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06)
흠흠, 좋아 좋아.
쌀을 잘 불려서 들려 보낸 덕에 적당하게 습기를 머금은 쌀가루가 완성됐다. 밀가루에 익숙한 템버는 이게 맞는지 불안해했지만, 이걸로 충분하다.
살짝 수분을 머금은 쌀가루를 체에 내려 준다. 여기에서 소금을 살짝 넣어 간을 해 주고 양손으로 비벼 준다. 수분을 고르게 해 주는 거라는데 솔직히 모르겠고 요 감촉이 너무 좋다. 알알이 될 때까지 해 주는데 살짝 수분이 모자라다 싶으면 물을 좀 더 넣어 주면 된다.
처음에 만들 땐 그 상태를 잘 몰라서 이상한 떡이 만들어지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꽤 베테랑이 되었다. 집에 방앗간에서 빻아 온 습식 쌀가루를 냉동시켜 놓고 해 먹을 정도로 떡은 자주 해 먹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됐다 싶으면 일단 찜기 밑에 깔 냄비에 물을 끓이기 시작한다. 물이 끓어 수증기가 올라오기 시작해야 찜기를 올릴 수 있기 때문에 미리 해 둬야 시간이 좀 절약된다. 가끔 잘 쪄진 생선이 올라오던 게 기억나서 물어보니 다행히 대나무로 된 찜기가 있다고 해서 날름 받아 챙겼지.
면포를 깐 찜기에 가루를 넣고 골고루 펴 준다. 중간에 숨구멍을 뽕 뚫어 줘야 골고루 잘 쪄지니까 손가락으로 살살 숨구멍을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하다. 물이 끓어 수증기가 올라온다 싶으면 뚜껑을 닫고, 기다리는 동안 템버랑 가벼운 수다를 떨었다.
“이런 건 어디서 보셨어요, 아가씨?”
“책에 나오더라구요. 본 대로면 달지 않은 느낌이라 혹시 엔프리제도 잘 먹지 않을까 싶어서.”
“냄새가 너무 좋아요. 구수한 냄새가 나네요.”
나도 모르게 ‘그쵸!’라고 하려다가 그냥 씩 웃기만 했다. 처음 만들어 본다고 했는데 냄새까지 알고 있으면 좀 이상하니까.
잠시 이야기하는 동안 시간이 훌쩍 지난다. 찜기를 여니 떡집에서나 날법한 구수한 냄새가 훅 풍겨 온다. 장갑을 끼고 면포 끄트머리를 잡아 꺼내 절구 위에 쪄진 쌀가루를 부어 준다.
후.
절굿공이용 물을 작은 그릇에 담아 준비한 후 찧기 시작한다. 여기서는 뭐, 그렇게 힘들진 않다. 한 5분 정도 이리저리 뒤집어 주며 콩콩콩콩 찧어 주면 되니까. 떡이 달라붙으면 공이에 물을 묻혀 주면서 열심히 찧어 준다.
그리고 어느 정도 되면.
진짜가 나타난다.
후.
물 바른 도마 위에 되다 만 반죽 같은 걸 엎어 주고 마음의 준비를 한다. 제발 근육통은 없기를. 내 손이 무사하기를.
원래라면 면장갑 같은 걸 끼고 그 위에 위생 장갑을 꼈겠지만, 아쉽게도 여기엔 그런 게 없다. 참기름을 담은 넓은 접시에 깨끗이 씻은 맨손을 담갔다가 꺼낸 뒤 뜨거운 반죽을 잡고….
치댄다!
치댄다!
으, 뜨거워!
한참 절구로 찧었지만 그렇게 식지는 않았다. 참기름을 바른 덕에 손에 달라붙지는 않지만, 처음에는 이걸 몰라 그냥 치댔다가 죽는 줄 알았다. 이게 손에 딱 달라붙어 있으면 시너지 효과가 나는지 더 뜨겁거든.
예전에는 사소한 울분을 담아 주먹으로 치기도 하면서 이걸로 스트레스 해소를 했었는데. 지금은 딱 하나밖에 생각이 안 난다.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몇 분 하다 보면 솔직히 팔이 저리기 시작한다. 반죽 자체가 어느 정도 찰기가 있기 때문에 치대는 게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골고루 치대 주고 많이 괴롭혀야 찰기도 생기고 맛도 있다.
지켜보던 템버가 청소하러 나갔다 온 뒤에도 계속 치대고, 상황을 보러 온 멜리나가 깜짝 놀라 멍하니 지켜보는 동안에도 계속 치댔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싶을 정도로 치댄 후 완성된 반죽을 봤다.
후… 만족스럽진 않지만, 뭐 이 정도면 나름 선방했지!
반죽을 좀 떼어 돌돌돌돌 밀어 준다. 도구가 있으면 좀 더 나은데. 손으로만 밀어 주면 아무리 애를 써도 미세하게 손자국이 생겨서 좀 아쉽다.
나한테는 익숙하고, 이들에게는 많이 낯설 긴 막대 모양으로 반죽을 만든 후 위에 솔로 살짝 참기름을 발라 준다.
그리고.
“흐아….”
다섯 줄의 가래떡을 만든 후 털썩 주저앉았다.
팔 아파. 다리 아파.
“괜찮으십니까, 샤페릴?”
지켜보고 있던 멜리나가 먼저 달려왔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지금은 괜찮지만, 이거 분명 근육통이 되겠지….
“마사지 좀 부탁해요, 멜리나.”
“물론입니다. 바로 옆에 응접실이 있으니 거기로 가는 게 좋겠어요.”
“으….”
반죽을 치대는 게 생각보다 팔도 아프지만, 전신 근육통이 되기 쉽다. 아마 온몸의 힘을 써서 무게를 실어 대며 치대서 그런 것 같은데 원래 몸이야 이런 거에 익숙했지만, 샤페릴은 귀하디귀하게 자란 몸이라 그런지 좀체 체력도 근력도 붙지를 않는다.
게다가 요즘엔 그, 흠흠.
새벽 운동을 그, 잘 못 갈 때가 생겨서. 흠흠.
“템버, 저거 세 줄은 냉장고에 넣어 줘요.”
“네. 나머지는 오늘 저녁 식사하실 때 같이 올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이제 문제는… 엔프리제가 맛있다고 해 줄지 어떨지.
멜리나와 부엌을 빠져나온 나는 그대로 응접실에 드러누워 버렸다.
* * *
“괜찮습니까, 샤페릴?”
“응? 왜요?”
왠지 모르지만, 오늘따라 엔프리제가 일찍 돌아왔다. 그것도 사색이 되어서.
그대로 응접실에 눌러앉아 멜리나와 수다를 떨던 나를 보더니 안심한 듯 표정이 풀리는 게 귀엽다. 혹시 템버가 나 쓰러졌다고 알려 준 건가?
“쓰러졌었다고 들었습니다.”
“아하, 템버가 알려 줬어요?”
“네.”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냥 힘들어서 그랬어요.”
가까이 다가오던 엔프리제가 멜리나를 봤는지 조금 놀란다. 슬쩍 나와 그녀를 번갈아 보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내게로 다가왔다.
“힘들다니….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아니요. 제가 그랬잖아요. 엔프리제 맛있는 거 해 주겠다고.”
순간 말문이 막힌 듯 멍한 얼굴로 나를 보던 엔프리제가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눈은 울 것 같은데 입꼬리는 올라갈락 말락 꿈틀거린다. 저거, 웃음 참는 거 맞지?
그 상태로 내가 앉아 있는 소파 옆으로 다가와 털썩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는다.
저거는 남주들의 공인 포즈 아닌가. 저 포즈가 저렇게 잘 어울린다니. 누가 남주인공 아니라고 할까 봐.
아주 그냥 최고야.
“샤페릴….”
“기쁘지만 다음부터 이런 짓 하지 말라고요?”
“네.”
이제는 놀라지도 않네.
예전엔 어떻게 자기 마음을 그렇게 잘 아냐면서 놀라 주더니.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표정에는 여전히 묘한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그래도 기쁘죠?”
“…네.”
“제가 막 힘들어서 탈진할 정도로 애써서 엔프리제 맛있는 거 해 주겠다고 하는 게 기쁘죠?”
“…….”
으음, 하고 뭔가가 끓는 듯한 소리를 내던 엔프리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해서 좋다니까.
“그렇게 해서 만든 걸 엔프리제가 맛있게 먹으면서 또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게 절 기쁘게 할까요, 아니면 다신 이런 거 만들지 말라고 하는 게 절 기쁘게 할까요?”
“당연히… 전자겠지만, 저는….”
“제가 힘든 게 싫은 거죠? 알아요, 알아요. 알지만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걸 막는 것도 강요라고 했죠?”
끙.
엔프리제가 뭐 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날 올려다본다.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흘러나온다.
그 얼굴을 잡고 살짝 뺨을 치댔다.
“그러고 보니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일찍 와도 되는 거였어요?”
“…영지에 큰일이 생겼다고 하고 나왔습니다.”
“거짓말인 거 다 알걸요.”
“거짓말은 아닙니다. 영지에 있는 샤페릴에게 큰일이 생긴 거니까요.”
아니, 이 남자가?
난 저런 말을 입에 낸 적도 없는데 왜 저런 걸 닮아가는 거지? 혹시 내 얼굴에 쓰여 있는 건가!
“기왕 일찍 온 거 얼른 씻고 쉬어요. 나중에 저녁때 먹으려고 했는데, 점심때 같이 먹으면 되겠네요.”
“…네.”
낮은 한숨을 내쉰 엔프리제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러자 곁에 있던 멜리나도 같이 일어난다.
아, 맞다. 멜리나는 내 시녀가 아니라 엔프리제의 시녀지. 같이 가야 하겠구나.
“그대는 여기에서 샤페릴의 대화 상대가 되어 주십시오. 전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전하.”
오오, 멜리나의 목소리가 똑 부러진다.
생각해 보니 처음 마사지를 해 주러 왔을 때도 저랬지. 서재에서 만났을 때는 너무 놀라서 그런가. 좀 더 귀여운 목소리가 되었었는데.
그 이후로는 계속 그 목소리였고.
“그럼 샤페릴, 씻고 바로 오겠습니다.”
“네. 얼른 와요.”
씩 웃으며 그의 손가락을 톡 쳤다. 엔프리제 역시 엷게 웃으며 내 손가락을 톡 쳐 주곤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하여간 과보호야.”
그가 나가자마자 그렇게 중얼거렸다가 흠칫, 놀랐다. 옆에 멜리나가 있다는 걸 까먹은 건 아닌데….
혼잣말 버릇이 이렇게 위험하구나!
“저도 놀랐습니다. 전하께서는 좀 더… 냉소적인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음, 다들 그렇게 생각하나 보더라구요.”
원작에서는 다들 그런 이미지로 알고 있더라고. 샤페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하지만, 분명 저 모습이 본성이시겠죠.”
오, 알아주는구나, 너는!
순간 멜리나에게 친밀감이 샘솟는다. 나도 모르게 덥석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맞아요! 귀엽죠?”
“귀…, 주인에게 그런 평가를 하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멜리나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잡힌 손과 내 눈을 번갈아 보던 그녀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샤페릴도, 전하도 귀여우신 분입니다.”
응? 나?
으음, 샤페릴은 귀엽다기보다 예쁘다거나 아름답다거나 여신 같다거나 그런 말이 어울리지 않나? 하긴, 귀엽기도 하지.
“멜리나가 알아줘서 정말 기뻐요. 다들 엔프리제를 나쁘게만 말하니까 아주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는데.”
“…아마 다들… 두려운 거라고 생각합니다.”
“두려워요?”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멜리나는 입을 닫았다.
그 모습이 곧 대답이었다. 다들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지에 대한.
빌어먹을 황제 놈. 나는 속으로 이를 빡빡 갈며 멜리나에게 말했다.
“멜리나.”
“네?”
“앞으로도 계속 여기 있어요. 거기 돌아가지 말고.”
그 말에 멜리나는….
“…….”
묘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