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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123화 (123/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마지막회)

다그닥다그닥.

승차감 좋은 마차 안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르다. 작은 돌이라도 밟으면 마차 전체가 휘청이는 통에 엉덩이가 너무 아프다. 이럴 바엔 차라리 말을 타는 게 더 나았을지도….

아니, 그게 안 되지….

지금은 나를 말에 태워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날씨가 추워서 다행이다. 후드 달린 로브를 뒤집어써서 눈에 띄는 이 머리카락 색도 가릴 수 있고 표정도 가릴 수 있으니까.

나는 낮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보 같은 엔프리제. 왜 거기서 날 말린 걸까. 어차피 진짜로 엘마레를 죽일 생각 따윈 없었는데. 다만… 솔직히 말하면 여차하면 진짜 일을 벌일 생각이 있긴 했다.

내게 있어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은, 누군가를 죽이는 게 아니라 엔프리제랑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니까.

엔프리제는… 도망자가 되면 날 데려가지 않을 거다. 그런 확신이 있었다. 게다가 날 지켜 주겠노라 확언한 엘마레가 있으니 더더욱.

그러니까 나는 어떻게든 그 계약을 무효로 만들고 싶었는데.

-검을 내려놓으세요, 샤페릴.

-엔프리제…!

엔프리제는, 바르카를 미워하진 않는다. 그를 죽이고 싶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가 엔프리제를 죽이고 나를 납치하려 하고 있을 때조차 나를 데리고 빠져나갈 생각을 했지 죽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족.

그의 마음을 내가 다 알 순 없지만… 분명 그런 마음이 있지 않을까. 머리카락과 눈 색 때문에 배척받았던 엔프리제였기에 도리어 더 핏줄에 집착하는 무언가가 있지 않았을까.

마치…, 학대받으면서도 그를 애써 부정하며 가족을 떠나지 못했던 나처럼.

-저는 괜찮습니다. 저는… 당신을 지키기 위해 그게 최선의 방법이라면….

-거짓말…!

-…….

엔프리제가 살며시 나를 끌어안았다. 그 온기는… 지금까지 그가 내게 준 그 어떤 온기보다도 뜨겁고 차갑고 아팠다.

-죄송합니다, 샤페릴. 저는… 엘마레의 말대로입니다. 당신이 절… 절 사랑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면… 저는….

엔프리제의 손이 검을 빼앗았다.

나는….

-약속해요.

-무엇을….

-떠날 땐 함께예요.

엔프리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미 당신에게서 떨어질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샤페릴이 싫다고 하면 억지로 납치해서라도 모셔 갈 겁니다.

거짓말쟁이.

그사이, 안의 소리가 들린 건지 아니면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서인지 문을 부수려는 소리가 들렸다. 틀렸나.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

문 밖에서 묘한 소리가 들렸다.

쿵, 하고 무언가가 부딪쳤다가 주르륵 미끄러져 내리는 소리.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지원병 같은 게 온 건가?

불길함에 덜덜 떨고 있는데 철컥, 소리가 났다. 열쇠가 풀리는 소리가.

그리고.

“…이런.”

낮게 잠긴 목소리.

내가 덮어씌운 담요를 헤집고 검은색 머리카락이 비죽 튀어나온다. 한뎃잠을 잔 탓인지 피곤해 보인다.

창밖을 보던 시선을 돌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담요 사이로 하얀 얼굴이 쏙 나왔다.

“잘 잤어요?”

“…죄송합니다, 깜빡 잠들었나 봅니다.”

“나 혼자 내버려 두고 자니까 편해요?”

“샤페릴….”

날 선 말에 곤혹스럽다는 듯 엔프리제가 말끝을 흐린다. 그게 귀여워서 괜스레 또 심술이 난다.

“하긴. 날 두고 혼자 가려고 했었던 사람인데 오죽하겠어요. 그쵸?”

“그건…, 그게 아니라.”

“거짓말쟁이. 떠날 땐 함께라고 약속해 놓고.”

유구무언.

엔프리제는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지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드물게도 바닥을 내려다보며 반성하는 자세가 귀여워서 결국 빵 터져 버렸다. 그 소리에 곁에서 잠들어 있던 플리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삐-?!”

“아, 미안, 플리. 깨웠어?”

“삐!”

살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플리가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하긴, 지치기도 했겠지. 황성을 빠져나오는 동안 계속 경계하고 있었으니.

“한 번만 더 그래 봐요. 진짜로 콱 혀 깨물고 죽어 버릴 거예요.”

“샤페릴,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거짓말쟁이는 조용히 해요.”

“…….”

엔프리제가 낮은 한숨을 흘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내버려 둔 채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힐끔힐끔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느끼며 다시 회상에 빠졌다.

열린 문 앞에는… 놀랍게도 예상외의 인물이 있었다.

-…왜, 여기에….

-어서 여기를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아가씨. 전하도…!

그녀의 왼손에는 피 묻은 단검이 있었다. 왜 그런 걸 그녀가 가지고 있는 걸까.

의문으로 생각하기도 전에 또 다른 의외의 인물이 내 팔을 끌어당겼다.

-샤페릴, 빨리 나가셔야 합니다. 언제 다른 사람이 올지 모릅니다.

분명 폐하가 도착했다고 했다. 바르카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아무 생각 없이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거기엔.

-…큭….

고통 섞인 목소리를 삼키고 있는 바르카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왜 저리 고통스러워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내 눈에, 문과 바닥을 잇는 붉은 흔적이 보였다.

등을 찔린 걸까. 대체 누가?

반사적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의 손에 들린 반짝이는 게 보였다.

-템버, 설마….

-샤페릴,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여기서 떠나는 게 좋겠습니다.

언제 나온 건지 엔프리제가 날 떠밀었다. 하지만.

-어딜…!

바르카가 이를 갈며 그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직 살아 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이 남자가 이대로 살아남으면 우리를 얼마나 괴롭히는 걸까.

어쩌면 엔프리제를 황제 시해범으로… 아니면 황제 시해의 주범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샤페릴은… 내 것이다…. 너 같은 피 도둑의 것이 아니라… 내 것….

그렇게 중얼거리는 파란 눈동자는, 묘하게 초점이 흐렸다. 겉으로 티가 나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꽤 피를 흘린 걸까. 그대로 떠나려는 내 치맛자락을 그가 잡아당겼다.

-샤페릴…, 어째서….

-샤페릴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애초에 물건이 아니니까. 그러니… 네 비뚤어진 소유욕을 샤페릴에게 강요하지 말아라.

엔프리제는, 그 손을 가볍게 쳐 냈다.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는 그 손과 달리 파란 눈동자에는 핏발이 섰다.

-나는…! 나는 황제다…! 이 제국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란 말이다!

-지랄하네.

나도 모르게 그 한마디가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다행히 이 세계에도 있는 말인 건지, 다들 놀라긴 해도 의아해하진 않았다. 어차피 내뱉은 막말. 나는 싸늘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네가 싫은 거야.

엔프리제와 템버의 손을 잡고 그대로 뛰었다. 눈치 빠르게 멜리나가 내 앞에서 길잡이를 해 주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미리 준비를 해 두었던 건지 성 뒤쪽으로 빠져나간 우리 앞에 마차 한 대가 있었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이런 것밖에…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그보다 멜리나, 당신도 같이 가요.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멜리나가 우릴 도운 건 확실한 것 같다. 이대로 남으면 분명 험한 꼴을 당하겠지. 그렇게 생각해서 말을 꺼냈지만, 그녀는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럴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보다 빨리… 이 마부에게는 길을 일러 두었습니다. 성문을 통하지 않고도 나갈 수 있는… ‘뒷길’이 있으니 거기로 빠져나가시면 됩니다.

-멜리나는 괜찮아요?

-네. 저는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엔프리제가 날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문을 닫으려 했다.

혹시나 싶어 지켜보고 있던 내가 재빨리 마차 문틈으로 손가락을 내밀었다.

-윽!

-샤페릴!

놀란 엔프리제가 벌컥 문을 열었다. 다행히 그리 세게 닫지 않아 솔직히 많이 아픈 건 아니었지만, 일부러 손을 부여잡고 주저앉아 청승맞게 그를 바라보았다.

-떠날 땐 함께라고 했잖아요.

-하지만 제가 같이 가면…!

-나 혼자 보내면 콱 혀를 깨물어 버릴 거예요.

물론 그럴 용기 따윈 없다. 그래도 엔프리제에게는 잘 통하는 협박이기도 했다.

-샤페릴, 하지만 저와 함께 가면 당신이 고생하게 됩니다.

-엔프리제가 없으면 전 누구한테 마력을 넘겨요? 제가 마력 과잉이 돼서 펑 터져 죽었으면 좋겠어요?

-샤페릴….

억지로 그를 끌어 올리자 엔프리제는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마차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템버는.

그저 우리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템버?

-저는 같이 갈 수 없습니다, 아가씨.

그녀는 앞치마 안쪽에서 꽤 커다란 주머니를 꺼내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정말로 문을 닫아 버렸다.

-부디… 두 분 모두 건강하시길.

“…….”

템버는, 왜 그랬을까.

흘끗 엔프리제 쪽을 보았다. 그는 고요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기분 안 풀렸으니까요.”

“…죄송합니다.”

“중간에 날 내버려 두고 자 버리고.”

“죄송합니다.”

“이제… 우리 둘밖에 안 남았는데.”

엔프리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 정말이지. 완전히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황제 감금을 당해서 평생을 놀고먹으며 살 생각이었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귀한 아가씨로 살 생각이었는데, 어쩌다가 도망자 신세가 된 건지.

이젠 템버조차 없고, 이 남자는 집안일의 ㅈ자도 모르니 그 지긋지긋한 일을 내가 다시 해야만 하겠지. 심지어 여기 음식에 대해선 거의 모르는데!

물론 레시피 책을 몇 개 보긴 했지만… 나처럼 손끝이 둔한 사람은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제대로 할 수 있단 말이다. 심지어 여긴 청소기도 없잖아? 청소도 일일이 빗자루랑 걸레로 해야만 하다니 최악이다.

최악이지만.

“엔프리제.”

“네.”

“이리 와 봐요.”

톡, 하고 플리가 잠들어 있는 쪽 반대편 옆자리를 치자 그가 냉큼 곁에 다가와 앉았다. 꼬리만 달리면 완전 강아지…, 아니, 크흠.

“있잖아요.”

“네.”

“사실 저 처음에는 엔프리제한테 빌붙어서 평생 호의호식하려고 했어요.”

“…….”

무슨 소린가 싶은지 엔프리제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딱히 기분 나빠 보이진 않고 그냥 의아한 것 같다.

왜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서.

“거기가 저한텐 천국 같았어요.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원하는 건 다 가져다주고, 다 해 주고. 맛있는 것도 다 먹을 수 있고.”

“…샤페릴….”

“무슨 말 하려는 건지 알아요. 지금이라도 엔프리제를 떠나면 저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거잖아요.”

뭐…, 엘마레한테 가면 그런 삶을 다시 살 수 있겠지. 정신적, 신체적 스트레스 하나 없이 평온하게.

하지만.

“근데 엔프리제가 틀렸어요.”

“네?”

“처음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달라요. 고생하고 힘들고… 설령 무슨 일을 당해도요.”

가만히 그의 귀에 입술을 가져갔다.

언제나 먹음직스러운 귓바퀴를 살짝 깨물어 주며 속삭였다.

“제 천국은 엔프리제한테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분명, 앞으로 그 어떤 삶을 산다고 해도…. 당신만 있다면 내겐 거기가 좁은 천국일 거야.

그렇게 속삭이며 그를 꽉 끌어안았다.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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