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프롤로그. 첫날밤에 일어난 비극
1장. 검은 마수와 아스펠라
2장. 신이 내린 저주
3장. 에르윈 대공 성
프롤로그. 첫날밤에 일어난 비극
솜씨 좋은 화가가 세밀한 붓터치 하나하나로 그린 듯한 화창한 날씨였다.
그날. 에르윈 대공과 그의 아름다운 신부가 결혼식을 올렸다.
수많은 귀족들은 물론, 백성들도 그들의 결혼식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건 바로 에르윈 대공의 신부되는 여인이 바로 평민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칼리우스 에르윈 대공은 모든 영애들이 설레고, 탐내고, 원했던 남자였다.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튀니아 왕국의 영웅이 된 자. 그와 동시에 튀니아에 기생하는 수많은 ‘신’들을 토벌하여 국왕의 신임을 얻은 남자. 26살의 젊은 나이로 대공의 작위까지 얻은 사내였다.
단순히 능력만 뛰어나다 하여 영애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는 건 아니었다.
그 대단한 능력과 지위에 걸맞게 외모마저도 튀니아 왕국의 으뜸.
그리하여 에르윈 대공의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에 왕국 내 모든 영애들이 뒷목을 잡고 쓰러졌더랬다.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만큼이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신부의 정체. 모두들 이웃나라 공주거나 못해도 공작 영애일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 예상은 보기 좋게 엇나갔다.
에르윈 대공의 신부는 평민 중의 평민. 성도 없는 고아 출신. 도시가 아닌 산속에서 살다 내려온 여인이었다.
그 여인을 둘러싼 소문은 많았다. 요술을 부린다는 소문도 있었고, 사라진 남작가의 사생아라는 소문도 있었으며,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홀려 잡아먹는 괴물이라는 소리까지. 무엇하나 입증된 것은 없었지만, 다들 그녀에 대해 말이 많았다. 귀족부터 평민까지 모두 다.
그녀의 이름은 아스펠라.
튀니아에서 흔한 평범한 금발에 평범한 녹색 눈동자. 속없이 좋아 보이는 선한 인상은 누구나 처음 보면 호감을 가질만한 미인이었으나, 튀니아 왕국에서 모두를 놀라게 할 만한 미녀는 아니었다.
외모 때문만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도대체 왜 대공이나 되시는 분이 일개 평민 여자와 결혼을 한 걸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결혼식은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딛고 이뤄낸 참사랑이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일간지에서는 커다란 글씨체의 ‘신분을 초월한 사랑, 에르윈 대공과 아스펠라 양’이라는 제목으로 신문 1면을 장식했다.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라니. 많은 이들의 환상을 자극하는 문구였다.
누군가는 우려의 말을 보냈고, 누군가는 찬사의 말을 보냈다.
모두의 관심 속에서 그들의 결혼식은 동화 속 주인공처럼 이뤄졌다. 화창한 날씨, 아름다운 부부, 환호하는 하객. 모든 것이 완벽했다.
적어도 그날 밤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밤늦게 축하 연회가 끝나고, 수많은 귀족들이 돌아갔다.
악단의 연주와 귀족들의 수다로 복작대던 대공 성이 조용해졌다. 성대한 파티의 뒷정리를 하기 위한 시종들의 빠른 발걸음과, 그릇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종종 들뜬 시녀들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그들은 아까 전 대공의 양팔에 안겨 성 안으로 들어간 신부에 대해 신나서 떠들고 있었다. 대공의 눈빛을 보았니? 어쩜 그리 사랑스러워 마지않는 표정이실까! 아아, 신부님이 너무 부러울 정도였어.
마치 한 편의 로맨스 소설을 읽는 것 같다며 시녀들이 요란을 떨었다.
원래라면 시녀들이 아스펠라를 데리고 가 그녀의 드레스와 치장을 벗겨준 뒤, 첫날밤을 위한 슬립 드레스를 입혀주는 것이 맞는 일이었다.
하지만 에르윈 대공은 제 아내를 어찌나 사랑하는지, 그런 것은 다 자신이 할 테니 너희들은 이만 모두 물러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어디 그뿐일까. 제 아내가 목소리 들리는 것이 부끄러워 할 것을 염려해 그날 밤만큼은 5층 출입이 모두 금지되었다.
항상 무뚝뚝하고 냉혈한 자신의 주인이 그런 반응을 보이자 저택의 사용인들은 저들이 더 신나했다.
술에 취한 제 아내를 양팔로 받쳐 안은 대공이 5층에 마련 된 새 부부 침실로 들어갔다.
방문이 굳게 닫혔다.
***
축하주를 조금 과하게 마신 건지, 아스펠라는 보기 드물게 붉은 얼굴로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아스펠라. 축하주를 대체 얼마나 마신 겁니까.”
“으음, 그리 많이 마시지는 않았는데, 아, 유디티아 후작께서 축하주를 직접 만들어주시기는 했어요.”
애주가로 소문난 유디티아 후작이 만들어 준 축하주라면 독하기 그지없을 거다.
분명 아스펠라가 사양했어도 내 절친의 부인 될 사람인데, 내가 이정도 성의는 보여야지! 하며 구태여 마시게 했을 것이 분명했다.
아스펠라에게 진탕 술을 먹이려는 것을 몇 번이나 대신 받아먹었는데도, 평소 술을 잘 마시지 않던 아스펠라에게는 무리였나 보다.
“속이 나쁘거나 하진 않고?”
다정한 그의 질문에 아스펠라가 헤실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히려 기분 좋은 걸요.”
반쯤 몸이 붕 뜬 기분에 아스펠라가 눈을 끔뻑였다.
에르윈 대공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붉은 기가 도는 아스펠라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홍당무가 되었는데.”
“그렇게 붉어요?”
아스펠라가 깜짝 놀라 방구석에 놓인 전신 거울로 얼른 달려갔다. 흰색 드레스에 붉은색 얼굴이 대조되어 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세상에. 이 얼굴로 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니.”
아스펠라의 눈이 울상이 되었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되자 시골 뜨내기처럼 보였다.
“다음날 일간지에 대공의 아내는 사람이 아니라 홍당무라는 기사가 뜨면 어쩌죠.”
“이렇게 아름다운 홍당무라면야.”
대공의 눈에는 그저 사랑스러운 제 아내로 보일 뿐. 그는 아스펠라 뒤로 다가와 잘록한 아내의 허리를 껴안아 제 쪽으로 잡아 당겼다.
고개를 숙여 붉은 목덜미에 입을 맞추자, 아스펠라가 간지러운 듯 목을 살짝 기울이며 그의 품으로 몸을 돌렸다.
촛불만이 비추는 방 안에서도 그의 금안은 빛을 내고 있었다. 아스펠라는 그 금색 눈동자를 좋아했다. 보고 있자면 한없이 드넓은 황금 갈대밭에 있는 느낌이었다.
에르윈 대공이 조금 흐트러진 아스펠라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아스펠라는 어쩐지 어깨가 움츠러드는 기분이 들었다. 술기운 때문인가. 그저 머리칼을 만지는 것뿐인데도 어지럽고 긴장이 되었다.
아스펠라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녀린 쇄골이 움푹 들어가며 골을 만들었다. 에르윈 대공은 그곳에 입을 맞추는 걸 좋아했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아스펠라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아스펠라. 아름다워.”
아래쪽에서 금안을 요요하게 빛내며 그가 말했다. 정말 술기운 때문인가. 쇄골에 닿은 칼리우스의 입술이 제 이름을 부르자 정신이 아찔했다. 뜨거운 그의 숨결도 느껴졌다.
아스펠라가 조금 풀린 눈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칼리우스….”
부끄러운 듯 괜히 입술을 잘근 깨무는 아스펠라에게 칼리우스가 입을 맞췄다. 말캉한 혀가 아스펠라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치열을 훑었다. 아스펠라가 어설프게 흉내내 보겠다며 그의 혀를 핥아 올리자, 그는 픽 웃으며―여전히 서툴러―짧게 말하곤 아스펠라의 옷가지에 손을 올렸다.
반사된 거울 속에서 화려한 드레스를 벗기는 조급한 대공의 손이 비쳤다. 칼리우스 에르윈은 조급함을 모르던, 모든 것에 권태롭고 여유를 느끼던 남자였다.
하지만 아스펠라를 만질 때면, 그녀가 그의 시야에 들어올 때면, 심지어는 제 시야에 없을 때도 그녀를 떠올리면 그는 항상 조급해진다.
이제 공식적으로도 제 아내가 되었으니 조급할 이유가 없는 게 확실한데도, 그는 여전히 아스펠라를 만질 때면 제어가 되지 않았다.
흰색의 러플 드레스는 아름답긴 했으나 그에게는 아스펠라의 몸을 가리고 있는 천 조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많은 전투로 인해 잔뜩 흉이 지고 부르튼 그의 거친 손이 흰색 실크 드레스를 잡아 뜯듯 벗겼다. 아스펠라의 뽀얀 살결이 드러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전히 두 사람은 격렬한 입맞춤을 하며 서로를 잔뜩 탐미하고 있었다. 칼리우스의 가슴께에 올려둔 손에서 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왔다.
“꺅!”
안 되겠는지, 칼리우스가 그대로 번쩍 아스펠라를 들어 침대로 향했다.
혹여나 금이 갈까, 부서질까 조심스레 제 아내를 뉘여 놓을 때는 언제고, 다시 한 번 거칠게 남은 옷가지들을 벗기기 시작했다.
살구색의 슬립까지 벗겨내자 아스펠라는 부끄러운 듯 제 가슴과 중요 부위를 손과 팔로 가리며 몸을 배배 꼬았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던 대공은 제 옷가지를 벗기 시작하며 아스펠라에게 다시 입을 맞췄다.
아스펠라의 두 손이 성글게 칼리우스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그의 목덜미에서 쇄골을 지나 잔뜩 헤벌어진 포에트 셔츠 자락 안으로 제 손을 집어넣었다. 단단한 그의 가슴팍이 아스펠라의 손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바들 떨리는 아스펠라의 손을 잡으며 칼리우스가 짓궂게 물었다.
“몇 번이고 만졌으면서 이제 와서 긴장되는 겁니까?”
아스펠라의 몸을 끌어안은 그의 손이 허리를 지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마치 뱀처럼 서로 얽힌 몸뚱이들이 천천히 움직이다가 이내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아스펠라의 가느다란 다리는 칼리우스의 허리를 감쌌고, 그녀의 허벅다리는 칼리우스의 손아귀에 잡혀 뽀얀 살들이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 튀어나왔다.
부부는 밤새도록 사랑을 나눴다.
에르윈 대공은 가녀린 제 아내를 도자기 어루만지듯 하며 조심스럽게 몸 이곳저곳을 탐미했다. 아스펠라는 아침 이슬에 젖은 수선화처럼 물기어린 상태로 몸을 떨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다.
아스펠라는 제 위에서 움직이는 에르윈 대공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에르윈 대공은 그런 제 아내를 꽉 껴안았다.
“사랑해, 아스펠라.”
그가 작게 속삭였다. 아스펠라가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저도요. 칼리우스.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먼저 쓰러지듯 잠이 든 것은 아스펠라였다. 대공은 한참동안 제 품에서 빨개진 얼굴로 잠든 아스펠라의 얼굴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아스펠라는 잠결에 느껴지는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좋았다. 천천히 제 머리칼을 쓰다듬고, 조심히 제 얼굴을 어루만지고, 조몰락거리며 제 손을 만지작대고. 그의 손길 하나하나에 애정이 담뿍 묻어났다.
잠결임에도 불구하고 아스펠라는 쿡쿡 웃음이 흘러나왔다. 대공의 입술이 제 이마에 닿았다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스펠라는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는지 으응, 잠투정을 하며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에르윈 대공은 그런 제 아내를 꽉 껴안았다.
아스펠라는 행복했다.
이렇게나 행복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
아니, 행복할 뻔했다.
***
새벽, 동이 틀 때쯤이었다. 문득 한기를 느낀 아스펠라가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지르며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창문이 훤히 열려 있었다.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 주변을 둘러봤다.
“……칼리우스?”
알몸의 그녀는 제 옆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얼른 바닥에 떨어진 슬립 드레스를 주워 입었다.
사랑하는 그녀의 남편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넓은 방 안을 빙 둘러봤으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방문이 열려 있다. 밖으로 나간 건가? 아스펠라가 고개를 갸웃댔다.
이 시간에 어딜 간 거지?
아스펠라는 로브 가운을 껴입고 촛대에 불을 붙였다. 새벽의 안개 같은 어둠으로 어스름해진 에르윈 성 안에 조그만 빛이 생겼다. 아스펠라는 촛대를 든 상태로 복도로 나갔다.
복도 끝에 위치한 방 문 앞에 뭔가가 뚝뚝 떨어져 있다. 아스펠라가 허리를 숙여 자국을 만졌다. 비린내가 나며 미지근한 그것은 피였다.
“……피……?”
아스펠라는 잠시 숨을 들이키며 먼 복도를 향해 촛대를 들어올렸다. 핏자국은 복도를 따라 죽 나있었다.
어둠뿐이었다.
핏자국을 따라가면 남편이 있을 거라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내키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움직여 핏자국을 따라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피비린내가 코를 마비시켰다. 간헐적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던 핏방울들은 앞으로 전진하면 전진할수록 그 양이 많아졌고, 마침내 맨발의 아스펠라가 멈춰선 부근에는 웅덩이마냥 고여 있었다.
“읍……!”
손으로 코를 막은 아스펠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복도 끝으로 향했다. 브라스 촛대를 저 멀리 들어 복도 끝을 가늠해보려 했지만, 이 커다란 대공 성의 복도는 마치 깊은 바다의 심연마냥 끝이 어스름하니 보이지 않았다.
이제 겨우 복도의 절반 정도 온 걸까.
아스펠라는 멈췄던 발을 움츠렸다. 차가운 대리석이 열을 빼앗아 간 탓에 발 끄트머리가 시려워 절로 곱아들었다. 하지만 발걸음을 돌려 방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제 발 옆에 웅덩이처럼 고여 있는 피의 주인을 찾기 전까지는. 사라진 제 남편을 찾기 전까지는.
“후우….”
아스펠라의 숨소리가 작게 떨렸다. 심호흡을 하며 두려움을 떨쳐낸 아스펠라가 다시 발걸음을 옮겨 복도 끝으로 향했다.
이곳은 성의 가장 꼭대기. 오늘 밤 제 부끄러운 목소리를 들키기 싫어하는 신부를 배려하여 모든 사용인들이 5층에 올라오는 것이 금지 되었다지.
그러니 5층에는 아스펠라와 에르윈 대공 둘뿐일 것이다.
둘뿐이어야만 했다.
피비린내가 짙어질수록 코끝에 다른 냄새가 번지기 시작했다. 소동물의 냄새가 아닌, 커다란 짐승이 상대를 압도하기 위해 내뿜는 기묘하고 불쾌하기까지 한 냄새였다.
아스펠라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어두컴컴한 저 앞에서부터 낯선 소리가 들렸다.
축축한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딱딱한 것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기도, 흡사 며칠 굶은 사냥개들이 살점이 달라붙은 돼지 뼈를 악착같이 핥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보이지 않는 앞을 비추는 촛대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걸어가던 아스펠라의 발이 멈췄다.
으득, 으득, 으드드득.
뼈가 씹히는 공포스러운 소리에 아스펠라의 몸에 난 솜털들이 쭈뼛 몸을 세웠다. 허벅다리부터 종아리까지 잔근육들이 도망가라고 아우성치는 양 덜덜 떨렸다.
아스펠라는 천천히 그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촛대를 들어올렸다. 어둡다. 온통 어둠뿐이었다. 괴수의 검정색 털 사이로 윤기가 흐른다.
“허억, 허… 허, 허윽….”
마치 누군가 그녀의 목을 죄기라도 하는 것 마냥, 잔뜩 막힌 숨소리가 아스펠라에게서 흘러나왔다.
살면서 이렇게나 두려움을 느낀 적은 없었을 것이다.
제 오두막보다 커다란 짐승을 마주쳤을 때도, 커다란 독사가 쉭쉭 혀를 날름거리며 달려들 때도, 심지어 흑곰이 바로 앞에서 저를 내려다볼 때도.
아스펠라는 자신이 이런 본능적인 두려움에는 이미 단련이 되어 있다 자부했다.
절벽에서 나물을 캐다 발을 잘못 디뎌 떨어질 뻔한 적이 몇 번인가. 웬만한 사내, 더 나아가 기사들보다도 담력이 좋다 자부했다.
그런 아스펠라가 공포에 떨고 있다.
뜨거운 촛농이 아스펠라의 손에 떨어졌지만, 화상을 입는 고통을 개의치 않을 만큼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뭔가가 먹히고 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가리 찢긴 그것은 사람인지 짐승인지 종을 분간할 수 없었으며, 털을 가진 건지 아니면 살을 가진 것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새빨갰다. 피로 흠뻑 물든 것인지, 살가죽이 벗겨진 건지. 아니면 둘 다거나.
그 무언가를 또 무엇인가가 게걸스레 먹고 있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온몸을 덮고 있는 윤기 나는 검은 털만이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아스펠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보?”
어둠에 동화되어 보이지 않던 커다란 몸집이 움찔댔다. 이윽고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 천천히 몸을 돌렸다.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스펠라의 입이 공포로 벌어졌다.
“……칼리우스?”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 그녀가 저 괴수에게 먹히고 있는 고깃덩이를 부르는 건지, 아니면 인간인지 짐승인지 피범벅이 되어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을 으득으득 씹어 먹는 커다란 괴물을 부르는 건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붉은 눈을 한 괴수를 쳐다보던 아스펠라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뭘, 뭘 먹고 있는…….”
공포로 마비된 혀는 제대로 말을 뱉지 못했다. 헐떡이는 아스펠라의 가슴께가 크게 들썩거렸다. 복숭아처럼 뽀얗고 선홍빛 돌던 아스펠라의 얼굴은 어느새 파랗게 질려 있었다.
챙그랑― 그와 동시에 촛대를 받치는 브라스 손잡이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촛대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떨어져버렸고, 성 안을 비추는 유일한 빛이 사라졌다. 아스펠라가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덜덜 떨리는 다리로 뒷걸음질 치다 이내 힘이 풀렸는지 주저앉았다. 그러는 사이 어둠을 먹고 자란 커다란 괴수가 몸을 일으켰다. 층고가 높은 이 커다란 공간도 괴수에게는 작았다.
그르르르…….
괴수의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목울대를 긁는 거친 소리가 나왔다. 기다란 검을 털 사이로 핏빛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오로지 살의만 내뿜는 눈빛에 아스펠라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죽을 거라는 걸 예감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아스펠라는 종아리 근육이 뻐근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쥐라도 난 것인지,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눈물이 찔끔 났다. 제대로 힘조차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꼬집으면서 아스펠라가 몸을 일으켰다.
죽어라 내달렸다. 그러나 그녀는 바닥에 듬성듬성 떨어진 피 웅덩이를 밟고 미끄러져 엎어지고 말았다.
아스펠라가 저를 키워주던 이를 잃고 혼자가 되었을 때, 아스펠라를 제 딸처럼 아끼던 약방 아주머니가 결혼한다는 그녀를 위해 손수 자수를 놓은 아이보리색 린넨 로브 자락이 피로 물들었다.
진득하게 붙는 피를 얼른 털어낸 아스펠라가 다시 일어났다. 제 몸을 덮은 피에 기겁할 새가 없었다.
도망가야 한다. 저것이 제 남편이든, 애완견이든, 괴물이든, 도망가야 한다.
아스펠라가 이를 악물고 뛰었지만, 거대한 괴물은 몇 번 발만 굴러 금방 그녀를 따라잡았다. 그것은 아스펠라를 알아보지 못한 채 칼날보다 날카로운 앞발을 휘둘렀다.
“아악!”
무자비한 발톱이 아스펠라의 등을 찢어발겼다. 그와 동시에 내쳐진 아스펠라는 그대로 두꺼운 유리창에 부딪혔다. 유리창은 마치 종잇장처럼 뚫렸다.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아스펠라의 몸에 박혔다.
엄청난 고통이 그녀의 몸을 집어삼켰다. 너무 아파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겠다.
아스펠라는 떨어지는 순간 괴수와 눈이 마주쳤다. 살의를 내뿜던 아까와는 달리, 잔뜩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된 걸까.
아스펠라가 한탄스러운 듯 눈을 감았다.
“칼리……우스…….”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가녀린 몸이 그대로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며칠 뒤 에르윈 대공 저택을 둘러싼 흉흉한 소문들이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대공이 행방불명되었다는군.
무슨 소리야. 행방불명은 무슨. 대공이 미쳐버려서 제 아내를 죽이려 했다는데?
첫날밤에 신부가 비명 지르며 떨어졌대.
온몸이 갈기갈기 찢겼다더라고.
평민 출신의 아내를 들인 이유가 대공의 변태 같은 성벽을 받아줄 영애들이 없어서라던데.
변태 같은 성벽이 아니라, 그냥 미치광이 살인마지.
살인마? 괴물이라니까. 인간이 아니고, 짐승이래.
신부는 아무것도 몰랐대? 대체 어쩌다가…….
동화 속 주인공이라 불렸던 아스펠라는, 그렇게 비극의 여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1년 전,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모든 비극들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
수많은 일간지 기자들이 대공 저택 앞에 진을 치며 몰려들었다. 자세한 내막을 누구보다 먼저 취재하고 싶어 하던 이들은 마치 예술품 경매라도 하듯이 대공 부인을 향해 저들의 조건을 떠들어댔다.
“저 인간들이 진짜!”
아스펠라를 간호하던 시녀 앨리스가 창문 밖을 쳐다보며 예의 없는 기자들에게 욕지거리를 날렸다.
“꺼져, 이것들아! 예의도 없냐!”
창문 밖으로 몸이 쏠릴 정도로 몸을 쭉 뺀 채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든 말든, 기자들은 입을 모아 아스펠라에게 애원했다.
“대공 부인! 제발 그날 일에 대해 말해주십시오!”
“현재 왕국을 휘젓고 있는 괴수의 정체가 뭔지 아십니까!”
“대공은 어째서 행방불명되신 겁니까! 괴수가 잡아먹은 건가요?!”
그녀를 존중하는 질문은 단 하나도 없었다.
시녀는 사탄도 저것들보단 눈치를 볼 거라며 혀를 내둘렀다. 가만히 병실 침대에 누워 있던 아스펠라가 몸을 일으켰다. 앨리스가 얼른 아스펠라를 부축했다.
“앨리스……. 기자들을 이곳으로 불러모아줘요.”
“네? 하지만, 대공 부인.”
“괜찮아요. 부탁해요.”
가련한 목소리였으나 어조는 단호했다. 눈빛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포와 슬픔이 느껴지는 녹색 눈동자는 바다 속에 짙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침몰한 상태는 아니었다.
결국 굳게 잠겨 있던 대공 저택의 철문이 열렸다. 기자들은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재빨리 내달렸다. 대공 부인이 요양을 하고 있는 병실 문이 열렸다.
취재에만 관심 있던 기자들은 대공 부인의 몰골에 다들 머릿속에 줄을 세워뒀던 질문들을 일순간 까먹고 말았다.
대공비의 모습은 처참했다. 온몸에 피 멍이 든 모습은 마치 독버섯을 먹은 사람 같았으며, 목 아래의 몸은 유리 조각에 베여 여기저기 흉터가 나있었다.
“대, 대공 부인. 몸은 괜찮으십니까?”
수많은 질문들을 제치고 나온 첫 질문이었다. 아스펠라는 그저 지쳐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기의 사랑이라 불리던 대공 부부였다. 최고의 날에 최고의 결혼식을 올려 행복해마지않던 신부의 얼굴이라고는 상상되지 않았다.
“첫날밤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까?”
“…….”
다들 어설픈 추론만 하고 있을 뿐 당사자의 입으로 듣는 것이 가장 확실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스펠라는 말하는 걸 꺼려하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날 마주친 괴수의 눈동자를 떠올리곤 공포에 떠는 것일지도.
침묵하는 아스펠라에게 다른 기자가 간곡하게 물었다.
“현재 튀니아 왕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그 괴수는 에르윈 대공 저택에서 나왔다고 하던데. 그 괴수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대공 부인, 특종도 특종이지만 지금 튀니아 왕국은 그 괴수로 난리가 났습니다. 대공 부인만이 유일하게 그 존재에 대해 아시는 것 같아 묻는 것입니다.”
기자의 말에 아스펠라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 괴수는…….”
한참 동안 뜸을 들이던 아스펠라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차마 말을 이을 수 없는 듯 가련한 어깨가 파들 떨리며 고개가 숙여졌다.
벌떼처럼 모인 기자들 역시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더 이상 보채지 못하고 조용해졌다. 칼리우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당신. 아스펠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기다란 속눈썹 사이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숙연해진 기자들은 더 이상의 질문 없이 아스펠라만 바라봤다.
가여운 여자. 저 연약한 몸에 난 상처와 멍을 봐. 두려워서 몸을 떠는 거겠지. 앞으로 그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다들 그녀를 동정하기 바쁜데 아스펠라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눈물 몇 방울을 흘린 아스펠라가 다시 고개를 훽 들어올렸다.
“당신들이 해줘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모두가 간과하고 있던 것이 있었는데, 방금 전까지 가련해 보이던 대공 부인은 사내들도 올라가기 꺼려하는 그 아스펠 산에서 20년 동안 살아온 여인이었다.
그 말인즉슨,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무엇인데요……?”
아스펠라의 말에 홀리기라도 한듯 기자들이 물었다. 아스펠라가 천천히 입을 뗐다. 가히 충격적인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