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98)
엔프리제를 괴롭히던 이들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는 또 다른 황제의 사람들로 채워졌다. 생김새는 다를지 몰라도 그 눈빛은 그리 다르지 않다.
누군가는 도살장에 끌려오는 것처럼 하기 싫는 눈치였고, 누군가는 이 기회를 붙잡아 제 처지를 더 낫게 만들겠다는 희망으로 눈을 반짝였다. 누군가는 저택을 향해 혐오의 시선을 던졌고, 누군가는 비아냥의 시선을 던졌다.
창문을 통해 그들을 바라보던 내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생김새는 귀엽게 생겼는데 눈동자는 서늘하다. 거기엔 그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마치 엘마레를 보고 있는 느낌이다.
“신경 쓰이십니까?”
원래라면 새로 들어오는 사용인들을 맞아들여야 했을 엔프리제였지만, 내가 영 침착하지 못하는 걸 보고 내 곁에 있겠노라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창밖을 보는 채로 대답했다.
“조금요.”
“…그리 위로는 안 되겠지만, 바르카는 그리 지략에 뛰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건 이미 알고 있다.
제 표정 하나 숨기지 못하는 남자가 뭐 그리 천재적인 지략을 꾸밀까. 게다가 뽕빨물 엑스트라 아닌가. 어느 작가도 뽕빨물에 그렇게 고도의 심리전을 집어넣지 않는다.
다만, 그래서 오히려 겁이 나기도 한다.
제 세력 하나 없는 엔프리제를 두려워해 황궁에서 지은 저택에 황궁에서 내려 준 사람들을 채워 둔 겁쟁이. 그런 겁쟁이에게 세상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력과 힘이 주어져 있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엔프리제는 알고 있을까.
그 남자가 아직 나를 강제로 데려가지 않는 건 알량하게 남아 있는 자존심 때문이다. 엔프리제는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 자존심은 얇디얇은 연의 실과도 같아서 언제 끊어질지 모른다.
그게 두려워서 일부러 나한테 정떨어지게 만들려고 했던 건데.
이게 뭔가 사건의 시초가 아닐까. 그런 두려움이 든다.
“엔프리제.”
“네.”
“부탁이 있는데요.”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건 나도 안다. 소설이나 영화 같은 데서 소위 복선 깐다고 하는 대사들. 그런데도 굳이 말하는 이유는.
“엔프리제의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제가 아니라 엔프리제로 둬 줘요.”
불안함을 조금이라도 잠재우고 싶기 때문이었다.
살아 있으면 뭐든 된다. 나는 그걸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지옥 같아도 살아 있으면 결국 행복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라고.
절대 만날 리 없으리라 생각했던 운명 같은 사람을, 거짓말 같은 기적을 거쳐 만날 수도 있는 거니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엔프리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모르는 척하는 거라기엔 표정이 진지하다.
나는 낮은 한숨을 흘리고는 창가에서 떨어졌다.
“문제를 하나 내 볼게요. 진지하게 대답해 줘요.”
“네.”
“갑자기 마왕이 나타났어요.”
“……?”
뜬금없는 말에 엔프리제가 고개를 갸웃한다. 진지하게 대답해 달라는 말에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지만, 대체 무슨 소리냐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걸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제가 너무 예쁜 탓에 마왕이 절 잡아간대요. 그러면 엔프리제는 어떻게 해야 해요?”
“당연히 샤페릴을 구할 겁니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니다.
진심이다. 그게 느껴져서 더 인상을 찡그렸다.
“마왕인데요? 엄청 세요. 손 한 번 휘두르면 마법으로 나라 하나쯤은 날려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상관없습니다. 샤페릴이 원해서 가는 거라면 몰라도, 원치 않는다면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구할 겁니다.”
“그게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잡혀갈 뻔했다는 것보다 더 선명하게 남은 기억이 있다.
침입자를 향해 달려들던 플리.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내려 꿈쩍도 하지 않던 그 새하얀 기억은, 내가 납치될 뻔했다는 공포보다도 더 오랫동안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죽으면 다신 볼 수 없다. 죽으면 다신 만날 수 없다.
나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엔프리제가 살아 있길 바란다. 살아 있으면, 언젠가. 희망이 남으니까.
“알겠어요? 엔프리제, 가장 중요한 건 엔프리제예요.”
“샤페릴.”
“엔프리제가 절대적으로 이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나서지 말아요. 설령 이길 수 있더라도 엔프리제가 위협을 받을 상황이 생긴다면 그래도 나서지 말아요.”
그냥 내 기우일지도 모른다. 우리 둘은, 어제처럼 그제처럼 앞으로도 계속 알콩달콩 잘 지낼지도 모른다. 자하에게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었지만, 결국 별일 없지 않았던가.
그래도 말해 둬야 내가 편할 것 같다.
“…….”
엔프리제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다만 그저 소파에 앉아 제 무릎을 톡톡 두드린다.
“대답해 줘요, 엔프리제.”
대답을 재촉하자 얼굴이 일그러진다. 얼마나 하기 싫으면 저런 표정을 지을까.
그 일그러짐조차 너무 귀엽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게 귀엽다니. 내 눈에 콩깍지는 대체 어느 정도의 초강력 본드로 붙어 있는 거지.
후.
“샤페릴.”
“대답 안 해 줄 거예요?”
날 설득하려는 듯 나직하게 부르는 걸 막아 버린다. 하얀 이가 잘근, 하고 입술 끝을 깨문다. 아마 스스로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모양이 예쁘긴 하지만 그리 색이 진한 입술은 아닌데, 점점 빨개지는 게….
안타까워야 하는데 어째 예뻐 보인다.
크흠.
일단 정신을 차리자. 엔프리제에게 다가가서 그 입술을 손끝으로 꾹 눌렀다.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 잘근잘근 씹히고 있던 입술이 쏙 빠져나왔다.
빨갛게 부어서 반질반질하니 잇자국이 남은 채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게….
“싫다고 대답할 걸 알면서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 미덥지 못해서 그러시는 겁니까?”
“당연히 엔프리제를 믿어요. 믿으니까 하는 말이에요.”
엔프리제가 날 지키려고 할 걸 아니까. 자신보다도 날 우선시할 걸 아니까.
이게 소설이라면 마음 놓고 봤을 거다. 어차피 해피 엔딩이라는 걸 알고, 어차피 남주인공인 엔프리제가 다 해 먹을 걸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 여긴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엔딩이 해피 엔딩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을까.
“절 믿으신다면…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 주세요. 당신을 두고 제가 어떻게 제 자신을 챙길 수 있겠습니까.”
“엔프리제에게 제가 소중한 만큼 저도 엔프리제가 소중해요. 엔프리제가 아프거나 다치거나 슬프면 저도 아파요. 절 아프게 만들고 싶으세요?”
“그건….”
나도 나서고 싶은데 참는 게 많다.
엔프리제가 싫은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서서 뭐라고 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건, 내가 공격당하면 엔프리제가 괴로울 걸 알기 때문이다.
내게 무슨 일이 있으면 엔프리제가 또 자책할 테니까, 또 자신의 부족함을 한탄할 테니까. 또 다른 사람들이 엔프리제를 공격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마음 같아선 황제한테 가서 담판도 짓고 싶고, 내 약혼자라는 사람도 어떻게 하고 싶다. 하지만 내겐 아무런 힘도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 괜히 나대다가 엔프리제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참고 있다.
“약속해 줘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샤페릴, 그건 여전히 샤페릴이 제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건 알아주세요. 당신이 아픈 건 싫습니다.”
“알아요. 그거 알아요?”
슬쩍 엔프리제에게 팔을 뻗자, 그가 날 꽉 끌어 안아 주었다. 그리고 그 귓가에 살짝 속삭였다.
“예전에는 여기서 끌려 나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서웠어요. 하지만 이제는 알아요. 내가 어디에 있든, 어떤 일을 당하든 엔프리제는 분명 날 다시 찾으러 올 거라는 걸. 그러니까 어떤 일을 당해도 힘들지 않고 아프지 않아요.”
꽉, 팔에 힘을 주어 엔프리제의 목을 끌어안고 정말 하고 싶은 한마디를 더 속삭였다.
“하지만 당신이 잘못되면 전 아마 평생 저를 용서하지 못할 거예요.”
엔프리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더 꽉 안아 주었을 뿐.
* * *
“…하.”
문을 닫자마자 낮은 한숨을 내쉰 엔프리제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인수인계가 한창인지 늘 조용한 저택이 시끌시끌했다. 그 소란에서 멀어지고 싶다는 듯 엔프리제는 2층에 있는 부엌으로 향했다.
곧 점심시간이라 고소한 냄새가 새어 나오는 부엌으로 들어가자 템버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엔프리제를 보았다.
“전하?”
“밖이 수선스러워서 진정이 안 돼서 왔어.”
“그럼 아가씨랑 같이 계시면 될 텐데.”
“…….”
아가씨라는 말에 엔프리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또 무슨 일이 있으셨구나. 템버는 일단 불 위에 있는 냄비를 내려놓고 그릇을 꺼내며 말을 걸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무래도 나는 샤페릴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는 모양이야.”
그럴 리가.
템버가 본 샤페릴은 생각 외로 사람을 가리는 사람이었다. 저택 안에만 있을 때는 몰랐지만, 밖에 나와 보고서야 알았다. 그녀는 왕제 전하에게도 경계를 풀지 않았고, 황제 폐하는 아예 싫어하는 티를 냈다. 다른 사용인들이 인사를 해도 어설프게 받아 줄 뿐 살갑게 굴지 않았다.
사람 보는 눈이 지나치게 좋은 건지, 아니면 의외로 낯을 가리는 건지. 여하간 그녀가 엔프리제를 신뢰하고 있지 않다면 제 곁을 허락했을 리가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오늘 내게, 자신에게 위험이 있어도 내가 위험해질 것 같으면 물러나라고 하더군.”
난 또.
아무래도 환경이 바뀌니 샤페릴도 불안감이 올라온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촉이 좋으니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건 그녀가 그리 말한 건.
“그건 전하를 믿고 있기 때문이죠.”
“믿는다면… 왜 자신을 지켜 달라고 하지 않지?”
“세상사가 다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아무리 전하의 검 솜씨가 좋더라도 여럿, 예를 들면 군대의 소대나 대대와 싸워서도 이기실 수 있나요?”
“그건….”
“그리 말하면 분명 전하께서 받아들여 주실 거라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 주실 거라고 믿으시기에 그런 말씀을 하신 거예요.”
엔프리제라면 망설임 없이 제 목숨을 버리더라도 자신을 구할 거라고 믿기에.
두 사람이 생각하는 신뢰가 조금 다를 뿐인 문제였다. 템버는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말하시면 전하께서는 또 자신이 부족해서, 힘이 부족해서 걱정하게 만들었다고 하시겠지요?”
“…….”
“하지만 전하께서 설령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보세요. 지금의 황제 폐하께서도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아 안절부절못하고 계시잖아요. 아무리 힘을 가져도 권력을 가져도 안 되는 건 있는 거예요. 아가씨는 전하를 믿지 못하시는 게 아니라 믿으셔서 그러시는 거니 걱정 마시고 얼른 방으로 돌아가세요.”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엔프리제는 순순히 문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샤페릴을 혼자 두고 온 것도 신경 쓰이겠지.
그 뒷모습을 향해 템버가 짓궂은 말을 던졌다.
“저 10분 후에 음식 가지고 갈 거니, 그때까지는 좀 참으세요!”
“……!”
의아하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던 엔프리제가,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인 채 부엌에서 도망쳤다. 템버는 그 뒷모습에 웃음을 던지며 냄비 안의 스튜를 접시에 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