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95)
“으읏….”
앓는 소리와 함께 느른한 열도 함께 빠져나온다. 나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간다.
“괜찮습니까…?”
낮은 목소리. 팔에 닿는 시원한 손끝.
나는 뒤집혀서 울렁이는 속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고개를 끄덕이는 것조차 지금의 내게는 자극이 되었는지 또 머리가 핑 돌았다.
“거의 다 왔습니다. 조금만….”
내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엔프리제는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다. 빨리 나를 내려놓지 않는 한 계속 이 상태가 계속된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끙, 하고 앓는 소리 한 번으로 울렁거림을 억누르며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얼마나 더 지났을까. 아마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을 테지만, 내게는 몇십 분은 된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겨우 침대 위에 안착할 수 있었다.
“물을 좀 드릴까요?”
날 내려놓기가 무섭게 엔프리제가 물었다. 확실히 차가운 물이 필요하다. 입안도 텁텁하고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가씨!”
라고 고함에 가까운 소리를 낸 템버가 달려 나갔다. 아무래도 현관에서부터 계속 우리를 따라온 모양이었다.
하긴. 나갈 때는 멀쩡하게 걸어갔던 애가 끙끙대며 안겨서 돌아왔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래도 누우니까 좀 살 만하다.
“삐-?”
내 이상을 눈치챘는지 플리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침대는 어떻게 올라온 거지. 또 이불이 늘어져 있었나.
아닌데. 템버가 내가 외출하기 전의 그 난장판을 그냥 두었을 리가 없는데. 엔프리제를 등반해서 올라왔나.
“으으.”
속이 안 좋으니까 별게 다 거슬린다. 목을 옥죄는 리본의 감촉이 거슬린다. 풀어내려 손을 꼬물거리는데 어디가 끝인지 모르겠다. 손의 감각이 둔해져서 그런가.
고개를 들 힘도 없어서 손만 더듬거리며 리본을 풀어내는데 커다란 손이 살며시 끼어들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으으…, 고마워요.”
과보호하지 말라고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이렇게 되다니. 왠지 허세 부리다 걸린 것 같아 창피하다.
창피한 건 창피한 거고 내가 못하는 건 못하는 것! 알아서 해 주쇼, 하는 마음으로 손발을 널브러뜨려 놓고 그의 손길을 기다렸다.
“…….”
왠지 모르지만 엔프리제가 움직이지 않는다. 리본을 잡은 채로 돌이라도 되어 버린 걸까. 슬쩍 눈을 뜨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지도 못한 채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엔프리제가 보였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제야 다시 느릿하게 손이 움직인다. 그냥 끄트머리를 당기기만 해도 풀릴 리본인데, 뜸을 들이는 바람에 안달이 났다.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자 겨우 리본이 스르르 풀려서 빠져나갔다. 그래도 목이 답답해서 단추를 풀려고 낑낑댔으나….
리본도 풀지 못하는 손이 단추를 풀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흘끔 엔프리제를 올려 보자 곤란한다는 얼굴로 날 본다.
뭐가 곤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엔프리제, 이것 좀 풀어 줘요.”
“…….”
기분 탓인지 어디선가 앓는 소리가 들린다. 설마 엔프리제도 어디 아픈 건가?
실험에 참가한 건 난데 왜 엔프리제가?
“잠시만… 눈 좀 감아 주시겠습니까?”
뭐야. 또 내가 너무 예뻐 보이는 건가. 이런 상황에서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일세. 그러면서도 묘한 뿌듯함이 느껴졌다.
그건 그거고 일단 죽겠으니 순순히 눈을 감았다.
“…하.”
낮은 한숨 소리와 함께 덜덜 떨리는 손이 단추에 닿았다. 누가 보면 저주파 안마기 달고 있는 줄 알겠네. 왜 저렇게 떨어.
“내가… 이 순간에도 그렇게 예뻐요?”
긴장을 풀어 줄 셈이었는데 어째서인지 떨림이 더 강해진다.
수전증? 지진?
거의 그 정도 수준인 거 같은데.
“네….”
아니, 이 남자는 이런 순간에도 이토록 솔직하단 말인가! 보통은 미움받을 거 무서워서 아니라고 하지 않나.
“샤페릴은 이런 제가… 발정 난 개같이 느껴지시겠지만.”
혹여 손끝이 다른 데 닿을까 봐 걱정되는지 그 길고 예쁜 손가락으로 조그마한 단추만 풀어내려 애쓴다. 그러느라 더 떨리는 것 같은데.
“전 언제나 샤페릴을 보면 떨립니다.”
후….
“이게 다 내가 너무 사랑받는 탓인가.”
“네?”
아.
몸만 둔해진 건 줄 알았는데 머리도 둔해졌나 보다. 씩 웃고는 그의 손을 잡아 내 뺨에 가져왔다.
“엔프리제는 다정한 사람인데 그런 사람도 발정 난 개처럼 만들었다는 거잖아요, 제가. 이게 제가 너무 사랑받는 탓인 거죠, 뭐.”
“…….”
물끄러미 날 내려보던 엔프리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조금 전까지의 묘한 죄책감은 어디 갔는지, 나도 모르게 넋을 잃을 정도로 예쁘고 맑은 미소였다.
아니, 이래도 되는 건가요. 피폐 뽕빨물 남주가 이렇게 예쁘게 웃어도? 사람 홀리는 데는 아주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단 말이야.
“엔프리제.”
“네?”
“잠깐만 고개 좀 숙여 봐요.”
흠칫, 하고 엔프리제의 얼굴이 굳더니 미소가 사라진다. 손가락이 삑, 하고 어긋나면서 애먹게 하던 단추 하나가 풀려 속이 편해졌다.
눈을 마주치며 웃음으로 재촉하자 엔프리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숙였다.
“왜 그러십니까.”
“조금만 더요.”
두 뼘 정도 떨어져 있던 거리가 좀 더 좁혀진다. 씩, 하고 짓궂게 웃자 살짝 눈살을 찌푸린 엔프리제가 조금 더 가까워진다.
고개 들기 힘든데. 이럴 땐 이거밖에 없지.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슬금슬금 팔을 들어 뒤통수를 꾹 눌렀다. 불의의 기습에 딱딱하게 굳긴 했지만, 좀 더 아래로 내려온 그의 코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사실 입술에다 하고 싶었지만.
“샤페릴…?”
당황한 그가 제 입가를 손으로 가린다. 평소엔 저럴 때 코끝도 같이 가리는데 오늘은 손바닥 위로 뿅 하고 나와 있다.
내 입술이 닿았던 곳이라 닦일까 봐 그러는 건가. 귀엽긴.
“이건 엔프리제가 저한테 너무 사랑받는 탓이에요.”
“그게 무슨….”
“누가 그렇게 예쁘게 웃으래요? 그러니까 아픈데도 뽀뽀하고 싶은 마음이 들잖아요.”
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물든다.
거참, 또 뽀뽀하고 싶게. 하지만 이번에 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 것 같으니까 참자. 아직 대낮이고, 아직 몸 상태가 별로고.
안 그래도 속이 울렁거리는데.
“…당신은 정말….”
“솔직하죠?”
씩 웃자 엔프리제가 푹, 고개를 숙이더니 이불 한쪽을 들어 날 멍석 말듯 말아 버렸다.
“으아!”
“그런 소리를 하실 여유가 있다면 괜찮겠죠. 좀 쉬시면 나아지실 겁니다.”
부루퉁한 얼굴인 것처럼 보이지만 빨개진 귓바퀴는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요전에 저거 입에 넣었을 때 되게 식감이 좋았는데. 오독오독하고 좋은 냄새가 나서….
…생각나니까 또….
“…어머나. 제가 조금 있다 올까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손 움직임을 멈췄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템버를 보며 우리 둘은.
“…크흠.”
동시에 헛기침을 해야만 했다.
* * *
저녁 식사 때가 지나서야 겨우 몸 상태가 나아졌다. 정신을 차리니 급격히 배가 고파졌다.
템버를 불러서 허기 달랠 걸 달라고 할까?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샤페릴?”
엔프리제다.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문득 장난기가 솟았다. 감히 내가 아픈데 곁에 없었단 말이지?! 좀 골려 먹어야지.
눈을 감고 이불을 이마까지 덮어썼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숨 쉬어야지. 저번에도 숨 안 쉬는 걸로 들켰으니까.
일부러 신경 써서 숨을 쉬었다. 자는 사람은 새근새근이랄까, 규칙적인 숨을 쉰다고 하니까 적당히 맞춰 봐야지.
아, 그래! 플리의 숨소리를 흉내 내면 되겠다. 아니, 근데 플리는 은근 코를 좀 고는데?
“…….”
잠시 망설이는 사이 엔프리제가 다가왔다. 너무 과장하지 않으려 애쓰며 숨소리를 내자 탁, 하고 무언가를 협탁에 내려놓더니 내 곁에 앉았다.
침대 곁에 의자가 있는 걸 보니 계속 날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오해해서 미안하네.
엔프리제는 잠시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더니, 손을 뻗어 내 이마를 짚었다. 열이 나는 건 아닌지 확인하려는 듯했다.
눈이 가려져 있어서 그런가. 그 까칠까칠한 손가락이 굉장히… 예민하게 느껴진다. 이마를 쓸어 올리는 손가락 느낌이 간지럽기도 하고 따갑기도 했다.
“제가… 만약 황태자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나지막한 목소리.
이불을 덮어쓰고 있어서 그런지 겨우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그런데 왜 이토록이나 또렷하게 들리는 걸까.
“지금 당신을 좀 더 잘 지켜 낼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으음, 어떠려나.
엔프리제는 의외로 책임감 강한 성격이니 샤페릴을 적당히 음지에서만 도와줬을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막 나가진 못했을지도.
“주어도 주어도 부족합니다. 샤페릴이 아프거나 힘들 때마다 제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제가 좀 더 힘을 가졌더라면. 제가 좀 더 권력이 있었더라면.”
연구에 참여하겠다고 한 건 내 의사였는데.
엔프리제와 좀 더 잘 살고 싶다. 엔프리제와 애정 표현도 잔뜩 하고 싶고, 야한 짓도 하고 싶다. 이 체질에게 방해받지 않으며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이었을 뿐인데.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런 것뿐이라는 게….”
쪽, 하고 환하게 드러난 이마에 엔프리제가 입을 맞춘다. 슬금슬금 이불을 끌어내려 눈만 빼꼼 내밀자, 날 보고 있던 엔프리제와 눈이 딱 마주쳤다.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아, 역시 깨있는 거 알고 있었나?
엔프리제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좀 변태 같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 얼굴도 참 예쁘고 사랑스럽다. 진짜 울어도 예쁘긴 하지.
기왕이면 슬퍼서나 죄책감 때문에 우는 거 말고…, 거, 있잖아, 크흠.
“나는 그런 거 필요 없어요.”
“…….”
“내가 연구에 손을 빌려주는 이유를 알려 줄까요?”
살짝 손짓을 하자 엔프리제가 내 입가에 귀를 가져왔다. 그 귓바퀴를 살짝 깨물어 오독오독한 식감을 즐긴 후 속삭였다.
“엔프리제랑 야한 짓 해도, 엔프리제가 안 아플 방법을 찾으려구요.”
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귓바퀴가 먹음직스럽게 빨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