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20)
왜, 엘마레가 여기 있는 걸까.
그는 마치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내가 나타나자 놀라지도 않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 모습이 어딘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애초에 여길 어떻게 안 거지?
엔프리제는 여기가 ‘엘마레도 모르는 곳’이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왜?
어차피 여기서 나가야 한다. 여기에 와 있다는 건 내가 어디서 왔다는 건지도 안다는 뜻일 테니까.
미소 지으며 손을 내미는 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잡았다. 마음 같아서야 기분 나빠서 잡고 싶지 않지만… 그냥 빠져가다가 쓸리고 넘어지는 것보다 낫겠지.
발을 딛자마자 그의 손을 놓아 버렸다. 엘마레는 기분 나빠하는 기색도 없이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오늘따라 더….
“왜, 엘마레 님이 여기 계신가요?”
“형님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레이디 리베테를 잘 부탁한다고.”
그건… 그랬을지도 모른다.
엔프리제는 이 남자를 찰떡같이 믿고 있으니까. 나 역시 그냥 내가 기분 나쁘게 느껴질 뿐이지, 엔프리제에게 뭔가를 한 것도 아니고 정말로 사이는 좋은 것 같아서 엘마레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엔프리제는 엘마레조차도 모르는 곳이라고 이야기했었다.
“…엔프리제가 곧 올 거예요. 오두막에서 기다리라고 하던데.”
“네. 안 그래도 모셔다 드리려고 기다렸습니다. 길이 험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해서요.”
…….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해서 좀 혼란스럽다.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간단하게 요약을 해 보기로 했다.
엔프리제는 ‘엘마레가 모르는’이라고 언급했었다. 하지만 엘마레는 나를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가능성은 두 가지.
1. 엔프리제가 ‘엘마레도 모르는’이라고 한 것은 통로 자체를 말한 거고, 내가 여기에 올 건 알고 있었다.
2. 엘마레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모종의 방법으로 내가 나올 곳을 알아낸 뒤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은 2라고 말하고 있는데, 1도 아니라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애초에 엘마레가 날 데려가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뭘까.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 하지만 1이라기엔 어딘지….
…일단은 오두막으로 가자. 여기 서서 계속 생각하고 있어도 의미가 없다. 엔프리제랑 합류하면 자동으로 풀릴 의문이고, 그는 내게 오두막에서 기다리라고 했었으니까.
“감사해요.”
생글생글 웃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앞장서라는 뜻이었다.
만약 정말로 엔프리제가 여기 위치를 말해 준 거라면 오두막의 위치도 알고 있겠지. 그런 생각에서였다. 엘마레는 그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웃음을 잃지 않은 채 내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앞장섰다.
정말로 아는 건가.
아니, 이 장소를 알게 된 이상 설령 엔프리제가 말해 준 게 아니라도 오두막의 위치 정도는 파악해 뒀을지도 모른다.
조용히 뒤따라가며 주변을 살폈다. 확실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티가 난다. 짐승의 길에 가까워 보인다. 이런 곳이니까 엔프리제가 골라 둔 거겠지.
확실히 걷기 힘들다. 치마가 거슬려. 돌아가면 당분간 바지를 입고 생활해야겠어. 애초에 바지를 입고 나왔어야 했는데 급하게 나오느라, 쩝.
마음 같아선 진짜 쫙 찢어 버리고 싶….
안 돼, 참아. 샤페릴의 말랑말랑한 피부에 풀독이 오르면 곤란하다. 거슬리는 게 낫지.
“괜찮으십니까? 조금 잡아 드릴까요?”
“괜찮아요.”
거의 종아리까지 올라오긴 하지만, 그래도 당장 근처는 다 풀밭이고 낮은 나무 하나 없어서 걷기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그냥 치마가 거슬려서 힘들 뿐.
그리고 저 남자의 손을 잡고 싶지 않다. 최소한 내게 있는 의문이 풀릴 때까지는.
길은 그대로 쭉 이어졌다. 짐승의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엔프리제가 미리 만들어 둔 걸까?
아니, 아닐 것 같다.
비밀리에 만든 은신처잖아. 그럼 아마도 버려진 쉼터 같은 거 아닐까. 예전에는 사람이 들어왔었다거나, 혹은 사냥꾼 같은 사람들이 잠시 들어와서 쉬었다거나.
심마니 같은 건 없을 테니까.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더 힘내세요.”
묵묵히 길을 따라 걸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삐!”
풀숲에서 무언가가 휙 튀어 올랐다.
“으악!”
순간 놀라 나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았다. 날 향해 날아왔던 그것은 풀숲 사이로 사라졌다가 빠르게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피하지 않고 내게 뛰어드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플리!”
“삐-!”
플리는 내게 안기기가 무섭게 곧바로 팔을 타고 뛰어 올라왔다. 그리고 목에 감긴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두려웠던 걸까. 걱정했던 걸까.
목을 통해 전달되는 따스함과 떨림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걱정했어?”
플리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날 더는 놓지 않겠다는 듯 손톱까지 세워 어깨의 옷자락을 꽉 붙들고 있을 뿐.
그 마음을 좀 알 것 같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씩 웃었다.
“미안해.”
“아가씨!”
플리의 소리를 듣고 나온 걸까. 템버가 평소와 다르게 뛰어왔다.
언제나 침착하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니는 템버인데. 분명히 템버도 여러 가지로 걱정이 많았겠지.
“템버.”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요. 템버가 플리를 데려다준 거예요?”
“네. 일단 안으로…?”
내게 말을 걸던 템버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플리가 내게 뛰어들 때부터 살짝 옆으로 물러서 있던 엘마레를 뒤늦게 발견한 듯했다. 반응을 보니 템버도 엘마레가 여기 와 있었다는 걸 몰랐던 듯하다. 그녀는 천천히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엘마레를 향해 말을 걸었다.
“왕제 전하께서 여기엔 어쩐 일로….”
“형님께서 말해 주셨습니다.”
“대공 전하께서요…?”
“네. 혹여 무슨 일이 있으면 여기로 와서… 레이디 리베테를 보호해 주었으면 한다고.”
“저도, 전하와 아가씨도 아무 말 없이 나왔는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엘마레는 엷게 웃었다.
평소의 그 만들어 낸, 가면 같은 웃음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 처음으로… 그의 진짜 얼굴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두 분께서 저를 믿지 않으신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이걸 봐 주시겠습니까.”
엘마레가 꺼낸 건 웬 두루마리였다.
그냥 종이가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하지. 파피루스? 그런 느낌이다.
받아서 펴 들자 안에는.
“…이거 설마….”
“마법 계약서입니다. 형님과 제가 쓴.”
1. 엘마레 드 블레임은 샤페릴 드 리베테를 정신적, 신체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엔프리제 드 블레임에게 요청받은 모든 협력을 거부하지 않는다.
2. 엘마레 드 블레임은 엔프리제 드 블레임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협력한다.
3. 엔프리제 드 블레임은 상기 두 가지 사항에 반하지 않는 엘마레 드 블레임의 요청 하나를 거부할 수 없다.
간단한 계약서다.
동시에 엘마레가 나와 엔프리제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걸 왜 지금 보여 주는 걸까.
엘마레는 눈치가 빠르다. 그건 딱 봐도 안다.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거스를 이야기나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는 나이기에.
그러니 알아채고 있었을 거다. 나와 템버가 자신을 적대시하지는 않지만, 어딘지 수상쩍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쯤은.
그런데 왜 이걸 계속 숨기고 있었던 걸까. 동시에 왜 지금 하필 이걸 보여 주는 걸까.
“형님은… 제게 요청하셨습니다. 레이디 리베테를 지켜 달라고.”
그러니 그걸 수행하지 않으면 계약의 페널티를 받게 된다. 그런 뜻이겠지.
계약 불이행에 대한 계약서는….
“…….”
1. 계약서의 조항을 이행하지 않은 계약자는 목숨을 잃게 된다.
이쪽 역시 간단하다.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것은, 형님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엔프리제가…?
“형님은 이런 계약서를 쓴 걸 레이디 리베테가 아시게 될 경우 분명 걱정하고 슬퍼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화를 내실지도 모른다고 하셨지요.”
…당연하지. 왜 이딴 거에 목숨을 걸어?
애초에 뭐 하러 엘마레에게 이렇게까지 도움을 요청해? 날 지키는 건 엔프리제로 충분한데.
엔프리제가 지켜 주지 못할 정도의 상황이 생기면… 그냥 거기까지인 거지.
“일단은 자리를 옮기도록 하죠.”
“엔프리제가 오면 갈래요.”
“형님께서는 황성으로 바로 오실 겁니다.”
어째서? 대공저가 아니고?
나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템버 역시 날 보호하듯 한 발 뒤로 물러섰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레이디 리베테. 저는 당신에게 어떤 위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 관련된 명령도 내리지 못하니까요.”
생글 웃는 엘마레.
주변을 감싸는 묘한 기척.
불길한 예감에 도망치려 뒤도는 내 눈에.
“……!”
낯선 남자들이 보였다.
* * *
엔프리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샤페릴은 사라진 뒤였다.
어째서?
여기를 알고 있는 건 템버뿐이었다. 엘마레조차도 알지 못하는 곳인데 대체 어떻게.
오두막 안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걸 보면 템버가 이변을 깨닫고 바로 달려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흐트러지지 않은 걸 보아 억지로 끌려간 것 역시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오두막 안을 둘러보던 엔프리제의 눈에 탁자 위 작은 쪽지 하나가 보였다.
“…….”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템버까지 있었는데도 샤페릴이 사라졌다. 그리고 남겨진 쪽지는….
템버와 샤페릴이 남긴 걸까?
뭔가 일이 생겨서 여기를 급하게 이탈해야 하는 사정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냉정한 이성이 그걸 부정한다.
만약 어떤 ‘사정’이 있었다면, 쪽지를 숨겨 두었을 것이다. 저렇게 대놓고 탁자 위에 보이도록 두진 않았겠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건….
만약 그렇다면 이렇게 망설이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한시라도 빨리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어야만 할 테니까.
엔프리제는 낮은 심호흡을 한 후 곧바로 쪽지를 집었다.
그리고 펴든 쪽지에는.
“……?”
의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