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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94화 (94/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94)

드디어 이날이 왔다.

나는 긴장된 얼굴로 낮게 심호흡을 했다. 사실 며칠 전에 왔어야 했지만, 내가 열을 낸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과보호에 불이 붙은 엔프리제가 결사반대하는 통에 오늘까지 미뤄진 것이었다.

처음엔 실험동물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앞으로도 이 몸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도 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혼자서 살아야 하면 그냥 스트레스를 너무 받지 않게 조심하기만 하면 될 테지만….

“몸이 좋지 않으시면 돌아갈까요?”

“괜찮다니까요.”

“하지만….”

“저 너무 과보호하는 건 싫다고 말했죠?”

“…혹시라도 피곤하시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불안한 건 자기면서.

그래도 그 불안감이 날 걱정해서 그런 거라는 건 좋다. 저럴 때 보면 집착남 같기도 한데. 저러다가 가둬 놓고 자기만 보려고 하겠네.

…뭐, 나야 그래도 좋긴 하지만.

그래도 내 체질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만 엔프리제랑 사는 데 문제가 안 생길 거 아니야. 게다가 저렇게… 흠흠, 절륜한 남자를 오랫동안 참게 하는 것도 그렇고….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은데. 여기서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어서 오십시오, 블레임 대공 전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리베테.”

오, 마치 그림에 그린 듯한 마법사!

마탑주라고 하기에 뭔가 학자 인상이나 제멋대로인 인상의 미남자를 연상했는데 호호 할아버지가 나왔다. 이마에 번개 모양이라도 그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인데.

“어려운 결정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의 협력으로, 향후 레이디와 같은 체질의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되겠지요.”

온화한 미소에 자상한 말투.

얼핏 보기엔 정말로 덤 씨 성을 가진 그분 같은 분위기가 나지만, 느낌이 전혀 다르다. 뭐랄까. 엘마레를 앞에 두고 있는 느낌이 난다.

진심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 보여서 좀 불편하다.

애초에 마탑은 날 노리고 있었다고 했다. 엔프리제가 내게 그렇게 말할 정도면 확실한 증거가 있었던 거겠지. 그런데 눈앞에서 저렇게 가식을 떨어 대는 걸 보니 우습지도 않다.

뭐, 따지고 들어 봤자 ‘아랫사람들이 멋대로 한 일입니다.’ 따위의 변명을 할 테니 의미 없을 것 같아 참긴 하겠지만.

“그 전에 계약서부터 쓰는 게 좋겠어요.”

“물론입니다. 말씀하셨던 조건에 맞는 계약서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쪽으로.”

마탑주의 뒤를 따라 발을 옮기려 하는데, 문득 다시 멈춰 섰다. 따라 멈추자 내 뒤를 따라오던 엔프리제 역시 멈췄다.

“그러고 보니 전하, 가르함이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더군요.”

어라? 이것 봐라.

또 수작을 부리려고 시도하네?

날 엔프리제랑 떨어뜨려 놓고 어쩌려고? 그런 생각에 반사적으로 엔프리제의 팔을 잡았다.

“그러고 보니 저도 가르함 님한테 드릴 말씀이 있어요! 오늘 실험이 끝나면 같이 갈까요?”

재빨리 선수를 쳤다.

내가 그 가르함이라는 마법사를 본 건 딱 한 번뿐이고, 그나마도 찰나에 불과해서 굳이 만나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날 떨어뜨려 놓으려는 시도는 못 하게 할 수 있겠지.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굳이 두 번 방문할 필요는 없을 테니.”

“…그렇습니까. 그럼 가르함에게는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가르함이라는 남자, 플리한테 거칠게 굴지 않아서 좋게 봤는데…. 아무래도 마탑주 편인 것 같다.

하긴, 당연한가?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은 그 집단의 성질에 따라가기 마련이다. 개인적으로 나나 엔프리제에게 적대감이 없더라도 조직에서 까라면 까야 하는 게 월급쟁이의 숙명이지.

게다가 목숨을 저당 잡힌 월급쟁이면 더 그렇겠고.

“그럼 제 방으로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순순히 간계에 빠져 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날 우습게 보고 그 정도로 된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수작은 부리지 않는다. 날 떨어뜨려 놓으려는 이유야 뻔해 보이긴 하지만.

계약을 할 땐 항상 주의해야 하는 것들이 있지.

일단 중요한 건 계약의 주체를 제대로 확인하는 것. 원래라면 내 체질을 연구하는 마법사들만 포함하면 될 테지만, 일부러 마탑의 모든 구성원, 혹은 구성원이었던 사람으로 대상을 잡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조직의 수장이 까라면 까야 하는 것이 구성원의 비애이므로.

물론 그렇게 해도 나나 엔프리제에게 뭔가 해를 입히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거기서 중요한 것이 계약 조항의 단어나 문구를 꼼꼼하게 살피는 것이다.

“…….”

자고로 계약 조항은 눈에서 불이 나올 정도로, 종이에 구멍을 뚫을 정도로 꼼꼼하게 살펴야 하는 법이다.

근로 계약을 할 때 가장 많이 함정을 깔아 두는 게 ‘협의’와 ‘합의’다.

얼핏 보기엔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르다.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도 그런 내용이 있었는데, 제대로 사원들의 의견을 구하지 않고 인사 조치를 멋대로 해 대는 것 때문에 몇몇 사람들이 노무사를 찾은 적이 있다.

노무사는 ‘협의’를 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둘 다 해당 사항에 대해 논의를 한다, 라는 의미를 포함하고는 있지만 협의는 거기서 끝나는 반면 합의는 제대로 둘 사이의 의견이 일치하는지까지 따진다. 즉, 계약서에 합의라고 쓰여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의견 교환이 없었음에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계약서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 작은 차이 하나가 크게 작용할 수 있다. 어기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만큼 꼼꼼하게 살펴야겠지.

지난번에 가르함이 왔을 때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단어를 몇 개 발견했기 때문에.

1. 마탑의 전직, 현직 구성원 전체는 샤페릴 드 리베테와 엔프리제 드 블레임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협력한다.

2. 마탑의 전직, 현직 구성원 전체는 샤페릴 드 리베테와 엔프리제 드 블레임의 신변에 위협이 될 언행이나 의뢰를 해선 안 된다.

3. 마탑의 전직, 현직 구성원 전체는 엔프리제 드 블레임이 샤페릴 드 리베테의 실험에 동행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다.

4. 마탑의 전직, 현직 구성원 전체는 실험 전 내용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야 하며 샤페릴 드 리베테가 이를 거부할 경우 실험을 진행하지 않는다.

5. 실험 전에 설명한 내용과 실험 내용이 부득이 달라지게 될 가능성이 생긴 경우, 엔프리제 드 블레임이나 샤페릴 드 리베테 중 한 사람 이상의 동의를 얻지 않으면 실험을 진행하지 않는다.

저번엔 대충 마탑은, 이라는 식으로 주어가 뭉뚱그려 있거나 보호 대상에서 엔프리제가 빠져 있었기에 그 보충을 요구했다. 이 마법 계약서라는 것 자체가 그리 쉽게 만들어 낼 순 없는 데다 조항이 달라지면 새로 만들어야 해서 이렇게 시일이 오래 걸리게 된 것이었다.

이번에는 내용에도 큰 문제는 없어 보이고….

꼼꼼히 살피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까 엔프리제에게도 보여 줬다. 이런 건 당사자이기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들이 하나씩 생기거든.

엔프리제는 조용히 계약서를 살피더니.

“……?”

응? 돋보기?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엔프리제를 보았지만, 그는 내게도 시선을 주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돋보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계약서의 빈 공간을 꼼꼼하게 살피던 엔프리제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뭐, 뭐지! 뭔가 적혀 있나!

나도 이면 계약서는 주의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뒷면을 확인해 볼 생각이긴 했는데…. 저런 건 확인해 볼 생각을 못 했네.

앞장을 꼼꼼하게 살핀 엔프리제가 휙 종이를 뒤로 돌려 살피기 시작했다. 마탑주라는 남자는 여유로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

뭔가 불안한데.

약물이나 마법으로 강제 동의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는 건 아니겠지? 설령 그런 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위협’이 되는 행위에 들어갈 테니까….

…괘, 괜찮겠지?

“괜찮은 것 같습니다.”

“계약 불이행에 관련된 계약서는 여기 있습니다.”

이쪽은 심플하다.

1. 계약서의 조항을 어기게 된 마탑의 전직, 현직 구성원은 목숨을 잃게 된다.

가 끝.

정말 목숨 걸고 하는구나.

물론 목숨 걸고 위해를 가하려는 이라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는 조항이겠지만…, 뭐 괜찮다. 엔프리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지켜 줄 테니까.

“동의하시면 아래에 서명을 해 주시면 됩니다.”

나한텐 걸린 조건이 없기 때문에 계약 불이행에 대한 사항 역시 없다. 엔프리제에게 계약서를 넘기자 아까보다 더 꼼꼼하게 종이를 살핀 엔프리제가 내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잉크로 뭘 썼다거나….”

마지막까지 의심의 끈을 놓지 않는 나를 보면서도 마탑주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한 질문이었다는 듯 막힘없이 대답이 나왔다.

“대공 전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마법 계약서는 조건을 가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발동하지 않습니다.”

오호, 그런 게 있나. 부정 계약 방지를 위한 건가.

슬쩍 엔프리제를 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계약서는 새로운 마법 계약서라든가….”

“마탑에서 연구하는 모든 발명품은 황가에 보고됩니다. 그것 역시 마법사들이 지원을 받고 마탑에 고용될 때 계약서에 있는 조항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사비로 한 연구조차도 모두 보고 대상이기에 그 또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흠.

하긴, 뭐. 이런 식으로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겠지.

깃펜을 들었다. 엔프리제랑 글자 공부할 때 써 보고 처음 써 보는데…. 묵직한 느낌을 만끽하며 슥슥 샤페릴의 이름을 서명했다.

…아니, 나 나름대로 글씨는 예쁜 편이었는데…. 아직 글쓰기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가. 글자가 너무 애기 글자 같은데.

“이걸로 계약은 완료되었습니다. 그럼… 실험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드디어.

우리의 안정적인 ㅅ, ㅅ…, 새, 생활을 위하여! 나는 꿀꺽 침을 삼키곤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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