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05)
엔프리제는 오늘도 외출했다.
평소라면 플리를 데리고 황제 그 새끼는 뭔데 자꾸 우리 엔프리제를 빼돌리냐며 하소연을 했겠지만, 오늘은 좀 다르다. 나는 결의의 팔굽혀 펴기를 하며 어깨와 팔을 예열시키는 중이었다.
원래는 블렌더로 쌀가루를 만들었지만, 여기엔 아쉽게도 그런 기구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엔프리제가 외출한 후 템버가 미리 불려 둔 쌀을 가지고 방앗간으로 간 참이었다.
그리고 그사이에는 내 방에 아니라 엔프리제의 서재에 잠시 있기로 했다.
혹여 필요한 게 있어도 템버가 없으면 아무도 내 방에 들어오지 못하니 서재에서 부르면 되겠다 싶기도 했고, 거기라면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테니까라고 생각해서였는데.
“…….”
문이 열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다만, 어딘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척이 나서 뒤를 돌아보았을 뿐이었다. 거기에는 언젠가 본 적 있는 시녀가 당혹스러운 듯 나를 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눈살을 찌푸렸겠지만, 이 사람은 왠지 싫지 않다. 엘마레와 닮은 느낌이 나지만… 엘마레랑은 좀 다르다. 뭔가 좀 더.
아무 생각 없이 인사를 건네자 그녀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레이디 리베테.”
“아, 혹시 여기 청소하러 오신 거예요?”
그녀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며 읽던 책을 내려놓자 겨우 대답이 돌아왔다.
“대공 전하께서 외출하시어….”
“아, 땡땡이?”
그러고 보니 이 시녀가 엔프리제의 시중을 들어 준다고 했지.
사용인들이 바뀌기 전에는 거의 엔프리제 혼자서 다 했었다. 밖에 나갈 일도 거의 없었고 대외적인 일도 거의 하지 않았으니까. 하는 거라곤 이미 검토가 끝난 서류들에 사인을 하는 정도.
하지만 지금은 좀 바뀌었다.
사용인들만 바꿔 주는 줄 알았더니, 밑에 있던 사람들을 다 물갈이해 버린 모양이었다. 덕분에 원래 영지 일을 돌봐 주던 사람들까지 갈려 나갔다. 인수인계를 한다고 했다는데 하루 가지고 뭐가 제대로 되겠어?
결국 서류에 사인만 했다고는 해도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지, 어떤 사업을 새로 시작하는지, 현재 영지 사정은 어떤지 꼼꼼히 서류를 읽어 보며 파악해 둔 엔프리제가 지휘를 맡게 되었다는 거다. 쉽게 말하면 이제 제자리로 돌아갔다는 거지.
거기에 최근 잦아진 초대에 외출까지.
나더러도 같이 가자고 했지만, 내가 진저리를 치자 쓰게 웃으며 본인만 갔다 오겠다고 말했다. 요즘도 가끔 외출 전에 버려진 강아지 같은 눈으로 날 보기는 하는데….
정말로 무도회 같은 곳에는 가고 싶지 않다. 솔직히 방을 나오는 것도 스트레스인데 귀족들이 바글대는 곳에 가면 어떻게 될지.
혹시라도 폭발해서 엔프리제에게 폐를 끼치게 되면 좀 그러니까.
게다가 기억을 잃은 설정이자 무도회에 대해 1도 모르는 나는 도움이 안 된다. 덕분에 이 시녀가 엔프리제의 곁에서 여러 가지로 조언도 해 주고 잡일도 해 주는 모양이었다.
“…네, 땡땡이 같은 겁니다.”
의외로 순순히 자백한다.
다만 뭐랄까. 우리나라 말 중에서 썩은 동태 눈이라는 표현이 있다. 그런 느낌의 눈으로 시원스럽게 저런 말을 하니 좀 위화감이 든다.
잠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곁을 톡톡 쳤다.
“뭐 해요? 앉아요.”
“네?”
“땡땡이 치러 왔다면서요.”
그래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저택에 온 다른 사용인들과는 뭔가 다르다. 아아, 그렇구나. 사용인들이 바뀌는 날 봤던 그 사람.
그 사람인가 보다.
“하지만….”
“여기서 제 시중 들었다고 하면 땡땡이 친 게 들키지 않을 거 아니에요. 저도 템버 올 때까지는 할 게 없어요.”
미리 템버가 준비해 주고 간 차와 과자를 먹으며 책을 읽고 있었을 뿐.
“아, 과자 좋아해요?”
“과자…요?”
“최근에 유행하는 과자점에서 사 온 거래요. 저도 가 본 적은 없지만.”
흠, 내가 불편한가?
다른 사용인들은 가끔 나랑 마주치면 잘 보이려고 꼬리를 치던데. 이 사람은 날 피하는 느낌이 든다. 어떻게 해야 길… 아니, 친해질 수 있지.
잠시 생각하다 계란 과자를 하나 집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흠칫, 하는 그녀의 입가에 과자를 내밀었다.
“계란 과잔데 먹어 본 적 있어요?”
“아니요….”
“맛있어요.”
쩜, 쩜, 쩜.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곤혹스럽다는 표정조차 없이 가만히 날 바라보고만 있다.
“팔 떨어질 것 같은데….”
살짝 너스레를 떨어 보았다.
물끄러미 날 바라보던 그녀가 두 손을 내밀었다. 엔프리제였다면 좀 더 장난을 쳤겠지만…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 그렇게까지 하긴 좀 그렇지.
살짝 손바닥 위에 과자를 놓아 주자 그녀가 꼭 쥐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리 와서 같이 먹어요.”
그녀의 손을 살짝 끌자 의외로 순순히 따라온다. 소파 앞에 데려가자 다시 고장 난 것처럼 멈추기에 내가 먼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물어봤네요. 이름이 뭐예요?”
“멜리나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멜리나.”
메론맛 아이스크림이 생각나는 이름인데. 작가가 이름을 적당히 지었나?
아니, 애초에 원작에 등장했을지 아닐지 알 수 없는 엑스트라인걸. 뭐랄까. 게임 같은 거 하면 자동 버튼 누르면 랜덤으로 이름 지어 주는 그런 거 아닐까.
“멜리나는 원래는 무슨 일을 했어요?”
과자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손이 뚝 멈춘다. 잠시 고장 나 있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의 시녀였습니다.”
“폐하? 황제 폐하요?”
“네.”
흐음, 그렇군.
근데 왜 숨기지 않는 거지? 엔프리제랑 황제 사이가 안 좋은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아니면 황제가 날 노리는 것까지는 모르는 건가.
흠흠, 내 입으로 노린다고 하니까 좀 그렇네.
“황성에 있다가 여기 오니까 어때요?”
“…….”
아, 나 나름대로 엔프리제의 가장 가까운 사람인데 말하기 좀 그런가?
“어, 다른 의미가 있어서 물어보는 건 아니에요. 들었겠지만, 제게는 과거의 기억이 없거든요. 황성에 갔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엄청 호화롭고 멋진 곳일 것 같은데 여기에 와서 힘들거나 어려운 건 없는지 물어보고 싶었어요.”
어라, 뭔가 변명 같은데.
물끄러미 나를 보던 녹색 눈동자가 문득 살짝 휘어졌다.
어라, 웃는 게 되게 귀엽다.
“레이디 리베테께서는… 정말로 허물없는 분이시군요.”
“제가요? 뭐… 사실 제가 귀족이었다는 기억도 없고 예법 같은 것도 기억이 나질 않으니까요.”
거짓말은 아니다. 이 몸은 어떨지 몰라도 정신은 그런 기억이 없으니까! 애초에 귀족이었던 적이 없는걸.
“레이디 리베테께서는 사용인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계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말을 걸어 주셨을 때는 조금 놀랐어요.”
“아….”
그거야 걔네가 입을 함부로 놀리니까 그런 거고.
생각하니 또 열 받네. 지나가다가 문이나 옷장 모서리 같은 곳에 새끼발가락이나 콱 찧어라.
“딱히 그렇진 않아요.”
“저는… 황성보다는 여기가 좋습니다.”
그런 말을 함부로 해도 되나?
나도 대책이 없지만 이 시녀도 참…. 아니면 입에 발린 소리인가?
슬쩍 얼굴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다만 아까와 달리 엷은 미소가 은은하게 맺혀 있긴 했다.
“왠지 물어봐도 돼요?”
“…여기는 햇빛의 냄새가 납니다.”
“햇빛?”
나도 모르게 킁, 하고 냄새를 맡았다.
엔프리제에게서는 언제나 달콤한 냄새가 나긴 하는데…. 햇빛 냄새는 플리에게서나 나지 여기서는 잘 모르겠다. 내가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가.
“풋….”
그런 내 모습이 웃겼는지 멜리나가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러고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입가를 가렸다.
귀여워라.
“멜리나는… 엄청 귀여운 것 같아요.”
“네…?”
“생김새도 그렇지만, 웃으니까 엄청 귀여워지네요.”
아, 빨개졌다.
은근히 엔프리제랑 닮은 것 같은데. 그래서 자꾸 마음이 쓰이나?
“무슨… 저 같은 것은….”
“귀엽다는 소리 별로 못 들었어요? 엄청 들었을 것 같은데.”
“…….”
결국 고개를 푹 숙인다.
아니, 생각해 보니 갈발녹안이잖아? 원래 이런 건 주인공들 속성 아냐? 엑스트라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중요 캐릭터…라기엔 등장이 너무 늦었지.
그냥 예쁜 시녀인 것 같은데.
“아, 맞다.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되나요?”
“뭐든 말씀하세요.”
“이따가 제가 어깨랑 팔이 매우 아플 예정이거든요.”
뜬금없는 말에 멜리나가 고개를 갸웃한다. 뭐랄까. 고양이 같아.
귀엽다.
할 말을 찾는 듯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녹색 눈동자. 하지만 도저히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가늠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긴, 뭐라고 하겠어.
왜 아프실 예정이냐고 하기에도 좀 그럴 거고. 뭔지도 모르면서 대신 해 주겠다고 하기도 그럴 거고.
“그래서 부탁인데… 이따가 저 마사지 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하지만…. 혹여 힘든 일을 하시려는 거라면 제가 대신 해 드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그건 괜찮아요. 제 손으로 꼭 해야 하는 일이니까.”
이 사람이 떡 만드는 방법 같은 걸 알 리도 없고.
차를 마시려고 손을 뻗다가 문득 생각났다. 과자만 먹으면 목 막힐 텐데. 지금 여기에는 찻잔이 하나뿐이다.
원래라면 초대랄까, 여기 앉힌 내가 대접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일단 나는 주인의 애… 크흠, 애인이고 멜리나는 이 저택의 사용인이잖아. 그럼 멜리나를 시켜야 하나?
근데 멜리나를 시킨다고 해도 순순히 할까? 그냥 안 마신다고 하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던 내 머리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멜리나, 저 차가운 물 좀 가져다 줄래요?”
“알겠습니다.”
벌떡 일어나는 그녀의 치맛자락을 재빨리 잡았다. 몸을 돌리려던 그녀가 흠칫 놀라 멈춘다.
“더 시키실 게 있으신가요?”
“네! 가는 김에 찻잔도 하나만 더 가져와 줘요.”
그녀의 눈이 의아한 듯 나와 내 손에 들린 찻잔을 향한다. 하지만 이내 아무 말 없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걸 잊을 뻔했다. 아무래도 앞으로 템버가 없으면 멜리나가 도와줘야 할 것 같으니.
“레이디 리베테 말고 샤페릴이라고 불러요. 그렇게 길게 부르면 귀찮잖아요.”
녹색 눈동자가.
텅 비어 있던 녹색이 무언가로 차올랐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