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100)
“전보다 많이 느셨네요.”
부드러운 웃음에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자하에게 그림을 배운 지가 꽤 되었는데 사실 거의 제자리걸음에 가깝다. 최근에는 수업이라기보다는 거의 수다회에 가까운 느낌이고.
오늘도 가볍게 조언만 해 주고는 에그 타르트와 차로 티 타임을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수도에 맛있는 과자점이 생겼다고 하더군요.”
“오오…? 어떤 걸 파는데요?”
“먼 외국의 과자도 있다고 합니다. 과일에 설탕을 덧입힌 사탕이나, 설탕으로 만든 구름 같은 과자도 있다고 하더군요. 보통 달콤한 다과들과 달리 짭짤한 맛의 다과도 있다고 합니다.”
오오, 맛있겠다.
내 최애 과자인 기다란 감자 과자는 없겠지만, 그래도 짭짤한 과자는 오랜만에 먹고 싶긴 하다. 사다 달라고 할까? 근데 뭐가 있는 줄 알고.
엔프리제한테 사다 달라고 하면 가게 있는 건 다 쓸어 올 것 같은데.
“다음에 올 때 몇 가지 사 올까요? 샤페릴한테는 언제나 맛있는 타르트를 대접받고 있으니.”
“정말요?”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요.”
엄밀히 말하면 타르트는 내가 주는 게 아니지만. 템버가 만든 거지만, 그래도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지!
“그럼 감사히 받을게요.”
“어떤 걸 좋아하십니까?”
“자하의 입에 맛있었던 거면 다 좋아요. 다른 분야에서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걸 싫어하지만, 먹는 건 별개라.”
“그렇습니까? 다른 분야에서도 충분히 모험심을 발휘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요?”
“그림도 전혀 그려 보지 않으신 게 보이는데 도전하셨잖아요.”
그거야, 밖에 안 나가고 집안에서 할 수 있는 걸 생각하다 보니 그런 거지. 그리고 사실대로 말하면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물감을 만드는 게 더 즐겁다.
원래 유화는 물감을 만들어서 뒤섞어서 새로운 색을 만드는데, 나는 물감을 만드는 과정에서 여러 안료를 뒤섞어 색을 만드는 것에 도전 중이다. 문제는 안료가 뒤섞이면서 하나의 안료만 썼을 때랑 오일의 비율이 달라진다는 데 있다.
만들면서 기록은 하고 있지만….
“그림 실력은… 여전하시지만, 물감을 만드는 솜씨는 정말 많이 느셨습니다.”
아, 그쪽이었어?
어쩐지. 별로 그림이 늘질 않았는데 왜 칭찬해 주나 했네.
“그림 실력이 늘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으음. 그림이 빨리 느는 데 가장 좋은 방법에는 애정을 가진 대상을 그리는 것도 있습니다. 플리나… 전하를 그려 보시는 건 어떨까요?”
“엑.”
나도 모르게 입에 머금고 있던 홍차를 내뱉으며 요상한 소리를 냈다. 이 똥손으로 엔프리제를 그리는 건 무리지.
무린데.
확실히 그리고 싶긴 하다.
가만히 앉아서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만 바라보는 엔프리제…. 그걸 슥슥 하고 멋진 손놀림으로 그려서 보여 주었을 때 그림이 정말 잘 나오면 엔프리제 역시 감탄할 텐데.
“…으으, 생각해 볼게요.”
내 상상 속의 엔프리제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 * *
오랜만에 무도회가 없는 건지 엔프리제가 내 방에서 나가질 않는다. 요즘 나가는 일이 잦아진 만큼, 저택에 있을 때는 거의 날 끌어안고 꿈쩍도 하지 않게 되었다.
딱히 야시시한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이미 몇 번 그런 전적이 있었던 만큼 등 뒤의 온기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된다. 상대는 그럴 생각도 없는 것 같은데.
“어제는 자하랑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아. 최근 수도에 맛있는 과자점이 생겼대요. 다음에 올 때 조금 사다 준대요.”
“제게 말씀해 주셨으면 사다 드렸을 텐데.”
“엔프리제는 거기 있는 거 다 쓸어 올 거잖아요. 그 정도로는 못 먹어요.”
수십 번도 더 그린 사과.
하지만 여전히 일그러져 있는 사과 위로 붓을 놀리자 심통이 난 건지 엔프리제의 손이 슬금슬금 배 위를 쓰다듬는다.
“방해하면 안 돼요.”
“방해 안 합니다.”
“자꾸 만지면 신경 쓰이잖아요.”
“신경 써 주시라고 그러는 겁니다.”
이제는 숨길 생각도 안 하네. 그것도 귀엽긴 하지만.
“사과가 그리 좋으십니까?”
“아니요.”
“지금까지 볼 때마다 사과를 그리는 것 같던데.”
그건 첫 과제에서 더는 진행이 안 돼서 그런거고! 누구 놀리냐!
부루퉁해져서는 대답하지 않자 다시 배 위의 손이 슬금슬금 위로 움직인다.
“하지 말라니까요.”
“저도… 샤페릴이 그려 줬으면 좋겠습니다.”
뭐지, 자하랑 이야기한 건가?
나도 모르게 손에 든 붓을 놓고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버려진 강아지 같은 얼굴로 나를 들여다보는 얼굴은 아래에서 슬금거리는 손과 꽤 대조적이다.
“저 그림 잘 못 그리는데요?”
“잘 그리십니다.”
“그린 거 다 봤으면서.”
“봤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도요? 동그라미도 하나 제대로 못 그리는데.”
“제 눈에는 예쁘기만 합니다.”
배 위를 어른거리던 손이 꽉, 허리를 잡아 끌어안는다. 아무리 봐도 이건 그려 줬으면 한다기보다….
“…흠.”
그의 손을 잡아서 떼어 내려 하자 드물게도 놓아 주질 않는다. 하지만 나 역시 포기하지 않는다.
잠시간의 힘겨루기 끝에 결국 엔프리제가 내 허리를 놓아 주었다.
그의 위에서 일어나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본다. 엔프리제는 묘하게 침울한 얼굴로 나를 올려 보았다.
하여간.
“그렇게 쓸쓸해요?”
“네.”
“제가 엔프리제만 봤으면 좋겠어요?”
“네.”
저랑 있으면서도 그림만 그리는 내가 불만스러운 게 틀림없다. 이 독점욕의 화신 같으니.
“얼른 그림이 늘어야 엔프리제를 그려 주죠.”
“전 지금도 좋습니다.”
“그럼 그림 그리지 말고 엔프리제만 볼까요?”
“…….”
어라, 예상외로 대답이 늦다. 고개를 갸웃하자, 엔프리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샤페릴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시니까….”
아하.
그래서 그려 달라는 소리를 하는 거구나. 그럼 내가 하고 싶은 걸 방해하지 않으면서 내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으니까.
귀엽긴.
“있잖아요, 엔프리제.”
조금 전까지 등을 향한 채 앉아 있던 그의 무릎에,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앉는다. 엔프리제가 흠칫 상체를 뒤로 물리는 게 느껴졌다.
그런 그에게 더 얼굴을 들이밀며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엔프리제는 제가 본 그 어떤 것보다 예쁘고 잘생겼어요.”
“…네.”
“그러니까 엔프리제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 놓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긴 해요. 근데 문제는.”
흘끗, 조금 전까지 그리고 있던 사과에 시선을 주었다. 색감이야 예전보다 좀 나아졌다지만 형태는 여전히 매끄러운 동그라미가 아니라 일그러져 있다. 그것도 매우 보기 싫게.
“제 손이 똥손이라는 거예요.”
“똥손…?”
“그 정도로 손재주가 나쁘다는 뜻이에요. 아무튼. 그래서 전 그림 연습을 열심히 하기로 했어요. 엔프리제랑… 플리를 그려 주려고.”
“플리도… 입니까?”
또, 또.
은근히 플리한테 라이벌 의식이 있단 말이야. 셰리한테는 안 그러면서.
“엔프리제가 제일이에요.”
“네…?”
너무 성급하게 내뱉은 말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그의 뺨을 꽉 잡아 고정한 채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내 마음속에서 엔프리제가 제일 우선순위가 높다는 뜻이에요.”
쪽, 하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파르르 떨리는 검은색의 속눈썹도, 그 속에서 흔들림 없이 날 바라보는 금색 눈동자도.
“그러니까 괜히 다른 거에 질투하지 마요. 알았죠?”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더군요.”
흠.
믿음을 못 준 건 아닐 테니 이건 분명 엔프리제의 성격이겠지. 나도 그랬지만 사람의 성격이라는 건 어지간해선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나도 요즘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있긴 해서.
…사실 좀 전에 뽀뽀했을 때부터 엉덩이 밑이 엄청 신경 쓰인다. 예전엔 이게 뭔지 모르기도 했고, 여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는데….
이제는 여기 뭐가 있는지 알다 보니, 흠흠.
“…….”
“…….”
엔프리제도 내가 눈치챈 걸 알아챘는지 얼굴이 빨개진다. 나름대로 심각한 이야기 중이었는데 이런 반응을 했다는 게 창피하겠지. 엔프리제는 의외로 고지식하고 야한 것에 대해 보수적인 편이라서.
“있잖아요, 엔프리제.”
“…죄송합니다. 그, 그쪽도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슬쩍 날 옆으로 밀어내려 한다. 조금 전까지 정색하고 그런 거 안 한다고 해 놓고 아래는 이렇게 되어 있으니 민망할 법도 하지.
일부러 그 위에서 슬쩍 몸을 뒤틀었다.
“잠…, 샤페릴.”
“왜요?”
“그….”
가끔 커뮤니티나 sns에 취향 개조 당했다는 글들이 보이곤 했다. 작가님의 필력이나 캐릭터들의 매력이 너무 쩌는 나머지 원래 좋아하지 않는 소재나 캐릭터 설정임에도 빠지게 되었다고.
오만하고 거만한 남자가 처음에는 거들먹거리다가 나중에 발닦개가 되는 게 남주 취향이었던 나 역시 취향 개조 당했나 보다. 왜 저 풋풋한 반응이 귀엽기만 한 게 아닌지.
발갛게 물든 목선도 먹음직스럽고, 창피함으로 가득한 얼굴도 색기 가득해 보이고.
“그?”
“읏….”
슬쩍 허리를 다시 움직였다. 참기 어려운지 날 꽉 끌어안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엔프리제가 뜨거운 한숨을 흘렸다.
으음.
도저히 안 되겠다.
어차피 엔프리제에게 부작용의 위험이 없다는 것도 알았겠다! 내 체력은… 까짓 오늘 하루, 종일 뻗어 있지 뭐!
“엔프리제.”
“…네.”
“오늘 나가야 돼요?”
내가 왜 이런 걸 묻는지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엔프리제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따로 초대장 온 것도 없고 황궁에서의 부름도 없었으니 저택에만 있을 겁니다.”
“흐음.”
슬쩍 엔프리제의 셔츠 단추에 손을 가져갔다. 작은 단추지만 풀기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단정하던 옷차림 사이로 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샤페릴…?”
“오늘 제 방에서 나가야 할 일 있어요?”
언제 만져도 부드럽단 말이야.
근육이 단단하게 붙어 있어서 당연히 딱딱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피부 결이 좋아서 그런지 손이 사르르 녹는 것 같다. 근육 때문에 살짝 부푼 가슴을 조물거리며 묻자 엔프리제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요.”
흐음, 그렇다면야.
나는 그의 귓가에 대고 살짝 속삭였다.
“그럼… 제가 엔프리제한테만 집중하게 해 줄래요?”
엉덩이 아래에 깔린 것이 꿈틀, 하고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걱정했다.
설마 내일까지 못 움직이게 되는 건 아니겠지…,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