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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99화 (99/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99)

생각보다는 평온한 나날이 지나가고 있다.

처음에는 잔뜩 긴장해서 밖의 동태를 살피기도 하고 낯선 발소리가 들리면 흠칫 놀라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플리, 손.”

“삐?”

요즘 엔프리제가 방에 있는 시간이 조금 줄었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대부분 그림을 그리거나 플리에게 새로운 기술을 가르쳐 주었으나.

“플리, 그건 손이 아니라 머리잖아.”

“삐!”

사실 이것도 머리를 준 게 아니라 그냥 목 밑을 긁어 달라는 것 같은데.

내민 손 위에 얹어진 작은 머리는 거의 무게감이 없다. 슬슬 손끝만 움직여 목 아래를 긁어 주자 플리의 눈이 사르르 감긴다. 쬐끄만 까만 콩이 사르른 녹아드는 모습이 꽤나 귀엽다.

엔프리제도 그렇고 플리도 그렇고 왜 봐도 봐도 질리긴커녕 더 귀여워지기만 하지.

“이제 됐지?”

슬쩍 손을 빼내려 하자 앞발로 턱, 내 손가락을 붙잡는다. 조금 전까지 꼭 감고 있던 까만 콩이 말똥말똥 나를 바라본다.

아니, 사실 콩보다는 깨라는 말이 맞지 않나. 하찮고 조그만 눈 같으니.

“왜? 더 해 줘?”

“삐!”

귀여워.

기왕 이런저런 마법을 부여할 거라면 의사소통이 되는 마법도 걸어 주지. 아, 예전에도 이런 생각 했던가?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면 너는 나한테 어떤 이야기들을 할까?”

“삐-! 삐삐-!”

은근히 수다쟁이라서 더 궁금하다.

대부분은 ‘야, 등 좀 긁어 봐!’, ‘어휴, 시원해.’, ‘오늘은 닭튀김 안 주냐!’ 같은 소리 아닐까. 저 귀여운 목소리로 그런 이야기들을 하면 진짜 귀여울 것 같긴 하다.

“그래도 지금이 더 좋은 것 같아.”

이렇게 상상할 수 있는 즐거움도 있고. 모르긴 몰라도 그런 기능이 하나 생길 때마다 플리의 몸에도 뭔가 부담이 가지 않을까. 뭐든 대가 없는 힘은 없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놀라운 일입니다.

엔프리제에게 체질에 대해 알아보는 게 어떻냐고 물어보기 무섭게 검사를 받았다. 그 결과가 어제 나왔다.

-지금까지 받아들인 마력의 양이 상당합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부작용이 없으셨습니까?

역시나.

열을 낸 게 몇 번이던가. 그중 한 번은 꽤 심하게 그랬었고.

열이 내리고 나서도… 크흠, 꽤 했고.

아무리 엔프리제의 마력이… 예를 들어 코딱지만 하다고 하더라도 슬슬 뭔가 부작용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시점이었다.

-전혀 없었습니다.

-속이 좋지 않거나 머리가 어지러운 등의 가벼운 부작용도 전혀 없으셨습니까?

-전혀…. 도리어 최근에는 예전에 비해 두통도 줄어들었습니다.

-…저도 처음 보는 케이스입니다만…, 아무래도 전하의 체질이 남들과 달라 타인의 마력을 받아들이실 수 있든지, 아니면 레이디 리베테의 체질이 이전과는 달라 타인에게 마력을 부작용 없이 넘겨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쪽일지 궁금하긴 하지만, 그걸 알아보려면 점막 접촉을 해야 한다. 내가 하는 거야 엔프리제가 무지하게 싫어할 테고, 엔프리제가 해 보는 건 내가 싫다.

슬쩍 엔프리제를 보며 고개를 내젓자, 그가 엷게 웃었다.

-그에 대한 실험은, 마력을 넘겨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고 나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알려진 방법은 저희 둘 다 거부감이 있으니.

-알겠습니다, 전하.

의외로 마탑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런 게 중요한 거 아닌가? 만약 내 마력이 누구에게나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면 눈에서 불이 나올 정도로 탐날 텐데.

만약 내 마력이 누구에게나 줄 수 있는 거라면, 날 어, 그, 음, 피폐물 남주들이 할 법한 방식으로 거시기하든지 여튼 공포에 빠뜨린 후 억지로 마력을 전달하게 만들면 거의 무한대의 마력 공급기가 되는 거잖아. 실제로 엔프리제도 그런 식으로 샤페릴이 험한 꼴을 당할까 봐 전전긍긍했던 거고.

“다들 너 같으면 좋을 텐데.”

쓸데없는 탐색이나 궁리는 내 취향이 아니다. 애초에 능력도 안 된다. 머리가 그렇게 좋았으면 이런 상황이 오지도 않았겠지.

이럴 땐 나도 다른 빙의물 여주인공들처럼 능력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든다. 머리가 좋아서 정치적으로 뭘 하든, 힘이 있어서 힘찍눌을 하든 뭐든 했으면 좋겠는데.

인간적으로 너무한 거 아니냐. 빙의 특전이 아무것도 없다는 게.

하긴, 이 세계에 빙의시켜 준 게… 엔프리제 곁에 빙의시켜 준 게 가장 큰 특전이긴 하겠지만.

“하긴, 다들 거짓말을 못하는 세계도 곤란하겠네.”

나부터 티가 날 거 아냐.

절대로 들켜선 안 될 거짓말을 하고 있는 나에게는 매우 곤란한 세상이 되겠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냥 말하는 게 좋았으려나.

그랬으면 엔프리제는, 내가 먹고살 준비 정도는 해 줬을 텐데.

다른 거짓말은 한 게 없다. 딱 하나만 거짓말을 했을 뿐인데 그게 이토록이나 큰 가시가 되어 가슴에 남아 있다. 그건 이미 박혀서 새살에 덮여 사라졌다고 생각할 때쯤 다시 빼꼼 고개를 내밀어 가슴을 찔러 댄다.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래서 후회 남주 같은 게 생기는 건가.

하.

“삐?”

살살 턱 아래를 쓸던 손가락이 멈추자 플리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내가 좀처럼 움직이지 않자 안달이 났는지.

“…풋.”

플리가 눈을 꼭 감은 채 슬금슬금 제 턱을 움직인다. 내가 움직이는 것처럼 앞뒤로.

귀여워 가지곤.

“내가 너 덕분에 웃는다.”

“삐!”

살살 손가락을 움직이자 다시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움직임을 멈춘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플리와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 * *

최근 황제가 엔프리제를 불러내는 일이 많아졌다.

정확히는 황실 주최의 무도회가 자주 열리게 되었고, 그때마다 엔프리제에게 초대장을 보낸다고 해야 할까. 거의 주에 한 번은 날아오는 초대장 때문에 엔프리제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거절할 수는 없다.

엔프리제는, 사실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어야 할 사람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황위 계승권에 가장 가까운 건 원래 그여야만 했으니까. 스스로 그 자리를 내려놓고 대공위를 받았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황실 주최의 행사는 그게 무엇이든 거절할 수 없다. 거절하는 순간 황실에 반기를 드는 거라고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황실의 사람으로 가득 찬 저택에 샤페릴을 혼자 두고 나가는 건, 설령 결계가 있다고 해도 그리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가까이 오면 확 키스해 버릴 거예요!

…하긴. 마냥 자신이 지켜 줘야만 하는 존재는 아니긴 했다. 샤페릴이라는 사람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이 난다. 차갑게 시리던 마음도 머리도 따스하게 채워진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스민다. 시야에 들어오기만 해도 가슴이 뛴다. 함께 있으면 한없이 편안하고, 또 한없는 지배욕과 정복욕에 시달리게 되기도 했다.

꾸물꾸물 고개를 치켜드는 그 욕망을 억누를 수 있는 건 그녀와 지내는 이 시간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서겠지.

샤페릴은, 엔프리제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후….”

“브로치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다른 것으로 가져올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심호흡한 것뿐인데 한숨처럼 들린 걸까. 갈색 머리카락의 시녀가 정중하게 묻자, 엔프리제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에 새로 온 사용인들은 대부분 엔프리제에게 정중했다. 다만 그 눈빛에서는 언제나의 적개심이나 경멸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이 시녀만큼은 어딘가 달랐다. 딱히 호의적인 건 아니었지만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그래서일까. 엔프리제는 저도 모르게 이 시녀를 찾는 일이 많아졌다.

“오늘은 귀가가 늦어질 것 같으니 템버에게 그리 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달리 이야기하실 건 없으십니까?”

달리 이야기할 것.

엔프리제는 엷게 웃으며 말했다.

“마부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시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녀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나간 후에도 엔프리제는 잠시 더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무도회에 가는 이상 의상은 어느 정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허름하게 나가면, 그 나름대로 또 입방아에 오를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다고 또 너무 화려하게 나갈 수도 없었다. 그 중간을 취하는 것이 몹시도 어렵다고 늘 생각했다.

-엔프리제, 그거 알아요?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말. 엔프리제는 어차피 잘생겨서 거지같이 입어도 무도회에서 제일 눈에 띄고 반짝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깔끔하게만 입고 가요.

무도회에 갈 옷이라며 보여 주러 갔을 때, 샤페릴은 어딘지 불평 가득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안 어울립니까, 오늘의 옷은?

그러자 샤페릴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제가 방금 뭐랬어요? 거지처럼 입어도 잘 어울리고 예쁘다니까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셔서…. 어울리지 않나 싶었습니다.

-반대잖아요! 진짜!

둔해 터져선! 이라는 얼굴을 하며 엔프리제에게 다가온 샤페릴이 폭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가만히 그 등을 끌어안자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너무 잘 차려입어서 화나요.

-왜요…?

-거지 옷을 입어도 잘생긴 남자가 이렇게 잘 꾸미고 나가면 어떻게 되겠어요? 여자들 마음에 불을 지를 거 아니에요.

-절 그렇게 봐 주는 건 샤페릴뿐입니다.

진심이었다.

지금까지 누군가가 그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낸 것도, 잘생겼다느니 멋있다느니 예쁘다느니 한 것도 처음이었다.

심지어 귀엽다니.

엔프리제가 뭘 하든, 뭔가 하지 않든 샤페릴은 늘 그를 귀엽다고 했다. 다른 이가 말했으면 아마도 모욕적이었을 그 말이 왜 이리도 달콤하고 설레는지.

“샤페릴….”

그 말이 너무 좋아서 무도회 전에는 무조건 샤페릴 방에 들리는 것이 일종의 규칙처럼 되었다.

“이렇게 부족하고 모자란 나를 믿어 주는 당신을….”

어떻게든 지켜 내고 싶어.

엔프리제는, 살짝 삐뚤어진 옷깃을 다잡으며 미소 지었다. 그녀가 내뱉을 칭찬을 예상해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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