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91)
“…다녀오셨습니까.”
템버는 묘한 눈으로 나와 엔프리제를 보고 있었다.
그건 안도 같기도 하고, 걱정 같기도 했다. 템버 역시 내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다녀왔어요.”
템버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먼저 앞장섰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템버만 마중 나온 건가요?”
첫날도 그랬고 리베테 저택이 있던 곳을 찾아갔다 왔을 때도 집안의 사용인들이 모두 나열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두 번째에도 비아냥거림은 옵션처럼 따라왔다.
황제 그놈, 마음에 안 든다 안 든다 했더니 그런 것도 아직 처리 안 해 주는 건가. 치사한 놈.
“두 분이 외출하신 걸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하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지, 원. 방에 들어가서 빨리 쉬고 싶네. 이상하게 몸이 나른하다.
“샤페릴?”
“…응? 네?”
“걸음걸이가 좀 이상합니다. 괜찮으십니까?”
걸음걸이? 내 걸음걸이가 어때서.
이렇게 똑바로 잘만 걷고 있는데?
“괜찮아요.”
“…얼굴도 빨갛습니다. 열이 있는 거 아닙니까?”
걸음을 멈춰 세운 엔프리제가 슥 내 이마에 제 이마를 갖다 댔다.
아, 놀라라.
이 남자는 자신의 미모를 좀 더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 이쁜 얼굴을 자꾸 들이대면 심장이 벌렁벌렁….
어라? 심장이 좀 심하게 빨리 뛰네.
“역시 열이…. 샤페릴?!”
어라.
어라?
이상하다. 아지랑이가 피는 것처럼 시야가 일그러진다.
어지러워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자 엔프리제가 재빨리 나를 받아 안는다. 그 품에 안겨서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어라…, 드디어 엔프리제의 미모가 날 기절시킬 정도의 수준이 된 건가.
그런 뻘생각을 하며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너희 집, 좀 이상한 거 같아.”
…우리 집?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우리 집이 뭐 어때서.
엔프리제는 최고로 예쁘고 귀엽고, 템버는 유능하고. 나머지 사용인들은 마음에 들지 않긴 하지만, 남부러울 것 없는 완벽한 집인데!
“뭐가?”
“할머니도 정상은 아니지만, 부모님이 제일 정상이 아닌 것 같아. 아빠랑은 거의 마주친 적도 없다며?”
할머니…? 부모님? 아빠?
그러고 보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수희였을 때의 내 친구다. 언젠가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젠가….
대학교 때였던가.
갑작스러운 공강. 그 이후에 곧바로 다른 전공 수업이 같은 강의실에서 있었기에 그냥 그대로 앉아서 기다렸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민아가 그런 이야기를 꺼냈었다.
“바쁘시니까.”
“아무리 바빠도 애를 방임하는 건 아니지. 그럴 바엔 그냥 독립하는 게 낫지 않아?”
“내가 없어지면 할머니도 동생도 곤란해지니까…. 어차피 결혼하면 독립하게 될 텐데, 뭐.”
“아니야. 지금 네 할머니 하는 꼴 보면 네가 결혼할 사람 데려가도 트집 잡아서 다 퇴짜 놓을 것 같아.”
이건, 꿈이구나.
꿈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꿈속의 내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몄다.
“설마. 지금도 어차피 시집가면 나갈 사람이라면서, 차라리 빨리 나가 버리라고 하는걸.”
“그럼 자취는 왜 못 하게 하는데?”
“내가 절제 없이 살까 봐 걱정되신대.”
“웃기고 있네. 네 동생이 훨씬 더 절제 없어. 설령 그렇다고 치자. 그럼 기숙사는 왜 안 되는데?”
민아의 말에 곤란한 듯 웃기만 했다.
애초에 친구들에게 설명한 이유와 실제 이유는 달랐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할머니가 내 독립을 막는 건 당장 집안일을 할 사람이 없다는 게 이유였으니까.
나야 자주 듣고 익숙해진 이야기였지만, 친구들이 들으면….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사실 그 생활이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아니, 모르고 싶어서 외면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보고 자란 게 그거였으니까. 부모님은 우리를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고, 나는 그런 부모님의 속을 썩이지 않도록 행동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빠와는 거의 이야기조차 한 적 없었고, 엄마는…. 너라도 날 힘들게 하지 말아 달라고 했었지.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받아도 아빠는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아빠는 동생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가끔 할머니가 닦달할 때만 잠시 관심을 가졌을 뿐. 엄마는 그럴 때마다 나를 안아 주며 ‘엄마가 너 보고 사는 거 알지?’라고 말하곤 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니까. 엄마는 내가 삶의 보람이니까. 엄마는 나를 보며 일하는 보람을 얻으니까.
할머니가 나한테 하는 행동들을 말하면 집안이 시끄러워진다. 그러면 엄마 아빠는 내게 잠시나마 관심을 가져 줬지만, 분란은 점점 커질 뿐이었다. 그러니까 나만 참으면 엄마는 행복해지고 할머니는 화를 내지 않고 아빠는 평소처럼 일을 할 수가 있다.
그런 내가 대학을, 서울에 있는 대학을 일부러 골라 가려고 했던 건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저 집안일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게 아니다. 알바로 번 돈을 모두 뺏기는 것도 그렇게까지 괴롭진 않았다. 정말로 괴로웠던 건.
이미 그 일상에 익숙해져 벗어날 힘조차 잃고 무기력해진 자신을 보는 일이었다.
“내가 없으면 일할 사람이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꿈속의 수희가 내 기억과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너희 집 사업하잖아. 부자잖아. 그럼 사람 고용하면 되는 거 아니야?”
“사람을 고용하면 돈이 들잖아. 내가 일하는 건 공짜고.”
“그런 게 어딨어? 너네 할머니 진짜 너무한 거 아냐? 너희 부모님은 그걸 그냥 두고 봐? 엄마는 그렇다고 쳐도 아빠는 못 하게 말려야지.”
어느 순간 꿈의 배경이 바뀌었다.
강의실 안에 친구들과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잠깐 눈을 감았다 뜨니 어둠 속에 홀로 서 있었다. 깜깜한 어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자니 엔프리제가 떠올랐다.
신기한 일이지.
예전에는 이런 어둠 속에 있으면 무서웠었다. 이대로 모두가 사라지고 나 혼자 남을 것만 같았다.
그게 두려웠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둠을 보고 있으면 엔프리제의 머리카락을 떠올린다. 하늘하늘 흩날리는 그 예쁜 머리카락. 손으로 살살 쓸어 주면 손가락 사이사이를 간질이며 흘러 떨어지는 그.
까맣고 사랑스러운 머리카락.
“아니야. 잘못한 건 나였어.”
“네가 무슨 잘못이야?”
“어렸을 때야 그랬다고 쳐도, 커서 그 집을 벗어나지 않은 건 두려웠기 때문이야. 혼자서 살아 본 적 없는 내가 혼자 산다는 게 무서웠어. 원하는 걸 마음대로 가져 본 적은 없지만 가난에 시달려 본 적은 없었던 내가, 돈 없는 삶을 산다는 게 두려웠어. 그리고.”
대답하다 깨달았다.
질문하는 목소리는 어느 순간 변해 있었다. 그건 친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 자신이었다.
“그리고 정말 내가 혼자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게 무서웠어.”
가족들은 날 찾지 않았을 거다.
할머니는 욕을 하긴 했겠지만, 굳이 날 찾아 나서서 데려가려 하진 않았을 거다. 돈을 보내라고 했으면 모를까.
동생 역시 날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부모님은 집안에 분란이 없다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별 상관없었을 것이다.
가족들이 날 붙잡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그들을 붙잡고 있었던 거지.
그러면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건 분명 가족에게서,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엔프리제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분명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나는 한 번도 어딘가에 속한 적이 없었어. 나는 늘 있으면 편리하고 없으면 그뿐인 존재였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
“뭐가 다른데?”
나를 정말로 사랑해 주는 사람이 생겼다.
의무라서 돌봐 주는 게 아니라, 혈연이라는 말에 묶여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봐 주고 나 자신을 사랑해 주는.
엔프리제는 말했다.
처음에는 샤페릴을 동경했다고. 그리고 함께 지내면 지낼수록 더 좋아졌다고. 그러니까 엔프리제가 사랑하게 된 건.
나다.
그걸 알면서도 다시 혼자가 되는 게 두려웠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 화학 작용이 가라앉아서 언젠가 날 버리게 되는 게 아닐까? 진짜 날 알게 되면 질리는 게 아닐까?
여주인공이 아니라 엑스트라조차 되지 못했던 내가 정말로 그에게 계속 사랑받을 수 있을까.
내가 정말 두려웠던 건 분명 그거겠지.
“나는 이제 사랑할 줄 알고, 사랑받을 줄 알게 됐어.”
“또 네 착각일지도 몰라.”
그럴지도 모른다.
머리가 그리 명석하지 않은 나는, 또 잘못된 결론을 낸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괜찮아. 나는 어제의 나보다 한 발 앞으로 나갔으니까.”
그리고 내일의 나는 분명 오늘의 나보다 한 발 더 나아져 있겠지.
내 대답을 마지막으로 목소리가 끊겼다. 잠시 더 기다리던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감아도, 떠도 보이는 것은 어둠뿐.
보이는 것은 엔프리제의 모습뿐.
이 타이밍에서, 내가 이런 꿈을 꾸고 있다는 건 분명. 눈을 뜨면….
“샤페릴….”
짠.
엔프리제가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매우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고.
손을 들어 올리려는데 팔이 무거워서 잘 올라가질 않는다. 내 마음을 알아챈 것처럼 엔프리제가 재빨리 내 손을 잡았다.
“나… 열나요?”
“네.”
“스트레스… 안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그런 상황이 되었으니 스트레스를 받으시는 게 당연합니다. 다만 그… 돌아오는 마차에서 마력의 일부를 제가 넘겨받아 저택까지는 증상이 보이지 않았던 것 같지만….”
거 다행이네.
저택에 도착하기 전에 이랬었으면, 오늘 중으로는 못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낯선 곳에서는 그다지 마음 편히 쉴 수도 없으니까.
잘했어, 나.
딱히 선견지명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뽀뽀가 하고 싶었던 것뿐이지만.
“후….”
약간 술에 취한 느낌이다. 머리도 지끈거리고 정신은 멍하고 몸은 화끈거리고. 물속에 잠겨 허우적대고 있는 감각이 조금 불쾌하다.
“엔프리제.”
“네.”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물론입니다.”
“고개 좀 숙여 봐요.”
엔프리제는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열에 들떠서 흐릿한 시야에서 보는 엔프리제는, 저번에도 두 번 보긴 했지만 각별하다. 특별하게 예쁘단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무거운 팔을 들어 그의 목에 감았다. 그리고 그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제 열… 다 뺏어 가 줄 거죠?”
그러자 엔프리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