던 아스펠라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와 동시에 그 무언가가 이불을 들추고 침대 속에 들어왔다.
“꺄아아악!”
“으악!”
아스펠라의 비명 소리에 괴한 역시 몸을 튕기듯 일어나며 얼른 협탁 옆의 조명 끈을 잡아당겼다. 그제야 어두컴컴했던 방 안이 훤해졌다.
야심한 밤, 침대에 스며든 자는.
“에, 에르윈 대공?!”
“아스펠라? 당신이 왜 여기에…….”
당혹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던 찰나, 에르윈 대공이 이내 얼른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아스펠라는 잠시 자신이 알몸인 것을 잊고 있었다가 그의 행동에 이를 자각한 뒤 얼른 이불을 끌어모았다.
또한 아스펠라는 지금까지 자신이 무슨 취급을 받아왔던 건지 깨닫게 되었다.
아아. 나를 손님으로 맞이하긴 했지만, 시녀장의 그 뾰족한 태도는 그냥 손님이 아닌, 밤손님으로 착각해서 나온 반응이로구나.
소란을 듣고 달려온 에르윈 대공의 비서와 시녀장이 문을 두드렸다. 아스펠라는 얼른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고, 대공이 화를 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그들을 들어오게 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거지, 헬렌?”
“예?”
아스펠라 역시 이 상황이 수치스럽고 당혹스러웠다. 시녀장은 아직 제 잘못을 깨닫지 못한 듯 했다. 아스펠라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분께서 저를 밤손님으로 착각하셨나 보군요. 이곳이 대공 각하의 방이 맞다면요.”
헬렌의 눈이 재빠르게 상황파악을 위해 굴러갔다.
“죄, 죄송합니다. 각하.”
“사과는 내가 아니라 저 여인한테 해야하는 게 맞는 거 아니겠나. 일단 옷부터 가져다드려.”
“옷은 여기 있답니다. 옷의 기능을 전혀 못해서 그렇지.”
아스펠라가 자신이 벗어둔 얇디얇은 천을 검지와 엄지로 집어 들며 말했다. 에르윈 대공이 옷을 보더니 한층 더 낯빛이 짙어졌다.
“……이번엔 제대로 된 옷을 가져와야 할 거야.”
어찌나 무시무시한 눈으로 바라보는지 시녀장이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는 달려 나갔다. 사람이 이렇게나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빠르게 옷을 들고 온 시녀장이 아스펠라에게 정중히 옷을 건넸다.
에르윈 대공은 비서와 시녀장을 내보냈다.
“미안합니다. 아스펠라. 어련히 알아서 잘 모실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오해를 받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당혹스럽고 수치스럽긴 하지만, 대공께서 의도한 게 아니니 사과는 받아들일게요.”
아스펠라가 그렇게 말한 뒤 셔츠와 속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대공이 얼른 고개를 돌리며 괜히 바닥에 떨어진 장신구들을 주웠다.
“아스펠라. 당신 등에서.”
“아. 이런. 상처가 터졌나 보네…….”
아스펠라는 셔츠에 드문드문 묻어나는 피를 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워낙에 깊은 상처였던지라 아무는 데 몇 달은 걸릴 거라던 상처가 결국엔 터지고 만 것이다.
언제 터진 거지? 아까 전 침대에서 활처럼 튕겨 올라 몸을 일으킬 때 이리 된 것인가. 생각보다 피가 더 많이 배어나오기 시작하자 아스펠라는 곤란한 듯 제 등을 만지작댔다. 알싸한 고통이 조금씩 올라온다.
“약을 가져올 테니 기다리세요.”
에르윈 대공이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이내 붕대와 연고를 들고선 돌아왔다.
“제가 직접 해도 되는데.”
“제가 치료하게 해주십시오. 제가 치료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대공의 표정이 어찌나 애달픈지, 아스펠라는 아픈 건 자신인데 왜 제가 더 아파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스펠라는 결국 뒤를 돌아 그에게 등을 내보였다. 대공이 천천히 피가 배어나온 셔츠 자락을 들어 올렸다. 상처를 확인한 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상처가 생각보다 더 깊군요.”
“아무래도 짐승의 발톱이다 보니…….”
“미안합니다. 아스펠라.”
“왜 대공께서 사과를 하세요.”
“…….”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신에 자그마한 연고통에서 연고를 퍼 대각선으로 길게 난 흉터에 살살 바르기 시작했다.
페퍼민트가 들어간 것인지, 어쩐지 연고가 닿는 부분마다 화한 느낌이 들어 아스펠라가 씁, 고통을 들이마시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럴 때면 대공은 잠시 손을 뗐다가 아까 전보다 더 조심스러운 손길로 흉터에 연고를 발라줬다.
“그때 그 사냥꾼들이 도와줬습니까?”
“네? 아, 네. 생각보다 착하신……그걸 대공이 어찌 아세요?”
“말했잖습니까. …기르던 개가 말해줬다고요.”
“깜장이랑 정말 대화라도 하신다는 건가요?”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아스펠라는 정말 이 남자가 깜장이와 대화라도 하는 건가 생각했더랬다. 그런 세세한 것까지 알고 있다는 것은 정말 동물과 말을 하지 않고서는 모를 일 아니던가.
이 세상에 자신 말고도 동물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자가 나타난 거라면, 그녀에게 있어서도 꽤나 중요한 사항이었기에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또 무슨 이야기를 하던가요, 깜장이가? 저와 지내던 일들을 모두 얘기해줬다면서요.”
떠보기 식으로 말하려 했는데, 잠시 대공의 눈빛이 요요하게 빛났다.
“궁금합니까? 무슨 얘기를 했는지.”
“…….”
아스펠라는 어쩐지 이야기를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어, 얼른 그의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이내 말을 바꿨다.
“피, 피곤하니 이제 자고 싶은데. 제 방이 따로 있다 들었는데 거기로 가면 되는 걸까요?”
칼리우스는 제 시선을 피한 아스펠라를 보며 픽 웃더니, 소파에 대충 놓여 있던 자신의 로브자락을 들어 아스펠라 어깨 위에 올려주었다.
“데려다 주겠습니다.”
“친절하시네요, 대공 각하.”
두 사람은 긴 복도를 거닐었다. 다른 하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복도 역시 촛불이 훤히 켜져 있기는커녕, 굴로 들어가는 것 마냥 어두웠다. 그 점이 이상한 듯 아스펠라가 살짝 고개를 갸웃대자 눈치챈 대공이 말했다.
“사람 많고 밝은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렇군요.”
“불편하다면, 내일부터는 촛불을 모두 켜놓겠습니다.”
“아니에요. 저 때문에 구태여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전 어차피 내일 깜장이 상태만 확인하고 갈 거라서요.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이런 배려까지 안 해주셔도 됩니다.”
“…….”
한참 복도를 거닐었다. 그가 내준 침실은 그의 방 반대편에 위치한 곳이었다. 문 앞에 멈춰선 칼리우스가 그대로 방문을 열었다. 아스펠라가 조금은 당황한 얼굴로 방 안을 쳐다봤다. 칼리우스의 방과는 전혀 다르게 촛불들이 모두 커져 환한 방이었다. 어디 환하기만 할까.
“방이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급히 준비한 거라.”
급히 준비한 거라고 하기엔 매우 완벽한 방.
아스펠 산이 곧장 보이는 커다란 창문과 화려한 침대, 화병마다 꽃이 잔뜩 꽂혀 있는 방이었다. 칼리우스는 방 앞에서 가만히 안을 보고만 있는 아스펠라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의 물음에 아스펠라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감사합니다만, 하루 자고 갈 방 치고는 너무 화려하네요, 대공 각하.”
“그럼, 내일 아침 식사 때 보죠, 아스펠라.”
느른하게 웃으며 칼리우스가 방문을 닫았다.
혼자가 된 아스펠라가 방 내부를 천천히 둘러봤다. 마치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하는 것 마냥 아스펠라는 문 앞의 카페트에서 쉽게 발을 내딛을 수가 없었다.
비르가는 종종 사람을 조심하라고 했다.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고. 맞는 말이다. 대공은 아마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이렇게 행동하는 걸 것이다. 하지만, 정말 개를 보살펴줬다고 청혼할 일인가?
아스펠라는 과하게 푹신한 침대가 불편했다. 몸에 배겨 자꾸만 뒤척였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달이 커다랗게 보인다. 멀리서는 아스펠 산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보니까 꼭 다른 산 같다. 창가에 앉아 한참 동안 산을 바라봤다.
화려한 드레스와 방, 깍듯한 시종들. 다른 이들은 꿈꿔오던 삶일 지도 모르겠지만 아스펠라에게는 불편하기만 하다.
“역시 난 이런 생활 맞지 않아.”
내일 아침 깜장이의 상태를 보고, 돌아가야겠다. 아스펠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
붉은색 두꺼운 마호가니 문 사이로 아스펠라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듣지 못했을 소리였지만, 칼리우스가 듣지 못할 소리는 없었다.
“내일 아침 깜장이의 상태를 보고, 돌아가야겠다.”
아스펠라의 방문 앞에 기댄 칼리우스가 가만히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이내 로브자락을 벗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 시트에 몸을 뉘이는 소리, 이불을 뒤척이는 소리. 한참 동안 뒤척대다 이내 잠이 든 것인지 규칙적인 아스펠라의 숨소리까지.
아스펠라는 한번 잠에 들면 누가 업어가도 몰라.
칼리우스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푹신한 침대에 파묻힌 아스펠라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스펠라.”
칼리우스가 작은 소리로 아스펠라의 이름을 불러본다.
그저 이름을 부르는 것뿐인데, 칼리우스는 아랫도리가 묵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거 원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애새끼도 안 이럴 텐데.
그렇게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면서도 칼리우스는 다시 한 번 아스펠라의 이름을 불렀다.
“아스펠라. 보고 싶었어.”
모래 같은 옅은 갈색과 금색이 섞인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내리니, 가느다란 머리카락들이 그물처럼 그의 손에 얽혀들었다. 그는 그것을 쥐어 입 맞췄다.
넓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칼리우스가 몸을 수그렸다. 아스펠라의 목덜미 가까이 얼굴을 가져간 그는 가만히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
그리웠던 향기.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당신이 그새 날 잊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증오하고 있진 않을까 얼마나 마음 졸였는데.
아스펠 산에 돌려보낼 생각 없다.
당신을 그렇게 쉽게 내 품에서 보낼 생각 없어. 아스펠라.
***
“세상에, 아가씨. 왜 이런 곳에서 주무세요?”
누군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아스펠라는 흐릿한 눈을 부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녀였다. 아스펠라가 중얼거렸다.
“침대가 너무 푹신해서요.”
“네?”
아스펠라는 결국 새벽즈음 불편함을 못 이기고 바닥으로 내려갔다. 목이 떨어질 것 같이 높은 베개 대신 팔을 베고 두꺼워 질식할 것 같은 이불 대신 그 위에 장식용으로 올려놓은 담요를 덮으니 그나마 편해졌다.
시녀는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었다. 푹신하면 좋은 거지 왜 그 좋은 침대 내버려두고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서 자는가.
“세숫물을 떠왔습니다. 얼른 이리로.”
시녀는 소파에 아스펠라를 앉힌 뒤 수건에 물을 묻혀 아스펠라에게 건넸다. 아스펠라는 부담스러워 얼른 세수를 했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시녀들이 커다란 행거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오늘 입으실 옷을 고르셔요.”
“네?”
행거에 가득 걸려 있는 비싼 드레스들이 번쩍거렸다. 아스펠라는 당황스러웠다. 어제 준 옷을 입는 게 아니었나?
“주인 어르신께서 아가씨를 위해 준비한 것입니다.”
시녀들은 마치 세기의 사랑 이야기라도 읽은 것 마냥 황홀한 얼굴로 말했다. 아스펠라는 당황스러워 물었다.
“어제 입은 옷도 있는데요.”
“어제 입은 옷은 어제 입은 옷이지요. 오늘은 날씨가 화창하니 이 청록색 드레스는 어떠신가요?”
“원래 하루마다 다르게 옷을 입어야 하나요?”
아스펠라는 제가 모르는 귀족들 간의 규칙인가 싶어서 물었다. 시녀들은 당황스러운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 아스펠라도 당황스러워 눈을 깜빡였다. 사태를 해결해준 건 시녀장이었다.
“아가씨께서 입고 싶으신 대로 입으시면 됩니다.”
“그럼 제가 입고 온 옷을―”
“죄송하게도 그건 아직 다 마르지가 않았답니다.”
“아, 그럼―”
“아가씨,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옷들은 모두 주인 어르신께서 아가씨께 드리는 것이니까요.”
그게 제일 부담스러운 말이었다. 아스펠라가 멍하니 있자 시녀장이 옷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아까 시녀의 말대로 날씨가 좋으니 청록색 드레스를 입으심이 어떠실까요? 아가씨의 금발과 매우 잘 어울립니다.”
아스펠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입고 어제처럼 화려한 머리 장식을 마친 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내려갔다. 칼리우스는 여전히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고, 아스펠라를 보자마자 의자를 빼내줬다.
“잠은 잘 잤습니까.”
“네, 뭐…….”
“들어보니 바닥에서 주무셨다는데. 침대가 불편하십니까.”
“낯선 곳이다 보니까요. 불편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너무 편해 불편한 거죠.”
“그렇군요.”
말없는 식사가 시작되었다. 순서대로 음식이 차례차례 바뀌고 어제와 같이 디저트와 차까지 마셨다. 아스펠라는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말했다.
“대공 각하, 이 정도면 답례를 차고 넘칠 정도로 받은 것 같습니다. 깜장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전 이만 제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그럼, 잠시 산책을 하고 보시죠.”
“아뇨. 지금요.”
“마음에 안 드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칼리우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스펠라는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얼른 말했다.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무엇이.”
“모든 게 다요. 각하, 전 딱히 답례를 바라고 보살핀 것이 아닙니다. 보상을 받을 생각도 없었고, 그러니 청혼도 더더욱 받을 수 없습니다. 물론, 왜 청혼을 하시는 건지도 이해 못 하겠지만.”
이때다 싶어 아스펠라는 다 말했다.
“큰 호의를 베풀어주신 건 두고두고 감사하겠습니다만, 저는 이런 생활을 딱히 바라지도 않았고, 아스펠에서의 삶이 더 편합니다. 주신 보석이나 드레스들도 모두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건 모두 그대를 생각하며 산 것입니다.”
만난 적도 없는데 어찌 아스펠라를 생각하며 옷을 산단 말인가.
“흠……그렇게 불편합니까?”
아스펠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어쩔 수 없군요.”
칼리우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말하는 그의 표정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최고의 지위와 부를 주겠다는데 마다하는 사람은 처음입니다. 산속보다는 여기가 더 안락할 텐데요.”
“전 20년 동안 그곳에서 생활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네?”
“아니, 얘기 들었습니다. ‘깜장이’한테요.”
“―그러니 이곳보다는 아스펠 산이 더 제게 편하고 안락합니다. 그보다 이제 깜장이를 보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프다고 들었는데, 빨리 치료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 지금 이렇게 고급 옷을 입고 비싼 음식을 먹는 것보다 깜장이의 상태를 보러 가는 게 더 우선 아니었던가. 아스펠라가 긴박하게 물었다. 칼리우스는 깜장이가 그리 걱정되지도 않는 걸까. 그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느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저녁에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인간이 또 자고 가게 하려는 속셈인건가. 아스펠라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그러자 그는 이번엔 진짜라며 갑자기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물었다.
“펠킨, 오늘 두 번째 보름달이 뜨지?”
“예, 각하.”
“보름달이 뜬다는군요. 아스펠라 양.”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어서 아스펠라는 가만히 차를 들이켰다. 이번에는 진짜 ‘깜장이’를 만나라며 칼리우스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
하지만 결국 밤이 될 때까지 아스펠라는 ‘깜장이’를 만나지 못했다. 에르윈 대공은 은근슬쩍 시간을 끌며 저택의 도서관을 데려가거나 정원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는 할 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비웠다.
아스펠라는 또 기가 막힐 정도로 넓은 도서관과 화려한 조성의 정원을 둘러보다 본래의 목적을 잃고 말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못 넘어가, 하며 제 방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자 칼리우스의 비서가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에르윈 대공 각하의 비서 펠킨입니다.”
“아, 네…….”
펠킨이 깍듯하게 인사를 하며 아스펠라에게 말했다.
“대공 각하께서 까, 깜장이 님께 아가씨를 안내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깜장이라는 이름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는지 푸흡, 웃음을 터트리다가도 얼른 정색하며 말했다. 아스펠라는 드디어 만나는군! 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갔다.
“저, 아스펠라 양. 에르윈 대공 각하께서는 어제 잠시 출장을 가셨습니다.”
“네? 출장이요? 이렇게나 갑자기요?”
“네. 보름 뒤쯤 돌아오실 거 같습니다. 부득이하게 손님을 두고 가는 것이 죄송하다며 돌아오실 때까지 극진히 아스펠라 양을 대접하라 하셨습니다.”
“보름요? 저는 이틀 정도만 깜장이를 돌보다 가려고 했던 건데―”
분명 저녁 식사까지 함께 했는데, 그럼 그 야밤에 출장을 떠난 건가. 아스펠라는 대공이라고 마냥 놀지는 않나 보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동안에 그…… 깜장이 님도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리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스펠라 양께서 그 깜장이 님을 잘 다루시는 것 같아서요. 아, 물론 금전적 사례를 충분히 하겠습니다.”
“……으음, 그럼 알겠습니다.”
아스펠라가 승낙하자 펠킨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펠킨은 지하로 그녀를 안내했다. 아스펠라는 목소리가 울리는 동굴 같은 지하를 내려가며 물었다.
“이런 곳에서 기르는 건가요?”
대단히 걱정스러워하는 목소리였다. 펠킨은 어색하게 웃으며 둘러댔다.
“아무래도 아직은, 그, 훈련이 안 되어 자꾸만 도망쳐서요. 여기 가두면 좀 잠잠하더라고요. 각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고요!”
계단을 다 내려가자 병사 둘이 앞을 지키고 있는 커다란 돌문이 나왔다. 돌문 안에서는 쿵쿵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나가고 싶어 온몸으로 돌벽에 부딪히는 걸까. 병사들이나 펠킨은 정말로 벽이 무너지면 어쩌지, 하는 불안한 눈초리였다.
“문을 열게나.”
“예, 펠킨님.”
돌문은 매우 두꺼웠다. 병사 둘과 펠킨이 힘을 합쳐 겨우 문을 열었다. 펠킨은 힘이 드는지 헉헉, 숨을 내쉬며 아스펠라에게 말했다.
“이리로 들어오시죠.”
안으로 들어갈수록 짐승의 냄새가 진하게 났다.
아스펠라의 걸음이 빨라졌다. 커다란 공간이 나왔다. 우물처럼 저 높이 하늘이 보였다. 뚫린 하늘에서는 둥그런 보름달의 환한 빛이 내려왔다.
아스펠라는 보름달이 만들어낸 조명의 한가운데 들어갔다. 그리고 맞은편의 아주 짙은 어둠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자 그 사이에서 붉은 빛이 번쩍 빛났다.
크르르르르.
위협적인 소리가 어두운 쪽에서 났다. 펠킨이 파랗게 질려 얼른 아스펠라에게 인사를 하고선 병사들과 함께 얼른 문을 닫았다.
돌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마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스펠라가 반가운 듯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야.”
마수는 여전히 공격적으로 송곳니를 보였다.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걸까. 한참 동안 적안을 빛내며 아스펠라를 쳐다보던 마수가 드디어 그녀를 기억해낸 건지 주둥이를 아스펠라의 손에 갖다 댔다.
[내가 밉지 않나?]
“밉기는 무슨. 자, 얼른 이리 나와. 오랜만에 보고 싶다.”
아스펠라의 말에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째 저번보다 몸이 더 커진 것 같다.
“주인이 없다면서.”
[미안. 어쩌다 보니 숨기게 되었어.]
“괜찮아. 그나저나 다친 곳은? 아프다던데.”
얼른 그의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며 걱정스러운 듯 아스펠라가 물었다. 저번에 도망치다가 다친 건지 아직 상처들이 덜 아물었다. 아스펠라는 속상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마수는 대신에 주둥이로 아스펠라의 등을 쿡쿡 눌렀다.
“등은 괜찮아. 거의 다 아물었어. 별로 세게 할퀴지도 않았던데?”
[아픈 건 마찬가지잖아.]
“넌? 그때 어떻게 도망쳤어? 사냥꾼들이 총을 쏴대지 않았니? 주인이 치료는 다 해줬고?”
[응.]
“다행이다.”
아스펠라는 기뻐서 그의 털에 온몸을 묻었다. 따듯하고, 여전히 심장소리가 빨리 뛰는 것이 느껴졌다. 그를 만나서 들뜬 건지 스스로 생각해도 오늘은 말이 많았다.
“있잖아. 대공 각하가 네 이름을 나보고 지어 달랬어.”
[그래?]
“내가 뭐로 지었게.”
[뭔데?]
“깜장이야. 어때, 귀엽지?”
[너무 나와 안 어울리잖아.]
“잘만 어울리는데 뭘. 왜, 싫어? 마음에 안 들면 바꿀까?”
시무룩해진 아스펠라의 모습에 마수는, 아니, 깜장이는 얼른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바꿨다.
[마음에 들어. 네가 지어줬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아스펠라에게 제 얼굴을 비볐다. 그러자 아스펠라가 생긋 미소 지었다.
“자, 이제 대공님이 말한 대로 네 상태를 봐야겠어. 의사들의 진료도 거부한다던데, 왜 그래?”
[날 보면 다들 창백해져선 기절하니까. 날 보고도 기절하거나 죽이려 들지 않는 인간은 너밖에 없어.]
“아무나 너랑 대화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참. 대공님과 너 대화할 수 있니?”
[음…… 대화까지는 아니고. 그 남자는 눈치가 빠르거든. 아마 내가 산속에서 온 걸 보고 널 찾아간 거겠지.]
“그치? 너에 대해 잘 아는 건 나밖에 없지?”
아스펠라가 뿌듯하게 물었다. 마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스펠라가 하하 웃으며 그의 주둥이 부분을 껴안았다. 어찌나 몸집이 큰지 아스펠라가 팔을 두르자 그 안에 꽉 찼다.
“저번보다 몸이 커진 기분이야.”
[그러게…….]
“몸이 더 커지면 이곳에서 지낼 수 있을까?”
[저택의 사용인들도 내 존재를 알긴 하지만, 안전을 위해서 여기 지내는 게 맞는 거겠지. 몸이 더 커져도 어쩔 수 없어. 지상으로 올라가면 언젠가 다른 인간들 눈에도 띌 거야.]
눈을 감고 있던 마수가 붉은 눈동자를 굴려 아스펠라를 담았다. 아스펠라는 그의 붉은 눈동자가 굉장히 슬퍼보였다. 풀이 죽은 듯한 그를 가만히 쓰다듬자 마수가 말을 이었다.
[날이 많이 어두워졌어. 아스펠라. 그만 방에 가도록 해. 대공이 방을 주지 않았나?]
“줬지만, 역시 난 그런 방보다 내 오두막이나 네 곁이 더 편해. 아침마다 수발들러 오는 사람들도 불편하고 이런 드레스도 부담스러워. 난 평소처럼 사는 게 제일 편한데 말이야.”
[그래도.]
“그러니 여기서 너와 함께 잘래.”
[그건 안 돼.]
“왜?”
[여긴 너무 추운 곳이니까.]
“너랑 같이 자면 되잖아.”
[그건 안 돼.]
“……흠, 안 된다는 것 치곤 꼬리를 너무 붕붕 흔드는데?”
아스펠라가 풉 웃음을 터트리며 마수의 꼬리를 가리켰다. 커다란 덩치기 때문에 꼬리도 엄청 크고 길었다. 붕붕 소리가 날 정도로 그는 기분 좋은지 꼬리를 흔들었다.
역시 개는 개다. 아스펠라의 말에 마수는 끙, 소리를 내며 추우니 잘 붙어 자라고 말했다. 아스펠라는 얼른 그의 옆구리 쪽으로 갔다. 그의 품은 굉장히 따듯해서 금세 잠에 들 수 있었다.
***
에르윈 대공이 돌아오기 전까지 아스펠라는 마수와 함께 나날을 보냈다. 사소한 대화를 하거나, 지하 동굴 안을 목적 없이 빙빙 돌면서 놀거나, 아스펠라가 책을 읽으면 마수는 잠자코 들어주거나, 간식을 먹거나.
딱히 뭘 해야지, 싶은 마음 없이도 둘은 보름 동안 잘 지냈다.
펠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스펠라는 잠은 항상 마수의 곁에서 잤다. 이상하게도 그의 옆에 있으면 마치 비르가와 함께 있는 것 마냥 포근했다.
아스펠라는 그의 털에 얼굴을 부비며 말했다.
“깜장아, 너랑 같이 있으면 비르가가 생각이 나.”
[비르가?]
“응. 비르가도 너처럼 고운 털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수는 비르가가 여태까지 사람인 줄 알고 있었던 터라 당황하여 물었다.
[비르가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비르가는 아스펠 산의 수호신이야. 그래서 신의 모습도 하고 인간의 모습도 할 수 있어.”
[그렇군. 아스펠라, 비르가는…… 어쩌다 죽은 거지?]
“비르가는, 인간들에게 공격받았어. 다른 산의 수호신을 도와주려다가 같이 공격받았지. 아마 그 공격은 에르윈 대공의 부하들이 하지 않았을까?”
아스펠라의 말에 마수는 잠시 침묵했다.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생각하는 듯 했고, 이내 죄책감을 가진 듯 끼잉, 풀 죽은 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내 마수가 말했다.
[그를 많이 원망하겠군.]
“원망도 했지. 하지만 비르가는 각자의 사연이 있을 테니 인간을 미워하지 말라 그랬어.”
[…….]
“……자연으로 돌아갈 때가 되어서 간 것뿐이야.”
아스펠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마도 비르가의 죽음을 회상하는 것 같았다.
비르가는 며칠 동안 보이질 않다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아스펠라를 보기 위해 온 것 마냥, 비르가는 한참 동안 아스펠라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흙이 되었다.
흰 털은 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필시 인간들의 소행이었다.
아스펠라는 인간들을 너무 원망하지는 않았다. 비르가의 유언 때문이었다.
인간을 너무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그의 말대로 미워하지는 않지만 좋아하지도 않는다.
「아스펠라. 이제 신들의 시대는 지나가는 거다. 그게 흐름인 거야. 인간들은 계속해서 발전하길 원하고 자연을 뛰어넘길 원해. 아스펠라. 인간들을 미워하지 마라. 그들은 언젠가 다시 깨닫게 될 테니까. 자연을 괄시해서는 안 된다는 걸. 그 후회 역시 흐름이겠지…….」
너는 아스펠 산을 지켜줘라. 아스펠라.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 나의 딸이여.
어찌할 새도 없이 흙으로 바스라진 비르가를 바람이 가져가버렸다. 거센 바람이 오두막을 지나갔고 비르가는 그렇게 산으로 돌아갔다.
아스펠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쩐지 슬퍼져 마수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그녀가 위로받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챈 마수는 제 품에 얼굴을 묻은 아스펠라의 팔 사이로 주둥이를 집어넣었다.
“뭐야…….”
커다란 주둥이로 슬금슬금 제 겨드랑이 사이에 들어오려는 그가 웃겨 아스펠라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컹! 하며 마수가 크게 짖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아스펠라의 다리를 툭툭 밀며 제 등에 태웠다.
[꽉 잡아야 해. 아스펠라.]
“뭘 하려― 꺄악!”
마수는 그 높은 우물 벽을 단숨에 올라갔다. 아스펠라는 혹여나 떨어질까 얼른 그의 갈기를 꽉 쥐었다. 높은 우물에서 나오자 곧장 들판이 보였다.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마수는 커다란 몸집과 기다란 다리로 훌쩍 훌쩍 들판을 넘더니 그대로 산으로 달려갔다. 그의 등에 탄 아스펠라는 처음 느껴보는 속도감에 가슴이 트이는지 때때로 신나서 환호성을 보내기도 했다.
들판을 넘어, 강을 넘어 아주 멀리 있는 아스펠 산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바람에 머리칼이 이리저리 날려도 아스펠라는 신나는지 눈을 감고 풀내가 은은히 나는 바람의 냄새를 맡았다.
마수는 아스펠 산의 꼭대기까지 열심히 달렸다.
마침내 산의 꼭대기에 올랐을 때가 되어서야 열심히 굴리던 발을 멈췄다. 아스펠라는 처음으로 아스펠 산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인간의 몸으론 체력과 산의 고도 때문에 정상에 오르기란 불가능했다.
아스펠라는 눈앞에 펼쳐진 절경에 눈이 아찔해졌다. 분명 고도가 높아 숨이 막혀야 하는 게 정상일 텐데도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신발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땅에 발을 댔다. 차갑고 촉촉한 흙바닥에 아스펠라가 씩 미소 지으며 발가락을 꿈질댔다. 아스펠라에겐 화려한 자수가 놓아지거나 보석이 박힌 꽉 죄는 신발보단 이편이 더 좋았고, 편했다.
한동안 신나서 뛰놀던 아스펠라가 깜장이에게 물었다.
“이렇게 저택 밖으로 나와도 되는 거야? 아침마다 비서님이 와서 확인하잖아.”
[잠깐정도는. 하도 우울해하잖아.]
마수는 아스펠라의 말투를 따라 하며 말했다. 그게 귀여운지 아스펠라 쿡쿡 웃으며 그의 몸뚱이에 몸을 기댔다.
“우물도 소용이 없겠는데?”
[그러게. 펠킨한테 아물 벽을 높이거나 막으라고 말해야―]
“응?”
[아무것도. 아스펠라. 기분은 좀 나아졌나?]
“완전히!”
아스펠라가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아스펠 산의 꼭대기에서는 튀니아 왕국의 모든 것들이 작게 보인다. 에르윈 대공의 거대한 저택도, 그 위로 더 올라가면 보이는 하늘을 찌를 것 같이 높던 튀니아 왕궁도. 모두들 아스펠 산 앞에서는 티끌처럼 보인다.
“고마워. 깜장아.”
깜장이는 역시 적응되지 않는다. 마수는 컹, 소리를 내며 아스펠라에게 꼬리를 흔들면서도 깜장이라는 소리에는 끙, 하며 붉은 눈동자를 굴렸다.
둘은 동이 터오를 때까지 절경을 바라보다, 다시 소소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새벽 이슬에 아스펠라가 몸을 떨자 마수는 꼬리로 아스펠라의 어깨를 감싸주기도 했다.
지평선 너머 아주 조그맣게 노랗고 주황색의 빛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스펠 산의 나무들 사이로 빛을 비추며 모든 생명체들을 깨우기 시작한다.
아스펠라는 그 순간이 너무 좋았다. 아침 안개의 눅눅한 느낌도, 제 옆을 데우는 깜장이의 체온도, 천천히 떠오르는 태양과 그 태양과 함께 잠에서 깨어나는 생명체들도. 그 모든 생명체의 근원인 발밑의 흙들도.
산이 좋다. 지금 이 순간도 좋다.
동그란 태양은 라일락 꽃처럼 흩뿌려진 보랏빛 장막들도 모두 다 걷어냈다. 밤의 흔적들은 모두 사라졌다. 푸른 하늘이 점점 진해지고 새들의 지저귐은 한층 높아졌다. 뿌옇게 부유하던 안개들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스펠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흙을 툭툭 털며 마수에게 말했다.
“그만 돌아가자. 비서님이 놀라시겠어.”
익숙한 듯 그의 등에 올라타며 아스펠라가 다시 그의 갈기를 꽉 잡았다. 마수는 왔던 것처럼 한달음에 우물가로 향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
다시 지하로 도착한 아스펠라는 두 손으로 마수의 주둥이를 받친 뒤 촉촉한 코에 입술을 살짝 맞췄다.
시기 좋게 펠킨이 문을 열고 들어와 아스펠라에게 아침 인사를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스펠라 양.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으니 올라가실까요.”
비서를 따라 위로 올라가려 하자 뒤에서 마수가 말했다.
[아스펠라. 오늘은 찾아오지 마.]
“왜?”
마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펠킨은 아스펠라가 자신에게 물은 건 줄 알고 뒤를 돌아 그녀를 쳐다봤다.
“제게 뭐 물으셨습니까?”
“아뇨, 아니에요.”
아스펠라는 그렇게 말하며 마수를 쳐다봤다. 마수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며 주저앉았다. 아스펠라를 데리고 저택으로 올라온 펠킨이 그녀를 힐긋 쳐다보며 말했다.
“깜장이 님과 마치 대화라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산에서 지내셔서 그런지 일반인들보다 감이 더 좋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펠킨은 비아냥거리기는커녕 최대한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치 저에게 관심이 넘쳐나는 듯 보여서 아스펠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런데 비서님께서는 깜장이 님이라고 부르시네요.”
“아……. 그게, 하하, 대공 각하의 애완견이다 보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예의를 차리는 거 아닌가. 아스펠라는 과하게 당황한 펠킨을 보며 엄청나게 예의를 중시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오늘 밤은 오지 말라던 마수의 말에 아스펠라는 왜인지 걱정스러워졌다.
“오늘 밤에는―”
그러자 펠킨이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아, 오늘 밤에는 지하로 내려가지 마시지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이, 어……. 아, 내일 아침에는 대공 각하께서 돌아오시기 때문에 저택에서 주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아스펠라 양을 제대로 대우 안 해줬다면서 혼날 것 같아 그럽니다.”
펠킨이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스펠라는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을 먹다 보니 하품이 절로 나왔다. 밤새 마수와 대화를 하고 절경을 보느라 잠을 자지 못해서 그런가. 펠킨은 아스펠라의 뒤에 서 있으면서도 귀신같이 하품을 눈치채곤 그녀를 침실로 안내하도록 했다.
침대에 누운 아스펠라는 불편함을 느낄 새도 없이 단잠에 빠졌다. 펠킨은 그녀가 푹 잠이 들었다는 시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아스펠라 양이 변화가 끝나기 전에 깨어나 마수를 찾으시면, 잘 둘러대거라.”
“예, 펠킨 님.”
펠킨은 그렇게 주의를 준 뒤 에르윈 대공의 의복과 커다란 수건, 신발 등을 들고 지하로 내려갔다.
“시작되었나.”
“예, 나가시고 나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돌문 앞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뒤에서는 연신 쾅쾅대는 소리가 들렸다. 기괴한 울음소리와 고통에 몸부림치는 소리가 한동안 쉬지 않고 들려왔다.
키에에엑! 끄아아악! 그것은 사람의 울음소리이기도 했으며 짐승들의 울음소리이기도 했다. 그 두꺼운 돌문도 고통의 절규를 막지는 못했다.
듣는 사람이 괴로울 정도였다. 병사들은 제 귀를 막고 싶은지 손에 들고 있던 창을 놓고 싶어 움찔댔다. 그건 펠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펠킨은 눈을 꾹 감은 채 묵묵히 기다렸다.
몇 시간 동안 괴성은 이어졌다. 결국 병사 하나가 지쳐 주저앉았다. 펠킨은 다른 병사를 시켜 그를 부축하게 한 뒤 둘을 내보냈다. 다시 몇 시간이 지나자 펠킨 역시 못 버티고 지하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저택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펠킨은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 앞에서 한동안 서성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옷가지들을 들고 누군가를 기다렸다.
하루 종일 그 앞에 있던 펠킨은 드디어 노을이 지는 것을 깨달았다. 노을빛이 지하로 내려가는 문을 비쳤다. 펠킨은 한 시라도 빨리 이 모든 시간이 지나가길 빌었다.
물 위에 톡 하고 잉크가 떨어지듯 서서히 어둠이 번졌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지쳐 쓰러졌던 병사들도 몸을 일으켰다.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그들은 지하로 내려가 돌문을 밀기 시작했다.
펠킨이 긴장한 듯 옷가지들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검은색 개는 탈진한 듯 쌕쌕 숨을 몰아쉬며 널브러져 있었다. 펠킨이 한탄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살짝 가까이 다가가려하자 마수가 고개를 들며 사납게 이를 내보였다.
크르르르르, 컹! 뾰족한 송곳니에서는 피가 배어나왔다. 아마도 제 혀를 씹은 것이 분명했다. 펠킨은 손을 치우며 사방에 튄 핏자국들을 바라봤다. 바닥에 낭자한 피들은 모두 그 검은 개가 흘린 것이다.
사납게 으르렁대던 개는 다시 낑낑대기 시작했다. 온몸에 난 원인 모를 상처들에서 울컥 울컥 피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 상처들은 금세 아무는 듯하더니, 또 다른 곳에서 상처들이 스스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보름달이 우물 아래에 빛을 보내기 시작하자 마수는 비틀거리면서도 악착같이 그 밑으로 갔다. 달빛에 얼굴을 들이밀며 붉은 눈동자를 빛내자 몸이 점점 작아지면서 뒤틀리기 시작했다. 뚜둑, 뚜둑, 뚝. 뼈가 맞물리고 재배열되며 나는 끔찍한 소리가 동굴 안을 메웠다.
앞발의 날카로운 발톱이 사라졌고, 온몸을 뒤덮은 검은 털이 살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주둥이는 짧아지고 네 발로 기던 몸을 꿈틀대더니 두 다리로 일어섰다.
바닥에 내딛은 발은 사람의 발로 변하기 시작했고, 허공에 떠다니던 손은 근육 잡힌 팔로 변했다. 붉은 눈이 점점 주황빛에서 노란빛으로 변하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커다란 마수는 사내의 모습으로 변했다.
펠킨이 얼른 그에게 담요를 덮어주며 의복을 건넸다. 사내는 숨을 들이쉬면서 눈을 감고 한동안 달빛을 쐬었다.
눈을 뜨자 달빛이 커다랗게 호박색 동공을 메운다. 펠킨이 건넨 로브자락을 걸친 남자는 익숙하게 옷을 입기 시작했다. 펠킨이 멀찍이 떨어져 안쓰러운 목소리로 사내를 불렀다.
“대공 각하. 괜찮……으십니까.”
그 사내는 칼리우스 에르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