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92)
“후….”
떨어지는 입술 사이로 숨결이 흐른다.
조금 전까지 맞닿아 있었던 걸 증명이라도 하듯 같은 반짝임으로 반들거리는 입술에 숨결이 스치며 무언가가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아쉬워서, 안타까워서 엔프리제의 머리를 더 꽉 안아 끌어당겼다.
엔프리제는 살짝 젖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아픈 건 아니죠?”
한결 가라앉은 열기 덕에 이성이 돌아왔다. 그를 유혹하던 말 대신, 걱정하는 말을 입에 담았다. 엔프리제는 어딘지 여유가 없어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아프면 말해야 해요?”
아파도 엔프리제는 분명 참겠지. 그걸 판별해 내는 건 쉽지 않을 것 같다. 이럴 때의 그는 언제나 무언가를 참는 듯 괴롭고, 간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곤 하니까.
그래서 미리 당부하기 위해 꺼낸 말인데.
“…….”
엔프리제는 대답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엔프리제. 결국 내가 계속 물어보는 수밖에 없는 걸까.
“사실대로 말하면, 조금 아픕니다.”
“아파요?”
이런, 역시 그런가?
어느 정도의 마력이 넘어가면 위험해지는 걸까. 얼마나 아픈 걸까. 걱정되는 마음에 그의 뺨을 잡아 살짝 밀어냈다.
“많이 아파요?”
“…아니요. 마력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분명… 샤페릴, 당신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런 거겠죠.”
엔프리제가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친다. 크고 뜨거운 손.
열이 나는 건 난데 왜 엔프리제의 손이 이토록 뜨거운 걸까. 내 마력과 함께 열도 같이 흘러드는 걸까. 아니면 내 열에 물든 걸까.
그것도 아니면.
“어디가 아픈데요?”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뛰고 욱신거립니다. 가슴 속에 가득 찬 무언가가 괴롭습니다.”
나도 알고 있는 감각이다.
엔프리제도 나도 공유하고 있는 아픔. 그리고 나는 그 아픔을 토해 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
“엔프리제.”
“네.”
내 손 위에 겹쳐진 그의 손을 잡아 가슴께로 가져갔다. 흠칫, 하고 놀란 엔프리제가 손을 빼려 하다 멈췄다. 마주친 금색 눈동자가 일렁거린다.
“느껴져요?”
“…….”
“제 심장도 터질 것 같아요. 저도 엔프리제랑 같아요. 엔프리제랑 닿고 싶고, 사랑한다 이야기하고 싶어요. 엔프리제가 너무 사랑스럽다는 기분으로 마음속이 꽉 차서 아파요.”
감정을 토해 낸다.
늘 삭이고, 또 삭이는 것만 알았던 내가 느끼고 있는 기분을 사실대로 말한다. 그건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몸속이 간질간질하다.
“엔프리제도 나랑 같아요?”
“저는….”
가슴에 닿은 엔프리제의 손은 힘이 잔뜩 들어가서 단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내 가슴을 움켜쥐거나 만지기 때문이 아니라 그걸 참기 위한 걸로 보였다.
“당신은?”
“…….”
엔프리제는 여전히 망설인다.
내 기억이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자신을 사랑해 준다면 더는 돌아볼 것 없이 날 안아 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엔프리제.
조금 전의 꿈에서 깨달은 게 있어.
“엔프리제. 그거 알아요?”
“무엇을….”
“당신에 대한 제 마음은 내일 당장이라도 식을 수 있어요.”
금색 눈동자가 흔들린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그 흔들리지 않고 올곧은 사랑은 어디까지나 창작물 속의 이야기다. 현실의 사랑은 언제나 흔들리고 또 뭉그러지기 일쑤다.
사랑뿐만 아니라 감정이라는 게 그렇다.
잘못이라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야 할 때가 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위하는 척할 때도 있고 나에게 이익을 줄 땐 좋아하다가 불리함을 주면 싫어하게 될 수도 있다.
인간의 마음은 변화무쌍하다.
내가 그랬듯이.
“처음의 저는 엔프리제를, 소설 속 주인공을 보는 느낌으로 바라봤었어요. 잘생기고 멋있고 분위기 있는 사람. 남자로서 보지도 않았고 사랑하게 될 거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처음으로 입 밖에 내는 진실.
이 순간조차 말할 수 없는 건 교묘하게 숨긴다. 하지만 이제 거기에 대한 죄책감도, 망설임도 없다.
나는, 설령 평생 그를 속이게 되더라도 이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그런 당신이 점점 사랑스러워졌어요. 제 말에 반응하는 것도, 제 행동에 일일이 놀라서 흠칫하는 것도. 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졌어요. 그리고 날 위해선 뭐든 다 해 줄 거라는 믿음이 당신을 보는 눈을 바꿨어요.”
처음으로 만난, 조건 없는 사랑을 주는 사람. 엔프리제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난 분명 그런 사랑이 존재한다는 걸 믿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아마도.
이렇게나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일도 없었겠지. 이토록 내가 이기적이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겠지. 벗어날 수 있음에도 벗어나지 않았던 그 늪 속에서 스스로를 다독이고 불쌍히 여기며 살았겠지.
나를 불쌍한 피해자라 단정 짓고.
“처음 만났던 그날과 지금의 내 마음은 이토록이나 달라요. 그렇다면 내일의 나 역시 무언가가 바뀔지도 몰라요. 설령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도 엔프리제에게 뭔가 실망해서 싫어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잖아요. 그럼 엔프리제는 평생 날 곁에 둔 채 그렇게 불안에 떨며 살 거예요?”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기억이 돌아와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감정은 변할 수 있다. 그 계기가 뭔지 알 수는 없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샤페릴, 저는….”
“그런데도 난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
“지금의 나는 당신의 곁에 있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보내는 일상이 행복해서,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당신의 불안과 고통이 내 아픔이 될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토닥, 하고 그의 등을 다독이곤 슥 쓸었다. 움찔하고 단단한 등이 굳는 게 느껴졌다.
“엔프리제, 우리 후회하지 말아요.”
“하지만… 만약….”
“저는 분명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기억이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이 순간은 제게 가장 소중한 기억이 될 테니까요. 아니, 아니지.”
이 순간만은 아니다.
이미 나는.
“엔프리제와 함께한 시간 전부가 소중하니까요.”
사소한 기억조차 좋다.
엔프리제가 부끄럽거나 쑥스러울 때마다, 혹은 혼란스러울 때마다 손으로 입가를 가리는 게 좋다. 제 표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싶다는 마음의 발로겠지, 분명. 오히려 그 행동이 감정을 드러낸다는 건 생각지도 못하고.
검을 휘두를 때의 엔프리제가 좋다. 나를 볼 때의 그 다정하고 상냥한 눈빛이 아니라 차갑고 냉정한 눈빛이 되는 게 좋다. 그 갭이 크면 클수록, 엔프리제가 얼마나 날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어서 좋다. 그리고 절제된 동작 속에 숨어 있는 그의 노력이 보일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
그런 주제에 소심해서 심하게 동요하면 좁은 창고 같은 데에 들어가는 것도 좋다. 그런 버릇이 생길 정도로 마음을 허락할 사람이 없다는 게 안쓰럽기도 하지만, 가끔 동요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나를 끌어안고 얼굴을 묻을 때가 있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던 그가 사랑스럽다. 그런 주제에 내게는 허락하는 게 너무 고맙고 예뻐서.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다.
가끔 엔프리제 앞에서 플리를 쓰다듬을 때 복잡한 감정을 품은 눈으로 보는 것도 좋다. 질투 같기도 하고, 부러움 같기도 한 묘한 눈빛. 그 눈빛이 좋아서 일부러 더 한 적도 있었다.
사소한 일상. 사소한 표정. 사소한 행동.
엔프리제의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좋다. 그 모든 것이 내게는, 수희로서 살아왔던 25년을 집어삼킬 정도로 소중하다.
“엔프리제, 내 부탁 들어주지 않을 거예요?”
살며시, 셔츠를 걷어 올린다. 흐트러진 차림새를 하고 있던 탓에 채 바지 속에 넣지 못한 셔츠 밑단이 내 손길에 슬슬 위로 딸려 올라온다.
드러난 허리께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단단하면서도 선이 예쁜 허리를.
“샤페릴….”
엔프리제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본다.
소설 속 남주가 이랬다면 정이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뭐 하는 거야! 덮치라고! 얼른! 배려 같은 거 필요 없으니 얼른 덮치란 말이야! 눈치도 없냐! 라고 외쳤겠지.
하지만 엔프리제는 이걸로 충분하다.
날 상처 입힐까 두려워 벌벌 떠는 겁쟁이. 내가 후회하게 될까 봐 겁내고 내가 힘들까 봐 겁내고 내가 싫을까 봐 눈치 보는 겁쟁이라서.
그래서 난 당신이 더 사랑스러워.
“내 열, 다 뺏어 가 줘요.”
쪽, 하고 그의 목에 입을 맞췄다.
내 가슴 위에 그저 올라만 와 있던 손이… 살며시 움직였다.
* * *
“…….”
정신이 멍하다.
내가 깨 있는 건지 잠들어 있는 건지도 잘 분간이 안 된다.
-눈 떠요, 샤페릴.
-엔프리…제, 제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텨 줘요.
-흐윽…! 아, 힘들…, 으응…!
“…으, 으으….”
마지막 기억을 더듬다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촛불 아래에서 꿈틀거리던 엔프리제의 단단한 몸은,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예뻤다. 근육질인 사람을 보면 징그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었는데 엔프리제는 전혀 달랐다.
몇 번이나 괴롭혀진 탓에 흐려진 시야 속에서, 내 안을 파고드는 그를 느끼며 본 근육의 꿈틀거림이 묘하게 야하게 느껴진다.
…아니, 아니! 그런 거 떠올리지 마! 떠올리는 거 아니야!
이상한 취향에 눈을 뜰 것 같은 예감에 애써 머리에 떠오른 이미지를 흐트러뜨렸다. 도리도리를 했을 뿐인데 머리가 울린다.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옆을 돌아보자….
“…….”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엔프리제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그, 거시기.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엔프리제는.
순간 말문이 막혀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아무 말 없이 그저 날 바라보고만 있었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이렇게 어색해질 줄은 몰랐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 크흠. 자꾸 머릿속에… 크흠.
“…조, 좋은 아침이에요.”
결국, 입에서 흘러나온 건 의례적인 인삿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