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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110화 (110/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10)

그들이 도착하기 전부터 회장은 소란스러웠다.

‘그’ 샤페릴 드 리베테가 ‘그’ 엔프리제 드 블레임과 함께 나타난다는 소식은 이미 수일 전부터 사교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사라진 그녀가 대공의 곁에 있다는 은밀한 소문은 알음알음 퍼져 나가고 있었으나, 설마 두 사람이 그런 관계가 되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대공이 그녀를 협박해서 동행시킨 것은 아닐까. 오갈 곳도, 핏줄도 사라진 그녀가 자포자기 상태로 그가 하자는 대로 따르는 건 아닐까.

그들이 도서관에서 애정 행각을 벌이는 걸 직접 목격한 이들은, 마음속으로 그들이 정말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차마 겉으론 드러내지 못했다.

이 회장 안에서 가장 위치가 높은 인물이자, 아마도 가장 기분이 더러울 인물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

황제, 바르카 드 블레임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푸른색 눈동자로 회장 입구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 두 사람의 모습을 직접 본 적도 있었건만 여전히 그는 그녀가 피 도둑놈을 사랑하고 있다고는 믿고 있지 않았다. 많이 봐줘야 연민이나 동정이 아닐까.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던 마음에 조금씩 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도회에 함께 동행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거겠지. 기억을 잃었다고 했으니 그런 예법이나 관습도 다 잊어버렸을 터. 그저 그런 것뿐일 터였다.

그런 마음 뒤로 누군가가 속삭인다.

혹시 그녀가 알면서도 같이 오는 걸 선택했다면? 지금까지 동행하지 않았으면서 갑자기 동행한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황제에 대한 예조차 잊었던 그녀가 굳이 여기를 오겠다고 한 이유는….

두 사람이 연인 관계라는 걸 공식적으로 확정 짓기 위해서가 아닐까.

“엔프리제 드 블레임 대공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흠칫, 하고 바르카의 몸이 굳었다.

들려온 이름은 하나뿐. 그렇다면 혹시…. 그 얕은 희망을 깨부수려는 듯 뒤이어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페릴 드 리베테 백작 영애께서 입장하십니다!”

같이 호명하지 않은 건, 설마 두 사람이 동행한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단순한 실수일까.

어느 쪽인진 모르지만, 바르카는 그를 가만둘 생각이 없었다. 얕은 희망은 깨어지고 더 깊은 절망만이 그를 휘감았다.

“…정말로….”

“세상에….”

“제정신….”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하지만 바르카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모습만이 그의 뇌리에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새겨지고 있었다.

늘 단정하고 수수한 옷차림을 고수하던 남자가 오늘은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새하얀 정장을 입은 모습 따위는 처음 보았다.

샤페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다소 자유로운 모습이었으나 오늘은 확연히 달랐다. 옅은 화장과 화려하게 단장한 머리카락. 그리고 엔프리제와 맞춰 입은 것 같은 드레스까지.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샤페릴은 환하게 웃으며 엔프리제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엔프리제 역시 평소 짓던 찌푸리거나 냉담한 표정이 아니라 옅게 미소 짓는 얼굴이었다. 붉은 눈동자에서도, 금빛 눈동자에서도 서로에 대한 애정이 뚝뚝 흘러넘칠 정도였다.

마치 이 무도회장이 그들이 결혼식장이 된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로.

“…빌어먹을.”

그들은 주변의 수군거림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곧바로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로 향했다. 엔프리제가 시종에게서 받은 음료를 가져오는 사이 샤페릴은 안절부절못하는 시녀에게서 빼앗은 집게로 테이블의 음식을 접시에 담고 있었다. 뒤늦게 엔프리제가 놀란 얼굴로 화들짝 뛰어왔지만, 샤페릴은 태연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평범한 연인 같아 바르카의 분노를 부추겼다.

엔프리제의 자리에 있어야 했던 건 자신이었다. 그녀를 구하는 것도, 그녀를 보살피는 것도 모두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다 차려진 식탁에 숟가락만 들고 나타나 메인을 모조리 빼앗아 먹어 치운 놈이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도….

저 자리에 서서 그녀와 마주 보며 웃고 있는 건 자신이었을 터였다.

아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약혼자에 대한 의리를 지키던 그녀였으나 지금은 기억이 사라져 그 감정도 사라지지 않았던가. 다시 데려올 수만 있다면….

그 후엔.

바르카는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며 제 의자의 팔걸이만 뿌득,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쥐었다.

* * *

“으음, 재미없었네요.”

무도회는 생각 이상으로 재미없었다.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춤을 추기엔 내가 춤의 ㅊ자도 모른다. 샤페릴은 모르겠지만, 수희였을 땐 심한 몸치라서 장기 자랑 같은 데선 웃음거리가 되기 일쑤였다. 아무리 몸이, 하드웨어가 모든 걸 기억한다고 하더라도 소프트웨어가 나인 이상 이 많은 귀족들 앞에서 비웃음당할 일을 시도하고 싶진 않았다.

뭘 먹는 것도 마찬가지.

전부 다 느끼하고 기름지고 맛이 너무 진하다. 별별 향신료를 다 때려 부어서 이 세계에 있을 리도 없는, 화학 약품을 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엔 신이 나서 이거저거 담았던 나였으나….

템버가 얼마나 대단한지만 깨닫고 침몰해야만 했다.

그나마 술은 꽤 맛이 있었다.

다만 내가 술에 그리 강한 편이 아니라 많이 마실 수가 없어 한 잔을 찔끔찔끔 마시고 있자니 감질났다. 그나마도 다 마시고 나니 할 게 없어졌다.

결국, 엔프리제를 졸라서 일찍 돌아온 참이었다.

“저런 곳은… 사교를 위해서 가는 곳이니까요.”

투덜거리며 그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 버리자 순순히 몸을 옆으로 옮겨 준다. 편하게 의자 위에 눕자 이번엔 머리 장식이 거슬렸다.

빼려고 바둥거리는데, 엔프리제가 살짝 내 손을 밀치더니 제 손으로 엉긴 머리카락을 풀기 시작했다.

“사교는 개뿔. 멀리서 둘러싸고 수군거리기만 하던데요.”

“그런 식으로 사교를 하는 거죠.”

아하?

하긴 엔프리제에게는 굴욕의 장소 외엔 아무것도 아니겠지. 황제가 오라고 하면 얌전히 달려와서 구석에 처박혀 욕먹고…. 저걸 혼자서 다 견뎠다고 생각하면 속이 타들어 간다.

하여간.

“앞으로는 저랑 같이 다녀요.”

“…재미없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엔프리제 얼굴만 봐도 재미있으니까 괜찮아요.”

“제 얼굴이요? 재미있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씩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의 뺨을 살짝 어루만지자 엔프리제가 간지러운 듯 눈 한쪽을 가늘게 떴다.

“잘생기고 멋있고 귀여워서 보는 재미가 있다구요.”

“아….”

엔프리제가 피식 웃더니 머리 장식을 빼냈다. 붉은 보석으로 장식된 은색 장신구를 건너편 의자 위에 던져 넣은 그가 이번에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습니다. 저도 샤페릴을 보고 있으면 재미있으니까요.”

…아니, 그거랑 좀 다른 것 같은데.

당신이 재밌다고 하는 건 진짜로 재미있어 하는 거 아니야…? 나는 그런 뜻으로 이야기한 게 아닌데….

“아까도… 당신께 다가오는 남자에게 갑자기 플리가 달려들었을 땐….”

엔프리제의 눈이 확 휜다. 이 남자, 저렇게 빵 터졌을 때는 얼굴이 되게 귀여워진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같이 웃어 버렸다.

“그냥 목도린 줄 알았던 게 갑자기 싯-! 하면서 달려드니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꽁지 빠지는 줄 알았어요. 어찌나 부리나케 도망가던지.”

“플리가 그러지 않았으면 제가 가로막았겠지만요.”

“그것도 귀여웠겠다.”

흐흐.

플리처럼 털을 세우지야 못하겠지만, 날카롭게 다른 사람들을 노려보며 질투하는 엔프리제…. 귀엽겠지….

아, 침 흐를라.

“쓰읍. 아무튼, 앞으로는 저랑 같이 가서 놀아요. 그리고 제 핑계 대고 일찍 오고.”

“알겠습니다.”

머리카락을 다 정리한 엔프리제가 씩 웃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한다. 그 손길이 부드럽고 편해서 나도 모르게 사르르 눈이 감겼다.

아, 오늘 좀 피곤하긴 했지.

겉으로 티는 안 내려고 했지만, 주변의 수군거림이 스트레스로 다가오긴 했다. 사람이 무슨 동물원의 원숭이도 아니고 흘끔흘끔 보기는 얼마나 보는지.

짜증이 아주….

그런 주제에 절대 다가오진 않는다. 물론 다가오는 걸 바라지도 않고, 다가오려던 남자도 플리가 퇴치해 주긴 했지만.

다만 그런 음습한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차라리 대놓고 말을 하지. 그럼 뭐라고 대응이라도 할 텐데 그것도 아니고 뒤에서 수군수군수군. 그게 대체 뭐야, 재수 없게.

“다음엔 사람들 앞에서 뽀뽀라도 몇 번 해 줄까요?”

아주 다들 기겁하게.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네.

“…싫습니다.”

응?

“왜요?”

살짝 눈을 뜨고 엔프리제를 보았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도 멈춘 채 엔프리제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들이… 샤페릴의 귀여운 모습을 보는 건 싫습니다.”

아, 알지 알지.

나도 엔프리제의 귀여운 모습은 나 혼자 독점하고 싶다. 특히 밤의 모습은, 그, 흠흠. 아무도 모르는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만약 누군가 다른 사람이 밤의 엔프리제를 알고 있으면 달려가서 뒤통수를 쳐 버릴지도 모른다. 기억이 깨끗이 지워지도록.

나만 알고 싶은 모습이란 언제나 있는 법이지.

“뽀뽀하는 게 귀여운 모습이에요?”

잠시 생각하던 엔프리제가 슬쩍 고개를 숙인다. 저렇게 뽀뽀로 얼버무리려고…?! 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살짝 입술을 내밀어 기다리게 된다.

하지만 기다리던 접촉 대신.

“…제가 키스하려고 하면….”

거친 손가락이 살며시 내 입술을 어루만졌다.

“샤페릴은… 몹시 귀여운 얼굴이 됩니다. 이 얼굴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여 주고 싶지 않아요.”

그런가.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설마 여기서 끝내는 건 아니지? 얼굴이 이만큼 가까워졌는데.

숨결이 뒤섞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의 입술에 기습적으로 쪽, 하고 입을 맞춘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지금은 우리 둘만 있는데.”

엔프리제의 귓바퀴가 빨갛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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