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09)
잊지 못할 순간들이 있다.
엔프리제에게 있어서, 가슴 벅차고 설레는 순간들은 모두 샤페릴이 준 것이었다. 그녀와의 첫 만남부터 그녀와 연인 사이가 된 지금까지.
엔프리제에게는 그 하루하루가 모두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었다.
그리고 아마 오늘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사교계의 꽃과 황가의 피 도둑놈.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무도회에 참석하게 되는 날. 사람들은 아마 모두 두 사람을 보며 수군거릴 터였다.
예전에는 그게 큰 스트레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수군거림이 듣기 싫어서 참석하기 싫을 정도였다. 엔프리제가 날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대놓고 집적거리는 이들은 사라졌지만, 들려도 상관없다는 듯이, 아니 들렸으면 좋겠다는 듯이 떠들어 대는 이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상처가 되었던지.
내 잘못이 아닌데.
어렸을 때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었다. 어머니에게 결혼 전 사랑하던 이가 있었던 것도,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가 억지로 빼앗아 취한 것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의 머리카락과 눈 색이 아버지를 닮지 않은 것 역시.
그런데 왜 아무도 아버지를, 어머니를 욕하지는 않는 거지? 왜 자신만이 욕을 먹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왜 아무도 자신을 지켜 주지 않는 것일까.
“…하아.”
긴장에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다만, 이번에는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이 싫어서 내뱉는 한숨만은 아니었다. 기대가 뒤섞인 한숨이었다.
무도회에 함께 참석한다는 건 두 사람이 연인이 되었거나 혹은 약혼을 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엔프리제는 오늘 샤페릴과 함께 참석한다.
만인의 앞에서, 자신과 샤페릴이 연인임을 공표하게 되는 날.
모두가 욕하겠지. 그럴수록 샤페릴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자신에게 달라붙거나 애정 표현을 해 줄 것이다.
샤페릴은 알고 있을까.
엔프리제는, 여전히 자신의 속내가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속상해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게 기뻤다. 그녀가 자신에게 더 다정하게 대할 수록, 다른 이들의 앞에서 진한 애정 행각을 해 줄수록 기뻤다.
그게 그녀를 욕먹이는 일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얼마나 추악하고 이기적인 기쁨인지.
“그런데도… 나는.”
원래도 그리 성정이 좋지 못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샤페릴이 얽히면, 솔직히 말해서 엔프리제 자신도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지 잘 가늠이 되질 않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무도회에 참석해 모두의 시선을 끄는 게 질투 났었는데….
마치 마음속에 태풍이라도 부는 것 같다. 변덕스러운 바람이 이리저리 제 생각을 흐트러뜨려 놓는 것 같았다.
그래서 싫으냐고 묻는다면….
아니었다.
예측할 수 없는 건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샤페릴이 예측하지 못한 반응을 하는 건 즐겁다. 언제나 그녀가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긍정적인 반응을 돌려주기 때문이겠지.
제 마음을 다잡지 못하는 것도 싫다. 절제하지 못하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건 옳지 못하다. 황족으로서도, 황가의 종기 취급을 받는 몸으로서도.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제 그런 평판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샤페릴만 있다면….
그래도.
그녀가 편안한 매일을 보낼 수 있도록 하려면…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을 모두 할 수 있도록 해 주려면 지금의 지위가 필요했다. 그러니 그걸 유지할 정도로만.
샤페릴을 위해.
“…누군가를 위해 산다는 게 이토록 행복하다는 걸 알려 준 것은 당신입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사는 삶은 고행길과 다름없었다.
처음부터 ‘아내의 전 연인의 자식’으로만 엔프리제를 보고 있었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해 주는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최소한 인정이라도 받고 싶었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이 없었다.
되려 잘하는 것은 당연한 것 취급을 받았고 부족한 것은 질책받았다.
샤페릴을 만나기 전까지, 누군가를 위해 산다는 건 엔프리제에게 있어서는 바보 같고 어리석은 짓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바보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분명.”
나는 당신을 잃으면 완전히 망가질 테지.
만약, 누군가 이 더럽고 추악한 자신에게 벌을 내려 그녀와 떨어뜨려 놓는다면 그는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할 터였다. 그런데도 죽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건 분명 먼발치에서라도 그녀를 보고 싶기 때문이겠지. 지옥의 업화에 불타는 것보다도 더한 고통 속에서 오로지 한 줌 빛 같은 그녀만을 바라보며.
그렇게 살겠지.
그래도 좋다. 샤페릴을 바라볼 수 있는 삶이라면 차라리 그게 낫다. 아무리 몸이 편안하고 마음이 편안하더라도 샤페릴이 없는 장소는,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이리도 당신을 사랑하게 될 줄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그녀를 처음 저택에 감금했을 때는, 미움받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험한 꼴을 당하고 실험의 희생양이 되는 걸 볼 바엔 차라리 자신이 평생 미움받으며 살아가겠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지금은…. 이토록이나 그녀를 사랑하게 된 지금도… 그 마음은 그리 달라지진 않았지만, 아마 다가오게 될 아픔의 크기는 전혀 다른 것이 되겠지.
그래도.
나는 지금 당신이 보고 싶다.
이 사랑이 커질수록 나중에 받는 상처가 커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언젠가 당신의 마음이 식기라도 하면 나는 죽어 버릴 걸 알면서도…. 그래도.
엔프리제는 아까부터 침착하게 있지 못하고 복도를 왔다 갔다 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혹여 샤페릴이 나오기라도 하면 꼴사납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 아닌가.
하지만 초조한 마음은 감출 수 없어 발뒤꿈치 끝으로 톡톡 복도 벽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 * *
흠흠.
슬쩍 앞을 보았다. 엔프리제는 제대로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 창밖을 보며 다리를 꼰 채로 팔짱을 끼고 있다. 저 자세, 남주들이 하는 거 많이 봤는데… 팔다리가 기니까 확실히 잘 어울리긴 하네.
게다가 차려입은 것도 좋다.
저번에 내가 질투 섞인 말을 꿍얼거린 후로는 좀 차분하게 입고 나가더니, 오늘은 아주 휘황찬란하다. 나랑 맞춘 건지 하얀 정장에 금실과 붉은 실로 자수가 왕창 놓여 있다. 심지어 그게 내 드레스의 레이스 문양이랑 비슷하다.
그 위에 새빨간 망토를 둘러서 금색 줄로 고정했다.
이런 걸 다른 남자가 입었으면 무지 촌스러웠을 텐데. 역시 패완얼. 우리 엔프리제는 역시 거적때기를 입혀 놔도 이쁘다니까.
근데.
“엔프리제.”
“네?”
“왜 절 안 봐요?”
아까 내가 방에서 나왔을 때부터 좀 이상하다.
흘끗 스치듯 날 보고서는 그대로 계속 시선을 피하고 있다. 행동이야 언제나 그렇듯 정중하고 대답도 잘 하는데.
“…….”
흘끗, 날 본 엔프리제가 다시 고개를 돌린다. 이렇게 차려입은 거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저번에 호숫가 갈 때도 봤으면서 왜 그럴까.
고개를 갸웃하자 엔프리제가 초조한 듯 손가락 끝으로 톡톡 제 팔을 두드리더니 입을 열었다.
“긴장돼서… 그런가 봅니다.”
“긴장이요?”
아니, 긴장은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 이래 봬도 오늘이 사교계 첫 데뷔인데…. 물론 아무도 데뷔라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처음 가보는 건 맞으니까.
근데 왜 나보다 엔프리제가 더 긴장하는 거지. 사고 칠까 봐 그러는… 건 아닐 테고.
“네.”
“왜요…?”
“그… 무도회를 함께 참석한다는 건 저희가 연인 사이라는 걸 공표하는 것과 비슷한 거라는 건… 이미 말씀드렸었죠.”
“그랬죠?”
날 말릴 때 했던 말 중 하나였다.
오히려 난 ‘그게 뭐 어떤데요?’라고 했었고.
“요컨대… 제가 당신의 연인이라고 공표가 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 오늘의 샤페릴이… 너무 눈부셔서 제가 당신 옆에 서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
아니, 칭찬을 해 주려면 그냥 쌈박하게 예쁘다고 해 주면 안 돼? 뭐 그런 식으로 돌려 돌려 이야기를 해?
사람 얼굴 빨개지게.
막상 이야기를 꺼낸 엔프리제는 긴장 때문인지 하얗게 질려 있는데 내 얼굴은 화끈거린다. 그게 어쩐지 창피해서 더 빨갛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그, 엔프리제도 잘생겼어요….”
“…네.”
오, 이제는 당신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라든가 하지 않네.
근데 당당히 받아들이니 그건 그것대로 재미가 없다. 좀 더 쑥쓰러워해 주는 맛이 있어야….
크흠.
“다들 우리보고 제국 제일의 미남 미녀라고 하지 않을까요.”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엔 좀 쑥스럽지만, 샤페릴은 작가 공인 세계관 최고 미녀니까 괜찮겠지. 엔프리제도 마찬가지고.
게다가 내 눈엔 정말로 최고로 잘생겼는걸.
“그럴…까요?”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내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땐 단호하게 이야기를 해 줘야 믿음을 주는 법.
“다들 속으로 부러워할지도 몰라요.”
“그건 당연합니다. 샤페릴과 함께 입장하는 걸 바라는 남자들은 산더미처럼 많을 테니까요.”
“아니요! 다른 분들이 절 부러워할지도 모른다구요. 황제 눈에 들려고 시답잖은 꼬투리를 잡으면서 당신을 괴롭혔는데, 사람들이 예쁘다 예쁘다 하는 제 옆에 서도 전혀 안 꿀리고 오히려 빛이 나는 엔프리제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피눈물을 흘릴걸요?”
씩 웃으며 그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사실 아까부터 딱 한 줄기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신경 쓰였거든.
살며시 그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려 몸을 숙이자 그가 내 팔을 잡으며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으음….”
옅은 화장을 한 탓에 선홍색 립스틱이 발린 입술을 훑은 혀가 살며시 입안으로 들어온다. 어설프게나마 혀를 내밀자 냉큼 잡아채 이내 누가 누구를 원하는지도 모르게 뒤섞인다.
살짝 입술 사이에 틈이 생길 때마다 숨을 내뱉지만, 이내 그조차도 아쉽다는 듯 막아 버려서 내 모든 숨결이 빼앗긴다. 그리고 내게는 그의 숨결이 흘러든다.
왜 갑자기 이러는 거지, 라는 생각조차 옅어질 정도로 호흡을 나눈 후에야 겨우 그가 놓아 주었다.
살짝 스위치가 들어온 듯 욕망으로 가득 찬 금색 눈동자. 내 립스틱이 묻어 붉은 얼룩이 진 엔프리제의 입가를 닦아 주며 중얼거렸다.
“…립스틱, 다 가져가 버리면 어떻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