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15)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1초가 마치 1시간처럼 길게 느껴진다. 과장이 아니라 진짜로. 솔직히 말하면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나가고 싶다. 그리고 엔프리제의 무사를 확인하고 싶다.
지금 이 문밖에서 엔프리제는 무얼 하고 있을까. 괜찮은 걸까? 다치진 않았을까? 혹시라도….
문을 닫기 전까지만 해도 사실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다. 엔프리제가 얼마나 강한지 직접 본 게 있기도 했지만…. 로판에서 ‘주인공’이란 죽지 않는 법이니까. 그런 생각이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자니 점점 불안감이 엄습했다.
밖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비명 소리조차도.
별일이 없는 걸까? 아니면 밖에서는 난리가 났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까. 나는 언제까지 여기에 있으면 되는 걸까.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나가고 싶다. 차라리 내가 나가서 황제랑 담판이라도 짓는 게 낫지 않을까.
그리고 이내 떠올린다. 내게는 아무런 힘도 없다는 걸.
내가 마법이라도 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체력만 단련할 게 아니라 검이라도 단련했더라면 지금보다 상황이 나아졌을까? 내가 똑똑해서 이런 상황을 회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아니면 특이한 능력이 있어서 엔프리제를 도울 수 있었다면 나는 지금 이 방 안이 아니라 그의 곁에 있을 수 있을까.
무력감이 엄습한다.
수희로 살아오면서 나는, 한 번도 내가 무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집안일도 공부도 회사 일도 노력하면 어떻게든 되었으니까. 노력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나쁘면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더 공부하면 된다. 집안일은 반복하면 할수록 익숙해져 능숙해졌다. 회사 일도 처음엔 적응하는 게 힘들었지만, 학교 공부하듯 집에 와서도 업무 프로세스를 파악하고 공부하니 어떻게든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토록 무력하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이 자신의 무력함을 피로할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왜 저렇게까지 죄책감을 가지고 힘들어하지?
막상 내가 그 상황이 되니….
가슴이 울렁거린다.
“후….”
어쩔 수 없는 것에 신경을 써도 의미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희미하게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 * *
카발레이 기사단은 조용히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중장비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상대는 단 한 명. 심지어 실전 경험도 거의 없는 애송이니 그리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이동하는 그들의 곁에서….
섬뜩한 은색의 무언가가 번뜩였다.
악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한 명이 그대로 절명했다. 정확하게 뒷목을 베어 넘긴 그 섬뜩한 것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다른 이에게로 향했다. 그는 제게 다가오는 죽음을 경악에 차 바라보다 눈이 꿰인 채 그대로 쓰러졌다.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은 다른 이들이 검을 겨누었다. 두 명을 순식간에 집어삼킨 어둠 역시 이번에는 섣불리 달려들지 않고 신중하게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전하.”
세실리오가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상대의 주의를 빼앗을 의도도 있었고, 타이밍을 엿볼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대답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날아온 것은 대답 대신 차가운 은색의 선뿐이었다.
이번에도 노린 건 급소였다. 하지만 조금 전과 달리, 대비하고 있었던 덕에 아슬아슬하게 피해 낼 수는 있었다. 다만 가슴께가 찢어져 피가 배어 나왔다.
“무슨 짓이냐고 물어야 할 건 내 쪽인 것 같습니다만. 감히 대공의 영지에 함부로 침입하여 무얼 하고 계시는 겁니까. 도둑 고양이처럼.”
검은… 무뎌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며 빛나는 은색의 몸체만 보아도 섬뜩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세실리오는 그제야 자신이 대공을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걸 알았다.
어렸을 때는 꽤 검을 잘 썼다고 듣기는 했다. 황제 폐하와 검을 나누어 이긴 적도 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와 대련하지도 않고, 검을 잡는 모습도 보이지 않아 그만두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모두가 그리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급소만 집요하게 노리는 검 놀림도, 사람을 죽이고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 역시 대공의 실력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자… 여러 번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있다.
“저희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내 아우가 그대에게 이러라 명했습니까? 날 미행하고 집 안을 뒤지고 날 공격하라고?”
“…폐하의 명을 받들어 전하의 잘못을 바로 잡으러 온 것입니다.”
“내 잘못?”
“강제로 리베테 가의 영애를 구금하고, 관계를 강요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강요?”
대공의 눈이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언제나 날카롭게 가시가 돋쳐 있는 사람이긴 했다. 마치 가까이 오면 찔러 죽여 버릴 거라고 말하는 듯이. 하지만 지금의 그는….
마치 맹수 같았다.
“나와 샤페릴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그걸 억지로 빼앗으려 드는 건 내 아우가 아닙니까.”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던 대공이 세실리오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두 명이 불의의 기습으로 전선을 이탈했다고 하더라도 남은 것은 다섯. 제국에서 손꼽히는 실력자인 세실리오 역시 건재했다.
그런데 왜일까.
세실리오는 불안감에 검 손잡이를 강하게 틀어쥐었다.
그리고.
“윽!”
집요하게 급소만 노리던 대공의 검 놀림이 변했다.
찌르기를 할 것처럼 자세를 잡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순간 흠칫해서 모두 뒤로 물러섰으나… 대공이 공격 자세를 잡기 무섭게 상체 쪽을 방어하던 몬페리오가 고통의 소리를 삼키며 무너졌다.
“몬페리오?!”
“크윽…!”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하나가 더 무너졌다. 세실리오의 바로 곁에 있던 루카스가 무너져 내렸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완전한 어둠 속이라 눈이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무언가를 파악하고 움직이기 그리 쉽지 않았다. 기사단인 그들이 이런 환경에서 전투를 벌이게 될 거라고 예상한 적이 없었기에, 당연히 그런 훈련도 받지 않았다. 다만 오감이 예민하기에 별문제가 되지 않을 줄 알았는데….
후퇴해야 하나?
밝은 곳으로 가야만 상대의 우위를 빼앗을 수 있겠지만, 순순히 따라 나와 줄 리가 없었다. 대공은 이 어둠을 여러 의미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하나는 상대의 정체를 모르고 침입자가 있길래 싸웠을 뿐이다, 라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황제의 기사단이라는 걸 알고도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면 대공이라도 그냥 넘어가긴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이 어둠 속에서는 몰랐다고 변명하더라도 누군가 흠을 잡을 수 없으리라.
설령 그 피아가 식별되지도 않는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을 죽이고 두 사람을 상처 입힐 정도로 자유롭게 움직였다고 하더라도.
또 하나는… 아마도 대공은 이 어둠 속에서 자신들보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듯 보였다. 이곳에 막 들어온 기사단보다 어둠에 적응할 시간이 길기도 했을 테지만, 그보다는….
어쩌면 이런 환경에서의 전투에 익숙한 게 아닐까.
또 하나는… 여기 어딘가에 있을 샤페릴을 찾아내지 못하게 할 생각이기도 할 터였다. 그녀가 정말로 대공을 사랑하고 있다면 스스로 나와 줄 리 없다. 이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숨어 있을 테지.
기사단이 그녀를 발견해 낼 방법은 대공을 처리한 후 이곳을 샅샅이 뒤지는 것 외엔 없으리라.
그러니 세실리오가 후퇴해 그를 유인한다 하더라도 분명 통하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생각하던 세실리오가 입을 열었다.
“이든, 비스테오! 두 사람을 데리고 여기서 돌아가라!”
부상자가 있으면 발밑이 신경 쓰인다. 게다가 모든 기척을 다 공격하면 되는 대공과 달리 자신은 아군을 식별해 내야만 하는 리스크를 지고 있었다.
그러니 차라리.
이든과 비스테오는 세실리오의 심중을 이해한 듯 부상자 둘을 데리고 빠르게 후퇴했다. 그사이에 대공이 공격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는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네 사람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세실리오가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영애를 돌려보내 주신다면 저희는 순순히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돌려보내?”
어둠 속에서, 금색의 눈동자가 휘었다. 그 모습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했다.
“샤페릴이 돌아올 장소는 내 곁뿐입니다.”
자신감에 찬 목소리.
세실리오는 낮은 한숨을 내쉬고 마력을 끌어 올렸다.
대공에게도 마력 통로가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마력의 양이 너무 미비해서 운용해 보았자 의미 없는 수준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이, 차라리 마력이라도 운용할 수 있었더라면 지금보다는 나은 취급을 받았을 거라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 상대에게 마력을 사용하는 건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소수 정예인 카발레이 기사단의 단장인 그가 부하를 둘이나 잃고 명령조차 이루지 못하고 물러날 순 없는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마력을 끌어 올리면서 온몸의 감각이 극도로 예리해진다. 어둠 속에서 빛 아래에 있는 것처럼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상대의 호흡이나 기척을 탐지하는 능력이 현저히 올라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차피 이 자리에 있는 건 자신과 대공 두 사람뿐이었으니까.
세실리오는 정확하게 대공이 있는 쪽을 향해 서서 검을 겨누었다. 자세를 낮추고 있던 그가 천천히 상체를 들어 올리는 게 느껴졌다.
“…죄송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공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세실리오가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기사라는 걸 모르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던 세실리오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을 때.
“오히려 내가 그대에게 미안하다고 해야 할 테니.”
무언가가 세실리오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