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17)
좁은 산길.
귀족으로 태어나 귀족으로 자란 템버에게는 험난한 길이었다. 미리 몇 번 답사를 와 두지 않았더라면 꽤 많이 헤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플리는 잔뜩 긴장했는지 몸에 털을 빳빳하게 세운 채 주변을 킁킁대고 있었다. 템버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플리의 등을 쓰다듬었다.
“조금만 더 가면 오두막이 나올 거예요, 플리.”
다만 아가씨가 언제 올지는 모를 일이었다.
지하의 그 방에 물건들을 들여놓은 것도 템버였기에 식량이 얼마나 있는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그걸 다 소모하고 나온다면 빨라도 일주일. 어쩌면 그보다도 늦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사라져서 연락이 없는 이상, 템버 역시 돌아오길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오두막에도 상당한 양의 식량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다만 걱정인 것은 그 후였다.
아가씨와 합류한 후 가야 할 곳은 왕제궁이었다.
아가씨는 여기에 두고 자신만 가야 할까? 그러기엔 이미 자신 역시 황제나 주변 귀족들에게 얼굴이 알려져 있었다. 마을에서 심부름꾼을 구해 서신을 보내기에도 영 불안했다.
아니, 사실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다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왕제궁에 가도 되는지가 더 걱정이었다.
엔프리제가 왜 그를 믿는지는 알고 있었다. 제 까칠한 언행에도 불구하고 형님 형님 따르는 그가 어찌 미덥지 아니할까. 모든 이들에게 배척받아 온 엔프리제였기에 더 그러하리라.
하지만 그렇기에 템버는 엘마레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차가운 파란색 눈동자는 아버지인 황제를 너무도 꼭 빼닮아 있었다.
“...괜찮을까?”
“삐?”
낮은 혼잣말에 플리가 대답하듯 고개를 갸웃했다. 피식 웃은 템버가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행여라도 자신이 샤페릴보다 늦는 불상사가 벌어져선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
풀숲을 헤치며 나아가던 템버가 저도 모르게 얼어붙었다. 눈앞에 나타난 회색 털의 늑대 탓이었다.
무리에서 낙오된 것일까. 아니면 먹잇감의 기척을 알아채고 먼저 달려온 것일까. 언뜻 전자가 더 희망적으로 들리지만, 전투 능력이 거의 없는 템버에게는 어느 쪽이건 절망적이었다.
이 숲에 사람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건 확실히 야생동물이 많기 때문이기는 했다. 기껏해야 사냥꾼들이 무리 지어 들어오는 정도였는데 그걸 잘 알고 있는 엔프리제가 일부러 사냥꾼들에게 정보를 사 고르고 고른 땅에 오두막을 지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여기에 늑대가 있는 것일까.
“…플리, 도망가야 합니다. 저 늑대를 지나쳐서 쭉 가면 오두막이 있을 거예요. 아가씨는 거기로 오실 겁니다.”
한입거리도 되지 않는 작은 족제비와 인간. 늑대가 어느 쪽을 보며 입맛을 다실지는 뻔했다. 그렇다면 플리라도 살려 샤페릴의 곁으로 보내고 싶었다.
플리는, 그녀의 말을 이해한 듯 목에서 쪼르르 내려왔다. 그리고 늑대를 향해….
“플리?!”
* * *
몇 번 검을 나눠 본 것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절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물론 처음부터 얕보진 않았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직접 검을 맞대 보니 그 예상조차 너무 물렀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엔프리제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세실리오를 노려보았다.
이미 두 사람 다 어둠에는 충분히 익숙해졌다. 그렇다면.
“……!”
엔프리제의 손에서 청색 불길이 솟았다. 예상외의 움직임에 세실리오는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서며 눈을 가렸다. 그 한순간이 승패를 갈랐다.
처음엔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세상이 휘청이더니 무언가 목을 통해 뿜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건 피일까, 아니면 세실리오의 생명일까. 무언지 알 수 없는 것이 목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엔프리제는 차가운 눈으로 제국 제일의 기사단 단장을 내려 보다 검을 갈무리했다.
부상자와 생존자를 쫓아야 할까? 아니, 쫓을 순 없었다.
엔프리제는 어디까지나 어둠 속에서 기습 받아 상대를 죽였다는 명분이 필요했다. 어쩌면 그 명분조차 필요 없는 상황이 일어날지도 모르지만…,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잠시 더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생존자가 내려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안도하고는 샤페릴이 있는 방 쪽으로 다가가는데….
철컥, 하고 무언가가 막힌 듯한 소리가 났다.
“설마….”
아니, 불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열쇠가 없으면 문은 열리지 않는다. 엔프리제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문 앞의 기척을 향해 달렸다.
그가 도착하기 직전.
끼이이이,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 * *
바르카 드 블레임은 초조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그가 신경이 잔뜩 곤두선 상태라는 걸 알아챘는지, 주변에서는 사람의 기척은커녕 개미 한 마리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라면 그 또한 고까웠을 터였으나 지금은 그게 달가웠다.
이제 곧 제 손에 샤페릴 드 리베테가 들어온다.
이 모든 정적도, 이 모든 초조함도 전부 그녀를 맞이하기 위한 식전 행사처럼 느껴졌다.
“샤페릴….”
길었다.
참으로 길었다.
샤페릴을 처음 만난 날로부터 벌써 몇 년이 지난 걸까. 그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감히 제 주제도 모르고 샤페릴을 질투하며 사랑을 구걸하던 약혼녀를 ‘사고’로 잃고,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면서 황위를 이어받았다.
처음에는 그저 샤페릴을 후처로 맞이할 생각이었던 그의 생각이 변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비록 백작가이긴 하지만, 상급 귀족 가문이지 않은가. 그것도 명망이 높은 곳이니 모두가 집안이 부족하다고는 하지 못하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그 빛나는 용모.
성스럽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아름다움만으로도 그녀를 정비로 맞아들이기엔 충분했다.
설마…, 본인이 황후 자리를 거절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 후로도 몇 번 그녀에게 고가의 선물을 보냈다. 먼 동방의 희귀한 미술품이나 제국에서 보기 힘든 디저트는 물론, 옷이나 보석을 보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번번이 선물을 돌려보냈다.
그저 호의일 뿐이니 받아만 두라고 그토록 간곡히 이야기해도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었다.
-폐하의 호의는 감사하나 제게는 과분한 물건입니다.
환심을 사려던 바르카의 얕은 속내를 알아챈 그녀의 한마디에 더는 선물을 강요할 수 없었다.
편지를 써 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고가의 선물도 거절한 그녀가 겨우 편지 따위에 마음이 흔들릴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고심하던 바르카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 체질은, 워낙 희귀해서 부르는 이름조차 정해지지 않은 것이었다. 다만 마력이 과잉 생산되는 체질이라 하여 이그지스트라고 암암리에 부르곤 했다.
마차에 치일 뻔한 그녀가, 강한 스트레스로 인해 마력을 과잉 생산하게 된 것을 보고 쾌재를 불렀다. 그녀의 체질에 맞는 약은 딱 하나뿐이었고, 그건 희귀한 독초라 이 제국 안에서도 오로지 황궁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
다만 희귀한 이유는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북방에서 자라는 독초이기 때문이고, 그 왕국에서는 흔하게 자라는 풀이라 그리 비싸진 않았다.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리베테 가문에게는 일부러 비싼 값을 받았다.
생각 외였던 것은, 리베테 가문이 백작가치고는 상당한 부를 축적해 두었으며 건실한 사업을 몇 개나 하고 있었다는 것일까. 약값이 다소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나 못 낼 정도는 아니었다.
비싼 약값을 부담하기 힘들어진 그녀를, 큰 은혜를 베푼다는 형식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으나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자금줄을 틀어막았다.
사업을 방해하고 영지에는 병충해를 풀었다. 아무리 그래도 바르카가 직접 나서서 그럴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그의 수족이 잘 해내 주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리베테 가문은 굳건했다.
사용인을 줄이고 집 안에 있는 것을 내다 팔며 평소 은혜를 팔아 두었던 이들에게 도움을 받아 근근이 생활을 이어 갔다.
어떻게 해야 샤페릴을 떨어뜨릴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가문이 방해라면 가문을 없애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의식중에 배제해 두었던 선택지.
어차피 그녀가 명망 높은 가문의 자제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멸문한 가문의 명맥을 이을 수 있게 도와주는 자신에게 감사를 표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장남이야 황위를 이어야겠지만, 차남 정도라면 얼마든지 내어 줄 수 있었다. 그녀를 얻기 위해서라면야.
결심한 바르카는 빠르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한 것은, 그녀가 기댈 곳을 모두 없애는 일이었다.
황후의 자리를 앞에 두고도 의리를 지킨 샤페릴과 달리 제레닉은 한 번의 권유에 샤페릴을 버렸다. 어리석은 남자. 한낱 유치하고 덧없는 자존심을 지키려고 바둥거린 탓에 제가 가진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도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그렇게 그녀를 손에 넣을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드디어 성화에 불이 올랐다.
너무 일찍 가면 안 된다. 혹여라도 살아남은 이가 있다면 처리가 곤란해지니까. 일부러 충분히 시간을 두고 갔는데 도착한 저택엔 아무도 없었다. 그때는 설마 그 비열한 도둑 놈의 짓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이번에야말로 샤페릴은 그녀에게 어울리는 장소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 비어 있었고 오랫동안 그녀만을 기다려 온 자리에.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샤페릴이 가장 빛날 수 있는 자리에.
“샤페릴, 나의 황후. 어서 내 곁으로….”
그 도둑 놈의 손을 벗어나 내 손 안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르카는, 창에 올려 두었던 손을 꽉 주먹 쥐었다. 그의 입가에는 참으로 오랜만에 옅은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설마.
그의 기사단이 거의 와해되어 가고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