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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90화 (90/123)

감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님! (90)

리베테 백작은 드물게도 영지민들의 신임을 받는 영주였다. 사업에 대한 선구안이 뛰어난 것은 물론이요, 얻은 이익을 나누는데도 망설임이 없었다. 덕분에 백작가의 재정은 풍족한데도 샤페릴은 늘 드레스 몇 벌을 돌려 입곤 했다.

다른 귀족 영애들이 최소한 무도회 때마다 드레스를 새로 맞추는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소비였다.

-네 아버지께서는 대단한 분이셔. 하지만 난 그 이상으로 너 역시 대단하다고 생각해, 샤페릴.

-내가? 왜?

샤페릴을 향한 수군거림은, 언제나 있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그녀이기에 시기 역시 늘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주로 흠을 잡는 것 역시 그녀의 옷차림이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왜 늘 같은 드레스를 고집하냐는 둥, 너무 파격적이라는 둥.

그런 이야기가 그녀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시기하는 이들 이상으로 그녀의 추종자들이 많았기에. 그들은 언제나 다양한 소식과 소문을 샤페릴에게 이야기해 주며 환심을 사려 했으니까.

그런 소리를 듣는 게 억울하지도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서 질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샤페릴은.

-그건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제레닉. 집안이 검소하게 지내기 때문이 아니라 내 선택이야.

-뭐?

-누군가는 새로운 드레스로 자신을 치장하고 사교계에서 이름을 드높이는 것을 명예로 알겠지. 그리고 실제로 제국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큰 명예이기도 해. 나 역시 그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유행을 선도하려 하고 공부하고 예뻐지려 노력하잖아. 하지만 내게 있어서는 그 돈을 길가의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쓰는 게 더 가치 있는 일이야. 그저 가치관의 차이일 뿐이지.

영지민들에게 리베테 가문은 늘 사랑받는 가문이었다. 그랬던 리베테 가문이.

귀족의 저택치고는 아담했던… 그 마음 따스해지는 장소가 도적의 습격으로 불타다니.

게다가 그 난리통에 샤페릴이 사라지다니.

샤페릴의 병이 발병한 이후로 그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진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지만, 그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샤페릴의 약값으로 어마어마한 돈이 지출되었고, 리베테 백작은 주변의 도움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 가고 있었다.

저택에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사용인들은 그들을 떠나지 않는 대신, 돌아가며 다른 곳으로 일을 나갔다. 그리고 벌어 온 돈을 가계에 보태곤 했었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영지민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세금을 올리면 당장의 상황은 타파할 수 있을 텐데도 끝내 백작은 세율을 올리지 않았다. 그랬던 그들에게 도적이라니.

무언가 작위적인 것을 느꼈다.

게다가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택은 거의 전소할 정도로 탔는데, 사람들의 시체는 남아 있었다.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형태가 갖춰진 채. 그래서 소문이 난 것이었다.

샤페릴이 사라졌다고.

마치 리베테 가문의 누가 죽었는지 확인시켜 주려는 것처럼 남아 있던 그 시신들. 그 면면을 보고 있자면….

샤페릴이 이 하늘 아래 홀로 남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대가 레이디 리베테의 약혼자라지?

그분.

이미 사교계에 소문이 나 있긴 했었다. 그분께서 샤페릴에게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하지만 리베테 가문의 비극에서부터 채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 제레닉을 찾아올 정도인 것은 아무도 몰랐을 터였다.

-리베테 가문의 소식은 들었겠지? 레이디 리베테의 행방을 알고 있나?

제레닉은, 그 담담해 보이는 말투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이분이다. 이분이 샤페릴을 이 하늘 아래 천애 고아로 만드셨다. 아마도 그녀를 제 수중에 넣기 위해서.

그리고 이분을 따르기를 거절하면 분명 자신, 아니, 자신뿐만 아니라 카운 가문 전체가….

-알게 되면 가장 먼저 알려 드리겠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뭐든 해내겠습니다. 그러니….

샤페릴은 분명 제레닉의 오랜 친구이자 약혼녀였다. 그녀를 여자로서 사랑한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지만, 가족애 같은 것은 분명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겪은 그 모든 불행의 배후를 알았으면서도, 아니, 알기에 제레닉은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가문을 살릴 수 있는 길을.

그게 잘못이었던 걸까.

“그대에겐 실망이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군.”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다니. 감히 조건을 내건 것치고는 하잘것없는 결과야.”

싸늘한 미소.

어둠에 가려진 탓에 제대로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데, 그 일그러진 입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이 자리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덜덜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주먹을 꽉 쥐며 제레닉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저벅저벅 하는 발소리 끝에 고개 숙인 제레닉의 시야에 반질반질한 검은 부츠가 들어왔다.

꽉 쥔 주먹으로도 다스리지 못한 떨림 탓에 시야가 흔들렸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스릉, 하는 맑은 소리 뒤에 제레닉의 시야에 은빛 검이 비쳤다. 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떨림을 억누르며 말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번 일로 인해 그녀는 그대에게 경계심을 품게 되었을 테고 다시는 방심하지 않을 테지. 게다가 그놈 역시.”

그의 말이 맞았다. 샤페릴은, 그리고 그 피 도둑놈은 두 번 다시 제레닉을 믿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앞에 나서실 수 없으실 때 제가 도움이 될 겁니다.”

“…….”

진흙탕을 굴러도 좋다.

샤페릴이 영지민을 위하는 것을 제 명예로 생각한다면, 제레닉은 가문을 유지하고 번성시키는 것을 제 명예로 생각했다. 그러니 그걸 위해서라면.

“…확실히.”

그는 가족과 다름없다 생각했던 이조차 버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카운가의 구성원이 아니니까.

* * *

“…저기, 엔프리제.”

“네.”

“화났어요?”

별실에 있던 엘마레는 아래에서 들리는 내 목소리에 놀라 내려왔다고 했다. 상황을 확인하더니 전 약혼자를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나는 그대를 믿고 부탁했는데, 그대는 내 믿음을 저버렸군.

-죄송합니다, 왕제 전하.

-…우린 돌아가도록 하지. 다시는 레이디 리베테의 앞에 나타나선 안 될 것이오.

한 패일까, 아닐까.

보여 준 모습을 보면 엘마레는 확실히 아무것도 몰랐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왜 이리도 그 남자에게 거부감이 드는 걸까.

“…….”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위를 올려 보았다. 나를 끌어안은 채 가만히 나를 내려보던 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 어, 죄송해요.”

“무엇이 죄송하다고 하시는 겁니까?”

“거, 흠. 좋아서 키스하려고 한 게 아니니까요? 그 사람들이 제 체질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서 위협하려던 말일 뿐이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면서 왜 날 더 세게 끌어안니. 평소엔 내가 무슨 날계란이라도 되는 것처럼 살살 끌어안더니….

오늘은 좀 아프다.

이것도 나름대로 힘 조절하고 있는 거겠지만…. 설마 내장 터지는 거 아니겠지? 소설 속에서 그런 표현을 봤을 땐 과장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좀 그런 기분이다.

“저기, 엔프리제…?”

“네.”

“조금 아픈데….”

흠칫, 하고 놀란 그가 팔에 힘을 풀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구나. 하긴 일부러 그럴 사람은 아니긴 하지.

“무서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자들은 따라오지 못할 겁니다.”

“아니, 엔프리제가요. 표정이 엄청 무서워요.”

몸을 돌려 엔프리제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 얼굴을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일그러뜨렸다.

입꼬리는 엄지로 올리고 눈꼬리는 검지로 내려 억지로 웃는 표정을 만들자….

“풋.”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잘생긴 사람도 이렇게 하면 웃긴 얼굴이 되는구나. 대놓고 웃을 순 없어서 그의 얼굴을 놓아주고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몸을 들썩이고 있는데, 엔프리제가 입을 열었다.

“제가 화가 난 건… 샤페릴, 당신에게가 아니라 저한테 화가 난 겁니다.”

“엔프리제한테요?”

어라, 그럴 만한 일이 있었나?

슬쩍 고개를 들어 엔프리제를 보았다. 살짝 내 손가락 모양으로 빨갛게 물든 눈꼬리와 입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헉, 내가 저렇게 세게 눌렀던가…?

“…설마 당신에게 그런 짓을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오랜 친구에 약혼자였다면서요. 그런 사람이 싫다는데 억지로 납치 감금 할 거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어요?”

“설령 생각할 수 없었더라도, 했어야만 합니다. 그런… 협박을 해야 할 정도의 상황에 당신을 밀어 넣은 게 저라는 걸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엔프리제가 착해서 그런다.

나야 온갖 소설을 다 읽어 봤으니 저런 엑스트라가 얼마나 위험한지, 여주가 남주 곁에서 떨어지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지만 엔프리제는 아직도 사람들의 악의의 깊이를 모르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나라 소설가들 대단하지? 가끔은 헤비 독자인 나도 예측 못 할 정도의 악행을 들고 나온단 말이야.

“저는 화 안 났는데요?”

“샤페릴은… 상냥하니까요.”

“저 못됐다니까요?”

내가 상냥했다면, 처음부터 내가 샤페릴이 아니라고 말하고 엔프리제를 해방시켜 줬겠지. 이 모든 상황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거고.

나는 이기적이고 어리석고 못됐다.

하지만 어쩌겠어. 그게 나인 걸.

그래서 난.

“그거 알아요, 엔프리제?”

엔프리제가 내 눈을 바라본다.

금색 눈동자가 일렁일렁 햇살 아래에서 예쁘게 흔들린다. 그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씩 웃었다.

“전 엔프리제가 바로 달려와 줘서 기뻤어요.”

그리고 당신이….

연인인 당신을 두고 그런 협박을 입에 담은 내가 아니라 그런 상황에 날 처하게 만든 당신을 향해 화내는 것도. 당신이 얼마나 날 사랑하는지 느껴져서.

그런 당신이 사랑스러워서.

“그러니까 이건 상이에요.”

그의 뺨을 잡고 쪽, 하고 입을 맞췄다. 평소라면 거기서 끝났겠지만… 오늘은 조금만 더. 그리 두껍지 않은 입술을 살짝 핥자 그가 혀를 내며 날 끌어안았다.

그렇게 우리는 덜컹이는 마차 안에서 짧은 키스를 나눴다. 그리고… 그걸 다행으로 여기게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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