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19)
생각보다 환기구 안은 더웠다. 이제 가을꽃도 시들어 가는 시기인데 시원한 바람은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줄줄 흐르는 땀이 불쾌했다.
심지어 통로는 좁기도 또 엄청 좁아서 치마를 입은 채로는 꽤 움직이기 힘들었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 본 것처럼 치마를 찢어 버릴까 하다 이내 그만두었다. 다리가 드러나는 거야 별문제가 되지 않지만, 치마 위로도 가끔 돌멩이라든가 무언가 이물이 느껴지는데 치마조차 없으면 다리에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후….”
쥐라도 나올 것 같은 어두컴컴한 통로를 지나면서 문득 플리를 떠올렸다.
아침부터 계속 주위를 경계하고 내가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손가락까지 깨물어 대는 통에 결국은 그냥 두고 왔는데…. 지금은 괜찮아졌을까?
플리가 있었다면 분명 나보다 앞서 나가면서 코를 킁킁거리고 있겠지. 그 생각을 하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스몄다.
조금 전까지, 엔프리제를 다시 만나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불안했는데. 어느덧 당신이 내게 이토록 큰 존재가 되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다.
여러 소설을 읽던 내가, 유독 로맨스 소설을 자주 읽었던 이유는 동경했기 때문이다. 물론, 잘생기고 멋있는 남자와 꽁냥거리게 되는 것도 부럽긴 했지만….
가장 부러웠던 것은 변함없는, 한결같은 사랑이었다.
그 사랑을 잃을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고 혹여 버림받을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외곬의 사랑. 내가 가장 받기를 원했지만,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것. 그게 로맨스 소설 안에는 늘 있었다.
소설은 소설일 뿐. 현실이 아니다.
그렇게 말해 왔던 동경이 현실이 되었다. 그게 참 새삼스럽게 믿기지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사랑받기만을 원하는 게 아니라 사랑해 주기를 원하게 된 것도.
언제나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하면, 별것 아니라고 하거나 이것밖에 못 해 줘서 미안하다고 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고 나는 수고를 조금 덜어 주는 정도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래서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다. 부족한 나는 언제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엔프리제.
당신은 내가 당신을 바꿨다고 말했지만, 당신 역시 나를 바꿨어. 겁쟁이던 내게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주고 믿음을 주면서 나까지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게 만들어 줬어.
아마 분명 그런 게 사랑이겠지.
서로가 서로를 채워 주는 것. 그리고 더 주고 싶어지고 더 받고 싶어지는. 그런 모순된 것 같기도 하고 당연한 것 같기도 한 그런 거.
그러니까.
“후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 거야.
아까, 소리만 들으면서 멍하니 기다리고 있었던 때보다 지금이 훨씬 낫긴 한데 좀 힘들다. 그래도 나름 운동 좀 했다고 체력이 나아지긴 했네.
끙끙대면서, 중간중간 조금씩 쉬기도 하면서 열심히 기었다.
원래 이런 용도로 만들어 놓은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그렇게 된 건지 모르지만 환풍구는 일직선이었다. 이 안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철조망이 쳐져서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던, 천장 쪽의 큰 구멍을 제외하고는 다른 통로가 전혀 없다. 그런데도 숨쉬기가 그리 힘들지는 않으니 신기하다.
그렇게 얼마나 더 갔을까.
이게 끝이 나긴 하는 걸까. 조금만 쉬었다 갈까. 먼지고 흙이고 모르겠고 대짜로 누워 버리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아.”
미처 느끼지도 못하고 있던, 습하고 쿰쿰한 냄새가 사라져간다. 대신 느껴지는 건 부드러운 흙 내음이었다.
평평하던 통로가 어느 순간 살짝 기울어지는 게 느껴진다. 그렇게 또 얼마를 갔을까. 한참을 더 가자 어둡던 통로 끄트머리에서 무언가가 빛나는 게 보였다.
출구.
그렇게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흘끗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이제는 한참 멀어졌을 우리.
아니, 어쩌면 일이 잘됐다면 말을 타고 올 엔프리제가 더 일찍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움직임이 빨라졌다.
조금씩 빛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 빛을 지나쳤을 때, 나는.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샤페릴.”
엔프리제가 아닌 남자를 마주해야만 했다.
* * *
-문을 열어 주십시오, 레이디 멜리나.
낮은 목소리.
거의 속삭이는 것에 가까운 목소리였지만, 미리 문에 귀를 댄 채 기다리고 있던 멜리나에게는 잘 들렸다.
낮은 한숨을 내쉰 그녀는 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황제의 기사단 단장인 세실리오가 서 있었다.
-레이디 샤페릴과 대공은?
대공은, 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이미 그를 자신보다 우위의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은밀하게 이곳에 와서 뒷문으로 저택 안에 들어가려 한다는 것은….
멜리나는 편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내 낮은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시점에서 이미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갔다는 건.
신중을 기해 뒷문으로 나간 거겠지만, 멜리나에게 지시를 한 주인 역시 같은 생각으로 뒷문을 지정했다. 그녀가 모퉁이를 돌기 직전에 기척을 느끼고 멈춰 섰을 때, 닫히는 문 사이로 반짝이는 하얀 머리카락을 보고야 말았다.
주인의 명령에 따르기 위해서는 바로 말해줘야 하겠지만….
어차피 그들도 멜리나를 보지 못했다. 멜리나 외에는 아무도 그녀가 그들을 봤다는 걸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약간의… 시간벌이 정도는 해 줘도 괜찮지 않을까.
그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참회였다.
-루카스, 열쇠.
-여기 있습니다.
멜리나는 그 방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때 엔프리제는 문손잡이를 이상하게 돌리며 마치 ‘결계를 푸는 방법’을 수행하는 척했었다. 하지만 샤페릴이 데리고 다니는 족제비의 가슴에 달린 보석과 엔프리제의 리본 타이 장식에 달린 보석이 같은 것임을 알아챈 멜리나는 그 수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것 역시 모두 주인에게 보고되었다.
아마 대비책도 가지고 왔겠지.
결계의 열쇠에는 다양한 것이 사용된다. 보석인 경우도 있고 진짜 열쇠인 경우도 있으며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는 돌멩이인 경우도 있었다. 다만 그 열쇠가 ‘무엇’인지만 알면 푸는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릴 뿐.
그걸 알기에 일부러 샤페릴의 방으로 유도했다.
-오늘은 별다른 일정이 없으니 레이디 리베테의 방에 두 분 다 계실 겁니다.
세실리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긴장된 얼굴로 푸른색의 보석을 꺼냈다.
세실리오가 문을 여는 동안 멜리나는 제 속으로만 기도했다. 부디 두 사람이 이 틈을 타 무사히 도망칠 수 있기를. 그리고… 가능하다면.
하지만 그녀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을 듯했다.
생각보다 빨리 열린 문 안을 확인한 남자들은, 그대로 어디론가 가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식사를 가져온 템버 역시… 이리저리 준비를 하더니 집을 나섰다.
그리고 멜리나는.
마지막 임무를 위해 그녀의 뒤를 따라야만 했다.
* * *
엘마레 드 블레임은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묘한 고양감과 긴장감이 그를 감쌌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순간이 거의 코앞까지 다가왔는데 왜 이리도 불안한 것일까.
“…후.”
긴장으로 마르는 입술을 살짝 혀로 적시면서도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있는 거라곤 온통 숲뿐.
멍하니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그건 분명… 엔프리제와 함께 사냥을 나갔던 날이었다. 활이 서투른 자신을 위해 이것저것 가르쳐 주던 형님.
평소라면 분명 눈치채셨을 텐데, 아마도 엘마레에게 신경을 쓰느라 주변을 살피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아직 어렸던 형님이 당시에는 미숙했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고.
그들이 정신을 차린 건, 바로 곁에서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으르렁거림. 위험을 깨닫지 못했던 엘마레와 달리 엔프리제는 본능적으로 엘마레를 감쌌다. 동시에.
-윽!
엔프리제가 고통 섞인 신음을 내뱉으며 무너졌다.
팔을 할퀴고 간 상처는 어린 엘마레가 보기에도 꽤 깊어 보였다. 놀라서 그를 붙잡으려 하자 엔프리제가 손을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이쪽으로 오지 말 거라.
형님은… 눈치챘었으리라.
그 진수를 보낸 것은 아버지거나 둘째 형님이거나… 혹은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라는 걸.
그 진수가 노리는 건 오롯이 자신 하나뿐이라는 걸.
엔프리제는 다치지 않은 손으로 검을 쥐었다. 원래는 양손으로 검을 쥐는 그가 한 손으로 검을 쥔다는 건…, 그 상태로 저런 진수를 상대한다는 건 자살행위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런데도 형님은 물러서지 않았다.
침착하게 상황을 살피며 상대의 움직임을 살피는 형님의 모습에는, 보는 이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귀기 같은 것마저 섞여 있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었지.
-황제의 자리란… 자비와 광기를 가진 이만이 앉을 수 있는 곳이다.
자신을 향한 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만약 형님이, 머리카락이나 눈 색 하나만이라도 아버지를 닮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바르카가 적장자 취급을 받는 일은 없었겠지.
어쩌면 적자인 세 사람 중에 아버지가 말한 조건을 통과할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저 형님은. 하지만 딱 하나, 아버지를 닮은 용모를 타고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는 뒤로 밀려나야만 했다.
아버지를 닮은 외모가 황제가 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조건이라면.
형님.
그 숲속에서, 형님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만약 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날이 온다면… 나는 절대로.
“…….”
엘마레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숲 사이에서 피어올랐다. 엘마레는 제 허리춤에 매달린 검집을 꽉 쥐며 중얼거렸다.
“저는, 절대로.”
후환을 남겨 두지 않을 것입니다,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