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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114화 (114/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14)

“…….”

멜리나는 가만히 제 손안에 편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어떤 문양도 찍혀 있지 않았지만, 편지에 붙어 있는 한 가닥의 백금색 머리카락이 보낸 이가 누군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다 읽은 편지를 두 손으로 잡은 멜리나가 종이 속의 글씨를 알아볼 수 없도록 잘게 찢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촛대가 망가지는 바람에 놓아둔 납작하고 작은 접시 위에 편지 조각을 놓고 초로 불까지 붙였다.

“…후.”

낮은 한숨.

멜리나의 입에서는 수도 없이 많은 한숨이 새어 나왔었다. 대부분은 짜증이 섞여 있었고, 또 상당수는 고뇌가 담겨 있었다. 바르카가 저지른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하는 건 정말로…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불쾌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한숨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이 편지가 시키는 대로 한다면, 그녀는 이 장소를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 역시.

하지만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어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엔프리제 혼자서는 샤페릴을 지킬 수가 없다. 상대가 너무 거대한 힘을 가졌기에.

왜 바르카가 황제일까. 그가 황제가 아니었더라면 두 사람의 결말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 역시.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가슴 속의 무언가가 간지러워진다. 너무 간지러워서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건 불쾌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계속 지켜보고 있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그런 걸 기분 좋은 떨림이라고 하는 걸까.

-이 저택의 사용인들 중에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인걸요.

샤페릴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기억을 잃었으니 설령 예전에 멜리나를 본 적이 있었다고 해도 기억하지 못할 터.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멜리나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그래서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먼발치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그녀는 언제나 사교성이 좋고 웃음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기억을 잃었어도 그 본성은 바뀌지 않은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

서재에서 샤페릴과 가벼운 담소를 나눈 후 그녀의 방 근처까지 데려다준 적이 있다. 결계가 쳐져 있어서 멜리나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고, 샤페릴도 그 안에까지는 멜리나를 들이지 않았다.

그런 모습에 더 확신했었다.

샤페릴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하지만.

원래는 와선 안 되는 층이었다. 샤페릴의 방이 있는 층은, 엔프리제가 허가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와선 안 됐다. 지금 허가받은 사람은 자신과 템버뿐이었다.

그런데 낯익은 시녀 하나가 복도 끝에서 얼쩡거리는 게 보였다.

그녀는 공공연히 샤페릴은 가련한 피해자일 뿐이며 블레임 대공은 수치를 모르는 가해자라 떠들고 다니곤 했다. 하지만 명확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제멋대로 떠들어 대는 말이었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놔두었었는데, 설마 이런 곳까지 몰래 올 줄이야.

그녀는 복도 모퉁이에 서서 샤페릴을 훔쳐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샤페릴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드물게도 무표정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치챈 건 확실한 데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저 사람은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아마도… 샤페릴을 보러 온 게 아닐까요.

-저를? 왜요?

-…….

다른 사용인들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얼핏 보기에는 주인들이 입이 가벼운 시녀를 총애하고 선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차할 때 목이 날아가는 것 역시 입이 가벼운 이들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은 모두 입이 무거운 시녀들에게 맡겨진다.

멜리나 역시 쓸데없는 말을 떠들다가 목이 날아가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그래서 가급적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샤페릴의 찡그린 얼굴을 조금은 펴지게 해 주고 싶었다.

-그녀는… 공공연히 샤페릴의 추종자를 자처하는 사람입니다. 샤페릴을 몹시 좋아하는 것 같아요.

-…….

하지만 샤페릴의 표정은 오히려 더 싸늘해졌다.

싸늘한 샤페릴이라니. 그녀는 언제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생김새는 아름답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단아하고 기품 있어 성스럽기까지 했지만, 표정이 늘 생기가 넘쳤다. 심지어 토라진 표정을 짓는 순간에도 귀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마치… 무도회장에 있을 때의 엔프리제 같았다. 금방이라도 주위에 있는 것을 베어 버릴 듯한 날 선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샤페릴은 잠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추종자의 시선을 깨끗하게 무시한 채 제 방으로 갔다. 그녀는, 결계의 열쇠를 가지고 있기에 손쉽게 문을 열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멜리나. 다음에 또 서재에서 같이 이야기해요.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시간 동안 근처에 오지 못하게 이야기해 둘 수 있어요?

생글 웃는 그 얼굴은 평소처럼 생기가 돌았다. 하지만 어딘지 싸늘한 기운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불쾌하셨습니까?

평소라면 하지 않을 질문이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샤페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문을 닫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왜 자신만 달랐던 걸까. 다른 사용인들을 관찰하는 사이, 그리고 샤페릴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조금씩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멜리나는, 굳이 따지자면 블레임 대공에 대해서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으나 별 관심이 없었기에 금방 잊었다. 그런 걸 기억하기엔 멜리나가 생존을 위해 기억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황제는 사소한 것 하나만 거슬려도 쉬이 화를 내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 저택에 자원해서 오는 이들은 대부분 블레임 대공에게서 꼬투리를 잡아내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었다. 무어 하나라도 집어내 황제의 앞에서 떠들어 대고 잠시간의 총애라도 얻어 볼까 하는 치들. 그들은 블레임 대공에 대한 악담을 공공연히 떠들어 댔다.

사랑하는 연인을 모욕하고 곱지 않은 눈길로 보는 이들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저 그 차이였다.

멜리나가 지켜본 바로는, 그녀가 환하게 웃어 주는 이는 몇 없었다. 약사이자 그림 교사를 하고 있는 자하 경과 전담 시녀인 레이디 템버, 그리고 엔프리제가 전부였다. 심지어 왕제인 엘마레 전하에게도 진심으로 웃어 주지 않았다.

그 좁은 세계에 자신도 들어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몸속 깊은 곳 어딘가가… 찰랑이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 역시 황제의 사람이었다. 왜 샤페릴은 자신 따위를 믿어 버린 것일까. 겨우 블레임 대공에게 적대감을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믿기엔….

이 저택에서 가장 더럽고 추악한 이는 바로 멜리나, 자신인데.

그녀는 귀족으로서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선조들은 제국을 위해 헌신하며 일했고, 영지를 지키기 위해서 애썼다. 지금의 멜리나 역시 그랬다.

자신의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아직도 영지를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는 영지민들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미안해요, 샤페릴.”

샤페릴이 그녀에게 이름을 부르는 것을 허락한 이후, 늘 아무렇지도 않게 불렀던 그 이름이….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졌다.

* * *

엘마레 드 블레임은 생각했다.

어떻게 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고 제게 더러운 진흙이 튀지 않을까.

제국 역사상 황제가 폭군이었던 적은 적지 않았다. 심지어 가장 압정이 심했던 제3대 황제인 루키안 드 블레임은 지금의 바르카로는 감히 비교 대상도 되지 못할 정도의 폭군이었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누군가의 피로 황성 정원을 물들였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심심하다거나, 새로운 고문 방법을 실험하고 싶다거나… 혹은 재미있을 것 같은 실험을 해 보고 싶다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키안은 죽을 때까지 황제의 위를 내려놓지 않았다. 누구도 그에게서 빼앗을 수도 없었다.

지금의 바르카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반란군에게 손을 빌려주는 것도 그런 면에서 곤란했다. 셋째인 그가 명확한 명분도 없이 형을 쳐 내고 황제의 위에 오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7년.

고작 7년 차이였다. 그 차이로 황제와 왕제로 나뉜다는 건 너무 크지 않은가. 심지어 둘 다 적장자가 아니라는 면에서는 같은 조건인데.

장자를 따질 거라면 엔프리제가 받는 게 맞았다. 하지만 엔프리제가 받지 않은 이상 나이순으로 따질 게 아니라 능력 순으로 따졌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 무능한 남자에게 왜 이토록 큰 것을 준 것일까, 아버지는.

그는 이상할 정도로 바르카에게 집착했었다. 애매한 시기에 태어난 데다 자신의 색과는 아예 동떨어져 있는 첫째, 엔프리제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아마 촉진제가 되었겠지.

그 뒤에 태어난 엘마레는 아버지의 눈엔 들어오지도 않았다. 자신 역시 아버지의 색을 꼭 빼닮았지만, 체격이 전혀 달랐다. 생김새와 체격까지 자신을 닮은 바르카에게 더 마음을 준 건 그런 이유에서였겠지.

그게 엘마레는 불만이었다.

하지만, 엘마레가 태어났을 땐 모두가 엔프리제를 적장자 취급하지 않고 바르카를 적장자로 대하는 분위기였기에 그것 역시 구실이 될 순 없었다.

무언가가 더 필요했다.

그러던 중 보게 되었다. 샤페릴에게 다가가는 바르카를.

그땐 아직 황태자였다. 심지어 곁에는 황태자비가 될 약혼녀가 함께였다. 그런데도 그는…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진 얼굴을 하고 샤페릴에게 다가가 춤을 신청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아챘을 것이다. 바르카가 그녀에게 한눈에 반했다는 것쯤은.

바르카의 약혼녀가 ‘사고’로 사망한 후에도, 바르카는 그 자리를 대신할 이를 들이지 않았다. 모두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엘마레는 그 누구도 모르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게 엘마레는….

제 오랜 숙원을 이룰 방법을 찾아내었다.

“부디 무사히 빠져나오시길, 형님. 그리고 레이디 리베테. 저를 위해서.”

자신을 묘하게 경계하던 붉은 눈동자를 떠올리며 엘마레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 짓던 착하고 바른 이미지의 미소가 아닌….

마치 악마의 것처럼 요염하고 위험해 보이는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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