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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116화 (116/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16)

몇 번이나 반복되는 금속음.

책으로 읽을 때는 그저 활자로만 다가왔던 소리가 이토록 두렵게 느껴지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 소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저 소리가 계속되는 한, 아직은 엔프리제가 무사하다는 증거가 된다. 하지만 저 소리가 계속되는 한, 엔프리제가 곧 다치거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뜻이 된다.

문에 바짝 귀를 대 봤지만, 흐릿하게 들리는 소름 끼치는 금속음 빼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소리가 그치는 이유가 엔프리제의 승리이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났을까.

“으…!”

고통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의 것인지는 명확하게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잦아든 금속음이 말해 주고 있었다.

이 전투가 끝났다는 걸.

숨을 죽였다. 이 문밖에 서 있는 이가 엔프리제라면, 나는 이 문을 열어야만 하겠지. 하지만 만약….

아주 만약에라도 엔프리제가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엔프리제가 말한 대로 도망가는 게 좋을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나가서 엔프리제를 살려만 달라고 애원해야 하는 걸까.

망설이는 사이… 무언가가 쿵, 하고 문을 두드렸다. 아니, 두드렸다고 해야 할까 부딪쳤다고 해야 할까. 묘한 소리다.

“…….”

문에 귀를 댄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호흡조차 죽인 채, 밖의 소리에 온 신경을 기울인다. 그리고 내게 들린 소리는….

철컥, 하고 문손잡이를 돌리다 걸린 소리였다.

엔프리제가… 아니다.

나는 참았던 숨을 터뜨리며 이를 악물었다.

* * *

비어 있는 방을 보고 템버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엔프리제가 ‘오두막’에 대해 알려 준 후, 단 한 번도 템버에게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 나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템버는 가지고 온 음식을 탁자 위에 둔 채 앞치마를 벗었다.

두 사람이 여기서 나간 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식사 준비를 하기 전에 인사를 하러 왔었으니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일단 템버는 침대 아래를 살피기 위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하얀 족제비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템버를 노려보고 있었다. 최근 이 작은 족제비만을 위해 고기 튀김을 종종 만들어 줬기에 템버를 보게 되면 반갑다고 달려오던 플리였는데… 이 반응은 역시 이상했다.

“플리, 아가씨한테 갈까요?”

“삐-!”

용케 알아들었는지 플리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래 봤자 다리가 짧은 탓에 그리 많은 차이는 나지 않았지만.

플리는 쪼르르 침대 밑에서 나와 냉큼 템버의 목에 휘감겼다.

“삐-!”

마치 출발-! 이라고 외치는 것처럼 소리를 치는 플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템버는, 안타깝게도 바로 출발할 순 없었다.

일단 샤페릴의 액세서리를 살 때 미리 사 둔 금 장신구 주머니를 옷 안쪽 주머니에 숨겼다. 다른 금속이나 보석과 달리 금은 그 가치가 거의 떨어지지 않는다. 도리어 소비량은 점점 늘어나고 채굴 가능한 양은 점점 줄어들어 값이 조금씩 오르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템버는, 일부러 금으로만 된 장신구를 여럿 사 두었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다른 사용인들과 달리 어렸을 때부터 엔프리제를 모셔 온 템버는 혼자서 방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방에는 다른 사용인들, 아니, 엔프리제조차 모르는 비밀의 공간이 있었다.

저택 준공 당시에도 템버가 함께했는데, 그때 몰래 만들어 둔 공간이었다.

템버는 제 방 탁자 위로 올라가 천장을 살짝 들어 올렸다. 예전에는 그리 어렵지 않게 들어 올릴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슬아슬할 정도로 까치발을 들어야만 가능했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몸을 쭉 펴 천장을 툭 건드리자 천장의 일부가 툭 빠졌다.

“플리, 안에 들어가면 주머니가 하나 있어요. 꺼내 줄래요?”

“삐!”

플리가 토도독, 하고 그녀의 머리 위로 올라가더니 휙 뛰어올랐다. 저 짧은 다리로 용케도 저리 뛴다고 생각하며 기다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플리가 끙끙대며 주머니의 끈을 물고 나왔다.

무게 때문에 자신이 물고 뛰어내릴 순 없다고 생각했는지 주머니와 템버를 번갈아 보던 하얀 족제비가 다시 천장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더니 먼저 툭, 하고 주머니가 떨어져 내려왔다. 그리고 뒤이어 플리가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고마워요, 플리.”

“삐!”

이건, 템버가 그동안 받았던 월급을 모아 둔 것이었다. 어지간한 건 장을 보러 나갈 때 같이 사 왔기에 월급은 거의 쓸 일이 없어서 일개 시녀가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거금으로 불어났다.

백금화 몇 닢과 금화 수십 닢. 이거라면 당분간은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이제 정말로 가요, 아가씨한테.”

“삐-!”

템버는, 일부러 제 짐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혹여 다시 돌아올 수도 있기도 했고 만약 다시 돌아오지 않더라도 발견이 최대한 늦어지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사라지면 분명 사용인들이 황제에게 보고할 테니까.

“…제발 무사하시길.”

짧은 기도를 마친 템버가 숨을 죽였다. 조용히 제 방을 빠져 나가 계단을 내려가는 그 뒷모습을….

고요한 녹색 눈동자가 지켜보고 있음을 채 눈치채지 못하고.

* * *

레이나 드 템버는 템버 백작가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이미 딸만 둘이나 있었던 가문이었기에 그녀가 태어났을 때 템버 가문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심지어 그녀를 출산하면서 백작 부인이 사망했기 때문에 더는 후계를 바랄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 되면 후처를 들이기 마련이었다. 템버 백작에게도 후처로 들어가겠다는 가문들이 줄을 이었지만, 그는 그 어떤 곳과도 연을 맺지 않았다. 비록 정략혼이었으나 그는 진심으로 제 부인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후계는 큰딸의 남편, 즉 맏사위가 이으면 된다. 그렇게 결정한 템버 백작은 성실하게 영지를 경영하면서 세 딸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혹자는 그가 막내딸을 미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애정하던 부인이 죽게 된 원인이지 않은가. 하지만 세간의 더러운 입소문과 달리 템버 백작은 특히 레이나에게 애정을 쏟았다.

-아버지, 아버지는 제가 밉지 않으세요?

언젠가, 이제 세상 물정을 좀 알게 된 레이나가 그리 물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온화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밉지 않단다. 오히려 네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미안해요?

-내가 네 어머니를 지키지 못한 탓에… 네가 어머니의 애정을 모르고 자라지 않았니.

템버 백작은, 제 잘못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부인의 몸이 약하지 않았다고는 하더라도 출산은 언제나 위험한 일인데 더 신경 써 주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심지어 제 막내딸에게 어머니의 젖 한 번 물려 보지 못하고 그리 보낸 게 다 제 탓 같기만 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큰 레이나는 지나치게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면이 있었다. 세상의 더러운 면을 모르고 큰 그녀는, 아버지가 고르고 고른 혼처에 시집 가 평온한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남편은 능력이 뛰어나지도 야망이 크지도 않은 사내였지만, 언제나 레이나에게 상냥했다. 그리고 더는 바랄 수 없을 정도의 애정을 주었다.

다만, 불행이라는 것은 언제나 행복한 이를 가만히 두지 않는 법이었다.

출산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이 열을 냈다. 별것 아닌 열이라 생각했던 것이, 의사가 다녀간 후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았다. 데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치솟은 열에 레이나와 남편은 밤새 초조한 마음으로 아이의 곁을 지켰지만….

끝내 아이는 레이나의 곁을 떠났다.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미안합니다. 제가 아이를 지켰어야 했는데….

남편은 그리 자신을 자책했다.

레이나 역시 자신을 자책했다.

그제야 어머니를 잃고도 자신을 원망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그저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았다. 언제나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던 남편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마저도.

먹을 이를 잃은 모유를 홀로 몰래 짜내며 레이나는 조용히 눈물 흘리곤 했다.

그러던 중 또 불행이 찾아왔다.

-잠시 베르노트 왕국에 갔다 와야 할 것 같습니다.

-거긴…!

제국과 몇 차례 충돌을 빚으며 최근 분위기가 험악해진 인근 국가. 베르노트 왕국에 정착해서 살고 있던 제국민 몇이 살해당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그런 곳에 남편을 보내다니. 만류하려던 레이나에게 남편이 말했다.

-전쟁을 막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언젠가… 당신과 저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서.

남편은, 그토록 괴로워하면서도 레이나와의 미래를 여전히 꿈꾸고 있었다. 그 한마디에 차마 가지 말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울 수 없어 웃으며 배웅한 그는, 손가락 하나가 되어 돌아왔다. 그 손가락에는, 그가 늘 빼지 않고 끼고 있던 결혼반지가 매달려 있었다.

-레이디 템버, 부군께서는… 마지막까지 전쟁을 막으려 애쓰셨습니다.

그걸론 어떤 위로도 되지 않았다.

남편을 막았어야만 했다. 그 생각이 레이나를 좀먹었다. 현실감 없는 매일이 지나갔다. 마치 꿈속에서 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어서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그런 레이나를 차마 보기 힘들었던 것인지, 아버지가 얼마 전 갓 태어난 황자의 보모로 레이나를 추천했다.

그렇게 레이나는, 엔프리제 드 블레임의 보모가 되었다.

-…….

검은 머리와 금색 눈동자의 아이는 몹시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 얼굴에 담긴 표정은 그리 사랑스럽지만은 않았다. 고요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를, 레이나는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던 매일.

먼저 손을 뻗은 건.

-아우….

아이였다.

제게 뻗은 손을 보고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 무게에… 사라졌던 현실감이 돌아왔다.

주르륵, 멈췄던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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