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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118화 (118/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18)

엔프리제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문을 연 것은, 그가 아직 살아 있을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황제가 보낸 사람들이라면 날 다치게 하지는 못한다. 그걸 알고 있기에 한 행동이었지만.

“샤페릴!”

다급한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자동으로 잠기는 건지 아니면 엔프리제의 등장에 그쪽으로 간 건지 모르겠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또 낮은 금속음이 들렸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반복되는 소리. 귀를 막고 싶지만 그래선 안 된다. 제대로 소리를 들어야 문을 열 때를 알 수 있을 테니까.

또 기다림이 시작되나 싶었는데.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 엔프리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샤페릴, 괜찮습니까?”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슬프거나 안도해서가 아니었다. 화가 나서였다.

벌컥, 문을 열자마자 엔프리제가 나를 끌어안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내가 밖을 보지 못하도록 곧바로 문을 닫아 버렸다.

그래 봤자 뭐 할까. 몸에서 진동하는 피의 냄새는 가릴 수가 없는데.

하지만 그 역겹고 비려야 할 냄새가 내게는 안도를 주었다.

“괜찮아요?”

원망의 말이 잔뜩 있었다.

나는 여기에 가만히 처박혀 있기만 했는데 왜 괜찮냐고 묻느냐. 그보다는 이런 꼴이 된 당신을 더 걱정해라.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가장 먼저 나온 말은 괜찮냐였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보다… 어서 여길 나가도록 하지요.”

엔프리제의 말대로다. 어서 나가야 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날 안고 있는 그를 떼어 놓고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눈에 띄는 상처는… 없는 것 같긴 한데.

“샤페릴?”

“엔프리제는 저기로 못 나가잖아요.”

“…네. 저는, 샤페릴이 나가는 걸 본 후에 다른 경로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열쇠를 가진 사람 둘 다 여기 있는데, 여기서 좀 더 있다가 가면 안 돼요?”

언뜻 보기엔 괜찮아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걱정된다. 엔프리제를 바라보며 그렇게 묻자 그가 엷게 웃었다.

“여기서 빠져나간 이가 있습니다. 마법사들을 불러오면 얼마 아마도 오늘 내로 문이 열릴지도 모릅니다.”

에이씨.

원래 결계라는 건 그리 쉽게 풀리는 게 아니지 않나? 왜 여기는 그렇게 쉽게 풀리는 거야.

“정말로 괜찮아요?”

“네. 차라리 지금 빨리 나가는 게 저에게도 부담이 적습니다. 그러니 샤페릴,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만 기다리면 제가 당신을 모시러 갈 겁니다.”

그런 건 걱정되지 않는다. 당연히 엔프리제는 날 데리러 올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다만… 혹시라도 무리할까 봐 걱정돼서 그렇지.

“알았어요.”

하지만, 확실히 엔프리제 말이 맞다. 여기서 살아 나간 사람이 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이들을 끌고 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 빨리 나가는 게 엔프리제가 상대해야 할 자들의 숫자가 줄어들겠지.

얌전히 책상 위로 올라가 환기구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뒤를 돌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좁은 탓에 엔프리제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제발, 빨리 내 곁으로 돌아오길.

그렇게 바라며 어둠 속으로 향했다.

* * *

오두막에 도착한 템버는, 우선 청소부터 시작했다. 이곳에 물건을 들여놓은 날 이외엔 일부러 오지 않은 탓에 여기저기 거미줄이 쳐진 데다 먼지도 소복이 쌓여 엉망이었다. 심지어 먼지털이마저 먼지가 쌓여 희뿌옜다.

이런 곳에 차마 플리를 내려놓을 수가 없어 일단 풀숲에 내려 주었다. 그러자 작은 족제비는 허공을 향해 몇 번 코를 킁킁거리더니 어디론가 부리나케 달려갔다.

영리한 아이니 그리 멀리 가지는 않을 터. 템버는 일단 창문을 여는 것으로 청소를 시작했다.

5분 정도 걸어가면 냇물이 흐르기에 일부러 우물은 파 두지 않았다. 물통 두 개를 가지고 가서 가득 물을 담아 와 걸레를 빨았다.

청소의 기본은 위에서부터. 먼지떨이를 가지고 나와 쌓인 먼지를 모두 털어 내고 선반이나 벽에 쌓인 먼지와 거미줄을 걷어 냈다. 한참 총총거리며 먼지를 털어 내는데 플리가 불쑥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플리, 아직 먼지가 많으니까 밖에서 더…. 어머나.”

어디서 가져온 걸까.

빨갛게, 맛깔스럽게 익은 작은 나무 열매 하나를 입에 물고 온 플리가 물끄러미 템버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제 아지트에 숨겨 두었을 텐데. 아직 더럽다는 템버의 말에 어쩔 줄을 모르는 걸까.

템버가 웃으며 손을 내밀자, 그 손 위에 열매를 내려놓은 플리가 다시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가씨 드리려고 그러는 걸까요.”

말은 하지 못하지만, 플리 나름의 애정 표현인지도 모른다.

첫 만남에 아가씨의 손가락을 깨물었다고 들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따르게 되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또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 아가씨니까 분명 가능한 거였겠지.

물끄러미 손바닥 위의 빨간 열매를 바라보던 템버는, 이내 그것을 제 주머니에 쏙 넣었다. 손에 들고 있어서야 청소가 진행되지 않고 그렇다고 어디 두기에도 아직 마땅찮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남은 먼지를 털어 내는 템버의 머릿속에 문득 엔프리제가 떠올랐다.

“…하긴, 그 전하도 길들이신 분인데.”

어렸을 때의 엔프리제는 몹시도 사랑스러웠다.

아이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을까. 템버에게는, 마치 전하가 제 아이인 것만 같은 애정까지 솟구쳤었다. 사랑스럽고 또 귀여운 아이.

아이는 크면서 점점 사랑스러워졌다.

배려도 있고 마음씨가 예뻤다. 그리고.

-이거 줄게.

-어머나.

템버의 손과 비교하면 반도 되지 않을 듯 조그마한 손. 그 손을 꽉 주먹 쥔 채 제게 내밀기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템버의 손 위로 까만 즙 같은 것이 떨어졌다.

이게 뭘까. 고개를 갸웃하며 아이를 보자 그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저하?

-미안….

아이의 손바닥에는 까만 열매가 짓이겨진 채 엉겨 붙어 있었다.

아마 정원을 산책하다 열매 하나를 몰래 따 숨겨 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힘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해 으깨 버린 거겠지.

템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제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가진 것이 없어도 이 사랑스러운 아이는 주위에 무언가를 주려 애쓰고 있었다. 그 마음씨가 어찌 예쁘지 않을까.

템버는, 즙이 묻지 않은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제게 열매를 주고 싶으셨어요?

-까만 보석처럼… 반짝이고 예뻤어.

-정말 그랬을 것 같아요. 그럼 우리 같이 보러 갈까요?

울상이던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붉은 열매를 떠올리자 갑자기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토록 사랑스러운 아이였는데.

-아버지, 어머니!

선황제와 선황후는 엔프리제를 거의 만나 주지 않았다. 아주 가끔, 정원이나 복도에서 마주칠 때가 있어도 엔프리제를 아는 체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작은 아이는 언제나 그들을 발견할 때마다 달려가 웃어 보이곤 했다.

그럴 때면 선황후는 곤란한 듯 선황제의 표정을 살폈고, 선황제는….

-더러운 손 치우거라.

얼굴을 찌푸리며 아이를 밀어냈다.

아이를 때리거나 신체적으로 다치게 한 적은 없다. 하지만 아이와 항상 함께 있는 템버는 알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이가 얼마나 상처받는지.

-왜 아버지, 어머니는 날 싫어해?

-싫어하지 않아요, 저하. 그저….

그저.

무어라고 설명해야 할까.

미워하는 건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머리카락과 눈 색이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미워하는 건 선황후의 과거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어느 쪽이건 아이가 받아들이기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드물게도 말문이 막힌 템버를 향해 아이는 물었다.

-어떻게 해야 돼? 어떻게 하면 아버지가 날 좋아해?

어떻게… 해도 불가능한 일이겠지.

엔프리제가 선황제의 밀어냄을 당하지 않을 방법은 많았다.

조용히, 죽은 것처럼 살 것. 그의 의중을 무조건 따를 것. 황제의 자리를 바라지 말 것. 눈에 띄지 않을 것. 그에게 다가가지 않을 것.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아이를 상처 입히는 일이기도 했다.

템버가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아이는 또 수없이 많은 상처를 입어야만 했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아이는 결국 알고야 말았다.

-나는 아버지의 아이가 아니야?

-아닙니다, 저하! 저하께서는 폐하의 아이이십니다!

적어도 템버는 그렇게 생각했다.

선황후는, 결혼 이후 거의 어두운 표정밖에 짓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는 언행을 하기 위해 많은 공부를 하고 노력했다.

혹여 오해를 받을까 주변에서 시녀를 무른 적도 없었고,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가… 가문을 위해 사랑하는 이까지 저버리고 선황제에게 시집온 그녀가 부정을 저지를 리 없었다.

-다들 내가 피 도둑이래.

-저하…, 그건….

-나는 도둑이야?

사랑스러운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사랑받기를 포기했다. 다만, 도저히 아버지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던지 인정받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차라리 템버가 그에게… 선황제의 아이가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해 주는 편이 나았을까. 그랬다면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그렇게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을까.

먼지떨이를 내려놓고 걸레를 집은 템버가 여기저기를 닦기 시작했다.

닦아 내면 깨끗해지는 물건들처럼, 사람의 마음도 그러면 좋을 텐데. 점점 언행이 사나워지는 엔프리제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는.

샤페릴을 만났다.

“…저는.”

얼토당토않은 감정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엔프리제가 제 아이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를 지켜보고 시중들어 온 그녀는… 부모와도 같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에게, 그리고.

“두 분이 행복해지시길 바랍니다.”

그녀에게.

두 사람을 위해서 템버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었다. 템버는 빠르게 손을 움직이며 먼지를 닦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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