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04)
많은 이들의 눈총에 지쳤다.
도서관 앞에서 자하와는 헤어지고, 엔프리제와 함께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마차에 타자마자 덥석 엔프리제의 무릎을 차지하고 누웠다.
“괜찮으십니까?”
“지쳤어요….”
엔프리제는 낮은 웃음을 흘리고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그가 손가락 사이에 내 머리카락을 한 움큼 놓고 비빌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다그닥 다그닥 하는, 말의 발굽 소리. 달각덜그럭거리는 마차 소리. 내 머리카락이 사각거리는 소리. 엔프리제의 옷 소매가 나와 스치며 나는 스윽스윽 소리.
짜증으로 곤두섰던 신경이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먼발치에서 샤페릴을 바라보기만 했을 땐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기에 그런 사교 모임을 즐기는 줄 알았습니다.”
그거야… 안에 있는 사람이 바뀌었으니 어쩔 수 없지.
“아니면 저에 대한 평판이나 반응이 당신을 방해하는 걸까요.”
그렇게 말하는 엔프리제의 목소리는 그리 씁쓸해 보이진 않았다. 그저 담담히 사실을 고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게 도리어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예전의 제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의 저는 솔직히 말하면 밖에 나가는 건 딱 질색이에요.”
“그렇습니까?”
“그래도 엔프리제가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언제든 같이 갈 거예요. 그때 말했던 극장이나 유람선도 같이 가면 좋겠어요.”
가장 편한 장소는 물론 내 방이긴 하다. 다만, 엔프리제가 있는 내 방.
그다음으로는 엔프리제는 없지만 플리가 있는 내 방이나 엔프리제가 있는 바깥. 내게 엔프리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아줬으면 좋겠다.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내가 그 불안을 떨쳐 버린 것처럼. 설령 그게 나 자신을 기만하는 거라고 하더라도.
“그런데… 요리책은 왜 갑자기 찾으셨습니까?”
그냥 만지작거리는 걸로는 부족했는지 이번에는 머리를 땋기 시작한다. 하지만 너무 약하게 땋는 탓에 탄탄하게 되지 않고 흐물흐물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살짝 집중하면서 꾹 다문 입이 귀여워서 피식 웃어 버렸다.
“엔프리제한테 맛있는 거 해 주려구요.”
“…네?”
순간 뚝, 하고 손이 멈췄다.
의아한 마음에 옆으로 돌아누워 있던 몸을 돌려 위를 보았다. 엔프리제가 당혹스러움을 애써 감춘 얼굴로 날 내려보고 있었다.
“왜 그래요?”
“네?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당황한 것인지 살짝 삑사리가 난다.
흠. 수상해.
저번에 반응도 이상했었지. 지금의 엔프리제라면 몰라도 그때의 엔프리제치고는 대담하게 나한테 파이를 막 먹여 주기도 했었고.
…어라, 잠깐만.
그러고 보니 내가 못 먹어 본 게 있잖아?
“혹시 맛이 이상했어요?”
“…이상…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이럴 땐 거짓말을 못해서 다행이다.
대체 뭐가 문제였지? 제과제빵은 처음 해 봐서 뭐가 문제였는지 모르겠네. 돌아가면 템버한테 물어봐야겠다.
“정말로 맛있었습니다.”
“뭐가요?”
“파이… 말입니다.”
이게 맞나 싶은지 눈동자가 흔들린다.
귀여워, 진짜. 발을 동동 구르고 싶어질 정도로.
“이번엔 정말 맛있는 거 만들어 줄게요.”
떡은 진짜 자신 있다. 몇 번이나 만들어 봤었고.
심지어 떡볶이에 들어갈 떡이나 떡국 떡도 직접 만들어 본 적 있다. 다만 그 전까지 좀 근력은 키워 놔야겠지. 의외로 그게 힘이 꽤 많이 필요하단 말이지.
“샤페릴이 만들어 주는 건 뭐든 다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거짓말. 아까 흠칫했잖아요.”
“그건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더니 쪽, 하고 가벼운 입맞춤이 이마에 내려앉았다.
다른 이유라니, 뭐지. 그게 궁금해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엔프리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샤페릴이 자꾸 부엌에 들어가는 게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해서 그랬습니다.”
“왜요?”
좋은 거야 이해가 가는데 싫은 건 왜지? 고개를 갸웃하자 엔프리제가 이미 다 풀린 머리카락을 다시 움켜쥐고 땋기 시작했다.
“샤페릴이 절 위해서 무언가를 해 준다는 게 더없이 좋습니다. 즐겁고… 행복합니다. 아마 당신이 주시는 거라면 그게 설령 길가의 잡초라 해도 맛있게 먹을 수 있겠죠.”
“…….”
아니, 그건 칭찬이 아닌데…?
내 눈이 스스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샐쭉해진다. 하지만 내 머리카락만 보느라 표정을 보지 못한 엔프리제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좋은 이유는 그렇게 단순합니다만, 싫은 이유는 조금 복잡합니다. 스스로도 잘 이해가 가진 않지만….”
“말해 줘요. 나는 엔프리제 생각이 알고 싶어요.”
“샤페릴이 고생하는 게 싫습니다. 당신이 그저 방에서 한가로운 한때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행복이 너무 계속되니까 무섭습니다.”
알 것 같다.
아마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가진 자는 가져서 잃을까 두려워하고 못 가진 자는 가지고 싶어 전전긍긍한다.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 역시 여기 처음 왔을 때 이 행복을 빼앗길까 봐 얼마나 두려웠던지.
“그럼 도망 못 가게 꽉 잡고 놓지 마요.”
엔프리제의 손을 찾아 살짝 깍지를 꼈다.
나 혼자 쥐면 그가 뿌리쳤을 때 쉽게 떨어져 나갈 손. 반대로 그가 홀로 날 쥔다 한들 내가 뿌리치면 그 역시 억지로 날 붙들고 있지 못하겠지.
그러니까.
“둘이 같이 꽉 잡고 떨어지지 않으면 분명 괜찮을 거예요.”
쪽, 하고 그의 손등에 입 맞추며 씩 웃었다. 그러자 엔프리제는.
“…정말로, 언제나 당신은….”
그렇게 말하며 우는 듯 웃는 듯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 * *
멜리나의 일과는 생각보다 널널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일단 씻고 복장부터 정돈한다. 그 뒤에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며 사용인들이 수군거리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대부분은 잡소리인 그 이야기들 사이에 혹여 황제가 혹할 만한 정보라도 들어 있을지 누가 알까.
그런 생각에서였지만.
“듣던 대로 오만하고 비뚤어진 사람인 것 같아.”
“나랑은 눈도 제대로 안 맞춰 주던데.”
“레이디 리베테가 있는 방은 함부로 나올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며?”
“그게 감금이지 다른 게 감금이겠어?”
“그런 것치곤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
“바보야. 아무리 레이디 리베테가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의 신병을 구속당한 상황에서 자유롭게 혐오를 표현할 수 있겠어?”
제대로 된 정보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뭐, 사실 멜리나도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블레임 대공은 생각 외로 철저한 남자였다. 일과는 마치 쳇바퀴가 돌듯 일정하게 흘러갔으며 온종일 레이디 리베테의 방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해야 할 일은 확실하게 끝내고 있었다.
그나마 멜리나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중을 들고는 있었지만, 그녀의 손을 빌리는 것 역시 거의 없었다. 두 사람의 세탁이나 식사 준비는 물론, 레이디 리베테의 방은 청소까지도 시녀인 템버가 전담하고 있었다.
멜리나의 손을 빌리고자 부를 때는 레이디 리베테의 방 이외의 장소에서 무언가를 할 때뿐이었다.
하지만 옷도 헤어도 모두 블레임 대공 스스로가 단장하니 할 일이라곤 대부분 곁에서 입어야 할 옷을 든 채 멍하니 서 있는 것뿐이었다.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눈을 날카롭게 빛내는 그를 보고 있으면 묘한 기백마저 느껴졌다. 뭐랄까. 마치 단 하나의 흠도 잡히지 않겠다는 듯.
그런 그가 유일하게 느슨해지는 시간은 레이디 리베테와 함께 있을 때뿐이었다.
딱 한 번 본 그날의 두 사람이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었다. 분명 황제가 봤다간 블레임 대공의 목을 날리려 덤벼들 그 광경.
“뭣도 모르는 것들이.”
멜리나치고는 드물게도 불만 섞인 목소리를 입 밖에 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그녀의 귀에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기에 그대로 사르르 허공 속에 녹아들었다.
아침을 먹고 나면 곧바로 서재로 향한다. 여기에 없으면 레이디 리베테의 방에 있다는 건데, 그 경우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는 대충 예상이 가기도 하고 그녀의 방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서재를 정리하며 그를 기다린다.
드물게 한 번씩, 한낮까지도 그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런 날엔 그가 서재에 나타나지 않았던 적이 많았기에 서재의 책을 보거나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을 먹으러 가곤 했다. 물론 블레임 대공이 허가를 내려 주었기에 책에 손을 대는 것이었다.
블레임 대공은 난잡하고 더러운 사람이라는 평가와 달리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듯했다. 보통 귀족들이 보는 도서뿐만 아니라 실용 서적이나 잡학에 대한 책도 꽤 많이 가지고 있었다. 멜리나는 이 서재의 책을 둘러 보며 처음으로 자신이 도예에 흥미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흔히 쓰는 접시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과정들이 꽤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 일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온다면 도예를 배우고 싶었지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이곳에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끝나면, 이 느긋한 일상도 끝난다. 멜리나는 다시 그 폭군의 곁으로 돌아가야만 하겠지.
그리고 그때는 아마 레이디 리베테도 함께일 터였다.
황제의 시녀가 되기 전,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의 그녀는 어린 날의 그녀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눈이 부시고 여전히 자유로웠다.
그런 그녀가 황제의 곁에 가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자유란 달콤한 만큼 유지하기도 어렵고 쉬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최소한 지금 블레임 대공의 곁에서 보여 주는 그런 미소는 더는 볼 수 없게 되겠지.
그리고 블레임 대공에게서도.
햇빛의 냄새가 가득한 서재의 소파에 앉아 멜리나는 가만히 천장을 올려 보았다. 이 공간 역시 절망으로 가득 차게 되는 거겠지.
어쩌면 주인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건….
최근, 자주 맛보는 아픔이 다시 시작됐다. 무언가 뾰족한 것으로 심장을 쿡쿡 찔러 대는 듯한.
멜리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