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21)
“으헉!”
아슬아슬하게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행인과 직접 부딪치진 않았지만,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넘어뜨릴 정도의 무언가.
그것이 황성으로 향하는 길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평소라면 이렇게 거칠게 말을 몰지 않겠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엔프리제는 이를 악물고 앞을 노려보았다.
혹여라도 저로 인해 다치거나 죽는 이가 생기지 않도록. 그리고.
자신의 목적을 잊지 않도록.
그의 방문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활짝 열린 성문으로 뛰어들었다. 엔프리제가 지나가기가 무섭게 성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엔프리제는 곧바로 왕제궁으로 향했다.
궁 앞에 도착하자마자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비록 착지는 깔끔했지만, 순간적으로 몸에 부담이 가서 욱신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왕제궁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렸습니다, 대공 전하. 생각한 것보다… 빨리 오셨군요.”
회중시계를 들여다본 시종장이 엷게 웃으며 말했다. 평소에는 엘마레와 닮아 싫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 미소가 오늘따라 기분 나빴다.
아니, 오늘이니까 기분이 나빴다.
“샤페릴은.”
“이쪽으로.”
평소와 달리 무례한 엔프리제의 언행에도 시종장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느긋한 걸음으로 앞장설 뿐.
엔프리제는 이를 갈면서도 순순히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왜 믿었을까.
샤페릴은 말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엔프리제가 지켜 주길 원한다고. 그런데 왜 자신은 그녀를 엘마레에게 맡기려 했을까.
아니, 처음부터 잘못했던 것이었다.
처음부터 엘마레를 믿어선 안 됐다.
로비를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종장이 멈춰 섰다. 그리고 우아한 손동작으로 방 문을 두드렸다.
“전하,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안에서 무언가 소리가 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거기에는.
“오셨습니까, 형님.”
오랫동안 엔프리제가 믿고 마음을 허락한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엘마레.”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그 목소리에서 제 형님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엘마레는, 엷게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짓이라니요, 형님. 계약하지 않았습니까. 레이디 리베테를 지키는 데 ‘협조’하겠다고.”
“나는… 이런 도움을 요청한 적이 없다.”
“일단 들어오시죠, 형님. 레이디 리베테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으득, 하고 이를 갈던 엔프리제가 방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리고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오해하지 마십시오, 형님. 어디까지나 레이디 리베테의 안전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으니까요.”
샤페릴은, 얇은 천으로 입을 가리고 손발이 구속되어 있었다. 가느다란 팔을 파고든 밧줄을 본 엔프리제가 곧바로 그녀에게 달려갔다.
“샤페릴, 잠깐만 기다려요.”
붉은 눈동자가, 엔프리제를 보자 살짝 흔들렸다. 그는 제 허리춤의 검을 뽑아 밧줄부터 잘라 주었다.
“괜찮습니까?”
손이 자유로워지기가 무섭게 샤페릴은 제 입을 막고 있던 천을 풀어냈다. 그러고는.
“오지 마세요.”
의외의 말을 꺼냈다.
엔프리제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얼빠진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샤페릴이 차갑게 내뱉었다.
“제가 이런 꼴이 될 때까지 뭘 한 거예요? 이제서야 오면 누가 기뻐할 줄 알아요? 그냥 가 버려요. 지금 당신 얼굴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아요.”
“샤페릴…?”
그가 조금만 더 주의 깊게 봤더라면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꽉 쥔 주먹.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입가와 살짝 흔들리는 목소리.
그리고 책을 읽는 듯한 어색한 말투.
하지만 그걸 알아채기엔 그녀의 말이 그의 머릿속을 엉망으로 헤집어 놓았다.
“빨리 꺼져 버려요.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니까요!”
거친 말까지 쏟아 내는 그녀의 모습에, 엔프리제는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런 그를 보호하듯 엘마레가 앞으로 나섰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레이디 리베테.”
“오늘 위험한 꼴이 되어 보고 확실히 알았어요. 아주 지긋지긋해요. 엔프리제랑 있으면 언제나 이래요. 왜 제가 이렇게 험한 꼴을 당해야 하냔 말이에요. 이럴 바엔 차라리.”
순간 샤페릴이 말을 멈췄다.
붉은 눈동자가 엔프리제와 엘마레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차라리… 황제 폐하의 곁에 있는 게 낫겠어요!”
토해 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엘마레가 당혹스럽다는 듯 엔프리제와 샤페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엔프리제의 눈은 오로지 샤페릴에게만 못 박혀 있었다.
어째서.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정말로… 내가 부족해서 당신을 이런 상황에 처하게 한 탓일까. 그동안 말하진 않았지만, 그런 나에게 질려 있었던 걸까.
정말로 당신은….
차라리 바르카의 곁에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진심이에요.”
“당신께서 제게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으니까요.”
혼란이 가라앉자 보였다.
어떻게 저걸 진심이라고 한순간이라도 오해할 수 있었을까. 엔프리제는 한 발, 샤페릴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오지 마요.”
차갑게 내뱉으려 하는 그녀의 말끝은, 그 손끝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
* * *
왜 믿어 주지 않는 걸까. 그동안 내 말은 다 믿어 줬으면서, 왜 하필.
이거라면 분명 믿을 거라고 생각했다. 엔프리제는 언제나 자신에게 자신감이 없었으니까. 분명 순순히 떠나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샤페릴.”
“오지 말라니까요!”
가까이 오면 들킨다.
사실은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도, 그를 끌어안고 도망치고 싶어지는 마음도. 하지만 그래서야 끝이 나질 않는다.
게다가 이미….
우리는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되었다.
“당신이 왜 그러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샤페릴, 저는 당신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냥 제 앞에서 좀…!”
“그동안 당신이 제게 해 준 말들을 믿습니다.”
…아아, 그랬지.
내가 그랬다. 내가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노래했고 당신이 얼마나 내게 소중한 사람인지 계속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데 마음이 변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그렇게 믿고 좀… 떠나 주면 안 되나.
이대로 있다간.
“샤페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지킬 겁니다.”
“…….”
왜 나는 이토록 무능한 걸까.
왜 나는 당신을 떠나 보내는 것조차 못하는 걸까.
왜 나는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을까.
“아….”
낮은 한탄을 흘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목소리까지 흔들리게 만들던 떨림이 멎었다. 차가워진 손끝에 피가 도는 게 느껴진다.
“…당신이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엔프리제가 날 꽉 끌어안았다.
얼마나 뛰어온 걸까. 평소와 다르게 살짝 땀 냄새가 났다. 게다가 품이 몹시도 뜨거웠다.
밀어내야 하는데. 안 그러면 엔프리제는… 해선 안 될 짓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런데도.
나는 손을 들어… 결국 그를 끌어안고야 말았다.
“이유는 묻지 말고 도망가 주면 안 돼요?”
“네.”
“제가 부탁하고 애원해도 안 돼요?”
“네. 당신은….”
엔프리제가 날 더 꽉 끌어안는다. 그리고 웃으며 속삭였다.
“제겐 저보다도 더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동시에.
벌컥,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 *
엘마레는 살면서 남 앞에서 땀을 흘린 적이 없었다. 뒤에서는 홀로 조용히 노력하며 땀을 흘리더라도 앞에서는 언제나 우아하고 여유로운 얼굴을 유지했다.
자신은 노력가여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순간 아찔했다. 그는 제 손에 고인 땀을 바라보다 쓰게 웃었다.
“다행입니다, 레이디 리베테. 형님이 생각 이상으로 당신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붉은 눈동자가 엘마레를 노려보았다.
머리가 마냥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설마 그 사람을 부른 것만으로 엘마레가 무슨 짓을 할 것인지를 대충 눈치챌 줄이야. 형님이랑 하는 걸 보면 머리에 꽃밭이라도 있나 싶을 정도로 멍청해 보였는데.
하긴, 계속 자신을 경계했던 게 단순히 기분이나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었던 건지도 모른다.
“형님,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정말로 레이디 리베테를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만.”
형님께서 이 자리에 와 주시길 기다렸을 뿐.
‘부탁’을 할 기회는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참아야만 했던 건 생각보다 바르카의 참을성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계기’가 있어야 ‘결과’가 나올 텐데, 그 ‘계기’가 좀체 시작되지 않으니 일을 진행할 수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드디어 ‘계기’가 만들어졌다. 그러니 이제는 ‘결과’가 따라올 차례였다.
“…뭐, 그건 중요하지 않겠죠. 저는 앞으로도 두 분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걸 위해서는… 기억하고 계시겠죠, 형님? 또 다른 조건을.”
“네 부탁을 하나 들어주어야만 한다는 그 조건 말이냐.”
“네. 형님께서 직접 제시한 그 조건 말입니다.”
만약 엔프리제가 말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꺼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아무리 둔한 형님이라도 경계했을지도 모르지.
-내가 할 수 있는 한 너를 도우마. 대신 부탁을 들어다오.
가진 건 작위뿐인 힘없는 황족.
아니, 황족 취급도 못 받는 떨거지.
하필 그가 샤페릴을 사랑하고야 만 게 그가 겪는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건 엘마레에게 있어서는.
-물론입니다, 형님. 존경하는 형님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레이디 리베테를… 저택에서 꺼내 주고 싶다. 반란군 쪽은 즉결 처형권으로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겠지만, 교회와 마탑은 황실 소속이라 손을 쓰기 어렵다. 그러니….
-이해했습니다, 형님. 저를 못 믿으신다면 마법 계약서라도 작성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까진….
-생각해 보니 꼭 작성하는 게 좋겠습니다, 형님. 확신을 드리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말하며 엘마레는 웃었었다. 마치 포식을 앞둔 맹수처럼.
“전하.”
그리고.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바로 지금, 엘마레의 얼굴에는 그때와 같은 미소가 스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