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01)
끄응.
“괜찮으십니까?”
“괜…, 찮… 나?”
이런, 괜찮다는 말이 도저히 안 나온다. 앓는 소리로 애매한 답을 하자 엔프리제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죄송합니다….”
“으으, 음…. 아니에요. 제가 졸라서 그런 건데.”
끽해야 처음 했던 날만큼 아프지 않을까 했는데, 설마 그 위가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어제는 그…, 흠흠. 여러 근육을 쓰는 바람에 진짜 온몸이 아프다.
엎드려 있는 내 허리를 꾹꾹 눌러주는 손길이 분주하다.
“읏…!”
“너무 세면 말씀하세요.”
“으으…, 네….”
엔프리제는 의외로 힘 조절을 잘 못한다. 너무 약해서 좀 세게 해 달라고 하면 으스러뜨릴 듯이 주무르고, 너무 아파서 살살 해 달라고 하면 거의 티도 안 나게 주무른다.
이런 걸 처음 해 보는 게 팍팍 티가 나서 좋긴 한데…. 당장의 통증이 나아질 기미가 없어 곤란하다.
“윽!”
“…….”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엔프리제가 손을 멈춘다. 물끄러미 나를 보더니 낮은 한숨을 내쉬고는 내 위에서 물러났다.
나한테 체중을 싣고 있지는 않았지만, 위에서 느껴지던 기척의 무게감이 사라지자 괜히 허전해졌다.
“왜요…?”
“너무 세게 마사지해도 좋지 않다고 합니다. 뭔가 다른 방법을….”
“으음, 두면 낫겠죠, 뭐…?”
응?
엔프리제는 침대 옆 바닥에 앉아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 그렇다면 허리에서 느껴지는 이 무게감은 무엇인가.
가볍긴 한데 묘하게 묵직하고 따스한… 데?
“엔프리제?”
“네?”
“혹시 제 허리에 플리가 올라갔나요…?”
내 얼굴만 안쓰럽게 보던 엔프리제가 놀라서 시선을 돌린다. 물끄러미 내 허리께를 보던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쩐지….”
뭔가가 조물조물 움직이는 느낌이 난다. 설마 제 딴에는 마사지를 해 준다고 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100g이 갓 넘는 플리의 꾹꾹이로 나아지기에는 내 허리가 너무 혹사당했다.
“으으, 고마워…, 플리….”
“삐-!”
그래도 그 마음이 고마워서 감사 인사를 했더니 당찬 대답이 돌아왔다. 쟤, 말하는 기능은 없어도 이해하는 기능은 확실히 있는 거 같다.
아니지, 족제비는 원래 영리한 동물이라니까 우리 플리가 그중에서도 특히 영리한 걸지도 모르지. 귀엽지, 듬직하지, 사랑스럽지, 영리하지.
우리 플리 같은 족제비가 또 어딨겠어?
“찜질을 할 수 있는 게 있는지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엔프리제가 나간 후에도 플리는 꾹꾹이를 멈추지 않았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간지럽기까지 한 그 감촉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마음이 편해서일까. 아니면 밤에 거의 못 잔 탓일까.
이내 사르르 눈이 감기며 잠이 들고야 말았다.
* * *
“템버는 어디 갔습니까?”
샤페릴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엔프리제는 템버를 찾았다. 믿을 사람이 그녀밖에 없기도 했고, 잡학다식한 그녀라면 무언가 방법을 알 것 같아서였기도 했다.
하지만 거의 항상 모습을 보이는 부엌은 물론 저택 어디에서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초조한 엔프리제의 눈에 마침 최근 그의 시중을 자주 드는 시녀가 보였다.
“잠시 장을 보러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하필 이런 때에.
하긴, 생각해 보면 그럴 시간이긴 했다.
다른 하녀나 시종을 전혀 믿지 못하는 엔프리제였기에, 템버는 다른 모든 일에서 제하는 대신 샤페릴에 관한 모든 일을 전담하게 되었다. 거기엔 식재료를 사는 일도 물론 포함되어 있었다.
매일 새벽 신선한 재료를 사 와서 요리를 하는 그녀이기에 지금은 한참 시장에 있을 시간이긴 했다.
“곤란한 일이 있으신가요?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엔프리제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싸늘하게 굳었다.
샤페릴에 관련된 건 황실의 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었다. 맡기고 싶지도 않았다. 그 정도로 믿음이 없었다.
하지만 템버가 돌아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터였다. 그동안 샤페릴이 앓을 걸 생각하면….
찜질을 할 수 있는 수건을 부탁하는 정도라면… 자신이 옆에서 감시하고 있는다면 괜찮겠지.
“혹시 온찜질을 할 수 있는 수건 같은 걸 만들어 줄 수 있겠습니까?”
“온찜질…? 어디가 불편하신 거라면 마사지를 해 드릴까요?”
마사지라는 말에 엔프리제가 꾹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금방 식어 버릴 수건보다야 마사지가 낫긴 하겠지만…. 이 사람을 믿고 샤페릴의 방에 들여도 괜찮을까?
엔프리제는 시녀의 녹색 눈을 바라보았다. 적대감은 물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눈. 어딘지 엘마레와 닮은 점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샤페릴로 인해 무언가가 바뀐 걸까.
“…그럼 잠시 따라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시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번에도 알았다는 듯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을 뿐.
다만 그녀를 이끌고 샤페릴의 방문 앞에 서자 조금 놀란 듯 보이긴 했다.
“샤페릴, 들어가겠습니다.”
엔프리제에게는 이 방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가 있다. 그래서 결계를 푸는 방법을 굳이 보여 주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문손잡이를 이리저리 돌리며 무언가를 하는 시늉을 했다.
그 묘한 손놀림을 시녀는 보고 있을까, 아닐까.
이윽고 열린 문 안에서 샤페릴은….
“…….”
“…잠드셨나 보군요.”
엔프리제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낯선 이의 기척이 느껴지는 데도 잠들어 있을 수 있다는 건.
그 정도로 샤페릴이 지쳐 있다는 걸까. 아니면 엔프리제가 지켜 줄 거라 믿고 있는 걸까. 그도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인 걸까.
어쩌면 셋 다인지도 모른다.
엔프리제의 입가에 연한 미소가 스몄다. 마치 조건 반사처럼, 샤페릴이 시야에 들어오거나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그도 모르게 짓는 부드러운 미소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녀가, 처음으로 그에게 옅게 웃어 보였다.
“전하께서는… 아가씨를 정말 많이 아끼고 계시는군요.”
“…그렇게 보입니까?”
“아낀다는 말은 적절치 않겠네요. 아가씨를 말 그대로 혹애한다고 해야 옳을까요. 전하의 표정만 봐도 지금 아가씨를 생각하고 계시구나, 하는 게 보일 정도입니다.”
혹애라.
그럴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늘 그런 거 아닌가 싶다가도, 주변을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여러 사람과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는 걸까. 자신은 샤페릴 하나만으로도 족하고, 샤페릴 하나만을 원했다.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 따위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겠지만, 설령 존재한다고 해도 의미가 없었다.
아니, 샤페릴의 말대로다. 그녀가 설령 추녀였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추 따위 엔프리제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녀의 한마디가 시작이었고 그녀의 모든 것이 그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
샤페릴만이 그를 구원할 수 있었다.
그게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그렇습니까.”
잠든 그녀에게 다가간 엔프리제가 슥, 뺨 위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그 얼굴에 스민 미소가 얼마나 행복으로 가득 차 있는지 그는 알고 있을까.
샤페릴에게 닿을 때마다 치닫는 충동조차 죽여 버릴 정도로 그는….
“…….”
시녀, 멜리나는 이 저택에 와서부터 계속 그녀를 괴롭히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았다.
엔프리제는 소문대로의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그는 소문대로의 사람을 연기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진실된 모습은 분명 저것이겠지.
샤페릴을 떠올릴 때마다 충만한 미소가 떠오른다. 샤페릴과 닿을 때마다 저렇게 행복해한다. 샤페릴을 바라보기만 해도 주변 사람까지 가슴이 설렐 정도로 아련한 얼굴을 한다.
마음이 굳어 버린 그녀조차 흔들릴 정도로.
“…황제는 당신께서 되시는 게 가장 좋았을지도 모르겠군요.”
만약, 샤페릴에게 온전히 쏟아붓고 있는 저 사랑이 나라로 향했다면 어떻게 될까. 분명 지금보다는 나았겠지.
황제는, 지금 술독에 빠져서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었다. 심심하면 방 안을 때려 부수고 숲에 들어가 칼을 휘둘러댔다. 겨우 제 손에 넣고 싶은 사람 하나 넣지 못했다고.
곁에서 지켜본 엔프리제는….
만약 엔프리제가 지금 황제의 상황이었더라면, 그는 괴로움을 다른 쪽으로 쏟아부었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최소한 샤페릴의 의사에 반해 자신이 가지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소유하려 들지 않을 것은 명백했다.
그래서 샤페릴은 황제가 아니라 대공을 고른 것이겠지.
그 비극의 날, 샤페릴을 구해 낸 게 설령 황제라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이다. 기억을 잃은 그녀가 처음 만난 것이 황제였다고 해도 마찬가지겠지.
“샤페릴, 미안하지만 잠깐 일어나요.”
“으…, 응…?”
“마사지할 줄 아는 시녀가 있어서 불러왔어요.”
“으응…, 알아…ㅆ어요.”
무어라 웅얼거리는 그녀는 몹시도 귀여웠다. 엔프리제는 저도 모르게 낮은 웃음을 흘리더니 그녀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깨우고 싶은 걸까. 이대로 자게 두고 싶은 걸까. 알 수 없는 다정한 손놀림이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쪽이 부끄러워진다. 어린아이들의 유치한 사랑 이야기 같으면서도 보아선 안 될 성스러운 무언가 같기도 했다.
어리석고 불쌍한 황제 폐하.
당신이 이들 사이에 끼어들 틈 따위는 전혀 없는데도 그 사실에 홀로 괴로워하다니.
멜리나는,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일이라면 악행이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반대로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면 그게 설령 숭고하고 위대한 일이라 할지라도 방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샤페릴, 일어나야 한다니까요.”
“5분… 아니… 1분만….”
자신은 이 자리에 없는 것처럼 달콤한 속삭임을 나누는 두 연인을 보며 그녀는….
“…….”
멜리나의 손에 제 가슴께로 향했다. 아까부터 무언가가 쿡쿡 제 심장을 찔러대는 것같이 아팠다.
그건… 그녀가 처음 느껴 보는 아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