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11)
평소라면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내 방으로 향했을 텐데, 오늘은 좀 달랐다. 템버의 뒤를 따라 저택 안의 한 방으로 향했다.
템버가 문을 열어 주자, 침대 두 개와 이불 속에 파묻혀서 끙끙 앓고 있는 멜리나가 보였다.
“고마워요, 템버.”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아가씨.”
고개를 끄덕이자 템버가 밖으로 나갔다. 발개진 얼굴로 끙끙거리고 있던 멜리나가 말소리에 살며시 눈을 떴다.
“샤페릴…?”
“괜찮아요?”
“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억지로 웃어 보인다. 그게 안쓰러워서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탁자에서 의자를 빼 와 침대 곁에 앉자 멜리나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어어, 괜찮아요. 누워 있어요.”
“하지만….”
“아픈 사람은 얌전히 누워 있는 게 일이에요.”
원래 오늘 나와 엔프리제 곁에 있었어야 할 멜리나는, 무도회 직전에 쓰러지는 바람에 저택으로 옮겨졌다. 다른 시녀를 데려올 수도 있긴 했으나 내키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그냥 둘이 참석한 거였는데, 아직도 앓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약은 먹었어요?”
“예…. 열도 많이 내렸습니다.”
흠.
갑자기 왜 열이 났을까.
고개를 갸웃하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내렸다고 하기엔 아직도 뜨끈뜨끈한데.
“식사는 했어요?”
“…네.”
이건 거짓말이네.
늦게 대답한 게 문제라기보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평소의 멜리나라면 이런 동요는 보이지 않았을 텐데.
알아챘지만, 모르는 척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려 두었다.
“시원하죠?”
“…네.”
이번엔 진짜다.
부드럽게 웃으며 눈을 꿈뻑인다. 졸린 건가? 여기의 해열제도 먹으면 졸리는 성분이 들어가 있는 걸까.
“요즘 날씨가 추워져서 그런가.”
“아마도….”
멜리나치고는 애매한 대답이다. 언제나 똑 부러지게 대답하곤 하는데.
말끝을 흐리는 그녀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아쉬워요.”
“네?”
“멜리나가 드레스 입은 모습, 되게 예뻤는데.”
갈발녹안의 미인이라서 그런가.
단정하고 귀여운 스타일의 드레스가 잘 어울렸다. 아마 남자들 눈이 하트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하긴, 우리 둘의 수행으로 따라오면 수군거림에 같이 휘말렸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같이 오지 못해서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엄청 재미없었어요.”
“그랬나요…?”
“네. 음식도 최악이었어요. 간도 안 맞고 기름지고 느끼하기만 한데다 이런저런 향신료를 때려 넣어서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더라구요.”
인상을 찌푸린 채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자 멜리나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이마에 얹은 내 손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대부분의 귀족가 식사가 그런 느낌입니다. 채소는 가축들이나 먹는 거라며 일평생 먹지 않는 이들도 있지요. 그런 주제에 먼 나라에서 공수한 비싼 향신료를 쓰면 음식의 질이 올라간다고 생각하니….”
평생 채소를 먹지 않는다니, 나도 육식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바보 같네요.”
“맞습니다.”
멜리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살며시 내 손을 치웠다. 이제 쉴 수 있도록 가라는 뜻일까.
아플 때 너무 귀찮게 하는 것도 뭣하긴 하다. 슬슬 갈까.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필요한 거 있어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한 얼굴이었는데, 멜리나는 이내 엷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으음, 뭔가 그런 느낌이려나. 직장 상사가 ‘뭐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보게!’라고 할 때 ‘너 같으면 말하겠냐?’라고 생각하게 되는… 그런 느낌?
“푹 쉬어요. 빨리 나을 수 있도록.”
“감사합니다.”
일어나서 그대로 몸을 돌렸다가, 다시 침대로 다가갔다. 의자를 제자리에 놓는 걸 깜빡했네.
의자까지 정리하고 정말로 방을 나서려는데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요.”
“응?”
고개를 돌리자 멜리나는 여전히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와 주셔서… 감사해요.”
“응?”
왜 고맙다고 하는 거지? 귀찮게만 하다가 가는데.
“고마울 게 뭐가 있어요. 쉬는 거 방해만 하다 가는데.”
“신경 써 주셔서요.”
흠.
멜리나를 보고 있으면… 정말로 엔프리제가 생각난다. 생긴 건 전혀 닮지 않았는데 왜 이토록 비슷한 느낌이 드는 걸까.
“멜리나한테 신경 쓰는 건 당연한 거예요.”
“네?”
“이 저택의 사용인들 중에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인걸요.”
그렇게 말하며 씩 웃자, 멜리나는….
“…저는….”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듯했으나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 * *
황제 직속 기사단, 카발레이 기사단의 단장으로 이름 높은 딜론 드 세실리오는 침울한 단원들을 보면서도 아무런 질책을 할 수가 없었다.
카발레이 기사단이 어떤 곳인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기사단으로, 임페리오 제국이 칭제하기 전부터 존재해 왔다. 그런 기사단에 속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자 명예인지 폐하께서는 알고 계실까.
제국의 심장. 황제를 지키는 일에 얼마나 큰 긍지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계실까.
아니, 아실 리가 없다. 아신다면 이런 일을 시키실 리가 없을 테니까. 세실리오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복잡한 심정으로 칼날을 손질했다.
-더는 기다릴 수가 없다.
-분부만 내려 주십시오, 폐하.
그렇게 이야기했던 건, 최소한 지금의 폐하께 이성이라는 게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사교계는 엔프리제 드 블레임 대공과 샤페릴 드 리베테 백작 영애의 이야기로 들썩이고 있었다. 나오는 말의 대부분은 블레임 대공이 무언가 수를 써서 레이디 리베테를 강제로 동행시켰을 거라는 것이었지만, 직접 눈앞에서 그들을 본 세실리오의 생각은 달랐다.
부인과는 정략혼을 했고 그 흔한 애인이나 정부조차 두지 않은, 아니, 둘 여유가 없었던 세실리오의 눈에도 둘 사이는 범상치 않아 보였다. 아마 다른 이들도 말로 표현하지 않을 뿐 다들 같은 감상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블레임 대공에 대해 나쁜 소문을 만들어 내는 이들의 속내야 뻔했다. 폐하께 잘 보이려 하는 거겠지만, 이미 폐하의 심중은….
사실 폐하께서 레이디 리베테를 만나기 위해 블레임 대공저에 갔을 때, 세실리오 역시 블레임 대공이 무언가 수를 쓴 게 아닌가 싶었다. 레이디 리베테는 억지로 붙들려서 감금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그녀를 둔 채 홀로 저택을 나온 폐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차하면 이 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고 칭송받는 검 솜씨를 여과 없이 뽐낼 생각도 있었다. 아무리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해도 실전 경험이 거의 없을 대공에게 질 리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폐하는 홀로 나왔다. 아마 그때, 레이디 리베테는 폐하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한 게 아닐까. 스스로 원해서 대공의 곁에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더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폐하는….
세실리오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미쳐 버리신 건지도 모른다.
“…하.”
“단장님.”
부단장인 루카스가 다가왔다.
세실리오는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검만 바라보고 있었다. 루카스가 답답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정말로… 따르실 겁니까?”
“우리는 폐하의 직속 기사단이다. 폐하의 명령을 따르는 게… 당연한 것이지 않나.”
“하지만 이런 명령은….”
최근, 양아치 같은 기사들이 많이 늘었다고는 들었다. 하지만 전통 있는 이 카발레이 기사단은 좀 달랐다. 그들은 초대 황제인 밀리암 드 블레임의 뜻을 이어받고 있었다.
귀족이란 제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나라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며, 귀족들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일하는 존재다. 악에 손을 물들이지 않고 선한 길을 가야만 하는 존재이다.
귀족이자 무예를 익힌 기사는 당연히 선한 모범이 되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런… 인간의 탈을 쓰고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단장님도… 솔직히 하기 싫으시잖습니까.”
“…….”
세실리오는 낮은 한숨을 흘리며 손질하던 검을 갈무리했다. 이 검을 갈고닦아 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번 명령을 수행하는 동안 그의 검은 지키는 검이 아니라 해치는 검이 될 뿐일 텐데.
“루카스, 더는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하지만….”
“모르겠나?”
세실리오는 으득, 하고 이를 갈곤 부단장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간 세실리오가 낮게 속삭였다.
“폐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시다. 거부했을 때 무슨 일이 생길지는 예상되지 않나. 너와 내 목이 날아가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거다.”
“설마… 설마 아무리 그래도….”
설마.
세실리오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할 수 있겠지?
믿을 수 없는 명령을 내리면서 폐하는… 웃고 계셨다.
용맹한 호랑이의 기상을 닮았다고 생각한 얼굴에 추악한 미소를 띠며 그분은 웃으셨다. 그 웃음을 직접 본 세실리오만이 알 수 있었다.
폐하는.
“괜히 단원들의 마음을 뒤흔들지 마.”
“…설령 목이 떨어진다 한들 명예와 긍지가 떨어지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릅니다. 최소한… 제게 마음을 토로하러 온 이들은 그리 생각할 것입니다.”
엄격한 세실리오와 달리 다혈질이긴 하나 정이 두터운 루카스는 단원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런 그이기에 단원들도 분명 진심을 말할 수 있었겠지.
그 마음이야 어찌 모를까.
사실 세실리오도… 마음 같아선 이런 명령 따위 거부해 버리고 자진이든 뭐든 하고 싶었다. 그게 제 목 하나로 끝날 일이라면.
하지만 앞날 창창한 젊은 단원들의 목숨까지 걸려 있어서야… 쉬이 그럴 수도 없었다.
“내가 왜 너희 마음을 모르겠나. 하지만… 살아야지. 우리가 죽어 봤자 어차피.”
폐하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분은, 아마도 카발레이 기사단을 갈아엎고 다른 이들에게 같은 명령을 내릴 터였다. 어차피 그리될 거라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돌아가라.”
세실리오는 억지로 쥐어짜 낸 목소리로 그리 말한 후, 제 부단장을 놓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