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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122화 (122/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22)

“형님, 제가… 형님께 꼭 하고 싶었던 부탁을 드리려 합니다.”

엘마레의 미소에 샤페릴이 다급히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이내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기만 했을 뿐, 다른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아니, 취할 수 없는 거겠지.

엘마레는 그런 그녀에게 진심을 담아 웃어 보였다.

샤페릴 드 리베테는 엘마레에게 있어서 완벽한 존재였다. 그녀가 없었다면 이 순간에 오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혹은 기회를 잡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있어서 엘마레는 지금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엘마레는 적자라고는 해도 삼남이었다. 즉, 그가 황제에 오르려면 완벽한 기회가 주어져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황제인 바르카만 끌어내려서 될 게 아니라 적장자인 엔프리제까지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그렇게 고민하던 엘마레의 앞에 샤페릴 드 리베테가 나타났다.

사랑. 엘마레는 그 감정을 몹시도 좋아했다. 인간은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 이성적인 행동을 보이지 못한다. 때로는 충동적, 혹은 감정적으로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들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형제 간의 사투 같은.

오랫동안 멸시받고 천대받던 대공이 유일하게 사랑을 느낀 여성.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가 원활치 않던 남자가 사랑에 미쳐 그녀를 납치하고 감금하여 억지로 취한들 무어 이상할까.

그런 대공을 막기 위해 황제가 나서는 것 역시 이상할 일이 아니다. 심지어 황제 역시 공공연히 그녀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있었더라면. 어쩌면 그게 대공이 그녀를 납치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저보다 더 나은 존재에게 그녀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그리고 황제가 거기에 죄책감을 더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문제는, 대공이 황제보다 훨씬 무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황제는 그걸 알면서도 다급한 상황에서 그녀를 구해 내기 위해 홀로 그녀에게 향하고, 결국 대공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대공은 황제 시해범이 되었지만, 스스로 황위 계승권을 포기했기에 일개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떠나고야 만다.

그런 스토리는 이제는 연극에서도 쉬이 쓰지 않는 낡디낡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런 게 현실에서 일어난들 뭐 어떠랴. 그리고 황위 계승권을 가진 이들 중 가장 높은 순위를 가진 데다 평소 인망이 높고 능력이 출중하다고 알려진 삼남이… 황위에 오른다고 한들 그것 역시 이상할 일 없겠지.

“형님, 아니, 엔프리제 드 블레임.”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이야기처럼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게 아니었다.

엔프리제 드 블레임은 세간에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너무도 다정했다.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자신을 그런 식으로 대한 아버지도, 그걸 알면서도 그 단맛에 취해 있던 동생도.

다만 자신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으며, 더는 상처 입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주변에 벽을 치고 가시를 세웠을 뿐이었다.

그런 그가, 설령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들 제 동생을 다치게 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희망을 가졌다. 좀 더 깊게 사랑하게 된다면, 좀 더 깊게 집착하게 된다면 혹시 모른다고. 하지만 엔프리제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게 되었음에도 바뀌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가 자신에 대해 기억하지 못해서 그럴 거라고, 기억이 돌아오면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기만 했다.

아아, 이 얼마나 상냥한 사람인지.

그냥 모르는 척 그녀의 곁을 차지해 버리면 될 텐데. 그녀를 취해 버리면 될 텐데. 엔프리제는 그녀의 기억을 되돌리려 애썼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엘마레 역시 같은 불안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카운 백작가 방문 일정을 바르카에게 흘렸다.

그녀가 기억을 되찾기 전에…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일을 벌이는 게 더 낫지 않을까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두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기억을 되찾기는커녕 도리어 의리를 지키며 황제의 혼담까지도 거절하게 만든 약혼자를 버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정말로 맺어졌다.

엘마레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진심으로 축복했다. 그녀가 엔프리제에게 더 소중한 사람이 될수록 샤페릴의 가치는 더 올라갈 테니까. 그리고 두 사람이 잘될수록 바르카의 질투와 증오 역시 더 커질 테니까.

“계약서의 내용에 따라 요청합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엘마레가 계약서에 엔프리제 드 블레임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협력하기로 썼다는 것이다. 물론 계약서를 거부하는 그를 회유하기 위한 조항이었지만….

뭐, 상관은 없었다.

바르카를 죽이는 건 엔프리제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는 요청이 아니다. 그 결과로 그가 황제 시해범이 되어 쫓기게 되다가 죽는 것은 엘마레가 그렇게 ‘명령’하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이니까.

게다가 그가 죽든 말든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그에게는 권력 따위 없어도 ‘샤페릴’만 있으면 될 테니까.

“바르카 블레임이 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이 자리에서 바로 죽여 주십시오.”

엘마레는… 오랫동안 바라 왔던 말을 입에 담았다.

* * *

엔프리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이 보였다.

마법 계약서는 절대라고 했다. 저 요청을 거부하면 엔프리제는 죽게 되는 거겠지.

그렇기에 요청을 하기 전에 이 자리에서 그를 벗어나게 해 주고 싶었다. 역부족이었지만. 나는 엘마레를 노려보다가 낮은 한숨을 흘렸다.

빠져나갈 방법이 없을까.

최소한 장소나 시간에 대한 제약을 붙이지만 않았어도 괜찮았을 텐데. 그걸 비웃듯 엘마레는 두 조건을 모두 내뱉었다.

그가 저 부탁을 철회하게 하는 방법….

나는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일단 방 문 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문을 잠가 버렸다. 엘마레는 그런 나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엘마레는 나를 해치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나를 보호하기 위한 협력 요청을 거부할 수 없다는 조항이었다. 내가 엔프리제를 향해 입을 열기 직전에 엔프리제가 입을 열었다.

“이 일로 인해 샤페릴이 다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협력해 주겠지?”

“당연합니다. 맹세해도 좋습니다. 레이디 리베테는 절대 다치지 않습니다.”

저 남자가…!

딱 한마디에 알아챘다. 엔프리제는.

“나는 엔프리제를 따라갈 거예요!”

“샤페릴….”

엔프리제가 곤란하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어딜 날 두고 가려고!

문을 잠그긴 했지만, 바르카의 성격상 오래 기다리진 않을 거다. 그래서 더 큰 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이 방에서 나가지 못하게 할 거예요!”

안에서 나온 말은 밖으로 새어 나가선 안 된다. 엔프리제가 황제 시해를 요청받았고, 계약서로 인해 그걸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하지만 곧바로 이 방에 들어오게 되어도 곤란하다. 그래서 내가 방 문을 막고 서 있다는 걸 어필하기 위해 소리를 지른 거였다.

그래야 억지로 문을 부수지 못할 테니까.

일부러 덜컹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문에 몇 번 몸을 부딪친 후에 다시 엔프리제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당황하는 엔프리제의 허리춤에서 검을 빼앗아 들었다.

무거워.

무겁긴 한데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나는 그걸 엘마레에게 향했다.

“…레이디 샤페릴,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당신은 날 해칠 수 없잖아요. 그렇죠?”

“…….”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건 아니죠. 그러니 엔프리제, 협력을 요청해 줘요. 샤페릴 드 리베테에게 정신적, 신체적 피해를 주는 그 어떤 행동이나 명령도 하지 말아 달라고.”

설령, 내가 그를 해하더라도.

“…샤페릴.”

“어서요.”

“지금 와서 요청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계약서를 쓰는 날, 저는 형님에게 지금 당신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의 요청을 받았으니까요.”

그렇다면.

나는 한 발 더 엘마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저항은 할 수 있겠지. 하지만 흉기를 든 이를 제압하는 건 유단자도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게는 한 가지 더… 유효한 수단이 남아 있으니까.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엘마레 님, 방금 하신 요청을 철회해 주세요.”

“그건 불가합니다. 당신의 신변을 보호하는 일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아니, 오히려 당신의 신변을 보호하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 방 문을 열고 황제가 들어오면… 당신은 정신적, 신체적 위해를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될 텐데.”

썩을 놈.

확실히 황제를 죽인다고 해도 당장 엔프리제의 신변에 위해가 발생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위험 요소를 배제하는 결과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하지만.

“당신을 죽이면 그 요청도 무효가 되겠죠. 그쵸?”

“글쎄요. 그런 사례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차라리 당신을 죽이고 바르카도 죽여 엔프리제가 황제가 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죠.”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

검날을 그의 목에 가져간다.

당장이라도 찌를 듯 번뜩이는 그 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도 엘마레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형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를 죽이면 어떤 협력도 받지 못하시게 될 텐데. 게다가.”

그의 손이 검날을 잡는다.

저런 걸 실제로 눈앞에서 볼 날이 올 줄이야. 날카로운 검이 손을 파고들어 주르륵 피가 흘러내린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손을 놓을 뻔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건… 그랬다간 모든 게 끝난다는 걸 무의식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레이디 리베테는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으시죠? 절 죽이면 당신은 엄청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게 되실 테죠. 이미 스트레스로 인해 한 번 기억을 잃었던 적이 있는 당신이….”

파란 눈동자가 엔프리제를 향한다.

그 눈동자가 조금씩 움직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에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번엔 형님과 사랑한 기억까지 잃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리고, 엔프리제의 손이 부드럽게 내 손을 감싸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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