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08)
흠, 흠.
템버가 만들어 준 드레스가 이런 식으로 세상에 빛을 볼 줄이야.
사실 막상 만들어 놓고 코르셋이니 뭐니 하기 싫어서 그냥 가끔 구경만 하고 놀았는데, 그걸 알아챈 템버가 코르셋을 하지 않아도 되게 고쳐 주었다. 뭐 몸 선이야 코르셋을 입은 거랑 다르겠지만, 알 게 뭐야. 나는 그거 입고 못 다녀.
절대 못 다녀.
“그다지 티도 나지 않는군요.”
“그래요?”
“자세히 보면 조금 티는 나기야 하겠지만, 지금도 선이 충분히 예쁘셔서 새로운 매력이 있어요.”
템버가 씩 웃으며 말한다.
템버는 의외로 입에 발린 말은 잘 하지 않는다. 처음 만났을 때는 뭔가… 만사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 적당적당한 말을 할 것 같은 이미지가 좀 있었는데.
그래서 템버의 말은 언제나 믿을 수 있다. 가끔 뼈가 아프긴 하지만.
“머리 장식은 무겁지 않으십니까?”
“조금…? 그래도 괜찮아요. 사실 머리 장식보다는 목이….”
슬쩍 아래를 내려 본다.
하얗게 뻗은 가느다란 목 아래에서 반짝이는 붉은 보석. 그 주위를 감싼 차가우면서도 기품 있는 빛의 은. 그리고.
하얗고 복실한 털 뭉치.
“플리, 이제 좀 내려오면 안 돼?”
“삐?”
“…거긴 너랑 같이 못 가.”
“삐!”
슬쩍 떼어 내려 도전해 봤지만, 그 조그만 발가락으로 야무지게 내 머리카락을 잡고 놓아 주질 않는다. 이게 바로 출근하는 엄마 다리에 달라붙어 가지 말라고 떼 부리는 아이를 보는 심정인가. 귀엽긴 한데 되게 난감하네.
“플리도 같이 데려가시지요.”
“네? 그래도 돼요?”
“뭐…, 무도회장에 동물을 데리고 오지 말라는 말은 없었으니까요. 야생 동물도 아니고 아가씨의 수호 기사인데 괜찮지 않을까요?”
“흠.”
엔프리제한테 물어봐야겠다.
하긴, 그 남자가 나한테 안 된다고 할 리가 없긴 하지. 특히 이런 걸로는. 오히려 플리가 같이 가는 걸 더 마음 든든해하지 않을까.
“엔프리제는요?”
“방 밖에서 안절부절못하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까부터 발소리가 거슬리네요.”
응? 발소리?
슬쩍 귀를 기울이자 톡, 톡, 톡 하고 가벼운 소리가 들린다. 템버도 들었는지 피식 웃고는 드레스의 여기저기를 매만져 주었다.
근데 어차피 걸으면 다 풀리지 않나? 안 풀리게 조심해야 하나.
“무도회에는 멜리나 양이 따라갈 텐데, 혹여 불편한 게 있으면 그녀에게 말씀하세요.”
아, 맞다. 원래 시녀가 같이 따라다니면서 이런 거 해 주는 거지. 그렇게 많이 읽어 놓고….
하긴 소설 읽을 땐 그런 생활상을 중요하게 본 게 아니라 여주가 뭘 하는지 남주가 뭘 하는지를 더 중요하게 읽었으니까.
“템버는 같이 안 가요?”
“저는 저택 내에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도 하고 이제 나이가 나이라…. 제가 따라가면 아가씨께 폐가 됩니다.”
아니, 뭐 어때서!
우리 템버가 어때서! 만능 템버인데!
“그리고 그런 곳에 따라가야 멜리나 양에게도 기회가 생기지요. 원래는 폐하의 시녀였기에 그런 자리에서 느긋하게 있을 시간이 없지 않았습니까.”
“기회요?”
“무도회는 사교계 영애들의 자리이기도 하지만, 시녀들이 남편감을 물색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나이가 찼는데도 약혼자가 없는 이들에게는 무도회가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니까요.”
흐음.
뭐, 결혼 못 하면 못 하는 대로 상관없지 않나?
…어라?
“멜리나는 몇 살이에요?”
“제가 알기론 스물여섯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헉, 언니였네?!
너무 귀엽게 생겨서 당연히 동생일 줄 알았는데. 그럼 보자 자하랑 몇 살 차이지….
허? 궁합도 안 본다는 네 살 차이잖아!
“템버, 템버.”
“네?”
“다음에 자하가 왔을 땐 멜리나가 차를 가지고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줄래요? 아, 아니다. 제가 그냥 응접실에 갈게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듯 템버가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왜 그러지?
“둘은 좀 아니에요?”
“아니요. 그냥 아가씨께서 누군가의 중매를 서실 생각을 하시다니, 싶어서요.”
으아니, 왜 그러십니까! 저는 그러면 안 됩니까!
대체 템버에게 나는 어떤 이미지인 거지. 설마 아직 응애응애하는 아가처럼 보이는 건 아니겠지…?
하긴, 내가 템버에겐 좀 어리광을 많이 부리긴 했는데…. 그래도 남녀상열지사에 좀 끼어들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이상한가!
“아가씨께서는 전하 외에 다른 사람의 연애 사정에는 관심이 별로 없으시다고 생각했었기에….”
아, 아아.
그렇죠…. 제가 좀 그랬죠….
정확히 말하면 신경 쓸 일이 없었던 것뿐이다. 템버는 뭔가… 엄마 같은 느낌이라 그런 거에 별 관심이 가질 않았고, 자하에겐 누군가 소개해 주고 싶다는 마음은 들었으나 사람이 없었고.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은 다 적이었으니까.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아가씨는 철저하신 분이군요.”
“제가요?”
“아가씨의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다 주려고 하시는 분이신 것 같아요. 격식이나 예절, 그런 것과 상관없이요. 다만 아가씨의 사람이 아닌 사람은 무서울 정도로 무시하고 신경 쓰지 않으시는군요.”
으음, 그렇게 말하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안 그럴 이유가 있나?
내 사람을 신경 쓰기도 힘들다.
여기에 내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 혹은 내가 사랑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받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이미 충분히 사랑받고 보살핌 받고 있다.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그 외의 다른 사람들, 내 사람에게 날을 세우거나 나에게 날을 세우는 사람들에게 굳이 잘 보일 필요가 있을까?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을 챙기기도 벅찬데.
본래 그다지 누군가와 충돌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유하게 넘어가긴 하지만…. 그다지 잘 보일 필요성도 못 느낀다.
“아가씨의 그런 점이 장점이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뭐, 다 그렇지, 뭐.
누군가에게는 장점인 게 누군가에게는 단점이다. 누군가는 활발하고 타인에게 잘 신경 쓴다고 평하는 성격이 누군가에게는 오지랖 넓은 성격일 뿐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차분하고 단호하다며 호평받는 성격이 누군가에게는 차갑고 정이 없다며 악평을 받을 수도 있다.
그걸 다 맞추려면 내 인격이 사람의 수만큼 있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있는 그대로의 날 사랑해 주는 사람과 잘 지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다. 한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가득 차고, 거기에 세 사람이 더 낀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다. 거기서 더 더할 생각은 없다.
뭐, 그런 걸 즐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도 템버가 좋아요.”
“어머나.”
“처음에는 뭐랄까…, 거리감이 있다고 해야 하나 조심스러운 성격인 것 같아서 좀 어려웠거든요. 하지만 할 말은 다 하는 성격인 거 알고는 편해졌어요.”
“이 나이가 되면 돌려 말하는 시간조차 아까워지거든요. 젊었을 때는 확실히 아가씨께서 말씀하시는 느낌의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흠.”
그랬다고 해도 아마 나는 템버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지금의 멜리나가 마음에 든 것처럼.
“아, 그럼 멜리나도 드레스를 입어요?”
“네. 무도회에 가는 거니까요.”
“예쁘겠다.”
“그래서 더 전하께서 안절부절못하고 계시죠.”
“네?”
멜리나가 예쁜데 왜 엔프리제가…!
설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 게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기도 하고! 설마!
“메, 멜리나가 예뻐서요…?”
“아가씨만으로도 이미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도 넘치는데 멜리나까지 같이 서 있으면 괜히 쳐다보는 남자들이 더 많아질까 걱정되시나 봐요.”
“아.”
하여간.
“질투쟁이에요, 정말.”
“전하께서는, 바라는 걸 이뤄 보신 적이 거의 없는 분이니까요. 특히 인간관계에서는.”
…….
나도 그 기분은 안다.
알기 때문에 더 속상하다. 나야 볼품없는 인간이었으니까 그랬지만, 엔프리제처럼 잘난 사람이 왜 그런 경험을 해야만 했을까. 그것도 황제를 닮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금 황제가 선황제를 완전히 빼다 박았다던데, 그걸 보면 엔프리제도 생김새는 꽤 닮은 것 같은데 말이다.
“선황께서도 불안하셨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불안요?”
“선황비께서는 진심으로 약혼자와 사랑하는 사이셨으니까요. 그걸 권력으로 억지로 앗아 왔지만, 그 마음만큼은 끝내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셨지요. 그게 불안하셨던 게 아닐까요.”
그러게 누가 남의 여자 탐내래?
하여간 이게 문제다. 모든 소설, 신화, 설화를 다 뒤져 봐도 거의 비슷비슷한 이유로 파국이 일어난다. 대부분 누군가가 가져선 안 될 욕심을 내고, 그 욕심을 억지로 실행하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그래 놓곤 의심병자가 되다니.
“그렇게 보면 확실히… 엔프리제는 그 선황제와는 닮지 않았네요.”
“네?”
“엔프리제는 자기를 죽여서라도 제가 원하는 걸 이뤄 줄 사람이니까요.”
어쩌면…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란 게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었기에 반면교사로 삼은 건지도 모른다. 혹은 정말로 황제의 아이가 아니라서 닮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확실한 건.
“맞습니다. 전하께서는 그런 분이시지요.”
엔프리제는 엔프리제라는 거다.
같은 성장 환경이라고 해서 같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건 아니다. 같은 부모 아래에서 나왔다고 해서 자식이 같은 성격을, 같은 인성을 갖지는 않는다.
엔프리제는 저런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엔프리제가 너무 좋다. 그게 중요한 거지.
“자, 다 됐습니다, 아가씨.”
아이보리색의 옷감이 하늘하늘하게 여러 겹 겹쳐 있고, 치마에는 프릴이 가득하다. 소매와 밑단에는 화려한 레이스가 가득 달렸지만, 색으로 봤을 때는 전체적으로 너무 흰 게 아닌가 싶을 때 가슴에 장식된 연보라색 리본이 제 역할을 한다.
으음, 무엇보다 예쁜 건 바로 이 빛나는 샤페릴의 미모지.
꼬박꼬박 씻는 거 빼고는 따로 화장품 바르거나 하는 것도 없는데 어쩜 이리 이쁜지. 엷은 화장만 했는데도 눈이 부시다.
거기에 엔프리제가 사 준 보석까지 차니 완벽하다.
귀가 좀 치렁치렁해서 귀찮긴 하지만.
“고마워요, 템버.”
나는 씩 웃고는 처음 신어 보는 굽 높은 구두 탓에 조심스러운 걸음을 내디뎠다. 엔프리제를 만나러 가기 위해.
그리고.
문을 연 그곳에는.
“…….”
초조한 듯 나를 기다리는 엔프리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