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96)
다 식어 버린 스튜를 데워다 준 템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게 바로 시녀의 소양이라는 거겠지. 나였으면 분명 완전 흐뭇한 얼굴로 눈썹을 찡긋거렸을 텐데.
크흠.
“플리는 어딨어요?”
“요즘 저녁 시간에 주변을 많이 돌아다니더군요. 아무래도 나름대로 순찰을 나간 것 같습니다.”
하긴, 족제비는 야행성이랬으니 당연한 건가. 그렇다기엔 밤에도 잘 자긴 하더라만.
“…….”
“…….”
크흠.
이야깃거리가 떨어지니까 어색하다. 평소라면 들러붙어서 느긋한 시간을 보냈겠지만, 지금은 좀….
슬금 탁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시원한 가을바람이 스르르 방 안으로 흘러들었다.
“이제 가을이네요.”
“시간이… 참 빠르면서도 느린 것 같습니다.”
처음 만난 건 6월이었지.
길다면 긴 시간이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매일매일이 정말 총알처럼 지나갔는데 이제 겨우 가을이라는 게 믿기지 않기도 하고, 벌써 가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게요.”
“아직도 사실 믿기지 않습니다. 샤페릴과 이런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게. 일상을 함께하고 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 거야 엔프리제보다 내가 더 하지 않을까.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서 늘 덜덜 떨고 있었다. 사실은 분쟁이 나는 게 무서운 게 아니었다. 자꾸 나로 인해 문제가 생기면 고아원에라도 버려지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부모님이 버리지 않는다는, 할머니가 날 버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내게는 없었다.
우리 집에는 동생만 있으면 충분했으니까.
“저도 그래요.”
딱히 생각이 많았던 건 아니었다. 다만 그건 본능이었겠지.
본능적으로 나는 내가 쓸모없는 존재라는 걸 알았고, 그런 존재가 동생처럼 어리광이라도 부렸다간 큰일 날 거라는 걸 알아챈 것이다. 그래서 가지고 싶은 게 있어도 참고 가지기 싫은 걸 억지로 들이밀면 순순히 받아 들었다.
혼자가 무서워서.
혼자 되고 싶지 않아서.
“세상에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있다는 것도 믿기지가 않고.”
엔프리제를 보며 씩 웃었다. 또 귓가가 빨개지는 게 귀엽다.
아, 살짝 부었네. 아까 너무 깨물었나.
근데 좀 흐뭇하기도 하다. 뭔가 내 흔적이 남은 느낌이라서. 이래서 엔프리제도 내 피부에 집요할 정도로….
크흠.
아니, 흠.
아잇, 신경 쓰기 시작했더니 거슬리기 시작한다. 슬쩍 목 근처의 옷깃을 여미자 엔프리제가 슬쩍 다가왔다.
“무슨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 흠. 아무것도 아니에요.”
좀 전에 한 번 폭풍이 지나갔는데, 아무리 신혼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라지만 이건 아니야. 안 돼!
아직 마력이 옮겨 갈 때의 부작용 해소 방법도 못 찾았는데!
“…….”
슬금슬금 다가오는 폼이 영 수상쩍다. 나도 모르게 양손으로 가슴께를 감싸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아쉽게도 뒤는 벽으로 막혀 있어서, 우리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기만 했다.
얼굴은 서늘하니 잘생겼는데 귀가 빨간 게 영 수상쩍은데.
“멈춰 봐요.”
“…왜 그러십니까?”
“귀가 수상해요.”
“귀… 말입니까?”
엔프리제가 멈춰 서더니 제 귀를 만지작거린다. 내가 깨물어 댄 통에 빨개진 곳 위를 더듬는 손이 귀엽다. 다음에는 손가락을 깨물어 줄까. 귀는 잇자국까진 안 남아서 아쉽단 말이야.
“귀가 좀 부었군요.”
“부은 것뿐만 아니라 빨개요.”
“그렇습니까?”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한 엔프리제가 다시 슬쩍 가까워진다. 내가 고개를 들면 숨결이 살짝 섞일 듯 가까운 거리. 일부러 고개를 옆으로 돌려 창밖을 보는데 손으로 꽉 부여잡은 옷깃 위로 엔프리제가 손을 올렸다.
“샤페릴의 여기에도… 제가 남긴 흔적이 있습니다.”
…아니, 말 안 해도 아는데요.
일부러 더 손에 힘을 주었다. 엔프리제는 억지로 그 손을 푸는 게 아니라, 까슬한 손가락으로 내 손 위를 덧그렸다. 간지러워서 나도 모르게 파르르 몸을 떨곤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길고 예쁜 손가락이 하얀 손 위를 쓰다듬는다. 손가락뼈 모양까지 확인하려는 듯 꼼꼼하고 부드럽게. 그 손길이 어쩐지 야하게 보여서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보는 사이.
손에 힘이 풀리면서 툭, 하고 옷깃이 빠져나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엔프리제의 손이 옷 아래로 파고든다. 쇄골 조금 아래, 그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달라붙어 붉은 흔적을 남긴 곳 위를 쓰다듬는다. 조금 전까지 괴롭힘 당한 여린 살은, 까슬한 손가락에 따끔한 통증을 호소했다.
“아파요.”
“조금 전에 절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아무 생각도 안 했다니까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요할까.
슬쩍 손을 뿌리치자 순순히 옷 속에서 빠져나온다. 대신 이번에는 내 얼굴 쪽으로 향했다.
“얼굴이 빨개졌었습니다.”
…아니, 나도 사람인데 야한 생각 좀 하면 얼굴이 빨개질 수도 있지! 그걸 뭐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자꾸 이렇게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시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왜 몰라? 그냥 덮….
아니, 이러면 안 되는데. 일단 내 체력도 문제지만, 엔프리제가 제일 걱정이다. 빨리 이 오묘한 분위기에서 벗어나야…!
“삐유우우우우-! 삐-!”
“응?”
어라?
귀여운 소리긴 하지만 플리의 울음소리랑은 좀 다르다. 좀 더 피리 같은 소리. 이건 분명 셰리 목소리 아니던가?
반사적으로 창밖을 보았다.
그러자.
“저거….”
어둑어둑한 하늘.
그 속에 몹시 익숙한, 새하얀 형체가 빠르게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플리…?”
평소 플리의 움직임을 생각해 보면 저런 속도가 이상할 건 없지만, 문제는….
여기가 2층이라는 걸까.
“…….”
플리가 좀 더 가까워지면서 상황이 보인다.
세상에.
대체 이게 무슨….
어이가 없어서 창밖을 본 채 굳어 버렸다. 내 반응에 고개를 갸웃한 엔프리제 역시 창가로 다가오더니.
“…셰리?”
함께 굳어 버렸다.
그리고 셰리와 플리는….
“삐유…! 삑――――!”
열린 창으로 들어오려는 듯 달려들다가 결계에 부닥쳐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
“…….”
넋이 나간 우리 둘만 남겨 두고.
* * *
“…푸훕.”
아, 생각할수록 웃기네.
뻗어 버린 플리를 조심스럽게 안아 방으로 돌아온 게 10분 전. 내 베개 옆에 눕혀 놓은 플리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거의 1분 간격으로 웃음이 터졌다.
아니, 대체 셰리 등에는 왜 타고 있었던 거야?
셰리의 목덜미에 그 작은 이를 콱 박아 넣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플리를 떠올리자 다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런 상태가 된 거지.
셰리도 셰리다. 왜 그 상태로 날아다닌 거지? 혹시 엔프리제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건가?
퍽, 하고 결계에 부딪치더니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지는 모습은 안쓰럽긴 했는데…. 어딘지 만화에 나올 법한 모습이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었다.
게다가 덕분에 오묘한 분위기도 잘 풀렸다.
“엔프리제도 엔프리제지만 내가 제일 문제네.”
나한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TV에 맨날 반쯤 벗은 남정네들이 나와도 별 관심이 없었는데, 왜 엔프리제는 이렇게 섹시한지 모르겠다.
그냥 물만 먹어도 입술이 촉촉한 것이 체리나 딸기같이 매끄럽고 맛깔나 보인다. 아침 운동 때 땀 흘리는 것만 봐도 나도 모르게 눈을 빼앗긴다. 하얀 피부를 타고 흐르는 그 땀방울이 얼마나 섹시하던지. 가끔 입가를 가리면서 얼굴이나 귀를 빨갛게 물들이면 그 손을 억지로 벗겨 내고 입술을….
아니! 그만 상상해!
크흠.
아무튼 뭔 남자가 이렇게 먹음직스러운지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군침을 삼킬 때가 많다.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성을 풀 가동하기는 하는데, 가끔 그런 생각도 든다. 내가 원작에서 씬을 다섯 번인가 봤는데 그 정도까지는 괜찮지 않을까 싶다가도….
그, 흠, 거…. 한 번 할 때 횟수로 따지면 이미 다섯 번은 한참 전에 지났던 걸 생각하면 안 된다 싶기도 하다.
애초에 점막 접촉이 뭐야. 어디서 어디까지가 점막 접촉인데. 그, 어? 직접 하는 거 말고 그런 것도 안 되는 건가 싶고!
“…갑자기 억울하네.”
나도 모르게 눈썹이 팍 찡그려졌다.
아니, 피폐 뽕빨물에 빙의한 거잖아. 근데 왜 내가 참아야 하는데? 이럴 거면 그냥 전 연령가에 빙의시켜 주지 그랬어!
엔프리제가 있는 전 연령가로! 는 너무 억지지.
에이씨. 이러면 주인공 입장에서뿐 아니라 독자 입장에서도 엄청 짜증 난다. 피폐 뽕빨물이라더니 하는 건 맨날 꽁냥거리고 서로 닭살 돋는 말 하는 게 전부잖아.
장르 파괴하지 말고 장르에 어울리게 몸의 대화를 하라고! 몸의 대화가 부족하다고! 으아악!
씬을 위한 설정이 걸림돌이 돼서 씬을 못 한다는 게 말이 돼?!
보통 이럴 땐 그런 거 있지 않나. 남주인공 특수. 엔프리제는 드물게도 마력 이동이 있어도 아프지 않은 체질이라든가! 문제가 없는 체질이라든가!
…어라, 그럴듯한데?
이거 원작에서 몇 번 했는지 확인은 못 했지만, 내가 본 게 1권 중후반부까진데 다섯 번을 했단 말이야? 그럼 그 뒤에 2, 3권에서도 한참 더 했을 텐데 끝은 해피 엔딩이었을 거 아냐. 남주인공이 죽는다는 리뷰는 못 본 것 같은데.
이건 엔프리제랑 좀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 마탑에서 조사를 받아 보면 뭔가 답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흐흐….”
조금 전까지는 억울함에 발을 동동거렸는데,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모르게 변태 같은 웃음소리를 흘렸다가 흠칫 내 입을 가로막았다.
원래도 19금적인 것에 흥미가 있는 편이었지만, 엔프리제와 선을 넘은 후로는 뭐랄까…. 변태력이 가속화되는 것 같다.
분명 얼마 전까지는 모쏠에 경험도 없었는데.
…크흠.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예전부터 생각했었지만, 남자한테 별 관심이 없던 내가 홀라당 넘어간 것도 그렇고.
“이게 다 엔프리제가 너무 야시시한 탓이다!”
“삐-!”
“으아! 플리, 진정해!”
왁, 내지른 소리에 놀란 플리가 벌떡 일어나 내게 로켓 발사되듯 달려들었다. 반사적으로 플리를 받아 들며 생각했다.
당분간은 엔프리제와 있을 때 꼭 플리를 깨우던지 셰리를 옆에 둬야겠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